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그것도 허리우드 극장에서. 허리우드 극장은 정말 강북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10년전과 비교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극장의 간판과 내부 인테리어가 조금 변했는데 주변은 그대로다.

게이들의 사랑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한국에서 존재했던가? 암시나 곁가지로 동성애 코드를 이용한 경우는 최근 들어 많이 늘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여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은 계급적 차이와 사회적 차별을 뛰어넘는다는 신파적인 소재지만 동성애자들이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 그리 촌스럽지 않게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영화속에서 재벌가 외아들로 나오는 주인공의 차가 포텐샤(!)라는 것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저예산 영화의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북을 중심으로 서울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눈을 즐겁게 하고 무엇보다 영화음악이 너무 좋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30 23:52 2006/12/30 23:52

이라크전 징집을 앞둔 미 육군 소속 예비군이 낙담에 빠져 크리스마스 날 밤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14시간 대치한 끝에 사살됐다고 미 언론들이 27일 보도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미 이라크전에 참전, 18개월간 복무했던 올해 28살인 제임스에머릭 딘.

 보도에 따르면 딘은 이라크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또다시 징집명령을 받자 낙담에빠져 지내던 중 25일 밤 메릴랜드주 레오나드타운의 아버지 집에서 몇가지 총기류로무장한 채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며 경찰과 대치를 시작했다.

 딘은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게 누구든 집안으로 들어오면 쏘겠다고 위협했고 경찰이 딘을 집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려고 하자 경찰관에게 수차례 총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결국 응사에 나선 경찰의 총에 사살됐다.

 가족들은 딘이 최근 이라크 징집명령을 받고 낙담에 빠졌다고 경찰에 밝혔다.

<워싱턴=연합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28 11:57 2006/12/28 11:57
12월26일 저녁 인천공항을 통해 스리랑카로 돌아갔습니다. 옷가지가 들어있는 가방 1개가 함께 동행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간 사만타씨를 위해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생업을 거의 놓다시피하며 동분서주 노력한 니로산씨,
사업주와 달리 끝까지 사만타를 돕기 위해 애써주신 박봉호 공장장님,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200여만원의 돈을 모아주신 공장동료들,
시신을 본국까지 보내는데 도움을 주신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와 김봉천 목사님,
어려운 사정을 듣고 흔쾌히 도움을 주신 외국인의료공제회분들,
이메일을 보고 후원을 해주신 정재룡 회원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애써주신 백병원 의사,간호사 선생님들과 원무과직원분들,
대사까지 직접 찾아와서 일이 빨리 해결되도록 도운 주한스리랑카대사관 분들....등등등
미처 열거하지 못한 분들까지 포함해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사만타씨가 이제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끝내고 가족들이 있는 고향에서 영원히 편안하게 잠들기를 빕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27 15:06 2006/12/27 15:06

사만타를 본국으로 보내는 일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다음주 화요일 밤에 비행기로 가게 된다. 그때까지 서울의 한 장례식장 영안실에 누워있을 것이다. 일이 좀 정리되니까 며칠간 있었던 일들이 다시 떠오른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킨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의사의 급한 호출로 중환자실에 들어가면서도 난 사만타가 죽을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금껏처럼 고비를 넘길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만타는 이미 몇 번의 심폐소생술에도 불구하고 맥박이 50이하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침대주변은 인공적으로 심폐소생을 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피들로 얼룩져있었다. 갈비뼈도 대부분 부러져서 가슴이 쪼그라들어보였다. 의사는 앞으로 30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 사이에도 맥박이 제로가 되기도 하였다. 의사가 급히 가슴을 치고 약을 좀더 투입해서 다시 30~40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다시 맥박이 제로가 되었다. 의사는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심장이 멈췄음을 알리는 기계신호가 삐-익하고 길게 울렸다. 사망을 하였지만 사만타의 가슴은 인공호흡기때문에 위아래로 움직였다. 움찔하는 듯한 움직임도 없었다. 체온도 아직 그대로였다. 사만타의 손을 세게 잡아주었다. 왠지 그렇게해야할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진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불운했던 그의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는 것이 슬펐다.

 

중환자실은 엘리베이터로 바로 영안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환자실은 지하1층이고 영안실은 지하2층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는 겨우 한 층밖에 되지 않았다. 영안실 직원들은 밝고 친절했다. 산 자를 다루는 중환자실 의사와 간호사들보다 얼굴이 훨씬 밝았다. 혹시 영안실 측에서 일부러 그렇게 교육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는 게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생각을 들게하였다. 하긴 영안실 직원들이야 업무상 아무리 큰 실수를 해봤자 뭐 더 나빠질 것이 없으니까. 의사들이 폭주를 즐기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24 18:17 2006/12/24 18:17
공장에서 발생한 추락사고로 백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스리랑카 노동자 사만타씨가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9일 오후5시50분경 사망하였습니다. 뇌를 많이 다쳐 뇌수술을 2차례나 받고 힘들게 버텨왔지만 뇌상태가 호전되었음에도 다른 합병증이 발병하여 결국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올해 나이는 36세이고 아직 미혼입니다. 지난4월에 한국에 와서 김포에 있는 공장에서 일해왔습니다. 사고 당일엔 인근의 친구가 다니는 공장에 놀러갔다가 어둠속에서 실족하여 3m 높이의 축대에서 떨어졌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만약 다음 세상이 있다면 꼭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19 23:25 2006/12/19 23:25

아시아의 친구들 송년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250여명의 손님들이 찾아주셨다. 전날 음식을 더 장만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뻔했다. 송년회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함박눈이 쏟아졌다. 마치 하늘도 아름다운 오늘 이 밤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송년회에서 우리 결혼이주여성들은 정말 별처럼 모두 빛났다. 세상에 이들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신감이 이들의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하였다.

이제 더이상 '나 못해요'라는 기죽은 말투 대신 '나 해요(할 수 있어요)'라는 당당한 말들만 하게 될 것이다. 이주여성들 화이팅!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17 00:20 2006/12/17 00:20

2006 세계이주민의 날

from migrant 2006/12/11 17:2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11 17:24 2006/12/11 17:24
극적인 전쟁 장면을 그리기 위해 실제로 참전한 화가
2006/06/20 오후 1:52 | 충격의 현대미술

 오토 틱스(Otto Dix. 1891~1969)라는 독일 화가는 전쟁을 직접 알고, 가능한 한 가장  사실적
방법으로 이를 전달하기 위해 전쟁에 자원 참전하여 벨기에와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이후 그 경험은 이 화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강박관념이 되었다.
이리하여 신객관주의파에 대표되는 당시 40대의 오토 딕스의 창조적 상상력은 전쟁이 몽땅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 신객관주의- 실제의 사실, 당시의 사회학적 현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1923년부터 독일에서 미술, 문학 방면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

 그는 군인과 학살 장면의 모습을 번갈아 다루었는데 전장에서 그렸던 생생한 생생한 스케치의 뒤를 이어 오랜 시간에 걸쳐 고심하고 공들인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1920~1923년에 그렸던 작품 <참호>에서는 군인들이 진흙탕 속에 틀어박혀 있는 두더지처럼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켜 작품을 구입했던 쾰른의 박물관장은 이를 팔았던 화상에게
도로 돌려주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반전 운동의 일환으로 군인의 인상을 자세히 묘사한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 후 몇년간은 자신의 아이들 초상화를 주로 그리며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그는 다시 전쟁의 악몽에 사로잡혀 뒤러와 중세미술의 영향을 받은 3부작 <전쟁>을
발표했다.



 <전쟁>
 2년 동안 작업해 온 이 작품은 성당의 제대를 장식하는 중세 성화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이 대규모 3부작은 실제로 3부분이 아니고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편에는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군인들이 출발하는 장면이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참호 속에서 벌어진 학살 장면이,
 오른쪽엔 오토 딕스 자신이 군인으로서 부상당한전우를 구하기 위해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각각 크기가 2m가 넘는 대규모이다.
 마지막 가운데 그림 밑부분에 길이 2m에 높이는 60cm밖에 안되는 그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군인이 보내는 하루의 마지막 단계인 전투를 치른 사람들이 기운회복을 위해 수면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대작이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데생과 수채화가 그려졌다.
그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작업하였고 여기에 묘사된 것은 군인의 수난기와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쟁은 한 군인이 체험한 그대로 내부로부터 보여져 미치광이와 같은 폭력과 파괴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다.

   


   

   
 1930년대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세력을 만회하고 나치군이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던 시점에
오토 딕스는 전쟁의 실체 그대로를 그려내어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잔인한 것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는 어리석은 것임을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8 15:26 2006/12/08 15:26

깜짝 선물

from 아무그리나 2006/12/08 14:30

그동안 세녹스 찌거기가 노즐부위를 막아 덜덜덜 거리던 차가 오늘 아침 갑자기 멀쩡히 달렸다. 너무 감격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정비소에서 말한대로 정품 기름을 꾸준히 너어준 덕분인 것 같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 든 기분이다. 매일 이런 깜짝 선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8 14:30 2006/12/08 14:30

중환자실의 사만타씨

from migrant 2006/12/07 00:32
오랜만에 면회를 다녀왔다. 며칠새 팔다리가 눈에 띄게 야위었다. 오늘은 스리랑카 친구들이 많이 왔다. 특히 스리랑카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이 부모님의 부탁을 받고 직접 면회를 왔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가져가시도록 했다. 코와 입에 호스를 꼽고 눈을 감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도 사진을 찍어왔지만 인터넷에 올릴지는 망설여진다. 적어도 가족이 한국에 오면 가족에게라도 물어보아야할 것 같다. 의사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7 00:32 2006/12/07 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