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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천당을 가는 것은 강남에서 한나라당이 낙선하기보다 힘들걸

참으로 섬세한 글이다.

 

 

부자가 천당을 가는 것은 강남에서 한나라당이 낙선하기보다 힘들걸
     글쓴이 : 실사구시 (skynomad) 조회 : 1300  점수 : 261  날짜 : 2006년5월6일 12시26분 
   

부자가 천당을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보다 힘들다고 예수는 말했다.

어렸을 때 어느 신부님 말씀이 그 바늘구멍이라는 것이 진짜 바늘구멍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있는 좁은 돌문 이름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많이 힘들다는 뜻이다.

부자를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여간 그런 성향은 분명히 있다. 단적으로 서울 강남을 보면 된다. 부자가 천당을 가는 것은 열린우리당이 강남에서 당선되는 것보다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부자가 천당갈 가능성이 0에 가까우니 그러면 안되겠고, 그냥 좋게 쳐줘서 강남에 살면서 한나라당 찍지 않고 열린우리당에 투표하는 정도로 양심이 있으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한나라당이 나쁜 이유야 수백가지 되겠지만 현재 경제측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부동산 투기 탐욕의 결정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썼다시피 우리나라가 일본식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 IMF 이상가는 타격이 온다. 지금 한나라당의 태도는 불 속에 뛰어 드는 나방처럼 그곳을 향해 돌진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양상이다. 그곳을 향해 가자고 선동을 하고 있다.

재수없는 가정이지만 한나라당이 집권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지금 주장하는대로 부동산 경기 부양한답시고 나라를 부동산 투기판을 만들까? 아니면, 지네도 그러면 국가경제 결딴난다는 것 알고 현정부 부동산 정책을 계승할까? 알 수 없다. 인간들은 예고된 재앙을 피하는 경우도 많지만 알면서 그길로 가고 보기도 한다.

현재 부동산 투기 탐욕의 문제는 강남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 겨우 집 한채 장만한 소시민들이 문제다. 이들은 원래 한나라당 지지 성향은 아니다. 그러나, 처지가 바뀌면 생각이 바뀔 수 있는 법. 노무현이만 아니면 내 아파트가 몇천, 몇억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유혹을 받을 만하다. 현재 한나라당이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높은 지지도에는 이 요인이 상당히 있다고 본다. 이번에 만약 경기도지사마저 한나라당에 빼앗기면 필자는 이 이유라고 본다.

언젠가 언뜻 들은 이야기가 수도권의 (폐)암 사망률이 대전보다 5배가 높다고 한다. 이제 인간다운 삶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교통체증으로 막혀도 좋다. 서울의 경제 집중 기득권은 놓치기 싫다는 탐욕. 그것이 역시 지금 비정상적으로 높은 한나라당 지지율로 나타나고 있다.

조중동, 한나라당 욕을 많이 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탐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욕망이 아닌 사회를 파탄낼 수 있는 탐욕. 사실은 그것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다가 행정수도 이전 싸움에서 패퇴하여 우여곡절 끝에 지금 여기까지 왔다. 그것과의 싸움에서 이겼으면 지금 수도권은 한나라당이 발 붙일 수가 없다. 원래 수도권은 한나라당 약세지역이 아닌가? 충청권 등 지방도 한나라당이 발붙일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수도권과 충청 다 밀리고 있다. 전부를 얻을 수 있는 승부에서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다가 다 열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러다 뒤집기를 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더 이상 드라미틱한 승부가 진짜가 아니다. 처음부터 본실력으로 이겨야 한다. 국가를 파탄낼 수 있는 부동산투기 같은 레드오션 패러다임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블루오션 패러다임을 세워야 한다.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 김문수는 행정수도 이전뿐이 아니라 행정도시 건설법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난동을 부리며 반대를 한 양아치다. 수도권 경제집중과 그로 인한 부동산 투기세력의 충실한 용병이 된 것이다. 반면에 열린우리당 후보 진대제는 우리나라 D RAM 을 세계제일로 발전시켜 연간 수조원의 흑자를 안겨준 블루오션 개척자이다. 필자는 결국 진대제가 이길 것으로 기대는 하지만 현재 김문수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부동산투기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식 국가 파탄을 야기하는 탐욕이 아닌 새로운 가치 창조로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모범사례를 많이 만들어 국민들로 하여금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그런다면 선거에서 마음 졸일 필요도 없어진다. 그런데, 벌써 임기는 후반으로 치닫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조중동과 한나라당을 소멸시키고 우리는 새 길로 가는 것이 과연 꿈일까?



ⓒ 실사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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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국사회와 노동계급 ─ 사회사적 개관 | 제삼노총 정책기획국

 

http://cafe.naver.com/3win

 

03호-157-184-논문-이영석,_현대_영국의_노동계급.hwp
 

현대 영국사회와 노동계급 ─ 사회사적 개관*

이  영  석**1)


1. 머리말

2. 번영의 시대와 노동의 변화

1) 경제성장의 두 측면

2)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정체성 변화

3. 노동조합과 정치

4. 장기불황과 신보수주의 개혁

5. 음울한 풍경화


1. 머리말


1945년 이후 영국의 쇠퇴는 세계체제 중심국가의 전락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은 아시아-아프리카를 휩쓴 탈식민지화 운동으로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전후 ‘번영의 시대’에 영국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생활수준도 높아졌지만, 그것은 독일․프랑스와 같은 경쟁국들의 번영에 비하면 상당히 뒤쳐진 것이었다. 특히 1차 석유위기와 더불어 시작된 장기불황은 영국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 또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우선 전후의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제도의 확대로 노동계급은 이전보다도 더 안정된 고용과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다. 노동계급은 아직도 작업장에서 그들만의 관행과 조직노동운동을 유지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양차대전 사이에 진행된 것으로서, 주거․보건․교육 여건의 향상과 더불어 심화되었다. 그들의 여가 또한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성격보다는 소비사회의 일반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한편 번영의 시대에는 정부와 전국적인 노동자조직 사이에 집단교섭과 정책결정의 합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이 생산성의 정치는 일종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 체제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북유럽이나 독일의 제도에 비해서 더 취약한 것이었다 특히 노사교섭은 1960년대 중엽 이래 집단협상 대신에 개별 작업장에서 직장위원(shop steward)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번영의 시대에 노동계급이 누렸던 직업의 안정과 단체교섭력은 장기불황 및 보수당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대처 정권 아래서 노동자들은 높은 실업과 생활수준 악화를 겪었다. 보수당 정부는 일련의 노동입법을 통해서 전통적으로 자원주의(voluntarism)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온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 조직노동운동의 전망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불투명해졌다. 영국의 노동계급은 1980년대 이래 ‘효율성’과 ‘생산성’의 구호 아래 거의 모든 기업에서 진행중인 노동과정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2차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영국 노동계급의 변화를 개관하는 데 목적을 둔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적지 않은 위험을 수반한다. 이 시기의 노동사 분야는 19세기에 비해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편적인 주제들에 대한 개별 연구가 있기는 하지만, 에릭 홉킨스(Eric Hopkins)의 최근 저술1)을 제외하면 노동계급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는 종합적인 작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이 글에서는 홉킨스의 저술을 토대로 하면서 최근의 경제사 연구와 사회조사 결과, 그리고 산업관계론(industrial rela-tions) 분야의 성과들을 참조하여 기술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각 시기별로 노동계급에게 나타난 변화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측면들을 중심으로 살피려고 한다.



2. 번영의 시대와 노동의 변화


1) 경제성장의 두 측면


1945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계획경제와 고용 창출, 이자율 인하, 수출촉진정책 등 일련의 경제정책을 통하여 경제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정부는 ‘수출이냐 아니면 죽음이냐’라는 구호를 내세울 만큼 수출을 장려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복지제도를 확대하였다. 노동당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1951년에 노동당의 뒤를 이어 집권한 보수당 정부 또한 이전의 노동당 집권기에 이루어진 여러 경제정책을 이어받고 국민보험과 의료보험을 기본축으로 하는 사회복지제도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950년대에 널리 쓰인 ‘버츠켈리즘(Butskellism)’이라는 말은 당시 경제정책 면에서 두 당의 차이가 별로 없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2)

1950~60년대 영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속적인 성장이다. ‘성장’은 그 시대의 구호였다. 이 시기 경제성장의 원인에 관해서는 대체적인 합의가 있다. 우선 영국은 전쟁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와 함께 전후 복구계획, 기계 및 생산설비의 현대화, 미국의 자본 투자, 공공지출 증가 등은 성장에 유리한 여건을 만들었다.3) 1948~60년 사이에 연평균 산업생산 증가율은 3.7%를 넘었는데, 이것은 20세기 전반에 비해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양차대전 사이에 크게 위축된 전통적 수출산업(제철․제강 섬유․조선․석탄 등)이 다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이들 분야의 생산은 1950년대 이후에 계속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화학․정유․전기․자동차 분야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이와 관련된 가스․전기․수도․식음료․담배 분야의 생산이 급증하였다.

<표 1)> 선진 공업국의 GDP․노동생산성․산업생산 증가율  %

 

국내총생산

노동생산성

산업생산

국가

1950~73

1973~84

1950~73

1973~84

1960~73

1973~85

영국

3.0

1.1

3.2

2.4

3.0

0.6

프랑스

5.1

2.2

5.1

3.4

5.9

1.0

독일

5.9

1.7

6.0

3.0

5.5

1.1

미국

3.7

2.3

2.5

1.0

4.9

2.3

일본

9.4

3.8

7.7

3.2

12.6

3.4

자료: Kirby, “Economic Record,” p. 13에서 재작성.

그러나 전후 영국 경제의 성장은 다른 산업국가들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에는 매우 낮게 나타난다. <표 1>은 1950~60년대에 영국의 국내총생산․산업생산․노동생산성 증가율이 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 경쟁국들의 증가율보다 낮은 수준임을 보여준다. 영국 경제의 상대적 쇠퇴과정에서 1950년대야말로 중요한 시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유럽 주요국가들의 경제부흥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에 영국인들의 생활수준은 이전에 비해서 급속하게 높아졌는데, 노동계급 또한 전반적으로 높은 소비생활을 누렸다. 영국인들의 소비 증가는 국내 생산물보다는 값싼 수입품에 의존한 것이었다. 대다수 영국인들은 그들의 번영의 이면에 쇠퇴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풍요의 사회’에만 집착하였다.

경제사가들은 1950~60년대 영국 경제의 상대적 쇠퇴과정을 검토하면서 제조업의 지속적인 위축과 정부의 통화정책을 주목한다. 우선 제조업의 쇠퇴는 다른 산업국가들에 비해서 두드러졌다.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영국의 공업생산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1.4%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비중은 1975~7년에 평균 9.1%, 1980년대에는 5%로 하락한다.4) 물론 이 시기에 서비스 분야는 상대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활동의 무게중심이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급속하게 이동한 결과인가? 1960년대 이래 선진 산업국가에서 서비스 분야의 팽창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서비스 혁명을 탈산업사회의 불가피한 변화로 파악한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제조업의 쇠퇴를 서비스 혁명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영국은 이전부터 오랫동안 국제금융 및 기업 서비스 분야에서 비교우위의 이점을 누려왔다. 1960년대 이래 서비스 부문의 팽창은 영국 제조업의 쇠퇴에 따라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이다.

다음으로, 영국 정부의 통화정책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일반적으로 전후 여러 나라들의 경제정책은 케인즈적인 수요관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경우도 사회보장의 확대와 주택 건설 등 공공부문의 지출 증대를 통하여 수요를 확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통화긴축, 즉 디플레이션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 까닭은 1950~60년대 보수당 정부가 국제수지 균형을 경제정책의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수입 증가로 국제수지가 불균형 상태에 빠지면 곧바로 통화량을 감축하였고, 불균형 상태가 개선되면 통화공급을 늘렸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은 금융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결과라는 비판이 있다. 국제수지 균형을 위해 금융제재의 강화와 약화를 되풀이하는 이와 같은 조치는 흔히 ‘스톱 앤드 고(stop and go)’ 정책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1950년대에 영국의 국내산업이 경쟁력과 기술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5)


2)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정체성 변화


제조업 분야의 고용인구가 감소한 것은 공업 자체의 쇠퇴를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공정의 자동화와 자동제어 시스템의 도입에 따른 변화를 반영한다. 이미 1954년 공장감독관 보고서는 공장의 자동화 과정을 언급하면서 ‘컴퓨터’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6) 이러한 자동화 추세는 주로 대단위 작업장에서 이루어졌다. 기술혁신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새로운 전기․자동차․식음료 분야의 경우 특히 ‘포디즘(Fordism)’과 같은 대량생산체제가 널리 자리잡았다. 자동화와 전자제어 추세는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한 작업장에서 두드러졌다. 포디즘 아래서 작업의 단순화와 반복이 과연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증가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전의 위험하고 불량한 작업환경과 포디즘의 역기능을 비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번영의 시대에 전반적으로 작업환경이 좋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 추세는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인 수출산업과 건축업의 경우 그 개선의 정도는 보잘 것이 없었다. 1960년대에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일련의 공장법7)이 제정된 것은 역설적으로 작업장의 위험이 산업분야에 따라 상존하였음을 보여준다.

시드니 폴라드(Sidney Pollard)의 추계에 따르면, 1970년의 주당 실질임금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950~75년 사이에 노동자들의 임금지수는 63.5에서 115.8로 높아졌다.8) 이와 같은 번영은 지속적인 성장의 결과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까지 그 성장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고용 안정과 복지제도의 확충 때문이었다. 우선 이 시기에 실업률은 이례적으로 낮았다. 1950년대에 1.5%, 1960년대에도 2%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9) 다음으로,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틀은 전후 노동당 집권기에 의해서 세워졌다. 노동당 정부는 집권 다음해에 국민보험법(The National Insurance Act)을 개정하고 국민보건의료법(The National Health Service Act)을 제정함으로써 사회보장의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이미 1942년에 간행된 이른바 ‘베버리지 보고서’(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가 제시한 사회보장의 청사진을 구체화한 조치였다.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노동계급의 주거환경 및 건강상태도 개선되었다. 우선 노동계급을 비롯한 서민주택 건설은 전후 노동당 정부의 우선적인 시책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1930년대에도 공공주택 건설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바 있다. 노동당은 1945년 선거에서 ‘서민에게 집을’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집권과 더불어 대대적인 주택건설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의료보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건장관 어나이런 베번(Aneurin Bevan)이 입안하였다. 그는 주택공급을 원활히 하고 집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련의 입법10)을 추진함과 동시에 주택 400만 호 건설이라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다. 노동당 집권기의 주택공급 물량은 대략 97만 호로 추정된다. 원래 계획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베번의 주택정책은 의료보험의 경우보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주택공급 정책은 1950년대 보수당 정부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주거환경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11)

1950~60년대 주택공급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주택공급정책은 지방정부와 민간회사의 주택건설을 지원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초기에는 지방정부에서 건설한 공영주택의 비중이 컸으나, 점차로 민영주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12) 이것은 지방행정당국이 점차로 주택부지를 공급하고, 민간 건설업자가 주택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유도한 결과이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공영주택의 세입자가 임대주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금융상의 지원책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공영주택의 경우도 임대는 단기간의 형태이고 장기적으로는 개인이 분할 상환의 방법으로 매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주택의 규모나 형태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주택보급률과 같은 양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기존의 서민주택을 대신하여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모델들은 이전의 주택에 비해 거실을 넓히고 주방과 욕실을 개량한 형태였다. 새로운 공영주택단지는 석탄․전기․가스를 이용한 개별 난방식에서 중앙난방식으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도 이전보다 나아졌다. 그것은 생활수준과 주거환경의 향상, 의료보험제도, 노동시간 단축, 가족원 감소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계급 가정의 식생활에 변화가 일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음에도 빈곤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이 시기에 빈곤선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극소수여야만 했다. 1899년과 1936년에 뒤이어 1950년에 세 번째로 요크의 빈민층을 조사한 시봄 라운트리(B. Seebohm Rowntree)는 이제 실업이 더 이상 빈곤의 기본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의 조사에서, 빈곤을 낳은 중요한 요인은 노령, 질병, 가장의 죽음 등의 차례로 나타났다.13) 피터 타운전드(Peter Townsend)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8년 당시 빈곤층이 전체 가구의 7.1%, 인구의 6.1%였다. 그러나 빈곤선을 오르내리는 불안정한 계층은 전체 가구의 23.8%, 인구의 21.8%였다.14) 1950~60년대에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졌음에도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1950~60년대에 노동계급의 정체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 노동계급의 정체성은 다른 사회세력과 그들 스스로를 구분할 만한 집단적 자의식과, 그리고 그 의식에서 비롯하는 고유의 문화형태 및 조직운동의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 19세기 이래 영국의 노동계급은 어떤 형태이건 스스로 집단적 자의식을 쌓았고, 작업장과 사회에서 그들 고유의 관행과 문화를 나타냈으며, 조직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회세력과의 경계가 약해지고, 시민사회의 일부로 편입되는 경향도 있었다. 그 단초는 이미 양차대전 사이에 나타났는데, 번영의 시대야말로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의 정체성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소득 수준 향상과 교육의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

소득 수준의 변화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향상이 다른 사회세력과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갔는가 여부이다. 이를 실증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과 다른 사회세력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국민소득 가운데 각 집단들이 차지하는 비율의 변화를 서로 비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업별 소득 분포를 통해서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통계치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소득 불균형의 추이는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소득배분의 문제를 다룰 때에 10% 단위로 소득분포층을 세분하여 이들 집단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서로 비교한다. <표 2>는 소득분포에서 상위 10%의 집단과 하위 20%에 해당하는 집단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변화를 살핀 것이다. 두 집단의 소득격차가 점차로 좁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과세전보다 과세 후에 상위 10% 집단의 비중이 더 낮아졌고, 하위 20% 집단의 비중은 더 높아졌다. 지니계수 또한 소득 불균형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번영의 시기에 전반적으로 소득이 증가하면서 노동계급과 다른 사회세력의 소득 격차는 좁혀지는 추세를 보여준다. 특히 정부의 조세정책으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심화되었다.

<표 2)> 계층별 국민소득 추이  %

 

과세 전 소득

과세 후 소득

구분

1949

1964

1973-4

1949

1964

1973-4

상위 10% 계층

33.1

29.4

26.8

27.1

25.9

23.5

하위 20% 계층

5.4

5.3

5.2

-

6.5

7.5

지니 계수

-

39.8

37.0

35.5

36.6

32.8

자료: Pollard, Development of the British Economy, pp. 316-17에서 작성.

다음으로 교육은 노동계급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계급 출신들에게서 교육을 통한 사회이동이 활발하게 나타났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정교한 실증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다만 교육제도의 변화에 따라 노동계급 출신에게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의 기회가 더 개방되었는가 여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960년대에 영국 정부는 교육 기회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부는 교육을 복지국가의 주요 내용으로 인식하였으며, 18~9세까지 학교에 재학중인 청소년층의 비율이 높아졌다. 전후에 영국은 의무교육 연한을 중등학교까지 늘리면서 공립중등학교를 세 범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대학 진학을 위주로 하는 전통적인 문법학교, 직업교육 중심의 기술학교, 그리고 두 특징을 아울러 지닌 현대식 중학교(종합학교)가 그것이다.15) 1960년대에 영국 교육당국은 전통적인 문법학교의 특권적 지위를 없애고 현대식 중학교를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일반 서민에게까지 고등교육의 기회를 넓히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1960년대에 정부는 노동계급 자녀에 대한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를 강조하였고, 기존의 31개 대학 이외에 더 많은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워리크, 요크, 브라이튼 등 지방도시에 ‘신대학’이 세워졌으며 이밖에 기술대학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고등교육기관도 증설되었다. 이 결과 1946~72년 사이에 대학 신입생은 1만 8,866명에서 6만 4,963명으로 늘었다.16) 그렇다면 노동계급 자녀들에게도 다른 사회집단에 못지 않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개방되었는가. 대학정원의 증가는 오히려 중간계급 출신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노동계급 자녀의 대학 진학이 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진학률은 중간계급의 경우에 비해 훨씬 더 낮았다는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43~52년 사이에 태어난 노동계급 자녀 가운데 3.1%만이 대학에 진학한 반면, 전문직․행정직․관리직․감독직 가정 출신 학생들은 26.4%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이다. 1932~42년 사이에 출생한 노동계급 자녀의 대학진학률이 2.3%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만하게 증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17) 그러나 전반적으로 1960년대에 노동계급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더 넓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노동계급의 정체성 문제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 사실 번영의 시대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이전의 관행과 규범이 이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물론 중간계급이었겠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노동계급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에게 일은 우선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낟알을 거두지 못하리라”는 성서의 구절은 오랫동안 서민의 숙명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일은 그 자체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특히 숙련노동자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얻은 기술과 숙련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들은 노동과정에서 자신의 정서와 가치를 반영하는 ‘규제적 관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그 관례들을 통하여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자동화와 전자제어방식이 주류를 이룰수록 작업은 좀더 단순하게 변하고 노동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없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여러 사회조사 결과들은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18) 예컨대 1960년대 후반 루턴(Luton)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작업을 도구적 맥락에서만 바라보았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으로만 인식할 뿐 작업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가정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고 집안 가꾸기와 가족간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전의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수준도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일의 성격도 소중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루턴 노동자들, 특히 미숙련공들은 작업의 특성이나 분위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작업에 대한 만족도는 오히려 노동과정과 관련이 없는 다른 요인들, 즉 고용주의 태도, 작업규율, 동료와의 친교, 노동조합의 지원 등에 좌우될 뿐이었다. 1972년 북동부 대규모 화학공업단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사회조사 결과도 비슷한 변화를 보여준다. 노동자들이 좋게 여기는 직업의 척도는 아직도 보수, 직업의 안정성, 기업복지, 작업조건 등의 차례로 나타났다. 보수와 직업의 안정성이 중시된 것은 물론 예상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직종(또는 일)의 성격과 그에 대한 흥미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1960년대 영국 사회는 결혼과 성 관계의 패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혼전 동거, 이혼, 성 개방 풍조 등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고 이것은 노동계급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성 해방은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성 개방 풍조와 함께 여성의 의상도 노브라, 미니스커트, 나일론 스타킹 등 새로운 외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추세들 가운데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여성 취업자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쟁기에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여성의 이미지는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채 빨래를 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 이미지는 직장에서 맞벌이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여성의 취업 증가는 성장기의 노동력 부족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이러한 추세가 가속화하는 데에는 내구소비재 보급, 가사노동의 감소, 피임 또는 임신중절의 확산 등도 영향을 미쳤다.

노동계급의 여가 또한 탈계급화 현상을 반영한다. 1970년 런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는 사회집단별로 여가 패턴의 차이가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긴 주말에 어떻게 시간을 소비하는가. 집안에서는 텔레비전 시청, 자녀와의 놀이, 집안 가꾸기, 자동차 닦기 등의 차례였다. 집 바깥에서는 자동차 드라이브, 팝하우스 출입, 산책, 외식, 교회 예배 등이 상위 목록에 올랐다. 여가 패턴은 대체로 직업에 따른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외식과 교회 예배의 경우 중간계급의 선호도가 노동계급보다 더 높았다.19) 여가와 문화에서 탈계급적 현상은 특히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와 단절현상을 보여주는데, 젊은이들의 새로운 여가와 문화는 탈계급적 성격을 지녔다. 청년문화의 단절성은 이미 1950년대 의상의 변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몸에 달라붙는 자켓과 바지는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앨런 실리토(Allan Sillitoe)의 ꡔ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ꡕ(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58)은 주말을 술과 섹스로 탐닉하는 젊은 노동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20)

지금까지 노동계급의 정체성의 변화와 관련된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구분선이 무너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두 계급 사이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중요한 것은 19세기 이래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경험-집단적 자의식-조직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그 고유의 패턴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조직과 노동운동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집단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제도로서, 그 제도의 관행에 힘입어 작동할 뿐이었다. 루턴의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조사에서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의무와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21)



3. 노동조합과 정치


번영의 시대에 노동조합과 작업장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영국의 노동조합은 19세기에는 대체로 직종노조 또는 산업별노조의 형태였으나, 20세기에 이르러 일반노조로 변모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일반노조란 직업, 산업, 숙련/미숙련의 명확한 구분이 없음을 뜻한다. 오늘날에도 의료․교육․소방 등 사회서비스 분야의 직업별노조나 탄광과 같은 산별노조가 존속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일반노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일반노조 내부에는 몇 가지 직업과 산업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직업별 또는 산업별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60~70년대는 노동조합의 힘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시기이다. 우선 이 시기에 노동조합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1950~75년 사이에 노조원은 270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특히 조합원 수가 절정에 이르렀던 1979년의 노조조직률은 55%를 넘어섰다.22) 이러한 팽창의 배경으로는 특히 많은 노동조합이 클로즈드 숍의 원칙을 견지했다는 점과, 그리고 1960년대에는 화이트칼러 노동조합23)이 성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이 시기 노동조합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대규모 노동조합으로의 통합 추세이다. 25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거느린 대규모 노동조합은 1968년 9개, 1979년에 11개에 이르고 있다. 노동조합평의회(TUC) 산하의 이러한 거대노조는 파업이나 집단협상 또는 정부와의 교섭에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1970년대 노동당 정부 아래서 노조는 정부와의 교섭에서 노조에 유리한 일련의 입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24)

이 시기에 노동조합은 정부와의 교섭을 중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노동당 정부의 임금억제정책에 반발하여 대립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이 시기의 파업은 대부분 임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노조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임금을 억제하려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파업을 이용하였다. 당시 정부는 임금 인상과 인플레이션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하려면 임금을 동결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노조는 노동자만의 고통 감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조는 그들의 임금 유지를 위해서 집단의 힘을 행사하는 길을 택했다.25) 그러나 거대노조와 노동조합평의회에서 활동하는 노조지도자의 영향력 증대는 다른 사회집단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임금정책을 둘러싸고 노조와 교섭해온 정부는 물론이고, 전문직업인을 비롯하여 중간계급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조활동 자체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무모한 파업, 피켓팅의 폭력, 조합내 분쟁 등을 다룬 텔레비전 연속물이나 영화 또한 ‘영국병’이라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노조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26)

1960년대 이래 정부는 노조활동을 제약하고 노조의 힘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윌슨 내각 당시 노동부장관 바브러 캐슬(Barbara Castle)이 간행한 정부백서 ꡔ투쟁을 대신해서ꡕ(In Place of Strife)(1968)는 노조의 비정상적인 활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백서는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제한하기 위해 파업 전 냉각기와 찬반 비밀투표를 선행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그후 보수당 정부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1971년의 산업관계법(The Industrial Relations Act)은 1968년 정부백서의 제안대로 파업 이전에 냉각기를 가진 후, 전국산업법정(NIRC)에 대해 필요한 경우 노조에 파업 여부를 묻는 비밀투표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물론 이 법은 노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다음 노동당 정부 아래서 폐기되었다. 그러나 노조는 법을 없애는 대신, 정부와의 교섭에서 임금의 자발적 억제에 동의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0~70년대 노동조합과 정부의 관계를 일종의 ‘코포라티즘’ 체제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다.27) 일반적으로 코포라티즘 체제는 자본과 노동의 독점적(또는 전국적) 조직이 국가의 매개를 거쳐서 그들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는 비의회적 방식, 달리 말하면 국가․자본․노동간의 정책형성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28)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전형적인 사례는 영국보다는 오히려 북유럽과 독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전국적 수준의 노사협상에 의해서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별 또는 전국적 차원의 강력한 노조조직, 전국 수준의 단체교섭, 안정된 노사관계를 필요로 한다. 영국의 경우는 오히려 ‘취약한 담합구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산업노조보다 일반노조가 지배적이고, 노동조합평의회와 같은 전국적인 노조조직이 개별 노조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미약하며, 정부도 필요한 경우에만 이들 전국조직과 교섭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번영의 시대의 영국 사회를 코포라티즘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이 시기에 국가와 노동 사이의 협의구조가 존속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70년대 초반에 노동당 정부는 노사정 협의기구를 강화하고 있다.29)

복지국가의 모델을 따른 영국에서 코포라티즘 체제가 취약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연구자들은 전국적 수준의 자본가 조직이 발전하지 않았고 TUC의 대표성이 약했으며 전국적인 교섭도 주로 정부-노조의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지적한다.30) 여기에서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TUC의 대표성 문제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TUC가 산하 노조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TUC 산하의 거대노조와 개별 작업장노조와의 관계도 그러했다. 사실 1960년대 이래 영국의 노사협상은 집단교섭보다는 개별 사업장 단위의 협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급노조의 통제력이 강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직장위원’의 역할 증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점이야말로 영국 노조활동의 또 다른 특수성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직장위원의 역할 증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사실 1950년대 후반까지 직장위원은 사회문제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들의 성채가 굳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매우 수세적인 것이었다.31) 당시에는 공장감독관, 고용주, 노조지도자들 대부분이 직장위원을 노조 안의 사적 기구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노조의 위계구조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위원제도는 자발적인 발전, 직접 민주주의 방식, 공식적 노동조합 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기존 산업관계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도전”이자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의 씨앗”인 셈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이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직장위원은 “불만을 경감하는 관리적 기능”을 가진 사람이었다.32) 그들은 대체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영향력을 지녔으며, 노사관계에서 자극제라기보다는 윤활유와 같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직장위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식적 교섭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은 1968년 도노번 위원회(The Donovan Commission)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영국 노사관계가 산업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 관계와 개별 작업장에서 전개되는 비공식적 관계로 이원화되어 있음을 인정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적 제도는 “그 조합원에 대하여 그들의 결정을 지시할 수 있는 전 산업에 걸친 조직”을 상정한다. 그러나 비공식적 제도는 “개별 회사 경영자의 폭넓은 자율성과 산업노동자 집단의 힘”에 의존한다.33) 그리하여 작업장의 비공식적 노사관계를 오히려 공식적인 것으로 인정할 것을 권유한다. “직장위원을 말썽꾸러기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들에게서 가끔 말썽이 일어나지만, 좀더 일반적으로는 질서의 지지자로서 조합원에게 억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34) 보고서는 규제적 관례를 없애고 영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직장위원제도를 공식화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35)

직장위원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영국의 단체교섭 형태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사실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단체교섭은 노동조합과 산업의 고용주 대표가 참여하는 전국 수준의 산업별 교섭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전국적 수준보다는 지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단체교섭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와 함께 직장위원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개별 작업장 노조가 노사교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노조지부의 교섭은 개별 작업장, 기업, 지역 단위의 세 가지 형태가 병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직장위원은 공식적인 제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직장위원은 조합원의 선거로 뽑힌 개별 작업장 노조의 대리인으로서, 고용주는 이들의 작업을 면제하고 사무실을 제공하였다. 1970년대에는 이 무급 직장위원이 노조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4. 장기불황과 신보수주의 개혁


1차 석유위기 이래 장기 침체에 빠진 영국 경제는 1978~79년에 다시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1973~77년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6%에 이르렀다.36) 이후 영국 경제는 두 가지 특징적인 면모를 나타낸다. 첫째, 전국적으로 제조업의 위축과 탈공업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둘째, 장기불황에 따라 실업자가 급증하고 이와 함께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떨어졌다.

먼저 제조업의 위축을 검토하기로 한다. 1차 석유위기 이후의 불황기에 제조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973~79년 사이에 산업 전체 생산 증가율은 1.5%, 제조업 분야의 생산 증가율은 -0.7%였다. 1979~88년 사이에도 산업 전체 생산 증가율은 2.1%였지만, 제조업은 0.8%에 지나지 않았다.37) 다른 통계들도 제조업의 쇠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1981~85년 사이에 자동차 생산량은 25% 줄었고 섬유공업의 경우 1979~81년간에 26%나 감소하였다. 공산품 수출입은 1984년경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했다.38) 제조업의 쇠퇴는 고용자 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984~88년 사이에 영국(북아일랜드 제외) 전체 산업분야의 고용규모는 2.9% 증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가는 제조업에서 6.1% 감소한 대신, 서비스업 분야에서 8.6% 증가한 결과이다. 제조업의 경우 지역별로 보면 스코틀랜드(-11.9%), 런던(-11%), 북서부(-10.5%), 요크셔(-8.6%) 등이 평균 감소율보다 높았다. 다만, 이스트 앙글리아만이 그 증가율이 12.1%에 이르는데,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39) 또 다른 고용통계에 따르면, 1984~7년 사이에 전체 산업 분야의 고용인구는 42만 5,000명(2%)이 늘었다. 이에 비해서 제조업은 21만 9,000명(4%)이 감소한다. 전체 고용규모 증가분은 서비스업에서 79만 3,000명(6%)이 늘어난 데 힘입은 것이다.40) 또 금세기 말까지 고용규모 변화에 대한 추정치는 더욱 더 비관적이다. 1989~2000년 사이에 제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용자 수가 감소한다는 전망이다. 감소율은 광업 -25%, 전기․가스․수도 -25%, 식음료 및 연초 -19%, 섬유 -19%, 기계․자동차 -15%, 금속 -14%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화학 분야만이 감소율이 비교적 낮은 편인데, -2%로 나타나고 있다.41) 요컨대, 1970~80년대 영국 경제의 장기불황은 무엇보다도 제조업의 쇠퇴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금융, 정보․통신, 공공서비스 분야가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탈산업화의 맥락에서 영국 제조업의 위축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표 3)> 실업자수와 실업률, 1960~88

시 기

실업자수(만명)

실업률(%)

1951-64

38

1.5

1964-73

58

2.3

1973-79

115

4.4

1979-88

281

10.3

자료: Feinstein, “Success and Failure,” p. 101.

제조업의 급속한 쇠퇴는 곧바로 실업자의 증가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표 3>은 번영의 시대와 1970~80년대의 실업 상태를 비교한 것이다. 1980년대에 연평균 실업률은 10%를 상회한다. 특히 1883~86년경에는 실업자 수가 300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것은 대공황기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42) 보수당 정부의 구조조정과 개혁으로 경제상황이 좀더 나아졌다고 평가받는 1990년대에도 고실업 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43)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은 제조업이 급속하게 쇠퇴한 지역과 일치한다. 1920~30년대에 실업자들은 섬유․석탄․제철․제강․조선 등 전통적인 수출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0~80년대에도 이런 산업분야는 다른 직종보다 그 쇠퇴의 정도가 더 심했다. 1984년의 경우 북부(18.1%), 북서부(16%), 미들랜드 서부(15.2%), 요크셔(14.3%) 등의 실업률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들 지역은 전통적인 수출산업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그 반면에 서비스업이 발전한 동남부와 이스트 앙글리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44) 1996년의 통계에서도 전국 평균(7.8%) 이상인 지역은 북부(10.1%), 북서부(8.4%), 요크셔(8.4%), 스코틀랜드(8.1%), 웨일즈(8.4%) 등이었다.45)

1980년대의 실업자들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는 대공황기의 경우와 비슷한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연령에 따라 실업률은 차이가 있다. 고령자와 청소년층의 실업률이 높은 편이다. 특히 노년층 실업자의 50%는 장기실업 상태에 있었다. 그 반면에 20~24세 연령층의 실업자 가운데 장기실업자는 20% 수준에 머물렀다. 미숙련노동층과 전문인력 사이의 격차도 크게 나타났다. 미숙련층의 실업률은 전문직종 종사자의 5배 수준에 이르고 있다.46)

경제불황기에 일할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982년의 한 사회조사는 실업자들의 태도에 관하여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47) 면접자의 19%는 실직 후에 스스로 비참하거나 불행해졌다고 응답하였다. 17%의 면접자는 불안하고 성미가 까다로워졌다고 말했다. 참고 인내한다는 응답자는 15%, 아직 용기가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13%였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1930년대의 현상과 대조적인 면이 있었다. 그 시대의 실업자들에게는 겨울에 따뜻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침대, 공공도서관, 영화관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의 경우 여성은 오전에 50% 이상이 집안일이나 상점 쇼핑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 시간대에 남자들은 집안에 있거나(20%), 상점에 들리곤 했다(20%). 오후가 되면 여성은 가사일․요리․친구 방문․사교․쇼핑․구직활동․텔레비전 시청으로, 남성은 대부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 조사결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활동적이고 다양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쨌든 200~3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들은 일찍이 산업혁명기에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간파했던 두 국민, 다시 말하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특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문제가 좀더 심각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1979년에 집권한 보수당 정부는 당면한 경제불황과 고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처 내각의 개혁의 본질은 경제주체들을 좀더 시장원리에 내맡김으로써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었다. 보수당은 선거에서 특히 산업관계의 전반적인 개혁을 구호로 내걸었다. 이것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사관계를 시장원리에 충실하게 만들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당연히 이익집단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는데, 대처 내각은 국가의 재흥, 생산성과 효율성의 제고 등의 수사를 동원하여 국민의 이해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수사는 ‘빅토리아적 가치’이다. 이러한 수사는 영국인들의 복고적인 분위기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빅토리아적가치의 핵심을 이루는 ‘자조(self-help)’야말로 제도개혁의 정신에 걸맞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처 내각은 먼저 일련의 노동입법을 통하여 노조활동을 억압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80년, 82년, 88년, 89년, 90년 등 5차례에 걸쳐서 개정된 고용법(The Employment Act), 1984년의 노동조합법(The Trade Union Act), 1992년의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법(The Trade Union and Labour Relations Act), 그리고 1993년의 노조개혁 및 고용권한법(The Trade Union Reform and Employment Rights Act) 등이 대표적인 입법이다. 이들 입법은 궁극적으로 노조의 파업을 억제하고 노조활동을 축소시키며 노동시장 자체를 유연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항들로 이루어졌고 점차로 그 내용이 강화되었다.48)

보수당 정부의 노동입법은 대체로 세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들 입법은 노조활동의 제약에 목적을 두고 있다. 피켓팅 제한, 2차 단체행동 금지, 파업 불참자에 대한 노조의 제재 불법화, 단체행동에 피해를 입은 시민의 소송권 등이 이에 해당한다(1980, 1992년 법). 둘째, 노조 운영방식의 개혁도 새 노동입법의 중요한 목적이다. 선거에 의한 노조간부 선출 의무화, 단체행동의 적법한 절차 준수, 노조 재정운영에 대한 감사기구, 직장위원의 작업면제 축소, 조합비의 원천공제방식 금지,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비밀투표, 입사 전 클로즈드 숍 금지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1982, 84, 88, 90년 법). 셋째, 새 노동입법은 노동시장에서 고용보호제도 및 규정을 철폐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임금위원회를 폐지한 것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1992년 법). 원래 이 위원회는 노조조직률이 낮은 직종이나 산업분야의 최저임금을 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1993년 노조개혁 및 고용권법에 의해서 26개 직종의 임금위원회를 폐지함으로써 비정규적인 노동력 또는 파트타임 노동력을 충원하는 길을 넓혔다.

이와 같이 보수당 정부의 노동정책은 산업 효율성 증대와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 것이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시장경쟁을 되살리고 통화긴축을 지속하며 기업연합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이제 이전과는 달리 정책결정과정에서 노조의 참여는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76~79년간에 TUC와 정부의 협의내용이 정책에 반영된 비율은 40%였다. 그러나 보수당 정부 아래서 그 비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49)

보수당 정부의 이러한 노동정책에 노동조합이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반발은 1984년 전후 최대의 광부 파업으로 폭발하였다. 당시 전국탄광노조 위원장인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은 생산을 줄이고 고용인력을 2만 명 줄이려는 국영탄광의 결정에 반발하여 비밀투표 없이 파업을 결정하였다. 다음해 봄까지 이르는 52주에 걸친 장기간의 파업은 결국 광부들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 밖에 1986년 ꡔ더 타임즈ꡕ지 인쇄공들의 과격한 파업도 결국 새 경영주인 러퍼트 머독(Rupert Murdock)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신문은 인쇄공들의 독점권을 없앤 후에 완전한 전자인쇄 설비로 제작되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국을 뜻하는 인상적인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의 숙련과 노동의 집단적 힘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시장원리에 굴복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18년간의 보수당 집권기에 영국의 조직노동운동은 쇠퇴의 길에 들어섰고, 노동조합도 위축되었다. 노동조합은 1979년에 노조원 1,344만 7,000명, 조직률 55.4%를 정점으로 그 이후 계속 위축되고 있다. 1995년의 경우 조합원 727만 5,000명, 조직률 32.1%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후반 이래 노동자 파업 또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991~95년 사이에 노동자 1,000명당 파업손실일수는 24일인데 이것은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다.50) 이와 같이 조직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 쇠퇴한 것은 정부의 반노조정책과 일련의 노동입법의 영향 때문이다. 이밖에도 고용방식의 변화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파트타임 노동자의 증가가 그것이다. 오늘날 파트타임 노동자는 전체 노동력의 25%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노동조합은 좀더 거대한 규모로 통합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생존의 차원에서 진행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거대노조는 대부분 활력을 잃고 있다. 이보다는 오히려 각 작업장의 직장위원이 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실정이다.



5. 음울한 풍경화


노동에 미래가 있는가. 영국의 노동계급은 이중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우선 번영의 시대에 그들은 점차로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조직노동운동도 그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기보다는 기존의 관행으로 움직였다. 노동조합의 관료화와 타성화는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다음으로 영국의 노동계급은 18년간의 보수당 집권기에 일련의 억압적인 노동입법에 의해 그 대부분의 활력을 잃었다. 원래 자원주의적 노사관계의 관행에 의존했던 노동조합은 국가의 억압을 받으면서 무력하게 변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넘어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지만, 신보수주의 개혁과 함께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조직노동운동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전의 활력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노동시장, 노동과정, 기업조직 등 생산과 관련된 모든 영역들이 유연화 과정을 밟고 있고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에 노동시장 및 노동과정의 유연화는 노조의 참여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제 기업들은 작업장 노사관계에서도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인적자원관리(HRM)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연화 과정을 급속하게 추진한 영국은 일시적으로 경제 회복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실 영국의 거대기업들의 일부는 구조조정, 생산과정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힘입어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을 인적자원관리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한 장기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을 내릴 수 없다.

오늘날 영국의 기업사회에서는 이른바 ‘유연한 회사(flexible firm)’의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이 모델의 중심노동자는 고임금과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숙련된 매니저․디자이너․판매담당․숙련기술자로 구성된다. 그들은 고용주의 목표와 자신의 목표를 일치시킨다. 그들은 유연한 기능의 소유자이다. 달리 말하면 기술변화와 새로운 작업조직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중심노동자는 개별적인 지위와 보수체계를 가진다. 그들 주위에 회사에 직접 고용되는 제1 주변집단이 포진한다. 그들은 서기, 감독, 집합적인 작업에 필요한 반숙련 노동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외부는 제2의 주변집단인 파트타임 노동자와 단기계약자들이 둘러싸고 있다.51)

이것은 음울하고 비관적인 풍경화이다. 그리고 이 음울한 풍경화는 비단 영국의 노동계급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혁신과 정보통신혁명이 가속화하면서,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의 유연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소수의 중심노동자와 다수의 주변노동자로 분화하는 이러한 상황은 노동의 위축과 함께 전통적인 노동의 개념 또한 바꾸고 있다. 이 비관적인 노동의 미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이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과제이다.


/Abstract/


British Society and the Working Classes since 1945: A Social-Historical Survey


Lee, Young-Suk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British working classes have changed since the Second World War. Between 1950 and 1970, the British people experienced continuous economic growth and enjoyed a high standard of living. But the rate of British economic growth was not as high as in rival countries.

Economic growth and the extension of the social welfare system especially in the 1950s and 1960s enabled the British working classes to enjoy sustained employment and a higher standard of living than pre-war generations. In the process they lost their self-identity. This tendency which had appeared already between the two world wars, was accelerated by the improvement of housing, health and education systems in the 1960s.

We can see a general mood of respect for negotiation and policy making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trade unions in this affluent age. The politics of productivity meant a system of corporatism. But it is said that the British system of corporatism was weaker than that of West Germany or northern European countries. Negotiation between capital and labour was conducted not so much through national organizations as through shop stewards in each workshop. 

The sustained employment and negotiating power, which the working classes had acquired in this affluent age, declined rapidly in the 1970s. This was called “the age of the long slump.” The working classes experienced high unemployment and a declining standard of living. The conservative government attacked the traditional trade unions which had developed themselves on the basis of voluntarism. The possibilities of an organized labour movement became obscure to workers. British workers could not cope with the new trends of flexibilization in labour processes and labour markets which companies have been promoting under the name of ‘productivity’ or ‘efficiency’ since the 1980s.

 
제삼노총(cadline)

한국민주노동조합총동맹 창립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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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지 의식·제도’ 해소가 복지국가 첫걸음

초딩들은 반복지 의식 하면 뭔소린지 갸우뚱할꺼다.

결국에 복지 증세라고 하면 경끼를 일으킨다.

 

 

 

‘반복지 의식·제도’ 해소가 복지국가 첫걸음
<한겨레> 선진대안포럼 1부 대안을 향한 성찰 ⑫ 복지사회, 꿈이 아니라 대안이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기획연재 : 선진대안포럼 대토론회
[관련기사]
2006년 현재, 한국 진보개혁세력 내부에는 하나의 공감대가 존재한다. ‘사회적 공공성’이 참 선진사회의 미래를 보증할 핵심 가치라는 판단이 그것이다. 이를 국가·사회·경제의 차원에서 표현하는 것이 ‘복지국가’ 또는 ‘복지사회’의 이상이다.

유럽 등 선진국가에서는 이미 복지국가가 보편타당한 가치로 자리잡았다. 80년대 이후 복지 시스템의 몇몇 가지를 쳐내는 일이 있었지만, 그 무성한 숲은 여전히 굳건하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맞는 복지의 묘목을 마련해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다. <한겨레> 선진대안포럼은 1부 ‘대안을 향한 성찰’의 마지막 토론회에서 이 화두를 잡았다.

지난달 2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고세훈 고려대 교수, 김연명 중앙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이일영 한신대 교수, 홍성태 상지대 교수,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박종현 진주산업대 교수,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데이터소장 등이 참여했다. 토론회 전문은 <인터넷 한겨레>(www.hani.co.kr)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재계·관계·언론·노동운동까지 반대세력 이뤄
복지경험 확대·정치적 리더십으로 난관 넘어야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 또는 ‘복지사회’는 대단히 현실감없는 개념이다. 전혀 다른 별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진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 강력한 ‘반(反) 복지의 덫’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선진대안포럼 참석자들은 이 덫의 실체를 파악해 해체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작업이 복지사회의 이상을 구체적 대안으로 바꾸는 일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가 이를 가장 힘주어 말했다. 반복지 의식과 반복지 제도가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사람들은 반복지 의식이 강하다. 심지어 적극적으로 복지를 혐오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복지의 전통도 없고, 국가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았다는 기억도 없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실현을 경계하는 의식이 이미 한국인의 심리구조 밑바닥에 내면화됐다는 이야기다.

‘반복지의 정서’는 복지를 혐오하게 만든 어떤 제도의 결과물이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국이 복지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강고한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반복지 사회에서 거대한 이득을 취하는 세력들이 연대해 ‘반복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복지는 기껏해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시혜라거나, 심지어 ‘빨갱이들의 사상과 가치’라는 오해와 거부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사회 성원에게 인간다운 삶을 제공하는 것이 복지라는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가려졌거나 잊혀졌다.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불신을 불러온 국가의 무능력도 여기에 한 몫하고 있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는 “위로부터의 발전을 기획한 것 말고는 별다른 경험이 없는 (한국의) 국가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빼앗아 부패에 탕진하는 ‘가렴주구’의 이미지가 국가와 관료사회 전반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 의구심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데이터센터 소장은 “사회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능력이 필요한데 이 부문이 너무도 취약하다”고 말했다. “관료기능이 취약해 예산을 확보해도 이를 제대로 쓰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관료사회의 ‘반복지성’은 서구 복지국가와 뚜렷히 대비된다. 서구 복지국가의 경우,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복지 시스템의 충실한 대변자이자 집행자다. 반면 한국의 관료집단은 “오히려 반복지적 성향이 강하다.”(고세훈 교수)

가장 뼈있는 지적은 이런 ‘반복지의 덫’에 노동운동 또한 갇혀 있다는 이야기였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노동운동이 임금투쟁에 덧붙여 생색내는 식으로 복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복지국가를 위한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악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홍성태 교수도 “힘있는 노조가 복지문제에 관심있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짚었다. 박종현 진주산업대 교수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타협을 가능케 할 이해 당사자간 교정기구가 한국에는 없다”며 “이런 타협을 위한 문화와 정치제도도 취약하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의 거대한 반복지의 덫이 서로의 발목을 조이고 있다. 고세훈 교수는 “낙후된 복지의식이 반복지적 정치제도로 이어진다”며 “복지를 정치권에 요구하지 않는 국민이 다수인 한, 정치권도 복지를 위한 제도를 만들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이 덫을 푸는 두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복지의 경험을 계속 확대하는 것이다. 전병유 소장은 “기초생활보장제도만 해도 이런 혜택을 난생 처음 겪어 봤다는 사람들이 많다”며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복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복지제도를 지지하는 문화적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저변의 복지문화를 질적으로 끌어올릴 정치적 리더십도 중요하다. 고세훈 교수는 “노동운동이 한없이 취약한 현 상태에서 이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 수는 없다”며 “복지제도를 앞장서 확충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미국이냐 스웨덴이냐’
한국 ‘미래모델’ 공론화 시작을

“작은 미국이냐 큰 스웨덴이냐.”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이 질문을 공세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적 구호 차원에서라도 ‘우리는 리틀 아메리카보다 빅 스웨덴을 원한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의 경제모델은 크게 보아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 유럽대륙식 복지 모델, 북유럽식 복지 모델 등이다. 참석자들은 이 가운데 유럽 대륙식 복지모델이 최근 몇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 모델을 비판할 때 종종 인용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유럽대륙식 모델은 현재 ‘전환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제 남은 것은 영미식 모델과 북유럽식 모델인데, 이들은 그 나름대로 진화해왔다”고 말했다. 세계화의 파고 속에 이 두 모델이 살아남는 방식은 뚜렷하게 대비된다.

신정완 교수는 이 작동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미식은 개인과 기업이 각자 알아서 세계화에 적응하라고 말한다. 북유럽식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제도를 변화시킨다.” 이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지에 대해 사회적 공론을 형성해 나가자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지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유럽대륙식 모델과 북유럽식 모델을 ‘고용과 복지의 연계’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유럽대륙식 강중국 모델은 고용 자체가 복지다. 고용만 돼 있으면 모든 혜택을 받는다. 반면 북유럽식 강소국 모델은 노동시장에서 탈락해도 사회적 보장이 이뤄진다. 지금 한국은 고용과 복지가 너무 잘 연결돼 있다. 삼성에 입사하면 모든 걸 얻지만 쫓겨나는 순간 모든 걸 잃는다.” 신정완 교수도 “유럽대륙식에 비해 북유럽식은 모든 경제지표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작은 미국의 시민이 될 것인지, 큰 스웨덴의 시민이 될 것인지, 한국 국민들이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미래 경쟁’을 진보개혁세력이 먼저 주창하고 나설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안수찬 기자

“서구 복지모델 위기론은 넌센스”

“유럽 복지체계는 뿌리깊은 문화…본질적 후퇴·변화 불가능”

서구 복지모델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데올로기도 ‘반복지의 덫’에서 중요한 노릇을 하고 있다. 서구 유럽 국가 스스로 복지모델을 폐기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신자유주의자들이 즐겨 들고 나오는 주장이다.

‘넌센스’라고 참석자들은 되받았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유럽 복지국가 모델의 유용성이 폐기됐다는 것은 과장된 주장”이라며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도적 변화는 세계화에 대응해 기존 복지제도의 효율을 높이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예를 들어 스웨덴 모델의 핵심은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사회의 총자원을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 체제를 잘 갖춘 사회인데, 이런 일반 원리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도 “유럽국가들의 사민주의적 복지체제는 경제적 수준을 넘어 이미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다”며 “그 곳에서 복지는 이미 중산층을 포용한 포괄적 체계로서 그 본질적 후퇴나 위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논란의 핵심은 복지국가의 이상을 한국에 적용하는 게 ‘시대착오적’이라는 보수세력의 공세에 있다. 그래서 서구 복지모델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다분히 한국적 현상이다. 고세훈 교수는 “복지국가 위기론은 그 이론의 근거 자체도 문제지만, 이를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후퇴시키려야 후퇴시킬만한’ 복지제도 자체가 거의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은 “한국 복지의 문제는 ‘과잉’이 아니라 ‘절대적 과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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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이란 누구인가

아래 글도 답을 못 내놓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정말 서민의 개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거 노동자/농민, 도시 빈민의 민중이라는 개념을 썼는데

지금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서민이라는 개념이 횡행하고 있다.

정말 서로 저마다 서민을 자처하고 있다.

 

회사 앞 매점 주인 아주머니가 맨날 야근하는 우리 사무직들에게

'당신들은 우리 같은 서민들의 아픔을 몰라' 이런 식으로 운운하시던데(즉 쥐꼬리 월급쟁이도 서민에서 제외)

그 아주머니 기준대로 차떼고 포떼고 다 떼고 하면 

재래시장 상인, 택시 기사들, 영세 자영업자 이정도 남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개념인지 모르겠다(우연히도 이들은 모두 불변의 박정희/박근혜 철밥통 지지자들 ㅠ.ㅠ).   

 

 

 

 

등록 : 마케터 (grands) 조회 : 1490  점수 : 0  날짜 : 2006년5월6일 13시39분 
   본문요약 멘트

 

5월5일 가족 행사가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늦은밤 집으로 돌아와 sbs토론을 뒤늦게 슬쩍 봤다. 토론형식만 보면 sbs의 방식이 제일 선진적인것 같았다. 이러니 정책공방에 임하는 후보들의 자세도 진지해지는 것 같다.

토론내용중 가장 내 주목을 끄는 대목은 강금실의 "서민관"이였다. 오세훈 후보는 돈이 많던 적던 마음에 시름이 있고 고민이 있으면 서민이라는 서민관을 피력했다. 강후보는 이점에 대해서 강력한 태클을 걸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그렇게 따지면 누구다 다 서민이 된다는 말인데..그런 발상은 진짜 서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라는 점 때문이다.

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강금실 후보는 "귀에 거슬리고 화가난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격한 표현이다.

물론 티비토론의 전술상 이런식의 격한 표현은 마이너스 효과를 줄수 있다. 오세훈이 상대적 약자로 보이고 강후보는 과격한 고집주의자 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제 강금실 후보의 그 공박이 이제까지 어떤 토론과 공약제시 이벤트 보다 더 젤로 맘에 든다.왜냐하면 내생각과 정말 하나도 다르지 않고 그대로 일치하는 점이기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서민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이제까지 진화해오면서 정부의 서민정책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그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건 서민의 대한 올바른 정의 내림과 그에 따른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 공동체는 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고 서민은 단지 이해당사자 간의 이해관계가 대립될때만 사용되었다.

결국 오세훈이 이야기한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속이 상하고 서글프면 서민이다"라는 말이 이런 흐름을 대변해 왔다.

참 희한한 일이다..

수억짜리 아파트를 보유해도 서민, 수십만원짜리 과외를 시켜도 서민, 철마다 해외여행을 가도 서민, 수천만원 프리미엄을 주고 자영업을 해도 서민이다.

이들 모두가 스스로 서민이기에  각각의 이해관계가 걸려 이익이 침해되면 그때는 모두 "서민 죽이기 정책"이 되는 거다.

강금실 후보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하지만 알다시피 가족의 사업실패로 인해 십수억의 부채를 떠앉고 있었고 채권자의 압박에 심리적 고통을 느껴 판사도 그만두고 로펌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서민으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되었던 자신은 사회로부터 선택되어 더 많은 능력을 인정받고 그에따른 많은 봉급을 받는  사람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난 이래서 강금실이 좋다..

정치의 시즌이 되면 저마다 자신과 서민을 동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선거만 되면 대한민국에 서민이 넘쳐나고 너도 나도 서민이라는 단어를 움켜쥐기 위해 안달을 한다. 이쯤되면 서민의 행복이 무럭무럭 자라나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런식의 "너도 나도 서민이야"라는 구호 외침은 결국 선거가 끝난뒤 이해관계자들의 쟁탈과 혼란만 가중시킬 뿐인거다.

우리동네 학교세우면 "서민 정책 만세"...남의 동네 학교세우면 '서민 죽이기 정책" 이런식의 혼란말이다.

 

**

그럼 서민은 누구인가?.

서민은 약자라는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농구 경기를 할때 키가 크네 작네의 개념이 아닌것이다. 서민을 주장한다고 모두 동일한 키 제한을 해서 농구경기를 하자고 할 순 없다. 그건 게임자체를 무시하는 발상이므로 말이다.

서민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농구게임 경쟁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해야 한다.

예를들면 정상인과 경쟁해야 하는 장애인, 남성과 경쟁해야 하는 여성, 젊은이와 경쟁해야 하는 노인, 부모가 없어 감독 없이 뛰어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 등을 의미한다

이들을 일반인과의 경쟁에 그대로 참여시켜 "더 뛰어봐..더 노력하라구"라고 외치는 것은 이른바 야수적 신자유주의 일뿐이다.

경쟁은 경쟁이 가능한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고 경쟁이 안되는 사람들은 공동체가 철저하고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는데..이들이 바로 서민인 것이다.

우리사회의 하위 20% 계층정도가 이런범주에 드는 진짜 서민이고 그 외 나머지는 서민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이해관계의 쟁탈에만 사용하려는 속좁은 사람들 또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난 생각한다.

오세훈은 "돈이 많던 적던 속이 상하고 괴로우면 서민.. "이라는 말로 스스로 속내를 드러냈는데..정말 화려한 포장속에 예단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정체성 폭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각종 이해관계가 걸린 쟁탈의 현장에서 오세훈의 이런 논리는 대화와 타협을 깨는 논리로 활용되었고 대표적인 것이 강남의 재건축 사업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서민정책"의 피해자로 포장하고 있다.

진짜 서민은 항의하지 못한다. 왜냐 항의할 여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들을 우리 대다수는 쓰레기 치우듯이 그냥 치워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치워진 공간에 각종 이해관계와 잇권을 매달아 놓고 "서민의 고통"을 이야기 한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현상인가..

정말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대상를 제처두고 경계가 애매모호한 상대적 빈곤층과 상대적 부유층이 서민이라는 정치적 단어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쟁탈하는 행위가 어쩜 선진한국을 가로막는 제 1의 공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상대적 빈곤층 + 상대적 부유층) 이들의 경계는 스스로의 맘속에 있는 것이고 이들은 모두 우리사회의 중산층으로 불리워야 마땅하다. 공정하게 경쟁하고 열심히 스코어를 내서 그 결과물을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게 이들의 의무다.
 

오세훈 같이 생각하는 이가 대한민국에 많다는 것..이거 참으로 불행한 일인데 그래도 강금실이라는 퍼스낼러티가 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동을 걸어준다는게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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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극좌의 1 대 800 끝장토론

 

 

 

일본 극우·극좌의 1 대 800 끝장토론
[서평] 전후 일본 지적논쟁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텍스트만보기   유성호(shyoo) 기자   
ⓒ 새물결
짧지도 길지도 않은 2시간 30분가량의 시간. 1 대 800의 절대 불균형한 토론에선 무슨 말들이 오갔을까.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 과도기인 1969년 5월 13일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강의실. 당대 전성기를 누리던 문학가이자 투철한 극우파인 미시마 유키오와 좌파의 대명사 동경대(원제를 살리는 의미에서 일어발음을 배제했다)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 패널 7명이 강단에 섰다. 미시마는 혼자였고 상대는 800명을 등에 업은 7명이었다. 일본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논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토론은 당시 휴교령이 내려진 동경대 전공투 학생들이 미시마를 초청해 이뤄졌다. 단신으로 동경대 교양학부 강당에 들어선 미시마는 의미를 담뿍 함축하면서도 균형을 잡으려는 듯 입을 연다.
"이렇게 나를 세우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고요?"

1 대 800의 끝장 토론, 차이만 확인한 채 마무리

토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꽃 튀는 논쟁으로 번진다. 쏟아내는 언어의 지평이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자아와 육체, 자연 대 인간, 계급투쟁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투쟁, 게임 또는 유희의 시간과 공간, 천황과 프리섹스와 신인(神人) 분리사상, 사물과 말과 예술의 세계, 관념과 현실에서의 미(美) 그리고 천황·미시마·전공투라는 이름에 대해서 까지.

신격의 천황을 지키고 부활시키려는 미시마와 '욕구불만의 비참한 육체'를 가진 인격체로 전락한 '천왕'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전공투 사이에서 발견되는 간극은 극우와 극좌의 이념적 좌표가 사사분면 대척점에 위치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논쟁은 그러나 '스스로 적을 논리적인 형태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토론한다'라는 기본 명제에 충실하면서 전공투의 문제제기와 미시마의 대응과 반격, 둘 사이의 겹쳐질 수 없는 평행선을 발견하면서 마무리로 치닫는다.

미시마는 전공투를 향해 끊임없이 천황의 개념과 권위를 인정하기를 요구했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공투(공동투쟁)에 기꺼이 응하겠다며 분위기를 정리한다. 그러나 전공투는 천황의 개념은 이미 그를 회자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미시마에게 공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받아쳤다.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매우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투를 거부합니다"

논쟁에 숨은 약속...이듬해 비합법 투쟁 후 할복자살

논쟁은 끝났다. 그러나 논쟁의 정점에서 미시마가 뿜어냈던 한 호흡이 목에 생선가시처럼 걸린다.

"나는 한 사람의 민간인입니다. 내가 행동을 벌일 때는 결국 제군과 똑같이 비합법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결투의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니까, 포돌이에게 잡혀가기 전에 자결이든 뭐든지 해서 죽어버릴 겁니다. 그런 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때를 대비해서 몸을 단련시키고, '근대 고릴라'로서 훌륭한 고릴라가 되고 싶습니다"

실제로 미시마는 이듬해 11월 육상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실을 점거, 헌법의 나약함을 외치며 동경대 강당에서 흘렸던 '자결'을 실행한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게 할복으로 풍미한 한때를 마감한다.

'인간'과 '역사'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미시마와 '인간'과 '역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전공투의 치열한 공방. 이 공방은 1969년에 끝나 1970년 미시마의 자결로 종지부를 찍나 했지만 30년 후인 1999년 미시마가 궐석인 채로 또다시 진행된다.

사실 이 책 읽기의 쏠쏠함은 30년 후에 모인 당시 전공투 주역들의 '복기(復碁)'에 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평가와 반성, 그리고 논쟁에서 놓쳤던 부분을 현재라는 공간 속에서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은 현대 일본 지식인이 어떻게 탈근대화를 이뤘는지를 보여주는 표본 같다.

30년 후 모임은 비교적 비평에 가까운 논리로 펼쳐진다. 파리 5월 혁명, 민족적 시간과 혁명공간,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국어의 성립, 일본과 유럽의 근대과학, 세계 경제 시스템과 일본, 과학기술과 존재론, 인구 문제 등 주제의 지평은 무한하리만큼 넓어졌고 분석은 평자의 연륜만큼 깊어졌다.

좌우의 이념적 대립이 사회 시스템 전 분야에 미친 영향을 곱씹는 자리에서 평자들은 청년시절의 순간적 불꽃이 아닌 용광로 같은 지식을 쏟아내고 있다.

다시 미시마로 돌아가 보자. 미시마는 동경대 방문을 대체로 유쾌한 경험이었다고 후기에 쓰고 있다. 미시마 역시 동경대 법대 졸업생인 만큼 낯설지는 않았지만 패널 토론을 하는 2시간 30분 동안은 편안하고 부드럽지만 않았다고 했다. 그것을 미시마는 몇 가지 짜증 나는 관념의 상호모색이라고 표현했다(사실 책 내용이 관념어의 나열이 심하다).

양해 불가능한 질문과 사막과 같은 관념어의 나열 속에서 미시마는 정신과 육체의 극심한 피로를 겪었고 시간 때문에 충분한 문제 전개를 못했다고 술회했다. 전공투와의 토론 결과에 대해서는 논리성은 인정하되 그들이 노리는 권력이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자기부정의 논리...변증법의 안티테제

이는 당시 동경대 전공투가 내세웠던 '자기부정의 논리'와 상통하고 있다. 자기부정이란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전공투의 행동강령이 대변하는 논리다. 동경대생들이 자기부정 논리를 투쟁주체로 삼은 것은 지성의 중심인 동경대를 지켜야 한다는 학교와 반학생운동 진영 분위기를 해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속집단(동경대)의 좌표와 자아(동경대생)의 윤리적 좌표가 공교롭게도 한 점에서 충돌함에 따라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기부정 논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종국에는 일본 학생운동의 한계를 스스로 지운 업보로 작용했지만.

미시마는 이런 자기부정 논리 속에 폭력혁명을 갈망하던 전공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이 책 저변을 흐르는 변증법적 안티테제인 것이다.

"평화주의의 미명 뒤에 언제나 단 하나의 옳은 전쟁, 즉 인민 전쟁을 긍정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위험스럽게 여겨왔다. 이것이 내가 평화주의에 대해 커다란 증오를 품어 온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의 폭력 긍정은 당연히 국가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므로, 평화주의의 가면 뒤에 숨은 인민 전쟁의 긍정이 국가 초극을 목적으로 하는 양하는 기만에 대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글쓴이 : 미시마 유키오 外
옮긴이 : 김항(도쿄대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표상문화론 박사과정)
펴낸곳 : 새물결
펴낸날 : 2006. 3. 28
쪽 수 : 544쪽
책 값 : 1만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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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란 한 글자 위력

 

 

 

등’이란 한 글자 위력
한나라당 “이사 추천자 조항에 넣어라”
열린우리 “개방형이사제 무력화…안돼”
한겨레 허미경 기자 최현준 기자
▲ 여야가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27일 비정규직 관련 법안 등을 논의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참으로 열리지 못하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퇴장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관련기사]

개정된 사립학교법의 ‘개방형 이사제’ 조항은 ‘학교법인은 이사 정수의 4분의 1 이상은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가 2배수 추천하는 인사 중에서 선임해야 한다’(제14조 3항)고 돼 있다. 이사 정수는 ‘7인 이상’이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25일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열린우리당 쪽에 요구하면서 이 조항에 ‘등’을 삽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다면 4월 임시국회에 계류중인 다른 법안을 처리하는 데 있어 여당과 “대승적으로 타협하겠다”고 했다. 위 조항 가운데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를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 등’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글자 수는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교육현장에서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등’이란 낱말 하나가 개방형이사제 도입의 근간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 사학법은 민생법안의 올가미?

새 사학법의 취지는 사학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했고, 친인척의 학교장 취임을 금지해 족벌경영의 폐단을 막고자 했다. ‘등’을 넣는 순간 개방형이사제 도입은 무력해진다는 게 교육·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더욱이 초·중·고교의 학교운영위와 대학의 평의원회는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결정할 수 있는 법정 기구다. ‘등’을 통해 개방형이사 추천권을 다른 임의기구에 줄 경우, 이른바 재단의 뜻을 대변하는 ‘들러리’ 기구들이 추천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학교 현장은 추천권을 둘러싼 갈등의 장으로 변모한다.

사립학교개혁 국민운동본부(사학개혁국본) 박경양 상임대표는 “법정기구인 평의원회,학운위가 있는데 개방형이사 추천권을 다른 임의기구에 부여한다면 몇명이 모여 임의로 ‘개방형이사 추천’ 기구를 구성한 뒤 이사를 추천하겠다고 줄줄이 나설 경우 막을 길이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방형이사 추천 주체를 확대하겠다는 한나라당의 요구는 학교현장을 추천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몰아넣는 일이자 개방형이사 도입 취지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사학개혁국본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야의 사학법 재개정 움직임을 정치야합으로 못박았다. 이들은 “지난해의 사학법 개정은 열린우리당의 생색내기용 결과물이 아니라, 사학의 공공성을 바라는 국민적 투쟁의 성과물”이라며 “여야의 사학법 개악 음모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허미경 최현준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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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듯말듯…우리·민노 ‘반(反)한나라당 연대’

개인적으로

이번에 열우당은 강금실이고 진대제로 다 깨진 다음에

정동영-김한길 그대로 내려오고

새로 시작하는게 좋겠다는 생각

 

평상시에 원내 교섭 단체 터주지도 않는 특권층들이 어디 선거 때나 나와서 설래바리를

 

 

 

될듯말듯…우리·민노 ‘반(反)한나라당 연대’
우리당 연이은 ‘구애’에 민노당 일언지하 ‘퇴짜’…그 이유는?
입력 :2006-04-26 21:43:00   김세옥 (okokida@dailyseop.com)기자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연일 ‘딱지’를 맞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부산시장 후보로 전략 공천한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난 25일 김석준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부산의 일당(한나라당) 독점체제에 따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은 물론 무소속 후보까지 포함하는 ‘범시민연석회의’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가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경남도지사 후보로 나선 김두관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이 지난달 19일과 이달 5일 같은 지역에서 출마한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대전제 아래 울산시장과 경남도지사 자리 ‘빅딜’, 경남지역 후보단일화를 위한 ‘경선’ 등을 제안했다가 “앵벌이냐”라고 빈축을 산 데 이어, 벌써 두 번째다.

▲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대전제를 앞세우며 민주노동당에 후보단일화와 선거연대를 제안했던 열린우리당 김두관 경남도지사 후보와 오거돈 부산시장 후보.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사진부  

“말이 좋아 ‘반(反)한나라당 연대 구축’, 민노당에 후보내지 말라는 뜻”

거듭되는 열린우리당의 구애에 민주노동당이 콧대 높게 계속 ‘딱지’를 놓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명분 아래 여당 후보들이 제안하는 ‘후보단일화’, ‘선거연합’ 주장은 절차와 형식 그리고 진정성 중 어느 하나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지안 민주노동당 언론국장은 26일 데일리서프라이즈와의 전화통화에서 “열린우리당은 ‘반(反)한나라당 전선구축’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강조하며 우리에게 ‘왜 대의를 추구하지 않냐’고 비판한다”면서 “그렇다면 왜 여당은 대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일절 않다가 본격 선거전 중, 그것도 민주노동당 후보가 경쟁력을 갖는 지역에 대해서만 선거연대를 얘기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아성인 부산에서 벌써 두 번째 시장선거에 도전하고 있는 김석준 후보는 지난 2002년 지방선거 당시 19만2594표(16.8%)를 득표해 화제를 낳은 바 있다.

당시 선거에서 부산시장으로 당선된 한나라당 소속의 안상영 전 시장과 한이헌 민주당 후보는 각각 72만9589표와 22만1938표를 기록했다. 김 후보가 당시 집권당의 후보였던 민주당 후보에게 고작 2만9344표 밖에 뒤지지 않은 것으로, 이는 민주노동당에 매우 의미있는 득표율이다.

반면, 열린우리당이 지난 2004년 과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며 17대 국회에 제1당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실시된 6·5 재보선에서 여당의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오 전 장관은 현 시장인 허남식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 62.3%(56만6700표)보다 24.6%p(22만3590표) 부족한 37.7%(34만3110표)밖에 얻지 못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이 국장은 “결국 (지난 25일 있었던) 오거돈 후보의 ‘범시민연석회의’ 제안도 듣기 좋은 명분을 앞세워 김석준 민주노동당 후보를 배제, 그의 득표력을 흡수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겠냐”면서 “결국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을 주장하는 여당 후보들의 말은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내지 않길 바란다’는 말”이라고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이 국장은 또 현재 여당의 후보들이 제안을 던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비정규직법,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놓고 일말의 접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이는 두 정당이 어떻게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명분 아래 ‘당대당’도 아닌, 후보 개인의 기자회견·간담회 등에서 툭툭 던져지는 제안을 갖고 논의를 할 수 있겠냐”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여당 후보들의 제안 방식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이 국장은 “열린우리당의 주장이 ‘투정’을 넘어 ‘진정성’을 담보한 제안이 되려면 차근차근 순서부터 밟아야 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용진 대변인 역시 “열린우리당이 진정성을 말하기 위해선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는 지역 혹은 열린우리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는 지역 등에 대해 먼저 정책적으로 상호 공조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박 대변인은 “그럴 리도 없지만 설사 당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한나라당을 무찌르기 위해 열린우리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지도부가 말한다 하더라도 과연 당심(黨心)이 이를 따르겠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지난 2004년 11월 김창현 당시 사무총장이 최고위원회의 내부 전략 문건을 통해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듣더라도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한다”며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을 주장한 것이 알려지면서 민주노동당은 한 차례 거센 폭풍을 겪은 바 있다.

우리-민노 공조, 본격 논의될 수 있을까…당장의 전망은 ‘흐림’

그렇다면 5·31 지방선거를 ‘반(反)한나라당 정서’에 기반한 ‘지방권력 심판론’의 구도로 끌어가고 있는 열린우리당에선 민주노동당의 이 같은 문제제기를 수용, 정책을 밑바탕으로 한 기초단위부터의 ‘당대당’ 공조 논의를 차근차근 밟아나갈 생각이 있을까.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초선의원은 26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당장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후보들 사이에서) 민주노동당과 (개인적으로) 후보단일화 등을 추진하겠다는 말이 나오면 정동영 의장께선 ‘생각대로 해보라’고는 답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대당’ 논의로 이끌어 갈 의지까지 보이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여당의 후보가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대전제 아래 개별적으로 민주노동당에 선거연대 등을 제안해 소위 말하듯 ‘입질’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게 냉정한 현실이란 얘기다.

그러나 또 다른 당직자는 “지금 당장은 현실적이지 않아 보여도 계속 얘기를 꺼내면 차츰차츰 논의의 폭이 넓어지지 않겠냐”면서 “김두관 최고위원이나 오거돈 전 장관의 진정성을 폄훼하기 앞서 계속되는 그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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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티'인 군사 마니아들에게 말한다

 

 

 

나의 '안티'인 군사 마니아들에게 말한다
[기고-임종인] 국회 국방위 활동을 마무리하며
텍스트만보기   임종인(jonginim) 기자   
▲ 지난 2005년 12월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이라크파병연장안에 대해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이 반대토론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최근 나에 대한 군사 마니아들의 안티 활동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2006년 4월 국회에서 조기경보 통제기의 주파 수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적한 것이 계기가 됐다.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해군의 발전방향인 대양해군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온 것도 표적이 됐다.

마침 4월 임시국회가 끝나면 17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활동이 마무리된다. 그래서 지난 2년간 국방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무슨 일을 했고, 무엇을 주장했는지 중간결산을 해보려 한다.

내가 추구하는 통일·외교·안보 정책기조는 대미자주, 평화통일, 동북아 안정이다. 국방정책의 1순위는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 개선이다. 나는 이런 정책기조가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방정책의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50년 이상 우리 국방정책은 북한무력남침론, 북한무력우세론, 주한미군전력보충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대변화에 따라 이런 고정관념이 현실과 맞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2004년 국정감사에서 국회가 생긴지 56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무력 우세론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보다 우세하다는 나의 분석에 대해 국방부와 육·해·공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공군만 북한보다 우세하다고 인정했고, 육군과 해군은 북한보다 열세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의 정책기조는 자주국방·평화통일·병사인권

2004년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국방개혁안의 기초자료로 남북한 군사력 비교에 대한 연구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연구에서도 공군만 북한보다 우세(103%)했고, 육군(80%)과 해군(90%)은 북한보다 열세라고 나왔다.

그러나 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해군이나 육군의 전력도 북한보다 우세했다. 열세라고 주장할 근거는 희박했다. 결국 2005년 국정감사에서는 해군도 북한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2004년에 분석한 핵심내용을 소개하면, 해군은 1천톤이상 함정이 한국39:북한3으로 우리가 많았다. 공군은 신형 F-16이 153대로 북한의 동급 MIG-29(30대), MIG-23(46대)보다 77대가 더 많았다. 지상군도 우리는 신형 전차인 K1A1과 K1을 1100여대나 보유하고 있으나 북한은 우리와 동급의 신형전차가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 www.wedream.or.kr)

그런데도 육군은 지금도 북한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회의(합참) 의장은 272조원의 전력증강비가 더 투자되는 2020년에도 육군은 북한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2003년 3월 16일 미 국방부에서 군부 인사들과 가진 정례 회동에서 "한국의 국내총생산 규모는 북의 25~35배에 이른다, 필요한 만큼의 억지력을 부담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갖고 있다"(한겨레, 2003년 3월 16일)고 밝혔다.

이제 주한미군은 대북억지 역할을 하지 않는다

남북한 군사력비교를 통해 북한무력남침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다음으로 나는 주한미군전력보충론을 검증했다. 우리가 주한미군에게 매년 7천억원의 주둔비부담금(토지·세금·카투사 등 직간접지원비는 1조원 별도)을 주는 것은 미군이 우리를 돕기 위해 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더 이상 대북억지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한반도 안보는 한국군에게 맡기고 주한미군은 한국을 거점으로 전 세계 분쟁지역으로 보낸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2006년 1월 19일 반기문 장관과 라이스 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른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용산기지이전협정과 연합토지관리계획(LPP)협정이다. 주한미군 기지의 통폐합과 재배치를 위한 협정이다. 이로써 평택은 동북아기동군으로 변한 주한미군의 거점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둔비 부담금, 평택기지 이전부지 385만평, 기지이전비용 5조5천억원 등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9·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선제공격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는 작전계획 5027에 따른 대북군사연습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태에 휘말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빨리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와 한국군의 대미종속에 대한 인식없이 자주국방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한미군의 역할변화는 우리 민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군사적 종속에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 전력만 늘린다고 자주국방이 되는 게 아니다.

국방개혁 전력증강, 미국의 요구가 더 크게 작용했다

국방개혁과 전력증강에 대한 입장도 논리적 맥을 같이한다. 국방부는 2020년까지 한국군의 구조와 전력을 개편하는 국방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국방개혁의 실제 목표가 군구조 개편이 아니라 전력증강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의 국방개혁은 우리 스스로의 필요보다 미국의 요구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첨단무기 구입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전시작전권은 한국군이 능력이 돼야 줄 수 있다는 럼스펠드의 말은 이런 뜻이다. 그리고 한국군이 도입하는 첨단무기는 미군과의 연동을 위해 미국제가 대부분이고, 천문학적인 돈은 미국 무기회사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첨단무기의 필요성을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전력증강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국민, 특히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누누이 염려해왔다.

국방개혁2020에 따르면 국방부는 2020년까지 무려 272조원을 전력증강비로 투자할 계획이다. 경상비 349조원을 더하면 621조원이다. 예산증가율을 보면 초기 5년간(2006~’10) 무려 9.9%의 증가율을 유지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이미 70년대 율곡사업 이래 2005년까지 80조원을 전력투자비로 지출했다.

그러나 최근 3년간 경제성장률은 5%에도 못 미친다(2003년 3.1%, 2004년 4.6%, 2005년 4.0%). 2005년 말 기준 국가부채가 248조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비를 9.9%나 증액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나는 경제성장률이나 재정증가율 아래로 국방비 증액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700만명이 빈곤층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와 교육, 의료지원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국방예산만 9.9%씩 올리면 서민들에 대한 지원은 어렵다.

주변국에는 일관된 평화정책으로 대응해야

주변국 위협에 대비한 전력증강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다. 주변국 위협에 대비하려면 먼저 북한을 이긴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북한군도 못 이기면서 주변국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국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

지금 동북아정세가 매우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다. 북핵문제는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의 대응 또한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엄중함에도 선택할 방법이 많지 않다는 데 고민이 있다.

나는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평화를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림없는 평화정책을 통해 동북아 안정과 다자안보체제를 추구하는 것만이 나라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균형자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전력증강은 최소한의 자위권을 갖추되 방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정책은 평화노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노선은 위험하다. 우리가 전력증강을 외치는 것은 주변 4강의 군비경쟁을 가속화할 뿐이다.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전력증강이 안보를 더 위협하는 꼴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병사인권 개선으로 튼튼한 군대 만들어야

다음으로 내가 주력하는 분야는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다. 2005년 1월 10일 훈련소 인분사건, 2005년 6월 19일 전방GP총기사고가 벌어졌다. 나는 평소에도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사건을 계기로 병사들의 복무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새삼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국방정책의 우선순위를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에 두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비대한 육군을 줄이고 불필요한 간부도 줄여서 거기서 확보되는 예산을 병사 복무여건 개선에 우선 투자하라고 요구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첨단무기도 필요성을 철저히 검토하자고 한 것도 병사들에 대한 예산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병사 인권·복지 개선책은 11가지다.

첫째, 병사월급을 30만원으로 올리는 것이다. 나는 민주국가에서의 병역의무는 2200년전 진시황이 백성들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던 시절의 강제노역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병사들에게 의무복무를 시키려면 국민에게 세금을 걷어서 상당한 돈을 줘야 한다.

징병제 국가인 대만이나 독일에서는 병사들이 사회에서 또래들이 받는 평균임금의 1/3~1/4을 받고 있다. 이를 한국 기준에 대입해 계산해보니 30~40만원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30만원까지 당장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는 의무복무기간을 18개월로 줄이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징병제를 하는 나라는 60여개국이다. 그 중 우리보다 긴 의무복무기간을 가진 나라는 북한을 비롯한 5개국 정도로 알고 있다. 남북 대치상황이라고 하지만 24~27개월은 너무 길다. 병사들이 기능을 습득하는 데는 1~2개월이면 충분하다. 전차나 자주포 등 전문성이 필요한 병과는 부사관 같은 직업군인에게 맡기고, 의무복무기간은 18개월로 줄여야 한다.

셋째는 내무반을 침대형으로 빨리 바꾸는 것이다. 넷째는 미군의 75%(6,912원)까지 식대를 올리는 것이다. 그밖에도 나는 ▲보급품 지급 확대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 확대 ▲병사들의 서열문화 개선과 평상시 존댓말 사용 ▲병사 징계영창 폐지 ▲자살사고 방지에 국방부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장했다.

또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매년 9만여명이 대체복무로 군복무를 대신하고 있다. 병무청의 신체검사자료(2004년)를 보면, 대상자 36만7913명 중 현역 26만1657명, 대체복무 9만9448명, 면제(5·6급) 6808명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600여명이다. 9만명이 대체복무하는 상황에서 600명에게만 징역을 보내는 것을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대체복무는 병역면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현역보다 1년이 더 긴 3년동안 장애인이나 노인 수발 등 어떤 험한 일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입법을 권고했다. 조속히 대체복무제를 시행해서 당사자의 인권문제도 해결하고 복지예산도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장생처럼 내 눈에 불칼이 들어와도 나는 대미자주국방, 한반도 평화, 병사인권을 주장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 우리 아들, 조카인 병사를 위한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006. 4. 26 국회의원 임 종 인

추신 : 나를 공격하는 군사 마니아들에게 말씀드린다. 자유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주장도 존중해야 한다.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 자체를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같다.

다른 견해를 폈다고 무조건 비난부터 해서는 안 된다. 나와 견해가 다르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욕이 아닌 대화와 토론으로 모든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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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ian.org펌]세계의 사회주의자④ - 장 폴 사르트르

 

 

 

> 뉴스 > 국제 | 세계의 사회주의자
     
(실존주의)자유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실현된다
세계의 사회주의자④ - 장 폴 사르트르

"그것은 아직도 어린아이 단계에 있다. 그것은 자기 발전을 거의 시작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들 세기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직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낳았던 시대적 상황이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참여작가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고 주장한 사르트르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 시절 철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스승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57년에 쓴 위 논문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25년, 즉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대학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강좌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학생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는 것이나 또는 심지어 자신들의 세미나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는 것조차 경계하고 있었다."

2차대전 중 파리 지식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

     
   
▲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사시로 인해 시력이 크게 저하됐다.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사르트르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일하면서 <구토>, <벽>등 소설과 희곡작품을 발표하다가 2차대전 기간 군복무 중 독일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근무하던 중 그는 나치에 반대하는 희곡 '파리들'을 발표하는 등 독일군 치하에 있던 파리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으나 지식인으로서 활발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했다. 사르트르는 이때 그의 동반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 메를로 퐁티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지하서클 ‘사회주의와 자유’(Socialisme et Liberté)를 결성했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사회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를 강조했던 사르트르의 사상은 이미 전쟁중 그의 저항운동에서 그 단초를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사회주의와 자유’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서클을 해산하고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포로수용소 시절에 구상했던 실존주의 철학서 <존재와 무>를 1943년 발간함으로써 철학자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5년 교직생활을 청산한 후 사르트르는 학창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던 철학자 메를로 퐁티와 함께 좌파 잡지 <현대>를 창간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1968년 혁명에 열렬한 지지 보내

하지만 전후 자신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이 프랑스 지성계에서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1951∼1952년 무렵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시작한 이후였다.

사르트르는 냉전이 깊어가기 시작하자 1952년 빈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의 평화를 위한 민중대회에 참석하고 소련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의 실천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사르트르는 그의 오랜 친구였던 알베르 카뮈와 멀어졌다.

1950년대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이 자유의 신장과 사회의 변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당으로 보고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8년 혁명 당시 학생들의 투쟁을 한낱 철부지들의 모험주의로 치부했던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고 철저히 학생들의 편에 섰다.

그는 프랑스의 주요 지식인 가운데 처음으로 학생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인물이었다. 사르트르는 1968년 5월 혁명의 학생지도자 다니엘 콩방디와의 대담에서 "우리 사회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언가가 당신에게서 솟아 나오고 있다. 나는 이것을 가능성의 확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포기하지 말라"며 강력한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은 그에게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게 만들었지만 사르트르는 "하나의 가치, 즉 스스로 목적으로 고양되는 자유"로서의 사회주의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결합 시도
   
 
▲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이 1946년에 찍은 사르트르. 오른쪽은 건축가 장 뿌이용.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실존주의자로서 '자유'를 중시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실현할 "혁명은 보다 길게 지속될 것이며 보다 강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중 세력이 부르주아의 권력에 대해 부분적 승리를 거두고 진보와 반동이 되풀이되며 제한된 성공과 일시적 실패가 반복되는 이 싸움은…모든 권력이 완전히 해소되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적어도 50년은 걸릴 것"이라며 "혁명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의해 전복되는 순간이 아니라 권력을 극복해가는 하나의 긴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던 사르트르는 1968년 혁명 이후 1980년 숨을 거둘 때까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등 신좌파 학생들의 운동에 동참했다.

사르트르에 대해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그가 초기의 실존주의에서 후기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되면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민중을 지키는 민중계급의 옹호자로 남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실천적 좌파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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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4월 18일 (화) 13:34:31 윤재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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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끊임없이 합의한다”

 

 

 

스웨덴은 끊임없이 합의한다”

비예른 폰 시도브 스웨덴 국회의장에게 들어본 ‘복지와 성장의 조화’ 시스템… 위기마다 사회적 합의로 탈출구 마련, 인적 자본 개발로 ‘일하는 복지’ 만들어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이른바 ‘스웨덴 모델’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복지와 성장의 조화’로 불린다. 북유럽의 대표적 복지국가인 스웨덴의 정치경제 모델을 선호하든 그렇지 않든, 스웨덴은 오랫동안 지구상의 여러 복지국가 중 최우등생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스웨덴 모델은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한국에서도 ‘성장과 분배의 조화’ ‘사회적 대타협’의 조건과 가능성을 둘러싸고 곧잘 거론되는 시스템이다. 한국 경제의 미래와 관련해, 참여정부 출범 초기에 네덜란드 모델이 널리 연구되다가 요즘에는 스웨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타협·연대임금·산업구조 재편

<한겨레21>은 지난 4월11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스웨덴 국회의장인 비예른 폰 시도브(61)를 만나 ‘스웨덴 모델의 변화와 세계화의 도전’을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 비예른 의장은 대한민국 국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 대담 자리는 스웨덴 모델 연구 전문가인 김용기 박사(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가 마련했으며, 인터뷰는 주로 김 박사와 비예른 의장 사이에 이뤄졌다.


△ 스웨덴의 전통적인 역사적 타협모델은 지속되고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비예른 폰 시도브 국회의장.

1990년대 들어 세계화 흐름 속에서 스웨덴 모델도 점차 동요하고 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비예른 의장은 스웨덴의 전통적인 사회적 타협 모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사례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1913년에도 사회적 합의를 이룬 일이 있고, 2차 대전 직후와 1960년대에도 공공연금 관련 합의가 이뤄진 바 있다. 1994년에도 노동, 자본, 정부 사이에 공공연금과 관련해 합의가 이뤄졌다.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 합의를 모아냈다.”

스웨덴 모델은 △사회적 타협 △연대임금 정책(동일노동 동일임금)에 의한 소득불평등 해소 △고생산성 분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 세 가지가 주요 축을 이뤘다. 그러나 연대임금 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도 사실은 LO(스웨덴 블루칼라 노동조합총연맹)와 SAF(스웨덴경영자연맹) 그리고 SAP(스웨덴 사민당) 간의 역사적 타협이란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웨덴 모델은 일찍이 1930년대 초 집권 사민당이 스웨덴의 장래를 “노동 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행복해지는 ‘인민의 집’을 만들자”고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어떤 세밀한 청사진에 따라 이 모델이 탄생했다기보다는 여러 번에 걸친 역사적·전략적 타협을 통해 각종 제도와 정책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때마다 노동조합·사용자·정부는 공동으로 경제·노동·산업에 대한 대규모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를 토대로 타협을 모색했다.

“각 정당마다 성장을 선호하지만, 평등한 분배가 성장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토론도 많았다. 역사적으로 스웨덴에서 소득 격차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 정서가 강했다. 스웨덴의 노사 중앙교섭은 100년 가까운 전통이 있다. 최근에도 1995년 저인플레이션 정책을 중심으로 사용자협회와 노동계가 새로운 협상 틀을 만들어내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합의를 통해 노동생산성은 물론 자본생산성도 높아졌다. 인플레이션도 잡혔다. 노동생산성을 중시할 것인지 소득분배를 중시할 것인지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1997년 가계소득에서 최상위 10%와 최하위 10% 간의 격차를 보면 미국은 5.94인 반면 스웨덴은 2.72에 불과했다.

“세계화에도 성장과 분배 확보”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세계화와 산업구조 재편에 따른 환경 변화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은 해체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부터 고생산성 부문인 금속산업에서 금속노조와 금속연맹(중앙사용자단체)이 중앙교섭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임금협상에 나서면서 연대임금 정책이 흔들리고, 이전의 ‘완전고용’ 대신 실업률이 5%대로 증가하면서 스웨덴 모델이 심각한 곤경에 직면한 것도 사실이다. 경제와 복지를 양립하게 했던 스웨덴 복지국가 전략은 기능 부전에 빠진 것일까? 비예른 의장은 이에 대해 “스웨덴은 사실 자유무역 정책을 선호한다. 다른 노르딕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스웨덴 내부에서는 지금도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둘러싸고 활발한 논의를 벌이고 있다. 스웨덴은 특별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두고 있지 않다. 자본 이동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다만, 기업 지배구조가 고용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그 결과 세계화 흐름에서도 성장과 소득 분배라는 두 개의 가치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기업과 노동이 국제적 의식과 기준에 부합해야 하지만, 스웨덴 기업의 투자는 스웨덴 경제 내부의 고용창출로 이어져야 한다. 스웨덴에서도 우편·철도·전력 부문에서 민영화와 규제 완화가 취해지기는 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스웨덴 국민들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함께 여러 사회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 세계화 속에서 스웨덴 모델도 고뇌하고 있다.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대담 중인 비예른 의장(왼쪽)과 김용기 박사(맨 오른쪽).

사실 스웨덴에도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들어오고, 복지 관련 각종 급부가 삭감되거나 수혜 조건이 엄격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스웨덴 모델의 골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스웨덴은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일까? “외국 자본이 들어와도 스웨덴 경제 시스템에 적응해야 한다. 스웨덴에 투자한 외국 자본 100개 가운데 99개는 스웨덴 국내 환경에 맞추고 있다. 스웨덴 기업이든 미국 기업이든 노동 조건 등 제반 조건은 똑같다. 특별한 구별을 두지 않는다. 일부 외국 투자자들은 스웨덴 노동조합과의 관계 설정에서 성공하지 못해 고용 부문에서 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고용 문제든 노동자의 안전 문제든 세금 문제이든 간에 스웨덴은 기본적으로 외국 자본에 대한 특혜나 예외 적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스웨덴 경제에서 외국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지만 외국 자본이 스웨덴에 들어와서 특별히 물의를 일으킨 사례는 찾기 어렵다.”

교육·훈련으로 새 일자리 쉽게 얻어

사실 복지국가 스웨덴 모델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한테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는 ‘재분배와 평등’만 지향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 경제정책’을 통해 생산성 증가와 산업 합리화를 도모해 경제 성장을 꾀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스웨덴 모델은 과도한 복지 수혜가 경제에 무거운 족쇄로 작용하거나 ‘효율’보다는 ‘평등’을, ‘시장’보다는 ‘국가’를 강조하는 복지국가 모델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자본의 수익성만 중시하지도 않고 노동세력이 경제를 주도하는 것도 아닌 스웨덴 모델은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 ‘중간층의 복지국가’를 지향했다. “북유럽 국가들에는 한편으론 불평등을 줄이는 문제가 중요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용자들에게 해고의 자유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대신 그에 따른 정부 차원의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영미식이나 지중해식 그리고 독일을 대표로 하는 라인형 모델이 있지만, 북구에서는 그 나름의 또 다른 자율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 스웨덴에서도 소득 격차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상위층의 수입이 주식시장 붐을 타고 많아졌지만, 최상위와 최하위층을 뺀 나머지 국민 80%의 실질 가처분 소득은 그리 큰 격차가 없다. 이들의 대부분의 소득은 2배 이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스웨덴 사회의 대다수는 소득 불균형이 심각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경영자가 스톡옵션과 연봉으로 지나치게 많은 수입을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좌파·우파 가리지 않고 이런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사업가는 자기 돈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투자하는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합당하고 특별한 노력 없이 아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돈만 많이 챙긴다면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젊은 층의 가정이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사회적 관심과 동정이 쏟아진다.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를테면 스웨덴에서는 지하철에서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사례가 없다.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여전히 비교적 균등하다.”

스웨덴은 모든 사람에게 ‘지금, 여기’의 평등을 보장하기보다는 인적 자본 개발을 강조하는 ‘사회적 투자전략’을 강조해왔다. 교육-노동-퇴직의 세 단계를 순서대로 밟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유롭게 노동시장을 떠나 교육을 받고 다시 노동시장에 참가하는 것이 쉽도록 정책을 펴온 것이다. 비예른 의장은 “스웨덴 모델에서 교육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스웨덴 국민은 교육도 잘 받았고, 각종 사회 안전망이 있으므로 구조조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세계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적극적인 직업 교육·훈련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자신감도 있다는 게 스웨덴의 강점이다”고 말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생산성 향상이 중요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소득정책이 사회적 합의로 도입되고, 이에 따라 생산성이 다시 높아지면서 가계 소득도 높아졌다.”

“기혼여성의 경제적 의존 없다”

스웨덴은 노동시장 참가를 전제로 몇몇 사회보장 수급권이 주어지고, 급부가 소득에 비례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복지(welfare)보다는 일을 강조하는 복지(workfare)에 가깝다. 특히 1930년대에 출생률이 급속히 낮아지고 ‘인구문제 위기’를 겪게 되자 정부는 출산수당·아동수당·육아휴직·부부 분리과세를 도입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확산시켰다. 스웨덴에서 7살 이하 자녀를 둔 25∼45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1982년에 80%를 넘어섰고, 18∼64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도 1993년 77.2%에 이를 정도였다. 남녀간 임금 비율도 90%대로 거의 격차가 없다. “1960년대부터 스웨덴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기혼여성들이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필요성이 광범위하게 제기됐다. 이는 ‘사회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슬로건과 맞물려 주부를 비롯한 여성들의 광범위한 경제활동 참가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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