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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했습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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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2/24
    대중이 옳을 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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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우석 파문의 여러 쟁점들 ; 애국주의 열광과 과학 [덧붙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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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9/29
    정운영 선생님을 기억하기(2)
    겨울철쭉

결혼했습니다.

지난 1월8일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에 와주신, 그리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지 못했더라도 축하의 마음을 담아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회진보연대 회원이기도 하고 전국보육노조 인천지부에서 일하는 박지영 동지와 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다음날 신혼여행도 다녀왔습니다. 환상적이고 행복한 경험들이었는데 아마도 박지영 동지 덕분이겠죠. ^^;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고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도 정작 우리 결혼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하는지 깊이 토론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혼으로 구성하게 되는 가족이라는 것이 가지는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실천을 해야할지 모호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상적으로 가지는 원칙은 있었지만 그것이 정작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될 때에는 더 진지하고 책임감있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도 결혼을 준비하면서 깨달아갔죠.

 

이런 고민을 더 하게 된 계기는 '결혼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속에서 어떤 의미와 약속을 담을 것인지를 의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정작 결혼식 자체에서 그것이 어떻게 녹아났을 지 평가는 나름대로 가능하겠지만, 고민의 계기는 분명히 된 것같습니다. (역시 물질적 계기, '사건'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요.)

 

특히 그런 고민이 집중된 것은 성혼선언 혹은 결혼에 대한 약속을 어떤 내용으로 구성할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권의 정치와 성적차이](공감, 2003)에 실렸던 올랭프 드 구즈의 [여성의 권리와 여성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 중 "남성과 여성의 사회계약의 형식"을 참고하기로 하고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와 ----, 우리 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또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결합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동시에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가 특히 좋아하는 이들[예컨테 입양한 아이들]에게 그것을 물려줄 권리를 각자 유보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들이 누구의 소생이든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귀속된다는 것과 아이들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그들을 자신들의 아이들로 확인하는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아이들을 유기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준수할 것이다. 생전에 이별할 경우 우리는 법에 의해 우리의 아이들의 몫으로 정해진 부분을 공제하고 나머지 재산을 분할할 것이다. 사별할 경우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몫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며, 아이들이 없을 경우 죽어가는 사람이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면 산 사람이 그것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는다.

... 이런 우정어린 결합의 유대가 처음에는 무질서를 초래할 지 몰라도, 그러나 그 결과로 완전한 조화가 마침내 생산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자체가 시대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에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난감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다시 구성해보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을 담으려고 하고 몇몇 선배들의 조언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구성한 '결혼에 대한 약속'을 결혼식에서 낭독했습니다.

 

박지영와 박준형, 우리 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결합합니다. 우리의 우정어린 결합의 유대에서 서로는 고유한 성적 차이를 존중하고 그러한 차이에 근거한 각자의 권리를 갖습니다. 이에 따라 둘은 결혼으로 구성하는 가족의 성격과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의무를 서로에게 가집니다. 임신여부와 그 회수를 선택할 시민적 권리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소득에 상관없이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부득이한 경우, 공정하게 분할하거나 남은 사람이 그것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결합할 것을 우리는 약속합니다.

 

나름대로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더 어려운 문제는, 선언을 성안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점일 겁니다. 약속을 하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항상 더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 가족 제도를 변혁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 생활자체가 되어야하는 일인 만큼 어느 약속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족이 온갖 종류의 위기에 봉착한 가운데 가족의 구성이라니, 흠흠.. 특히 이러한 결합 속에서 더 책임감있는 실천이 요구되는 쪽이 현재의 가족제도의 모순속에서 특히 남성에게 있다고 할 때 개인적인 책임감이 더 무거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약속'에는 온전히 다 담지 못했을 지 모르겠지만, 더 고민되는 것은 과연 관계의 성격이 어떠해야하는지, 관계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서로의 차이와 권리를 존중하고 유지시켜갈 것인가 등등입니다. 아마도 여남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시빌리테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는 살아가면서 매순간 발명해가야할 것입니다.

 

결혼식에서는 조주은 선배와 박하순 선배가 귀한 시간을 내서 '주례'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굳이 주례라는 부담스러운 말로 소개하지 않아도 활동가, 이론가 선배들로서 후배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죠. 우리는 결혼식을 진행하면서, 나이든 남성의 보증으로 결혼이 승인되고 보증된다는 식의 구도를 깨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따라 '어르신'보다는 '선배', 그리고 여남 각각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구성을 했습니다.

 

박하순 선배는 말씀중에 알튀세르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한 아래 구절을 언급해주셨는데, 저도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 그 후 나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는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하나의 선물을 인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줄 아는 것, 그러나 전혀 자만하지 않고 전혀 강요하지 않은 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아는 것이다. 요컨데 단순한 자유다. 세잔느는 무엇 때문에 생트-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관계가 우리가 '약속'에서 담지 못한 그런 내용일 텐데, 매 순간 상기하면서 살아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인 박준도 동지는 축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윤선애씨가 '러시아에 대한 명상' 중 불렀던 '사랑'이라는 노래입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결혼식 당일날 아침에 듣고 나온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둘이 되어 고단한 우리들의 앞날을 본다는 것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미래를 두 눈으로 바라볼 뿐
주인은 너희들(후손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더 나아가 눈물 흐린 시야를 보탤 줄 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고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그래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눈물 혹은 기쁨일 뿐
일어서는 것은 오로지 세상 뿐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히 일어선다

 

전체 가사는 http://dawn.logosia.com/rs.html 참고.('새벽'의 홈페이지), 노래는 밥자유평등평화 사이트의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권현정, 공감, 2002)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따라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의 물질적 토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람들이 가족에게 거는 모든 기대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추구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냄으로써 가족을 덜 필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근대적 가족형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비판은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물질적 토대의 소멸과 동시에 그것 안에서 추구되었던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 또는 동반자적 사랑 역시 역사적 시효를 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의 틀을 넘어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사랑과 유대를 사고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48쪽)

 

박지영 동지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정작 결혼제도 속에서 묻히는 것같아 아찔했다는 평가를 했습니다. 돌아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던 것을 깨닫게 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대한 정확한 평가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가족을 구성하지만, 박지영 동지와 '가족의 틀을 넘어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사랑과 유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이 결혼을 경과하면서 우리가 그 제도 속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실천을 할 수 있는 방향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추상적인 원칙보다 구체적인 실천들(가사노동이라든가, 각자의 가족과의 관계라든가 등등)이 훨씬 중요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가장 힘들 것이고 관계의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주리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해내기 위한 노력, 실천이 모든 것을 판별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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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옳을 때

지음님의 [대중운동을 목격하다] 에 관련된 글.

좋은 글이 몇개 링크되어 있기도 한 좋은 글이다. melona라는 아이디를 썼던 과갤러의 블로그를 보고는 즐겨찾기에 등록했다. 멋진 사람이다. '아릉~'이라는 사람과 함께 가장 먼저 의혹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사람들.

 

나도 며칠 동안 중독된 것처럼 들락거렸던 브릭(소리마당)과 과갤(디시인사이드 과학갤러리)은 독립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개인들이 교통을 통해서 집단적으로 진실을 인식해가는 멋진 사례를 보여주었다. 어느 과갤러가 말한 것처럼, 이들 공간이 '과학'을 주제로 한 공간이었다는 말도 새겨들을만하다. 대중의 맹목적인 상상이 아니라 과학을 사고하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는 것.

 

과학, 과학자 사회이라는 공간도 모순적이라는 것이 다시 드러났다. 얀 핸드릭 쇈의 사기사건에서도 나타났지만, 새로운 산업적 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에서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쇈의 연구는 나노기술과 IT와 연관되어 있었고 황우석의 연구는 IT 이후의 성장동력으로 '기대되는' BT분야이다. 이들은 모두 자동차공업을 이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각광받던 IT, 전자공학이 한계에 부딪힌 가운데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예상되는 산업들이다. 쇈 사건과 황우석 사건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링크 참고.) 그러나 과학자 사회에 남아있는 진실에 대한 검증 시스템은 다행이도 작동했다. (오히려 이런 검증과정에서 보여주는 과학자 사회의 태도는 20세기에 고유한 것이라기 보다는 19세기의 유산으로 보인다.)

 

다만, 나는 이번 진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사실과 거짓이 명확히 구분될 수 있고, 거짓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어거지로 지지할 수 없는 조건이 있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을 뿐이다. 유리한 戰場이었고, 정세의 호기를 만났을 뿐이다.

 

실상, 우리는 항상 이런 운이 통하지 않는 사건들에 더 많이 직면한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사건들이 브레이크 없는 광기에 대중을 동원할 위험이 더 크다. 붉은악마의 열정에는 사실과 거짓이 소용없다. 독도문제와 같이 사실이 함께 하는 경우에 오히려 더 위험한 열정이 증폭되기도 한다. '사실'이라는 것조차 대중의 상상에 이용될 때, 그것은 어떤 정세에서는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역설. 사실이 환상을 증폭하고 급기야 사실이 아닌 상상의 요소로 완전히 전환된다.(마치 고대의 신화들로 '해석'된 역사적 사실들처럼 말이다. 사실에 기반했지만 이미 상상의 요소가 된 것들.) 우리는 민족주의적인 역사적 상징들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어쨋든, 이번의 작은 승리, 멋졌다. 특히 브릭과 과갤의 그대들, 우리들, 축하한다.

브릭과 과갤 네티즌들은 이미 이 어처구니없는 광기를 불러온 '애국질'을 조롱하고 있기도 하다. 성장동력으로 각광받는 BT연구의 뒷면에는 월화수목금금금, 라면, 40만원의 월급의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것을 주문한다.

이번 승리가 단지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멈추지 않고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대중동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성찰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회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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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마지막 환상을 깨는 계기

아마도 중국에 대해서 '공산당 정권'이나 '사회주의 시장경제'니 하는 말에 혹해서 아직도 중국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활동가라면 이번 WTO 홍콩각료회담과 이를 수호하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과 인권유린을 자행한 경찰들을 보면서 완전히 환상을 깼을 것이다.

 

중국은 2001년 11월 WTO 가입 이후, 이번 각료회담 개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충성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그리고 철통같은 방어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한국의 노동자 농민을 때려잡음으로서 자신들의 본질을 다시한번 확인해주었다. 한때 동아시아 공산주의의 맹주였던 중국은 신자유주의를 수호하는 무장한 경찰력이 되어 있었다.

 

거대하고 슬픈,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舊사회주의 정권들의 비가역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에 대한 비판을 터부시하는 일부 좌파들에게는 약이 되었을 지 모를 일이다. 대안은 다시금, 실패한 舊사회주의 실험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WTO에 반대하여 싸웠던 노동자 농민 원정투쟁단과 같은 대안세계화 사회운동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오늘(21일) 진행되었던 폭력탄압/인권유린 규탄, 구속자석방촉구 중국대사관앞 항의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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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파문의 여러 쟁점들 ; 애국주의 열광과 과학 [덧붙임]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한 PD수첩의 보도 이후 온통 난리다. 윤리문제에서 연구결과 발표의 사실여부 문제까지 확대되고 있다.
 
최근 상황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대중들의 광적인 반응은 놀라운 것이면서도 충분히 예상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대중의 광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열광이 2002년 월드컵의 '붉은악마' 현상과 유사하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당시에 '붉은악마'에게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아야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제 어떠신지 묻고 싶다. 당시 인권운동 사랑방이 <논평>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 을 통해서 문제를 제기했을 때, '붉은악마'들의 광기는 차치하고라도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인권운동사랑방이 '심했다'는 식의 반응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인권운동 사랑방은 [논평] 국익 선동에 가려진 인권 을 통해서 현재 국면의 문제를 적절히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PD수첩과 민주노동당 덕분?에 당시와 같은 비방의 중심은 되지 않는 것같다.)
 
'붉은악마'의 애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열광에 대한 ('진보'적인 인사들까지 포함한) 이데올로그들의 무비판적인 찬양은 오늘의 사태를 불러오는데 책임이 없지 않다. 그 열광이 마치 '대중의 활력'인 것으로 오해되었는데, 대중의 활력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은 쉽게 애국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파시즘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과학의 이름을 통한 여성의 몸에 대한 지배, 여성인권의 문제다. 또한 연구용 등의 난자구매는 장기구매와 같이 가난한 자의 육체를 하나의 직접적인 상품으로 만든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권리를 중심으로 인간의 육체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쟁점이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토론해야한다.
 
또 한편으로 황우석의 연구결과에 대한 PD 수첩의 검증문제에 이르러서는 과학자 사회의 검증 매커니즘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과학의 위상, 사회적 관계에 대해 과학이 가지는 관계가 쟁점이 된다. 과연 과학에 대한 대중의 권리란 무엇인가?, 과학은 스스로를 대중의 '무지에 기반한 열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가?
 
아래의 두개의 링크(딴지일보에서 가져온 것이다)를 참고할 수 있다.
 
글 (1)은 황우석을 둘러싼 애국주의 열풍, 윤리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과학적 연구결과에 대한 검증은 과학자 사회가 할 일이라는 입장을 보여준다. 저널리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2)는 과학자 사회에도 권력관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과학이 아니라 권력이 판단하는 상황에서 과학자 사회 외부의 개입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한편, 글의 내용들을 보면 아마도 글쓴이들은 연구조직의 위계에서 상이한 위치에 있지 않을까 예상해볼 수 있다.)
 
하나의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이미 과학 외적인 문제가 된 상황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과학이 사회로부터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중요한 생산기술의 일부로 통합되어 자본의 구성요소가 되었고 또한 이에 따라 정치적인 문제가 된 상황이 관련되어 있다. 황우석의 연구도 이미 과학자 사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사회적 문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국가는 다른 연구에 대한 지원비를 빼서까지 황우석을 지원했고 이를 애국주의 선동에 앞장서 활용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저널리즘의 검증 대상이 되는 것이 올바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저널리즘의 검증이라는 방식 역시도 과학을 과학 외적인 상황과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 아닌가? 특히 황우석에 대한 광신을 조장한 것이 저널리즘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저널리즘의 개입을 긍정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여기에 현재 수준에서 가능한 답은, 과학이 이미 과학자 사회의 전유물이 되기에는 불가능한 비가역적인 지점을 넘어섰다는 현상황에 대한 사실진술 정도인 것같다. PD수첩의 개입은 이미 과학적 연구결과가 '과학' 그 자체에 제한되지 않고 자본과 권력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황우석에 대한 광적인 지지-'무지에 기반한 열광'이 이미 연구의 독립성을 침식한 상황인데 PD수첩을 문제삼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다. PD수첩이 아니라 이미 선행한 저널리즘의 대중선동 과정에서 형성된 과학과 저널리즘의 관계 구조 전체가 문제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조건을 인정하는 것으로는 자본과 권력에 독립적인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과학적 연구의 조건을 만들어내야한다는 데 대한 문제제기가 묻혀진다는 점이다. 또한 자본과 권력에 독립적인 연구라면,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과학적 연구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이데올로기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가운데 과학이 스스로에 대해 비판할 수 있어야만 '과학'으로서 자신의 결과물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여기에는 알튀세르를 더 참고해야한다.)
 
이번 과정은 딱히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모순-쟁점을 드러내고 제기하고 있다.(다만 정세적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애국주의 광기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각각의 쟁점이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서 논쟁될 수 있다. 이 속에서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사회운동, 좌파들의 입장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상황을 전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방식을 대중들에게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최근의 열광은, 황우석의 연구가 설사 거짓말로 밝여진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않거나, '진실'을 비방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연구의 결과가 사실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정치적으로 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애국주의자들은 마침내 타도해야할 민족의 적을 명확히 지목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대중이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중들 스스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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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글을 남긴 다음 날, MBC는 뉴스테스크를 통해서 취제윤리문제에 대해서 사과하고 '이제는 과학계가 나서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결국 '과학자 사회'에 공을 넘긴 셈인데, 이로 인해 숱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PD 수첩이 시도했던 과학에 대한 과학외적 접근은 '애국주의자들의 적'으로 자신들을 노출시킨 채 마무리되고 말았다. 또한 이후에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 특히 생명과학에 대한 맹목이 맹위를 떨칠 것이다. 생명과학의 위험성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이 것이 앞으로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 것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독서일기]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과학자 사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도 의문일 뿐더러, 과학에 대한 환상을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결정의 영향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과학은 결국 과학자들만이 그 진위를 논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다만 과학은 대중에게 상상으로 번역될 수 있을 따름이고, 그 상상은 다름아닌 애국주의적 환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지식에 대한 대중의 통제,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과학에 대한 과학외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이다.
 
PD 수첩이나 MBC에 미숙한 대응이 한 몫했지만,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 과학에 대한 맹목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맹목과 결합했을 때, 어떠한 거대한 승수작용이 일어나는 지 이번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국민'들이 환호할 수록 그들의 과학과 지식에 대한 권리가 박탈된다는 역설에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비극적인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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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의 위기에 대해서 토론하다보니..

얼마전 한 수련회에서 연맹을 비롯한 노조운동의 위기를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활동가들이 의기소침, 사기저하를 겪고 있는 요즘에, 이에 대한 진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논의를 하지는 못했지만, 몇가지 입장의 차이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노조운동의 위기와 그 원인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몇가지 유형.

 

* 위기의 원인은 집행부(혹은 활동가)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입장

 

- 정파적 입장과 처한 위치에 따라 몇 가지 판본이 있다.

- (우파) 임원급 인사는 (좌파) 사무처 실무자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좌파) 사무처 실무자는 (중앙파나 우파) 임원들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 (스스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 사무처 실무자가 다른 사무처 실무자가 헌신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 혹은 그밖에 이런저런 조합에 따라 다양한 옵션의 비난이 가능하다. 모두 '열심히'만 더 하면 위기가 해결된다는 인식들이다.

 

* 위기의 원인은 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노조운동의 현실에 있다는 입장

 

- 보다 위기의 근원에 다가가는 인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몇가지 판본이 있다. 주로 '대책' 수준에서,

-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투쟁을 중심으로 운동의 방점을 극적으로 전환하고 활로를 모색해야한다는 입장과

- 비정규직 투쟁으로 노조운동이 바뀌는데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기간 안에 노조운동은 망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파 간 '대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있다.

 

* 그 밖에, '투쟁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위기라는 입장으로

 

- 투쟁의 내용은 차치하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투쟁을 한번 조직해보자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투쟁'은 있으나 '내용'은 나중에 생각해보자는 투쟁만능론(?)에 가까운 입장.

 

몇시간 동안의 토론에서 나타난 것은 대략 이 정도의 입장들과 논쟁지형이다. 여러가지 방향에서 위의 지형에서 나타난 각각의 입장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 토론 과정에서 좌우파 모두를 막론하고 활동가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식의 의지주의적인 입장이 상당히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또한 이러한 논리 속에서 정파 간 상호 비난의 근거가 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이로부터 좌우파 기회주의가 여러가지 판본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현재의 위기에서, 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면서도 대안에서 '대연정'을 제시하는 방식의 결론도 생소한 것이었다.

 

위기의 원인에 대한 인식이 다양한 것만큼, 결론도 다양하다. 다만, 나를 포함한 활동가들이 위기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인식한다기 보다는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았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장기간, 활동가들 사이에 토론은 물론, 이론가들의 연구 성과와도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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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의 몇가지 고민, 쟁점들

[속보]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전국순회투쟁단,

민간위탁 반대 원직복직 투쟁 전개하는

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 칠곡환경지회 투쟁에 연대하며

11월15일 오후 6시경 칠곡군수실 진입하여 연좌농성 돌입!

=> 관련 내용 보기 [전비연 홈페이지 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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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가 올해 전태일노동상을 수상했다. (http://blog.jinbo.net/rudnf/?pid=37) 심사위원단은 "조직성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비정규 8개 노조가 연합하면서 책임감 있게 투쟁해 나간 점 등을 들어서 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를 수상 조직으로 선정한다"고 밝혔다. 많은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각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출범부터 함께 활동한 한 활동가로서 뿌듯함을 느낀다.

 

이러한 결정은 '조직을 불렸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을 근거로 투쟁에서 연대하고, 조직을 하나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평가받았을 것이다.(조직을 크게 불린 것도 사실인데, 노조 건설 이후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를 받아들이고,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새로 조직된 사업장의 투쟁을 엄호하고 유지시켜줄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일반노조운동과 많은 부분 유사하지만 또한 독자적인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는 공공연맹의 미조직비정규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부터 조직화작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2005년 초부터 대구경북, 광주전남, 충북에 조직되어있고, 전북지역평등노조가 취지에 동감하고 함께 활동하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기존에 존재하던 중소영세비정규직노조가 통합하는 방식으로 출범했고, 출범을 전후해서 새로 조합원들이 가입하기 시작했다.

 

△ 전태일노동상 수상 모습 (참세상 사진)

 



지역을 근거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노동자를 하나의 조직으로 묶고 단결해서 투쟁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대공장노조만이 아니라 소규모의 노조, 비정규직 노조까지도 사업장 이기주의에 갇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를 극복하면서 지역차원의 운동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다.

 

이 운동이 조직되는 과정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이 운동의 의의를 폄하하는 개인/세력이 존재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혹은 마땅히 이 운동을 지지하고 엄호해야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주로 헌신하고자하는 '신규조직화'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기존 조직들의 '조직구획'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민감한 정치적 쟁점이 된다는 것 자체가 노조를 '자기 나와바리' 정도로 생각하는, 천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사고방식이 노조운동에 팽배해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초기에는 전국단위 소산별노조와의 조직구획의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른바 '전국지자체일반노조' 조직화 시도와 이에 대한 대항조직화 시도 등 속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적인 조직경쟁 대신에 지역에서부터 비정규직조직화, 투쟁의 기반을 만들어가는 시도로서 이 활동은 의미가 있다. 심지어는 공공연맹 중집은 물론 상집에서도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하지만, 앞으로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 산별노조 건설 등에 있어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직 개인적인 수준에서이기는 하지만, 이 운동을 함께 해오면서 느낀 점들이 많다. 아래의 시사점들은 지역별로 편차가 있고, 주체들마다 고민의 지점이 다른 점도 있지만, 운동주체들이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들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 지역일반노조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역별로 해당 지역의 지역일반노조와 조직경쟁과 갈등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운동의 주체들은 몇가지 점에서 문제의식을 달리한다.

 

우선 조직운영에 있어서, 이미 조직된 사업장에 대한 안정적인 일상활동과 활동가 양성을 더 중요시한다. 이는 일부 지역노조의 '철새형 조직화 방식'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는데, 일단 조직화를 진행하고 당면한 사안을 해결한 뒤, 다른 사업장으로 활동가 역량을 옮겨가는 식의 활동을 지양하자는 취지다. 이에 따라 일상활동을 강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더 풍부하게 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상활동은 '공부방/주간포럼'같은 일상적인 교육사업이나 정치적, 사회운동적 과제로 채우려고 노력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더 중요한 점이 여기서 연결되는데, 사회운동적 과제를 일상활동의 주요한 부분으로 만들어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일상활동의 측면보다 더 중요하게 주요 조직대상이 공공부문이라는 점에서, 공공성이라는 쟁점으로 사회운동과 연결고리를 찾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를 들어 (원래는 지자체 업무인) 재활용품처리 업무를 하는 민간위탁된 사업장의 조합원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투쟁쟁점을 가지게 된다. 공공업무의 민간위탁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변형된 사유화와 간접고용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의 노동보건 단체와 연대하기도 하며 환경단체와 연대 하기도 한다.(민간위탁은 공공서비스에 이윤논리를 강화하여 노동강도를 크게 높이고, 이는 곧장 산재와 공공서비스의 부실화로 여결된다. 재활용품의 부실한 처리는 환경문제와 직결된다.) 사회복지관, 장애인복지관의 경우 복지관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투쟁, 장애인단체와의 연대 투쟁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공공성을 쟁점으로 지역의 사회운동과 연대를 조직하는 데 있어 공공서비스노조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현재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산별노조가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될 때, 사업장 간 연대는 물론이려니와 공공성이라는 쟁점으로 지역의 사회운동과 연대할 수 있다는 점, 노조 스스로 사회운동적 쟁점을 제기하고 투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이 어떠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인지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와 가능성과 함께 여러가지 난점과 쟁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지역일반노조가 가지는 조직화 상의 난점, 운영 상의 난점을 그대로 갖고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조직화가 주로 신규조직상담을 통해 이루어지고, 전략적인 부문에 대한 의식적인 조직화 노력을 기울이기 힘든 조건이다. 신규조직상담을 통해 조직되는 경우 대부분 투쟁사안이 당면한 경우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의 상근역량이 전적으로 투여되다보면 전략부문에 대한 조직화가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마치 '해결사'와 같은 역할을 요구받게 되는데 이는 활동가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조합원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른바 전략부문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조직하려고 하는 조직대상의 두가지 특성과 관련된 문제가 존재한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는 (1) 지자체를 상대로 투쟁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지자체 직간접 고용노동자와 (2) 지역을 근거로 조직되어야하는 지역의 공공부문 중소영세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고자한다.(소유관계는 민간이라도 서비스의 성격이 공공적인 경우를 포함) 전자는 주로 지자체 직접고용 상용직, 일용직 노동자와 민간위탁 환경미화원, 사회복지기관 등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통신산업비정규직, 시설관리, 공기업 하청사업장 등이 있다.

 

애초에 조직할 때부터 지자체 직간접고용 노동자를 전략적으로 조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특히 지자체 직접고용 비정규직노동자를 통해서는 지자체를 교섭에 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했는데, 지자체를 상대로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명확히하고 공공서비스부문의 '원천사용자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교섭을 성사시키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전략부문에 대한 조직화가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이는 노조가 지자체를 상대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하나하나의 단위사업장의 투쟁에 개별적으로 집중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업장별 운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공동의 투쟁과제로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서로 연동되는 문제인데, 사업장별 운영은 매번 현안을 갖고 처음 조직되는 사업장에서, 해당 사업장의 현안 해결을 위해서 강제된다. 또 한편, 지자체를 상대로 하는 공통이 요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조건--이는 요구를 정식화할 수 없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지자체 직간접 고용 노동자를 충분히 조직하지 못한 한계--에 따라 요구도 사업장별로,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도 사업장별로(비록 끈끈한 연대투쟁이 존재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사업장별 요구), 결국 사업장별 운영구조를 형성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사업장별 운영구조의 고착화는 기업별노조와 같은 폐단을 낳게 되는데, 자기 사업장 이기주의가 일정한 시점부터 작동하기 시작하고 실리주의, 투쟁회피 경향이 발생한다.

(나는 사업장별 조직, 사업장별 요구를 무조건 터부시하는 산별만능론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은 부차화되어야하며, 지역차원에서 공동의 요구가 수립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목적한대로 지자체를 상대로 하는 공동이 요구를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차원에서  묶어내고 이를 사업장별 요구에 앞서 노조의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요구로 만들어내는 투쟁이 조직되어야한다. 예를 들어 지자체의 직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지역협약을 쟁취하거나, 이러한 요구를 지자체 조례 형태로 요구할 수도 있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함게 추진하는 지역생활임금투쟁도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쟁점을 중심으로 투쟁하고 실현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지역노조로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지역산별노조'의 위상에 걸맞게 운영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지자체 직간접고용노동자를 보다 집중적으로, 전략적으로 조직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타당하다. 그러나,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1), (2) 두 종류의 공공부문 비정규직노동자 모두를 조직화 대상으로 한다는 점도 인정해야한다. 전략적인 부문의 조직화를 할 수 있는가의 부분은 매우 중요하지만 당장 이것을 '요구'한다고 가능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이 마련되어야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공공연맹 등 상급단체의 물질적 지원을 통해서 활동가를 더 배치하고 전략적인 조직화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산별노조가 필요하다거나 한다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인력과 예산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중에도 편차가 있다면, 잘 되는 지역은 해당 지역의 연맹 지역본부가 탄탄한 경우이다. 연맹 지역본부의 지원과 엄호 속에서 조직이 활성화되고, 그 어떤 대공장 사업장보다 연맹 지역본부의 핵심사업장이 된다. 반대로 연맹 지역본부가 아예 없는 지역에 건설된 충북의 경우 큰 어려움에 봉착해있다.)

 

그러나 당장은 민주노총이 50억 기금 모금도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고, 비대위는 책임있게 사업을 집행하려 하지 않는 조건이다. 결국, 관건은 현재 조직된 조합원 중에 활동가를 어떻게 훈련하고 형성할 수 있는가이다. 현재 있는 조합원을 교육하고 투쟁속에서 단련하는 과정을 통해서 활동가를 조직해야한다. 그래야 이 활동가들이 신규 조직화 사업을 하거나 혹은 지금 있는 조직활동가들이 '조직관리' 대신에 전략적인 부문에 조직화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의 운명은 여러 측면에서 열려있다. 앞서 언급한 장점들(혹은 가능성들)을 생각해보자.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장을 넘어선 연대투쟁을 강화하고, 지자체를 상대로 공동의 요구를 모아내며, 이를 사회운동적 쟁점으로, 사회운동들과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성화시켜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일상활동을 통해서 현장에서 활동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고 전략적인 부분에 조직화를 시작할 수 있어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직을 확대하고 아직 '기업별 지회'의 연합체 정도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구조를 바꾸어내야할 과제가 있다.

 

이를 위해서 공공연맹 차원에서도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조직발전 전망을 지원하고 이 운동이 전국화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현재 지역별로 조직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이미 전국단위(소산별노조)로 조직된 비정규직노조, 지자체관련 중소영세사업장노조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지역공공서비스노조도 전국적인 조직형태를 갖추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과 통합하고, 전국과 지역에서 운동역량을 상호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직경쟁 속에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현재 진행되는 이런저런 산별노조 논란 속에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아예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드는 주장도 나타나고 현실화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선배활동가는 지역공공서비스노조가 애초에 그리려고 했던 '용'은 되지 않았지만, '뱀'이 된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공감한다. 애초에는 '공공산별노조'의 '선도조직'(혹은 '실험조직'?)으로 사고된 측면이 강했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이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고유한 자기 운동의 의의를 형성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기 스스로 형성해가는 운동의 의의를 얼마나 강화할 수 있을 것인가, 활동가들과 조직 스스로의 역량에 성패가 달려있다. 그 '성패'는 단지 노조의 성패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부문 비정규직 운동, 그리고 공공부문 노동자운동 자체의 성패와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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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이후, 우리가 내부 혁신을 위해 투쟁했던 것들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그 결과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모든 것은 아니겟지만, 조금씩 그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고 함께 싸웠던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나?

 

아래는 우선, 내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함께한 입장들이다.

[공공연맹사무처활동가]민주노조 정신의 회복을 위해, 총연맹 지도부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281] 미봉책의 결과는 민주노조운동의 몰락뿐이다 

[성명] 지도부 총사퇴를 시작으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혁신에 나서자

[284] 현장에서부터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그러나, 지난 포스트(민주노총 혁신, 절망이...)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투쟁은 그 구조적 한계 때문에 운동주체들이 목적한 성과는 얻을 수 없는 한계에 갇혀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은 '비극'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투쟁을 촉발시켰던 민주노총 사무총국 15명의 동지들을, 최소한 이수호 위원장의 신중함 같은 것조차 없이 단칼에 잘라버린 비대위(중집)을 보면서 드는 생각만은 아니다.



강승규 사건 이후 이수호 위원장의 사퇴, 비대위 구성과 그 이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모든 논쟁은 정파적 구도 속에서 이해되고 규정되었으며, 정작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모든 주장들은 정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따라서 운동의 위기를 촉진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대위 구성은, 지도부의 사퇴가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대중적 힘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 아닌 이상, 위기의 당사자들이 위기를 미봉하기 위한 수습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내가 이전에 민주노총 조직혁신안에 대해서 비판했던 것처럼(민주노총, 혁신의 대상이 혁신을 이야기하다 ) 노동자운동 위기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재확립하는 방식으로 위기의 해결을 자처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이번 강승규 사건의 직접적이거나 잠재적인 공범들이 다음 민주노총 선거에 다시 출마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들과 연관되지 않은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비리를 양산하고 운동의 위기를 증폭시켰던 운동구조를 온존해왔던 점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 선거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이 투쟁의 과정에서 지도부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했던 것은 조합원들은 수수방관, 혹은 냉소했다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반응들이 많았다. 비리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이러한 운동구조를 바꾸어내야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대중들은 노동자운동의 위기가 강승규를 잘라내고, 이수호 집행부를 퇴진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극은, 위기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위기와 투쟁하려했다는 점에 있었다. 지도부의 비리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점을 인식했어야하지 않을까? 90년대 중반 이후 십여년간 고착되어온 노조운동의 제도화는, 노조가 투쟁의 기관이 아니라 대중을 통제하는 기구로 변화하는 역설을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노조에 대해서 아마도 유일하게 인정하는 효용일 이 대중통제는, 사업장 단위의 노사협조주의와 대정부 차원의 사회적 합의주의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단지 간부, 활동가들의 주관적 노선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 대중 스스로의 후퇴가 있다. (이런 점에서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가 말한 것처럼("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들이 활동가들의 노선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조차도 원인이 아니라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대중의 물질적 조건을 비판함을 통해서 단순히 과거의 구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건의 새로운 운동을 개시할 수 있어야한다.) 특히 노조의 조합원으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후퇴가 있다.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불안 속에서, 조합원들은 실리적 이해에 침윤되어갔다. 비정규직에 대한 배제는 사측과 안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비정규직 투쟁과 정규직 노조가 어떻게 관계를 가질 것인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정규직 노조 운동이 자신의 조합원들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통제하는 입장에 설 것인지, 따라서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대립물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용자와 유착하고 타협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노조관료들만은 아니다. (정규직) 조합원들 역시 이러한 타협구조 속에서 창출되는 노사관계의 안정화를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해주었던 것이다.

 

이번 강승규 사태와 같은 명백한 도덕적 사안에 대해서 철저한 처리는 필수적이다. 그것조차 없이는 노조운동이 다시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고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길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정세 속에서 강승규 비리 사건의 엄정한 처리라는 자명한 목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망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구도였다. 정파간 논쟁 구도에 의해 지도부 비판이 과잉결정된 것처럼 지도부의 퇴진이 상징하는 논쟁의 자명함 속에서 우리들의 입장도 과잉결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극은, 그 때 그 곳에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목적을 다가갈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우리들의 무능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제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지도부 사퇴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노조운동의 구조를 바꾸어내는 대중적 운동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아마 모두들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도부 사퇴'만'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해야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긴, 더 이상 우리가 어떤 발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강승규 사건과 지도부 사퇴 이후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의 상층부를 '혁신'하는 것이 사실상 별로 가능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조건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김승호 대표의 지적처럼 민주노총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한계는 그 물질적 구조 속에 온전히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비리사건으로 극적으로 드러난 노조운동의 위기는 노동자운동의 위기의 반영이라는 점, 그것은 단위 사업장 현장에서부터 존재하는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투쟁이 단지 노조운동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서는, 노동자운동이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 (따라서 어떻게 노동자운동이 노동자 대중 속에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훨씬더 지난한 과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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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애, 하산

 윤선애, 하산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냉큼 주문했는데, 오늘 늦게 사무실에 들러보니 도착해있었습니다.

 

새벽 때와도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목소리 속에 이제는 고요함이 있군요.

노래들이, 조금 쓸쓸하고, 차갑고 촉촉하지만, 아득하기도 하네요, 윤선애 스스로의 표현으로 '습한 공기와 투명해서 빛나는'.

하지만, '하산'한다는 것의 의미.

 

앨범제목과 같은 '하산'은 맨 마지막곡입니다.

 

하산 (김정환 작사, 이현관 작곡)

 

저 아래 사람들 사는 아파트 상가
아스팔트 길 건너 산동네 불빛
멀수록 아늑하게 반짝이는데
그래 약속 하는 거야.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아래 사이트에서는 샘플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uljib.com/bluealbum/?S_Type1=album&S_Type2=06&table=greenmusic&Mode=View&B_SEQ=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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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혁신, 절망이거나 희망 혹은 미망

민주노총 강승규 비리 사건 이후, 그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보다 더 뻔뻔스러운 민주노총 지도부에 절망했다. 그러고도 계속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조건이 참담하다. 또 이를 막을 수 없는 우리의 한계, 나의 한계가 가슴 답답하다.

 

민주노총 사무총국 15명의 동지가 사직서를 냈다. 사회단체와 각 연맹과 지역본부 활동가들의 성명서, 호소문이 쏟아지고 있다. 오늘은 시국토론회도 진행되었다. 나 역시도 이러한 작업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같이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지도부가 사퇴하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것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민주노총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도들은 애당초 성공을 거의 기대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민주노총을 혁신하고, 이를 통해서 노조운동의 혁신에 계기로 삼자는 우리의 주장은, 그래서 슬프게도 미망(迷妄)일 수 있다.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참세상뉴스에 실린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의 글이다.

 

거친 댓글들이 이어 달린다. 소부르조아, 운동을 그만해라는 말까지.

 

그러나 가치판단들과는 무관하게 민주노총의 건설과정과 그 한계에 대한 그의 지적은 그 자체로 사실명제들이다. 민주노총은 건설 당시부터 변혁지향적 민주노조의 구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을 혁신한다고 하는 것은 애당초 이 프로젝트가 가진 한계, 그리고 그의 논리적 귀결인 국가권력과의 타협, 그리고 그 효과로 나타난 오늘의 비리사건 전체를 바꾸어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총 혁신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노총을 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은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투쟁은, 어쩌면 정세의 호기를 만나 이수호 집행부를 퇴진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주노총'을 쟁점으로 하는 한 애초의 목적은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구조적 한계. 그런 점에서 우리의 투쟁은 미망일 수 있다.

 

우리에게 비극은, 이것이 미망일지라도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그런 점에서 다시 비극일 지라도 김승호 대표와는 달리 한번 더 그것에 대면해야한다. 그리고 스스로 비극의 조건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가 '진정성'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하기 때문에 비극일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여기서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조건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할 것이다. 운동의 결과로 그 한계들을 집단적으로 깨닫게 될 때, 비록 비극적이었을지라도 이 운동은 어떤 종류의 성과를 남길 수 있다.

 

나 역시 김승호 대표가 던진 아래의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예 질문으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금 시작하는 이 투쟁 속에서, 계속 걸으면서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과연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이, 기존의 정파 혹은 계파들 그리고 거기에 속한 활동가들이 이런 역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나갈 수 있을까? 과연 이 진통을 산고로 삼고서 노동운동의 신새벽을 열어 제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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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선생님을 기억하기

로젤루핀님의 [대학서곡과 신포도] 에 관련된 글.

 
정운영 선생이 타개하셨다는 이야기를 지난 주말이 지나고야 전해 들었다. 듣고나서 인터넷을 보니 정운영 선생 타개에 대한 기사가 있다.
 

각 학과마다 조직된 사회과학학회는 운동권을 길러내는 의식화 셀로 활발히 조직되어 있었다. (아마 91년 투쟁의 성과로 조직된 91학번들이 92학번을 대량으로 조직한, 이후에는 쇠퇴한 학회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나도 물론 학회에 가입했지만 당시에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세미나는 '철학에세이'부터 시작하고 있었고 그나마 이런 저런 1학기 행사일정들과 투쟁일정으로 세미나는 별로 진행되지 못했다. 92년 4월에는 전대협 총회까지 학교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전대협의 당파적 강화'라는 구호를 보고 나서 선배의 설명을 듣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당없는 당파성이라..)
 
여튼, '철학에세이'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것을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어리둥절했는데, 중고등학생용 철학우화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를 공부해보자는 당시의 시도는 재생산 경로로서 사회과학학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부작용이었다. '쉬운' 책으로 새내기를 조직해보자는 선배들의 맹목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여름방학 동안은 도서관에서 보냈는데, 학회 세미나에서 얻을 수 없었던, 또 고등학교 과목과 다를게 하나없는 교양과목 강좌로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얻는 공간이었다. 그 때 열심히 읽었던 책이 정운영 선생이 쓴 <광대의 경제학><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등이었다.
 
당시에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용이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정치경제학의 주요 개념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역설이다. (말하자면 교과서가 아니라 컬럼을 통해서 '야매'로 배운 셈이다.) 정운영 선생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언급도 이 컬럼집에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 개념을 처음 접했고 곧 이어 사회구성체논쟁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읽은 책들을 통해서 (아직 어정쩡하기는 하지만)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노동가치이론연구> 등 책은 나중에 '공부로' 읽게 되었지만 선생의 시원시원한 문체는 잊혀지지가 않는다.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내가 사무국장을 맡은 학생회에서 새내기 수련회인 '새터'를 진행하면서다. 새내기를 위한 강연으로 누구를 섭외할까 논의하다가 정운영 선생을 섭외하자는 제안을 하고 결정되었다. 정작 새터를 진행하면서는 실무에 치여서 강연을 전혀 듣지 못했지만 그 때 처음 직접 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로젤루핀님이 올여놓은 [대학서곡과 신포도]가 그 내용이었을 것같다. 선생의 사후에야 못들었던 당시 강의를 문자로나 접하게 되는 셈이다. 거 참..
 
그 이후에 뵌 것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진행한 정치경제학 강좌에서다. (veloso 선배가 기획했던 강좌) 10강으로 진행되었는데 마지막 강좌에서 정운영 선생이 던진 고민이 아마 선생이 마지막까지 가져가셨던 고민이 아닐까 싶다.
 
자본의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선택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질문이었다. 국민국가 내의 계급투쟁의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유지하고 국민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본을 국가 내에 묶어두는 것이 답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좌파의 대안은 무엇인가 등등. (최근에 읽고 있는 실버의 <노동의 힘>이 언급하는 논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선생이 마지막 몇년간 중앙일보 논설에서 모호한 입장으로 보였다면 이런 질문들이 관계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정운영 선생에 대해서 쉽게 비난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데, 최소한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고민이 전제되는 가운데 비판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운영 선생의 질문을 다시 생각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 좌파의 대안, 대중운동의 전략이 무엇이어야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을 고민하고 풀어갈 때 정운영 선생을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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