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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0/30
    대전천 생태하천?
    구르는돌
  2. 2009/10/26
    [발췌]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중
    구르는돌
  3. 2009/10/21
    생물학적 소멸
    구르는돌
  4. 2009/10/20
    DNA강제체취법, 국무회의 통과(1)
    구르는돌
  5. 2009/10/20
    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구르는돌
  6. 2009/10/07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2)
    구르는돌
  7. 2009/10/06
    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구르는돌
  8. 2009/10/05
    임종인, 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3)
    구르는돌

대전천 생태하천?

내가 일하는 곳 앞에는 대전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요즘 이 곳을 생태하천으로 만든다고 공사가 한창인데, 그래서 밖으로 나가면 가는 곳곳 마다

포크레인이 즐비해 있어서 통행 자체가 불편할 지경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 하천공사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대강 공사에 차질이 있다는 얘기인것 같던데...

아침 밥을 먹다가 봤는데, 공사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듣다가 밥알을 뿜을 뻔 했다.

이 대전천이라는 데가 워낙 수량이 적어서, 풍부한 수량이 확보되어야

생태하천의 모양새가 갖춰지는데, 그래서 택한 방법이

하류에 있는 물을 상류로 끌어오는 거란다.

 

청계천에서 MB씨께서 했던 그대로

또 빰뿌질로 '생태'하천을 만들겠다는 거다.

내가 환경공학에 무지해서 하는 헛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류에 있는 물을 빰뿌질 해서 상류로 끌어올린다고

수량이 늘어나나?

 

하석상대, 조삼모사...

아 뭐 더 없나? 요딴 빈곤한 사자성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그저 내가 '환경공학'에 무지해서일까?

 

이 뉴스를 듣고 있던 우리 아버지께서도 오랜만에 나에게 한 마디 거드셨다.

옛날엔 다 그냥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땅으로 스며들어서 물이 자연스럽게

하천으로 보내지고, 그래서 수량이 어느정도 잘 유지가 되었는데,

요새는 다 시멘트에 아스팔트여서 물이 그냥 하수구로 빠져나가서

수량이 보존이 안된다고....

 

이런 아주 당연한 진리도 모르고

하천 복원한다고 지금 천변을 싸그리 세멘 공구리칠을 하고 자빠졌다.

그러면서 공사 홍보 플랑에는

"멱감고 물장구치던 대전천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요지랄 하고 있다.

 

나 초등학교때만해도 대전천에서 몇번 물장구 치고 놀았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요즘엔 그 주변을 자전거 도로 만든다고 다 세멘 칠 해놔서

들어갈 맘도 안나고

그나마 있는 자전거 도로도 날파리들만 잔뜩해서

자전거 타고 달리다보면 입속으로 날파리들이 다 들어온다.

 

요딴 짓거리를 전국적으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난 그저 썩소를 날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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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중

피상적인 물질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는 짐작도 할수 없을 만큼 인간이란 깊고 복잡한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총체성을 말하면서 단순히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사회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인식에 머문다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 충분히 철저한 인간 이해를 수행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고, 따라서 크게 감동적일 수 는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 현대의 위대한 지적 업적 중의 하나는 인간 행동을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표피적인의식의 수준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심층의 심리 구조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정신분석학의 성과가 아닌가 싶은데요.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이나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러한 질환은 환자 자신의 유아기의 어떤 경험, 프로이트가 대체로 그런 질환의 원인을 개인차원에서만 탐구하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서구 부르주아 과학의 기본 가정을 초월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프로이트의 후학이면서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간 융의 경우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이지요.

융이 쓴 <땅과 마음>이라는 글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대 미국 백인들의 심층 심리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뜻밖에도 그들이 내심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인디언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사람 이하로 보면서 야만적인  폭력으로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해 온 바로 그 인간 종족이 백인들 자신도 모르게 심층 심리의 가장 내밀한 고셍서는 외경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거지요.  백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백인들의 무자비한 무력 행사 앞에서 죽어가거나 쫓겨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거의 완전한 패배속에서도 의연히 위엄을 잃지 않았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어쩌면 심한 열등감을 느겼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깊은 심층 심리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백인들 자신이 이것을 인정할 리는 없겠지요. (...)

융이 말하는 지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겪어 온 생명 진화의 전체 역사가 각 개인의 심층 심리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이렇게 직립하기 이전에 하나의 포유류로서, 또 그 이전에는  파충류, 그 이전에는 단순한 세포...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맨 처음 이 지구상에 생명이 싹틀때의 기억, 또는 좀 더 뿌리까지 간다면 생명을 잉태시켜 온 흙이나 물, 바람, 핷빛,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 생성의 근원적 기운과 같은 것이 내 기억의 까마득한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본다면 나의 자아라는 것과 자아 아닌 것은 엄격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서양에서첢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간단하게  구분하는 수준이 아니고 제1식에서 제8식까지 나누어 이야기해 왔는데요. 대개 우리의 외관을 통한 감각적 체험이 제5식까지의 내용이라면, 그 다음 단계가 우리의 의지적 작용, 감정 생활, 이지적 체험을 관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다음의 제7식부터가 이른바 무의식이나 잠재 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는데, 같은 무의식의 차원이지만 정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하는 7,8식으로 구분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제7식의 범위는 말이지요, 이를테면 생존 본능의 심리라 할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죠지 오웰이 쓴 어떤 글에 보면 어느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것은 아마 오웰이 젊은 시절 버마에서 영국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할 때 실제 체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사형수 한 사람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 위해서 간수들을 따라 교수대로 가는데, 전날 내린 빗물로 땅이 질퍽해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수는 될수 있는대로 그런 곳을 피해서 마름 땅을 골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쌩각해 보면, 곧 목숨이 끊어질 처지에 있는 사람이 빗가랑이나 신발에 흙물이 투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것은 우수운 행동이지만,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취하는 그런 행동이말로 진실한 행동인 셈이지요. 어떻든 불교에서 말하는 제7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드러나는 생존 본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본능의 단계보다 더 지독한 차원이 있다고 유식학에서는 보고 있어요. 그것이 제8식, 다른 말로는 알라야식이라고도 하고 또는 종자식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각자의 전생, 금생을 통틀어서 내가 사념으로나 실제 행동으로나 지었던 모든 업이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윤회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자아 개념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인간과과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갖고 있는 자아 개념, 즉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이 육신을 경계로 하여 나와 나 아닌것의 분별을 기초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보면, 이런 식의 분별심에 기초한 자아 개념이 가장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문화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늘상 들어 왔듯이 자기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지요. 저 자신 옳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연기법이라는 것은 결국 나와 세계와의 불가분리성을 뜻하고 근원적인 일체화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내 마음 가운데 우주가 있고, 우주는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생각도 거기서 비롯하는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하여튼 융의 관점이든 불교적 생각이든 어느 쪽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총체적 인격의 구조를 간단히 어떤 결단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정의감이라든가하는 이지적, 의지적, 합리적 언어에 의해 다 통제하고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우직한 착각인것 같아요. 인간성의 구조의 깊이와 복잡성에 대한 탐구가 깊어짐에 따라 "세계의 합리적 조직화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융은 술회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삶의 이성적 기획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능력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보아야겠지요. (93-6쪽)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적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모든 참다운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볼까요? "신비의 감정에 낯선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가장 높은 지혜와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을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는 것 -- 그것은 모든 종교성의 중심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만이 나는 경건하게 종교적인 인간에 속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전체의 일부이다.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서 생각하고 느끼는 경험은 일종의 의식의 광학적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은 일종의 감옥인데, 거기서 우리는 개인적 욕망의 세계로만 제한되고, 우리 주변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애정을 갖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자신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비심의 권역을 넓혀서 살아 있는 모든 것, 모든 자연을 그 아름다움 속에 포용해야 한다. 누구도 이것을 완전히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를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해방의 일부가 되며, 내면적 안전의 토대가 된다."  (87-8쪽)

 

 

 

 

그런데, 그런 문명 사회를 이루는 데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문자란 말이에요. 문자가 나옴으로 해서 평등 사회가 무너진 것이에요. 동양에서도 가량 도가 사상은 문자나 지식 행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거부감을 끊임없이 표현해 왔는데, 이것도 그냥 관념적인 문명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 지금 우리가 당장 문자 없는 삶을 구상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적인 인간 질서,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잇는 문학 형태는 아마 문자를 벗어난 문학 생활일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서구 지식인들이 인도의 문맹률이 높은 것에 대해 걱정으 하면, 아니 인도 사람들이 전부 글자를 깨쳐서 신문을 다 보기를 원한다면 히말라야의 나무가 한 그루인들 살아 남겠느냐고 반문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터무니 없는 듯하지만, 앞으로 지구 사회가 나아갸야 할 근본적인 방향에 대해 깊이 시사하는 게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종래의 방식대로 지식 생활을 한다면, 지구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거든요. 집집마다 책이 수백 권씩 있고, 매일 몇 십 페이지나 되는 신문을 잠깐 보고 버리고, 또 매일 같이 수십 장의 종이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지금 인류의 10분의 1이 이렇게 해도 지구가 못 견뎌 하느데, 그런 생활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겠어요? 조만간 생태계가 붕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차워의 구비 문학에 대해, 지금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일지 모르나,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태학적 사고라는 것은 문명화 이후 인류가 당연지사로 여겨온 관습과 가치 전부를 뿌리로부터 다시 검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자 중심의 문명 생활의 문제도 근본적인 각도에서 새로이 짚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28-9쪽)

 

 

 

 

그런데, 요즘 어디서 읽은 내용입니다만, 독일 튀빙겐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이 20년 동안 조사를 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연평균 1퍼센트의 비율로 청소년들의 감각 능력이 퇴화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 20년에 걸쳐 그 이전에 비해 20퍼센트나 감각이 둔화되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미세한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즈 세대는 어지간한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대뇌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간에 망상 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요. 예전 청소년들에게는 조그마한 소리도 그 망상 구조에 반응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작은 소리들은 아예 거기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충격적인 큰 소리들만 들리는 것이죠. 시각 능력도 그래요. 전에는 가령 붉은 색 계통이라면 360개나 가려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붉은 색 중 분간할 수 있는 것은 100개 정도로 줄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뻘건 색깔이 아니면 식별하지 못한다는 얘기에요. 이런 보고 내용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양을 보면서, 전자 오락실의 굉장한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든지, 늘상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을 보면서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예요. 이미 감각이 둔화디어 아주 충격적인 것들에만 반응할 수 밖에 없게 된었다면, 그 심성은 자연히 거칠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사실이 게 제일 문제란 말이죠. 하기는 20년 전의 사람들도 그 보다 훨씬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 감각이 둔화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이 인간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급격하고 가장 심각하게 환경이 변화하고 손상되어 온 시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시기에 아마 감각 능력에 가장 급격한 쇠퇴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겠지요.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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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소멸

지난 일요일엔 오랜만에 녹색평론 대전독자모임에 참석했다.

이얘기 저얘기 하다보니 6.25와 월남전을 겪은 한국사회 극우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때 한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 분들은 스스로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정치적 설득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는것 같아요. 그래서 레드 컴플렉스같은 문제는 오히려 이런 나이 드신 분들이 생물학적으로 소멸되는 시점 이후에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즉 반공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솔까말'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들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이런 분들이 죽기 전에는 레드 컴플렉스가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6.25를 통해 형성된 냉전적 사고방식은 사실상 '생물학적으로' 소멸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진보신당 제2창당대회에서 강령문제를 토론했을 때이다. 김상봉 교수가 주축이 되어 작성된 강령에는 통일문제에 대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라고 다소 원론적인 입장이 담겨 있었다. (이것저것 부연설명이 더 있긴 했는데 뭐 지금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해 한 대의원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수정 안건을 냈다. 지금 기억으로는 '민족공동체 지향'이라는 표현을 '인류공동체 지향'으로 고치자고 했던 것 같다. 표결에서 수정 안건이 부결되긴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찬성표를 던진 대의원들 대부분은 예전 사회당 출신이었다더라.

 

어찌하다보니 최초 수정안건을 냈던 대의원과 얘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분의 생각은 대충 이랬다. 분단이라는 문제가 아픈 역사의 기억이긴 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의 모순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분단 이후 60년이 넘는 기간동안 서로 다른 체제를 살아오면서 남과 북은 사실상 남이 되지 않았느냐? 이런 상황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러운 민족주의일 뿐이다. 이산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분들도 몇 십년 안에 이 땅에 안 계실 분들이다. 그분들의 후손들은 사실상 분단의 아픔 같은 것을 모르는, 아니 그것과 이질적인 경험을 겪어왔던 세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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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강제체취법, 국무회의 통과

조두순, 강호순 DNA 보관된다 (연합뉴스, 10.20)

 

 

또 이렇게 은근슬쩍 법 하나를 날치기 하려 한다. 아직 국무회의에서만 통과된 것이라고는 하나 국회에서는 어떨까? 요새 하도 싸울 일이 많아서 이런 것 정도는 여론에 묻어가는 흐름으로 그냥 가뿐하게 통과될 것 같은데... 실제로 국회의원들도 이런 사안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것도 같고...

 

이런걸 보면 명박 정부는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포퓰리즘 정권인듯 하다. 그들은 정확히 대중의 정념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연쇄살인범, 아동성폭행범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니까 이들을 때려잡을 쇠몽둥이를 준비해 주시니, 국민들이 박수치고 지지율을 올라가고... 뭐 요딴 나라가 다 있나?

 

대체 강력범죄 잡는 거랑 DNA 보관하는 거랑 무슨 상관일까? 이런식으로 점점 DNA정보를 국가기관이 독점하기 시작하면 DNA를 통한 계급분할이 벌어질 것이다. 강호순, 조두순과 DNA가 비슷하면 범죄 가능성이 높다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두렵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였던가? 영화에서도 가끔 이런 상황이 다뤄지는 것 같던데... 어쨌든 (좀 수그러든 쟁점이긴 하지만) 사형제 폐지 문제보다 이런 사안이 더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언론에서도 이런 걸 보도할꺼면 보관된 DNA가 어떻게 사용되며, DNA 정보에 따른 피의자 처리 여부는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야 할 거 아닌가?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라면 법안 초안은 다 있을 텐데... 그런 정보도 못 얻나? 이 나라 언론에게 심층보도 따위를 주문하는 내가 바보지...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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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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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약간의 변명

 

내가 그의 책에 논평하는 것은 적절한 것일까? 장애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사실상 전무한 국내 좌파의 토양 위에서 그나마 장애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글들을 써왔던 수유+너머의 고병권마저도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사실 내가 김도현의 책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애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내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병권의 말을 기준으로 하자면 내가 '서평'이라는 큰 타이틀을 걸고 '낙서' 수준으로라도 글을 찌끄리는 것은 상당히 발칙한 생각이겠지만, 버스비 천원이 아까워 3-40분 거리 정도는 가뿐하게 걸어다니는 내가 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이 책을 샀으니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평 올리는 사람들마냥 몇 마디 코멘트 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일단 뭔가 평을 하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른 문헌들, 특히 논평하려는 책과 다른 관점을 가진 문헌들과 비교하는 것 정도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더군다나 나 같은 풋내기 독자가 이 책을 평하는 글을, 심지어 낙서수준으로라도 쓴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국내에서 장애문제를 자기 학문적 과제로 다루는 사회복지학이나 특수교육학 전문서적을 제외하고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애(학) 관련 서적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내가 봤을 때 (물론 공부를 전혀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장애복지 어쩌구 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그냥 '장애'라는 단어를 '노인'이나 '아동' 등으로 바꿔놓으면 또 아주 새롭고(?) '훌륭한'(??) 이론서가 될 만큼, 장애문제 자체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정이다보니 김도현의 <장애학 함께 읽기>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국내출판 문헌만 봤을 때) 전공서적스러운 몇 개의 문헌과 저자 자신이 이전에 쓴 다른 책을 제외하고는 장애문제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책은 전문 연구자도 아닌 저자가 거의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해외 원문서적 찾아가며 읽어낸 장애학의 정수를 그의 말마따나 소화한 만큼 보여주는, 그래서 완전 알짜배기로만 뭉쳐있는 그런 책이다.

 

 

 

내가 읽은 <장애학 함께 읽기>

 

이 책의 1부는 주로 '장애' 자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이 중에서 특히 주로 사회적 생성주의 모형에 따르는 '사회적 장애이론'에 대한 소개에 할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 관점은 그의 전작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도 얼마간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주로 영국 리즈대학 장애학연구센터의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운동세력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몸의 사회학 등)간의 논쟁을 덧붙이면서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장애학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나아가 2부에서는 장애학이 사회운동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을 엮어놓는데, 이 부분에서는 특히나 저자의 폭넓은 독서편력이 돋보인다. 그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대안사회체제에 대한 논쟁에 장애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장애와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폴 애벌리의 '노동거부'와 '기본소득'론, 그리고 이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경로로서 울리히 벡의 '새로운 노동세계'건설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이 둘을 경쟁시킨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제도정치와 비제도정치의 결합 또는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논쟁을 장애인운동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다.

 

노회찬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 책이 노회찬의 이 말을 더 근원적인 물음에 닿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애인운동을 전체 사회운동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물음. 젠더가 배제된 정치여서는 안된다고 이해했다면, 이는 곧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단순한 '부분집합'이 아니라 사회운동 자체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우리 운동의 전략적 심급으로 사고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운동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시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말미에서 발리바르가 제기했던 '노동과 자본의 모순으로 포섭할 수 없는 인간학적 차이'라는 시각을 환기시키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장애를 인간학적 차이로 이해하고 이로 인한 모순들이 다른 어떤것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일전에 나는 어떤 활동가가 여성운동이 왜 전략적 심급을 갖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장애인운동과 다르게 여성운동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장애인운동은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전체운동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 심급이 아니라는 것이고, 여성운동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넘어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전체 사회운동 내에서 장애인운동의 근원적 위치를 물을 수 있는 통로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2부를 읽으면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 '장애 정치' 부분은 장애정치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사회운동론을 다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는 주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탄생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쟁인, 당이냐 사회운동이냐라는 쟁점을 환기시키고 여기에 장애문제를 살짝 얹어놓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쉽다'라는 느낌이 책 자체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논의를 둘러싼 장애정치의 발전 수준에 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장애정치에 대한 논의가 이런식으로밖에 갈 수 없는 것은 저자 자신의 논의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애운동이 세계 어디에서도 정치무대의 제대로된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적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 자신도 불가피하게(?) 장애운동 외부의 이론적 자원들을 동원했던 것일테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이론적 자원에 근거를 둔 논의 방식이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밑거름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활동가의 롤모델

 

어쩌다보니 난 지금까지 김도현씨가 낸 3권의 책을 다 사보게 되었다. 근데 좀 씁쓸한 것은 그의 책 세권이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운동 관련된 책 중에 한권 빼고 나머지 다 라는 사실이다. (그 한권은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이다) 내가 그 동안 책을 많이 본 편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장애문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고 있던 편이다. (그냥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데 내가 본 4권에 장애문제 관련된 책 중에 3권을 김도현씨가 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장애운동의 이론화, 대중화를 위해서 그 혼자 독고다이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공부하고 투쟁하는 사회운동가의 전형적인 롤모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참 그런 의미에서 김진균상 같은 것은 정말 아무한테나 주는 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에 이 허섭스러운 서평, 아니 낙서를 보시는 분들에게 <장애학 함께 읽기>라는 양서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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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구르는돌님의 [DJ 경제학] 에 관련된 글.
 

 

 

책을 읽은지는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서야 후기를 남긴다. 사실 그냥 김대중의 경제학이기 때문에 관심이 간 것도 있지만, 하버드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는 책이라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생각을 갖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서야 대학에서 교재로 쓰는 책들이 항상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하버드라고해서 별 수 있겠나...

 

본문의 내용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고인에게 괜히 몇 가지 따지자면,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바탕이 된 논문을 미국의 교수들이 읽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의했다는데, 그 교수들이 대체 누구인지 전혀 얘기를 안한다. 그냥 '저명한 교수'라고만 말한다. 뭐야? 이름이 '저명한'이야? 게다가 남의 말을 인용한 부분들에서 한 번도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처음에 논문으로 쓰여졌던 것을 대중적 출판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러 뺀 건가 싶으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이게 뭐 신변잡기 농담따먹는 책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 싶다. 그가 책 전체에서 출처를 밝힌 부분은 오직 숫자와 표로 이루어진 통계자료들 뿐이다.

 

<대중참여경제론>에 담긴 김대중의 경제사상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경제는 지금껏 정부주도의 관치경제의 심각한 폐해를 겪어왔다. 관치경제는 자유로운 경제주체의 활동을 제약하고 독재정권과 유착된 일부 재벌에게만 편향적으로 재정분배가 이뤄지도록 했다.  2)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금리가 낮게 유지됨으로 인해서 은행으로 돈이 모이질 않고, 게다가 부족한 은행자금의 기업 대출과정에 정치권력이 개입함으로써 대출을 통해 사회적 부가 대거 재벌로 이전된다. 은행을 통한 자산증식의 경로를 찾지 못한 돈들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로 몰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  3) 결국 이런 정부주도 경제성장 정책은 일부재벌과 대토지소유자의 이익만을 보장하고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이익을 배제한다.  4) 한국이 기존의 경제성장의 성과를 이어받아 '세계 8대 선진국에 들려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중과세를 매겨 불로소득을 차단함과 동시에, 금리 자유화-한국은행 독립, 그리고 법인세 인하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원활히 작동케 해, 금융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런 논의 속에서 얼마간 정치적인 결론도 도출되는데, 이는 어느정도 87년 이후 정세에서 김대중이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의 재구축에 대한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에는 권위주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일부 재벌과 대토지 소유자가 한 편에 있고, 다른 한편엔 건전한 기업가(중소기업)과 근로자, 그리고 민주화 세력이 버티고 있다. 후자의 세력은 지금껏 관치경제의 폐해로 인해 성장이 발목잡힌 이들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제주체이다. 이들은 성장된 금융시장에 동등한 투자자로서 활동할 수 있으며, 특히 근로자들은 소규모 다수조합으로 활동하여 국민경제에 제동을 걸기보다는 광범위한 전국적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국가적 단위의 협상에 참여해 자신들의 법적 권익을 지키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요로한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나는 김대중이 정말 준비된 대통령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런 내용은 IMF가 남한에 요구했던 경제개혁 조치의 주요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그리하여, 김대중이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것이, IMF의 강요때문이었다고 항변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니들이 김대중을 그렇게 떠받들고 싶으면 최소한 선상님이 쓰신 책 정도는 읽어보고 떠들어야지...

 

이 책을 읽으면 김대중이 추진했던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이 IMF 사태에 의해 우발적으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추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단위 노동조합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실제 파견법, 정리해고법과 맞거래된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놓인 잘 뻗은 고속도로가 참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항간에는 김대중이 2000년도에 생산적 복지를 내걸고 기초생활보장법 도입한 때에 정권 초반 신자유주의 정책과 단절하고, 그의 원래 경제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중경제론을 실현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는 놈도 있더라. 그러나 이 말을 김대중이 대선 첫 도전 때 낸 <대중경제 100문 100답> 집필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심지어 요즘엔 그 때문에 대필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는 박현채 선상님께서 듣는다면 저승문을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으실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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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인, 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

 

 

나는 작년 초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걸 매우 띠겁게 바라보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당을 뛰쳐나가신 분들이 내걸은 이유(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전자의 것은 시기적으로 좀 쌩뚱맞고, 후자의 것은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오십보백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에겐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임종인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신당의 두 상임대표라는 사람들이 맨날 임종인을 끌어들이려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듯한 모양새가 모양새가 영 띠꺼워 보였기 때문이다.(=>요 문장은 좀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대충 넘어가 주시길...) 임종인이 대체 뭔대? 얼마나 잘난 놈이길래 열우당에 있던 놈을 데려오려고 저리도 거품을 무나? 어렴풋하게 예전에 이라크 파병에 대해 비판하면서 행정부와 각을 세웠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런 식의 활동은 진정성이라고는 개미 코딱지 만큼도 안 느껴지는 천정배, 김근태 이런 놈들도 다 하던 짓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래봤자 열우당인데..."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건 내 정치적 당파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열우당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난 이게 어떤 측면에선 요즈음 일반적 시민들의 구 집권세력에 대한 보편정서가 나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체현된 것이라 (강하게!) 주당한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결정하고 진보정당들에 지지요청을 보낼 즈음 레디앙과 한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임종인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진보의 재구성'을 외부 사람 끌어오기로 대체하려는 신당의 몇몇 어르신들의 행태에 대해선 여전히 띠거운게 내 기본적인 관점이다.) 사실상 친노파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친노신당을 친박연대에 비유하는 것을 보고 그냥 큰 제목만 읽어보고 닫으려던 기사를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블로거 한윤형의 말을 빌자면 "2004년 탄핵열풍을 업고 열린우리당에서 금뱃지를 단 인물들 중에 자신을 뽑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헤아렸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외환카드 노조위원장을 지낸 장화식과 함께 쓴 <법률사무소 김앤장>을 읽게되었다. 예전에도 읽으려다가 임종인의 '출신성분'이 맘에 걸려 멀리하다가 위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나름 그와의 '오해'를 풀고 편한 마음으로 읽어갔다.

 

일단 최종 감상평(??)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런 책을 쓰고도 아직 이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는 거다. 삼성 이건희 회장보다 1년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을 대표 변호사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사적 권력 집단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속옷까지 벗겨서 낱낱이 까발릴 생각을 하다니, 이 양반들 간댕이를 수십개씩 은행에다 냉동보관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실제로 위클리경향의 전신인 뉴스메이커에서 김앤장 비판성 기사를 썼다가 김앤장으로부터 몇 십억대 소송 협박을 받고 정정기사를 내보내야만 했던 전례를 저자들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책 속에는 대한민국 최고 로펌이 살아가는 방법이 조목조목 드러난다. 핵심은 이중생활!! 대한변협에는 그냥 공동사업자(이거 맞나?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서 정확한지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로 등록해서 변호사법상 로펌에 가해지는 제약을 피하고, 국세청에는 로펌으로 등록해서 세제상의 혜택을 받는다. 게다가 수많은 고위공직자 출신들을 고문으로 거느린 이 로펌은 당당히 2년에 한번씩 국세청으로부터 납세자 표창을 받아서 주기적으로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

 

이건 그냥 도의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뭐 전과자들이 장관되고 총리도 되는 세상에 쩝... 그러나 정치적으로, 국민경제적으로 문제인 것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위한 법률해석, 나아가 법개정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막강파워를 지녔다는 점이다. 세계최초 문자해고를 발명하고, 단협해지를 단체협상과 함께가는 연례행사로 만들어 버린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 한다. 진로소주가 불법적으로 헐값 매각될 당시에도 진로 사장의 등뒤에서 칼끝을 겨누던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이다. 기업 사장까지 무릎꿇게 할 정도면 노동자들은 집단 암매장 시켜도 눈하나 깜빡 안할 놈들이라는거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이 devil's advocates(악마의 옹호자)를 여론의 심판대 위로 끌고 올 여지를 만들어 놓은 두 저자에게 늦었지만 박수를 보낸다. 여하간에 이번 보궐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서 18대 국회에서도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이게 하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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