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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25
    연세대 총학생회, 뉴라이트, 오래된 반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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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3/14
    산별노조가 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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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2/19
    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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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2/18
    김명호 관련글을 다시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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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2/11
    산별노조-지역운동에 대한 추가적인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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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 바탕화면을 바꾼다는 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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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1/12
    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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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총학생회, 뉴라이트, 오래된 반성

연세대 총학생회가 총여학생회를 폐지하겠다고 학생 총투표를 한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여기에 더해서 의결기구로서 단과대 학생회와 함께 구성하게 되어 있는 중운위를 폐지하고 그 권한을 총학생회 상집이 가져갈 뿐 아니라, 단과대 학생회가 "외부" 단체와 하는 연대활동(성명서까지도)도 총학생회의 허락을 받도록 한다고 하니, 독재를 위한 쿠데타가 따로 없다.

 

관련 내용은 아래 링크 참고

[연대총여] 연세대 총학생회의 독단적 총투표 강행과 총여 폐지 주장을 규탄한다!

 

학생동지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아울러 들은 이야기는 (내가 요즘에 학생운동에 관심이 좀 많이 없었나 보다) 서울시내 규모가 있는 주요대학 17개 정도를 따져보니 몽땅 비운동권-반운동권 총학생회더라는.

 

연세대 총학생회는 '뉴라이트'라고 알려져있는데, 이들의 정치가 어떤 내용인지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반여성주의, 반정치주의(역설적이게도)에 입각한 대중의 정치적 동원. 이것은 그냥 '보수'라기 보다는 파시스트들을 떠올리게하는 정치양식이다. 특히 자신들이 장악한 총학생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반의 비민주적 학생회칙 개정 사항을 반여성주의적 동원 아래 묻어가고 있다는 것은, 반여성주의가 가진 성격, 따라서 여성주의에 대한 쟁점이 가지는 보편적 성격을 드러낸다.

 

이들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대자보들도 학내에서 훼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정치적이지만 또한 反정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공동체 내에 이견과 쟁점을 다루는 방식일 텐데, 이들의 방식이란, 의견을 억압하는 폭력으로서 도대체 정치라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동의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있다는 것이 현재의 학생사회라고 생각하니 우울해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오는데에는 많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고,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어떠한 집단적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대중의 정치적 후퇴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가 현재의 노동자운동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한때 실천했었던 학생운동을 반성할 필요도 있을 것같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학생사회의 논쟁이란 참으로 빈약한 것들이었다. 특히 학생사회의 논쟁이 집중되는 총학생회 선거 공간에서 '정치적 후퇴'란 좌우파가 모두 공범이었다. 정치적 구호가 중심이던 총학생회 선거에서 92년부터 처음으로 이른바 '복지공약'이라는 것이 NL 선본의 대대적인 선전 아래 핵심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좌파들도 93년부터 이를 모방했다. 그래도 그나마 정치적 쟁점이 남아있던 것이 93년까지 정도였던 것같다. 그 이후로는 모든 정치세력의 선본이 학내 복지사항을, 기껏해야 학교와 협의해서 만들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 상품들로 선거를 도배했던 것이다. 미디어 선거를 전면화했던 것은 애초에는 NL이 시작이었으나 이후에는 오히려 좌파가 더 유능했던 것같다.

 

군대를 다녀온 90년대 말에는 이런 상황은 더욱 전면적이어서, 총학생회 선거에서 정치적 입장이란 선본 자료집 맨 뒤 몇페이지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들 선거에서 항상 NL들이 복지공약에는 유능했지만, 그렇다고 좌파들이 그나마 정치적으로 나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 감각에 무능했을 뿐이다.

 

결국, 노동자운동에서 노조운동이 90년대 내내 단위 사업장 내에 경제적 이익에 몰두하면서 모든 방면에서 노조를 실리주의에 빠지게하고, 결국 신자유주의에 제대로 대항할 수도 없게 조합원 사회(그것을 '현장'이라고 부르지)에서도 실리주의가 만연하게 만들고 말았다.

 

학생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생회는 실리적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은 애초에 운동권들이었다. 운동권들이 학생회를 '수권'하기 위해 몰두할 수록 이런 경향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비운동권, 반운동권들이 세력화될 수 있었을 때, 이런 쟁점이 훨씬 유리한 것들은 이들이었다. 일말의 꺼리낌없이 '정치'를 배제하자는 주장이었는데, 그래도 이제까지 복지사안이라는 것을 도구적 쟁점으로 제기했을 뿐인 운동권들보다 이런 방면에서 훨씬 유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사태는 매우 불행하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의 원인중에는 90년대 우리가 해왔던 학생운동의 실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중요한 요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생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주체였던 학생운동 세력이 이러한 상황에 전혀 책임이 없을 수 없다면, 그 책임의 내용과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반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나 자신도 이러한 상황에 (내가 활동했던 캠의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의 책임이 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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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가 뭐 이래?

공공노조 출범 이후, 지난 2월 말 선거와 과도기 집행부 이후 제도를 정비하는 3차 중앙위원회가 지난 주 끝난 이후 나에게 특징적인 정서는 (많은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환멸"이다. 이런 낱말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나 자신에게도 분노스러운 일이라도 그렇다.

 

앞서 썼던 글들에도 말했던 것처럼, 공공노조의 출범과정은 대단히 문제가 많이 있었고 많은 쟁점이 '봉합'된 채로 '일단 출범'한 상태였다. 결국 선거와, 그 이후의 제도 정비과정에서 묻혀있던 여러 쟁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들은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위한 고민에 입각해서 발전적으로 정리되기보다는 기존 조직들, 특히 대공장 사업장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가운데 (또한 감히 말하건데) 폭력적으로 정리되었다. 

 

선거=민주주의?

 

아래 글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선거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공공노조 선거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월말에 진행된 선거는 아래와 같았다.

(1) 공공노조 위원장-사무처장 (2) 업종본부 본부장-사무처장 (3) 지역본부 본부장-사무처장 (4) 업종선출 노조 대의원 일반 (5) 업종선출 중앙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6)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7)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조합원들은 총 7장의 투표용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의원 투표의 경우 많은 경우 16명에 이르는 후보에 대해서 투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선거구의 조합원은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3월말에도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다. 앞서의 선거에서 (1)을 제외하고 선출되지 않은 기구에 대한 보궐선거(많은 경우 6개)에다가 지역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업종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등 총 10장의 투표용지를 받아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평조합원의 입장에서 불과 한달만에 이런 선거를 두 번이나 한다는 것이 어떻게 느껴질까?

 

쟁점은, 이러한 과중한 선거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3월말 선거에서 지역본부, 업종본부에 당연직 대의원제도를 임시로 운영하는 등의 방안을 도입하자는 서울본부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제안은, 조합원들이 표찍는 기계도 아니거니와, 지난 선거 경험을 통해 볼 때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진행할 경우 한달간 모든 활동이 마비된다는 점에도 있었다. 학교 비정규직 등 투쟁사안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고 산별적인 사업을 위해서 현장 순회 등으로 조직력을 정비해야할 시기에 모든 일정이 연기된다면 단위 지부의 임단협마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

 

일부의 주장은, 완고하게 "제도에 정한 대로"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약과 규정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지난 선거 이후 모든 제도가 얼마나 탁상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실제로 확인한 이상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대의원 선거는 이번에는 각 단위 자율로(결국 대부분의 단위가 선거를 진행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다)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돌이켜볼 때 선거는 각 집행기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상 노조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토론이 가능하게 되어야하는데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선거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선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결국 과도하게(지역-업종으로 2중으로 불어난) 노조의 기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합원을 동원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노조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조합원이 노조와 노동자 운동의 쟁점에 대해서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노조의 활동, 노동자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교육이든 토론이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공유하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노조의 방침에 따르는 수동적인 조합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동적 조합원으로 조직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선거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알리바이로 선거가 이용되고 있다.

 

조합비, 0.65%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조합비와 관련된 부분이다. 많은 노조에서 보통의 조합비는 1%로 생각되어 왔다. 0.65%라는 조합비 기준은 기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임금규모가 일정하게 되고 조합원수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는 노조들에서 총임금의 1%가 아니라 기본급의 1% 등의 방식으로 조합비를 낮게 책정해온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이 금액의 10%는 희생자구제-투쟁기금으로, 나머지의 60%는 다시 지부에 교부된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조합비 결정과정에서 많은 "유예"조항이 신설되었다. 기존 조합비가 인상되는 지부에 대해서는 1년간 이를 유보하고 이후 3년동안 점진적으로 인상한다든가, 해고자가 많은 사업장 지부에 대해서는 조합비를 감면한다든가 하는 조항이 그것이다.

 

유예조항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에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고 조합비를 많이 걷었던 지부들은 기존의 규모만큼 부담해야하고, 그렇지 않았던 곳은 오히려 계속 혜택을 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열심히 하는 데만 부담이 가중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해고자 부담 등을 이유로 사회보험 지부에는 산별중앙에 할당된 금액의 50%를 감면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조합비를 감면하는 대신 해고자들이 산별노조의 각급기구에서 활동한다든가하는 조치가 함께 통과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에서 일하는 해고자에 대해서는 상근자 임금수준의 급여를 지부 대신 노조 중앙이 부담하기로 하면서 '이중혜택'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결정되는 과정에서 조직적인 공동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지부가 어렵다"는 것만이 모든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사회보험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사업장 규모가 클 수록, 임금이 높은 사업장일수록 그런 모습이 강했다.

 

이는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 어떻게 각종 사업을 산별차원에서 함께 진행하면서 통합력을 증진할 것인가를 각 단위가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사업을 보전하고 산별노조(중앙과 지역, 업종본부까지 포함하여)에 납부되는 기금은 마치 어딘가 빼앗기는 것처럼 사고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출범한 산별노조에 대한 신뢰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산별노조를 출범하는 과정에서부터 원칙으로 천명되던 '단결의 증진과 힘의 결집'이라는 것과는 다른 사고가 팽배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것은 역시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보전해야할 사업장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최대한 많은 사업을 산별노조 차원에서 함께 하기를 바라는 곳들이다. 결국, 조합비를 낮게 책정하고 산별노조의 기구들, 특히 지역본부를 약화시키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 사업장과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의 관심이 충돌하는 쟁점이 되었다.

 

결국 결정된 예산안을 볼 때, 가장 예산축소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은 지역본부들이다. 원래 예산의 규모가 작은 상태에서 심지어 가장 작은 강원, 대전충남, 충북, 전북, 울산 등의 지역본부들은 월 130만원 대의 예산으로 사업을 집행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대부분의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 과정에서 기본에 연맹 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지역에서는 가용한 예산이 줄어들기도 했다. 서울의 경우에는 연맹 때와는 '현상유지'를 한 정도지만 전북, 대전충남 등에서는 연맹 지역본부 시절보다 예산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지역운동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도 발생했던 것이다. 노조 중앙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어서, 현재 작성중인 예산에 따르면 중앙의 각 부서의 사업비가 총 20여만원에 불과한 상황이다. 5개 정도 실이 만들어질 경우 4만 몇천원으로 사업을 하라는 이야기다.

 

전국단위의 비정규직노조들의 상태는 심각하다. 학교비정규직, 보육, 자활, 사회복지 등 지부들은 이미 지역별로 조직을 편제하기로 하고 중앙조직을 해산하고 있는 과정이다. 이들 사업장은 어차피 임금총액이 적기 때문에 조합비 교부금을 받아도 독자적인 사업이 불가능하다. 이런 속에서 지역별로 편제할 경우에도 지역별 주체형성도 문제이거니와 노조의 지역본부가 매우 취약하게 되면서 공세적인 조직화 사업은 커녕 조직유지도 힘들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조직의 상근자들은 공공노조에 고용이 승계되면서 최소한 지역-업종본부, 중앙단위 이상으로만 인사배치가 이루어지게될 것인데, 이 경우 상근활동가가 조직을 담보하기도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회의 장소에서 조합비에 따른 각단위 사업비의 시물레이션이 즉각 공개되었다)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몰라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은 이루어질 수 없고, 산별노조에 대한 각 단위 간부들의 솔직한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히려 저임금 사업장, 중소영세비정규직 동지들이 조합비 인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의 한 간부는 이런 논란이 '우습다'는 말도 했는데, 0.65%로 책정될 경우 산별중앙이 가져가는 조합비 수준은 연맹-민주노총의무금에도 미달하기 때문이다.(최저임금 조합원이 늘어날 수록 산별중앙 사업비는 줄어든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조건에서 지역,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에서는 오히려 "연맹 때가 좋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 과정은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운동적 의의를 공유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일단 결의하고 보자'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만들어진 이후에도 최소한의 원칙을 확인하지 못하고 "제도 정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후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산별노조,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된 이유를 사업장 현장 간담회라든가 이런 저런 과정에서 본 것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산별노조는 여전히 명분뿐이거나 개별 기업별 사업장의 이해를 지키기위한 방편정도로 인식되는 것같다. 기업별을 넘어서 적어도 유사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의식, 당장 자신의 일은 아니라도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으면 연대한다는 연대의식이라든가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겠다는 목표들은 공문구가 된다.

 

당장 사업비가 월130여만에 불과한(추가 할당된다고 해도 170만원을 넘기는 힘들 것이다.) 지역본부에서는 운영비도 빠듯할 뿐더러 투쟁사업장이 발생할 경우 제대로 지원도 할 수 없는 조건에 이른다. 이런 조건에서 미조직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거나 지역 차원의 산별교섭이나 사회공공성투쟁과 같은 것은 "좋은 사업계획"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산별노조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산별노조는 이런 것'이라는 관성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내부투쟁은 물론이지만)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면서 최대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수밖에. 그것은 당장은 조직적으로는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조직하는 노력과 사업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조직 내에 조직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노조운동의 주체를 이를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기존의 노동조합들을 바꾸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아무리 훌륭한 관점을 갖고 있더라도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는, 자신들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그런 것을 확인할 때마다 느껴지는 막막함이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실천이 기존의 운동을 압도해가도록 할 수밖에. 그것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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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영국 인민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돼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루소, "사회계약론" 3권.

 

 

무한히 복잡한 공공노조 선거제도

 

공공노조 선거 기간이다.(투표는 21~23일 동안 진행된다.) 금속노조는 1차 선거가 끝나고 결선이 예정되어 있다. 금속노조보다는 작지만 유례없는 규모와 복잡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선거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당장 걱정되는 것은, 이 선거가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 이것은 선거제도의 지나친 복잡성과 관련있다. 아래 공공노조에 대한 글에서, 공공노조가 지역본부-업종본부의 이중골간 체계를 인정하면서 관료조직이 두배로 확대되고 말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 선거는 두배로 진행되고 있다.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투표용지는, [중앙 위원장/처장], [지역본부 본부장/처장], [업종본부 본부장/처장], [지역선출 중앙대의원], [업종선출 중앙대의원]다섯개 선거에 여성할당 별도 투표용지까지 모두 7장이다. 후보는 특히 대의원의 경우 큰 선거구는 12~16명에 이르는데, 이 결과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후보자수는 무려 30여명에 이른다. 이번 선거와 지부-지회 선거를 겸하는 경우에는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게다가 현재 규약규정상 3월 중에 지역본부, 업종본부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한번 더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이쯤되면 "조합원을 표찍는 기계로 전락.."운운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선거를 많이 한다고 민주주의가 증진되는 것은 아닌만큼 나는 3월 선거는 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 직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조합원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투표용지에는 얼굴도, 소속사업장도 없이 오직 성명 세 글자 뿐이다. 게다가 투표방식 역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무나 엄격하다. 각 종이박스로된 투표함은 모두 20곳을 봉인해야하며, 각 투표용지에 지부 선관위원의 날인이 필요하고, 각 비표는 따로 봉인해서 23일 저녁까지 개표소에 인편인든 퀵이든 박스채로 모두 보내야한다. 볼펜기표는 금지되며 반드시 인주를 사용해야하고... 나는 내가 조직하고 주로 대해왔던 환경미화, 청소, 경비 고령의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당장, 투표용지가 빠졌다는 전화를 받으면 어떤 경우에는 (선거구가 다르기 때문에) 단지 옆 지부와 투표용지 크기가 다를 뿐인 경우들도 있다..

 

투표에서 ; 민주주의 조건

 

이쯤되면 직선투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의 조직구성,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조합원을 고문하는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30여명을 모두 투표해야하는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은 근무 중 현장에서 뛰어다니다가 이 투표를 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최소한 고민해야할 것들이 (그야말로) 대규모로 누락되고 있다. 아무리 선거가 복잡하더라도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칙이 있는 법일텐데, 실무적으로 바쁘다는 이유로─다른 말로 하면 관료기구의 편의를 위해서─면밀하게 보지 않는 것들. 누구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는 가장 쉽게 구성되어야한다. 가장 지적으로 부족한 조합원의 눈높이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제도 전반은 사무전문직 조합원들의 수준, 가장 높은 수준에 맞추어져있다. 이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비주류-교육수준이 낮고, 고령이며, 행정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바쁘더라도 더 신경써야하는 부분도 있다. 10여명의 이름이 있는 투표용지에 최소한 사진이나 사업장같은 기초 인적 사항이 들어가지 않으면 구별할 수도 없을 정도다. 조합원 선거 공보물에는 대의원의 경우 '엑셀'로 만든 표가 그대로 건조하게 들어간 정도여서 내 선거구 후보를 찾는데 나조차 곤란을 겪을 정도다.(그나마 서울본부의 경우 사진-경력-출마의 변이 담긴 포스터를 겨우 제작했다.)

 

물론, 선거구의 크기, 후보의 크기와 같은 면에서 지역 선거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나의 경우에도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초기업 선거구를 만드는 것을 관건으로 보다보니 일부 선거구는 너무 비대해졌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선거구도 더 분할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거가 복잡해지는 것은 지역-업종 이중골간체계에다가 과도한 선거제도, 불친절한 선거행정.. 등의 복합물이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와 지역-현장에 밀착한 운동구조, 그리고 가장 낮은 조합원의 눈높이에 맞춘 제도의 구성을 지킨다면 버릴 수 있는 것들도 많을 텐데.

 

노조에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노조에서의 선거는 또한 지속적으로 대안적인 관계, 대안적인 조직을 실현해나가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마자 관료조직이 (제대로 구성되고 작동하지도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 행정은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들이 우리들이 위임한 사업의 단순한 집행자, 즉 책임을 지며 소환 가능하고 근소한 보수를 받는 "감독과 부기 계원"(물론 여기에는 모든 종류와 모든 등급의 기술자들이 포함된다)의 역할로 끌어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프롤레타리트적 임무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면서 먼저 시작할 수 있고 또 먼저 시작해야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같은 시작은 대규모 생산을 토대로 하여 저절로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사멸"로 나갈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식은 더욱더 단순화되는 감독과 계산의 기능을 모든 사람이 순번대로 수행하여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는, 그리하여 결국 특수한 인간계층의 특별한 기능은 소멸되어 버리는 그러한 질서─괄호없는, 즉 임금노예제와 같은 유보조건이 없는 질서─가 점차 조성되게 할 것이다. (돌베게 판, 71쪽)

 

그러나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직무의 기능들이 주민 대다수에 의해, 나중에는 주민 모두에 의해 이해되고 수행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통제와 회계사무로 전화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5쪽)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또 실제로 사회적 생산을 관리하게 되며 독립적으로 계산을 하게될 그 때에는.. (137쪽)

 

노조기구를 전화하는 것이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전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조직에서 노동자의 자기통치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에 착목해야하는지를 발견할 수는 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사회에 미리 훈련될 것이다.

 

여기서 두개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행정이 더욱 단순해져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적 차이가 감축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는 것이다. 이는 노조에서도 (선거제도까지 포함하여) 노조행정의 단순화, 그리고 단순히 선거를 조합원 머리위로 위해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교육과 훈련─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은 하나의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의 경우 억압적인 자본주의국가의 '국가관리'가 아니며 '감독과 부기계원'도 아니라는 점. 유기적 지식인이자 활동가라는 점에서 '단순한 집행자'로 끌어내려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문제는 지적 차이를 감축하면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순번대로"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중에 주목할 만한 한 단어가 있다. "순번대로".

레닌은 베른슈타인이 이러한 자신의 주장(마르크스의 주장)을 "원시적" 민주주의라고 비웃었다고 말하면서 반박한다.(62쪽) 따라서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에서 참고한 것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은 (선출되는 것도 있었으나) 추첨에서 의해서 선발되었다. 오늘날, 대의제가 지배적인 "민주정"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배자이자 피지배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적절한 제도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것은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운영에 적합하도록 교육되고 훈련될 것을 요구한다.(정체의 필수적인 유지조건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지적차이의 감축) 그리고 그것은 평의회, 법정, 입법 위원회, 민회 등 다양한 기구를 구성하고 필요한 자리에는 선출제를 택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인민 그자체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인민의 규모의 문제, 기술적 문제는 전혀 아닌데, 충분히 대규모 조직에서도 추첨은 가능하다.(법정의 배심원제도와 같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다.)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에는 추첨이 더 적절해보인다. 추첨이 무정부적으로 아무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제도와 기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다시 상기해야한다.

 

(이번 공공노조 선거에서 자신이 좌파라고 주장하는 어떤 후보는 자신이 "지도자형"이며 "실무자형"과는 다르기 때문에 위원장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노조가 지향해야할 '민주정'에 대한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조합원-노동자들은 누구나 공동체에서 지도자이자 피지도자이다. 그것을 고양하고 공동체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선출될 후보가 특권적인 "지도자형"이 될 것을 요구하는 모델은 전혀 아니다.)

 

한편, 여기서 시민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은 "일차적으로 민주정에서 존재한다." 시민은 "판결권과 집행권에 참여하는 자이다." 시민은 민주정에서만 가능할 뿐 아니라, 민주정은 판결권과 집행권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그것이 민주정.

 

레닌이 말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그러한 순번, 혹은 추첨이 사회의 운영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묘사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노조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대의원 제도와 같은 경우에는 추첨을 통할 수도 있는 문제다. 아테네에서처럼,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출마하고, 추첨하며, 다만 선출될 경우에는 회의 참가에 따르는 일급을 지급할 수 있다.(무한히 복잡한 선거제도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이것이 적절한 '민주주의 비용'일 것이다.) 지금의 선거에서 20~30명이 출마한 선거구에서 기계적으로 투표하는 것보다는 민주적이다.

 

(대부분의 선거구가 미달이거나 후보자와 선출자수와 같기 때문에 선거제도가 변별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을 뿐더러, 경선이 된다 치더라도 대사업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불리하다. 게다가 과반수 이상 득표해야 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노조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모두 투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과제들

 

지금 진행되는 선거의 이례성─그 규모 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새로 만든 조직의 첫선거이며 따라서 아직 '관례'가 아니고 우리에게 '낯설다'는 점─ 은 노조에서 선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민주노총 직선제 주장에서도 직선제가 만능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 문제는 관료제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합원 사이의 민주주의를 증진할 의지와 고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일부 정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장 민주주의"라는 말을 수없이 한다고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문제의 복잡성 속에서 끈기있게 작업할 수 있어야 겨우 가능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첫 시도에서 우리에게는 끈기보다는 감각과 속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늦었고, 당장은 이번 주의 선거, 투표-개표까지 실제로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선거 이후 다시 평가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평가가 선거의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다시 한번 관료제의 편의성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증진할 수 있도록 논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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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관련글을 다시 보다가.

겨울철쭉님의 [김명호씨의 아이러니] 에 관련된 글. (내 글에 트랙백)

별로 인기없는 내 블로그에 폭발적인 댓글이 달린 위의 글을 보면서 이유를 생각해봤다. 흠흠..

왜 이런 짦막한 단상이 사람들의 '분노'(내가 느끼기엔 그렇다)를 불러일으켰을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사건에 대해 교수노조를 비롯한 지식인 단체들의 대응의 성격은, "(대학-제도권) 지식인들의 경제투쟁"이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같다. 사실 사법부의 전횡을 고발하려면, 더 분노할 만한 사건은 언제나 더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만 해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사법부가 돈과 권력 앞에서 어떠한 입장을 갖는지 보여주는 너무나 적나라한 사례였다.

 

김명호 사건과 굳이 비교해보더라도, 이번 건에서는 삼성의 모든 범죄행위는 무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제기한 김성환 위원장은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에다가 집유까지 엎어서 곱징역을 살아야했다. 그냥 피고(성균관대)가 무죄가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김성환 위원장의 옥중 투쟁과 부모님 상, 최근 엠네스티의 양심수 인정 등...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여러가지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사법부의 권력-자본 유착과 전횡을 폭로하려면 김성환 위원장 사건이 더 심각하고, '극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명호 사건은 언론은 물론 지식인들에게도 다른 대접을 받았는데(물론 후자는 전자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언론도 만약 아무리 석궁 사건 할애비라고 해도 삼성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신속하게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럼 지식인들에게는?

 

김명호 사건에 (대학의) 지식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의 재임용제도의 불합리성과, 이 속에서 드러나는 대학권력의 전횡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부의 문제로 보자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수많은 판결에서 반복된 문제를 다시 한번 드러낸 것이고, 최근의 다른 사건에 비해서 그 정도가 심각한 것도 아니다.

 

(나는 "비해서"라고 했으니 오해 없으시길, 나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판결이 많은 사건에서 이미 일상적이라는 것. 다만 여기서 지식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일반화'하려는 속성이 작용한다. 지식인들은 어쩌면 자신의 특수한 문제인 대학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을 사법부의 문제로, 일반화해서 제기한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때로는 다소 뜬금없는 비약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솔직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오히려 솔직해지는 것이 좋다. 사법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대중에게도 호소력을 갖는 그런 '대의'를 스스로 믿기 이전에, 이 사건에서는 대학 재임용제도의 문제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최원씨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결론이지만 다소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재임용제도'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지식생산과 공유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으로 나갈 때 최소한 대학 내 지식인들의 경제투쟁을 넘어설 것이라는 점은 언급해두자.

 

나는 이제 김명호가 선생으로서 존경받을만 하지는 않다고 하는 말이 그런 입장에서는 분노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하지만 그가 대학에서 선생으로서 존경받을 만한지는 여전히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재임용 문제가 쟁점이될 때, 그 사람이 교수 자격이 있느냐 아니냐가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의미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제가 사법부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핵심쟁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김명호의 교수로서의 자격에 대한 비판에 분노하는 입장들이다.

 

결국, 이 문제는 대학-제도 내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 사건과 같은 것에 그 만큼의 정력을 투자해서 공동대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글에 달린 댓글에 '징후'를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학제도권 內이든, 비제도권이든) 지식인들도 자기분석과 자기비판이 필요한 법이다.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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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지역운동에 대한 추가적인 토론

지난 2월9일(금)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에서는 "산별노조 시대, 노동자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이라는 이름의 정책워크샵이 열렸습니다. 토론자의 한명으로 참석했습니다. 아래에 올린 <공공노조, 쟁점과 전망>을 다소 수정-보완해서 토론문으로 제출했습니다. 회원들과 지역의 몇몇 노조 활동가 동지들이 함께 한 가운데 의미있는 토론들이 있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몇가지 생각난 지점들.

 

지역에서 노조가 사회운동을 함께 한다는 것

 

이 것은 노조가 자신의 문제를 지역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것인데요, 두 가지 과정이 결합되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1) 우선 다소 중장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의 문제로 노조의 문제가 인식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 이는 노조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할 것인데, 운동프로그램들만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2) 덧붙여 노조가 자신의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사업장의 구조조정 문제와 같은 것이라도 말이지요.) 특히 두 번째 과정을 통해서 지역공동체가 처한 문제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의 동일한 원인을 공동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이 속에서 노조는 자신의 투쟁을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위치지울 수 있겠죠.

 

두 가지는 서로 상이한 실천프로그램들을 요구할 것인데, 그것은 노조의 상황이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역차원에서 상시적으로 노동조합운동, 사회운동들이 공동의 운동을 기획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 기획이 이런저런 조직적 조건, 인적 연계망을 통해서 활성화된 곳에서 이런 시도들은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경제살리기"

 

신자유주의 불균등 발전전략 속에서 배제된 지역에서는 특히나 '지역경제살리기'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합니다.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이 전개되는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식의 운동이 지역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데요, 건설노동자들이 투쟁했던 포항에서도, 현대하이스코 투쟁이 있었던 순천에서도, 건설플랜트, 현대차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울산에서도 비슷합니다. 이건 결국 블랙홀이 되어서 노동자들의 요구의 해결이라는 것도 이런 틀에서 제기되기도 하는데, 그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죠. 심지어 민주노동당 마저도 울산시장선거에서 "오토밸리의 적임자는 민주노동당"이라는 식의 공약이 제시되었는데, 대안적인 지역운동에 대한 방향이 없이 지역발전주의에 포섭되고 그것을 강화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지역경제살리기"와 다른 방식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제기될 수 있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보다는 비수도권지역의 동지들이 더 답을 줄 수 있을 것같군요.)

 

그밖에 토론문에 이런 내용을 추가했었죠. 참고로.



 1. 산별노조 건설과 지역운동 강화는 별개의 과정

 

o 현재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지역운동을 강화한다거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추진되는 것은 아님. 다만, 그러한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정세적 조건이 형성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주의해야


o 역사적으로도 산별노조 건설이 자동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노조운동의 활성화로 귀결된 것은 아니며 이는 별개의 운동과제로서 조직내에서 추진되어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 특히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라는 쟁점은 ‘사회공공성’이라는 정책방향으로 제시되는 데 이것을 넘어서는 운동기획이 또한 도입되어야한다는 점.


o 오히려 산별노조 자체의 적극적인 의의는 ‘초기업’, ‘초업종’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음. 노동자들이 단위 기업 안에서 협소한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단계라는 점
- 이러한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초기업적 운영, 초업종 운영은 각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음. (산별노조 조직구조와 관련된 논쟁은 이러한 쟁점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조직형식적 논쟁이라는 한계가 있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용적인 논쟁이 필요한 시점.)

 

2. 지역운동 강화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결되어야함

 

o 지역운동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질을 갖는 것은 아니며, 지역자체를 강조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운동적인 의의가 확보되는 것은 아님


o 지역공동체의 특수한 이익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될 경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보편적인 노동자계급 주체를 형성하려고 하는 시도와는 무관하게 진행, 현실에서 지역운동을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은 지역차원의 특수한 이익을 강조하는 경향도 존재함 :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의 ‘오토밸리’ 활성화 공약


o 그러나 지역공동체와 노동조합이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결합하는 사례는 보편적인 정치투쟁과 연결될 때 가능했음. 현재의 시기에 그것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결되어야함


o 이를 위해서는 지역차원의 운동전략이 노조운동과 사회운동 일반에서 공동으로 수립될 필요가 있음. 현재 상황에서는 오히려 산별노조의 지역조직이 사회운동적 의제를 외삽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음.

 

3. 지역차원의 ‘공동체 형성’이라는 문제가 특별히 강조되어야함

 

o 공공노조의 경우는 더욱 심한데,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문화는 모두 천차만별임. (공공노조의 경우 같은 지역안에서도 임금차이가 수배에 이르고 직종도 고액연봉 연구자에서 청소원에 이르기까지 다양)


o 지역차원에서 조직적 단결을 이루어내고 ‘같은 지역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식-조직이데올로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음. ‘시혜’가 아니라 연대를 위해서는 정체성 형성에 대한 개입이 필수적임.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야하기 위해서는 문화 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함.


o 이는 노동자 문화 운동에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기업별노조(업종별) 운동을 넘어서 노동자 운동의 ‘일반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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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바탕화면을 바꾼다는 것

하루중 많은 시간 동안 pc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바탕화면은 나름대로 사소하지만 신경쓰이는 고려사항이다. 바탕화면을 어떤 이미지로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서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니면 일부러 무미건조한 바탕화면을 쓰거나 아니면 아예 그림없는 단색으로 쓰기도 한다.

 

내가 사용하는 pc는 세 개인데, 하나는 집에 있는 개인 pc, 사무실 pc, 그리고 노트북까지다. 각각에 깔려있는 바탕화면들은 다르기도 하고 공통되기도 하는데, 여튼 평균 한달 정도 주기로는 바뀌는 것같다. 바탕화면바꾸기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분전환 수단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 것들은 어느 정도는 그 당시의 기분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실 pc에는 이런 화면이 깔려있다. (이 바탕화면들은 모두  "가까바탕화면"creensaver.pe.kr s 사이트에서 다운 받은 것이다. 가장 괜찮은 바탕화면 사이트. 이미지가 커서 로딩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다.)

 

 [크게보기]

 

주로 업무용으로, 낮에 사용하는 pc에는 요즘에는 이 그림이 깔려있고, 노트북도 비슷한 이미지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집에 개인 pc에는 이런 그림이 깔려있다.

 

[크게보기] 

 

역시 밤에 많이 쓰는 pc여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

이 그림을 보고 물끄러미 있으면 그림 속 눈발날리는 강변에 서 있는 것같고, 걷고 있는 것같고, 길을 걷다가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이 손을 내밀 것같다. 역시, 깊은 밤에 와인이라도 한두잔 마셨을 때 이야기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어디론가 이어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 그곳을 걸어가면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디론가 이어진 길을 걷는다. 길을 욕망하는 내가 만날 길은 어디로 이어져있을까. 숲속의 그 길은 어디로, 그리고 눈발날리는 강변, 밤길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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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노조 활동가들의 노동조합

EM님의 [상근자 노조 논쟁(?)에 부쳐] 에 관련된 글.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일로 논쟁이 되고 있던 즈음, (뭐 우리밖에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지만 ^^;) 나를 포함한 공공연맹의 상근활동가들도 공공노조의 지부형태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지금 진행되는 선거인 명부가 확정되는 2월18일 전에 가입절차를 마무리할 것을 상근활동가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며칠후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의 간부를 이런저런 일로 우연찮게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연맹의 상근활동가 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공노조에 집단 가입할 것을 제안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 운영에 함께 하는 조직에 정당한 일원으로 책임을 갖고 또한 그에 걸맞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제안하고 나서 보니 주로 "전진"쪽 선배상근활동가들은 이미 각자 개별적으로 가입원서를 공공노조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참.) 그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단지 '월급받고 채용된 사람'의 위치에 남는다면 그것은 계속 관료기구의 실무자가 될 뿐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것은 '멤버쉽'이었던 것이다.

 

사실, 채용 상근활동가들은 유리한 조직적 위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부당한 배제를 당하기도 한다. 연맹에 있는 1/3 정도의 상근활동가들은 단위 노동조합에서 직선간부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머지 동지들도 단위노조의 경험이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책임있고 훌륭한 동지들이 많다. 하지만 정당한 조직적 멤버쉽을 갖지 못한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연맹 소속 노조의 직선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사업장을 퇴직하고 연맹에 채용상근자로 올라온 동지라도 같은 상황.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서는 배제되었다. 다만 (힘쓰는 정파에 속한 경우에) 정파들을 통해서 비공개적으로 개입하는, 부적절한 관행만이 그것의 결과였다.

 

나는 공공노조의 '연맹사무처지부'(일단 향후 초업종 지역지부가 구성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지부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서울지역지역지부가 구성되는대로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지부를 설치했다. 서울지역의 초업종지역지부와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의 <우리들의 미망 혹은 희망>을 참조.)가 상근활동가들이 공공노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일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과는 달라야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EM님이 위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에 비해서 일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노동자가 아니라거나, 노조를 만들 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EM님이 정리했거니와, 적어도 그것들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수준은 넘어야 의미있는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구조적으로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노조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면, 노동조합 조직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1번인 '법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을 규정할 뿐 아니라, 매시기 활동의 모든 측면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매순간 그것들과 전투를 치루어야한다.

 

노동조합은 조직의 구조, 운영방식, 활동의 범위, 활동양식 등 전반을 노동관계법을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도다. 그래서 그것은 (알튀세르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의 하나이다. 노동조합의 규약이라는 것도 사실 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데, 규약으로 풀리지 않는 (내부운영 등에 대한) 쟁점이 종종 법정으로 간다는 사실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노동조합의 활동과정에서도 그것은 느낄 수 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부르조아 국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무해하다고 인정된 경제적 투쟁에 국한되며, 그것을 관리한다. 경제투쟁이 한계를 넘어서 법의 규제를 받는 순간까지가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물론 최근의 경험에서도 80년대말과 전노협 시기에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항상 기억해야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이유라면, 그 속에서 이러한 법적 제한에 갇히지 않는/을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때로만 성공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이다. 노동자들이 결사체인 노동조합이 법 이데올로기에만 제한되지는 않는 자신의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그 과정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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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알튀세르를 인용하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앵에서의 주장/1991,솔』에 실림, 무엇보다 전체를 직접 읽는 것이 좋겠지만.)

"계급투쟁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 속에서, 따라서 AIE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고 시행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형태들을 훨씬 넘어선다. 그리고 피착취계급의 투쟁이 또한 AIE들의 형태들 속에서 시행될 수 있고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라는 무기를 권력을 쥔 계급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그러한 형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각주11, 강조는 원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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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도, 자신의 조직형태를 노조로 규정하는 순간 같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노동조합은, 그 제도 자체의 정의에 따라 '사용자'를 누군가로 정의하고 '단체협약', '임금협약'을 요구하며,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모아내려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자기 조직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이 노조 활동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만들 조직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게된다. 이러한 노조 기구의 한계를 인식하는 활동가들이라면 오히려 평의회 형태를 조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서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말이다. 설사 그것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취했더라도 그 운영이 기존의 노동조합과 같은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사후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민주노동당 상근자였다면 민주노동당과 같은 경우에는 '당직자 평의회'와 같은 형태를 제안했을 것같다.(물론 조직형태만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조직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며, 그것은 조직의 성격자체를 규정하는 충분히 강력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 형태를 취하는 것은 가볍게 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조직 안에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당이 스스로도 대안적인 구조와 운영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동당 노동조합을 만든 동지들만의 책임은 아니며, 당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것이 당직자들에게 당지도부와 자신들의 관계가 '노사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날 때 당직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가능할까?  다만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인해 부여되는 가상--부르조아 법이 제한하는 구조와 운영--에 스스로 빠지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노조형태를 취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그것은 당사자들이 우선 고민해야할 문제이지만, 만약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이 공공노조에 가입하게 된다면 지역별로 사회복지, 비정규직 등 운동과제에 '조합원으로서' 해당 현장의 노동자들과 결합하는 방법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형적인 '노조'활동과는 또 다른 방식의 노조활동일 것이고, 노조 안에서 사회운동을 강화하는 또 다른 의미의 활동이겠지만.)

 

"연맹사무처지부" 경우는 다를까? 나의 경우에는 '멤버쉽'이 가장 문제라고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참여한 상근활동가 모두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함께 했을 것이고, 그중 다수는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관행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찬가지의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노사관계에 가까운 무엇이 우리 내부에서도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날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활동가들의 조직이라면 자본주의적 노사관계를 조직 내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물론 민주노동당 안에서나, 공공연맹 안에서나 그것은 조직의 객관적 현실이라는 한계에 규정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직들 자체가 다른 관계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너무 "후지다".) 그러나 주체적으로도 부르조아 법이 부여한 가상에 갇힐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진술이 이제 '조합원'이 된 사람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까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기구의 한계만이 아니라 주체들의 한계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연맹에서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강조되어야할 것은,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조직의 상근관료들이 조합원을 대신하는, 관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럴 위험이 상당하다.) 그들도 발언권이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잉대표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근활동가들을 직접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한다. 그것이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강화하고 권력화를 비호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이어야한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모순의) 이중의 항에 대항해야하는 어려운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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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이 적절치 않다고 비판하는 동지들의 진술이, 일면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그 형태를 '노동조합'으로 결정한 동지들에게도 항상 자기비판-자기지양이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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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

작년 12월에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강좌에서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진행한 강의 교안입니다. 제가 이런 주제로 교육을 할 위치는 아직 아닌데, 뭐 그래도 사례들을 곁들인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강의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부분들도 있고 말이지요.

아래와 같은 두개의 인용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뭐 대부분의 내용이 제가 쓴 것이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짜집기 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안이라는 것의 운명이 본래 그렇죠.

… 따라서 노동자 조직들 (특히 계급정당)은 결코 노동자 운동의 총체성을 '대표'했던 것이 아니며 노동자 운동과 주기적으로 모순에 처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 조직의 대표성이 산업혁명의 특정단계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 '집합 노동자'의 특정분파를 이상화하는 것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대표성이 국가와 정치적 타협의 특정한 형태에 조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 노동자 조직의 실천적 형태들에 반대하여 노동자 운동이 재구성되어야하는 순간이 항상 도래했다.
- 발리바르, 「계급투쟁에서 계급없는 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과 노동계급의 지속적인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제설정 덕택에 우리는 노동계급의 형성을,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던져버릴 위험성에서 비껴서 있게 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자본에 의한 노동시장의 분단, 인종·민족·젠더 등 비계급적 토대에 따른 노동계급의 배타적 자기 동일성의 형성, 국가에 의한 시민권의 경계 분할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경계긋기의 과정으로 역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재)형성을 추동하는 기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된다. 실버가 자본이동, 제품주기, 세계정치의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지역적·세계적 추세와 근대세계체계의 변화가 맞물리는 지점, 즉 시간의 동학과 공간의 동학이 맞물리는 접합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백승욱, 『노동의 힘』역자후기

신자유주의라는 정세와, 이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전화한다면 노동자운동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대의 확장, 대안세계화운동(그리고 여성운동, 반전평화운동)과 결합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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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씨의 아이러니

김명호 교수의 사건이 참세상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재판부 기록을 보면, 이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증언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까 이 것들도 사실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수업 중 학생들의 시위 소리가 귀에 거슬리자 '저런 새끼들이 학생이냐', '저런 놈들을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한 점 △수업 중 공공연히 '내가 내년에 학과장이 되면 과내 모든 써클을 없애버리고 학생회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점 △학생들에게 '애가 어렸을 때 잠자는데 울길래 패버렸다', '성대 수학과 대학원생들은 쭉정이들이다'고 말한 점 △수학과 동아리 학생들에게 '씨팔놈', '개새끼'라는 욕설을 한 점

그냥, 뭐, 이렇다는 겁니다. 공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저같은 사람 입장에서 이런 교수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선배 과학생회장은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 때 수업을 빼는 문제로 학과장면담하다가 재털이가 날아와 크게 위험하기도 했지요. 우리과만 그런것도 아니었죠. 그땐 참, 그런 인간도 덜된 자들이 교수랍시고 선생'질'한다는 게 분노스럽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했습니다. 나이도 들고 공학적 지식이 머리에 있으면 뭐합니까, 인간이 덜 되었는데 말이죠. 김명호 교수도 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같습니다.

이번 판결 자체는 심각한 문제가 있고 사법부의 본질을 또 한번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명호라는 양반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김명호씨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은 그것이 어느 방향이든 하는 사람인 것같은데(이번 "테러"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총쏴버리고 싶다고 했던 시위대 출신들, 없애버리겠다던 학생회 출신의 진보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법부의 기만적인 작태에는 분노하면서도, 비판하면서도 (더구나 반동적인 사법부가 저런 증언들을 판결문에 인용한다는 것자체가 역겨운 일입니다. 이런 걸 증거로 제출한 삼성재단이 지배하는 성균관대 역시 그렇죠. 그들도 학생회 없애버리겠다는 데에는 동감하면서도 이런 걸 증거라고 내다니, 구역질 나옵니다. )
김명호씨를 그냥 옹호하는데 까지 가기엔 씁쓸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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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

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몇몇 글이나 논의에서, 산별노조 건설 자체가 노동자운동의 대안이 될 수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조직적 재편을 강제하는 정세를 창출하고 따라서 개입을 위한 열린 공간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런 점에서 공공연맹의 산별노조 건설(전국공공서비스노조 전환) 과정 속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노동조합 구조를 조직하기 위한 나와 우리 동지들의 노력은 이런 계기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기존의 고루하고 관료화된 노조 조직구조를 혁신하고 '운동'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을 복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다.

공교롭게도 공공연맹의 임시대의원대회가 성원부족으로 개회조차 못하고 무산된 날, 산별노조의 서울지역본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와 초기업-초업종 서울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는 나름대로 알차게 진행되었다. 오전에 있었던 서울지역본부 논의(산별노조 서울지역 지부-지회 대표자회의)는 지역의 운동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논의를─현재 논의일정이 대단히 부실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진행했다. 그리고 저녁에 있었던 서울지역지부 준비모임도 의미있게 진행되었다.
 
▶ 당일 대의원대회와 관련된 참세상 기사
공공연맹 임시대대 개회도 못하고 무산
토론회에 이어 임시대대도 무산, 통합연맹 빨간불

 


지역을 단위로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사회복지부문 등을 중심으로 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건설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전체 산별노조 조직질서 속에서 '보장'하기 위한 초업종 "업종본부"를 구성하는 노력이 병행된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조직형태는 금속노조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광역지역본부와 업종본부 양자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고 두 본부에 모두 편제되는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마치 금속 새흐름이 예전에 주장한 "이중단일체계"와 유사하다. 게다가 금속에서도 많은 동지들이 반대했던 '한시적 기업지부' 또한 인정된다. 더더군다나 '한시적'이라는 말은 사실 수사에 불과한데, 이 기한을 3년으로 못박자는 주장은 주로 우파들의 고집으로 인해 '3년 후 논의한다'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덕분에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하고자 하는 단위들도 의무적으로 "업종"본부에 편제되어야하는 곤란함이 발생한다. 게다가 전국단위 기업별노조에 속해있지만 지역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려는 동지들은 조직 내에서 구조적 제약을 받는 상황이다.)

각 지역에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이날 "서울지역지부 준비위" 1차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의 "지부"단위가 기업별로 구성되고 있고, 그나마 '나은' 단위들이 업종지부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도는 지역차원에서 연대의 정신을 부활시키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이념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산별노조 자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을 위한 '코어'를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단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조직 내 '경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 내적이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일반화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공장 사업장 활동가들이 산별노조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세사업장, 비정규직사업장의 경우 연합적 힘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적 조건으로서 산별노조가 의미가 있지만, 대공장 사업장에서는 그나마 존재했던 현장투쟁을 약화시키고 관료화를 부추길 염려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의 산별부결운동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자신의 사업장의 현장주의에 갖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싶다. 노동자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은 대공장의 '사업장'이라는 현장보다는 오히려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는데 각 지역에서 주로 우선 나서는 조합원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자치단체 비정규직 노동자, 용역-외주위탁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 시설관리노동자, 영세사업장 노동자, 학교비정규직노동자, 사회복지부문 노동자(보육, 자활기관, 사회복지시설 등)와 같은 사람들이다. 지역을 근간으로 해서 "연합적 힘"을 형성해야하는 노동자들이다.(이 '연합'의 대상이 노동조합으로만 제한되지 않으며 지역차원에서 사회운동도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경향을 가질 수 있는 조직적 여건이 형성되기도 한다.)

모임을 갖고 간단한 뒤풀이. 회의를 하면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노조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함께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들을 확인했다. 뒤풀이를 하면서는 각자의 조건을 대화 속에서 확인하면서 어려움도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학교비정규직 동지들은 새롭게 조직되는 학교내 시설관리 노동자들과, 기존에 시설관리 용역 노동자를 조직했던 동지들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자활지부에서 조합원들이 만나는 청소용역, 사회서비스부문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함께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청소용역, 학교비정규직, 보육 등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함께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사회복지, 사회서비스, 빈곤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여러 사회운동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이것은 공공부문 노조운동 안에서는 "사회공공성"이라고 불린다. 나는 이 개념에 다소 불만이 있지만 ^^;) 이렇게 가능성들을 찾아갔다.

(일전에 자활기관에서 일하는 블로거인 체게바라님과 사회서비스업무를 자활기관이 위탁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논쟁한 적이 있다. "근데 왜 굳이 청소용역입니까" 등. 이날 회의 뒤풀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과정에서 참여주민을 조직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점을, 이 과정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현실의 답을 찾은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산별노조 내에서 우리가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업종, 초기업 조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작은 감동도.

하지만, 그것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난 6월에 같은 방식으로  이미 조직해왔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에 대한 평가토론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한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지역연대확장과 강화, 비정규직 조직화, 조합원의 주체화, 사회운동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기업별 조직구조, 취약한 조직역량, 조직확대의 한계를 뼈져리게 평가했다. 따라서 지난 2~3년 동안의 각 지역에서의 실천에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면 결코 좋은 성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엊그제 있었던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도 지난 몇년간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을 좀더 규모가 큰 서울지역에서, 산별노조 건설 이후라는 조건에서 반복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한 희망希望은 어쩌면 미망迷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는 서울지역에서도 이제 처음 모여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장과 업종을 넘어선 노동자의 연대, 사회운동과의 연대, 비정규직 조직화라는 이념으로 만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을 지 솔직히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가 엊그제 잠시 서로 확인한 가능성들은, 지난 몇년간의 각 지역에서 실천에 대한 평가에 비해서는 너무나 연약하고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은 희망이라기보다 미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그것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고, 어쩌면 성공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몇 년 동안의 (비록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이 지적되었다고 하더라도) 평가가 있고 교훈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함께 고민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자. 각 지역 동지들의  몇년 동안의 어려운 실천과 실패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나갈 수 있다.(그 실천들에 경의를!)

그래서,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을 사고해야하겠지만, 다만, 희망하는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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