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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

내가 밑에 포스트 <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에서 언급했던 가족 내  불평등 호칭 바꾸기 켐페인이 있습니다.


아래 <조선일보의 여성혐오>라는 포스트에서 언급한 조선일보 등의 기사가 나간 이후에 켐페인 홈페이지가 난리입니다. '분노한 남성'들이 몰려왔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상상들이 되실 겁니다.

그래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 차원에서 게시판에 글을 썼는데, 아래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



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

이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서 남성으로서 한편으로 (익숙하게 보아온 광경이면서도) 다시 한 번 놀라기도 하고 답답한 느낌이다. 여성에게 차별적인 호칭을 바꾸자고 시작한, 그것도 "여성이 여성에게 쓰는 호칭"을 여성들 스스로 바꾸자고 제안한 이 켐페인에 오히려 남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로 그런 남성들에게 같은 남성으로서 같이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고, 몇몇 주장들은 호칭의 언어학적 기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밝히는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아냥, 조롱, 분노를 담은 글이다. 일부는 성폭력적인 글도 있다. 이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그래서 '남성들의 분노'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어원 등에 대한 의견이 다르면 그냥 깔끔하게 그에 대한 입장만 밝히면 될 일이다.) 여성민우회는 남성들의 분노를 촉발시킬 만한 일을 한 것일까? 성평등한 호칭을 쓰자는 주장이 왜 남성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일까?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들도 많겠지만, 주로 남성들의 사고가 여성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평등은 남성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와 같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상징들은 물질적인 힘을 갖고, 언어의 평등은 관계의 평등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상징들 속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들은 '왜 경제도 어려운데 호칭 따위를 갖고 '국론'을 분열시키냐"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진정으로 호칭과 상징이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게시판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논쟁에 '경제'와 '국론분열'이라니, 히틀러와 스탈린도 혀를 내두를 전체주의 사회가 따로없다.)
 
이 켐페인에서 여성들의 주장은 우리 언어 속에 내재되어 있고, 따라서 여전히 상징으로 작동하고 우리 행동에 영향을 주는 호칭들을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적극적인 대체 호칭을 제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열어두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성적 편견,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스스로 반성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을 부정하고 눈을 감는 순간 자기반성이란 불가능하며, 자신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주는 호칭과 상징에 대한 비판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타인과의 열린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게시판에서, 어쩌면 자신들과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열을 올리는 남성들을 보자면, 같은 남성으로서 씁쓸해진다. 이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차별에 대해서 눈을 감고, 적극적으로 부정할 뿐더러(이렇게 하려면 세상을 자신의 관념에 따라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야하는데, 그 개인들에게도 슬픈일이다), 성적 차별을 상징적인 수준에서부터라도 해결하자고 하는 여성들의 노력을 마치 자신의 권리에 대한 침해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남의 권리를 억압할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그에 따라 권리를 갖고 있다. 호칭에 있어서도 차별적인 언어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 수천년 동안 (아마 수억명은 될) 여성들이 받았을, 이 호칭에 내재된 차별과 멸시로 인해 받았을 정신적 상처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따라서 여성들이 호칭에서조차 평등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든, 그것은 여성들의 권리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의바른 토론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남성들이 고려했으면 하는 것은,(나 자신도 남성으로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는 어떤 행위는 아니라는 점이다. 양성이 호혜-평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때, 남성도 자신에게 부과된 억압을 깨고 권리를 찾을 수 있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부과하는 전쟁과 폭력의 의무(우리 모두에게 군대는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가. 나도 30대 중반의 남성으로 철원 6사단에서 화기중대 보병으로 26개월을 복무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처럼, 말로는 뭐라 하더라도 자신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런 폭력의 경험이다. 군대를 찬양하는 친구 중에도 군대 다시 가겠다고 하는 녀석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를 져야하고, 뼈골빠지게 생계부양자라는 의무를 져야한다. 가족의 대소사에서 부담되는 '어른'노릇, '남자'노릇을 해야하고, 또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정확하게는 결혼한 여성에게 '아들'을 강요하는 끔찍한 역할이다.) 도대체 이런 양성 차별과 억압 속에서 부여되는 남성으로서의 권리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호혜평등한 관계를 서로 편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알량하고 사소한,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 얻는 남성들의 '기득권'은 버리는 것이 속편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여성-남성의 권리를 제로섬게임인 것처럼 만든 데에는 군가산점 논쟁과 같은 것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하는 것이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권리를 상호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운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쟁점들, 그리고 남녀관계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양성의 권리는 서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호칭 문제로 촉발된 게시판 논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성민우회라는 단체, 혹은 다른 여성단체들도 이런 호칭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테니, '왜 호칭만 갖고 시비냐, 딴거나 해라'라는 말씀들은 그만하시길. (물론 그들이 언제나 옳다는 것은 아니며, 여성가족부의 '연말회식켐페인'처럼 진짜 뻘짓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호칭의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들이 수천년간 받아온 멸시와 상처를 치유하자는 제안이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은 언제나 가하는 자들은 직접 느끼지 못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물론 폭력을 가하는 자들도 무의식과 영혼에 상처를 받고 인간성을 점차 상실해가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도 성차별 구조의 희생자라고 말했다.) 이 켐페인은 그런 상처를 여성들이 서로 치유하기 위한 '그녀들의 일'이니 당신들과 나 같은 남성들은 그냥 좀 지켜보자. 여성들의 자기치유에 조차 욕설과 성폭력 언어를 가하는 잔인함이 당신들은 즐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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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여성혐오

조선일보의 패악질을 보려면 포탈사이트 뉴스가 적당하다.(포탈사이트의 뉴스메뉴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다른 신문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에 검색된 사회>여성 페이지.
여러 기사 중에서 조선일보 기사만 골라보자.

(1)"며느리·올케는 여성비하적 표현"…여성민우회 캠페인 논란
(2) 20~30대 여성 55% “난 페미니스트 아니다”
(3)여성운동, ‘거리’에서 ‘일상’ 속으로
(4)"여성부 폐지하라" 네티즌 서명운동에 관련사이트 다운

뭐 이런 것들이 있나 싶다. 단연 돋보이게도, 올라오는 족족 이런 기사.


(1)의 경우에는 내가 밑에 포스트 <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에 서 링크했던 호칭바꾸기 켐페인(호락호락)에 대한 기사. 다른 언론들은 '이런 켐페인도 하더라', 혹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거리가 되네', 이런 기조인데 반해서 조선일보는 "정말 먹고 살기 편해져서 할 짓 없는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닌 것에 신경 쓰는 걸로 밖에 안보인다"라는 악플을 당당하게 기사에 실으면서 '논란'이라고 한다.

(2)의 경우, 여성들조차 페미니즘을 거부한다는 식의 주장. 여성들이 사회적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갖고 있나를 보기 보다는 "페미"라는 딱지붙이기를 시도하고, 이걸 거부하게 만드는 교묘한 기술. 역시 조선일보.

(3) 페미니즘의 위기 어쩌구하면서, '포스트페미니즘'을 소개한다.(조선일보, 니들이 페미니즘의 위기를 알아?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야기하면서 각종 포스트주의 선전하던 행태가 생각난다.) 권력에 관심 안 갖고, "늘어난 고무줄 치마로 숄더백 만드는 법" 나누는 것이 페미니즘이 할 일이라는 말씀.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역시 조선일보의 논지는, 그러니 "너희 여성들은 집안으로 들어가라"는 얘기다. 조선일보의 공포가 드러나는데, 그놈들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든 마초들의 배타적인 권력을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한다는 데 견딜수 없어 하는 것이다.

(4) 뭐, 얘기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 조선일보 전체가 완전히 여성혐오주의자(misogynist )라는 걸 고백한다. "감히" 정부 부처에 "여성"부라니!, 뭐 이런 욕지거리.

마지막 사례와 같은 경우에 조선일보는 '여성가족부'라는 풀네임을 쓰진 않는다. "여성부"라고만 표현한다. 영리하다. 한편으로 이들은 여성혐오주의자들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처녀)/창녀" 이분법에 빠져 있는데, 이들이 보기에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은 도저히 자기 머리로는 사고가 불가능한 개념이 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두뇌에서 언어형태로 처리가 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라는 부처 명이 조선일보 기자들의 골통을 괴롭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도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라는 부처명 자체가 여성문제,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완전히 왜곡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와는 다른 이유에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조롱조의 기사의 원인이 된 사건이 "연말 회식 후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회식비를 주겠다"는 여성가족부의 ─내가 봐도─황당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에 대해서 네티즌들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를 공격한다는 것인데, 거참,참,참,참!

관련해서 여성가족부의 행태를, 마초적이지 않은 시각에서 비판한 기사도 있다. 여성가족부도 조선일보 못지 않게 한가닥 한다. 성매매 문제에 대한 여성가족부와 주류여성운동의 입장이 가진 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정말 너무들 하시네.
‘방지’ 안된 여성부 성매매방지 ‘폭탄광고’
튀는 방식 선호 이벤트 번번이 말썽


한편, 조선일보의 이런 패악질은 증상으로서 '여성혐오'(Misogyny)라고 볼 수 있겠다.
여 성운동의 '성주류화전략'에 대한 우익적인, 마초적인 비판인 셈이다. (뭐, '비판'이라기 보다는 거의 정신병이지만.) 이들 사회적 위기에 대해서 여성혐오를 처방으로 제시한다. '여성들이 깝치기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자세는 박근혜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조선일보가 왜 그런지를 최보은─대선에서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프리미어>편집장─씨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노동자 혐오, 이주노동자 혐오도 곁들여져있고 분리될 수 없다.

놈들이 노리는 효과는 위에 (1)번 기사에 이른바 "네티즌 의견"이라는 댓글로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굳이 찾아가서 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좋다.)

성주류화전략이 여성문제를 해결할수 없어보이지만, 조선일보는 이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을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비방에 활용하는 셈이다. 주류여성운동과 여성가족부와도 논쟁해야할 여성운동의 건강한 내부 토론과 발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는 더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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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

재밋다는 이야기만 듣다가 이번 연휴기간에야 본 영화. 2003년에 나왔으니 꽤 됐다. 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

줄거리나 영화소개는 여기저기 많고, 이미 본 사람들도 많을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궁금한 분은 포탈사이트 영화정보를 검색해보면 될 일이다.
다만, "가짜"교사 듀이 핀(잭 블랙)이 범생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밴드를 만들고 아이들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재능들을 발견할 뿐더러, 멋진 공연까지 한다는 내용.

영화를 보고 나니, 얼마전에 후배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숨어있는 재능이 무언가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과 기대가 다시 떠올랐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http://member.jinbo.net/~rudnf/blog/s_sor.jpg
△ 공연장면, 1등은 못했지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politically correct한 결론까지.

영화 중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밴드의 이름을 학생들이 제안하는 장면.

스쿨 오브 락
락의 학교라...
세상에 락을 가르치는 거야
멈출 수는 없어!

그렇다. 락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한다. 이에 더해서 자기들끼리 지지고볶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가르칠 수 있는 학교.(제도화된 '학교'가 아니라.) 이 학교는 제도화된 공간으로서 학교가 아니라, 그것에 독립해서 교사와 학생이 스스로 만든 학교다. 어떤 제도라기 보다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학교. 교사는 학생의 작곡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학생들은 스스로 배워간다. 지적 위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평등한 '밴드'를 구성하는 것이 목적인 학교. 서로의 노래를 연주해주는 우애로운 관계.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내용을 '세상에' 가르칠 수 있는 학교.

(아무래도 교사인 '듀이 핀'의 이름은 존 듀이에게서 빌려온 듯. 하지만 이것은 듀이의 교육철학이 '주류'라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학교제도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는 듀이보다 더 많은 시사점이 있는 것같다.)

(듀이;교사) 좋아, 모두 연주 준비
(잭:학생) 뭐 하시는 거예요?
(듀이;교사)네 노래를 배울 거야
(잭:학생) 왜요?
(듀이;교사) 원래 밴드는 그래, 서로의 노래를 연주해주지

마찬가지로 영화가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지만 클래식 음악을 배울 수도 있어야하는 것.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고급 사립 초등학교가 아니고선 오히려 클래식을 배울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하지만 배우지 못한 것들의 더 많은 항목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떠오른 것은 콜론타이의 '사랑의 학교'라는 개념.
콜론타이는 경제적 관계의 변혁과 마찬가지로 성적 관계의 변혁에도 '사랑의 학교'라는 이행기가 요구된다고 보았다. 사랑의 학교를 통해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더 이상 사랑을 삶의 본질로서 간주되지 않게 될 것이다.
- 「1세대 페미니즘」, 이미경,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 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中

여성에게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로 필요할 이러한 '학교'는 시민들이 알고 익혀야(學習)할 것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제도적이고 비제도적인 기관들 혹은 과정들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교사-학생의 자발적인 실천의 형태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 실천들 속에서 이렇게 서로 격려할 수 있겠지. 단순히 가르치고 결과를 알아서하라는 제도화된 '학교'가 아니라, 그것은 교사-학생의 구별을 폐지하는 과정이자, 무엇보다 그/녀들 공동의 실천이기 때문에. (공연에 나서기 직전에 듀이 핀의 대사.)

너희는 열심히 했어
모두가 무척 자랑스럽다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내자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위엄만은 잃지 말자
손에는 기타 심장에는 락을!
락을 하는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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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보니, 이런 조회수가 " 총방문자수 33333명"이군! 오호, 3이 다섯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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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연말이라 이런저런 송년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자리에서 여성단체 상근하는 동기도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송년 번개 자리.

 

편한 술자리이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여성'(類로서의 여성이나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나)에 대해서나 '여성문제'에 대해서 정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역시 이걸 확인한 자리. 특히 몇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별칭 부르기 운동

 

이건 딱히 여성문제라고 보긴 힘든 것이지만, 이야기하는 중에 운동단체 안에서 별칭부르기와 관련된 화제가 있었습니다. 전 이제까지 이런 별칭부르기가 그냥 일부 단체들 안에서 '재미있는 대안문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더군요. 잘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름(별칭)을 자신과 동료들이 정하는 과정도 그렇고, 호칭에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더군요. 직책과 나이를 떠나서 단체 안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를 호칭 속에서 만들어간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별칭부르기는 나이에 따라 존대말을 쓰는 관행을 폐지하는 것과 병행되는 데, 적극적으로 나이에 따른 위계를 폐지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노조와 같은 조직에서는 <담당--차장-부장-국장-실장-임원 >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위계가 호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호칭 자체가 위계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호칭에 반대하는 한 동료를 함께 놀려먹었던 우리 사무실 분위기,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관료적 위계는 활동가 사이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위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과 '동등'해지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규노조 교육을 하면서 항상 위원장, 혹은 지부장을 호칭 속에서나 다른 대우에서 존대해야 사측이 노조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교육을 해왔습니다. 위원장이나 지부장은 사장, 기관장과 동급이라는 인상을 주어야한다는 것이죠. 저도 이렇게 교육을 해왔습니다만, 별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노조를 구성하는 동지들간에 호혜-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존에 자본이 부여한 관계방식(위계와 복종)과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는 않은지하는 것이죠. 사장, 기관장과 동등해지기 전에 조합원들 상호가 동등해져야하는 것은 아닌가.

 

노조가 조직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적인 유용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본이 부여한 위계가 판을 치고 있고 그것에 노동자들도 익숙한 상황도 있지요. 게다가 노조같은 경우에는 대중기관이라는 점에서 별칭을 쓰게 되면, 조직운영에 있어서 노조가 책임지는 대중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를 호칭이 반영하고 호칭이 다시 관계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에 맞게 그것을 개조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과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라도, 현재의 것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다면 방법은 없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노조 등의 대중조직이 적극적으로 운동의 하나로 수용하면서 운동조직을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요?  현존하는 대중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수용-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동조직이 적극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으로서 말이죠. 사회운동단체에서 시작해 대중조직으로 확산되면서 조직문화를 바꾸어왔던 이제까지의 많은 시도들을 생각해보면, 의지가 있다면 방법이 없을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동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행'이 지나는 중이라는.. ─_─;; 암튼 '유행'은 아니어야할 것같네요.)

 

(다만 나이를 전제하지 않고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에게 상호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는 더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교사)와는 관계가 친근하더라도 존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지적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존경과 존중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폐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같은 곳에서는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기도 한데, 서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적 관계가 증발된 너무 메마른 호칭으로 느껴집니다. 결국 나이, 직책의 위계가 아니라, 호혜-평등하고 우애로운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이 관계의 무정부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어야할 듯.)

 

그리고 이런 호칭 문제는 가족 안에서도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익숙하게 쓰여지는 가족관계의 호칭들, 형수, 올케, 며느리 등등 주로 여성과 관련해서 쓰여지는 호칭에 문제가 많더군요. 예를 들어 '올케'는 '오라비의 겨집'이라는 것이 어원이고,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딸려 더부살이 하는 이'라는 식으로 편견이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점 놀랍습니다. '집사람', '아내'와 같은 호칭이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부인'이라는 낱말도 문제가 있군요.(놀라움의 연속! 한편으로는 그럼 뭘로 칭해야하는지 오리무중.) 그래서 호칭을 변혁하는 문제, 대안을 만들어가는 문제가 가족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

 

이런 호칭들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여성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켐페인입니다.

 

열악한 여성노동권

 

상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이야기들도 다소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이유로 여성이 당연퇴직하도록 공공연하게 강요하는 회사가 많다는 겁니다. 잘 알려진 어느 유명 제약회사는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퇴사하게 하는 데, 이런 식으로 매년 엄청난 여성이 강제로 해고된다는 것이죠. 또 다른 어느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결혼을 이유로 하는 퇴직에 대해서 어쩌겠냐하는 반응이라고 하고 말이죠. 마치 80년대에 여성에 대해서 25세 정년 폐지 투쟁을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아직도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것들을 여전히 '체념'하고 그만둔다는 것이고 싸울 엄두를 두지 못한다는 것. 상담을 했던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국 사측의 회유, 압력이나 가족의 만류에 의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적절하게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고 싸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특히 이런 종류의 상담이 노조보다는 여성단체에 가는 것같은데, 이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신뢰가 가는 집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에 놀랐던 이유가, 노조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런 일에 분노하고 뭔가 해보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텐데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 나서기 힘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나서려고 해도 노조가 적절한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한편, 제가 아래에 썼던 "우리은행, 그게 과연 '정규직화'일까"라는 포스트에서 주류여성운동들에 대해서 비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연, 여노회 등이 우리은행의 조치가 가진 여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환영을 표하는 데 대해서 여성단체로서의 역할이라도 충실히하라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성단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여성민우회같은 경우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성명]우리은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박수는 시기상조) 싸잡아서 여성단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되었다면 사과할 일입니다.

 

은폐와 부풀리기

 

마지막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노조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은폐와 부풀리기'라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조직 내에서 발생한 문제인 경우에는 '은폐', 자본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정파와 관련된 경우 '부풀리기'.

어느 경우에나 다른 조건에 대한 종속변수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이 투쟁 중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해당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폭로'하고 '활용'하는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 그것이 투쟁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으로 제기된다고 해도 여전히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점. 특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은폐'하기 쉽상인 노조들이 말입니다. 이런 운동구조 속에 있는 저도 뭐라 말하기 힘든 일인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죠. 어려운 문제입니다.

 

매번의 사건들이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하나의 경향으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일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폭력 문제를 노조 내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제기하는 일들을 보면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이번에는) 다른 또 한번조차도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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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끝나고 집에 오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는)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나가야할 문제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지속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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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 4연맹 통합대회 유회 & 운수노동자의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

풀소리님의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잔치] 에 관련된 글.

4연맹 통합대회 유회, 이해하기 힘든 통합논의 과정

공공-운수 4연맹 통합대회는 어제(26일), 5시반 정도에 시작해서 8시 정도, 두시간 반만에 정족수 부족으로 유회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유회 사태에 대해서, 여러가지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대의원들이 많이 안오고 일찍갔다'는 식의 일반적인 문제제기는 별로 적당치 않다고 봅니다. 논의하는 과정 자체, 최종적으로 통합을 하자고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파행적이고 졸속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에 풀소리님이 포스트에 쓴 것과 같이 말이죠.

지난 주말 통합이 무산되었다는 판단 이후에도, 연휴기간인 23,24,25일에도 계속 재논의가 반복되었을 뿐더러 최종적으로 하루를 남기고 심야에 '결국 통합' 결정이 이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계속 엎치락 뒤치락하는 과정에서 대중적 공유는 물론 간부들 사이에도 엄청난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조직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닌데 너무한다 싶었던 과정이었죠.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그랬으니 실제로 논의를 진행하신 동지들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결국, 투쟁을 통해 조직을 건설하지는 못할 망정, 논의라도 제대로 해야하는데 그 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이러니 상층논의, 일정박기식 조직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요. 통합대회에서 질의, 의견을 퍼부은 대의원동지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특히나' 이런 상황이었으니 발언을 자제하라는 의장의 발언에 대해서 발끈하는 대의원의 항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조직의 의결단위의 핵심인 대의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결이 제대로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공공연맹은 1월10일경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통합방침을 재확인하며, 중집을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운영하기로 했습니다.(중집위원회 결정) 아마 민주노총 선거 등의 일정을 고려해서 통합대회는 1월 중하순(17일?)에 다시 열리게 되겠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중적 공유, 토론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결정과정을 반복한다면 그 결과는 다시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은 기간동안 정말로 통합의 의지가 있다면 조직 내 토론에 총력을 다해야겠죠.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데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훈이라도 얻지요.

사실 어제 통합대회 중 어느 조직 대의원의 발언은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운수노조만 만드는 줄 알고 왔는데, 와보니 연맹도 통합해서 만든다고 한다. 그럼 상급단체가 하나 더 늘어나는건데 이래도 되는거냐? 산별노조를 '또 하나의 상급단체'로 보는 시각도 시각이지만, 최소한 대의원들에게조차 어떤 논의와 합의가 있었는지도 공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조직 내 공유가 안되었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점. 그러나 더 문제는 이것이 자기 조직 내에서 충분히 토론하지 못한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운수부문의 전략적 중요성 : 구조적 힘

암튼, 회의 자체는 그렇다치고,
이런 상황이 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운수-공공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신자유주의 정세에서 노동자 운동이 나갈 전망을 보아도 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런 입장들이 오히려 논쟁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논의 과정에서 '봉합'된 이후에 이런 식으로 뒤에서 치고 들어와서 정상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가 문제입니다.

운수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점은 실버가 <노동의 힘>에서 언급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수노조 출범 자료집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남한의 물류-운수 산업도 확장되고 있고, 중국의 팽창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물류산업도 크게 팽창하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철도나 동북아 물류중심국가와 같은 구상은 그 일환인 셈이죠.)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산의 국제적 팽창은 물류 산업이 확장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듭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적기생산방식JIT은  물류가 잠시라도 중단되면 생산 전체가 차질을 빚는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부품, 원자재 재고가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운수 부문 중 특히 화물운송의 경우 전략적 중요성이 있고, 그 때문에 이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구조적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야말로 '세상을 멈추는' 힘이 있습니다.


(남한의 노동조합운동이 대부분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구조적 힘을 해당 노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장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들의 노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착취를 받고 있기 때문이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문제를 보다 사회적인 문제, 다른 노동자들(예컨데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제시할 때만 보다 넓은 연대도 확보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운수노동자들이 이러한 힘을 '자신들만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이제까지 민주노조 운동이 밟아온 한계를 그대로 따라 밟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운수에만 갇히지 않는 조직적 전망을 가져야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라는 구호는 정당하고, 또 사실이지만, 새상을 멈춰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까지 고민을 함께 하자는 것이죠. ('구조적 힘'이 가지는 한계는 이미 제조업 대공장의 투쟁이 가지는 한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구조적 힘을 갖고 있고 이것이 많은 성과를 가능하게 했지만, 노동의 불안정화, 자본의 생산에서의 철수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는 그 조차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크게 늘어나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울산 지역에서조차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들은 이제 막 크게 일어나고 있지만 마찬가지 한계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연합적 힘에 대한 사고가 더 필요해지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하에서 도시 교통의 노동자 : 연합적 힘

화물운송에 비해서 여객운송, 특히 도시교통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문은 도시의 시민들로부터 지지가 필수적이고, 이 과정에서 힘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지역별로 노동이 이루어지고 지자체와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노동자,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구조적 힘을 가지는 화물운송 분야와는 약간 다른 조건에 처할 텐데, 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연합적 힘'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가 중요하게 됩니다. (버스노조의 여러 지역에서의 투쟁들은 지역연대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점에서 버스 뿐 아니라 택시의 경우에도 지역연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할 조건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운수를 넘어서는 지역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는 이들 조직이 더 힘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하지만 택시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같군요.) 이를 위해서는 지역연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슷한 조건에 있는 공공노조 쪽 조직들과도 연대를 강화하고 통합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 거의 업종본부만을 중심적인 편제로 하는 운수노조의 구조는 안타깝습니다.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계획이 --철도나 화물은 전국적인 구획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버스, 택시 쪽에서는--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하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어쩌면 '남의 조직'이지만 전망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좀 주제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운수쪽 동지들에게 무례하다면 죄송.) 암튼, 결론적으로는 △ 운동의 전망을 갖는 데 있어서 구조적 힘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는 사업장-업종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변혁의 일환으로 구조적 힘을 사용하기 위한 고민이 더 강화되어야한다는 점, △ 운수 안에서도 연합적 힘을 강화해야할 부문이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에서는 조직 안팍으로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운수동지들이 당장은 공공부문과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이후에는 더 확장된 고민을 더 함께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어제 통합대회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많이 나갔네요.
통합이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대중적 논의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야한다는 점, 운수부문이 공공과 통합까지 발전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 힘을 더 확장된 요구를 위해서 사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역을 중심으로 연합적 힘을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아마도 모든 과정이 다시 시작되겠지만, 정말 '제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 끄적거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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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스페인 내전에 관한 세 개의 작품.

최근 개봉한 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그리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를 꼭 보라는 친구의 소개(소개만 하지 말고 같이 봐줄 것이지, 쳇 ^^;)에 따라서 보려고 준비하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작품을 아예 더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예전에 읽었고, 지난 홈페이지에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번번히 볼 기회를 놓쳐서 부끄럽게도 아직 보지 못했던 '랜드 앤 프리덤'은 이번에야 보게 되었다. (eMule 프로그램을 열 몇시간 돌린 끝에 겨우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 그래도 결국 파일을 다 받았으니 다행.)

 

1936년 스페인 :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영화포스터에 보이는 붉은 깃발에 쓰여진 POUM은 '통일노동자당'의 약호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자신도 이 당이 주도한 민병대에 참가했다고 밝히는 바로 그 당.

 

영화는 혁명을 지키려는 투쟁과, 그것이 소진되는 과정을 그린다. 파시스트와 전투에서 죽은 동지를 묻는 처음 장례식 장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영원할 것이라는 결의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당(통일사회당PSUC)의 탄압으로 숨진 동료를 묻을 때, 부르는 'A las Barricadas'(To The Barricades)는 참담하다.

 

영화는 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명대사로 가득하다. 아래 몇가지는 꼭 인용하고 싶은 것들.

 

해방된 마을에서 토지를 집단경작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마을에서 혁명을 계속할 것인지, 혹은 적당히 미봉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 한 늙은 농부가 말한다.

 

"혁명은 새끼 밴 암소와 같아서,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암소와 송아지까지 잃게되고, 아이들은 굶게 돼"

자본주의 외국들에게 경계심을 갖게해서는 안된다는 둥 갖가지 핑계로 '온건한' 조치를 요구하는 데 대한 간명한 답변이다. 혁명은 중단하는 순간 후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손녀딸이 낭송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시(詩).

전투에 참여하라
아무도 실패할 수 없다

육신은 쇠하고 죽어가더라도

그 행위들은 모두 남아

승리를 이룰 것이므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국제적 연대가 이루어진 투쟁이었지만, 가장 더러운 배신이 망쳐놓은 투쟁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자들(PSUC)는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민중을 관리하려하고 혁명을 압살했다. 전선에서 부르조아 군대와 같이 계급과 위계제를 다시 도입하고 여성을 밥짓는 일로 축출했다.  도시에서 경찰을 부활시키고 '통제'를 도입하며 노동자의 파업을 금지한다.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들이 접수한 공공기관을 정부가 '관리'하기 위해서 병력을 투입했다.

 

베르나르라는 의용군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봐, 민병대는 투쟁의 심장이라구. 스탈린은 우리를 두려워해. 서방세계와의 협정에 싸인하고 싶으니까. 이미 그렇게 했어.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지. 협정에 싸인하기 위해서는 거부감을 없애고 우호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지. 그런데 우리와 우리의 혁명을 지원하면 신뢰를 잃게 되는 셈이야. 그게 우리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이유야."

 

실제 역사는 진행된 대로. 스탈린은 배신하고 히틀러는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게르니카에서의 학살(피카소).

게르니카

 

주인공격인 데이빗(사실 이 영화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은 PSUC의 입장을 지지하는 영국공산당 당원증을 찢어버리면서 이렇게 편지에 말한다.

"스탈린은 노동 계급을 장기말 처럼 이용할 뿐이야.

팔아 먹고 이용해 먹고 희생시킬 장기말."

 

데이빗은 이렇게 해서 (지금의 우리들이 그런 것처럼) '당없는 공산주의자'(알튀세르)가 되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당운동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한 장면.

 

아이러니한 것은 21세기 지금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한편으로 스탈린을 용인하면서 한편으로 당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주체주의자)들은 어치피 죽어다 깨어나도 스탈린주의자들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자발적 투쟁을 관리하려 들고, 협상하려드는 노조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당관료주의를 상징하는 스탈린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용인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혹은 그렇게 비판하는 주체주의자들(관료주의)이나 노조관료주의와 자신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감기(맹목)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곳곳에서 혁명을 질식시켰는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르주님의 블로그; "북한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침묵하는 계급인가?" 를 읽어보자. 아래로부터 대중의 자발적 투쟁을 혐오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마드리드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평양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화에 삽입된 노래 중 'A las Barricadas' (가자! 바리케이트로)라는 곡은 폴란드 혁명가인 La Varsovienne (The Song of Warsaw)라는 곡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개사해서 부른 노래다.  참세상 겨울잠프로 중 구닥다리노래창고 13회. "우리가 알고 모르는 번안가요들 1"에서도 소개와 함께 들을 수 있다. 김정환의 번안으로 메아리가 부르기도 했다.(새벽인가?) 암튼, 여기 링크를 따라가면 들을 수 있다.

 

가사가 이렇다. (Wikipedia 홈페이지에서 인용, 가사끝에 Confederation은 최대의 노동자조직-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이었던 CNT(전국노동자협회)를 뜻한다고 한다.)

△ '랜드 앤 프리덤'에 삽입된 곡

 

Black storms shake the sky
Black clouds blind us
Although death and pain await us
Against the enemy we must go

 
The most precious good is freedom
And we have to defend it
With courage and faith

 
Raise the revolutionary flag
Moving us forward with unstoppable triumph

(original: carrying the people to emancipation)
Working people march onwards to the battle
We have to smash the reaction (aries)

 
To the Barricades!
To the Barricades!
For the triumph
of the Confederation

 

 

1944년 스페인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감독은 비극적인 현실을, 판타지라는 양식을 통해서 예술적인 비극으로 형상화해낸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이렇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도 놀라운 경험.

 

영화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거의 파시스트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 '랜드 앤 프리덤'에서부터 8년 후, 1944년.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나치들은 패망했지만, 프랑코는 승리한다. 얄타협정이 냉전의 국경선을 획정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최종적인 배신.

 

그러나 여전히 민병대는 남아 '반군'이 되어 투쟁한다. 마을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잘 훈련된 정예부대'로 대체하고자했던 그 사람들이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민병대를 살해하고 무장해제하던, 제복을 차려입은 그 '정예부대'는 다 어디에 갔단 말인가?)

 

(여기서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 내 블로그의 제목인 '겨울철쭉'은 '녹슬은 해방구'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1953~4년 겨울의 빨치산의 상황일 텐데, 혁명이 후퇴하고, 전투가 패배한 후, 그러나 여전히 투쟁하는 비극적인 상황. 이 영화의 민병대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비극일 수 있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하며, 숭고하기 때문이다.)

 

영화 첫장면, 해설이 끝나고 첫대사.

"대체 저 많은 책을 어쩔 셈이니! 오필리아"

오호! 이건  내가 책을 또 살 때마다 주변에서 나에게 하는 낯익은 잔소리다. 어쩌긴요, 하나하나 가장 소중한데다가, 언젠간 다 읽을 거랍니다. 그 속에서 모험이 시작되죠. 일단 오필리아, 나와 공감.

 

오필리아는 책에 나온 요정 이야기를 믿는다. 그래서 요정을 만나고, 미로 속에서 판Fauno을 만난다.(판Fauno는 마치 POUM같은 어감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책의 이야기도 요정 이야기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렇다. 산속 반군들은 노동자, 인민이 평등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책에 나온 것을 보고 믿었는지는 확실치 않더라도, 그들은 산속에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반군과 함께하는 하녀 메르세테츠는 유일하게 오필리아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그/녀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는 전선이 그어져있다. 여기서 짧지만 빛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구절을 다시 생각해보자.

 

..오히려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상의 요구들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中


그/녀들은 모두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든, 판타지이든 자신의 '가상'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현실에 반역하는 동지들이 된다.

'오필리아'는 '햄릿'에 나오는 이름이기도 하다.(아마 감독이 그 비교를 염두에 두었겠지만 말이다.) '햄릿'을 읽으면서 세익스피어가 오필리아를 너무나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햄릿'에서 그녀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슬픈 정념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도 오필리아는 슬픈 조건에 처하고, 우리에게 슬픈 감정을 불러오지만 그것은 '햄릿'에서의 오필리아와는 다르다. 오필리아는 이번에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자신의 죽음-희생도 스스로 선택한다.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단지 슬픈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기쁜 정념'. 판타지와 현실 사이(사실 그 구분이 뭐 필요할까 싶지만)에서 슬프지만 기쁜, 기쁘지만 슬픈. 그래서 오필리아는 한편에서는 죽지만, 지하세계의 공주로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래서 오필리아가 돌아가는 곳은 영화의 처음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 지하에서 그곳의 아버지는 말한다.

"일어나거라, 내딸아. 어서 오너라.
너는 다른자의 순결한 피를 희생하지 않고 너 자신의 피를 흘렸구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마지막 과제란다"

이 시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전략)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의 미래를 가장 먼저 이룩한다

그렇다 생애는 추락보다 멀고 깊다

그렇다 패배를 죽음에 비유한 것은 옳지 않았다

무엇이 또 다시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씨앗이 아니다 일어서는 것은

이미 이룩된 것이다, 일어서라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하게 일어선다"

- 김정환, '에필로그' 『하나의 二人舞와 세 개의 一人舞』(1993)

소련의 몰락으로 한 시대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생각된) 후 쓰여진 시에서 우리는 유사한 비극적 감성을 느낀다.

 

그녀는 운명 앞에서 자신에게 끝까지 당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숭고한 비극이다. 마치, 최종적인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반군들처럼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래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리스 비극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숭고한 정신을 형상화한다.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오필리아와 반군들에게도, 그리고 1953년 겨울의 빨치산과 80년 광주도청의 시민군에도 적용될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20세기의 패배 이후에도 투쟁하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언젠가.)

 

오로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만이 죽음의 운명을 통해 도리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죽음보다 더 큰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146쪽)

..여기서 고귀함이란 자기의 탁월함을 실현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죽음의 시험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80년 광주의 전사들처럼,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선과 악이 싸우는 싸움터요, 때때로 그 싸움은 우리에게 의로움과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를 요구할 만큼 치열할 때가 있습니다. 트로이 성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생존을 버리고 덕을 선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운명보다 더 크고 강한 정신의 힘을 보였습니다. 80년 광주도청을 마지막으로 지켰던 사람들도 그랬겠지요.(151쪽)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한길사 中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 '랜드 앤 프리덤'과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 둘 모두 그렇다. 현실과 영화 세계의 진정한 비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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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그게 과연 &quot;정규직화&quot;일까?

우리은행이 노사합의로 31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했다고 난리다. 오늘 비정규직 투쟁사업장 집회 가서도 조합원들이 물어본다. "우리은행은 비정규직을 정규직도 시켜준다는데, 우리는..." 이런 반응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만난 한 민주노동당 활동가도 '좋은 거 아닌가요?'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런이런, 언론의 선전대로 우리 조합원들도 이걸 '비정규직 정규직화라고 생각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차, 비정규직 운동단위들의 명확한 입장이 필요한데!

 

이번 합의는 언론에 발표된 것처럼 요런 내용이다.  

△ 언론에 보도된 우리은행의 이번 조치 요약 (한국경제)

 언론에서는 특히 △ 정규직노조가 합의한 가운데 정규직 급여를 동결해서 복리후생 차별을 철폐하는 재원을 마련했다는 내용 △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이 (주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식의 반응이다.  (말하자면 "비정규법안 반대투쟁한 민주노총, 뻘짓하느라 수고했다, 이제 임금이나 양보해라", 대략 이런 스토리다.)

 

물론 금융권과 경영계의 '우려'가 심각하다는, 예의 그 짜고 치는 고스톱은 여전히 이번에도 등장한다. 은행은 나름의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업종에 있어서는 적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도 친절하게 덧붙여준다.

 

우리은행의 이런 흐름은 이미 작년부터 준비되고 도입된 '직군분리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정부의 비정규법안 내용에 따라 당연히 손봐야할 내용을 먼저 손본 것뿐이다. 어차피 2년 이상 고용된 경우에는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하거나 해고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은행창구 업무 등은 복잡하고 숙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고하고 다시 훈련하는 것이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이번 조치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은행자본의 지극히 '합리적 선택'일 뿐이다. 물론 '자본의 논리'에 따른 '합리'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일일히 이야기하는 그렇고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되겠다.

‘반정규직’은 말장난, 고용보장도 못해(일다)

‘금융권 신인사제도, 차별시정의 대상인가?’ 토론회(단병호 의원실)

 

위의 링크를 따라가보면 알겠지만, 이번 조치는 이미 상당부분이 준비되고 있던 것들이다. 상시업무 비정규직에 대해서 차별적인 직군을 신설하는 조치를 통해서 저임금과 차별을 고착화한 새로운 분할선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정규직과는 다른 별도의 저임금을 받고 승진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새로운 직군의 도입이다. 따라서 기존의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의 '정규직화'보다는 (정부가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내면서 '정규직화' 대신 제시하여 지탄을 받았던) '무기계약화'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간제 노동자의 계약기간만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다. (임금은 은행측 주장에 따르면 현재 정규직의 70~80%이며 이 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임금수준은 실제로는 40% 수준이라는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따라서 기존의 저임금은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정부의 비정규법안이 통과된 상황에서 저임금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 언론의 평가 중에서는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한겨레 신문의 아래 사설이 문제를 지적한다. 이번 조치를 '2류정규직', '반쪽 정규직' 등으로 평가한다. 우리은행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남긴 과제 / 한겨레 12/21 사설

* 특히 이러한 조치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차별을 반영구적으로 고착할 것이다. 이번에 대상이 된 창구담당이나 사무지원, 콜센터 등은 거의 100% 여성노동자로 이루어져있다. 이런 조건에서 주류여성운동진영에서 이번 우리은행의 조치에 대해서 찬성의견을 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설사 일부 비정규직 관련단위, 노동단체에서 찬성의견을 내더라도 이런 점에서 여성운동단체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해야하는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에 편입된 NGO와 주류여성운동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은행 정규직화, 여성계 환경(프로메테우스 기사))

 

이는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과도 일맥상통하는데, 기간제 직접고용에 대해서는 일부를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되, 차별을 고착화하고, 나머지는 외주화하는 계획과 닮아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이 일관성을 가진다는 것, 정부가 말 그대로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통해 민간부분의 대응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발표에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애초 초안에는 업무 부적합 경고 3번이면 해고, C, D 등급을 2년 이상 받으면 해고 등의 내용으로 매우 유연하게 해고할 수 있는 조치를 담고 있었다.(아마 상당부문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굳이 매년 계약을 갱신하면서 떨어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인력을 정리할 수 있다.

 

이번 우리은행의 조치는 자본의 성격에 따라서 차별적인 방식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응할 것임을 보여준다. 은행업무와 같이 일정한 숙련이 필요한 업무에 대해서는 '무기계약화'의 방법으로 완전한 정규직화는 피하면서도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시장분할 전략이 사용될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경총의 '우려'와 같이 제조업에서는 이러한 방식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숙련도가 낮고 더 유연한 노동시장을 원하기 때문에 외주화가 계속 더 확산될 것이다. (공공부문은 업무특성에 따라 두가지가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은행이나 몇몇 공공기관에서 '무기계약'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번 법안의 통과 이후 △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2년 직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할 것이라는 점,△ 파견 업종이 확대될 것이라는 점, △ 파견용역이 확산될 것이라는 점 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럼 이렇게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을 뿐인 이번 합의를 이렇게 부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 건은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법안을 선전하기 위해서 판을 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정규법안 통과 직후 이루어진 합의라는 점과, 이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언론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는 점, 청와대 등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고 있다는 점, 사실상 '무기계약화'와 유사한 내용을 '정규직화'라고 선언하고 최대한의 언론효과를 노린다는 점 등등을 볼 때 그렇다. 이를 통해서 '정규직 노동조합의 양보를 통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낯익은 도식을 한국노총을 이용해 훨씬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제시한다. 이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양보해야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번 우리은행의 합의에서도 복리후생 차별 해소를 위한 재원은 사측의 양보('추가비용부담'이라고 불리는)은 전혀 없이 정규직 임금인상을 양보한 결과로 자랑스럽게 선전되고 있지 않은가! 자본의 추가 부담이 없어 더 좋은 처방이라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진단이다.)

 

따라서, 당사자들에게 일정하게 (기간제보다는) 고용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은 전체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방법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을 혼동하게 만들고, 해결의 방법을 왜곡한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은행의 사례를 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위험한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우리은행 비정규직''이 수백계단을 급상승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의 투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의지보다는, 정규직들의 양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러한 '요구'는 보수정치꾼들과 자본에 쉽게 활용될 수 있다. 그 양보가 요구되는 대상은 민주노총의 주요 사업장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민주노총의 정규직 대공장 사업장 노조들이 이러한 비판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음은 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그 원인을 여기서 진단할 건 아니지만.)

 

따라서 우리은행의 이른바 '정규직 전환'이 가지는 문제와 환상에 대한 정확한 지적과 대중적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다면 무엇이 희망인지를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분명하게 실천으로 제시해야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헛된 희망'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 이미 너무 늦고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누히 지적하는 노동자 운동 혁신의 과제들과, 이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계획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의 투쟁과 기존의 노조운동을 포함한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의 이에 대한 연대와 엄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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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어떤 결과일까

개토님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에 관련된 글.

 

노동운동은 개판 오분전이지만, 그래도 테스트는 테스트. 피할 수 없다.ㅎ

테스트를 해보니, 목성에서 왔단다.

목성에서 온 사람
목성에서 온 사람
당신은 호기심이 왕성하여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당신은 열띤 토론을 즐깁니다.
당신은 외국의 문화와 언어에 매력을 느낍니다. 당신은 외출을 좋아하고 동물과 자유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과대포장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렇게만하면 당신은 자신감과 관대함,공평함으로 유명해질것입니다.
너 어느 별에서 왔니?

좀 안맞는 것도 있는 것같지만, 암튼 재밋군.

근데 목성은 너무 뚱뚱한 별인데.. ^^;

 

요즘에 정치적 성향 알아보기가 또 유행이던데, 예전에 했던 결과를 보면,

Your political compass : Economic Left/Right: -9.63,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7.08

(10점이 최고이고, 좌파쪽으로 9.63, 자유주의쪽으로 7.08)  나름 뿌듯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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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여의도에서 이런 일들이..

지난 주 단식농성이다, 집회다, 총파업이다 하면서 여의도에서 사는 동안, 정작 여의도에선 이런 황당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군요. 단편적으로 얘기만 듣다가 주말이 되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정말, 여의도에서 투쟁이라고 하던 일들이 모두 바보같고 속은 것같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습니다.

 

먼저, 매일노동뉴스 기사.

누가 전선을 교란했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로드맵 타협안이 나오기까지

 

내용은 보시면 알겠지만, 노사관계로드맵을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합의해주었다는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국회로 진격'하는 투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쑈를 한 거네요. 저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워보였을까 생각하면 정말!

 

이 '진격'투쟁 과정에서 모두 연행되자는 택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들었는데, 현장에는 제대로 통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거면 저도 그냥 연행되었을 겁니다. 하긴, 허영구 부위원장 연행되는 자리 옆에서 조준호 위원장도 연행을 피하는 상황이었다니, 어떤 조합원들이 '모두 연행되자'라고 한다고 자리를 지켰을까 싶기는 합니다만.

 

관련해서는 필수공익사업장들에 대해서 합의를 종용하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참세상 아래 기사 참고.

 "민주노총·민주노동당, '개악'에 단호하지 않았다"  
  '로드맵' 환노위 통과 둘러싸고 민주노총·민주노동당 비판 제기돼

 

특히 이 기사에 맨 아래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달린 댓글을 보시면,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앞에서 집회 때는 '투쟁!'이고 뒤에서는 온갖 거래를, 그것도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도 없이 자의적으로 협상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고도 '총파업'하자고 선동할 수 있나 싶습니다. 현장에서는 무노동무임금에 징계, 해고, 구속 위험까지 무릅쓰고 조직해야하는 총파업인데 이런 뒷거래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 다 알게된 마당에 누가 총파업을 조직하려고 하겠습니까.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런 와중에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런 일도 진행되었다는군요. 집회 중간중간 회의하러 많이 드나들던 시간에 말이죠. 레디앙 기사입니다. 
‘일심회’ 공소장 내용 '충격'
“경악 - 참담” 반응 … “사상 투철하지만 출세주의자” 표현까지

 

"일심회"가 북에 넘긴 자료 중에 당내 인사들에 대한 성향분석 자료가 있었다고 하는데, 내용이 가관이라는 것이죠. 서울시당은 어떻게 장악하고, 북핵관련 성명은 어떻게 저지하며, 심지어 '전진'에 프락션을 하려는 계획까지 있다는데 황당할 따름입니다. 저는 민주노동당 당원도 아닙니다만 주체주의자들 하는 행동에 또 한번 실망할 수밖에 없군요. 이래서 뭐 공안조작일 뿐이라고 주장한 입장은 도대체 뭐가 됩니까.

 

밑에 대우센터빌딩 투쟁과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노조운동이 현실에 대해서 답답하고 한심한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었지만 이건 정말 너무들 하는군요. 게다가 지난 주 농성장에선 더 들은 이야기들은 또 이런 거였습니다.

 

1월 재계약 시점을 앞두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가입하려고 하자 해당 사업장의 정규직 지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받네 못받네 하고 시간을 끄는 산별노조가 있었는가하면, 비정규직에 대한 잠정합의안이 비정규직 주체들에게서 부결되자 '책임질 수 없으니 재투표로 가결시키라'고 하는 노조도 있었습니다. 어제는 저 노조, 오늘은 이 노조, 이런 식의 얘기들을 듣다가도 '투쟁은 투쟁'이라고 조직하고 구호외치고 하던 게 다 바보같았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노동운동이 다 왜들 이런가 싶습니다.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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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한꺼번에 지운 파일들

피에로님의 [10년쯤후에?] 에 관련된 글.

이런 사적인 글에 트랙백 건다는 것이 좀 그렇지만.(죄송;;) 피에로 님의 글에 붙여진 뮤직 비디오는 '만약에 우리'라는 곡이군요. '연애시대', 감우성, 손예진이 주연했던 TV 드라마 테마.

정작 TV에서 할 때는 많이 보지 못해서 여기저기 뒤져서 동영상 파일들을 모두 모아두었었죠. 하지만 (왜 그랬을까) 결국은 보지 못했고, 얼마전에는 폴더 통째로 삭제해렸습니다.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드라마OST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이란 곡이 당시에 더 알려졌던 것같습니다. 저도 그 노래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그 노래도 듣기 쉽지 않더군요.(아마 이 포스트를 볼 일은 없겠지만 당시에 그 노래를 좋아했던 어떤 사람에게는 요즘 참 미안한 일이 많습니다만..)

드라마는, '슬프지만 진실',(이건 델리스파이스 3집의 제목이군요.) 이렇게 말하는 것같습니다. 그렇죠, 슬프지만 진실. 세상엔 그런 것들이 있고... (거기에 비하면 드라마의 결론조차 불공평한데다가, '슬프지만 진실'엔 미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여전히 슬프지만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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