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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NL-PD는 되살려야 할 '해방의 이념'"

 

 

최장집 "NL-PD는 되살려야 할 '해방의 이념'"
  "PD 문제의식 소진 큰 문제"-"'통일'보다 '평화'가 더 중요"
  2005-10-21 오후 1:52:58
  "한 사회의 정당성의 기준은, 그리고 역사에 대한 평가 기준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정의된 어떤 형태의 이념의 구현이 아니라 시민적 자유, 권리, 복지,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얼마나 훌륭하게 실현하는가에 두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조건에서 누가 문제를 정의하고,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어떻게 설정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민중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이다."
  
  해방 60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좌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는 이 간단치 않은 질문에 뜻밖에도 1980년대 NL(민족해방)-PD(민중민주)의 문제의식을 다시 되새겨볼 것을 제안했다.
  
  해방 60년, 왜 오늘의 한국 사회 문제점 회피하나
  
  최장집 교수는 참여사회연구소가 21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연 '해방 6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해방 60년에 대한 한 해석'이라는 글에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한 냉철한 직시를 촉구했다.
  
  최 교수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해방 60년을 주제로 한 행사나 논의들은 '성찰 없는 현대사 이해'를 특징으로 한다"며 "정작 오늘의 한국 사회,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회피 내지 문제의식의 결핍을 나타내고 있다"고 최근의 분위기를 비판했다.
  
  최 교수는 "분단국가의 건설과 권위주의 산업화가 내포했던 갈등과 이로부터 제기된 문제 해결의 과제는 민주화로 떠 넘겨졌다"며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현대사는 곧 '민주주의를 향한 전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해방 60년의 역사를 어떻게 보고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디를 지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란 곧 오늘 한국 민주주의가 당면한 과제를 통해 조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억압과 궁핍,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던 민중을 역사와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낸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전히 민중이 소외된 민주주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민주화는 매우 불완전하고 미숙한 수준에 있다"며 "민주화야말로 한국 사회를 진정으로 성숙하게 하는, 한국인이 대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한국적 '해방의 이념' NL-PD 문제의식 다시 불러와야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열쇠'로 뜻밖에 NL-PD의 문제의식을 다시 불러올 것을 제안했다.
  
  최 교수는 "NL-PD의 문제의식은 강력한 반공 권위주의 국가와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민주화의 두 의제를 축약하고 있다"며 "한국 사회 내부로부터 제기됐고 민중성을 관심에 중심에 두는 이것이야말로 한국적 '해방의 이념'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절차적 수준에서 민주화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NL-PD의 이념을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것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며 "NL-PD의 문제의식은 현실의 핵심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내용으로 재구성돼 그 이념을 대표하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정당 체제 내로 들어오고, 그 정당이 선거 경쟁을 통해 다수당과 정부가 돼 그 개혁 프로그램들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NL-PD의 장점은 한국의 역사로부터 생성된 체제가 안고 있는 두 문제(민족 문제-민중 문제)를 상호연관성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라며 "그간 민족 문제에 초점을 둔 NL과 민중 문제에 초점을 둔 PD가 상호 연계성을 잃고 분리된 것과는 달리 둘 사이의 연계가 유지될 때 비로소 서로를 뒷받침하면서 상승적으로 그 의미를 크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둘 사이의 연계가 유지될 때 민족 문제는 민중 문제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반대로 민중 문제는 민족 문제의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다"며 "이 연계가 단절될 때 하나가 다른 것을 희생하여 자기 정당화와 자기 권력의 증진을 도모하는 분열과 적대성을 창출한다"고 설명했다.
  
  민주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PD적 문제의식의 소진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 상황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PD적 문제의식의 약화 또는 소진"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민주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결합한 경제 및 사회ㆍ노동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보통 사람들의 삶에 여러 형태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며 "각종 양극화의 현실은 그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현실은 민주화 이후 집권 정당과 집권 엘리트들이 이런 현실을 초래한 '노동 없는 민주주의'와 같은 신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통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NL-PD는 민주적 국가의 역할을 통한 개혁 프로그램들, 즉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 노동을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분배 구조의 개선과 사회 복지권의 확대를 포함하는 공동체와 공공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며 "하지만 민주정부는 대신 신자유주의적 극단을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여기에 노동참여, 사회복지와 같은 내용을 가미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 결합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민주정부의 과제"라고 덧붙였다.
  
  통일 지상주의 경계해야…'통일'보다 '평화'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
  
  한편 최 교수는 NL적 문제의식에 대한 강조가 초래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최 교수는 특히 "NL은 PD적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하나의 민족주의로 전락될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화 이후 정치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민족주의적 정서의 동원이나 이슈로 활용해 왔다"며 "이것은 민중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저평가하게 만들거나 나아가서는 민중 문제를 민족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분열적 요소로 보게 만들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최 교수는 "탈냉전 시기 남북한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평화와 공존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며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면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격차가 남북한 사이에 있는 현실에서 여전히 '민족 통일'을 최대 명제로 강조하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남북한 간의 이상적인 관계는 장기간에 걸쳐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북한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남한과 같이 자족적인 독립 국가로서 지위와 안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라며 "단일민족→분단 이후의 다음 단계는 완전히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분명한 것은 통일보다 평화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지적했다.
  
  최장집 교수는 마지막으로 "한 사회의 정당성의 기준은 시민적 자유, 권리, 복지,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얼마나 훌륭하게 실현하는가에 있다"며 "다른 사람이 아닌 민중이 민주주의를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해방 60년의 좌표를 제시했다.
  
   ▶ '해방 60년에 대한 한 해석' 전문보기
   
 
  강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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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조중동, 언론사주 탈세수사 때 불구속 수사 말하더니”

 

 

진중권 “조중동, 언론사주 탈세수사 때 불구속 수사 말하더니”
18일 SBS 전망대 “박 대표 장외투쟁하면 경제 살아나나...이성 찾아라”
입력 :2005-10-18 12:49   최고다 (no1@dailyseop.com)기자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가 천정배 법무장관의 수사권 지휘 발동에 대해 지지하고 나섰다.

진 씨는 18일 SBS 전망대에서 “천 장관의 수사권 지휘 결단이 참여정부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당장 재보선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시류에 편승하지 말고 끝까지 관철 시켰으면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진 씨는 이날 방송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천 장관 구하기에 나섰다고 소개했다.

그는 정 장관의 ‘수사권지휘 발동은 참여정부의 인권을 중요시 하는 철학을 대변 하는 것’이라는 발언과 김 장관의 ‘천 장관의 결단은 우리 사법제도가 새롭게 인권존중의 길로 나아가는 푯대가 될 것’이라는 발언을 언급하며 두 장관의 뜻에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박근혜 장외투쟁 하면 경제는 누가 챙기나?

진 씨는 이어 ‘현 정권은 이성을 상실했다’며 장외투쟁을 계획하는 박근혜 대표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진 씨는 “한 교수가 인터넷에 글 하나 올린 것으로 유신시절에나 창궐하던 대규모의 궐기대회를 하면 경제가 살아나냐”며 박 대표의 행동을 꼬집었다.

이어 그는 “(현 정권이 아닌) 박 대표야 말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찾아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후 <조선>, <중앙>, <동아>의 보수 신문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진 씨는 과거 신문사 사주들의 탈세 혐의로 구속 됐을 때의 조중동의 사설을 일일이 제기하며 180도달라진 보수신문의 태도를 비난했다.

다음은 <조선>, <중앙>, <동아>의 언론사 사주 탈세혐의로 구속 시 사설내용

조선일보 2001년 10월 11일자 사설의 일부

“우리의 헌법과 헌법정신은 형사 사법제도가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권리의 신장이란 대원칙에 입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형사 피의자도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무죄로 추정되어야 하며 그 취지에서 인신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도록 불구속재판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동아일보 2001년 8월 20일자 사설의 일부

“형사소송법 70조는 인신구속의 요건으로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 등 세 가지를 명시하고 있는데 구속된 사주들은 이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 법원의 최종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법리에도 어긋난다.”

중앙일보 1999년 1월 7일자 사설 일부

“불구속 수사는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형사법의 대원칙이다. 유죄 확정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헌법정신과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피의자는 구속시키는 것이 말썽이 없다’는 수사기관의 무사안일이 (...) 없어져야 한다. 또 구속을 행위에 대한 응징 수단으로 삼는 자의적인 법 운용도 문제다. 아울러 구속이 유무죄를 가늠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국민들의 법 감정도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 쪽으로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관/련/기/사
조중동 말바꾸기...언론사주는 불구속, 강정구는 구속? / 문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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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인혁당 사건의 진상부터 학습하라

 

 

박근혜는 인혁당 사건의 진상부터 학습하라
이성을 잃은 건 박근혜와 한나라당
입력 :2005-10-18 12:00   김동민 (한일장신대 교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오늘(18일) 기자회견을 갖고 체제수호를 위한 장외투쟁 불사 방침을 천명한다고 한다. 이름하여 '구국대회'라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야당이 국민과 함께 나가겠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또 17일 열린 당 상임운영위원회에서 천정배 장관의 강정구 교수 불구속수사 지시에 대해 "이것은 우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고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우리 체제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준 바가 되기 때문에 우리 안보와 체제 수호에도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강 교수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천정배 장관의 선택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지와 격려를 보낸다. 강 교수를 매도하고 천 장관을 흔드는 세력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주적'이다. 따라서 박 대표가 구상하는 장외투쟁은 '망국대회'가 될 터이니 국민들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

어지간하면 유신공주라는 박근혜 대표와 '인혁당 사건'을 연관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해도 너무 한다. 박 대표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전혀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름들을 상기해 보기 바란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우홍선,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의 사법살인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름들이다. 끔찍하게도 사형은 대법원이 확정 판결을 내린 바로 다음날 전광석화처럼 집행되었다.

출소 후 1년 가까이 자행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분들도 있고, 감옥에서 옥사한 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지치고 병든 몸으로 평생을 고통과 싸워 오면서도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도 있다.

인혁당은 실존하지 않는 중앙정보부 조작의 산물이었다. 목적은 민주화운동의 지원세력을 거세하면서 본때를 보임으로써 유신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정권을 지키고자 했던 파렴치한 짓인 것이다. 게다가 유신체제에 가장 강렬하게 저항했던 경상도 지역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사형을 포함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25명 중 20명이 대구·경북·부산·경남 출신이었다).

끔찍했던 고문의 실상을 살아계신 분의 증언으로 재생해 보고자 한다.(재경 대구경북민주동우회/민청학련·인혁당진상규명위원회 편 <인혁당 사건, 그 진실을 찾아서> 2005년 7월)

"그들은 옷을 완전히 벗겨 전신 나체로 시멘트 바닥에 꿇어 앉히고, 손목 발목에 수건을 감고 포승줄로 양 손목과 두 발목을 꽁꽁 묶었다. 다음에 긴 막대기를 사이에 끼워 두 사람이 덜렁 들어 올려 책상 두 개 사이에 걸쳐 놓으니 마치 도살장에서 네발 짐승을 묶어 매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머리는 천장을 향해 뚝 떨어진다. 이렇게 해놓고 그들은 내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콧구멍에 주전자로 물을 부어 넣는다. 그들은 '서울대 최교수도 이렇게 우리가 죽였다. 그래도 끄덕없다. 너같은 놈은 죽여도 아무런 상관없어' 하며 협박 공갈한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참 계속하니 지쳐서 비명 지를 힘도 없어 기절하고 말았다."

"나에게도 그들은 두 손을 꽉 묶고 전기줄을 감은 후 기계를 돌린다. 손바닥이 타고 전신이 충격에 아찔해진다. 정신을 잃게 된다. 나도 몰래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후 법정에서 알게 된 일인데, 당시 지하실에서 전기고문을 받던 또 다른 사람은 하재완이었다."

"나는 좌절했다. 기대했던 검찰권의 양심, 허무한 법의 공정성, 박정희 폭정에 대한 증오심이 내 머리를 압박한다. 저녁이 되어 구치소에 끌려왔다. 폭력 수사관이 내뱉던 말 '천년만에 잡은 정권…'. 박 정권을 신라의 부활로 보는 영남 출신 폭력 수사관들, 아니 그것이 박정희의 역사인식인지도 모른다."

박 정권은 이렇게 모진 고문으로 수사기록을 조작하고, 또 그걸 토대로 재판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며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저질렀다. 박 정권의 천인공노할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고문 흔적이 알려질 것이 두려운 중앙정보부는 시신마저 가족들에게 인계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 시신 쟁탈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문정현 신부는 경찰차 바퀴에 깔려 불구가 되기도 했다.

이후로 유신체제는 4년여를 연장했고, 그 때 박근혜씨는 소위 '퍼스트 레이디'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박 대표는 자신이 가담했던 유신체제의 만행을 사죄하면서 특히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평생을 은인자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박근혜씨가 박정희 망령에 기대어 야당의 대표에 차기 대권 주자로까지 부상하더니 자유민주주의를 욕보이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국민과 함께 나가겠다? 박정희 망령은 박근혜씨를 대권주자 반열에 올려 놓았지만, 바로 그게 업보가 되어 절대 대권에 오를 수 없게 돼 있다. 제발이지, 나라 걱정 그만 좀 하고, 허황된 생각일랑 버리고 은인자중 하기를 바란다. 그게 바로 박근혜 대표가 할 수 있는 구국의 길이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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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강교수 논리 반박 못하는 우익...웃지 못할 해프닝”

 

 

진중권 “강교수 논리 반박 못하는 우익...웃지 못할 해프닝”
17일 SBS전망대 “국보법 때문에 50년전 혼란에 다시 빠져들 수 있다” 지적
입력 :2005-10-17 12:04   조은영 (helloey@dailyseop.com)기자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참고 인내하는 제도다. 세상에 별난 사람도 많은데 교수가 인터넷 신문에 쓴 말도 안 되는 글 하나로 왜 이렇게 온 나라가 시끄러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진중권씨는 ‘진중권의 SBS 전망대’ 오프닝 칼럼에서 얼마 전 한나라당 소속 손학규 경기도 지사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을 인용, 국보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온 나라가 강정구 교수의 인터넷 글 하나로 50년 전 해방 전,후사의 혼란에 다시 빠져들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진중권씨는 자신의 칼럼에서 “별난 사람이 이치에 닿지 않는 발언을 했구나 하는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일을 국보법이 있으니 경찰에 고소가 들어가고, 경찰이 조사를 하니, 검찰이 나서게 되고, 검찰에서 ‘구속’ 운운하니 법무부장관이 나서고, 그러니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그야말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번일이 총장이 사퇴하고, 장관을 해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태인가?“ 되물었다.

이어 “이번일은 국보법 존재로 인해 우리가 치러야 할 ‘국력소모’이자 강 교수의 논리 하나 반박하지 못해서 사법의 칼을 빌리는 한국의 보수우익의 이념적 취약성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나라당은 물론 보수언론조차 주장해 온 원칙인 불구속 수사 확대는 ‘구속 수사’라는 게 피의자의 인신을 구속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처벌을 의미하고, 이는 판결 이전에 모든 피의자는 무죄추정을 받는다는 원칙에서 벗어나며, 따라서 구속수사는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을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므로 모든 형사 피의자에게 적용되는 불구속 수사 확대의 원칙이 왜 강정구 교수에게만은 예외가 되어야 하는지 법리적인 설명을 내놓거나, 강정구 교수가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를 할 우려가 있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강교수에게 적용될 국보법상의 '고무찬양죄'도 여야가 이미 폐지하기로 합의한 조항이었던 만큼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굼하다고 언급하며 정치권은 이제라도 이성을 되찾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민생’에 더 큰 신경을 써야할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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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노 대통령에게 “이번 기회에 강력한 검찰 개혁” 요청

 

 

심상정, 노 대통령에게 “이번 기회에 강력한 검찰 개혁” 요청
검찰 공안부 해체와 검찰 기소독점주의 개선도 요구
입력 :2005-10-17 11:53   김세옥 (okokida@dailyseop.com)기자
민주노동당은 17일 김종빈 검찰총장 사퇴와 관련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검찰의 철저한 인적쇄신을 당부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원내 부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진행한 브리핑에서 “김종빈 총장의 사퇴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을 구현할 검찰의 소명을 거스른 것이자, 검찰에 자기개혁의 의지가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심상정 원내 부대표는 “그동안 검찰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수십년 동안 권력과 돈의 시녀 역할을 자임해 왔다”며 “5번이나 수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구속시키지 못한 이건희 삼성회장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꼬집었다.

심상정 원내 부대표는 “반면 검찰은 노동·학생·사회운동 등 공안사건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구보수 세력 장기집권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며 송두율 교수 사건을 예로 들었다.

그는 “송두율 교수는 수사를 받기 위해 자기 발로 귀국했지만, 검찰은 구속수사부터 했다”며 “천정배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는 공안사건에 유독 편향적이며 반인권적 수사를 계속하는 검찰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심상정 원내 부대표는 “청와대는 이번 기회에 검찰의 힘을 정치 입신의 기회로 삼는 정치검사와 재벌의 떡값을 챙기면서 돈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비리검사, 민주인사 탄압으로 조직을 유지하는 공안검사 등 검찰상을 훼손하는 3대 검찰세력을 과감히 청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상정 원내 부대표는 또 검찰 내 공안부 해체와 검찰의 기소독점주의를 견제할 장치마련을 강하게 요구했다.

심 원내 부대표는 “검찰 공안부는 노동운동가와 민주인사, 민주화를 위해 운동한 학생들을 무더기로 잡아넣으며 스스로 권력을 키운 집단”이라면서 “정권안보 차원에서 조직적 필요로 과도히 부풀려진 공안부 해체를 더 이상 미뤄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검찰의 기소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권력분산은 검찰개혁의 핵심”이라며 “검찰의 기소독점주의 등 패권적 권력을 가능케 하는 장치를 이번 기회에 개선해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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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개구쟁이 스머프’를 학살했나

 

 

누가 ‘개구쟁이 스머프’를 학살했나
유니세프, 소년병 재활기금 조성 위해 스머프 폭격하다
구본권 기자
▲ 유니세프가 스머프 원작자인 페요 가족의 동의 아래 광고기획사를 통해 만든, 소년병 재활기금 조성용 애니메이션. 평화로운 스머프 마을의 공동체에 폭격이 퍼부어진 뒤 꼬마스머프들이 울고 있다. 전체 동영상은 기사 아랫부분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누가 스머프를 죽였나? 가가멜? 아니다.

세계 어린이들의 친근한 벗인 ‘개구쟁이 스머프’ 마을이 폭격을 받아 불에 타고 스머프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기 위한 TV 모금캠페인 광고에 인기 만화영화 캐릭터인 ‘스머프’를 등장시킨 것이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최근 벨기에 발로, 파란 피부의 스머프들이 폭격으로 학살당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다룬 기사를 상세히 보도했다.

25초 분량으로 제작된, 유니세프의 스머프 애니메이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머프 마을에 쏟아진 폭격…파괴된 공동체…스머트들의 울음

평화로운 스머프마을에 스머프들이 손을 잡고 캠프파이어 주변을 돌며 노래를 부르며 나타난다. 갑작스런 폭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파란 새들이 날아가고 토끼들은 버섯 모양의 집들로 이뤄진 친숙한 풍광의 스머프 마을 주변을 돌아다닌다.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폭탄의 충격과 불길을 일으키는 폭발이 일기 직전에, 작은 스머프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혼란스런 모습이 이어진다. 뒤이어 불길에 그을린 채 찢어진 옷을 입은 아기 스머프가 폭격으로 엉망이 된 또다른 스머프들에게 둘러싸인 채 주저앉아 구슬피 우는 장면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아이들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지 말자”는 메세지의 자막이 지나간다.

짧지만 소름끼치는 이 애니메이션은 유니세프가 만든 캠페인 광고로, 다음주부터 세계의 여러 나라의 텔레비전에 방송될 예정이다. 벨기에TV는 10월초에 25초짜리 이 애니메이션을 저녁뉴스를 통해 먼저 공개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유니세프 벨기에지부로 하여금, 아프리카 부룬디의 소년병 출신 아이들을 위해 재활기금 7만파운드를 조성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이 성인용 애니메이션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이 에피소드를 우연히 보게 된 어린 아이들은 공포에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스머프의 원작자 페요(1992년 사망)의 가족들에 의해 허가되었다. 유니세프와 스머프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IMPS는 이 애니메이션이 오후 9시 이전에 방송되지 않도록 했다.

벨기에 유니세프의 대변인 필리페 헤논은 “제3세계 분쟁지역의 고통받는 이미지로는 TV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없다는 것이 이런 충격적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논쟁의 여지는 많다. 전에 이런 식의 캠페인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동안 평범한 캠페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낮았다는 것을 학습해왔다.”

“스머프들이 팔과 머리를 잃은 진짜 전쟁과 같은 모습 그리려 했지만…”

이 캠페인을 기획한 광고대행사 퍼블리시스는 전쟁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일찍이 벨기에TV 시청자들이 ‘가장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958년 10월23일 만화책으로 첫선을 보인 <스머프>를 선택했다.

이 캠페인을 만든 퍼블리시스의 줄리 라무로는 대행사의 애초안보다는 표현수위가 낮아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스머프들이 팔을 잃거나 머리가 사라져버린, 진짜 전쟁과 같은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유니세프쪽이 ‘그건 안된다’라고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스머프 공식 팬클럽으로부터도 잠정적인 승인을 받았다. 대변인은 “이 애니메이션이 일부 사람들을 각성시킬 것 같다. 애니메이션은 매우 스머프답지 않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뭔가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벨기에는 <땡땡>과 <럭키 루크>를 비롯해 <스머프>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만화캐릭터들의 고향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 벨기에TV 스머프 동영상 보기: 40초 이후부터 애니메이션 방영

■ 스머프 홈페이지

■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

<개구쟁이 스머프>는 어떤 애니메이션?

▲ 한 싸이월드 이용자(jojay)의 미니홈피에는 다양한 스머프 캐릭터를 캡처받아 놓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개구쟁이 스머프>는 어린이용 만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안 메시지는 상당한 정치·사회적 함의가 깊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스머프에 담긴 정치·사회적 함의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국내에도 번역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마르크 슈미트)가 쓴 ‘스머프 만화의 정치사회적 주제’로 소개되었다.

이 책의 필자는 <개구쟁이 스머프>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화로 풀이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생활체의 전형으로 독립적이며 토지도 개인소유가 아닌 공동체의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마르크스를 상징한다. 나이와 지혜로, 스머프들의 존경을 받는 그는 수염을 기르고 늘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를 떠올리게 한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마을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철저한 분업, 평등, 공동소유 ‘이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성인용 우화

스머프 사회는 철저하게 분업사회다. 이들은 각기 다른 직업과 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 중요하기는 하지만,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스머프를 탄생시킨 벨기에 애니메이션 작가 페요가 스머프를 다듬고 있다.(사진)

집단 내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인민복을 떠오르게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도, 사제 스머프도 없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고 두 번째는 스머프를 잡아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참조 :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마르크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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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

암살되지 않았으면...

이정도야 학자들에게 기본이지

 

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
[전격인터뷰] “‘6·25는 통일전쟁” 강정구 교수 심경 토로
이본영 기자 이정아 기자
▲ 강정구
[관련기사]
“6·25는 통일전쟁” 등의 글이 문제가 돼 보수언론의 집중표적이 된 데 이어 구속 위기에까지 몰린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과 심경을 털어놨다.

강 교수 입장은 한마디로 “분단과 전쟁의 한국 현대사를 학술적으로 접근하는데, (보수언론과 수사기관 등이) 자꾸 오늘날의 기준에서 몰역사적인 결과론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체제를 편들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분단체제가 다행스런 것일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의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한 접근은 어디까지나 당시 상황의 객관적 전개에 기반한 것이지, 오늘날의 북한 체제를 추켜세우려는 데 본뜻이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11일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1시간30분간의 인터뷰에서 던져진 비판적 관점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 입장에서든, 남한 입장에서든, 유엔군 입장에서든 통일전쟁”

-최근 보수언론이나 수사기관이 문제삼는 여러 문장이나 발언 중 대표적인 것이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통일을 지상 과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북한이 선제공격해 일어난 한국전쟁을 합리화한다는 인상을 주는 면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6·25가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거나 나쁜 것이라는 가치평가가 아니다. 전쟁 전에도 북한은 민주기지론, 남한은 북진통일론을 주창하며 무력통일을 추구했다. 유엔은 1950년 10월7일 총회결의안을 통해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추인하면서 “한반도에서 통일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북한 입장에서든, 남한 입장에서든, 유엔군 입장에서든 통일전쟁이었다는 얘기다. 그것을 북한 식의 사회주의적인 통일을 하자는 주장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렇게 뻔한 얘기를 가지고 사법처리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주류 종이신문이 그렇게 몰고 가서 그렇지, 과연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충격적인 표현인지 의문이다.




“학문한다는 진중권씨의 부화뇌동에 ‘미쳤구먼’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한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전쟁론’을 언급하며 강 교수를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고 했다.
=진씨는 진보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는데, 그런 역사적 서술을 전쟁하자는 의도의 표현으로 둔갑시켰다. 극우진영의 색깔몰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문한다는 그가 그러는 것을 보고 “미쳤구만”이라고 해 줬다.

-맥아더가 있어서 남한체제가 유지됐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강 교수가 그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나.
=맥아더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고 인정한다. 처음엔 ‘생명 박탈자’로 묘사하려 했는데, ‘은인’과 대비되는 말을 찾다보니 ‘원수’가 떠오른 것이다. 마침 맥아더 동상 허물기 논란이 일어, 60년 동안 구세주이고 생명의 은인이라고만 생각해 온 그를 재평가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했다. 논쟁을 통해 맥아더에 대한 ‘은인론’, ‘구세주론’, ‘영웅론’을 검증하자는 거였다. 그러자면 점령사령관으로서의 역할, 이승만과의 관계 등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 달 안에 전쟁이 끝났을 것이고, 사망자는 1만명 이하였을 것이다.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와 민간인학살이 겹치면서 사망자가 400만명에 달했다. 맥아더가 모든 한국인들한테 원수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사망자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맥아더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

▲ `한국전쟁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 발언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정구 동국대 교수 지난 4일 오전 옥인동 보안분실앞에서 3차 소환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제자들이 선물한 엽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연합)
-그렇다고 전쟁의 숱한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을 맥아더한테만 지우는 것은 적절치 않고, 오히려 북한이 침공을 하지 않았거나,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줄었을 것이라는 반박도 가능하지 않나.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났어야 좋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표현했지, 모든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맥아더를 논하다 보니까 미국 부분이 강조된 것이다. 중국의 책임을 따질 기회가 되면 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북한의 얼굴을 그리라고 해서 얼굴을 그렸더니, 왜 주체사상이나 개인독재 같은 발바닥은 안그리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을 비판했다고 해서 중국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

-강 교수의 입장은 한국전쟁은 1948년 이후부터 진행된 남한 내 내전의 연장이라는 이른바 수정주의적 시각인가.
=꼭 무슨 시각을 들지 않더라도, 당시 역사가 그렇게 전개됐다. 1948년 2월 이후 1950년 6월24일까지 남한의 내전 과정에서 10만명이 죽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에서, 지리산과 오대산에서, 또 38선에서 전투가 계속됐다. 난 한국전쟁이 1948년에 시작됐고, 6·25는 그런 한국전쟁의 부분집합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강 교수는 인터넷매체 기고문에서, 해방 직후 고압적인 내용의 맥아더 명의 포고문과 소련군 치스챠코프 장군의 포고문을 비교하며 미군의 점령군적 성격을 강조했다.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는 포고문을 가지고 당시 한반도 주둔군의 성격을 재단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은가.
=소련군도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본다. 미국은 직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소련은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줬다는 차이가 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동유럽에서 그랬듯, 그냥 조선인들한테 맡겨도 사회주의로 가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외세척결이 제일의 과제였다는 점에서, 미군이나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곧바로 철수했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소련 개입안했으면 김일성집권도 불가능…여운형 집권했을 것”

-해방공간이나 한국전쟁에서 미국이나 맥아더의 개입이 없었다면 결국 김일성이 지도하는 북한체제가 남한을 삼켰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가정 아닌가.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운형 선생이 집권했을 것으로 나는 본다. 또 해방정국에는 김구 선생도 있었고, 김규식이나 안재홍 등 중도파들도 있었다. 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연립정권 형태의 정치체제를 향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해방 후 남한 민중의 77%가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게 당연했다는 논리 역시 지금의 일반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지 않나.
=1946년 미국무성과 미군정의 보고서 등은 여론조사 결과 등을 근거로 “조선은 공산화되기 쉬운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부분은 1988년 강만길 교수의 논문에 나온 것을 내가 89년에 재인용한 것이다. 만약 외세개입이 없고 조선사회가 스스로 결정했다면, 인민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근거들 중 하나를 거론한 것 뿐이다. 어떤 신문은 사회주의 지지가 70%고, 공산주의 지지는 7% 뿐이라고 반박했는데,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공산주의가 탄압받는 분위기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해도 사회주의라고 답했을 수도 있다. 그게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조선 사람들이 원하는 식으로 했어야 한다는 게 내 시각이다. 그런 시각을 오늘날의 기준을 적용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몰역사적 결과론이다. 민주적 기준으로 봐서 다수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지, 지금 기준으로 잘됐다거나 잘못됐다고 한 게 아니다. 어제(10일) <미국의 소리>와 인터뷰하며, “만약 당시 여론조사 결과대로 갔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나쁜 것이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지식인으로서의 내 성격상 입도 뻥긋하기 힘든 북한체제가 더 힘겨울 것이다.

“해방공간 여론대로 갔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나빴을 것”
“지식인으로 입뻥긋하기 힘든 북한체제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부분을 묻겠다. 한 신문에서는 강 교수의 부인을 인터뷰해 큰아들이 미국에서 법률회사에 다니고 있고, 작은아들은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쳤다고 보도했는데.
=반미하는 사람이 미국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식의 생각으로, 참 한심한 얘기다. 그렇다면 내가 미국에서 유학한 것부터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인터넷에는 심지어 내가 (사실과는 다르게) 타워팰리스에 산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집사람과 함께 유학생활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란 큰아들은 내가 육군에 가라고 해서 육군으로 복무했다. 그러고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녔는데, 미국은 로스쿨을 다니는 과정에서 직장을 잡기 때문에 미국 회사에 취직했다. 작은아들도 큰아들처럼 군복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유학 등의 사정으로 부모와 오래 떨어져 살아 그런지,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다. 집사람은 그런 애가 적응을 잘 못해 사고를 당할까봐 카투사로 보내려고 했다. 나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집사람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강 교수는 현재의 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보는가.
=점령군은 아니지만,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실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작은아들 일은 부끄럽다.

“논문에 통일한국 체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여야 한다고 썼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강 교수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한 뒤 ‘반시장경제적’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게 취업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동국대나 동국대 학생들이 도마에 오른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람이 내 강의를 들어봤는가? 파쇼적인 얘기다. 나는 1998년 학술지 <경제와 사회>에 게재한 논문 ‘4월혁명과 자주·민주·통일의 과제’에서 “통일된 한국의 사회경제체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돼야 한다”고 썼다. 좋아하든 않든, 이미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또 북한도 개혁·개방으로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번 논란에 대한 심경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이런 시련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에 쓴 글은 지탄의 대상은 될지언정 사법적 잣대가 동원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이제는 소모적이고 과거지향적인 게 아니라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진통이 필요하지 않나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시급하다. <한겨레> 글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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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필화사건을 되돌아보며

개한민국 현수준이다.

 

6·25 필화사건을 되돌아보며
[특별기고] 통일전쟁론 사법처리, 국내-국제법과 배치되는 모순
입력 :2005-10-12 12:05   강정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unikorea@cvnet.co.kr)
일주일 만에 빨리 걷기 운동을 하던 동네 야산에 올라갔다. 가을인데도 유달리 싱싱한 잎사귀는 여름을 연상시키고 풀냄새는 더욱 향기롭고 싱그러운 맛을 풍긴다.

오늘 내일 다가올지 모르는 불길한 굴레 때문인지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한층 생생하게 다가온다. 덕분에 울적하던 마음도 가시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릴 때 숲속과 풀밭에서 뒹굴던 까마득한 옛날 옛적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솟구침일까 왜 갑자기 그 옛날로 돌아갔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곧 상상의 나래는 20여 년 전 박사논문을 쓰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 때 남몰래 혼자서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오빠생각’, ‘두만강’, 황성옛터 등의 민족 애환이 담긴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달랬다. 한국전쟁 중의 세균전 자료와 일본 731부대에 의해 세균전 실험대상으로 희생된 조선 사람들을 연상하면서, 그 가운데 한 명이 행방불명된 사촌 형님이 아닐까 하는 가상을 해 보면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해방인 줄 알았더니 또 다시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외세가 우리 역사를 난도질 한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더구나 이런 오욕의 역사를 오욕이 아니라 자랑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역사왜곡에 의분과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그리기’와 ‘통일 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 미래를 조용히 관조해 보았다. 쓴 웃음으로 내린 결론이 여러 가지 시련을 함께해야 되는 팔자였다. 이러한 전망에 유학후배 부인께서 왜 그런 짐을 자진해서 걸머지려 하느냐면서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난다.

여러 가지 시련이야 어차피 팔자소관이지만 이를 둘러싼 온갖 허무맹랑한 혐의나 비방 등은 바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또 많은 분들이 의도치 않게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한 것 같다.

하나,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미국에 배은망덕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제기

조선 시대의 유림과 선비들은 비록 부자지간의 인연일지라도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필요하면 사죄를 촉구하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고 필자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이런 교습을 받았다. 더구나 참, 진실, 진리를 추구한다는 학문하는 사람까지도 조그마한 인연인 미국 유학에 발목 잡혀 미국의 문제점에 눈감게 되면 이 세상에 정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자세로는 왜곡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은 결코 밝혀지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유학이라는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고, 학문은 꽃이 피고, 우리 사회는 투명해지고 정의가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친일민족반역자 아들딸들이 자기 부모와 조부모에까지 이런 엄격한 잣대를 대었더라면 시민사회 수준의 과거청산이 자발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을 해 본다면 이 문제제기가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는 분명할 것이다.

둘, 국민정서에 반하는 6·25통일전쟁론이라는 문제제기

학문적 결론은 객관적 자료, 타당한 방법론, 논리적 추론, 연구자의 양심 등이 종합·포괄화 되어 귀결되는 것이지 학자가 남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이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권력의 간섭과 탄압, 국민정서라는 여론몰이, 돈과 명예 등을 초월하고 이들 간섭으로부터 굳건히 독립을 견지해, 곧 학문의 자유 속에서 귀결된 학문적 결론만이 값진 것이다.

참이나 진실은 결코 산술평균값이나 중간 값이 아니다. 이런 것에 구애되거나 국민정서에 맞는 학문만이 허용될 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의 지적혁명도 불가능 했을 테고,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도 정당화 되고 말 것이다. 또 국민정서는 수시로 바뀌므로 학문적 귀결은 국민정서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추듯 바뀌게 되는 이 엄청난 사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셋, 통일전쟁론의 찬양·고무성 문제제기

‘6·25는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내전’이라는 필자의 전쟁성격 규정은 남의 공식입장인 ‘6·25불법남침론’에서 남침을 인정한 셈이다. 이는 오히려 북의 공식입장인 남한의 북침에 대한 정당방위론을 부정한 셈이다. 이처럼 학문적 결과는 어떤 이해당사자에게 때로는 득이나 실도 되고, ‘찬양’도 되고 ‘이적’도 될 수밖에 없다.

학문적 결론은 객관적 자료 등에 의해 학문적으로 귀결되는 것이지 어느 단체나 특정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만약 달라진다면 그것은 객관성도 설명력도 없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과학적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다. 이는 진실과 진리를 배반하고 학자의 양심을 파는 것이며, 곡학아세해 지식인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자기부정이며, 학문의 존립기반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국보법 7조의 찬양·고무라는 사법적 잣대는 원초적으로 학문의 자유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넷, 소영웅주의의 발로라는 문제제기

이번 필화사건이 소영웅주의의 발로라면 나의 학문 일생 전체가 소영웅주의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것처럼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았고 이후의 학문적 궤적이 온통 일관되게 이 소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현대사의 참과 진실을 은폐하고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가로막는 주범인 냉전성역을 허무는 작업이야말로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 터닦기’의 요체이기 때문에 여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성역허물기 이게 나의 학문일생이었다.

이 냉전성역은 지난 반세기 이상 극단적인 냉전분단체제 아래 남북이 서로를 원천적으로 적대·부정하여 상대방에 극단적인 덫 칠을 가하여 악마화하고 자기 것은 절대적인 선으로 미화하거나 신성시 해온 과정에서 형성된 불가침의 금기영역이다. 이에는 공식적인 단일 표준정답이 있어 일체의 다른 해석이나 평가는 비록 학문연구라 하더라도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어 옥살이나 죽음 또는 불이익을 강요당할 정도여서 냉전성역은 파시즘과 폭압 그 자체다.

이에는 6·25, 주한미군, 연방제 통일, 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 민족자주, 평화협정, 정통성, 항일무장 투쟁, 민간인학살 등이지만 6·25는 냉전성역 0순위로 성역 중에 성역이다.

냉전성역은 그 기반이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과 같은 맹목적 반공반북이데올로기다. 반(反)과학이기에 진실의 왜곡·은폐이고 반(反)이성적이며, 맹목적이기에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래서 남북의 진정한 화해, 협력, 평화, 통일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으며 학문사상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기본을 침해한다. 그래서 이 성역은 허물어져야 한다. 이성적이라면 응당 이 냉전성역 0순위인 6·25에 대한 필자의 냉전성역허물기를 색깔몰이 할 게 아니라 밀어주고 끌어줘야 할 것이다.

박사논문 때부터 여러 가지 시련과 굴곡을 각오한 이 같은 학문적 행위가 소영웅주의라면(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학문공동체에 정말 이런 소영웅주의자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말 많았다면 나의 학문의 길은 훨씬 덜 외로웠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어이없는 일들은 벌써 사그리 지게 되었을 것이다.

다섯, 미군정 여론조사 ‘왜곡’의 문제제기와 역사평가

2005년 10월 3일(월) 2:59 <동아일보>는 아래와 같이 필자에게 포문을 열었다.

“강정구교수 ‘국민 다수가 공산주의 지지’ 발언 진위 검증”이라는 제목 아래 “▽광복 직후 실제로 공산주의 지지자가 압도적이었는가?=강 교수는 발표문의 16쪽 각주(脚註) 19번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남북 전체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1946년 8월 미군정 여론국이 전국의 84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무려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당시 조선 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가 인용한 미군정 여론조사 결과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73년 펴낸 자료집에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강 교수가 조사 결과를 상당히 부정확하게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서울 지역 1만 명에게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강 교수가 인용한 1946년 8월 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됨). 그 결과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 ... 이처럼 여러 조사는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 우선 이 여론조사는 서울대 민교협 발표문에서 각주에서 처리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였고 논문에서는 지엽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논문전체를 논하기보다 학계에서는 진부한지 오래인 각주 하나를 두고 너무 과잉반응을 보였다.

뒤에서 길게 인용한 필자의 1989년 발표 1990년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한국산업사회연구회편 <경제와 사회> 통권 7호 1990년 가을호 204~212쪽) 210쪽에서 필자는 그 출처를 각주9(아래 인용은 각주4)에서 밝힌 것처럼 1989년판 강만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했다.

이후 1996년판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에 재수록된 위의 논문은 출처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3> 104~105쪽’으로 고쳤고 잘 못 인용한 부분도(공산주의 지지율 4%를 7%로) 수정했다. 이처럼 이 여론조사는 필자가 1989년에 인용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이번에 처음 인용하거나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2. 해방공간인 당시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큰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다. 단지 조선공산당이 탄압받았듯이 공산주의의 경우 미군정의 탄압과 반공흑색선전 때문에 응답자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의도적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고 보기에 그 구분은 필자에게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물론 오늘도 일반인이 사회주의 자체를 막연하게 알고 있듯이 당시에도 응당 그랬고 또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차이 역시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런데도 <동아일보>처럼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시 반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높은 지지도를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 이 여론조사에서는 정치형태를 묻는 질문 항이 있었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필자 역시 <동아일보>의 최근 주장을 보고 이를 확인했다. 이 정치형태 질문에 대한 답항은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하게) 3%, 나. 수인독재(민의와는 무관하게) 4%, 다. 계급독재(타계급의 의지와 무관하게) 3%,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85%, 마. 모릅니다 5%”로 응답자의 85%는 ‘라. 대중정치(대의정치)’를 선택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2005.10.3)는

“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질문 항은 질문으로서 기본을 갖지 못한 것으로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답항 ‘라’의 대중정치와 대의정치는 동일하다고 보기 힘들고 오히려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마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답항을 억지로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답항으로 자격이 없는 질문항을 근거로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선호했다고 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더 나아가 답항 ‘라’의 원문인 ‘대중정치(대의정치)’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대중정치와 대립될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로 자의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과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해방공간의 여론조사를 해석할 때 유의할 점은 당시에는 ‘민주주의’란 결코 자본주의 옹호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트루만의 회고록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해방공간 남한 땅에는 두 종류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식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식 민주주의였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모두 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위의 답항 ‘가, 나, 다’ 는 모두 독재를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응답자 대부분은 응당 ‘라’ 답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공식적인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만을 보더라도 해방공간 민주주의는 우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4. 필자는 이 여론조사를 하나의 자료로 보았지 이 여론조사 결과라는 단독 자료 때문에 해방공간 당시 조선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했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뒤의 긴 인용문에서 서술된 것처럼 필자는 이미 1989년부터 여러 가지 주객관적 조건 때문에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통로였다...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고 결론지었다.

아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조선사회 전체가 사회주의화 될 객관적 요인으로는 사적 소유가 미미했던 경제토대의 특성, 계급구조의 불균형, 구래지배계급의 정통성 상실, 조선인 구지배계급의 경제적 지배계급에 국한된 제한성 등을, 주체적 요인으로는 노동·농민계급의 계급역량 성숙, 이들의 급진화, 좌익급진민족주의자의 독립운동의 헤게모니, 지배계급의 온정주의적 지배를 피지배계급이 극복한 점 등을 제시했다. 또한 국면적 요인이면서 촉진요인으로는 조선총독부의 건준 대상 정권이양, 해방이전의 소련군 진주 등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역사자료로는 1945년 초기 해방이전에 발표된 미 국무성의 조선정세보고서, 1946년 트루만 미 대통령의 특사로 남북을 방문한 Pauley 특사의 보고서, 위의 <동아일보>가 제시한 여론조사, 미군정청 각종 자료 등이었다.

주목할 사항은 1943년 중경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외교부장 조소앙이 당시 주중미대사관에 전달하자 미국무성은 그해 8월 2일자 보고서에서 “비록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좌익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비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반(半)사회주의 경제를 제창한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석과 논증의 기조에 이 여론조사 결과가 일치했기 때문에 자료로 활용한 것이지 아무 자료나 활용한 것은 아니다. 또 이 여론조사를 활용했다고 해서 이 여론조사 결과라는 단독요인만으로 해방공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지향성을 논증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해방공간의 사회주의 지향성은 종합적 분석과 논증의 결과이지 단순히 미군정 여론조사 하나로 내려지는 결론은 결코 아니었고 최소한 필자에게는 새삼스런 학문연구 결과도 아니었다. <동아일보>에 필자의 논지를 반박한 몇몇 학자들이 과연 이 1989년 논문과 이후 이의 연속인 필자의 논문들을 제대로 읽어 보고 내린 결론인지 의심스럽다.

5. 이 분석에서처럼 해방공간의 역사흐름이 사회주의 지향이었고 또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반영되었다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당시의 역사지향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학자로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사회주의든 선택은 당시의 조선 사람에게 응당 맡겨져야 하는 것이지 외세가 개입할 성격은 분명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일제의 35년 식민지 통치로부터 갓 벗어난 시점이기에 민족자주 지향은 최상의 덕목이었고 목표였다. 바로 친일파 숙청이 당시의 최우선 과제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명확하다 볼 수 있다.

엊그제 10월 10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와의 국가보안법 문제에 관한 인터뷰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필자는 아마 사회주의 통일한국에서 보다 지금의 남한에서의 나의 개인적 위상은 더 나았을 것이고 나에게 이로웠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지만, 학자로서 이 개인적 기준에 따라 당시의 역사가 당연히 자본주의로 가야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개인의 이해관계, 오늘날의 기준에서 과거의 역사평가를 복속시키고(몰역사적 결정론) 가치를 개입시키면 객관적 역사평가는 불가능해지고 학문은 학문으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여야 한다.

6. 필자는 역사관에 관한 한 남북이 함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곧, 북은 ‘발생적 결정론’(genesis determinism)에 빠져있고 남은 '몰역사적 결정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해 왔다. 북한의 발생적 결정론 역사관은 “북한의 처음이 좋았으니까 지금도 좋고 남한은 옛날이나 처음이 좋지 않았기에 지금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친일파 청산 등과 같은 대남 우위성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는 문제점을 북한의 역사관은 가지고 있다. 남한의 몰역사적 결과론은 “지금 현재가 좋고 대북 우위에 있으니까 과거도 좋았고 대북 우위에 있었다” 면서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 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강조했지만 이 몰역사적 결정론은 현재의 기준을 역사평가의 잣대로 삼기 때문에 현재를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 역사평가가 들쑥날쑥 춤을 추게 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몰역사적 결정론은 오늘날 남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북쪽에 비해 우세하므로 오늘의 남쪽 기준에서 해방공간을 평가해 역시 분단이 사회주의식 통일보다 잘 됐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서 1970년 초반까지 북한은 남한에 비해 경제역량이 높았고 자주성도 앞섰다. 이 때문에 4·19 당시 경제적 요인 때문에도 ‘통일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쳤다. 몰역사적 결정론에 의하면 1960년 당시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고 자주성이 높았기 때문에 해방공간 사회주의식 통일을 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이처럼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평가할 것이 아니라 남북을 아울러 우리 모두는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여섯, 사상검증의 문제점

앞의 여론조사와 관련된 필자의 서술을 마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수언론들은 색깔몰이로 덫 칠을 가해 왔다. 논문이나 컬럼 어디에도 가치지향적인 언술이 없다. 학자로서 역사를 평가할 때 자본주의는 선, 사회주의는 악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친북한도 안 되고 친남한도 안 된다. 필자의 경우 남북을 초월한 친민족이 기준이고(이를 두고 응당 민족지상주의로 몰아서는 안 될 것이다) 친역사적인 것이 잣대이다.

남한의 공식적인 해석과 역사를 찬양일변도로 평가하지 않으면 친북과 색깔몰이로 낙인찍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이러한 필자의 학문적 기준과 잣대는 지금처럼 친북이나 친공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이렇게 학문·사상의 자유가 폭력몰이, 색깔몰이, 사법처리 등으로 원천적으로 제약될 때 자율성은 속박되고 이 결과 역동적 창조성은 녹슬고 말 것이다.

경찰조사도 가치지향의 문제로 연결시켜 진행되었다. 이에 필자는 굳이 아래의 논문을 제시해 사상검정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 속에 우리가 추진해야 할 통일의 방향에 관하여 시론적인 수준에서 논하겠다. 첫째, 통일 경제형태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적 경제형태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중국형 사회주의를 포함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나 주관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데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행사하고 있는 객관적 규정력의 산물이다.” 출처: 강정구 “4월혁명과 현 단계 자주·민주·통일의 과제”(한국산업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 통권 39호 227쪽).

학문이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너무나도 필자에게는 소중하다. 물론 대부분의 연구자에게 국가보안법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연구주제가 연관이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에게 해당된다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는 용납될 수 없다. 냉전성역 허물기를 학문의 소명으로 삼고 있는 필자의 경우 왜 이렇게 소중한 것인지를 법정에서 밝힌 적이 있다.

냉전성역 허물기라는 학문지향에 대하여 법정에서 변호사는 “혹자는 피고인의 이러한 태도가 너무 비판적인데 치우쳐, 학문으로서의 객관성이 약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라고 물었다.

“저는 저의 학문이 객관적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학문적 연구결과가 객관성이 약한 것처럼 보이고 마치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저의 주 연구분야가 현대사, 통일, 북한이고 이 분야의 연구주제는 대부분 냉전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되었기에 이것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마치 학문이 아닌 것 같고 객관성이 덜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한국전쟁입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저의 학문연구 결과가 마치 객관성이 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제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적 좌표인 민족, 민중, 비판 학문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진술했다.

일곱, 6·25는 불법 침략전쟁이기에 통일전쟁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문제제기

이 문제제기는 모순의 극치를 이룬다. 통일전쟁론은 전쟁주체자의 전쟁목표를 기준으로 한 전쟁성격 규정이다. 이에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단순한 권력야욕(왕위쟁탈 전쟁이나 왕위계승전쟁), 민족통일, 지역통합, 종교 전파, 분단고착화, 징기스칸처럼 정복이나 영토 확장 등의 전쟁성격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따른 6·25의 성격규정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 376호처럼 통일전쟁, 북한의 규정처럼 조국해방전쟁, 남한의 북진통일론처럼 통일전쟁 등이 있을 수 있다.

대조적으로 침략전쟁은 국제법적 기준에 의한 전쟁성격 규정이다. 이에는 1950년 6월 15일과 27일 유엔안보리 결의 82호와 83호와 같이 평화파괴나 또 평화위협, 침략전쟁, 테러 등의 성격규정이 있을 수 있다. 위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6·25를 별개의 주권국가 간의 전면적 군사행위인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breach of peace)로 규정했다. 동시에 유엔은 북한을 별개의 주권국가로 승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6·25는 한반도 내의 5·10선거가 실시된 지역에 한정해 합법성을 유엔총회로부터 1949년 10월 21일 인정받은 대한민국과 아직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북한이라는 실체(국제법적으로는 반도단체) 사이의 내란, 곧 집안싸움인 것이다. 국제법 차원에서 내란은 무력행위 주체를 반도단체 수준에 한정할 때의 규정이고, 이 반도단체를 교전단체로 인정할 때 내전이 된다.

6·25의 경우 초기에 ‘동란’이나 ‘사변’으로 지칭했던 것은 동학란이나 농민반란 등과 같은 수준의 내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에서 북한을 평화파괴자로 규정하면서 교전단체가 되어 내전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6·25가 침략전쟁이냐 아니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유엔의 승인이라는 국제적 기준에 의하면 이는 내전이지 침략전쟁일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의 외교적 승인을 기준으로 하면 북한은 별개의 주권국가가 되므로 국제법적 기준으로 침략전쟁도 될 수 있다. 남한은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어쨌든 전쟁목표를 기준으로 한 통일전쟁 성격규정과 국제법을 기준으로 한 침략전쟁 규정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양립가능하다. 곧 침략전쟁이면서 통일전쟁이 될 수 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독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침략했을 경우 이는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침략전쟁이다. 이처럼 6·25를 남한의 공식 규정인 침략전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통일전쟁이나 민족해방전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침략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성격규정 했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배했다는 등의 주장은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또한 이 필화사건에서 가장 우려스런 것은 사실논쟁을 이념논쟁과 가치논쟁으로 환원시켜 색깔몰이로 판결을 내리려 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학문적 귀결인 통일전쟁론이 틀렸다면 실증적 차원에서 남북지도부가 전쟁의 목표에 통일을 배제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면 된다. 곧, 북의 민주기지론이나 남의 북진통일론이 통일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입증하면 된다.

또 무력이나 사회주의식 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평화나 자본주의식만이 통일이라는 것은 기치논쟁이지 사실논쟁이 될 수 없다. 하나로 합치면 통일이지 누가하면 통일이 되고 다른 누가 하면 통일이 안 된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지 논리와 현실은 아니다.

자본주의식 흡수통일인 독일통일만 통일이고 사회주의식 통일인 베트남통일은 아직도 통일이 안 되고 분단되어 있단 말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베트남 사람에게 물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사람이면 사람이지 백인만 사람이고 황인종과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백인종이 황인종과 흑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인종차별주의라는 가치관이 따를 수는 있지만 이런 인종차별주의조차 흑인과 황인종을 최소한 인간으로는 취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전대통령과 수구의 대표격인 조갑제도 6·25를 신라통일과 같이 통일시도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사실 차원에서 통일전쟁이고 맥아더가 전쟁광이라고 본 것이지 ‘잘됐고 못됐고’의 가치논의는 하지 않았다.

실재 필자의 한국전쟁 성격론은 1993년 <역사비평> 여름호에 “미국과 한국전쟁”이란 논문 발표 이후 시대 흐름에 맞춰 수정·보완 작업이 연속적으로 이뤄져 전쟁성격 규정도 변화 발전되어 왔다. 이 논문에 대해 수 십 개의 우익단체들이 고발했지만 당시 공안당국은 이에 내사를 벌였으나 학문자유 침해 여지가 있다고 내사 종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과 한국전쟁” <역사비평> 1993년 여름호 계간21호,(195쪽 표2 ‘한국전쟁 5단계’는 민족해방전쟁과 조국해방전쟁 및 계급해방 전쟁으로 성격규정)
: “미국과 한국전쟁”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205쪽 표2 ‘한국전쟁의 5단계’에서 민족해방전쟁과 계급전쟁으로 규정)
: “한미관계사:38선에서 IMF까지” 강치원 엮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백의, 2000. (‘한국전쟁 5단계설’ 도표에서 65쪽 통일전쟁 처음 등장)
: “한국전쟁과 민족통일: 전쟁의 통일을 넘어 평화와 화해의 통일로” <경제와 사회> 48호 2000년 겨울호(233쪽 표1. ‘한국전쟁 5단계설’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민족해방전쟁, 통일전쟁,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 함)
: “통일과 한국전쟁” 강정구, <민족의 생명권과 통일>당대, 2002,(98쪽 표1. ‘한국전쟁 5단계설’ 역시 통일전쟁과 민족해방전쟁 및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하고 북한이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조국해방전쟁보다 민족해방전쟁으로 서술하고 있음)“
: “6·15평화통일시대 한국전쟁의 역사적 재조명”(인천통일연대주최 토론회 발표문, 2005년 6월 30일)
(위와 같이 통일전쟁, 민족해방전쟁,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하고 있음)


여덟, 통일전쟁론을 부정하기 위한 요건의 문제

‘6·25 통일내전론’을 국가보안법이란 법의 잣대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학문적으로 부정(否定)하려면 북의 국토완정론이나 남의 북진통일론이 전쟁목적에서 통일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차원의 실증적 역사자료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안 376호를 폐기시켜야 한다.

이 ‘한반도 통일결의안’은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을 침공한 시점에서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결의안이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는 6·25를 침략의 개념으로 규정짓지 않고 ‘평화파괴’(a breach of the peace)로 규정했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이 철수할 것만 결정 했다.

Determines that this action constitutes a breach of the peace,
Calls for the immediate cessation of hostilities;
and Calls upon 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 to withdraw forth with their armed forces to the thirty-eighth parallel. 출처: Resolution 82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June 25, 1950)


또 1950년 6월 27일자 유엔 안보리결의안 83호 역시 38선 이북으로의 북한군 철수만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군사적 지원을 하도록 결정했다.

Recommends that the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furnish such assistance to the Republic of Korea as may be necessary to repel the armed attack and to restor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n the area. 출처: Resolution 83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June 27, 1950.

이들 유엔안보리결의안이 유엔군의 활동을 38도선 이남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38선을 월선하려면 응당 유엔의 별도 결의가 필요했고 이게 바로 1950년 10월 7일자 총회결의안 376호다. 376호 결의안은 38선 이북의 침공을 명시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권고사항 1항의 a, b, c 에서 한반도의 평화회복, 통일선거, 통일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아래 인용처럼 권고했다.

1. Recommends that
(a) All appropriate steps be taken to ensure conditions of stability throughout Korea;
(b) All constituent steps be taken, including the holding of election, under the auspices of the United Nations, for th establishment of a unified, independent and democratic government in the sovereign State of Korea;
(c) All sections and representative bodies of the population of Korea, South and North, be invited to cooperate with the organs of the United Nations in the restoration of peace, in the holding of elections and in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government. 출처: RESOLUTION ADOPTED ON THE REPORTS OF THE FIRST COMMITTEE, 376(v).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294th plenary meeting 7 October, 1950).


이는 유엔이 유엔군의 38도선 이북 침공을 통일전쟁으로 규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유엔은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라고 서술해 내전(civil war)으로 규정했다. 남한의 공식적 주장인 불법 남침이라는 침략전쟁과는 배치된다. 이 때문에 <한반도 평화조약의 체결>(국제법출판사, 1993)에서 김명기 국제법 전공 교수는 36쪽에서 유엔결의안을 분석하면서 침략전쟁이 아닌 내란으로 해석했다.

“위 결의는 북한의 대남 적대행위가 ‘평화의 파괴’를 구성한다고 했고, ‘침략행위’를 이룬다는 표현은 없다. 이는 당시의 무력을 내란으로 간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침략행위는 국가 간에만 이야기 될 수 있고 국내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김명기,『한반도 평화조약의 체결』국제법출판사, 1993, 36쪽).

이처럼 유엔도 통일전쟁론으로 규정하고 있고 위의 김명기 교수같은 분은 평화협정이 맺어진다하더라도 유엔사령부가 해체될 필요가 없고 유엔군 명의로 미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는 근거로 바로 이 유엔의 통일결의안 376호를 들고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은 엄연히 유엔가맹국이다. 유엔이 규정하고 지구촌의 대부분 학자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고, 일반인도 실재 통일목적을 부정하지 않은 이 엄연한 현실에서도 이런 보편주의를 거절하고 국보법의 금과옥조에 따라 나 홀로 식의 통일전쟁 불가론을 고집하는 정신상태는 정밀 검진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홉, 글로벌 시대와 국내법에 맞게 6·25 전쟁 성격론의 재고를

글로벌 시대를 맞아 6·25 전쟁성격 규정에서도 이제까지 남한의 ‘표준정답’이었던 침략전쟁론을 이제 국제법이나 유엔의 기준에 맞게 글로벌화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법과도 일치시키는 법치주의를 지켜야 한다. 그 대안은 내전형식의 침공이나 통일내전으로 전쟁성격을 재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대로 국제법상 별개의 주권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면 침략전쟁으로 규정할 수 없다. 유엔은 50년 6월 25일과 27일 결의안에서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라고 규정했고, 10월 7일 통일결의안 역시 통일을 전쟁목적으로 삼아 한 나라 안의 문제 곧, 내전으로 성격규정했다. 6·25이전에 유엔은 남한만을 38선 이남 합법정부로 승인했지 북을 별개의 주권국가로 승인하지 않아 침략전쟁의 성격규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국제법적으로 또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25는 침략전쟁이 아닌 내전이다. 내전에서 전쟁주체자의 전쟁목적이 통일이었기에 통일전쟁이다. 국제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보편주의 원칙과 요즘 금과옥조처럼 들먹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 설사 냉전기간에는 그랬다하더라도 이제 탈냉전-글로벌시대에는 이런 구각의 굴레에서 응당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내법과도 상치된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또 국가보안법에 의해 북한은 주권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판시되어 있다. 남한 법체계는 최소한 북한이 유엔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1991년 이전까지는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불법적인 반국가단체였다.

국내법에 의하더라도 1991년 이전에 발생한 남북 간의 전쟁인 6·25는 별개 주권국가 간의 전쟁일 수 없기 때문에, 곧 주권국가인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 존재하는 반국가단체에 불과한 북한과의 전쟁이기에, 침략전쟁이 성립될 수 없고 단지 내전일 수밖에 없다.

군사평론가인 김성전 예비역 중령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보수 세력이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북한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보수 세력들이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위배한 것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이들은 모두 사법처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수 세력이 국내법을 어기고 6·25를 침략전쟁으로 보면서 통일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거나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김성전의 지적처럼 스스로 모순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국내법에 맞게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부정하면, ‘6·25는 내전이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통일전쟁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경우 6·25를 통일내전이라고 학문적 결론을 내린 필자의 전쟁성격 규정과 완전히 동일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므로 필자에 대한 사법처리 요구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6·25 통일내전에 대해 사법처리 운운하는 이 땅의 일부 세력은 국제법이나 국내법을 초월한, 영어식 표현으로는 over and above either the internal or external laws= the lawless= outlaw인 셈이다.

“북한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본다면 수구세력들은 북한이라는 실체를 국가로서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수구세력들은 통일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한 국가가 또 다른 국가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무력으로 통일해야 한다면 그것은 침략전쟁으로 국가를 몰아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구세력들이 북한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전을 누가 먼저 일으켰건 목적이 통일이라면 통일을 위한 내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교수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출처: 김성전, “강정구 전에 수구세력부터 처벌하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게시판, 2005-09-05 05:36:16 From : 221.145.82.104


이제 이런 모순된 자화상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더구나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 화를 밥 먹듯이 외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말이다.

열, 마무리말

필자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맥아더 컬럼 들머리에 맥아더 동상 철거공방에서 폭력몰이와 색깔몰이는 이제 그만하고 냉정한 이성적 논쟁을 하자는 당부를 했다. 이를 비웃기나 하듯이 논증이나 설득이나 설명이 아니라 색깔몰이 일색으로 또 일부에서는 폭력몰이로 결판을 내고자 한다. 여기에 공안당국마저 사법처리 운운하고 가세하는 기막힌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는 해방과 분단 60년 환갑의 해다. 환갑은 지난 일생을 성찰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전환의 출발이다. 이번 필화사건을 마지막 소모적인 진통으로 마무리시키고 분단 60년에 즈음해 우리 남북 모두는 잘못된 지난날을 겸허히 반성하고, 시야를 남북 한 쪽에 고착시키는 외눈박이가 아니라 전 민족 차원으로 넓히고, 외세가 강제한 분단과 적대를 직시하고, 19세기 말의 각축전이 재연되고 있는 엄중한 오늘의 동북아정세를 남북이 함께 대처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실천에 나아가기를 염원하고 촉구한다.

끝으로 의도하지 않게 강의에 차질을 빚고 대학 업무에 불편을 끼친 점 등 각종 사항에 대해 동국대 학생과 동국대학교 당국에 유감을 표한다.



유첨: 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한국산업사회연구회편 <경제와 사회> 통권 7호 1990년 가을호 204~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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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동시에 조선은 역사전환기 또는 사회변혁기에 돌입한다. 그런 왜 이런 역사전환기를 맞지 않을 수 없었는가에 대해 구조적 요인과 국면적 요인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순수해방공간에서 조선은 일제가 남겨놓은 사회구조를 유산으로 받았고, 이 유산의 기초 위에 구성되었던 계급구조에 변동을 겪었고, 유산으로 받은 사회경제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의 순수해방공간의 조선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행로를 걸었던 것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즉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통로였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대략적인 개요는 ①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제를 일소하여 반봉건 착취제도를 근절시키고, ② 중요산업이나 기간산업 들을 국유화해서 독점자본주의 착취를 청산하고, ③ 경쟁자본주의는 육성하여 생산력 발전을 꾀하고, ④ 친일파를 숙청하고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사대주의도 배격하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택하고, ⑤ 복수정당을 허용하고 표현·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⑥ 농민과 노동자 등 피지배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각주1: 인민민주주의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민대중의 혁명적 정권으로 설명되어진다. 이는 “2개의 상이한 사회구조의 영속적 또는 공존적 형태는 아니면 자본주의적 요소를 순차적으로 제거하고 일소하기 위한 형태임과 동시에 장래의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발전・강화시키기 위한 정치형태이다.” 고희정 지음, 이남현 옮김, 『북한경제입문』, 청년사, 1988, 225쪽)

그럼 순수해방공간에서 왜 조선사회는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또한 외세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구비되었던 것으로 판단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첫째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식민지로부터 전승한 경제적 토대가 사회주의 이행에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이 되는 시점에서 철도, 항만, 광산 등은 거의 100%, 다른 중요산업은 90% 정도가(공정 자본금 기준으로는 93%) 토착조선인의 소유가 아니라 일본인 또는 조선총독부의 소유여고, 농지의 경우도 거의 18% 정도가 일본인 또는 조선 총독부의 소유였다.

이 사실은 해방과 동시에 이들 중요산업의 90% 이상과 농지의 18% 가까이가 하루 아침에 소유주가 없는, 즉 임자 없는 재산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생산수단은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민중을 착취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전사회나 국가의 공공소유화되어야 된다는 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경제적 특성은 해방 후 활성화하기 시작한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나 소작제의 실질적 와해가 확산되는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둘째, 해방공간과 동시에 식민지 패퇴라는 요인에 의해 초래된 계급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중요산업자본의 90% 이상이 일본인 소유였다. 이것은 독점자본이나 대규모자본은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 장악되고 조선인 자본가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규모자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도적 자본가는 일본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데, 일본인이 패퇴한 순수해방공간에서는 계급구조상 자본가 없는 노동자의 형성이라는, 자본주의 계급구조상 불균형적인 계급구조형태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요인이 계급구조상으로 형성되었고 일부 지주와 소작인 관계도 이러한 모습을 띠었다.

셋째, 토착지배계급인 조선인 지주와 자본자의 대부분은 친일 행위로 인해서 지배 계급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하여 피지배 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의 철저한 민족 차별정책과 지배전략에 의해 토착 조선인이 대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지극히 일부에게만,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허용되었다.

그래서 조선인 자본가는 지극히 수적으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기타 대부분의 자본가나 일부 지주들은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지속시키기 위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친일 행위를 강요 받았고 또한 이에 순응하였다. 일본인 지배 계급의 와해로 생긴 지배 계급의 지배력에 대한 공백을 구래의 조선인 지배 계급이 메꿀 수 없었던 요인은 특히 조선인 자본가 계급의 저형성(underevelopement)과 친일 행위로 인한 정통성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조선인 구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 계급으로서의 지위는 일본인 지배 계급과 공유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지배 계급의 역할은 부여받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과 동시에 정치권력이 곧바로 와해되고 그것을 계승할 정치적 지배 계급이 육성되지 않았기에 국가기구, 그 중에서도 경찰과 군대의 통제가 불가능해져 결국은 폭력수단의 독점이라는 국가 기구의 중요한 고유 영영이 상실되었다.

이상은 주로 경제구조와 계급구조에 관련된 객관적 요인에 치중하여 요인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해방공간을 역사 전환기로 보는 것은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이 구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일본인 지배 계급의 위치를 계승해서 사회 통제를 수행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러한 객관적 조건이 변혁주체세력의 자동적인 형성과 역량강화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급이익이나 집단이익의 실현은 의식적인 조직운동과 실천운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직운동, 의식운동, 실천운동을 통해서 계급이나 집단 역량이 강화되고 이익실현을 위해 다른 계급과의 활발한 계급 투쟁을 전개할 때, 즉 주관적으로 변혁의 주체를 형성하고 실천할 때에 변혁기나 역사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제 주관적으로 계급 형성과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주체적 조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일제시대에 활발했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노동자·농민의 역량이 성숙했다. 특히 1930년대 공산당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가 자생적인 운동으로 전화한 적색 농민운동과 적색 노동운동 등은 커밍스의 해방 후 임시인민위원회의 분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방 후 노동자 자주 관리나 소작제 철폐, 인민위원회에 의한 통치 지배권 장악 등을 수행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급진민족주의자들과 노동자·농민들 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노동자·농민이 급진화되었다. 급진민족주의자의 노선은 민족해방운동이 단순히 일본인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조선인 지배로 대처하는 사람바꿈식의 독립운동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와 수탈로부터도 해방되는 구조바꿈을 지향한, 즉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급진성이 노동자·농민들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지방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의 권력 기반을 제공한 주요인이다.

셋째, 민족해방투쟁에서 1920년대 후반 이후 급진민족주의자들이 민족 개량주의자나 문화민족주의자를 압도하여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독립운동주체라는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실제로 건국동맹 등의 기존조직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조선 인민 공화국, 지방 인민위원회 등의 형성으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미점령에 의한 반혁명과 반공산주의정책이 테러통치와 폭력에 기반하여 강력히 전개되지 않았다면 이들 급진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정치권력이 장악 및 통치되었음에 틀림없다.

넷째, 커밍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의 인구이동은 기존의 토착조선인 지주들이 종래의 가부장적 또는 보호자적인 전통관계로 소작 및 농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무너뜨렸다. 징용이나 징집, 고향을 등지고 일본, 북한, 만주의 탄광, 공업지, 농지 등으로 또 징집 및 징용으로 전쟁터에서 비정통적이고 비가부장적인 조직과 환경 속에서 생활한 이들 귀향인들은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또 집단 작업장에 배치되어 있는 정규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어느 정도 급진사상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들이 해방 후 해외에서 귀환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인적 자원 동원 능력은 고양될 수밖에 없었다. (각주2: 이에 대해서는 브루스 커밍스 지음, 홍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참조 바람.)

위와 같이 주체적 요인을 살펴보았다. 이들 객관적·주체적 요소들은 순수해방공간을 역사 전환기, 즉 사회 혁명기로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변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원인변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혁명이나 변혁을 촉진시키는 촉진변수(reinforcing variable)의 역할도 중요하다.

주로 촉진변수의 역할을 한 국면적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총독부가 급진 민족주의 세력인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한 여운형 집단에게 해방정권을 이양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한민당 계열의 민족개량주의자인 송진우나 김준연 등에 해방정권 이양교섭을 총독부에서 제의했다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음모의 일환일 가능성이 놓다.

조선총독부는 급진민족주의자에게 행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조선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일본인의 안전을 어는 정도 기해보자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고 이러한 조건에 가장 알맞는 조선인이 민족정통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민족개량주의자에 대한 행정이나 치안권 이양은 조선 민중의 엄청난 분노와 반발을 야기하리라는 것을 총독부는 감안했음에 틀림없다.

치안행정권을 이양 받은 급진 민족주의자의 일환인 건준은 조선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했고 동시에 정치범, 즉 대부분의 민족독립운동가를 석방했고 치안확보를 위한 치안대의 조직 등 국가고유기구인 폭력사용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수행할 기반을 재빨리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건준이나 나중에 창설된 조선 인민공화국은 전국 규모의 건준 지부, 지방 인민위원회가 비록 시민사회 내의 자생적 요인에 의해 창설되었다 하더라도 이들 지방조직의 구심적 역할과 지주의 역할을 함으로써 지방의 시민사회가 급속히 면혁역할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둘째, 45년 8월 15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하기 이전 단계에서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 땅에서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행위를 전개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주목적은 물론 조선해방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민족 해방을 위해 직접 전투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장차 소련의 역할이 크고, 또 급진주의자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게 했다. 실제 북한의 경우 소련군의 전투 행위와 그 이후 주둔은 북한의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유리한 지형을 제공해주었다.

이제까지 열거한 주·객관적 및 국면적 조건에 의해 조선 사회는 급진적인 역사전환기를 맞았다. 이러한 내적인 역사 전개 방향에 대해서, 즉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방향인 테로스(Telos)로 설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나아갈 필연성을 확인하는 자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1945년에 작성한 미국무성 보고서는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용이한 조건을 제공할 것”과 “러시아 지원의 사회주의 정권이 한반도에서 쉽게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각주3: U.S State Dept, Foreign Relation of the United States, 1945, V.6, 561~563쪽)

또한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남·북한을 방문했던 폴리(Pauley)특사도 그의 보고서에서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공산화되기 쉬운 경제적 조건을 가진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급진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귀속 재산을 미국의 전리품으로 계속 확보하여 이들 귀속 재산이 인민위원회(공산당이라고 표현했음)에 귀속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46년 5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조선민중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해방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보고 있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점령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반혁명, 반공산주의를 위한 테러통치와 이데올로기 조작을 수행한 지 9개월이 지난 뒤에 실시된 여론조사임에도 불구하고(즉 순수해방공간이 아니라 반혁명, 반공정책을 시행한 외세의 개입이 장기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14%가 자본주의, 4%가 공산주의, 8%가 모른다, 70%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비록 한정된 여론조사라 할지라도 응답자의 4분의 3이상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은 순수해방공간에서의 역사추동력이 어느 방향을 지향했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각주4: 강만길, “분단의 근본원인”, 『통일론 강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통일위원회 편, 1989, 중원문화 17쪽)

이와 같이 미군정의 자료 외에도 3년간 지속된 미점령군 군사통치에 관한 보고서 여기저기에서 이러한 급진운동인 급진성향이 팽배했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전개방향을 가늠하는 좋은 지표는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지방인민위원회, 여러 중요 정당들의 강령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하나인 김구계의 상해임시정부(이하 ‘임정’)의 건국강령만 하더라도 토지국유화, 중요산업 국유화, 무상교육 등 진보적인 정책을 천명했고 이를 검토한 미국무성은 임정이 “비록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좌익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비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반(半)사회주의 경제를 제창한다”라고 평가했다. (각주5: U.S. State Dept, R & A No. 1028, "Recent Korean Documents Relating to the Korean Provisional Govemment in Chunking", Aug. 2, 1942, 4쪽.)

대부분이 구지배계급인 지주와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고 친일·친미파의 소굴이었던 한민당을 제외하고 모든 우익정당들조차 비록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천명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에 순수해방공간에서의 역사진로는 진보적 민주주의이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농지 개혁에 관한 한민당의 강령은 농지제도의 합리적인 재편성이라는 추상적이고,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이현령비현령식(耳縣鈴鼻縣鈴)의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정당들이 농지개혁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순수해방공간의 시대적·사회적 요구에 직면하여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정강 아닌 속임수 정강을 내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추상형은 사회주의 지향이라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이제까지의 논리에서 충분히 도출해낸 것 같다. 그러면 실제로 진행된 역사의 흔적은 어떤 것인지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실현 시킬 역량을 충분히 갖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가 미점령군의 본격적이고 성공적인 반혁명적·반사회주의 캠페인 이전에는 모든 조직을 압도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경험적인 자료들은 우리 현대사의 구석구석에서 너무나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 인민공화국의 압도적 우세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 그리고 이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극우보수세력을 비교한 미군정의 자료를 간단히 인용함으로써 순수해방공간은 인공의 주도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로 또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추상형을 띠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들(인민위원회)은 모든 수준에서 통치조직을 가졌고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노동, 농업, 산업, 경찰 등 여러 분야의 기관장을 포함하고 집행위원회를 통하여 실질적인 정부통치기능을 수행했다. 농촌지역을 광범위하게 답사한 후 언더우드 박사는 ‘인공’이 ‘남’조선의 전역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활동적인 정치조직이라고 기술했다.(각주6: History of The State Armed Forces in Korea, "Part Ⅱ, Korean Politics and People", p.11.)

비록 그들 좌익주의 강세가 자발적인가 또는 강제적 성격인가 하는 것은 추측의 문제이지만 분명한 사실을 이들 좌익집단들이 주로 인민공화국의 조직력을 통해서 남조선 인민의 다수를 대표한다는 것이다.(각주7: U.S Armed Forces in Korea, "G-2 Weekly Reports", No. 23,24, 돌베개, 『미군정보고서』 11권, 311쪽.)

비교적 잘 알려진 명사들이 ‘한민당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 조직은 매우 약하고 층이 얇다. 아마도 머리는 크지만 몸뚱아리는 작은 거인과 같은 조직이 한민당인 것 같다. 아마 한민당은 미군사 정부와 밀접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각주8: “G-2 Weekly Summary", No.12, No.2, 돌베개, 위의 책, 11권, 174쪽.)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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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친절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이다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텍스트만보기   정민호(hynews20) 기자   
천만 관객 시대가 알려주듯 영화는 이제 국민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영화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진 때가 오늘이다. 더군다나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나타난 영화가 아니더라도 비디오나 TV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영화들까지 생각한다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국민의 문화행위 중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2005 효형출판
그런데 이러한 문화행위는 어느 정도나 그 값어치를 해내고 있을까? 양적인 팽창과 달리 질적으로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소도구적인 역할로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보고 난 뒤에 곧바로 잊게 되는 무의미한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이왕주, 그 역시 이러한 의문을 품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의문을 품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분야인 철학을 살려 영화들을 한 단계 높은 단계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영화와 철학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는데 그리하여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가 등장하게 됐다.

<디아더스>는 푸코, <친절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영화들을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여겨지는 철학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디 아더스>는 푸코의 것으로, <친철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으로, <슈렉>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는 칸트의 것으로, <피아노>는 에리히 프롬의 것으로, <북경자전거>는 하이데거의 것으로 해석하는 등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철학을 만나고 철학을 말하면서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영화와 철학의 만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가령 지은이는 <북경자전거>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을 찾아내는데 그 근거는 '부숴질 수는 있으나 패배할 수는 없는 자', 즉 '존재'라는 개념이 영화 속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대하는 지안과 구웨이의 서로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에서 자전거를 다루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주인공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구웨이가 자전거에 달려드는 그것은 자기 세계의 주인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강한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물론 구웨이를 욕하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전거에 보이는 그의 병적인 집착 그리고 한갓 도구인 자전거를 부순다고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돌로 해치는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물건과 생명은 그렇게 단순하게 부를 수 있는 고정된 명칭이 아니다. 생명 같은 물건이 있는가 하면 물건 같은 생명이 있다. 혹은 소유물로 위장된 존재가 있고, 존재로 위장된 소유물이 있다. 영웅은 먼저 그것을 준별하는 눈을 가진 자요, 또한 그것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용기를 가진 자를 말한다. 영화에거 구웨이는 그런 눈과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문' 중에서

또 다른 영화 <디 아더스>에서는 푸코의 이름이 등장한다. <디 아더스>는 깜짝 놀랄 반전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 반전을 만들고 가능케 했던 일련의 서사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느 영화에서나 나와 타자의 관계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그것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디 아더스>는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보는 가치관에서 벗어나 '타자로 전락해 버린 나'를 다룸으로써 흥미로운 사실들을 제공해할 수 있었는데 이것에 대한 메시지들 또한 자연스럽게 푸코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나비>에서는 '니체'이름 등장

마찬가지로 <트루먼 쇼>는 안주를 넘어서 떠나려는 열망을 표출하는 유목민의 갈 길을 다루기에 들뢰즈의 이름이 등장하고, <나비>는 삶의 시간을 과거나 미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서 찾는 것임을 보여주기에 '니체'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최상의 조건에서도 안나는 낙태를 선택했으나 최악의 조건에서도 유키는 분만을 선택했다. 한때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때로 진저리치며 잊고 싶은 기억들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까지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 사상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본문'중에서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의 이러한 과정들은 낯설면서도 대단히 흥미롭다. 영화가 인생살이를 말하고 철학 또한 인생살이를 기본 바탕으로 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공통분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와 철학의 만남은 전문가들을 넘어 대중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허나 이왕주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영화와 철학, 그 절묘한 만남으로 영화를 보는 문화행위에 지적유희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 철학은 목적 그대로 인생사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와 철학, 모두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철학과 영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까지 지적유희를 가능케하고 있다. 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장 친근한 문화행위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했으며, 가장 친근한 문화행위를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니 그 즐거움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품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언급한 영화들로 시작하거나, 또한 책에서 지은이가 언급한 철학도서들로 시작한다면 강물에 몸을 맡기듯 그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으리라.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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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후보 뒤집어보기⑧] 권영길, 척박한 보수의 땅에 진보의 나무를 심는 큰 형님

 

 

[대권후보 뒤집어보기⑧] 권영길, 척박한 보수의 땅에 진보의 나무를 심는 큰 형님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10-07 12:47]
▲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자료사진)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데일리서프라이즈는 2007년 대선 유력 후보들을 연속 해부하는 특집기사를 연재합니다. '그가 대통령이 돼야하는 이유 10가지'입니다. 조선닷컴이 최근 연재한 '...안되는 이유 10가지'를 뒤집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매체가 어떤 의도로 그런 연재를 했는지의 이유와 함께 후보군들에게서 또 다른 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칼릴 지브란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보지만 정작 보아야 할 자신의 허물에는 어둡다." 본보가 연재할 '...돼야하는 이유 10가지'에서 나타나는 각 후보들의 장점이 실제 경선에서 득표율과 연결될 지의 전망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맡깁니다.<편집자 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진보정당을 상징하는 대표 브랜드다. 그는 김대중, 이회창 후보와 대결한 97년 대선과 노무현, 이회창 후보와 맞붙은 200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독자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정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애당초 보이지 않았다. 진보세력의 독자 후보들은 87년 이후 대선 때마다 사퇴와 연대 요구에 시달려왔다. 많은 이들은 “이길 수도 없는 선거에 왜 나서서 범민주개혁세력 후보의 표를 갉아먹느냐”고 비판했다.

권영길 의원은 두 번이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시도했다. 결과만을 보면 당선은 커녕 기대했던 득표율에도 미달했다. 하지만 그가 감행한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지난해 4 ·15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이라는 소중한 씨앗이 됐다. 이후 민노당은 군소정당의 한계를 뛰어넘고 진보적 의제를 공론화시키는 정책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제도권 내에 진보정당의 씨앗을 뿌렸던 권영길은 그 결실을 거둬야 하지 않을까. 차기 대선은 고건 전 총리를 비롯 여권에서 김근태, 이해찬, 정동영,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손학규, 이명박 등 쟁쟁한 후보들이 거론되고 있다.

개혁완수를 위해 재집권을 희망하는 열린우리당이나 정권탈환이 실패할 때 당 해체가 불가피한 한나라당으로서는 차기 대선에서 불꽃 튀는 격돌을 벌일 것이다. 진보진영 또한 외연확대와 안정적 뿌리내림 더 나아가 2012년 집권 플랜을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다.

조선닷컴은 최근 대선후보 시리즈를 통해 진보진영의 유력 후보 권영길 편에서 ‘황당 공약을 남발하는 위장서민’이라는 의문부호를 달고 다소 색깔론적인 시각에서 권 후보를 평가했다.

본보는 권영길 의원과 민주노동당을 유기적으로 결합, 차기 대선 가능성을 전망해봤다. 조선닷컴이 지적대로 권영길 의원의 대통령 당선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와 소속 정당이 실력만큼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 2012년 집권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개인 권영길이 아니라 진보정당 대선후보 권영길

차기 대선은 개헌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2007년 이후 5년간 한국을 이끌어나갈 국정 최고 책임자를 선출하는 것. 조선닷컴은 권영길 의원과 관련 차기 대권 여론조사의 낮은 지지도에 근거로 “대통령의 꿈은 역부족일 것”이라며 “그는 왜 대통령이 되기 힘든 것일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이어 조선닷컴은 △비대중적 한계와 기득권층의 반감 △독자적 득표력의 취약성 △부유세 등 극단적이고 허황한 공약 △위법경력 △노회찬 의원과의 경쟁관계 △위장 서민 논란 △부친의 빨치산 전력 등을 약점으로 일일이 거론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없을까? 조선닷컴은 특히 ‘뜨는 노회찬, 지는 권영길’이라는 구도를 사용, 최악의 경우 (권영길 의원이) 차기 대선후보조차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지난 4월 11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의회진출 1주년 기념 <민주노동당의 길-빈곤극복과 평화실현>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권영길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민노당은 기존 정당과는 시스템이나 체계나 다른 정당이다. 이 때문에 정치인 권영길 개인이 아닌 진보정당 대선후보 권영길로 평가해야 그의 대선 전망에 대한 합당한 평가가 가능하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등 기존의 여야 정당이 이념적 스펙트럼이 혼재돼 있다면 진보성이라는 비교적 단일한 이념으로 조직돼 있고 당내 민주화에 있어 훨씬 돋보이는 정당이다. 기존 정당들은 누가 대선후보가 되느냐에 따라 당의 전반적인 컬러는 물론 실세그룹도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반면 민노당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권영길 혹은 노회찬 그리고 제3자 누가 나서더라도 민노당의 대선후보는 당의 핵심적 가치와 이념을 실현해내는 매개자일 뿐이다. 인물보다는 소속 정당의 가능성에 보다 포커스를 둬야 한다.

이 때문에 권영길과 소속 정당인 민노당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노당의 입장에서 2007년 집권은 실현이 어렵겠지만 2012년 집권의 가능성은 충분히 탐색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차기 대선에서 권영길 의원은 2012년 집권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분파주의 노동운동을 통합으로 이끈 리더십

권영길 의원은 90년대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상징이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국회의원 권영길’보다는 ‘위원장 권영길’ 혹은 ‘대표 권영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 권 의원과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영역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다양한 인사들은 아직도 ‘위원장’ 혹은 ‘대표’로 그를 부른다.

먼저 ‘위원장 권영길’은 과거 노동운동 지도자 시절의 그를 가리키는 것. 또한 ‘대표 권영길’는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며 진보정치의 상징으로 활동한 경력을 담아낸 호칭이다.

권영길 의원은 80년대 말 노동운동에 투신, 1994년까지 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부터 3대 위위원장을, 95년부터 97년까지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국민승리21’ 창당과 97년 대선 출마, 2000년 16대 총선 출마,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후보로 대선전에 뛰어들었다.

오랜 노동운동 생활과 진보정당의 풍부한 경험 속에서 그가 가지는 강점은 통합의 리더십이다. 정치는 한마디로 이해집단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하는 예술. 권 의원은 특히 노동운동 지도자 시절과 진보정당의 대표를 역임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직들을 큰 대과없이 무난히 이끌어왔다. 특히 김영삼 정권 말기 노동법 개악안이 날치기 통과된 것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이끈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매카시즘은 독이 아니라 득

색깔론은 지역주의 정치와 함께 우리 정치를 후퇴시킨 가장 고질적인 악재였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통해 민주화에 헌신했던 인사들은 ‘빨갱이’라는 딱지를 천형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과거 독재정권의 논리대로 본다면 민노당은 ‘빨갱이 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좌우파를 막론한 운동권 인사들이 주요 포스트에 포진해있다.

조선닷컴은 대선후보 권영길의 약점으로 부친의 빨치산 경력을 거론한 바 있다. 조선닷컴은 대선후보 시리즈 권영길 편에서 “부친 전력 문제는 물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고 전제하면서도 “국가 지도자로서 자격을 논할 때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색깔론의 냄새를 짙게 풍긴 부친의 빨치산 경력이 ‘과연 약점이 될까’라는 점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를 볼 때 다소 의문이다.

▲ 지난 3월 21일 오후 열린 국회 통외통위(독도문제 현안보고) 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반기문 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후보 시절 장인의 부역 의혹에 맞서 “유권자 여러분들께서 부역자의 딸이 아내라는 이유로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대통령 후보를 포기하겠습니다”고 호소했다. 이에 국민들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택, 그의 아픈 가족사를 보듬어 안았다.

2002년에도 통하지 않았던 이른바 색깔론이 2007년에 통할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색깔론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과거 선거 때마다 몰아친 매카시즘적 광풍에 휩쓸리지 않은 만큼 우리 사회는 이미 성숙해있다.

△개혁 대 진보로 재편되는 정치구도

87년 이후 대선이나 총선의 주요 국면에서 진보진영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정권의 탄압도 내부의 갈등도 아니었다. 어쩌면 독자 당선이 어려운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표심리로 진보진영은 범민주개혁세력 후보의 당선을 도와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때문에 개혁과 진보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많은 유권자들은 머뭇거렸다. 실제 권영길 후보의 경우 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각각 1.2%와 3.9%에 불과한 투표율을 얻었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대선 정국 최대의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방송토론 등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 진보정당의 의미있는 득표를 기대했다.

하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의원의 지지 철회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많은 지지자들이 노무현 일병 구하기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4.15 총선 직전에도 ‘거대 야당의 부활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표이론이 등장, 민노당은 적잖은 손해를 겪었다.

과연 차기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도 이러한 관행들이 여전히 반복될까? 가능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민노당은 원내 진입 이후 누구나가 인정하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는 10석이라는 군소정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진보적 의제설정에 성공한 것이고 이는 지지자층의 확대로 늘어났다.

X파일로 드러난 한국사회의 추악한 정경언 유착 구조에 대해 민노당은 가장 선명한 입장을 견지,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점을 중요하게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의석수로는 민주당이 3당이지만 일반인의 인식에서는 민노당이 여전히 3당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아울러 보수라는 이념 앞에 ‘합리적’ ‘개혁적’ ‘혁신적’ 이라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거나 뉴라이트 운동의 확산 등은 보수가 처한 위기감을 그대로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개혁 대 진보라는 구도로 변화해나갈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설득력 얻어가는 공약들

권영길과 민노당의 이미지 중 하나는 과격하다는 것. 또한 민노당의 강령과 부유세 등 주요 정책들 또한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먼저 강령부분. 딱딱한 사회과학적 용어의 사용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유렵식 사회민주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민노당의 강령을 지나치게 삐닥하게 보는 시선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그만큼 왜곡돼있다는 반증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은 민노당이 추구하는 이념이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지향하는 수준보다 더 우파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홍세화 한겨례신문 기획위원은 과거 권영길 의원의 대선출마와 관련한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당이 존재한다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도 존재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선 유권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서민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당은 없었다”면서 “민주노동당은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사회를,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사회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당신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며 사회경제적 처지에 걸맞는 정치의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따른 정당 선택이 이뤄질 때 한국사회는 비로소 하나의 ‘사회’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노당이 주장하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등은 정말 허황된 공약인가? 교육과 의료, 부동산의 문제로 우리 국민들이 감당해온 엄청난 비용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황당한 공약으로 평가하기보다 진보적 관점에서의 고민과 문제해결이라는 데 무게를 둬야 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또한 이에따른 사회 양극화는 사회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수준으로 진전되고 있다.

사실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 위기 탈출은 고통분담이라는 슬로건에도 노동자와 서민층의 고통전담으로 어느 정도 극복됐다. 하지만 이후 이들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너무 미진한 편이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등 민노당의 3대 핵심정책은 지난 대선에서 그 참신성에도 실현 가능성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차기 대선에서도 과연 ‘황당한 공약’이라고 평가받을 것인지는 현재 한국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과 토대, 복지수준만을 살펴봐도 답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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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2월 5일 오후 이해찬 국무총리가 7일째 단식농성중인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을 찾아 유감표명의 뜻을 전하고 있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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