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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기행
박영근 시인
1
산다는 일은 저렇게 곧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어이 산맥은 길을 끊어 왕포나
채석강에서 바위 절벽 아래 떨어지고
바다 끝까지 달려간 마음도
저녁 노을로 스러지고
2
방첩대나 지서 사람들이 밤새 술상머리를 두드리며 부르던
그 유행가 소리를 옛집에서 듣는다
선거場이 설 때마다 공화당 표몰이꾼들에게
말들이 막걸리와 그 질긴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며
신명을 내던 아버지
내 모든 생각들이 숨을 멈추고 엎드려 있던
대공수사대
벌건 갓등 아래
시멘트벽에
발가벗겨진 내 알몸의 그림자
외롭게 춤출 때 듣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
빨치산 전향자라는 이름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옛집엔
지금도 정정한 참오동나무 한그루
아침 저녁으로 가지를 흔들며
마당에 옛말을 뚝뚝 떨구고 있다
아들의 목숨을 사기 위해
한 마을을 부리던 논마지기도 당신이 묻혀서
들판을 지켜보고 싶던 선산마저 올려세우더니
그예 돌아가셨다는 말
3
세월이 어떤 시간의 물살에 허물어져
그 이름이 쓸려가고
살붙이들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거기 묻힌다 한들
아버지에겐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칼날의 마음
흰 눈에 호랑가시나무 마냥 푸르른
겨울숲에 홀로 들어
그 붉은 열매 앞에
몇 번이나 멈추어서서
고개 돌리고 눈물지었으리
쓰러진 마음들이
바위 절벽으로 저를 세워
파도의 아우성 키우는
변산
4
파도는
한 바다를 이루어놓고도
저렇게 돌아서고
돌아서서 어느새
물소리 한자락 없이
제 생애를 비워놓고
-변산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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