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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27
    I Hate It.
    겨울철쭉
  2. 2008/03/14
    민주노동당 비정규후보 논란(7)
    겨울철쭉
  3. 2008/03/11
    바흐, Goldberg Variationsiations BWV 988(4)
    겨울철쭉
  4. 2008/02/23
    백기완 선생 강연 중에.(3)
    겨울철쭉
  5. 2008/02/18
    신당파/분당파 유감(23)
    겨울철쭉
  6. 2008/01/20
    "현장파"의 모순
    겨울철쭉
  7. 2008/01/02
    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이려면.
    겨울철쭉
  8. 2007/12/31
    2007년의 마지막날들(4)
    겨울철쭉
  9. 2007/12/30
    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인가?(4)
    겨울철쭉
  10. 2007/12/23
    그해 여름
    겨울철쭉

I Hate It.

이번 주말에 사무실이 이사를 한다. 일요일 노가다까지 하게생겼다. 다들 짐싸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은 광주시청 비정규직 투쟁이 있는 날이라 많은 사람이 광주에 가서 썰렁하면서도 남은 사람들은 짐싸고, 나는 회의자료(지긋지긋하군) 때문에 남았지만 역시 전혀 일할 분위기는 아니다. 전혀.

짜증나고 정신없을 때는 더 정신없이 음악을 들으면서 일(하는 척)하는 것이 가장 좋다.
사실 앞으로 출근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지만 이사가는 것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 넬Nell의 새 앨범을 듣다보니 이런게 일종의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 이게 앨범 제목이다)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 사무실에서 벌써 몇년이람.

그래서 플레이시켜놓은 것이 Ellegarden 의 Riot on the Grill 앨범이다. 맨 끝곡이  I Hate It.
딴 건 잘 모르겠고 "I Hate It"을 반복하는 후렴구가 있는 데, "싫어 싫어 싫어"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
정말, I Hate It.



같이 넣은 곡은 Nell의 앨범 중에 Moonlight Punch Romance 라는 곡.
Nell은 슬픈감정을 극단적으로 오버하는 게 뭔지를 보여주는 밴드인데,(그래서 좋아하긴 하지만ㅋ. 일종의 대리만족이랄까) 그나마 이 곡은 그나마 "겉으로는" 좀 밝은 곡이다. 묘한 효과가 있다 싶다. Moonlight Punch 라는 칵테일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I woke up and I found that I was sleeping on the couch
깨어보니 소파에서 잠들었다는걸 알았어
Cast away the papers unread
읽지 않고 흩어진 신문들.
Half awake and a bit confused
반쯤 깨서 조금 멍하게
Just trying to understand if I was dreaming or not
꿈을 꾼건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있어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are not around When you are gone
네가 곁에 없을 때, 네가 가버렸을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say it's not truth
네가 거짓이라 말한 때가
I walked down the street to buy some junks and tooth paste
몇가지 물건과 치약을 사러 내려갔어
I couldn't find my favorite ones
좋아하는 것들을 찾을순 없었어
I unsealed the new paste and I'm trying to understand
새로 산것을 열어보고, 이해해보려 해
How does this world looks to you
이 세상은 네게 어떻게 보일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are not around When you are gone
네가 곁에 없을 때, 네가 가버렸을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say it's not truth
네가 거짓이라 말한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are not around When you are gone
네가 곁에 없을 때, 네가 가버렸을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say it's not truth
네가 거짓이라 말한 때가
I woke up and I found that I was sleeping on the couch
깨어보니 소파에서 잠들었다는걸 알았어
If I was dreaming or not
꿈을 꾼건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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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비정규후보 논란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 2번으로 민주연합노조 홍희덕 위원장을 올리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란이 있다.
두 가지인데,
첫번째로, 왜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적 중요성이 있는 이랜드-뉴코아가 아니냐는 것
두번째로, 민주연합노조의 산별노조 등에 대한 행보를 볼 때 추천받을 만하냐는 것이다. (민주연합노조는 대의원대회 결의로  산별노조로 전환했다가, 총회를 다시 부쳐서 부결하고 공공노조를 탈퇴했다.)

이에 대해서 민주노동당과 후보는 각각 이렇게 해명한다.


첫번째에 대해서.
이랜드노조 지도부를 민주노동당 비례후보로 전략 공천하지 못한 이유는 이러합니다. 혁신 비대위가 김경욱 위원장, 이남신 수석부위원장과 직접 면담한 결과를 바탕으로 비정규투쟁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물 등 여러모로 손색이 없지만, 혁신 비대위가 애초 원했던 김경욱 동지는 고사했으며, 추천된 이남신 동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는 아니라는 점, 비례후보 출마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은 상태에서 사측의 악선전도 예상된다는 점, 민주노동당 비례후보 등록마감이 3월 2일인데, 비례후보 채택 여부, 어느 정당인지 여부, 누가 나갈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이랜드의 최종 판단은 3월 4일 조합원 총회에 좌우된다는 점, 집행유예와 고법재판 계류 중이라는 점 등이 반영되었습니다.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전략공천에 대한 혁신 비상대책위원회의 입장>

두번째에 대해서,
Q: 민주연합노조는 대의원대회 결의로 공공노조에 가입했다가 조합원 총투표로 탈퇴를 한 적이 있다. 산별연맹을 통해서만 민주노총에 가입할 수 있는 규정 때문에 (법적으로는) 한동안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적이 있었다. 상급조직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A: 대의원대회에서 가입결의한 다음 조합원 총투표를 거친 것은 노동조합의 규약에 의한 것이었다. 민주연합노조 규약에 의하면 총회 의결사항의 대부분을 대의원대회에서 갈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분할 합병 해산에 관한 것은 반드시 총회에서 의결하도록 되어 있다.
한동안 법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적이 있었다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규약 제5조 2항 및 제8조 1항에 의하면 전국규모의 산업별 단위노동조합과 연합단체, 일반노동조합,전국 규모의 산업별 협의회와 직업별 노동조합등이 가입신청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 산업별 연맹만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중앙에 가입신청하지 않고 각 지역본부에 직가입한 노동조합도 여럿이다. -<비례대표 전략 2번 홍희덕 후보 지상청문회[진보정치]>


첫번째에 대해서 다시.
나는 이남신 동지가 진보신당의 후보로 출마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조합원 총회에서 결정한 마당에, 이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 관련된 정황에 대해서는 "진보신당은 우리를 이용하지 말라"-정경섭/레디앙 기사를 참고.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해명"은 매우 궁색하다.
우선, 민주노동당은 이남신 동지가 비정규직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말하는 김경욱 위원장도 역시 정규직이라는 점에서 곧바로 모순된다.

게다가 그런 식의 기준이라면 민주노동당 후보로 추천된 민주연합노조의 홍희덕 위원장도 현재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홍희덕 위원장은 의정부시설관리공단에 속해있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민간위탁 반대투쟁을 전개했지만, 현재는 지방공기업의 "정규직"인 셈이다. 적어도 법적, 형식적으로는 그렇다.(물론 이 경우에도 시청이 위탁주체를 지방공기업이 아니라 민간에 전환할 수 있어 간접고용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고용된 법적 신분이 무엇이냐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홍희덕 위원장이 적절할 수 있는 조건이 "비정규직 투쟁의 경험"이라면 이남신 동지도 다르지 않다.(물론, 여성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비례대표 추천마감일과 노조 총회날짜의 이틀차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출마여부-정당-후보" 세가지가 결정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 이틀의 여유를 더 갖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일일 뿐더러, 더 많은 모순이 있다. "정당"의 경우, 민주노동당이 홍희덕 후보로 확정하지 않았다면 민주노동당을 결정될 가능성이 (아마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후보"의 경우에도, 이미 민주노동당이 이남신 동지를 거부한 상황이다. 조합원 총회에서 이남신 동지가 추천되었다라도 거부했을 것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변명의 거리가 되는가?
마지막에 언급된 집행유예, 재판계류 문제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것같다.


▲지난 해 열렸던 이랜드노조 총회 모습.(사진=이랜드 노조/레디앙에서 펌)

두번째 문제는, 이미 많이 논란이 된 문제다.
최근에는 민주연합노조가 사실상 휴면조직 상태에 있었던 시설연맹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우회해서 민주노총에 다시 가입하게 되었다. 애초에 가입되어 있던 공공운수연맹에는 복귀하지 못했다.(민주노총 직가입도 아니다.)

* 관련된 기사와 게시물 :
민주연합노조-공공노조, 공공연맹, 민주노총 탈퇴처리
민주연합노조는 시급히 민주노총으로 복귀 하여야 합니다.

민주연합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가입하는 결의는 90%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졌다. 얼마 후에 총회에서 산별 가입안건은 90%이상이 반대하는 것으로 부결로, 각각 정반대로, 그러나 압도적인 한쪽으로 결정되었다. 즉 집행부의 매우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는 가운데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조직기풍은 최근 민주연합노조가 진행하는 100%조합원의 민주노동당 가입운동으로 연결되는데, 대중조직에서 이런 방식이 가능한지 갸우뚱해지기도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항에 대해서 순전히 형식적인 논리로 자신들이 규약을 잘 못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민주연합노조가 총회를 하기 전에 이미 민주연합노조의 핵심지도부들은 공공노조 임원선거에서 비공식적인 논의를 이런저런 세력들과 깊숙히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선가능한 방식으로 공공노조 임원출마가 불가능해진 직후, 민주연합노조의 총회가 잡히고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할까?

자, 그런데 홍희덕 위원장의 발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동안 법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었다는 점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뒤에 말하는 민주노총 가입과 관련해 여러조직형태가 가입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민주연합노조는 시설연맹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연합노조가 이런저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민주노총 소속이었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주장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법적,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 민주노총 탈퇴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므로" 정신상으로는(혹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노조 정신을 갖고 민주노총과 함께 투쟁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형식적인 가입상태가 문제가 아니라고, 민주노조 정신이 문제라고,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이렇게 말할 경우에는 앞에 산별노조 가입과 관련해서 법적, 규약상 문제 운운하는 것과는 전혀 일관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사실상 가입한 사실을 법적이고 규약상의 문제를 들어 다시 총회에 붙이고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홍희덕 위원장, "진보정치'에서 펌)

홍희덕 비례대표홍희덕 위원장을 여러 사업속에서 가까이 보아온 나로서는, 그분의 운동상의 신념이나 활동가로서의 자질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여러해동안 환경미화원, 간접고용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헌신적이었고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분이라 존경한다. 그래서 국회의원 후보로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연합노조가 만든 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홍희덕 위원장에게 그 책임을 다 물을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위에 "진보정치" 인터뷰의 40문40답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23. 일 잘 하고 못된 사람, 일은 못 해도 착한 사람 가운데 누구와 일할 지 : 일 잘하고 못된 사람", "못된 사람"과 하고 계신 것같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여준 민주노동당의 변명은 매우 구차하고 치졸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남신 후보가 정당성이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홍희덕 위원장께 대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분명하게 잘 못된 것이 있었다면, 혹은 정치적 판단이 달라져서 남들(우선 공공노조에 남은 3만명의 조합원들부터 민주연합노조 조합원들에게까지.)에게 피해와 혼란을 주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일이다.

전후 사정을 모두 다 알면서 뻔한 방식으로 변명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홍희덕 위원장답지도 못하다. 아예 그 모든 과정이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면 존경을 철회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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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Goldberg Variationsiations BWV 988

좀 멍해지는 봄날,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잠시 짬을 내서 음악을 들을 때는 피아노 연주곡들이 좋다. 오늘은 바흐를 듣다가, 잠시 시간에 틈을 벌인다.

바흐, Goldberg Variationsiations(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중에서 Aria No.1과 Variation 3.

* 곡을 클릭하면 재생.

 

사실, 바흐의 곡들은(이 곡도 마찬가지지만) 화성법을 "연구"하거나 "교육"하기 위한 것들이 많다.
그래서 윤소영 선생같은 분은 바흐의 작품을 (특히 베토벤에 비해서는 ^^;) 좀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냥 편하게 이렇게 듣기에 무척 좋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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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 강연 중에.

노조 교육에서 오랜만에 백기완 선생 강연이 있었다. 나이가 나이이신만큼 예전처럼 힘이 넘치지는 않았지만,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말씀은 여전하시다. 이날 말씀이나 평소의 내용에 모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생각해볼만하다. (아래는 나의 언어로 정리한 것)


"누구나 나누고 고르게 잘 사는 사회라는 이념, 평등사회라는 이념은, 단지 200년짜리의 이념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형성되고 내재화된 이념이다. 그래서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지역에서나 항상 존재하고 부활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보사상의 위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이념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표면적인 것이거나, 운동 주체의 위기이다."



[이날 강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찾은 다른 사진. 나중에 이날 사진은 구해서 올려야겠다]


몇가지 생각해볼 부분.

발리바르가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에서 언급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번역글 보기) 평등사회라는 유토피아,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전통. 그것은 (중세적인 형태, 발리바르에 따르면 "첫번째"인 공산주의로서 "청빈형제회(fraticelli) 혹은 급진적 프란체스코주의의 공산주의"처럼) 단지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면서부터 만들어진 보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백기완 선생의 말에 담겨있다. (“천년왕국-메시아”마저도 중세가 아니라 그 천년도 전에 중동에서 제기된 한 시기의 사상이다.)


재미있는 부분인데, 평등사회에 대한 지향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 자체의 내용(혹은 그 필수적인 일부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정세에서도 완전히 압살되는 경우는 없고, 매시기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마치 함석헌-김상봉이 말하는 씨알과도 유사하지만, 민족적이지 않으며, 보편적이다. 인류 전체에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인류의 보편적인 이념인 평등사회-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의식”의 형태를 띤다는 것. 보편적 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이라는 사고와도 통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선험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백기완 선생의 말씀 안에도 그런 씨앗이 있다.

여기서 더 주목한 부분은, 계급의식이라는 것의 원래의 형태가 인류의 보편적 해방에 대한 사상이라면 그 내용이 그에 걸맞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이라고 불리는 인구의 특정부분에 특수적인 이해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류의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것으로, 자신의 이념을 보편화시켜 가야한다. (그런 측면에서 전투적인 경제투쟁을 계급의식의 핵심적이고 주된 발현형태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평등사회-공산주의가 대중들의 정서 속에, 사회적 본능 속에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현재 다시 표면에 드러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것인가가 문제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매번(장소와 시간에 따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 우리 장소에서의 그 형태, 그렇지만 보편적인 내용을 채워가는 형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한다.


강연 끝무렵에는 카프 작가 강경애의 단편소설 “원고료 이백원”을 소개한다.(찾아보니 범우사 판의 <인간문제(외)>에 실려있다.) 한번 읽어보기는 해야겠는데, 사람은 자신의 (자본주의적인) "교환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 가치“를 높여야한다는 소설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사람에게 어떤 ”가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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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파/분당파 유감

1.
"패권주의"에서 "종북주의"로
애초에 대선즈음에 들은 민주노동당 혁신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당내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주파의 패권주의적 행태였다. 그리고 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패권주의의 원인으로 종북주의가 지목되었을 때만 해도 이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스탈린주의적 당노선을 가진 세력들과는 상호 존중하는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인정할만했다.
 
그러나, 정작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문제는 패권주의가 아니라, 패권주의의 원인으로서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주체주의)가 아니라, 곧장 "친북노선"자체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바로 빨갱이 사냥으로 이어졌다. 최기영 제명안은 비록 나중에 수정되기는 했지만 "편향적 친북행위"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쯤되면, 쟁점은 애초에 문제의식, 패권주의로 인해 불가능해진 당내 민주주의 수호가 문제가 아니라 북조선에 대한 공격이 된다. 노골적인 반공주의 노선으로 전환.

2.
"신당파"의 반공사민주의
이 과정에서 신당파의 정치적 포지션은? 당장 결성한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공동대표는, 박승옥이었다. 92년 전노협 위기논쟁에서 2007년 노동운동위기논쟁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노동운동의 변혁성과 전투성을 문제삼고 "새로운" 노동운동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 "새로운"이라는 수사 안에는 이제까지 그나마 민주노조 운동이 만들어왔던 긍정적인 정치적 의미를 모두 폐기하는 운동이 그려져있다. 신당파의 입장이 무엇인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런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이 NL에 비해서 급진적이기는 한가? 신당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본질을 너무 빨리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렇다고 당내 혁신파가 다른 입장이었나? 비록 그 안에는 당을 보다 왼쪽으로 가게 해야한다는 입장이 있었을지 몰라도, 심상정 비대위가 제안한 내용은 한편으로는 "편향적 친북행위"라는 반공주의 의제를 활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생활 속의 푸른 진보" 운운하는, 생태주의를 핑계로 우경화된 정치노선을 표방했던 것이다. (더 오른쪽에 있는 노회찬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왜 급진적 생태주의와 반자본주의 변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적인 생활정치로 나가는가? 이후 민주노동당내 "자율과 연대"와 같은 사민주의 세력은 노골적으로 신당지지를 선언하고 나선다.

결국 애초부터 신당파, 혁신파 모두가 동일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처한 공간은 그 프레임 때문에 점점 더 우경화하고 있다. 이제 자신들의 위치를 보면 NL을 "우파"라고 부르기가 쑥스럽지 않나?

어떤 분이 모아놓은 민주노동당 분당관련 신문기사, 사설들을 보라.
http://cafe.naver.com/hamsatam.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974

3.
대중조직의 분할인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책임묻기로 일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가장 중요한 공동의 과제 중 하나는, 당의 분열이 대중조직의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이미 일각에서는 공공연하게 이런 위험을 경고한다. 이미 강승규사태, KT노조, 민공노, 민주연합노조 사태 등 폭약은 쌓여있으니, 뇌관만 있으면 되는 상태일수도 있다.) 이번 민주노동당 분당의 사실상의 정치적 책임이 NL에 있는 것처럼, 민주노총의 위기도 국민파-NL 집행부가 만들고 있다. 이미 실질적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분화를 패권으로 막으려는 우매한 행위를 민주노총 집행부가 하고 있고, 이는 역으로 현장의 분할을 촉진한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주된 책임이 NL에 있는 것처럼, 민주노총이 분할의 위기에 빠진다면 그 정치적 책임은 온전히 국민파-NL 집행부에 있다.)

이런 조건에서 양식있는 활동가들은 당의 분할이 민주노총의 분할로 이어지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노총 안에서 정치적 선택의 폭을 여는 것이 필수적이다.(민주노총 정치방침, 민주노동당 배타적지지 방침 개정) 그러나 그러한 방향자체가 민주노총의 정치적 분할을 촉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매우매우 신중해야한다. 앞으로 예상되는 민주노총 분열위기의 1차적인 책임은 국민파-NL집행부에 있을 것이지만, 중앙파-좌파도 면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그럼 NL--'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와 동거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NL당이 된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점에서 노운협 등의 입장은, 정치적 지형에 대한 진단에서는 올바르지만, 정작 현실의 정치적 지형에서는 무능하다.

자주파/평등파 왜곡된2분법, 민족개량파 공개사과하라
천영세 직무대행이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

민주노동당내 이른바 '평등파'가 분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인 NL이 노선을 혁신하여 분파형성권을 인정하고 당 노선을 수정하지 않는한 그들과 공동의 정치활동에서는 "복종"혹은 "압도"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그런 측면에서는 애초에 당내 평등파의 문제제기--"패권주의"의 본질이 NL의 "종북주의"정치노선, 당과 수령관을 핵심으로 주체주의에 있다는 비판은 정확했던 것이다.)   NL만이 압도적으로 남은 당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혹은 조선노동당의 우당인 조선사회민주당 같은 포지션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5.
제 3의 선택지?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신당파의 반공 사민주의도 아니고, 민주노동당에 남은 NL의 스탈린주의도 아닌 다른 정치적 위치가 가능할까? 이것은 마치 냉전시기의 국제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처한 것과 유사한 딜레마. (물론 정치적 지형은 분명히 다르고 따라서 다른 사고, 제3의 선택지에 대한 사고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런 지형에 대한 "좌익적 비판"은 어떤 내용이 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정치를 압살하는 두 경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우의 간지와 사자의 용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특히 비-NL 사이에서 민주노동당 분당-탈당파가 "전면적으로 지지"받는 상황, 레디앙만이 아니라 이제는 참세상 기사에도 그런 기사가 탑에 올라오는 작금의 상황에서 그래도 이제는 생각을 좀 해보자. 지금 더 절박한 것은 NL만 남은 (이제 서서 죽은) 민주노동당 공격이 아니라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는 흐름에 대한 비판이다. 비-NL이 올바른 정치노선을 보장해주지는, 전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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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현장파&quot;의 모순

'현장파'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노동자운동에서 '좌파'와 혼용되어 사용된다.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물론 이렇게 된데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사업장 단위의 경제투쟁에서 전투성과 비타협성을 좌파들이 일관되게 지지해왔고, 이것이 이러한 정서를 공유하던 현장활동가들과 결합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전노협이 약화-소멸되면서 대공장 중심의 경제투쟁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단위 경제투쟁의 전투성과 비타협성은 좌파들이 현장활동가들과 공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좌파'는 '현장파'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한 활동가가 좌파이자 현장파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좌파=현장파는 아닌 것이다. 좌파는 정치적 입장이며, 현장파는 대중운동의 한 경향이니까.(그것도 주로 대공장 현장조직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향들이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좌파=현장파의 도식, 좌파가 자신의 대중운동적 기반을 주장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활용해왔던 이 도식의 모순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고, 그 모순을 적대적으로 전개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류기혁 열사의 분신 이후에 민투위가 크게 비판받았던 적이 있다. 대공장 현장파운동이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태도가 문제였다. 물론 당시에 이 문제는 정파간의 비난으로 얼룩졌고, 그것을 특정 정파(말하자면 노힘)의 책임이라는 식의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차 집행부의 태도가 노힘의 입장과 같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 비난은 진정한 쟁점을 왜곡하는 효과를 낳았다. 말하자면 노힘이라는 정파의 입장이 아니라 대공장 현장파의 입장이 문제였던 것이다.(현장(파)를 '신성시'하는 이런저런 정파들의 비난이, 현장조직이 문제라는 비판이 아니라 정파(노힘)가 문제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최근 공공노조나 연맹 주변의 상황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게 된다. 공공노조-연맹 안에서 좌파라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존재한다.(본인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하나는 산별노조를 지역조직을 중심으로 강화하고 이를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을 주된 입장으로 하는 경향.
또 하나는 대공장의 현장투쟁을 강화하는 데 우선을 두고 따라서 산별노조로의 집중을 비판하는 경향.

경향적으로 지역운동 활동가들,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전자의 입장을,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은 후자의 입장을 가진다. 이런 입장은 산별노조 안에서 대공장 조직의 발전방향, 향후 산별노조 발전방향, 지역조직과 비정규사업에 대한 예산과 인력의 배정 등에서 입장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것은 국민파와 형성하는 산별노조에 대한 쟁점과는 또 다른 축의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어떤 현장파 간부는 이후 산별노조 내 예산배정비율을 [중앙:기업지부=3:7]로 하자고 제안한다. (현재는 4.5:5.5이며, 내년에는 5:5로 조정할 예정이니 이 현장파 활동가의 입장은 현행보다 기업별 지부의 예산을 확충하는 안인 셈이다.) 이런 입장은 사업장단위 현장에 더 큰 힘을 주어야한다는 관점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산별노조의 지역조직,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재정과 인력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또 어떤 현장파활동가들은 '제대로된 투쟁'을 위해서 현재의 산별노조를 탈퇴해 유사업종 대공장 노조들로  새로운 산별노조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실질적인 "총파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산별노조의 재편단계에서 몇번씩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이런 지점에서는 오히려 국민파의 "업종노조" 입장과 유사해지는 현상도 나타난다.(역설적인 현상도 아닌 것이, 양자 모두 실리주의와 경제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자의 입장은 상호 토론되고 합의점을 찾는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적대적으로 전개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쟁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해야한다. 그저 범-좌파라는 입장으로 뭉개고 갈 수는 없는 상황들이 터져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정규직-대기업 사업장 운동이 어떻게 "현장에 기반하여" 사업장 경제투쟁을 넘어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으로 확장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제기될 필요가 있다.(양자의 입장의 산술적 합, 합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업장 단위의 전투적 경제투쟁,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가진 의미와 한계가 모두 확인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문제제기는 이제까지 노동자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많은 학자들의 논문과 정치/사회단체들의 입장에서 확인된 것들이다.(그래서 너무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가들 사이에 충분히 동의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모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사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좌파-현장파라고 불리는 경향 안에서 이런 쟁점과 모순이 확인되어야 그런 동의도 비로서 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쟁점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입장들이 다수인 것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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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이려면.

새벽길님의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답이라고 생각하면서...] 에 관련된 글.

새벽길님의 말씀에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특히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논의에 당 안에 있는 동지들만이 아니라 당외에 있는 대중운동, 사회운동이 논의를 함께 해야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같은 사람들도 책임감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아래 글에 대한 댓글에도 언급한 것처럼 당내의 논쟁만 진행될 경우 그것은 논쟁의 구도상 필연적으로 자주파라는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나가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논의결과로 진행되는 분당은, 말그대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는 신당창당이라기 보다는 잡다한 반-자주파들이 모인 (유행하는 표현을 응용하면) '민주노동당 시즌2'가 될 뿐이겠죠. (물론 분당을 주장하시는 분들 중에는 더 '민주노동당'다운 '민주노동당'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내에서 논쟁하시는 동지들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레디앙에서 장석준 동지의 글은 계속 읽고 있지만, 과연 당내 논쟁에 임하는 평등파(주로 전진)동지들이 이러한 입장에 따라 논쟁을 제기하는 것인지도 계속 모호합니다. 특히 지난 중앙위에서 벌어진 논쟁은 (자주파의 후진 대응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 우선 당외곽의 사회운동, 대중운동의 입장과 발언, 어떤 개입들("바로 지금"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매우 고민됩니다)이 시급하게 필요할 것이고,
(2) 이와 함께 현재 논쟁이 어쨌든 이미 당내에서 쟁점을 형성하고 사회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내에서 논쟁하시는 동지들이 논의의 방향을 제대로 가져가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당 밖에 있는 운동들은 결국 당내의 논쟁구도를 보면서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당내 논쟁이 정파간 대립의 형태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구도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효과일 테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면피하려고 해서는 안되겠죠.

이런 조건들 속에서만 분당이든 신당창당이든 (아니면 민주노동당 개혁이든간에) 의미있는  운동적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조건들을 만들기 위한 실천을 함께 해야겠지만, 그것이 실패하는 상황이라면 여전히 이 과정 전체가 하나의 '해프닝'이 될 수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아래 제 글에 댓글 중에 '트루로드'님의 제기처럼, 대안의 논의에 있어서는 오히려 당형태 운동의 상대화, 그러니까 제도정치에 진출하기 위한 당, 혹은 운동들을 '지도'하는 당이라기 보다는 운동들(사회운동, 대중운둥)을 위한 당이라는 관념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런 지점에서 논의가 진행될 때, 당밖에 있는 운동들이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겠죠.
( 이런 지점에서는 민주노동당 외부의 당-좌파들과는 입장의 차이가 좀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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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의 마지막날들

12월31일. 잘 '기념'되지는 않는 기념일 중 하나. 어찌보면 그저 사람이 만들어놓은 날짜들의 구획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기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의미가 있다.

2007년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그제는 베토벤의 '합창', 9번교향곡 연주회를 갔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서울시립미술관 반고흐展에 다녀왔다. 고난에 찬 2007년을 마감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선물을 한 셈이다. 우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다가온 어떤 이유들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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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9번 교향곡은 흔히 보편적인 인류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곡을 들으면 그것은 그저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형제애, 민족(국가)을 넘어선 연대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곡의 해설에 대해서는 붉은털실님의 포스팅이 좋다.
http://blog.jinbo.net/egalia227/?pid=155
링크를 따라가면 푸르트벵글러의 1951년 공연도 들을 수 있다.

예술이 (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선언'처럼) 하나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선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자,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의 지침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나갔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적 연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마치 공산주의자선언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이념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을 '활동가'로 만들 수도 있다.(이 위대한 작품을 단지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하고 긴박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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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당시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지에 보고 세달만에 다시 만난 전시회.
몇몇 작품은 만난적도 있어서 괜히 반갑다.

여행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고흐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 중에 몇가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영혼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로서 구원받고자한 열정.

이번 전시에서는 유럽에 갔을 때 꼭 보고 싶었지만 못봤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슬픔'이라는 제목의 석판화.

동거하던 시엔이라는 여인을 그린 1882년 작품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 그림은 마치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같은 느낌이었다. 웅크리고 떨고 있는, 누군가 다독거려주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결국 한달반 여행을 거치면서 그 누군가는 무엇보다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보았을 때에서 그 슬픔을 다시 만나고 한참을 앞에 서있기도 했지만, 훨씬 덜 격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고흐의 다른 그림들, 자화상이라든가, 피에타(들라클루아 모작) 같은 작품들도 나에게는 지난 3개월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는 리트머스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슬픔에도 어느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사적인 느낌 외에도, (초기 네덜란드 시기부터 아를까지 이어지는) 고흐의 그림의 어떤 이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고흐의 작품도 하나의 이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씨뿌리는 사람>같은 경우를 보라. 그것은 태양의 진실 속에 표현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고흐가 그리고자 했던 "영원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편으로는 영적이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기도 한 이러한 이념 역시 우리 활동에 어떤 '선언'이 될 수 있고,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에 녹여낼 지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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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 형제애와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적이고 정치적인) 애정은 어쩌면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인민의 해방을 위한 운동에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되었던 이념적 근원들의 일부다.

그것들을 예술 속에서 사고할 수 있고, 또한 실천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까를, 올해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에게 선물한 두 가지의 예술적 체험은 아마도 2007년,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지나온 나에게 어떤 방향을 말해주는 것같다.(목적론적인가? ^^;) 2007년이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사적으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졌던 한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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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인가?

어제 민주노동당 중앙위가 파행적으로 끝난 이후에 분당론이 더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원도 아니니 좀 자유롭게 혹은 거리를 두고 이야기해보자. 물론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사업도 많이 함께 하고 있으며 이번 대선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선거 때마다 투표는 했다는 정도는 밝혀둔다.

왜 분당하려고 하는가?

분당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분당하려고 하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당론자라는 분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이유들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엊그제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 제기된 요구를 보면 아래와 같다. (레디앙 인용)

현장 발의안의 주 내용은 △종북주의 및 패권주의 청산, 당 강령 정신 및 당 민주주의 실현, 대선평가 당 전면 쇄신안을 임시당대에서 확정하고 △1월 15일 이전 임시 당대회 개최하며 △비례대표 추천권, 당규개정권 등 중앙위 권한의 비대위 전면 위임 등이다.

중앙위의 요구사항이 그 자체로 분당론의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다른 분당 주장 입장들을 보아도 종북주의, 패권주의는 중요한 근거로 제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 원인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인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물론 하나의 문제들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보여준 심각한 위기의 주된 원인인가? 혹은 권영길이 문제인가? 권영길의 노쇄한 이미지 때문에?

그렇다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없었다면, 권영길이 후보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런 결과를 만든 원흉이며 앞으로도 이런 식의 '뻘짓'을 할 자주파와 분리하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건강한 진보정당 운동이 가능할까?

글쎄, 나는 이 대목에서 분당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일부는 '순진한 분'들이고 일부는 (좋게 말해서) '영악한 분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번 대선에서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이 당내에서 심각하기는 했지만 실제 선거과정에서 대중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패권주의적 작태 때문에 기층 당조직이 의기소침했다는 이야기들은 들었지만 적어도 당원, 활동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에 헌신적이었다.

이번 대선 참패와 당위기의 원인을 주로 종북주의, 패권주의로 제기하는 것은 자주파에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비당권파들은 면책받고 면피하기 좋은 방식일 뿐이다. 그러니 '그래봤자 정파적인 권력투쟁 아니냐'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을 포함한 지난 5년의 비판

구체적인 쟁점에는 논란이 있겠지만, 이번 대선 참패의 주된 원인은, 민주노동당이 사실상 '진보'라고 자신을 표상하는 노무현, 통합신당, 문국현류와 같은 세력,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이중대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찾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탄핵사태를 정점으로 주요 쟁점들에서 이들과 함께 했으며, 입장이 갈릴 때에도 국회 안에서 '예의바르게'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주로 노무현 심판이라는 회고투표로 진행된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과 친한 것으로 생각되는 민주노동당이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5년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기껏해야 민주노총의 정규직 조직노동자를 대변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심상정, 노회찬이 후보가 되었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환호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은 대선후보 선출 후부터 선거운동기간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지난 4~5년 활동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자주파만의 책임일까? 물론 자주파가 비판적 지지, 과도한 통일전선론의 입장에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당 내의 어느 세력도 의미있는 다른 정치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평등파라고 불리는 非자주 정파들은 순치된 개혁적 의제를 중심으로 의회활동을 전개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이 아니라 '열우당의 조금 왼쪽'에 있는 성실한 정책정당을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게다가 '전진'으로 말하자면,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표상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민주노총 안에 있는  그 멤버들(이른바 중앙파)의 역할이 오히려 지대하다고 할 정도다.

어떤 운동적 대안?

자, 하지만 이제 책임소재를 묻기 전에 운동적 대안을 만들어야하니 분당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사실 자주파에 "책임소재"를 묻고 있는 것은 평등파라는 점에서 모순된 문제제기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새로운 진보정치 혹은 노동자정치운동을 만들고자 한다면 왜 그 제기방식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비판인가? 그리고 이를 명분으로 하는 분당논의인가?

오히려 민주노동당을 신자유주의 개혁의 이중대이며, 세상을 바꿀 의지도 힘도 없는 고분고하고 제도화된 합리적 정책정당이고, 정규직 노동자들 이해를 대변하는 데 불과한 '민주노총당'으로 만들어온 과정에 대해서 비판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자주파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비판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운동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자주파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식의 분당론이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정치운동을 할 것인지를 제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대중을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운동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안사회를 급진적으로 제기하고 투쟁할 것인지를 물어야하지 않는가?

만약 그 반성과 대안에 대한 논의의 결론이 결국 '분당'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작금의 민주노동당 내의 문제제기는 문제의 책임을 자주파에게 전가하는 것으로만 집중되고 있으며, 자신들은 부정하더라도 결국 당내 권력투쟁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당내 권력투쟁의 결과로 분당한다면 그들이 이후에 창당하더라도 당외의 좌파들이 왜 이들과 함께하겠는가? 그렇다면 기껏해야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함하는 민주노동당내의 非주사 정파들의 연합당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실용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그렇다. 분당으로 새로운 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주파에 대한 책임전가와 네거티브한 평가만이 아니라 어떤 운동을 하겠다는 포지티브한 입장이 있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분당 후 만들 신당의 정체성을 '반자주당'으로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당, 혹은 신당이 진정으로 필요하다면.

'민중의 소리'라는 NL 정파기관지가 폭로한 전진 한석호씨의 문건 전문을 보면 향후 정황, 정세에서 자주파의 행동을 예측한다. 이대로 간다면 2012년에는 평등파는 괴멸한다고 진단한다.

한석호씨의 진단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당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2012년, 이명박의 실패 이후 대중의 선택이 더 반동적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것은 매우 긴박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분당'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정치운동의 주체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주파는 그런 정세에서 올바른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는 세력이고, 그것은 남한에서 사회운동 전체의 파멸이 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그들이 계속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라면 새로운 정당운동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내의 평등파를 주목한다.

그러나 작금의 분당논의의 내용과 방식은 이런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기에 충분하다. 결국 민족자주당 대 사민당이라는,  불모의 구도를 만들거라면 그냥 민주노동당 안에서 소멸하는 것이 차라리 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석호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내 권력투쟁으로 이 과정을 사고한다면, 시간만이 아니라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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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그 해 여름
(2006) / 121분/2006-11-30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인데 뒤늦게 보았다. 작년에도 11월말에 개봉했으니, 여름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겨울에 보는 게 적당한 것같기도 하다. 조금 더 영화와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는 관객 대부분이 갖고 있을 각자의 '그 해 여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 바로 '그 해 여름'이었다.

사실, 영화는 좀 어설픈 점들이 없지 않다. 1969년의 농활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볼 때 영화에 나오는 방식으로 대학생들이 농민들을 만나는 설정도 어색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 농촌의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도시-농촌, 지식인-무지자의 차이를 남성-여성으로 환유하는 불편한 구도다. 사건의 전개는 어쩌면 상투적이기도 하다.

여튼, 진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정인(수애)처럼 혼자서 편백나무 잎을 세상 어딘가로 열심히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모든 사랑은 변한다"" 혹은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주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 되든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뭐, 어느 쪽이든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어설픈 틈새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살아있는 건 거의 두 명의 주연 배우 덕분이다. 특히 (그리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애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더랬는데 영화를 보면서 아주 깊은 매력이 있는 배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흔한 미모보다는,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다. 좋은 배우를 좋은 연기로 만난 것같아 좋다.


영화를 보려고 떠올렸던 건, 영화와 별 상관은 없지만 제목은 같은 노래 때문이다. 새로산 MP3플레이어에 놓을 노래들을 고르다가, 한동안 잊고 있던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펄스데이(Pearl's Day)'의 '그해 여름'이라는 곡이다. 우연찮게도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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