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세종대왕 ‘외에’ 한글을 빛낸 5명

 

등록 :2017-10-08 09:19수정 :2017-10-08 10:26

 

한글 점자 만든 ‘박두성’부터 대표 글꼴 만들어낸 ‘최정호’까지

 

아직도 ‘한글’하면 세종대왕만 떠올리시나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뜻을 이어 한글을 지키고 가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571돌을 한글날을 맞아 누구보다 한글을 사랑하고 아낀, 한글대표선수 5명을 소개합니다. 한글날 주인공은 나야 나!

 

 

 

■ ‘기역, 니은, 디귿, 리을’ 한글의 이름을 만든 동시 통역사 ‘최세진’

 

최세진.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최세진.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안녕하세요.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며 동시 통역사를 한 최세진입니다.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통역 일을 하게 됐죠. 2017년 한국에도 중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중국어 번역과 통역’하면 한때 제가 조선에선 최고로 꼽혔는데요∼∧∧ (흠흠) 중국어 실력 덕분에 중인 출신임에도 양반들도 하기 힘들다는 정2품 벼슬까지 지내기도 했죠∼

 

 

전 후배 통역사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곤 했어요∼‘노걸대’란 교재를 썼는데요. 고려 상인이 특산물을 중국에 가져가서 팔고, 또 중국의 특산물을 사서 귀국할 때까지 이야기를 담은 중국어 회화책이었습니다. ‘역관들을 위한 실용 중국어 회화’인 셈이죠. 근데 후배들이 발음을 잘 따라 읽지 못하더라고요. 아시죠? 중국어는 성조도 있고 많이 복잡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쉽게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어 교재에 한글로 음을 달면 어떨까?’ 결국 몇 달 동안 ‘노걸대’ 번역판을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반응은 어땠느냐고요? 당연히 좋았죠∼∧∧ 이 번역판 덕에 아들도 쉽게 중국어를 배우더군요. 덕분에 전 승진도 하고요.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런데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이웃에 사는 통역사가 하루는 절 찾아와 “‘ㄱ,ㄴ,ㄷ,ㅏ,ㅑ’와 같은 초성과 중성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한글 기본 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자료마다 자음을 부르는 이름은 가지각색이었죠. ‘자음과 모음의 표준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날부터 글자 모양도 살피고, 소리를 내 발음도 해봤죠. 결국 가장 간편하게 발음할 수 있는 모음 ‘이’와 ‘으’를 넣어 자음의 이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기윽’(기역), ‘니은’, ‘디읃’(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읏’(시옷) 이런 식으로요∼자음과 모음의 차례도 다시 정리했습니다. 첫소리와 끝소리에 모두 쓰이는 사용빈도가 높은 자음부터 앞세워 놓는 방식으로 배열했죠. 모음은 입을 벌리는 순서에 따라, 수직 글자를 먼저 배열하기로 했어요.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이런 노래도 있다면서요? 다 제 덕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하∧∧

 

한자에 한글로 음과 뜻을 단 ’훈몽자회’ 영인본. 창비교육 제공
한자에 한글로 음과 뜻을 단 ’훈몽자회’ 영인본. 창비교육 제공

 

■ 최초의 한글 백과사전으로 여성들을 도운 만물박사 ‘빙허각 이씨’

 

빙허각 이씨.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빙허각 이씨.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안녕∼나는 빙허각 이씨에요∼여성들을 위한 한글 백과사전 ‘규합총서’를 만들었죠. 시동생 서유구가 한문으로 백과사전을 만드는 걸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같은 아낙들이 꼭 알아야 할 지식도 많은데 어려운 한문으로 돼 있으니 쉽게 읽을 수가 없겠구나” 싶었죠. 저야 한문을 아니까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한문을 배우는 여성들이 많이 없었거든요.

 

 

결국 한글로 된 ‘생활 백과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딸과 며느리들한테 전하려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써놓기도 했거든요. 남편 서유본도 적극 돕겠다고 나섰어요 ∧∧ 같이 자료를 찾고, 책을 읽고, 글을 썼죠. 사전을 펴내는 데만 힘을 쓰도록 남편은 집안일도 종종 거들어주곤 했어요∼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렇게 1809년 생활 백과사전 ‘규합총서’가 탄생했습니다! 최초의 한글 백과사전입니다. 소식을 듣고 동네 아낙들이 집 마당에 가득 모였어요∼옆 마을에서도, 뒷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달려와 ‘규합총서’를 살펴봤죠.

 

 

“남성 양반님들이 쓴 책들은 모두 한문이라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말짱 도루묵이죠.” “빙허각 마님이야말로 남성 양반님 천만 명 몫을 하셨구먼요∼이 언문 생활 백과사전으로 우리 민초들도 살리고 우리 글자도 살리고요.”

 

 

아낙들이 너도나도 기뻐하고 좋아해 주니 그동안 고생한 것도 다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식을 남성들만 읽는 한문책에 가둘 이유가 있나요?

 

 

‘규합총서’ 모습. 창비교육 제공
‘규합총서’ 모습. 창비교육 제공
‘규합총서’ 표지와 차례. 국립중앙도서관·창비교육 제공
‘규합총서’ 표지와 차례. 국립중앙도서관·창비교육 제공

 

■ 한글 요리책으로 사람을 살린 살림의 고수 ‘장계향’

 

장계향.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장계향.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난 경북 안동에 사는 장계향이라고 해요∼보통 ‘장씨 부인’이라고도 불러.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 디미방’을 펴냈지. 아이고∼일흔이 넘은 나이에 매일 촛불을 밝히고 글을 쓰느라 고생 좀 했어∼1600년대 경상도 양반집에서 만들어 먹던 음식 요리법, 발효식품을 만드는 법, 식품 보관법 등을 자세히 적어놨지. 주로 양반집 요리긴 하지만 국수, 만두, 떡 등 우리 토속 재료를 활용해 만들 수 있는 음식 146가지를 소개해놨어. 2017년엔 ‘백선생’이 그렇게 유명하다며? 여기선 ‘장선생’으로 통해∼∧∧

 

 

요리책을 만든 이유는 별거 아니야. 아니 하루는 이웃집 아낙이 숭어 한 마리를 들고 찾아오더라고. “이걸 어찌 먹어야 할깝쇼?”물었지. 좋은 음식 재료가 생겨도 제대로 요리를 하지 못해서 재료를 버리는 게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요리법을 알려줬더니 그 아낙이 아주 고마워했어.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또 어떤 날엔 동네 젊은 새댁이 글쎄 시어머니에게 왜 반찬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냐고 된통 구박을 당하고 있는 거야∼안쓰럽더라고. 그때 생각이 났지. “한글로 요리책을 펴내면 한글을 아는 여성이 책만 봐도 쉽게 음식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어. 딸과 며느리가 ‘음식 디미방’의 잡채 만드는 법을 보고 요긴하게 활용하는 것을 보니 뿌듯하더라고. ’찰랑찰랑’, ’질벅질벅’ 같은 생생한 한글을 사용해 설명하니 실생활에서 보고 써먹기 쉬울 수밖에 ∧∧ 원본을 잘 간직할 수 있도록 필요한 사람은 베껴서 서로 돌려보도록 했지∼수많은 요리책의 원조랄까?

 

’음식 디미방’에 나온 요리법. ‘만두법’ 등이 적혀있다. 창비교육 제공
’음식 디미방’에 나온 요리법. ‘만두법’ 등이 적혀있다. 창비교육 제공

 

■ 한글을 여섯 개의 점으로 표현한 길잡이 ‘박두성’

 

박두성.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박두성.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안녕하시오. 나는 박두성이라고 하오. 1913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제생원에서 맹아부 교사로 일했소. 앞이 안 보이는 아이들에게 일본 점자를 가르치면서 틈틈이 주산과 우리말, 수저 잡는 법 등을 알려줬소. 근데 쉽지 않더군. 학생들이 일본 점자책으로 배우면서 일본어 수업을 들으니 말이오. 쉬운 용어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걸 보니 안타까웠소. 한글 점자가 있으면 쉽게 배울 수 있을 텐데 싶었지.

 

 

그땐 3·1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던 시기였소. 어느 날 일본인 교사가 “앞으로는 우리 학교에서도 조선어를 가르칠 수 없소!”라는 거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눈이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어두워서 되겠소? 단지 눈이 멀었다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소? 눈 밝은 사람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글을 읽고 쓰겠지만 눈먼 사람에게 조선말까지 빼앗으면 저 아이들은 부모와 형제자매와 어떻게 이야기를 나눈답니까? 저 아이들에게 장님에 벙어리까지 되라는 말이오?”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 사람은 끽소리도 못하더군. 결심했소. 한글 점자를 만들어 눈먼 사람들도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말이오. 결국 1923년 맹아부 제자들과 함께 ‘조선어 점자 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만들고 한글 점자 연구에 몰두했지. 3년을 꼬박 연구한 끝에 여섯개의 점으로 이뤄진 한글 점자 ‘훈맹정음’이 탄생했소.

 

 

“누구든지 배워야 하지만 눈이 먼 사람은 멀쩡한 사람보다 더 배워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었소. 배우고 싶어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점자책을 보내줬지. 종이 구하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라 관공서나 은행에서 누렇게 바랜 문서들을 얻어왔소.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귀여운 우리 딸도 날 도와주더군∼∧∧ 그렇게 점자로 된 교육책이나 소설, 교양책도 펴냈지. 성경도 점자로 옮겼다오. 2017년에도 내가 만든 점자를 잘 쓰고 있나 궁금하오∼!

 

 

‘훈맹정음’의 모습. 창비교육 제공
‘훈맹정음’의 모습. 창비교육 제공

 

■ 글씨에 한땀 한땀 혼을 넣은 글꼴 장인 ‘최정호’

 

최정호.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최정호.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안녕하세요. 최정호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니 쑥스럽네요. 2017년에 사는 분들이 ‘굴림체’를 쓴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진지하게 이야기할 땐 ‘궁서체’를 쓰신다고도 들었습니다. 하하. 사실 그 두 글꼴을 만든 사람이 바로 접니다. ∧∧ 굴림체와 궁서체를 포함해 공작체, 그래픽체, MS명조 등 30여가지 한글 글꼴을 만들었습니다.

 

 

전 어렸을 때부터 글씨 쓰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글씨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답니다. 보통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따귀를 맞았어요. 글씨 숙제를 검사하는 날이었는데, 제가 쓴 글씨를 보고 부모님이 대신 써주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결국 전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글씨를 써서 보여주고 나서야 억울함을 풀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한글 글꼴에 관심을 깊게 가지게 됐어요. 낮에는 인쇄소 일을 하고 밤에는 미술학원에 다녔죠. 가끔 일본에 사는 한국인을 위해 영화광고나 포스터, 간판 등에 들어가는 ‘선전 글씨’를 써주기도 했어요. 인쇄기술을 배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리 인쇄기술이 뛰어나더라도 글꼴이 아름답지 않으면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없구나’라고 말이죠.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그림 이수진. 창비교육 제공

 

혹시 일본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라고 아시나요? 글쎄, 하루는 길을 걷다가 ‘시세이도’ 광고에 나오는 글자가 아름다워서 멈춰 섰어요. 글자도 예술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 세계인이 감탄할 수 있는 한글 글꼴을 만드는 걸 목표로 꿈을 키웠습니다. 처음엔 일본 글꼴을 바탕으로 한글 글꼴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고유의 글꼴이 없는 점이 아쉽더라고요. 고민 끝에 탄생한 게 바로 궁서체입니다. 1988년엔 제 이름을 딴 ‘최정호체’도 나왔습니다. ∧∧

 

 

한글 글꼴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어찌나 막막하던지요. 처음엔 ‘훈민정음’의 글자 형태를 꼼꼼히 살폈죠. 어렵게 만들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 활자는 용광로에 던져버리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글꼴에 매달렸냐고요? 전 글자가 사상이나 뜻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이 피로를 느끼지 않도록 읽기 쉬운 모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굴림체와 궁서체 모두 유용하게 써주세요∼

 

 

균형미와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최정호체. 창비교육 제공
균형미와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최정호체. 창비교육 제공

 

*위 내용은 한글학자 김슬옹과 시인 김응이 쓴 ‘한글 대표 선수 10+9’ (창비교육)를 토대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한글 대표 선수 10+9> 창비교육 제공
<한글 대표 선수 10+9> 창비교육 제공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813581.html?_fr=mt1#csidxbed9573fb369373ad03680651a97b7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제가 한반도 근해에서 학살한 고래만 8천여 마리

 

[고래의 섬, 흑산도 ⑥] 흑산도에 ‘포경근거지’ 설치한 까닭

17.10.07 12:01l최종 업데이트 17.10.07 12:01l

 

사람들은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가 포획한 귀신고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조선인들.
▲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가 포획한 귀신고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조선인들.
ⓒ 고래박물관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일제, 한반도 근해에서 대형 고래 약 8천 마리 이상 학살

새로운 세기, 20세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조선(대한제국)과 한반도 근해의 고래들에겐 참혹한 세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1904년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충돌을 일삼던 일본과 러시아는 끝내 전쟁을 시작하고 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9월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조선(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한다.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에서의 고래를 포획하는 '포경 독점권'은 실질적으로 일제가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1910년, 일제가 강제로 병합한 것은 대한제국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1년 6월 3일 어업령(제령 제6호)과 어업령시행규칙 및 어업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67, 68호)을 공포한다.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는 '허가어업'이 되었다. 물론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는 포경회사는 일본 포경회사들뿐이었다.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은 일본 포경회사들의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잡이는 포획(捕獲)을 넘어선 '학살(虐殺)'이었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에 의해 학살당한 대형 고래는 기록된 것으로만 약 8259마리에 이른다. 무려 1만여 마리의 대형 고래가 일제에 한반도 근해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1908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이 편찬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러일 전쟁 전후인 1903년부터 1907년까지 5년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당한 고래는 약 1612마리에 이른다. 모두 일본 포경회사에 의해서였다. 1900년대 초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업을 했던 일본 3대 포경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 일한포경합자회사였다. 

세 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포획고를 올린 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로 이들은 5년 동안 1200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1904년부터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를 포획한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는 4년 동안 377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1906년에 세 회사 중 가장 늦게 한반도 근해 포경에 뛰어든 일한포경합자회사도 2년 동안 35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일본포경협회가 1911년부터 1944년까지 자체 집계해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된 고래는 무려 약 6647마리에 이른다. 특히 대형 고래에 대한 포획이 심각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포경회사는 참고래(긴수염고래) 5166마리, 귀신고래 1313마리,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 29마리, 보리고래 5마리, 향유고래 3마리, 북방긴수염고래 1마리를 포획했다. 돌고래 역시 이 기간 동안 130마리가 일본 포경선에 의해 포획되었다. 이 돌고래는 혹등고래를 가리킨다. 당시엔 혹등고래를 돌고래로 불렀다.

물론 이 수치는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1908년부터 1910년 이 기간에도 일본 포경회사들은 쉬지 않고 고래를 포획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 포경회사들이 까지 남기지 않은 불법 포획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일제의 고래 학살은 더욱 극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 포획을 주도적으로 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러일전쟁 직후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은 고래 포획고를 올렸던 동양어업주식회사가 1909년 5월 일제의 이른바 '전국 포경회사 합동운동'으로 동양포경주식회사로 거듭난 것이다. 

오사카에 본점을 둔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10년 1월 거제도에 포경지 허가를 받아 한반도 근해 포경을 시작한다. 그리고 1913년에는 울산, 거제도, 통천 근해, 1914년에는 울산, 거제, 강원도 통천군, 함경도 북청군으로, 1916년에는 전라도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포경 조업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후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34년 7월 1일 일본수산주식회사에 합병되어 해산되고, 일체의 자산과 사업은 일본수산주식회사의 자회사인 일본포경주식회사에 승계되었다. 일본수산주식회사는 다시 자회사인 1936년 9월 일본포경주식회사 등과 합병하고 1937년 3월에는 일본식료공업주식회사를 합병하여 4월 1일 회사 이름을 일본수산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장생포는 일본 포경회사들의 대표적인 포경근거지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 포경선들 모습.
▲  장생포는 일본 포경회사들의 대표적인 포경근거지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 포경선들 모습.
ⓒ 고래박물관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일제, 동해에서 포경 쇠퇴하자 서해와 남해로 사업장 확대

한편 1939년 현재 일본수산주식회사의 포경 근거지는 모두 33곳이었고, 이 가운데 한반도에 설치된 포경근거지는 울산 장생포, 제주도 서귀포, 전남 대흑산도, 황해도 대청도 등 네 곳에 있었다.

한반도 근해 포경사에서 마침내 흑산도(대흑산도)가 등장한다. 일본 포경회사인 동양포경주식회사가 포경 조업 영역을 1916년에 전라도 대흑산도까지 넓혔다는 기록과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승계한 일본수산주식회사가 1939년 현재 대흑산도에 포경근거지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동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됐다는 것은 일제의 포경 영역이 그 무게 중심을 동해에서 대흑산도 근해 등으로 포경 중심지를 이동했거나 포경의 영역을 확대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반도 포경기지 변천사를 연구해온 김백영 박사는  일제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 동해에서의 포경이 쇠퇴하는 추세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제는 1900년 초부터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을 독점했고, 그 주 사업장은 동해였다. 하지만 10년 넘게 지속된 동해에서의 고래 남획은 동해 포경의 쇠퇴로 이어졌고, 그 활로는 포경 영역을 남해와 서해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즉 동해에서의 포경 실적 쇠퇴는 1914년부터 일제로 하여금 포경사업장을 서해와 남해로 확장하게 만들었다. 특히 1916년부터는 포경 대상지를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확장하게 만들었고, 고래 해체 작업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계적인 기반 시설인 '포경근거지'를 대흑산도에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구병 교수가 정리한 '1917년부터 1934년까지 각 도별 포경선 수와 포획 두수'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한다. 동해에서만 활동하던 포경선들이 서해 (황해도 52척, 전라남도 95척)와 남해(경상남도 150척)로 이 시기에 급격하게 진출한다. 동해(경상북도 36척, 강원도 54척, 함경북도 50척)에서 활동하는 포경선의 수를 크게 앞지른 것이다. 

고래 포획고 역시 이 시기에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 포경회사가 1917∼1934년까지 경상북도, 황해도, 함경북도 등 동해에서 올린 전체 포획 두수는 151두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황해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서해와 남해에서 포획 두수는 무려 2854두였다. 동해의 포획고보다 약 18배나 많은 포획고다.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이 대형 고래를 포획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동양포경주식회사는 대형 고래 해체 장면을 담은 기념 우편엽서를 만들 정도였다.
▲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이 대형 고래를 포획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동양포경주식회사는 대형 고래 해체 장면을 담은 기념 우편엽서를 만들 정도였다.
ⓒ 일본포경협회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흑산바다는 따뜻하고 먹잇감 풍부한 고래들의 고향이었다

대상지를 더 좁혀보면 이 기간 동안 경상북도 근해에서 활동한 포경선은 모두 36척으로, 47두의 고래를 잡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전라남도 근해에서는 95척의 포경선이, 고래 1095마리를 포획했다. 전라남도 근해에는 이 시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 포경선에 의해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당한 고래의 수는 흑산바다에 동해 못지않게 많은 고래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슬프게 증빙한다.  

조선수산회가 집계한 '1930년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한국 근해 포경 실적' 역시 이를 증빙한다. 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 한 해 동안 울산 사업장에선 긴수염고래 55두와 귀신고래 10두 등 모두 65두를 포획했다. 하지만 남해와 서해에 걸쳐진 제주도 사업장(31두)과 대흑산도 사업장(46두), 대청도 사업장(85두)에선 대왕고래, 긴수염고래(참고래), 혹등고래 등 모두 162두를 포획했다. 동해보다 서해와 남해에서 약 2.5배 이상 더 포획한 것이다. 이 시기 한반도 동해에서의 포경이 쇠퇴하고 서해와 남해에서의 고래 포획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포경회사들이 포경근거지를 동해에서 흑산도로까지 확장할 만큼 대형고래가 많이 살고 있었던 흑산바다. 흑산바다에 큰 고래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까닭은 흑산바다가 고래들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흑산도 근해는 수심 100m 안팎으로, 겨울철에도 평균수온이 섭씨 7도∼8도로 유지한다. 이 온도는 귀신고래의 회유 동선에 있는 사할린해나 오오츠크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따뜻한 온도다. 봄이 되면 수온은 더 올라가니 고래들에겐 새끼를 낳거나 어린 새끼를 키우기엔 더없이 아늑한 바다였던 셈이다.

또한 흑산바다에는 고래의 먹이가 풍부했다. 흑산도는 조기들의 산란장과 월동장으로 이동하는 길목 한가운데 있다. 조기는 서해에서 산란해 가을에 월동장인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로 회귀하는 회유성 어종이다. 조기가 이동하는 곳엔 멸치와 새우, 청어, 꽁치 등이 풍부하다. 이들은 고래가 매우 좋아하는 먹잇감들이다. 

일제가 포경근거지를 동해에서 서해와 남해로 확장했던 곳이 흑산도와 제주도 서귀포, 황해도 대청도였다. 이곳들은 모두 조기 회유 동선과 일치한다. 이런 까닭에 더글라스 칼튼 아브람스(Douglas Carlton Abrams)는 <고래의 눈 Eye of the Whale>에서 "북서태평양 귀신고래 등은 동중국해 하이난의 얕은 바다에서 새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포경사를 탐구해온 일부 연구자들은 더글라스의 주장을 이어받아 "흑산바다 역시 하이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조기 회유 길목에 있는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았던 곳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동안 생태 추적 조사가 꼼꼼하게 진행되지 못한 상태에서 "흑산바다가 귀신고래의 고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흑산바다는, 참고래·대왕고래·혹등고래·귀신고래 등 대형 고래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생명의 고향, 유랑의 거처'였음은 분명하다.  
 

 흑산도 근해는 큰 고래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풍성했다. 이를 확인해주는 조기 회유도.
▲  흑산도 근해는 큰 고래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풍성했다. 이를 확인해주는 조기 회유도.
ⓒ 나증만, 조경만, 김준 등 공저 <서해와 조기> 67p

관련사진보기


# 다음 기사 '조선총독부가 직접 흑산도에 직원 파견한 까닭' 곧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제 논문 ‘일제강점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태그:#고래#장생포#흑산도#포경#일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조선학교 차별, 식민지 교육은 진행형"

 재일 조선학교 차별반대, 사노 미치오 호센대 교수
도쿄=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7.10.06  18:56:46
페이스북 트위터
   
▲ 사노 미치오 일본 호센대 교수는 6일 오후 일본 도쿄 문부과학성 인근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재일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은 곧 식민지 교육의 현재진행형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식민지 교육은 1945년에 끝나지 않았다.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이 그 증거이다."

재일 조선학교 무상화 교육을 거부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재판이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 7월 히로시마에서 패소했지만 오사카에서 승소해 재일 조선학교 관계자들과 지지자들은 고무됐다. 하지만 지난 9월 13일 도쿄지방법원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조선학교 무상화를 위한 싸움이 끝을 모르는 상황. 식민지 교육이 현재 진행형이기에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차별하는 것이라고 사노 미치오(佐野通夫) 일본 호센대 교수는 지적했다.

대학시절부터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사노 미치오 교수는 6일 오후 일본 도쿄 문부과학성 인근 찻집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식민지 교육은 1945년에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은 사노 교수는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은 제대로 된 식민지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데서 원인을 찾았다.

   
▲ 사노 미치오 교수.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사노 교수는 "재일 한국인이든 재일 조선인이든, 그들은 식민지 시대처럼 학교에 가면 한국이름을 쓰지 못한다. 일본 이름으로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왕따당한다"며 "이것은 식민지 시대와 똑같다.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배 당시 조선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지금이라고 없는가? 아직도 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후진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물론 한류때문에 인식이 좋아지긴 했다. 북한에 대한 차별도 역시 조선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한에 대해 조금 좋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 밑에는 차별의식이 깔려있다."

비단 조선학교 만의 문제는 아니라고도 사노 교수는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브라질 노동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브라질학교'가 세워졌다. 그런데 '브라질학교'도 조선학교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조선학교와 달리 고등학교 과정을 인정해주지만,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 이를 두고 사노 교수는 '새로운 경제 식민지배'라고 표현했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 사회가 식민지 청산을 제대로 한 경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 인식을 70년째 그대로 이어오고 있고, 이는 새로운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조선학교를 북한과 연결하며 차별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일본 사회는 무서운 상황"이라며 "북한이 미사일을 시험발사해도 그건 일본과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 영공도 아니다. 그냥 태평양에 떨어졌다. 그런데 경보를 울리고 학생들을 책상 밑에 숨기고 있다. 이상한 사회이다. 아베가 큰일이 나 듯이 호들갑을 떤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북한은 일본 경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제재를 해도 북한이나 일본이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서 "오히려 재일조선인들이 친척과 연락을 못하는 피해를 입고 있다. 그걸 연결시키면서 '북한은 나쁜 나라다, 무서운 나라'라고 하면서 국민들을 의식화하기 위해 '조선학교를 나쁜 학교'라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 사노 교수는 6일 오후 도쿄 문부과학성 앞에서 열린 '조선학교 무상화를 위한 금요행동'에 참석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수많은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일본 사회에서 조선학교 차별을 없애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조선학교 무상화 관련 재판이 일본 내 지역별로 다르게 판결나듯.

그럼에도, 사노 교수는 조선학교 차별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조선학교를 알리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9월 도쿄지법에서 패소했지만, 항소심에서는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도 갖고 있다. "식민지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그는 이날도 매주 금요일 문부과학성에 열리는 '조선학교 무상화를 위한 금요행동'에 나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헬조선 청년들, ‘월세 10만원’에 도전하다

 
박소영 기자 psy0711@vop.co.kr
발행 2017-10-06 09:27:15
수정 2017-10-06 13:29:02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대학가 원룸
대학가 원룸ⓒ제공 : 뉴시스
 

1인가구 520만 시대. 높은 월세 장벽에 시달리는 청년 1인가구 수는 그 중 190만 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혼자 사는 청년들 대다수는 목돈이 드는 전세보다는 보증금이 있는 월세를 살고 있다. 1인 청년가구의 평균 월세는 관리비를 제외하고도 34만원. 이마저도 대학가 근처 원룸은 평균 월세가 49만원으로 더 비싸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청년 주거정책을 제안한 이들이 있다. 민중연합당 흙수저당 산하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월 임대료의 80% 또는 최대 30만원까지 지원해 청년들이 실제로 부담하는 월세를 10만원 수준으로 낮추는 조례발의 운동에 나섰다. 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손솔 운동본부장을 지난 27일 만났다.

기존 청년주거정책 많지만 효과는 '글쎄'

운동본부가 추진하는 ‘월세10만원’ 청년주거비 지원조례는 20세 이상 39세 이하 무주택자 청년 중 50㎡(15평) 이하의 최저주거기준을 충족하는 주택에 사는 1인 청년가구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소득분위와 같은 경제력을 자격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 운동본부장은 청년주거문제에 대해 주목하게 된 이유에 대해 “주거 문제가 청년의 숨통을 트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면서 “청년들이 월세 벌려고 알바를 2~3개 하고, 진로나 학업에 시간도 들이고 싶은데 발목 잡히는 게 너무 많은 현실”이라고 말했다.

1인 청년가구는 전체 1인가구 비율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지원정책은 미흡한 상황이다. 게다가 기존에 있는 청년주거지원 정책은 대학생·사회초년생·신혼부부에 집중되어 있어 자격이 안 되거나 대출 금액 지원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거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운동본부의 판단이다.

또한 청년들은 높은 월세를 감당하기 버거워 싼 집을 찾다보니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야 해 ‘주거 난민’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청년 빈곤 해소를 위한 맞춤형 주거지원 정책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 1인가구 중 최저주거수준 36㎡(11평)미달인 주택에 생활하면서 임대료가 가처분소득 20%를 넘는 주거빈곤가구가 47.03%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저는 몇 해 전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 생각하면 너무나 아찔합니다. 지리산 산행 다녀와서 늦은 밤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은 좁고 창문이 없어서 환기가 잘되지 않았고 평소에 습해서 벽에 곰팡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방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 바닥을 보는데 물이 흥건했습니다. 휴대전화 불빛으로 방을 비춰봤는데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제 방 천장이 무너져 내려있던 것입니다. 제가 집에서 자고 있었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난달 12일 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당시 소개된 월세방 피해 사례)

운동본부는 주거비를 지원받아도 집주인이 맘대로 월세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월세제도’ 도입 등과 같은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에 따르면 서울시 청년 1인가구 수는 약 41만 가구로 이중 60%가 지원 대상에 해당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밖에도 주거비 지원 외에 청년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청년주거문제전담기구를 설립하고, ‘주거 코디네이터’와 같은 주거 복지 전문가를 양성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25일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가 서울시청에 제출한 조례안
25일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가 서울시청에 제출한 조례안ⓒ제공 :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

‘청년 월세 10만원’ 현실이 될 수 있다

손 운동본부장은 ‘청년 월세10만원’은 결코 꿈이 아니‘라고 말했다. 기존에 나와 있는 청년주거지원정책 제안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산이 많이 드는 정책인 건 맞다”면서 “하지만 이것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으면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청년 주거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겠다는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고, 주민들의 발의서명이 이어진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25일 청년 월세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서울시청에 제출했다. 이후 조례 발의대표자로 지정이 되면 향후 6개월간 서울시 유권자 인구의 1%, 즉 8만 명을 대상으로 조례발의 주민 서명을 받아야 한다. 서명이 제출되면 지방 의회에서 안건으로 제출이 되고 통과시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운동본부는 조례 제정을 목표로 최근 청년 1인가구가 밀집된 대학가 등을 돌며 서명을 받는데 집중하고 있다. 높은 월세 장벽에 공감하는 청년들이 많다보니 자발적으로 서명을 하거나 주위 사람들에게도 서명을 받도록 권하는 경우도 많단다.

현재는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향후 전국적으로 범위를 확대해 나갈 생각이다. 또한 대학가에 높은 월세 지역이 밀집해 있는 만큼 청년단체는 물론 대학 학생회와도 연대 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가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서 청년들로부터 조례 제정 서명을 받고 있다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가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서 청년들로부터 조례 제정 서명을 받고 있다ⓒ제공 : 청년월세10만원운동본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청년 정치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좌담] 우리미래 이성윤, 비례민주주의연대 김푸른, 청년참여연대 김현우
전혁수 기자 | 승인 2017.10.06 12:57[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424개 시민·노동단체가 함께하는 정치개혁 공동행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선거연령 18세 인하 등의 개혁안을 제안하고 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출범했으며 지난 27일 국민의당 정동영 의원의 주도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서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선거제도 개혁 '민정연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청년이 만드는 젊은 국회라는 목소리도 선거제도 개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미디어스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힘쓰고 있는 청년정당 우리미래 이성윤 대표와 비례민주주의연대 김푸른 청년위원장, 청년참여연대 김현우 정치분과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정치개혁 청년행동 출범 기자회견 모습. 김현우 청년참여연대 정치분과장(왼쪽 세 번째), 김푸른 비례민주주의연대 청년위원장(왼쪽 네 번째), 이성윤 우리미래 대표(오른쪽 네 번째). ⓒ미디어스

청년정당 우리미래 이성윤(이하 성윤) : 정치개혁 공동행동이 추구하는 선거제도 개혁 안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함께 청년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주제들도 있다.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나왔던 만 18세 피선거권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청년들과 관계가 많다.

선거제도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서 청년 정치인이 많이 탄생할 수도 있다. 청년 유권자는 전체 유권자의 34%인데, 지금은 국회의원 중에 2030세대는 1%도 안된다. 청년문제는 계속 화두가 되는데 청년 의원은 없다. 평균 55.5세의 남성 중심의 국회가 돌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선거제도를 바꿔 더 많은 청년들이 국회에 진입하게 해야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정치개혁 청년행동이 시작됐다.

청년참여연대 김현우 정치분과장(이하 김현우) :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의회 내 독과점을 타파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제도다. 나는 청년 참여연대에서 활동을 하던 중에 청년세대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개선하려면 청년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기성세대는 청년이 가진 의제를 우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방향성 속에서 청년 시민단체들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의제를 알리는 등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정치개혁 청년행동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18세 선거권, 바쁘니까 나중에?  

비례민주주의연대 김푸른 청년위원장(이하 김푸른) : 정치개혁 청년행동이 만들어진 맥락도 정치개혁 공동행동이 만들어진 맥락과 비슷하다. 각자 자리에서 다양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모인 거다. 그러나 사실 청년에 대한 정책이나 여러 의제들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요원하지 않나. 촛불광장에서 '성평등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구호를 들고 나가고 페미니즘 이슈나 일자리 이슈 등 여러 의제가 있었는데, 실제로 실현된 건 거의 없다. 그래서 이런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의식이 생겼고, 청년 의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물론 언론이 청년에 주목한다는 측면을 고려한 것도 있다.

김현우 : 사실 겉으로 청년정치를 장려한다면서도 실질적으로 정치권 내에서 '과연 청년에 대한 생각을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여러 상황을 비춰봤을 때 정치개혁 청년행동 활동을 하면서 청년들만의 조직을 정치권에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도 있다.

이성윤 : 작년 촛불정국에서 우선 순위는 탄핵이었지만, 뒤에서는 청년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돼야 한다는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당시 정치권에서 만 18세 선거권을 해줄 것처럼 하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조기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바쁘니까 나중에 목소리를 듣겠다"는 식으로 흐지부지됐다. 이런 과정들이 청년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컸다.

또한 현행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조장하고 있다. 겉으로는 5당체제가 만들어져 있지만 나는 지금도 양당제 체제라고 생각한다. 바른정당이 언제 자유한국당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것이고, 국민의당이 그나마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다면 3당이 유지는 되겠지만, 그래도 결국 몇 차례 현행 선거제도로 선거를 치르면 결국 양당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결국 5000만 국민 목소리를 2개의 정당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다. 누군가는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여성, 누군가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당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의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청년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 청년행동이다. 전국 청년네트워크, 민달팽이유니온, 제가 속해 있는 우리미래 등 청년 관련 단체들이 다수 들어와 있는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청년 정치인이 정치권에 들어가야 청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현우 : 그런데 현재 거대양당에는 청년이 들어갈 틈이 없다. 공천 과정을 생각해보면 현재의 지역구 위주의 정치에서는 자본이 부족한 청년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 확대로 청년이 정치권에 들어가고, 청년의 감수성으로 청년의 의제를 풀어줘야 청년들이 바라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청년뿐 아니라 젠더 문제나, 장애인 문제, 중소상공인 등 다양성을 인정받는데 선거제도 개혁이 필수적이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정치개혁청년행동 회원들이 1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피선거권 연령하향 및 청년할당제 입법청원 제출 관련 기자회견을 있다(연합뉴스)

20대, 의회 진출 더 어려워져   

김푸른 : 한국 기득권 정당들의 폐해 중 하나가 정당 민주화가 돼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청년들이 기득권 정당에 들어가면 지역기반이 없이 때문에 공천을 받아 당선될 가능성이 적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가끔 거대정당에서 등장하는 청년 의원들이 과연 그 정당에서 큰 청년이냐는 거다. 우리나라는 선거철만 되면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한다. 그 정당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스웨덴의 경우 32살에 교육부 장관이 된 사례가 있는데, 그 인물의 경우 11살에 입당을 해서 그 정당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리고 19살에 국회의원이 됐고, 32살에 장관이 됐다. 무조건 나이로만 청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청년이 어떤 삶의 비전을 가지고 어떤 정치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천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사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정당 내에서 제도화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김현우 : 청년 정치 교육 등도 함께 이뤄야할 과제다. 정치, 인권, 노동 등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요즘 청년들은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는 대체로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나의 경우에도 책을 읽는 등의 개인 시간을 꿈꾸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다. 그리고 청년들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선거법 개혁을 통해 당사자인 청년이 의회에 들어가고, 청년 정치가 청년의 삶을 바꿔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직업 선택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헌법 15조에는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권리가 없다.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에 입후보 했다가 떨어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삼성에 이력서를 넣어도 그 기업이 나를 원하지 않으면 그 기업은 나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고 싶다. 국민에게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해보고 싶다는 이력서라도 내보고 싶은 것인데, 만 25세 이하의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없다. 결국 성인 남성만 민주주의를 누렸던 고대 아테네의 제한적 민주주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14년 OECD국가들의 만 40세 미만 의원 비율은 평균 19%였다. 그런데 지난 19대 국회에도 우리나라는 민주당 김광진, 장하나 의원 정도 있었을 뿐이다. 19대에 2030은 9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대는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1명 있었다. 과거에도 가능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20대가 의회에 진출하는 게 더 어려워진 느낌이다.

김현우 : 청년들이 기득권 정당에 들어가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식들이 약해지는 경향도 있다. 거대정당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만의 색깔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선거제도 하에서는 더 심화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이게 악순환이 돼 돌아올 것이다.

김푸른 : 나는 청년문제 해결을 복지국가로의 이행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청년 정치인의 세력화는 기득권의 해체라고 본다. 그러니 당연히 기득권 정당에서 청년의 자리가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기득권 정당을 보면 아직까지도 1980년대 문제의식에서 멈춰있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세력이 청년으로 해석이 된다면, 이들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청년할당제와 새누리당의 비례 7번  

이성윤 : 솔직히 말하면 기득권 정당에게 청년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을 때 가장 기대되는 효과가 '인기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당의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정책 선거가 된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는 유명한 사람을 데리고 와야 당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들은 장년층에 비하면 언론 노출도 적고, 가진 경험도 적고, 정당에서 후보로 내놨을 때 당선이 될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보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할당제를 법제화하자는 얘기를 한다. 지난 입법 청원서에도 청년 할당제 권고를 넣었다. 청년들을 3의 배수로 명부에 포함시키는 권고안을 넣으면 여성할당제와 조화될 수 있다. 그런 것이 하나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푸른 :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성할당제와 청년할당제를 같은 불평등 해소의 장치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유보적인 입장이다. 여성과 청년을 동등한 약자로서 놓고 보느냐는 것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정당 내부의 민주화가 이뤄지고, 청년이 정치권에 많아질 때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아직 그려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과거 새누리당에서 비례 7번에 청년을 넣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청년이라는 세대를 단일하게 기성세대와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청년이 청년을 대변했나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따른다. 그런 식이라면 청년 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부분이 생긴다.

이성윤 : 청년들이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이를 이유로 정치권에 나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장기간 정당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정치권에 몸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미래 안에서도 급하게 하지 말고 커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도 청년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면 많은 것이 변할 것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30 유권자가 국민의 30% 이상인데 국회의원 300명 중에 100명만 청년이었다면 대학 등록금 문제가 해결이 안 됐을까. 기숙사 문제가 해결 안 됐을까란 질문을 던져본다. 최근 부산에서 청년 조례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 청년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하더라. 이러한 세세한 것들이 청년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내에서 제대로 철학과 비전을 교육 받은 청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김푸른 : 물론 청년들이 기회를 갖는 것은 필요하다. 청년이 100명이면 달라질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다만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나이로서의 틀을 넘어선 청년이어야 한다고 본다. 정말 기성세대의 정치인들과 동등하게 정치인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2030 세대가 겪는 문제를 청년 문제로 정의하지만, 이것은 청년세대를 넘어서도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그런 문제이기 때문에 빈곤감과 좌절감, 불확실성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기저로서 작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청년 정치인이 정치권에 들어가도 그 사람이 청년들을 대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여성 대통령 후보라고 나갔는데, 심 의원의 정체성은 노동전문가다. 그런 것처럼 꼭 청년들이 청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를 져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 의원들과 시민사회 연대체인 '정치개혁 공동행동'은 지난달 27일 선거제도 개편 추진을 위한 공동 기구 구성 방안 등을 논의했다.(연합뉴스)

지금은 선거법 개혁 불 붙일 때 

이성윤 : 나는 그래서 당사자 정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청년들이 다 해결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탈리아를 보면 차기 총리 물망에 오른 사람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변변한 직업도 가져보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당사자 정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당사자가 아닌 엘리트 중심의 정치가 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더 많은 다양한 세력이 국회에 들어가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가야 한다.

김현우 : 지금까지의 그런 과거 정치사를 돌아보면 결국 양당제를 깨내야 한다. 의회의 다양성을 재고할 시기라고 본다. 우리는 청년이란 담론을 내세우지만 청년뿐만 아니라 모두의 문제다. 청년정치도 일반적이 되려면 다양한 사람이 의회에 진입해야 한다.

김푸른 : 국회의 기득권들이 1980년대 문제의식에 머물러 있어서 한국 사회의 기본방향을 청년 중심으로 가져오는 게 결국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그러기 위해서 선거법 개정안이 필요하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법안 하나 통과시키면 될 일이라고들 하지만 결국 정치권에서만 하는 일이 아니다. 뉴질랜드가 시민사회운동을 통해 선거법 개정에 성공한 사례처럼 우리도 이걸 촛불정국에서의 '박근혜 탄핵'처럼 구호로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공론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윤 : 이런 부분이 지금까지 이슈화가 되지 못한 부분은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누히 얘기하는 거지만 유럽 선진국의 민주주의는 역사가 길다. 이 싸움은 길게 가져가고, 그래서 당장 되지 않더라도 속상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선거법 개혁에 불을 붙일 시기인 것 같다.

김현우 : 실제로 선거제도를 바꾼 나라들을 보면 10년 이상 관련된 운동들이 벌어졌다. 이 활동이 당장 실패하더라도 개헌안에 '비례성 보장' 정도의 문구만 들어가도 작은 변화가 생길 것이란 희망을 걸고 있다.

전혁수 기자  wjsgurtn@naver.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병대가 허용되는 나라, 미국... 이대로라면 참사 재발을 막기 힘들 것

미국이 연이은 총기참사에도 총기규제에 실패하는 이유

민병대가 허용되는 나라, 미국... 이대로라면 참사 재발을 막기 힘들 것

17.10.06 20:56l최종 업데이트 17.10.06 20:56l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15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은 총격범 스티븐 패덕이 자동화기를 쏜 32층 객실의 깨진 창문
▲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15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은 총격범 스티븐 패덕이 자동화기를 쏜 32층 객실의 깨진 창문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지난 1일 저녁, 미국 라스베이거스 중심가인 스트립 지역에서는 컨트리 가수들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10시 8분 경 제이슨 알딘(Jason Aldean)이 공연을 펼치던 중 폭죽소리와 같은 연속된 폭발음이 울렸다. 하지만 폭죽소리가 아닌 총성이었다. 수많은 관중들의 머리 위에 총알이 빗발쳤다. 범인은 콘서트장 바로 옆에 위치한 만달레이 베이 호텔 32층 객실에서 창문을 깨고 총격을 가했다. 한순간에 콘서트 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관중들은 총격을 피해 바닥에 엎드렸지만 오히려 공중에서 날아드는 총알에 더 넓게 노출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59명이 숨지고 527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상자가 600명에 달할 정도로 피해규모가 컸던 것은 범인이 32층 호텔에서 다수의 인파를 향해 총격을 가했기 때문이지만 범행에 사용된 총기의 특성에서도 크게 기인한 바도 크다. 범인이 머물렀던 호텔 객실에서는 20여정이 넘는 총기가 발견되었다. 스나이퍼들이 사용하는 스코프(조준경)도 발견되었다. 특히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1발씩 발사되는 반자동 방식의 총기를 분 당 400~800발의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할 수 있는 범프 스탁(bump-stock)'도 발견되었는데, 피해가 컸던 결정적 이유였다.

최악의 총기참사를 겪은 미국은 슬픔에 잠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참사 현장을 방문해 "나라 전체가 애도한다"며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지도자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이번 기회에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의 총기난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거의 매년 크고 작은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그때마다 슬픔과 애도 그리고 총기규제 주장이 이어진다. 그러나 미국은 반복적으로 총기난사 사건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겪으면서도 총기규제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총기규제의 실패의 원인을 미국총기협회에서 찾고는 한다.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미국의 헌법과 건국과정에까지 이어진다.

미국 최대의 로비단체, 미국총기협회
 

 영화 <미스 슬로운> 스틸컷
▲  영화 <미스 슬로운> 스틸컷
ⓒ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관련사진보기


미국 로비스트들의 활약을 그린 2016년 작 영화 <미스 슬로운(Miss Sloane)>은 총기규제 법안을 둘러싼 미국 정계의 암투를 그리고 있다. 영화에는 총기규제 법안 도입을 무산시키기 위해 불법까지 서슴지 않는 미국총기협회(The National Rifle Association of America, NRA)와 거대 로비그룹, 거물급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총기규제를 둘러싼 알력다툼은 영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대형 총기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총기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로비가 합법화된 미국에서 막대한 자금을 보유한 NRA의 로비에 번번이 실패하고는 했다. NRA는 실제로 정치권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총기규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엘 고어 후보의 반대활동을 하여 결국 엘 고어의 낙선에 결정적 여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개인의 총기소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면 미국에서 총기규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총기규제법안 역시 총기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총기구입 시 신원확인 절차 등을 강화하는 내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제도 미국사회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총기소유의 자유가 미국의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2조는 "규율 있는 민병은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국민의 무장할 권리를 넘어 민병대의 존재까지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의해 보장된 무장할 권리

미국의 헌법이 무기를 소유할 권리를 국민의 권리로 규정한 것에는 미국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약 8년에 걸친 싸움 끝인 1783년 독립에 성공했다. 그리고 1787년 연방헌법을 완성한다. 그런데 헌법이 제정 된지 2년 만인 1789년에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헌법의 수정을 주장한다. 연방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헌법조항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10개조로 이루어진 수정헌법이다.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 당시 정규군대가 없었다. 대신 지역별로 산재해 있던 민병대(militia)들로부터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민병대는 후에 대륙군(Continental Army)으로 합쳐져 독립을 이끌었다. 대륙군은 독립 이후 다시 민병대로 해체되었다. 

그런데 민병대는 정규 군대와는 성격이 달랐다. 민병대는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사냥 등을 하던 사람들이 필요시 군대를 형성하여 전투 활동에 참여 하는 형태다. 때문에 민병대는 민간인들의 평시 무장을 전제로 한다. 평시 무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전시에 이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수정헌법이 민병대와 국민의 무장을 보장하게 된 계기다.

미국의 민병대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이는 불법이 아니다. 현재도 미국 곳곳에서는 수백여 개의 민병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다만 민병대의 존재는 수정헌법 제2조에 따라 보장되지만 군사적 행동이나 인명피해의 발생 등 불법행위는 금지된다. 그러나 몇몇 민병대가 주정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 전 적발된 사건도 있었고, 멕시코 접경지대에서는 민병대가 자체적으로 밀입국자들을 단속하며 불법행위를 일삼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은 시민들이 각자 저마다의 총을 들고 군대를 만들어 독립을 일구어냈다. 독립 후엔 연방정부의 권력독점을 방지하고자 계속하여 민병대가 허용되었다. 자신의 총기로 무장한 개개인으로 구성된 민병대는 건국 초기 미국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헌법까지 무장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병대에서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오늘 날 부메랑이 되어 미국을 세계 최대의 총기사고 국가로 만들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총기는 거대산업으로 성장했고 미국 정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로비단체로까지 이어졌다.

이번 총기참사로 목숨을 잃은 많은 이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면, 600명에 가까운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또다시 총기규제에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일 내에서 또다시 총기참사가 발생할 것이다.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3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 주 클라크 카운티 검시소 측이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 설치한 총격 피해자 가족지원센터 앞에서 노란 근무복을 입은 경찰관이 출입자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3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 주 클라크 카운티 검시소 측이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 설치한 총격 피해자 가족지원센터 앞에서 노란 근무복을 입은 경찰관이 출입자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로그램 퇴출·합성사진·댓글달기…국정원의 연예인 활용법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입력 : 2017.10.06 07:32:00

 

MB 정부 블랙리스트에 ‘좌파 성향’ 연예인으로 분류됐던 코미디언 김미화씨.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MB 정부 블랙리스트에 ‘좌파 성향’ 연예인으로 분류됐던 코미디언 김미화씨.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2013년 세상을 뜬 배우 박용식씨는 10년간 생계를 위해 방앗간을 운영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에나 나올 법한 독재 정권 시절의 황당한 인권 탄압 같지만, 최근 그 실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MB) 정부 국정원의 문화예술인 탄압 행태도 그 못지 않다. MB 정부 국정원은 분야별 문화예술인 82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류했고, 방송사에 압박을 가해 입맛에 맞지 않는 연예인들의 출연을 막았다. 너절한 합성사진과 댓글공작으로 이미지도 훼손했다.
 

■ 성향 분류·퇴출 압박·합성사진…국정원의 연예인 활용법 

코미디언 김미화씨는 2010년 7월6일 SNS에 “김미화는 KBS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출연이 안된답니다”며 “KBS에 근무하시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블랙리스트’ 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밝혀주십시오” 라는 글을 올렸다. 같은해 4월 김씨가 KBS <다큐멘터리 3일> 내래이션을 맡자 KBS 김인규 사장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래이터가 잇따라 출연해 게이트키핑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문제를 삼은 지 석 달 만에 올린 글이었다. KBS는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김씨는 이듬해 4월 10년간 진행하던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도 급작스럽게 하차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김씨가 올린 SNS 글은 하나 둘씩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로부터 보고받은 ‘MB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 과 MB 정부 청와대의‘좌파 연예인 비판활동 견제 방안(2010년 4월)’ 문건 등에 따르면 국정원은 분야별로 좌파 문화예술인 82명의 명단을 만들고 관리했다. 문화계는 이외수·조정래·진중권씨 등 6명, 배우 겸 방송인 문성근·명계남· 김민선·김미화·김구라·김제동씨 등 16명, 영화감독 이창동·박찬욱·봉준호씨 등 52명 등 총 82명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국정원은 아예 정부 비판 연예인들의 프로그램 배제, 퇴출 등 압박을 위해 2009년 7월 김주성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 주도로 문화·연예계 대응을 위해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구성했다. 국정원이 2009년 12월24일 작성한 ‘라디오 시사프로 편파방송 실태 및 고려사항’에는 김미화씨에 관해 “퇴출, (경영진에) 교체권고, 프로그램은 개편으로 폐지”라는 ‘지시사항’이 담겼다. 국정원은 해당 문건에서 “(2010년 6월) 지방선거 앞두고 정부 비판 급증 예상”이라며 “방송사 행정 제재, 경영진 주의 환기”라는 ‘지침’을 내렸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달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나 이명박 정권 때 당한 방송출연 제약 등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달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나 이명박 정권 때 당한 방송출연 제약 등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방송인 김제동씨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사전 행사를 진행하고, 이듬해 1주기 추도식 때 사회를 보면서 MB 정부의 눈 밖에 났다. 김씨는 2009년 10월 진행 중이던 KBS <스타 골든벨>에서 하차 통보를 받았고, KBS <해피투데더>출연도 촬영 전날 취소됐다. 2010년 4월 MBC 에서 진행 중이던 <환상의 짝꿍>도 폐지됐다. 2010년 1월19일 국정원에서 작성된 ‘문화예술체육인 건전화 사업 계획’에는 김미화씨, 김제동씨 등을 ‘퇴출 대상’으로 삼고 “방송사 간부, 광고주 등에게 주지시켜 (이들을) 배제하도록 하고 그들의 비리를 적출하여 사회적 공분을 유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것이 일부 현실화된 셈이다. 퇴출TF와 별도로 국정원 심리전단은 온라인상에서 특정 연예인을 ‘종북 성향’이라고 낙인찍어 공격하기도 했다. 

배우 김규리씨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채로 수입하다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라는 글을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김씨는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내가 쓴 글에) 청산가리 하나만 남게 해서 글 전체를 왜곡했던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며 “그 누군가가 10년 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삶,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틈 사이사이에서 (나를) 왜곡했다”고 말했다.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 위해 1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 위해 1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국정원 심리전단은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둘의 나체 합성사진도 직접 제작해 인터넷에 유포했다. 해당 합성사진을 만들어 유포한 국정원 직원은 최근 구속됐다.
 

■ 왜 연예인일까 

MB 정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명단은 연예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예인들에게 특히 조직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하려 한 정황이 눈에 띈다. 대중적 영향력이 크고 여론과 이미지에 민감한 연예인들의 직업적 특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다.

국정원은 퇴출 대상인 블랙리스트 뿐만 아니라 ‘지원 대상’인 우파 연예인 리스트까지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2010년 작성한 ‘연예계 좌파실태 및 순화방안’ 문건에는 친정부 성향의 연기자, 개그맨들을 ‘좌파 연예인들의 대항마’로 거론하며 이들을 정부 주관 행사나 공익광고에 우선 섭외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일반 대중과 접촉면이 넓고, 영향력도 있는 연예인들을 압박하는게 파급력이 있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화씨 등 국정원 블랙리스트 관련 피해자들을 소환 조사한 검찰은 추석 연휴가 끝난 뒤 국정원 개혁발전위에서 넘겨받은 자료 등과 함께 수사에 더욱 속도를 낼 계획이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060732001&code=910100#csidx949139f5bbd60dabde06137228620d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 개성공단 공장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

북, 개성공단 공장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7/10/06 [10: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지난 개성공단이 가동될 당시 의류제조공장 모습. <사진-인터넷>     

 

북은 6일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흉칙한 수작질’이라는 개인 논평 글에서 “최근 괴뢰들이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을 비롯한 언론 매체를 동원하여 우리가 개성공업지구에서 의류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을 은밀하게 가동하고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며 북의 주권 행사에 관여할 바가 아니라며 “공업지구공장들은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 소식에 따르면 북 대외선전용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공업지구공장들을 저들의 ‘승인’없이 돌리면서 주로 외국에서 주문한 임가공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느니, 공장운영이 드러날가봐 두려워 공장창문들에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가림막까지 치고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느니, 공장들이 가동을 시작한지 6개월이 넘었는데 이것은 불법무법이라느니 하는 온갖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매체는 “그야말로 우리 공화국의 힘찬 전진에 배 아파난 자들의 부질없는 앙탈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는 이미 박근혜 역도가 미국과 작당하여 개성공업지구를 깨버렸을 때 공업지구에 있는 남측기업과 관계기관의 설비, 물자, 제품을 비롯한 모든 자산들을 전면 동결한다는 것과 함께 그것을 우리가 관리운영하게 된다는데 대해 세상에 선포하였다”고 역설했다.

 

이어 매체는 “따라서 우리 공화국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업지구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에 대하여 그 누구도 상관할 바가 없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뢰들이 우리의 공업지구운영을 두고 허튼 나발을 불어대는 것은 마치도 우리가 못할 일을 하는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흉칙한 수작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매체는 “우리 근로자들이 지금 어떻게 당당하게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눈이 뜸자리가 아니라면 똑똑히 보일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명백히 하건대 미국과 그 졸개들이 제아무리 짖어대며 제재압살의 도수를 높이려고 악을 써대도 우리의 힘찬 전진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며 공업지구공장들은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자유아시아(RFA) 방송은 지난 2일(현지시간) 북 내에서 임가공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의 한 대북 소식통이 “조선당국이 개성공단 내 19개의 의류공장을 남한당국에 통보하지 않고 은밀하게 가동시키고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편 개성공단은 지난 2000년 8월 22일 현대아산과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사이에 개발합의서가 체결된 후 2004년 12월 15일 개성공단의 공장에서 첫 제품 생산되면서 공장 가동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지난 2015년 2월10일 북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을 이유로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개성공단의 북 노동자 임금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사용되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북 노동자 임금이 군사용으로 전용됐다는 확증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개성공단기업협회가 올해 2월 개성공단 폐쇄 1년에 맞춰 집계한 입주기업 피해액은 토지ㆍ건물ㆍ기계설비 등 고정자산 5936억원, 원ㆍ부자재 등 유동자산 2452억원, 가동 중단에 따른 미납품 위약금 1484억원, 개성 현지 미수금 375억원, 가동 중단에 따른 영업손실(1년) 3147억원, 거래처 단절 등 영업권 상실에 따른 피해 2010억원 등, 총1조 5404억원 규모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부가 지금까지 지원한 금액은 4838억원에 불과하다. 온전한 피해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고] 신고리 공론화, 한수원과 정부출연 연구소의 역할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0/06 10:56
  • 수정일
    2017/10/06 10: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발행 2017-10-05 14:54:37
수정 2017-10-05 14:54:37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15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현 상황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론화위원회 회신공문은 신고리 시민행동의 주요 요구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며 공정성, 중립성을 지키고 설명자료 내용의 자율성 보장과 한수원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건설 재개측 활동 중단 등을 요구했다.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15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현 상황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론화위원회 회신공문은 신고리 시민행동의 주요 요구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며 공정성, 중립성을 지키고 설명자료 내용의 자율성 보장과 한수원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건설 재개측 활동 중단 등을 요구했다.ⓒ뉴시스
 

“그럼 산업부 장관도 재생에너지 전문가인데, 산업부 장관이 전문가 자격으로 ‘건설중단 측’ 발표를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지난 21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사무실에선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정부출연연구소 관계자의 ‘건설재개측’ 활동에 대한 논쟁이 오고갔다. 건설 중단측은 원자력연구원 산하 원자력정책센터장이 계속 ‘건설재개측’ 패널로 토론회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기했고, 건설재개측은 ‘개인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건데 그게 뭐가 문제냐’며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던 중 산업부 장관 이야기가 나왔다. 공직을 맡고 있는 이에게 ‘개인적인 입장’이란 언제나 애매하다. 그동안 건설 재개측은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백자화를 기정사실로 하고 ‘짜고치는 고스톱’을 치고 있다며, 정부의 중립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건설 재개 측의 답변은 ‘그렇게 하세요.’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중립을 선언한 상태에서 산업부 장관이 나올 리도 없고, 설사 나오더라도 모양새가 안 좋을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중립요구’, 그런데 공기업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선거 공약은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였다. 따라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출범 이전부터 탈핵단체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 결정에 대해 ‘공약 후퇴’라며 비판했다. 또한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사를 중단시킨 것도 정부였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노후핵발전소 수명연장 금지,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널리 알리고 집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보수 야당의 탈핵정책 비판이 이어지자, 정부와 여당은 ‘중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명목상 국민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지만, 더 현실적인 이유는 보수 진영의 반발을 염두해 둔 변화였다. 특히 형식상 중립을 지켜야 할 정부와 달리 여당의 경우 대선 공약을 지키고 폭넓은 국민 여론을 수렴할 의무가 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반면 보수 야당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입장을 홍보하고 있다.

정부의 공약은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이지만, 이미 공론화가 시작된 상황에서 십분 양보해서 정부가 중립을 표명할 수 있다. 그간 국민의 의사결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럼 정부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가?

신고리 5,6호기를 건설하고 있는 한수원은 공기업 한전의 자회사로 주식의 100%를 한전이 소유하고 있다. 한수원을 통하지 않고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다. 안전성, 경제성 등 공론화의 주요 토론주제는 물론이고, 건설 기간과 투입금액 등 모든 정보는 한수원이 독점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의 담당 부서인 산업부 조차 한수원이 정확한 내용을 보고해주지 않으면 내용을 알수 없다. 이런 가운데 한수원이 공론화 과정에서 한쪽 편 ‘선수’로 뛰는 것은 이미 공정치 못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수원은 그동안 ‘건설 재개 측’ 토론자로 참여하기도 했고, 각종 회의에 참석했다. 오히려 자신들이 주요한 이해당사자라며 공론화 자체를 주도하는 모습까지 보여왔다. 더구나 한수원의 홍보 물품인 부채와 핸드폰 케이블 등이 길거리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 유인물과 함께 배포되는 현실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물량 공세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위 ‘국책연구소’라고 불리는 이들 기관은 우리나라 정책을 그동안 좌지우지해온 곳들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일반 대학 교수나 전문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원자력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 등 이번에 쟁점이 되었던 연구소들은 그간 우리나라 핵발전 정책과 에너지정책을 총괄해 온 곳이고 현안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연구자들이 정부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건설재개 측’ 패널로 참석해서 시민들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부 출연연구기관 구성원이 외부 발제를 위해서는 기관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사실상 연구소의 암묵적 지원에 의한 ‘건설재개 측’ 활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운동연합회원들 경주 지진을 기억하라며 신고리 원전 공사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운동연합회원들 경주 지진을 기억하라며 신고리 원전 공사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한 차례 해프닝이 아니라, 이후 제대로 된 기준이 있어야

혹자들은 정부 출연연구소 소속 연구자들의 ‘다른 목소리’를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사업에 반대했던 사례 등 정부 출연연구소의 ‘다른 목소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외국의 경우 정부 출연연구소 내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가진 연구자들이 상호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막는 건 연구자의 양심이나 생각을 제약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문제는 원자력계의 이러한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나 ‘소수 의견’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자력계는 그간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발전해 왔다. 이런 면에서 이번 신고리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건설 재개측’ 활동 문제는 단순히 몇몇 개인이나 특정 기관의 문제라기보다는 탈핵정책 추진과정에서 원자력계 전체의 반발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정부 출연연구소의 ‘건설재개측 활동’ 문제는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원자력계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론화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의 기자회견도 한 상태이다. 합숙토론과 최종 투표를 앞둔 상태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요한 것은 앞으로 정부가 수차례 공론화를 더 진행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이미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계획에 대한 공론화를 조만간 진행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다른 갈등 사안에 대해서도 공론화 계획이 추진 중에 있다. 즉 공기업과 정부 출연연구소의 역할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 시민단체, 공기업, 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이 명확히 재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는 국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보수 여당들은 신고리 5,6호기를 국회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정작 전력계획이나 핵발전소 문제를 국회에서 논의하기 위한 법 개정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 여당은 한차례 소나기만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정책 결정을 국민들에게만 던져놓고 국회나 정치권이 뒷짐지고 있는 것 역시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이 문제가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는 최소한의 자세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DJ의 사과'도 '쿼터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④
2017.10.06 00:24:47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의 고아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하다며 돈을 받고 나를 스웨덴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진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에 팔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런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1989년 야당 총재로 스웨덴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계 입양인 레나 김 씨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이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간담회 자리는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98년 10월 23일 청와대로 8개국에서 온 29명의 해외입양인들을 특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 과거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의 불행한 관습 때문이기도 했다"고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 김대중 정부 시절 해외입양인 초청행사에 참석한 영부인 이희호 ⓒ국가기록원

 

▲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미국 입양부모회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영부인 이희호 ⓒ국가기록관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친가족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고, 준정부적 성격의 글로벌 입양 정보 사후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그 후 입양정보센터, 중앙입양정보원(2009년 7월)을 거쳐,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의 중앙입양원(2012년 8월)으로 자리 잡았다. 김대중 정부는 또 1999년 입양인들에게 해외동포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 결과 이들은 2년까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허용되고, 취업, 투자, 부동산 취득, 의료보험 취득, 연금 취득이 가능하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9년 8월 서거했을 때 입양인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도사(바로 보기)를 따로 내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계 해외입양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사과했던 김대중 정부도 입양정책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해외입양에 대한 규제를 풀어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오히려 증가했다. 또 김대중 정부는 매년 국가예산을 들여 입양인 초청행사를 가졌는데, 애초 의도와 달리 '성공한 입양인'의 존재만 부각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한국의 허술한 입양 관련 법과 제도 때문에 양부모의 나라로 보내져서 입양이 되지 못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거나, 학대, 방임, 극단적인 경우 살해까지 당하는 어려움에 처한 입양인들의 문제는 오히려 정책 시야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2기 민주정부인 노무현 정부에서도 입양정책에 큰 변화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 2004년 국내입양 가정에 양육수당(당시 월 10만 원, 현재 월 15만 원)을 보조하는 정책이 도입됐다. 또 2005년 '입양의 날(5월 11일)'이 제정되고, 국내입양 가정에 입양수수료(당시 200만 원, 현재 270만 원)를 보조해주는 정책도 도입됐다.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입양인대회'에 참석해 "여러분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겪어야만했을 아픔과 고통, 상처를 알고 있기에 그냥 사랑한다고 말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하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정부 차원에서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김근태 장관은 이어 2005년 국정감사에서 "향후 4-5년 내에 해외입양이 완전히 중단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앞서 박정희 정권, 노태우 정권에서 '해외입양 중단 계획'을 밝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다시 끄집어낸 '쿼터제' 

1990년부터 노무현 정부 중반기인 2005년까지 16년간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2000명 선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에서는 해외입양을 줄인다며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인 2007년 국내입양 우선제(5개월 동안 국내입양을 우선적으로 추진한 뒤 이에 실패할 경우 해외입양을 추진하도록 함)와 쿼터제(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기 위해 입양기관들에 국내입양 추진 실적에 따라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배분함)를 도입했다.  

'쿼터제'는 박정희 정권 이후 정부가 해외입양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할 때마다 등장하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6년 북한이 '남한은 고아를 수출한다'는 비난하자 '요보호 아동에 대한 입양 및 가정위탁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쿼터제'를 도입했다. 1975년 당시 5000여 명이던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국내입양 500명, 가정위탁 500명씩 증가시켜, 매년 1000명씩 줄이겠다는 '단순무식'한 계획이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쿼터제는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때도 반복된 정책이다. 입양은 아동이 출생 가정에서 분리돼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마치 상품이 왔다 갔다 하는 일처럼 '숫자'로만 접근하는 정책은 그 자체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며, 성공하기도 어렵다. 안타깝게 노무현 정부도 입양이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배경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국내입양을 늘려 국제입양을 줄이겠다는 안이한 접근을 했던 셈이다.  

이경은 박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입양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지난 세월 정부가 사적인 입양기관에 취약한 미혼모들과 그 자녀들을 내맡겨온 정책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선한 의도와 달리 한국 해외입양 정책은 오히려 더 왜곡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쿼터제는 보건복지부의 국외입양 아동 수 규제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정책 수단이었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쿼터제는 관료집단에 의해 정권의 의지로 받아들여졌고 더 굳건해졌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국외입양 문제는 보건복지부라는 한 부처를 넘어 민법과 아동보호체계 전반을 변혁해야 하는 과제"라며 "가정과 국가의 양육 지원, 부적절한 친권에 대한 국가의 개입, 아동보호체계의 정비와 같이 오랫동안 미뤄왔던 법제 정비를 해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1993년-2007년까지 연도별 해외입양 아동수 (출처 : 보건복지부) ⓒ프레시안

 

 

'냉온탕' 오간 국내입양 촉진 정책...아동 노동 착취 부작용도

박정희 정부 이후 해외입양 정책은 '냉온탕'을 왔다갔다 했다. 아동보호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이 기본 정책 방향이었다가, 북한이나 서구에서 '고아 수출'이란 정치적 비난이 쏟아지면 쿼터제 등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는 방식이 되풀이 됐다. 어느 정부도 입양이 왜 일어나는지, 입양이 친생부모와 그 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일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도입한 정책에서 아동 인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박정희 정부 때 1962년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고아 한 사람씩 맡아 기르기 운동'을 벌였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 입양이나 위탁을 보냈는데, 이런 '강제 결연'은 입양된 어린이의 일부가 다시 시설에 수용되거나 버려져서 부랑아가 되는 일로 귀결됐다. 또 맡겨진 아동이 가사노동자나 단순 노동자로 노동착취를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우리나라 입양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9 참고)

또 쿼터제나 직접적인 양육비 지원 이외의 국내입양 활성화 정책은 입양기관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정부가 입양아동의 '이주허가서'를 발급하는 것 이외 모든 입양과정을 입양기관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에서 관련 정책을 강제할 행정적 수단이 없었고, 무엇보다 의지도 없었다. 2008년 복지부의 입양기관들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면,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대상 아동에 대해 국내입양 우선추진 기간 중 국내입양은 시도하지도 않고 국외입양을 추진하고, 국외에 입양된 아동의 국내입양 추진 기록을 유지 하지 않고 있다"며 "홀트아동복지회의 경우, 2007년 12월 및 2008년 4월부터 6월까지의 기간 중에 국외에 입양된 153명 중 139명(90.8%)은 국내입양 우선추진기간 중에 국내입양 추진기록도 유지하지 아니하고 국외입양을 위한 성.본 창설을 신청했다"고 위반 사실을 지적했다. 

이같은 행태는 2013년 있었던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특별감사에서도 지적됐다. 홀트는 당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실시된 2012년 8월 5일 이후 출생한 아동 115명 가운데 17명(14.8%)에 대해 국내 양부모를 찾아보지도 않고 해외입양을 추진한 것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 [한국 해외입양 65년] 연재 더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북 직통전화, 80년대 이후 최장기 중단

개성공단 중단 이후 22개월 째 연락채널 폐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7.10.05  17:11:20
페이스북 트위터
   
▲ 지난해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이후 남북간 연락채널이 20개월 간 끊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개성공단이 운영되던 시기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북간 연락채널이 22개월째 중단된 상태이다. 1980년이후 가장 오래된 중단 상태로 정부는 북한에 육성으로 통보할 뿐이다.

박주선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5일 "작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이후 남북간 핫라인이 끊어진 지 20개월이 지났으며, 이 기록은 1980년 2차 단절사태 이후 최장기간"이라고 밝혔다.

박주선 의원이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남북 핫라인 구축현황' 자료에 따르면, 1971년 9월 22일 남북 직통전화(핫라인) 설치 이후 단절된 사례는 지금까지 모두 6차례이다.

남북 간 핫라인이 처음 단절된 때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로, 북한이 핫라인은 단절해 약 3년 5개월간 지속됐다. 이후 1980년 2월 6일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위한 제1차 실무대표 접촉을 계기로 재개통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5일 북한이 남북총리회담 실무접촉 중단을 발표하면서 약 4년간 남북 간 연락채널은 막혔다.

이후 남북 간 핫라인 중단은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발생했다. 2008년 유엔총회 북한 인권결의안에 남한이 공동제안자로 나서자 북한은 약 9개월 동안 연락채널을 중단했다. 김대중 대통령 북측 조문단 파견으로 재개된 핫라인은 2010년 '5.24조치' 발표에 반발해 북한이 7개월 동안 중단했다.

2013년 3월 유엔 안보리 제제결의 및 한미합동군사훈련으로, 북한은 약 3개월 동안 직통전화 단절을 발표했으며, 3개월 뒤 북한이 남북당국실무접촉을 제의하면서 다시 재개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2016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를 내리자, 이에 북한은 군 통신선 및 판문점 연락통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으며, 1년 10개월 째 남북 간 연락채널은 막힌 상황이다.

남북 간 연락채널 중단이 장기화되면서, 정부는 북측 주민 송환 등을 통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엔사 정전위원회의 협조로 판문점에서 확성기를 이용한 육성을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 17일 문재인 정부가 처음으로 군사분계선 상 적대행위 중단을 위한 남북군사당국간회담,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제안할 때는, 언론성명 식으로 발표하는 등 남북 간 직접 통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통일부는 매일 두 차례씩 판문점 연락채널로 북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황이다. 북한이 연락채널을 열지 않는 한, 남북 간 핫라인 단절 상황은 지속될 전망이다.

박 의원은 "핫라인 재개는 대화의 시작점이며, 대통령 취임 후 5개월이 지나도록 핫라인조차 재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첫발도 떼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며 "군사적 긴장 고조로 우발적으로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는 만큼, 정부는 조속히 남북 핫라인이 가동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판문점을 경유하는 남북 직통전화는 총 33회선으로,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5회선, 서울-평양 21회선, 항공관제용 2회선, 해사당국 2회선, 경협사무소용 3회선 등이 있다. 그리고 판문점을 경유하지 않는 군 통신선 9회선, 남북열차운행을 위한 직통전화 6회선 등이 설치되어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미, FTA 개정협상 착수 사실상 합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0/05 12:32
  • 수정일
    2017/10/05 12:3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미, FTA 개정협상 착수 사실상 합의

등록 :2017-10-05 09:05수정 :2017-10-05 11:3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 둘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무역대표부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 참석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 둘째) 등과 양국 FTA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 둘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무역대표부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 참석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 둘째) 등과 양국 FTA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한국, ‘협상 전 효과분석 먼저’ 기존 주장 철회
산업부 “호혜성 강화 위해 개정 필요성 공감
개정협상 개시 필요한 제반 절차 진행 예정”
한국과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제2차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어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고 산업통상자원부가 전했다. 이날 협상은 지난 8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이후 한달 반 만에 이뤄진 것이다.

 

 산업부는 이날 협상이 끝난 뒤 보도자료를 내어 “양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상호호혜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개정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미국 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한 각종 이행 쟁점들과 일부 협정문 개정 사항들을 제기했으며, 우리 쪽도 이에 상응하는 관심 쟁점들을 함께 제기하면서 향후 자유무역협정 진전방안을 논의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산업부는 “이에 따라 우리 쪽은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경제적 타당성 평가·공청회·국회보고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협상 개시에 필요한 제반 절차를 착실히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공식적으로 개정에 합의했다는 언급은 없었지만, 개정을 염두에 두고 관련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 무역촉진권한법(TPA)에 따라, 미국 행정부는 개정협상 개시 90일 전에 의회에 협상 개시 의향을 통보해야 한다. 연방관보 공지, 공청회 등 절차를 거쳐야 하고 협상 개시 30일 전에는 협상 목표도 공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쪽은 개정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다.

 

 우리 쪽이 개정 협상에서 앞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효과부터 먼저 분석하자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선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협상을 압박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쪽은 지난 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뒤 한국의 ‘지연 전략’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1차 공동위 종료 열흘 뒤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준비하도록 참모들에게 지시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김현종 본부장도 지닌달 27일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국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위협이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 쪽은 이날 2차 특별회기에서 “한 미 자유무역협정의 상호호혜성,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미국 무역적자와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효과분석 내용을 미국과 공유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효과분석 결과, “한국의 대미 수출보다 한국의 대미 수입과 관세철폐 효과 간 상관관계가 더 크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특히 “대미 수입 규모가 대폭 증가한 자동차·정밀화학·일반기계·농축산물 등의 품목에서 관세철폐와 수입증가 간 연관성이 뚜렷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무역적자 폭이 커졌다는 미국 쪽 주장을 반박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이날 회의 종료 뒤 성명을 통해 “중요한 이행 쟁점들을 해결하는 한편, 상호 공평한 무역으로 가는 개정 협상을 위해 신속한 방식으로 한국과 강도높은 협상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김미나 기자 yyi@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터뷰] 국민소환법 발의한 박주민 “‘국민 위해 정치한다’는 국회의원들, 국민 눈치 보나요?”

 

다음 총선까지 3년, 그 전에 불량 국회의원 해임할 수 없을까?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7-10-05 09:09:54
수정 2017-10-05 09:09:54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정치권의 '막말' 경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적절한 막말 사례를 찾기 위해 포털사이트에 한 국회의원의 이름과 '막말'을 함께 검색해봤더니 그 역사도 유구하다. 처음에는 '막말' 뿐인 기사 제목이 '또 막말', '연이은 막말', '계속되는 막말' 등 수식어도 제법 화려해졌다. 막말 분야도 다양하다. 철 지난 색깔론 공세가 더 이상 먹히지를 않는지 이제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말로 먹고사는 국회의원'이라지만 이 정도면 도가 많이 지나쳤다.

비단 거친 말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발목 잡고 몽니를 부리는 탓에 빈손 국회를 만들기 일쑤고, 다수 국민의 뜻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통해 일부로 국정에 차질을 빚게 한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국회의원, 그 의원의 왼쪽 가슴에 달고 있는 금배지를 당장이라도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현재로서는 그 국회의원이 자진사퇴하지 않는 이상 다음 총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참고로,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2020년에 실시된다. 앞으로 3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대통령도 국민들이 소환하고 탄핵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국회의원만은 내 손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자질이 없는 국회의원이더라도, 내 속을 후벼 파는 국회의원이더라도 이들을 파면시킬 '법'이 없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도 국민소환제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논의로 온 국민의 시선이 국회로 쏠렸던 2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민의 뜻을 외면하거나 무능하고 부패한 국회의원에게 국민들이 직접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유권자에 의한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토록 하자는 게 법안의 취지다. 그러나 법안을 발의한 후 반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국민소환법은 소관 상임위원회 논의 테이블에도 한 번 올라가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말은 국민 위해 정치한다면서…"
쟁점 법안 하나 통과 시키기 어려운 국회 현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제정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와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제정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와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뉴시스

박주민 의원은 지난 26일 국회에서 가진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회의원 당선 후 수많은 법을 발의해 '박주발의'라는 별명도 얻은 박 의원이었지만, 그가 발의한 개혁 법안들은 번번이 특정 정당의 당리당략에 의해 발목 잡히기 일쑤였다. 평소와 달리 박 의원의 목소리에도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박 의원은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정당이 다르거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해나가야 한다"며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면 정치적인 이해타산만 따지면서 개혁과제나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안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국민들이 실망한다. 그런데 또 말은 '국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니, 정치인들에 대한 괴리감이 더 커 보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몸소 느꼈던 아쉬움은 국민소환법 발의로 이어졌다. 박 의원은 "국회라는 곳이 정치 불신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다"며 "그런데 국회가 제대로 일을 하고, 국회의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민을 진짜 위한다면 처리해야 하는 법들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다 보니까 저 자신도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상황이었다"며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조금 더 국회가 생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발의 배경에 대해 밝혔다.

박 의원이 발의한 국민소환법의 주 내용은 임기 중인 국회의원이 위헌적이거나 위법한 행동, 부당한 행동을 하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서 해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 20대 국회에는 국민소환과 관련된 법안은 3건이 발의된 상태다. 박 의원뿐만 아니라 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 바른정당 황영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도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국회의원을 소환할 때 필요한 요건이 조금씩 다른 정도다.

다만 박 의원의 제정안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소환할 경우 해당 지역의 유권자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유권자도 소환 청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박 의원은 자신의 팟캐스트를 통해 국민소환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예시를 들었다.

"예를 들어, '춘천' 지역의 의원을 소환할 때 기존에 발의된 법안은 '춘천'에 사는 분들만 소환이 가능할 수 있는데요. 제가 발의한 법안은 '춘천'에 거주하지 않은 유권자라도 소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박 의원이 발의한 국민소환법은 ▲지역구 의원을 소환하는 경우(①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 ②타 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와 ▲비례대표 의원을 소환하는 경우로 나눠진다.

이중 해당 지역구 주민이 국회의원 소환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해당지역 투표권자 수×직전 총선 투표율×15/100 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다.

타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와 비례대표 의원을 소환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전국투표권자÷지역구 수)×(투표율×15/100) 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도록 규정했다.

이 같은 요건이 충족되면 국민소환투표를 실시하게 되고, 그 투표 결과에 따라 국회의원의 소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박 의원은 기존의 법안과 달리 타 지역구 주민도 지역구 국회의원을 소환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 "국회의원은 해당 지역구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지위가 헌법 기관이고, 전체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특정 지역 정치인을 지역감정에 기반한 정치적 목적으로 소환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한 지역에서 소환 투표를 요구하는 사람이 전체의 1/3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안전 장치로 마련하기도 했다.

17대 국회부터 잇달아 발의된 국민소환법
번번이 통과는 무산, 대체 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과 은평구 지역 협의회장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민원지원센터에서 관계자에게 국민소환제 제정 청원서 제출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주민 의원, 오덕수 역촌동 협의회장, 김현수 녹번동 협의회장, 정남형 응암1동 협의회장.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과 은평구 지역 협의회장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민원지원센터에서 관계자에게 국민소환제 제정 청원서 제출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주민 의원, 오덕수 역촌동 협의회장, 김현수 녹번동 협의회장, 정남형 응암1동 협의회장.ⓒ뉴시스

과거에도 국회의원에 대한 자질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국민소환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특히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 이후인 17·18·19대 국회에서는 잇따라 국민소환제 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결국에는 흐지부지되면서 무산됐다. 당시에도 국회는 민심과는 동떨어진 선택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국회의원 스스로 자기 목에 방울을 다는 법이다 보니까 (국민소환법을) 통과 시키는 것에 대해 썩 내켜 하지는 않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민소환제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굉장히 세기 때문이다. 상황은 달라졌다고 본다"고 내다봤다.

박 의원의 설명처럼 국민소환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앞서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국민소환제 도입을 공약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였던 홍준표 대표도 포함됐다.

그러나 국회 통과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현재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3건의 법안은 모두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전체회의에서 올라오지도 못한 채 법안을 심사하는 소위원회에서 가로막히는 상황이다.

박 의원은 "지금 현재 국회 전체적인 상황이 무쟁점 법안 중심으로 통과되는 상황"이라며 "만장일치제인 법안심사 소위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검토해보자'라고 한다면 전체회의에도 못 올라온다. 논의조차 안 하는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박 의원은 "5개 정당(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의 후보들이 대선 때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만장일치 아닌가"라며 "그런데 대선이 끝났다고 국민소환제가 또 논의가 안 된다? 그러면 국민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정치인들이 또 거짓말했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이 이렇게 원하고, 또 실제로 대선 때도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통과시키기 위한 노력을 안 하지 않느냐"라며 "그런데 이런 국회의원들을 통제할 장치가 없다. 지금 국회의원들이 국민들 눈치를 크게 보나?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국회의원들이 적어도 국민들 눈치는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국민소환법을 둘러싸고 오남용의 우려나 위헌 논란이 제기되는 데 대해서도 단호히 일축했다.

박 의원은 우선 오남용의 우려에 대해선 "오남용이 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면 되는 것"이라며 "그리고 나머지는 이제 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있는 국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제 우리 국민들은 단순한 선동과 선전에 현혹돼 일 잘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을 날려 버리진 않을 것 같다"고 강한 믿음을 드러냈다.

국민소환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한 헌법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이 조항을 두고 국회의원의 임기 4년은 무조건 보장받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에는 허점이 존재한다. 국회가 자율적으로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4년이라는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조항은 국회의원의 임기를 '최대' 4년으로 보장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며 "국회 윤리위원회에서 결의하면 국회의원을 제명할 수 있다. 그러면 이것도 위헌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맞받아쳤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소환법의 운명은?
"이번에 통과 안 되면 사실상 어려워"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국민소환법 통과를 위해 자발적으로 서명 운동에 나선 시민들도 생겨났다. 벌써 13만여 명의 목소리가 모아졌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국민소환제의 조속한 제정을 위한 청원서가 국회에 접수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소환법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 의원은 지금과 같은 높은 열망을 다시 모으기 어렵기 때문에 20대 국회가 국민소환법을 도입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내다봤다.

박 의원은 "국민들은 국민소환제 도입을 굉장히 원하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찬성한다고 말은 한다"면서도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심도 있게 논의될지 자신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국민들이 지금 같은 관심을 계속 표명해준다면, 국민소환법이 통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며 "이번에 통과가 안 된다면 사실상 (다시금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열망을 모아내기가) 어렵다. 다음 대선 때 또 대통령 후보들이 국민소환제를 도입한다고 약속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약속을 어겼는데 별탈이 없었으니, 다시는 안 할 것"라고 단호히 말했다.

'너무 험난한 것 같다'는 혼잣말에 박 의원은 쓴웃음으로 답했다.

 

 

 

"험난하다고 느껴지면서 특정 정당이 머릿속에 떠오르죠. 그분들을 소환하고 싶죠. 그러면 국민소환법을 위해 조금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요.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기사 댓글로라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창간 기획-신문의 미래]“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노도현·허남설·권도현·김지혜·심윤지 기자 hyunee@kyunghyang.com

입력 : 2017.10.05 10:00:00 수정 : 2017.10.05 10:00:09

 

 

ㆍ‘경향신문의 길’ 시민에게 묻다

종이신문만으로 뉴스를 보는 이용자는 1%다.<br />가판대에서 신문을 찾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통의 신문사들은 생존이 화두가 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종이신문만으로 뉴스를 보는 이용자는 1%다. 가판대에서 신문을 찾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통의 신문사들은 생존이 화두가 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경향신문은 팔리지 않았다. 지난달 20일 오후 5시부터 한 시간 동안 종로1가 가판대를 맴돌았다. 중년 남성과 노인이 신문을 1부씩 사갔다. 하루 3부 갖다놓는 경향신문은 그대로 남았다. 가판대 앞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기 신문이 22종이나 있다는 걸 모르겠지. 사람들 눈은 스마트폰을 향한다. 

“경향신문 망할 것 같지 않아요?” 신문을 팔아서는 가판대 깔고 접는 수고비도 안 나온다는 주인 아저씨에게 자조 섞인 말투로 물었다. “에이, 망하지는 않지!” 3개월차 수습기자인 나를 위로한다.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읽잖아. 종이는 10년이면 거의 없어질 거야.” 주변 가판대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마찬가지. 1시간 동안 7명이 음료를, 2명이 각각 초콜릿과 껌을 사갔다. 주인 할머니는 냉장고 빈자리에 음료를 채워넣었다. 신문은 팔리지 않아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신문 1부 가격은 800원. 주인 할머니는 600원이 신문을 가져다주는 ‘박 서방’ 몫이라고 한다. 1부 팔면 200원이 남는다. 이날은 400원을 벌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야 5부 팔린단다. 한때는 하루에 100부를 팔았다고 한다. 20년 전 이야기다. “신문 팔아봐야 종이값도 안 나오지 않아?” 할머니가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40대 회사원은 퇴근길 아이와 함께 볼 영자신문을 샀다. “온라인에는 얕은 정보밖에 없잖아요. 속보 말고 심층기사를 다룰 언론은 필요하죠.” 작은 희망을 주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가판대를 유심히 쳐다보다 신문을 사진 않은 50대 김모씨는 말한다. “전자책 나왔을 때 일반 책이 금방 사라질 것 같았죠. 실제로 물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죠. 종이신문도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더 반가운 손님을 만난 건 광화문의 한 가판대에서다. 

40대 직장인 ㄱ씨는 경향신문 1부를 사서 청록색 크로스백 안에 넣었다. 2년 전 스마트폰을 없앤 이후 매일 신문을 사서 읽는다고 한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오피니언면을 열심히 읽는단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아쉽게도 다시 목이 말라왔다.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이 확 준 건 안다. ‘1%.’ 닐슨코리아 ‘2017 뉴스미디어 리포트’ 조사에 ‘한 달간 뉴스를 볼 때 이용한 매체’를 묻는 질문에 종이신문만 읽는다고 답한 비율이다. 나부터 기자 지망생 시절부터 신문 읽는 것을 썩 즐기지 않았으니…. 큰 흐름을 파악하고 싶다면 스마트폰으로 포털 뉴스 제목을 훑어도 충분하다. 읽을 만한 기사? SNS에 알아서 퍼진다. 힘들게 입사한 경향신문과 수습기자인 나의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사람들을 붙들고 ‘신문의 미래’라는 식상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창간 기획-신문의 미래]“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웹을 보는 이들은 줄어간다. 모바일 독자가 확 늘진 않았다. ‘경향 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기사의 플랫폼 유통도 언론사의 고민거리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웹을 보는 이들은 줄어간다. 모바일 독자가 확 늘진 않았다. ‘경향 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기사의 플랫폼 유통도 언론사의 고민거리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그들이 뉴스를 보는 법 

종이신문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김모씨(32)가 일하는 공공기관에는 매일 여러 조간신문이 배달된다. 김씨는 신문 1면을 쭉 보면서 북핵 ICBM 관련 기사 제목을 어떻게 뽑는지, 어떤 이슈를 비중 있게 다루는지 관찰한다. “전통신문의 장점은 ‘1면에 어떤 걸 보여주겠다’같이 지향점을 확실히 드러내는 거죠. 경향은 청년·민주주의 등 기획이 괜찮아요. 기획은 지면으로 보면 느낌이 확 달라요.” 기자 지망생 송모씨(24)도 매일 신문을 읽는다. 같은 사안이라도 신문마다 제목과 맥락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준경씨(28)는 종이 맛을 아는 기자다. ‘미디어오늘’에서 미디어산업정책 분야를 담당한다. 팔을 뻗어 자신이 만든 종이신문을 펼칠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여기까지다. 

금씨가 주요 일간지를 모니터링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지면 스크랩 프로그램으로 봐요. 검색도 되고 편하거든요. 저도 기자지만 종이신문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요. 온라인 뉴스는 담당 분야 지인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참고해요.” 송씨에겐 신문사 지망생 외에 신문 읽는 지인이 있냐고 물었다. “한 명도 없어요.” 취업준비생 장모씨(27) 집은 10년째 일간지를 구독한다. 장씨가 보는 일은 거의 없다. “흥미가 없어요.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신문 읽으려고 시간을 투자하고 싶진 않아요.” 직장인 박성연씨(25)는 입사 전 취업을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기득권’의 사고방식을 익히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면접 답안을 짜기 위해 일부러 보수성향 일간지를 골랐다. 취업과 동시에 구독을 끊었다. 예상한 답이지만 듣고 나니 울적하다. 

‘경향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유모씨(28)는 3년째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고 있다. 유씨는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와 포털에서 뉴스를 본다. 종이신문을 보는 건 1주일에 한두 번. 대학 언론고시반에서 보거나 가판대에서 사본다. “정기구독을 할까 했는데 자취생이라 돈도 없고 신문 보고 나면 쓰레기가 나와서 안 했어요. 스크랩도 인터넷이 더 편해요.” 건설업계에서 일하는 임세현씨(32)는 틈날 때마다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주로 정치 기사와 사설, 만평 ‘장도리’를 본다. “홈페이지가 많이 촌스럽긴 해요. 앱은 콘텐츠가 없어서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형식이 올드한 게 아쉽죠.” 또 다른 과제, 걱정거리가 생긴다. 

신문사의 경쟁 상대는 ‘신문사’가 아니다. 박성연씨는 출근 전 화장을 하면서 팟캐스트 뉴스 프로그램을 듣는다. “업무 기사만 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잖아요. 현실 감각이 떨어질 것 같아 팟캐스트를 틀어놔요.” 언론사 홈페이지, 포털, 팟캐스트, 페이스북 같은 갖은 플랫폼이 스마트폰 모니터를 놓고 경쟁하는 꼴이다. 

인테리어 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김대원씨(30)가 말했다. “‘내일 전쟁 날 것 같다’ 이런 속보는 네이버를 통해서 보고요. 출근할 때 좋은 기사를 소개해놓은 경제·정치학 전문가들 페이스북을 봐요. 전문가들이 ‘이 기사 한번 읽어보시라’ 평가해주니 믿을 만하죠.” 김씨는 언론 전문성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 경향은 들어라 

경향신문도 신뢰 위기를 겪었다. 지난 5월 대선 전후 진보 성향 언론인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를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한경오’라는 말이 번졌다. 입사 전 그 말을 들으면 그러려니 했다. 6월 입사 후 ‘한경오’는 달리 다가온다. 그저 넘길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임세현씨는 열렬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한경오’에 할 말이 많다. “요새 온라인 커뮤니티에 정치 기사나 기자 발언을 재생산한 글이 많이 올라와요. 그걸 보면 ‘한경오’가 쓰레기구나 싶죠. 사안을 왜곡하는 건 ‘한경오’나 다른 언론사나 다를 바 없잖아요. 경향은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편을 든 것 같아요. 홍준표, 안철수는 까지 않고 문재인은 작은 티끌 가지고도 뭐라 하는 느낌이에요.” IT업계 종사자 박모씨도 경향신문에 ‘한경오’ ‘가난한 조중동’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이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나요? 내부적으로 ‘한경오’ 프레임을 고민했다고 하지만 미디어 소비자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그럼 그냥 노력 안 한 거죠.” 그가 보기에 경향신문의 소통방식은 일방적이다. ‘한경오’ 비판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다. “비판이 나왔다면 공개적으로 기사를 썼어야죠. 경향신문이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공유해야 소통이 돼요.”

경향신문을 좋아하는 이들도 부족함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언론사 입사준비생 유씨는 여성혐오를 다루는 시각을 예로 든다. “경향신문은 적당한 수준의 진보지죠. 여성·환경·노동 문제에 관해 확실히 진보적 색채를 드러냅니다. 다만 공정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여성혐오를 부각하기 위해 사건을 제멋대로 재단해요. 남성혐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그래도 경향을 보는 건 사회적 약자를 적극 대변하고 환경을 제대로 감시하는 언론이기 때문이죠.” 취업준비생 조민경씨(28)는 젠더나 청년 이슈에 관심 많다. 경향신문의 여성 이슈 제기는 좋은 제스처라고 생각한다. “경향신문은 젊고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은데 가끔 헛발질을 해요. ‘문제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이슈를 선별할 때 젊은 시각을 반영하지만 다루는 방식이 고루하다고 할까요. 기본 방향은 잘 잡고간다는 생각입니다.” 

200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경향신문을 만든다. 정치·이념 성향이나 페미니즘·성소수자 등 사회문제를 보는 시선도 제각각이다. 여러 선배들은 5월 대선 때도 지금도 불편부당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젠더·여혐 기획도 고민을 반복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한경오’ 비판이 억울하다는 한 선배는 “대나무숲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독자들과 머리를 맞댄 설득·해명·대화를 했다면 억울함이 핑계 아닌 진심으로 통했을까? 권력의 ‘불통’을 비판해온 언론이 정작 자신의 기사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건 아닐까?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널리즘, 미디어 문화, 매체비평을 연구한다. 언론 소비자와 기자들을 직접 만나 여러 책과 논문을 썼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이 수용자들에게 좀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합니다. 기자들이 건방지다는 인식이 많아요. 기자들은 정치인이 아니라서 수용자에게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죠. 기호에 영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고 보고 싶어 하는 뉴스가 무엇인지 공부해야 합니다.”

■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입사 후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경향신문이 ‘진보지’라는 막연한 이미지만 갖는다. 어떤 의제에 주목하고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름값’ 못한다는 소리다. 이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김대원씨에게 경향신문은 ‘진보적이지만 덜 과격한’ 신문이다. 지면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란다. 언론이 어떻게 변해야 존재감을 높일 수 있을지 물었다. “가끔 일간지를 보면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종이 문제는 확실히 아니라고 봐요. 일간지는 다 얕고 넓게 다루는데, 굳이 차별점 없는 걸 볼 필요가 있는가 싶은 거죠. 뭔가 다르고, 또 깊어야지 보겠죠.” 

금씨는 경향신문이 잘하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난해 ‘부들부들 청년’ 같은 기획보도를 강점으로 꼽는다. “경향이니까 앞으로도 더 젊은 느낌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문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줄 만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경향이니까’ 한마디가 가슴에 훅 들어온다. 가능성을 알아주니 기분은 좋다. 

어쩌면 기자보다 신문을 많이 볼 기자 지망생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매일 신문을 읽는 송씨는 저출산과 육아 문제를 다룬 ‘맘고리즘’ 기획을 기억한다. “페미니즘이라든지 사회적 약자라든지 앞으로도 경향만이 할 수 있는 걸 했으면 해요. 시대가 변해도 기본을 지키는,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기사는 통한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는 ‘신뢰’ 키워드를 제시한다. “출처는 오래 기억되지 않고 결국 메시지만 남아요. 그럼에도 가장 믿을 만한 정보는 전통신문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문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내용과 더불어 지면과 온라인에서도 새로운 형식을 찾아야 하고요. 유용한 정보를 다양한 포맷에 담아내는 종합정보매체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아프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사람들이 건넨 모든 말들이 달다가도 쓰다. 두번째 형용사를 꼽자면 ‘갑갑하다’이다. 속보도 쓰고, 탐사·기획도 내보내야 한다. 특종은 말할 것도 없다. 텍스트도, 비디오도, 오디오도 해야 한다. 힘든 노동의 결과물을 홈페이지에도, SNS에도 유튜브에도 올려야 한다. 들어와보니 인력이 부족하다. 수습기자들은 이번 창간기획에도 여기저기 불려다녔다. 이 기사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까지 채널 6개 관리…‘뷰수’에 울고 웃고”. 사회부·정치부에서 오래 일하다 신설한 SNS팀으로 간 선배가 ‘SNS팀은 뭐하는 데야’라는 내부 일각의 차가운 눈초리에 어려움과 절실함을 토로하며 노보에 쓴 글 제목이다. 태어나서 처음 본 가산동 경향신문 윤전기도 떠오른다. 경향신문의 길을 구하는 거창한 기획에 동원한 선배들이 야속하다. 앞으로 더 험난할 미디어 생태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왜 ‘경향신문’이어야 하는지 현장 취재와 좋은 기사로 증명하는 것 말곤 다른 답은 잘 모르겠다. 미래에 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련다. 

※ 경향신문 수습기자 3명과 모바일팀 기자 2명의 취재를 수습기자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0.4선언 10년, 여전한 '금단의 선'

[친절한 통일씨] 10.4선언 발표 10주년 그리고 문재인 정부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7.10.04  12:49:31
페이스북 트위터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경. 북으로 향하는 도로 위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한 폭 30cm의 노란색 선이 상징으로 그려져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노란색 선을 걸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성.

"오늘 이 자리에 서고보니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발전이 저지돼왔습니다. 다행히 그 동안에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이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MDL를 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길'로 향한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4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남북정상선언')에 서명했다. 7년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듯, 이날도 양 정상은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10.4선언이 발표된 지 꼭 10년이 됐다. 하지만 10.4선언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2개월 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고,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9년동안 말그대로 휴지조각이 됐고,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준비위원장이던 문재인 대통령. 10.4선언은 부활할 것인가.

7.4성명, 6.15공동선언을 이은 10.4선언

10.4선언은 1972년 7.4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2005년 9.19공동성명, 2007년 2.13합의도 잇고 있다.

"군사적 신뢰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계를 구축하는 발판이 마련되는데 의미가 있다. 남북경협,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 질적으로 한단계 진전시키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화해협력기조가 지속돼 나가는데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데 여할 것이다."

10.4선언은 총 8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항은 6.15공동선언을 명시해 이행을 약속하고, 2항은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담겨있는 상호존중과 신뢰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 3항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협력을 담고 있다.

1.2항의 원칙에 따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지정해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것.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NLL을 포기했다고 비방하지만, 정작 공동어로수역은 1972년 7.4성명 발표 이후 박정희 정권이 검토를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 전두환 정권이 북한에 제안했고, 1992년부터 본격 논의가 됐다. 이를 받아 10.4선언에 명시된 것이다.

4항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이를 위해 남북.미.중 4자가 만나며,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준수해 핵문제를 해결하자는 원칙을 담고 있다. 

   
▲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정상선언'에 서명한 뒤 손을 잡고 기자들을 위해 다시 포즈를 취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5항은 남북경제협을 골자로 하는데, △민족내부협력사업 특수성 인정,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를 통한 해주 개발,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착수, △개성-신의주 철도,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및 공동이용,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이를 위한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구성 등이다.

6항은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북응원단 경의선 열차 이용 등 남북교류.협력을 담고 있다. 7항은 △이산상봉 확대, △금강산면회소를 통한 상시 이산상봉, △자연재해 등에 상부상조 원칙 협력 등 인도주의 협력사업 추진을 밝히고 있다. 8항은 국제무대에서의 남북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10.4선언'은 유엔 총회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물거품이 됐다. 14조 원을 퍼준다며 공격을 하던 보수정부는 10.4선언 이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결국,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5.24조치'를 발표, 경제협력을 주요 골자로 한 10.4선언은 폐기 수순을 밟았다. 박근혜 정부도 이를 이어받았고, 9년 동안 10.4선언은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10.4선언 10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할까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발표 10년을 맞은 10.4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공약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핵심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다. △금강산, 원산.단천, 청진.나선을 남북이 공동개발해 동해안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동해권 에너지.자원벨트 구축', △수도권, 개성공단, 평양.남포.신의주 연결 서해안경협벨트 건설 및 경의선 개보수, 서울-베이징 고속교통망 건설 등 '서해권 산업.물류.교통벨트 건설', △설악산.금강산.원산.백두산 관광벨트 구축 및 DMZ 생태.평화안보 관광지구 개발 등을 담고 있다. 10.4선언 5항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 문재인 대통령은 9월 26일 열린 '10.4선언 발표 10주년' 기념식에 참석, 연설을 통해 북한을 향해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통일부 내 '한반도 신경제지도 TF'를 설치하고, 관련 예산으로 내년도 경제협력기반 세부사업 예산을 1천억 원 이상 증액.편성해 2천 480억 원을 책정, 장기적인 사업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10.4선언 발표 10년을 맞은 현 상황은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꺼낼 형편이 못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두 차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을 시험발사했고,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은 두 차례 일본 열도를 넘어갔다. 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실험(6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대북제재를 보다 강화하는 추세이다. 당장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신규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구현하려면 미국 정부의 도움없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가 별다른 실력발휘를 하고 있지도 않다. 강력한 대북응징력을 보인다며 자체 개발한 탄도미사일 '현무-2'를 대응발사했다. 미국의 전략무기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 전략폭격기 'B-1B'는 처음으로 동해 NLL을 넘어 함흥지역까지 날아갔다.

   
▲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 일행이 북녁으로 향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평화의 운전수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 물꼬를 트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대화로 풀어야 한다더니 아직은 대화할 때가 아니라고 하고, 꾸준히 제기되는 특사 파견 요구에도 귀를 닫은 모양새이다. '긴 호흡' 필요성에 '신 한반도평화비전'(베를린구상) 발표, 남북대화 제안 등 성급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왜 서두르냐고 주변을 탓하고 있다.

인도주의 문제는 정치.군사와 무관하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문재인 정부는 국제기구에 800만 달러를 공여하는 문제를 두고서도, 오락가락하더니 '정치적 상황과 분리'한다면서도 '남북관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여론 설득에 실패한 듯하다.

"10.4정상선언은 한반도 평화지도였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신북방정책 역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며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10.4정상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하지만 10.4선언 발표 10년. 정작 문재인 정부가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넘은 금단의 선은 여전히 남아있을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