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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종철 열사 아버지, 노환으로 별세

박정기씨, 28일 오전...부산진구 시민장례식장에서 4일장, 31일 발인

18.07.28 10:51l최종 업데이트 18.07.28 11:43l

 

 20일 오후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인 박정기(90)씨가 입원한 부산의 한 요양병원을 찾은 문무일 검찰총장이 박씨의 손을 잡고 쾌유를 빌고 있다.
▲  지난 3월 20일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인 박정기(90)씨가 입원한 부산의 한 요양병원을 찾은 문무일 검찰총장이 박씨의 손을 잡고 쾌유를 빌고 있는 모습. 안타깝게 박정기씨는 7월 28일 오전 별세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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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90)씨가 아들 곁으로 떠났다. 아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지 31년 만이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박씨는 이날 오전 5시 50분께 부산 수영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지난해 1월 넘어져 척추 수술을 한 뒤로 급격히 쇠약해진 박씨는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장례는 부산 부산진구 시민장례식장에서 4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31일 엄수될 예정이다.

서울대 언어학과에 다니던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하고 쓰러졌다"며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결국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는 같은 해 6월항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있다.
▲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있다.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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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개봉한 영화 <1987>은 당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특히 박씨가 아들 박종철 열사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많은 이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1987년 당시 박씨가 한 말이었던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라는 대사가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지난 1월,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은 경찰 지휘부와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박종철 열사의 영정에 고개를 숙였다. 문무일 검찰총장도 지난 3월 박씨가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아 당시 은폐에 가담한 검찰을 대표해 사과했다. 문 총장은 박씨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1일 다시 병문안했다.

한편 박종철 열사의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은폐하려고 한 강민창 전 내무부 치안본부장은 지난 6일 노환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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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는 종전선언 약속을 이행하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7/28 11:43
  • 수정일
    2018/07/28 11: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사설] 트럼프 정부는 종전선언 약속을 이행하라!

오늘(7월27일)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5년이 되는 날이다. 온 겨레는 바로 오늘 “한국전쟁은 끝났고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을 선언하는 종전선언이 나오길 간절히 기대했다.

종전선언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새로운 북미관계를 향한 첫걸음이며, 4.27판문점선언과 6.12북미공동성명 이행을 통한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로 나아가는 세기적인 대전환의 입구, 출발점인 까닭이다.

북한(조선)은 7.27을 맞아 미군 유해송환과 함께 서해 위성발사장 해체를 단행하는 등 북미정상 합의와 약속을 이행하는 조치를 속속 취하고 있다. 북한(조선)은 트럼프 행정부에 ‘종전선언’ 약속을 지킬 것을 강하게 촉구하면서도 ‘선제적 평화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핵시험장의 선제적 파괴조치와 같은 맥락이다.

반면 트럼프 정부는 종전선언 등에 상응하는 조치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 정부와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과연 북미공동성명을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지난 5일 북미공동성명 이행 실무협상을 위해 방북한 폼페오 미 국무장관은 북한(조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 또한 “평화체제 구축 문제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 문제까지 멀리 뒤로 미루어 놓으려 했다.”

잘 아는 것처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은 1) 새로운 북미 관계 2)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3)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4) 미군 유해송환 등 네 가지 합의사항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이행을 위한 첫째 실무협상은 이 네 가지 의제의 이행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러나 폼페오는 오직 비핵화, 그것도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조선)만의 비핵화에 매달렸다.

지난 5일 폼페오는 방북길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김정은 북한(조선)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합의한 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지속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가 북미공동성명에서 빠지게 되자, 합의에는 있지도 않은 새로운 용어를 고안해 낸 것이다. 그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FFVD의 대가인 것처럼 말했다. 북미정상회담 전 ‘선비핵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나아가 폼페오는 지난 25일 미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2021년 1월 이전 CVID 달성’이라는 ‘비핵화 시간표’를 제시하면서 “북한(조선)의 대량파괴무기(WMD) 제거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제재를 완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북미정상회담 전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꺼냈다가 북미정상회담 무산위기까지 불러왔던 WMD+탄도미사일 폐기론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 23일 미 상하원 군사위원회는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또는 2만2000명 미만(현재 2만8500여명)으로 줄일 때엔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거치도록 하는 새로운 국방수권법안을 의결했다.

북미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정부는 오히려 대북제재 단속과 강화에 몰두하고 있다. 6.12북미정상회담 당일 중국 외교부 겅솽 대변인이 대북제재 조정을 공개 주장한 데다, 6월19일 북중정상회담에서 양국간 협력이 우호적으로 논의되자 트럼프 정부는 제동을 걸고 든다.

6월22일, 지난 정권이 발동한 미국의 독자적 대북제재 6건의 효력을 1년 더 연장한 데 이어 6월25일엔 트럼프가 직접 나서 “중국이 대북제재를 풀면 정말로 안 좋을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이어 6월27일 베이징으로 날아간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협박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중국의 대북제재 유지를 압박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대북제재 단속강화 압력은 가히 전방위적이다. 폼페오는 6월18일과 6월28일 연이어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 전화를 걸어 강력한 대북제재를 압박했다. 지난 25일엔 폼페오가 이례적으로 조명균 통일부장관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대북제재 유지를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통화는 폼페오가 7월25일(현지시각)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대북제재를 이어가기로 한 입장을 밝히기 직전에 이뤄졌다.

방한 중인 마크 램버트 미국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대행은 지난 26일 코레일을 비롯한 대북경협기업 관계자들과 비공개 만남에서 “대북 경협에 너무 앞서 나가지 말라”는 미국 정부의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그는 “대북 제재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민간 기업들이 북한(조선)과 교류사업을 추진할 때 반드시 정부와 사전 협의를 하고, 필요하면 미국측에도 직접 문의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한 남북경협 기업인은 “비핵화 협상이 완전히 마무리돼 모든 제재가 해제되기 전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미국의 이런 대북제재에 대한 전방위적인 단속과 압박이, 한국 정부가 최근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에 개성공단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개·보수 공사를 위한 물자 반입에 대한 포괄적 대북제재 유예 조치를 신청한 시점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에 북이 2020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스포츠용품 관련 제재 대상에서 제외를 요청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각하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7일(현지시각)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미국은 미상원 은행위원회에서 발의된 ‘대북 은행업무 제한 법안(BRINK Act. 브링크액트)’과 외교위원회에서 발의된 ‘효과적인 외교 촉진을 위한 영향력 법안(LEED Act. 리드액트)’ 등 새로운 대북 제재와 관련된 두 건의 법안을 의결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미국의 태도에 비춰볼 때, 미국이 한국 정부의 대북재제 유예조치 요구에 동의할 가능성은 회의적이다.

남북체육회담(6.18), 남북적십자회담(6.22), 남북철도협력분과회담(6.26), 남북도로협력분과회담(6.28), 남북 해상 긴급연락망 가동(6.1),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공사 시작(6.2)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과 북의 노력이 미국의 대북제재 앞에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평화를 애호하는 전 세계인들 앞에서 천명한 6.12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를 뒤집고 역행하면서, 남북 사이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가로막는 배경에는 지극히 정략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정상회담 이후 미국 내 보수언론을 비롯한 반북세력들은 ‘얻은 것이 없는 실패한 회담’이라고 폄하하면서 “북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숨기고 있다”, “비밀 농축유라늄 시설이 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미사일 생산공장이 있다”는 둥 근거도 없이 악선전을 해댔다.

더욱이 ‘러시아스캔들’ 추가 폭로가 이어지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럼프는 “북의 완전한 비핵화에 이르기까지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트럼프의 이 발언을 ‘포괄적이고 전격적인 비핵화’ 입장에서 ‘단계적 동시이행’의 입장으로 선회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 정부가 행한 일련의 언행은 미국이 취해야할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를 서두르지 않고 ‘최고수준의 제재와 압박’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으로 후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의 성과와 핵과 미사일 실험발사 중단, 핵시험장 폐기, 미군 유해송환, 미사일(위성)발사장 해체 등 북의 선제조치에 따른 정치적 수혜만 챙기고 종전선언과 제재완화 등에 따른 정치적 부담은 회피할 생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 대중무역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트럼프가 북중관계의 밀착을 견제하면서 대북제재를 미중무역전쟁의 고리로 활용하고, 미중무역전쟁을 중국의 대북재제 강화의 지렛대로 쓰려는 것이 아닌가는 의심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종전선언 약속을 즉각 이행해야 한다. 종전선언은 트럼프에겐 정치적 흥정물이거나 정략적 소재일지 모르지만,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겐 생존과 운명이 걸린 문제다. 트럼프 정부가 새로운 북미관계를 선언한 북미공동성명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계속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연인원 수천 만 명이 참가한 촛불시위, 그 강력한 한국민의 저항과 거대한 에너지가 트럼프와 미국을 향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문재인 정부에게도 촉구한다. 지금의 현실은, 미국의 요구에만 순응해서는 남북은 결코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없으며 한반도 평화체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의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미국에 종전선언과 제재완화를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자주적 입장 없이는 궁색한 위안이거나 말장난에 불과하다.

한국의 평화통일세력은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거족적인 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 판문점선언은 남북의 정상이 서명했지만 그 실천과 이행의 주체는 남과 북, 해외의 전민족이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온겨레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그 어떤 합의도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은 6.15시대가 준 준엄한 교훈이다. 종전선언이든 평화협정이든 그 어떤 것도 투쟁없이 이뤄지는 것은 없다.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제국주의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판문점선언과 북미정상회담의 감동에만 빠져 있어서도 안 되고, 그 무엇이 다 된 것처럼 착각해서도 안 된다.

일제 36년, 그 두 배나 되는 정전체제를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주통일의 큰길을 열 수 있는 다시 오지 않을 절체절명의 기회인 오늘, 온 힘을 판문점선언 이행에로 쏟아 붓자. 판문점선언 이행은 그 이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투쟁이다. 지금 당장 종전선언이행, 대북제재 해제운동에 떨쳐나서 민의 힘으로 이를 쟁취하자. 그리고 그 힘으로 평화협정체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 근본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으로 거침없이 나아가자.

현장언론 민플러스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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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송월, 김여정, 최선희 - 북한의 여성들

<기고> 서울겨레하나, '판문점선언 시대'를 읽는 아카데미 (4)
강혜진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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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7  18: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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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겨레하나는 7월 4일부터 31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시민강좌 ‘판문점선언시대를 읽는 아카데미’를 진행합니다. 다음은 지난 7월 24일 ‘분단체제와 혐오를 넘어, 평화시대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로 김귀옥 한성대 교수가 진행했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북한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판문점시대에 남과 북의 여성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평화시대를 만들어가야 할지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강연 : 김귀옥 한성대 교수
정리 : 강혜진 서울겨레하나 홍보팀장

 

   
▲ 서울겨레하나가 24일 개최한  '판문점선언 시대'를 읽는 아카데미 네 번째 강좌. 김귀옥 한성대 교수가 24일 ‘분단체제와 혐오를 넘어, 평화시대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강혜진 통신원]

2018년, 남북이 만들어온 한반도 평화의 타임라인을 떠올려보자.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 북한 대표단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 그리고 4.27 판문점선언과 이후 북미정상회담까지. 이 역사의 꼭지점마다 공통점은 현송월, 김여정, 최선희 등 북한‘여성’들이 함께 자리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를 보면 여성이 25% 내외를 차지하는데 남한의 경우, 최근 여성 국회의원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고, 기초 지자체의 경우 여성의 수가 많아지고 있지만 수치로 보자면 압도적으로 북한이 많다. 북한에서 여성은 어떤 지위를 획득해 왔을까. 시기별 북한 여성의 삶의 궤적을 함께 살펴보자.

종속적 여성에서 독립적 여성으로 - 남녀평등권과 토지개혁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사회가 변화한다. 그 중 여성의 사회적 성격을 바꿔놓는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여성의 존재론적 성격과 위상을 바꾸는데 가장 의미가 있는 사건은 남녀평등권 도입이다. 제도적 성평등은 남한보다 북한이 빠르게 도입한 것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제도적인 성평등을 먼저 만든다. 남한의 경우 1989년도에 들어와서야 남녀평등권을 만드는 것에 비해 북한은 46년 7월 30일에 공포된 “북조선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9개조)”와 9월 14일 공포된 법령의 “시행세칙(29개조)”에 남녀평등권을 기초에 둔다. “동일노동·동일임금” 권리,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자유결혼권, 자유이혼권과 재산상속권과 이혼시 재산과 토지분배권을 제정한다. 또 조혼이나 민며느리제도, 일부다처제, 공·사창제도를 금지하였다.

둘째, 현실적으로 여성의 평등권을 보장한 최초의 제도적 실효는 토지개혁으로 나타난다. 토지개혁 당시 성인 남녀 모두에게 같은 1점씩을 부여하였는데, 설령 토지는 호당 합산되어 분배되었지만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몫을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자신의 몫을 갖게 된 것은 남편에 대한 의존적 삶에서 사회정치적으로 독립된 개체로서 각성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셋째, 문맹퇴치운동과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은 여성의 근대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 직전 전국 문맹률은 77.8%에 달했고 여성 문맹률은 90%이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에 각 도에 ‘야학회’나 ‘성인학교’ 등에서 문맹퇴치운동이 시작되었고 1949년 초쯤에 운동이 끝났다. 문맹퇴치운동과 건국사상총동원운동으로 일제 잔재나 봉건 잔재를 청산하면서, 미신 숭배나 남존여비 사상도 척결해 가는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들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여성이 사회역사의 주인이라는 인식으로 발전하여 여성의 권리 의식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 책임감도 같이 형성된다.

넷째, 조선민주녀성동맹이 1945년 11월 18일 창립되면서 조선직업총동맹이나 농업근로자동맹, 민주주의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지 않았던 북한 여성들도 조직원으로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여맹원들은 남녀평등권을 실현해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남성이나 사회단체들에 대하여 설득과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데 앞장섰고 일반 여성들에게 여성해방 인식을 보급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여초사회’

한국전쟁은 남북 모든 주민들에게 절대절명의 위기를 주었다. 전쟁 직후 북한에는 ‘트럭 대 일’이라는 농담이 유행하는데 한 트럭분의 여성에 남성 한 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북한은 전통적으로 남초사회였다. 토지가 남쪽에 비해 부족하지만 광산 등이 존재했고 이를 토대로 일제강점시기 공업단지들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여성 100명당 남성의 수는 일제강점시기 이남이 93.2, 북이 108.3이었으나 전후에 상황이 역전되어 1953년에는 북이 88.3으로 감소된다.

전쟁 직후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면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여성들이 공장을 직접 돌리거나 농사를 전담하기도 했고, 과거 금녀(禁女)의 직종이었던 트럭이나 기차 운송업, 어업(선원), 광업(광부)에도 투입된다. 특히 중공업 중심으로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당시 북한은 젊은 남성 대부분을 이러한 공장 혹은 건설부문으로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농촌에서는 여성 관리자들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이 조성된다. 한달화 협동관리위원장과 같은 인물이 1960년대부터 배출되었던 것이 이러한 배경이다.

아이가 있는 여성들에겐 2시간의 휴식시간을

   
▲ 김귀옥 교수는 북한의 모성보호제도 등을 구체적으로 예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강혜진 통신원]

일하는 여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노동전선에 뛰어들기 위해서 국가는 무엇을 보장해줘야 할까. 바로 보육, 가사, 교육 등이다. 북한에서는 본격적인 ‘여성의 노동계급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탁아소 건설을 비롯한 모성보호 제도를 갖춘 여성복지 제도를 구비하기 시작한다. 북한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3대 기술혁명’을 추진하며 여성들을 가사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과제들을 제시한다. 또한 여성의 간부화와 인테리화도 추진한다.

구체적으로 여성관련 정책 중 모성보호제도를 살펴보자. 모성보호제도는 월 1회의 유급 생리휴가제, 임산부의 경우 가벼운 업무 배치와 시간외노동과 야간노동 금지, 산전산후 100% 유급휴가제를 들 수 있다.

남한과 다른 특이한 제도로는 ‘수유권’을 들 수 있다. 북한도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생후 1년 이하 유아를 가진 직장 여성의 경우 오전 오후 각 2회 각 30분씩, 1년 이상의 유아를 가진 어머니의 경우 오전 오후 각 1회 각 30분씩 휴식시간을 가진다. 북한은 공장별, 직장별로 탁아소를 운영하는데 본인이 일하는 일터에 어린이집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쉬는 시간에 이러한 육아시설에 있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러 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보육뿐만 아니라 가사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가사의 사회화’정책을 실시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각종의 옷 공장과 생필품 공장, 공동세탁소, 공동식당을 운영하고 가정용 냉동고와 전기가마 등의 부엌세간을 공급해 나갔다. 이후 밥공장이나 부식공장, 된장공장, 간장공장 등이 전국적으로 설립된다.

남-북 여성이 ‘어떤’ 한반도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이제 분단국가주의의 가부장적 제도를 만들어 왔던 이전 시기와 결별을 할 때가 되었다. 한반도평화시대를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함께 만들어야 한다.

통일의제를 만들어 가는데 여성이 있음으로서 젠더화된 통일의제를 설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남북여성교류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만남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남북여성교류의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도 제고해야 하고 혐오, 반공, 분단의식에 대한 성찰적 태도도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보겠다는 자세다. 그리고 상대방의 좋은 점은 본받고 아쉬운 점은 서로 고쳐 가면 된다.

북한 사회에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가져올 것이 있다면 조직성이고 우리 사회의 장점은 자율성이다. 조직성과 자율성이 결합했을 때, 새로운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분단국가주의 아래 착취당하는 여성의 삶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과 북의 여성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갈 새로운 한반도에서의 여성의 삶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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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맞아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의지 높여

7.27 맞아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의지 높여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7/28 [09: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대북제재, 정전협정, 주한미군, 종속적 한미동맹을 걷어내자!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7월 27일 광화문광장에서 '전쟁은 끝났다. 평화의 시대를 열자'라는 주제로 열린 평화행동 참가자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2018년 7월 27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판문점선언 실천, 815자주통일대행진 추진위원회'는 전쟁은 끝났다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주제로 '7.27평화행동 종전 퍼포먼스(이하 평화행동)'을 진행했다.

 

평화행동에서는 8월을 가장 뜨겁게 살 통일선봉대통일대행진단의 결심을 밝히는 자리가 이어졌다.

 

또한 올해로 10주기를 맞는 정유미(전민특위 사무총장)의 남편인 쟈니클라인 목사의 미국규탄연설 등이 있었고전체 참가자들이 상징의식을 함께 하면서 판문점 선언 이행조국통일 실현 의지를 다졌다.

 

▲ 7월 28~29일 활동을 하는 서울지역자주통일선봉대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서울지역자주통일선봉대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서울지역자주통일선봉대 대장인 박희진(민중당 자주통일위원장)씨는 우리는 판문점선언을 통해 길게는 100짧게는 70년간 지속되어온 대결과 전쟁을 끝내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로 나아가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바로 지금이 분단과 전쟁대결의 상징인 주한미군이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만들어 나갈 적기이다역사적인 촛불혁명으로 분단과 대결의 시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어낸 서울시민들과 함께 2018, 서울지역자주통일선봉대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 조헌정 목사는 올해안에 평화협정 체결에 힘을 모으자고 연설했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이어 평화행동 공동대표 조헌정 목사는 우리 국민의 힘으로 종전선언 이뤄내고올해안에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고 호소했다.

 

쟈니 클라인 목사는 미국의 역사는 한국에 비해 어린 국가이지만 폭력의 역사범죄의 역사이다전 인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미국은 폭력에 미쳐있다미국은 쇠퇴해가지만 그들은 폭력을 끝낼 의지도 없다한국이 평화협정을 요구하고 전쟁을 끝내야할 때이다미국이 한국 땅에서 사라져야 할 시기이다라고 연설했다.

 

▲ 대학생들이 통일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8월을 맞아 한반도 곳곳에 미군철수통일의지를 높이는 대학생 통일선봉대통일대행진단 대장들의 결의발언이 이어졌다.

 

대학생들은 노동자 통일선봉대와 성주부산평택 등에서 활동을 할 예정이다. 8월을 자주와 평화통일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판문점선언 이행한미동맹 파기주한미군철수종전선언 과 평화협정 체결 내용으로 전국의 국민들을 만나겠다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서겠다고 밝혔다.

 

▲ 노동자 평화통일실천단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주한미군철수하라!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이어 전체 참가자들이 대북제재정전협정, 주한미군종속적 한미동맹 등을 걷어내고 통일한반도를 만드는 상징의식을 하면서 평화행동을 마무리했다.

 

▲  평화협정 체결하고 주한미군 철수하라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한편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정전협정 체결 65평화협정미군철수대회를 개최했다.

 

윤기진 국민주권연대 공동대표는 시대가 바뀌었다. 6.12 북미합의를 미국에게 이행시켜야 하는 시기이다. 6.12 북미합의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약속한 것이다그런데 미국은 국방수권법을 통해 주한미군을 22천명이하 감축시키는 것은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을 확정했다우리의 힘으로 미국이 합의를 이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한미군을 우리 땅에서 들어내야 한다. 8월 15, 9월 8, 11월 3일 총집중에서 미군을 철수시키자고 호소했다.

 

▲   7월 27일 미 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정전협정 65년, 평화협정, 미군철수대회가 진행되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김한성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공동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통일의 시대에 맞게 태도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다왜 여전히 미국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통일농구대회에 우리 대표팀은 공군기를 타고 갔다이는 대북제재 때문이다왜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대북제재 해제하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가, 5.24 조치도 당장 해제해야 한다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게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변화를 요구했다.

 

또한 김은진 국민주권연대 공동대표는 연설에서 하반기에 미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위해 11월 3일 자주독립선언대회까지 온힘을 다해 싸워나가자고 호소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성조기가 붙어 있는 얼음을 깨뜨리는 상징의식으로 집회를 마무리했다

 

▲ 평화협정 체결하고 미군을 철수하라! 구호를 외치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시원한 얼음처럼 미군도 시원하게 나가달라는 상징의식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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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수원, 4월에 공문으로 원전정비 연기했다

한빛‧한울 1호기 한수원에 보낸 공문 “조중동 경제지의 여름철 폭염으로 원전 재가동설 거짓 확인”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2018년 07월 27일 금요일

올 여름 유례없는 폭염으로 탈원전을 하려던 정부가 원전 재가동에 나섰다는 조중동과 경제지 등의 보도와 관련해 한국수력원자력이 이미 지난 4월 정비기간을 연기한다는 계획을 세운 사실이 내부 공문을 통해 확인됐다.

여름철 폭염으로 탈원전을 선언한 정부가 돌연 원전을 재가동하기 위해 정비착수시기를 연기했다는 조중동과 경제지 등 주류 언론의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27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우원식 의원(더불어민주당‧서울 노원을)이 확보한 ‘한빛 1호기 제24차 계획예방정비 기본계획서’(2017년 10월13일자), ‘한빛 1호기 24차 계획예방정비공사 시행계획서 제출’(지난 4월2일자), ‘한울 1호기 제22차 계획예방정비 시행계획 제출’(4월4일자) 등 한수원 내부공문 세 건을 보면, 공사 시작기간이 한빛 1호기는 8월13일에서 8월18일로, 한울1호기는 8월15일에서 29일로 각각 연기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한빛원자력본부장이 지난해 10월13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한빛 1호기 제24차 계획예방정비 기본계획서 제출’ 공문을 보면, 한빛 1호기는 애초 제25주기 연료재장전 및 제24차 계획예방정비를 위한 기본계획을 오는 8월13일 오전 10시부터 10월19일 저녁 7시까지 1617시간(67.4일) 동안 시행할 계획이었다. 한빛1호기는 공문에서 “한울2호기 21차 OH시 CLP 점검범위 적용 및 CLP 정비범위에 따라 공기(공사기간)연장 가능”이라고 썼다. 

(※OH(overhaul‧계획예방정비), CLP(containment liner plate‧격납건물내부철판) 원자력발전소의 돔 형태의 건물 콘크리트 안쪽에 있는 얇은 철판)

이후 한빛원자력본부장은 다시 지난 4월2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한빛 1호기 24차 계획예방정비공사 시행계획서 제출’ 공문에서 공사기간을 오는 8월18일 오전 10시부터 11월7일 오후 4시까지 1950시간(81.3일) 동안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한빛 1호기의 계획 예방정비를 위한 공사 시작시점을 연기한다는 계획은 4월2일에 이미 한수원 본사로 제출돼 그대로 결정됐다. 

▲ 한빛1호기 본부장이 지난해 10월13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공문. 사진=우원식 의원실
▲ 한빛1호기 본부장이 지난해 10월13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공문. 사진=우원식 의원실
 
▲ 한빛1호기 본부장이 지난 4월2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공문. 사진=우원식 의원실
▲ 한빛1호기 본부장이 지난 4월2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공문. 사진=우원식 의원실
 

한울원자력본부장이 지난 4월4일 한수원 정비처장에 보낸 ‘한울 1호기 제22차 계획예방정비 시행계획 제출’ 공문에 따르면, 한울 1호기의 22차 계획예방정비를 위한 공시가간을 변경 전에는 오는 8월15일 오전 10시부터 10월6일 오후 2시30분까지 1252.5시간(52.2일) 동안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변경 후엔 오는 8월29일 오전 10시부터 11월21일 오후 2시30분까지 2020.5시간(84.2일) 동안 진행한다고 밝혔다.

 

착수일의 변경사유에 대해 한울원자력본부장은 공문에서 “추가운전 가능일 반영에 따른 착수일 변경”이라고 썼다.  

한수원 관계자는 “하계 피크기간에 대비한다는 이유도 포함해 착수일이 연기된 것”이라며 “매번 계획예방정비 때마다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지, 그 안에는 하계 전력수급 확보도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 공문이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려다가 여름철 폭염 전력수요급증으로 갑자기 원전을 재가동하기로 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며 원전 가동이나 정비일정은 갑자기 변경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수원은 이처럼 지난 4월에 이미 공사 착수일 연기 결정을 해놓고도 지난 22일 보도자료에서는 폭염시 전력수급을 위해 “한빛 1호기와 한울 1호기의 계획예방 정비를 전력 피크 기간 이후로 조정키로 했다”고 표현해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그 이후 당일에만 두차례 더 추가 보도자료를 냈지만 조중동과 경제지는 ‘탈원전 정부 폭염에 원전 재가동’(조선일보 23일자) ‘전력수급 문제없다더니 허둥지둥 원전 5기 더 돌린다’(중앙일보 23일자) ‘최악 폭염 덮치자 원전 다시 찾는 정부’(한국경제 23일자)라고 썼다.  

우원식 의원실 관계자는 27일 “전력피크 시기에 맞춰 가용 발전기가 투입되도록 정비기간을 조정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보수언론들이 억지주장을 해왔는데 이 내부 공문은 ‘탈원전 정부가 폭염에 원전을 재가동했다’는 주장이 왜곡됐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밝혔다.

▲ 한울1호기 본부장이 지난 4월4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공문. 사진=우원식 의원실
▲ 한울1호기 본부장이 지난 4월4일 한수원 정비처장 앞으로 보낸 공문. 사진=우원식 의원실
 
▲ 경북 울진에 소재한 한울 원전 3, 4호기 전경. 사진=연합뉴스(한울원자력본부 제공)
▲ 경북 울진에 소재한 한울 원전 3, 4호기 전경. 사진=연합뉴스(한울원자력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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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마지막 국회 등원

국회 영결식 엄수 "많이 사랑했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2018.07.27 13:58:30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등진 지 닷새, 시민들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아내며 그를 떠나 보냈다.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고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27일 오전 엄수됐다. 지난 2004년 5월 31일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기념식이 열렸던 바로 그 자리다. 14년 전, "여기까지 오는 데 50년이 걸렸다"며 감격어린 첫 소감을 밝혔던 고인의 마지막 국회 등원을 시민들은 비통한 눈물로 맞이했다.

노 의원을 실은 영구차가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을 출발할 무렵부터 시민들은 이미 땡볕이 내리쬐는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그를 기다렸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노인, 유모차를 끌고 온 주부, 그리고 국회의원도 지위 고하가 없었다. 유족들을 제외한 좌석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9시 50분, 노회찬 의원을 실은 영구차가 들어왔다. 노 의원의 큰 조카 노선덕 씨가 영정사진을 들고 유족들과 함께 영결식장으로 들어섰다. 정의당 심상정, 이정미, 추혜선 의원도 함께 걸어들어왔다. 유시민 작가와 윤소하 의원, 천호선 전 공동대표, 강기갑 전 의원, 단병호 전 의원도 그 뒤를 따랐다. 

 

 

▲노회찬 의원의 사진을 단 차량이 국회 앞에 세워져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문희상 국회의장이 영결사를 읊었다. 문 의장은 "이곳 국회에는 한여름 처연한 매미 울음만 가득하다"며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냐. 어떻게 하다가 노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사를 읽고 있는 것인가"라고 했다. 장중에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 의장은 "정치의 본질이 못 가진 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늘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며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다. 당신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낡은 구두, 오래된 셔츠와 넥타이가 말해주는 대중정치인의 검소함과 청렴함은 젊은 세대에게 귀감이 됐다"며 "당신은 여기서 멈췄지만 추구하던 가치와 정신은 당당히 앞으로 나갈 것이다.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조사를 통해 "수만의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노회찬 원내대표를 추모해주셨다. 감사하다"며 "초등학생부터 구순 어르신까지. 막 일을 마치고 땀 자국이 선연한 티셔츠를 입고 온 일용직 노동자부터 검은 정장을 정중히 입은 기업대표까지. 남녀노소 각계각층 많은 분들이 노 원내대표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분들이 나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라고 했다"며 "'꼭 필요한 사람'. 이보다 노회찬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노 원내대표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단체가 추모성명을 냈다"며 "그들은 해고 노동자이고, 산재로 자식을 잃은 어미이자 아비였으며,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였다"라고 했다. 

이어 이 대표는 "당원들과 국민에게 너무나 죄송하다"며 "그가 오직 진보정치의 승리만을 염원하며 스스로가 디딤돌이 되겠다는 선택을 할 때도 그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라고 했다.
 

▲심상정 의원이 조사를 읽던 중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 ⓒ 프레시안(최형락)


심상정 의원은 슬픔을 참지 못했다. 심 의원은 "지금 내가 왜, 왜, 대표님께 조사를 올려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저 뒤로만 숨고만 싶습니다. 생각할수록 자책감에 서러움이 밀려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순간, 슬픔을 참던 장내에서도 끅끅거리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회찬 의원과의 인연을 회상하며 심 의원은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30년이다"며 "당신은 인천에서, 저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가로 알게 되어 이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과 심상정은 늘 진보정치의 험준한 능선을 걸어왔다"라고 했다. 

금속노동자 김호규 씨도 조사를 낭독했다. 그는 "(선배님과 함께)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너무나도 소박한 요구를 밤새 가르방으로 긁어 유인물로 만들었다"며 "새벽 찬 어둠을 뚫고 잰걸음으로 인천, 부천지역 공단 주변 집집마다 돌리고 먼 길을 돌아 출근했던 노동자 생활이 떠올려진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필요할 때만 전화했던 이기심이 부끄럽다"며 "바쁘다는 이유로 선배의 고민을 함께하지 못했던 얄팍함을 반성한다"라고 했다. 그는 "낮은 울림이 큰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할 수 있는 나라를 꿈꿨던 선배의 감성을 배우겠다"고 덧붙였다. 

노회찬 의원은 영상 속에서 목소리를 들려줬다. 노 의원은 "변화가 가능하다. 정치인들을 변화시키는 것 이전에 유권자들이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영상 속에서는 '판을 갈아야 한다', '외계인이 쳐들어 오면 연대해야 한다'라는 노 의원의 호쾌한 유머가 나왔지만 시민들의 웃음은 들리지 않았다. 노 의원이 서정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소연가'가 처연히 흘러나왔다.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서른 해만 서른 해만 더 함께 살아볼꺼나"

노 의원이 육성으로 부른 노래가 울려 퍼지자, 시민들의 울음 소리는 더욱 커졌고 큰 한숨 소리들이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노 의원의 큰 조카 노선덕 씨는 "무더운 날씨에도 큰아버지 가시는 길에 함께해준 여러분께 감사하다"며 "내가 7살 네발자전거를 함께 끌어준 추억, 명절에도 서재에서 독서하시는 모습, 큰아버지와 걸을 때 참으로 듬직해서 꽃길이나 가시밭길이나 함께 걷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큰아버지께 조언을 구하러 갈 때, 큰아버지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 당장 알 수 없으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라.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다'라고 말씀하셨다"라며 "항상 어려운 선택, 최선을 선택을 하셨을 거라 믿지만, 지금은 그 큰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큰아버지와 배우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시간이 함께 남은 줄 알고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많다"며 "국회의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큰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라고 했다. 그는 "그립다. 사랑한다. 큰어머니, 할머니 잘 모시겠다"며 "큰아버지 바람대로 더 좋은 대한민국이 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마련된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서 노 의원을 떠나보낸 시민들이 많았다. 늦게 온 시민들은 먼발치 잔디밭에 서서 노 의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1시간에 걸친 영결식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국회 분수대에 양옆에 놓인 방명록에 시민들이 저마다 고인을 기리는 말을 써 내려갔다. 유모차를 끌고 온 주부, 프리랜서, 학생, 할아버지, 할머니, 반차를 쓰고 달려온 직장인까지.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씨 속에도 행렬은 말 없이 순서를 기다렸다. 20여 명이 넘는 줄을 말 없이 기다렸다.  

'의원님. 너무나 원합니다. 노회찬 없는 노회찬의 세상이 열릴 겁니다. 지금 열립니다. 그대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그대는 영원한 내 편이기에. 김숙영.'

이른 새벽밥을 먹고 전남 광주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온 김숙영 씨는 "이렇게 노회찬 의원에게 마음 깊이 의지하고 있는 줄 몰랐다"며 "라디오에서 만나는 노 의원 때문에 일주일을 버틴다고 할 정도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영결식에 준비된 자리가 꽉차 자리에 앉지 못한 시민이 먼 발치에서 노회찬 의원 영결식을 지켜보고 있다.ⓒ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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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목숨 대가로 한 ‘사법부·외교부·김앤장’ 뒷거래”

참담한 피해자들 “재판 결과 기다리다 대부분 돌아가셨는데…”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7-27 19:18:23
수정 2018-07-27 19: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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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기자회견에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27일 기자회견에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수 십년 간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해 왔으며, 자신 또한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75)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어디서든 기자회견을 하면, 항상 피해자 입장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은 제가 당당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30 여 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기자회견을 해봤지만, 오늘처럼 참담하고 슬프고 분통터지는 기자회견은 처음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참담하기만 하다.”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장 벽면엔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 등 일본기업들을 대상으로 일제강제동원 소송을 진행해 온 피해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총 9명의 피해자 중 7명의 피해자 이름 앞에는 ‘故’(고)자가 붙어 있었다. 고인이 된 7명의 피해자들은 일본은 물론이고 모국에서도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다. 2분의 피해자 또한 현재 90세가 넘거나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데, 최근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에 이들의 재판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논란이다. 지난 26일엔 한 현직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대법원 측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관련 재판을 “재검토하라” 지시했다고 밝혀 논란이 더해지고 있다. “한일 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 벽에 걸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 벽에 걸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민중의소리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
피해자들 위로해온 이희자 공동대표의 낙담

 

이희자 공동대표는 발언 내내 재판 결과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떠올리는 듯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재판 결과가 나오질 않자, 제가 그분들을 위로해드렸다. 포기하지 말라고, 오래 살아달라고, 그게 이기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대법원 재판결과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라며 탄식했다.

앞서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주금을 상대로 각각 부산지법(2000년)과 서울중앙지법(2005년)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이들은 1·2심에서 패소했으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처음으로 일본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희자 공동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일본에서 모든 재판을 지고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 재판을 시작하고, 처음 승소 소식을 접했을 때 할아버지들이 정말 많이 우셨다”라며 “식민지 시대에 잃어버린 민족과 청춘을 다 찾은 것처럼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원심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대로 피해자 한 사람당 1억원(서울 고법) 또는 8천만원(부산 고법)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다. 이런 상태로 해당 사건은 2013년 8월 대법원에 재상고 됐다. 하지만, 이후 5년이 다 되도록 법원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원고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를 믿고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위로했던 이 공동대표가 “당당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낙담한 이유다. 그는 “일본과의 문제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청와대가 거래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탄했다.

27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27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민중의소리

사법부·외교부·김앤장 유착,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충격적”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도 사법부·외교부·김앤장의 유착에 절망감을 드러냈다. 김세은 변호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그동안 무엇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기다려 왔는가 질문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탄식했다.

김 변호사는 “사법부는 다수의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구제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라며 “그런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외교부, 청와대와 손을 잡고 우리 재판을 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래했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사법부가 삼권분립 원칙까지 어겨가며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한 정황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민사소송규칙 상으로는) 원고와 피고 등의 의견은 1-2심에서 모두 제기가 되어야한다”며 “그런데 이 규칙을 대법원 판결 전에 바꿨다.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 단계에서 소송과 관련도 없는 외교부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2심에서 시민단체나 관계기관들이 의견을 법원에 제출하는 길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외교부가 일방적으로 일본기업 측에 유리한 내용의 의견서를 통해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라며 “이는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소송당사자에 대한 심각한 권리침해 소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외교부의 의견서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외교부의 의견서ⓒ민중의소리

당시 외교부가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외교부는 명확하게 입장을 드러내진 않지만 교묘하게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안 된다는 의견을 표한다.

해당 문서에는 ‘피해자들이 한국 내 일본 기업들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50년간 한일양자관계의 근간이 되어온 협정의 해석이 뒤흔들릴 경우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신인도 손상을 불러올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한국 투자와 비즈니스에 장애가 되고 한일 간 경제관계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음’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고, 사법의 근간과 국가주권마저 내던져버린 파렴치한 폭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국가와 정부, 외교부, 사법부의 존재 의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총체적 부정의와 재판 거래라는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뜻을 모아 강력히 요구한다”라며 소송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사죄, 새로운 재판부 구성을 통한 신속·공정한 심리, 외교부·사법부·김앤장이 결탁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검찰의 철저한 수사 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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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내란 모의 수사 상황정리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7/27 21:36
  • 수정일
    2018/07/27 21: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제 큰 그림을 그리고 새롭게 군을 설계·시공해야 한다
 
권종상  | 등록:2018-07-27 09:48:37 | 최종:2018-07-27 09:50:0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벗님께서 이번 기무사 내란모의 사건에 대한 상황을 다시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벗님의 상황 인식과 이를 풀어내는 능력은 탁월합니다. 조금 길긴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이번 기무사 계엄모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 나아가 한국군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느껴보시고, 그리고 우리가 민주시민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며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인지 함께 공감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애틀에서…

권종상 / 서프라이즈 논객

 

작성자: 나그네
출처: blog.naver.com/andie0712

계엄(내란모의) 수사 상황정리  
-이제 큰 그림을 그리고 새롭게 군을 설계·시공해야 한다- 
  
1. 현재 수사상황

요즘 말로 빼박. 그냥 딱 걸렸다. 누가? 촛불정국 때 안보 라인에 있던 모든 자들이. 박근혜, 황교안. 김관진, 박흥렬(경호실장), 한민구, 장준규 육참총장, 조현천 기무사령관(알자회), 구홍모 수방사령관, 조종설 특전사령관(알자회), 우병우까지 죄다.

비밀로 분류된 계엄포고에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글자가 나온 이상, 황교안 이하로는 다(?) 죽었다. 남은 건 박근혜가 어디까지 간여했는가인데 이미 촛불시위 1회 때부터 기무사를 시켜 계엄을 준비했다는 정황으로 볼 때 박근혜 일당은 최순실이 들통난 이상 탄핵으로 인한 권력 상실을 거의 기정사실로 보고 카운터 펀치로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준비했다. 이 문건에는 심지어 미·중에 대한 계엄 시 설득방안마저 적혀 있을 정도니...따라서 박근혜는 내란 모의의 수괴로 추가 기소될 가능성이 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그동안 기무사 계엄문건에 대해서 그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청와대의 수사지시가 적폐몰이다 라며 매우 부정적인 입장과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자유당 의원들의 수사와 수위가 67쪽의 세부문건을 열람한 후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점. 이제 계엄모의 및 내란모의 수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외통수로 격상되었다.

대한애국당 조원진조차도 계속 군을 비호하다가는 정당 해산 및 반란동조죄로 걸린다. 추가로 이번 계엄 수사에 대해 당시 여당이던 자유한국당 내에서 누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그 외 촛불 정국에서 계엄 선포와 군 출동을 공공연하게 입에 담으며 이를 선동했던 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정밀수사가 불가피하다.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이 일을  모의했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 아주 중요해졌다. 이들이 평화로운 촛불시위 앞에 뜬금없이 계엄령을 들고나온 게 절대 아니라고 봐야 할 만큼 세부문건은 치밀했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이번 계엄문건을 지방선거 이후에 터트린 건, 의도의 여부를 떠나 현명한 정치적 판단이었다. 이 건이 정상회담시기나 올림픽 즈음 혹은 지방선거 전에 터졌다면 문재인 행정부는 너무도 많은 부하가 걸리거나 야당과 수구세력들의 총체적인 정치공세 때문에 제대로 된 수사의 진행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2. 또다시 사조직! 알자회

독사의 머리는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짓이겨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위의 주요 내란음모 피의자 명단에서 알 수 있듯이 문민정부 시절 드러난 사조직 알자회는 이후 15년간 요직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지만, 이명박 집권 이후 군 곳곳에서 다시 독버섯처럼 세력을 키운 정황이 역력하다. 위 명단 중 조종설 당시 특전사령관의 전임자인 장경석 역시도 육사 39기(수석졸업) 알자회 출신으로 항작사 사령관 등 요직을 맡았다. 한마디로 이명박근혜가 집권하자, 저들 사조직 출신들은 다시 군에서 승승장구했다. 이 점에 대해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군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거나 부주의했음을 반성해야 한다. 이렇게 군내에서 다시 사조직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전혀 견제가 없었다는 건 그 어떤 말로도 용서가 안 된다. 지금의 민주당은 여전히 군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데도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문건을 터트린 이철희 의원만 해도 계엄사령관이 육참총장으로 바뀐 게 심각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챘을 정도니.

더구나 이번 계엄문건의 진원지인 기무사령관 조현천을 그 자리에 적극 추천한 인사도 같은 사조직 알자회 동기이자 당시 현직 국정원 주요간부였다는 점에서 알자회에 대한 전면수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대통령의 권력을 수호하는 특권형 대전복 친위부대 3개중 무려 두 개나 되는 기무사와 특전사의 지휘관에 알자회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예사롭게 안 보인다. 40여 년 전 하나회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기에 충분한 인적구성이다. 이번 사단을 계기로 전면적인 군내 사조직의 발본색원과 제도적인 방지책 마련이 시급하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의 프레임 전면 교체가 절실하다.

이런 지경이면 육사 폐지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 이번 계엄사령관 선정에서 저들 육사 출신들은 정당한 명령권자인 합참의장을 비육사출신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이너 서클이 군을 독점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쯤 되면 육사 자체가 사조직화 된 게 아닌가. 
  
3. 육군 전체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이미 계엄문건에서 드러났듯이 이번 내란모의에서 육군은 수도권의 주요 대전복 친위부대는 물론 주력인 기계화사단과 정예의 특전사 부대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만큼 이번 내란 미수 사건으로 군은 혁명적 수준의 개편과 변화만이 살 길이다.

단순히 기무사의 해체와 방첩대 재창설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모든 대전복 친위부대의 해체는 물론이고 군 전체의 패러다임도 과거 군부독재 시절이 아닌 새로운 21세기의 흐름에 걸맞는 설계도와 미래 청사진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새 술은 절대적으로 새 부대에 담가야 한다. 지난 91년 민간인 사찰 파문으로 보안사의 이름을 바꾸고 잠시 달라지는 척 했지만, 저들 대전복 친위부대구조와 육사의 독점적 기득권 적폐는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현재의 군 전체 시스템과 모든 패러다임과 의식구조를 시민사회의 요구와 명령에 충실한 새로운 조직의 군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4. 사조직 특권화 된 육사 해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육사 출신들은 무려 두 번이나 반란을 시도해 권력을 찬탈,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현대사를 암울하게 만들었음에도 또다시 육사출신들이 추축이 되어 세 번째 반란시도를 모의했다는 사실 하나로도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전원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삼세번이면 음주운전도 면허 박탈인데, 이쯤 되면 육사의 폐지를 적극 고려해야 한다.  도대체 육사에서는 뭘 어떻게 교육을 하길래 반란시도가 기수 구분. 시대 구분 없이 매번 이렇게 반복되나.

이제 향후 육군인사에서 육사 출신은 철저하게 여태 누린 특권과 혜텍에 비례해서 불이익을 줘야 한다. 또한 모든 육군의 주요 지휘관 보직에서 같은 출신들이 연이어  보임되는 경우는 철저하게 법적으로 막을 필요가 있다. 학군단 3사 출신들을 더욱 중용해야 하며 고위장성일수록 그 인적 배분에서 특정출신의 비율이 과도화되지 않도록 인사원칙을 제도화 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삼금(三禁)과 같은, 시대착오적 19세기 낡아빠진 관습에 집착하는 우리 육사는 전도유망할 장교지망 청년들을 불과 4년 만에 꽉 막히고 오만한 꼴통들로 만들어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방식과 교육과정에 문제가 많다. 단적인 예로 생도시절 엄격한 성욕의 금지가 풀린 이후 왜 육사 출신 장성들의 거듭된 성문란과 성범죄는 기수구분 없이 반복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건 생도 시절 왜곡된 가치관과 교육이 꾸준히 반복되었다고 밖엔 설명이 안된다. 왜 허리 아래로 문란한 장성들은 육사출신이 이다지도 많은가.

이제라도 육사는 선진국처럼 대학원으로 전환해서 학부의 과정을 마친 다양한 배경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진짜 직업군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전환하는 게 어떤가. 지나치게 폐쇄적인 교육과정과 교육내용을 수정해서 민간대학에서의 과정 이수를 의무화하고 최소 4년 중 1년 이상 민간 위탁교육을 시키는 등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아니면 차라리 일정 기간 군 복무경험을 가진 부사관 중에서 선발하는 등 그 선발과 교육과정 전체를 바꿀 필요갸 있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 육사생도를 임관시키는 한, 육군은 언제든 이번처럼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개연성이 크다. 70년의 짧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무려 세 번이나 반란과 내란을 시도한 주역들이 하나 같이 육사 출신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다수의 선량(?)한 육사출신 장교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너희들은 니네 동기들의 폭주와 일탈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조국의 부름과 소명을 배신했고, 시민과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군인의 본분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차원에서 그런 반론 할 자격도 없고 도의적 책임부터 느껴야 한다.

지금도 반란의 선봉에 선 반역집단 기무사를 전면해체하자고 하면 기무사의 본래 기능을 운운하며 존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나오는데 과연 이게 현실적인 대안일까. 안된 이야기지만 지금 이 지경에까지 이른 육군을 몇 군데 보수해서 써봐야 민주공화국의 백년지대계와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 조성에 가장 나쁜 영향을 줌과 동시에 미래의 모든 집권세력과 군 통수권자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울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무려 70년 가까이 켜켜이 쌓인 대한민국 군 특히 육군의 구습과 적폐를 모두 털고 재창군 수준으로 혁신해야 한다. 육사출신들이 주축이 된 기무사 계엄내란 미수는 절호의 기회다. 여기서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불안한 폭탄 돌리기를 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21세기 인터넷으로 온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대명천지에 도로 유신, 도로 5공 군부 독재시대로의 퇴행을 꿈꾸는 실행계획이 너무나도 상세하고 치밀하게 준비되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우리는 더 이상 방심하거나 손을 놓을 수 없다.

5.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이쯤 되면 육군은 창군 이래 최악이자 더 나빠지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 어느 때보다 문제의 원인을 직시해야 한다. 이번 계엄문건 내란 모의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그간 육군은 지나친 군의 특수성과 내부조직 논리만을 앞세워 잘못된 성역을 구축해왔고 이를 오랜 세월 동안 당연시하다가 결국 시대의 보편적인 흐름에서 완전히 낙오했다. 

평창 올림픽 개최를 코앞에 두고도, 5.18 비상계엄확대보다 더 살벌한,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전무한, 실로 난감하고도, 어처구니없는, 계엄계획(사실상 반란모의)을, 사뭇 진지(?)하고도 나름 치밀(?)하게, 수립했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우리 육군의 시대착오적 후진성과 사리분간 전혀 못 하고 있는 정치 감각과 세상을 보는 한심한 인식은 할 말을 잃게 한다.

감이 없어도 어찌 이런 지경까지 감이 없냐? 군 지휘부는 어떤 경우에도 정치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이번 경우처럼 정치를 전혀 몰라서는 더욱 안 된다. 계엄 모의와 관련해 이 나라 육군은 정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전히 예전 관성대로 권력의 일에 무분별하게 개입했다는 점에서 실로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범했다.

설사 박근혜와 윗선에서 계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과거 87년 6월 그토록 시위가 격렬했음에도 전두환의 무력진압 명령을 대놓고 거부했던 당시 특전사령관 민병돈과 보안사령관 고명승 정도의 사리분별력과 정치 감각만 있었어도 이토록 평화적인 촛불시위에 대해서 이런 참담한 수준의 내란모의 계엄문서를 작성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전 니네 군 선배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눈치라도 있었는데 지금 니들은 대체 뭐냐? 이런 걸 처만들고도 정권 교체후에 아무일도 없을 걸로 생각했니? 따라서 이 속죄의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다!

이제 군은 패트런인 촛불 시민이 드는 채찍으로 죽도록 얻어맞아야 한다. 아니 무릎 꿇고 석고대죄하며 군 통수권자의 처분을 달게 받아야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이제부터 군은 최악과 최저의 대접과 처분만 남았으니까. 현재 별 달고 있는 육군장성들 전원이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모두가 옷을 벗어도 모자라다. 안 부끄럽냐?

하긴 어제도 대놓고 국방장관에게 책임 전가하던 기무사 대령이 고개 빳빳이 세우는 거 보니까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감도 없는 거 같긴 하더라. 23일 날 전역 지원서 써놓고 총대매는 심정으로 국방장관 들이 받은 거 같던데? 얼굴 딱 기억해두련다. 36년간 그자의 군 생활이 어땠을지 어제 그 입놀림 하나로도 감이 온다. 

각설하고,

여기에 더해 한반도의 정치·외교 지형도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다. 에도 불구하고 육군으로 대표되는 군 주류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여전히 구태의연한 패러다임과 이에 기반한 기득권 유지로 일관했다. 상반기에 군 통수권자에게 보고하고자 했던 국방 2.0 문건을 왜 끝내 보고하지 못하고 말았을까?

현재 우리 군부 특히 육군에겐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플랜 B가 전혀 없다.

냉정히 말해 지금 우리 군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조국의 안위를 답보해낼 청사진을 제시하는 진정한 의미의, 제대로 된 전략가가 전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 거의 대부분의 시기에 자기의 군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권한조차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병력을 운영하고 독자적인 작전을 수립하는 경험은 아예 없다. 그러니 군 전략가나 안보 경세가가 필요했겠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가라면 자신의 체제를 보위하는 생존전략과 안보계획의 수립은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한다. 문약이라고 잘못 알려진 조선조차 제승방략과 진관체제라는 기본 틀이 있었고 근대 독일에겐 슐리펜 계획이 그리고 미 합중국에겐 예상가능한 모든 국가와의 전쟁을 상정한 컬러 플랜이 존재했다. 우리가 흔히 오렌지 계획으로 알고 있는 미국의 대일본 전쟁계획안은 무려 50년이 넘도록 수정과 보완을 꾸준히 거쳤던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군은 오직 북한만 적이고 모든 작전계획과 준비는 인민군 맞춤형으로만 지금도 수립되고 있다. 이미 국력 차가 50배 가까이 나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도 여전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이 나라 군 지휘부(이러구도 니들이 군인이니?)

지금의 대한민국 육군은 아직도 주적개념이라는 낡은 도그마에만 사로잡혀 한국전쟁 당시의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변한 게 없는, 북한 인민군 대응에만 전념하는 맞춤형 군에 안주해왔다. 그러나 전쟁의 역사에서 같은 식의 전쟁이 반복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고 따라서 지금 육군이 준비하고 있는 계획안은 전혀 쓸모가 없음에도 육군은 수십 년간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와 자기 혁신을 일관되게 거부해왔다. 그러면서 자리를 위한 자리 만들기와 장군복지에만 열심이었다. 어느새 우리 국방예산에서 인건비의 비중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많은 걸 시사한다. 그러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천문학적인 국방예산이 소모되었음에도 이 나라 군대는 적재적소에 예산이 사용되지 못한 채 비효율적이고 전혀 실전에서는 써먹지도 못하는 무능한 거대공룡 꼬락서니다. 

전시작전권 없는 군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평시지휘권? 그거야말로 말장난이다. 이 당연한 명제가 안 먹히는 집단이 대한민국 군이다. 저들의 전작권 환수 회의론과 시기상조 주장과 준비부족론의 배경에는 군 본연의 가치에 대한 상식적인 정체성이 전혀 확립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미군에 대한 의존이 이제 절대 상수가 된 집단으로 퇴행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미국에게 국방분야는 완전히 아웃소싱을 주고 말아야 한다. 아마 비용도 절반 이하로 싸게 먹힐 거다.

이 나라 군의 주류인 육군은 아직도 전시작전권환수에 대해 부정적인 인사들이 더 많고 회의적인 시선을 표출하는 것에 수치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궤변과 억지와 강변을 듣고 있으면 군인이 제대로 된 기강과 의식이 없으면 제복 걸친 건달에 불과하다는 나폴레옹의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70년 가까이 미군에게 의존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프레임으로 인식하며 오직 이 상황에서 ‘근육키우기(야전전투력 증강)’에만 몰두한 결과, 작금의 군 특히 육군은 미군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시간이 흘러 흘러 이젠 감히 독자적인 그 어떤 것도 시도할 엄두도 못 내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계엄 모의처럼 국내정치 상황에 과도하게 머리를 디미는 구습은 여전하다. 좀 심하게 평가하면 국민들 혈세 축내는 잉여이자 제복 걸친 양아치 집단에 가깝다. 

이런 한심한 수준으로 급변하는 21세기 한반도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군의 진짜 주인인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과 안전을 지키는 군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지금 군의 외적인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군 내부는 이번 계엄문건 파동으로 획기적인 쇄신과 역동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지금 이 상태의 군대로는 실전에서 무용지물인거 군 지휘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는지 꽤 된 걸로 안다. 그런데도 육군의 개혁은 늘 구두선이다.

이제 이번 내란미수 사건을 계기로 군이 혁명적인 수준으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해야 할 너무도 많은 당위가 이번 계엄문건 수사과정에서 하나 둘 드러나고 있질 않은가. 그리고 그 시작은 모든 주권국가에서 가장 필수적인 자주국방의 실현, 즉 우리 군에게는 전시작전권 조기 환수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난 70년간 천문학적인 비용의 국방비가 투입되고도 늘 이 나라 군부, 특히 육군은 자주국방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허구한 날 북한핑계만 댔다. 과연 육군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걸까. 이제 더는 이들의 상투적인 궤변의 주장을 그냥 좌시하거나 묵인할 수 없다. 우리 사회 전체가 IMF 환란 후 최소한 한번 이상의 구조조정과 변화가 있었지만, 유독 군부만 1950년대 한국전쟁 프레임 그대로다.

이미 전방의 주력인 1군과 3군의 통합에 합의해 지상작전사령부 창설을 결정한지도 벌써 2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 진짜 이유는 단 하나! 대장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연히 해야 할 개혁을 이리 미루며 그저 자리 유지에만 혈안이 된 현 육군이 이번 계엄모의에 앞장섰다는 사실보다 더 군에 혁명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반증이 또 있을까.

지금 이런 식의 육군으론 우린 언제나 군부의 반란과 내란을 우려하며 일상을 보내야 한다. 외부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다시 독버섯처럼 나쁜 기운을 뿜어대는 무력조직을 군으로 둬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이젠 없다. 

6. 북한 맞춤형 군대에서 한반도 평화의 수호자로

쇼와 일본 육군이나 금과옥조로 여겼던, 낡은 주적개념을 붙들고서 항상 북한만 쳐다보는 답답한 군대는 그만해야 한다.

한국 육군의 실제(?) 아버지인 쇼와 일본 육군은 수십년간 소련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오직 소련 맞춤형으로 군대를 양성했다. 그러나 막상 전면전에 돌입하자,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 적은 소련이 아닌 미군이었고 전쟁터도 추운 시베리아가 아니라 뜨거운 열대의 정글과 너른 대양의 외딴 섬이었다.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 육군이 총검 돌격이라는 19세기적 낡은 전술을 반복했던 것은 물량의 열세 못지않게 보병들이 차고 있던 탄입대(탄약 보관함)가 열대의 습기와 고온을 배겨나질 못해 총알이 못쓰게 되어 잦은 격발 불량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은 총알이 없어서 육탄 돌격을 한 게 아니라 야전 환경에 부적합한 탄입대로 인해 사격조차 맘대로 할 수 없어 돌격밖엔 수가 없었던 셈이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조차 인식이 없었던 당시의 일본군 지휘부는 바로 주적개념의 도그마로 인해 너무도 많은 인명을 허망하게 희생시켜야만 했다.

바로 옆 나라에 그것도 오래되지도 않은 시기에 주적개념을 붙들다 폭삭 망한 이웃이 있음에도 이 나라 육군은 오직 북한 맞춤형 군대 주적개념을 절대시하는 군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거나 정당화하기 일쑤다. 도대체 지나간 역사에서 무엇을 배운 건가.

인구절벽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아직도 50만 대군을 고집하는 육군의 사고방식에는 오직 주적을 북한으로만 상정한 도그마가 자리 잡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 군은 합리적인 전략에 입각한 다변화된 한반도 안보의 청사진을 설계하고 이에 따른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제 우리 군은 미군에 의존하는 수동적 주변적 입장에서 벗어나 당당한 한반도 평화유지의 주역으로 능동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작금의 모든 군 패러다임 특히나 육군의 구조와 의식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 여태 존재하고 있는 육군의 모든 것이 검토대상이어야 한다.

이미 전편에서 지적했듯이 특정 학교 인맥의 인사독점과 편중은 이번 대통령 임기에서 반드시 종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육·해·공 3군의 균형발전과 육사 인사독점의 철폐가 필수다.

특히나 통합군 체제하에서 군령권자인 합참의장은 반드시 육군과 해군과 공군은 물론 해병대에서까지 다양하게 선발하는 순환보직제가 시급하다. 이렇게 되면 육군은 6년이나 4년에 한 번꼴로 2년 임기의 군령권자를 배출하게 되므로 작금의 육군편향을 확실하게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다년간 여러 중견 장교들이 건의하고 있는 군령권과 군정권을 단일화하는 방안도 검토해봐야 한다. 작금 우리 군의 군권 이원화는 다분히 일본군의 소산이다. 과거 일본군이 군권의 이원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분란과 비효율을 초래했었던가. 이제 확고한 문민통제의 원칙하에 군권을 일원화해서 효율을 극대화하자.

금번 기무사 내란 미수에서 육사 출신들의 다대(?)한 역할을 반면 교사하여 육군의 주요보직은 같은 학교 출신이 연이어 부임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 이번 알자회와 육사 출신들이 주도한 내란 모의의 수위를 생각해볼 때 과거 하나회와 알자회에 가했던 그 이상의 제재와 불이익이 불가피하다. 안된 말이지만 그들은 이번 삼세번으로 아웃이다. 더 이상 그 어떤 배려나 온정도 있어선 안 된다. 이들의 썩은 엘리트 의식과 비뚤어진 국가관, 시대착오적 특권의식과 반민주 성향을 뿌리 뽑으려면 다른 길은 없다.

과거 문민통제가 확실했던 조선은 실병력을 가진 부대의 지휘관과 참모들은 모두 다른 고향과 배경을 가진 이들을 고루 기용했었다. 이러한 전례를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특히나 과거 육사가 독점해왔던 육본과 합참의 요직은 물론, 주력 기계화사단과 특전사 예하여단과 항공작전사 등등 핵심 야전부대와 소위 잘나가는 주요지휘관 자리에서 철저하게 육사 출신은 배제해야 한다. 적어도 이 정부 임기 내내 이 원칙은 유지돼야 한다. 

당연히 앞으로 있을 대장인사에서 육사 출신은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하며 최소 10년간 육사 출신 대장은 일절 나오지 않아야 한다. 여태 군부의 금수저이자 성골로 군림했던 육사 출신들에게 반란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뼈에 새기게 하려면 인사 불이익보다 더 좋은 채찍은 없다. 여기에 불만이신 육사 출신들은 옷 벗고 나가서 대한애국당이나 태극기 부대에 새 자리 알아보시는 게 나을 것이다.

이참에 국방부 장관도 장성출신들은 전역 후 10년이 지난 이후에만 임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모든 걸 미군 따라 하는 나라가 왜 이 좋은 제도는 시행을 안 할까.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육사가 배제되면 육군에 인재가 모자랄 거라고? 웃기지 마라.

이순신은 늘 절실하게 찾지 않아서 없을 뿐이다. 학군단 출신, 3사 출신들이 여태 빛을 발하지 못한 건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육사 성골들의 기득권 철옹성이 너무 막강했던 때문이다. 그러니 반란을 일삼는 집단에게 더 이상의 호시절은 없어야 한다.

촛불을 든 시민이라면 이런 참담한 수준의 모반을 꿈꾼 자들을 더 용납할 수 있을까.

7. 시민의 통제와 감시를 제도화하며 민의 참여가 보장된 개방형 군 정립

이제 군은 폐쇄와 독점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세상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그간 군은 특수성을 내세워 상식 이하의 사고방식과 반민주주의적 행동 양태를 정당한 무엇으로 착각해왔고 그 결과, 끝내 시대착오적 군사반란과 내란을 획책하는 모의를 작당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지금 군 주요간부들 특히 육사 출신들의 의식과 감각이 30년 전 그들의 선배들만도 못하다는 사실에 실망보다는 과연 이들에게 국방과 안보의 중책을 맡겨도 될지가 더 불안할 지경이다. 30년 전, 6월 항쟁이 격화되자, 당시 군 통수권자 전두환은 또 다시 피를 부르는 강경무력 진압을 명령했지만, 정작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군 출동을 막았던 건 진압의 선봉에 서야 하는 특전사령관(민병돈)과 보안사령관(고명승)이었다. 그들 모두 성골이라던 하나회였지만 시위의 양상과 민심의 흐름을 읽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때 고명승과 민병돈이 지금 기무사에 있었다면 이런 수준의 문건을 작성했을까? 스스로 무덤 팔 게 뻔한, 실각이 확실시되는 박근혜와 황교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몸 바쳤을 리 만무하다.

지금 군의 떨어지는 정무감각은 사안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국방장관을 대놓고 들이박는 하극상을 연출하는 점입가경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아무리 프레임의 전환을 시도한들 시민여론의 평가와 군 통수권자의 분노는 그들의 염원과는 달리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일부 수구언론의 프레이밍에 기대 단말마의 저항을 지속할수록, 국민은 그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며 추후 진행될 법의 심판에서 괘씸죄를 더할 뿐이다.

이제 군의 프레임을 모두 바꾸고 시민의 통제와 감시를 제도화하며 군의 일에 시민의 감시와 조언 그리고 제안이 더욱 적극적으로 보장되는 개방형 군대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참고할 준거는 사방에 널렸다. 선진국 군대들만큼만 하면 된다.

왜 우리는 아직도 쇼와 일본육군의 굴레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하나. 더 이상 북한을 핑계로 시대에 뒤진 낡은 군의 구조와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어리석은 구습은 버려야 한다. 

8. 시민민주주의의 이념을 견지한 새로운 군 패러다임 구축

작금의 우리 군에는 보편적 개념에 의거한 민주주의 재교육과 시대의 보편적 정서와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진정한 시민의 군대, 패트런인 시민을 위해 헌신하고 받드는 군대로의 변신을 위한 의식교육이 시급하다.

가장 먼저 우리 군의 뿌리가 일본육군이나 만주군이 아닌 광복군과 독립군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상징적인 조처들이 요구된다. 같은 민족끼리 치고 박고 싸운 걸 자랑스러워하고 그걸 군의 존립근거로 삼아서는 언제까지나 이 나라의 군 복무는 큰 자부심을 가지기 어렵다. 그러니 38선 돌파일인 10월 1일이 아닌 광복군 창설일로 국군의 날부터 변경하자.

또한 과거의 수치스러운 두 번의 군사반란과 자행한 다수의 민간인 학살 등등의 과거사에 대해서 전군의 간부와 생도와 병사들에게 진솔하게 팩트 위주로 교육해야 하며 철저한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제반 조처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또한 군인이라도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대해 정당한 거부권이 있음을 모든 병사와 부사관 그리고 하급장교에게 정확히 인지시켜야 한다.

진정 강하고 중심이 뚜렷한 군대는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긍심이나 긍지에 손상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안다. 부끄러운 정치개입과 여타의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우리 군이 여태 견지했던 그 어정쩡한 태도와 의식은 그 진정한 뿌리인 쇼와 일본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제는 분명하게 과거를 제대로 교육하고 기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개입과 감시 그리고 열린 제안들이 군에 파급되어야 한다. 더 이상 이들만의 폐쇄된 리그에 놔두면 안된다.

반란은 언제나 감시가 소홀할 때 준비됨을 이번 기무사 문건이 분명하게 보여줬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607&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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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한 ‘정전협정’


[친절한 통일씨] 정전협정 체결 65년, 준수되지 않은 협정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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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7  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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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에 대한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하기 위하여서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1953년 7월 27일 북한 김일성 최고사령관과 미국 마크 클라크 연합군 총사령관, 중국 펑더화이 인민지원군사령관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리고 65년이 흘렀다.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에 서명했다.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이 만났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및 한반도 및 세계의 평화, 번영, 안정을 촉진해 나가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5년, 멈춰진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문이 열렸다. 정전협정은 서언, 5조 64항으로 3년 1개월의 전쟁을 잠시 쉬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잉크가 마른 지 65년 된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을 위해 존재한 한시적인 협정이라는 듯, 사실상 많은 부분의 효력이 상실됐다. 유명무실한 협정인 셈이다.

   
▲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중국군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자료출처-국사편찬위원회]

군사분계선 중심 2km 이격 위반과 군정위 유명무실화

먼저, 정전협정 제1조 제1항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는 규정부터 이행되지 않았다.

남북 모두는 1960년 이후 방어 및 경계라는 목적으로 남방, 북방한계선에 설치된 방책선 일부를 전방으로 추진해 설치했다. 비무장지대(DMZ) 내에는 다수의 경계초소가 설치됐다. 그뿐 아니다. DMZ 안에는 군인이 아닌 민간 경찰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군 경찰(MP)’이 투입됐다. 남북 군인들이 비무장지대를 누비고 있다.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는 1991년 2월 이후 유령기구로 전락했다. 정전협정의 실시를 감독하고 협정 위반사건을 상호하에 협의해 처리하는 핵심기구이지만, 기구를 운영하는 쌍방 중 한쪽이 기구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91년 2월 13일까지 459차례 군정위 본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그해 3월 한국군 장성이 군정위 수석대표를 맡으면서 북한이 군정위를 탈퇴했다.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가 아닌 한국군이 군정위 수석대표를 맡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4월 북한은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해, 정전협정 관련 사항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엔군은 이는 군사정전위와 무관한 기구로 치부, 군정위는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91년 9월 중국도 군정위에서 자진 철수했다. 1992년 5월 29일 제460차 군정위 본회의를 유엔군이 소집했지만, 북한의 불참으로, 유엔군의 발언만 남아있는, 마지막 군정위 본회의가 됐다.

이름뿐인 중감위..한반도 적대행위는 여전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도 사실상 붕괴됐다. 중감위는 한반도 내에서의 무력 증강을 금지하는 정전협정 13항의 관련 규정 및 정전협정의 위반사건에 대한 협정 상대방 지역 내에서의 감독, 시찰 및 조사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군정위에 보고하는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에 전투부대를 파견하지 않은 국가로 유엔은 스웨덴과 스위스, 북한은 폴란드와 체코를 각각 중감위 국가로 지명했다.

그러나 1954년 5월 제네바회담 이후 한국정부는 중감위 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며, 1958년 8월 13일을 폴란드와 체코 대표의 철수시한으로 못 박기도 했다. 유엔군도 1955년 1월 31일 중감위가 유엔군의 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면서 미 국방부에 중감위 철수를 건의하기도 했다.

결국, 1956년 5월 31일 제70차 군정위에서 유엔군은 중감위의 활동이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남한의 인천, 부산, 군산에서 활동하는 모든 중감위와 감시 소조의 활동을 정지시킨다는 정전협정 제40항 기능중지를 선언했다. 유엔군사령부가 정전협정을 위반한 셈이다.

그해 6월 9일 부산에서 활동하던 폴란드와 체코 대표단은 철수했고, 북한은 스위스와 스웨덴 대표단의 활동을 봉쇄해, 모든 감시 소조는 판문점에 국한됐다. 이후 북한은 1993년 4월 체코 대표단, 1995년 2월 폴란드 대표단의 철수조치를 내렸고, 1995년 5월 중감위 북측 사무실은 폐쇄됐다.

정전협정이 준수되지 않은 항목 중 가장 큰 대목은 적대행위 금지이다. 정전협정 제12항은 ‘적대 쌍방 사령관은 육.해.공군의 모든 부대와 인원을 포함한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모든 무장역량이 한국에 있어서의 일체 적대행위를 완전히 정지할 것을 명령하고, 또 이를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엔군은 1957년 6월 21일 제75차 군정위에서 ‘상대적으로 군사역량의 균형이 유지될 때까지’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는 정전협정 13항 (ㄹ)의 효력중지를 선언했다.

유엔군과 남한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면서 각종 무기와 장비를 반입했고, 북한도 중국, 소련과 함께 ‘우호협력 및 호상원조조약’을 체결하면서 군사적 증강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들이 모두 해당 조항을 위반해왔다.

그뿐 아니다. 1969년부터 시작된 한.미연합군사연습은 북한에 대한 적대행위라는 점에서 사실상 정전협정과 배치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중단하는 유일한 문서인 ‘정전협정’은 65년의 세월 동안 군사적 대립 구도를 유지하면서 제대로 된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전쟁을 막자는 최소한의 장치였을 뿐, 협정 체결 당사자들은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음을 과시해왔다.

이는 65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과 북은 ‘판문점선언’에서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자고 뜻을 모았다. 미국도 이를 명시한 ‘판문점선언’을 지지했다. 65년째 유명무실한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평화협정’의 미래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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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비상계엄선포”

기무사 작성 ‘계엄령’ 문건 공개..군인, 국가를 통치하다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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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5  18: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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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초겨울부터 시작된 촛불 정국 당시, 박근혜 정부의 국군기무사령부(당시 사령관 조현천)가 계엄령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문서인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군사 2급 비밀로, 총 67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이 그대로 실행됐으면 어떠했을까.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선고 당시로 돌아가, 이 문건에 따라 가정의 역사를 써본다. 군인이 국가를 통치하면 이렇게 된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정부,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기각됐다. 태극기부대는 환호를, 촛불시민들은 분노했다. 그토록 춥고 시린 겨울,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탄핵’을 외친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 시각, 국방부. 한민구 국방장관 주관으로 이순진 합참의장, 장준규 육군참모총장, 조현천 기무사령관, 조종설 특전사령관, 구홍모 수방사령관 등과 국방부 정책실장, 합참 정보.작전본부장, 군사보좌관 등이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2016년 7월 터키 계엄시 군부가 시민의 저항으로 실패했던 사례에서 최소한의 인원들이 모여 계엄 성공을 위한 보안을 지키려던 것.

이들은 “폭력집회 및 시위의 규모, 사회혼란 가중 정도 및 경찰에 의한 치안통제 능력, 정부의 사법.행정 기능 발휘 가능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폭력시위 발생 지역 및 규모 등을 고려하여 시행지역을 결정하되, 현 상황 고려 시, 전국적인 시위확산 예상으로 전국 계엄 등을 우선으로 판단한다”고 논의했다.

서울시장 등 지자체단장의 요청이 불분명해 위수령은 쉽지 않고, 계엄에 대한 국민감정 악화로 전국적 규모의 시위확산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 경비계엄 대신, 비상계엄을 결정한다. 비상계엄은 사법부를 포함해 모든 정부 부처에 대한 강력한 통제로 사회질서 회복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대비계획 세부자료' 중 비상계엄 선포문과 담화문 내용. 2017년 계엄령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증거이다. [캡처사진-통일뉴스]

이들은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추천한다. 이순진 합참의장은 전시상황에서만 계엄사령관이 될 수 있다는 자체적인 판단을 내렸지만, 사실상, 육사 중심의 비상대책회의에서는 3사관학교 출신 이순진 합참의장이 탐탁지 않았던 것.

“현재와 같은 정부 기능 및 치안 질서가 마비된 상황에서도 대북 억제력 발휘가 절실한 바, 군사대비태세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하”며 “계엄사령관은 군사대비태세 유지 임무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면서 장준규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황교안 대통령 직무대행 체제도 염두에 뒀다.

이와 함께, 탄핵소추안 결정 이후 집회.시위 확산 등 국가 위기상황 관련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 및 치안 질서 확립을 위한 군사작전 지원을 위해 전국 비상계엄선포를 건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계엄이 선포되기 전, 한민구 국방장관은 주한 외국무관단을 소집해 현재 국내 상황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주한 외국 대사를 대상으로 일부 언론의 편파 보도에 따른 국내 상황이 왜곡돼 보도되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심지어 국방장관은 주한 미국 대사와 중국대사를 따로 공관에 불러, 비밀리에 계엄의 불가피성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정부는 탄핵 결정 이후 집회.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시위대의 무장 및 폭동, 강력 범죄 확산 등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됨에 따라 공공의 안녕질서를 회복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의 위기를 종식시켜 헌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1. 계엄의 종류 : 비상계엄

2. 계엄지역 : 전국

3. 시행일시 : 2017년 3월 10일 00:00부

4. 계엄사령관 :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장준규

대통령 박근혜”

뒤이어 장준규 계엄사령관은 담화문을 발표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현재 우리는 대규모 폭력 소요로 인해 치안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국가비상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유언비어 확산으로 사회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폭력시위 확산 및 사재기가 급증하고 있어,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헌법 제77조에 의거하여 17년 3월 10일 00:00을 기하여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본인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국민여러분!

저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원활한 작전을 위하여 부여된 책임과 임무완수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우리 군을 믿으시고 계엄사령부의 통제에 적극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 국민총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공공의 안녕과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거듭 다짐합니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드립니다.

2017.3.10.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장준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계엄사령관은 다음의 포고문을 내건다.

‘포고문’

“계엄법 9조(계엄사령관의 특별조치권), 대통령 공고문 제1호(비상계엄선포문)에 따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 계엄임무수행군의 임무수행을 지원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계엄이 선포된 전 지역은 2017년 3월 10일부터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니 준수해야 함.

 가. 통행금지 시간 : 23:00~익일 04:00

 나. 지구 및 지역 계엄사령관의 통행증을 소지한 자는 가능함.
1) 통행증 발급 대상자
가) 계엄시 관련 필수요원 : 공무원, 동원된 민방위대원, 생활필수품 공급요원, 보도요원 등
나) 야간통행이 필요하다고 인정된 자 : 긴급환자, 의료종사자 등

다. 지구/지역계엄사령관 판단하 사회질서가 확립되고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지역은 야간 통행금지 해제가 가능함.
(단, 통행금지 해제 및 시간 변경사항은 계엄사 보고후 시행)

2. 계엄임무수행군의 원활한 임무수행을 위해 지구 및 지역계엄사령관이 지정한 도로는 차량운행을 금지하되 허가된 도로만 사용해야 함.

3. 언론, 인터넷, 통신, 출판, 보도는 검열을 받아야 함.

가. 검열시간
1) 신문 : 조간(매일 12:00~22:00), 석간(매일 05:00~12:00)
2) 방송 및 통신, 인터넷 : 수시
3) 주.월간지 및 기타 : 매일 13:00~15:00

나. 검열요령
1) 검열자료는 신문(간판 인쇄본 2부), 방송 및 통신(원고 1부), 기타 출판 간행물 및 전시물(견본 2부), 영상매체 및 공연물(제작품 원본 1부)를 제출
2) 인터넷신문은 각 신문사가 포털사이트로 전송 전 온라인으로 제출
3) 보도검열은 사전검열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시 사후검열 가능

4. 보도매체 및 인터넷, SNS를 통해서 집회 및 단체행동을 선동하거나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행위를 금지함.

5. 자유민주주의 체제 부정과 전복을 기도하거나 이를 내용으로 한 불법 유인물, CD, 음반, 컴퓨터 보조기억매체 등을 제작.소지.배포하는 행위를 금지함.

6. 계엄사령관이 정하는 군수물자에 대한 조사.등록시 이에 응하여야 하며 임의 반출을 금지함.

7.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에 저해되고 사실을 왜곡하는 사이버 공간을 포함한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지함.

8. 계엄선포지역에서의 의례적인 종교행사, 관혼상제 등을 제외한 사회혼란 및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 방해를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함.

9. 사회혼란 조성 및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을 저해하는 직장이탈, 조업거부,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지함.

10. 각종 흉기, 폭발물, 화염병 등을 제조.소지.투척하는 등 일체의 폭력행위를 금지함.

11. 전국의 대학 이상의 학원은 휴교 또는 휴업지정 후 24시간 이내에 휴교 또는 휴업을 하여야 함.

이상의 포고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의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법칙)에 의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017.3.10.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장준규

군, 전국에 배치되다..포고문 위반자는 계엄군사법정으로

비상계엄선포와 포고문이 발표되자 전국에 군대가 투입됐다. 시위대의 저항이 가장 적은 야간을 틈타 장갑차를 이용해 6개 기계화사단, 2개 기갑여단, 6개 이상의 특전사 소속 군인들이 총을 휴대한 채 거리에 나왔다. 75만 명의 촛불시민들을 1만 5천 명의 군인이 진압할 수 있는 규모이다.

주요 시설이 집중된 서울은 엄혹했다. 2개 사단, 2개 특전여단으로 구성된 계엄군은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청사, 국방부를 장악했다. 대규모 집회가 예상되는 광화문광장은 경찰 1만5천 명, 30사단 2개 여단, 9공수여단이, 여의도에는 20사단 1개 여단이 배치됐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707대대가 대기했다.

서울 외에 경기 2, 5기갑사단과 9특전여단, 강원 11사단과 3특전여단, 충청 8사단과 13특전여단, 전라 26사단과 11특전여단, 경상 수기사와 7특전여단이 각각 맡았다.

   
▲ 계엄군은 '시위대 저항이 가장 적은 야간에 진입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캡처사진-통일뉴스]

계엄법에 따라,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합동수사본부장은 계엄사령관의 명을 받아 소관업무를 처리하고,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 업무를 관장한다.

합동수사본부장은 국정원 안보수사국장, 경찰 보안국장, 헌병 조사본부장을 조정하는 위치로, 계엄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체포.구금.조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그리고 계엄군사법원이 설치됐다. 계엄선포 시 계엄관할 지역 내 사법, 검찰 및 법무행정사무를 관장해 신속하고 엄정한 사법 및 법무행정 시행으로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와 계엄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내란 및 외환의 죄, △국교에 관한 죄, △공안을 해치는 죄, △폭발물에 관한 죄, △공무방해에 관한 죄, △총포.도검.화학류 등 단속법에 규정된 죄, △군사상 필요에 의하여 제정된 법령에 규정된 죄, △통화에 관한 죄, △살인의 죄, △강도의 죄, △방화의 죄,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죄 등을 다룬다.

위에 해당되는 13개 죄를 계엄령하에서 피할 수 있는 촛불시민이 얼마나 될까. 계엄군은 촛불시민들을 하나둘씩 잡아가기 시작했다. ‘비상계엄지역에서 계엄사령관은 군사상 필요시 체포, 구금, 압수, 수색,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또는 단체행동에 대해서 특별한 조치가 가능하다’는 계엄법 9조에 따른 것.

시민들은 이사할 수도 없었다. 한 장소에 여러 명이 모이면 끌려갔다. 길을 걷다 수상하다고 의심받으면 아무 때나 영장없이 수색을 받았다. 책도 낼 수 없었고, 신문과 TV도 맘대로 볼 수 없었다. 

   
▲ 계엄사령부는 합동수사본부를 편성하도록 했으며, 본부장은 기무사령관이 맡도록 했다. [캡처사진-통일뉴스]
   
▲ 비상계엄 선포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내용. [캡처사진-통일뉴스]

계엄군이 끌고 간 시민 중 주요 사범은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에서 직접 처리됐다. 기타사범은 헌병, 경찰, 국정원 등에서 수사했다.

수사 1국은 기무사 중심으로, 포고령 및 계엄법 9조 특별조치권 중 수사관할 범죄, 형법상 내란.외환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 군형법상 반란, 이적의 죄, 군사기밀누설, 암호부정사용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 등을 다뤘다.

수사 2국은 헌병이 다루며, 내란.외환.국가보안법 외 사회지서를 유지를 해하는 범죄 등을 맡았다.

수사 3국은 경찰로, 경찰청 홍제동 수사분실에서 수사 1국과 2국 관할이 아닌 범죄를 처리했고, 국정원 중심의 수사 4국은 형법상 내란.외환의 죄, 군형법상 반란의 죄, 국교에 관한 죄, 국가보안법 위반 죄, 사이버 범죄수사 등을 맡았다.

여기서 조사받은 시민들은 각 지역에 설치된 계엄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단, 계엄군사법원이 재판권을 갖는 범죄 중 중요범죄를 제외한 범죄는 계엄군사법원의 신속한 사건처리를 위해 계엄법 제10조 단서의 규정에 따라 일반법원에 재판권을 위임한다고 계엄사령부가 알렸다.

그렇다고 일반법원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얼마나 됐을까. 계엄사령관이 특별히 지시한 사건 또는 계엄군사법원 관할 사건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엄군사법원에서 재판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계엄군, 국회와 정부를 장악하다..대외 유화책도

계엄사령부는 국회의 계엄령 해제를 저지했다. 국회는 임시회의를 소집해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해제를 시도했다.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해제해야 한다는 헌법 77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계엄사령부는 당.정협의를 통해, 국회의원 설득 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여당인 새누리당을 통해 계엄의 필요성과 최단 기간 내에 해제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계엄해제 의결에 참여하지 말라고 유도했다.

이래도 안될 경우, 계엄사령부는 국회의원 299명 중 진보성향 160여 명, 보수성향 130여 명으로 각각 분류, 집회.시위금지 및 반정부 정치활동 금지 포고령을 선포해 위반한 국회의원을 집중 검거해 사법처리했다.

결국, 정족수에 미달한 국회는 국회의장 직권으로도 계엄해제가 상정되지 못했다. 계엄을 그대로 유지됐다.

   
▲ 국회를 장악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캡처사진-통일뉴스]

계엄군은 정부도 장악했다. 각 군 본부에서 중.대령급 장교 48명을 소집, 각 부처에 2명씩 파견했다. 정부 부처별 5급 이상 공무원 2명은 정부연락관으로 계엄사에 소집됐다.

계엄군의 원활한 정부 부처 업무 통제를 위해, 계엄위원회가 설치됐다. 계엄사령관의 자문기구로, 계엄부사령관이 위원장을 맡고 군, 정부 차관급 인사, 대학 부총장 및 교육감 등 학계, 언론사 국장급 인사 등 20여 명으로 구성됐다.

계엄군은 자신들의 통제를 거부하는 정부 부처에 대해서는 대통령 및 국무총리를 통해 경고 및 제재조치를 하고, 공무원은 계엄법 제8조 계엄사령관의 지휘.감독 위반으로 3년 이하의 징역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치안질서 유지’라는 이유로 자행됐다.

계엄군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외교활동도 강화했다. 계엄사령관은 주한 무관단을 소집해 계엄의 불가피성과 신속한 사회질서 확립 등 계엄 시행의 지지를 당부했다.

국방장관은 주한 미 대사를 초청해, 미국 정부가 한국의 계엄 상황을 인정해달라는 부탁했다. 외교장관은 기자, 기업인 등 주요 국가 주한 사절단을 초청해 계엄 시행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장준규 계엄사령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고문을 발표했다. 외국인 유화책이었다. “공항만 출입 통제 간 외국인 등록증 및 여권 소지자는 출국을 허용한다. 국내 주둔 외국 기업 및 법인의 영업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계엄군, 보도통제에 나서다..SNS 계정은 강제로 폐지

계엄군은 재빠르게 언론 장악에도 나섰다. 계엄사령부에는 기무사 1명, 현역 13명, 동원 34명으로 구성된 보도검열단이 구성됐다. 합동수사본부에는 합수본부 7명, 계엄사.문체부 파견관 각 1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언론대책반이 설치됐다.

이들은 ‘보도검열 요령 및 지침’을 하달했다. 계엄에 유해되고 공공질서를 위협하며 군의 사기를 저하하고 군사기밀에 저촉되는 내용은 보도금지됐고, 정부와 군의 발표, 반정부 의식을 불식시키며 시위대의 사기를 저하하는 내용은 확대보도 대상이었다.

조간신문은 매일 05:00~12:00, 석간신문은 매일 15:00~22:00, 방송.통신.인터넷 매체는 수시, 주.월간지는 매일 13:00~15:00 한국언론회관에서 검열을 받아야 했다.

   
▲ 보도지침. [캡처-통일뉴스]

만약, 보도지침을 위반할 경우, 1차 경고에 이어 2차 기자실 출입금지, 보도증 회수, 현장취재 금지, 외신매체 출국조치 처분을 받아야 했다. 세 번째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의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래도 지침을 어길 경우, 매체 등록을 취소하고 보도정지 조치를 내렸으며, 전국적으로 <KBS-1TV>와 라디오를 단일방송으로 전환했다.

보도가 단일화되자, 문체부 장관이 정부발표를 국방부와 계엄사가 상황을 브리핑하는 것을 기자들은 문체부가 운영하는 프레스센터에서 받아써야 했다.

그리고 언론 통폐합도 진행됐다. 계엄군은 방송 22개, 신문 26개, 통신 8개로 중앙 언론사를 통폐합했고, 지역 언론은 방송 32개, 신문 14개로 묶었다.

인터넷 포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통제됐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민.관.군 합동으로 ‘인터넷유언비어대응반’이 설치, 모니터링을 강화해 불온내용이 식별되면 신속하게 차단했다. 유언비어 등을 유포하는 인터넷 포털과 SNS 계정은 계엄법 제9조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 직권으로 폐지됐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됐다.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군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통일뉴스>는 자유로이 기사를 쓸 수 있다. 촛불시민의 힘이 더욱 고마운 하루를 우리는 보내고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관련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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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을 닮은 사람, 노회찬 약전

인간 노회찬의 삶과 사랑
2018.07.25 18:50:58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들은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 노회찬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노회찬이 살아온 삶을 기록한 글이 여기 있다. 이 글은 월간 <시대> 제50호(2017.07~08월호)의 한 꼭지로,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안재성이 썼다. '안재성이 만난 사람들'이라는 코너의 글이다. 노회찬에 대한 약전(略傳)으로 손색이 없다. (☞ 월간 <시대>에 실린 글 바로 가기) 
 
이 글은 노회찬의 출생에서 국회의원 입문 때까지를 주로 다룬다. 따라서 원문에는 있는 '국회의원 입문 이후 노회찬의 행보'와 2007년 이후 '진보정당사' 부분은 안재성 작가와 월간 <시대>를 펴내는 박종철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편집했다. 안재성 작가와 박종철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의 원제는 '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이다. 편집자.
 
1. 조봉암을 닮은 사람 
 
노회찬을 보면 조봉암이 생각난다는 이들이 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주역이었으나 현실 공산주의의 국가폭력에 반대해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던, 필요에 따라 이승만과 손잡고 토지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처형된 조봉암의 일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봉암은 야만적 시대의 제물로 갔으나 노회찬은 3선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 석밖에 안 되는 정의당의 원내대표지만 그 여섯 석도 우리나라 진보정당 현실에는 소중하다. 물론 그가 속한 정의당이나 그가 천명해 온 주장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여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만,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것이 사실이다. 
 
노회찬을 두고 한국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노회찬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처음으로 민중후보를 내세운 이들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중의 당(1988년)을 주도한 이래, 민중당(1990년)으로부터 진정추(1992년), 민주노동당(2000년), 진보신당(2008년), 통합진보당(2011년)을 거쳐 현재의 정의당(2012년)까지 한 번도 진보정당운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뿐더러 늘 주역의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만들거나 속했던 진보정당들이 모두 그와 다른 정파들에 의해 장악되어 그는 밀려나거나 스스로 분당해 나왔다. 
 
그럼에도 맨 처음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했고, 많은 동지가 자의든 타의든 물러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국회에 진출한 정당을 이끌고 있으니, 그를 두고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나서면서 시작된 진보정당운동이 올해로 꼬박 30년째다. 노회찬의 진보정당운동 시계와 똑같다. 지겹게 들어 온 멍청한 질문이겠지만, 왜 오로지 이 운동에 일생을 바치는가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일만 추구해도 이루기 힘든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하겠습니까? 학창 시절에 결심한 대로 이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일부러 낳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회찬은 아이조차 없는 극히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한 일간지 <매일노동뉴스>를 10년간 운영하느라 빚더미에 앉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은행에서 의원용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조건이 안 된다며 거절당한 일화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는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삶과 사상이 일치하는, 이 변치 않는 무욕의 삶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음, 편향되지 않음, 재치 넘치는 특출한 표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욕심 없음 등등으로 표현되는 이 노회찬 특유의 인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진보 진영 인사들은 대개 운동 경력만 내세울 뿐이다. 개인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잡지에 이 꼭지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이 부산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 말은 억양이 강해서 고향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출신지를 숨기기 어렵다. 그런데 노 의원의 말투에서는 경상도 억양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2. 첼로 연주하는 아이 
 
아버지의 이력부터가 독특하다. 아버지 노인모 씨는 이북 출신이다. 일제 치하에서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라는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징병으로 끌려가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원산의 도서관에서 사서를 하던 문학예술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초량동 산동네에 살면서 원태순 씨와의 사이에 셋을 낳아 키웠다.
 
노회찬은 위로 누나를 둔 맏아들로, 1956년 8월에 태어났다. 부모가 이북 말을 쓰니 노회찬도 자연히 이북 억양에 익숙해졌다. 노회찬이 부산 출신임에도 남과 북이 합쳐진, 어디 출신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특이한 억양을 가진 이유다. 
 
초량동 산동네는 전쟁 피난민들이 많이 살던 빈민촌으로, 무허가로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다. 노회찬의 다섯 가족은 그나마 집도 없이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았다.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할 때까지 그 집에 살았으니, 노회찬의 부산 생활은 초량동 빈민가의 셋방살이가 전부다. 
 
산비탈 판잣집에서 셋방살이를 했어도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가족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도 풍요로웠다. 박봉이나마 안정된 수입이 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질적 욕망보다는 문학예술을 사랑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방이 두 칸으로 늘자 암실부터 만들어 스스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던 멋쟁이 아버지였다.
 
"살림은 가난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였는데, 중학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전축 앞에 불러 놓고는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이걸 들어야 한다면서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주세요. 백 번은 더 들었을 거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연주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심취하게 되었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난한 살림에 남편과 비싼 오페라 공연을 다니던 이였다. 월남을 하기는 했으나 북한에서 살면서 사회주의 교육의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까? 노회찬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사람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고르게 했다. 누나는 피아노를 택했고, 노회찬은 바이올린보다 큼직한 것이 배우기 쉬울 듯해 첼로를 택했다. 
 
연습용 첼로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사사가 문제였다. 부산에는 첼로 선생이 한두 명밖에 없던 데다 수강료도 엄청났다. 운 좋게도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였던 배종구 교수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역시 좋은 교수를 만났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학 진학을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해서 배우려는 것을 안 두 교수는 거의 돈을 안 받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재능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분들께 꽤 여러 해 배웠는데 열심히 하라는 말만 잔뜩 들었지, 너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리코더는 아주 잘 불었어요. 무슨 노래든 듣기만 하면 즉석에서 악보로 옮겨 불 정도였지요." 
 
어렵게 배운 첼로 솜씨로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 받아 3천원의 출연료까지 받고 공연한 적도 있었다. 첼로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해, 당시 서울의 낭만파 학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출입하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도 드나들고,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삼아 직접 작곡해 본 적도 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문학, 철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열독했고 영화도 무척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는 한 해 개봉된 모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책상물림의 샌님이 아니었다. 삼육국민학교, 부산중학교 다니는 내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반장을 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 선생들이 부당하게 굴면 바로 대들어 싸우기 일쑤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고 고등학교 내내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부당하다 싶으면 못 참고 선생님한테 바로 대들어서 엄청 많이 맞았습니다.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 맞기, 주먹으로 얼굴 맞기, 꽃병으로 머리두들기기 등등 정치나 학원이나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는데도 계속 반항했죠." 
 
잘못된 일에는 반항을 하되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애정과 존중심을 잃지 않는 그의 특징은 그때도 나타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 선생이 미국 인디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피식거리며 동조를 하지 않자 "너희는 텔레비전도 못 봤냐?"고 성질을 냈다.이에 아이들이 전부 못 봤다고 하자 속 좁은 선생은 못 본 놈 나오라고 고함쳤다. 겁난 아이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는데 노회찬이 혼자 나갔다. 자취방에는 진짜 텔레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인데도 대든다고 생각한 선생은 무자비하게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무한대로 맞았어요. 싸대기를 양쪽으로 무한대로 맞고 나니까 기분이 좀 그랬죠. 선생님이 과도했고 어른답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괜히 폼을 잡아 선생님으로 하여금 학생을 때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맞고도 교무실에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이랬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아니다 싶으면 곧장 일어나 대드는 성격은 이후에도 변치 않아 참 많이 얻어터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운동도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은 선수급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노 씨 성을 따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운동도 잘했지만 아마도 커다란 체구에 그보다 더 큰 머리통,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대범한 성격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오늘의 그가 보수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개의치 않고 '민의'라는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나오는 소신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사회운동도 퍽 일찍 시작했다. 아는 선배의 영향을 받거나 학습 서클에 들어가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니 참 조숙했다. 
 
3. 인생의 미스터리들 
 
인생이란 묘한 우연에 좌우되기도 한다. 나이대로 하면 1972년에 부산고에 입학해야 했던 그가 재수를 하고 한 해 늦게 경기고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한 미스터리다. 지역의 명문이던 부산중학교에서는 넷 중 세 명이 부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교 10등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노회찬이 낙방을 하고 만 것이다. 정말 이유를 알수 없었다. 평소 경기고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일부러 시험을 망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족에게서 오해를 받는 것도 싫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등학교를 아예 포기하겠다고 주장하는 그를 아버지는 서울로 보내 재수를 하게 했다. 
 
"서울에 온 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부산에 있었으면 아마 내가 이 길로 안 들어섰을 겁니다. 반항심만 극대화된 채 친구들과 어울려 이상한 길로 빠졌을 겁니다."
 
어쨌든 전국의 수재가 모여든 경기고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이번에는 스스로 원해서 택한 길이었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소위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재수 시절 혼자 그렇게 끙끙 앓고 지내다가 경기고에 들어가니 정광필, 이종걸 등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몇 명 생겼다. 똑똑한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흔쾌히 응했다.
 
글은 노회찬이 썼으나 등사가 문제였다. 철필로 긁으면 공신력도 없거니와 글씨체가 드러나 체포되니 타자를 쳐서 등사하기로 했다. 타자기가 귀한 시절이고 칠 줄도 몰랐다. '청타'라 해서 푸른 등사 원지에 타자를 쳐 주는 몇 군데 청타집을 찾아다녔으나 원문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고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한 군데 청타집에 사정해서 타자를 친 다음, 공범 중 한 명이 다니는 부천의 한 교회로 갔다. 전철이 없던 시절이라 완행 기차를 타고 소사역에 내려 밤중에 몰래 교회에 들어가 등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등사 중일 때 목사가 불쑥 들어왔다. 밤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신고를 당해 감방에 가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겠구나 생각했지요. 근데 목사님이 우리가 등사해 놓은 유인물을 한 장 집어 들고 죽 읽어 보더니 다시 내려놓고는 단 한 마디도 않고 나가서 문을 닫아 주는 거라. 참 고마운 목사님이었지요."
 
무사히 1,200장 정도를 등사한 일행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학교에 들어가 책상 속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 
 
읽어 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찬동하자 학교가 뒤집어졌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해 즉시 조기 방학을 선포하고는 모두 집에 가라고 내몰았다. 학생들이야 방학이 당겨졌으니 신이 나서 누가 뿌렸는지 몰라도 고맙다고 떠드는 것이었다. 경찰이 정문부터 학교를 빙 둘러 감싸고 있었지만 문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일을 통해 규합된 친구들에게 노회찬은 기초부터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런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가서 하드카버로 된 두꺼운 <세계철학사>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옛 소련의 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세계철학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플라톤이니 칸트가 등장하는 부르주아철학사였다.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재미도 없어 얼마 안 있어 포기하고 <다리>, <사상계>를 함께 보는 시사 모임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기획한 날이자,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대학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청학련 관련자는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던 경기고 학생 하나가 교문 밖에서 어떤 대학생이 선생님 주라며 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학생들이 열어 보았다. 유신 반대를 선동하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었다. 
 
노회찬은 교실 문을 잠가 선생님들의 진입을 막고 큰 소리로 유인물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즉석에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농성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자 학교 측은 또 다시 휴교를 선포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시사 토론을 이어 갔다.
 
경기고 학생들의 이날 수업 거부는 전국이 공포로 얼어붙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기획되었던 이날의 시위는 대부분 실패해 버렸는데 뜻밖에 고등학교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시절의 저항의 무용담이며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자연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곧바로 입영 영장을 받는다. 베이비붐 시대라 웬만하면 현역병에서 제외될 때라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보충역, 이른바 '방위'가 되었다. 
 
1978년에 제대하고 다시 입시를 치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에 합격했다. 동갑내기들은 대개 75학번인데 4년 늦은 79학번이 된 것이다. 
 
"대학에 간 이유는 오로지 데모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혁명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친구들이 대학에서 데모를 주동하다 보니 대학에 가기 전에도 벌써 몇 번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요." 
 
신입생이라지만 벌써 졸업했을 나이인 데다 이미 고교 1학년부터 경력이 화려한 그가 들어오자 학교에서는 선배이던 친구들이 곧바로 그에게 '이념 서클'을 맡겼다. 1학년이 지도하는 특이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유신 독재의 마지막 해이던 1979년부터 시작해 4년 내내 마음껏 데모를 했다. 여러 이념 서클을 지원하고 고려대 처음으로 학회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학생이 아니라 '직업운동가'로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으나 그는 학생운동이야 지나가면서 자동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머지 긴 인생은 노동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주항쟁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이 정치운동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노동,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운동을 지향할 때였다. 
 
성적과 취업에 목숨이 걸린 요즘과 달리 대학의 성적 관리가 느슨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운동권 학생이라면 출석을 거의 안 해도 시험만 치르면 학점을 주어 어서 졸업시켜 버리려 했다. 노회찬은 4학년이 된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등록해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 취업에 나섰다. 학교는 시험만보러 가서 졸업장은 받았다. 
 
처음 취직한 곳은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의 하청 공장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본인이 직접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러시아혁명기의 인민주의적 분위기 속에 3년 가까이 열심히 공장에 다녔다. 이 3년간 받아 본 월급이 20여년 후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받아본 거의 유일한 정규적 수입이었다. 
 
노동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대학생들 사이에는 현장 취업의 열풍이 불어 1985년쯤에는 전국에 위장 취업자가 만 명은 되리라는 말까지 돌았다. 출신 학교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거나 개별적으로 공장에 흩어진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차례 시위를 주동하느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어 공장에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배령을 내렸고, 7년간의 기나긴 지하활동이 시작되었다. 정기 수입이라곤 없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가 알 수 없는, 그의 인생의 또 다른 미스터리가 시작된 것이다. 
 

ⓒ노회찬 전 의원 홈페이지

4. 인민노련에서 정의당까지 
 
보수파가 이미 확보한 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라 이권다툼만 한다면, 진보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야 하니 논쟁이 필연적이다. 
 
노회찬도 알게 모르게 우리 진보운동을 좌우한 중대한 논쟁과 이합집산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독자적 진보정당을 만들 것인가 말것인가, 민족문제인가 계급문제인가,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등의 논쟁으로 야기된 주류 운동권의 분열 또는 연합을 이끌어 낸 사건들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쟁들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민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큰 바위를 만난다. 70년대 운동가들이 반파쇼 민주주의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별다른 논점 없이 뭉쳐 있었다면, 잇달아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유입된 80년대 운동은 그 벽두부터 온갖 정파의 난립과 논쟁과 파쟁으로 얼룩졌다.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활동가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혹은 소속되기 위해 수백 종은 될 팸플릿을 읽고 밤새 논쟁을 벌여야 했다. 
 
인민노련은 1986년부터 인천, 주안, 부천 등 경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위장 취업자들이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공식적으로 결성을 선포했다. 지도부는 노회찬, 주대환, 최봉근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민중민주주의적 성향(이른바 '피디PD')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성 직후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민족해방 진영(이른바 '엔앨NL')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면서 인민노련의 성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민노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단시간 내에 정회원만 600명을 넘어서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조직이라고 할 만했다. 
 
인민노련에서 노회찬이 맡은 임무는 조직부장이었다. 그의 조직수완에 대해 주대환은 이렇게 증언한다. 
 
"노회찬 씨는 자기주장을 먼저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고는 그중 다수를 차지한 주장을 선택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 결론을 삼습니다. 자연히 큰 반발 없이 조직화에 성공합니다. 정략적으로 그렇게 한다기보다 본래 성품이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타고난 조직가지요." 
 
조직 담당 중앙위원으로,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을 이끌던 노회찬은 결국 수배 7년 만인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체포되어 2년 반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체포되기 1년 전인 1988년 12월에는 인천 지역의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지선과 결혼했다. 노회찬보다 한 살이 많아 1955년생인 김지선은 중앙여중을 졸업하고 16세 나이로 인천 대성목재 등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운동을 시작해 70년대에 두 차례나 구속된 적이 있는 맹렬한 활동가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버린 노회찬은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결혼에 성공한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혁명을 위해 안 가진 것이 아니라, 잇단 감옥살이와 수배 생활로 그럴 여유가 없다 보니 임신 적령기를 넘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한방과 양방을 다 동원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두 사람은 입양이라도 하려고 신청했으나 집도 수입도 없다고 해서 자격 미달로 거절당했다. 
 
1992년 석방되고 보니 인민노련을 주축으로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여러 정파가 결합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약칭 진정추를 결성하고 있었다. 결성식에 5천 명이 모일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이미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민중 진영의 독자 후보로 내세운 주역이던 노회찬은 1992년 12월 선거를 맞아서도 백기완 선대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백기완은 1%밖에 얻지 못했고, 보수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노회찬은 남았다.
 
진보정당 추진 세력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과 합쳐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도 노회찬은 진정추의 후신인 민중정치연합의 대표로 이를 주도했다.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권영길 역시 참패했으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정당의 존립 여지는 넓어졌다. 
 
이에 힘입어 2000년 1월에는 민주노동당을 결성했다. 이에 민족해방 계열도 대거 당에 합류하더니 다수파가 되었다. 이때부터 민족해방계열은 자주파로, 노회찬이 속한 민중민주계열은 평등파로, 권영길로 대변되는 중도파는 국민파로 불리게 된다.
 
운동권의 주류이던 자주파가 합류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했다. 비례대표 8명을 포함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2004년 선거는 노회찬에게도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안겨 주었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당선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던 비례대표 8번으로 등재했는데 뜻밖에 턱걸이로 당선된 것이다.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그는 꼼꼼히 일지를 기록했다. 이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 노동운동의 기원이랄 수 있는 전태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상은 그가 받은 수많은 상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상일 것이다.
 
초선 의원임에도 노회찬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는 국정감사의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신사적인 의원, 시민운동가들이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방송국 피디들이 뽑은 최우수 의원 1위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는다. 출석률과 발언 등의 지표에서도 최우수 의원의 하나였고, 비정규직노동자 처우 개선 등 4년간 무려 467건의 법안을 발의해 31건을 가결시키는 등 입법 활동에서도 선두였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통화를 불법으로 도청한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삼성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및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인맥을 관리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실은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가 먼저 방송을 통해 공개했는데 이때는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이에 해당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불의 앞에 차별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에 검찰은 명예훼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을 기소하고 나섰다. 길고 긴 재판 끝에 노회찬은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받아 국회의원 자격까지 잃었으나 2009년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노회찬의 길이 항상 옳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항상 옳은 단 하나의 진리의 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노회찬이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든, 시기와 사안마다 옳다고 판단되면 서로 지지하고 틀리다고 판단되면 비판하면서 큰 길을 함께 걷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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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북 미사일발사장 해체 감사”… 이젠 미국 행동할 차례

VOA “서해위성발사장 해체, 북이 미국에 다음 단계 상응조치 요구한 것”
▲ 사진 : 미국의소리(VOA) 홈페이지

김정은 북한(조선)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지난달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폐기를 약속한 시설인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작업에 착수한 데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밝혔다. 조만간 참전용사 유해가 미국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기대도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각)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해외참전용사회(VFW) 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새롭게 공개된 위성사진은 북한(조선)이 주요 미사일 부지의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는 걸 보여준다”며 “미국은 그 점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미국의소리(VOA)가 보도했다.

앞서 미국의 북한(조선) 전문매체 ‘38노스’는 북이 2주 전부터 미사일 엔진시험장인 서해위성발사장을 해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지난 20일과 22일 촬영된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해당 사진엔 미사일 발사체를 조립할 수 있는 구조물을 해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북한(조선)의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와 모든 아시아의 번영과 안보, 평화의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고 있다”고 바람을 나타내곤 “김정은 위원장과 훌륭한 만남을 가졌으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VOA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북쪽 지역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송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은 한국에 생명을 바친 전우들의 유해가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면서 “빠른 시일 내 전사자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해 미국 땅에 눕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의소리(VOA)는 “북한(조선)의 서해위성발사장 폐기 움직임은 답보 상태에 빠진 미-북간 비핵화 협상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전망”이라며 “예정대로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도 이뤄질 경우 비핵화에 대한 미국 내 회의론을 누그러뜨리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VOA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작업, 북미간 물밑접촉의 결과일 가능성”

VOA는 24일(현지시각)자 ‘뉴스해설’ 꼭지에서 “북이 이 시설(서해위성발사장)을 완전히 해체하고, 아울러 한국전쟁 정전협정일인 27일에 맞춰 미군 유해도 송환한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했던 두 가지 약속을 실행에 옮기는 게 된다”고 의미를 강조하곤 38노스가 이번 조치를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약속을 이행하는 중요한 첫 단계”라고 평가한 점을 부연했다.

그러면서 VOA는 서해위성발사장 해체 작업이 북미간 물밑접촉의 결과일 가능성을 언급했다. VOA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막후에서 아주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비핵화 진전 상황을 평가한 점을 환기시키곤 “서해발사장 폐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38노스가 북의 발사장 해체 움직임이 이미 2주 전에 시작됐다고 본 점을 거론하곤 “한국 청와대도 미국과의 정보 공유를 통해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이어 VOA는 북의 이번 조치가 종전선언을 염두에 둔 것임을 지적했다. 즉 “북이 서해발사장 해체에 착수한 건 무엇보다 미국과의 핵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며 “이를 통해 종전선언이라는 다음 단계 상응조치를 미국에 요구한 것”이란 얘기다.

미국의 종전선언 검토 가능성에 대해선 “알 수 없다”면서도 “다만, 비핵화의 진전 속도가 미국의 종전선언에 달려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고 중요성은 강조했다. 종전선언은 당초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조치 가운데 최우선으로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달 7일 “싱가포르에서 종전 선언에 서명할 수 있다”고 밝힌 사실을 근거로 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이 “미북관계 정상화의 첫 걸음”이자 “가장 쉬운 부분”이라고 말했었다.

미국이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선 “일부에선 북한(조선)이 주장하는 단계적 비핵화를 미국이 사실상 수용키로 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이 단계를 세분화해 단계별 안전보장 조치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종전선언을 협상카드로 삼으려 한다는 지적”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관영 매체조차 북이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에 이어 27일께 미군 유해 송환을 시작할 경우 다음은 미국이 행동에 나설 차례란 분석을 내놓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icon관련기사icon임박한 정전협정 65년… 북 언론들, 잇단 ‘종전선언’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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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무 장관을 향한 기무사의 ‘의문’스러운 반발

송영무 국방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정의철 기자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간부들 간 벌어진 낯뜨거운 '진실 공방'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앞두고 기무사가 작성한 이른바 '촛불 계엄 문건'에 대한 사후 보고를 둘러싸고 송 장관과 기무사의 주장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특히 국방장관과 대령이 공개적으로 설전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양측의 진실 공방만 부각되는 양상이다. 이 때문에 정작 기무사가 내란 음모를 계획했다는 '기무사 문건 논란'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상 초유의 사태 벌어진 국방위 회의장
국방부장관에 정면으로 맞선 기무사

이석구 기무사령관이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석구 기무사령관이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사건의 발단은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벌어졌다. 이날 회의에는 기무사 간부들이 총출동했다. 이석구 기무사령관, 민병삼 100기무부대장(대령)과 '기무사 계엄 문건' 작성에 관여한 소강원 기무사 참모장과 기우진 기무사 5처장도 직접 출석했다. 소 참모장은 기무사 계엄 문건을 작성할 때 꾸려진 TF팀 팀장을 맡았고, 기 처장은 문건 작성의 실무 책임자를 맡은 당사자다.

이 자리에서 이석구 기무사령관은 송 장관에게 계엄 문건을 보고했을 당시 "이 사안의 위중함을 인식할 정도로 대면보고를 했다"며 "20분 정도 (충분히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 장관은 "5분 정도 보고를 받았고, 지휘 일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반박했다.

이후 이어진 민병삼 기무부대장의 발언은 진실 공방 논란에 불을 붙였다.

민 부대장은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양심을 걸고 말한다"며 "7월 9일 장관께서 '위수령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법조계에 문의해보니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계획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장관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다만 직권 남용에 해당되는지는 검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송 장관이 당시 해당 문건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이 발언을 들은 송 장관은 "완벽한 거짓말"이라며 "대한민국의 대장까지 마치고 장관하는 사람이 거짓말하겠느냐. 장관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국방부 수장의 말을 기무사 대령이 면전에서 반박하고, 원색적인 표현까지 동원해 입씨름을 벌이는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되자 발언의 진위에만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장 자유한국당은 송 장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몰아세우며 사퇴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논란은 다음날인 25일 장외전으로까지 번졌다. 기무사는 송 장관이 한 발언의 진위를 입증하기 위한 보고서를 추가로 공개했고, 국방부는 "사실무근"이라고 재반박에 나섰기 때문이다. 같은 날 여야 원내대표들은 기무사 계엄 문건에 대한 특별수사단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 국방위원회와 협의를 거치고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기무사는 왜 항명에 가까운 반발을 감행했나
조직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기무사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와 4.16연대, 민중공동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기무사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시민사회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 해체 등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와 4.16연대, 민중공동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기무사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시민사회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 해체 등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그러나 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동이 정작 사건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입을 모아 강조하고 있다.

기무사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계엄 문건을 작성한 부대로서, 친위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즉, 특별수사단의 수사를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송 장관에게 맞서면서 양심선언을 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기무사가 항명에 가까울 정도로 국방장관에 반기를 든 이유는 책임 회피로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김광진 국방부 정책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은 25일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기무사는 (계엄령을 검토한 것이) 기무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송 장관 역시 (그렇다고) 이야기해놓고 왜 이제 와서 기무사가 다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덤터기를 씌우느냐며 반발하는 것"이라며 "우리(기무사)한테 칼 대지 말라고 하는 중"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김 자문위원은 기무사 간부들이 국회에 출석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국방위 회의에 기무사 대령이 출석해 발언한 적 있나. 아주 이례적인 것"이라며 "더욱이 (어제 출석한 기무사 대원들은) 계엄 문건으로 조사 받고 있는 사람인데 이와 관련한 내용을 진술하기 위해 떼로 몰려 왔다는 것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상만 국방부 국방개혁자문위 간사 역시 송 장관의 주장이 진실이냐, 거짓이냐에 대한 문제는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논쟁이 아니라고 힘줘 말했다. 오히려 고강도 기무사 개혁을 준비했던 송 장관을 흔들기 위한 기무사의 공작 중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 간사는 같은 날 통화에서 "진실 공방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박 전 대통령의 권력 하에서 기무사가 친위 쿠데타를 모의하려고 했다는 것"이라며 "그 중간에 있던 송 장관의 발언과 판단의 적절성은 논쟁거리가 될 수는 있지만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친위 쿠데타라는 계획안을 짰던 사람이 누구고, 그것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어제 기무사의 행태는 송 장관을 날리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무사는 이번 기회에 송 장관을 날리면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국방개혁안을 중단시키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현역 군복을 입은 기무사 대령이 장관의 면전에서 공방을 벌이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연출해 송 장관의 리더십을 훼손하려는 것이 목표인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진실 공방 논란의 실체는 기무사가 자신의 조직에 대한 개혁 움직임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기무사 개혁 방안을 논의 중인 국방부 기무사 개혁위원회 장영달 위원장은 통화에서 "다른 곳도 아니고 군이 국민들 앞에서 자신들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심각하다"며 "지금 기무사는 명령대로 수행했는데, 우리만 죽일놈 취급을 당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뜻 아닌가. 그런 부분은 합동수사단에서 밝혀내야 할 문제"라고 조심스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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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하나로 아들·딸의 생사가…

[2017년 언론관련 주요 판결] 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고 간 코멘트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 사례까지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8년 07월 26일 목요일
 

 

미디어오늘이 최근 언론중재위원회가 발간한 ‘2017년도 언론관련 판결 분석보고서’에 언급된 주요 판결 사례 가운데 2017년 확정 판결된 7건의 사건을 추렸다. 언론중재위원회는 매년 언론사 또는 언론인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들을 수집·분석한 보고서를 내고 있다. 언론관련 판결은 언론분쟁의 양상과 추이를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서 언론계에 유용하다. - 편집자 주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1. 언제는 탐정이라고 치켜세우더니 - 2008년 SBS

희대의 조작방송이 있다. SBS는 2008년 9월16일자 ‘긴급출동 SOS24’ 프로그램을 통해 강원도의 한 휴게소에서 지적장애가 있는 소녀를 감금한 채 찐빵을 팔게 했으며, 제작진이 휴게소 주인을 고발해 구속시키고 소녀를 완치시켜 가정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을 연속 보도했다. 이 사건은 ‘찐빵소녀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대법원은 방송이 조작됐다며 SBS에 3억 원의 손해배상판결을 내렸다. 21세기 한국의 언론관련 판결사상 최대금액이다.  

방송 당시 사설탐정이던 A씨는 휴게소 주인 쪽 의뢰를 받아 사건을 조사했고 사건이 악의적으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그러자 SBS제작진은 ‘A씨가 일체의 법률적 근거가 없는 탐정을 자칭하면서 방송의 조작설을 무분별하게 유포하고 있다’는 내용의 게시 글을 시청자게시판에 올렸다. 이후 A씨가 명예훼손을 주장했고 재판부는 게시 글의 허위사실 적시 및 악의적 의도 등을 인정해 SBS에 4000만 원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 SBS ‘긴급출동 SOS 24’ 방송 갈무리
▲ SBS ‘긴급출동 SOS 24’ 방송 갈무리
 

재판부는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A씨를 치켜세우면서 탐정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으나 이번에는 방송의 허위조작 실태를 은폐하고 A씨가 정당하게 제기한 조작설의 광범위한 유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SBS) 스스로 A씨의 조사 활동을 ‘불법탐정’ ‘공무원자격사칭’ 등의 표현을 동원해 비방하며 A씨의 인격적 가치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사건 당시 탐정 A씨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 사건은 평소 도벽과 거짓말이 능숙해 가족도 외면했던 찐빵소녀를 SBS 방송이 마치 세상물정 모르는 지적장애자가 파렴치한 휴게소 주인에게 4년 간 임금착취와 학대를 당한 것처럼 조작했다.” “제작진이 찐빵소녀를 정신지체 장애자로 몰아가는 것 같다. 방송내용에 의하면 찐빵소녀는 재학 당시에는 정상인이었으나 휴게소 가족의 폭력으로 지적장애자가 되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SBS제작진은 찐빵소녀 변아무개씨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고 간 코멘트 - 2014년 동아일보 

2014년 2월24일자 동아일보는 서울시공무원으로 재직했던 탈북자 A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보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심 형사재판으로 A씨가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상태였지만 A씨를 간첩이라고 단정적으로 지칭한 최초 신고자 B씨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 보도했다. 결국 사법부는 A씨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과 관련, 동아일보에 정정보도와 함께 1000만 원 손해배상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인용보도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사가 언론중재법 등이 정하는 언론의 공적‧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고 할 수 없고 형사판결로 간첩 공소사실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된 상태임에도 정반대로 원고를 간첩이라고 단정적으로 지칭하거나 간첩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B씨의 발언 등을 그대로 보도한 점”을 문제로 꼽았다.

재판부는 “동아일보가 B씨의 언급이 진실에 부합한다는 점을 조사했거나 적어도 위 언급을 신빙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근거를 확인했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논쟁적 사안이 발생했을 때 취재원의 쿼터에 의지해 소송을 피해갈 순 없다. 특히 한 사람의 삶을 간첩으로 규정짓는 사건이었다면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3. 왜곡보도=반복되는 패소 - 2014년 MBN 

MBN은 2014년 9월22일자 메인뉴스에서 ‘마취 환자 방치시킨 위험한 압수·수색’이란 제목의 리포트를 통해 서울 강남 서초경찰서 수사과 경찰들이 수술실에 난입해 수술 중인 환자가 위험한 상태로 방치됐다고 보도했다. 보도내용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보도의 핵심내용 대부분이 허위였다는 사실은 더 충격이었다.

 

▲ MBN ‘압수수색 하다 전신마취 환자 방취’ 방송 갈무리
▲ MBN ‘압수수색 하다 전신마취 환자 방취’ 방송 갈무리
 

재판부는 MBN보도와 달리 “환자에 대한 수술이 진행되던 도중에 경찰이 수술실에 무단 진입했다거나 그로 인해 진행 중인 수술이 중단된 사실은 없고, 환자의 코가 절개된 채 방치된 사실도 없으며 사건 보도에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여성은 그 무렵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가 아니어서 (MBN이)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던 중인 환자처럼 보도한 것은 허위라 할 것이고, 그가 압수·수색으로 인하여 수술이 중단되고 위험한 상태로 방치되었다는 내용도 허위”라고 밝혔다.

 

당시 보도와 관련해 수사팀 책임자였던 B씨는 민사소송을 제기해 2016년 정정보도와 함께 7000만 원 배상판결을 받아냈다. 당시 B씨와 함께 수사팀에 있던 A씨 또한 보도로 명예훼손을 입었다며 B씨와 마찬가지로 민사소송에 나서 지난해 1000만 원 배상판결을 받았다.  

MBN은 서초경찰서 경찰관으로 표시해 A씨가 특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A씨가 속한 팀(압수수색 참여 경찰관은 5명)에서 수사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은 주변인이나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기사를 보고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며 명예훼손을 인정했다. 왜곡보도의 결과는 이처럼 반복되는 패소다.

4. 기사 하나로 아들·딸의 생사가… - 2014년 문화일보  

2003년 귀순한 A씨는 2014년 당시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해 비공개로 증언했다. 이 무렵 A씨는 북한에 있는 딸과 2014년 경 연락이 닿았는데 북한 보위부 직원들이 A씨 딸에게 “남조선에서 조국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경우 너희 남매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전하라”고 위협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A씨는 항소심 재판부에서 자신이 증언한 것을 북한 보위부가 알게 됐다고 알렸다.  

문화일보는 2014년 4월1일자에서 과거 북한 공작원이었던 A씨가 재판에서 증언한 사실과 이로 인해 A씨의 딸이 북한 보위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해당 신문은 A씨의 나이와 성별, 북한에서의 경력, 가족관계 등 인적사항과 증언 사실을 비롯해 북한에 있는 딸이 위험에 처하게 된 사실을 재판부에 탄원했던 사실까지 보도했다.

A씨는 해당 기사로 인해 북한에 있는 자녀의 생명이 위험에 빠졌다며 기사 삭제를 요청했고 문화일보는 기사를 내렸다. 하지만 이미 해당 기사를 참고한 다른 언론사에 의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이후 A씨는 문화일보 보도로 인해 딸과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북한에 알려졌고, 실제로 자녀의 생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며 문화일보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문화일보 보도로 A씨 자녀들의 생사에 중대한 위험이 초래돼 A씨에게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 발생했으나 문화일보 또한 공익적 목적에서 사건을 보도했던 점 등을 고려해 3000만 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북한에 있는 증언자 가족의 생명, 신체 등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 피해의 정도가 중대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보도의 위법성은 조각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5.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예 - 2016년 MBC  

MBC는 2016년 9월29일 방송된 ‘리얼스토리 눈’에서 ‘육남매의 상속 다툼, 누가 노모를 모시나’란 제목으로 2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두고 육남매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내용을 방송에 내보냈다. A씨는 재산을 증여받은 형이 유류분반환청구권 소멸시효기간이 지나자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켜 제보하게 된 ‘현대판 고려장’ 사건인데 애초 제보취지와 달리 방송이 육남매의 상속 다툼으로 사건을 왜곡했고, A씨가 언급하지 않은 ‘구치소’라는 자막을 삽입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해배상과 정정 보도를 요구했다.  

 

▲ MBC ‘리얼스토리 눈’ 방송 갈무리
▲ MBC ‘리얼스토리 눈’ 방송 갈무리
 

A씨는 ‘부친의 부동산을 팔아 합의금을 마련했다’는 형의 주장에 반론을 내놓는 과정에서 “동생이 사고 쳐서 들어간 걸 (형이) 자랑이라고 말하던가요? 40년이나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네요. 아무튼 나쁜 사람이에요”라고 인터뷰했고, 이 과정에서 MBC는 임의로 ‘동생이 사고 쳐서 (구치소) 들어간 걸 자랑이라고 말하던가요?’라는 자막을 삽입했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개인의 과거 형사 구속 여부는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로서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방송사업자가 임의로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국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존재하는 나라다. 재판부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을 인정해 MBC에 700만 원 손해배상판결을 내렸다. 정정보도 청구의 경우 보도의 공익성과 상당성을 인정해 기각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폐지됐다.

6. ‘노룩 취재’의 결말 - 2015년 MBN·서울신문·동아닷컴 

MBN·서울신문·동아닷컴은 2015년 10월22일 한 교회에서 ‘두 목사가 서로를 흉기로 찌르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A목사와 B목사가 등장하는데, 사실 A목사는 B목사를 칼로 찌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없던 해당 매체들은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당시 사건을 묘사해 허위사실을 적시했다.  

당시 MBN과 서울신문 등은 해당 사건을 보도하며 “B는 ○○교회 담임목사 A를 흉기로 수차례 찔렀고, A는 B가 들고 있던 흉기를 빼앗아 다시 B를 수차례 찔렀다”고 단정했다. 기사 제목도 ‘목사끼리 벌어진 칼부림 사건’으로 단정적이었다.

 

▲ 서울신문 온라인 보도 갈무리
▲ 서울신문 온라인 보도 갈무리
 

그러나 검찰은 사건 당시 녹음내용 등을 근거로 B가 칼로 자해한 것이고 A는 B를 제지했을 뿐 칼로 찌른 적이 없다고 판단하고 A가 B를 칼로 찌른 혐의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이에 A목사가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MBN이 400만 원, 서울신문이 100만 원, 동아닷컴이 200만 원을 배상하게 됐다. ‘노룩 취재’의 결말이다.

 

이 중 동아닷컴은 억울했다. 당시 기사는 민영뉴스통신사 뉴스1으로부터 기사를 제공받아 송고했던 것. 하지만 재판부는 “동아닷컴이 뉴스1으로부터 기사를 전달받아 게재했더라도 마치 동아닷컴 소속 기자가 직접 취재한 것처럼 보도하면서 스스로 사실 확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허위사실을 적시한 기사를 게재해 A씨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7. 음주운전과 무면허운전 - 2017년 충청투데이  

충청투데이 B기자는 2017년 6월1일자로 ‘서산시의회 A의원, 무면허 운전 적발 물의’란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다음날 편집부 편집으로 ‘서산시의회 A의원 음주운전 물의’로 기사 제목이 바뀐 채 출고됐다. A의원은 무면허 운전으로 단속됐을 뿐 음주운전은 한 적이 없다며 손해배상을 주장했다.

 

▲ 충청투데이 온라인 보도 갈무리
▲ 충청투데이 온라인 보도 갈무리
 

재판부는 명예훼손을 인정해 300만 원 배상판결을 냈다. 재판부는 “B기자가 진실한 내용으로 기사를 작성해 송고한 사실 등에 비춰볼 때 기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송고 당시까지는 문제가 없는 기사를 썼기 때문에 기자에겐 책임이 없다는 판결로, 결국 이 사건은 회사만 배상액을 물게 됐다.

 

해당 시의원은 왜 무면허 운전을 했을까. 그는 2016년 7월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됐다. 재판부는 “독자들은 A의원이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다시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어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켰다”고 판단했다. 충청투데이는 ‘음주운전’을 곧바로 ‘무면허운전’으로 바로잡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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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발길 이어진 故노회찬 의원 빈소 “시대를 선구한 진보정치의 상징”

정치 인사, 프로그램 출연진, 노조 조합원, 일반 시민 등 늦은 시간까지 조문 행렬 이어져

김도희 수습기자
발행 2018-07-23 22:42:46
수정 2018-07-23 22:42:46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가 마련된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헌화를 하며 오열하고 있다.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가 마련된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헌화를 하며 오열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23일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늦은 시간까지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고인과 인연이 있는 이들은 갑작스레 가버린 고인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노 원내대표와 경기고등학교 동창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빈소를 찾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고인과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에 반대해 민주화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노 원내대표에 대해 “누구보다도 칼날 같은 자기검열을 일생동안 했던 사람”이지만 ”타인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너그러운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마지막까지 저의 정치적 스승이자 정치적 기준점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어렸을 적부터 좋은 세상을 같이 만들자고 했던 그 믿음을 노 원내대표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년 전 노 원내대표가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일 때 인연이 있다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정치하는 저희들은 같은 또래”라고 언급했다.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면서도 “고인께서 제도 정치권에 처음 오신 게 김대중 총재님하고 헤어졌던 민주당에 와서 처음 정치를 시작했다”며 고인과의 만남을 회상했다.

23일 오후 故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여야 원내대표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장병완 민주평화당 원내대표.
23일 오후 故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여야 원내대표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장병완 민주평화당 원내대표.ⓒ정의철 기자

노 원내대표와 함께 3박 5일간의 방미 일정을 마치고 22일 귀국한 4당 원내대표단도 함께 빈소를 방문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조문 후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비보에 “말을 잇지 못할 충격”이라고 한 김 원내대표는 “노동운동 동지로서, 특히 그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와 국익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에서 최선을 다하신 고인의 모습을 우리 모두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노 원내대표와의 마지막 시간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정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저께 밤에는 공식 일정 18개를 다 마치고 난 이후에 그 안도감을 가지고 우리가 워싱턴에서 마지막 이별주를 기울였다”고 덧붙였다.

23일 오후 故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여야 원내대표들이 조문을 마친 가운데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23일 오후 故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여야 원내대표들이 조문을 마친 가운데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정의철 기자
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투신 사망한 23일 오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눈물을 흘리며 빈소를 나서고 있다.
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투신 사망한 23일 오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눈물을 흘리며 빈소를 나서고 있다.ⓒ정의철 기자

박수현 비서실장, 유인태 사무총장과 함께 방문한 문희상 국회의장은 “노 원내대표는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다”며 “(노 원내대표는) 정치 본질을 늘 안 가진 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과 의원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과 의원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 송인배 정무비서관, 박상기 법무부 장관 외에 박원순 서울시장, 우원식 민주당 의원,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이용주 민주평화당 원내대변인 등 다수 동료 의원들도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놓여 있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놓여 있다.ⓒ정의철 기자

문재인 대통령, 이낙연 총리, 김명수 대법원장 등은 화환을 전했다.

JTBC ‘썰전’을 통해 인연을 맺은 방송인 김구라, 박형준 동아대학교 교수 등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과 알고 지낸 세월이 30년 이상이라는 박 교수는 “평생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 그렇게 깨끗하게 사신 분이 없다고 저는 생각한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한 노 원내대표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가치 정치를 해온 몇 안 되는 분”이라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의미롭다고 생각하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심으로 정치를 해오신 분이다. 자기 가치에 안 맞는 것을 못 견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빈소에 머문 김구라는 취재진에게 말을 아낀 채 식장을 떠났다.

23일 오후 故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조문객들이 줄서고 있다.
23일 오후 故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조문객들이 줄서고 있다.ⓒ정의철 기자

6시부터 일반인 조문객의 행렬도 이어졌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무지개 표시가 새겨진 옷을 입은 시민, 노조 조끼를 입고 온 조합원, 휠체어를 타고 온 시민 등 많은 사람이 노 원내대표의 빈소를 방문했다. 평소 고인의 정치 지향에 자주 언급된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눈물을 흘렸고 침묵을 유지했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은 이날 오후 9시 55분 추가 브리핑을 통해 앞서 발표한 이정미 의원이 상임장례위원장을 맡은 것과 더불어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유시민 작가, 심상정 의원, 김세균 전 정의당 공동대표 등이 결정됐다고 알렸다. 이 중 심 의원이 호상을 맡는다. 또한 노 원내대표의 장례위원을 수요일 밤까지 제한 없이 공개 모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정의철 기자

정의당은 27일 오전 9시 노 원내대표 발인 후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당사를 방문하는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동일 10시엔 국회에서 국회장으로 영결식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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