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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 참석하라”

  • 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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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26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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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 솎아보기] UN 사무총장 이스라엘에 즉각 휴전 촉구, 신문들 논조는

이태원 참사 1주기에 생존자 목소리 전하는 신문들

한겨레·경향 사설로 “전현희 표적감사 진상 밝혀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면 봉쇄와 공습이 18일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누적 사망자는 6545명을 넘어섰다. 아동 사망자만 2704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봉쇄로 인한 병원 마비로 최악의 보건위기도 닥쳤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게 아니다”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즉각 휴전을 촉구하고 나섰다.

26일 아침신문들은 1면에 이스라엘 공습으로 다친 아동과 전기·연료 봉쇄로 인해 병원 외에 불이 꺼진 가자시티 사진을 실었다. 24일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서 공습에 머리를 다친 남성이 상처 입은 아이를 안은 채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26일 아침신문

▲26일 한국일보 1면

▲26일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가자지구 내 누적 사망자가 6500명으로 늘어 15년 동안 이스라엘 공격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사망자보다 많아졌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첫 전쟁이 벌어진 2008년 이후 지난 15년 동안 발생한 팔레스타인 사망자 전체(6407명) 규모를 이번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18일 만에 뛰어넘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한 후 지난 15년 동안 가자지구와 총 4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는데 이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과 18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다. 경향신문은 가자지구 보건부를 인용해 “지상전을 앞둔 이스라엘이 공습의 수위를 계속 끌어올리면서 가자지구 사망자는 24일(704명)에 이어 이틀 연속 700명대를 넘어섰다”고 했다.

▲26일 경향신문

▲26일 경향신문

어린이 사망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규모를 넘어섰다. 경향신문은 “어린이 사망자가 2704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41%를 차지한다”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 어린이 사망자 535명을 4배 이상 뛰어넘는 규모”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진입해 시가전을 벌일 경우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망자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1면 <공허한 인류애…가자 수천명 ‘사경’> 기사에서 “이스라엘의 봉쇄 조치로 가자지구의 물과 연료가 바닥나면서 이곳의 의료 체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진은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수술을 하고 있으며 소독제가 부족해 식초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6일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가디언을 인용해 “공습으로 인한 사상자와 대피하려는 민간인으로 꽉 찬 가자지구 병원들이 자원 부족으로 기능을 멈추고 있다”고 했다. 전쟁 18일째인 이날 기준 치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 부족으로 문을 닫은 병원은 6곳이다. 가자지구 보건부 메드하트 압바스 국장은 “비상 발전기를 가동할 연료가 없어 수술실과 중환자실, 응급실이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는 “최근 가자지구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통로’를 통해 식량 등 구호 물품이 반입되면서 연료 공급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이스라엘군은 하마스가 연료를 작전상 필요한 곳에 쓴다는 이유로 불허했다”고 했다.

▲26일 한겨레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게 아니다”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24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을 논의하려고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게 아니다”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56년 동안 숨 막히는 점령에 시달려 왔다”고 했다. “하마스의 공격은 팔레스타인 국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단적 처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서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살해하고, 다치게 하고, 납치하고, 민간 표적에 로켓을 발사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며 하마스를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은 56년간 숨 막히는 점령을 당해왔다”며 “(유대인) 정착촌이 자신들 땅을 계속 집어삼키는 것을 지켜보고, 폭력을 경험하고, 경제가 억압 당하고, 쫓겨나고, 집이 파괴됐다”고 강조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하마스의 끔찍한 공격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집단 처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26일 한겨레

한겨레는 “미국 MSNBC는 바이든 대통령의 태도에 대해 민주당 안에서도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민주당의 일부 진보 성향 의원들은 그가 이스라엘에 휴전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침공 연기를 요구하고 있냐’는 기자들 질문에 “이스라엘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는 24일 이스라엘 봉쇄로 인해 연료 공급이 중단돼 구호활동이 중단될 위기라고 전한다. 이날 UNRWA 직원 3명이 사망하면서 지난 18일 간 이스라엘 공습으로 인한 UNRWA 직원 사망자는 38명이 됐다.

▲26일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또다른 기사에서 “국제사회의 초점이 하마스에 대한 타격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무차별 공습에 따른 민간인 참화로 점차 옮겨가고 있다”며 “초기에는 하마스의 반격 역량을 꺾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던 서방 진영에서도 매일 수백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목격하면서 휴전론이 확산되는 중”이라고 했다. 국민일보는 “휴전 논의를 차단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한 국제사회의 압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며 “이스라엘에 자제를 촉구했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연설에서 수위를 대폭 높였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구테흐스 총장의 이 같은 발언을 ‘하마스 공격 두둔 취지 발언 논란’이라고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그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을 두둔하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구테흐스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정부 입장을 반영한 기사다. 조선일보는 “대체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책임론’을 고집하는 가운데, 각국 정상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오면서 또다시 세계가 양분되는 모습”이라고 했다.

▲26일 동아일보

▲26일 조선일보

한국일보는 사설 <벌써 2,300여 명…더 이상 아이들을 죽이지 마라>에서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 숨지게 하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이고 범죄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당장 중단돼야 마땅하다. 필수 의약품과 구호품 공급을 허용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했다.

▲26일 한국일보

한국일보는 그러면서도 “살던 땅에서 쫓겨난 뒤 숨 막히는 억압에 시달려온 팔레스타인의 분노엔 이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마스의 기습과 민간인 학살·납치까지 정당화할 순 없다”며 “이스라엘도 하마스 기습이 민간인 230만 명이 거주하는 곳을 무차별 폭격할 권리를 부여하는 건 아니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한겨레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수 없다는 당신에게>란 제목으로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기고를 실었다. 김정희원 교수는 “지상전이 전개되기도 전에 왜 (가자지구 내) 발전소가 멈추는가. 그것은 애초에 연료 공급도, 전기 공급도 이스라엘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며 “전기 공급의 3분의 2는 이스라엘이 통제하며 나머지 3분의 1을 담당하는 가자지구의 유일한 발전소는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폭격한다. 그래서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었던 날이 없다”고 했다.

김정 교수는 이어 “가자지구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최소한의 의식주도, 이동의 자유도, 언어와 문화를 지킬 자유도, 직업 선택의 자유도”라며 “당신은 이런 삶을 수십년 간 버틸 수 있겠는가? 오늘 태어난 아이가 기약없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이 절박한 투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하마스를 핑계로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회피하지는 말자”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1주기… 한겨레 “윤석열 대통령, 추모제 참석하라”

서울 복판에서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가 오는 29일 1주기를 맞는다. 신문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 유가족과 이들을 돌봐온 사람들을 취재한 기획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1년째 이태원 참사 관련 감사를 하지 않던 감사원이 25일에야 포괄적 ‘재난안전 체계’ 점검에 나섰다는 보도도 나왔다.

▲26일 한겨레

한겨레는 1면 인터뷰 기사에서 이태원 참사 생존자가 시달리는 자책감과 트라우마를 전했다. 한겨레는 “‘너는 살아남았다’는 혐오감은 아직도 생존자를 괴롭히고 있다”며 현재까지 책임을 진 정부 관계자는 없는 가운데 생존자인 김효진(가명)씨는 “나는 피해자도 가해자라고 생각한다”는 친했던 이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김효진씨는 참사 뒤 답답함이 밀려와 몇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와이어 달린 속옷은 모두 버렸으며 안전벨트를 제대로 매지 못하는 날도 많다고 했다. 생존자 동은진씨도 “내가 그날 그곳에 가서 (밀집도가 올라가) 사람들이 다친 게 아닌가, 끝내 돕지 못해 참사가 커진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오래 했다”라며 자책감과 싸운다고 했다.

▲26일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1면에 이태원 참사 생존자이자 참사로 친구를 잃은 A씨 이야기를 전했다. 22세인 A씨는 이태원 참사로 중학교 때부터 단짝인 친구를 잃었다. A씨는 이후 밀집된 지역이나 지하철 등을 가면 숨이 막히는 증상까지 겹쳐 출퇴근 시간에 붐비는 곳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그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은 건 친구 박씨 어머니의 연락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딸 몫까지 계속 열심히 살아줘야 해’라는 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고 했다.

한겨레는 사설을 내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제에 참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가의 부재로 벌어진 일이지만, 정부 고위직 중 책임진 이는 없고 희생자 유족들은 지금도 길거리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의 1주기 추모식 참석 여부가 민생과 통합을 향한 국정기조 전환의 가늠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26일 한겨레

중앙일보는 “‘10ㆍ29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할지를 고민해온 대통령실이 결국 불참 입장을 정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며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정치집회라는 판단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는 것”이라고 했다.

▲26일 중앙일보

경향신문은 1면에 “감사원이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이태원 참사를 포함한 ‘재난 및 안전관리체계 점검’ 예비조사에 착수했다”며 “외부 비판을 의식한 요식 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전했다.

▲26일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헌법상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윤석열 정부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고도 했다. “통상 감사 착수부터 결과 발표까지 열 달가량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태원 참사의 감사 결과는 내년 4월 총선을 넘겨 발표될 가능성이 크다. 감사원이 총선 전 감사 결과가 나오는 것을 피하고자 감사 시점을 최대한 뒤로 미뤘다는 비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이태원 참사를 따로 감사하지 않고 여러 재난 관련 대응 체계 감사의 일환으로 축소했다는 지적도 있다”고 했다.

 

경향·한겨레 “전현희 표적 감사 의혹 밝혀야”

감사원의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표적 감사 의혹에 대해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사설을 내고 “의혹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경향신문은 전현희 전 위원장에 대한 감사원의 표적감사 의혹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감사원 등 압수수색 영장 내용을 보도했다. 감사원 압수수색 영장에 ‘권익위 간부의 제보를 받은 대통령실 비서관이 이를 감사원에 전달했다’는 내용이 기재됐다는 것이다. 영장에는 감사원이 권익위에 전 전 위원장 등이 사퇴하면 감사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점도 적시됐다.

▲26일 경향신문

한겨레는 “전 전 위원장을 찍어내기 위해 대통령실까지 나서 감사를 ‘사주’했다는 ‘하명 감사’ 의혹이 사실이라면 감사원의 독립성을 의심케 한다.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실이 비위 의혹을 제보받았으면 직접 감찰 지시를 해야 한다. 몰래 감사원에 제보하는 것은 위법·편법 소지가 다분하다”고 했다.

▲26일 한겨레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감사원은 서해 공무원 월북 피살 사건,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전 정부 관련 사안에 대해 대대적인 감사에 나서면서 정치적 중립 훼손 시비를 불러왔다”며 “정작 본연의 업무에 해당하는 이태원 참사 감사는 1주기가 다 돼서야 뒤늦게 착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실이 감사원과 ‘짬짜미’를 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진 것이다. 진위에 따라 정권의 도덕성을 의심해야 할 중차대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라고 했다.

 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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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극우의 무모한 상상, 바이든의 결정적 실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3/10/26 08:55
  • 수정일
    2023/10/26 08:5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중동의 운명 쥔 세 나라... 민간인 희생 이면에 자리 잡은 국제 역학관계

23.10.26 05:46최종 업데이트 23.10.26 05:46

▲ 이스라엘 남부 스데로트에서 23일(현지시간) 촬영한 가자지구 북부의 모습. 이스라엘군 공습 이후 연기가 치솟고 파편이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가자지구를 향한 이스라엘의 보복 조치가 날로 격화되고 있다. 23일 기준 양측이 발표한 사망자 수는 6100명을 넘었다. 이스라엘 사망자(약 1400명 추정) 다수는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있던 첫날 발생했고 나머지 4700여 명은 이후 가자지구를 향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인한 희생자들이다. 

이스라엘의 대대적 보복 공격이 이어질수록 가자 주민의 피해는 점점 불어나는 중이다. 지구촌 많은 국가들이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를 규탄하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공격에 대한 자제 요청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만약 있을지 모를 이스라엘의 전면적 지상군 투입에도 많은 우려의 시선이 쏠린다. 

이러한 소모적 전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많은 국가들이 휴전, 또는 적어도 긴장완화를 위한 해법을 고민하지만 미국 등 서방 주요국들은 이스라엘의 '방어권' 보장을 주장하며 휴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마스의 '후견국' 이란은 참전 수위를 고심한다.
   
유엔 193개 회원국 가운데 78개국이 하마스에 대한 규탄을 공식 입장으로 내놓고 있다. 반면 공식 입장으로 하마스에 대한 지지를 밝힌 국가는 16개국이다. 확인되지 않은 49개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50개국은 하마스에 대한 규탄 여부와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군사행동 자제와 긴장완화 촉구를 공식 입장으로 내놓았다.  

국제여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들의 입장도 엇갈린다. 유엔 상임이사국 가운데 미국, 영국, 프랑스가 하마스 규탄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밝히고 그들의 방어권 보장을 주장한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특정 진영에 대한 규탄 또는 지지 없이 해당 지역 긴장완화를 촉구함과 동시에 미국의 책임을 지적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주요 7개국(G7)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있다. 반면 브릭스(BRICS) 5개국은 G7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입장 차이를 보인다. 인도가 비교적 서구와 유사한 입장을 공유하는 반면 브라질, 러시아, 중국은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른 4개국보다 하마스 지지에 좀 더 경도돼 있다. 

전반적으로 하마스에 대한 규탄과 함께 긴장 완화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다수지만 향후 흐름은 이스라엘, 이란, 미국, 이렇게 세 나라의 의중과 판단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중동의 운명을 쥔 세 나라의 결정은 상대의 전략적 판단에 크게 상호 의존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을 놓고 현재 벌어지는 눈치보기 게임은 이러한 역학관계의 산물이다. 
 

▲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한 각 나라별 입장 ⓒ 임상훈

 
[이스라엘] 극우세력의 위험한 질주, 팔레스타인 완전 접수 시나리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현 내각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우 성향을 띠고 있다. 지난해 11월 1일 총선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은 이스라엘 의회 120석 가운데 32석을 차지했다. 제1당으로서 내각 구성권을 쥔 리쿠드당은 더 극우성향인 정당들과의 연정을 통해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부패와 위법에 연루된 네타냐후는 총리직 아니면 구속 수감이라는 극단적 운명 앞에서 사실상 선택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도 꺼려하던 극우 근본주의자들과의 동침은 이스라엘에는 불행이지만 네타냐후에게는 정치생명 연장을 구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소수파 극우세력의 국가 지배가 이렇게 이스라엘에서도 가능하게 됐다.  

끝없는 팔레스타인 박해와 이스라엘 사법정의 파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법부 무력화가 이스라엘의 헌법적 가치를 파괴하는 길이었다면 다양한 방식의 팔레스타인 박해는 국제법 위반의 연속이었다. 연정 상대인 샤스당과 종교시오니즘당 등은 궁극적으로 현 거주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완전한 추방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서방 정부들과 달리 다수의 학계와 언론에서는 이스라엘 극우 정부의 비합리적 국가경영에서 하마스 준동의 근본적 원인을 찾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최근 십수 년 동안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를 끝없이 자극했고 하마스는 이에 비이성적 대응으로 맞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구실 삼아 팔레스타인 완전 접수 시나리오를 가동했다. 

[미국] 바이든 외교팀의 심각한 오판

이러한 이스라엘의 위험한 질주가 중동에서 서서히 발을 빼려는 미국에는 '봐도 못 본' 현실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처지에 빠진 미국이 중동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수교만 이뤄진다면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가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든 외교팀의 심각한 오판이었다. 이스라엘 극우세력이 근본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요르단으로 내몰고,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집트로 내모는 것이다. 현실적 문제의 당사국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닌 요르단과 이집트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물리적으로 내쫓는다는 발상이 외교적으로 말이 안 되는 무모한 상상이지만 극우세력은 무모한 상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않는 집단이다. 현 이스라엘 내각이 그런 사상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팔레스타인 축출 발상은 근본적으로 아랍 세계를 균열로 이끄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과 정상적 외교관계를 맺게 된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국 땅으로 내모는 순간, 이들의 외교관계도 파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는 미국이 생각하듯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이란] 하마스 등 무장조직을 지원하는 속내
 

▲ 중동 이슬람권 내 시아파 비율 ⓒ Geopolitical Futures


이처럼 이스라엘 극우 내각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이란 역시 최근까지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수교를 전제로 빈번한 고위급회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가 곪아가는 상황은 모든 계획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다. 이슬람 소수파인 시아파를 이끄는 이란 입장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른 수니파 국가들과는 다른 맥락에 닿아 있다. 

팔레스타인은 종교적으로 이란과 달리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란이 하마스의 후원자 노릇을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립, 페르시아계와 아랍계의 대립 속에서 중동의 패권을 다투는 페르시아계 시아파 국가 이란은 8800여만 명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국가 단위에서 소수에 해당한다.

그런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란은 수니파 국가 내부의 점조직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견제하고 있다. 일종의 '점조직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연대는 흔히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렇게 이란으로부터 지원받는 점조직들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무장세력'이라 불린다. 

결국 종교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한 원조 관계이고 따라서 종교적 파벌이 달라도 이들의 연대는 성립된다. 그리고 수니파 조직 하마스는 그렇게 이란이라는 강력한 후원국을 두게 된다. 그 외에도 레바논의 반정부 조직 헤즈볼라, 시리아에 본부를 둔 팔레스타인 이슬라믹지하드 등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조직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가자지구에서 하마스 조직이 궤멸한다면 이란으로서는 큰 타격이고 다른 무장조직들의 동요를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란이 직접 가자지구에 군사개입을 한다면 미국의 개입은 불가피해진다. 결국 헤즈볼라 등 다른 무장조직을 통한 간접 개입의 자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또한 미국과 고도의 정보전, 심리전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
 

▲ 이스라엘 지상군 가자 침공 반대, 폭격 중단을 촉구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집회가 20일 오후 서울 이태원에서 무슬림들과 노동자연대 등 국내 지지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20일째 이어지는 가자지구 민간인 희생의 이면에는 이러한 국제관계의 역학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혹자는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이런 힘의 논리를 숙명론으로 치부하려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세력균형론을 말하기도 한다. 바로 지금 가자지구를 사이에 놓고 벌이는 군사 강국들의 무력 대치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패권주의도, 숙명론도, 세력균형론도 문제해결의 본질을 말하지는 못한다. 근본적으로 지배-피재배의 관계를 고착시킬 뿐 그 이상의 해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뒤치다꺼리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이 지금의 국제분쟁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기능도 못 하는 상황도 이러한 숙명론적 패배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최고 지상권을 가진 국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다. 국제법도 강대국이 무시하면 그만이다. 무장세력 하마스의 국제법 위반을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그동안 숱하게 국제법을 위반한 이스라엘의 야만성 앞에서 우리는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스스로의 눈과 귀를 막아왔다. 

어쩌면 이런 무기력증과 숙명론, 현실도피가 2023년 팔레스타인 사태를 만든 주범인지도 모른다. 국제사회의 중대한 사태가 터지면 증시와 유가 상황부터 챙기는 이기적 자국중심주의도 역시 한몫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방치한 아랍국가들의 최근 자국 중심적 외교행태가 현 사태를 유발한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알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고 무기력증이 인류의 필연적 거처는 아니다. 국가를 넘어서는 정치학적 상위 가치가, 또는 국가 해체 수준의 새로운 정의가치가 출현하는 미래가 올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은 세상에 대한 부단한 관심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언론이 있고, 독자가 있고, 여론이 있다. 그리고 여론으로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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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상철거 논란 때문에 편치 못했던 홍범도 장군 추모식

홍범도 장군이 안장된 대전현충원에서 80주기 추모식 진행

  • 기자명 대전=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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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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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홍범도 장군이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었다.

추모식 및 기념식은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 우원식 국회의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정용래 유성구청장, 남양홍씨 남양군파 중앙종회 홍성종 회장, 광복회대전지부 양준영 지부장,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조진웅 배우를 비롯해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 25일 오전 11시,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홍범도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홍범도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 우원식 국회의원은 “오늘 이 자리에는 독립유공자의 예우를 책임지고 계신 박민식 장관님께서 함께해 주셔서 기념행사에 큰 의미가 더해졌다”고 말하면서도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에 “보훈부의 수장인 장관님께서 마치 동조하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우원식 이사장은 이어 “어제 국회에서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모아 국회의원 181명이 함께 독립영웅 흉상철거와 독립전쟁영웅실철거 백지화를 내용으로 담은 결의안도 발의했다”며, “그런데도 육군사관학교는 독립전쟁의 역사를 부정하는 흉상철거를 계속해서 추진하겠다고 한다”며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이것은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뿌리이고, 독립군,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라고 하는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오늘 이 자리를 계기로 보훈부에서 육사 현충관 앞의 독립영웅들의 흉상과 독립영웅실 철거 백지화에 앞장서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작심한 듯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향해 뼈 있는 말을 쏟아냈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추모사에서 “홍범도 장군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최고로 예우하는 것은 국가보훈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며, “이 부분은 국민들이 확실히 믿으셔도 되고,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더더욱 세심하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 포상이 실시된 1962년 홍범도 장군님을 서훈하고, 예우하는 데 있어 최선을 다해 왔고, 앞으로 그 예우에는 티끌만큼의 소홀함도 없을 것”이라며, “더불어 독립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님의 공적과 역사적 위상에는 의심의 여지는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가 홍범도 장군의 약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가 홍범도 장군의 약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외에도 이종찬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광복회대전지부 양준영 지부장이 대독했고, 노송달 대한고려인협회 회장의 추도사를 최예진 부회장이 대독했다. 대전현충원이 위치한 대전 유성구의 정용래 유성구청장도 추도사에 나섰다.

추모식은 홍성종 남양홍씨 남양군파 중앙종회 회장이 축문낭독을 했고,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가 홍범도 장군의 약력을 보고했다.

추모사 후에는 헌화와 분향이 이어졌고, 목원대학교 중창단 ‘시네테노레’의 기념공연도 진행됐다. 추모식 사회는 홍범도기념사업회 오광영 이사(대전모임 대표)가 봤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 앞서 정진채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박석신 화백은 글씨를 쓰며 ‘이름꽃시’라는 제목의 드로잉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 앞서 정진채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박석신 화백은 글씨를 쓰며 ‘이름꽃시’라는 제목의 드로잉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식에 앞서 박석신 화백과 정진채 가수는 ‘이름꽃시’라는 제목의 드로잉콘서트도 진행되었다. 드로잉콘서트는 정진채 가수의 ‘서시’ 노래 공연에 맞춰 박석신 화백은 흰 천에 ‘홍범도’라는 글씨와 함께 ‘범이 달려 들어도 총알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신념이다’는 글씨를 멋들어지게 썼다. 추모식은 ‘독립군가’를 다함께 부르며 마무리했다.

한편,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했고, 국가보훈부가 후원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추모식 및 기념식에 앞서 현충탑을 참배했다.

홍범도 장군 추모식이 대전현충원에서 개최된 것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지난 2021년 8월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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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문제의 근원,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여야만 한다'는 이념

[장석준 칼럼] 탈시오니즘화 없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사슬 풀 수 없어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기사입력 2023.10.25. 06:36:25

 

10월 7일 하마스에 기습 공격을 당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거점인 가자 지구에 정규군을 투입해 소탕전을 벌이겠다고 하고 있다. 세계 최대 인구 밀집 지역에 대한 무력 침공은 수많은 민간인의 무참한 대학살이 될 수밖에 없다. 하마스의 무차별 테러 공격은 분명 인도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이에 맞서겠다는 이스라엘의 대응 방향은 전쟁 범죄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실은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른 것 자체가 이스라엘의 이러한 침략적이고 폭력적인 태도 탓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이 협정의 기본정신인 '두 국가 해법'(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의 평화적 분립)에 따른 평화 정착을 방해하고 후퇴시키는 방향에서 움직였다. 협정에 서명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당했고, 서안 지역에 줄기차게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됐을 뿐만 아니라, 베냐민 네타냐후 현 총리를 중심으로 정치권 전반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이스라엘 안에는 이런 흐름에 저항하는 세력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최근까지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부 장악 시도에 맞서는 격렬한 시위가 계속됐고, 이를 이끈 정치세력, 사회운동들이 있다. 그 중에는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중도파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좌파도 있다. 

 

아니, 사실 20세기 내내 이스라엘은 '좌파'가 주도하는 나라였다. 이스라엘 건국에 앞장서고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불사하면서 이를 성사시킨 세력은 (네타냐후가 속한 리쿠드당이 아니라) 좌파정당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왜 이런 모습인가? 강력하던 저 '좌파'는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다는 말인가? 

 

좌우를 불문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모순 

 

진실을 말하자면, 이스라엘 좌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문제의 뿌리 깊은 근원 중 일부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스라엘 좌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이스라엘 좌파는 분명 그렇다. 

 

일단 이스라엘 주류 좌파를 살펴보면, 건국 당시에는 마파이당(이스라엘 땅의 노동자당)과 마팜당(통합노동자당)이라는 두 좌파정당이 정계를 양분했었다[첫 총선에서 리쿠드당의 전신인 헤루트(자유)당은 제4당에 불과했다]. 마파이당과 마팜당은 20세기 말에는 각각 노동당과 메레츠(활력)당으로 이어지며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좌파를 대표했다. 이들의 사회적 토대는 노총인 히스타드루트와 키부츠 공동체들이었다. 

 

한데 이러한 이스라엘 주류 좌파에게는 다른 나라 좌파에는 없는 독특한 공통 이념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시오니즘이다. 즉, 이스라엘의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세력은 단순한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세력이 아니다. 시오니즘 +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세력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좌파는 서유럽 어느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정당이나 라틴아메리카 어느 나라의 좌파정당과 동렬에 놓고 관찰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면, '좌파' 시오니즘이다. 영어로는 흔히 Labor Zionism, '노동 시오니즘'이라 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시오니즘이다. 2000여 년간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디아스포라를 이루며 살아가던 유대인의 국가를 팔레스타인 옛 땅에 다시 세운다는 이념이다. 다만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이 유대인 국가가 처음부터 노동계급 중심의 '세속적', 민주적 국가가 되길 바랐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런 '좌파' 시오니즘이 시오니즘 전체의 주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스라엘 좌파가 유별나다는 게 좀 과장인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시오니즘을 단순히 유대인 민족주의로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렇다. 어느 나라든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 역시 어느 정도는 근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웨덴을 '인민의 가정'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여기에서 민족주의의 뉘앙스를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적 길'을 선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주의란, 비록 정도 차이는 있더라도, 어쨌든 근대 정치의 기본 형식이다. 

 

그러나 시오니즘은 다르다. 근대 민족주의의 범주 안에 놓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것은 유대인의 오랜 이주 역사가 낳은 비극적 운명이며, 지금도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비극을 낳고 있는 요소다. 시오니즘은 지구상의 숱한 민족들이 근대 민족주의의 요소들을 서로 모방하며 만들어 낸 근대 민족주의 현상의 일부이되, 그런 '근대' 민족주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근대 민족 관념은 지리, 언어, 역사, 문화 등 여러 요소들이 얽혀 구성된다. 여기에는 종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종교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다. 오히려 종교적 정체성은 근대적 민족 정체성과 충돌하는 측면까지 있다. 근대적 민족 정체성은 오랜 종교적 정체성을 포용하면서도 이와 경쟁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특정 종교에 복속되지 않으며 도리어 종교적 정체성 전반에 대해 우위를 주장하는 근대적 민족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리고 근대 국가는 이러한 근대적 민족 정체성을 그 안정적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런 일반적 경로에서 이탈하는 유일하면서도 결정적인 사례다. 2000년 동안의 이산 역사 속에서 유대인은 근대적 민족 정체성을 구성할 어떠한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공통 요소도 갖출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유대인'을 말하는 것은 언어상의 온갖 모순을 감내하는 행위였다. 다만 그럼에도 '유대인'을 실체로 만드는 단 한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교였다. 사실 유대교를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맥락의 종교로 봐야 하는지 자체가 논쟁거리이지만, 아무튼 근대에 들어 유대교는 그런 '종교' 중 하나로 분류됐다. 그리고 유대인이란 유대교도, 즉 유대교를 믿고 실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모든 모순이 비롯되었다.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의 근대 국가를 세우길 원했다. 많은 이들은, 시오니스트들이 하필이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만들려한 데에서 비극의 씨앗을 찾는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유대인의' '근대 국가'라는 목표 자체가 비극을 불러오는 요소였다. 시오니스트들이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려면, 우선 '유대인'을 호명하고 그들을 결집시켜야 했다. 한데 현실에서 '유대인'이란 '유대교도'였다. 즉, 유대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근거로 하나의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좌파' 시오니스트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대개 유대교 리버럴파에 속하거나 아니면 아예 유대교 신앙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세운 신생국은 '유대인의 국가', 즉 '유대교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중동전쟁 와중이던 1948년에 선포한 '독립선언'은 이스라엘이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근대 국가임을 천명했지만, 또한 신생국의 성격을 '유대인 국가(Jewish State)'라 규정했다.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유대교 국가. 누가 보더라도 불안한 모순어법이었다. 

 

좌파 시오니스트들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성문헌법 없이 독립선언과 기본법으로 헌법을 대체했는데, 1985년에 기본법 일부 조항을 수정하면서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당시에 이미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에 맞서 좌파가 주도한 개정이었다. 좌파는 '유대인 국가'라는 규정에 '민주주의 국가(Democratic State)'라는 규정을 더함으로써 '유대인 국가'가 내포한 위험을 방지해 보려 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자기 규정은 '유대인-민주 국가(Jewish and Democratic State)'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방지책이 될 수 없었다. '유대인-민주 국가'는 다른 '민주 국가'와 달리 결혼을 비롯한 여러 사회 제도를 민법을 통해 운영하지 않는다. 유대교 랍비가, 그것도 국가가 공인한 유대교 정통파에 속한 랍비에 한해, 민사재판이나 가사재판의 역할을 떠맡는다. 물론 리버럴 혹은 좌파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특이성을 증명한다. 이스라엘은 태생적으로 '근대' 국가에 미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특이성 탓에 이스라엘 건국 주역이었던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쇠퇴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은 악화하기만 했다. 건국 당시 주류였던 유럽-북미 출신 인구가 상대적으로 줄고 중동 출신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출신이 늘어나면서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유대교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노동당이나 메레츠당 지지율은 하락한 반면 극우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들의 지분은 늘어났다. 또한 그럴수록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은 더 잔인하고 가혹해졌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걸어온 역사의 큰 줄기다. 

 

 

 

두 국가 해법, 한 국가 해법, 어떤 것도 쉽지 않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생적 한계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일단 당장 필요한 조치는 쌍방이 모든 무력 행위를 중단하고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협상을 전개하려면, 중장기적 대안의 선택지들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다시금 이스라엘 국가의 숙명이 미래의 가능성들을 교란하거나 봉쇄한다.

 

오슬로 협정 이후에 국제사회 대다수가 공인한 대안은 '두 국가 해법'이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허용하고 더 나아가는 독립국가 수립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국가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이스라엘 정부는 두 국가 해법을 원천 봉쇄하는 방향에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노동당 소속 라빈 총리의 암살 이후 리쿠드당과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들의 극우 연합이 정계를 주도한 탓이다. 노동당, 메레츠당 같은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이 분위기에 끌려다니며 평화 정책을 스스로 후퇴시켰다. 지지 기반도 줄어들고 이념-노선도 흔들린 좌파정당들은 반극우연합의 주도권을 중도우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급기야 작년 11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3.69%만을 득표하며 의석이 4석(크네세트 총 의석은 120석)으로 쪼그라들었다. 3.16%를 얻은 메레츠당은 아예 원외정당으로 밀려났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유대교 근본주의에 휘둘릴수록 팔레스타인 진영 안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특히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작금의 분쟁에서 보듯이, 양측의 폭력 충돌이 고조되면서 두 국가 해법의 실현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만 있다. 일방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스라엘 편에서 종교 근본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두 국가 해법은 다시 진지한 평화 대안으로 논의되거나 추진될 수 없을 것이다.

 

두 국가 해법을 제외하면, 남는 대안은 '한 국가 해법'이다. 현재의 이스라엘 시민,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시민이 하나의 통합국가 안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국가 형태에는 여러 가지 변주가 있을 수 있다. 단일국가일 수도 있고, 연방국가나 국가연합일 수도 있다. 이 중 어떤 국가 형태가 됐든, 종교와 언어, 인종의 차이에 상관없이 오직 지중해 남동부의 한 지역에 함께 거주하는 시민이라는 정체성만으로 공통의 정치 공동체를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가? 그런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비현실적이기만 한 방안은 아니다. 숱한 폭력 충돌 경험이 걸림돌이 되겠지만, 비슷한 분쟁을 겪고도 단일한 정치 공동체를 이룬 나라들이 없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좋은 비교 대상이다. 오랜 인종 간 갈등과 분리, 억압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은 보통선거, 즉 1인 1표에 바탕을 둔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정적인 걸림돌은 역시 '유대인 국가'의 업보다. 한 국가 해법으로 나아가려면, 하마스가 이슬람 국가 건설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민주 국가'라는 이스라엘의 국시(國是) 역시 폐기해야 한다. 이스라엘 건국의 기반이 된 시오니즘을 박물관 속 유물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흔히 한 국가 해법에 반대하는 논거로 민주화 이행 이후 남아공의 현실을 든다. 보통선거에 바탕을 둔 통합으로 결국 (백인 지배 체제를 대신하는) 흑인 지배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우에도 한 국가 해법의 결말은 아랍인 지배 체제가 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반론은 엄살에 가깝다. 남아공에서는 흑인이 압도적 다수인 반면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는 어느 쪽도 그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점하기 힘들다. 해외 팔레스타인인 디아스포라에서 인구가 유입된다 하더라도 해외 유대인 디아스포라 역시 여전히 이스라엘에 새로운 인구를 더할 여력이 남아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라는 점에서는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과거 남아공과 비슷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폐지 뒤의 현실은 남아공과는 또 다를 것이다.

 

결국 걸림돌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국가'여야만 한다는 그 이념이다. 이것이 한 국가 해법을 가로막고 두 국가 해법 역시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리고 있다. 달리 말하면, 가장 강한 이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사슬은 결코 풀릴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의 탈-시오니즘화는 가능할 것인가? 

 

과연 이스라엘 사회의 탈-시오니즘화는 가능할 것인가? 이는 "대한민국이 분단반공국가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비슷하다. 2023년에도 여전히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나라가 과연 분단반공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만큼 이스라엘의 탈-시오니즘화 역시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고, 또한 온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진지하게 돌파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다만 일단은, 이스라엘 사회 안에 이 과업을 직시하는 흐름이 미약하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스라엘 좌파가 좌파 시오니즘 일색만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 결정적인 사례는 노동당, 메레츠당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 공산당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공산당은 이스라엘 내 아랍계 시민을 대변하는 정치세력들과 함께 하다쉬('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주전선'의 약칭)라는 정당연합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하다쉬는 작년 총선에서 노동당보다 많은 3.75%를 득표해 5석을 확보했다. 

 

공산당은 다른 좌파정당들과 달리 오랫동안 '유대인 국가'라는 규정에 반대해 왔고, 하다쉬는 현재 이스라엘 안에서 한 국가 해법에 가장 가까운 대안을 주창하는 정치세력이다. 유대계와 아랍계가 내부에서 공존하며 협력하는 하다쉬 자체가 미래의 통합 세속-민주 국가를 예시한다. 

 

노동당 소속으로 크네세트 의장까지 역임한 원로 정치가 아브라함 버그는 노동당의 퇴행을 비판하다가 2015년 하다쉬로 당적을 옮겼다. 본래 좌파 시오니스트로 출발한 버그는 오슬로 협정의 약속이 깨져나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점차 시오니즘의 기본 내용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한 국가 해법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 결과가 하다쉬 입당이었다.

 

분명 지금 이스라엘 사회는 극우화하고 있다. 그러나 버그의 행보처럼 이에 맞서는 정반대 변화도 있다. 비록 폭력의 스펙터클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희망은 오직 이런 이스라엘 내부의 탈-시오니즘화에 있다. 어렵고 또 어렵지만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 내부의 변화처럼 말이다. 

 

▲ 지난 23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파괴된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 주택가에서 한 팔레스타인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무력 충돌이 이어지면서 양측 사망자는 6000명을 넘어섰다. ⓒ로이터=연합뉴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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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유진그룹 3세, 브랜드 인지도 높이려 방송에 베팅”

  • 기자명 노지민 기자 
  •  
  •  입력 2023.10.25 08:10
  •  
  •  댓글 0

 

[아침신문 솎아보기] YTN 민영화, 보도전문채널 공영성 해칠 거란 우려 속에 강행…’이태원 참사 1년’ 둘러싼 엇갈린 비판

여야가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고성이나 야유를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 ‘민생’ 경쟁에 돌입한 여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오는 31일 윤석열 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앞두고 이뤄진 협정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2023년 10월25일자 주요신문 1면

이번 제안은 홍익표 민주당 신임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에게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이를 두고 세계일보 <여야 ‘정치 회복’ 첫발… ‘보여주기식 협치’ 회의적 시각도> 기사는 “내년 총선을 겨냥한 ‘매표용 쇄신’에 머물지 않기 위해선 제도 개선과 함께 정치인의 언행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정치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처럼 의원의 부적절한 발언에 국회 전체가 나서 제재를 가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신문 <英의회 질문자까지 국회의장이 지명해 韓, 질서유지권 활용”> 기사는 이종훈 정치 평론가를 통해 “(민주당이 먼저 제안했는데) 이 대표를 겨냥한 여당의 ‘팻말전’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계산이 녹아 있을 것”이라면서 “영국 의회는 질문권자까지 국회의장이 지명한다. (국회의장이) 질서 유지권 등 국회 품위 유지와 원활한 국회 진행을 위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최대한 활용하는 게 맞다”는 의견을 전했다.

한국일보 <정쟁 현수막 제거 이은 노피켓 합의... 총선 앞 정치권 비판 의식> 기사는 “이번 합의는 내년 총선에 앞서 정치권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정쟁 자제’ 차원으로 풀이 된다”며 “특히 국민의 힘이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정쟁을 유발하는 현수막 제거에 나서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아울러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앞서 이번 합의가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라며 “지난해 10월 윤 대통령의 첫 번째 국회 시정연설에선 민주당은 당시 중앙당사 압수수색 등을 이유로 헌정사상 최초로 이를 보이콧했다”고 했다.

▲2023년 10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

국민일보 사설(여야 피케팅·고성 중단 합의, 정치문화 확 바꾸는 계기되길)은 “불과 얼마전에도 국방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에서고성과 피케팅을 이유로 국정감사가 파행됐다. 여야 합의가 지켜질지는 오는 31일 예정된 윤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부의원과 장차관이 국회에서 하라는 회의는 하지 않고 지지층을 향해 ‘정치’만하려 하니 정쟁 국회가 더격해진 측면이 있다. 이런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일보 사설(비방 금지 ‘신사협정’ 여야, 협치로 승화시키길)은 “그간 여야의 비방전은 국회 품격을 떨어트리고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후진적 정치의 상징이었다. 지금이라도 이를 개선하겠다고 나선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며 “이번 합의를 계기로 상호 비방이 아닌 존중의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여야가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민생 정책도 성과를 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쟁에 과감하게 선을 긋고, 협치에 방점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YTN 민영화’ 속도전에 여전한 의문

▲2023년 10월25일자 한겨레 사설

지난 23일 YTN 공기업 지분 매각 입찰 경쟁에서 유진그룹이 낙찰됐다. 유진그룹이 YTN의 새 최대주주가 되기까지 방송통신위원회의 최다액 출자자 변경만 남은 상태다.

동아일보 <유진그룹 3세 유석훈 사장, YTN 인수 주도...사업 확장하고 인지도 높이려 방송에 베팅> 기사는 유진그룹의 이번 인수 시도 배경에 대해 “이번 인수 시도는 3세 경영인인 유석훈 그룹 경영혁신부문 사장이 미디어 산업에 의욕을 보였기 때문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서울신문을 인수한 호반건설, 헤럴드경제를 인수한 중흥건설 등 건설사들이 언론사 지분 인수를 통해 기업 인지도를 높인 사례가 영향을 미쳤을 거란 업계 해석도 전했다.

경향신문 사설(의혹투성이 YTN 민영화, ‘강행 · 속도전’ 이유가 뭔가)은 “윤석열 정부에서 YTN도 반대하는 민영화가 속도전으로 강행된 터라 언론 길들이기 의심이 일 수밖에 없고, 실제 지분 매각 절차 과정도 의문투성이”라며 “당초 지분 계속 보유 의사를 밝혔던 한 전 KDN 등에 대해 공공기관 자산 효율화 를 내세워 지분 전량 매각 결정을 이끌었다. 또 매각 주관사는 배임 논란 속에 두 회사의 지분을 한번에 파는 통 매각 결정을 내렸다. 인수 기업을 정해놓고 정부가 밀어붙인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온다. 유진 그룹 계열사가 주식 리딩방 연루 의혹을 받고, 사주가 검찰 수사 무마 대가로 검사에게 금품을 준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는 점 등이 드러나 인수기업으로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사설(YTN 지분 매각, 방송 공공성 훼손 우려된다)은 “공기업이 대주주로 참여하는 와이티엔의 공적 소유구조는 친정부 인사를 ‘ 낙하산 사장’으로 내려 보내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와이티엔이 방송의 공공성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더 많다”며 “더불어 민주당은 대통령실의 외압 의혹 등에 대해 검증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매각 절차와 인수자의 적격성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10·29 이태원 참사 1년

지난해 10월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오면서 일부 신문이 지난 1년을 돌아보는 기획보도를 전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수사기록으로 본 이태원 참사 1년’ 기획 연재를 통해 수사 과정에서 사라진 국가의 책임을 지적했다. 1·3면 <"핼러윈 성지? 홍대·강남역도 있어" …또렷한 책임 회피 기록> 기사는 “참사 발생 사흘 만에 꾸려졌던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는 지난 1월 김광호 서울 경찰청장 등 24명을 입건하고 이 임재전 용산경찰서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6명을 구속 송치했다. 경찰청 서울시 행정안전부 등 윗선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며 “검찰은 용산구청 관계자 4명, 용산경찰서 관계자 5명, 경찰 정보라인 3명 등을 기소했으나 재판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그나마 윗선으로 지목된 김광호 서울청장의 기소 여부조차 결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 이임재 전 용산서장 등 책임자들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본인의 책임을 부인해왔고, 이 전 서장 관련 수사기록엔 기동대가 사전 배치되지 않았더라도 당일 집회가 종료된 후 긴급 배치 결정이 이뤄졌다면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내부 보고서도 담겨 있었다.

경향신문 <"김광호·이임재 기동대 배치 요청 안 해 사고 키워" 이태원 특수본 내부 수사보고서에 명시된 ‘팩트‘> 기사는 “김광호 서울 경찰청장은 용산경찰서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 당일 인파를 관리할 경비기동대 배치를 요청했는지를 두고 이임재 전 용산서장과 진실 공방을 벌여 왔다. 그러나 경찰청 이태원 특별수사본부 수사보고서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경력을 배치하지 않아 참사 피해를 키운 책임이 있다고 적혀 있다”며 “특수본은 피의자 김광호 및 이임재는 경력 조정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태원 핼러윈 현장에 경력을 배치하도록 조정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다 고 적시했다”고 했다. <‘이태원 보고서‘ 삭제 전날…김진호·김광호 ‘15분 통화’> 기사는 “이태원 참사 당시 김진호전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이 핼러윈 인파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하기 하루 전 김광호 서울 경찰청장과 15분 가량 전화통화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2023년 10월25일자 경향신문 기사

▲2023년 10월25일자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는 <정쟁에 묻혀버린 핼러윈 참사 교훈> 기사는 “전문가들은 우측통행과 같은 기초 질서가 지켜졌다면 참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우측통행 등 일상의 기초 질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정치권이 정쟁에 휘말려 문제를 방치한 탓”이라고 했다. 이어 “본지가 지난 9~10월 출퇴근 지하철역과 시내 번화가, 국제 행사장 등을 돌아본 결과 우측통행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일부 시민은 우측통행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좁은 골목이나 지하철역을 오가던 시민들끼리 부딪치거나 사고가 발생할 뻔한 아찔한 장면도 목격됐다”며 우측통행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을 전했다.

조선일보 <클럽거리·지하철역 뒤엉킨 인파… 우측통행 하면 참사 막을 수 있다> 기사의 경우 “오른손잡이가 많은 우리 나라의 경우 우측 통행을 할 경우 보행자 간 충돌이 줄고 보행 속도도 빨라질 것으로 예측됐다. 우측 통행을 하면 도로 옆 인도에서 보행자가 차량을 마주 보며 걸어가게 되면서 교통사고도약 20%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고 했다.

 

악질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위헌 논란도

법무부가 이른바 ‘한국형 제시카법’으로 불리는 ‘고위험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법’ 제정안을 26일 입법예고한다. 아동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재범 가능성이 큰 고위험 성범죄자 주거지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중앙일보 <악질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한다> 기사는 “미국은 특정 시설로부터 일정 거리 내 거주를 금지하는 데 반해 법무부가 마련한 법안은 ‘특정 시설 의무 거주’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한상희 건국대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신문에 “형벌이 종료된 후 다시 거주지를 제한하는 것은 이중처벌로 볼 수 있다”며 “치안 당국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조두순에게 떠미는 셈이다. 상당히 위험한 정책으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새로운 형태의 감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05년 이중처벌 논란으로 폐지된‘보호감호’ 제도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있다.

 

감사원의 전현희 제보, 대통령실 비서관이 전달

감사원의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표적 감사’ 의혹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전 전 위원장 관련 제보는 권익위 간부에서 대통령실 비서관을 거쳐 감사원에 전달됐다고 파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은 1면 <“전현희 의혹 제보는 대통령실 거쳐 전달”> 기사에서 공수처가 감사원 등 압수수색 영장에 “최재해 감사원장과 유병호 사무총장이 2022년 7월 권익위 관계자가 전 전 위원장, 이정희·안성욱 부위원장의 사퇴를 목적으로 A 당시 대통령실 비서관에게 제보한 내용을 A 비서관으로부터 전달받은 뒤 공직감찰본부 특별조사국 등에 지시해 감사위원회의 의결 없이 감사에 착수토록 했다”는 취지로 기재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공수처는 압수수색 영장에 최 감사원장과 유 사무총장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와 함께 B씨와 전 전 위원장을 공동 무고한 혐의가 있다고 적시했다”며 “A 전 비서관이 전 전 위원장의 비위 의혹을 감사원에 전달했다면 위법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감사원은 “제보자와 관련된 사항을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는 없다”, A 전 비서관은 “전 전 위원장 비위 의혹을 전달받거나 이를 감사원에 제보한 사실이 없고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제보자로 지목된 B씨는 “수사 중인 사안이라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이다.

 

중대재해법, 법원과 검찰이 힘 빼고 있나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 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적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고용노동부가 ‘추가 유예’ 방침을 밝혀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어렵게 기소된 사건에서도 ‘솜 방망이’ 구형과 판결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겨레 <집유· 집유…중대재해법 힘빼는 법원·검찰> 기사는 “24일 한겨레가 중대재해 처벌법 시행 이후 나온 총 7건의 판결문을 모두 분석해 보니, 사업주(경영책임자)에 대한 선고 형량이 대체로 징역 1년~1년 6개월에 그치고 그마저도 단 1건을 제외하면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돼 실형을 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집시법 시행령 바뀌자 ‘대통령실 앞 집회’ 금지한 경찰

서울 용산경찰서가 오는 11월18일 예정된 트랜스해방전선의 트랜스젠더 추모 집회에 대해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 앞은 주요 도로라는 이유로 부분 금지를 통고했다. 경향신문 <‘집시법 시행령‘ 개정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실 앞 트랜스젠더 집회 부분 금지> 기사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17일 대통령 집무실 인근 도로를 관할 경찰서장 재량에 따른 집회 시위 금지가 가능하도록 개정한 집시법 시행령을 근거로 삼았다. 법원은 트랜스 해방전선이 제기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여성 총파업에 총리도 동참하는 아이슬란드

‘성평등 모범 국가’로 불리는 아이슬란드의 카트린 야콥스도 티르 총리가 24일 ‘여성 총파업’ 참여를 위해 업무 중단을 선언했다. “한국일보 <‘여성 총파업’에 총리까지 동참 성평등 1위 국가의 끝없는 노력> 기사는 “ 야콥스도 티르 총리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업에 동참한 게 아니다. 정부 수반인 ‘총리’로서 이번 총파업에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명하는 차원”이라며 “파업에 따른 총리의 업무 공백을 다른 남성 장관이 기꺼이 메우고 시민들도 이를 이해할 정도로,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위·성별·나이를 불문하고 성차별 해결에 팔을 걷어붙인다”고 전했다.

 노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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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공격 중단을 촉구하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그림=클립아트

편집자주

지난 7일 하마스의 공격 이후 이스라엘이 구속해 감금한 팔레스타인인이 5,000여명,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인이 5100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중 절반가량이 아이들이라고 한다. 그 수가 하마스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이스라엘인 1,900여 명을 두 배 이상 넘어섰지만, 네타냐후를 필두로 한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를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명분 하에 가자지구 지상전을 예고한 상황이다. 네타냐후가 총리로 처음 취임한 2009년부터 양국의 갈등이 더 심해져 올해 9월까지 팔레스타인이 살해한 이스라엘인이 300여 명, 이스라엘이 살해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6,400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네타냐후 극우 정권의 강경 노선은 놀랍지 않다. 그 와중에 하마스의 공격 생존자 중에서 언론에 등장해 적극적으로 평화를 촉구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카운터펀치의 기사를 소개한다.

원문: Meet the Hamas Massacre Survivors Opposing Israeli Brutality in Gaza

 

10월 12일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공보비서관은 아야나 프레슬리, 코리 부시, 라시다 탈리브가 등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촉구한 것에 대해 ‘혐오스럽다’, ‘수치스럽다’고 해 미국이 가자지구의 참상에 얼마나 공조하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10월 7일 하마스 공격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이스라엘 생존자 중에는 완전히 반대된 견해를 가진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극우 정부가 가자지구에서 더 악랄한 만행을 저지를 명분으로 그들의 슬픔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전기, 물, 연료 공급을 차단했고, 북가자지구 ‘정리작업’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아이만 1,000여 명을 살해하고 50여 가구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이스라엘이 가자시티의 알-알리 병원을 폭격해 최소 500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홀로코스트와 대량학살을 연구하는 미국 스톡턴 대학교의 라즈 시갈 교수는 최근 ‘유대인 커렌츠’에 기고한 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정책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교과서적인 대량학살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자제와 화해를 촉구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인 9명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며 제2의 낙바(Nakba)를 저지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연민의 목소리는 주목받을 만하다. (낙바는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이스라엘이 국가 수립을 선포하며 일으킨 팔레스타인인 75만 명의 디아스포라이다. 현재 6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하마스 폭력이나 반유대주의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자 학살에 반대할 힘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인의 의견을 강조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이스라엘이라고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상기하자는 얘기다.

요나탄 지겐, 하마스에게 납치된 이스라엘계 캐나다 활동가 비비안 실버의 아들

이스라엘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점령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인을 이스라엘로 데려와 치료받도록 도왔던 실버는 베에리 키부츠에서 하마스에 납치됐다. 그녀가 죽었는지, 인질로 잡혀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버의 아들 요나탄 지겐은 영국 채널4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어머니가 경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기를 많이 죽인다고 이미 죽은 아기가 살아나지 않는다. 평화가 필요하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목표를 삼은 것은 평화’였다고 말했다.

지겐은 팔레스타인과 화해하자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좁아졌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고통이 다를 수 없다. 나도 키부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함께 운다. 하지만 안전을 확보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화뿐’이라며 ‘복수는 전략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네타 하이만, 하마스에게 납치된 딛차 하이만(84)의 딸

연로하신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간 뒤 하이만은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에 가자지구 공격에 반대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잡아간 자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이란에 화를 내면서도 대부분의 분노는 이스라엘 정부에게 쏟아냈다.

‘나는 명절날 어머니를 지키고 보호하는 대신 군대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순찰을 돌게 한 이스라엘 정부에 분노한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가자 국경 지역의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온 이 정부에 분노한다. 이 엄청난 실패, 이 혼란은 그들의 책임이다. 4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가 인질의 가족 대부분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들의 책임이다. 나는 이 끔찍한 분쟁을 끝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2000년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정권에 분노한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끔찍한 곳에서 이 악몽이 끝나고 등장할 정부를 향해 외친다. 가자지구를 파괴하지 말라. 그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다음번에 더 잔인한 폭력을 가져올 뿐이다. 그리고 휴전 협상할 때가 오면 그때를 이용해 양측 간에 ‘약정’이 아닌 진정한 ‘평화 협정’을 끌어내도록 노력하라.‘

지브 스탈, 고향을 방문했다가 친구와 가족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인권운동가

스틸은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분리주의 정책을 규탄해온 이스라엘 인권단체 ‘예쉬 딘’의 이사이다. 그녀는 10월 7일 크파아자 키부츠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는 중 친구와 가족을 잃었다. 그녀는 10월 17일 하레츠에 이스라엘의 폭력 중단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 작은 소리 하나하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밤중에 총소리 환청이 안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한 가지 강력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죽음의 순환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롭고 안전한 미래를 건설하는 방법에 모든 힘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억제‘, ’최후의 일격‘, ’결정적 행동‘과 같은 단어로는 이 순환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전은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야 이뤄질 것이다.

내 처제 미라, 같은 반 친구 탈, 어머니의 죽마고우 빌하와 그녀의 손자와 사위, 옆집의 리브낫과 아비브, 그들의 자녀와 손자 손녀, 학창시절 내 상담선생님이었던 미할과 그녀의 아들 등 수백 명이 죽었다. 그러나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7일 공격과 무관한 민간인 학살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과 공포, 슬픔과 유가족의 아픔을 연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의 미래, 크파아자 키부츠와 주변 지역의 미래, 이곳에 사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다‘. 

스틸은 지난 20년, 그리고 끔찍한 이번 사태가 증명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도 방어와 안보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글을 마무리했다.

다비드 존셰인, 삼촌이 사망하고 사촌이 끌려간 이스라엘 인권단체 브트셀렘의 이사

존셰인은 15일 글에서 이미 가자지구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이스라엘 군인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희생하고 (7일 공격 당한) 오타프 마을에 또다시 유혈 사태를 야기할 복수를 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를 비난했다. 그는 ‘복수는 비전이 아니다.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계획이 아니다’라며 정부의 말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가자지구 전체를 처벌하려 한다고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네타냐후는 선택된 몇몇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마스와 협상하고 수백만 달러의 카타르 자금이 가자지구로 유입되는 것을 눈감아줌으로써 하마스를 강화하려 노력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8일 보도했다. 네타냐후는 2019년 당원 회의에서 하마스와 서안지구를 명목상 통치하는 파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하마스를 강화하려 했음을 시인했다. 지금도 네타냐후는 충분히 하마스와 또다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전쟁의 확실한 대안을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익명의 생존자, 베에리 키부츠 공격의 생존자

11일 독립 저널리스트 오를리 바레브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군대 강화와 미국의 지원으로 갖춘 돔 미사일 방어 체계를 ‘임시방편적’인 해결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베에리 키부츠에서 불과 4.5km 떨어진 가자지구에 이 사태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편히 자겠는가. 나에게 이 사태는 12시간 만에 끝났다. 대피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를 얘기하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엄청난 고통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을 직접 겪은 나는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힘이 빠진다. 내가 겪었던 일을 똑같이 겪고, 도망갈 곳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수년간 정치적 해결책을 요구해 왔다. 나는 19살이다. 지난 며칠 동안 군인의 신분으로 전장에서 쓰러진 친구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긍심을 갖고 기대했던 군 생활이 그렇게 끝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베에리 키부츠, 나할오즈 키부츠, 크파아자 키부츠의 고통과 가자지구의 고통은 똑같다. 그 키부츠에 떨어진 로켓과 가지지구에 떨어진 로켓은 똑같은 방식,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폭발한다.

네타냐후에 대한 분노가 크다. 나 또한 그렇다. 멍한 상태를 벗어나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마다 강렬한 분노를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이 100% 네타냐후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흘린 피는 그의 탓이다. 그러나 그가 근원적인 문제의 뿌리인 건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에게 묻고 싶다.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라. 당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당신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그리고 또 물어보라.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당신의 가치에 부합하는가. 당신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 그 정치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정말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요구사항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요구하는 건 사실 하나뿐이다. 그것은 평화이다.

마오즈 이논, 부모가 사망한 네티브 하사라의 소년.

이논은 15일 BBC.뉴스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모님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태로 목숨을 잃었고, 앞으로 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멈춰야 한다. 모든 관련자에게 압력을 가해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상황을 동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복수는 더 많은 고통과 사상자를 초래할 것이다. 군인과 가자지구 및 이스라엘 양측의 민간인이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울고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 힘든 시기에 이런 인터뷰에 응하는 이유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다. 전쟁을 멈춰 달라. 제발, 전쟁을 멈춰 달라’.
 

10월 16일 이스라엘의 대피 명령을 받고 집을 떠나 피란간 소년이 자기 고양이를 안고 동생과 앉아 있다. ⓒ뉴시스


야코브 아르가마니, 슈퍼노바 축제에 갔다가 납치된 딸을 둔 아버지.

아르가마니는 8일 이스라엘 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웃과 평화를 이루자. 나는 평화를 원하고 딸이 돌아오기를 원한다. 이제 충분하다. 그들도 사상자가 있고 포로가 있으며 울고 있는 어머니들이 있다. 우리는 한 아버지 밑에 있는 두 민족이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자’. 그리고 CBS 뉴스와의 10일 인터뷰에서 아르가마니는 자기 딸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며 이스라엘이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이 카츠만, 7일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차임 카츠만의 남동생.

형의 장례식이 치러진 12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카츠만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의 죽음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명분으로 이용되지 않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 정부는 이것이 우리에게 안전과 안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정부는 항상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사람을 많이 죽이면 우리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더 나은 삶들 가져다주지도 않았다. 그저 더 많은 테러와 내 형처럼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다. 나는 내 형에게 일어난 일이 가자지구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엘라나 카민카, 이스라엘 군인이었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

카민카는 16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사람이 목숨 잃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것이 누구든 절망할 어머니가 있는 사람이 또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견딜 수 없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생명을 잃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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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에 의한 일본의 불법참전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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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3/10/25 09:38
  • 수정일
    2023/10/25 09:3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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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과 “유엔사” 1 / 이시우

  • 기자명 이시우 
  •  
  •  입력 2023.10.24 19:50
  •  
  •  수정 2023.10.24 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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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 사진가

 

목   차

(1) 유엔헌장 위반여부
1) 요시다 정부의 유엔협조론
2) 요코타 기사부로의 경찰행위론
3) 요코타와 일본정부주장 비판
4) 일본정부조치의 유엔헌장 위반여부

(2) 국제전쟁법 위반여부
1) 불법전투원
2) 용병

(3) 평화헌법 위반여부

 

(1) 유엔헌장 위반여부

1) 요시다 정부의 유엔협조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신문마다 대서특필했지만 미군 점령 하에 있었고, 장기간 전쟁피로 상태에 있었던 일본국민들은 이 전쟁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또한 한국사태가 내전이라면 주권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라도 전범국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유엔이 움직이고 일본의 점령정책을 주도하던 미군이 “유엔사”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일본으로서는 “유엔사”의 행동에 어떠한 방식으로 협력할 것인가라는 대응에 직면하게 되었다.(주1) 즉 유엔이라는 대의명분과 “유엔사”라는 실체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한국전 개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7월 14일, 중의원 시정방침연설에서 요시다 총리는 유엔활동에 참가할 입장은 아니나 가능한 범위에서 이에 협력한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했다. 다음날 유엔에 대한 협력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유엔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협력하거나 가능한 범위에서 협력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주2)

일본정부가 ‘정신적으로 협력’한다는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표명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지 2개월이 지나서였다. 8월 19일, 외무성은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을 발표하고 미국주도의 “유엔사”에 대한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자세를 명확히 했다. 이 8월 19일이라는 시기는 “유엔사”가 부산교두보까지 밀렸던 시기이다.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공산세력에 의한 침략이며, 공산주의 세계와 자유세계의 사상전으로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엔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공산주의 세계에 굴복할 것인가, 유엔에 협력할 것인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하며 “유엔사”에 가능한 협력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일본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기술하고 있다.(주3) 주목할 것은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보다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미국주도의 “유엔사”에 협력한다는 것이었다.(주4)

2) 요코타 기사부로의 경찰행위론

“유엔사”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방침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 것은 1950년 당시 일본의 보수적 국제법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요코타 기사부로(橫田喜三郞)였다.(주5)

일본이 평화헌법에 의해 군비철폐를 당한 상황에서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을 어떻게 보장 받을 것인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당시 일본국제법학계의 첨예한 과제였다. 이에 요코타는 1950년 2월 간행한 일본의 강화문제(日本の講和問題)(주6)에서 유엔헌장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헌장 제1조1항)는 규정에 대해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라며 ‘국제’의 용어를 넓게 해석한다.

요코타는 이런 관점에서 일본이 비회원국(주7)의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받거나 그 위험에 접하는 경우에는 국제연합의 집단보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으로부터 희망을 찾은 것이다. 요코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비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의 협력을 통한 재무장의 가능성도 언급한다. 유엔의 군사조치는 전쟁이 아닌 경찰행위이기에 평화헌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결의에 의거해 많은 연합국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의 통합지휘하에 남측을 원조하기로 되었지만 이 군대의 행동은 보통 전쟁이 아니라 국제경찰행위로 봐야할 것이다...이 행위는 침략전쟁을 제지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강력한 군사행동이 되어야 한다. 침략전쟁이나 무력행사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무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형태상 무력행동에 대해서는 무력행동이 행해져 전쟁과 같이 보이긴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개인의 완력을 제지하는 경찰관의 행위가 폭력이 아니라 불법이 아닌 정당한 공무집행의 행위이며 경찰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침략전쟁이나 무력행사를 제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공동의사에 근거하여 국제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게 위해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은 사적인 전쟁이 아닌 공적인 국제경찰행위로서의 성질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법하고 금지되지 않는다. 금지될 리가 없다...유엔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는 것은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보통의 전쟁에 협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국제연합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는 것은 헌법에서의 전쟁포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주8)

이는 한마디로 유엔군사조치의 경찰행위론이다. 경찰행위이기에 전쟁이 아니고, 일본이 유엔의 경찰행위에 협력하는 것은 참전이 아니므로 헌법위반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요코타의 논리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한국전쟁 발발로 개회된 제8회 국회연설(1950.7.14.)에서 다음과 같이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만일 대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우리나라의 군비철폐로 우리 안전보장은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국민이 근심하는 바이다. 국제연합의 이번의 조치는 우리의 마음의 안정에 답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로서는 현재 적극적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국제연합의 행동에 참가한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될 수 있는 범위에서 국제연합에 협력하는 일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주9)

요시다는 일본인을 참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유엔의 조치는 공개적으로 지지했다.(주10)

그러나 일본과 미국에서의 일부 여론은 “유엔사”에의 협력은 곧 참전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2일 관방장관 오카자키(岡崎勝男) 등이 일본인의 전투참여는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주11) 일본인 참전주장은 일본 정계뿐만 아니라 미 의회에서도 제기되었다. 1주일 후인 1950년 7월 10일 인디아나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호머(Homer Capehart)는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한국전쟁에 일본인을 자원병의 형태로 투입할 것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보냈다. 유엔이 일본인을 편성하여 “유엔사”의 지휘 하에 참전시키도록 하자는 주장이었다.(주12)

민주당의 아시다(芦田均)는 참전하는 것은 일본이 국제경찰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아시다는 “현재 요시다 정권은 조선전쟁이 주는 기회를 십분 이용함으로써 유엔활동에 적극 협조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13)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여론은 “한일의 역사적인 관계에 비추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한 사토 의장의 발언처럼 참전 반대의견을 지지하였다.(주14) 미국의 여론도 주류는 반대 입장이었다. <뉴욕타임즈>는 1950년 8월 12일자 사설에서 6․25전쟁에 일본인이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주15)

이렇듯 일본인의 참전에 관한 의견들이 분분해지자, “유엔사령관” 맥아더(Douglas A. MacArthur)는 그에 대한 최종적인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는 일본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일본인이 “유엔사”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주16)

그러나 요시다 정부의 신중함과 맥아더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은 비공개적으로, 비밀리에 불법참전의 길로 미끄러져 들어가 있었다.

8월 29일 요시다 총리는 맥아더에게 서한을 보내 ‘귀관이 필요로 하는 어떠한 시설 및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가능한 협력을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주17)

그러나 일본의 “유엔사”에 대한 협력은 시설과 노력에 의한 협력에 그치지 않았다. “유엔사”가 부산교두보로 밀리면서 한국내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전투기와 전폭기 출격은 큐슈 등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일본의 비행장은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극동공군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7함대 항모 함재기가 사용되었는데, 그 기지인 사세보는 미해군의 작전기지뿐만 아니라 수송기지의 역할도 했다. 구일본해군의 군항으로서 발전했던 사세보는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무역항으로 그 첫걸음을 디딘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발발로 인해서 중요지역 대부분을 미군이 접수하였다.(주18)

소해부대 파견이나 영덕, 흥남 등 전장지역으로의 선박‧선원파견은 정부가 표명한 「노력제공」범위를 초과한 것이나 정부는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정부방침으로 추진하였고, 일본은 “유엔사”의 가장 큰 군수기지가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일본인들은 요시다 정부의 “유엔사”지원 방침을 상당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던 1950년 9월말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의하면, 유엔에 협력해야한다 56.8%, 협력해선 안 된다 9.2%로, 협력찬성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요코타설을 지지한 오사토 마사오(大鄕正夫)는 1972년 논문에서 “가장 잘 국가실행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설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고 하여 국가실행에 국제학설을 꿰맞춘다는 국수주의적 국제법학관을 대변하였다.(주19)

요코타는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를 신봉하는 대표적 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켈젠의 입장과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가 켈젠의 입장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된 것은 일본국의 입장을 수호하는 국수주의학자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3) 요코타와 일본정부주장 비판

이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비회원국 권리의무설과 경찰행위설을 검토해보자.

첫째, 비회원국 권리의무설을 살펴보자.

유엔헌장은 회원국 간의 국제법적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는 조약이다. 그러나 조약일반처럼 비회원국에 대해서는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헌장 제2조는 제1조에 명시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추구함에 있어 회원국의 행동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회원국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또한 안보리의 결정을 이행하거나 안보리가 정하는 바에 따른 이행조치, 상호원조 제공의 주체는 회원국이다.(헌장25조,48조,49조)(주20) 당시는 일미동맹 등의 지역기구를 형성하기도 전이지만 설령 지역약정이나 지역기관이 결성되어 강제조치를 취하고자 할 때도 안보리의 허가 없이는 불가하다.(헌장53조)(주21) 일본의 참전에 대해 안보리는 허가한 바가 없다. 따라서 이들 헌장조항에 의해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다음으로 헌장29조에 의해 설치된 안보리의 보조기관에는 남녀 개인이 참여할 수 있다.(헌장8조)(주22) “유엔사”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면 아무문제가 없다는 일본 법률가들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최고법원장이던 타나카(田中耕太郞)는 1950년 7월 23일자 신문에 만약 유엔의 요구가 있으면 일본인이 개인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주23) 일본 참의원의장인 사토(佐藤尙武) 역시 일본이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도 일본인들이 개인자격으로 유엔군에 입대하는 것은 헌법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주24) “유엔사”를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보면 일본국민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사”는 1994년 유엔법률국이 명백히 밝혔듯 유엔의 보조기관이 아니다.(주25) 따라서 이들 조항에 의해서도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헌장103조(주26)에 의하면 유엔헌장의 우선성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미‧일간의 국제점령법보다 유엔헌장 상의 의무가 우선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켈젠에 의하면 두 가지 규범 또는 두 가지 의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하나의 경우에만 ‘우선적’이면 다른 하나는 유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즉, ‘우선’하지 않는 규범이나 의무는 ‘우선’인 의무를 규정하는 조약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103조는 회원국 간 체결된 불일치 조약과 관련해서는 불필요한 조항이며,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에 체결된 불일치 조약에 대해서는 매우 큰 문제가 된다. 현행 일반 국제법 하에서 조약은 동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조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조 6항(주27)에 따라 헌장이 새로운 일반 국제법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 즉 UN법이 모든 국가에 대해 유효하고 적용가능한 초국가법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회원국과 비회원국 사이의 조약에 관한 제103조의 규정은 현행법과 저촉되지 않는다.(주28) 그러나 유엔헌장은 국가간의 법이지 국가위의 법은 아니다.

따라서 헌장103조에 의해서도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둘째, 경찰행위설을 살펴보자

일본정부는 1952년의 국회질의응답에서 참전행위가 유엔에 대한 협력활동에 해당하나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주29) 요코타의 경찰행위설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요코타의 경찰행위설은 트루먼으로부터 유래한다. 1950년 6월 27일 안보리 결의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권고’했다. 트루먼은 1950년 6월 29일 언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전쟁 중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전쟁 중이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조치는 유엔에 의한 경찰조치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데 동의하였다.

유엔헌장의 채택과 관련하여 1943년 미 연방의회에서 이루어진 논의과정 중 상원의원인 페퍼(Claude Pepper)는 연방의회의 전쟁선언권을 국제기구에 위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다만 소규모전쟁(small wars)에 있어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경찰력(police force)으로써 의회의 사전동의없이 미군이 사용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미국역사에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군사적 조치들은 해적과의 전투, 미개척의 해안에 소규모의 해군을 상륙시킨 행위, 멕시코 국경지대의 강도들이나 소떼 도둑을 쫒기 위한 군대동원 등이었다. 이때 사용된 느슨한 경찰조치(police action)라는 개념을 후에 트루먼이 의회의 동의없이 미군을 한국에 파병하는 법적 근거로 이용하였다. 트루먼은 페퍼의원이 발언하던 당시에 같은 상원의원이었다.(주30)

유엔의 행동이 국제사회를 대표한 경찰행위라면 침략자에 적용될 법은 낡은 전쟁법규가 아닌 새로운 유엔경찰법규가 아니면 안된다. 이같은 경찰법의 제정이 경찰행위에 선행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범죄자에 대하여 「불법으로부터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ex enjuria non oritur jus)라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주31) 그러나 유엔도 미국도 경찰행위에 해당하는 법 개념을 제정한 바가 없다. 비유는 법이 아니다.

그럼 요코타가 경찰행위라고 비유한 유엔의 군사조치에 대해 살펴보자.

안보리는 39조와 42조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회원국들에게 무력사용의 ‘권한을 부여할(authorize)수’ 있다. 42조에 의거한 안보리결정은 2조 4항에 의해 금지된 무력사용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결정이다. 그러나 단지 39조에 의거한 단순한 권고는 이 같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주32) 39조는 ‘권고’(주33)와 41조와 42조에 따라 취해지는 ‘조치’를 구별하고 있다. ‘권고하기’와 ‘강제조치 결정하기’는 39조 내에서 안보리의 서로 다른 두 기능이다. 39조하의 강제조치는 안보리에 의해 결정, 지시될 수는 있으나 권고될 수는 없다. 만약 안보리가 39조하의 권고하기를 원한다면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평화적 수단만을 권고할 수 있다.(주34) ‘권고’는 오직 유엔헌장 6장에 나열된 평화적 해결에 대해서만 사용하도록 헌장제정 당시부터 명확히 정의되었다.

스톤(J. Stone) 역시 헌장 39조 규정에서 “권고한다”는 것은 평화적 수단의 권고만을 의미하며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포함하지 않으므로, 6월 27일의 결의에서 안보리가 가맹국에 군사원조 등을 권고한 것은 헌장에 입각한 결의가 아니라고 한다.(주35)

따라서 이들 결의에 따른 참전국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일 뿐이다.(주36) 통합사령부든 “유엔사령부”든 간에 그것은 헌장 29조에 계획된 방법대로 창설되지 않았으므로 유엔의 기관이 아니다.(주37)

이리하여 미국은 작전수행상 다수의 국제약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스웨덴 간 「재한 유엔작전에 있어서의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의 참가에 관한 협정」 또는 「남아연방군의 재한유엔작전참가에 관한 미정부와 남아연방정부간의 협정」(주38) 등은 미국이 「주한유엔사의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체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는 이러한 약정조차 체결하지 않았다. 유엔사업무편람에는 “유엔사”가 ‘유엔의 대행기관인 미국 국가통수기구로부터 전략지침 및 지시를 수행한다’(주39)고 되어있다. 그러나 미국이 유엔의 「집행기관」으로 지명된 일은 없었다. 그 결과 그것을 “유엔군”이라 칭할 수 없으며, 「유엔의 조치」라는 표현은 정치적 용어일 수는 있으나 법적의의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주40) 유엔사무국 역시 유엔의 조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한 통합사령부는 유엔의 지휘와 통제하에 있는 강제조치라기보다는 개별국가에 의해 허가된 무력사용이라는 점에서 걸프전에서 설립된 연합군과 유사하다.(주41)

이로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유엔사”협력론의 근거는 모두 의심된다. 요시다시게루 총리는 현실적인 이유로 참전에 반대했지만 유엔의 조치 자체에 대해서는 지지했다. 요코타와 같은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이 유엔에 가입한 것은 1956년이므로 한국전쟁기간동안 유엔회원국으로서의 어떤 권리나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주42) 또한 유엔의 군사조치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엔참전국들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였다. 1951년 요시다애치슨교환공문과 1954년 일본유엔사행정협정의 최대전제인 한국에서의 ‘유엔조치’는 부존재 한다. 따라서 요시다 시게루의 참전결정이후 현재까지 일본정부가 추구해온 유엔조치의 경찰행위설은 의심된다.

4) 일본정부조치의 유엔헌장 위반여부

다음으로 요시다 정부의 행정적 책임을 살펴보자. 소해대에 내린 명령서는 요시다의 유엔헌장위반이 의심되는 증거이다. 요시다는 1950년 10월 9일, 특별소해대 제2전대의 함선에 전보 한 통을 최종적으로 보냈다.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위해 한국해역에서 유엔군의 소해작전에 협력할 것이다.”(주43)

또한 1차 원산소해작전에서의 사고 후 10월 31일 해상안전청 오오쿠보 청장은 특별소해대 타무라 사무총장을 대동하고 오카자키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한반도해역에서 특별소해대 활동에 대한 정부의 의향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전쟁초부터 참전찬성론자였던 오카자키 장관은 요시다 총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일본정부로서는 유엔군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고, 이에 따라 강화조약을 일본에 유리하게 이끌어 갈 생각이다. 추운 겨울 한반도해역에서 노후화된 작은 배로 소해작업에 대단히 노고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나 최선을 다하여 미해군의 요망에 부응하길 바란다. 일본정부로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심려하지 말라”(주44)

유엔회원국이라도 안보리의 허가없는 강제조치는 헌장위반인데 비회원국이 유엔의 강제군사조치에 참여하거나 원조를 제공하는 것은 유엔헌장위반이다. 또한 유엔의 명칭을 도용하고, 유엔깃발을 불법사용 했으며 자국의 조치를 유엔의 조치로 기만한 미국의 유엔헌장위반에 그대로 편승한 것이다. 미국의 헌장위반을 추수만 했다고 해서 일본정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상을 보면 일본은 미군주도의 유엔활동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력’한다고 표명해놓고 ‘기지제공, 후방지원, 작전지원’등 예상을 뛰어넘는 적극적 협력을 했다. 기지제공 측면에서 일본은 주한미군 가족의 긴급피난지, 긴급파견부대의 출격기지, 작전기지, 훈련기지, 군수기지로 “유엔사령부”의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방지원활동을 개관하면 수많은 일본인이 일본 국내에서 군수품 생산과 수송 등에 종사하였으며, 일본국내의 미군기지 등에서 서비스에 종사하였고, 해상수송, 항만기술자 및 하역자로서 한국의 해역 및 항만에 파견되어 “유엔사”활동을 지원했다. 직접적인 작전지원으로서는 소해활동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참전은 외면적으로 ‘유엔군에 대한 협력’이라는 명분을 걸고 내면적으로는 ‘대미협력’을 한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직접지원은 생각지도 못할 사안이었고 한국도 일본의 협력을 바라지 않았다. 직접적인 대미협력도 불가능했다. 오직 “유엔사”를 명분으로 한 참전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정부가 ‘미군에 대한 협력’보다 ‘유엔군에 대한 협력’을 선언하게 되는 배경은 야당과 국민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제1야당인 사회당도 ‘미군에 대한 협력은 불가하지만 유엔의 활동은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미군이 유엔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유엔사”협력이라는 명분으로 대미협력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일본정부는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로서 “유엔사”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한미안보조약 제3조에서는 ‘태평양지역에서의 무력공격에 한미가 공동으로 대응’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미일안보조약 제6조에는 ‘극동에 대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기여하기 위하여 일본은 미군에게 시설과 구역을 허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두 조약은 한미일 3국이 극동지역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연동되어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된다.(주45) 그러나 “유엔사”는 한국전쟁부터 지금까지 일본이 직접적으로 한국유사사태에 개입할 수단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유엔사”를 앞세운 일본의 한반도개입은 유엔헌장위반을 반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사 로고. [출처 - 유엔사 홈페이지]
유엔사 로고. [출처 - 유엔사 홈페이지]

 

(2) 국제전쟁법 위반여부

1) 불법전투원

명확한 기록을 중심으로 “유엔사”와 일본정부의 국제전쟁법 위반여부를 살펴보자. 먼저 불법전투원개념을 중심으로 다음사례를 보자.

1950년 10월 2일 미극동해군참모부장 얼레이 버크소장은 해상안전청 오오쿠보(大久保)청장을 극동해군사령부로 불러, 원산만 소해지원을 요청했다.(주46) 오오쿠보 청장은 즉시 거절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해상안전청(MSA)의 공식지위 문제였다. 해상안전청법 제25조는 비군사적 단체로서의 해상안전청의 지위에 대해 명확히 했다. 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이 법의 어떠한 내용도 해상안전청 또는 그 직원이 군대로 조직되거나 훈련되거나 군사기능을 수행하도록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주47)

따라서 해상안전청법 제25조는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오오쿠보는 버크 소장 요청의 본질에 대해 1981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주48)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총리 요시다 시게루였다. 오오쿠보 청장의 보고를 받은 요시다 총리는 미군의 부대나 화물수송을 위한 용선傭船계약은 체결되었으나 소해작업은 계약하지 않았고 한반도해역에서의 소해작업은 전투행위이며, 해상안전청법 제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라고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일본해군이 미군의 지원작전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으로 곤란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요시다는 버크 소장의 지시에 따르도록 했다.(주49) 일본정부는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방침으로 결정했다.(주50)

“유엔사”는 요시다 정부에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을 행사했고, 요시다 정부는 소해대가 비군사조직이고 교전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법적인 적대행위에의 참가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교전자격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전쟁수행 자격을 국제법적으로 교전자격(facultas bellandi)이라 하고 교전자격을 가진 자를 교전자(belligerents)라고 한다. 비전투원이라 함은 병력에 속하되 직접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법무, 위생, 종교 등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 현대 전쟁법에 있어서는 정규군의 구성원이면 비전투원에게도 전투원과 거의 유사한 법적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비전투원이 아무리 전투원의 지위에 근접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적대행위의 권리는 전투원에게만 주어진다.(주51)

비정규군은 전시에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민중의 조직으로서 이에는 민병·의용병 등이 있다. 민병이란 전시에 국가가 소집·편성한 병단이고, 의용병이란 국가의 위급을 인식하고 자진 출원하여 병력에 속해서 전쟁에 종사하는 자로 편성된 병단이다. 그러나 민간공무원인 소해대는 비정규군도 아니었다. 민간인이라면 어떨까?

전투원이 교전자로서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할 권리를 갖는 것과 달리, 민간인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행위로 인한 기소 면제와 전쟁포로 대우를 핵심으로 하는 “전투원의 특권”역시도 향유하지 못한다.(주52) 민간인의 전투참여는 전쟁법위반으로 전쟁범죄자가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간공무원신분인 소해대의 적대행위참여는 전쟁법위반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4가지 조건을 갖추면 교전자격을 부여받을 수는 있다.

1907년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의 부속서인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규칙 제1조” “1949년 제네바 제3협약 제4조(A)(2)”는 합법전투원으로서 포로지위를 부여받기 위한 4개 조건을 명시했다.

ⓛ 부하를 위하여 책임을 지는 통솔자가 있고,
② 원거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고착된 특수기장을 가지고,
③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고
④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를 준수할 경우에 한하여 교전자격을 인정한다
.(주53)

민병, 의용병, 민간인이라도 위의 4개 조건을 갖추면 합법전투원이 된다 하겠다. 그러나 일본특별소해대의 경우, 고착된 기장부착이라는 두 번째 조건을 명백히 위반하였다. 다음을 보자.

10월 6일 미제3소해대의 스포포드 대령은 일본 소해대가 제7통합임무부대 지휘관 스트라블 중장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고 통보했다. 동시에 일본 제1소해대와 제2소해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하였다. 이것을 접수하고 특별소해대 사무총장은 특별소해대의 임무편성을 규정한 명령 특별소해 제1호를 하달하였다.(주54)

“일본 소해부대는 일본 국기 대신 국제 ‘E’깃발(상업용 선박에 사용됨)을 게양할 것이다.”(주55)

선원들은 일본선박이 일장기를 달고 항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법적지위는 정확히 무엇인지 질문했다. 선원들은 일시적으로 더 이상 일본시민이 아니라 미 해군에 고용된 무국적 계약자인가? 소해대 사무총장 타무라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주56)

일본국기 대신 ‘E’깃발을 단 것은 교전자격을 갖기 위한 4개의 조건 중 2번째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원거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고착된 특수기장을 달기는커녕 오히려 고의적으로 위장‧기만한 것이다.

이는 최근 전쟁법 이론인 불법전투원의 조건에 의하면 두 가지나 해당된다. 우선 불법전투원의 조건을 보자.

(i) 정규군이 제복을 착용하지 않거나 기타 고착된 식별표지를 하지 않고 간첩행위나 적대 행위를 한 경우,
(ii) 정규군에 편입되지 않은 비정규군이 합법전투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 대행위를 수행하는 경우,
(iii) 민간인이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주57)

일본소해대는 (i) 고착된 식별표지를 하지 않고 (ii) 비정규군이 합법전투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대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따라서 “유엔사”와 요시다 정부가 소해대에 내린 명령과 조치는 국제전쟁법의 위반이 의심된다.

다음은 주일미군기지에 근무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기지노동자들의 사례를 보자.

미7사단 제49야전포병대대 대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상부에서 일본인노동자들을 한국으로 데려가지 말라는 지침도 없었고 그저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하던 연장선에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주58)

이들은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로 비공식적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이들의 종군 동기는 대체로 미군부대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또는 아니면 막연히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자원하여 한국행을 자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전투에서 위기에 처할 때나 혹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전투‧적대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는 교전자격조건을 두 가지나 위반한 것이다.

③ 공공연한 무기휴대
④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의 준수

이들은 전투목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기에 공공연하게 무기를 지급하지 않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불가피한 상황에서 전투에 휘말렸다. 또한 미군대대장의 진술에서 확인되듯 지침도 없이 상식선에서 데려갔기에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를 준수할 수 없었다. 다음은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자.

제24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타케시(Matsunobu Takeshi, 28세)는 1950년 7월 4일 이후 사단 포병본부를 따라 통역 겸 기술자로 종군하였고, 대전에서 부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직접 전투를 가담하여 북한군 2명을 사살하였다고 했다.

제24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미네후미(Yoshiwara Minefumi)는 1950년 7월 19연대 G중대와 함께 종군하면서 주로 주방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지연전을 수행하던 중대와 함께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결국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처가 미 187공수연대 군 경찰을 통해 소재 파악을 요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아사이신문>1952년 11월 14일자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952년 10월 14일 극동군사령부는 그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 권유에 의해 참가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주59)

이는 교전자격조건 ⓛ 부하를 위하여 책임을 지는 통솔자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전투원으로서 지휘통솔체계에 속하지 않은 채 적대행위를 한 것이다. 이 사안은 미군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써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맥아더가 일본인의 참전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공표한 상태였기에 조사부대는 이 사건이 미군정책에 명백히 위반된다는 점에서 매우 복잡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상부의 특별한 지침이 요구된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안은 특별보안이 유지되도록 통제되었다.(주60) 이처럼 “유엔사”는 불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모츠(Ueno Tamotsu)는 1950년 7월 9일 부산에 도착하여 열차로 대전으로 갔고 제24사단 34연대 통역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부대와 종군하면서 항상 전투에 참가하여 사격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주61)

후미죠의 경우는 사단 병원에서 근무하였으나 철수작전 시 개성 북쪽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북한군과 사격전을 수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주62)

히라츠카(Shigeji Hiratsuka)는 1950년 7월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E중대에 소속되어 종군하였다가 1950년 9월 4일 낙동강전투에서 교전 중 사망하였다. 1952년 11월 13일 아사이신문에 「조선에서 전사했던 한 일본인」이란 제목으로 히라츠카(平塚重治)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단에서는 예하부대에 그에 대한 의무기록이나 인명손실기록을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하였고, 각 부대의 조사결과 의무기록이나 사망기록이 전혀 없다고 보고되었다.(주63) 미군 당국은 그 이유가 공식적인 승인 없이 밀항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주64)

히라츠카 역시 전투원으로서의 지휘통솔체계 없이 비군사요원으로 부대에 소속되었다가 적대행위에 내몰린 경우이다. 일본인노동자개인의 전쟁법위반보다 그들을 교전자격도 갖추지 않고 전쟁터로 끌고 간 지휘관들의 전쟁법위반이 더 심각하다 하겠다.

코바야시(Sakae Kobayashi, 21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시 제7사단 32연대 H중대의 하우스보이로 종군하였으며, 북진작전에서는 중대장과 함께 정찰을 나가 북한군을 만나 사격전을 수행한 적이 있다고 했다. 중대장은 만에 하나 공산군이 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안 된다고 하여 즉시 후방으로 가도록 지시했다고 진술했다.(주65)

이처럼 현장지휘관들도 일본노동자들의 교전행위가 문제가 될 것임을 정확히 자각‧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켄죠(Takatsu Kenzo, 19세)는 1950년 9월 15일 제7사단 32연대 57포병대대에 소속되어 종군하면서 주로 주방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대대가 동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사격전에 참가했으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켄죠의 경우는 중공군과 교전 중 부상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극동군사령부는 그의 사안에 대해 특별히 비밀등급을 1급 비밀로 상향할 정도로 민감하게 처리하였다.(주66)

제2사단 23연대 1대대 A중대 소속되었던 츠네시데(Shigamitsu Tsuneshide)는 부대의 하우스보이였으나 소총을 지급받았고 북한지역에서 중공군을 만나 사격전을 전개하여 3~4명을 사살하였으며, 자신도 중공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었다고 진술하였다.(주67)

1950년 11월 27일 세이이치가 부산에서 한국군 경찰의 검문에 걸려 심문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은 김두한 외무장관 명의로 미국 대사관을 통해 세이이치의 한국입국경위 조사와 일본으로의 추방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문제에 관해 후에 제1기병사단 감찰참모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담당 중대장들이 일본인들을 공식적인 절차없이 허락한 것은 잘못이고, 그들이 그것이 위법사실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면책이 될 수 없다.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들어간 것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주68)

현장지휘관이 위법사실을 몰랐어도 위법은 구성되고, 위법에 대한 처벌도 피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미군 내부적으로 종군 일본인기지노동자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려한 사안이었다. 일본인 종군노동자들의 소재가 공산측에 알려지면 미국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기지노동자들의 불법참전에 대한 전쟁법위반책임은 전적으로 “유엔사”측에 물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요시다는 “유엔사”에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라는 미국의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요시다는 국내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때론 어쩔 수 없이, 때론 능동적으로 요구에 응했다. 1950년 6월 이미 요시다는 “유엔사”의 전쟁수행에 광범위한 비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주69) 또한 138척의 일본 상선과 7,550명의 선원을 한반도로 오가는 유엔군과 군수품수송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요시다의 협정이 있었다.(주70) 미국대사를 지냈던 머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선박과 철도전문가들은 숙련된 부하직원과 같이 한국에 가서 미국과 함께 유엔사령부 예하에서 활동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극비사항이었다. 한국사정을 잘 아는 수천 명의 일본전문가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유엔군은 한국전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주71)

이것은 전쟁에 대한 직접개입의 중요하고 실질적인 형태를 나타낸다.(주72) 이는 “유엔사”와 일본정부 공동으로 전쟁법위반책임이 의심되는 사건들이다.

2) 용병

다음으로는 참전일본인의 용병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뉴욕 타임즈>는 1950년 8월 12일자 사설에서 밝힌 일본인의 참전반대 이유 중 하나가 일본인은 “유엔군”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군의 용병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주73) 다시 소해대의 사례를 살펴보자.

1950년 10월 9일, 특별소해대가 요시다 시게루총리로부터 최종적으로 받은 전보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

“특별소해대원, 귀하는 항구를 떠날 때부터 항구로 돌아올 때까지 미군에 임시 고용된 것으로 간주된다. 단, 복무기록의 경우에는 계속 공무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한다.”(주74)

일본선박과 선원들이 미해군사령부로 이전된다는 발표는 그들이 일종의 “용병”임을 암시했다. 미육군 공간사에 의하면 맥아더는 일본 소해정의 사용은 계약에 의해 고용된 것이기 때문에 전투목적이 아니라 인도적 목적으로 운용되었다고 국방성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밝히듯 그들은 전투목적으로 운용되었다. 용병으로서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맥아더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국전쟁 후에 발전된 용병관련 국제법은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가 1977년 범용병회의에서 채택한 “아프리카 용병 폐절에 관한 OAU 의정서(용병배제조약),”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엔총회가 1989년에 채택한 “용병모집, 사용, 자금공여 및 훈련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용병금지조약),”(주75) 1977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채택한 제네바 협약에 추가되는 제1의정서(제1추가의정서) 제47조의 정의가 있다. 이 제47조에 따르면 용병은 전투원의 권리와 포로의 권리가 없다.(주76)

따라서 맥아더의 말처럼 소해대가 고용된 용병이었다면 교전자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도적 목적이 아니라 전투‧적대행위를 목적으로 운용되었으므로 용병관련 국제법의 기준으로 보면 그 위반이 의심된다.

 

(3) 평화헌법 위반여부

일본국헌법 제9조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 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 기한다.
② 제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교 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일본국헌법 제9조①항 전쟁포기의 주체는 국가가 아닌 일본국민이다. 일본국민이 전쟁에 참여했다면 그는 이 조항의 위반자가 된다. 그런데 그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군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면 그를 배치한 군대와 지휘관이 위반자가 된다.

타케세(Ito Takeshe, 20세)는 전쟁 이전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과 함께 한국으로 왔으나, 전쟁이 발발한 후 제24사단 21연대 C중대에 소속되어 미군 병사들과 똑같이 군복과 소총 등을 지급받고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7개월 동안 전선에서 공산군을 20명 정도 사살하였고 자신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미국정부로부터 퍼플 허트(Purple Heart)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진술했다.(주77) 이 훈장의 수여는 종군한 일본기지노동자 가운데 유일한 경우로 미국정부가 그의 종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는 거꾸로 “유엔사”가 그를 헌법9조의 위반자가 되도록 지휘한 책임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소해대사례를 다시보자.

1950년 10월 4일 미해군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중장에 의한 긴급동원에 불안과 불만을 느낀 소해대원들은 타무라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한 함장은 “어느 바다에서 기뢰제거를 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가 주한 미해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면 강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위헌 아닙니까?”
또 다른 사람은 “우리는 38선을 넘는 것입니까? 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을 넘으면 우리는 참가할 수 없습니다.”
(주78)

부하들 사이의 불신과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타무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미 극동군사령부와 안전한 장소에서만 기뢰제거를 하기로 합의했다.”(주79)

그것이 거짓말임은 금방 드러났다. 한 익명의 해상안전청대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새로 제정된 헌법에서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다른 나라의 전쟁을 위해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국가 공무원, 행정 공무원이다…일본재건 사명을 가지고 일본재건을 위한 국내 소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기뢰제거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주80)

비록 많은 인원이 전직 일본제국해군(IJN) 선원이었지만 전후 일본의 새로운 평화국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로서 그들은 평화헌법을 수호하려 했다. 이 사람들에게 다시 전쟁에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전후 국가의 정체성과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주81)

일본 특별소해대는 원산항부근 미구축함의 육상포격이 실시되는 가운데 정박예정해역의 소해작업을 실시하였다.(주82) 원산에서의 소해임무는 시작부터 치명적임이 증명되었다.

10월 17일 결국 일본소해함이 기뢰와 충돌했다. 이 폭발로 승무원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의 동료선원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하던 배의 요리사 나카타니 사카타로오(Nakatani Sakatarō)는 갑판위에 있지 않았기에 기뢰충돌시 즉사했다.(주83)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지 불과 5년 만에 일본선원은 전쟁에서 적대행위의 결과로 다시 한 번 죽거나 다쳤다. 분노한 함장들은 타무라에게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전쟁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다. 기뢰제거를 중지하라. [우리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주84) “[우리는] 속았다.”(주85)

모인 함장들은 원산작전의 미 해군 사령관에게 일본소해정의 침몰에 대한 분노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입안하여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해상안전청 민간고용인의 직무가 아니었다.(주86)

타무라 휘하의 해상안전청부대 2인자인 노세(Nose)대령은 이제 전체작전을 불법이자 부하들의 생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위험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노세는 더 이상의 기뢰제거를 거부하는 부하장교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노세와 그의 동료 함장은 그들의 사령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산에 있는 연합함대 미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겠다고 위협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미국상륙부대의 중장인 앨런 스미스(Allen Smith)는 분개했다. 스미스는 타무라에게 다음 날 아침 일본함정이 소해를 재개하거나 작전 개시 후 15분 이내에 일본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주87) 노세는 간단히 말했다.

“쏠 테면 쏴라.”(주88)

이는 전후 일본군 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성공적인 불복종 사례였다.

상선의 광범위한 동원과 해상안전청의 전개는 전후 시대에 일본이 해외분쟁에 직접 가담한 첫 번째 사례임을 의미했다. 요시다 총리와 오오쿠보 청장은 헌법 9조 위반을 합리화했다. 패전 후 해상보안청에서 없어졌어야 될 조직이었던 구해군의 소해대가 은닉하고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정체가 드러났고, 결국 해상자위대의 중핵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속으로는 출동하여 요시다 정권유지를 위한 ‘국내여론의 환기’와 국민경제궁핍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특수’로 나서야 했으나 겉으로 제시할 수 없는 처지에서 미국이 제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은 미일 간에 한반도 유사 등 주변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 간의 작전협력항목으로 ‘일본영역 및 일본주변의 공해역에서 기뢰제거와 기뢰정보를 교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일본주변의 공해역이므로 한국의 영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미국이 극동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소해정은 3척에 불과하나 일본 해상자위대는 소해모함 3척과 34척의 신소해정을 보유하고 있다. 한반도 유사시에 소해능력이 부족할 경우에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와 같이 한반도 영해까지 일본의 소해활동을 요구할지도 모른다.(주89) 한미일동맹이 가속화되면서 공동군사연습의 범위는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일본정부의 평화헌법위반은 반복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의 “유엔사후방기지”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브룩스 전 유엔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은 “유엔사”를 강화하던지 새로운 극동군사령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유엔사”를 중심으로 한미일동맹이 현실화되는 것은 유엔헌장과 국제전쟁법과 평화헌법을 총체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의심되는 과거역사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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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池井優, 『日本外交史概説』, (東京: 慶応義塾大学出版会, 1992), p.269.

2) 山崎静雄, 『史実で語る朝鮮戦争協力の全容』 (東京:本の泉社,1998), pp.270-27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1

3) 辻清明編, 『資料戦後二十年史』, (東京:日本評論社, 1966), pp.81-82.

4)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2

5) 그는 1896년 아이치현 출생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서 배우고 1930년 동대학 법학부교수가 된다. 1948년 도쿄대 법학부장, 1957년 도쿄대교수 퇴직, 1960년~1966에는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하고 1993년 사망했다. 鄭祐宗, 「戰後日本の國際法學者における朝鮮問題認識」, 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第20号, (2021), p.37. 참고로 일본 평화헌법수호운동의 시발점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도쿄대 법학부에 1934년 입학하니까 그의 스승 중 한명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1937년 요코타가 아닌 난바라 시게루(南原 繁)의 연구실조수가 된다. 난바라는 일본국체론을 비판한 진보적 정치학자였고 1945년 도쿄대 법학부장이 되니 요코타는 난바라의 후임 법학부장이었던 셈이다. 1946년 난바라는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출되어 신헌법심의에 참여했다. 그러니 그의 제자였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평화헌법수호운동을 벌인 것은 그의 스승의 길을 따른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는 1949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시 전면강화를 주장하며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정면대립 하였다.

6) 橫田喜三郞, 日本の講和問題, (勁草書房). p.111

7) 일본이 유엔의 회원국이 된 것은 1956년으로, 한국전쟁 당시는 회원국‧가맹국이 아니었다.

8) 橫田喜三郞, 朝鮮問題と日本の將來, (勁草書房,1950), pp.68-71, 208-209; 鄭祐宗, 「戰後日本の國際法學者における朝鮮問題認識」, 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第20号, (2021), p.27

9) 第8回國會施政方針演說, 1950.7.14.; 고영자, 「6·25전쟁과 전후일본;미점령기의 講和문제와 독립회복」, (경희대학교박사논문, 2010), p.246재인용

10) 『每日新聞』, 1950年7月12日字.

11) 『讀賣新聞』 1950年10月30日字.

12) 『每日新聞』, 1950年7月10日字.

13) 『每日新聞』, 1950年8月14日字.

14) GHQ SCAP, Prefecture Press Analysis(27 Aug 1950), MFSN-267(군사편찬연구소소장 자료번호)

15) New York Times, 12th August 1950.

16) 『每日新聞』, 1950年8月10日字. 맥아더가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법률문제보다도 오히려 일본인 참전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일본의 군사적 위기 문제였다. 주일 미군이 한반도로 모두 투입되는 상황에서 일본인마저 투입하게 된다면 일본안보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52

17) 神井林二郎篇訳, 『吉田茂=マッカーサー往復書翰集』, (東京: 法政大學出版局, 2000), pp.340-341

18) 佐世保市総務部, 『佐世保市史(政治行政編)』 (東京: 図書刊行会,1982), pp.348-349,410.;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2

19) 大鄕正夫, 「南北朝鮮統一なめく゛る國際法問題」, レファレンス22(12), 1972, p.113

20) 제25조 유엔회원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이 헌장에 따라 수락하고 이행할 것을 동의한다. 제48조1.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조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유엔회원국의 전부 또는 일부에 의하여 취하여진다. 제49조 유엔회원국은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정한 조치를 이행함에 있어 상호원조를 제공하는 데에 참여한다.

21) 제53조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22) 제29조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임무의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을 설치할 수 있다. 제8조 유엔은 남녀가 어떠한 능력으로서든 그리고 평등의 조건으로 그 주요기관 및 보조기관에 참가할 자격이 있음에 대하여 어떠한 제한도 두어서는 아니된다.

23) 『每日新聞』, 1950年7月23日字.

24) 『每日新聞』, 1950年8月5日字.

25)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이 제공한 군대를 미국의 권한 하에 있는 통합사령부에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분명히 안보리는 통합사령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보조기관으로 설립하지 않았다.”UN Office of Legal Affairs, “STATUS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IN KOREA — SECURITY COUNCIL RESOLUTION 84 (1950) OF JULY 1950”,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501

26) 제103조 유엔회원국의 헌장상의 의무와 다른 국제협정상의 의무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이 헌장상의 의무가 우선한다.

27) 제2조6. 기구는 유엔의 회원국이 아닌 국가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확보한다.

28) H.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 Frederick A. Praeger, 1950), p.116

29) 山崎静雄, 『史実で語る朝鮮戦争協力の全容』, (東京:本の泉社、1998), pp.310-311;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65

30) Louis Fisher, “The Korean War : On What Legal Basis Did Truman Act?”,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1995, p.25; 崔哲榮, 「미국의 UN참여법과 미군의 6.25전쟁 참전의 합법성문제」, 美國憲法硏究Vol.21 No.3, (미국헌법학회, 2010), p.154

31)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A Treatise on the Dynamics of Disputes and War Law, (Stevens and Sons, 1954), p.237; 이한기, 「한국휴전협정의 제문제」, 國際法學會論叢Vol.3, (대한국제법학회 1958) p.63

32)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ed., (London: Routledge, 1997), p.390; 김대순, 국제법론제11판, (서울: 삼영사, 2006), pp.1084-1085

33) 헌장 기초자들의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권고’란 단어는 어떤 구속력 있는 병력도 안보리의 조치에 첨가하지 않았다. 유엔헌장제정회의 제7차 Ⅲ/2위원회 회의에서 ‘벨기에 대표는 4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권고”란 단어의 법적 효력에 대해 발기한 국가들에게 해석을 요청했다. 미국 대표는 영국 대표의 관점에 합의하여 말하길, 강요나 강제없음을 상정했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했다. Cf. also U.N.C.I.O. document 1027, Ⅲ/2/31(Ⅰ), p.4.);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444인용

34) 헌장 39조의 권고(Recommendation)가 평화적 수단의 권고를 의미하느냐, 또는 강제적 수단의 권고까지 포함하느냐의 논의에서 평화적 수단의 권고에 한한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이 다수 학자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932; Hersch Lauterpacht, Oppenheim's International Law, Vol.II 7thed., (London: Longmans, 1972), p.164; Ian Brownlie,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 by States (Oxford: The Clarendon, 1963), p.335;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230; Grenville Clark and Louis B. Sohn, World Peace through World Law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p.113; L. M. Goodrich and E. Hambro,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2nded., (Boston: World Peace Foundation, 1949), pp.27-28; James Leslie Brierly, The Law of Nations: an introduction to the international law of peace, 6th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394; 김명기, 주한국제연합군과 국제법 (서울: 국제문제연구소, 1990), p.20

35)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p.234-235

36) 이들 안보리결의가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개별국가의 조치라는 입장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이한기, 「한국휴전협정의 제문제」, 국제법학회논총제3호, (1958), pp.37-85; 김대순, 『국제법론』(제9판), (삼영사 2004), p.988;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34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7), p.213등이 있고, 국외에서는 Hans Kelsen, “The Recent Trends i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with Supplement, (Steven & Sons, 1951), pp.936-937;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Routledge, 1997), pp.389-390;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A Treatise on the Dynamics of Disputes and War Law, (Stevens and Sons, 1954), p.231등이 있다. 반대로 그것을 유엔의 행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로는 국내에서는 김명기, 주한국제연합군과 국제법, (국제문제연구소, 1990), pp.52-62; 제성호, 한반도 평화체제의 모색, (지평서원, 2002), p.15; 이병조·이중범, 국제법 신강(제9개정판), (일조각, 2003), p.959의 각주3; Chee, Choung II, Korea and International Law, (Seoul Press for the Institute of International Legal Studies, Korea University, 1993), p.88, 강병근, 「주한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 관한 법적문제」, 한림대학교민족통합연구소총서제2권, (2000), p.207; 배재식, 「한국휴전의 법적제문제」, 『법학』(서울대) 통권33호, (1975), p.52등 있고, 국외에서는 Rosalyn Higgins,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Documents and Commentary II.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178; D. W. Bowett, United Nations Forces: A Legal Study, (Frederick A. Praeger, 1964), pp.45-47; Finn Seyersted, United Nations Forces: In the Law of Peace and War, (A.W. Sijthoff-Leyden, 1966), p.41; Danesh Sarooshi, The United Nations and the Development of Collective Secur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110, 169이하; Christine Gray,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 2nd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p.199등이 있다.

37) Baxter, “Constitutional Forms and Some Legal Problems of International Military Command”, British Year Book of International Law, (1952), p.334. 순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국사변에 대한 Command의 구조는 일본점령에 채용된 Command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 두 개의 경우에 단일국가가 국제조직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단일국가는 실제의 군사작전에 어떠한 통제도 행사하지 않았다.(Ibid, p.335)

38) 다른 참전국들도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표적 경우가 네덜란드와의 협정인데, 그 협정의 주된 목적은 참전국들이 전쟁물자를 미국으로부터 보충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osalyn Higgins,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Documents and Commentary II,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205;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34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7), p.205

39) UNC and CFC Manual(유엔사연합사업무편람), 7 November 1984, p.7-2-2

40) H. Kelsen, “The Recent Trends i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with Supplement, (Steven & Sons, 1951), p.937참조.

41)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42) 이시우(李時雨), 「國連システム と 國連軍司令部」, PRIMEno.41, (東京: 明治學院大學國際平和硏究所, 2018), pp.13-14

43)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p.1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4) 大久保武雄, 『海鳴りの日日』, (東京: 海洋問題硏究會, 1978), p.231.

45)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p.171-175

46) 大嶽秀夫, 『戰後日本防衛問題資料集․ 第一卷』, (東京: 三一書房, 1992), p.524.

47) “Shōwa nijyūsannen hōritsu dai nijyūhachi gō kaijōhoanchōhō,” E-Gov hōrei kensaku, accessed June 5, 2022.;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8) Shirōchi, Shōwa nijyūgonen, p.2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9) 大久保武雄, 『海鳴りの日日』, (東京: 海洋問題硏究會, 1978), p.209

50)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4

51) 이광원, 「군인의 법적지위」, (전남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0), p.62

52) 안준형, 「국제인도법상 불법전투원의 법적 지위」, 서울국제법연구Vol.28 No.1, (서울국제법연구원 2021), p.137

53) 이광원, 「군인의 법적지위」, (전남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0), p.61. 다만 일각에서는 이외에도 1) 위계조직(hierarchical organization), 2) 교전당사국에의 소속, 3) 억류국에 충성의무(국적)가 없을 것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추가적으로 요구된다고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Yoram Dinstein, The Conduct of Hostilities under the Law of International Armed Conflict, 3r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pp.54-56참조.

54)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6

55) Shōgo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sōkaitai,” (March 1978),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56)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57) David Kretzmer, “Unlawful Combatants,”in Gordon Martel (ed.), The Encyclopedia of War (Blackwell Publishing, 2012), p.1.; 안준형, 「국제인도법상 불법전투원의 법적 지위」, 서울국제법연구Vol.28 No.1, (서울국제법연구원 2021), p.142

58) 테일러 대대장이 사단포병에게(1951.1.16),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1

59) 『朝日新聞』,1952年 11月 14日字.

60) 치카마우가캠프가 서남부사령부에게 실종사건보고(1951.11.26) ; 유엔군사령부가 일본군수사령부에게(195112.20),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1) Ueno Tamotsu,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2)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5

63) 1st Cavalry Division Inspector, Certification(1951.1.26) ; 1st Cavalry Division, Certification(1951.1.28) ; 15th Medical Inspector, Japanese Nationals evacuated through medical channels (1951.1.29.),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4) 『朝日新聞』,, 1952年 11月 13日字.

65) Sakae Kobayashi, Statement,; 8041st Army,, Certification (1951.2.22),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6) 서남부사령부가 일본군수사령부에게(1950.12.20); 일본군수사령부가 극동군사령부에게(1950.12.22); 극동군사령부가 일본군사사령부에게(1950.12.22); Takatsu Kenzo,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7) Shigamitsu Tsuneshide,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9

68) 제1기병사단 감찰참모의 조사보고(1951.1.26),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9) Wada Haruki,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New York: Rowman & Littlefield, 2018), p.138

70) Hisao Ōnuma, “Chōsen sensō ni okeru nihonjin no sansen mondai.” Sensō sekinin kenkyū 31, (Spring 2001), pp.2-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1) 古垣鐵郞譯, 『軍人の中の外交官』, (東京: 鹿島硏究所出版會, 1954), p.44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30

72) Yōji Kasawa, “Dai yon shō chōsen sensō to nihonjin sen’in: gunyōsen nado no jōsōin toshite,” Kaiin, no 10. (October 2007), p.91.;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3) New York Times, 12th August 1950

74)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 p.1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5) 용병배제조약은 용병의 정의를 ‘국가 및 OAU가 인정한 독립운동을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고용된 주체’(제1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용병고용 자체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1조에서 금지된 목적 이외의 용병고용, 예를 들어 앙골라와 자이르에서 반정부 세력을 탄압할 목적의 용병고용, 혹은 개인의 금전적 이익, 분쟁목적에 대한 공감, 병사에 대한 근친감, 개인적인 모험심을 목적으로 한 용병고용을 함으로써 조약의 적용을 면했다. 또한 조약은 적용 확보를 위한 강제수단이 결여되어 용병 배제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유엔은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용병금지조약을 채택하여, 용병모집, 용병사용, 용병에 대한 자금 공여, 용병훈련을 금지하였다. 동 조약은 용병행위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으나, 사찰조항이나 벌칙규정도 없기 때문에 조약의 유효성에 의문이 있다.

76) 전용태, 「민간군사경비회사(PMSC)의 업무수행과 그 법적문제」, 법학연구Vol.79, (한국법학회 2020), pp.674-675

77) Ito Takeshe,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78)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9)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0)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1) Hirama, “Sōkaitei haken,” p.129.;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9

83) Hirama, “Sōkaitei haken,” p.129.;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4)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5)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6) Yamazaki, Shijitsu de kataru chōsen sensō kyōryoku no zenyō, p.260.;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7) 포터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스미스(Smith)소장이 해상안전청(MSA)선박에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타무라와 동료 일본장교들은 스미스가 그들에게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지만 다른 목격자들은 스미스가 타무라에게 그가 “해고당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타무라는 스미스의 의견을 직접 들은 유일한 해상안전청(MSA) 장교였다. 결과적으로, 보강증거를 제공할 일본어로 된 다른 직접적 자료는 없다. 일반적으로 원산에 있던 일본 참가자들의 모든 설명은 스미스의 말을 타무라가 이해하는 대로 이해했다고 한다.;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8)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9)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66-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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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전남에서 전국으로 11.11총궐기 대행진

  • 정강산 기자
  •  
  •  승인 2023.10.24 16:55
  •  
  •  댓글 0
 

 

윤 퇴진 대행진 2회차...전남에서 올라오는 퇴진 열기

정권교체보다 근본적인 개혁...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

11월 11일 총궐기...새로운 대한민국의 첫 발걸음으로

▲23일 오전 11시 30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앞에서 열린 '전남지역 윤석열 정권 퇴진 총궐기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전남 일대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 전국 대행진’ 2회차가 열렸다. 전국 대행진은 11월 11일 ‘윤석열 정권 퇴진 총궐기’를 성사하기 위해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의 열기를 모아가고 있다.

제주에서 1회차를 마친 행진단은 23일 순천 법원 앞에서 전남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전남지역 총궐기 선포식을 가졌다.

이날 회견에는 진보연대 각 지부(화순, 광양, 나주, 무안)와 민주노총전남지역본부, 광주전남추모연대 등 13개 단체가 결합했다.

▲전남진보연대 문경식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전국민중행동

정권교체보다 근본적인 개혁...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

이들은 “윤석열 정부 1년 6개월 간 잘못된 외교와 경제정책으로 수출은 급감하고 민생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며 “윤 정부는 부자감세와 친재벌 정책으로 세수를 감소시켜 놓고서는 복지예산 삭감으로 서민들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 앞에 단 한 번도 비켜서지 않았던 정의로운 전남의 의기와 호남 정신으로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자”고 결의했다.

투쟁 발언에 나선 진보당 이성수 전남도당 위원장은 “윤석열 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정권교체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검찰청을 기소청으로 전환하여 정치검찰을 뿌리뽑고, 정치기본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며 자산불평등을 일소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윤석열 퇴진투쟁을 결의했다.

그는 “11월 11일 민중총궐기가 그야말로 민중대행동이 되어 개헌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전남이 앞장서겠다”고 전했다.

회견 이후 대행진단은 여수로 이동하여 흥국체육관 일대에서 거점 행진과 선전을 이어갔다.

버스를 필두로 14대의 차량이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11.11총궐기 소식을 전했고, 단원들은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노조법 2,3조 개정,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등 당면 현안을 알리며 퇴진 선전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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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총궐기...새로운 대한민국의 첫 발걸음으로

이날 전국 대행진의 피날레는 ‘전남 윤석열 정권 퇴진총궐기 한마당’이었다.

오후 6시 여수 이순신광장에 모인 대행진단은 대중가요와 민중가요를 부르며 버스킹 공연을 진행하는 한편,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분쇄 서명 부스와 함께 포토존을 운영했다.

이순신광장은 공연을 관람하는 시민들과 더불어 ‘모이자 11월 11일 민중총궐기로!’라는 구호가 적힌 포토존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시민들로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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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킹 무대에서 발언에 나선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의 윤부식 본부장은 “곧 추운 겨울이 오는데 윤 정부는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더니 난방비와 전기요금을 올려 서민들이 제대로 난방도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늘 민주노총이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시민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라며 “국민들이 좀 더 잘 살려면 윤 대통령이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라 말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윤석열 정권 들어 노동절에 건설노동자가 분신하고, 조선소 하청노동자가 0.3평 창살에 갇히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을 좀 바꾸자”고 독려했다.

윤 수석부위원장은 “이에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모두가 11월 11일 거리로 나오기로 했다”며 “그날 새로운 대한민국의 탄생은 전남 시민이 함께할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권 퇴진 전국 대행진’은 오는 25일 전북에서 3회차를 거쳐, 오는 11월 10일 서울까지 대장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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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부식 민주노총 전남지부 본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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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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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국민의힘 실세들도 책임지고 희생하는 자세 필요"

  • 장슬기 기자 
  •  
  •  입력 2023.10.24 07:04
  •  
  •  댓글 2

 

[아침신문 솎아보기] 24일자 신문 만평들, 인요한 혁신위 역할에 의구심

유진그룹, 3199억 원으로 YTN 인수…조선 “정치 간섭에 벗어날 기회”

기상천외한 동물학대, 영역동물 고양이 포획해 낯선 공간에 방사 환경변화 탓에 죽기도

국민의힘이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에 임명하자 24일자 아침신문들은 여당 개혁에 대한 기대감과 필요성을 나타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를 계기로 현 정부에 대한 냉혹한 심판이 있었다는 평과 달리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10일이 넘도록 혁신위원장을 구하지 못했고 여의도에선 ‘김 대표 입맛에 맞는 인사를 찾기 위해 늦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인요한 위원장이 전권을 약속받는다 해도 여전히 당 1인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며 향후 당 혁신 과정에서 당내 기득권 반발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관련해 이날 상당수 아침신문 만평에선 인요한 혁신위가 제대로 여당을 개혁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는 메시지를 그려냈다.

보도전문채널 YTN의 공공기관 지분 매각에서 유진그룹이 최종 낙찰자로 결정됐다. 이에 YTN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현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라는 평가를 내놨다. 여러 우려 속에서 조선일보는 소유 구조 변화가 오히려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고 전했다.

현재 법에서는 동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적극적 행위를 학대로 보고 처벌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법을 피해 새로운 방식으로 동물을 학대하고 학대방법을 공유하는 인터넷 공간까지 등장했다. 관련 대응이 필요한 실정이다.

▲ 24일 주요 아침신문 1면 모음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 진짜로 당 개혁할까

조선일보는 사설 <인요한 “국힘, 통합하고 의생하고 다 바꿔야” 관건은 실현>에서 인 위원장에 대해 “4대째 한국에서 선교·의료 봉사를 해온 미국 린턴가 자손으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며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은 의료인이 집권 여당의 쇄신작업을 이끌게 됐다”고 소개했다.

인 위원장은 “국민의힘의 많은 사람이 내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많은 변화를 예고한다”며 “지금 국민의힘은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고 4년 동안 편하게 의정 생활을 해도 되는 영남권 의원들이 주축”이라고 했다. 이어 “큰폭의 인적 쇄신이 불가피하다”며 “국민의힘을 이 지경으로 만든 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른바 ‘실세’들도 책임지고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 24일 조선일보 1면 사진기사

조선일보는 당의 개혁이 쉽지 않은 구조적 이유를 짚었다. 이 신문은 “국힘은 야당이 아니기 때문에 인 위원장이 전권을 약속받는다 해도 여전히 당 1인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며 “인 위원장의 통합, 희생, 변화 추진은 모든 고비마다 거센 당내 기득권의 반발을 부르게 된다. 결국 어느 순간에 대통령 앞에 이 반발과 갈등이 다 모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 “많은 정당의 혁신위가 중간에 좌초할 때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혁신위가 요식행위에 그칠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통령과 당 대표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당내 기득권을 침해하지 못할 혁신위원장이 임명될 수밖에 없고 혁신을 추진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 위원장은 “(내) 권한이 정확하게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대표가 ‘전권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조선일보는 “혁신위원장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는 통합, 희생, 변화를 추진하면서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라며 “당장 어려움을 모면하려고 흉내만 내는 혁신위인지, 아니면 이대로면 경제 사회 개혁을 해보지도 못하겠다는 위기감 속에 진심으로 하는 개혁인지가 드러나면 국민은 그것을 보고 내년 총선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이번 국민의힘 혁신위의 과제를 강조했다. 사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 ‘용산 출장소’ 오명부터 벗어야>에서 “여당이 이렇게까지 무기력·무능력할 수 있냐고 비판받는 것은 ‘친윤’ 지도부가 대통령실에 종속돼 윤 대통령에게 찍소리도 못하기 때문”이라며 “친윤·영남에서 벗어나 인재를 발탁할 수 있는 공천제도를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혁신위가 쇄신의 한계를 정해놓거나 대통령실·당 지도부 입김에 휘둘린다면 그 결과는 볼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일부 언론에선 이날 만평에서 인요한 혁신위가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 24일자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에선 인요한 혁신위가 민심과 동떨어졌다는 내용을 담았다.

▲ 24일 서울신문 조기영의 세상터치

서울신문 조기영의 세상터치에선 강서구청장 보선 이후 여당의 위기 분위기를 담았다.

▲ 24일 국민일보 국민만평

국민일보 국민만평에선 인 위원장이 실제 국민의힘 개혁 운전대를 잡은 것이 맞는지, 윤 대통령이나 국민의힘 지도부의 바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지 의문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 24일 경기일보 경기만평

경기일보 경기만평은 인 위원장의 혁신에 대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전망을 담았다.

▲ 24일 중부일보 최경락 만평

중부일보 최경락 만평에선 인 위원장을 의사에 비유해 윤 대통령과 김 대표에 대한 대수술을 진행할 수 있겠냐는 메시지를 담았다.

▲ 24일 매일경제 4컷만화 아이디

매일경제는 4컷만화 ‘아이디’에서 의사 출신 인 위원장이 당내 보신주의와 당내 비판을 내부총질이라고 비난하는 분위기를 수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YTN 지분 매각, 낙찰자 유진기업

YTN 지분 매각을 진행 중인 한전KDN과 마사회는 23일 입찰에서 “최종 낙찰자로 유진그룹 지주사인 유진기업을 선정했다”고 했다. 유진그룹이 한전KDN(21.43%)과 마사회(9.52%)가 보유한 지분 30.95%를 인수하면 그동안 정부 산하 공기업이 소유하던 YTN의 첫 민간 최대주주가 될 전망이다. 유진그룹은 계약 체결 30일 이내 방송통신위원회에 최다액 출자자 변경 승인을 신청하고 60일 이내 승인을 받으면 정식으로 YTN 새 최대주주가 된다.

▲ 24일자 경향신문 사진기사

 

이에 언론노조 YTN 지부는 성명을 내고 “윤석열 정권의 언론 장악 시도”라며 “언론 장악 하청업체는 YTN에 발 못 붙인다”고 했다. 이러한 반발 목소리와 함께 조선일보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계속되어온 YTN의 이른바 ‘공적 소유 구조’ 변화가 오히려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고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고 전했다.

 

기상천외한 동물 괴롭힘?

한겨레 <동물학대에 관한 슬픈 사실들>이란 칼럼에서 방혜린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는 최근 동물보호단체에 취직했는데 기상천외한 동물학대 방식에 대해 알게됐다며 이를 소개했다.

칼럼에 따르면 ‘고양이 무단방사’라는 동물학대인데 멀쩡히 자기 구역에서 사는 길고양이를 포획해 수십 km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방사시키는 행위다. 고양이가 영역 동물이기 때문에 준비 없이 극단적인 환경 변화를 겪으면 적응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행법상 적극적인 가해행위만 처벌하기 때문에 처벌하기 어렵다. 인터넷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안티캣맘 갤러리’에는 무단방사 행위에 경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고 합법이라는 주장부터 고양이 급식소 철거를 위해 지자체나 기관에 ‘민원 테러’를 하는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방 전 활동가는 칼럼에서 “군인권센터에서 근무한 지난 5년 동안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많은 사건을 통해 접했다”며 “사람에서 동물로 옮겨와 보니 또 다른 끔찍한 세계가 있다”고 한 뒤 “나보다 약한 생명체를 거리낌 없이 착취하며 이득을 얻고, 괴롭히면서 즐거워하고 전시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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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슬기 기자wit@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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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되돌려도, 1.5도 이상 오르면 되돌릴 수없는 기후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 ③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이명선)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  기사입력 2023.10.24. 05:01:55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계 지정학과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전쟁 피로감은 높아지고 무고한 피해도 늘어나고 있지만, 종전이나 평화 회복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미·중 전략 경쟁도 조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러·우 전쟁과 미·중 경쟁은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 사안을 포함해 세계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합리적인 선택을 도모해야 할 까닭입니다.

 

이에 창간 22주년을 맞아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외교광장 및 평화네트워크와 함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을 주제로 토론회를 마련했습니다. 아래는 이날 토론회 발표를 맡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의 '전쟁과 신냉전의 시대, 새로운 게임 체인저를 찾아서' 발표문 전문입니다.

 

 

 

 

이 글에서 '전쟁'은 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의미한다. 물론 이 전쟁 이외에도 지난 10년간 세계 도처에서 무력충돌의 빈도수와 이에 따른 사상자가 늘어나고 있고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이면서 중동 정세도 크게 위태로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우 전쟁이 전 세계에 걸쳐 지정학적·경제적·이념적 파장을 크게 일으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에 남한은 우크라이나를, 북한은 러시아를 지지하면서 전쟁의 파장이 한반도로도 뻗치고 있다. 

 

또 '신냉전'은 주로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을 일컫는다. 양국 관계를 '신냉전'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중 관계가 1970년대 초반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고 경쟁과 대결 국면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에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특히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양국과 그 동조국들이 '힘에 의한 평화'를 앞세우면서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냉전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조지 오웰의 통찰을 호출한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자신과 동맹국들의 생존을 절멸의 무기인 핵무기에 의존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미중 역시 핵무기를 비롯한 군사적인 힘에 의한 생존과 권력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글의 핵심어인 '게임 체인저'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게임 체인저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에서 결과나 흐름의 판도를 뒤바꿔 놓을 만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집단, 사건, 사고, 제품 등"이다.

 

여기에는 결과나 흐름을 좋은 방향으로 뒤바꿔 놓는 것도 있지만 그 반대도 존재하고, 결과나 흐름을 더더욱 예측 불허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또 예견된 게임 체인저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것도 있고, 이미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지만 외면·무시당하는 것도 있다. 아울러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 '나비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전쟁과 신냉전의 시대에 새로운 게임 체인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화되고 여기에 헤즈볼라, 이란, 미국도 가세하면서 확전이 일어나면 글로벌 지정학의 불확실성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또 내년 11월에 치러질 미국 대선과 중간선거도 중대 변수이다. 트럼프의 승리 여부, 상하원 의석의 변화, 선거 이후 미국의 정치사회적 대혼란의 수습 여부 등은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제정세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냉전 시대 비동맹운동에 비해 영향력과 위상이 더욱 커진 '글로벌 사우스'가 제3지대를 형성해 러-우 전쟁 및 미중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이다. 

 

'자유주의 연대'를 주창하고 있는 한국의 윤석열 정부와 '반미 연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의 선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이다. 남북한 상호간의 적대성과 한반도 군비경쟁이 역대급으로 치닫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의 핵심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도 남북한의 갈라치기 외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일동맹에 '다 걸기'를 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선택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의 선택은 미중 전략 경쟁과 러-우 전쟁의 향방에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되고 있다. 한국이 이미 세계 6위의 군사강국으로 올라섰고, 북한 역시 핵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전쟁과 기우에서 현실로 다가서고 있는 신냉전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게임 체인저는 존재할까? 돌이켜보면 냉전 시대의 게임 체인저는 핵무기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경쟁은 냉전을 격화시킨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절대무기에 생존을 의지할수록 모두를 파멸시킬 위험도 커진다는 자각도 일어났다. 이러한 자각은 '핵무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는 각성으로 이어졌고 이는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냉전을 종식할 수 있었던 지혜로 작용했다. 

 

이제는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경쟁의 위험을 직시하면서도 '기후위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기후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져야 할 시기이다. 강대국과 주요국을 향해 갈수록 거주 불능의 땅이 되고 있는 지구를 둘러싼 허망한 경쟁과 대결을 멈추고 살만한 지구를 만들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자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전쟁과 군비경쟁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여러 국가들이 상대를 위협이자 적으로 삼아 전쟁과 군비경쟁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체를 위협하는 실존적 위협이 진짜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기후위기다. 

 

그런데 전쟁 및 군비경쟁과 기후위기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군사 활동 자체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또 전쟁은 물론이고 지정학적·전략적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후위기 대처에 필수적인 국제협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위기를 넘어 재앙으로 치닫고 있는 기후변화가 국제분쟁의 주요 원인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전쟁과 신냉전 시대에 기후위기를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악순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후위기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나날이 그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보다 못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3월 "화석연료 중독이야말로 상호확증파괴(MAD)에 해당된다"며 인류가 "몽유병자처럼 기후재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올해 7월에 전 세계 곳곳이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폭염으로 몸살을 앓자 이제는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과 신냉전, 그리고 이 와중에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군비경쟁은 여기에 기름을 붓고 있다. 

 

각종 군사 무기와 장비를 만들고 이것들을 운용·연습·훈련·작전하는 과정에서, 지구촌 곳곳에 퍼져 있는 군사 시설과 부대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또 분쟁과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세계 각국의 군사 활동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5-6% 정도를 차지한다는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민간 분야의 항공(1.9%), 해운(1.7%), 철도(0.4%), 파이프라인(0.3%)을 합한 것보다 많다. 또 세계의 군사 활동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국가 단위로 환산하면, 중국, 미국, 인도에 이어 세계 4위에 해당된다. 

 

이처럼 군사 활동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군용기, 함정, 전투차량 등 주요 무기와 장비가 대부분 다량의 화석 연료로 기동되고 연비도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개 자동차의 연비는 30mpg(휘발유 1갤런 당 운행할 수 있는 마일) 정도이다. 이에 반해 전투용 지프차(험비)는 자동차의 5분의 1 수준인 6mpg, F-35 전투기는 50분의 1인 0.6mpg, B-2 전략폭격기는 100분의 1인 0.3mpg에 불과하다. 

 

다량의 연료 소비와 낮은 연비는 다량의 탄소 배출로 연결된다. 1회 작전 임무 수행시, 전투용 지프차는 260 kgCO2e(이산화탄소 환산량), F-35는 27,800 kgCO2e, B-2는 251,400 kgCO2e를 배출하는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또 폭등하는 군사비는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소중한 자원의 낭비를 수반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미 많은 탄소를 배출했고 또 현재도 그러한 선진국들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개발도상국들의 동참도 반드시 요구된다. 개발도상국들이 경제발전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저탄소형, 혹은 탄소 제로형 인프라와 기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자체적으로 이에 필요한 재원과 기술을 확보하기 어렵다.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의 기후협약 이행을 위해 매년 100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2010-2016년까지는 500억 달러 안팎을 맴돌았고 그 이후에도 8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처럼 기후 기금 재원 조달은 크게 미달된 반면에,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주도해온 세계 군사비는 크게 높아지고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집계한 세계 군사비의 흐름을 보면, 2020년 화폐 기준으로 2000년대 후반에 1980년대 후반기를 넘어섰고, 2021년에는 사상 최초로 2조 달러를 돌파했다.

 

또 2022년 세계 군사비는 2조 24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군비지출이 가장 높았던 1980년대 후반보다 약 6000억 달러가 많다. 그런데 앞으로 세계 군사비 상승폭은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세계 양대 군비지출 국가인 미국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국방비를 늘리고 있고, 주요 국가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노벨상을 수상한 50여 명의 사람들은 2021년 12월 "인류를 위한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세계 각국이 5년 동안 매년 2%씩 군사비를 줄이고 이 가운데 절반을 전염병, 기후변화, 극한 빈곤 해결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안"에 호응하는 나라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군비경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고 장기화·확전될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기후위기 대처를 위한 국제협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대표적으로 세계 양대 탄소배출국이자 군비지출국인 미국과 중국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면서도 기후변화 대처에는 협력을 다짐했지만 아직까진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이처럼 기후위기 대응과 군비경쟁은 양립할 수 없다. 인류가 '냄비 속의 개구리'로 전락하는 신세를 모면하려면 냄비를 가열시키고 있는 군비 활동도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 결단 속에서는 지금까지 사각지대로 존재해온 국가안보와 군사 분야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국립대구과학관 실내 전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기후위기가 찾아온 지구를 나타내는 SOS시스템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군축은 기후위기 대처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 대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 가스 배출을 줄여 지구 온도 상승폭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지나면 돌이키기 어렵다. 섭씨 1.5도, 혹은 2.0도는 이를 대표하는 수치이다. 이 수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인류의 안전 및 생태 보전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선'으로 제시한 수치이다. 각국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대비 2도, 더 나아가 1.5도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고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와 그 이후 기후변화회의에서 채택한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2019년 배출량 기준으로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84%를 줄어야 하고 이에 앞선 2030년까지는 43%를 줄어야 한다.

 

또 하나는 변화되는 기후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초창기 적응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기후위기에 취약한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기후위기가 몰고 오는 영향이 선진국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적응에 대한 논의 또한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홍수, 가뭄, 태풍 등 극한 기후가 빈번해지고 빙하와 만년설 해빙과 해수면 상승이 빨라지면서 변화된 기후환경에 대한 적응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군비통제와 군축은 이러한 기후위기 대처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우선 군사 활동의 축소는 탄소 배출의 감축으로 이어져 기후위기 '완화'에 기여하게 된다. 2022년 기준으로 군사 분야의 탄소 배출이 전체 탄소 배출의 5.5%를 차지한다면, 이는 연간 약 27.5억 톤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탄소예산'은 얼마 남지 않았다. 탄소예산은 상승하는 지구의 기온을 특정 온도 이내로 붙잡아두기 위해 허용되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의미하는데, '1.5도 이하' 목표 달성을 위한 탄소예산은 2500억 톤밖에 남지 않았다. 매년 380억 톤을 배출한다고 가정하면 7년 이내에 바닥나는 셈이다. 

 

그런데도 전 세계의 군사 활동은 나날이 증가 추세에 있다. 이를 감안해 2023년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량을 30억 톤이라고 가정해보자. 또 2024년부터 2030년까지 7년간 군사 부문의 연간 탄소 배출량을 2023년 가정치(30억 톤)에서 10%를 줄인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하면 7년 동안 군사 부문에서만 21억 톤을 줄일 수 있다. 20%를 줄이면 감축량은 42억 톤이 된다. 42억톤은 전체 탄소예산의 6%에 근접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 감축은 기후위기 완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군사 활동은 국방비 책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만큼, 국방비 감축과 감축한 예산의 기후위기 대처 투입은 '완화'와 '적응' 모두에 기여할 수 있다. 국방비 감축은 해당국의 탄소 배출 감축 및 기후 위기 적응 예산 증대에도 도움이 된다. 또 개발도상국들에게 지원하는 기후금융 규모를 늘릴 수 있어 이들 나라의 탄소 배출 저감형 산업구조로의 재편 및 기후변화 적응에 기여할 수 있다. 이는 2020년에 책정된 기후 재원(완화와 적응 포괄)과 실효적인 대처를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재원, 그리고 글로벌 국방비 감축 효과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산하 재정상설위원회의 <5차 기후재원 흐름 보고서 (2022)>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글로벌 기후 재원 규모는 8170억 달러이다. 이는 2020년 세계 GDP의 약 1% 수준이다. 이에 반해 지속가능발전 국제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ustainable Development, IISD): IISD는 기후 완화 및 적응에 필요한 금액을 세계 GDP의 약 5%에서 7%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기후대응 예산을 늘리고 있어 이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크게 부족한 현실이다. 

 

부족한 부분은 매년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세계 국방비의 절감을 통해 상당 부분 채울 수 있다. 가령 세계 국방비를 2024년부터 2030년까지 7년 동안 연 2조 달러 수준으로 묶어두고, 이를 예상되는 국방비 증액과 비교해보자.

 

2022년 세계 국방비가 2조 2400억 달러였고 올해 세계 국방비 증액을 감안하면 2023년 세계 국방비 총액은 2조 3000억 달러 규모가 될 것이다. 또 2024〜2027년 세계 국방비 증가율을 2%로 가정해보면, 7년간 세계 국방비의 합계는 17조 4410억 달러가 되고 7년간 순 증가분은 3420억 달러가 된다. 

 

이에 반해 2024년부터 7년 동안 세계 연 국방비가 2조 달러로 동결된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7년 동안 절약할 수 있는 재원은 3조 4410억 달러에 달한다. 이렇게 절약한 재원의 절반을 기후위기 대응에 사용한다면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 수 있다. 

 

불가능한 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과거 사례를 복기해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중후반 세계 군사비는 1조 6000억 달러였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1조 1000억 달러까지 떨어진 바 있기 때문이다. 군비 축소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복합위기 대응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은 그 당위성에 비해 현실성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1997년 교토의정서에서 군사 분야 탄소 배출량 보고를 제외키로 했고 2015년 파리협정에선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사항으로 담겨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안보 예외주의는 기후위기 대처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국들을 중심으로 군비 축소를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이고 기후위기 대응 예산을 늘리자는 주장에 동의할 국가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점 역시 명확하다. 기후위기 대처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군축을 통해 평화와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계 시민의 역할과 분발이 전제되어야 한다. 반핵 운동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핵무기를 '금기의 무기'로 만들고 냉전을 촉발·격화시킨 무기를 냉전을 종식시킨 무기로 둔갑시킨 데에는 세계 시민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핵무기를 만든 핵물리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반핵 투사로 변신했고, 의사와 과학자들이 핵실험과 핵무기 사용이 얼마나 인체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지 밝혀냈으며, 평범한 시민들이 핵전쟁의 공포에 맞서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반핵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글로벌 시민의 힘이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레이건 등 국가 지도자들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발판으로 삼아 이제는 '기후위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기후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를 결집해 각국 정부와 유엔 등 국제기구 대한 설득과 압박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 이를 통해 군축을 통한 기후정의 실현에 나설 수 있는 행위자들을 찾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단번에 군비 축소에 합의하고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선도국의 역할을 떠올려볼 수 있다. 우선 세계 양대 탄소배출국이자 경제대국이며 군비지출국가인 미국이나 중국의 솔선수범에 나서야 한다. 2023년 미국의 국방비는 약 9000억 달러이고, 중국의 국방비는 약 3000억 달러이다. 이 가운데 10%를 줄여 기후위기 대응 재원으로 전환한다면 획기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 미중 가운데 어느 나라가 먼저 이러한 선택을 한다면, 상대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냉정하게 볼 때, 이상론에 가까울 수 있다. 군산복합체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고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도 대중 견제심리가 매우 강한 미국이 솔선수범을 보일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중국은 역대 탄소 배출량이 미국보다 현저하게 적은 반면에 국방비는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점을 들어 먼저 나서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에 대한 설득과 압박의 수위는 계속 높여야 한다. 군축을 통한 기후위기 대처의 선도국이 되는 것이 배타적이고 악의적인 경쟁을 선의의 경쟁으로 전환시키고, 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라는 점을 설파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의 민심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나은 방법은 미중이 협력해서 두 나라가 함께 나서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중이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기후협력을 도모하는 것은 조지 오웰이 말한 '이중사고'(double-think)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군비통제와 군축 협력과 기후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때마침 바이든 행정부는 11월 경 미중 정상회담을 희망하고 있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미가 협력해야 할 이유는 천 가지가 넘는다"며 양국의 협력에 인류운명의 향방에 달려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미중 정상회담을 촉구하면서 핵심 의제로 양국이 군비통제를 통해 긴장완화와 기후위기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일국적, 양자적 차원을 넘어 다자적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포함된 다자주의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그룹과 G20을 떠올려볼 수 있다.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인 G20이 지구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총량의 75-80% 수준이다. 또 G20 소속 국가들은 국방비 지출에 있어서도 대부분 상위권에 들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G20이 군사 활동 축소를 통해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고 국방비 감축을 통해 기후위기 대응 재원을 마련키로 결의하면 큰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주도해 '군축을 통한 평화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결의'를 채택하는 방법도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크게 두 가지 특권적 지위를 유지해왔다. 하나는 공식적인 핵보유국이라는 지위이고, 또 하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이다. 

 

이러한 지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국제 평화와 안정을 지킬 책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런데 기후위기가 국제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임이사국들은 이에 눈감고 있다.

 

더구나 이들 5개국은 지구 온난화에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다. 5개 상임이사국들은 1750년부터 2021년까지의 탄소 배출에 있어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압도적인 1위이고, 중국은 2위, 러시아는 3위, 영국은 5위, 프랑스는 8위이다. 또 이들 5개국의 2022년 국방비 합계는 약 1조3,700억 달러에 달해 세계 국방비 총액의 60%에 육박한다.

 

이러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특권과 현황, 그리고 책무를 고려할 때, 군비 조절을 통한 기후위기 대처 기여에 P5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령 P5가 2022년 대비 국방비를 10% 줄이면, 연간 1370억 달러를 기후위기 대응 예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모습. ⓒAP=연합뉴스

 

미국·영국·프랑스와 중국·러시아가 군비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의는 상호호혜의 맥락도 품고 있다. 또 유엔 안보리 결의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엔의 다른 회원국들의 동참도 이끌어내는 데에 효과적이다.

 

인류는 전쟁과 신냉전, 그리고 이 와중에 격화되고 있는 군비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상호간 경쟁심, 적대감, 배타성을 품고 있다. 그런데 서로 싸우고 다투다가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친다고 한다. 

 

오늘날 외계인의 침공에 해당하는 실존적 위협은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기후위기이다. 실마리는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위기이기에 인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흐름과 결과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핵무기를 호출해본다. 핵무기와 기후위기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공통점이 이를 대표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다. 핵전쟁은 통제할 수도 억제할 수도 있다. 반면 기후위기는 '1.5'를 넘어서는 순간 통제할 수도 억제할 수도 없다. 하여 이제는 서로를 겨냥한 총을 내려놓고 1.5도라는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군축의 종말 시대를 딛고 군축을 통해 평화와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장정에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이다. 

 

끝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함의도 언급해보고자 한다. 한반도는 기후변화 취약 지역 가운데 하나이자 군비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또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군사 문제에 있고 그 비중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에 반해 남북한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 당사자들이 대화와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도 매우 희미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한 평화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지구적 차원의 노력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군비경쟁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라는 지구적 차원의 각성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이 힘을 얻으면, 한반도에서도 '쌍중단', 혹은 '쌍축소'를 추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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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희생자 모교에 마련된 추모 공간

故 박가영 학생의 모교 목원대에 분향소 마련하고 추모제 개최

  • 기자명 대전=임재근 객원기자 
  •  
  •  입력 2023.10.23 21:09
  •  
  •  댓글 0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추모제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다녔던 목원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추모제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다녔던 목원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시민 분향소’가 목원대학교 학생회관 앞에 마련되고, 분향소 옆에서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추모제’도 진행되었다. 

분향소가 목원대에 마련되고 분향소 옆에서 추모제까지 진행된 이유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참사 당시 목원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분향소는 10월 23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운영되었고, 추모제는 오후 4시 시작되었다.

김병국 대전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병국 대전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목원대를 졸업하고, 목원대에서 이사장을 역임했던 김병국 대전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추모사에 나서 “이태원 참사의 원인과 사고 발생 후 대처 과정을 낱낱이 밝혀서 책임자를 처벌하고 국민 안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데,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 뒤, “후배를 비롯한 이태원 참사를 당하신 가족들을 위로하고 고인들께 편안한 안식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목원대에 재학 중이 이해천 학생이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목원대에 재학 중이 이해천 학생이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목원대에 재학 중이 학생도 추모사에 나섰다. 

이해천 학생은 ‘우리는 이제 자녀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목소리 내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자녀가 우리 자녀와 같은 참사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던 유가족들의 발언을 언급하며, “저는 유가족분들이 말씀하신 자녀가 저를 포함한 우리 목원대학교 학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목원대 학생들이 안전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길에 유가족분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드리고, 영원히 기억하고 반드시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눈물이 또 쏟아진다
같이 한 추억이 떠올라
간절해지는 짙어지는
이 마음을 어찌 해야 할지
아무리 힘들어도
내 곁에 네가 있었으면
속삭여주는 사랑한단 말
한번만 들을 수 있다면

세상에 ‘사랑해’라는 말이 이토록 슬프게 들릴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은 정경희 씨가 부른 노래에 평생을 맘껏 사랑해도 모자랄 자녀들을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현실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노래를 부르던 가수도 벅차오르는 감정에 노래를 하며 잠시 울먹였다.

마당극단 좋다의 정경의 배우가 추모노래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마당극단 좋다의 정경의 배우가 추모노래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제에는 이태원 참사 충청지역 유가족들도 함께했다. 목원대에 재학 중이었던 故 박가영 학생의 부친, 박계순씨는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저희 이태원 유가족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며,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려면 특별법이 통과가 돼야 한다”며,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故 박가영 학생의 모친, 최선미 씨는 “졸업식에 와서 정말 축하해 주고 싶었던 학교였는데, 추모제를 하면서 찾게 되어 기가 막히다”며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무질서함으로 인해서 별이 된 아이들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저희는 그곳에 왜 갔는지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왜 돌아오지 못했나를 물어봐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1주기입니다. 2주기, 3주기, 4주기, 우리 가영이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전에 대해서 기억해 주시고 우리나라가 안전해지는 그날까지 학교가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故 박가영 학생의 부친 박계순 씨가 유가족 발언 도중 말을 잠시 잇지 못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故 박가영 학생의 부친 박계순 씨가 유가족 발언 도중 말을 잠시 잇지 못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다녔던 목원대 학생회관 앞에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분향소가 설치되고 분향소 옆에서 추모제가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다녔던 목원대 학생회관 앞에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분향소가 설치되고 분향소 옆에서 추모제가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제는 바로 옆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함께 헌화를 하며 마무리했다.

목원대학교에 마련된 대전시민 분향소와 1주기 대전추모제는 10.29이태원참사대전대책회의와 10.29이태원참사충청유가족협의회, 목원대학교 민주동문회가 주관했다.

추모제가 끝난 후 헌화를 한 후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제가 끝난 후 헌화를 한 후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다녔던 목원대 학생회관 앞에 설치된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분향소에는 또래 학생들도 찾아 헌화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 박가영 학생이 다녔던 목원대 학생회관 앞에 설치된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분향소에는 또래 학생들도 찾아 헌화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가 끝난 후에 참석자들이 함께 분향소를 찾아 헌화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10.29이태원참사 1주기 대전 시민 추모제가 끝난 후에 참석자들이 함께 분향소를 찾아 헌화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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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입문생’ 인요한, 용산 외풍 막고 혁신 성공할까

당 안팎의 회의적 시각 “히딩크는 경험 많은 감독”, “혁신안 만들어봤자 지도부가 안 받으면 의미 없다”

(자료사진) 지난 8월 23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인요한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공감 열두 번째 공부모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23.8.23. ⓒ뉴스1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을 위해 ‘푸른 눈의 한국인’ 인요한(64) 연세대 의대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23일 임명했다.

당 안팎에서는 “국민들 관심을 끌 만한 카드”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얼마만큼 당을 혁신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인 교수 본인도 “32년 동안 의사로 일했기에 공부할 게 많다”며 정치 경험 자체가 부족하다고 말했고, 혁신의 핵심인 ‘공천 룰’에 관해서도 “제게 주어진 것은 이론적인 방향”이라며 “솔직히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라고 밝혔다.
 

당 안팎의 회의적 시각
“혁신안 만들어봤자 의미 없어”
“정당에 대한 이해 없는 분”
“히딩크는 경험 많은 감독이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의 진실한 변화를 만들어 갈 혁신위원장으로 인요한 교수를 모시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박성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쇄신과 변화라는 국민의 엄중한 명령을 잘 수행해 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자료사진 ⓒ뉴스1

1959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인 교수는 1991년부터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 교수의 가문은 ‘4대째 대한민국에 헌신하고 있는 가문’으로 유명하다. 외증조부인 유진 벨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당시 호남지역에서 선교·교육·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의 조부인 윌리엄 린튼은 일제강점기 선교사·교육자로 1919년 전북 군산 만세운동을 지도하고, 국제사회에 3·1운동 지지를 호소했다. 아버지인 휴 린튼은 한국전쟁에 미 해군 대위로 참전했으며, 순천기독치료소를 설립해 결핵퇴치에 헌신했다. 인 교수 본인은 대학 재학 중 5·18 민주화운동 시민군 외신 영어 통역 활동을 했고, 최초의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다.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인선은 아니다. 인 교수는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또 내년 총선에서 그가 연대 신촌세브란스병원이 있는 서울 서대문갑 지역구 공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바 있다. 지난 8월 23일에는 국민의힘 친윤계 공부모임인 ‘국민공감’으로부터 초청받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위가 잃어버린 1%’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 강연에서 인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언급하며 “대통령이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는데, 정말 잘한다”라고 윤 대통령을 추켜세웠다.

이번 인선과 관련해, 당 안팎에서는 “국민들의 관심을 끌 만한 카드”라는 평가가 나온다. 당 내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천하람 국민의힘 순천 갑 당협위원장은 이날 오전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여러 가지 배경이나 또 가족이나 아버님이나 이런 분들도 굉장히 훌륭한 분들”이라며 “한국형 앰뷸런스를 보급하고 이런 분이라서 일단 흥미로운 카드인 것은 맞다”라고 평가했다.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가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이만희 사무총장과 만남을 마치고 나서고 있다. 2023.10.23. ⓒ뉴스1
하지만 인 교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의도 정치 경험이 없고, 혁신위원장의 권한과 책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도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인요한 교수가 정치에 문외한”이라고 걱정하며, 위원 후보를 2~3명 정도만 추천하면 “난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우 전 의원도 이날 페이스북에 “히딩크는 자신의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감독이었다. 견습생이나 훈련생이 아니었다”라며 “인 교수는 히딩크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을 남겼다. 천하람 당협위원장은 당 혁신위원으로 일해 본 경험을 언급하며, 당과 당 지도부가 혁신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으면 “혁신안을 만들어봤자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 혁신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국민의힘에 위기감이 팽배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을 예상했는지 김기현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참고로 위원장 인선 과정에서 권한이나 역할에 대해 어떤 제한을 가하는 조건을 제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접촉한 혁신위원장 후보 모두에게 “혁신을 위한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핵심은 ‘공천 룰’이다.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던 이번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던 김태우 전 구청장’을 후보로 밀었다가 참패했기 때문이다. 당이 얼마나 용산 대통령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정한 공천을 할 수 있느냐가 관권인데, 당 안팎에서는 회의적이다. 내년 총선 공천 실무를 총괄할 핵심 요직에 친윤계 인사가 임명되면서다. 새 사무총장·부총장 임명에 대해, 유승민 전 의원은 지난 19일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당을 100% 장악하고 자기사람으로 공천을 심겠다는 생각을 하나도 안 버렸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신인규 국민의힘 전 상근부대변인 또한 23일 페이스북에서 “전권 부여를 믿을 사람은 없다. 인요한 교수도 전권의 의미를 모를 것”이라며 “정당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또 한 사람의 좋은 이미지만 소비하며 혁신의 단어를 오염시키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인 교수 본인도 혁신위원장 권한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이만희 사무총장과의 만남 후 ‘구상 중인 공천 규정에 관한 질문’에 “제게 주어진 것은 이론적인 방향”이라며 “솔직히, 아직 권한이 정확하게 어디까지인지 모른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와이프하고 아이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방향성만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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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정부상태 같을까... 수수께끼 풀린 윤 정권의 실체

[강인규 리포트] 윤석열 대통령과 일년 반, 모든 게 선명해졌다

23.10.24 06:03최종 업데이트 23.10.24 08:48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8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박근혜와 이명박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여름, 한국에 머물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한 번만 들은 게 아니니, 독자들께서도 비슷한 말을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실망스럽다 해도, 탄핵으로 임기 도중 쫓겨난 대통령이나, 수백억 원 뇌물과 횡령 등 20여 가지 범죄 혐의로 수감됐던 대통령을 그리워한다는 게 말이 될까요?

물론 앞의 탄식이 '그때가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글픈 한탄 속에는 현 대통령에 대한 단순한 실망을 넘어, 깊은 우려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염려는 윤석열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성일 것입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라는 불안감을 지속적으로 품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급'이 다른 대통령임에 틀림 없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지도자가 집결한 현장에서 한국 대통령이 걸쭉한 비속어를 내뱉으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태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그런 겁 없는 태도로 한국 이익을 위해 싸우기라도 했다면 나았겠지만, 그는 미국과 일본 앞에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스맨' 역할을 해 왔을 뿐입니다. 그 결과 시민들의 삶과 한국 경제는 외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위태로운 등불 신세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막힌 일을 당할 때 즉각 대처하지 못합니다. 처음 보는 생물체가 튀어 나올 때 처럼, 눈 앞에서 상식 밖의 사태가 펼쳐지면 마치 사고가 마비되는 듯한 상태에 빠지게 되지요.

세계적으로 주목 받은 욕설 논란에서 시작해, 난데없는 '공산 전체주의' 반대 선언과 '사면으로 강서구청장 후보 재활용하기'까지, 윤 대통령이 취임한 후 '사고가 마비되는' 흔치 않은 경험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터무니 없는 일을 저질러 놓은 후, 시민들이 사태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을 터뜨리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표적을 맞추기 힘들듯, 저돌성과 결합한 몰상식에 대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윤 대통령이 용산에 입주한 이후부터 그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해 왔습니다. 정치적 관심에서보다는 제 직업인 사회과학자와 교육자로서 그를 관찰해 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저는 최근까지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많은 사람들을 지켜봐 왔지만, 윤 대통령처럼 종잡기 어려운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 년 반 가까이 자세히 관찰하며 고민한 끝에 어느 정도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이념의 외피로 무능을 덮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사람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줄곧 '대화'와 '협치'를 주문해 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윤 대통령이 0.73퍼센트포인트라는 간발의 차로 당선됐기 때문에 양쪽을 보듬어야 해서가 아니라, 사회통합이 국가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임무는 대통령이 73퍼센트 득표로 이겼다고 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단지 야당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복절 경축사에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에 내놓은 '경축사'치고는 매우 기괴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균형 잡힌 외교에 대한 요구나, 국민건강과 환경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핵 폐수 방류에 대한 우려조차 "공산세력, 반국가세력이 반일 감정을 선동하는 것"으로 치부하며 적대시했지요.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격언까지 문제 삼으며,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야 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말 본래의 의미와 물리법칙 모두를 거스르는 이상한 '날개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은 정확히 윤 대통령과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독선의 위험을 경고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새는 양 날개가 모두 온전해야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좌우 날개를 각기 다른 각도로 움직여야만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 날개를 똑같이 움직여서는 머잖아 장애물에 부딪혀 떨어지고 맙니다. 새가 왼쪽으로 이동할 때는 왼편 날개를 아래로 숙이고, 오른쪽으로 이동할 때는 반대 날개를 아래로 움직입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개 각도를 바꿔 날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계속되어 온 윤 대통령의 이념색 짙은 발언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일부가 말하는 대로 보수 유튜브 채널을 애청하며 '늦깎이 우익'이 되어서일까요? 그의 이데올로기성 발언이 증폭된 시점이 약식기자회견을 중단한 이후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취임 후 줄곧 출근길 약식회견을 즐겨 오다가, 몇 차례 실언을 하고, 무엇보다 골치 아픈 현안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 행사를 갑자기 중단합니다.

일부는 윤 대통령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이념색을 덜고 현안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 전망합니다. 한 보수언론은 그가 후보 시절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준석 전 대표와 얼싸 안거나 신년사에 큰절을 한 것을 언급하며 '불통처럼 보여도 무섭게 변하는 사람'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실 역시 윤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이념 논쟁을 통해 자유와 연대를 바로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삶"이라며 민생을 강조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제 윤 대통령이 갈등과 반목을 중단하고 실용 노선의 길을 걷게 될까요? 선거 패배 이후 짧은 기간을 포함해 제가 일 년 반 가까이 대통령을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념을 내세웠던 탓에 현안에 집중하지 못한 게 아니라,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탓에 이념에 집중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존재보다 더 큰 부재의 웅변
 

▲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0월 26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출근길 문답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한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출근길 약식회견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이 일상의 행사가 꽤 주목을 받았던 만큼, 이를 중단한 후 일 년 가까이 대중들의 시선에서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때로 부재가 존재보다 더 큰 웅변을 하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시민들과의 접촉면이 줄수록 대통령의 발언 수위는 높아졌고, 이 기간에 정책 실패의 우려는 지속적으로 커졌습니다. 저는 윤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대안부재의 징후로 파악합니다. 그에게는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며, 이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 '반성'과 '소통'을 말하기 시작한 대통령의 변화를 무시한 판단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정부가 어떻게 표현하든, 강서구청장 보선은 정권의 중간평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완패한 뒤, 대통령이 "차분하고 지혜로운 변화"를 주문했다는 전언이 있었고, 19일 '필수의료혁신 전략회의'에 참석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반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언론은 일제히 "윤 대통령, '소통 부족하다 지적하는 분 많아 반성,'" "'소통 부족 지적에 많이 반성…국민 위한 정치할 것" 등의 표제를 달아 보도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실제로 한 발언은 이렇습니다.

"과거에는 소통은 많이 했습니다. 저보고 소통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저도 많이 반성하고 더 소통을 하려고 합니다마는, 소통만 해갖고 되는 게 아니라, 추진하면서 소통을 해야 됩니다."

육성을 들어보면, 상대에게 주입하는 듯한 윤석열 대통령 특유의 화법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성'과 '소통' 이야기는 단정적 말투 "해야 됩니다"로 끝을 맺습니다. 특히 "소통만 해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라는 부분은 또 다시 '사고마비'를 유발합니다. 소통이 왜 필요한가요? 정책의 추진 방향을 정하기 위해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진'을 먼저 언급하는 그의 발언은 '소통'을 '사후 통보'나 '홍보' 정도로 파악하는 시각을 드러냅니다.

이 사실은 윤 대통령이 선거 패배 이후 어떤 일을 '추진'해 왔는지에서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가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친한 친구의 친구"가 탈법행위와 자질 시비로 낙마했고, 곧이어 구청장 보선 패배 예측이 현실화했습니다. 이때 윤 대통령이 한 일은 대학동기를 헌법재판소 소장에 지명한 것입니다. 행정안전부 장관자리에 후배를 앉혀 경찰을 통제해 온 것도 모자라, 이제 헌법재판소까지 지인을 심겠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임기가 11개월밖에 남지 않은 사람을 말입니다.

대통령이 '40년 지기'를 헌재소장 후보에 지명한 날은 18일로, 그가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던 날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들려온 소식은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김좌진·안중근 열사를 기리던 '독립전쟁 영웅실' 철거를 시작했다는 속보였습니다. '반성'과 '변화'는 말이 아니라 행위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소통을 할 줄 알아야 소통을 하지
 

▲ 2019년 7월 25일,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소통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못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상대는 두 부류로 나뉘는 듯합니다. 철저히 굴복시킬 대상 아니면 완전히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말입니다. 타협과 중재는 그의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는 당연히 현대 민주국가의 지도자로서 심각한 자질 결여를 의미하지만, 그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중들에게 평가받지 못한 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윤 대통령은 1960년대생입니다. 성인으로서 삶 대부분을 민주화가 성취된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그가, 어떻게 그런 독선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를 지닌 채 검찰 조직의 지도자 역할을 해 올 수 있었을까요? 또한 그처럼 고압적 태도를 지닌 사람이 미국이나 일본 지도자 같은 소수에게는 그렇게 철저히 복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해답을 한국 검찰 조직의 특수성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국 검찰은 사회의 민주적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역행해 온 독특한 조직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퇴행적 리더십을 몸에 익힌 공간이기도 하고요. '철저히 굴복시키거나 완벽히 복종하는' 이분적 태도는 한국 검찰이 작동해 온 방식이기도 합니다.

용산 집무실에서 윤 대통령은 아무도 직언하지 못할 만큼 두려운 존재인 듯합니다(직언할 능력과 의지를 지닌 측근이 존재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무정부상태'를 입에 올리기 시작한 지 오래입니다. '추상같은 대통령이 지배하는 무정부상태'라는 모순 뒤에는 책임 없이 권한만 행사할 줄 아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제 눈에 비친 한국 대통령은 서초동에서 용산으로 장소만 옮긴 검찰총장입니다. 검찰총장은 사표 던지고 떠날 수 있지만, 대통령은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책임지는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무정부상태'라는 표현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대중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까닭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니 보일 리도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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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에 돌아왔건만...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

[연재] 김학규의 ‘이달의 근현대사적지’(5)

  • 기자명 김학규 
  •  
  •  입력 2023.10.23 00:40
  •  
  •  수정 2023.10.23 00:55
  •  
  •  댓글 0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10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입니다.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은 최근 국방부가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 이전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이를 우려하는 시민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 필자주

‘장군의 귀환’과 ‘장군의 위기’

2021년 8월 18일 홍범도 장군 안장식.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사진-통일뉴스 자료사진]
2021년 8월 18일 홍범도 장군 안장식.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사진-통일뉴스 자료사진]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과거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계속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노력이 끝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당시 언론은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지 78년 만에 이루어진 ‘장군의 귀환’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우리 국민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사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북한은 홍범도 장군이 평남 양덕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유해 봉환의 우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관계로 고려인 사회의 반대도 완강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뚫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이루어진 ‘장군의 귀환’은 불과 2년 만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육사 교정에 있는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입장이 발표되면서부터이다.

육군에 따르면 홍범도·김좌진·안중근 장군 등 7명의 독립전쟁 영웅을 기린 육사 안 충무관의 ‘독립전쟁 영웅실’은 지난 10월 16일부터 철거를 시작했다. 지난 8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이 알려지면서 압도적 국민의 반대 여론에 부딪쳤던 육군이 이를 외면한 채 ‘독립군 역사 지우기’ 작업을 벌써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조만간 현실로 다가올 듯하다. 하필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기를 맞는 10월 25일을 전후한 시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도 고약한 모양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난 9월 17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차량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지난 9월 17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차량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지난 9월 20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국방부 앞 1인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지난 9월 20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국방부 앞 1인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물론 국방부는 '철거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장소인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심지어 이전 대상지로 발표된 독립기념관의 한시준 관장조차 “직접 연락받은 바 없다”면서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독립기념관 수장고로 이전한다는 방침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상황이다.  

국방부가 내세우고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리는 더 기가 막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입당 이력과 1921년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 개입 의혹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개입했다는 객관적인 근거 제시도 없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점, 말년에 부하들의 안정적 정착을 지원하고자 했던 맥락을 무시한 채 1927년 그의 나이 육십에 이루어진 소련공산당 가입을 비난하는 것은 국방부의 빈약한 역사인식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더군다나 소련공산당이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지 7년이 지나 벌어진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한 사실을 근거로 들 때는 그 몰역사적인 관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육사가 독립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므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육사가 미군정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에서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육사는 대한민국 육군의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육군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군과 광복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난 2018년 육사 충무관 앞에 독립군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하여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한국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청 장군과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등 다섯 분의 흉상을 세운 것도 육사 생도에게 대한민국과 육사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럼에도 신원식 신임 국방부장관 역시 후보자 청문회 당시부터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 국방부장관은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한 것에 대해서도 “육사와 홍범도 장군을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로 그의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쯤 되면 국방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방침이 단순히 윤석열 정부의 이념 우선을 강조하는 행보의 하나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미명 하에 최근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핵오염수 방류에 대한 ‘지지 입장’을 천명하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2018년 대법원 배상 판결을 사실상 부정하는 등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알아서 기는 듯한 대일 굴종 외교와 맥이 닿아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홍범도 장군, 그는 누구인가?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당시의 홍범도 장군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당시의 홍범도 장군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안중근, 유관순 등과 더불어 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번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담당한 긍적적인 측면은 국민들이 홍범도 장군의 활동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홍범도 하면 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포수 경력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15살의 어린 나이 때부터 3년여 간 평안 감영에서의 군생활(나팔수)과 황해도 한 제지소에서 한 3년간 노동자 생활,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상좌승 생활을 거친 이후였다.

홍범도는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 시작하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영웅이었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레닌과 면담하여 권총을 선물 받는 등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거듭난 인물이 홍범도였다.  

홍범도 장군의 부인 이씨와 아들 양순

홍범도는 백발백중의 총 솜씨로도 유명하지만, 특유의 정직과 겸손으로 부대원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홍범도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일지형식으로 남겼는데, 그 중 이씨 부인과 큰아들 홍양순에 대한 기록도 있다. 홍범도와 결혼한 이씨 부인은 신계사 상좌승 시절 만난 비구니 출신이었다.

1908년 일제는 삼수·갑산 일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홍범도 부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홍범도의 가족을 동원하여 그를 유인하고자 했다. 

일제는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문안까지 주면서 이씨 부인에게 편지를 쓰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이씨 부인은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라면서 의연하게 버텼다고 한다. 이씨 부인에게는 혹독한 고문이 뒤따랐지만 그의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씨 부인은 끝내 혀를 깨물면서 까지 저항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얼마 못가 끝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물러설 일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17살의 아들 양순을 홍범도가 있는 산속으로 보낸 것이다. 

홍범도는 단호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하지만 홍범도가 쏜 총알이 양순의 왼쪽 귓방울을 자르고 지나갔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후 양순은 홍범도 부대에서 훌륭한 의병으로 활약하다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홍범도의 부인 단양 이씨와 아들 홍양순은 2021년 3·1절에 즈음하여 뒤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평민 출신의 홍범도 장군과 양반 출신의 의병장 이범윤

평민 출신의 홍범도는 의병운동 시절 양반출신 의병장 이범윤(1856-1940)과의 악연에 대한 이야기도 남겼다.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기도 한 이범윤은 고종황제로부터 간도 관리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1908년 삼수·갑산의 홍범도 부대는 탄약의 부족으로 위기를 겪게 되는데, 홍범도는 탄약 구입비 2만원과 함께 부하를 러시아령 연추에 있는 이범윤에게 보냈다. 그런데 두 차례나 보낸 부하는 일제의 정탐꾼으로 몰려 갇혀버렸고, 그 부하를 구하려고 보낸 부하조차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홍범도 부대는 힘을 잃게 되었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홍범도가 우여곡절 끝에 연추에 도착해 보니 부하 둘은 여전히 갇혀 있고, 마지막에 보낸 한 명은 이범윤 부대원이 되어 있었다.

홍범도는 이범윤에게 자신의 부하를 일제의 정탐꾼으로 몬 근거를 따져 물었지만, 이범윤은 책임을 회피할 뿐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양반출신 의병장과 평민출신 의병장 사이에는 이렇듯 골이 깊었던 것이다.

연해주에 정착한 이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표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러시아어로 “레닌으로부터 홍범도에게”라고 씌어진 권총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에게서 직접 선물 받기도 했으며, 이후 연해주에 정착하였다.

홍범도의 무덤이 머나먼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중앙공원에 있는 이유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었다. 1937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연금생활을 하면서 현지 고려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내다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1943년 머나먼 이국땅에서 서거하였다.

홍범도는 지금도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전설적인 빨치산이며 열렬한 독립투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가 사망하기 전인 1942년부터 고려극장 극작가 태장춘 등의 노력으로 홍범도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연극 <홍범도>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고려인 작가 김세일의 소설 『홍범도』가 1965년부터 4년간 124회에 걸쳐 <레닌기치>에 연재되었다.

중앙공원묘지에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있고, 크질오르다 시 소비에트의 결정으로 홍범도가 거주하던 인근의 한 거리가 ‘홍범도 거리’로 이름 붙여지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의 비밀,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거듭나기를

최근 참배객이 부쩍 늘어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의 홍범도 장군 묘 [사진-임재근 제공]
최근 참배객이 부쩍 늘어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의 홍범도 장군 묘 [사진-임재근 제공]

사실 홍범도의 유해 봉환은 2020년 3·1절 기념식에서 이미 천명된 바 있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마침 2020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1년 전에는 영화 <봉오통 전투>가 개봉되어 흥행을 구가하기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약 1년 6개월이 경과한 2021년 8월에야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범도의 유해 봉환은 결코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정부는 늦어지는 이유를 코로나19 사태 때문으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현지 고려인 사회와 북의 반발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멀지 않은 평남 양덕 출신인 홍범도는 살아생전에 “내가 죽거든 고향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북이 홍범도 유해 봉환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카자흐스탄 정부에 “남과 북이 통일된 이후에 유해를 넘겨주겠다.”고 한 애초의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을 때 카자흐스탄 정부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지 고려인 사회로서도 자신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홍범도의 상징성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지에서는 홍범도의 유언에 따라 북한으로 유해를 봉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보다 의미 있게 기여하는 방식으로 홍범도의 유해 봉환을 일구어내지 못한 점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가령, 남과 북이 공히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를 모시는 ‘현충 공간’을 판문점 근처 휴전선의 한복판에 만들고, 그 첫 안장자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봉안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봉안됨에 따라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의 홍범도 장군 위패가 모셔져 있던 자리는 이제 이곳이 홍범도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식만 남게 되었다.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독립유공자 제3묘역 917)의 묘비에는 평생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고민하고 실천한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인 '어깨동무체'로 ‘애국지사 홍범도 장군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분단 극복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상징하는 새로운 차원의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가슴 벅찬 그날을 상상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10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은 구글(https://maps.app.goo.gl/dDsr71Zrk3pgbzXGA)과 카카오(https://kko.to/TCLbYwzvTB), 네이버 지도(https://naver.me/GG84Zan5)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클릭하여 들어가 홍범도 장군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겨 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필자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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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다를 것 없는 바이든, 우리의 생존 전략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 ①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  |  기사입력 2023.10.23. 05:02:17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계 지정학과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전쟁 피로감은 높아지고 무고한 피해도 늘어나고 있지만, 종전이나 평화 회복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미·중 전략 경쟁도 조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러·우 전쟁과 미·중 경쟁은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 사안을 포함해 세계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합리적인 선택을 도모해야 할 까닭입니다.

 

이에 창간 22주년을 맞아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외교광장 및 평화네트워크와 함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을 주제로 토론회를 마련했습니다. 아래는 이날 토론회 발표를 맡은 전 국립외교원장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미·중 전략경쟁,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발표문 전문입니다. 

 

 

 

대전환의 시대

세계는 지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세계화와 민족주의와 지정학 부활의 파편화라는 두 개의 '메가트렌드'가 혼재하는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비정상 상태가 안정화되기보다는 불안정성, 불평등성, 불가측성을 특징을 하는 '뉴노멀'(New Normal)이 혼란과 혼재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 

 

인류 역사는 위기를 맞을 때마다 '대전환'을 이야기했고, 무엇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예측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에 경험해본 적 없는 거대한 불확실성의 시대다. 

 

1990년대 초,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소위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전성기를 맞았고, 우리는 그것을 세계화로 명명했다. 세계화는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패권 질서를 일정한 규칙과 규범의 틀 안에서 운용하게 만듦으로써 협력과 통합의 질서를 형성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요동쳤다. 

 

2001년 9.11과 2008년 국제금융위기는 미국 패권체제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심각한 약점을 드러냈고,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 골몰하는 동안 중국의 부상과 도전은 본격화되었다. 

 

또한, 세계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전체적으로는 번영을 가져다주었을지 모르나, 극심한 불평등 및 빈부격차를 초래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는 근로소득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자본소득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에 빈부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라며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을 저격했다. 

 

2016년의 두 사건,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당선은 탈냉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역류하는 전환점이었다. 협력과 통합이 아니라 내부의 실패를 외부 탓으로 돌리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혐오를 선동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동반되었다. 

 

기존 질서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기보다는 일부 세력의 이익을 위한 선동의 정치가 부상했다. 이른바 '트럼피즘(Trumpism)'은 질서 변동의 결과이자, 동시에 근본적 변화를 가속하는 촉매였다. 미국은 세계화의 리더 역할을 거부하고 자국 이익을 우선했으며, 팍스아메리카나는 흔들렸다. 

 

미국 또는 중국이 장기적으로 안정 질서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압도적인 패권의 존재가 국제정치의 안정성을 확보해준다는 '패권안정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은 불가능할 것 같다.

 

미국 사회의 분열과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미국 사회 내부에서도 당면한 위기가 매우 다층적이고 전례 없는 규모라고 입을 모은다. 2020년 대선에서 회자했던 미국의 위기 5종 세트는 스페인 독감 이후 100년 만의 보건 위기, 1920년대 말 대공황 이후 90년 만의 경제위기,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 이래 60년 만의 인종 갈등 위기,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 분열 위기, 그리고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기후변화다. 

 

트럼프의 집권과 부상은 미국이 맞닥뜨린 총체적 위기의 결과이자 곧 더 큰 변화를 초래한 촉매라고 해석한다. 미국은 전통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었고, 금융 자본주의의 득세와 왜곡으로 소득의 양극화가 초래되었으며, 중산층이 붕괴했다. 여기에 백인 숫자의 상대적 감소와 이민 유입이 증가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등장은 백인 기득권에는 큰 충격으로 내재했다. 게다가 노동자 대변을 자처하던 민주당은 입으로만 진보를 내세우는 '브라만 좌파,' 우리로 치면 '강남좌파'의 위선이라는 공격과 외면 끝에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에 패배하는 큰 빌미가 되었다. 

 

트럼프는 본능적으로 이러한 질서 변화를 감지해 활용함으로써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공화당 경선부터 기성 질서에 도전하는 이단아로서 자리매김하며 급부상했다.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과 이민자 추방으로 대표되는 반이민 및 반난민 정책을 통해 거리낌 없이 인종주의를 표방했고, 기성 세력의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비난하며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의 폭발적 환호를 끌어냈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주의를 공격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반복하면서 국가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천명했다. 2020년의 미국 대선은 트럼프가 4년간 구축했던 각자도생의 질서와 도전자 바이든이 상징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회복 사이의 선택이기도 했었다. 

 

바이든의 극적인 당선은, 일단은 국내외의 분열과 파편화에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갈라치기' 정치로 분열된 미국을 하나로 만들고, 망가진 글로벌리더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선언했었다. 자신의 당선을 역사의 ”변곡점“이라 칭했고,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바이든의 대외정책이 트럼프와 다른 것처럼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트럼프 2.0이라고 부를 정도로 미국 외교의 전통적 다자주의보다는 자국 위주의 노선으로 기울었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위협인식으로 인한 전략적 강박증에 빠져버려, 대선 당시 약속했던 미국은 말하자면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바이든이 승리했지만, 실상은 트럼피즘에 대한 단절은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미국 사회의 극단적 분열을 재확인했고, 트럼프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당시 바이든을 제외하면 역대 어떤 승리한 대통령들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분열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트럼프는 꺾었지만, 트럼피즘은 꺾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른바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은 패배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국제정치학자 스테판 월트 교수는 ”선거는 끝났지만, 이념 갈등은 이제 시작이“라며 미국 내 극단적인 이념 분열 현상에 주목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80%가 넘는 사람들이 공화당이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점령당했다고 생각하고, 공화당 지지자의 82%가 넘는 사람들은 민주당이 좌파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생각한다는 여론 조사는 심각한 분열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 사회의 주도권을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백인들의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두려움은 감성적 미사여구와 단순한 화해의 언술만으로 해소되기는 어렵다. 

 

미국 국내 사회는 물론이고 국제질서가 협력과 통합의 질서가 어려워지는 가장 큰 장애물은 중국과 벌이는 전략경쟁의 심화이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바이든 외교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중국과의 전략경쟁일 수밖에 없고, 바이든은 이를 전혀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질서의 운명은 양국 전략경쟁의 양상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등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이다. 먼저 국제정치의 '권력 전이(power shift)'에 의한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오가는 정권교체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누가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느냐의 결과보다도, 이미 두 국가의 권력 분포가 급변하고 있다는 자체가 전 지구적 불안정을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또한, 양국 여론의 서로에 대한 반감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특히 미국의 반중여론이 80퍼센트를 훌쩍 넘기고 있기에 공화당 민주당 할 것 없이 중국 때리기는 정권 획득과 유지에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양국 관계의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 202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유세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왼쪽) 당시 대통령과 조 바이든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AP=연합뉴스

 

미국 내 대중 전략노선들 

 

미국 내의 대중 노선들은 크게 보면 힘과 힘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자는 존 미어샤이머 류의 공격적 현실주의자와 아직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회복을 주장하고, 또 가능하다고 믿는 조셉 나이 류의 자유주의자들이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거론한 세계화와 파편화라는 국제질서의 두 가지 메가트렌드의 혼재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두 관점은 지금까지 대중 경제협력과 포용을 지속하면 중국이 변할 것이라는 과거 미·중 정상화를 끌어냈던 헨리 키신저류의 기능주의 접근의 오류를 한목소리로 비판한다. 결국 외부적 압박이나 봉쇄를 통해 중국 체제의 변화를 이끌 수 있으며 동시에 미국이 전략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노선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직전에 거론한 키신저류의 현실주의는 1970년대 데탕트라는 대중 포용 정책의 결과적 실패에 대한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미국의 네오콘 방식의 대중 정책이 오히려 미국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반격한다. 

 

중국의 위협에 대해 '전략적인 강박증(strategic obsession)'에 사로잡혀 이념과 가치를 망라한 전방위적인 압박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외교 비용을 증가시킴으로써 미국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현재의 미국의 저인망식 봉쇄는 미국의 외교적 자산을 낭비하는 것이며, 중국의 반칙행위에 대해서 선택식 견제만으로도 대중 격차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으며, 투명성, 민주성, 개방성에 바탕을 둔 미국 체제의 우월성을 통한 점진적 압박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과거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잡아 사회주의 진영의 불러온 것처럼, 지금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거나 최소한 중·러 사이를 분열시키는 이른바 '역(逆) 키신저 전략'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은 '반(反)글로벌리스트'로 집약할 수 있는 관점인데, 트럼프식 대외정책으로 미국 이기주의이자 동시에 고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트럼프가 재임 중에 그랬듯이 민주당 리버럴의 '정치적 올바름'을 저격하는 동시에 공화당 내부의 글로벌리스트를 공격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지금까지 글로벌리스트 은행가, 방산업체, 다국적 대기업의 연대에 의한 '딥스테이트'가 지배해왔기 때문에, 해외에서 전쟁을 벌이며 미국의 청년들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며, 국제기구와 동맹 네트워크로 인해 미국의 경쟁력을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NATO와 CIA를 해체하고,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장악하고, 동맹을 해체하며, 국제금융통신망(SWIFT)을 폐지하고, 언론매체의 선동 능력을 궤멸해야 미국이 다시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트럼프는 재임 시절 유엔 연설에서 반세계화를 부르짖고, 파리기후협약을 거부했고, WTO를 마비시켰다. 그는 현재 대선 재도전에서 공화당 후보 경선 경쟁자인 드샌티스 플로리다주지사도 중국, 유럽, 아시아와 기타 지역을 탈피하지 못하는 글로벌리스트에 포획되어있으며, 자신만이 '미국 제일'(America First)의 입장이며 그것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초부터 중국을 적으로 돌리거나 신냉전 구도로 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왔다. 다만 규칙을 위반해온 중국을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단호한 대중전략을 추구하되 트럼프처럼 신냉전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않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런 실수는 미국의 정책을 군사 일변도로 이끌 수 있으며, 상황이 악화할 경우, 미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유탄을 맞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행의 자유에 대한 글로벌 공약을 강조함으로써 남중국해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군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한편, 대만 관계법을 존중하며 양안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원한다. 홍콩사태와 관련해서는 홍콩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지지하고, 홍콩의 인권 가치를 수호하며, 민주주의적 법치를 이행하는 것을 지지한다. 홍콩과 함께 중국이 신장·위구르에 대해 인권탄압을 규탄한다. 

 

이렇게 보면 바이든의 대외정책이 트럼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실제로는 차이가 크지 않고 오히려 유사성이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바이든은 2차 대전 이후 지속해왔던 미국 대외정책의 원칙인 국제주의를 선언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정책이나 고립주의적 경향도 내재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글로벌거버넌스의 지속에 미국의 필수적인 이익이 달려있다는 원칙은 약화하고, 해외 군사개입을 하는 것이 국익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미국 외교협회 회장 리차드 하스는 바이든의 대외정책은 순전한 고립주의라기보다 미국의 전형적 국제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강경한 대중 정책을 보면 고립주의라고 하기는 어렵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가장 큰 유사성은 역시 미·중 전략경쟁이 외교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있다. 트럼프 정부의 대중 정책 설계자였던 전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메튜 포틴저는 아예 바이든이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바이든 정부에서 대중전략을 총지휘하는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조정관 커트 캠벨은 대중 관계를 관여나 포용이라고 정의하던 시대는 종식되었다고 했다. 즉, 과거 키신저 등이 중국을 미국이 주도하던 세계에 편입할 수 있다고 기대했던 환상이 깨졌다는 것이다. 

 

대만 정책은 더욱 연속성이 두드러지는데, 미국과 대만의 공식적인 접촉을 금지하던 것을 해제했을 뿐 아니라 고위급 간의 접촉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무역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매우 과장된 언술과 일방적 행보를 보였다는 차이는 있지만, 바이든은 새로운 자유무역정책은 거의 없고,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정책들을 계승하거나 약간의 변화만 주고 있다. 관세정책이나 수출규제, 중국 보조금 기업 조사 등도 트럼프 시절의 정책들을 대부분 계승했다. 

 

다만 트럼프가 아예 대놓고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했고, 상대적으로 고립주의적 경향이 더 강했다고 한다면, 바이든의 경우 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비롯해 팬데믹 대처를 위한 백신 정책 등에서 보인 자국중심주의는 명확하다.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한편, 미국 제조업 경쟁력의 부활을 위해 리쇼어링(re-shoring)부터 니어쇼이링(near-shoring)과 프랜드쇼어링(friend-shoring) 정책이나, 아프간 철군 등도 트럼프와 맥을 같이 한다. 민주당 정부가 주장하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등 가치문제는 트럼프의 철저한 비즈니스 계약적 사고와 차이가 크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는 가치를 오히려 장애물로 생각했고, 독재자들과의 개인적 친분 등을 선호했다. 하지만 바이든 역시 중국과의 대립구조에서 미국의 전략에 도움이 되는 필리핀, 인디아, 베트남, 미얀마, 사우디 등의 반민주정권의 가치 이슈들은 모른 척했다. 

 

미국의 국내 정치적 분열은 점차 극대화하고 있지만, 대외정책은 꽤 합의를 이루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런 합의가 그것이 미국의 장기적 이익이나 국제질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이행한다는 차원에서는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20년 이상 끌어오던 아프간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철수한 것을 다른 동맹국에 대한 신뢰 문제와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이익을 앞세운 결정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과 진정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바이든이 겉으로는 세계를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으로 나누고 가치의 투쟁을 벌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는 패권 갈등을 벌이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유럽의 단일대오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에만 적용된다. 바이든의 이중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프간 철수였다. 바이든은 아프간 전쟁의 원래 이유는 테러리스트 위협 제거였고, 이것이 달성되었기에 철수하는 것이라면서 민주화를 포함한 아프간의 미래는 아프간인들의 몫이라는 냉정한 말을 남겼다.

 

▲ 2021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8월 26일(현지 시각) 아프간 카불 공항 테러와 관련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역내 안정을 위협하는 미국의 전략 

 

바이든의 외교는 트럼프의 고립주의와 네오콘의 국제주의가 혼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중 봉쇄를 위해서는 네오콘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글로벌리스트 외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바이든은 자신의 신냉전 반대 천명과는 달리 가치와 이념 연대를 통한 중국봉쇄에 '올인'하다시피 한다. 또한 전 세계 동맹 네트워크를 부활하는 동시에 과거 미국이 친미라면 독재정권이라도 지지했던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던 민주당이 주도하는 매우 반동적 대외정책이 아닐 수 없다.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을 '악(惡)의 진영'으로 규정하면서 한국, 베트남, 인도 등의 반민주적 정권들과는 '선(善)의 진영'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이익이 분명하지 않은 일에는 고립주의를 고수하고, 미국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일에는 국제주의를 거부한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이후로 민주당·공화당 관계없이 아무리 정당하고 명분이 있는 해외 분쟁이라도 인적 개입은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져 왔다. 또한 미국은 자신이 구축하고 또 유지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근간인 유엔, WTO, WHO 등 국제기구들의 무력화를 주도하고, 자유무역을 촉진하는 다자 합의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다만 의회의 비준이 필요 없는 행정명령을 동원한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같은 보호주의와 블록화를 조장한다. 목표는 중국 배제와 봉쇄를 위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적으로는 공급망 재편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군사·안보적으로는 1975년 헬싱키조약 이후의 국제정치의 협력안보 또는 공동안보 체제를 무너뜨리고 진영화를 통한 대결구조의 부활이 진행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키신저류가 말하는 중러 분열 전략은 흑백론의 사고로 무장한 네오콘의 세계관으로는 불가능하다. 중러 분열 전략을 배제하고 나면 차선의 전략은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것이다.

 

아시아는 유럽과는 달리 나토로 대표되는 단일한 집단동맹이 아닌 중첩적 쌍무동맹으로 이뤄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근간이었다. 그러나 소위 '아시아의 나토화'에 대한 미국 외교의 꿈은 초기부터 있었고, 지금은 대중 봉쇄라는 목표로 인해 더욱 강력해졌다.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쿼드와 미국-영국-호주의 오커스는 물론이고, 한-미-일의 안보 협력체 구축도 아시아의 나토화의 일환이다. 

 

이와 함께 나토와 아시아의 동맹 간 연계 전략도 구사되고 있다. 2022년 나토가 전략개념을 집단안보에서 집단동맹으로 바꾸고 중국과 러시아를 도전과 위협으로 적시하는 자리에 한국, 일본, 뉴질랜드, 호주를 초대했고, 2023년에도 불렀다. 간헐적으로 제기되는 한반도의 유엔군 사령부를 나토 사령부로 확대·개편하겠다는 것도 가능한 옵션이다. 프랑스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미국이 일본에 나토지부를 설치하겠다는 의도에서도 읽힌다.

 

미국이 유엔사를 확대하는 방식이든, 아니면 기존의 동맹 또는 안보 협력체를 연결하는 방식인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아시아의 집단동맹 구축이라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캠프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회담 직후 바이든이 역사적 합의로 치켜세우며 만족스럽다고 감격하고, 뉴욕타임스가 미국 외교 70년의 숙원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던 이유였다. 

 

한반도의 운명과 생존전략 

 

세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중의 전략적 갈등이 영역적으로는 무역, 통화, 기술, 체제 우위를 놓고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지만, 물리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를 중심에 두고 집중되는 경향을 띤다. 

 

지구적 경쟁에서는 아직 중국이 미국과 맞서는 데는 역부족일 수 있으나, 동아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므로 팽팽한 세력 다툼이 벌어진다. 

 

양국의 세력권 경계 설정이 관건인데, 한반도, 동중국해, 중국-대만 양안, 그리고 남중국해가 그런 지점들로 패권 대결의 단층선 역할을 한다. 이 지점들을 연결하면 동아시아를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경계선이 그어지는데, 중국은 이를 돌파하려 하고, 미국은 어떻게든 봉쇄하려 한다. 

 

경계선을 두고 이미 충돌의 예고편들이 불거진 바 있다. 아래부터 살펴보면 남중국해는 중국으로서는 자신들 대부분의 에너지원을 수송하는 해로의 안전을 미국에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미국은 중국이 이곳을 봉쇄하거나 통제할 경우 한국과 일본이 있는 동북아로의 바닷길이 막히게 된다는 우려가 있다. 서로 신뢰가 있고 협력적인 분위기였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미·중 간의 불신이 커지면서 의도적 군사 활동 증가와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대만 양안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대만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과 본토와의 관계 개선을 강조하는 국민당 정부의 집권에 따라 양안 관계는 요동쳤다. 그러다가 2016년 민진당이 집권한 이후 대만의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어려워지던 가운데 발생한 홍콩의 '우산 혁명'과 이를 힘으로 억압한 시진핑의 행보에 대만 내 반중 정서가 폭발했다. 이는 민진당의 재집권으로 이어졌으며, 곧바로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했고, 미국의 노골적 대만 챙기기로 갈등은 깊어졌다.

 

동중국해 역시 충돌 포인트로서 꾸준하게 긴장이 고조되어왔다. 일본 명칭으로는 센카쿠이고, 중국 명칭으로는 댜오위다오인데 여러 섬이 연결된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데다, 과거사 반감과 민족주의적 감정 격돌로 인해 일본과 중국의 분쟁지역이 되었다. 

 

일본은 1895년 영유권을 주장할 때까지 아무도 살지 않는 주인 없는 섬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그 이전부터 중국의 소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가 재부상한 것이 2010년에 발생했던 불법 조업하던 중국 배를 일본 해양경비대가 체포하는 사건 이후였다. 이후 오바마 정부가 개입하면서 문제는 커졌다. 한편으로는 중일 양국의 자제를 촉구하면서도 미일 안보 조약에 의거 센카쿠는 일본 영토이며, 미국이 보호할 것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바마 정부의 소위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미국과 일본은 <미일 안보가이드라인>을 변경하면서 밀월관계를 구축했다.

 

단층선을 구성하는 4개의 충돌지점 중 가장 위험해 보이는 것은 일단 중국-대만 양안일 것이다. 그러나 양안에서 충돌하는 것은 곧 공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서로에 대한 공격적 언급에 비해 실제로 충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의 대만에서의 긴장 고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미래에 무력 충돌은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와는 달리 대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중국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는다. 중국의 침공을 방어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정도의 간접적 지원을 추구한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대만 문제를 놓고 상대방에 엄포를 놓을 수는 있어도, 실제 무력 충돌로 갈 가능성은 적다는 의미다. 

 

이를 고려하면 미·중 전략경쟁의 국면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시험하고, 기 싸움에서부터 경고하는 활용도 면에서 한반도가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한반도는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서 이를 강화함으로써 비용을 치를 것인지, 아니면 경계의 자리에서 완충의 역할을 할지 기로인 셈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 등을 단순히 신냉전 질서의 고착으로 보는 것은 정확한 이해도 아닐뿐더러 우리의 향후 행보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까지 분석한 것처럼 미국의 진영화 시도와 함께 각자도생의 파편화가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출범부터 거의 절대적인 진영편향 외교와 힘을 통한 안보를 내세우며 지정학적 위기를 배가해왔다. 

 

미국은 이념에 기초한 글로벌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윤석열 정부의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국가전략이 냉전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지점에서 미국은 해양 세력의 전위대의 역할을 주문하고, 한국은 충실하게 따른다. 

 

윤 정부의 안보 절대주의와 동맹 신화의 맹목적 추종은 우리의 역량을 지정학과 미국의 전략적 범위 안에 갇히도록 만들 것이다. 확장 억제, 전략자산 전개, 한·미 연합훈련 확대 등을 통한 외교의 안보화와 경제와 기술 등 가히 모든 영역의 군사화로 위기를 자초한다. 

 

최근 한국의 극우 인사들이 윤 정부의 시대적 사명을 '좌파 척결'로 정조준하고,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이러한 흑백 논리는 대외정책에도 반영되어,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극우와 삼각편대를 구성해 냉전 시절을 소환하면서 우리는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의 대응 전략은 '미들 파워(middle power)' 또는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로 가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의 판에서 배타적 선택의 프레임에 빠져들지 말고, 유사한 입장과 능력을 지닌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완충지대를 구축해야 한다. 

 

지난 6월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는 "6개의 중간 국가들이 미래의 지정학을 결정할 것이다(6 Swing States Will Decide the Future of Geopolitics)"라는 분석 기사에서 앞으로 국제정치 질서에 영향력을 발휘할 국가로 인도, 브라질, 사우디, 인도네시아, 남아공, 터키를 꼽았다. 가장 큰 이유는 미·중 전략경쟁의 판도에서 오히려 어느 한쪽 진영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역학 구도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중 사이에서 선택의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미·중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구애하는 나라들이다. 과거에는 국력의 크기로 미들 파워, 즉 중견국이라는 용어가 유행했지만, 이제는 양쪽 진영이 아닌 제3의 지대를 만들 수 있는 글로벌 사우스의 리더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이것은 과거 냉전 시절 G77이나 비동맹 운동의 단순한 부활이 아니다. 이념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일찌감치 미국 진영에 참여함으로써 영향력을 스스로 감소해버린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과 대비된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전략을 충실히 수행하며 진영싸움의 최전방 돌격대를 자처하는 윤석열 정부는 최악의 선택으로 한국 외교의 불행한 미래를 예약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김준형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는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의회산하 평화재단 연구원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평가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한미관계를 포함한 국제정치경제 등을 주 연구 분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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