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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 사회 초년생의 명함 돌리기

 

몇일 전 부터 학원강사를 시작했습니다.

공교육의 꿈을 잠시 접고 사교육으로 발을 돌린지 어언 3주.

오늘 출근을 하는데, 원장 선생님이 뭔가를 내밉니다. 명함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면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에

처음으로 제 이름이 찍힌 명함 200장을 건네 받았습니다.

사실 명함을 처음 찍은 것도 아닌데,

(대학교 때 다 돌리지도 못하고 구석에 처 박힌 제 명함이 2년에 걸쳐 200장은 족히 남아 있습니다.) 명함을 받자마자 기분이 묘합니다.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묘한 느낌.

 

 

이 종이짝에 찍힌 제 이름 석자가 이렇게도 무겁게 느껴진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생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종이 한장에 사람 기분이 묘해지는

야릇한 상황에 어리둥절합니다.

이젠 정말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는 생각만 납니다.

 

 

순간 명함이 도대체 왜 필요한걸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 말고 다른 선생님들은 금장으로 명함을 다시 박기로 했거든요.

갑자기 "아메리칸 사이코"라는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몇년 전에 나온 공포영화였는데,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는 간단한 동기는

자신의 친구가 찍은 명함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질의 종이에 금줄 하나 더 박은 명함을 자랑하는 친구를 전기톱으로 깨끗하게 처리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종이 한장에 간단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 때문에요.

그런데 지금에서는 그게 현대인의 모습을 과도하게 잘 반영한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책상 앞에 쌓아놓은 명함 케이스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전, 아직 명함을 어떻게 주고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명함들도 케이스에 담겨 고이고이 보관될 것 같습니다.

이거...학원 선생님은 이 명함 다 쓸 때까지 나갈 생각말라던데,

이 상태로는 학원에 말뚝을 박아야 할 지경이겠죠?

 

 

누군가에게 명함을 처음 받았을 때의 어리둥절함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제 주변 사람이야 이제는 명함을 주고 받는 것이 익숙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도 곧 명함을 주고 받는게 익숙해지는 그런 환경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훗날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되더라도

종이 한장에 박힌 활자와 지위가 저를 말해주기보다는

제 웃음과 말 한마디가 저를 더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삶을 늘 기대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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