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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에 비통함을 금치못하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에 비통함을 금치못하며

 

언제부터인가 계절이 서늘해지면 열사의 죽음을 생각한다. 2003년, 10월 129일을 외로이 한진자본의 탄압에 죽음으로 맞선 김주익열사, 2003년 가을 근로복지공단에 다니던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열사의 분신, 2004년 설무렵에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열사의 분신 등등 2003년과 2004년을 오가는 추운겨울에 많은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으로 이어진 항거가 있었다.

 

그런데, 2005년 9월 4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가 또 죽음으로 항거했다. 이제 막 30살의 나이에.. 나보다도 젊은 나이에, 한창 꽃을 피울 나이에, 왜 그렇게도 절망하고 절규를 했어야만 하는가? 왜 죽어야만 했는가?

 

경제위기의 시기에, 자본가계급의 무분별하고 방만한 확장과 집중의 결과로 빚어진 그 혼돈의 시기에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였다. 1999년, 2000년 파견법의 도입으로 인한 급격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이것은 자본가와 자본가계급의 투철한 앞잡이인 정부가 위기를 전가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기에 파견법의 도입을 막지 못한 노동자계급의 한계도 있으나, 그것을 앞장서서 합의해준 민주노총 지도부는 씻을 수 없는 역사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자신을 휘둘러칠 철퇴를 자본가계급에게 갖다 준 셈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는 그 일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형태의 고용관계, 미래사회의 고용형태도 아니고, 새로운 노동시장의 흐름이 아닌 것이다. 노동자의 힘의 열세와 사회적 합의주의로 인한 노자관계의 재형성의 결과인 것이다.

 

그후에 노동자계급은 절규한다. 아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절규하고 절망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계급의 문제는 바로 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인 것은 모든 노동자계급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나, 함께 투쟁하기에 무엇이 그다지도 방해를 했던가? 바로, 자본가계급과 국가였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관계없이 함께 단결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 한다. 그것은 바로 위기의 시대를 해방의 시대로 전환시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계급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결사적으로 막았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절망하게 둘것인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한명 한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기전에 차라리 우리 같이 죽도록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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