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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15
    애니어그램 등 테스트 결과, 흠흠
    겨울철쭉
  2. 2006/12/13
    사회적 기업-일자리 논쟁에 더해서.(4)
    겨울철쭉
  3. 2006/12/12
    그래서 '결국' 비정규직을 왜 만들어야하죠?(3)
    겨울철쭉
  4. 2006/12/11
    오호, Google의 Picasa라는 사진서비스
    겨울철쭉
  5. 2006/12/10
    근데 왜 굳이 청소'용역'입니까?(1)
    겨울철쭉
  6. 2006/12/05
    도로로, 둥글게.(4)
    겨울철쭉
  7. 2006/11/28
    어머나, '새벽'의 공연실황(4)
    겨울철쭉
  8. 2006/11/27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A Short Film About Love, Kroki Film O Milosci, 1988)(2)
    겨울철쭉
  9. 2006/11/11
    민주노총, 살려주세요!(1)
    겨울철쭉
  10. 2006/02/02
    2005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겨울철쭉

애니어그램 등 테스트 결과, 흠흠

아침님의 [내가 이래서 설문은 못믿어...] 에 관련된 글.

역시, 이런 건 보면 안해보곤 못참지.
http://my-happy.com/enneagram.htm 에 들어가서 테스트.

결과는,
완벽주의자     90% 
성취욕이 강한 사람     80%
관찰을 좋아하는 사람     85%
호기심이 많은 사람     75%
등등등

'완벽주의자'가 가장 높군요. 그담이 관찰을 좋아하는 사람과 성취욕 등등.
그런데 다 어느 정도 예상되는 수치같군.

한편,
'우울과 몽상'님 블로그, '성격자가진단' 에 소개된 테스트.
테스트해보기


AAABA
몸이 머리를 따라주지 못하는 타입 (으악! 역시 스포츠엔 젬병)

▷ 성격

사회의 모범생이라 할 만큼 종합적인 정신력이 높아 누구도 흠잡을 일 없는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타입입니다. 그런 생활 태도 속에서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해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 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생활 태도만 고수하다 보면 한숨을 돌릴 곳이 없어집니다. 낮에는 회사, 밤에는 가정, 휴일에는 사회참여 활동,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력적인 타입이라 해도 어느새 지치고 피로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모두 조금씩 신경을 덜 쓰거나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부분은 아예 과감히 버리도록 합시다.

그밖에 사항(상대방이 이런 타입이라면, 등) 더 보기

 

이것도 짜증나는 성격입니다, 그려.

하지만 이런 테스트 결과들은 너무 단순해서,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내면들을 이런 몇가지의 유형으로만 판별하려하다보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을 것같다는 생각은 드는군요.(이렇게 스테레오타입을 제시하는 것이 부당한 편견을 고착할 수 있다는 얘기.) 위의 유형들과 많은 부분은 유사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어쩌면 더 많은 부분이)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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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일자리 논쟁에 더해서.

체게바라님의 [비정규직 만들자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에 관련된 글.

중요한 쟁점이고 토론 과정이 의미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사실 제가 빈곤, 사회복지나 이쪽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때때로 관심가지는 수준이라서 인식이 그리 구체적이지는 못합니다. 요즘 對국회투쟁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정신없네요, 잠깐 짬내서 씁니다.

체게바라님 글에 트랙백을 건 글이지만, 밑에 댓글 주신 손님분과도 토론입니다.

보육, 간병 등 주체들의 문제제기의 성격

일단, 손님께.
제가 보기에 간병(의료), 보육 등에서 영역을 분명히하라는 요구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현재 진행되는 자활사업 전반이 저임금-불안정노동자를 양산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철폐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조건을 인정한다는 점, 또 한편으로는 △자활사업이 노동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개조되어야한다고 보지만 직접적인 해당분야의 운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에(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조건 등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발언의 당사자들이 아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제까지 논의를 진행하던 맥락에서 보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예상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보육, 간병 등의 일자리를 저임금-불안정노동으로 고착시킬 우려가 다분한 현재의 정책에 대해서 관련주체들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저는 관련주체들이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보육, 간병에 관심가질 주체, 투쟁 당사자도 없을 뿐더러 다른 직종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제가 너무 후하게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현실의 논쟁에서는 그렇게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영역구분' 자체가 그 조직들이 주장하는 핵심은 아닐 듯하여서 말입니다.)

사회단체와 노동조합의 분리가 가지는 문제

다만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사회단체와 노동조합의 일종의 '역할분담'에 대한 비판은 많이 동감합니다. 특히 노조 차원에서는 해당 분야의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중심으로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넘어서야한다고 봅니다.(그러나 이들 주체들은 적어도 '조합원으로 가입한', 혹은 '이미 채용된' 노동자들을 위해서만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아주 편협한 의미에서 실리주의는 넘어서고 있다고 봅니다. 역시 후한 평가인가요? ^^;) 따라서 노조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생산영역의 전화에 대해서, 구체적인 고민을 진행할 필요도 물론 있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형태의 노동조합으로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보다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런 방식으로 조직이 전화될 필요가 있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보육교사회가 보육노조로 전화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을 저는 단순히 기각할 수만은 없다고 보는데, (제 나름대로 거칠게 요약하면) '당사자들의 현실에 노동조건 개선을 병행하지 않고서는 보육 자체를 전화시키는 보육운동도 불가능하다'는, 기존의 보육교사회운동에 대한 평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육을 쟁점으로 하는 일반적인 의미에 '사회운동'을 진행하기에는 보육교사회라는 형태가 어쩌면 더 유효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노동조합 형태로 전화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을 단순히 퇴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조건이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각각의 운동형태/양식이 가지는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냐하는 것이겠죠.
** 여기서 사회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구별이라는 것은 (노동자운동도 사회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매우 부적절하고 맘에 안드는 용법이지만, 편의상 그냥 사용하겠습니다.
 


사회운동의 실천적 무능력에 대한 지적도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역할분담'이 아니라, 운동의 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사회운동-노동자운동 주체들이 '융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각자의 운동이 가진 고유성이 소거될 수는 없겠지만요.)  다만 재생산노동의 사회-국가 책임에 관해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쟁점이 있겠죠. 저는 국가 책임과 동시에 노동자-민중통제를 제기해야한다고 보는데, 이 '국가책임'이라는 것은 저도 여전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공공성이라는 쟁점

이것은 '사회공공성' 담론에 대한 쟁점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사회공공성'이라는 주장이 국가책임만 주장해서는 코포라티즘의 다른 판본이 되기 쉽상일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자-민중통제를 적극적으로 요구해야한다고 봅니다. (이것도 한계적일 수는 있을 것이라 고민입니다.--이 고민이 이 논쟁에 가장 심층의 쟁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 다만, 현실에서는 예를 들어 △ 지자체의 사회복지운영위에 대한 개입, △ 각 사회복지기관('시설'들만이 아니라)에 대한 지역 노동자-빈민의 실질적 통제 등등이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역시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 ^^;;)

여기서 체게바라님의 문제제기와도 연결되는데요,
코포라티즘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빈곤화가 심각하게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세 하에서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기초생존권 보장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것이 저도 고민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사례 ; 민중연합기관(?)

다만, 시사적인 사례로 베네수엘라 사례를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관련된 링크들 (앞의 세개는 NeoScrum님의 블로그, 뒤의 한개는 참세상 기사)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레닌인가?
▷ 바리오 아덴뜨로에 가다
▷ 라 베가 맛보기 - 3
▷ [손호철의 남미이야기](3) - 민중참여모델     
 대안수퍼마켓, 대안학교, 대안방송국... 대중 참여가 혁명 동력
 “혁명을 만드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민중이다”


글 들은 보시면 되겠는데, 핵심적으로는 활동가들이 지역공동체에 들어가서 의료, 교육, 언론(방송), 생산과 유통까지 사업을 하는데, 이런 활동들이 빈곤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존을 가능하도록 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의식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업을 하는 지역적인 민중기관을 창설하는 것이죠. 그 결과로 이러한 사업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공동체가 강화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고 주체화된다는 이야기죠.

차베스 이후에는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혁명은 이들 공동체의 민중들이 스스로 수행한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업단위와 공동체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운영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죠.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다고 해서 운영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런 점에서 저는 이런 모델을 손호철 교수가 '민중참여모델'이라고 보는 것에는 비판적입니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운동의 지향을 더 적합하게 설명할 수 있지요, 참여는 이미 남이 갈아놓은 판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준다는 의미니까말이죠. 게다가 '참여정부'와 '참여연대'까지 연상되는군요.)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으로 지역의 反빈곤운동

베네수엘라의 방식이 남한에서 그대로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방향에 있어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에서 빈곤층의 생존권을 확보하는 사회운동의 방식이란 것이 단지 '생계'를 보완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정한 '자활'이기 위해서는 단어의 의미( "스스로 살아감")이 강한 의미에서 적용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원하는 저임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고 투쟁하는 과정으로 나가야하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생존권을 쟁취"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 빈곤의 원인이 신자유주의일진데 그것을 제거하는 운동없이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장은 재원이 마련되기 때문에 이걸 받아서 사업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 유리하게 판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건 너무 실용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그런 돈을 공짜로 푸는 이유는 없고, 사업적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데, 그것은 이미 누차 지적된 대로 노동연계복지의 고유한 문제점 외에도 이러한 분야에 사적 자본이 진출할 수 있는 시장공간을 창출하고, 인구증가율둔화 속에서 장기적으로 여성노동력을 노동시장에 진출시키는 등의 구체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별 행위자 입장에서는 선의로 사회적 기업을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는 정부가 목적하는 사업계획을 대리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선한 결과까지 담보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자활현장 현실의 어려움을 말씀하신다면 제가 할 말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활기관을 만들고 운영해온 운동들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현실의 프로그램이 이렇게 구성되어야한다는 구체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역에서 빈곤층을 조직하는 운동이 이렇게 되어야하지 않겠냐는 추상적인 의견일 뿐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 '방향'이 어쩌면 결정적일 수도 있지 않냐고 보는 입장인 거죠.

(다만 이런 방향--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의 조직화) 관점--을 전제한다면 어쩌면 학교 청소용역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또다른 의미에서 '실용적으로' 의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청소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고통받는 비정규직노동자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조직하고--실제로 그런 노동자가 되는 것이니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주체로 조직하려는 노력을 병행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조직이 장기적으로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요구를 정부를 상대로 전개해야한다는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또 사회적 기업이라는 조직형태가 이러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지역차원의 사회운동 기관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하기도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그것이 '기업'보다는 '조합'적인 형태라고 하더라도 조합원의 배타적 이해를 위한 것이라면 기업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같습니다. 다만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연합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조직이라면 다른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겠죠.)

차이와 토론

그렇다고 제가 '정책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정책담당자'도 아닐 뿐더러 지역단위의 비정규직 조직사업 담당자거든요.) 다만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른 분들과 다를 수는 있겠죠. 주로 제가 언급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청소용역노동자들, 시설관리노동자들, 민간위탁 환경미화원들, 지자체 상용직, 일용직, 이런 분들이 제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도 강조점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만나는 사람, 관심의 차이로 인한 인식 '차이' 이상으로 토론할 거리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쓰는 건데요, 핵심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정세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시대인식,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사회운동이 대안일 것이라는 점, 이런 원칙들에 입각해서 토론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공유한다면 각각의 상황에서 공통의 인식도 상호교통 속에서 만들어 갈 수 있겠죠.


** 삼성 이야기는 자본측이 이 판에 그런 식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맥락에서 말한 것이니까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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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비정규직을 왜 만들어야하죠?

체게바라님의 [학교 청소사업에 대한 또다른 견해] 에 관련된 글.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고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차원에서 학교 청소용역 관련 내용이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맥락을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런 맥락은 잘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 문제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군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예를 들어 교육부가 예산을 지원한다면, 학교 단위로 지원해서 정규직으로 고용하면 안되는 건가요?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은 (지침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각 개별 학교장을 엉터리로 법적 사용자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교육청이나 교육부가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직접 고용이 되어야겠죠. 교무보조, 과학보조, 조리원 등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실상 교육부/교육청 지침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학교장이 '법적인' 사용자로 되어 있는 바람에 제대로된 노동3권을 보장받고 있지도 못합니다. (교육부나 교육청은 절대로 자신들이 사용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고, 노동위원회도 그렇게 인정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노조 만들면 뭐합니까, 실질적인 사용자들은 나몰라라하고 권한없고 힘없는 학교장 앞에 놓고 교섭하고 하소연해봤자 거든요.(교섭하러가면 학교장이 오히려 노조에 하소연합니다. 자기는 지침대로만 움직이고 권한이 없는데 왜 자기를 괴롭히냐는 거죠, 거참, 사용자의 하소연 듣는 황당한 상황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여기서 간접고용까지 가기 시작하면 그나마 실권없는 학교장마저 자기는 교섭상대가 아니라고 빼겠죠. 우리나라 노동법이 그들 사용자 모두를 노동자들의 교섭요구와 투쟁으로부터 보호해주거든요.

사회적 기업이라고 노동자의 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간접고용 구조 속에서 저임금을 강요하는 사용자로 노동자들은 사회적 기업을 직접 대면하게 될 겁니다. 이것을 자활참여자의 노동권을 박탈한 방식으로 막으려고 하거나 혹은 '선량한 의도'를 앞세워 억누르려고 하면 더 큰 모순이 폭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회복지기관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이 이런 식이죠.)

직접고용과 간접고용(용역)

이런 말도 사실 좀 그렇지만, 비록 비정규직이라도 직접고용과 간접고용의 차이는 큽니다. 최근 투쟁이 터진 대우센터빌딩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상황을 보면, 용역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건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 올라온 이 블로그의 글 몇개를 참고하세요.)

2006.11.25 | 서울시-산하기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릴레이 단식농성 & 대우센터 투쟁

게다가 공공부문에서도 그 차이는 제도적으로 벌어지는 데, 최근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종합대책"(06.8.9)에 따르면 직접고용의 경우 청소, 경비 등의 '단순업무'에 대해서 중기협이 발표하는 '보통인부노임단가'를 기준임금으로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접고용 용역의 경우에는 낙찰률을 87.7%까지 하락시키는 것을 인정하고 있죠. 이것은 임금차이로 직결됩니다.결국 같은 업무라도 공공부문에서 직접고용-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임금차이는 제도적으로 12.3%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문제는 더 있습니다. 임금은 12.3%가 삭감되지만 용역 사업자가 차지할 이윤+일반관리비가 15% 가량 필요하기 때문에 소모품 사용과 인원을 줄이는 방식이 병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부실한 노동조건과 과도한 노동강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당연히 공공부문에서도 사용자들은 간접고용을 선호하죠, 사용자 책임도 면하죠, 돈도 조금 줘도 되죠, 언제든지 업체하고 민법상 계약해지만 하면 자를 수 있죠.


한편,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종합대책"은 그 외에도, 상시업무이지만 기간제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sic!) 사유로 "⑤ 고령자고용촉진법 제2조 제1호의 규정에 의한 고령자를 사용하는 경우, ⑥ 정부의 복지,실업대책 등에 의한 일자리 제공으로 인력을 사용하는 경우"등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기업 일자리는 무한정의 비정규직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적 일자리 방식의 '용역' 고용이 청소하시는 노동자 당사자에게는 어떤 결과를 낳겠습니까?

 

왜 좋은 일하자고 일자리 만든다면서 좋은 일자리 안 만들고 비정규직, 그것도 용역만 만드냐는 겁니다. 그것도 학부모(그러나 빈곤한)일 것이 뻔한 중고령 여성 노동자를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으로 만들면서 말입니다. 좋은 일자리 만들면 더 좋은 일 하는 것같고 기분도 좋을 텐데 말이죠. 흠흠.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기업

그리고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기업이라 해도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적으로는 공공서비스, 사회복지의 확충을 이들 서비스의 사유화를 통해서 민간기업을 육성한다는 구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공공서비스라면 국가가 직접 책임지고 하면 될 것이고, 만약 그것이 관료적으로 통제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의 '운영구조', '지배구조'를 지역의 노동자 민중, 수급자 빈곤층이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개방하면 될 문제입니다. 사회적 기업이니 이런 식으로 사적 자본이 '투자'할 공간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사회운동이 개입하는 방식의 사회복지 서비스 확충이 가능한 방식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건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들이 추진하고 있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분야에 사적 자본의 투자공간을 확충하고, 여성인력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시도들과도 모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은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더 잘 아실 것같으니 생략하죠. 다만 '사회적' 기업이라는 식으로 아무리 '사회'라는 말을 수백번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사적 자본의 투자공간을 여는 맥락일 뿐이라는 겁니다. 삼성 같은 기업이 간병, 보육 등 이런 분야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오래전부터 '사회공헌'을 빙자해서 해오고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씨를 뿌렸으니 이제 수확하려고 하겠죠. 삼성방식으로 말이죠.

관련해서는 아래 글이 참고가 됩니다.
[월간 사회운동 2006년-9월호]

빈곤과 불안정 노동의 악순환 구조를 철폐하자

- 사회적 기업, 사회적 일자리 정책의 위험성


좋은 일자리 만들기

일자리 만들기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일자리 만들어봤자, 이들 업종과 이 업종에 주로 종사하는 주로 저임금에, 주로 여성에, 주로 중고령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항상 그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오히려 같은 일이라도 정규직으로, 제대로된 대우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공공부문에서부터 확인이 되어야 좋은 일자리가 민간부문에서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학자들이 외국 사례를 들어 말하는 것처럼 공공부문이 '모범적 사용자good employer'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쓰다보니 좀 장황하게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보호된 노동시장'이 필요하다면 국가가 '괜찮은 공공부문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게 해야한다는 것이고, 사회운동적인 방식이 되려면 이러한 공공서비스 운영에 지역의 노동자-민중-빈곤층이 사회운동과 함께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을 요구해야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단순하게 처음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청소 노동자들을 굳이 '용역'으로 할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같은 돈 들여서 왜 '용역'으로 씁니까? 그런 용역 받아서 '사회적 기업'의 기반을 만들어봤자, 맨날 그런 일자리만 만들고 다닐 것같습니다.


** 글이 다소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쓰다보니 그냥 글이 나가는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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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Google의 Picasa라는 사진서비스

구글의 Gmail부터 시작해서 데스크탑 검색, 가제트 등 각종 서비스 애용자인데요, 드디어 사진서비스인 Picasa에 도전! 훌륭한 서비스군요. 일단 구글 계정이 있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Picasa 사이트 가기

인터페이스나 이런 건 사실 좀 불편하고, 역시 웹 유저빌리티(Usability) 구성하는 건 남한이 앞선다는 생각은 다시 하게 되는군요.(흠, 한때 IT업체 근무했던 경력으로 평가하기로. ㅋ)

Picasa가 가장 좋은 점은 그림을 쉽게 올릴 수 있고, 250메가 용량을 기본(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이지요. 덕분에 블로그에 사진 올릴 때 어디에 올릴 지 고민하던 저같은 블로거들에게는 좋은 대안이 됩니다.(저같은 경우는 진보넷 멤버 게시판에 하나씩 올렸었더거든요, 사진이 많으면 만만찮은 노가다가 됩니다.) 사진을 올린 담에 웹에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래는 Picasa에 올린 그림으로 붙여본 이미지. (뮤지컬 Miss Saigon 앨범 스캔이지요.)
 
 
흠 잘 올라온 것같군요.

Picasa 프로그램이 사진보정 기능같은 것도 제시하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모로 편리할 듯.

글을 쓰고 나니 구글 서비스 광고처럼 되어버렸군요. -.-;;(전 구글에  인적관계는 없습니다.) 암튼, 블로거들이 사용하는데 편리할 것같으니 참고들 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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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굳이 청소'용역'입니까?

학교 청소, 누가 할 것인가?
[김정명신의 학부모의힘] 청소 경험이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참세상 기사에 대한 트랙백.

학교청소가 힘들고 아이들이 제대로 하지도 못하니 '청소용역'을 주어야한다는 주장글이다.

그런데 하필 청소'용역'인가? 청소는 직접고용된 정규직 노동자가 하면 안되나? 왜 비정규직이 대명사이고 가장 취약한 고용형태, 간접고용인 '용역'일까?

우리나라 노동시장 구조에서 이 분야에 일자리를 만든다면 대부분 나이드신 중고령 여성분들이 하게 되실 것이 뻔하다. 근데 이게 왜 '용역'이라야 되냐는 것이다.

이미 학교 현장에서는 정규직 교사와 행정실장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가 비정규직이다. 사무업무는 교무'보조', 수업준비 관련 업무는 전산'보조', 실헙'보조' 등, 반드시 필요한 업무들이 모조리 '보조'라고 규정되고 주로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다. 어린이들 밥하는 중요한 급식 일도 모조리 비정규직 여성이 한다. 그밖에 남성이 좀 있는 경비같은 업무도 모두 비정규직인 건 물론이다. 도대체 이 따위로 운영되는 학교들에 청소업무를 그나마 이제까지 학교비정규직의 주요형태였던 직접고용도 아니고 '용역'이라니!

학교 청소에 학부모를 동원하는 건 적절치 않다. 아이들에게도 벅찬일일 수 있다.(교육적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소중한 일이라면 그에 걸맞는 일자리라야한다.

청소같은 비숙련 일자리(알고보면 비숙련도 아니지만) 일들은 당연히 비정규직에 용역을 써야하는 것처럼 인식이 만연되어 있다. 참세상 기사에서까지 청소'용역'을 도입하자는 글을 보니 갑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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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로, 둥글게.

지난 주말 한나절은 인기리에 방송중인 '케로로 중사'를 인터넷으로 다운받아서 한참을 봤다.

시간을 웃으면서 때우고 싶을 때 케로로는 최고의 프로그램.

 

잘 모르시는 분은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하시고 : 개구리 중사 케로로

(솔직히 아직도 케로로를 모른다면 좀 그렇잖아 ㅋ 초히트대박애니메이션! 물론 침략과 군국주의를 희화화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는 일단 재미로 보자.)

 

케로로 소대에는 다섯 캐렉터가 있는데, 그 중에 도로로라는 친구가 있다.(가운데가 케로로, 오른쪽 끝이 도로로)

 

이 극장판 DVD의 소개에 따르면

 

도로로 병장
  마음 착한 우주 닌자
  케로로 소대의 조언역
  단 존재감이 너무 없어
  그 조언이 통과되는 법은 없다

 

흠흠. 슬픈 일이군. (심지어 네이버에 '케로로'를 검색해도 첫화면에 나머지 넷은 나오지만 도로로는 나오지 않는다. 너무들 하네.)

 

하지만, 도로로가 등장하는 모습을 본다면 매력적일 수밖에. (나만 그런가?)

(아래는 극장판에서 등장장면.  TV판에서는 13화에 처음 등장한다. TV판의 등장도 범상치 않다. 물론 등장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수난. ─_─;)

 

 

 

 

 

 

 

 

 

위의 장면은 뭐 이런 스토리다. (우주선이 추락하는데) 꽃 한송이를을 구하기 위해서 칼을 쓰는.

(동영상을 편집할 줄 몰라서 그림 캡쳐로다가 넣다보니 길어졌군 ^^;;) 

 

이 장면이나 이 캐렉터를 보면서 이상은의 '둥글게'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흠.. 뭐, 안 어울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내용은 무척 비슷하잖아?) 노래는 인터넷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으니 생략(하려고 하다가 대신 노래가 실린 포스트를 링크)

 

가사 한 부분이 이렇기 때문이다.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던 너와
부딪혔어
함께 웃음이 나왔어
하늘이 투명해서
너도 빛났지

2절의 앞부분. 사실 노래 전체가 한 구절에선 순간 멍하게 아름다운 곡이다.

<전체 가사 보기 & 노래듣기 링크, 노래를 BGM으로 깔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 ^^;> 


(이상은은 이 노래가 실린 Romantopia 앨범을 내기 얼마전부터 연애를 한다고 한다. 덕분에 이런 노래가 나온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 노래의 아래 구절을 보면 사회운동 활동가하고 사귀는 게 아닌가 싶기도. 믿거나 말거나.

작은 꿈을 꾸는 / 사람들을 /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해(둥글게)

이 노래 가사를 봐도 그렇고.

어떤 사람이 되야할까/힘없는 사람들을/도와야 하는 걸까/지금 네가/그런 일 하고 있으니(돌고래자리) )

 

'도로로'나 '둥글게'나 어감도, 다소 생뚱맞지만 느낌도 비슷.

그런 이유들 때문에, 도로로가 슬프다기 보다는('존재감'은 없지만 나름 멋지다 ㅎ) 어쩌면 도로로가 떠올리게 하는 것이 슬픈 일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래도 멋진 도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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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새벽'의 공연실황

정말, 어머나!라고 할 수밖에.

오랜만에 들린 밥자유평등평화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있었으니(사실 예전에 올라왔었는데 그냥 지나쳤다고 하는게 맞겠지) 어떤 블로그 포스트의 주소였다.

augenauf님의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augenauf

그곳에 '새벽'의 공연실황과 공연을 준비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 오른쪽에 있는 블로그 메뉴를 보시라) 꼭 가보려고 했지만 이래저래하다 결국 가보지 못해 무척 아쉬웠던 '새벽' 공연.

그러니,
정말, 어머나!라고 할 수밖에.

http://member.jinbo.net/maybbs/pds/rudnf/pds/sae1.gif
△ 사진은 위의 블로그에 실린 공연실황

공연실황 노래들이 모두 올라와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이 실린 포스트에 올라온 노래.

역시, 이 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 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http://blog.naver.com/augenauf/30004596821

밥자유평등평화가 소개해준 또 하나의 노래.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김은채 시/ 김현종 곡 / 윤선애 노래
 
아무말도 말아요 지나간 일이라면
수많은 이야기 속에 오해가 너무 많은 걸요
물어보지 말아요 지나간 일이라면
무슨 대답으로도 진심을 전할 수 없어
그냥 가슴 속에 묻어요 하고 싶던 그 말들도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흩어져간 기억들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그땐 나를 안아줘요
오늘 차마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 대신
 
돌아보지 말아요 멀어진 사람이면
웃으며 떠나갔지만 아직도 울고 있을 걸요
기다리지 말아요 멀어진 사람이면
어리석은 그리움 미움이 되어 가겠죠
그냥 가슴 속에 묻어요 하고 싶던 그 말들도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흩어져간 기억들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그땐 나를 안아줘요
오늘차마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 대신
 
http://blog.naver.com/augenauf/30006079885
 
이제는 새벽, 그/녀들이 이제 40대여서 였을까, 노래는 더 쓸쓸해. 하지만 더 성찰적이지.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난 아직 30대라는 느낌이 다시 들었다. 공감하지만 그만큼의 거리와 거리, 쓸쓸함.
그럼 나이 마흔에 우린...?

나이 서른에 우리가 어떨지 몰랐던 것처럼 정말 알 수 없는 일.
 
사랑노래2

김정환 시 /성임숙 곡

눈이 내린다 거세게, 내 뺨에 부딪치지 않고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지워질 듯, 도시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바깥은 이별보다 가깝다 사랑이여, 눈은 눈보다 가깝다, 육체여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과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부츠
눈이 내린다 무너질 듯, 내 몸을 파묻지 않고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말살하듯, 네 육체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http://blog.naver.com/augenauf/30004546592

김정환의 이 시를 <김정환시집 1980~1999>에서 한참 찾다가 인터넷에서 결국 찾고 말았다.(역시 구글!) 이 시는  시집 <해가 뜨다>, 2000에 실렸던 것이다. 그러니, ~1999에는 없을 수밖에. 김정환 시인은 '사랑노래'를 참 많이 쓰기도 했다.(시집1980~1999까지만 하더라도 '사랑노래'로 제목붙고 번호나 부제 붙은 작품이 서른 개에 이른다.)

그 눈 바깥에, 네가 있는 걸까, 내가 있는 걸까.

...

아, 그리고 노래모임 '새벽'은 이런 곳이었구나.
http://blog.naver.com/augenauf/30004102839
이 노래들로 현장을 만나고 노래로 교통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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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A Short Film About Love, Kroki Film O Milosci, 1988)


폴란드 감독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이름이 어렵기도 하지)의 1988년 영화. 83분의 상영시간으로 짧지만은 않다. 영화 공유 사이트에 추천영화로 올라와 있더군.

http://imgmovie.naver.com/mdi/mi/0175/A7502-01.jpg 그림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에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요약하면.

연하의 남자와 연상의 여자.(위에 포스터에 나오는 남녀.) 남자는 여자를 훔쳐만보다가 어느날 대화한다. 남자는 '사랑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여자는 '사랑'이란 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끝?
 
아니, 그 담에,
남자는 손목을 긋는다. 여자는 사랑은 있거나/혹은 있었다는 것을 동시에/혹은 사후적으로 알게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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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살려주세요!

민주노총의 대시민 유인물인데, 제목이 보는 것처럼 '살려주세요'

 

 

물론 어린이가 파도 앞에서 하는 말인거 같기는 한데.. 내가 보기에는 민주노총이 시민들에게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민주노총 슈퍼맨'에게 어린이가 외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만도 한데 말이지. 왠지.)

 

뭐 선전물 카피 하나가지고 또 트집잡는다 하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카피보다도, 이것이 현재 민주노총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같다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총파업 조직화도, 대정부 교섭도 안되고 되는 것이 없는 마당이니 '살려주세요' 할만 한 건가.

 

그리고, 아..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긍지와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 싶다. 이제는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지 못하고 '살려주세요'라니.

보고 있는 내가 다 비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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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작년 공공연맹 안에서 비정규직 조직화/투쟁 과정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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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공공부문에서도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요즘 2005년 공공연맹 사업평가를 진행하는 중이다. 평가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치열하게 진행된 투쟁의 상당수가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굳이 2005년에 전면화된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투쟁이 지속적으로 침체되고 있으며,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투쟁은 장기화되는 경향이 더 뚜렷해졌다. 이런 점은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공세가 대규모 공기업 자체의 전면적인 사유화보다는 이른바 ‘핵심-비핵심 업무의 분할’, ‘비핵심 업무’에 대한 위임위탁 활성화 등을 통해서 진행되는 정세와도 관련되어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맞선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의 투쟁이 다소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전선은 훨씬 분산되어 있고, 정부와 자본이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용이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햇수로 3년째를 맞는 경마진흥노조의 투쟁부터, 해고투쟁 1년이 다가오는 대경공공서비스노조 칠곡환경지회 투쟁, 200여일을 넘기면서 이제 마무리된 시설노조 코펙지부 투쟁 등 장기투쟁 사업장들이 많다. 현대기림지회, 경찰고용직공무원노조, 경기도노조 안양지부, 서울시설환경노조 성북태한지부, 학교비정규직노조, 건설엔지니어링노조 건축사협회지부, 세종문화회관지부 등 예술노조의 각 사업장 투쟁, 새마을호/KTX 승무원 투쟁도 장기간 진행되었거나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밖에도 상애원, 정립회관 등 사회복지기관의 투쟁은 전면적인 파업이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일상적인 탄압과 투쟁이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지난 연말 64일간의 파업을 끝내고 다음 투쟁을 기약하면서 현장에 복귀한 산업인력공단비정규직노조는 상대적으로 많은 성과를 남긴 셈이다.


투쟁의 이러한 장기화에는 공공서비스 업무의 민간위탁 등을 통한 간접고용화와 이 과정에서 공공서비스 업무를 중소영세 민간자본이 수탁하는 사정이 연관되어 있다. 공공부문의 중소영세 사업장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민간위탁 사업장으로 간접고용인 상황이다보니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이 되고 장기투쟁으로 연결된다. 고용형태가 형식적으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문제보다도 민간위탁, 외주화의 확산을 통해 다각적인 방식의 노동의 불안정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2005년을 돌아보면 이런 장기간, 전투적으로 진행된 투쟁들은 공동의 의제를 제기하거나 연대투쟁 전선을 형성하는 데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투쟁들이 한 개의 산별연맹 소속이고, 상당부분 공동의 쟁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지역적으로도 가까운 경우가 있지만 개별화되는 경향이 있다. 공공연맹 수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도 실태조사, 정책과제 제기 등 추상적인 수준의 사업과 구체적인 사업장 투쟁 지원이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했다. 사업장의 분산성이 제조업보다 심하고 연대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점, 연맹차원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정부요구를 구호,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대투쟁으로 조직하고 있지 못한 등의 한계가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투쟁사업장 간의 연대는 물론,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에 책임있게 연대하거나 조직하는 활동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지방본부를 중심으로 한 철도노조 동지의 활발한 활동과 정보통신노조의 시도 정도를 제외하면 비정규직 조직화, 투쟁에 정규직 노조가 자기 문제로 결합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력기술(KOPEC), 인천지하철에서는 시설관리노동자들이 시설노조에, 대구지하철에서는 정비용역노동자들이 대경공공서비스노조에 가입하는 등, 연맹 내에서조차 비정규직 산별노조가 조직화를 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동차산업 대공장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과도 유사한 상황이지만, 논쟁보다는 오히려 무관심이 특징적이다.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풀어가려는 운동적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 논의에 있어서도 비정규직 조직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금속산업 부문보다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논의가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정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고민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계급적 연대를 위한 산별노조 건설의 원칙은 추상적으로만 확인될 뿐이고, 구체적인 쟁점에 들어가면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자기 (정규직) 노조의 당면한 이해를 우선하는 입장이 더 자주 드러난다. 정규직 노조들이 가지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비정규직 노조들끼리 독자적인 조직전망을 논의하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근래 가장 급속하게 신규조직화된 지자체 직간접 고용 비정규직의 경우 독자적인 전국적 규모의 산별노조로 결집하려는 시도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공공연맹은 정규직 조직까지 함께 하는 산별노조, 더 열악한 하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산별노조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고는 있지만, 현재와 같은 논쟁 지형에서 ‘같이 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는 제안의 설득력은 점점 더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건설을 중심으로, 아직 많은 한계가 있지만 지역차원의 비정규직 연대의 수준을 좀 더 높여낸 것이 성과라면 가장 큰 성과다. 3개 지역에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를 건설하고 지역차원의 산별적인 조직화를 시작하고 있다. 공공연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롭고 귀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민주노총의 50억 기금 사업의 지체에 따라 후속 지원이 중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에 대한 지속적이고 책임있는 지원이 없이는 곧장 조직적 침체,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1회성 사업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차고 넘치는 추상적인 논의 속에서 정작 구체적인 연대를 실현하고 전선을 모아내기 위한 노력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공부문 노조운동의 얕은 활동가층의 문제부터, 활동가들 사이에 논쟁이 부족한 것이 또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다. 건강한 정규직 활동가들도 비정규직 활동가들과 논쟁할 수 있는 기회도 접점도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좀 더 많은 논쟁이, 활동가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논란이 발생하고 더 시끄럽게 쟁점에 대해서 토론하는 과정 없이는 개별 사업장의 고립된 투쟁, 정규직 노조의 무관심, 겉도는 연맹사업과 같은 상황이 2006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종류의 교훈이라기보다는 고민의 항목들이 더 늘어간 2005년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난점, 한계들에 직면했을 뿐아니라 그것을 만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들이 난점과 한계로만 기억되지 않고 건강한 공동의 논쟁으로 활성화될 때, 운동이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공공부문에서는 아직, 우리가 마주친 난점들이 기억되지 않고, 고민들이 제대로 논쟁되지 않는 것이 우리 한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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