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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2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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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0
 

 

팔레스타인 비극사 ③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아랍인들을 농락한 영국 : 후세인-맥마흔 협정, 사이크스-피코 협정

1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은 오스만제국이 지배 아래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이 독일의 편에 가담하자, 아랍인들은 이를 호기로 생각하고 독립투쟁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 안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며, 전쟁 승리 후 아랍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집트 주재 영국 고위 관리 맥마흔과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은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친 서신을 교환하며 이런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를 세계사에서는 ‘후세인-맥마흔 협정’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약속한 대로 1916년 6월부터 독립투쟁을 벌였고,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아랍인들은 영국이 협정을 이행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애초에 영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승리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 지배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비밀리의 논의한다. 1915년 11월부터 1916년 3월까지(후세인-맥마흔 서한이 오가던 시점) 진행된 협상 끝에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한다. 양국 협상 대표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협정은 현재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차 대전 승리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합의대로 아랍지역을 나누어 지배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 A지역을 프랑스, B 지역을 영국이 통치하기로 합의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 : 밸푸어 선언

전쟁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자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돕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영국의 대부호였다. 이미 팔레스타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던 로스차일드는 이 편지에 호응하여 영국에 자금을 지원했고 그 결과 영국은 1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편지는 11월 9일 공개되었고,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에 치를 떨어야 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 편지에 환호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이주는 순조로웠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의 지원이 있었고,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인 부호들의 자금 지원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중동 전쟁은 종결된 것일까: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년)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대통령을 초청하여 13일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집트는 네 차례의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주도했던 아랍의 대표적인 반이스라엘 국가였다. 따라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 체결은 중동 평화의 출발로 평가된다.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수에즈운하 수입이 줄어들면서 국가 재정마저 여의치 않자, 사다트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경제난을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사다트는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유화적’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78년 평화협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중동 평화의 출발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사다트는 이집트 국민들뿐만 아니라 아랍권 국가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집트는 아랍연맹 회원자격이 정지되었다. 협정을 체결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암살당했다.

 

평화적 해법의 출발이 되는가: 오슬로 협정 Ⅰ(1993)

1991년 11월 미국, 소련, 스페인이 주최하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가 초대받아 ‘마드리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중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비록 합의문 도출에는 실패했지만, 1990년대 평화 협상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중동 평화 협상은 1993년 오슬로 협정 체결로 빛을 보게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이집트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한 2개의 합의문을 일컫는다. 1993년 9월 워싱턴에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 아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이 만나 합의서에 서명했다. 1993년 1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측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를 오슬로 협정 Ⅰ이라고 부른다.

오슬로 협정 Ⅰ의 원칙은 두 국가 해법이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고,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5년 안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이스라엘이 동의했다. 쟁점이 되는 예루살렘, 최종 국경,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등은 5년 후에 논의하기로 했다. 평화적 해결의 원칙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협정의 공식 명칭은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다.

1994년 5월 4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 대한 합의”를 체결하고, 두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 일정과 팔레스타인으로의 권한 이양 등을 합의했다. 몇 주 후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했고 PLO는 자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기엔 너무나 많은 한계를 가졌다.

▲ 빨간 점이 예리코 지역이다.

오슬로 협정 Ⅰ은 서안지구(West Bank) 대신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를 명시했다. 예리코는 서안지구 내의 도시이다. 흔히들 오슬로 협정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합의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일부에서만 팔레스타인 자치가 합의된 것이다.

또한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이 철수했지만, 이스라엘 정착촌은 그대로 존재했다. 정착촌 문제는 5년 후에 논의하기로 미뤘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착촌이 존재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보장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착촌 문제는 자치 정부수립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 역시 5년 후로 미뤘다.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이 팔레스타인 거주민을 내쫓고, 그들의 귀환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늘려 종국에 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 지역에서 완전히 내쫓는 것이다. 따라서 정착촌과 귀환권 문제를 5년 뒤로 미룬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에 토대해서 마련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 오슬로 협정의 주역인 PLO의 아라파트, 이스라엘의 페레스 총리, 라빈 총리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서안지구 분할은 누구에게 이익인가 : 오슬로 협정 Ⅱ(1995년)

1995년 9월 28일 오슬로 협정 Ⅱ가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 기구 구성, 이스라엘 군대의 재배치와 철수, 서안지구 분할, 팔레스타인 경찰, 적대행위 예방 등의 내용을 담았다. 공식 명칭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임시 협정”(Interim Agreement)이다.

오슬로 협정 Ⅱ의 가장 큰 특징은 서안지구를 A, B, C 구역으로 나눈 것이다. 서안 지구 18%에 해당하는 A 구역은 팔레스타인 당국이 단독으로 관리한다. 서안 지구의 22%를 차지하는 B 구역은 팔레스타인 당국과 이스라엘의 공동 관리 구역이며,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관리로 이양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서안 지구의 60%를 차지하는 C 구역은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관리한다.

▲ A구역은 팔레스타인, C 구역은 이스라엘이 관리한다. B 구역은 공동으로 관리하되 점차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관리권을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그림에서 확인되듯이, 팔레스타인 당국의 권한이 미치는 A와 B 구역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오슬로 협정이 온전히 이행된다고 하더라도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갇혀 있는 셈이다(그러나 오슬로 협정에 불만을 품은 이스라엘 극우 시오니스트에 의해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1995년 11월 14일 암살당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절망시킨 7년의 ‘평화 협상’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2000년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까지 7년 동안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1997년 양측은 헤브론 의정서를 합의했다. 서안지구 남쪽에 있는 헤브론에 400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정착촌이 있다. 문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800명의 이스라엘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 이스라엘군은 여러 형태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이 합의로 헤브론의 80%(H1)는 팔레스타인이, 20%(H2)는 이스라엘이 관리하게 되었다. 당시 H2에는 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다.

1999년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배치된 이스라엘군의 11%를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측이 요르단강 서안 영토의 40%를 완전 또는 부분 관할하며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 350명을 석방하고 ▲2000년 9월까지 팔레스타인 최종 지위 협상을 종결하는 내용을 합의한 “샤름 엘-셰이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합의는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으로 이어졌고,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주 동안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 실패하고, 곧이어 등장한 이스라엘 강경파 샤론이 총리로 등장하면서 그 이후 협상은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의 7년은 ‘평화 협상’ 기간으로 불리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시간이었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7년 사이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수 배로 늘었고, 미국의 자본으로 50개가 넘는 이스라엘 군사기지가 건설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평화 협상’에 참여했던 PLO는 합법적인 협상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주장을 무조건 인정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을 묵인했고,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포기했다. 7년 동안 이스라엘 총리가 라빈, 페레스, 네타냐후, 바라크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정책은 일관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구조화되었다.

2000년 이스라엘 샤론이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동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 통치를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2차 인티파다의 시작이다. 2001년 총리가 된 샤론은 오슬로 협정 효력 상실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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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후무한 1년 6개월... 국경없는기자회의 선견지명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3/10/30 10:14
  • 수정일
    2023/10/30 10: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진단- 윤석열 시대, 언론은 좋아졌나①] '자유 수호자' 자처대통령과 추락하는 '언론 자유'

23.10.30 07:10l최종 업데이트 23.10.30 07:10l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6개월. 정부여당은 언론을 의심했다. 가짜뉴스와 허위정보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공영방송의 인적·소유 구성을 바꾸려 했고, 각종 정책적 조치도 뒤따랐다. 국회에서 집권당 국회의원들은 때로는 공세로 프레임을 만들었고, 때로는 정부의 조치에 힘을 실어줬다. 새 정부 1년 반을 즈음해 '그래서 한국 언론은 나아졌는가'를 세 차례에 걸쳐 진단한다. [편집자말]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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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은 국회 과방위 소속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연일 언론 편파성과 불균형을 주장했다. 정부는 '가짜뉴스 퇴치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새로 지명된 방송통신위원장은 KBS에 대해 "재건축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규정했다. 정부는 위헌 지적이 있음에도 '가짜뉴스 근절 종합계획'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대선 전 두 사람의 대화 녹취를 보도한 언론에 대한 '응징'도 있었다. <뉴스타파>와 해당 사안을 인용보도한 언론 이야기다. '허위 사실을 인용해 보도했다'는 혐의를 받은 MBC 뉴스데스크와 JTBC 뉴스룸 등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최고 수위 제재인 과징금 부과를 확정받았다. <뉴스타파>에 대해선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지자체도 언론 손보기에 발을 맞췄다. 교통방송(TBS)에 지원되던 서울시 예산은 특정 프로그램의 편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며 중단이 결정됐고, 진행자는 방송국을 떠났다. 비단 TBS뿐만 아니다. MBC와 KBS의 일부 진행자들에 대한 살생부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된 모양새다. 

따지고 보면 언론 손보기는 2022년 대통령 미국 순방 당시 발생한 '바이든-날리면 발언 보도'부터 시작된 것 같다. 대통령실은 MBC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배제 조치를 단행했고, 대통령은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고 아주 악의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했다. 이에 "무엇이 악의적이죠?"라고 해명을 요구했던 기자는 이제 더 이상 정치 뉴스를 전하지 않는다. 

정부는 과감했다. 공영방송의 이사장과 사장, 이사진 등의 인적 구성은 2인 체제 방통위의 결정에 의해 큰 변화를 앞둔 상황이다. 그 사이 KBS 수신료 별도 징수는 이미 실행 중이다. 준공영방송 YTN은 최근 3200억 원을 써낸 기업의 소유물이 되기 직전이다. 

포털도 힘들다. 다음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응원과 관련해 중국 측 응원 클릭이 많이 발생하자 '차이나 게이트'의 진원지로 지목됐다. 여당과 보수언론이 '알고리즘 변경 의심'을 보내던 네이버에는 10월 6일 방통위 조사관이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나열하기만 해도 숨가쁘다. 중간중간 빠진 사건도 있다. 이상은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 분야에서 벌어진 주요 사항들을 정리한 것이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이 모든 일이 '올바른 언론' '자유민주주의에 걸맞은 언론'을 위한 여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관점과 정책이 합리성을 인정받으려면 정부 출범 1년 6개월 이상이 경과한 시점에서 과거에 비해 '언론이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물론 '좋다'는 평가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주관적 지표다. 그러나 언론의 궁극적 가치와 핵심 속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좋아졌다' '나빠졌다'는 판단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듯하다. '언론'에 빅데이터상 자연스레 따라붙는 연관어들인 '언론의 자유' '팩트체크와 가짜뉴스' 그리고 '언론의 중립과 다양성' 등을 기준으로 우리 언론을 평가해보자. 정말, 윤석열 정부 이후 한국 언론은 좋아졌나.

하락하는 언론의 자유
 
국경없는기자회가 집계한 대한민국 언론 자유 지수. 180개 국가 중 47위다(2023년).
▲  국경없는기자회가 집계한 대한민국 언론 자유 지수. 180개 국가 중 47위다(2023년).
ⓒ 국경없는기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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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6개월 동안, 한국 언론의 자유 정도는 어떤 상태가 됐을까. 기준과 의견, 체감 정도는 각자 다를 수 있기에 구체적 근거가 중요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각국이 처한 언론의 자유 상황을 국제적인 잣대로 통합해 파악하는 대표적 자료는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언론자유지수(RSF World Press Freedom Index)'다. 현 시점에서는 180여 개국을 조사하고 있는데, 정치적 맥락과 법적 프레임 워크, 경제적 맥락과 사회 문화적 맥락 등 언론 자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을 국가별로 분석해 결과를 내놓는다. 

우리나라는 이명박 정권 시절 69위(2009년), 박근혜 정부에서 70위 수준까지 하락했으나, 2018년~2022년엔 41위~43위 수준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2023년 자료에 의하면, 새 정부 출범 후 한국의 언론 자유 지수는 47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한국의 언론 자유가 후퇴 기조로 돌아서고 있음은 이미 2022년 보고서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국경없는기자회 웹사이트에 게시된 2022년 한국 편 보고서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언론을 대하는 '적대적인 움직임(president's hostile moves against public media)'에 대해 상세히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본문에는 대통령과 똑같은 기조를 보이는 집권당의 활약도 설명해놨다. 

대통령실의 '바이든-날리면' 사건 대응이 언론에 끼친 영향
 
2022년 12월 5일 발행된 RSF의 기사. 제목은 '대한민국 : 국경없는기자회, 공영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적대적 행보에 우려를 표한다'. RSF는 이 기사에서 대통령실의 MBC에 대한 차별적 조치(탑승기 배제 등)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협하고 언론인 괴롬힘을 조장한다고 평가했다.
▲  2022년 12월 5일 발행된 RSF의 기사. 제목은 '대한민국 : 국경없는기자회, 공영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적대적 행보에 우려를 표한다'. RSF는 이 기사에서 대통령실의 MBC에 대한 차별적 조치(탑승기 배제 등)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협하고 언론인 괴롬힘을 조장한다고 평가했다.
ⓒ RSF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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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F 보고서가 대표적으로 언급한 사안은 당시 국민의 약 63.2%가 욕설로 들린다고 대답했던 그 유명한 '바이든-날리면 사건'이다. RSF 보고서엔 이 사건의 경과는 물론 대통령실의 비상식적 대처까지 설명해 놨다. 

특히 MBC와 해당 기자에 대해 대통령실과 정부가 취한 조치를 놀라울 만큼 상세히 싣고 있다. 이 보고서는 대통령실이 MBC의 보도에 대해 '심각한 국익 침해(causing serious harm to national interests)를 저질렀다'고 보고, 이에 따라 '11월 9일 시작된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서 전용기 탑승을 금지했다(the President's office banned MBC's journalists from boarding the presidential plane)'는 점을 기술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은 무기한 취소됐으며, 그해 11월 20일엔 도어스테핑이 열리던 곳에 높은 벽이 설치돼 그 뒤로 누가 출입하는지 볼 수 없게 만들었다'(it installed a wall in front of its pressroom)는 것도 적시했다. 

더불어, 국민의힘 의원들의 MBC와 기자들에 대한 압박과 항의 그리고 해당 기자가 정부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 협박을 받은 사실까지 명시해놨다. 

RSF 보고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후 대한민국의 외교부가 바이든-날리면 보도를 진행한 수백 군데 언론사 중 하나인 MBC를 콕 집어 소송을 제기한 사실도 있다. 국경없는기자회의 한국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은, 2022년 국경없는기자회의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선 180개국 중 43위를 차지했다 (South Korea, one of Asia's leading democracies, ranks 43rd of 180 countries in the 2022 RSF World Press Freedom Index)."

나라 밖에서 '자유' 설파하는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1일(현지시각) 뉴욕대학교에서 열린 '뉴욕 디지털 비전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뒤 인사하고 있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1일(현지시각) 뉴욕대학교에서 열린 '뉴욕 디지털 비전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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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자유와 관련해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사건은 최근 국내에서 관찰됐다. 세계 언론동향을 매년 파악하는 또 하나의 국제적 자료인 영국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 발간 디지털뉴스리포트는 한국언론재단이 한글판으로 만들어 매년 국내에 배포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올해 재단이 발행한 보고서에는 예년에 없던 변화가 발견됐다. 

원문 보고서의 한국 영역 중 언론사별 대중이 느끼는 신뢰도 순위에 대한 정보가 통째로 사라진 채 한국판이 제작된 것이다. 올해 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신뢰한다고 대답한 언론사 1위는 MBC였고, 심지어 지난해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할 정도로 증가세를 보였다는 사실이 원문에는 포함돼 있었다. 

신뢰받는 언론사 순위에는 현재 지분매각 단계 중인 YTN과 정부로부터 편향적 언론으로 지목돼 '재건축'이 필요하다고 취급받는 KBS가 올라가 있기도 하다. 이 사안과 관련해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단에 해명을 요구했고, 국정감사에 출석한 남정호 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은 "조사대상의 표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 (중략), 로이터에서 모집하는 표본은 온라인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되어 있었으며 (중략), 온라인에서 가입한 사람들은 젊은 분이라든지 어떤 성별 별로 한쪽으로 몰려있기 때문에 문제가..."라는 답을 내놨다.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가 이미 전체 보고서에 포함된 방법론(Methodology) 영역에서 "인구통계학적 불균형에 대해서는 보정 과정을 통해 해결(weighted to targets based on census)"했음을 명시했는데도 말이다. 

사실 최근 미디어 영역에서 실시하는 설문조사 중 오프라인을 통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기도 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병합할 경우 통계 처리에 있어 또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원칙 또한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간다. 이와 함께 재단 측은 국정감사에서 진행한 답변을 통해 유튜브를 포함한 디지털 플랫폼을 가장 자주 그리고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한국 대중에 대한 몰이해도 드러냈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이미 95%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단순히 '온라인에 있는 사람들만 표본이라 신뢰할 수 없어 보고서에서 들어냈다'는 해명은 합당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해외 순방 시 연설을 하거나 대담·강의 등을 할 때 '가짜뉴스·허위정보 등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며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실상 자국 내에서의 언론 자유는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윤석열 정부 1년 반, 언론의 자유는 과연 나아졌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유현재씨는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입니다.

 

태그:#한국언론, #국경없는기자회, #날리면, #언론자유, #바이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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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대통령이라고 해서 박수받고 화기애애한 자리만 갈 수 없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3/10/30 10:00
  • 수정일
    2023/10/30 10:0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윤수현 기자 
  •  
  •  입력 2023.10.30 07:42
  •  
  •  수정 2023.10.30 07:54
  •  
  •  댓글 3

 

[아침신문 솎아보기]

한국 “1년 전과 달라지지 않아”… 경향 “메시지만 내겠다는 협량한 처사”

조선일보, 추모 행사 정쟁적 요소 강조 “한때 아수라장”

윤석열 대통령은 끝내 이태원 참사 추모행사에 오지 않았다. 서울광장 추모행사가 아닌 교회로 찾아가 추도예배에 참석한 것이다. 추도사에서 참사에 대한 책임 인정과 사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주요 아침신문들은 30일 일개 교회의 추도예배가 정부의 공식행사가 된 격이라며서 “1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정부만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추도예배가 열린 서울 성북구 영암교회는 윤석열 대통령이 유년 시절 다녔던 교회로 알려졌다. 대통령은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도 이 교회를 찾았다. 대통령은 “지난 한 해 정부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안전한 대한민국’이란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민추모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정치 집회”다. 야당이 공동주최에 포함됐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된 야당이 ‘공동주최에서 빠지겠다’고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정부여당 차원에서 기획한 별도 행사도 없었다.

▲29일 이태원 추모행사 대신 교회 추도예배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그리고 한 시민이 서울광장 분양소에서 추모 메시지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김예리 기자.

주요 아침신문들은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날 선 비판을 내놨다. 동아일보는 사설 <이태원 참사 추모대회, 당 이름으로는 참석 피한 여권>을 내고 “대통령과 국무총리, 여당 대표가 추모의 뜻을 밝히긴 했으나 유가족 추모행사에 불참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대통령실로선 대통령 면전에서 돌발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대통령의 참석은 재난에 대한 국가 책임을 명확히 하면서 사회 통합에 한발 다가설 기회였다. 결국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의 빈자리는 불편한 자리를 피한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다”고 했다.

▲10월30일 동아일보 칼럼.

동아일보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박수받고 화기애애한 자리만 갈 수는 없다”며 “어제 행사는 불편했을지언정 유가족의 상처를 함께하며 대통령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킬 수 있었던 자리였다. 대통령은 아직 유족 대표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1년 전 참사 직후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머리 숙였던 국정 책임자로서 앞으로 유족과의 만남 자리를 갖는 등 직접 위로할 기회를 갖길 바란다”고 밝혔다.

▲10월30일 한국일보 사설.

한국일보는 사설 <아쉬움 큰 尹대통령 이태원 참사 추도>를 통해 “이유 여하를 떠나 개인이 아닌 대통령은 유가족 주최 추모제를 찾는 게 합당했고, 그랬다면 추도사 메시지의 진정성도 컸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일보는 “참석자 면면만 보면 일개 교회의 추도예배가 정부 차원의 공식 추모행사 격이 된 셈”이라며 “대통령과 여당 대표까지 한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면 애초 정부 차원의 추모제를 준비했으면 될 일이었다… 논의도 않다가 뒤늦게 추모제가 정치 행사라며 불참한 것은 결과적으로 1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정부만 확인시켰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10월30일 경향신문 사설.

경향신문은 <이태원 추도식 빠진 대통령·김기현·이상민의 독단과 협량> 사설에서 “추모식에 참석한 유가족과 시민들은 시민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정부의 존재 이유를 거듭 물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윤석열 대통령은 없었다. 유가족들이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렸지만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진정으로 희생자를 기리고 유가족의 슬픔을 보듬겠다면 추모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옳았다”며 “대통령이 참석하면 정치 집회가 아니라 대통령의 행사이고, 야당도 공동주최에서 이미 빠진 터였다. 그런데도 이를 뿌리치고 예배로 향한 것은 허심탄회하게 유가족과 시민들을 만나길 회피하고, 홀로 메시지만 내겠다는 협량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10월30일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이 같은 비판을 ‘정쟁’으로 봤다. 조선일보는 사설 <핼러윈 방지법 표류, 국민 의식 그대로인데 여야는 정쟁만>에서 “핼러윈 참사 1주기인 29일에도 여야는 서로를 비난하며 싸우기 바빴다”며 “추모행사를 놓고도 여야로 갈려 대립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정작 여야가 시급하게 처리했어야 할 안전사고 방지 법안은 국회에 방치돼 있다”며 “정치권이 관련 입법은 뒷전인 채 내 편 네 편 갈라 싸우고만 있다. 세월호 등 대형 사고를 겪고도 달라진 게 없다. 이래선 언제 제2의 세월호·핼러윈 참사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10월30일 경향신문 3면.

이태원 추모행사 정쟁 강조한 조선일보

경향신문은 3면 <현장에서, 광장에서… 눈물 흘리며 “진상규명” 외친 시민들>에서 시민들의 이태원 참사 추모 모습을 소개했다. 경향신문은 “1년 전 참사 현장인 용산구 해밀톤호텔 골목에는 전국에서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서 추모객들은 참사가 발생했던 골목을 한참 응시하고는 고개를 숙였다”며 “‘추모의 벽’ 앞에는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두고 간 과자와 초콜릿, 통조림, 술 등이 국화꽃 사이사이에 빼곡히 놓여 있었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10월30일 조선일보 4면.

조선일보는 4면 <“한국놈도 아냐” “꺼져” 야유·욕설… 인요한 “아픔 함께하는 게 책무”>에서 추모행사의 정치적인 부분을 부각했다. 조선일보의 부제는 “한때 아수라장이 된 추모행사”, “수많은 좌파 시민단체 깃발 속… ‘尹 탄핵’ 구호에도 자리 지켜”다. 조선일보는 “(야)당 대표들이 나와 추모사를 하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할 땐 참석자들이 ‘윤석열 꺼져라!’ ‘탄핵하자!’ 등을 연호하며 열띤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인 위원장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었다”며 “고 최보람씨의 고모가 소속된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올라 ‘천개의 바람이 되어’ 등을 연주할 때 광장에선 ‘윤석열 탄핵’ ‘검찰독재’ 등이 큼지막이 적힌 대형 깃발들이 선율에 맞춰 휘날렸다”고 했다.

▲10월30일 한겨레 1면.

‘윤석열 검증 보도’ 기자 압수수색 영장 표지에 배임수재 혐의?

‘윤석열 검증 보도’를 수사하는 검찰이 경향신문과 뉴스버스 전·현직 기자 압수수색 영장 표지에 범죄 혐의와 관련 없는 ‘배임수재 혐의’를 적시했다. 신학림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등 뉴스타파 보도 관련 인사들에게 적용한 혐의다. 한겨레는 1면 <명예훼손 수사 막히자 검찰, 또 ‘꼼수’ 영장>에서 “(검찰의 영장은) 경향신문 등의 보도와 뉴스타파 보도가 모두 직접 연결됐다는 취지”라며 “두 사건은 2021년 10월, 2022년 3월로 보도 시점도 5개월 가까이 차이가 나고, 증거물·등장인물 등도 겹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검찰이 수사할 수 없는 명예훼손 혐의를 직접 수사하기 위해 뉴스타파 사건과 경향신문 등의 사건을 무리하게 직접 관련 사건으로 엮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배임수재는 검찰이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범죄다. 한겨레는 “검찰은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수사 개시를 할 수 없다”며 “검찰이 수사 중인 범죄와 ‘직접 관련성’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과거 시행령에는 ‘직접 관련성’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한동훈 법무부’의 시행령 개정을 거치며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이후 검찰은 ‘직접 관련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검찰은 JTBC 본사와 리포액트 기자 주거지 압수수색 당시 배임수재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지만 영장 표지에는 ‘배임수재’를 적시하고, 영장 내용에 뉴스타파 배임수재 혐의를 병기했다고 한다.

▲10월30일 한겨레 3면.

한겨레는 3면 <배임수재로 엮은 명예훼손 수사…“검찰 월권” 내부 비판도>에서 “명예훼손 사건에서 검찰이 ‘배후를 밝히겠다’며 특별수사부를 대거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검찰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나온다”며 “명예훼손 사건에서 공범의 존재를 밝히겠다는 식의 수사도 이례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검사 고위직 출신 한 변호사는 ‘명예훼손 혐의 수사는 범죄 당사자의 고의 여부를 따져 묻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수사다. 한발 더 나아가 배후까지 밝혀 공범으로 기소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기소나 유죄를 염두에 둔 수사라기보다는 수사 자체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사로 오해받기 쉽다. 반의사불벌죄라 언제라도 ‘피해자 윤석열 대통령’이 ‘그만하라’고 하면 검찰은 부담 없이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면서 끝낼 것’이라고 내다봤다”고 전했다.

▲10월30일 중앙일보 칼럼.

쏟아지는 정부·여당 비판… 소통·협치 필요성 대두

30일자 신문에선 정부·여당의 행보를 비판하는 칼럼이 다수 나왔다. 박정호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은 칼럼 <‘1’의 정치, 탕평 정치>에서 협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논설위원은 “‘국민이 늘 옳다’ ‘(내각에) 국민의 절규를 들어라’라고 재촉하던 윤 대통령의 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 추모대회 참석은 결국 불발로 끝났다”며 “추모식을 둘러싼 정쟁은 이해하지만 국민의 슬픔과 함께하는 통 큰 리더십을 발휘할 순 없었을까. 통치의 요체는 이해관계 조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0월30일 중앙일보 칼럼.

최훈 중앙일보 주필은 칼럼 <대통령이 달라지면, 그게 혁신이다>를 내고 “친절한 대통령이 보고프다”며 “국민과의 대화가 가물가물하다. 위임 CEO가 오너인 국민에게 하는 보고는 의무다. 정권의 치적일 일본과의 관계개선 역시 5700자 일방 담화로 끝내니 맥락 모를 국민들만 갑갑하다”고 지적했다. 최 주필은 “국민 70%가 불안하다는 일본 오염수, 개혁적 결단으로 상찬받았어야 할 긴축 건전 재정 역시 공화국 대통령의 육성 설명이 잘 안 들린다. 그러면 모든 게 ‘독선적’으로 뒤바뀌고 만다”고 밝혔다.

▲10월30일 동아일보 칼럼.

정용관 동아일보 논설실장은 여당이 혁신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실장은 칼럼 <與 혁신은 ‘양떼 정당’ 반성부터>에서 “국민의힘은 최고 권력자의 눈치만 살피는 ‘양떼 정당’이 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존재론적 반성문을 쓰는 것에서 혁신을 시작해야 한다”며 “국가의 보편적 이익을 고민하고 추구하거나, 적어도 국익과 지역구 이해관계의 조화를 모색할 정도의 자세는 돼 있는 인물을 어떻게 얼마나 공천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과 전략이 먼저 나와야 한다. 영남권 다선 의원들의 험지 출마나 용퇴 요구 등은 그다음 수순의 얘기”라고 했다.

▲10월30일 한겨레 칼럼.

손원제 한겨레 논설위원은 <‘역시나’로 귀결되는 윤 대통령 첫 ‘셀프 반성’> 칼럼을 내고 “윤 대통령은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대와 동떨어진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국빈 방문 환대에 취해서일까, 잠깐의 각성 효과마저 사라진 듯하다”고 했다. 손 위원은 윤 대통령이 이달 26일 ‘박정희 추도식’엔 참석하고 이태원 추모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은 점을 꼬집으면서 “가눌 수 없는 국민 아픔을 달래는 자리인데, 주최가 누구인지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했다.

손원제 논설위원은 “윤 대통령에게 과연 여당의 총선 승리가 절실하긴 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어쩌다 대통령’이 된 걸로 이미 정치적 목표 달성은 끝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며 “아쉬울 게 없는 대통령이 안 바뀌면, 절박한 여당이라도 소리를 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맹종이 체질이 된 여당 돌아가는 꼴은 기대 난망”이라고 지적했다.

▲10월30일 경향신문 칼럼.

“방통위·방통심의위 규제 모델 실패했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 <방통위·방심위 규제 모델 실패했다>를 통해 방송통신위원회·방송통신심의위원회 모델을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 두 기관이 정부의 가짜뉴스 프레임에 앞장선 상황에 대한 비판이다. 강 교수는 “사실, 이 두 기구는 원래부터 독립성을 지키기엔 불안한 조직이었다”며 “원칙상, 국가기관의 미디어 내용 심의와 제재는 반헌법적이다. 게다가 여권 다수인 회의체에서 현 정권에 불리한 내용을 불공정하다고 다수결로 정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아니 우스운 일”이라고 했다.

강형철 교수는 방통심의위가 ‘김만배 녹취록’ 보도에 대해 중징계를 내린 것을 언급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가짜뉴스’ 언급에 방통위가 호응하고, 방심위가 방통위와 협의 후 인터넷 언론까지 심의하겠다고 나섰다. 인터넷상의 뉴스라면 현실적으로 거의 모든 언론이 해당한다. 한국만의 독특하지만 나름 잘 유지되고 있는 언론중재위원회나 국가 검열 시비를 피할 수 있는 다른 자율규제 방식들마저 무력화할 수 있는 무모한 일”이라고 했다.

강형철 교수는 “한국의 방통위 모델 자체는 이례적이지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한국의 정치문화와 맞지 않는 게 드러났다”며 “또한 국가가 미디어 내용 심의를 하는 방심위는 그 자체로 이례적이고 이미 실패했다. 후일 대통령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권이라도 이 두 기구를 접수해 도구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공론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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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현 기자melancholy@mediatoday.co.kr

 

#이태원#참사#추모행사#추도행사#불참#윤석열#국민의힘#서울광장#대통령#협치#더불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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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유가족, “특별법이 가장 중요한 과제”

‘1주기 추모대회’ 외면한 윤 대통령, “안전한 대한민국” 강조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3.10.29 22:51
  •  
  •  수정 2023.10.29 23:25
  •  
  •  댓글 1
 
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유가족을 대표해 연단에 선 이정민 운영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유가족을 대표해 연단에 선 이정민 운영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10·29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 주십시오.”

29일 오후 5시 서울시청 앞 광장.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 연단에 선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운영위원장이 참석자들과 국민들을 향해 이같이 호소했다. “그 기억이 조금씩 모여 커진다면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러한 참사가 발생하지 않고 더 이상의 유가족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잃어버린 우리 아이들을 추모하는 이 시간은 결코 정치집회가 아니”며, “참사 이후 우리 유가족들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정치적 행동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했을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족들의 ‘추모대회 참석’ 요청에 대해 ‘정치집회’라는 핑계를 대며 끝내 불참한 윤석열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 

참사 1주기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서울시청 광장에 나왔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참사 1주기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서울시청 광장에 나왔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정민 운영위원장은 “이제 우리에겐 특별법만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과 재발방지를 논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법”이고 “국민들이 참사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참사 앞에는 여야가 없고 모두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며 “진정성 있는 자세로 특별법 통과에 힘을 보태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이날 ‘추모대회’에 참석한 야 4당(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대표들은 ‘이태원 참사진상규명 특별법(아래 특별법) 처리’를 약속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반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인요한 혁신위원장, 김병민 최고위원, 권영세 의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1부 행사가 끝나고 퇴장하다가 일부 시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30일 오후 4시 국회 차원에서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강세봄(진보대학생넷), 박석운(한국민중연대), 이지현(참여연대), 이태의(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영선(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동대표가 「기억·추모·진실을 향한 다짐」 다섯 가지를 밝혔다. 

하나,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게 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과 참사 발생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

하나, 희생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사라지는 날까지 유가족들 곁에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

하나, 특별법이 제정되어 독립적 조사기구가 설치되는 날까지 국회와 정부를 지켜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

하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이 만들어질 때까지 연대와 지지의 손을 놓지 않겠다.

하나, 이 땅에 살고 이 땅에 머물고 이 땅을 지나는 모든 이들이 안전하고 평등한 세상을 누비며 살 수 있는 안전사회가 건설될 때까지 책임을 내려놓지 않겠다.  

가수 한선희, 유주현 씨가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이태원 골목에서」로 희생자 159명과 유가족, 시민들을 위로했다. 추모공연 형식으로 진행된 2부 행사에는 웨슬리 꽃재 오케스트라, 한영애 밴드, 4·16합창단 등이 출연했다.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 해밀턴호텔 골목에 '기억과 안전의 길'이 조성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 해밀턴호텔 골목에 '기억과 안전의 길'이 조성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에 앞서, 오후 1시 59분에는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부근에서 ‘4대종단 기도회’가 열렸다. 1년 전 참사의 현장인 해밀턴호텔 골목에는 유가족과 지역 주민들이 중지를 모아 「기억과 안전의 길」을 조성했다.

한편,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낮에 서울 성북구의 영암교회에서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도 예배를 드렸다”고 알렸다. 윤 대통령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는 교회다.

유가족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추모대회’에 불참한 윤 대통령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 가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유가족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추모대회’에 불참한 윤 대통령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 가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추도사’를 통해, 윤 대통령은 “지난해 오늘은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을 가진 날”이라며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저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한 대한민국’이라는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족들의 거듭된 추모대회 참석 요청에도 윤 대통령이 불참한 이유가 무엇인가’는 질문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태원 사고현장이든 서울광장이든, 아니면 성북동 교회든 희생자를 추도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피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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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관, '대안 매체란 뭔가' 질문에 "유사언론 점잖게 얘기한 것"
네이버 알고리즘 개편 골자는 '심층·기획기사 추천 강화'
'박성중 혁신위원 임명, 당 최고위도 반대' 언론[미디어스=송창한 기자]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이 네이버가 특정 언론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알고리즘을 조작했다며 방송통신위원회의 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이동관 방통위원장은 조사하겠다고 답했다. 박 의원이 지목한 특정언론은 뉴스타파,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미디어스 등이며 이 위원장은 이들 매체를 유사언론이라고 지칭했다.  

2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종합감사에서 박성중 의원은 이동관 위원장에게 "뉴스타파를 탄생시킨 민노총(민주노총) 언론노조의 소개글을 보면 '대안 매체로 뉴스타파를 제작·방송하고 있다'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대안 매체라는 게 뭔가"라고 질의했다.

이에 이 위원장은 "유사 언론이라는 얘기를 점잖게 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소개글에는 "2012년 민주언론실천위원회민실위와 해직기자들이 공정언론 회복 및 망가진 저널리즘 복원을 위해 대안 매체로 뉴스타파를 제작 방송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왼쪽),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왼쪽),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박 의원은 "신학림 씨가 전 대표로 있던 민노총의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미디어스, 뉴스타파 이런 것이 다 대안 매체라고 얘기하는 데 맞나"라고 질의했다. 이 위원장은 "조금 생소한 용어지만 그렇게 읽힌다"고 했다. 

또 박 의원이 "통상 레거시 언론(전통적 언론)에 대안되는 그런 매체를 자기들이 '대안 매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말하자, 이 위원장은 "특정 진영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언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네이버가 '대안 매체'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뉴스 알고리즘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네이버가 2차 알고리즘 검토위원회 지적에 따라서 뉴스알고리즘을 바꾼 글을 보면 가중치를 바꿔 노출을 기존 대비 685% 늘렸다고 얘기한다"며 "대안 매체가 결과적으로 잘 노출이 안 된다는 알고리즘 검토위원회 지적이 있었다. 보수성향 언론사가 상대적으로 잘 노출되다 보니 대안 매체는 (노출이)안 된다 해서 이걸(알고리즘을)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미디어오늘, 뉴스타파, 오마이뉴스, 미디어스 이런 것들이 상당히 상승했다. 이 내용을 알려면 당시 회의록을 조사해야 한다"며 "우리가 계속 자료요구를 하고 있는데 아직 안 내고 있다. 방통위가 네이버 현장조사를 나가 있는데 이 부분도 조사를 해서 같이 공유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이 위원장은 "지금 실태조사 중이기 때문에 보고를 받지 않고 있지만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방통위는 현재 '포털 알고리즘으로 보수언론(조선일보)이 손해봤다'는 박 의원 주장을 근거로 네이버에 대한 사실조사를 진행 중이다. 네이버가 '뉴스 검색 인기도'를 바꿔 MBC를 1위로 만들고, 조선일보를 2위에서 6위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박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정치성향에 관계 없이 언론사 순위가 변동됐다는 게 확인된다. 네이버는 계열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언론사가 뉴스 검색 순위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상황을 전문가 검토 의견에 따라 개선했다는 입장이다.(관련기사▶'보수언론 죽이기' 뉴스 알고리즘? 한·경·오도 밀려나)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 6월 30일 유튜브 콘텐츠 썸네일 갈무리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 6월 30일 유튜브 콘텐츠 썸네일 갈무리 

네이버는 지난해 9월 <알고리즘 검토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뉴스 알고리즘 개선 방향을 설명드립니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네이버는 제2차 뉴스 알고리즘 검토위원회 검토 결과에 따라 ▲보도 기사의 심층성 강화 ▲언론사별 추천 기사량 편차 개선 및 다양한 관점 반영 ▲저널리즘 환경 변화를 반영한 품질평가 가이드라인 재정립 ▲신규 알고리즘 반영 및 새로운 학습데이터의 객관적 검증 등 4가지 주제로 개선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중 '대안 언론'이 나오는 대목은 알고리즘 검토위의 권고사항 중 일부다. 알고리즘 검토위는 네이버에 "현재 알고리즘은 어뷰징과 저품질의 뉴스를 필터링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으나 그 과정에서 보도 기사의 심층성과 대안 및 지역 언론사의 뉴스들이 결과적으로 잘 노출되지 않을 수 있다'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네이버가 내놓은 해법은 '심층·기획 기사 추천 강화'였다. 네이버는 "'심층·기획기사' 여부를 추천 피처(Feature)화 했고, 해당 기사에 가산점을 부여했다"며 " 이를 통해 사용자의 만족도가 크게 감소하지 않으면서, ‘심층/기획 기사’의 노출이 유의미하게 증가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이 언급한 '685% 증가'는 '심층·기획 기사'의 전체 추천 비중 증가폭으로 '대안 매체'의 노출 증가가 아니다.

네이버는 뉴스의 심층성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논증 체계'를 강조했다. 네이버는 "심층성이 높은 기사는 단순히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용의 논증 체계가 잘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며 "이를 평가하기 위해 입력된 뉴스 문서들에 대해 논증 마이닝을 통해 문장 별로 내포하고 있는 논증 방식을 분류하고, 다양한 논증 방식으로 구성된 기사들을 심층성이 높은 기사로 가정해 이를 바탕으로 심층성을 평가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네이버 검색 2022년 9월 22일  갈무리
네이버 2022년 9월 15일 <알고리즘 검토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뉴스 알고리즘 개선 방향을 설명드립니다>  갈무리

한편, 박 의원은 26일 현역 의원 중 유일하게 국민의힘 혁신위원에 임명됐다. 강성 보수 성향인 박 의원의 혁신위원 인선에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반대 입장이 터져 나왔으나 김기현 당대표가 추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6일 한겨레는 "혁신위원들 면면이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특히 친윤, 서울 서초지역 재선, 강성 보수인 박성중 의원에 대해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조차 바꿔야 한다는 항의가 터져 나왔으나 김기현 대표가 '방법이 없다'며 추인했다고 한다"며 "그는 과방위 여당 간사로 '한국방송은 가짜뉴스 숙주', '문화방송은 가짜뉴스로 여론 선동' 등의 발언으로 '언론 탄압 선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준석 전 대표는 이날 오마이뉴스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박 의원은 혁신의 대상'이라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27일 중앙일보는 사설 <변화·쇄신 기대 못 미친 ‘인요한 혁신위’의 사람들>에서 "인선을 주도했다는 인 위원장은 과감하게 쓴소리할 이준석계나 유승민계는 한 명도 품지 못했다.(중략)정작 인 위원장 자신이 주창한 통합과도 거리가 멀다"며 "대신 그 자리에 오히려 매사 강경 일변도여서 혁신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인물까지 등장했다. 오만과 독선이라는 여당의 환부를 제대로 도려낼 수 있을지 의문인 인선"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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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송창한 기자
  •  
  • 입력 2023.10.27 15:51
  •  
  • 수정 2023.10.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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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정부'의 실체, 이런걸 우린 예전에 '레임덕'이라 부르기로 했다

[박세열 칼럼] 용산이 한눈 팔면 곧바로 '복지부동'?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3.10.28. 05:04:33

 

지난 9월, 추석을 앞두고 철도 파업이 있었다. 경쟁 효과 '제로'인 STR와 KTX 통합 요구 등 쟁점들은 있었지만, 이 글에서 논할 주제는 그것이 아니다.

 

의외로 큰 이슈 없이 철도 파업이 끝났다. 한 간부 출신 조합원에게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파업을 시작할 때, 지난해 '화물 노조 파업' 때처럼 정부가 대대적 '노조 때리기'에 돌입할 줄 알고 긴장 속에서 대응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파업 과정에서 국토부 공무원들은 너무나 '젠틀'했고, 노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진 않았지만, 노조가 내놓은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 애써주는 '진정성'도 보였다는 것이다. 이 간부 출신 조합원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몇 가지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사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화물파업에 강경대응해 '재미'를 좀 봤다. 이어 노조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겠다고 했고, 노조에 침투한 '공산 전체주의 세력'을 때렸다. 나아가 '노조로 위장한 조폭' 건폭 몰이에 나섰다. 그러나 그 결과는 흐지부지되고 있다. 간간히 간첩단 사건이나, 노조와 별로 관련 없는 '위장 노조 조폭' 검거 스토리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대체 정부가 이루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정작 노동시간 개편은 69시간제 논란 후 논의의 명맥이 사실상 끊겼고,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 방안 등 산적한 노동 개혁 현안들은 오리무중이다. 

 

대통령이 '노조 때리기'에 관심을 끊자, '노조의 악행'을 뿌리뽑을 것처럼 요란하게 '대통령 지시 사항'을 늘어놓고 엄포를 놓던 공무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대통령은 해외 순방에 몰두하고 있었고, 국토부 공무원들은 '부드러운 중재'를 위해 '몰래' 뛰어다니고 있었다. 

 

'용산 정부'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대통령이 관심 갖지 않으면, 공무원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관심을 보인 분야의 공무원들은 혹사당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한 때 뿐이다. 그때그때 이슈가 있을때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용산이 분주해지고, 관계 부처 고위 공무원 몇은 크게 질타를 듣고 몇은 현란하게 움직였다. 실무를 다루는 공무원들은 눈치를 보다가 대통령과 용산의 관심이 다른 '카르텔'로 옮겨가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 이젠 '카르텔'이라는 말도 과거의 유물이 된 것 같다. 

 

검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조직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찾아내 조치하고 처벌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수년 씩 묵은 미제 사건이 즐비해도 새로운 정치인 혐의, 경제인 혐의가 나오면 열일 제쳐놓고 역량을 특수부에 쏟아 넣는다. 한 사건이 일단락되거나 화제성을 상실하면 다른 사건에 눈을 돌린다. 기소 결정 과정도 불투명하다. 어떤 사건은 기소가 가능해 보이지만 미제로 남아있고, 어떤 사건은 기소가 불가능해보여도 기소한다. 검찰총장은 '암막' 뒤에서 이 과정을 미세 조정한다. 유일하게 대통령이 경험한 조직이 '검찰 조직'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부처를 '검찰 조직'처럼 다루고 모든 이슈를 검사처럼 다룬다. 

 

관가는 지금 숨족이고 있다. 사정기관들만 바쁘다. 2년동안 검찰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건에 특수부 인력을 집중시켰다. 박근혜 국정농단 수사팀이 25명 수준인데, 지금 이 대표에 대한 수사에 약 50여 명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약과의 전쟁, 건폭과의 전쟁에 이어 검경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시절 의혹 검증 보도를 한 언론사들에도 수사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을 비롯해 시민단체의 보조금 관련 수사도 줄줄이 대기중이다. '나쁜 놈 때려잡기'는 계속 진행중이지만, 윤석열 정부가 호기롭게 외친 연금 개혁, 교육 개혁, 노동 개혁 등 국정과제들은 언론 지면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엔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과 같은 거친 언사들이 껍데기처럼 나부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또 혼이 났다. 자율전공학부로 입학한 학생들의 의과대학 진학을 허용하겠다는 이 부총리의 발언이 나오자 대통령실은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불필요한 언급으로 혼란을 야기한 교육부를 질책했다"고 밝혔다. 이 부총리는 대체 몇 번째 사과를 하고 있나. '킬러 문항'을 배제했다는 지난 10월 모의고사 결과, 올해 '물수능'이 예측된다는 말에 반수생이 '역대급'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A 아니면 B 식의 정책이 남발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대비책은 가지고 있는가? 교육 현장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지 알 수가 없다.

여성가족부는 잼버리 사태로 망신당한데 이어 신임 장관 후보자가 '드라마틱'하게 '엑시트'해버렸다. 국토부는 '순살 아파트'와 각종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으며, '서울-양평 고속도로 건설'은 국토부장관의 '백지화 선언' 이후 꼬여만 가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공영방송 사장을 바꾸고 YTN 민영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지만, KBS 사장은 '낙하산 논란'에, YTN 민영화는 졸속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정부 유관 기관 소유의 지분을 '통매각'한 결정은 YTN 최대 주주인 한전KDN의 손실을 일으키는 배임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지적까지 제기된다. 지금 정부 부처는 스스로 벌인 일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 감사원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감사원의 전방위 감사는 전 정권 털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은 최근 국회에서 한 답변에서 "어차피 현 정부도 (정권) 중반이 되면 현 정부 사업도 감사를 받는다"고 말했다. 감사원의 '타이거 감사'가 현 정부 공무원들에게도 "중반" 이후 적용될 텐데, 어느 공무원이 '개혁적'인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위에 언급한 부처들이 하고 있는 일이 죄다 감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떠돈다.

 

도어스테핑은 없어진지 오래고, 이후엔 그 흔한 기자회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간간히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들의 워딩이 신문과 방송을 메우는데, 목소리는 있으되 형체는 불분명하다. 

 

감사원, 검찰, 법무부, 경찰, 방통위, 이런 조직들에만 과한 관심이 쏠린다. '적폐 청산'의 선두부대다.(이 글에서 전쟁 용어를 사용하는 건 이 정부가 많은 것을 '전쟁'에 비유하기 때문이니 양해를 바란다.) 일을 할 수 있는 조직만 '공격적'으로 굴리는데, 그 대상은 '적폐 청산'에 그치고, 삶은 팍팍해지는데 살림살이 나아질 '비전'은 안 보인다. 과거를 들추고 쑤셔대다, 급기야 1920년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홍범도를 부관참시하는데, 어느 국민이 이 정부를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정을 발목잡힌 정부로 보겠는가. 현란한 칼춤의 칼끝만 부각될 뿐이다.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긴 것은 이 정부의 두고두고 상징이 될 것이다. 용산에 우뚝 선 '그들만의 리그'는 국정 전반을 다루는 방식에서 실패하고 있다. 곧 있으면 총선이다. 용산에서 '철새'들이 국민의힘으로 대거 날아들 것이다. 그러면 용산에 새로 입성한 참모들은 또 다시 업무를 파악하고 인수인계에 골몰할 것이다. 대통령은 장관 대신 '용산 출신 차관'을 내려보내 부처를 통솔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잘 되는 것 같진 않다), '용산 정치인'들을 의원으로 만들어 국회에 '내려보낼' 수는 없다. 철학 없는 정책, 준비 없는 대책이 남발된다. 

 

이런 총체적 상황을 우리는 '레임덕'이라고 부르기로 과거에 합의한 바 있다. 그런데 너무 빠르다.

 

▲4박6일 간의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국빈 방문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6일 오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뒤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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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숫자’ 빠진 연금 개혁안 발표...“보험료 인상 불가피” 예고만

연금행동 “‘맹탕’ 연금개혁안...윤석열 정부, 구체적 수치 제시 않고 책임 회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하고 있다. 2023.10.27. ⓒ뉴시스


정부가 국민연금의 보험료율 인상이 필요하다는 방향성만 담은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내야 하는지(보험료율),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소득대체율), 언제 받을 수 있는지(수급개시연령) 등 핵심 수치는 빼놓은 채 공론화 과정을 거치겠다고 결론냈다. 이에 연금개혁의 핵심인 '모수 개혁'이 빠진 '맹탕' 개혁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날 오전 국민연금심의위원회에서 심의·확정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했다. 종합운영계획은 국민연금법에 따라 정부가 의무적으로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수지 계산을 바탕으로 수립해야 하는 국민연금 전반에 대한 운영 계획이다.

이번 종합운영계획안은 지난 3월 발표한 재정추계 결과를 바탕으로 재정계산위원회의 제도개선 자문안, 국회 연금개혁 특위 논의내용 등을 거쳐 수립됐다. 앞서 재정계산위는 보험료율을 12%·15%·18%까지 올리는 안, 연금 수급개시연령을 68세까지 올리는 안, 기금수익률을 올리는 안, 소득대체율을 45%·50%로 인상하는 안을 조합한 총 24가지 시나리오를 담은 최종 보고서를 복지부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날 발표된 종합운영계획안에는 연금개혁의 핵심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급개시연령 모두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다. 현재 보험료율은 9%, 소득대체율은 42.5%, 수급개시연령은 63세다. 앞서 진행된 연금개혁의 계획에 따라 소득대체율은 2028년까지 40% 더 하향되며, 수급개시연령은 2033년 65세까지 추가 상향될 예정이다.

복지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평균 보험료율은 18.2%, 소득대체율은 42.2%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소득대체율은 유사한 반면 보험료율은 절반 수준으로,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해 점진적인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보험료율 인상의 방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상 수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한 만큼 공론화를 통해 구체화한다"고 결정을 미뤘다.
정부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은 데 대해 국민과의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그동안 개혁 과정을 보면 정부가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 수준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을 해왔는데,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며 "이번에는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회 연금특위에서 진행 중인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구조개혁 논의 결과에 따라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달라질 수 있다"면서 "이르면 올해 말에 나올 새로운 장래 인구 추계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향후 국회의 연금개혁특위에서의 구조개혁 논의와 연계하여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국회 연금개혁특위는 눈에 띄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활동 기한을 내년 5월로 미룬 상태다. 내년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있는 만큼 사실상 총선 이후로 연금개혁 시기를 미룬 것이다.

공론화에 대한 일정과 계획조차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스란 연금정책관은 "국회하고 진행을 해보면서 일정을 말씀드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언제 하겠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보험료율 인상 방식과 관련해서는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이라는 방향성만 제시됐다. 같은 비율로 보험료율을 올리더라도 내는 기간이 짧은 중장년층은 단기간에 올리고, 가입 기간이 긴 청년층은 장기간에 걸쳐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등 인상'에 대해서도 정부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하지 않았다. 정윤순 사회복지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보험료 인상 수준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인상 시나리오가 있는지는 실무적으로 저희가 검토한 바는 있다"면서도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 논의가 추후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아꼈다.

 

 

 

국민연금공단(자료사진) ⓒ뉴시스

 

'낸 만큼 받는' 방식으로 전환 추진...기금 해외투자 비중 확대


복지부는 공론화를 통해 재정방식 개선을 위한 논의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또는 '확정기여방식(DC)'으로 전환 등에 대한 국민의견을 수렴하겠다는 방침이다. 자동안정화장치는 향후 출산율과 경제동향 등에 따라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 등을 달리 적용하는 것이다. 정해진 소득대체율에 따라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닌 경제 지표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도록 설계하겠다는 뜻이다.

DC방식은 '낸 만큼 되돌려 받는' 방식이다. 기금 운용 수익에 따라 급여액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 국민연금은 확정급여방식(DB)으로, 낸 돈과 관련 없이 받는 급여액이 정해져 있다. 사실상 국민연금을 민간 금융 상품처럼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복지부는 국민연금 운영에 대한 개선과제를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노후소득보장 강화 ▲세대 형평과 국민 신뢰 제고 ▲재정안정화 ▲기금운용 개선 ▲다층노후소득보장 정립 등 5개 분야 총 15개 과제다.

기금운용 개선과 관련해서는 기금수익률을 최근 5년 평균 4.2%에 수준에서 1%p(포인트) 이상 더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제도개선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해외투자 비중을 2028년까지 약 60%로 확대하고, 2024년부터 대체투자 분야 인력을 대폭 확충한다. 또한 전문성 제고를 위해 전략적 자산배분 권한을 기금운용본부로 이관하고, 기금운용위원회는 장기수익률과 위험 수준을 설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노후소득 보장 강화와 관련해서는 국민연금 외에도 기초연금, 사적연금 등을 함께 강화해 다층노후소득보장이 가능하도록 체계를 잡아가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기초연금을 40만원까지 인상하는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되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은 국민연금 개혁과 연계해 정하기로 했다.

또 소득 활동에 따른 국민연금 감액 제도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현행 국민연금 제도에서는 퇴직 후 소득 활동을 하면 소득액에 비례해 노령연금을 깎아서 지급하고 있다.

 

 

 

연금행동 "'맹탕' 연금개혁안...오히려 국민연금 죽이기 계획 담겨"


구체적인 '모수 개혁' 내용이 빠진 이번 개혁안에 대해 "'맹탕' 연금개혁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복지부가 재정방식 개선을 위해 제시한 공론화 과제에 대해서도 "오히려 국민연금 제도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은 이날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대한 논평을 내고 "단일안은커녕, 국민연금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등 핵심적인 숫자는 아무것도 없고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되는 '맹탕' 연금개혁안"이라고 비판했다.

연금행동은 "윤석열 정부에게 있어 국민의 존엄한 노후는 정책의 고려대상이 아닌지, 종합운영계획에 구체적 보장목표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면서 "국민연금의 보장 목표가 제시되지 않으니 구체적인 숫자가 담길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제시한 DC방식 전환,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 등에 대해서는 "DC방식 전환은 국민연금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며 "낸 만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공적연금의 사회연대 및 재분배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복지제도도 그렇게 설계돼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어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은 소득대체율 삭감 이상의 연금 삭감제도로 보장성을 크게 훼손해 제도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보험료율 인상의 방향으로 제시한 세대에 따른 보험료 차등 인상에 대해서도 "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자의적이고, 재정조달에 있어 사회연대의 원칙이나 부담능력에 따른 부담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연금행동은 "윤석열 정부는 국민연금 제도 근간을 흔드는 엉뚱하고 위험한 주장만 담고, 핵심 수치는 하나도 담지 않는 등 수준 이하의 무(無)내용, 과제나열에 불과한 '맹탕' 연금개혁안을 제출했다"면서 "국민을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오만과 무능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정부의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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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 기자명 장창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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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0.2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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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 비극사 ③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아랍인들을 농락한 영국 : 후세인-맥마흔 협정, 사이크스-피코 협정

      1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은 오스만제국이 지배 아래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이 독일의 편에 가담하자, 아랍인들은 이를 호기로 생각하고 독립투쟁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 안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며, 전쟁 승리 후 아랍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집트 주재 영국 고위 관리 맥마흔과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은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친 서신을 교환하며 이런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를 세계사에서는 ‘후세인-맥마흔 협정’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약속한 대로 1916년 6월부터 독립투쟁을 벌였고,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아랍인들은 영국이 협정을 이행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애초에 영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승리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 지배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비밀리의 논의한다. 1915년 11월부터 1916년 3월까지(후세인-맥마흔 서한이 오가던 시점) 진행된 협상 끝에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한다. 양국 협상 대표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협정은 현재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차 대전 승리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합의대로 아랍지역을 나누어 지배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 A지역을 프랑스, B 지역을 영국이 통치하기로 합의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 : 밸푸어 선언

      전쟁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자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돕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영국의 대부호였다. 이미 팔레스타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던 로스차일드는 이 편지에 호응하여 영국에 자금을 지원했고 그 결과 영국은 1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편지는 11월 9일 공개되었고,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에 치를 떨어야 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 편지에 환호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이주는 순조로웠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의 지원이 있었고,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인 부호들의 자금 지원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중동 전쟁은 종결된 것일까: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년)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대통령을 초청하여 13일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집트는 네 차례의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주도했던 아랍의 대표적인 반이스라엘 국가였다. 따라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 체결은 중동 평화의 출발로 평가된다.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수에즈운하 수입이 줄어들면서 국가 재정마저 여의치 않자, 사다트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경제난을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사다트는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유화적’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78년 평화협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중동 평화의 출발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사다트는 이집트 국민들뿐만 아니라 아랍권 국가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집트는 아랍연맹 회원자격이 정지되었다. 협정을 체결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암살당했다.

       

      평화적 해법의 출발이 되는가: 오슬로 협정 Ⅰ(1993)

      1991년 11월 미국, 소련, 스페인이 주최하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가 초대받아 ‘마드리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중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비록 합의문 도출에는 실패했지만, 1990년대 평화 협상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중동 평화 협상은 1993년 오슬로 협정 체결로 빛을 보게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이집트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한 2개의 합의문을 일컫는다. 1993년 9월 워싱턴에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 아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이 만나 합의서에 서명했다. 1993년 1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측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를 오슬로 협정 Ⅰ이라고 부른다.

      오슬로 협정 Ⅰ의 원칙은 두 국가 해법이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고,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5년 안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이스라엘이 동의했다. 쟁점이 되는 예루살렘, 최종 국경,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등은 5년 후에 논의하기로 했다. 평화적 해결의 원칙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협정의 공식 명칭은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다.

      1994년 5월 4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 대한 합의”를 체결하고, 두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 일정과 팔레스타인으로의 권한 이양 등을 합의했다. 몇 주 후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했고 PLO는 자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기엔 너무나 많은 한계를 가졌다.

      ▲ 빨간 점이 예리코 지역이다.

      오슬로 협정 Ⅰ은 서안지구(West Bank) 대신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를 명시했다. 예리코는 서안지구 내의 도시이다. 흔히들 오슬로 협정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합의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일부에서만 팔레스타인 자치가 합의된 것이다.

      또한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이 철수했지만, 이스라엘 정착촌은 그대로 존재했다. 정착촌 문제는 5년 후에 논의하기로 미뤘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착촌이 존재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보장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착촌 문제는 자치 정부수립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 역시 5년 후로 미뤘다.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이 팔레스타인 거주민을 내쫓고, 그들의 귀환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늘려 종국에 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 지역에서 완전히 내쫓는 것이다. 따라서 정착촌과 귀환권 문제를 5년 뒤로 미룬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에 토대해서 마련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 오슬로 협정의 주역인 PLO의 아라파트, 이스라엘의 페레스 총리, 라빈 총리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서안지구 분할은 누구에게 이익인가 : 오슬로 협정 Ⅱ(1995년)

      1995년 9월 28일 오슬로 협정 Ⅱ가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 기구 구성, 이스라엘 군대의 재배치와 철수, 서안지구 분할, 팔레스타인 경찰, 적대행위 예방 등의 내용을 담았다. 공식 명칭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임시 협정”(Interim Agreement)이다.

      오슬로 협정 Ⅱ의 가장 큰 특징은 서안지구를 A, B, C 구역으로 나눈 것이다. 서안 지구 18%에 해당하는 A 구역은 팔레스타인 당국이 단독으로 관리한다. 서안 지구의 22%를 차지하는 B 구역은 팔레스타인 당국과 이스라엘의 공동 관리 구역이며,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관리로 이양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서안 지구의 60%를 차지하는 C 구역은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관리한다.

      ▲ A구역은 팔레스타인, C 구역은 이스라엘이 관리한다. B 구역은 공동으로 관리하되 점차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관리권을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그림에서 확인되듯이, 팔레스타인 당국의 권한이 미치는 A와 B 구역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오슬로 협정이 온전히 이행된다고 하더라도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갇혀 있는 셈이다(그러나 오슬로 협정에 불만을 품은 이스라엘 극우 시오니스트에 의해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1995년 11월 14일 암살당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절망시킨 7년의 ‘평화 협상’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2000년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까지 7년 동안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1997년 양측은 헤브론 의정서를 합의했다. 서안지구 남쪽에 있는 헤브론에 400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정착촌이 있다. 문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800명의 이스라엘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 이스라엘군은 여러 형태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이 합의로 헤브론의 80%(H1)는 팔레스타인이, 20%(H2)는 이스라엘이 관리하게 되었다. 당시 H2에는 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다.

      1999년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배치된 이스라엘군의 11%를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측이 요르단강 서안 영토의 40%를 완전 또는 부분 관할하며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 350명을 석방하고 ▲2000년 9월까지 팔레스타인 최종 지위 협상을 종결하는 내용을 합의한 “샤름 엘-셰이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합의는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으로 이어졌고,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주 동안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 실패하고, 곧이어 등장한 이스라엘 강경파 샤론이 총리로 등장하면서 그 이후 협상은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의 7년은 ‘평화 협상’ 기간으로 불리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시간이었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7년 사이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수 배로 늘었고, 미국의 자본으로 50개가 넘는 이스라엘 군사기지가 건설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평화 협상’에 참여했던 PLO는 합법적인 협상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주장을 무조건 인정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을 묵인했고,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포기했다. 7년 동안 이스라엘 총리가 라빈, 페레스, 네타냐후, 바라크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정책은 일관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구조화되었다.

      2000년 이스라엘 샤론이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동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 통치를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2차 인티파다의 시작이다. 2001년 총리가 된 샤론은 오슬로 협정 효력 상실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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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특혜 의혹 양평공흥에 도촌땅 관련자 연루 정황

토사 매립 위조 의혹 필지 소유자, 최은순 도촌땅 매입 회사 이사... 최씨는 잔고증명 위조로 구속

23.10.27 05:42l최종 업데이트 23.10.27 07:00l

정혜원(whj428)

 최근 국정감사에서 대통령 부인인 김건희 여사 일가 특혜 의혹이 불거진 양평 공흥지구 관련 토사 매립 예정지 소유주가 과거 경기도 성남 도촌동 사건에 연루된 회사의 전직 임원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확인됐다. 


김 여사 어머니인 최은순씨가 도촌동 땅 매입 과정에서 통장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혐의로 올해 7월 21일 항소심에서 법정 구속된 것을 감안하면 양평 공흥지구와 도촌동 땅 매입 등 사업 관계가 서로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남 도촌동 땅 관계자, 양평 공흥지구에도 등장 

지난 2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건희 여사 일가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ESI&D)가 양평군에 제출한 '양평공흥지구 도시개발사업 공동주택 신축공사 토사반출계획서'를 근거로 당초 토사 매립 예정지가 백안리 192번지 외 4필지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들 필지(총 8266㎡)의 부동산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소유주는 A씨다. 과거 최은순씨가 도촌동 땅 차명 매입 당시 최씨 측 토지 지분을 넘겨받았던 B사에서 이사를 역임한 인물과 이름 및 생년월일이 같았다. B사의 법인등기부등본과 대조·확인한 결과다. 

한준호 의원은 2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공흥지구에서 등장한 A씨가 도촌동 사건에서도 확인되면서 부동산 개발이라는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는 최은순씨와 그 관계자들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큰사진보기최은순씨의 도촌동 땅 차명 매입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B사의 법인등기부. A씨는 2016년 3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이 회사 이사로 재직했다.
▲  최은순씨의 도촌동 땅 차명 매입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B사의 법인등기부. A씨는 2016년 3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이 회사 이사로 재직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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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진보기최은순씨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 측이 양평공흥지구 사업 토사 매립 예정지로 양평군에 당초 신고했던 주소지는 백안리 192번지 등 4개 필지였다. 이들 필지 소유자는 모두 A씨다. 사진은 백안리 192번지 건물 등기부등본.
▲  최은순씨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 측이 양평공흥지구 사업 토사 매립 예정지로 양평군에 당초 신고했던 주소지는 백안리 192번지 등 4개 필지였다. 이들 필지 소유자는 모두 A씨다. 사진은 백안리 192번지 건물 등기부등본.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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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정황은 이제까지 무관한 것으로 보였던 최은순씨의 도촌동 땅 차명 매입 사건과 최씨의 장남 김진우씨가 기소된 사문서 위조·행사 사건과의 연결고리가 새롭게 드러난 것이어서 주목된다(하단 타임라인 참조).

먼저 최씨가 차명 매입한 성남 도촌동 땅 부동산등기부를 보면, 최씨는 2013년 축구장 77.4개 규모의 도촌동 땅(55만㎡, 약 16만7000평)을 매입하면서 전체 1/2의 부지를 H사를 통해 사들였다. 그리고 H사 토지 지분 전체를 2016년 4월 매입한 곳이 바로 B사다. 

나머지 토지 1/2은 당초 동업자 안소현씨의 사위 김OO씨의 지분이었다. 그런데 2015년 9월 김씨 소유 토지에 대해 10억 7000만 원가량의 가압류를 건 이가 있었다. 바로 B사 대표 강OO씨다. 그보다 8개월 전에는 최씨가 해당 토지에 대해 21억2000만 원을 가압류로 걸기도 했다. 이후 김씨 소유 부지는 경매로 넘어갔고, 이를 이에스아이엔디가 2016년 7월 샀다. 

결국 최씨 측 차명 매입분이 B사에게 넘어갔고, 동업자 안씨 측 지분은 최씨 측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가 매입한 구조다. B사와 최씨 측과의 도촌동 토지 거래는 이뿐만이 아니다. 도촌동 땅 중 답(논)에 해당하는 부지 역시 안씨의 사위 김씨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2016년 5월 경매로 이 땅들을 각각 1/2씩 취득한 이들은 김진우씨와 B사 대표 강씨의 관계인이었다. 

지난 1월, 수원지방법원은 최씨가 성남시를 상대로 제기한 '과징금부과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최은순)가 부동산실명법을 위반하여 도촌동 부동산을 명의신탁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처럼 B사는 최씨의 도촌동 땅 차명 매입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곳이다. 

김건희 여사 오빠 공소장에 없는 새로운 의혹 
 
큰사진보기양평공흥지구 개발 사업으로 들어선 아파트 입구에 있는 머릿돌. 준공일은 2016년 7월 1일로 새겨져 있다.
▲  양평공흥지구 개발 사업으로 들어선 아파트 입구에 있는 머릿돌. 준공일은 2016년 7월 1일로 새겨져 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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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B사 법인등기부등본에는 당초 이에스아이엔디가 양평 공흥지구 토사 매립 예정지로 양평군에 신고한 토지 소유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A씨가 등장한다. A씨는 2016년 3월 B사 이사로 취임해 2019년 3월 퇴임하는데, 이 기간은 양평 공흥지구 개발 공사 기간과 일부 겹친다. 수원지검 여주지청이 김건희 여사 오빠 김진우씨 등을 기소한 공소장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다. 

지난 7월 수원지검 여주지청은 김씨 등을 사문서 위조, 위조사문서 행사, 위계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기소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씨 등은 당초 양평군에 제출한 '양평공흥지구 도시개발사업 공동주택 신축공사 토사반출계획서'와 달리 토사 매립지를 A씨 소유의 백안리 192번지 등에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수리 모처로 변경했다. 

검찰은 "공사 현장에서 약 18.5km 떨어진 경기 광주시 퇴촌면 도수리 지역 사토장까지 토사를 운반한 사실이 없음에도 토사 운반 업체 명의를 도용하여 허위의 확인서를 작성하여 토사 운반 거리를 늘리는 방법으로 개발비용을 부풀리기로 하였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공사기간을 2015년 7월 18일∼2016년 6월 30일에서 2013년 2월 1일∼2015년 5월 31일로 수정하고, 운반량도 13만㎥에서 15만㎥등으로 위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소장에는 공사 과정에서 나온 토사가 경기 광주시 퇴촌면이 아닌 다른 어느 곳으로 운반됐는지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 한준호 의원은 지난 23일 국감에서 "당초 토사반출계획서상 1.9km 거리(백안리 192번지)에 토사를 매립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공문서를 위조해서 거리가 9.7배 늘어난 18.5km 떨어진 곳에 토사를 매립하려했던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연도별 위성사진 등으로 백안리 192번지 일대를 확인한 결과 원래 논이었던 토지가 흙으로 메워졌다"고 지적했다. 

양평 공흥지구 개발 사업과정에서 나온 토사가 당초 양평군에 신고된 대로 A씨 소유 토지로 운반됐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토지 소유자와의 협의나 동의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오마이뉴스>는 B사 관계자와 A씨가 발행인으로 있었던 경기 지역 모 매체 등을 통해 A씨와 접촉해 당초 이에스아이엔디의 토사반출계획서에 해당 토지가 매립 예정지로 신고된 과정 등에 대해 문의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상하다"... "땅값 뛰어"... 검찰 수사 확대 필요
 
큰사진보기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건희 여사 일가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ESI&D)가 양평군에 제출한 '양평공흥지구 도시개발사업 공동주택 신축공사 토사반출계획서'를 근거로 당초 토사 매립 예정지가 백안리 192번지 외 4필지였다고 밝혔다. 백안리 192번지는, 최은순씨의 도촌동 땅 차명 매입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B사에서 이사로 재직했던 A씨가 보유하고 있다. 해당 땅의 전경.
▲  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건희 여사 일가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ESI&D)가 양평군에 제출한 '양평공흥지구 도시개발사업 공동주택 신축공사 토사반출계획서'를 근거로 당초 토사 매립 예정지가 백안리 192번지 외 4필지였다고 밝혔다. 백안리 192번지는, 최은순씨의 도촌동 땅 차명 매입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B사에서 이사로 재직했던 A씨가 보유하고 있다. 해당 땅의 전경.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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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호 의원이 A씨 소유 토지에 창고 건물이 들어선 사실을 거론하면서 특혜 행정 의혹을 제기한 것 또한 새롭게 주목된다. 한 의원은 국감에서 "백안리 192번지에는 창고 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것을 봤을 때 뭔가 행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떠냐"며 김동연 경기도지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김 지사 역시 "네, 좀 이상하다"고 답변했다. 

실제로 A씨 소유 부동산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답(논)이었던 백안리 192번지는 2017년 5월 지목이 창고용지로 변경됐다. 그리고 다음 달(6월)에 단층 농업용 창고가 들어선다. 모두 A씨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B사에서 이사로 재임했을 당시 일어난 변화다. 

이와 관련해 부동산·건설 관련 전문가인 전홍규 변호사(법무법인 해랑)는 "기본적으로 답(논)은 물기가 있어서 매립을 해야 하므로 값이 가장 싼 편이다. 이걸 창고용지로 바꿨다는 건 대지로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땅의 활용도가 높아진 것"이라며 "답에서 창고용지로 지목을 변경했을 시 땅 값은 다섯 배 정도 뛴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 변호사는 "농지는 한 번 지목이 변경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라며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해당 땅이 지목변경의 요건을 통과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라고 짚었다. 

한준호 의원은 양평군과 최은순씨 측과의 유착 의혹에 대한 보다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한 의원은 "공흥지구 개발사업자가 당초 계획서대로 백안리에 사토를 매립했고, 그 결과 논의 형질이 변경되어 활용도 높은 창고용지로 지목이 바뀌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라며 "최은순씨 일가와 그 주변에만 유난히 특혜가 집중되는 양평군의 행정은 '유착 의혹'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촌동-양평 공흥 관련 타임라인
 
큰사진보기최은순씨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가 양평군에 제출한 '양평공흥지구 도시개발사업 공동주택 신축공사 토사반출계획서' 중 일부. 이에스아이엔디는 당초 사토처리장소로 백안리 192번지 외 4개 필지를 신고했다.
▲  최은순씨 가족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가 양평군에 제출한 '양평공흥지구 도시개발사업 공동주택 신축공사 토사반출계획서' 중 일부. 이에스아이엔디는 당초 사토처리장소로 백안리 192번지 외 4개 필지를 신고했다.
ⓒ 한준호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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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도촌동 사건과 양평 공흥지구 사업 관련 타임라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양평 공흥 관련 내용은 볼드) 

2012년 03월 : A씨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백안리 192 외 4필지 매입 
2013년 10월 : H사와 김○○씨(안소현씨 사위), 도촌동 땅 각 1/2 매입
2015년 01월 : 최은순씨, 김○○씨 지분에 20억 2000만원 근저당 설정 
2015년 07월 ~ 2016년 06월 : 양평 공흥지구 아파트 공사 토사 운반 기간 
2015년 09월 : H사 대표 강○○씨, 김○○씨 지분에 10억7000만원 근저당 설정 
2016년 05월 : H사 지분 B사(대표 강○○)가 매입, 경매로 넘어간 김○○씨 지분, 에스아이엔디(ESI&D)가 매입
2016년 03월 ~ 2019년 03월 : A씨, B사 사내이사 재직기간 
2016년 07월 : 양평 공흥지구 개발 준공 
2016년 08월 : ESI&D 대표 김진우 등 사업시행사 관계자 4명, '토사 운반거리 확인서' 조작
2016년 11월 : B사와 ESI&D 지분 전체, J사 매입 
2016년 11월 : 양평군, 개발부담금 17억 4800만원 ESI&D에 부과. ESI&D 이의 신청
2017년 01월 : 양평군, 개발부담금 6억 2542만원 ESI&D에 부과
2017년 05월 : A씨가 보유한 백안리 192필지, 답->창고용지로 지목변경 
2017년 06월 : 양평군, 개발부담금 0원 ESI&D에 부과 
2017년 06월 : A씨 보유 백안리 192필지에 창고 건물 건축

2020년 06월 : 성남시, 최은순씨와 안소현씨에게 각 27억 3297만 3660원 과징금 부과(도촌동 땅 부동산실명법 위반)
2021년 03월 : 최은순씨, 성남시 상대로 행정소송 제기
2021년 11월 : 양평군, 개발부담금 1억 8700만원 ESI&D에 정정 부과
2023년 01월 : 수원지법, 성남시 과징금 처분 적법 판결
2023년 07월 : 최은순씨, 성남시 도촌땅 매입 과정에서 잔고 증명 위조 혐의로 항소심에서 법정 구속. 
2023년 08월 : 검찰, 공흥지구 개발관련 사문서 위조 및 행사 등 혐의로 김진우씨 기소
 
태그:#양평공흥지구특혜의혹#김진우#양평군#최은순#도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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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승인 없이 멋대로 지방 예산 깎은 정부…“법적 근거 없어”

교부세 삭감 과정서 추경 안 거쳐…“재정 민주주의 흔드는 행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7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논의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2022.10.27. ⓒ뉴시스
정부가 당초 지자체에 주기로 한 지방교부세를 감액하기로 한 가운데, 해당 결정이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교부세를 감액하려면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국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정부는 추경 없이 일방적으로 교부세 감액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추경을 거부하는 왜곡된 재정 운용이 국회의 예산심의권 침해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26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행안부는 지난달 광역시도에 교부세 감액을 통보했다. 해당 통보는 기초자치단체로 전파됐다. 정부 세수에 결손이 생겨, 각 지자체에 배정하는 교부세를 본예산 대비 일괄 감액하겠다는 내용이다.

교부세는 정부가 거둬들인 국세 일부를 지방자치단체에 교부해, 지자체가 행정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보통교부세는 내국세의 19.24%, 부동산교부세는 종합부동산세의 전액을 지자체에 내려보낸다. 정부 세수가 줄면 교부세도 줄어드는 구조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올해 국세 수입이 예측치보다 59조 1천억원 줄어들 것이라는 재추계 결과를 발표했다. 행안부는 올해 지방교부세는 본예산 75조 3천억원 대비 11조 6천억원(15.4%) 감액한다는 방침이다. 국세 연동되는 보통교부세와 부동산교부세는 각각 10조 6천억원(16%), 1조원(18.3%) 줄어든다.

문제는 교부세 감액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부세를 감액하려면, 추경을 편성하거나 결산을 통해 세입 감액을 인식해야 한다. 정부 결산보고서는 이듬해 5월 국회에 제출되고, 그 이전에 세입 감액을 인식하는 방법은 추경뿐이다.
정부가 추경이나 결산 없이 교부세를 깎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세수가 줄어 당해연도에 배정된 교부세를 감액한 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과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이던 2020년이 유일한데, 이때도 추경을 거쳤다. 당시 세입 감액 경정과 세출(교부세) 감액 조정이 동시에 이뤄졌다. 정부가 올해 교부세를 줄이려면, 앞선 사례와 같이 추경을 거쳤어야 했다.

추경 없이 교부세를 감액하는 건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추경을 하려면 국회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독단적으로 교부세 감액을 강행한 것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아직 2024년이 안 됐으니 결산은 할 수 없고, 추경마저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정부에 돈을 덜 줄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면서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회가 아무리 예산 심의를 거쳐도 정부가 예산대로 자금 배정을 하지 않는 건 국회의 예산 심의권을 무력화하는 행태”라며 “재정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12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1회국회(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2023년도 예산안에 대한 수정안이 재석 273인, 찬성 251인, 반대 4인, 기권 18인으로 가결되고 있다. ⓒ뉴시스

무조건적인 추경 거부로 ‘교부세 대란’ 초래


“추경은 없다”는 정부 고집이 ‘편법’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추경을 편성하고 세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대신, 외국환평형기금에서 돈을 끌어 오기로 했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조성한 기금인데, 기금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운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선거에서 지더라도 나라를 위해 건전재정,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재정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세수 부족이 있더라도 올해는 적자국채 발행 없이 즉 추경 없이 재정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올해 1분기부터 세수가 부진했으나, 정부는 추경을 하지 않았다. ‘상저하고’ 전망을 유지하면서, 하반기에는 세수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버텼다. 하반기 들어서도 경기 반등이 지연되자, 59조원의 세수 결손을 인정하면서 교부세를 감액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각 지자체가 통합재정안정화기금과 순세계잉여금을 활용하면 된다는 게 정부가 제시한 대응 방안이었다.

교부세 감액은 2년 뒤로 미루는 게 통상적이다. 지방교부세법에 따르면, 정부 세수가 감소할 경우 교부세를 당해연도에 바로 감액하지 않고 2년 뒤까지 미룰 수 있다. 지방정부 재정이 경기에 따라 크게 변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경기가 안 좋으면 국세뿐 아니라 지방세도 줄어, 교부세까지 감액되면 지자체 타격이 크다. 반대로 세수가 많이 걷혀 교부세를 올려야 할 때는 향후 경기 하방기에 추가 정산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교부세 감액을 올해 정산하든 2년 뒤에 정산하든, 정부가 제1원칙으로 내세우는 재정건전성에는 영향이 없다. 국채를 발행하는 시기만 달라질 뿐이다.

 
이 수석연구원은 “추경 없는 교부세 감액은 재정건전성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서 “추경을 하지 않겠다는 정부 기조를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부세 감액을 당해연도에 정산하는 데 대해서는 과거에도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20년 교부세 감액 추경에 대해 “세입 경정에 따른 당해연도 교부세 감액 정산은 기존 정산 방식과 주기가 상이하다”며 “지방재정 운용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또한 “지자체는 매년 자체 수입 외 교부세 규모를 면밀하게 검토해 세입 예산에 반영하고 이를 근거로 세출예산을 편성한다”면서 “연도 중에 세입 예산이 변경되면 지출 구조조정이 불가피해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지방정부 재정난에 대해 “당초 예정된 집행에는 무리가 없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지자체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전국 광역시와 도의 세입에서 교부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4.7%, 9.7%다. 시와 군 단위 지자체는 각각 23.9%, 45.2%에 달한다. 세입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교부세가 줄면서 지자체는 예정된 사업 집행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강도 세출 구조조정에 나서고 체납액 징수를 강화하는 등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선 실정이다.

전례 없는 ‘교부세 대란’이 일자, 지방정부 사업 추진에 차질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부세 최저한도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최근 양주시의회 윤창철 의장은 ‘보통교부세 감소에 따른 지방자치단체 재정위기 대책 마련 건의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정부는 세수 결손에 따른 재정책임을 지자체에 전가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 과세자주권이 낮은 지방정부의 재정안정을 위해 보통교부세의 최저보장률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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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박해의 세월 살다간 이들에 대한 '예의'

[인터뷰] 간토 조선인학살 진실찾는 재일 영화감독 오충공의 40년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  입력 2023.10.26 15:46
  •  
  •  수정 2023.10.26 21:50
  •  
  •  댓글 0
 

우여곡절을 겪으며 맞이한 올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도 하릴없이 저물어간다.

대지진의 혼란속에 국가(일본 정부)가 개입해 자행한 전대미문의 조선인 집단학살(genocide, 제노사이드), 그 진상을 밝히려는 추도의 정은 더해가지만 진실을 덮으려는 탐욕과 위선의 힘은 100년이 지나도록 위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가리려 할수록 불가항력의 힘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오충공(呉充功, 68세) 감독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마음도 바쁘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인 올해가 끝나기 전에 새로 개봉할 영화를 마무리하고 유족회가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 그는 지금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지난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이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이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8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최초의 영상작품인 「숨겨진 손톱자국」을 감독한 28살의 청년은 환갑을 훌쩍 넘어 일흔을 앞둔 지금까지 40년 인생을 한결같이 그 진실을 밝히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의 불가항력은 무엇일까?

지난 16일 저녁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오충공 감독은 깊은 존경심을 담아 '두번째 아버지'라고 부르는 재일 역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님을 이야기했다.

재작년 6월 12일 강덕상 선생이 별세할 때까지 끝까지 병상을 지킨 그는 "돌아가시기 2년 전인가,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을 많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처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영화해설을 써주신 것도 그때 알았다"고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올해를 넘기지 않고 개봉하려고 하는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가제)을 새로 시작했다. 이번 방한도 마산과 함양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다.

「숨겨진 손톱자국」을 감독하면서 한계에 부딪혔을 때 만난 강덕상 선생의 가르침과 '엄격한 진심'을 그렇게 평생 가슴에 새겼다. 그런 그에게 강 선생은 한번씩 "내가 너한테 반했다"며 잊지못할 깊은 정을 주었다.

또 하나의 잊지못할 인연은 1923년 9월 1일부터 조선인학살이 자행됐다는 결정적 증언을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해 준 조인승 할아버지(경남 거창 출신, 당시 82세)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인승씨가 가해자인 일본인과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지켜 보던 가해 일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고,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그의 마음속에 각인된 '강덕상'과 '조인승'은 일제의 만행과 억울하게 학살당한 재일 조선인을 잊지 않도록 하는 선명한 좌표이고 그 모든 것의 구체적인 표상인 듯 하다.

강 선생은 그에게 "나는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로서 책을 많이 썼다. 하지만 책 5권, 10권을 쓴 것 보다 네가 만든 영화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이 있다. 너는 계속 간토대지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광스러운 말씀인데 너무 어깨가 무겁다, 무슨 유명한 영화사도 아니고, 귀도 잘 안들리는데다가 능력도 부족하다"라고 대꾸라도 할라치면 "내가 네 결혼식 주례까지 했는데, 너는 그동안 영화를 안만들었다"고 질책하던 엄한 스승이었다.

그렇더라도 하나의 주제를 붙들고 40년을 살아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그를 이토록 '아주 드문 사람'으로 만든 건 사랑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또 그들의 아버지·어머니가 살아 온 세월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까? 뼛속깊이 사무친 차별을 넘어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말로는 다하지 못할 엄숙하고 준엄한, 자신도 일부가 되어버린 그런 세월.

그의 평온한 모습이 그걸 말해주는 듯 하다. 나이가 무색하게 순진무구한 표정이 있고, 자신이 겪은 차별의 파편이 제 몸에 박히지 않도록 경계해 온 듯 갖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다. 40년을 지켜온 집념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대로 녹아있어 희노애락이 말속에 자연스레 묻어있다.

10월 16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선생(맨 오른쪽)이 오충공 감독(가운데)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여러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10월 16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선생(맨 오른쪽)이 오충공 감독(가운데)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여러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오 감독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우석대 교수는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계속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해 온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 간토 사건을 이렇게 장기적으로 하는 사람은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매우 귀중하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관을 갖고 기본 주제를 붙들면서도 재일동포들의 밑바닥 투쟁과 연관시켜서 작업하는 시각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관동)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당시 2주 남짓한 기간에 일본 당국의 직간접적인 개입아래 최소 6천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 일본 당국의 용렬함, 진실 규명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국 정부의 무력한 태도가 오랜 세월을 짓눌러 왔다.  

한 세기가 되도록 미궁에 빠져있던 그 날의 진실이 이나마 세상에 알려진데는 오충공 감독의 공이 크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전남 담양 출신인 아버지 오상수와 보성 출신의 어머니 강정애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올해 68세이다.

어느 누구도 그 학살의 현장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학살의 현장이 모두에게서 잊혀져 가는 듯 보일 때, 27살의 영화학도 오충공은 카메라를 들고 그 현장에 뛰어들었다. 1982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이 자행된지 60년이 다 되가는 해였다.

처음 시작은 대학 중퇴 후 뒤늦게 들어간 영화학교의 졸업작품으로 출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편집을 바꾸어 봐도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1년 반의 추가 촬영을 하면서 생존 피해자인 조인승 할아버지와 강덕상 히토츠바시대학교 교수(2021년 작고)를 만났고, 그들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가며 1983년 「숨겨진 손톱자국」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작품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이나 영상자료 한 점 없던 당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이고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현장을 들여다 본 것이 그에겐 숙명이었을까.  「숨겨진 손톱자국」(1983)을 시작으로 「불하된 조선인」(1986), 「93년의 침묵」(2016) 까지 그의 카메라는 40년을 한결같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찍고 있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다는 것, 명부가 남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자연스레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2017년에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도 만들었다.

100주기인 올해를 넘기기 전에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네번째 다큐멘터리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가제)를 개봉할 예정이다.

오 감독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포함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이며, 최근에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무리 식민지 종주국이라고 하더라도 미증유의 지진 상황에서 이민족인 조선인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무참하게 살해한 역사를 없었던 일로 은폐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또 지난 100년동안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앞에 화환 한번 보내지 않은 한국 정부를 향해서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를 위한 조사 한마디 없고 유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와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신도 없이 만들어 놓은 헛묘앞에서 매년 음력 7월 20일, 21일(간토대지진 당시 9월 1, 2일의 음력 날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숱한 조선인 희생자 유족의 백년 한을 하루 빨리 풀어주어야 한다는 호소는 간절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영화 3편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한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행한 역사가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굳은 다짐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어떤 의미인지,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묻고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달 16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토크콘서트에 참가한 오 감독을 만나 나눈 대화를 시작으로 추석 명절 기간에 전자메일을 주고받으며 진행됐다. 서면으로는 부족하여 10월 16일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를 서울 인사동에서 직접 만나 보충했다.

인터뷰 내용 중 오충공 감독이 '관동대지진'이라고 한 표현은 '외래외표기법'에서 정한 '현지에서 쓰는 언어표기 원칙'에 따라 '간토대지진'으로 모두 바꾸었다. 

다음은 문답 전문.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 감독님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룬 최초의 영상제작물 「감춰진 손톱자국」을 만들어 당대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기였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려면 남다른 결심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 오충공 감독 : 간토지진 조선인대학살은 조선근대사에 기록되어야 할 제노사이드, 민족최대의 비극이며, 일본이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일반 민중을 포함한 자경단을 동원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집단 살육한 국제법상 인권범죄입니다. 

저는 조선인 6,661명 이상이 학살당한 이 중대한 역사를 고등학생때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다뤄야 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9살 무렵 생겼던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네요. 


□ 재일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씀인데,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들려주시겠습니까?  

■ 저는 재일 조선인 2세로 도쿄의 '밑동네'(아랫동네)인 가츠시카구 다테이시에서 나서 자랐습니다. 전남 담양출신인 아버지 오상수는 중학교 중퇴 후 보성으로 내려가 삼촌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사진기술을 배운 뒤 일본의 벳푸 온천에 있던 사진관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일했습니다. 갖은 차별을 받으면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정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강정애는 전남 보성출신인데, 그곳에서 아버지와 결혼해 생활하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남편을 뒤따라 일본으로 들어왔죠. 1955년에 외아들인 저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아홉 형제의 큰아들, 종손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국땅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고품팔이'(고물장사)와 비닐 재생작업을 하면서 고향에 있는 늙은 부모의 생활을 지원하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에 며칠간 원인불명의 고열을 앓고 난 후 귀가 잘 안들리는 난청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외아들인 저의 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다니며 애를 썼지만 딱히 이렇다할 치료법도 없어서 그저 세월을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난청 장애가 있는 제가 착하면서도 차별과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인간이 되길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한다고 엄하게  키워주신 분이 어머니였습니다.

처음엔 장애인학교가 아니라 집 근처 일본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칠판에서 제일 가까운 앞자리에서 앉아서 선생님의 입 모양을 살피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는 제가 조선인이라는 자각도 없이 다녔죠.

소학교 3학년때인데, 동급생들이 하교하는 저를 집앞까지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조센진! 조센진, 김치냄새 난다!"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9살이던 그때 일본인 동급생들로부터 들었던 '조센진'이라는 소리 덕분에 처음으로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학교 작문시간에 '왜 조선사람은 부끄러운 인간인가'라고 쓴 적이 있어요. 제가 쓴 작문을 본 소학교 선생님이 어머니와 상의한 뒤 조선학교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데리고 가보자고 해서 간 적이 있는데, 처음 듣는 장단소리에 아름다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는 조선 여학생들의 민족무용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몸안의 피가 뜨겁게 역류하는 걸 느꼈습니다. ''나에게도 자랑스러운 민족과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첫 체험이었던 같애요. 별 망설임없이 소학교 4학년때 조선학교로 전학하게 됐죠.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조선학교에서 보내는 동안 축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난청때문에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를 잘 알아들지 못하잖아요. 결국 문지기 전문으로 기량을 닦았어요. 그때 민족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조선말과 글로 조국의 역사를 배웠고 식민지시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활동한 김달수, 김석범, 이은직, 허남기, 김시종을 비롯한 카프(KAPF)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습니다. 조선인의 문화정서와 민족 정체성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고, 독학으로 시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도쿄 조선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학교측과 교섭하면서 신문부를 창설해 학생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조선대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학교에는 난청 장애가 있는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설비도 없고 강의를 메모해 주는 보조자도 찾을 수가 없어서 갈등 끝에 중퇴하게 되었죠.


□ 「감춰진 손톱자국」은 조선대학교 중퇴후 출판사에서 일하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현 일본영화대학) 다큐멘터리학과에 입학한 뒤 찍은 졸업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영화전문학원 입학전에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루야 한다는 결심을 하신 건가요.

■ 조선대학교를 중퇴한 뒤 25살에 영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긴 했는데, 그때만해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살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도 있어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되려고 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을 2년 앞두고 새로 만들어진 다큐세미나에 흥미가 생겨서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들어서게 된 것은 영화학교 입학전에 일본인 모리겐치티 감독이 1981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세계의 사람들에게: 조선인 피폭자의 기록(世界の人へ: 朝鮮人被爆者の記録)」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영화학교 졸업작품의 테마와 소재를 토론하는 세미나에서 한 일본인 학생이 요시무라 아키라 작가가 쓴 「간토지진」을 읽었다고 하면서 '조선인학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없을까'라고 가볍게 말을 꺼냈는데, 누구도 선뜻 답을 하지 않았어요. 졸업작품 제작기간이 짧았고, 무엇보다 당시 기준으로 59년전에 발생한 조선인학살을 문학작품도 아닌 다큐멘터리로 과연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던 거죠.

아라카와 방수로 일대 발굴 현장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아라카와 방수로 일대 발굴 현장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중 그해 8월 TV뉴스를 통해 59년전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유해 발굴을 위한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도쿄 아라카와 방수로의 하천부지 일대에서 첫 시험 발굴을 한다는 보도를 보게 되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죠. 그곳은 다름 아니라 제가 6년간이나 다닌 조선학교로 가는 등교길이었거든요. 그때까지만해도 졸업작품팀이 만들어지지는 않아서 친한 학생 5명이 비디오카메라를 빌려서 발굴장소로 뛰어갔어요. 

유해 발굴을 제안한 분은 아라카와 방수로가 지나는 아다치구의 소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기누타유키 선생님이었어요. 작은 체구의 그 여선생님은 평소 알고 지내는 노동조합 간부와 상의하고 발굴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한사람 한사람 설득하면서 시민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기누타야키 선생님은 큰 비가 올때마다 발생하는 아라카와강 범람을 막기 위해 1911년 첫삽을 뜬 아라카와 간척공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대규모 공사에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는데 간토대지진 이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혹시 학살당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아라카와강 인근에서 군대와 자경단이 저지른 학살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기누타야키 선생님에게 지금도 학살 희생자들의 '유체'(遺体, 시신)가 매몰된 채 그대로 있지 않겠느냐며, 동네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서 어떡하든 유골을 찾아 위령을 해드려야 한다고 당부했어요    


□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한 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어떤 것이었을까요. 

■ 제가 중학생때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의 사촌오빠, 즉 외당숙이 간토대지진 당시 아라카와 근처 무코지마섬에 있는 한 술집의 '오시이레'(押入おしいれ, 일본주택의 붙박이장)에 숨어 있다 살아남은 일화인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때만해도 학살의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라카와 강 옆에 있는 옛 요츠기다리 제방 아래에서 당시 학살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유체를 석유로 화장한 뒤 매장했다고 증언한 일본 노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발굴 장소를 검토했지만 59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천 부지의 모습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어요. 결국 정확한 장소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굴을 시작했죠.

아라카와 하천부지에서 한 조선인 희생자 발굴작업은 처음에는 대형 포크레인으로 구멍을 뚫은 다음 청년들이 그 안에 내려가서 손과 삽으로 퍼 내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하루에 구덩이를 하나 파서 살펴보고는 다시 원상회복시킨 뒤 또 다른 구덩이를 파는 식으로 3일간 3개의 구덩이를 번갈아 팠다 덮었다하는데, TV보도를 보고 여기 저기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어요. 구덩이 주위에 선 노인들은 흥분한 어조로 '군대가 조선인을 묶어서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는 등의 증언을 쏟아내는 등 난리도 아니었죠. 그렇지만 발굴은 3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조사도 하지 못한 채 일단 끝났습니다.

졸업작품으로 내기 위해 시작한 촬영도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제출 마감에 쫓겨 편집에 들어갔습니다. 제작에 참가한 학생들과 작품구성에 대해 의논하면서 여러 번  편집을 바꾸었지만 만족한 작품으로 마무리할 수가 없었죠. 3년의 학업을 끝낸 우리가 졸업을 앞두고 뭔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졸업작품으로 내도 좋은지 고민했습니다. 처음엔 결정적 증거,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 간토 조선인학살 이후 6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일본 정부의 조선인학살 부정, 학술 연구 부족은 물론이고 학살 가해자의 증언거부, 가해자와 피해자의 서로 다른 기억 등 시대적 제약과 접근의 한계, 아쉬움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특별히 도움받은 사람,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 「감춰진 손톱자국」을 완성하는데 제일 큰 애로는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발굴 이후 아라카와 지역과 일본 사회에서는 과연 1923년에 조선인학살이 있었던가? 아라카와에서 조선인이 300명 이상 학살당하고 유골이 매장된 것이 사실인가? 등 목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우리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도 앞서 발굴 현장에서 흥분하며 증언한 일부 노인들은 촬영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일본인 7명과 조선인 3명으로 구성된 제작팀내에 조선인학살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감독을 하는 제 자신도 간토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고 영화제작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도 미숙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학살의 가해자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를 영화에 등장시켜야 하는데, 59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속에 묻힌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어요.

감춰진 발톱 촬영 당시의 오충공 감독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감춰진 발톱 촬영 당시의 오충공 감독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그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재일 조선인으로부터 1923년 당시 요츠기다리 제방위에서 폭행당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피해자가 생존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알려준대로 조인승 할아버지(경남 거창 출신, 당시 82세)의 주소를 들고 집으로 달려갔죠.

82세의 고령이었지만 기억이 분명하고 아라카와 발굴 소식을 TV방송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발굴 마지막 날 조인승 할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르신, 발굴 장소에 저와 함께 한번 나갈 수 없을까요?'

할아버지는 발굴현장을 찍는 TV화면을 보면서 '안가겠다. 거기서 뭘하는지...유골이 안나오지 않나'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할아버지는 '그 날을 회상하기 싫다'는 생각이었어요. 본인이 요츠기다리 제방에서 일본 소방대로부터 '도비'(화재현장에서 장애물을 해체할 때 쓰는 막대기에 달린 낫)로 다리를 찔리며 폭행당한 일, 함께 아라카와로 피난 온 조선인 3명이 눈앞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한 걸 목격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싫었던 거죠. 그날 할아버지의 사촌형도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희가 영화를 완성하는데 증언이 꼭 필요하다고 간곡히 요청하니까, 마지막 구덩이를 다시 메꾸기 2시간 전에 우리 차로 발굴장소로 이동해 부상당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한걸음 한걸음 구덩이 옆으로 다가서서는 한참동안 말없이 그 안을 쳐다 보셨습니다.

저희는 이미 영화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인승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전문 촬영감독을 영입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학생 몇명은 1년 반동안 구직 활동도 포기하고 영화 완성을 위해 한몸처럼 나섰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 온 82년간의 인생을 통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쓰라림과 억울함을 같이 호흡하는 기분으로 배우는 나날이었죠. 제작팀도 하루 하루 작업이 거듭되면서 갈등이 풀리고 민족의 차이를 넘는 우정을 쌓아나가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아쉬운 점도 있었겠습니다.

■ 사실 40년동안 영화를 못찍었던 시절이 있었죠. 돈 벌어가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제가 2017년 부산에서 유족회를 만들었는데, 왜 그랬냐하면 영화를 찍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어요. 여기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곳을 찾아가서 도움도 청하곤 했어요. 여러 말 하기는 어려운데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조선(한국)은 너무 날카로웠어요.

경제적인 문제, 선입견과 이념의 장벽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죠. 영화로만 보면 초기 작품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죠.

19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필름을 썼는데, 이건 한번 걸면 3분밖에 못찍었어요. 두번째 작품(불하된 조선인)에는 조선인 살해에 가담한 일본인 노인이 '죽기전에 마시고 싶은 만큼 술을 사주었다. (조선인이) 원하는대로 총으로 죽이기 위해 들고 있던 칼 대신 돈을 들여서 총을 빌려서는...좋은 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어...'라는 증언이 나옵니다.

자신의 죄행을 감추고 나는 양심적으로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슬쩍 덮어서 했던 말인데, 죽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기억을 해야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마음은 알지만 그대로 그냥 기록을 하겠다는 마음이 컸죠.

첫번째 영화(감춰진 발톱)에서 조인승 할아버지가 9월 초하루부터 일본의 조선인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확인해주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학살을 보았다'고만 했던 가해자가 '학살에 가담했다'고 고백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9월 5일 이후에는 조선인을 보호한다고 선전하면서 치바현(千葉縣) 나라시노(習志野)의 수용소에 가두었는데, 전쟁포로로 다룬 조선인들(2만 3,715명-강덕상 『현대사자료 6권』)을 민간 자경단에 '불하'해서 그들이 죽이도록 했어요.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물었더니, '칼 대신 총으로 한 번에 죽고 싶다'고 했다...총을 구해서 조선인을 줄지어 세워 두고 3명을 한 명씩 총으로 쐈다"는 증언으로 그같은 사실이 확인된거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니까 중간에 다른 질문을 해서 이걸 놓치면 안되었으니까. 자신이 조선인을 죽였다는 일본인의 증언이 책으로는 있었지만 영상으로는 카메라에 처음 담게 된 것이거든요. 그때 32살이었는데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찍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만, 그렇다면 죽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 무슨일을 하다 왔는지, 가정은 있었는지. 보통 사람의 대화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때는 왜 그런 걸 묻지 못했는지 반성하고 있어요. 그때는 아마튜어였어요.

강덕상, "내가 너한테 반했다"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 한 오충공 감독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 한 오충공 감독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강덕상 선생님도 그때 처음 만나신거죠.

■ 네. 또 한 분, 「감춰진 손톱자국」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기록영화를 제작하면서 잊을 수 없는 저의 은인이자 인생의 스승인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입니다. 강 선생님은 제가 제작과 편집의 방향을 못잡고 헤맬때 저의 어두운 역사탐구에 바른 눈을 열어준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책으로만 알고 있던 강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해서 자택으로 찾아간 것이 27살때입니다. 영화에 필요한 학살사진과 자경단의 실체를 보고 싶어하는 저의 조급한 마음을 감지하셨는지 강 선생님은 저에게 '어떤 영화를 만들고싶은가?  지금까지 간토지진에 대해 어떤 책과 자료를 읽고왔는가? 도쿄의 도서관과 공문서관에 가본 적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학을 중퇴했다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긴장감과 교양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이 들어서 똑똑한 답을 하지 못하고 선생님 댁에서 나왔습니다. 학살 현장 사진을 하루 빨리 보고 싶었던 제작팀은 '감독이 강 선생님 댁까지 찾아갔다가 사진 한장 보질 못하고 돌아왔다'고 모두 한숨을 쉬었죠.

하지만 선생님이 저에게 가르쳐주신 건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1982년 당시만 해도 일본인 학자와 출판사가 낸 조선인학살 관련 연구서가 많지 않았어요. 더러 있더라도 간토지진의  자연재해 피해나 도쿄 일대에서 자경단이 자행한 일본 사회주의자 학살사건(가메이도사건),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 일가가 육군 헌병대에 살해된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 등을 조선인 학살과 나란히 다룬 책이 주류였습니다.

선생님은 영화 제작 전에 제가 조선인학살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갖고, 자기 발로 도서관과 도쿄도 공문서관, 국립공문서관에 가서 조선인학살에 관한 일본군과 경찰의 문서와 동향, 자경단의 기록을 찾아보도록 하셨던 거죠. 훗날 생각해보아도 선생님의 그 '엄격한 진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생님은 간토대지진 당시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있었던 목격자와 증인, 즉 가해자와 피해자를 영화에 출연시키고 남아있는 지도와 자료를 함께 사용하면 좋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 영상과 기록문서를 담아 찍으면 어떤가 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고생끝에 목격자를 찾아도 카메라 앞에서는 '조선인을 죽였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학살 장면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라카와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입이 무거웠어요. 반면 세월이 지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 간 노인들중에는 당시 학살 장면을 그림 그리듯이 증언하는 사람도 있어 촬영이 잘됐던 일도 있습니다.

그 노인들이 보시기에 손주뻘인 저희가 노인들이 다니는 목욕탕에 열심히 쫓아다니고 어떤 날엔 노인들이 하는 게이트볼 경기장에 들어와서 함께 운동도 하니까 당신이 목격한 학살장면만은 이야기해주자는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저도 20대 젊은이였으니까요. 

영화제작이 어려움에 닥칠때마다 일본인 노인들의 증언과 강덕상 선생님의 연구, 무수히 수집한 자료 덕분에 일본 정부가 학살의 흔적을 숨기고  희생자 조사를 방해하고 심지어는 조선인의 유체와 유해을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던 은폐의 단편을 하나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1923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배는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9월 15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 [통일뉴스 자료사진]
9월 15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 [통일뉴스 자료사진]

오충공 감독은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가해자인 일본인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인승씨가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지켜 보던 가해 일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고 했다.

유언비어만 믿고 왜 조선사람을 그렇게 죽였느냐고 물으면, 가해자들은 "머릿속에 '삐쩍'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조선 정벌, 조선인 토벌'이라는 말이 횡행했었다"고 당시의 광기어린 풍경을 기억했다. 결국 국가가 개인을 집단학살의 가해자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 2년전 별세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은 오 감독님의 영상작업에 평생의 길잡이이자 동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랜 세월 교유한 강덕상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제가 처음부터 강덕상 선생님을 만나서 영화를 만든게 아니고 영화를 만들다가 고민이 생겨서 만난 사람이 그 분이었어요. 강선생님은 영화감독도 아니고 역사학자이잖아요.

강 선생이 저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나는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로서 책을 많이 썼다. 하지만 책 5권, 10권을 쓰는 것 보다 네가 만든 영화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이 있었다. 너는 계속 간토대지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영광스러운 말씀인데 너무 어깨가 무겁습니다, 무슨 유명한 영화사도 아니고, 귀도 잘 안들리는데다가 능력도 부족합니다"라고 짐짓 딴청을 부리기도 했지요.

2011년 동일본지진때는 집이 무너지는 큰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내가 네 결혼식 주례까지 했는데, 너는 그동안 영화를 안만들었다"는 질책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엄격한 분이었지만 그만큼 저와 제가 하는 영화작업에 기대를 많이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한마디로 감독님에게 강덕상은 어떤 존재입니까. 영화 만드는데 자문도 하시고 주례까지 해주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만났잖아요.

■ (얼굴을 감싸쥐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갈린 목소리로) 두번째 아버지같은 분이지요.
 
돌아가시기 2년전인가,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을 많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영화를 많이 못만들었다는 자책도 있었고...미처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영화해설을 써주신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이 교수(강덕상 선생의 히토츠바시 대학 제자, 강덕상자료센터 운영위원) 앞에서 말하기 거북한대 강 선생님이 간혹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너한테 반했다"구요.

주제를 가지고 이런 어려운 영화를 만든 젊은이가 있었다고 격려하느라고 하신 말씀이었겠지요. 마음에 안드신 것도 있었겠지만 그저 반했다고 말씀하신 거겠죠. 너무 고마운 말씀이고 영광스러운 마음이에요. 내가 영화를 많이 만들지 못할수록 강 선생님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

마지막 영화는 강 선생님의 그 말씀때문에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네 편의 간토 영화를 만들면서 왜 다른 영화는 만들지 않는지, 밝은 영화는 왜 만들지 않았느냐고요.

그런데 나한테는 테마가 너무 무거웠어요. 아니 테마가 무거운 것보다도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거에요. 알지 않아요. 그런 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요. 드라마로 못만들잖아요.

강 선생님은 '논다'고 혼을 내지 '쉰다'고 다정하게 말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렇게 일에 엄격하신 분이 내 앞에서 일본말로 '너한테 반했다'고 그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한동안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꼈다.

□ 분위기를 좀 바꿔서 강선생님이 주례 봐주신 이야기 좀 해 주시죠.

■ 재미난 이야기인데, 제가 건방지게 강덕상 선생님에게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첫번째 작품과 두번째 작품 사이에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죠. 그때 나이가 33살이었습니다. 

마누라는 역사도 모르고 내가 영화감독인지도 몰랐어요. 일본에 온지 5~6년밖에 안되는 아가씨였거든. 나를 그저 밥 먹으로 오는 손님인줄만 알았지. 어머니(장모)는 제주도분이었는데 거기서 무슨 사정이 있어서 곱창집을 하고 있었어요. 첫번째 영화를 만들고 두번째 영화를 준비할 때 제 사무실이 그 곱창전골집  바로 옆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그 집에 당시 여자친구하고 밥먹으로 갔다가 거기서 알게된 거에요. 

강 선생님은 대학 교수님이니까 제자가 많이 있는데, 나는 그 제자도 아니잖아요. 우리 마누라는 제주도에서 건너 와서 엄마 일을 돕고 있던 그저 이쁜 아가씨일 뿐이었고. 23살때였거든. 뽀뽀도 안한 여자를 강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는데, 어디 가냐고 자꾸 묻는거에요. 강 선생님은 아가씨가 이쁘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그 많은 제자들 주례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고 난처해 하시다가 결국 해주시긴 했어요. 나와의 인연이란 것도 어릴때부터 잘 아는 사이도 아니라 그저 영화를 좀 도와주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런데 주례로서 신랑 신부 소개부터 해야 할 분이 계속 영화해설만 했어요. 하객들을 배려해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주례사를 하는데 너무 오래하니까 제주도에서 온 마누라 집안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 결혼식에 야마다 쇼지라는 간토대지진 연구자가 내빈으로 참석하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도 30분 이상 영화 애기를 하는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집 친척들이 또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렇게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왼쪽부터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포스터, 「93년의 침묵」(2016) 스틸컷 [통일뉴스 자료사진]
왼쪽부터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포스터, 「93년의 침묵」(2016) 스틸컷 [통일뉴스 자료사진]

□ 2023년 9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이하면서 남다른 감회가 있을텐데, 먼저 일본 정부의 태도,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움직임,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감독님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 고 아베수상이 2016년 무렵에 '아름다운 일본국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침략에 사죄를 해야한다는 진보세력과  역사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올해 100주기 조선인추도제까지 7년간 연속해서 추도사를 보내는 일을 거절했습니다. 고이케 도지사는 도쿄올림픽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선언했지만 막상 자신이 딛고 서있는 땅 위에 서 있는 조선인학살 추도비 앞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급기야 10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는 또 다시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극구 부정하고 있는데,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종주국인 일본에서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포함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이며, 최근에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식민지 종주국이라고 하더라도 미증유의 지진 상황에서 이민족인 조선인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무참하게 살해한 역사를 없었던 일로 은폐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간토 조선인학살 100주기인 지난 9월 1일 차별주의 단체인 '소요카제'는 도쿄 도립 요코아미초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 추도비 앞에서 '진실의 위령제'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인 피해자들은 실제 비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변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등 더욱 교묘하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또 다른 학살을 시도했습니다.

학살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조선인의 넋을 기리는 신성한 추도비 앞에서 사자(死者)를 모욕하고 추도제를 더럽히는 '소요카제'의 집회를 도쿄도는 처음부터 허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기동대 경찰과 도쿄도 공원과의 직원들이 소요카제의 가짜 위령제를 보호하듯이 바리게이트로 벽을 만든 그 앞에서 차별과 역사수정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 한국의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단결된 힘으로 조선인 추도비를 지켰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상황입니다.


□ 올해 간토대지진 학살 희생자 추도제에서는 조선인 희생자와 함께 중국인 희생자 문제를 공론화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배경이 궁금하구요. 이에 대한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중국인 유족은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자가 약 700명인데, 명단도 다 있습니다. 지금 증손자까지 약 2,000명에서 2,500명이 있어요. 해마다 일본에서 추도제가 있을 때 약 20명 정도가 일본에 옵니다.

그 분들의 요구는 여러가지인데, 첫번째는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가 일본 외무성에 희생자 명단을 내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인정을 했어요. 명부도 남아있구요. 일본정부는 그때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희생자 1명에 20만엔을 지급한다는 도장을 찍었습니다.지금도 그 계약서가 남아있는데 일본 정부는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단된 거에요.

그래서 중국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서 우선 20만엔을 갚으라,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중국인 희생자도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유골이나 묘비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인 희생자는 강덕상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최소 6,600명 이상입니다. 더 많은지 모릅니다. 희생자 명단이 전혀 없는 건 아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일본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6,661명의 명단도 있습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에도 발표가 나왔는데,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거죠.

중국인 희생자들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한국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정부에 법적인 주장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학살의 증거, 명단이 있어야지요. 유골과 유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어디에 했는가? 일본 정부에 따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일본에는 학살 희생자를 기리는 20여군데의 시민단체와 총련, 민단이 만든 모임이 있는데 어디나 할 것 없이 유골이 없습니다. 중국인 유가족과 한국인 유가족이 같이 기자회견하면 서로 형편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따로 따로 하고 있어요.

올해 8월 31일에 한국에서 두분만 왔지만 그래도 유족을 대표해서 기자회견을 한 겁니다. 그때 함께 왔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측 변호사가 한국인 유족을 위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한국정부는 올해 100주기까지 진상규명과 추도를 위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한국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 1923년 9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무대신 조소앙 명의로 일본 총리 앞으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해 항의공문을 발송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 100년동안 역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과 학살 피해자의 구제를 한번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기나라 국민, 해외공민의 죽음에 애도의 말도 없었고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 앞에 100년동안 화환 한번 보내지 않았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를 위한 조사 한마디 없고 유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와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시신도 없이 만들어 놓은 헛묘앞에서 매년 음력 7월 20일, 21일(간토대지진 당시 9월 1, 2일의 음력 날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조선인 희생자 유족의 백년 한을 하루 빨리 풀어주어야 합니다. 


□ 다큐멘터리 제작 외에도 2017년부터 한국내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는데에도 적극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현황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세편의 간토학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거나 명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났습니다. 2017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를 만들었고 올해 100주기 추도제에는 일본으로 유족들을 모셔가기도 했습니다. 이번 방문(10.16)도 마산과 함양의 유족회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유족회가 나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희생자 명부와 유골을 비롯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들은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사람'으로서 '살아있던'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아파하고 이같은 학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100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만든 영화가 희생자의 넋을기리고 두번 다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사이에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굳은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서승 선생은 "오 감독이 지금 하고 있는 유족 모임 구성을 혼자서 하는 것 보니까 참 벅찬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유족모임과 함께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이 제대로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안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 이후 일본인의 잠재의식속에 가려져있던 조선인에 대한 열등감이 분출한 사건'이라는 제대로 된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일본에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추도회 실행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오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서승 선생은 오 감독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본 술집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같은 사람을 붙잡고 집요하게 딱 작품을 만들었잖아. 그거 대단한 거에요. 그런 작품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라고 그를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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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 4개 크기 오름에 불 놓는 들불축제가 세계의 자랑거리?

[제주의 녹색분칠] '불 없는 들불축제'라고? 기후위기 역행하는 들불축제 폐지해야

부순정 제주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기사입력 2023.10.27. 07:59:16

 

"제주에선 오름 하나를 통째로 태워야 봄이 온다"는 풍문이 있다. 제주들불축제를 소개하는 블로그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제주도민 입장에서는 참 무섭고 마뜩잖은 말이다. 제주의 봄은 음력 2월 초하루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과 함께 온다. 영등할망은 2월1일에 제주에 와서 보름 동안 온 섬을 돌아다니며 땅과 바다에 생명의 씨를 뿌리며 봄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떠난다. 그래서 영등할망은 '바람의 신'이면서 '봄의 신'이다.

 

그런데 생명들의 터전인 오름에 석유를 뿌리고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는 들불축제가 제주의 봄의 전령사로 둔갑하다니!! 영등할망이 뿌린 생명의 씨앗을 모두 학살하는 일이 제주의 전통으로 각인되다니!!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아니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제주들불축제 ⓒ제주시청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민선 지방정부가 출범한 이후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는 축제와 이벤트가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런 문화사업화 전략은 중앙정부가 '5대 국정지표'로 문화관광의 진흥을 설정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고 1997년 제주에서도 북제주군(1946년 8월 1일부터 2006년 6월 30일까지 존재했던 제주특별자치도의 폐지된 자치군)에서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를 시작한다. 구좌면, 추자면, 한림면, 조천면, 애월면의 군민들이 모두 모여 정겹게 즐겼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는 그러나 특별자치도 출범으로 북제주군이 폐지되면서 제주시가 주최하게 되었고 2013년부터는 3월 경칩이 낀 주말로 개최 시기를 옮겨 '제주들불축제'로 이름을 바꾸며 몸집을 키워갔다.

 

 

'제주의 전통 목축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들불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유망축제(2006~2014), 우수축제(2015~2018), 최우수축제(2019), 문화관광축제(2020~2021) 등 각종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집행된 예산 규모도 지난 10년간 새별오름 일대에 조성한 광장,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 비용 약 100억 원은 논외로 치고도, 단 4일의 축제를 위해 2023년 기준 16억 9천만 원의 예산을 집행하며 매년 30만 명이 찾는 제주의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대표축제라는 화려한 타이틀 이면에 들불축제는 환경훼손, 기후위기 역행, 오름생태계 파괴, 산불위험 등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 왔다. 특히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2022년과 2023년에는 전국적인 산불재난경보 발령으로 최근 4년 동안 행사가 취소되거나 변경되며 그 지속가능성마저 위태로워졌다. 2023년 들불축제는 제주시가 첫날 행사를 치르고 나서야 오름불놓기와 달집태우기 등 불 관련 프로그램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리며 지역사회 혼란, 관광이미지 하락, 예산 낭비, 행정력 낭비 등의 논란이 증폭되기에 이른다 

 

기후위기를 역행하는 반생태적. 반환경적 들불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제주녹색당은 지난 4월 '제주특별자치도 숙의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주민참여 기본조례'에 따라 19세 이상 제주도민 749명의 서명을 받아 숙의형 정책개발을 청구했다. 들불축제의 상징성과 논쟁성을 고려한다면, 숙의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들불축제 존폐에 대해 제주도민들이 직접 참여해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리고 지난 9월 19일, 200명의 도민참여단이 참여하는 '제주들불축제 도민 숙의형 원탁회의'가 열렸고, 10월 11일 제주시장은 원탁회의 결과에 따른 권고안을 받아들여 "탄소배출, 산불, 생명체 훼손 우려가 있는 오름불놓기는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제주의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축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기획부터 축제 운영까지 시민 주도 축제로 탈바꿈시키고, 새로운 콘텐츠 개발 등을 위해 2024년 들불축제는 개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들불축제가 열리는 애월읍 봉성리 일대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도의원은 '원탁회의에서 결정이 나더라도 제주도가 주도하는 사업이므로 제주시장은 결정 권한이 없다, 예산을 심의하는 도의회가 결정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주장하며 제주도의회가 만든 조례를 도의원 스스로가 무용지물로 만드는 자기 모순적 망언을 이어가고 있다. 10월 제주도의회 임시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이른바 '불 없는 들불축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지구가 불타고 있는 마당에 기름과 화약을 사용해 축구장 4개 크기의 오름에 불을 놓아 불구경하라는 들불축제는 이제 세계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웃음거리' (2023.3.8. 제주녹색당 논평)가 될 것임이 분명함에도 여전히 논란인 이유는 무엇일까? 들불축제 원탁회의에서 오고 간 주장들을 들여다보며 들불축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해보려고 한다. 

 

1. 환경훼손 문제보다 지역경제활성화가 더 중요하다? 

 

2000년 새별오름으로 축제장소가 고정된 이후 새별오름의 환경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이어졌다. 지속적인 불놓기로 인해 다년생 식물이 사라지며 식생이 단순화되고 토양건조 및 토양침식을 가속화시켜 지표면의 사막화도 발생한다(2009.'새별오름의 초지화입에 의한 색생변화 연구', 제주대학교 생물학과)는 조사뿐만 아니라 특히 화약 등의 무차별 살포로 토양오염이 심각하다(2013,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제주지역대학 농학과)는 결과는 땅속으로 물이 잘 스미는 제주 화산지질 특성상 토양오염이 지하수오염과 바다오염으로 이어진다는 문제를 진단하며 통합적인 조사가 시급함을 경고했다. 

 

그러나 제주시는 지난 20여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새별오름훼손, 생태계파괴, 토양오염, 지하수오염, 바다오염, 발암물질로 인한 인체 영향 등에 대한 행정조사와 평가를 시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10년 동안 새별오름 일대에서 30건 이상의 공사를 시행하면서 공사에 대한 소규모환경영향평가를 수차례 회피해 제주도 감사위원회의 행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행정이 법을 위반하고 환경파괴를 눈감으며 축제는 지속되었고 급기야 오직 '불'을 놓기 위해 놀라운 일들을 벌이게 된다. 

 

정월대보름 시기에 진행되던 초기 들불축제는 강풍과 폭설로 불놓기가 연기되는 경우가 잦았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해 2013년부터 3월 이후 경칩이 낀 주말로 개최 시기를 옮겼지만 그 이후도 불놓기가 순조롭진 않았다. 2016년 비 날씨가 예보되었으나 들불축제는 강행되었고 안개와 폭우, 강풍으로 불이 붙지 않자 석유를 쏟아부어 오름에 불을 놓았다. 이를 지켜보는 도민들은 '폭우와 강한 바람으로 연기만 더해갔고 듬성듬성 타다만 새별오름을 지켜보는 것이 씁쓸했다'고 전한다. 석유 사용은 축제 시작되던 해부터 이어지던 것이었고 불똥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을 놓는 주변에 락스를 탄 물을 농약 뿌리듯이 뿌렸댔다고도 한다. 

 

석유사용 비판이 일자 화약과 폭죽을 사용해 불을 놓기 시작하는데 2019년에는 화약 2,650kg을 사용했고, 코로나가 창궐했던 2021년에는 비대면으로 차량 400대만 출입시켜 5,600개가 넘는 폭죽과 1,000kg의 화약을 사용해 오름에 불을 질렀다. 폭죽과 화약을 사용해 오름에 불을 놓았으니 그 잔류물도 오름에 그대로 남았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그 잔류물들이 바람에 날려 주변 식생과 탐방객들에게까지 날아간다. 날리는 재를 맞으며 관광객들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오름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도 진정 제주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지난 20년 동안 식생조사, 생태계조사, 토양오염조사, 탐방객에 대한 피해조사, 지하수오염 및 바다오염 조사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별오름 환경회복을 위해 오름휴식년제 시행해달라는 요청도 이어졌지만 제주시 관광진흥과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들불축제를 진행해야 하므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 번 훼손된 환경을 회복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돈이 들까? 아니, 회복이 가능할까? 지난 20년 오름에 불을 지른 대가를 우리는 어떻게 돌려받게 될까?

 

2. 들불축제는 제주의 전통 목축문화를 계승? 

 

들불축제 홈페이지에 따르면 '해충구제를 위해 소나 말을 풀어놓던 방목지에 불을 놓는 제주의 방애불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한다. 제주의 목축문화인 방애(들불)는 중간간 지대 목축민들이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 유충구제 및 잔초제거를 위해 방목지에 방화선을 구축하여 불을 놓던 자연친화적 생태농법이다.

 

그러나 들불축제는 방애불의 자연친화적인 정신은 내던진 채 석유를 쏟아붓고 화약을 터뜨려 인위적으로 불을 지르는 반환경적, 반생태적 방법으로 진행되면서 '방애불 전통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에 더해 화산섬 제주 생성의 근원이 불에서 유래했다며 밑도 끝도 없이 올림픽 성화 채화를 흉내 내고 삼성혈에서 고위공직자들이 채화한 불씨를 제주시청까지 봉송하며 전통을 윤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제주의 전통 목축문화를 계승하는 것이 목표 라면 새별오름을 통째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목축이 행해지던 마을목장을 개발의 광풍에서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 먼저이고 자연친화적인 제주도민들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3. 지역민들이 참여하고 즐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워가는 축제?

들불축제는 1997년 1회 개최 당시 1만3000명이 찾았던 소규모 행사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애월읍과 구좌읍 중산간 마을 공동목장을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치러졌고 당시는 북제주군의 군민 단합대회 느낌이 강했다. 행사가 끝나면 큰 구덩이를 파서 쓰레기들을 한 번에 묻어버렸다는 이야기가 흠으로 전해지지만 말이다. 

 

▲제1회 정월대보름 들불축제 ⓒ들불축제 홈페이지

 

그러나 몸집을 키워 제주시가 개최한 후로는 제주도의회에서조차 지역주민이 즐기는 축제가 아닌 동원된 축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제주시 전 부서가 일제히 동원되어 축제 부스를 운영하는 관주도 축제'(2015년 제주도의회 김용범 의원), '들불축제 찾아온 39만 명 대부분 각 읍면동에서 동원된 도민들이고 전국에서 읍면동별로 천막을 친 곳은 들불축제 밖에 없다'(2018년 제주도의회 안창남 의원) 

 

그리고 '제주시가 들불축제 평가에서 입도관광객 4만 4천명인데 축제엔 8만4000명으로 뻥튀기하고 있다'(2012년 제주도의회 강경식 의원)는 비판도 꾸준히 이어져 '들불축제가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유망축제, 한국축제 50선에 선정될 만큼 제주시의 대표축제이지만 결국은 대다수 도민이 참여하는 도민축제에 불과하다'(2013년 제주도의회 오충진 의원)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전체 문화관광축제의 경우 관광객의 비율이 70% 정도라면 들불축제는 관광객 비율이 20% 남짓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김의근, 지역축제의 특성화 발전방안 연구-제주들불축제를 중심으로, 제주관광학연구 제21집, 2018. p35) 

 

매년 16억, 17억 원의 돈잔치를 벌이는데 관광객도 오지 않고 지역주민들조차 즐기지 못한다면 들불축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축제인지 묻고 싶다. 

 

4. 제주도민의 역사를 지워버린 들불축제, 새별오름은 고려시대 최영 장군의 전적지? 

 

제주들불축제가 10돌을 맞은 2006년에는 최영 장군이 목호들을 무찔렀던 새별오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추자도 최영장군 사당에서 성화 채화를 한 뒤 제주도 일원을 돌며 봉송행사를 하고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불을 점화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이는 권력을 가진 승자의 입장에서만 역사를 기억하는 과오이고, 역사에서 제주도민을 지워버리는 만행이다. 당시 도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안다면 감히 행정이 나서 새별오름을 전적지로 추켜세울 수도, 폭죽을 쏘아 올리며 흥겨운 축제를 열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는 1153년 고려에 편입된 후 150년간 지배를 받았고, 이후 83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았다. 원은 제주에 1500명 가량의 군사를 주둔시켰고 제주 목마장은 원 제국의 14개 국립 목장 중 하나로 경영되며 제주 사람들은 주둔군의 한 형태인 목호(말 키우는 오랑캐)와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원나라가 저물고 명나라가 고려에 말 2천 필을 요구하자 목호들이 이를 거부하며 결국 전쟁은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살던 제주 사람들의 숫자에 가까운 2만 5천여 고려군은 '몽골인의 피가 섞인 자, 변발을 한 자, 목호를 도운 자'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토벌을 자행했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과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무고한 많은 제주 사람들이 죽어갔다. 

 

제주 도민의 입장에서 '목호들을 무찌른 전적지'로 새별오름을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애통하고 한스러운 일인지 행정은 진정 몰랐던 것일까? 게다가 새별오름과 그 주변 노꼬메오름, 유수암 일대는 4.3 당시 소개작전으로 모두 초토화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위령비는 못 세울망정 폭죽을 터뜨리는 축제를 여는 이 역사적 만행을 이제 그만하자는 것이 들불축제 폐지의 또다른 이유이다. 

 

새별오름이 다시 별처럼 빛나기를 

 

▲2021 불놓기 후 새별오름 ⓒ 제주들불축제 홈페이지

 

새별오름은 '하늘에서 제일 반짝이는 금성처럼 빛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행사가 끝나면 새까맣게 타버린 새별오름을 바라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하던 원탁회의 참가가(50대 남성)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내건 "다함께 미래로, 빛나는 제주"라는 슬로건에서 별처럼 빛나야 할 새별오름은 제외되어 있다. 앞으로 도민들이 참여해 제주의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축제를 찾아가는 과정에 '별처럼 빛나야 할 새별오름'을 다시 복원하는 방법도 꼭 찾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원탁회의 권고안대로 '제주의 생태, 문화적 가치를 지키며 시민들이 참여해 만드는 축제'를 만드는 첫걸음은 특정 세대가 과대 대표된 도민참여단 구성, 운영위원회 운영 등 들불축제 원탁회의 과정을 점검하고 검증하는 일임을 제주도정은 다시 한번 새겨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제주투데이, 생태적지혜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같이 실렸습니다. 

 

▲제주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부순정 ⓒ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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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러니 검찰이 ‘윤 대통령 보위 수사’ 비판 받는 것”

  • 기자명 윤유경 기자 
  •  
  •  입력 2023.10.27 07:33
  •  
  •  수정 2023.10.27 07:36
  •  
  •  댓글 0

[아침신문 솎아보기] 검찰의 기자 압수수색, 한겨레·경향 1면

박근혜 만난 윤석열, 중앙일보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동반자”

동아일보 대기자, 인요한 혁신위에 “김기현 퇴진이 혁신 출발”

검찰이 지난 26일 윤석열 대통령의 검사 시절 부실수사 의혹을 보도한 경향신문 전·현직 기자와 인터넷 매체 뉴스버스 기자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 경향신문은 1면에서 본지의 입장을 전했고,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에서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1면부터 2면까지 실은 본지 입장에서 “이 건과 관련한 취재 및 보도 전 과정에서 언론윤리에 저촉될만한 행위를 일체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며 “검찰이 예단에 근거해 언론사를 무리하게 수사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검찰이 져야할 것이다. 경향신문은 앞으로도 권력 감시·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한치의 소홀함도 없을 것임을 더불어 밝힌다”고 했다.

▲ 경향신문 1면 기사 갈무리.

만평에선 ‘국민은 늘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선 안돼!’라는 글을 빨간펜을 들고 ‘기자는 대통령이 늘 옳다고 믿어야(해)! 어떤 비판도 해선 안돼!’로 바꾸는 윤 대통령 모습을 그렸다. 경향신문 현직 기자 주거지 압수수색 현장 사진도 지면에 실었다.

▲ 경향신문 만평 갈무리.

▲ 경향신문 사진 갈무리.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 <‘윤석열 검증보도’ 또 압수수색한 검찰>에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검증 보도를 문제 삼아 검찰이 언론인 압수수색을 이어가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기사 <‘의혹보도’를 가짜뉴스 규정…정권 비판언론 잇단 정조준>에선 “‘권력의 입맛’에 따르는 ‘정치 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며 “특히 검찰이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없는 명예훼손 혐의인데도 직접 수사를 확대하고 있어, 재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 한겨레 기사 갈무리.

윤 대통령 처가가 연루된 ‘양평 공흥지구 개발특혜 의혹’을 수사했던 검찰이 핵심 피의자인 김건희 여사 오빠에 대해 경찰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반년 가까이 청구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는 내용의 단독 보도도 이어졌다. 이로 인해 검찰이 핵심 증거물이 될 수 있는 김 여사 오빠의 휴대전화는 압수수색 대상에서 빼버렸다는 것이 핵심이다. 관련해 한겨레는 사설에서 “이러니 검찰이 ‘윤 대통령 보위 수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한겨레 기사 갈무리.

한국일보도 관련 사설을 내고 “이런 정도의 취재와 보도가 강제수사의 대상이 되는 건 언론자유에는 재앙 수준”이라며 “오로지 윤 대통령 관련 의혹을 제기한 매체만 수사받는 점도 공교롭다. 더구나 특별수사팀까지 꾸려서 기자들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행태는 전례조차 없었다. 검찰 역사와 언론 역사에서 크나큰 퇴행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 한국일보 사설 갈무리.

 

박근혜 만난 윤석열, 중앙일보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동반자”

윤 대통령이 지난 26일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제44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27일 대다수 아침신문들은 1면에 추도식에서 악수하는 윤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화답’, ‘통합’이라는 긍정적 단어로 둘의 만남을 묘사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윤 대통령이 국민 통합이 아닌 보수 통합만을 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 추도사 ‘박정희’ 8번 언급, 박근혜 ‘우리’ 7번 화답> (중앙일보 4면 머리기사)

<尹 “대통령 돼보니 박정희 위대함 느껴”>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尹, 朴 만나 “박정희 혜안-결단 배워야”…총선앞 보수결집 행보> (동아일보 6면 머리기사)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추도식에…‘변화 다짐’ 무색> (경향신문 1면 기사)

<박정희 추도식 간 윤 대통령, 변한다더니 ‘보수 결집’부터> (한겨레 1면 기사)

중앙일보는 “함께 걸으며 편안한 몸짓과 대화를 주고받는 게 연대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면서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을 동반자라 일컫는다”는 문장으로 1면 머리기사를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과 위업을 다시 새기고, 이를 발판으로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을 강조했다. 정치 양극화 속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추모와 재평가를 통해 ‘통합’ 흐름이 속도를 내고 있다고도 평가했다.

▲ 중앙일보 기사 갈무리.

▲ 조선일보 기사 갈무리.

반면, 경향신문은 “윤 대통령의 ‘차분한 변화’ 다짐 이후에도 보수 내부 통합 신호만 두드러지는 모습”이라며 “최근 민생·소통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 행보의 방점이 ‘보수 통합’에 찍히면서 ‘국민 통합’ 신호는 미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또한 “대통령 스스로 ‘내 편 챙기기’와 ‘보수 결집’에 집중하는 모습”이라며 “이날 행보는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 윤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과 대조를 이뤘다”고 비판했다.

▲ 경향신문 기사 갈무리.

김진우 정치에디터는 경향신문 칼럼 ‘에디터의 창’ <착시와 직시>에서 “(윤 대통령이) 지금도 뭘 ‘반성’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며 “협치의 시금석으로 지목됐던 제1야당 대표와의 만남은 거부하고 있다.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달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태원 참사 시민추도식은 ‘정치적 성격’이라며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 KBS 사장 내리꽂기, 언론에 대한 잇따른 압수수색 등 언론 길들이기 논란은 진행형”이라고 짚었다.

이어 “국정기조 전환 없는 태세 전환은 위기모면용 보여주기일 뿐”이라며 “일단 소나기부터 피하고, 좀 살 만해지면 다시 본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척하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한다. 얼렁뚱땅 넘어가면 국민은 다 안다”고 했다.

동아일보 대기자 “김기현 퇴진이 혁신 출발”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지난 26일 12명의 혁신위원 인선을 완료했다. 비윤석열계 인사들이 없는데다 혁신 대상에 가까운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변화·쇄신은 없었다’는 신문들의 냉혹한 평가가 이어졌다.

▲ 한겨레 기사 갈무리.

이기홍 동아일보 대기자는 ‘이기홍 칼럼’에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물러나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기자는 “김 대표가 즉각 물러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며 “책임을 져야 한다. 구청장 선거라는 일개 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라 거기서 재확인된 땅에 떨어진 여당의 위상과 중도층 이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아울러 “개혁의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직할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김 대표가 있는 한 아무리 혁신위가 개혁안을 내놓아도 당정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길 국민은 많지 않다”며 “대통령의 운신 폭을 위한 김 대표의 선제적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 동아일보 칼럼 갈무리.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당 안팎에선 ‘돌려막기 인사’란 비판도 나온다. 이대로 혁신이 제대로 추진될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며 “이제라도 혁신위의 권한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얘기하겠다고 큰소리만 치기보다 진짜 할 말을 하고, 혁신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무엇보다 당의 기득권 내려놓기를 주도하려면 혁신위원들 자신의 총선 출마 포기 선언도 필요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비윤’ 못 태운 인요한 혁신위…과반이 여성·MZ세대만 6명>에서 “윤 대통령과 당 주류인 친윤석열계에 맞서 쓴소리할 인사는 없어 혁신이 가능하겠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했다. 사설에서도 “이렇게 해서 여당이 할 말을 하고, ‘용산 출장소’란 오명을 떨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며 “독립성을 잃은 혁신위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혁신위는 ‘윤심만 보는 식물정당’이란 국민 질타를 무겁게 새겨야 한다”고 했다.

▲ 27일 아침신문 1면 갈무리.

 

 

윤유경 기자602@mediatoday.co.kr

#아침신문 솎아보기#김기현#인요한#혁신위#국민의힘#윤석열#박근혜#박정희#국민 통합#보수 통합#압수수색#기자#경향신문#뉴스버스#언론탄압#언론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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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26 08:00
  •  
  •  댓글 0
  •  
  •  

    팔레스타인 비극사 ②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6%의 땅에 살던 31%가 52%를 차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안을 제시했다. 아래 표는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유대인의 비중은 31%였다. 이에 반해 소유하거나 정착하고 있던 땅 비율은 6%에 불과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둘째, 31%의 인구가 소유한 땅이 6%였으니,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 유엔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의 52%를 분배하는 안을 제시했다. 유엔은 애당초 편파적이었다. 유엔의 분할안은 공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인근 아랍 국가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75만 명이 30%의 물을, 4만 5천 명이 70%의 물을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는 (조사 시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유대인을 이주시켜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대해 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4만 5천 명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스라엘 군대의 폭격으로 가자지구의 수도시설은 거의 파괴되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공급하는 물에 의존해야 했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가 사용하는 물의 30%을 75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공급했다. 나머지 70%의 물은 4만 5천 이스라엘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말려 죽이려’ 했다.

    분노에 차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봉기에 나섰다.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에 시작되어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의 직접적 발단 계기는 이스라엘 탱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들이박아 4명이 즉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었지만, 1967년 가자지구 점령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말려 죽이기’ 정책의 결과였다.

     

    미국, 점령지역 도로 건설에 1조 이상을 지원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평화 협상'을 중재했던 것은 미국.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 기간에도 정착촌을 늘렸다. 당시 총리였던 네타냐후(지금도 총리!)는 정착촌을 4배로 늘렸다. '평화 협상'의 중재자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를 지원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있는 모든 정착촌을 도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도로 건설에 1조 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당시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지원한 액수는 50억이었다.

    7년에 걸친 '평화 협상'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PLO가 팔레스타인 측 대표로 참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미국의 중재에 ‘고분고분한’ PLO에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50% 증가, 팔레스타인은 36% 감소

    1995년부터 1999년 사이 이스라엘의 GDP는 50% 증가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단지 10%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0개국 이상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무역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평화 협상'은 이스라엘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다.

    1993년 오슬로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봉쇄 조치는 계속되었다. 아니 정착촌 확대에서 볼 수 있듯이 더 강화되었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0억 달러 이상 손실을 보았고, 그들의 1인당 GNP는 36% 감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업률은 1995년 9월 18.5%에서 1996년 28.4%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라 1997년 유엔 보고서에 적혀있다. '평화 협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했다.

    7년의 '평화 협상' 기간 PLO가 이스라엘을 위한 “추잡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확대되었다. 외교적으로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 측의 “굴욕적인”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PLO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2006년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한다.

     

    이스라엘 정착민, 7만 5천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어

    1990년대 초반 이스라엘 정착민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합해 7만 5천 명 정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이스라엘 정착민은 급증하여 서안지구에 19만, 가자지구에 5천~7천, 동예루살렘에 19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이 거주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에도 이스라엘 정착민이 1만 7천 명 이상 거주한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 정착민이 6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충돌을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래 표는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물리적 충돌로 인한 양측 사망자 통계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2000년 서안지구의 베이드 아리에(Beit Arye) 지역의 한 마을.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대는 올리브나무 4,000그루를 제거했다. 미처 제거하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올리브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몇 안 되는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 이스라엘군이 올리브나무를 베려 하자 이를 막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

    1991년 미국은 PLO에 서한을 보내 “미국은 1967년에 점령된 영토에서 정착촌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해 왔고 앞으로도 반대할 것”이라고 확약했다. 1999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 역시 “정착촌 활동이 평화구축에 파괴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이스라엘 정착촌은 몇 배 늘어났고, 미국의 원조금은 정착촌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는 2차 인티파다의 주원인이 되었다.

    2017년 국제 앰네스티 사무총장은 “5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단순히 규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백하게 국제법을 위반하고 전쟁범죄에 해당할 행위를 하는 불법 정착촌에 자금 지원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세계가 구체적인 국제 행동을 취해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6m 높이의 분리 장벽, 65km(가자지구)와 714㎞(서안지구) 길이로 설치

    2차 인티파다는 1차 인티파다와 달리 폭력적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군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점령지역에 분리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6미터에 달하는 분리 장벽이 가자지구에 65km, 서안지구에 714km 길이로 설치되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04년 7월 분리 장벽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하고, 철거 조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 장벽을 가리키며 “일리걸”이라고 외친다. 불법(illegal)이라는 것이다. 분리 장벽을 다녀온 세계 평화 활동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옥죄는 뱀”이라고.

    ▲ 가자지구 분리장벽

     

    ▲ 서안지구 분리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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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대선 허위 보도 의혹’ 경향신문 기자 등 주거지 압수수색

검찰, ‘대선 허위 보도 의혹’ 경향신문 기자 등 주거지 압수수색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자료사진) 2022.06.03 ⓒ민중의소리
검찰이 26일 지난 대선 기간 이뤄진 ‘대장동 사건’ 관련 허위 보도 의혹과 관련해 경향신문 기자 등에 대한 강제 수사에 나섰다.

서울중앙지검 ‘대선개입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팀장 강백신 반부패수사1부장)은 이날 오전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경향신문 전·현직 기자 2명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

인터넷 매체 뉴스버스의 전직 기자 1명의 주거지도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됐다.

검찰은 이들이 2021년 10월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수사하면서 대출 브로커 조우형 씨를 봐주기 수사했다는 허위 보도를 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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