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저 평등의 땅에(3)
- 겨울철쭉
- 2010
-
-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2 (3)
- 겨울철쭉
- 2010
-
- [독서]두보杜甫시선(1)
- 겨울철쭉
- 2009
-
- 노무현추모 비판과 반비판들
- 겨울철쭉
- 2009
-
- 노무현 사망, 사회운동의 패닉(3)
- 겨울철쭉
- 2009
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오늘(자정이 지났으니 이미 어제군) 사회운동포럼이 사회운동총회와 폐막행사로 모두 마무리되었다. 많은 사람들(워크샵들에 연인원 2500명이 했다고 한다)이 함께 했고 의미있는 쟁점들을 논의했다. 마지막날 모습과 결산은 이 다음 글에 올리는 것으로 하고, 일단 3일차 이야기를 해보자. 박래군 집행위원장이 참세상에 인터뷰한 것처럼, “안 갔으면 후회할” 행사였다고 평가.
[특별강연] 피터 워터만 ; 노동운동, 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워터만은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노동자운동이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급진적 사회운동, 국제적 정의운동과 동행해야한다는 점, 이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등을 강연에서 언급했다.
워터만이 하나의 경향으로 강조한 것은 최근 우리 운동에서도 관심이 높아지는 “지역”과 관련된 부분이다.
워터만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community)과의 연대를 말한다.(community, 통역한 동지는 '지역운동'이라고 번역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역공동체'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중심부-주변부 모두에서 이러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호이익,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특히 남아공, 남미,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운동을 예로 든다. 작년 미국의 메이데이 시위를 보라, 이것은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이주노동자의 운동이었는데, 노조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이주노동자 공동체들) 조직화되지 않은, 조직화 될 수 없는 노동자들이 공세적으로 진출하고 노동자운동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제기되는 쟁점 ; 비공식노동자 등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되는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혹은 노조로 조직된 것만 노동자운동인가?) 워터만은 “노조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자치적인 조직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취약한 층의 노동자들이 기존의 노조 조직 안에서도 억압될 수 있으며, 자신의 전략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노점상을 예로 드는데 이들은 노조 조직 안에 있기도 밖에 동시에 있기도 하다. 미국노총은 이주노동자 네트워크를 조직하기도 했다.(이주 일용직 노동자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한 합의)
이러한 고민은 불안정노동자, 이주노동자, 비공식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노조형태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쟁점이다.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한 지역운동(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과 이랜드 월드컵 분회가 분별되지 않은 어떤 조직형태-조직화전략도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이날 저녁 지역운동 워크샵에서 논의된 주제이기도 하다.)
워터만은 조직화된 노동자를 넘어선 보편적 운동, 조직화 전략이 노동자운동에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노조를 넘어서는 조직화 방식에 대한 언급은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노조를 넘어선 확장되고 유연한 (조직화)전략이 필요하다는 점.
그밖에도 세계사회포럼에서 노동자운동의 위치, 인종주의 반대운동으로서 노조의 역할 등등 쟁점이 더 있었다. 아마도 발제문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에는 올라갈 것같으니 참고들 하시라.
** 벌써 올라왔네 ; 피터 워터만 초청 강연자료 링크
“사회변혁적 노동운동”
노동자운동과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의 중심워크샵이었던 자리. 나는 사회진보연대 토론자 역할을 맡았다. 주발제는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김진억 국장.
전반적으로 노조가 경제주의적 투쟁, 기업 사업장에 갇힌 투쟁을 넘어서 사회변혁적, 사회운동적 성격을 복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보편적 해방운동으로서 성격을 회복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한 이념적 대안, 대안세계의 이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국제주의의 결합하고 또한 실천적으로, 사회공공성 운동, 사회운동의 의제로의 확장 등도 필요하다는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한노사연 류의 소개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측면, 정치적 지향을 보다 강조해야한다는 측면을 고려해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워크샵에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위한 조직적 대안들도 언급되었는데 토론에서 깊이 논의되지는 못했다. 이후 논의 필요한 부분일텐데, 노동자 사회운동체 혹은, 노동운동-사회운동의 안정적 지역적 네트워크(연대구조) 같은 것들.
한편, 내가 주로 제기한 쟁점들은 토론문을 참조할 수 있다. 다운받기;링크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러 “의제”들을 노조에 도입하는 것인가?
한편, 토론 과정에서 사회운동노조주의가 마치 노조에 여러 가지 운동의 ‘의제’를 도입하자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될 경우 사회운동적 노조운동을 제안하면 현장활동가들은 "다양한 운동을 하기에는 노조도 힘들다, 지금하는 투쟁으로도 가랑이 찢어진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게 된다.
심지어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것이 민주노총 1기 집행부의 “사회개혁적 노동운동”과 같은 것 아니냐는 식의 발언도 나온 상황. 토론자였던 노동전선의 김태연 씨의 토론 중 발언인데,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새흐름이나 사회진보연대가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왜곡한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것을 통해서 제기하고자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이, 특히 노조가 이익집단이 아니라 사회운동이어야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운동은 대안세계화운동, 워터만의 표현으로는 지구적 정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자기 사업장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활동을 넘어서,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노조의 이념도 혁신되어야하는데, 특히 남성노동자만을 노동자운동의 주체로 규정하고, 민족국가 안에서 타협을 추구했던 역사를 넘어서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라는 보편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을 보편적 해방운동으로 만들기위해서, 역사적인 보편적 해방운동이었던, 그러나 현재는 실패-소진된 역사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개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좀 더 쟁점적으로 말하자면, 노조가 백화점식으로 사회단체들의 운동에 모두 결합하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세에 따라서 결합할 필요가 있는 공장밖 운동의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운동에 대한 강조는 <사회공공성 투쟁을 제기하면서 많은 비노조 운동의제를 “도입”하자는 주장>과 경향적으로 혼동된다는 점을 이번 토론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노조들의 경제주의, 기업별 이기주의에 비판적인 활동가들은 그 돌파구를 공장밖 운동의제인 다양한 사회운동 혹은 소비자-시민으로 조합원들이 마주치는 문제들을 상대하는 ‘사회공공성’ 의제(교육, 의료, 교통 등)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다른 대안이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대안이념, 변혁전망 자체가 취약해진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은 현재 노조운동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는 정당하지만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공장 안-밖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어떤 시기에는 이랜드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현장조직화 운동일 수도 있고,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일 수도 있고 한미FTA반대 투쟁일 수도 있다.(이랜드비정규직 연대투쟁은 노조에게 사회운동이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노조 안에서도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지침"에 따라 간부들 집회참석하는 것을 넘어서 조합원들을 상대로 이랜드비정규직 지원, 연대를 위한 말그대로 "운동"을 벌여야한다.)
사회운동으로 노조를 개조하자는 주장을 노조 외부에서 ‘의제들의 도입’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회운동-노조운동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소 도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운동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 대중조직이 보편적 운동이라는 쟁점이 아니라 △사회운동단체라는 조직들과 노조라는 조직들의 조직간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대중운동 스스로 운동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연대단위”를 불러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날 대토론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가 반복되는 셈이다.) 하지만 오히려 대안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들을 (외부적 결합이라기 보다는) 노조운동 안에 도입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맥락은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성격을 회복하고, 경제주의/현장주의를 넘어서 대안세계를 건설하기위한 운동에 나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가진 어떤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용어의 성격 때문인지 다양한 운동의제들을 병렬적으로 도입하자는 식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운동 지형에서는 '사회운동'이 '비노조 사회운동 단체들의 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다보니 더욱 그런 측면이 있다. 따라서 주장하는 바를 잘 드러내는 다른 용어를 쓸 수도 있고, 이번 워크샵에서 사용한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념적 대안?
울산에서 온 어떤 활동가는 “볼세비즘도 아니고 사민주의도 아니라면 어떤 길인가”라고 묻는다. 한편에서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운동이 가져왔던 역사적 한계, 한편에서는 시공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불가능한 사민주의가 아닌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반성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는 운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제기가 핵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사회공공성과 같은 쟁점을 넘어설뿐더러 “노동해방”, “사회변혁”이라는 것이 그냥 외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야하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 될 필요가 있다.
한편, 토론과정에서 플로어에서는 자본주의 위기와 체제붕괴를 예상하는 것은 (1) 몇 년 전부터 항상 하던 이야기 이거나 (2) 파국론이다라는 식의 문제제기도 있었다.
2010년대 전자본주의적 금융위기에 대한 예상은 신자유주의 경제비판을 통해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경제적 분석을 정세분석에 어떻게 반영하는가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위기가 올 것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분석에 따른 정세예측이 ‘파국론’은 아닌데, 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맞을 객관적 위기라는 제한조건 속에서 운동주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 노동운동 사전워크샵 중 2차, "세계자본주의와 한국자본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지역운동의 쟁점들
* 이 부분은 오전과 저녁에 있었던 지역운동워크샵의 내용이다. 쟁점과 내용이 좀 되는 만큼 별도의 글에서 따로 언급하는 것으로 하자.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전철이나 도서관같은 곳에서는.. 읽지마세요,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다가, 어느 구절에선가 갑자기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니까요.
김진숙의 글들.
하지만 김진숙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글은 투쟁사든, 강연이든, 교육이든, 추도사든 그녀의 '말'의 흔적이다. 말은, 보통 하나의 순간에 명멸하지만, 그것이 가진 무게와 진실에 따라서는 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낱말하나 문장하나의 무게 때문에 쉬이 읽어나갈 수 없고, 눈물과 반성 때문에 며칠을 걸려 읽어야하는 책.
노조가 주최하는 이런저런 교육에 조금 다녀본 사람이라면, 열사 투쟁에, 적어도 열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서 익숙한 내용의 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장소들에게 김진숙을 만났다. 노조 간부들, 비정규직 노동자 교육들에서, 김주익,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만났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빼앗겨서 그녀의 삶과 투쟁에 대한 두시간 가까운 강연을 듣기도 했고, 열사들의 추모식에서는 정말 펑펑 울어버렸다. 창원시청 앞 광장에서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이 있을 때, 한진중공업 횡횡한 도크위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식에서.
우리 노동자운동은 87년 이후,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기보다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한계 속에만 갇혀왔다. 그래서 87년을 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전투적 투쟁을 회고하지만 과연 그 속에서 우리가 길어올려야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기 보다는 '잘나가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진숙의 글이 하나 하나 영혼에 울리는 것은, 그녀가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잘 나가던'(혹은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고 믿는) 노동운동이 굳이 외면하거나 침묵하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7년의 진실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진숙은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노동자의 단식 투쟁에서 조수원 열사를 기억한다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청소용역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지 모르는 부인 황길영 동지를, 유통매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지 모르는 두 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보수세력에 탄압당지만 꿋꿋하게 싸우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투쟁을 소중히 말하면서도, 그들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을 돌아볼 것을, 화룡점정할 것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주문한다.
이런 점들이 아니라도 책을 읽다보면, 왜 김진숙의 말이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게 하고, 어떤 구절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게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깊은 상처를 건너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중학생 딸이 새벽신문배달로 사온 털신을 고이 간직한 어미니를 기억하는 사람, 돌아가실 때까지 '복직했냐'를 묻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조카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
그래서 마치, 남한의 노둥운동이 경제주의와 합의주의에 빠져서 희망은 이제 없어진 것이 아닌가 몇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스쳐 지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진숙의 글에 영혼이 울리는 당신들이 있다면, 여전히 노동자들의 눈물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만으로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햝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스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239쪽
=====
배달호 열사의 추모제와 눈물들이, 배달호 열사 추모곡인 "호루라기 사나이"가 떠오른다.
EM님의 [상근자 노조 논쟁(?)에 부쳐] 에 관련된 글.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일로 논쟁이 되고 있던 즈음, (뭐 우리밖에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지만 ^^;) 나를 포함한 공공연맹의 상근활동가들도 공공노조의 지부형태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지금 진행되는 선거인 명부가 확정되는 2월18일 전에 가입절차를 마무리할 것을 상근활동가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며칠후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의 간부를 이런저런 일로 우연찮게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연맹의 상근활동가 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공노조에 집단 가입할 것을 제안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 운영에 함께 하는 조직에 정당한 일원으로 책임을 갖고 또한 그에 걸맞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제안하고 나서 보니 주로 "전진"쪽 선배상근활동가들은 이미 각자 개별적으로 가입원서를 공공노조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참.) 그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단지 '월급받고 채용된 사람'의 위치에 남는다면 그것은 계속 관료기구의 실무자가 될 뿐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것은 '멤버쉽'이었던 것이다.
사실, 채용 상근활동가들은 유리한 조직적 위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부당한 배제를 당하기도 한다. 연맹에 있는 1/3 정도의 상근활동가들은 단위 노동조합에서 직선간부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머지 동지들도 단위노조의 경험이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책임있고 훌륭한 동지들이 많다. 하지만 정당한 조직적 멤버쉽을 갖지 못한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연맹 소속 노조의 직선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사업장을 퇴직하고 연맹에 채용상근자로 올라온 동지라도 같은 상황.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서는 배제되었다. 다만 (힘쓰는 정파에 속한 경우에) 정파들을 통해서 비공개적으로 개입하는, 부적절한 관행만이 그것의 결과였다.
나는 공공노조의 '연맹사무처지부'(일단 향후 초업종 지역지부가 구성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지부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서울지역지역지부가 구성되는대로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지부를 설치했다. 서울지역의 초업종지역지부와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의 <우리들의 미망 혹은 희망>을 참조.)가 상근활동가들이 공공노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일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과는 달라야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EM님이 위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에 비해서 일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노동자가 아니라거나, 노조를 만들 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EM님이 정리했거니와, 적어도 그것들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수준은 넘어야 의미있는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구조적으로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노조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면, 노동조합 조직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1번인 '법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을 규정할 뿐 아니라, 매시기 활동의 모든 측면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매순간 그것들과 전투를 치루어야한다.
노동조합은 조직의 구조, 운영방식, 활동의 범위, 활동양식 등 전반을 노동관계법을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도다. 그래서 그것은 (알튀세르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의 하나이다. 노동조합의 규약이라는 것도 사실 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데, 규약으로 풀리지 않는 (내부운영 등에 대한) 쟁점이 종종 법정으로 간다는 사실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노동조합의 활동과정에서도 그것은 느낄 수 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부르조아 국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무해하다고 인정된 경제적 투쟁에 국한되며, 그것을 관리한다. 경제투쟁이 한계를 넘어서 법의 규제를 받는 순간까지가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물론 최근의 경험에서도 80년대말과 전노협 시기에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항상 기억해야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이유라면, 그 속에서 이러한 법적 제한에 갇히지 않는/을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때로만 성공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이다. 노동자들이 결사체인 노동조합이 법 이데올로기에만 제한되지는 않는 자신의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그 과정에 개입한다.
-------------------------------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알튀세르를 인용하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앵에서의 주장/1991,솔』에 실림, 무엇보다 전체를 직접 읽는 것이 좋겠지만.)
"계급투쟁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 속에서, 따라서 AIE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고 시행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형태들을 훨씬 넘어선다. 그리고 피착취계급의 투쟁이 또한 AIE들의 형태들 속에서 시행될 수 있고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라는 무기를 권력을 쥔 계급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그러한 형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각주11, 강조는 원저자)
-------------------------------
활동가들도, 자신의 조직형태를 노조로 규정하는 순간 같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노동조합은, 그 제도 자체의 정의에 따라 '사용자'를 누군가로 정의하고 '단체협약', '임금협약'을 요구하며,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모아내려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자기 조직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이 노조 활동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만들 조직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게된다. 이러한 노조 기구의 한계를 인식하는 활동가들이라면 오히려 평의회 형태를 조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서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말이다. 설사 그것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취했더라도 그 운영이 기존의 노동조합과 같은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사후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민주노동당 상근자였다면 민주노동당과 같은 경우에는 '당직자 평의회'와 같은 형태를 제안했을 것같다.(물론 조직형태만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조직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며, 그것은 조직의 성격자체를 규정하는 충분히 강력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 형태를 취하는 것은 가볍게 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조직 안에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당이 스스로도 대안적인 구조와 운영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동당 노동조합을 만든 동지들만의 책임은 아니며, 당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것이 당직자들에게 당지도부와 자신들의 관계가 '노사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날 때 당직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가능할까? 다만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인해 부여되는 가상--부르조아 법이 제한하는 구조와 운영--에 스스로 빠지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노조형태를 취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그것은 당사자들이 우선 고민해야할 문제이지만, 만약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이 공공노조에 가입하게 된다면 지역별로 사회복지, 비정규직 등 운동과제에 '조합원으로서' 해당 현장의 노동자들과 결합하는 방법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형적인 '노조'활동과는 또 다른 방식의 노조활동일 것이고, 노조 안에서 사회운동을 강화하는 또 다른 의미의 활동이겠지만.)
"연맹사무처지부" 경우는 다를까? 나의 경우에는 '멤버쉽'이 가장 문제라고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참여한 상근활동가 모두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함께 했을 것이고, 그중 다수는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관행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찬가지의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노사관계에 가까운 무엇이 우리 내부에서도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날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활동가들의 조직이라면 자본주의적 노사관계를 조직 내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물론 민주노동당 안에서나, 공공연맹 안에서나 그것은 조직의 객관적 현실이라는 한계에 규정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직들 자체가 다른 관계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너무 "후지다".) 그러나 주체적으로도 부르조아 법이 부여한 가상에 갇힐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진술이 이제 '조합원'이 된 사람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까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기구의 한계만이 아니라 주체들의 한계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연맹에서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강조되어야할 것은,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조직의 상근관료들이 조합원을 대신하는, 관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럴 위험이 상당하다.) 그들도 발언권이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잉대표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근활동가들을 직접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한다. 그것이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강화하고 권력화를 비호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이어야한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모순의) 이중의 항에 대항해야하는 어려운 실천이다.
--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이 적절치 않다고 비판하는 동지들의 진술이, 일면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그 형태를 '노동조합'으로 결정한 동지들에게도 항상 자기비판-자기지양이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 목록
ㄱㅇ
관리 메뉴
본문
여러모로 눈이 틔이는 글 잘 읽었습니다.부가 정보
겨울철쭉
관리 메뉴
본문
ㄱㅇ/과분한 말씀. 고맙습니다. 여튼 쟁점들일텐데 이런 것들이 토론되고 구체적인 운동의 관행이나 내용을 바꾸는 실천들이 이곳저곳에서 계속된다면 좋겠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