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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서를 내고 온 날

병가에 이어서 휴직을 연장하고,

한 동지의 사직 소식을 듣고 술을 같이 진탕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술을 먹는 밤.

집에 오는 버스를 타고 중경삼림 주제가인 夢中人(王菲)를 듣고 나서,

어쩌면 우습게도..

럼블피쉬의 "으라차차'를 듣다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펑 울고 말았다.




 
  

음악과 동영상은 다소 무관하지만 음악 때문에, 암튼.
 


몽중인(夢中人),중경삼림 OST




가사는 원곡인 Cranberries - Dreams 의 것

Oh my life is changing everyday
in every possible way
And though my dreams
it's never quite as it seems
Never quite as it seems
 
I know I felt like this before
But now I'm feeling it even more
Because it came from you
Then I open up and see
The person fumbling here is me
A different way to be
 
Ah, la da ah... La...

I want more, impossible to ignore
Impossible to ignore
And they'll come true
impossible not to do
Impossible not to do

And now I tell you openly
You have my heart so don't hurt me
For what I couldn't find
Talk to me amazing mind
So understanding and so kind
You're everything to me

Oh my life is changing everyday
In every possible way
And though my dreams
it's never quite as it seems
'cause you're a dream to me
Dream to me   Ah la la la 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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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없다~"진중권의 유머?심형래의 유머?

'디워'에 대한 포스팅을 한 번 더하게 되네.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이 한 비유 중에 "영구 없다~"가 있다. 이게 아주 재밌는 말인데, 언론이 이상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괜한 욕설로 알려지는 중이다. 여튼, 심형래 개그의 본질을 진중권이 패러디한 셈.

대부분의 언론이 "스토리가 없는 것이 ‘영구 없다’와 다를 바가 없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다. 엥? 황당한 얘기다. 신문마다 100이면 100 기사들이 다 이런데, 기자들이 멀쩡한 말을 전혀 이해할 능력이 안되거나 멍청하게 처음 쓴 남의 기사를 배껴쓴다고 밖에 볼 수없게 만드는 대목. 물론 이 말이 '디워' 영화 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핏대올리는 '디워'광팬들도 마찬가지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한 말은 이렇다.(오마이뉴스의 토론 지상중계만 정확하더만.)

(관객들이) '아리랑' 나와서 눈물 흘렸다.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인생극장'이라 찡하다. CG 볼만하다. 이것 빼곤 없다"며, "문제는 그러면서도 애국 코드가 아니다, 민족 코드가 아니라고 하니 황당하다. 영구가 '영구 없다' 하는 것과 똑같다"

'디워' 광팬들이 민족주의, 애국주의 논리로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게 아니라고 핏대를 올리는 모습에 대한 언급이다.

심형래의 "영구 없다~"개그가 재밌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영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영구는 단지 "말"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모순을 우리 모두 알지만 영구만 모른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과 말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그것을 모르는 영구를 우습게 만든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디워'광팬들이 "영구 없다~"로 집단 개그를 해주고 있는 시추에이션.
그러니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심형래의 위트있는 개그를 그의 광팬들이 (충실한 팬들답게?) 따라하는 셈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심형래가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들을 광팬들은 정말로 모른다는데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이 그냥 코메디가 아니라 블랙코메디가 될 수밖에. (여기선 역사가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반복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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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MBC100분 토론이 진미군.

영화 '디워 ' 광풍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길게 덧붙일 것은 없지만,
다시 논란이 되는 MBC 100분 토론, " '디-워'(D-WAR)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 "을 봤다. (MBC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없지만 이번 100분 토론은 지대로 재밋더만. 강추! (사실 하도 광들이라 호기심에 영화도 볼까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지만, 지금 더 흥미로운 건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니 보지 않기로.) 진중권은 역시 예의 그 날카로운 입담을 발휘한다. 순발력도 죽이고 논쟁 중에 상대의 약점을 잡는 방법도--다소 비열할 정도로--잘 알고 있다.(언론에 다소 엉뚱하게 소개된 "영구 없다" 발언은, 맥락을 보면 통괘할 정도로 예리하다.) 진중권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디워' 광풍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 영화 자체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비판한 셈이다.

정말로 재밋다. 자, 여기.
100분 토론 홈페이지 : http://www.imbc.com/broad/tv/culture/toron/index.html


진중권의 이야기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대중들이 애국주의, 민족주의 논리로 말하고 있으면서 곧바로 자신들은 그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주여,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비밀. 자신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예 인식하지 않을 때/거부할 때 그것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바로 앞에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한다. 논리와 이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비판은 불필요해진다.

'디워'를 광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스크린쿼터 폐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하겠다고한다. 결국, 이번 소동을 겪으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컴플렉스는 헐리우드와 같은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셈이다. 자기 파괴적으로.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한 대안이 아닌데, SF는 아메리카에 고유한 (문학)양식일 뿐 아니라, 그것을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즉 SF를 영화로 제작할 수있는) 자본과 기술은 미국이 아닌 곳에서도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문화적 양식이라는 점, 헐리웃 영화산업이 아메리카 헤게모니의--아마도 매우 불충분할-- 새로운 이윤의 원천 중 하나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러한 요구는 결국, 한국영화가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장점들마저 모조리 파괴하고 말 것이다. 헐리웃 영화의 문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헐리웃 영화일 뿐이다. 그것은 심지어 심형래도 아니고 말이다.(따라서 100분 토론에 나와서 "한국영화를 위해서" '디워'를 옹호하는 하재근 씨는 오히려 자신이 그 "한국영화"가 불가능한 어떤 곳으로 가는 대중들을 정당화한다.) 젠장, 영화관에 헐리웃 영화만 깔리는 것도 짜증나지만, 헐리웃 영화 + 헐리웃 영화와 구분이 안되는 한국영화들(그것도 수명이 얼마 안 남을 테지만)로만 깔리는 것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토론에서 '디워'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던 하재근 씨마저, 진중권의 주장이 옳고, 존중해야한다고 말하자 마자 여기에 대해서조차 디워 광펜들은 광분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포지션도 용납이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 "같은 편"이라도 "비둘기파'는 테러의 대상이 된다. 아주 웃기고들 계시다.

한편, 대표적인 친노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는 '디워'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글들이 "컬럼"이라는 이름으로 게시되고, 전화 인터뷰이 중에서 '디워'옹호자는 오마이뉴스 기자. 그리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인용한 "디워,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무로를 타격하라."라는 정신나간 컬럼은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렸고 하재근 씨도 여기 컬럼을 쓴다. 모두 노사모 계열의 사이트들인데,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이 이런 점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그들은 의사-비주류, 반지성주의 전략으로 신자유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을 읽어야한다. '디워'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한, 희망이 갈 곳없는 대중들이 열망하는, 그러나 "텅빈 자리"다. 대중의 민족주의적인 열등감의 다른 면, 잘나가는 '전문가'들에 반대하는 다른 면, 충무로로 상징된 주류에 소외된 다른 면,  헐리우드 영화자본의 화려한 영상에 대한 열등감의 다른면..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고, 욕망의 이면.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텅빈 욕망의 장소이자, 그것에 걸맞게 영화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부정적인 것'들--무엇에 반대하는--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디워' 광풍에서도 그에 어울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터넷의 '디워' 광팬들은 처음에는 평론가들에 대한 반대, 그 다음에는 이송희일 감독에 대한 반대, 이제는 진중권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디워'에 열광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들이면서, 또한 계속 미끄러져간다. 그래서 토론에서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비판을 할 수록 역설적으로 '디워'마케팅에 도와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출연하기가 꺼려졌다는 발언은 매우 정확한 지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치 한 때는 그것이 노무현이었고, 한때는 황우석이었을 때처럼) 다음번에는 또 무엇인가, 누군가가 그 자리에 또 위치할 것이다.(어떤 노련한 인민주의자 정치인? 그게 수준미달이라고들 하는 이 괴수 영화와 관련된 현상을 "정치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디워' 현상에 비판적인 전화인터뷰이였던 서대원 무비스트편집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반복되고, 계속될 것이다. (진중권이 놓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 '텅빈 자리'에 어떤 다른 상징, 대안적인 세계상이 자리할 때에야 대중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밖에도 평론과 대중, 미학 등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쟁점들이 많이 있으니, 이번 MBC 100분 토론은 한번들 보시길.


* 논란이 되었던 이송희일 감독의 '디워 현상'에 대한 비판 글을 우연히 찾았다. 아래 펼침. 이 양반 글도 정말 맛깔나게 잘 쓰는구만.
 


 1.
막 개봉한 <디 워>를 둘러싼 요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으로 느낀 것은 막가파식으로 심형래를 옹호하는 분들에게 <디 워>는 영화가 아니라 70년대 청계천에서 마침내 조립에 성공한 미국 토스터기 모방품에 가깝다는 점이다. '헐리우드적 CG의 발전', '미국 대규모 개봉' 등 영화 개봉 전부터 <디 워>를 옹호하는 근거의 핵심축으로 등장한 이런 담론들과 박정희 시대에 수출 역군에 관한 자화자찬식 뉴스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는 여전히 70년대식 막가파 산업화 시대이고, 우리의 일부 착한 시민들은 종종 미국이란 나라를 발전 모델로 삼은 신민식지 반쪽 나라의 훌륭한 경제적 동물처럼 보일 뿐이다. 이야기는 엉망인데 현란한 CG면 족하다고 우리의 게임 시대 아이들은 영화와 게임을 혼동하며 애국심을 불태운다. 더 이상 '영화'는 없다. 이 영화가 참 거시기하다는 평론가들 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의 벌거숭이 꼬마들을 지켜보는 건 정말 한 여름의 공포다.

2.
그 놈의 열정 좀 그만 이야기 해라. <디 워>의 제작비 700억이면 맘만 먹으면, 난 적어도 350개, 혹은 컬리티를 높여 100개의 영화로 매번 그 열정을 말할 수 있겠다. 제발, 셧업 플리스. 밥도 못 먹으면서 열정 하나만으로 영화 찍는 사람들 수두룩하다. 700억은 커녕 돈 한 푼 없이 열정의 쓰나미로다 찍는 허다한 독립영화들도 참 많다는 소리다. 신용불량자로 추적 명단에 오르면서 카드빚 내고 집 팔아서 영화 찍는, 아주 미친 열쩡의 본보기에 관한 예를 늘어놓을 것 같으면 천일야화를 만들겠다. 언제부터 당신들이 그런 열정들을 챙겼다고... 참나.

심형래씨는 700억 영화짜리 말미에 감동의 다큐와 감동의 아리랑을 삽입하고, TV 프로그램마다 나와서 자신의 열정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고지깔 안 보태고 영화판에 몇 만 명은 족히 존재할 게다.

지구가 존재한 이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아서 영화를 찍어놓고, 누가 누구를 천대했다는 건지, 참나.

3.
충 무로가 심형래를 무시한다고? 정작 심형래를 '바보'로 영구화하고 있는 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충무로라는 영화판은 대중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에게 애증의 욕망 대상이다. 스타들을 좋아하지만, 반면 끊임없이 스타들을 증오하는 두 가지 배반된 욕망의 투영물인 셈. 이는 스펙타클화되어 있는 정당 정치에 대해 시민들이 갖는 이중의 배리되는 시선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정당 정치에서 배제된 듯 보이는 '바보' 노무현은 잘 살고 거짓말을 일삼는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유일한 대항점으로 시민들에게 비춰지면서 대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심형래는 이와 다르지 않다. 충무로에서 지속해서 배척된다고 가정된 바보 심형래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심형래의 아우라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저 기존 충무로에 대한 환멸이 투영되어 있으며, 바보는 여전히 바보로서 시민들에게 충무로에 대한 환멸의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보 전략'은 바보 아닌 것들을 비난하며, 서로를 바보, 바보 애정스럽게 부르다가 끝내는 정말 바보가 되어 선거함에 투표 용지를 몰아 넣거나 친절하게 호주머니를 털어 영화 티켓값으로 교환해주는 바보 놀이, 즉 아주 수완 좋은 훌륭한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4.
심형래와 기타노 다케시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코메디언 출신이면서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낸 두 사람의 차이 말이다. 열정의 차이? CG의 기술력의 차이? 애국심의 차이? 헐리우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의 차이? 딱 하나 있다. 영화를 영화적 시간과 공간 내에서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차이다.

CG 가 중요한 것도, 와이어 액션이 중요한 것도, 단검술과 권격술의 합의 내공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스스로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다면, 그 아무리 입술에 때깔 좋고 비싼 300억짜리 루즈를 발랐다고 해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5.
좀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영화는 영화이지 애국심의 프로파겐다가 아니다. 하긴 도처에 난립하고 있는 온갖 징후들로 추측해 보면, 이 하수상한 민족주의 프로파겐다의 계절은 꽤나 유의미한 악몽의 한 철로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될 게 분명하다. 아, 덥다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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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노동자운동의 어떤 가능성들

필리핀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회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살인이 끔찍한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 최근 노동, 사회단체들이 진행한 기자회견(필리핀의 정치살인 및 노동탄압을 규탄한다! )이 진행되었다. 필리핀 정부(그리고 군부와 지방 우익조직들)는 최근 몇 년 동안 무려 1,000여명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암살했다. 최근에는 총선을 거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1,000명이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동료가 살해당할 수 있으며, 내일 내가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필리핀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최근 태국에서의 회의를 비롯해서 서너 번밖에, 그것도 단절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난 적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을 생각할 때 숙연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부끄러워진다.
(아래는 정치살인에 항의하는 필리핀의 집회 사진, 프레시안기사 지은/'경계를 넘어' 활동가로부터 인용)


최근 태국에서의 회의에 참석한 한국 활동가 중에도, 남한의 운동이 잘나간다는 식의 거만함같은 것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내 경우에도 필리핀의 노동, 사회운동의 지형 정도가 관심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가 있어야했던 그 자리에서 말이다.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Lidy Nacpil(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 코디네이터), 빛나는 활동가인 그녀도 몇 년전 이러한 살인에 남편을 잃어야했던 사람인데도.

***
필리핀의 노동자운동을 활동가들과의 간혈적인 대화나 팜플렛을 통해서 접하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미약하다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자본주의의 극심한 모순에 불균등하게 노출되어 있고, 사회운동이 치열하게 발전하는 곳이 필리핀이다. (사회운동의 발전은, 심지어 노동자운동의 발전조차도 자본주의의 발전, 혹은 노자관계의 전면화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의 불균등한 발전과 “계급투쟁”이, 그 함수라는 것을 필리핀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필리핀의 노동자운동은 정치적 입장과 노선에 따라 여러 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다.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은 모두 공산당(CPP)계열의 KMU(노동절운동)에서 분리되어 좌파들이기는 하지만, 입장들은 상이하다. 최근 태국회의에 참가한 것은 필리핀 노동자운동조직 내에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BMP(필리핀노동자연대)APL(Alliance of Progressive Labor)이다.(둘다 전국적인 수준의 노동조합 연합단체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KMU에 비해서는 작다.)
(필리핀 노동자운동의 지형에 대해서는 불충분하고 어떤 점에서는 왜곡도 있지만 한노사연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아시아 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2. 필리핀 )

APL은 독특한 조직형태를 갖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운동의 연합단체이지만 같은 조직 안에 노조의 연맹, 산업노조, 지역노조 뿐 아니라, 협동조합, 노동자공동체/협회, 노동자 자조조직, 직업조직 등의 다양한 노동자조직형태를 포괄한다. 이것은 노동자운동의 조직형태는 노동조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그에 비해서 민주노총에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직업조직이 가입할 수 있을까?) 노동자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형태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정세에서는 노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제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APL은 정치조직 중에는 AKBAYAN(시민행동당)과 경향적으로 함께하는데, 최근 총선에서는 월든 벨로가 정치살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 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APL은 자신들의 지향으로 직접 사회운동노조주의를 표방한다. 위의 한노사연 글에서 APL을 사민주의 좌파라고 소개하는 것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한노사연 식의--우익적-- 해석이 반영된 것같다.)

이것은 마치 전노협 시기에 지노협의 조직과도 유사하다. 지노협은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지역의 노동단체, 노동자 교육단체 등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92년 전노대의 구성부터,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운동은 노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 과정에서 노조 외의 조직형태는 모두 배제된다. 그 원인이자 결과는 무엇인가? 노조는 사업장 내의 경제투쟁, 사회-정치적인 투쟁은 사회운동-정치단체들이 하는 것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이에 “어울리게” 노조는 사업장내의 (때로는 전투적으로) 경제투쟁에 몰두했다.(이점에 있어서는 좌우파가 다를 바가 없었다.) 전국적 총연합단체(민주노총)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기층 노조의 경제주의를 보완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사업장 단위의 경제주의가 어떻게 그 노조 외부에 있는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여성노동자를 배제해왔는지 알고 있고,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최근 비정규직운동의 고민 중 하나는 기존의 노동조합 모델이 이 운동에 절대적인 조직형태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적인 조직형태가 무엇인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사업장단위의 노조결성--사업장단위의 임단협교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이클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들은 이러한 형태와 어긋나는 조직과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심지어 지역차원에서 자주 일자리를 옮기기 때문에 사업장 단위의 활동도 한계가 많다. 따라서 다른 방식의 조직화, 활동이 있을지가 고려된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과 같은 수준에서라면 그것을 포괄하거나 연대할 수 있을까? (다만 노조조직이 전적으로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 적어도 지역노조와 산별노조는 가능성이 있다. 산별노조들은 매일 실망을 주는 중이지만 말이다.)

한편, BMP는 총연합단체가 아니다. 오히려 지역적인 투쟁연대체에 가깝다. 다른 총연합 단체에 속해있더라도 BMP와 함께 할 수 있다. (전노협도 한국노총에 가입해있거나 독립적이거나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BMP 활동가는 총연합단체를 일부러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며, 역량이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조건에서도 조직들을 관통하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점은 인상적이다.(적어도 그게 가능하다는 사고가 전제되어야하기 때문인데, 민주노총은 연맹만 달라도 연대의 수준이 뚝 떨어진다.)

최근 BMP는 지역단위의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전략을 채택하고 3개년 계획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마치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와 유사한 것일 수 있겠지만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충분히 다른 방식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을 것같다.

한편, BMP는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BMP 활동가는 대화 속에서 APL의 조직화 방식, 즉 노조를 넘어선 조직화에 대해서 “나는 실용주의자다. 그들(APL)은 자신의 노선을 현실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나는 실용주의자”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말도 아마도 비슷한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세 속에서, 노선과 실천은 검증되어야한다. 그것은 단지, 또한 전혀 실증주의가 아니라 정세에 개입하는 것의 본질이다. 정세 속에서 활동가들은 정세를 사고하고, 자신의 대응-노선을 창안하며, 그것을 정세에 기입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가 정세와 그 우연성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의 성공은 보증이 없지만, 정세 속에서 살아남을 경우 새로운 정세를 형성하고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상상력도 필요할 것이다. 자신을 “실용주의자”라고 말하는 BMP 활동가는 조직형태들 속에서도 그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먼 곳에서 우리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세 속에서, 당신들이 실현하라.”

그리고 발리바르가 말한 대로 여기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11. 공산주의는 복수의 의미들로, 즉 잉여노동의 제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의 종언, 시민성과 국민성[민족성]의 구별의 종언으로 이해된다(그 외에도 다른 것들이 더 있을 것이다). 맑스가 말한 바대로 공산주의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운동이다.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여야한다. [미래에 대한] 보증없는 [현재의] 운동이라고.


===
* 정세와 “우연성” 그리고 활동가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사회운동(사회진보연대) 2007년 7-8월 합본호 “정세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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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노동자운동(2)-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

태국에서 열렸던 아래 회의에 대한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7월15~17)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국제금융의 이해, 국제적 저항 건설

 

지난 번에는 주로 중국에 대한 쟁점, 이번에는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에 대해서 논의된 것들과 시사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이와 관련해서 심상정, 권영길 등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의 정책을 살펴봅시다.

 

변화하는 금융세계화

 

금융세계화의 정세는 변화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10년전 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고, IMF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집행기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자본주의도 변할뿐더러 신자유주의도 변화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만드는 위기의 양상도 말이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위기의 심화 속에서 무엇이 위기인지, 그것에 어떤 대응을 해야할지를 사고하는 데 중요하겠죠. 10년전 남한의 사회운동이 IMF에 대한 의미있는 반대투쟁을 “전혀” 조직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노총은 “민족적인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합의를 통해서 정리해고, 파견제와 같은 IMF의 요구조건을 자기 손으로 합의해주었고 그 후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IMF 협약이 강제된 다른 반주변 국가들의 사회운동과도 크게 다른 모습이었죠)

 

우선 IMF의 역할이 크게 약화되고 있고 “금융세계화”와 그것이 강제하는 구조조정의 주도적인 행위자도 교체되는 과정에 있다는 점들이 지적되었습니다. (물론 IMF는 애초에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융자본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이후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금융시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정책을 국가들이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요구의 제안자로 역할을 전환했죠. 지금은 사실상 정책지원기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나 카리브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남아있지만) IMF의 악명높은 구조조정 때문에 많은 주변, 반주변 국가들이 서둘러 구제금융을 상환하고 정책적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대중적인 저항으로 인해 신뢰성이 약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주도적인 행위자는 오히려 금융시장의 법칙, 사적 금융자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 국가들은 금융시장의 등락에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알아서’ 조정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투쟁으로서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은 다른 것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다자간 무역협상--WTO, GATS 등--이 양자간 무역협상--FTA--로 전환되면서 무역자유화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또 한편, 위기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통화위기의 형태로 발발한 이후에 지역적인 수준에서 최소한 통화위기는 막기 위한 장치들이 개발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역 같은 경우에도 아세안+3(중,한,일) 틀을 통해서 양자간 외환지원 장치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가 구성되고, 최근에는 IMF의 지역판이라고 할 만한 아시아통화기금(AMF)를 구성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합니다.(98년 직후에는 AMF가 IMF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구성되지 못했는데, 2007년 현재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달러화가 각국의 외환보유고로 쌓여있는 만큼(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죠) 다음 금융위기는 외환위기의 형태가 아닌 것으로 닥칠 수도 있다는 점. 그렇다면 그에 대응도 다른 방식일 겁니다.(다음 위기의 형태가 무엇일지는 공부를 더 해봐야할 것같네요;;) 그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같고, 그러한 위기가 운동을 수세에 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정세는 머지 않아서 다시 귀환할테니까.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대안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CMI, AMF의 창설은 아시아 지역차원에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의 대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금융세계화의 파괴적인 불안정으로부터 각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죠. 예를 들어 98년 직후에는 운동진영의 어느 분파에서도 AMF창설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을 정도로(물론 당시에 김종필도 언급했던 적이 있죠;) 지역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제어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안전한” 금융세계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IMF가 했던 것처럼 주로 일본자본의 이해에 따라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행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내더라도 그것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인지가 쟁점일 텐데, 최근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흥미로운 쟁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권영길 캠프의 정책

 

권영길 후보의 정책 중에 유사하게 살펴볼 부분이 있고, 심상정 의원의 정책이 가장 구체적입니다.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아예 부재한 대목입니다. (국제관계에 대해서는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언급이 없군요.)

 

심상정 후보의 경우 “동아시아 호혜경제- ‘Social Asia’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정책이 제시됩니다. “글로벌 경쟁 심화에 따른 국가양극화, 패권국가의 일방적 지배를 방지하고, 호혜적 분업체계에 기초한 지역공동체(regional community) 건설”을 중심으로 “역내평화와 호혜적 경제발전을 꾀하려면 처음부터 차이를 해소해야 하고, 이를 위해 ‘Social Asia’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 시민사회 교류프로그램과 아시아 사회헌장(Asia Social Chapter) 채택 △ 개발과 인프라구축, 기술발전에서 국가간 공조와 지원을 강화 △ 동아시아 지역발전기금(ODA)을 조성하고, 달러 통화체제를 대신하는 아시아통화체제(AMF) 등 역내 금융체제 구축.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이제까지 단지 국내 혹은 대북관계 정도의 사고에 머물고 무역과 금융에 대해서 사고하지 못했던 운동진영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특히 단지 지역차원의 통화안정 프로그램 혹은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동북아시대”프로젝트와 달리 민족국가 사이의 호혜평등한 관계, 사회적 교류를 강조하는 부분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운동적 요구라기 보다는 국가의 전략적 정책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은 대선이라는 공간의 고유한 효과일텐데, 어떤 후보도 (이미 국가의 정부를 수권하기 위한 후보로 표상된 이상) 국가전략 수준의 정책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점. 예를 들어 AMF 구상과 같은 것인 현재 구성이 합의된 AMF와 사실상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시대 전략이라는 것과 사실상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심상정 후보 쪽에 정태인씨가 관계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그런 맥락일 겁니다.)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 아시아 지역의 “정세”가 문제가 됩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는 남미가 아니고 따라서 ALBA와 같은 대안이 동아시아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남미의 경우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쿠바가 있지만, 아시아에는 그렇지 않을뿐더러 중국은 그러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죠. 게다가 아시아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민족국가 간의 대립은 물론, 일본을 정점으로 해서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폴과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수직적으로 결합된 하청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안이 가능하기 위한 운동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심상정 후보 정책의 문제는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정책대안이 먼저 제시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오히려 운동들이 문제겠죠)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국가전략을 제시하고자할 때 처하는 위험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체제, 대안적 국가 간 관계의 형성의 난점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부분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번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월든 벨로는 이 회의에서 CMI, AMF 같은 것들이 지역차원의 ‘정치의 공간’을 연다는 측면에서, 그것에 개입할 수 있고/해야하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달리 생각해볼 지점도 있지요.)

 

이에 비해서 권영길 후보 쪽의 정책은 더 심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부르조아 국가전략과 사실상 아무런 구분도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북방대륙 경제권 개척으로 제4의 세계경제권 주도”라든가, 이를 위한 역내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공동사용과 같은 정책이 있습니다. 주변, 반주변의 발전을 위해서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자는 제안이 위기에 처한 금융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스티글리츠(리버럴들)의 것이라는 점은 지난 글에도 언급한 점이 있지만, “북방경제권”을 언급하는 것은 이미 일본 자본에 선점된 동남아가 아니라 다른 경제공간을 찾아가자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민족국가간 호혜평등한 발전 지원이나 사회적 교류를 전제한 심상정 후보 쪽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것은 아시아 지역의 금융, 무역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아제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발전전략인데, 노무현의 동북아시대 전략에 한걸음 더 다가가 있습니다.

 

“노동중심경제체제”라는 것을 제안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식기반경제”를 들고 있는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것은 생산으로부터 이탈한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투기운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팽창한 IT 산업의 이데올로기이고 따라서 남한에서 98년 이후 짧은 금융적 팽창(~2002년 경까지) 시기에 “빅뱅”을 경험한 IT 벤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석훈 박사는 권영길 후보의 비전이 “벤처 사장들의 북방 개척론”이라고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그 벤처사장들은 짜증나는 '디 워'의 심형래처럼 이른바 반지성주의 "신지식인"들이죠.)
* 레디앙 기사 참고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148

 
지역마다 다를 분기점, 신자유주의 이후

 

그렇다면 이렇게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 제시되는 대안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하면 “대안이 뭐냐”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대안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말인데, 다만 대안들이 “가능한 조건”을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가능한 최대한이라고 할 수밖에요.

 

앞서 말한 대로 남미의 알바(ALBA 미주대륙 볼리바르대안)와 민중무역협정(trade treaty of people; Tratado de Commercio entre los Pueblo: TCP) 같은 대안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는 말하기 힘들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AMF 같은 것을 이야기해서는 지역적 수준에서도 진행되는 금융화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현재 정세에서 가능한 것은, 각 민족국가의 사회운동들이 지역차원의 대안을 “합의”할 수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 이를 통해서 어떤 전략들이 어떤 민족국가(들)의 발전전략이 아니라 대안적인 지역적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취약한 (특히 남한의 사회운동에는 더욱 취약한) 아시아 지역의 사회운동의 강화된 사회운동 네트워크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아시아 지역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취약한 것은 사실인데, 지역별로 진행되는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도 아시아가 가장 취약하죠.)

 

그리고 각 민족국가 내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을 논의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운동의 문제제기, 그리고 국가를 강제하는 실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남미에서 ALBA나 TCP가 가능한 것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그 비슷한 뭐라도 있어야겠죠.

 

그러나 사실, 그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는데, 따라서 다소 비관적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지역차원의 대안세계화를 위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의 조건과 상황이 각 지역마다 모두 다 다릅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통화통합이 이미 이루어졌고 유럽연합도 신자유주의적인 헌법조약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인 지역통합”을 완성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공동지배” 체제를 이루고 있죠. 아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직적 분업체계가 구축되어 있고 민족국가 간의 역사적 구원으로 인해서 지역적인 통합이 쉽지 않습니다.(일각에서는 지역통합을 위해서 민족주의도 개조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반도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해서 논란이 되었던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그 징후일 수 있다는 것.)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합중국과 같은 식의 지역적 통합도 논의되고는 있지만 만성적인 내전과 민족국가의 취약성, 민주화의 지체 등으로 인해서 지역통합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자본이 그것을 촉진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쉽게 예상할 수는 없는 문제. 대안세계화운동에서는 남미의 경우가 가장 희망적일 텐데,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화할 수 있는 정세는 아니죠.

 

그렇다면 이후에 만약 미국 헤게모니의 자본주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붕괴하더라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대안체제는 같은 형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가 모두 다른 형태의 체제에서 (다음 세계체계가 있다면 그 때까지) 상당 기간 경합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역사의 상이한 분기, 어떤 지역적 모델도 절대화할 수 없는 혼란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정세에 맞는 대안들, 운동의 전략들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변혁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그것으로 제한되지 않는 것들이죠. 그리고 (10년전에 IMF 구제금융과 구조조정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미처 사고하기도 전에 불현듯 사활이 걸린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고 사고와 실천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라도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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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담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봤다, 기담.
(스포일러 조금 있음)
이런저런 평처럼 "잘 만든" 공포영화다.
서로 연결되는 세개의 에피소드가 액자구조 속에 있다. 액자의 밖은 1979년 유신 말기, 액자의 안은 1942년 일제 말기 경성. 억압적인 시대--따라서 그 자체가 공포들인--들이 절정에 있고 끝나가는 시기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싶었나보다.

영상도 좋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식 건물과 복식들이 아름답고도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는데, 남한 사람들에게는 일본전통양식은 뭔가 알수 없지만 존재했던 공간,아직 봉건적--따라서 前-이성적--이고도 근대적--따라서 이성적--인 것들의 불안정한 공존을 상징하는 것같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이자 부재, 과학의 부재이자 존재를 드러낸다.(이 영화는 병원이라는 근대적인 '과학'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괴담.) 역시 잘만든 공포영화로 기억되는 '장화홍련'의 배경도 일본식 건물이었던 기억이 있다.

중간중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공포효과'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플롯 자체는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세개의 에피소드들에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역설적이게도 논리적--따라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여기서 '과학적'인 것이라면 정신분석이거나, 심리학적인. 다만 심리학을 과학이라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무의식의 어떤 불안을 건드리면서도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에 비하면 너무 친절하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잘 아는 누가 꼼꼼하게 분석을 해주면 재미있을 것같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여러가지 정신적인 현상들을 소재로 가져온다. 시체성애 necrophilia, 엘렉트라 컴플렉스, 다중인격장애 같은 것들. 이것들은 모두 죽은자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다른 포스터에는 "사랑에 홀린자, 여기 모이다"라는 카피를 쓰는데, 내용들은 모두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응시한다. 사랑하는 대상들은(그것이 이미 죽어있든 사랑하다가 죽었든) 살아있는 주체에게는 여전히 죽지않고 살아서 함께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타자에 대한 사랑은 타자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의 욕망)이라고 상상되는 내 안의 가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같다. 사랑하는 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유령이다. 뭐, 사실 모든 사랑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을 통해서 망각하고 대상의 부재를 상징화해야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것들에 실패하고 죽은 자들은 따라서 죽지 않는다. 특히 이런 점에서 세번째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애도작업이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 된다. 따라서 주체 안에서 죽지않고 공존하게 된다. (영화의 무대는 안생(安生)병원이라는 가상의 병원이다. 이름이 흥미롭다. 내가 보기엔 안(安)은 오히려 '아니-'라는 의미의 부정어로 보인다. 따라서 un-live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un-dead.. 따라서 죽어도 죽지 않은,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좀비같은 존재다.) 이 영화의 공포효과는 이 부분, 죽었지만 죽지않은, 그리고 그 죽지않은 부분은(사실은 살아있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당신들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앞서서 이야기했지만, 잘 만든 영화이지만 그렇게 대단히 공포스럽지는 않다.(이것은 욕이 아니다.) 모두 설명가능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 또한 모두 상징들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섭다기 보다는 지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흠.. 깜짝 놀라고 무섭기도 장면들도 많다. 감독이 만든 영상-음향 효과는 뛰어나다.)

공포영화들이 최근에는 가족(장화홍련, 4인용식탁)이나 학교(여고괴담)를 다루어온 것은 그것이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주체들을 무의식에서 억압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제도적인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이라... 사랑도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과잉되어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한 주이상스로 나타날 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인영'(이자 동시에 그녀의 남편인 '동원'이기도 한)이 마지막으로 남성 인턴을 살해하려는 장면은 마치 여성상위체위에서 성교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장면에서 인영은 사실은 그녀의 사랑의 대상인 '동원'이 부재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나비(퓌지스psyche-영혼)모양의 비녀로 가슴을 찌르고 자살한다.

그리고 인영의 마지막 대사, "쓸쓸하구나.."
실재계에 갑자기 마주할 때, 그런 느낌이다.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쓸쓸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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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노동자운동(1)-중국과 아시아사회운동

태국에서 열렸던 아래 회의에 대한 이야기.(7월15~17)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국제금융의 이해, 국제적 저항 건설

아래 태국에서 진행되었던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대한 아시아 노동자대회'에 연결된 일정. 주빌리사우스는 이 행사들을 연계해서 참가를 조직하기 위해 앞의 일정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방콕 출라롱콘 대학에서 진행.

이 행사는 주빌리사우스 노동자대회에 결합했던 각국의 노조들을 비롯한 아시아지역의 노조, 농민조직 등 대중조직, 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온 사회운동 활동가, 연구자들이 함께했습니다.(공동주최 :Bretton Woods Project, Eurodad, Fifty Years is Enough, Focus on the Global South, Gender Action, IDEAS, Jubilee South APMDD, Solidarity Africa)
* 관련된 프로그램 소개와 일정은 이곳 링크  참조

이 회의는 Conference on A Decade After : Recovery and Adjustment since the East Asian Crisis(아시아 금융위기 10주년 토론회)라는 (주로 학술) 행사 뒤에 이어졌습니다. 회의 제목 그대로, 여러나라의 사회운동들이 금융위기 10년을 맞아서 그 동안의 금융세계화의 양상을 평가-이해하고 운동적인 대응전략을 논의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가지 발제와 토론이 있었는데, 주로 생각해볼만 한 것들을 정리해봅시다.

전체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운동단체들이 모여서 진행하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깊다는 것.(당연한가;;;) 국제적인 수준에서 자본운동이나 금융기구의 움직임, 그리고 국가간 체제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심화된 토론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국내에서라면 이런 것들은 몇몇 저자의 책에나 언급되거나, 좌파-현장파들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혹은 개량주의네 하면서 비난을 일삼을 만한 내용들이죠.(금융세계화의 양상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강조하는 것을 왜 개량주의라고 비난하는지 그 머리 속을 이해하기가 더 힘든 노릇입니다만.)

몇가지 쟁점들과 생각해야할 지점들.

중국이라는 문제 - 거대한 팽창

먼저, 전체적으로 프로그램 내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국이라는 쟁점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참가한 대중운동 단위 중에서 중국의 부재가 가시적이라는 것 등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금융세계화, 따라서 미국 헤게모니 하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운명에 중국이 큰 쟁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외환(달러)보유고는 이미 1조3천억 달러가 넘어서 일본을 넘어 세계최대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달러는 외국자본들의 상당 부분이 FDI에 기반하는 데, 이 자본은 주로 미국의 재무성 채권과 미국의 해지펀드 등에 투자됩니다. 이렇게 미국으로 순환된 자본은 다시 중국에 투자되는 방식으로 순환합니다. 알려진대로, 이 순환에 있어서 미국에 투자된 외국자본에 비해서 외국에 투자된 미국자본은 두배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가지 입장과 해석이 있더군요. 일단 중국의 거대한 생산과 미국의 거대한 소비가 불안정한 균형에 있다는 건 대부분 동의하는 데 그 함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등등.

일부에서는 중국이 미국이 아니라 주변-반주변 국가들에 대해서 대안적인 투자를 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래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국이 최근 투자를 전략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스티글리츠의 주장과도 공명할 뿐 아니라 중국 체제의 성격을 볼 때 실현가능성도 의문입니다.

포스트-워싱턴컨센서스를 제안하는 스티글리츠는 (중국만이 아니라) 각국이 외환보유고를 개도국에 투자해서 국제적인 유효수요를 확대하자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진보주의자들.. 리버럴들의 대안이라고 보면 될텐데요, 이렇게 해야 장기적으로 현재의 금융체계가 붕괴하지 않을 것이고 글로벌한 통치성도 유지될 것이라는 거죠. 이는 현재의 금융세계화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노선일 뿐 아니라, 중국 자체가 이미 대안세계를 위한 어떤 전망을 갖거나 제시할 수 없는 조건에서 그냥 "좋은 희망"일 뿐인 것같습니다.

한편, 예측에 있어서는, 중국이 "때를 기다린다"는 해석도 있습니다.(중국은 미국 시장 외에 대안적인 투자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안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죠.)

어차피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일정한 시기에는 중국이 미국의 쌍둥이 적자를 지랫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중국은 시간을 벌면서 (물론 때로는 심각한 신경전을 펼치─는 척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국 재무성의 요구나 월스트리트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중국이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고, 중국의 지배엘리트들도 그런 지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전망은 아리기나 백승욱 선생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국헤게모니의 위기 이후에 미국-중국의 공동지배(스페인-제노바 공동지배와 같이)로 갈 수도 있다는 예상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군사력과 경제적 지배력이 상이한 지역에서 우세하게 되고, 세계체제는 이러한 국가들의 공동지배에 의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쟁점은 아시아의 운명과 관련해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회의 내내 여러 섹션에서 쟁점이 되었을 텐데요, 그것이 사회운동, 대안세계화 운동-전망과 어떤 관련을 맺을 지는 이어지는 글에서 더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하죠. 특히 중국의 외환보유고와 관련해서는 아시아 지역 차원의 대안으로 제시기되는 아세안+3(한.중.일) 차원의 양자간-다자간 통화 스왑 장치로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아시아 통화기금’(AMF) 구상과도 관련됩니다. 그것의 의미와 전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튼, 이 쟁점은 다음 글에서 더 이야기 해보죠.

(아시아 지역의 대안적 금융체계에 대한 것은 최근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인 심상정 후보캠프에서 관련된 공약을 내면서 쟁점으로 부각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심상정 캠프의 관련된 공약에 동의하지도 않고, 반대에 가까운 입장이지만 그것을 사고하는 것 자체는 매우 의미있는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경우, 국내적인 변혁과 동시에 남미에서 ALBA와 같은 대안적인 지역경제-금융협력체계를 제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안적인 무역을 시작하는데, 몇개 나라가 석유-의료서비스-콩을 교환하는 망을 만들거나 공동의 지역은행을 창설하거나 하는 것이죠. 변혁의 문제가 국내정치적인 것만 아니라 이미 최소한 지역적 수준의 대안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도 자기 입장이 필요하겠죠. 물론 심상정 후보캠프의 것은 운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전략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여튼 자세한 내용은 담글에서.)

중국의 노동력

이런저런 발제 중에서 강조되는 것은 또한 중국이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 특히 중국의 거대한 노동시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인구로만 보아도 중국의 거대한 인구는 세계 노동력의 1/5 정도에 이릅니다. 이 노동력의 편입이 가지는 의미는, 중국 국내의 노동정치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죠.

중국에서 온 학자들도 발제를 했었는데, 주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중 한명은 중국의 후진타오 체제가 제시하는 전략으로서 '조화사회'를 언급하면서 노조(공회)설립의 의무화 등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동친화적인 체제를 통해서 사회적 불안, 계급투쟁의 촉발을 제어하겠다는 전략인데, 어느 정도로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중국의 이러한 전략이 성공한다면 중국 체제의 안정은 물론, 새로운 노동타협체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겠죠.(그러나 그 반대의 가능성이 더 커보이고 따라서 그것은 반대의 방향에서 국제적인 계급투쟁에 엄청난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의 지금과 같은 방식의 거대한 팽창은 에너지 수요에 있어서나 환경적인 측면(특히 co2 배출, 지구온난화와 관련해서)에서 재앙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팽창이 어떤 지점까지 가능할지는 알수는 없지만, 어느 시점에 긴급한 문제로 부각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적인" 측면은 물론이려니와생산과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 기술과 이것의 사회적 조직화와 같은 것들이 정치적 문제로 제기될 것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아프리카

21세기 들어서 중국은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를 크게 확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후진타오가 아프리카를 순방하면서 외채탕감, ODA 확대, (주로 에너지 관련 국영기업들의) 직접투자 등을 약속했죠. 이러한 중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지원 확대는 이제 미국에 비슷한 규모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이 장기적으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로 나이지리아나 앙골라 등 산유국에 대한 지원이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아프리카는 미국 헤게모니가 배제한 지역이기 때문이죠. 아프리카는 주로 금융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들에게는 변변한 주식시장, 채권시장도 없는 버려진 곳입니다. 전쟁이 나든 인종청소에 학살이 벌어지든 버려두는 것이죠. 그런데 중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의 입장도 애매한 것같습니다. 여전히 금융적인 투자가치는 없지만 석유자원이 문제인 것이죠.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이 지역의 사회운동도 (서로 다른 이유로) 중국에 더 친화적이고 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일단,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처럼 IMF 협약,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미국, 유럽과 국제금융자본들은 IMF 협약을 통해서 이들 나라의 물, 전기 등의 필수서비스와 에너지, 광물자원을 체계적으로 약탈해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러한 조건을 달고 있지 않죠. (이 점은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국제금융기구나 초국적 금융자본과 관련된 비판이 집중되어 왔던 지점이라는 점에서, 중국에 대해서 일단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아프리카의 사회운동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진보적인 입장에서 인권, 정치 민주화와 같은 쟁점에서 조건을 달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는 것같습니다. 최악의 독재국가들에 대해서도 중국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지역 차원의 대안적인 지역적 협력체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우회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중국이 서구의 이러한 명분의 개입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별로 가능할 것같지는 않지만 말이죠.

또 하나는 중국이 이렇게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외채 등의 방식으로) 자국 자본의 우회적인 침투를 위해 활용했던 서구와는 달리 (기술 이전 등을 통해서) 아프리카 각국의 내재적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역시 중국 정부의 입장이 문제일 텐데요, 여기에 중국은 국내 정치에 있어서 '조화사회'와 마찬가지로 외교에 있어서 '조화세계'라는 전망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 역시 같은 만큼의 한계를 가질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국내적으로 발전주의 정책이 중시되고 아프리카 관계에서도 에너지자원이 중시될 것이라는 점.

최근 미국은 이제까지 유럽사령부가 관장하던 아프리카의 군사작전을 총괄하기 위해한 별도 기구로 아프리카사령부(아프리콤)를 신설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각국들이 미군의 주둔에 부담을 느끼면서 군사기지 설치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자, 일단은 군사기지 없는 사령부 형태로 추진하는 것도 검토되는 것같습니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비교하게 하는데, 앞으로도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중국, 성공적인 발전국가?

 

발제 중에는, 외환위기 이후의 '쇼크요법'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주로 IMF가 "금융위기를 불러온 경제의 구조조정을 촉진해야한다"는 명분으로 강요하는 협약에 의해서 이루어지죠. 대표적이고 극적인 케이스는 오히려 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 적용된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급격한 사유화와 공공부문의 붕괴.. 이어지는 자신시장의 창출과 급격한 빈곤화, 성장동력의 소실 등이 결과였죠. 물론 IMF는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고, 중국이 이에 비해서 일종의 '연착륙' 모델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더라는 겁니다.(물론 동의하지 않는 토론자들도 많죠.) 베트남 역시 비슷한 케이스로 언급되는데, 발제 중에 언급되는 지표만 봐도 이들의 성장속도는 엄청나더군요. '전성기'의 남한, 대만 등도 앞지르는 속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경제성장은 '질서있는 개방' 혹은 '연착륙'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이들 국가가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한 80년대말-90년대초 이전에도 민족주의적 발전국가였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종료 이후 덩샤오핑 시기부터 그랬고, 베트남도 꾸준히 정책을 전환해왔죠. 그 이전의 역사를 보는데 있어서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제3세계 개도국과 발전주의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세계시장에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직업적으로 잘 훈련/교육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당의 지시에 순응적이고 규율있는 노동자들은 국제적인 생산 재배치에 아주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던 것이죠.

 

결국 혁명 몇십년 만에 세계시장에 복귀하면서 애초에 혁명가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성공을 만들어낸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북한에 있어서도 북한 엘리트들이나 미국-남한의 리버럴들은 이런 방향의 구상을 가질 텐데요.) 그런 점에서는 쿠바가 이례적인데, 지역적인 정세의 차이(아시아와 남미)와 결합해서 정말로 다른 효과들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망도 아마 다를 수 있겠죠.(이 대목은 좀 우울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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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주로 중국 이야기까지만 해야할 것같군요. 국제금융체계 등과 관련된 여러 흥미로운 쟁점에도 중국이 연관되기는 하는데, 그건 그 쟁점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중국이 쟁점이 되는 분위기가, 묘한 점이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주로 서구 쪽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중국은 뭔가 공포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같고, 아프리카에는 어떤 희망, 아시아 참가자들에게는 우려와 기대의 양가감정 같은 것.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민족국가의 지정학적 운명이 미묘하게 인식에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냥 느낌일 뿐인지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한가지 에피소드. 태국의 비디오샵 같은 곳에는 한국의 드라마가 많이 깔려 있습니다. 인기가 있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는데요, 공중파에서도 주몽과 같은 드라마를 해주고 있는 걸 봤습니다. 필리핀 사람과도 이야기를 하다보니 주몽이 인기리에 방송 중이라고 합니다. 너무 민족적인 판타지라 해외 판매는 글렀겠구나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동남아 TV시장에서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도 느끼게 됐죠.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주몽과 같이 중국과 대립하는 드라마가 수용되는 맥락은 뭘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국과는 어떤 식으로든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아시아 각 민족들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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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중국에 대해서는 좀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아래 연재가 도움이 됩니다.(백승욱, 사회진보연대 기관지 연재)

[{사회진보연대}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 (2002년)

[연재순서]
1. 흔들리는 중국 (1·2월 합본호)
2.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WTO 가입과 중국의 미래 (3월호)
3. 국유기업 개혁과 중국의 노동자 (4월호)
4. 黑猫白猫: 외국인 직접투자와 대외개방 (6월호)
5. 마오쩌뚱의 유령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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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칸, 남한정부의 무능과 기만

세 토막의 글
1
. 아프칸 납치 사태에서 남한 정부의 무능과 기만

2. 아프칸에서의 무능과 비교되는 뉴코아-이랜드에서의 신속한 대응
3. 피해자들은 뒤에 숨는 보수-근본주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
 
1.
오늘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청와대, 외통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정부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오늘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 마다 '확인 중'(즉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하는 데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오늘은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물어? 지나가는 미국 개가 웃을 노릇이다. 아프칸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시작이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

아프칸 '정부'는 물론이지만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는 판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번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없는데 그것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의 갈등, 탈레반의 잔인성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역시, 자신들의 건재를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생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서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기만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가장 무능하다는  점. 지금의 무능은 아프칸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청와대가 말한 정치적 수단의 한계).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자기 나라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진단,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는 미국의 무책임한 반응들 목록/한겨레신문)


2. 
두번째 인질이 살해되면서 곧장 정부가 한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뚜렷하다.

남한 정부는 아프칸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칸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나는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을 명확히하는 것이 중요하고 특히 지금 시점에서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사태해결을 위해 압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아프칸에 간 것이 책임이라는 식(여러가지 버전의 피해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다소 논쟁적으로 말해보자.
피해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 나는 피해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야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칸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부당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인권으로서 정당화되어야한다.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은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고 이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리고 이들이 아프칸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계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길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또 이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를 겨냥하고 있다.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 그 순진함?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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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곳에서 돌아본 노동자운동(2)

아래 포스트에 이어지는 글.

7월 중순 며칠간 태국에서 진행된 회의들에 참석하면서 생각한 것들. 두번째로.

Asian Labor Assembly Privatization Of Essential Service (Focus on Water and Power)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대한 아시아 노동자 회의( 물과 전력)

 

각국 운동이 가지는 인식의 편차

 

회의 과정에서 느낀 것은 각국의 대중 운동의 발전정도에 따라서 활동가들의 사고도 제한된다는 점입니다.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발전정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나라 운동이 처한 정세--국가기구의 역량, 정치제도, 종교 등등--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겠죠. 저나 남한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마치 대단히 '학술적인' 논쟁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그 나라의 대중운동의 발전이 영향을 주는 모습들이 느껴지더군요. 그것은 이론(+사상)이 대중운동과 맺는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이론의 입장에서는 대중운동들과 교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도 있겠죠. ("지성의 명철함과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 ^^;)
 
굳이 '발전정도 '라는 말을 쓴다면, 자신들의 운동을 얼마나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서,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기준이 가능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동남아 한 나라의 활동가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빌린 '외채'는 정당하므로 상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발언으로 다른 참가자들이 뜨아,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나라의 참가자는 WTO, FTA 에 대한 토론에서 "물과 에너지를 여기서 제외하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죠. 그러나 문제는 WTO, FTA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연관된 부문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설사 연대가  확장되어도 그것이 여전히 다른 '부문'과의 (어떤 점에서는 실용적인) 연대로 사고될 뿐, 전체적으로 이들 자유무역기구-제도를 폐기하는 투쟁으로 나가지 않는 문제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국제금융기구는 ILO 노동기준을 지켜라!?

 

한 발제에서 PSI(국제공공노련)는 국제금융기구(WB의 월포위츠까지)에 대한 로비를 통해서 노동친화적인 투자를 요구해야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발제 제목도 CLS Policies at International Finance Institutions 입니다. (CLS = Core Labour Standards)

 

프리젠테이션 마지막에는 "자랑스럽게" 이런 내용까지. (ITUC는 ICFTU가 전환한 국제노총)
Pres. Wolfowitz announced in meeting with ITUC (Dec 06):
All WB infrastructure projects in future will come under the new (CLS) requirements, which are aimed at ensuring workers‘ rights to trade union organisation and collective bargaining, freedom from discrimination in the workplace and the elimination of child labour and forced labour.”

 

월포위츠의 이 말을 보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픽~ 나오더군요.(하다못해 스티글리츠도 아니고;;) 이런 걸 보면, 국제노총이나 국제산별노련들이 하는 활동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총회장 만나서 로비하는 셈인데.. 이들이 노동조합(상급단체)인 이상 국제적 연대와 투쟁을 조직하는 것보다는 ILO나 국제금융기구 상대로 로비하는 데 열중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발제에서는 ILO 기준에 대한 일종의 "교육"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조항들을 국내 노동정치에 활용하라는 취지였겠죠.

 

이 발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발언이 많았습니다. 인도, 파키스탄(참가자들이 주로 공산당 당원들) 활동가들의 비판도 있었죠.  국제금융기구에 대하여 노동권보장 요구는 그들의 정당성을 보완해줄 뿐입니다. WTO 각료회담에 '개입'하려고 하는 국제노총이나 신자유주의적인 NGO들 입장의 연장선인 셈인데, 한심한 일이죠.

 

그러나 다른 조건을 사고할 필요성

 

한편,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건'들을 역시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부분도 있습니다. PSI가 몰두하는 ILO 조약에 대한 제 비판에 대해서는 필리핀 좌파 활동가들은 동의하지 않더군요. 국내 투쟁에서 노동권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 ILO 조약이 도움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PSI는 앞서 언급한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CLS준수요구의 연장선에서 ILO와의 관계를 보는 입장이라, 맥락으로보면 문제가 있다는 점을 비판했던 건데;;)

 

한편으로, PSI의 ILO 조약에 대한 입장과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서는 국제적 사회적 합의주의로 비판할 수 있으나 필리핀에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입장일 수 있는 것이죠. 한국의 경우에도 91년 ILO 공대위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고, 지금도 여러가지 쟁점에서 ILO 협약도 비준하지 않는 정부를 공격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운동의 국내적 조건과 경험이 국제적인 입장에도 반영되는 데, 이것이 상이한 차이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지반을 확인할 수 있는 합의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구체화되는 것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각국 노동자운동이 처한 정세적 조건을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겠죠.(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 남한 노동운동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의 과잉이 사고에 영향을 주는 셈인데, ILO 조약과 관련해서는 그런 논쟁구도로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점.

 

주변-반주변 국가에서 사유화의 주체들

 

그 외에도 이 회의에서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국제금융기구들IFIs이나 수출신용기관들ECA, 중국이나 일본, 남한의 공기업들, 국제적인 컨설팅 기업들까지 여러 주체들이 주변-반주변 국가들의 공공부문 사유화에 개입하고 있더군요.(물론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주체는 각 국가들이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투쟁은 이들 국가에 대한 것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컨설팅 기업들 중에는 남한에 합작형태 등으로 진출한 것들도 있는데요,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서비스시장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주로 전제하는 것이 이런 금융과 결합된 컨설팅 기업들이라는 점을 상기할 수있습니다. 자본의 초민족화에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겠다는, '금융화된 발전전략'이 노무현 정권의 한미FTA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부분.

 

특히 중국, 일본, 남한의 공기업들이 초국적인 투자자로 등장하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국적인 차원에서 공기업의 사유화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해당 기업에 대한 주식시장 상장-해외투자의 과정에서 사실상 초민족 자본으로 발전해가는 것에 대한 반대가 필요합니다. 특히 남한의 경우 수자원공사, 한국전력공사, 가스공사 등이 이런 방식으로 '진출'하는 데 노조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판단의 문제일 수도 있죠.(민족주의와 경제주의) 그러나 이들 공기업의 사유화를 반대했다면 해외'진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투자한 나라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이어진 IMF외환위기 10년 토론회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다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중국의 국영기업들이 초민족적 투자자로 등장한다는 점은 중국과 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중국의 노동자운동일텐데요, 이번 주빌리사우스 노동자회의에 참석한 나라들의 지정학적 분포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참가국들을 나열해보면 남한-홍콩-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 등등인데, 동, 동남, 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을 둘러싼 나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빠져있다는 점이 매우 가시적이라는 것이죠. 중국의 자율적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아시아 전체(물론 그보다는 세계 전체^^;) 노동자운동에 중요한 문제라는 점.

 

남한 노동자운동에서 국제주의의 취약성

 

이번 회의를 보면서 계속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남한 노동자운동에게 '국제주의' 혹은 '국제연대'는 무엇일까하는 점이었습니다. 분임토론에서는 공동행동전략도 논의되었는데, 공동행동이 결의되면 실행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동행동'이 국제기구의 회의에 대응하는 이벤트성 투쟁이거나 혹은 참가자들도 조직적으로 책임지지 못하는 아이디어성 발언--일단 아이디어 지르고 보는 무책임한 NGO들은 이해가 안됩니다--이 많아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여튼)

 

예를 들어서 이번 참가단의 단장이었던 이호동 전해투 위원장이 속한 발전노조. 활동가들도 많고 사유화 반대투쟁도 열심히했던 훌륭한 조직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국제연대는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어서 어려운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회의에 참가하거나 국제연대사업에 대해서 '외유' 혹은 '사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어용노조들이 노조 간부들 '해외연수'랍시고 놀러가는 행태에 대한 비판 때문인데,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거나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

 

이런 현상은 이른바 '현장주의'가 사업장 경제주의와 연결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활동을 경시하기 때문일 겁니다. 국내에서도 자기 기업밖에 있는 사업장, 노조가 아닌 사회운동과의 연대에 인색한 것이 남한의 전투적 (대기업의) 기업별 노조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외국의 노동자운동-사회운동과의 연대는 정말 "딴나라 이야기"인 것이죠. 사업장 내 문제, 국내 문제에 몰두하고 국제적 운동에 대해서는 맹목인 건데요, '국제연대'는 오직 투쟁에 대해서 외국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 걸맞는 국제연대를 추구하지는 않는 것이죠. 민주노총 정도 되면 국제연대에 나름의 기여를 하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네팔과 같이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이 성장하는 곳의 활동가들에게 지원도 할 수 있을 텐데, 제기하기도 힘든 분위기입니다.

 

좌파의 경우에도 이런 점에서 보면 현장주의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노조 현장파-좌파라고 해도 국제사업담당자나 일부 활동가를 제외하면 국제주의적 사고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전 어떤 글에서 남한의 좌파가 국제주의에 가깝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같습니다. 좌파는 反-민족주의에 불과한데 그것은 아직 국제주의자는 아닌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제주의를 좌파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좌파들이 민족주의 반대를 쉬운 알리바이로 가지면서, 국제주의를 실제로는 수용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 더 "막대를 구부리는" 비판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주의라고 해서, 곧장 국제금융기구, 자유무역제도들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국제주의적인 접근이라고 해서 사유화반대 투쟁에 있어서도 곧장 그런 초국적 기구들을 대상으로 투쟁해야하는 것은 아닌데, 그 나라의 국가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가장 유효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남한 국가가 아닌 동남아 각 나라들의 경우에는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남한은 국가기구가 강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투쟁이 중요할 수 있지만, 국가자체가 매우 취약한 필리핀 같은 경우에는 국제기구들을 직접 상대해야할 수 있죠. 이 점은 남한에서 98년, IMF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이 촉발되지 않았던 부분적인 이유일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운동주체들의 신자유주의와 국제금융기구들에 대한 몰인식에 기반한 것이 더 컷다고 생각되지만 말이죠.)

 

그밖에.

 

이 회의는 애초 물과 에너지에서 출발한 회의이지만 투쟁 목표는 계속 확장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 자유무역체제에 대한 투쟁 등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제도들에 대한 투쟁으로 논의가 확장됩니다. 그 때문에 논점이 흐려진다는 불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어쩔 수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

 

WTO, FTA 반대 투쟁에 대한 워크샵만 보더라도, 물, 에너지 사유화를 반대하는 것으로만 사고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자유무역 기구-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참가자들의 사고과 경험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물, 에너지 사유화는 이러한 자유무역 기구-제도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죠.

 

회의 마지막 참가자 총회에서는 아시아 지역의 노동자운동-사회운동의 네트워크 형태의 연대조직을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Campagin for People's Rights to Natural Resorce and Essential Service(자연자원과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 운둥)이라는 이름이죠. 앞선 글에서 썼던 것처럼 이 회의를 조직한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의 활동이 의미있는 것은, 이렇게 국제적인 수준에서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말로 만이 아니라) 실제도 조직한다는 점입니다.

 

지역별 운영위원을 호선할 때에는 반드시 여성을 포함시키는 것도 인상적.(아마 이런 방식이 국제 사회운동에서는 일반적인 것같더군요) 지역(남-동남-동 아시아)별로 2인씩 배정한 운영위원에 지역별 1인을 여성으로 했으니 1/2을 여성으로 배정한 셈이죠. 할당제와 관련한 여러 쟁점이 있기는 하지만, 인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다음 포스트는 이어진 회의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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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곳에서 돌아본 노동자운동(1)

7월 중순 며칠간 태국에서 진행된 회의들에 참석하면서 생각한 것들.

 

아래 일정은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에서 주최-조직한 필수서비스의 사유화와 관련된 노동조합의 회의였습니다. 주빌리사우스는 외채탕감운동단체이지만 중심부 국가들이 외채를 이용해 주변-반주변 국가들을 착취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비판과 반대운동을 전개해왔죠. 집행국도 (필리핀 사람들인데) 다른 국제NGO에 비해서 매우 건강합니다.

 

특히 외채를 통해 주변-반주변을 착취하는 유력한 방식이 필수서비스(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공공서비스)의 사유화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부문에 노동조합들을 직접 조직하려는 시도가 이번 회의였던 셈이죠. 주빌리사우스가 건강하다고 하는 것은, 집행국의 정치적 성향(주로 필리핀의 비공산당좌파들이 함께 하더군요) 때문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의 운동을 국제적인 수준에서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Asian Labor Assembly Privatization Of Essential Service (Focus on Water and Power)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대한 아시아 노동자 회의( 물과 전력)

 

국가단위를 넘어선 국제적-지역적인 접근

 

언급한대로 이 회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수서비스 산업의 사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프로그램은 각 국에서 진행되는 필수서비스의 사유화가 국내적인 사안이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필수서비스의 사유화 문제를 각 나라 사회운동의 국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연대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런 점은 남한의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에도 부족했던 측면입니다. 주로 남한의 공공부문노동자운동은 국내정치적인 요소만 고려했는습니다. 물론 국제 금융기구의 직접적 강제보다는 남한의 지배계급이 능동적으로 추진한다거나, 금융위기 과정에서 국가가 다른 주변-반주변 국가처럼 취약해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특수한 지형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인식을 계속 국내에 가두는 편향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사유화가 진행되는 직접적 과정은 국내정치적인 제도를 거친다고 하더라도 국제금융기구, 중심부 국가, 초민족자본, 국제적인 컨설팅 기업, 주반-반주변 국가를 모두 고려해야하고 이 주체들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메커니즘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 지역적 관점에서 전반적인 접근을 통해서 말이죠. 남한에서는 IMF 구제금융 이후 (직접적으로 IMF SAPs에 의해 강제된 사유화에 대항하는) 몇년 동안 사유화반대 투쟁을 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IMF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 적이 없을 정도로 국내정치에 대한 대응에 집중해왔습니다.

 

한편, 이러한 회의가 아시아에서 조직되는 대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산업적 팽창 때문에, 물-에너지도 emerging market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유화, 주식상장, 지분매각 등을 통해서 금융화됩니다.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대한 사회운동의 접근방식


공공부문의 사유화 반대에 있어허 해당 노조들은 주로 고용, 임금,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이러한 문제가 신자유주의의 문제라는 인식정도에서 사유화반대투쟁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특히 사회운동들의 문제제기는 물-에너지에 대한 인민의 권리, 환경에 대한 권리, 정보의 공개-참여 등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식이더군요. 인민의 보편적 권리의 한 항목이라는 것으로 말이죠.

 

노조와 사회운동의 접근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고, 노조에 있어서도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사유화 반대투쟁들을 평가할 필요가 있을 텐데요, 남한에서는 사유화에 대해서 공공성-국부유출 이런 방식으로 비판하기는 했는데, 그게(국부유출은 민족주의적인 구호고, 공공성이라는 구호는) 인간-시민의 권리라는 방식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꼭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사용하는 개념도 차이가 나는데, 회의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만  남한에서 "공공 public 서비스"라고 부르는 것들을 그곳 논의에서는 "필수 essential 서비스"라고 부릅니다.)

 

공공성 수호라는 구호는 국가가 이런저런 항목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데 더 중점이 있는데, 인간-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인권의 항목으로 바라보는 것으로서 접근 방식이 다른 거죠. 공공성 구호가 남한에서 중심이었던 것은 국가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기도하고, 따라서 사회운동이 국가와 투쟁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상황에 근거하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이 투쟁이 보편적인 인권-시민권을 확장하는 투쟁으로 나가지 못하고 코포라티즘에 수렴될 위험성도 매우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그런 점에서 저는 "사회공공성" 구호에 대해서는 항상 "?"를 칩니다.) 물론, 국가의 책임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함의가 있고 그런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튼 남한의 정세에서 운동에도 그런 효과가 발생한 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를 상대화하는 대안까지 함께 고려하고 운동에 기입해야한다는 점.


특히 에너지의 경우 지구온난화 문제와 함께 결합해서 인식할 필요성


이번 프로그램에서 가장 관심있게 들었던 발제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에너지부문의 노동자운동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취지에서 배치되었습니다. (옆 사진에서 발제하는 사람은 Red Constantino라는 그린피스 활동가)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는 다른 자료를 참조하면 될 테니 여기서는 생략.  다만 도쿄협정의 CO2 감축 요구는 선진국 정부의 무시는 물론이려니와, 그 자체로도 에너지가격을 높이면서 빈곤층, 노동자에게 고통을 심화한다는 점을 인식해야하고 그런 측면에서 민주적 통제, 세계화반대와 함께 인식해야한다는 접근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체제에 부담을 주고 체제전복적이어야한다는 주장은 월러스틴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러나 환경과 관련된 '산업'자체가 성장할 수 있고, 자본은 여기서도 이윤을 얻을 수 있죠. 그런 점에서 환경규제가 '체제에 부담'을 주는 것인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도록 하는 물질적 한계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 이것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주체없는.. 폭력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류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다른 운동적 접근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남한에서도 공공연맹 안에 에너지관련노조들과 환경운동연합 등이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라는 것을 구성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에너지 소유-운영구조에 관심이 집중된 측면이 있고 지구온난화문제 등 보다 넓은 환경운동의제에 대해서는 접근이 부족한 점도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도 노조들의 인식이 가지는 편차는 크게 드러나더군요. 환경운동단체들의 주장이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같이 할 수 있냐 없냐가 갑론을박. 인도의 어떤 참가자는 화해불가능이라고 주장하기도. 생태주의를 노조의 이념으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에너지 부문 노동자 당사자들, 특히 주변-반주변의 노동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경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체제 대안이라는 것이 해당 부문의 노동자에 대한 대안을 필수적으로 포함하지 않으면 안되겠죠. 특히 환경운동 진영과 함께 노동자 운동이 고민하면서 공동의 "전략적 합의"를 국제적인 수준에서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너지분야 분임토론에서 이런 주장을 언급하긴 했는데, 다른 참가자들은 좀 시근퉁 하더군요 ─_─;;)


사유화와 젠더

 

프로그램 중에는 물과 전력의 사유화가 여성에게 특히 문제라는 내용의 워크샵이 있었습니다.  여성이 '가사'유지와 더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데요, 특히 가정을 유지하는 임무가 여성에게 주어지며, 특히 물의 경우 여성이 획득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가족구조에서 물을 확보하는 것이 여성의 임무로 규정된 이상 여성들은 물을 얻기 위해서 더 힘든 조건에 처할 수밖에 없죠. 또한 생계를 부양하는 빈곤여성의 경우 공공요금의 인상은 더 큰 부담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해고만이 아니라, 필수서비스, 특히 물의 사유화가 여성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전 발제를 했던 PSI--국제공공노련--는 성주류화전략에 입각해서 여성에 대한 구조조정이 국가의 노동력 개발이나 생산성에도 역행한다는 입장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건 좀 그렇더군요.) 여성노동자의 측면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여성일반의 문제로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정규적인 노동자 인구가 적은 주변부 국가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더욱 의미가 있겠더군요. (남한과 같은 사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만.)

 

그런데 이런 문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유화 반대운동을 생계부양자로서의 여성의 피해가 가중된다는 식으로 진행할 수 있는가는 고민이 필요한 것같습니다. 여성을 사유화 반대투쟁에 동원할 수 있기는 할텐데, 가족 내 여성의 위치를 당연히 전제하면서 고정하는 효과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주변부국가에서 지역차원에서 여성들을 조직하는데는 의미있는 경로일 수는 있겠군요. 가족 내에서 불평등한 여성의 역할을 전제하고 여성을 조직하는 방식은 꼭 이런 예만이 아니라도 학부모의 역할, 가족 내 돌봄노동의 역할 등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어떤 의미일지 어떤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지는 고민해보아야할 것같군요.

 

<더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포스트에. 글이 너무 길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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