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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1/27
    홍기빈 강연회 후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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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11/24
    친북인명사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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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11/22
    순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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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11/20
    요즘 읽는 책 (2)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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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11/20
    요즘 읽는 책 (1) - 지식e 시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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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11/18
    민경우의 정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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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9/11/17
    '한국사회체제논쟁' 토론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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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9/11/15
    학생회 운동(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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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11/14
    체제논쟁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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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11/12
    금융위기 정리 4 (<2008 글로벌 금융위기>, 최혁 저)
    구르는돌

홍기빈 강연회 후기

어제 대전시민아카데미에서 홍기빈씨를 모시고 강연을 한다기에 가봤다.

주제가 "홍기빈과 함께 읽는 폴라니"였는데,

그의 책은 재미있게 읽은 것도 좀 많고, 폴라니에 대해서 언론 상에서 유행처럼 하는 얘기 말고

좀 더 영양가 있는 얘기가 있을까 싶어 가보게 되었다.

 

물론 워낙 대중강연의 형태를 띤 것이어서

엄청 새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최근의 경제상황과 돈벌이=경제로 통용되는 세간의 경제관념에 대해

일상적인 예들로 고정관념을 깨주는 정도의 강연이었다.

그런만큼 사람들의 호응도 좋은 그런 강연이었다.

 

그러나 강연에서 했던 그런 얘기들은 사실 그가 쓴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라

나의 관심사와는 좀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최근에 폴라니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따르겠다는 사람들도 폴라니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고 좀 뜨악했는데, 그동안 한미FTA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홍기빈 선생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폴라니 독해에 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질문에 대해 홍기빈은 "내가 무슨 가톨릭 교황도, 폴라니 대변인도 아닌데 그 사람들이 폴라니 읽는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질문 자체를 좀 어이없게 생각한 듯 했다. 사실 나는 더 직접적으로 "친노신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강연 주제가 폴라니이고 하니 약간의 우회로를 선택한 것이어서 그런 반응을 그냥 덤덤히 받아들였다.

 

어쨌든 홍기빈은 그들이 폴라니를 읽기 시작했다는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들이 읽은 폴라니가 그들 정책 속에서 어떤 영향을 보여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반성 했습니다. 작년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FTA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죠? 그건 그의 솔직한 자기반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써 접하는 정보라는 것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격이 달라요. 노무현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따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그 정도로 소탈한 사람이죠. 저는 예전에 노무현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모임, 미래발전연구소라는 데에 가서도 폴라니에 대해 발제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들이 노무현의 어떤 측면을 계승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정확히 그렇게 한미FTA에 대해서 반성했던 그런 자세를 배우라고..."

 

난 이 새롭디 새로운 주장에 순간 '얼음'이 되었다. 내가 아는 홍기빈은 그래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진보 지식인 중에서는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맥락없이 '대통령 노무현은 반성했다'는 말은 어떤 근거에서 타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증거로 삼아볼 수 있는 발언은 작년에 그가 민주주의2.0에 한미FTA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에 대해 심상정이 '지난 5년간 정책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반론을 펴면서 벌어진 논쟁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도 확인되듯이, 노무현은 심상정의 '반성 요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내가 모르는 노무현의 발언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 봐서는 당췌 그가 어떤 부분에서 반성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홍기빈의 말처럼, 이런 판단 과정에서 노무현은 어떤 정치적 계산도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반성'이 아니라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경제학적 상식에 기초한 것일 테다. 그 논쟁 와중에 노무현이 한 이야기는 한미FTA를 철회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심상정이 그렇게 주장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잘 보라) 오바마가 재협상 얘기하고 있으니 섣불리 국회비준하지말고 재협상 준비해서 '완성된FTA' 체결하자는 거였다.

 

난 대체 홍기빈이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이건 전적으로 '노무현 착시효과'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민주당 세력도 아니고) 노무현 그 자체에 대한 희망과 환상, 기대의 이 말도 안되는 근거지는 어디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자들이 죽은자를 대신해 그의 입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은자를 대신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한다는 얘기가 이렇게 천가지 만가지이니 죽은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요즘 故 전인권 박사가 쓴 [박정희 평전]을 읽고 있는데, 노무현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평전이 당장 필요한 시점이다. 전인권 박사가 박정희의 정치적 행동의 심리사회학적 근원을 파헤쳤듯이, 노무현이 대중들에게 환상과 희망, 기대를 생성케 했던 정치인 노무현의 정신분석학적 근원과 그것이 대중과 상호작용했던 매커니즘 그 자체에 대해 까발려놓고 따지고 들어가 봐야 할 시점이다.

 

故 전인권 박사가 97년에 쓴 [김대중을 계산하자]는 '김대중 문제'를 우회하고는 지역주의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를 죽은 놈 취급하는 일련의 정치적 언사들은 우익이든 좌익이든 그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necrophilia(시체애호증)라고 불렀다. (김대중의 경우와는 좀 다르긴 하나) 말이 없는 죽은자를 붙잡고 빙의한 것처럼 그의 말을 대신하고자 하는 이들도 자신이 '시체애호증'이 걸린건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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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니 우익단체들에서 친일보다 친북이 문제라면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한덴다.

 

그래서 어제 잠깐 생각해 봤는데, 그 '친북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갈 만한 사람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 만큼 반발을 할까? 내가 볼 땐 정 반대이거나 그냥 쌩깔 것 같다.

 

친일은 누가봐도 나쁜 거지만, 친북은 나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좋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런게 아닐까?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왔는데, 강도를 도와주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것인가?

 

동생이 아버지랑 싸우고 가출하면서 아버지 비상금을 훔쳐갔다. 그렇게 동생은 10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냈는데,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어 먹고살기가 갑갑해졌다. 이런 동생을 아버지 몰래 도와주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후자의 비유는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친북을 이념의 문제를 떠나서 그 자체로 쳐죽일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출한 자기 자식을 결국엔 능지처참 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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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땅에서 뺏어 먹은 만큼 양분을 땅에 되돌려주는 순환농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인분과 축분이 단지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됨으로써 심각한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어있을 뿐이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써서는 토질의 악화 내지는 쇠약화는 필연적이다. 땅으로 되돌려주어야 할 인간의 배설물이 지금은 그야말로 똥 취급만 당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서양식 근대산업문명의 논리가 관철된 결과이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있는 서양 작가인데, 그는 어디선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똥을 누게 하는 성가신 일을 하게 했을 리는 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서양 근대 지식인의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순환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근본적으로 무지한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똥을 눈다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하느님이 완벽하다는 것을 뜻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똥이 없다면 세상이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질병이 있다는 게 도리어 자연 질서의 완벽함을 표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사회에는 약자도 있고 장애인도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 필요하고, 그런 관계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깊이가 형성되고, 우리의 인간성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발생하고, 시와 철학과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 김종철,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녹색평론> 109호 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머스코기 족의 주술사는 생명의 순환 과정 전체를 '교환'이라는 말로 부른다. 거기서 사냥이란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이지만, 인간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 식물이 먹게 되고, 그 식물을 다시 동물이 먹는 '영원한 순환'의 한 고리다. 그들은 사냥을 하기 전에 사냥감인 동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살기 위해 너희들을 무척  필요로 한다. ....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이 이 '지구 어머니' 속으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자라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 동물들도 그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이며 교환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이 연결된다." (베어 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34쪽)

 

-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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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 (2)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얼마 전 방송된 골드미스다이어리에서 송은이는

성대모사를 제대로 못하는 신봉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신봉선씨는 능력에 비해 너무 떴어요. ㅋㅋㅋㅋ"

 

난, 이 말을 미안하지만 우석훈에게 들려주고 싶다.

 

요즘 그가 수많은 책을 순식간에 뚝딱뚝딱 내놓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는데, 그 중 몇개를 읽어보고 생각을 바꿨다. 조한혜정이 이 책의 추천사에서 쓴 것처럼 우석훈은 약간 수다맨 기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딱히 창조적인 수다라기보다는 요즘 가수들이 즐겨하는 리메이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좀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기표절의 냄새가 많이 난다. 사실 뭐 자기가 다른 책에서 썼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는 경우는 없지만, 사실상 비슷한 주장을 말을 다양하게 변주해서 이 책 저 책에 담는 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 실력없는 아이돌 가수도 기획사를 잘 만나면 초특급 스타로 발돋움 하는 것처럼, 그도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니 그 정도 책을 쓰는 것 같다. 물론 출판사가 아무나 붙잡고 '지원 해 줄테니 책 좀 써봐라' 한다고 누구나 그 정도의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테지만, 몇 년 안에 이렇게 책을 '쏟아낼' 기회가 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한 듯 하다. 자기가 본 영화, 만화책, 심지어 삼국지 얘기까지 끌어대지만 결국 하려는 얘기는 이 책에서나 저 책에서나 비슷비슷한 책을 써내는 거라면 아무리 뛰어난 수다맨이라도 그에게 이렇게 책 낼 기회가 집중되는 건 좀 아니다 싶다. 노무현 정권 때였다면 그나마 예전에 진중권이 하던 것처럼 방송이라도 하나 따내서 수다라도 떨 텐데 요새 상황이 지저분하니 우석훈에겐 그런 기회도 안 오는 듯... ㅠ.ㅠ

 

물론 나는 우석훈이 실력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난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서는 참 많은 걸 배웠다. 생태의 문제를 이토록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처럼 20대의 문제를 솔직 담백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의 장점은 대중적인 '화법' 이상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진보담론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 처럼 포장된다는 점이다. 사회과학서적 출판도 전적으로 마케팅에 의존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88만원세대>를 10만부 이상 팔면 출판사 레디앙을 망하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우석훈이 말하는 '샤넬'식의 혁명에라도 근접하게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20대 문제에 관하여...

난 이미 대학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20대이고, 앞으로 3년 동안은 계속 20대일 것이다. 그리고 20대 문제를 고민한다는 게 단지 생물학적 20대만이 아니라 소위 '장기20대'를 고민하는 문제라면 내가 사회 초년생으로 버벅대고 있을 30대 초반까지는 그 '장기20대'의 자장안에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난 20대 문제를 고민하는 어떤 글도 남 얘기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이 20대 문제를 논하는 글들은 항상 대학생 문제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도 (명시적이진 않지만) 서울 4년제 대학을 보편적 형태로 놓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도 매우 그렇다.

 

나는 <88만원 세대>에서 실업계고 졸업한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는 꼭지를 보고 가장 공감했는데, 이번 책에서는 아예 그 부분이 빠져버렸다. (아마 그 부분은 박권일이 썼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연세대 일부 학생들과 함께한 수업의 결과물이라서 그렇겠지만, 그런 만큼이나 이 책이 포괄하는 20대에 대한 논의 범위도 한계적이다.

 

스펙경쟁과 쿨함으로 무장한 20대의 자기 정체성이 어디가 한계이고, 어디부터가 급진적일 수 있는 것일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떤 대답도 못 내놓고 있다. 그저 알바노조나 만들어 보라는 떡밥만 던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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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 (1) - 지식e 시즌3

 

정말 정말... 너무 좋다.

아, 이런 책을 왜 이제서야 만났을까?

예전에도 가끔 지식채널 방송분을 몇개 본 적이 있긴 한데,

그것보다는 책으로 읽는 것을 더 추천하고 싶다.

물론 음악과 함께 듣고자 한다면 방송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난 각 꼭지별로 뒤에 4-6페이지에 걸쳐 담긴 짧은 해설이 참 좋았다.

참고문헌으로 제시된 몇 개의 책은 꼭 읽어봐야지 생각도 했고....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미술세계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복종 실험으로 알아내고자 했던 대중의 파시즘적 속성

멕시코 올림픽 시상대에서 당당히 오른손을 들어 흑인차별에 대해 항의했던 토미 스미스...

 

추천사에 쓰여있던 말처럼 정말 우리 시대의 비망록이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우니 영어공용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인상깊은 구절을 옮겨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50여 년 전

영국 유학시절

"영어 못하는 노란 원숭이"라는 조롱을 들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으로 돌아와 총리 자리에 오르자

근대화 교육정책의 핵심으로

전국 곳곳에 '영어수업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

 

"더 빨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예 일본어를 없애고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영어공용화론에 반론을 펼친

자유민권운동가 바바 다쓰이

 

"일본에서 영어만 쓴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어에 대한 동경'과

'모국어에 대한 콤플렉스'사이에서

결국 일본이 선택한 방법

 

"정부기관 내에 '번역국'을 설치하고

서양 근대 기술문명의 모든 성과들을

빠짐없이 번역하여 국민들에게 보급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바로 저런거다!!!

남의 것을 갖다 베껴도 내 말로 베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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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의 정세인식

오늘 레디앙에 뜻밖에 괜찮은 글이 실렸다.

 

민주노동당 독자노선을 비판함 (민경우)

 

이쪽 사람들이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관심이 없었는데, 민경우의 글을 보니 자주파 쪽에서도 MB나 친노세력을 바라보는 입장이 좀 제각각인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민주노동당 내에 일고 있는 '민노당 고립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근거로 제시한 정세인식이 정말 뜻밖에 귀담아 들을 만한 것 같다. 난 요즘 이 쪽 동네 사람들 정서를 잘 몰라서 그냥 얘네들은 무뇌충처럼 'MB=파시즘'이란 식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전부 다 그런건 아닌가 보다.

 

향후 정국은 남북관계의 발전, 중국의 부상, 신자유주의의 약화 등을 고려할 때(...) 조선일보류의 보수우익이 점진적으로 약화되고 대자본,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이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나 대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향후 대권은 ‘MB를 제물로 MB보다 합리적인 보수 주자’를 중심으로 ‘사회개혁이 동반되지 않는(또는 제한적인) 보수적인 재편’을 기도할 것이다.

전반적인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에 반북ㆍ반공을 이념적 지반으로 한 민간독재(또는 파시즘)는 한국에서 정착되기 어렵다. (...)

따라서 중장기적으로 경계해야할 것은 독재, 파시즘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비주류 보수+민주당 우파+친노 일부’까지를 포함한 중도보수(?) 성향의 정치세력이다. 이 경우 보수 양강 또는 보수 대 중도(내용적으로는 보수에 가까운) 양강 구도가 정착될 가능성이 있다.(이는 진보세력의 고립, 분열, 약화를 의미한다)

 

최근 '희망과 대안' 창립식에 난동을 부린 어버이연합인가 하는 단체 등의 문제를 현 정세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꽤 있어왔다. 그러나 민경우는 그런 문제는 과감하게 제껴놓자고 말한다. 결국 대세는 그 쪽이 아니라는 거다. 사실 이명박을 대통령 만들어 준 기반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없다. 조갑제는 자기네가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이명박을 찍은 서울-수도권의 386 중에 조갑제류의 말 따라 행동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이명박표 신자유주의에 있어서 4대강 사업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그닥 중요한 위치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를 세종시를 중심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해 방식이다. 노무현의 세종시가 그랬듯이, 이명박의 4대강도 포퓰리즘의 한 단면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속성상 포퓰리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같고, 그런면에서 볼 때 세종시와 4대강사업의 관계는 이복형제 쯤 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중장기적으로 '한나라당의 비주류 보수+민주당 우파+친노 일부'의 중도보수세력의 전면화를 강조하는 민경우씨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래서 그가 해당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런 상황에서 민노당/진보신당 찢어지면 공멸하는 것 뿐이니, 생명을 유지하고 싶으면 연합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연합의 대상으로 친노 일부와 민주당 소수를 포함시키자는 고민은 어떤가?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이런 구상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할 때 대체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는데, 혹여나 그럴만한 인물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진작에 민주당 당적을 버리고 나왔을 것이다. 임종인처럼 말이다. 민주당, 친노계에서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할 때에는 딱 그 정도이지 않을까? 혹여나 그런 사람이 제발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라면 민주당을 향해 러브콜을 보낼게 아니라 반대로 신나게 두들겨 패야 한다. 그래서 그들 내부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해서 한나라당의 건전보수??에 붙을 놈은 빨리 가서 붙어버리라고 하고, 나머지 그렇지 않은 놈하고 결판을 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 민주당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러브콜이 아니라 분열을 사주하는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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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체제논쟁' 토론회 후기

지난 금요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체제논쟁 관련 토론회에 다녀왔다. 사실 그날 아침 정신 없이 나와서 내가 레디앙에 투고하려고 보낸 글이 실렸는지도 몰랐는데, 서영표 교수가 발제중에 "저는 확인을 못하고 왔는데, 어떤 분이 말씀해주시길 아침에 레디앙에 새 글이 올라왔는데 손호철, 조희연 선생님을 노회하신 분이라고 표현했다더군요. (...)" 말하길래, 아 내 글이 실린거구나 하고 알게되었다. 안타깝게도 서강대에는 복도에 서서쓰는 PC가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레디앙에 올라온 내 글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여튼, 난 저녁에 일이 있어서 1부 토론회만 보고 나왔는데, 오랜만에 그런 토론회를 가보니 살짝 설래기도 하고 쫌 재밌었다.

 

음... 우선 나는 청중 토론 때 서영표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08년 촛불집회라는 우연적 계기를 통해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우연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는 문제라면 대체 08년이 체제로 규정될 이유는 뭔가? 체제라는 것이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런데 서영표 교수님의 대답은 좀 의외였다. 내가 자신의 주장을 오해했다는 거다. 자기가 삶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중요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08년체제라는 규정과는 별도로 강조한 것인데, 이걸 굳이 연결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거다. 대답을 들으면서 내가 헛다리를 짚은건가 싶어 잠시 뻘쭘해 졌는데, 1부 토론이 끝나고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자기가 강조하던 이데올로기와 삶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서영표 교수 자신이 08년 체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영표는 자신이 조희연과는 다르게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연속성을 더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말하며 약간 달리 생각해 볼 여지를 두고 있지만, 원래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기고한 글에서 이 두명의 공동저자가 손호철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강조했던 것이 08년체제 아닌가? 토론회 참석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조-서 교수는 자신들이 08년체제를 강조하는 이유를 너무 얍쌉하게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심지어 당일 토론에서 조희연 교수는 손호철 교수가 93년에 편역한 알렌 메익신즈 우드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에 나오는 라클라우/무페에 대한 비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의 화법은 이랬던 것 같다. "노무현-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로 동일선상에 있다는 지적에 모두 동의한다. (즉, 그런 지적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당연함을 뛰어 넘어 대안의 정치를 만들 수 있는 헤게모니 전략이다."

 

그러나 그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실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서 교수가 그렇게 강조하는 대중들은 알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진보운동이 이 모양 이 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이 아니라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인식'하도록)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방법이 서영표 교수가 우려하는 것처럼 계몽주의적인 방법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게모니 전략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것은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이 아니라 '급진적' 헤게모니 전략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너무 두서없는 메모인 것 같긴 한데... 흠... 어쨌든 난 아직도 조희연-서영표 교수의 주장이 중간 설명 과정을 한참 빼먹은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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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 운동

지난 금요일 저녁, 출신 동아리의 1년 중 가장 큰 행사가 있어 갔다왔다.

뒷풀이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 때 한 얘기 중

혹시나 나중에 까먹으면 안될 것 같은 얘기가 있어 메모를 해둘까 한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S모 후배님은 올 해 총학생회 선거 대응에 대해 고민을 해 봤단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얘들도 있었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얘들도 있었다는데,

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 내놓은 근거들이 대략 5년전에도 들어왔던,

너무나 해묵은 얘기들이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올 해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더 이상 학생운동이 학생회운동으로는 생명유지 자체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아래 이야기들은 그 날 했던 얘기에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합한 것이다.)

 

 

예전에 학생운동의 역사 같은 것을 공부하면서 9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대략 이렇게 보고 있었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략 "학생들은 젊음의 패기와 배움의 자리에 있다는 가능성...."

뭐 이런 거였다.

 

여기서 정의하는 학생운동은 '대학생' 자체일 수도 있겠지만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자면 '20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학생운동 하면 20대 젊은이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거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균열적인 방식으로' 형성하는 공간이 바로 대학이고,

그들의 '형성중인' 정체성과 대면하여 저항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오늘날에 이르러 완전히 뒤흔들리고 있다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 '학생운동'의 경험 덕분인데,

난 07년 쯤에 평생교육 문제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고민의 결과를 아주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학생이라는 거다.

 

이미 대학과 대학이 아닌 곳의 경계가 무너진지는 오래이다.

직장 끝나고 영어회화 배우러 다니는 직장인은 90년대 개념으로 보자면 학생이 아니었지만

2000년대 개념으로는 분명 학생이다.

난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얼마전까지 방통대 경제학과에 편입해서 공부를 좀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지금은 포기했지만)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학생신분이고 언제부터가

학생신분이 아닌가?

게다가 전통적인 의미의 대학생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구축하는 공간은 어디인가? 학생회실, 학회실, 강의실?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마지막으로,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문제이지만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안가고 바로 취직하는 20대의 문제이다.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세대>에서는 그 중에서도 실업계고 졸업 후 취직하는 여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파트가 있는데, 90년대 학생운동의 개념으로는 절대 이런 주체들의 문제를

사고할 수 없다.

 

90년대 학생운동의 자장안에 묶여있는 지금의 학생운동, 특히 학생회운동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입학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68혁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사고에 기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평생학습사회로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학생운동의 상은 소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80년대 말,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생이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이 사회의 주축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나타났던 일시적인 현상이지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난 이 시점에서 '백 투 더 베이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곧 '학생'이라는 만들어진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그리고 광주항쟁에서의 들불야학 운동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베이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덧붙이고 싶은 점은 학생운동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릴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도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이 평생학습사회체제에 적합한 저항주체로서의 노동자-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은 전적으로 '학생운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와 동시에 학생운동은 대학의 벽을 넘어서 대학 밖의 학교와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 서동진씨 논문을 여기저기서 찾아 놓고 오늘 읽고 있었는데,

그걸 읽고 있자니 나의 이런 생각이 조금 더 근거를 찾은 것 같다.

예전에 알라딘 블로거(??) 게슴츠레님이 <학생운동의 종언 혹은 부활의 기회>라는 글에서

학생회운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은 전적으로 '고려대'니까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게 고려대에서도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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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논쟁에 대한 논평

 

블로그에 바로 올릴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레디앙에 투고를 했는데 민망하게도 실려버리고 말았다.

댓글들이 좀 내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도 있어서 좀 고민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젯밤 마신 술이 깨면 천천히 고민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레디앙에서는 예전 프레시안과 같이 내용을 멋대로 뜯어고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아서 참 좋다. 게다가 제목도 좀 야하긴 하지만 적절하게 뽑아주신것 같다. 여튼 감사 ^^;;

 

 

레디앙 기사 주소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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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체제론, 자의적 공상의 산물"
[투고-체제논쟁] 전형적 운동권 논리…'FTA체제'가 적합
 
 
 

엊그제서야 <레디앙>에서 뜨겁게 진행되었던 '체제논쟁'에 관한 글들을 다 읽었다. 초반에 올라온 손호철과 조희연의 글을 읽은 지는 좀 됐는데, 후반에 올라온 이승원, 이종보, 최원의 글은 이제서야 읽었다. 뒤의 글들은 어지간히 긴 게 아니어서 화면으로 보기 힘들어 이면지에 출력해서 봐야 했다.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몇 가지 정리를 해보려 한다.

1. '대안제시'가 중요하다는 입장에 대해서

이번 논쟁 자체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다른 중요한 논의를 하는데 필요한 전제로 얘기해야만 할 것 같아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손호철, 조희연 논쟁에 부쳐 글을 기고한 이종보씨는 진보 담론이 항상 반대에만 머무른다고 비판하면서 대안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이다. 그런데 왜 난 이런 주장을 접하면서 우리 동네 주민센터 헬스장에서 매일 '00일 안에 몸짱되기' 같은 책을 보며 운동하는 뚱뚱한 남학생이 생각나는 걸까? 내가 볼 땐, 아니 누가 봐도 그 학생은 가만히 서서 아령이나 들고 있을 일이 아니라, 체지방 감량을 위해 러닝머신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뭐 몸짱이 되는 말든 할 거 아닌가?

한 마디로 '몸짱'이라는 대안은 있으나, 자신의 문제가 뭔지 모르는 거다. 전형적인 몸짱들의 환상적인 복근과 팔뚝 근육에 매료되어 자기 상태가 뭔지 파악이 안 되니 매일 헛짓을 해대는 거다.

반신자유주의니 반MB니 하는 소리는 반대 담론에만 머무르는 것이니 한계적이며, 대안을 얘기해야 한다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그 체질에 맞는 가장 알맞는 대안도 나오는 거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서구복지국가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걸 가장 이상적인 대안인 양 아무데나 들이대는 습관은 저 안타까운 남학생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종보씨는 자신의 글에서 우리사회에서 '성장'을 얘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 대안이라고 '복지성장'을 꺼내들던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모순점인 성장주의를 비판할 여지를 차단해 버리는 셈이다.

다이어트 하려는 사람이 비대해진 체지방을 문제삼지 않고 무슨 운동을 한단 말인가? '성장'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두려는 것은 이종보씨가 사고하는 대안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무엇을 반대하고 비판할지를 제대로 알아야 대안도 나오는 거다.

2. 08년 체제? 정권 바뀔 때마다 체제가 바뀌나?

이미 최원씨가 잘 비판한 내용이긴 하지만, 사족을 달자면 난 08년 체제라는 말이야말로 '체제'론을 희화화시키는 발언이라 생각한다. 이런 식이라면 5년에 한 번 대통령 바뀔 때마다 체제도 바뀌는 거다. 조희연이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데에 써먹는 이유라는 것이 고작 통치 스타일 수준의 것들인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체제'라는 것이 이런 '통치 스타일'로 변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사회체제'social system를 논의한다는 것은 사회를 이루는 여러 부문들의 총체적인 상호작용의 작동방식의 결정적인 변화가 어디서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조희연의 글에서는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의미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이 얘기를 먼저 해야 전술이니 전략이니 하는 것이 나오는 건데, 조희연은 오히려 몇 발짝 건너뛰어 '헤게모니 전략'부터 얘기하고 있다.

08년 체제가 의미있는 것이라면 나는 93년 체제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93년이 어떤 해인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정권을 잡은 해 아닌가? 김영삼이 요즘 노무현 보고 빨갱이의 자식이니 뭐니 노망 난 소리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김영삼은 79년 YH노조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에 대한 보복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해 부마항쟁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을 터지게 한 장본인 아닌가?

게다가 그는 집권 당시 하나회 해체를 통해 군부독재의 뿌리를 잘라버린 장본인이다. 왜 김영삼의 이 '위대하신' 면은 보지 않고 다 늙어서 헛소리 하는 것만 가지고 트집을 잡나? 조희연은 손호철의 97년체제론을 경제주의로 비판하면서 이 시기에 일어난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성격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97년이 아니라 93년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난 그의 주장이 '김대중 착시효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하간에 조희연의 08년체제라는 규정은 상당히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만들어낸 공상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체제'에 대한 논의는 뒤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런 문제점은 서영표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영표는 논쟁의 와중에 쌩뚱맞고 황당하게도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소리를 한다. 다음의 글을 보자.

2009년 한국 사람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하고, 투자하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결과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문제의 고리는 ‘행복하지 않음’을 체제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인의 능력 또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부패로 생각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지형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바로 당신들의 생활양식이, 자유, 평등, 정의, 인권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외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력하다. 21세기 대항헤게모니는 계몽주의적 전략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계몽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대항헤게모니 전략은 현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상주의적 규범에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처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 "일상의 정치공간에 대한 통찰 부족" 09/09/23)


최소한 이 체제논쟁에 참여하는, 그리고 이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누구도 사람들의 일상을 변혁해야 하고, 이는 계몽주의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영표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대체 그 대항헤게모니를 형성하기 위해서 08년체제라는 규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이다.

서영표의 이런 발언 때문에 문제의 앞뒤가 뒤엉켜 버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08년 이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는 운동이 필요 없었다는 얘기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그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거다.

그러면서 서영표는 어느새 체제논의를 미시적인 수준의 운동 논의로 전환시킨다. 미시적인 수준의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과 체제논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도 스스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음'을 체제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의 고리라고 했다.

문제가 체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결여에서 시작됐는데 해결을 미시적으로 한다? 이것은 사실상 체제논의에 대한 방기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번 체제논쟁이 80년대 사구체논쟁보다 한참 후퇴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서강대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서영표가 제출한 토론문을 보니 그의 입장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정치체제, 경제체제와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체제'로 설정하려 한다. 그러니 손호철과 서영표는 사실상 동문서답을 한 거다. 손호철의 사회체제는 이 세 가지를 포괄하는 것인데, 서영표는 부분으로서의 사회체제만을 말했으니...

3. 08년체제 규정은 단순한 현실 묘사일 뿐

여기서 조희연-서영표가 주장하는 08년체제의 근거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97년 체제에서 대중들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저하되는 데 비해 08년 체제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이라는 정세적 변화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인 역사적 블록을 흔들 수 있는 정치투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 분석한다. (<레디앙> 기사 "손호철 97체제론은 경제주의 편향" 참조)

즉 경제체제는 변함이 없는데 정치체제에서의 권위주의적 전환이 투쟁의 가능성을 넓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08년 이후 저항의 방식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나는 08년 이후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조희연-서영표의 주장은 쇠고기 촛불집회 이후 드러난 대중 이데올로기 표출 방식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대중 이데올로기의 표출 방식인 것이지, 투쟁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투쟁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투쟁은 정치체제든 경제체제든 그것을 전복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의 흐름을 지칭한다. 그러나 08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런 '투쟁'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희연-서영표는 대중 저항 이데올로기를 정치레짐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받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노무현의 탈권위주의와 이명박의 신보수주의를 특권화시킨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과 이명박 시대를 관통하여 나타나는 대중의 '정치'에 대한 태도의 일관성을 놓치는 것이다.

노무현 시대에 가장 유명한 정치 유행어는 단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였다. 그는 단연 최고의 국민 코미디의 소재였다. 노무현에 대한 실망은 박정희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명박 시대에는 어떤가? 촛불집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이 때도 최고의 유행어는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였다. 국민들에게 대통령은 한낱 설치류 동물과 동급 취급을 받았다. 이런 대중적 정서는 '허경영'이라는 새로운 개그 스타를 탄생시켰다.

이 두 시기 대중 이데올로기 상의 차이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이런 '정치의 코미디화'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에 대한 조롱이지 투쟁이 아니다. 물론 대중 저항이 이전보다 진일보한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소한 어떤 체제상의 변화라고 할 정도가 되려면 전국적인 정치-경제적 쟁점에 이 대중 저항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용산과 평택이 가장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했는가?

그렇기 때문에 괜스레 08년체제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를 기점으로 굉장한 양적 증가를 보였던 대중적 불만 표출의 현상을 기술한 것이지 그 심층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체제규정으로 볼 수는 없다.

서영표 자신은 "실재에 대한 분석은 표층에서 드러나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추상 수준의 이론적 고찰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의 글 어디에서도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내가 가장 의아스러웠던 것은 바로 이들이 주장하는 '국민적 정치전선'이라는 개념이다. 아래 인용글을 통해서 그 의미에 대해 대강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손호철) 선생님께서 87년 체제론을 비판하고 97년 체제론을 제시하는 이유는 소위 맹목적인 반MB론자들의 이론적 토대를 잘라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조희연 선생님이 소위 87년 체제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는 ‘운동권’이 아닌, 그리고 ‘이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는, 그들의 주체성 안에서는 87년의 ‘민주주의와 인권’, 97년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08년의 ‘권위주의주의적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이 대화해야 할 상대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 굳어진 운동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지배적 논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저항의 계기가 주어지면 (비록 단속적이지만) 폭발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대중이어야 합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이명박을 욕하지만 부동산 가격과 주식시장에 민감한 사람들,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에는 민감하지만 용산참사에 대해서는 둔감한 사람들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강대 토론회 서영표 토론문 中)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이 더 전형적인 운동진영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가끔 보면 어떤 운동권 지식인이나 활동가들은 반대자를 비판하면서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대곤 한다. 마치 자신이 대중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인양 말이다.

서영표의 위 발언도 그러한데, 그는 자기 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자신이 현상적으로 '본' 대중들의 행동을 겹쳐서 말한 것뿐이다. (손호철이 비판하는 사회학적 서술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겠지?) 그가 이론가라면 현상을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심층에 있는 의미를 캐내야 한다.

그럼 이와 관련해서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말해볼까? 나는 최소한 대중들에게 87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고 본다. 지난 2007년 87항쟁 20주년을 맞아 모 언론사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60% 이상이 87항쟁을 모른다고 했다. 87항쟁 자체를 아는 사람이 40%도 안 되는데 무슨 87년의 민주주의와 인권인가?

물론 이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서는 비율이 다르겠지만, 사회의 주축이 되는 세대가 이동한다는 사실만 생각해 봐도 국민 전체에서 '모른다'의 비율은 더 많아질 것이다. 물론 87년이 갖는 상징성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상징성이라는 것이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87년이라는 쇠락한 상징성에 기대어 08년 이명박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통해 조희연-서영표가 부각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치전선'이라는 것의 성격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미 대중들에게 민주-반민주 전선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런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재야인사'들의 머릿속에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을 통해 구성되는 '국민적 정치전선'이라는 것이 화폐적 관계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일상에서부터 재구성하자는 말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87년에 대한 대중들의 상징성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공허해서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

4. 急 결론

간단한 메모 정도만으로 글을 마치려고 했는데, 처음 생각에 비해 글이 너무 길어졌다. 게다가 논쟁에 뛰어든 그 긴 글들을 하나하나 읽기에는 시간도 부족해 오독한 것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보니 글의 핵심 내용이 조희연-서영표 비판이 되어버렸는데, 그렇다고 손호철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사실 그가 말하는 97~08복합체제도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08년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난 도대체 납득을 할 수가 없다. 선생님들께서 너무 시기구분에 강박당하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히려 예전 한미FTA투쟁 당시 심광현 교수가 말한 FTA체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FTA체제가 초래할 사회문화적 파국", <한미FTA를 계기로 본 한국사회 성격변화>, FTA교수학술공대위 토론문, 07.10.12)

90년대 이후 변화 양상 전반을 포괄하기 위해 IMF-FTA체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FTA가 한미 양국 모두에서 국회 비준이 안 된 상황이지만, 미국 이외의 나라들과도 수많은 FTA가 이미 체결되었고 체결이 추진되고 있으며, 한미FTA를 전후해 Pre/Post - FTA적 조치들이 착수되고 있다는 점에서 FTA체제라는 규정은 전혀 흠이 없다.

게다가 조희연-서영표 그리고 손호철의 논의가 오직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에만 천착해 전개되고 있는데 반해 FTA체제는 세계체계적 전환의 문제까지 함께 고려하는 장점이 있다. 한편 FTA가 자유'무역'협정이다 보니까 이로서 체제를 규정하면 경제주의라는 혐의를 뒤집어 쓸 우려도 있지만, 모두가 잘 알다시피 FTA는 그 자체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이다. FTA를 경제문제로만 보는 것이야말로 경제주의일 것이다.

어쨌든 이번 논의가 현장 토론회까지 여는 걸 보면 작심하고 제대로 된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지금의 논의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의 나왔으면 좋겠다. 사실 조희연, 손호철 선생님은.... 너무 옛날 사람이잖아... ㅠ.ㅠ 좀 '신인'들이 적극 가담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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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정리 4 (<2008 글로벌 금융위기>, 최혁 저)

■열리는 판도라의 상자



1. CDS의 전성시대


○ 신용위험과 CDS(Credit default swap; 채권에 대한 보험)

 ┖→ 채권이 부도가 났을 대 누가 대신 갚아주기로 약속한다면 채권을 보유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줄일 수 있음. 채권 발행자가 모노라인에게 보증을 받는 것도 이 때문. 그런데 채권을 ‘매입’한 사람도 보험을 살 수 있는데, 그것이 CDS.

 ┖→ CDS를 매입한 기관은 주기적으로 프리미엄을 내야하며, CDS를 매도한 기관은 프리미엄을 받는 대신에 채권이 부도가 나서 손실을 보게 되면 손실액을 보전해 줌. CDS프리미엄은 채권을 발행한 회사의 위험 수위를 판단하는 기준.

○ CDS를 살 수밖에 없는 이유

 ┖→ CDS의 특이점 : 매입자가 해당 채권을 갖고 있지 않아도 CDS계약을 맺을 수 있음. (화재보험은 집을 가지고 있어야 맺을 수 있음.) 즉 부도가 나면 돈을 주는 것이니, CDS는 채권으로부터 부도위험만을 따로 떼서 거래하는 것. 채권을 보유하지 않는 투자자에게는 ‘신용위험에 대한 투자’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

 ┖→ CDS와 BIS비율 : 바젤협약에 따라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은 BIS비율의 분모인 자산을 측정할 때 자산을 단순히 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산의 종류에 따라 ‘위험가중치(risk weight)'를 곱해서 합한 값으로 자산을 측정. OECD국가가 발행한 채권은 가중치가 0%, OECD 은행들이 발행한 채권은 20%, 회사채나 OECD 비회원국의 국채와 은행채는 모두 100% 가중치. 그런데 CDS가 생기면서 채권의 위험가중치를 CDS 매도기관의 위험가중치로 변경하는 것이 가능해짐. 즉 OECD은행의 CDS를 사면 회사채의 위험가중치는 100%가 아니라 20%가 됨.

○ 규제의 사각지대 : CDS는 증권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권한 밖에 있었고, 보험과 유사하지만 일반적인 보험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보험업에 적용되는 것도 아님.

○ CDS와 시스템 위험

 ┖→ 금융위기의 여파로 CDO채권에 대한 CDS발행 금융기관의 신용등급이 떨어진다면 CDS 매수기관의 BIS비율이 악화됨. 이에 BIS비율을 맞추기 위해 ①CDO채권을 매도하거나 ②신용등급이 더 높은 기관에게서 CDS를 구매해야 함. ① 때문에 CDO채권의 가격 하락. ② 때문에 CDS프리미엄 상승.

 ┖→ 게다가 채권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CDS를 사고 팔 수 있으므로 특정채권에 대한 CDS들의 기초자산금액을 모두 합하면 실제 채권의 액면가보다 훨씬 커질 수 있음. 10억달러짜리 채권에 대해 CDS를 다섯 은행이 발행했다면 기초자산금액은 50억 달러. 이 채권이 부도가 나면 CDS 매도자들이 물어주어야 할 금액을 모두 합하면 50억 달러가 되는 셈. 신용위기의 연쇄반응이 나타났을 때, 파장은 엄청남.



2. 패니매와 프레디맥의 국유화


○ 패니매와 프레디맥의 위기 : 이들은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모기지 채권을 발행하여 빌린 자금으로 미국 은행이나 모기지 대출업체로부터 모기지 대출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미국 주택시장을 유지시켜 옴. 그러나 베어스턴스 몰락 이후 미국과 유럽의 주택가격 하락과 그로 인한 파급 효과로 패니매와 프레디맥의 주가가 급락함.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폴슨 재무장관은 패니매와 프레디맥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긴급구제금융조치 발표.

○ 네이키드 공매도 규제 : 공매도를 이용한 투기꾼들 때문에 주가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금융기관으로부터 제기됨. 여기에 패니매와 프레디맥의 위기를 목도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7월 15일 깁급명령권을 발동해 네이키드 공매도(주식을 빌리지도 않고 먼저 매도를 하는 행위)에 한해 규제를 가함.

○ 재국유화 : 공매도 규제의 효과는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주가가 폭락. 패니매와 프레디맥이 파산한다면 전 세계 부동산 시장의 초토화가 예상되는 상황. 실제 정부는 두 회사보다 규모가 작은 사기업인 베어스턴스도 구제한 상황이기에 두 회사는 구제금융을 기대하게 됨. 08년 9월 7일, 미국 정부는 두 회사를 다시 국유화하고 1,000억 달러씩의 긴급 유동성자금 투입과 기존 주주에 대한 배당을 모두 중지시킴.



3. 투자은행들과 AIG의 몰락


○ 9월 21일 모건 스탠리와 골드만삭스가 투자은행의 길을 포기하고 은행지주회사로 전환.

○ 투자은행의 문제점 : 지나치게 높은 부채비율을 갖는 재무상태. 자산에서 자본의 비중이 낮아 자산가치 하락에 대한 버퍼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미약함. 실제 미국 금융기관에서 자본에 대한 자산비율은 골드만삭스가 26으로 가장 낮은 수준. 나머지는 대부분 30이 넘음. 이는 곧 자산가치가 3.3%만 하락하면 자본이 완전히 잠식된다는 것. 평소에는 아니지만 금융위기 시기에 자산가치 3.3% 하락은 아주 쉽게 일어남.

○ AIG의 위기

 ┖→ AIG는 높은 신용등급을 바탕으로 모기지 채권에 대한 CDS발행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던 회사. CDS발행자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담보로 충분한 현금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AIG는 신용등급이 최상위 였기 때문에 많은 자금을 담보로 갖고 있을 필요가 없었음.

 ┖→ 그런데 금융위기 국면에서는 CDO 등 모기지 채권들이 한꺼번에 부도가 날 수 있음. 현금보유가 적다면 지급불능 상태가 될 것이고, 신용평가기관들은 AIG의 신용등급을 내릴 수밖에 없음. 실제 대부분의 신용평가기관들이 AIG의 신용등급을 두 단계 또는 세 단계 내려버림.

 ┖→ 정부의 고민 : 130개국에 걸쳐 7천4백만 명의 고객을 갖고 있는 AIG가 파산할 경우 미칠 파장을 염려한 정부는 결국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고려와 맞물려 구제금융을 택함. AIG가 미국연방준비은행으로부터 2년만기의 대출형태로 850억 달러 규모의 자금지원을 받고, 그 대신 미국 정부가 AIG 주식 80%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 사실상 국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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