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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술마시고 나면

정리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어지럽기만 하다. 모든 것이.

 

과거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결정한다.

 

나의 과거는 나의 것이고

나는 그것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할 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행동할 지는 모르겠는걸.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음을 난 믿고 싶어.

진심으로.




♪ 꽃다지 - 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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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이름으로, 전체의 이름으로

안드로이드님의 "LG 정유 파업에 대한 단상"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와, 진보넷 블로그 외부에서 트랙백이 걸린 건 이게 처음이네요.

블로그에서 포스트 사이의 네트워킹, 말로만 수없이 떠든 것 같은데

실제로 이렇게 트랙백이 걸리고 걸고 하니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안드로이드님의 감정을 불타오르게 한 첫 번째 요인에 대해

전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요인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동의하고

세 번째 요인에 대해서는 (저는 안그렇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요인에서 말한 그 "피해"라는 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논리와 철학과 이념을 배제하고 감정적으로 봐도 말이죠.




저는 자본주의적인 노동을 합니다.

매일 8-9시간씩, 일주일간 44-50시간을 말이죠.

누구를 위해서? 당연히 절 위해서죠.

정확하게 얘기하면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 취미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돈" 때문입니다.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 전혀 없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도 볼 때 "저 놈이 나을 위해 일해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멍청한 관리자는 없을 겁니다.

회사와 노동자와서 관계는 서로 피해 안 주고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임금으로 얽힌 계약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국민과 국가 경제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 역시 전혀 없습니다.

매달 임금에서 원천 징수되는 각종 세금을 내고 나면

제가 국가를 위해 하는 일은 다 끝난 겁니다.

 

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강제노동하는 게 아닌거죠.

 

그래서 파업-즉 노동을 멈추게 되면

회사에 대한 피해, 국민에 대한 피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회에서 누군가 회전을 멈추게 되면

다른 바퀴에 피해를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계속 돌아가기 위해서

다른 바퀴에게 계속 회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옳은가요?

지하철 파업을 하면 내가 지각하고 불편하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참고 계속 일하라고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요?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피해"를 받는 "국민들"은

정작 자신들이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국가 경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국가 경제를 위해 모든 국민들이 개미처럼 일해야 한다는

개발독재시대의 생각을 갖고 계신 건 아니겠죠.

파업을 하면 국가 경제에 피해가 물론 갑니다.

"기간산업"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죠.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계속 노동해야만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건가요?

파업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라면

당연히 파업을 통해 풀어야만 하고

그 동안 발생하는 "피해"는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업을 통해 발생하는 피해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저는 파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적인 손실은

충분히 감수할 용의가 있고 적극 그들의 편에 설 생각이 있습니다.

즉, "국민"의 한 사람인 저한테까지 그들이 파업의 "공공성"을 구차하게

(정말 구차한 일이죠. 왜 자신이 노동을 멈추게 되었는지를 공공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설득할 필요는 없단 얘깁니다.

 

첫 번째 요인에서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집단의 이름으로, 전체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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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side

How long how long will I slide
Separate my side I don’t
I don’t believe it’s bad
Slit my throat
It’s all I ever


I heard your voice through a photograph
I thought it up it brought up the past
Once you know you can never go back
I’ve got to take it on the otherside

Centuries are what it meant to me
A cemetery where I marry the sea
Stranger things could never change my mind
I’ve got to take it on the otherside
Take it on the otherside
Take it on
Take it on

 

...

                                   - Red Hot Chili Peppers, 'Otherside'

 

아직 늦지 않았다고,

난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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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p Warm, Burn out the Rich

민족성이 실존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사회에 따른 경향성은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를 따르면 한국 사회에는 이상한 평등주의가 존재한다.

누군가 큰 이익을 보면 주변 사람과 나눠야 하고

다 같이 어려운데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지탄받는다.

어떻게 해석하면 "아주 위험한" "공산주의 사상"(허걱)인데,

뭐 여기까진 좋다고 치자. 최소한 나쁘진 않다.

문제는 이 관점이 국가차원으로 확대될 때 발생한다.

국가 경제가 어려운데 감히 파업을 하다니! 또는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는데 월급 올려달라고 하다니! 또는

게다가 연봉이 6-7천이래, 대우도 국내 최고 수준이래, 하는 일도 별로 없다는데. 등등

그리하여 결론은 저놈들 다 짤라라. 내가 일하겠다. 뭐 이런 식이다.

Burn out the rich! 이건 거의 증오 수준이다.

 



회사에서 공개한 연봉 테이블 및 여타 지원 내역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파업하는 노동자가 고액 연봉을 받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고액 연봉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파업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인간들은 존재하지만 말이다)

같은 이유로 대기업 총수, 고위 관료를 증오하진 않지 않은가.

그리하여 세상에는 두 종류의 노동자가 존재하게 된다.

파업해도 되는 노동자, 파업하면 안되는 노동자.

그 기준은? 연봉 3000정도면 되려나?

 

결국 이들에게 있어 파업은 연봉 올리기를 위한 줄다리기이고

이들은 파업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경제적인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도 게시판에, 신문 독자 투고란에, 열심히 글을 쓰고 보낸다.

Keep warm, burn out the rich!!!

 

사실 위의 아나키즘적인 이미지가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림의 꽃병이 날아가게 될 목적지인 "The Rich"가 누구인지는 알 것 같다.

가난한 자일수록 더욱 착취하는 자들,

부의 독점을 구조적으로 유지하는 자들,

전세계를 자신들이 구상하는 질서로 재편하고자 하는 자들.

바로 그들이 진정 "The Rich"라는 영광의 칭호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

고작(!!!) 연봉 6-7천 받는 노동자들이 감히...

 

증오와 적의를 동반한 "정의로운" 시민들의 목소리에

저 그림 이미지가 떠올랐다.

뭐 목적없는 분노에 일일히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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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티셔츠

neoscrum님의 체 게바라는 너희들의 상품이 아니다! 를 트랙백한 글입니다.

 

이전 회사를 다닐때
전혀 혁명적이진 않지만 혁명적인 사상을 동경하던 형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담배를 피우다가 느닷없이 체 게바라를 아느냐고 묻더군요.
뭐... 안다고... 대답하니까
인터넷에서 게바라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그의 혁명 사상이 %$%!@%$#%#^~ 라고 설명했습니다.
주의깊게 듣지 않아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기억은 못하지만
대충 짐작컨데 그의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정신력 등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았습니다.

 

60년대 전설적인 남미 공산 게릴라로 활동했던 체 게바라였지만,
이젠 MTV의 아무 의미없는 이미지들 중의 하나로,
길거리 티셔츠 판매의 일등 공신으로,
또는 엉뚱한 의미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체 게바라로부터 배우는 경영전략"라는 책도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어딘가에서 출판했을런지도...)

 

의미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이미지만을 차용하고 복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서
게바라의 이미지는 커트 코베인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이런 식의 이미지 무한 복제는 막을 수도 없고 통제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코르다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봅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식의 싸구려 이미지와 함께 게바라 동지의 삶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그래서 결국 위인전의 위인 중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의미 왜곡이라고 봅니다.

 

지나간 혁명가의 이미지를 신주모시듯 조심스레 다룬다고
그의 혁명적 삶이 더욱 가치있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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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 마이클 무어

 

주중에 "화씨 911"을 보고 또 한 번 느껴버렸다.

 

"화씨 911"은 마이클 무어의 전작인 "볼링 포 컬럼바인"보다 "웃기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 하나 바보 만들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 무어가

이번에는 그 대상을 (잘 알려진 대로) 원수 지간인 부시로 잡았으니

세계적 트렌드로 자리잡은 反부시 정서에 근거하여 보면 매우 "웃기다".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무어의 다큐는 좀 산만하다.

주제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데,

"화씨 911"도 역시나 가뜩이나 자막이 많아 정신이 없는데다

주제가 계속해서 필사적인 도약을 해 대니

영화관을 나올 때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좀 나은 게

이미 반전이라는 주제를 알고 영화를 봤었고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나레이션까지 나와줘서

마이클 무어가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지 좀 알 것 같다.

("볼링 포 컬럼바인"의 경우에는 마이클 무어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서로 말이 달라 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뭐 "화씨 911"의 주제야 잘 아는 내용이라 그다지 생각을 더 해 볼만한 것은 없지만

또 다시 머리 속에 든 생각은 자본주의와 저항 간의 관계이다.

 

"화씨 911"은 상업 영화다.

물론 할리우드 거대 자본이 개입하진 않았지만

제작과 배급을 거치려면 상업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을 거쳐야만 한다.

지지리도 못사는 플린트 시 출신인 마이클 무어라고 해도

자본주의적 착취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저항의 관계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근데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RATM을 생각하면 좀 얘기가 다르다.

이들 노래는 자본들의 입장에서 신경쓰일 만하지 않나?

그럼 좀 경계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너무나 당연하게 소니-컬럼비아와 RATM은 이들 노래를 상품화하고 잘 팔아먹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저항을 상품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항이 자본주의를 이용하는 것인지.

난 전자에 100만표를 던질 용의가 있다.

(그리고 사실 후자는 좀 말이 안된다.)

 

제니스 조플린의 "Mercedes Benz".

자본주의 물신성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벤츠는 이 노래는 자사의 CM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저항한들 자본은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상품화한다.

역시 자본에 독립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대안인가? 난 잘 모르겠다.

 

"화씨 911"을 보고 난 후 가장 안 좋았던 것은

잘 만든 저항 상품을 구입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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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잃어가는 것들

neoscrum님의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통해 '아니메'를 알게 된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군요.
어릴 적 보던 만화들이
(특히 마징가나 그랜다이저 같은 거대 로봇 만화들,
그리고 코난이나 은하철도 999같은 SF도 그랬죠)
당시에는 일본 만화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
최초로 일본 만화라는 인식을 가지고 본 애니메이션은
세운상가에서 복사를 뜬 "천공의 성 라퓨타"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의 복사를 거친 후라 조악한 화질+음질을 자랑하는 데다
요즘 DIVX 같이 자막이 같이 붙어 나오는 게 아니라서
당시 활발했던 PC 통신에서 구한 대본(!!!)을 구해 같이 읽어가며
간신히 내용을 이해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퓨타"를 통해 작품마다 독특한 철학들을 지닌
아니메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모조리 구해가며 보기 시작했는데
오시이 마모루를 만나기 전까지
저에게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는 최고의 애니 감독이었죠.

 



제가 느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는
권력과 과학기술 문명에 저항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아 이 단어는 너무 애매하군요)이지만
가족관과 젠더적인 측면에서 보수적(이 단어는 명확해서 좋습니다ㅡㅡ;)이라는 것입니다.
"나우시카"나 "라퓨타", "원령공주" 등에서 등장하는 가족들의 구성원은
전통적인 가족 내에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들은 그 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라퓨타"와 "원령공주"에서는 여성이 리더를 맡고 있는 집단이 등장합니다.
"라퓨타"에는 해적(공적인가???) 집단의 삐삐머리 할머니,
"원령공주"에는 제철마을의 군주인 에보시가 리더인데,
이들은 남성화된 여성 캐릭터로서 중성적이죠.
만약 에보시가 남성이었어도 그의 행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이 작품들의 주인공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탈피한 모습입니다.
일부 캐릭터에서도 역시 이러한 모습은 드러나죠.
하지만 이 작품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강인함을 요구받고 여성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주인공급 남성 캐릭터들은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죠.
그래서 저는 그의 작품 자체는 매우 재미있게 봤지만
그가 만든 캐릭터를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아, "원령공주"의 코다마를 제외하곤 말이죠. :)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 훌륭한 감독이고 작품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붉은 돼지", "마녀배달부 키키" 등 역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무척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때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붉은 돼지"만큼의 사회성을 지닌 작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의 애니에서 사회성이 제거되고 남는 것은
불편한 캐릭터들과 판타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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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2004.7.28




난 달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달의 매력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달을 좋아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얘기하기도 어렵다.

단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움을

한여름에도 느낄 수 있는 은은한 차가움을

도시의 의미없는 불빛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달 이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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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의 추억

암울했던 시절, 사무실에서 밤샘하던 증거물.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하다.

 


분홍색 수건이 인상적.

 

촬영자의 모습이 더 잘 나온 이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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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B 포트


'아니오'의 접속단자를 보고 생각난

마린블루스의 USB 포트.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상의 차이?

어찌보면 이토 준지 만화에 나오는 '부유물'과 비슷할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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