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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17
    인 디스 월드 / 마이클 윈터바텀(2)
    ninita
  2. 2005/06/19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
    ninita
  3. 2005/06/0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nin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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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3/20
    봄, 3일의 休.(3)
    ninita
  9. 2005/02/26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2)
    ninita
  10. 2005/02/26
    tarnation / jonathan cauotte(2)
    ninita

인 디스 월드 / 마이클 윈터바텀


그는 이 세상에 없어요..



어떻게든 미래가 있는 삶을 살아보려 난민촌을 떠나는 사람들.

그러나 떠나는 순간, 그들의 발끝엔 죽음이 매달린다.  

머무르지 그랬냐고 하기엔, 이 삶이나 저 삶이나 매일반이어서,

그저 이 세상에 있었을 때 나는 존재했다, 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숨막히는 순간들. 야간 산행 때 총기로 위협당하는 씬이라든가, 밀폐된 컨테이너로 수십시간 밀항하는 씬은, 일부 익숙한 시각적 코드와 결합되고 다큐적 현실감을 경유하여 감각적인 대리체험으로까지 관객을 몰고 간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공포다. 국제란 한구석 1단 기사로 수도없이 지나갔을 건조한 비극이, 그 순간 숨쉬는 생명체로 살아난다.

 

여기, 타인의 삶이 있다.

이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어떤 위치에서 바라볼 것인가.

내가 목격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것으로 결국 무엇을 말할 것인가.

 

-------------------------------

 

진영이 부탁으로 인권하루소식에 기고하기로. ㅡ.ㅡ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질까.

 

살기 위해 떠나는 난민들의 죽음 같은 여정 

이 세상에는 1500만 명의 난민이 있고, 그 중 500만은 아시아에 살며, 100만은 파키스탄 난민촌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다. 영화는 누런 모래바람 날리는 난민촌에서도 천진함을 간직한 아이들의 웃음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인 열두 살 소년 자말도 그런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봤자 하루 1달러도 벌지 못 하는 데다 미래 따윈 사치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난민촌에서, 웃음을 잃어버린 많은 이들은 탈출을 꿈꾼다. 오직 하나, 미래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하여 자말은 사촌형 에나야트의 통역을 자처하며 런던까지 6400km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살기 위한 여정은 첫발부터 난관을 예고한다. 브로커는 돈 떼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검문소의 군인들은 뇌물을 요구한다. 국적을 속이려 어색한 옷을 걸쳐 보기도 하지만, 왔던 길로 되돌려지는 건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수많은 난민들이 택했던 도피의 여정을 극적으로 쉽게 재구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함께 경험하기를 선택한다. (알려진 바대로, 자말과 에나야트는 실제 난민이다.) 카메라는 자주, 자말의 뒷모습 가까이에 붙어 따라다닌다. 관객도 따라나서길 종용하듯이.

또한 국경수비대의 총소리에 위협당하면서도 국경을 넘는 야간 산행 장면이나, 밀폐된 컨테이너로 수십 시간씩 밀항하는 장면은, 일부 익숙한 시각적 코드와 결합되고 다큐적 현실감을 경유하여 감각의 대리체험으로까지 관객을 몰고 간다. 신문 국제란 한구석에서 1단 기사로 수도 없이 읽고 넘겼던 건조한 비극이, 그 순간 생명력을 얻고 살아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밀입국을 시도하다 컨테이너 안에서 질식사 한 58명의 중국난민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나의 경험인 듯.



<인 디스 월드>는, 눈물이 흐르지는 않되 가슴 먹먹해지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 전편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경험한 관객들에게, 눈물을 통한 면죄부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타인의 삶까지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이다.

덧붙임.
우리나라는 1992년 유엔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했지만, 2001년에야 에티오피아인 한 명을 첫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난민 인정을 신청한 외국인은 494명이며, 그 가운데 129명만이 난민 여부를 심사받았고, 최종 인정을 받은 사람은 37명에 불과하다.


(사진 출처는 nkin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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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모든 사랑은 비루한 일상에 한 발을 내딛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의 모습이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한 순간이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그 진심을 믿는 순간, 사랑은 사랑으로 존재한다. 

 

- 공선옥의 블로그에서..



 

 

p.s 한 번도 진심을 의심해 본 적 없다. 그럴 수 있었음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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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실 난 이 영화가 좋지 않았다. 관념에서 관념으로.

결국 소통하기 어려운 또하나의 '실험' 혹은 '스타일'

늘 궁금했다. '실험적인 영화'는 왜 그 자체로 말할 뿐, - 도저한 자기반영? 켁.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 하거나 소통하기 어려운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반전집회에서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고 스탭들이 그를 좇고 그 모습을 또다른 시선이 포착하고, 일종의 퍼포먼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선을 모두 보여주는 씬이 있는데, - 관객이 보는 감독의 카메라는 분명히 주인공의 뒷모습을 좇고 있지만, 편집된 장면에는 그 장면도 있고, 주인공이 빠진 빈 공간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관객들에게 있어 감독의 카메라가 주인공을 좇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으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은 그것만일수도, 혹은 그 이전의 것이나 이후의 것일 수도 있다. 감독이 어떤 의도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했는가에 따라.

그것이 다큐멘터리 '만들기' - 즉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다큐멘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충실하다 못해 과다하게 인용했다 느껴지는. 펩시콜라는 오바잖아.. - 에 대해 관객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굳이 반전집회라는 공간이었어야 하는 이유다.

그 이유에 대해 나에게 말걸기가 되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했듯이 그러지 못 했고, 감독이 '액티비즘적인 다큐'와 그 자신의 다큐를 나누어서 말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형식실험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했다고나 할까. 

 

물론 이 작품의 감독들이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며(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다음 작품은 이 의미있는 시행착오를 넘어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포스트를 끄적이다가, 그리고..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해 진 건,

이들 작품에 레퍼런스가 되었을 만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다. 일견 도식적으로까지 보이는 나의 해석이나 반응과 달리 즐거운 무언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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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요다, 꺄아~

 

어쩔 수 없는 거다.

<스타워즈> 시리즈나 요다에 대한 애정은.

 

"use your feelings"

"Fear is the path to the dark side. 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Hate leads to suffering."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역시 이 모습이다.

900살 먹은 은둔자의 모습.

광선검 휘두르는 요다는 어색해..

 

그나저나 간만에 루크를 보니 가슴이 설레는군. @.@

루크와 도노반, 맥가이버.

중학교 들어가서 리버 피닉스를 알기 전까지 좋아했던 배우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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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sky / 조 존스턴

 

스푸트니크호가 하얀 꼬리를 빼물고

시월의 밤하늘을 날아가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탄광 소년은 우주를 꿈꾸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옛스럽고 감동적인 미국식 성공드라마.



영화 보고 글쓰기, 는 내 취미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내 능력이 인상비평 이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노력이 필요했는데,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직관으로 분석하는 것은 즐겁지만,

이론틀로 분석하는 것은 어쩐지

늘 누군가를 따라가야만 한다는 강박이 느껴져서?

 

많은 이들은 내게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난 시작도 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학문의 세계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은 영화를 보고 나서 a4 1장을 채 쓰지 못 한다.

우울하긴 하다.

 

사실 october sky만 해도 할 얘기가 무척 많다.

막장으로 내려가는 이미지의 반복과 변주가 내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는지,

그건 감성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이니까.

그저 시끄러운 무엇으로 비치던 탄광노동자들의 파업과

'아버지-아들'의 그 식상한 애증과 영웅 어쩌구 하는 지루한 감동,

그 속에서 끊임없는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어머니.

어쨌거나 영화 자체는 흥미롭게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헐리우드 내러티브의 새끈함이라던가.

 

그만그만.

쓰지도 않을 거 뭐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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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 고레다 히로카즈


 

아무도 모르는 사정,

아무도 모르는 표정,

아무도 모르는 감정.

 

아이들은 울지 않았다!

 

알고 있거나 살고 있을까,

네 몫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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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즐거운 몽상가일 뿐?

<69><몽상가들>

 

모두가 몽상가일 뿐이었다고,

그 시절은 꿈의 시절이었다고,

빛나는 젊음은 무엇이든 탐닉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고,

무엇이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위한 여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그렇게만 말해 버리는 것이 싫었다.

 

한 때 뜨거웠으나 이제는 시시해져버린 청춘들이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지금 이 세상은 뜨거워 본 적 없이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청춘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 그들 모두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사랑해.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야 할, 그러나 빼앗긴,

자기 몫의 삶을 되찾기 위해 피눈물 흘리는 자들 앞에,

영화는 이렇게 무력한가? 혹은,

이렇게 무력함을 조장하는가?

 

그 꿈을, 그 에너지를 어떤 '비전'으로 보여준다기 보다는,

모르겠다. 나에겐 그랬다. 무력함, 이었다.



<69> 역시 거슬리는 구석이 상당하지만, 그나마 귀엽게 봐 줄 수 있겠다.

 

 

우리들의 청춘 시절이 비극적인 까닭은 지독한 입시지옥에 시달려서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나와 내 친구의 꿈이 같았다는 것. 나와 친구가 아닌 이의 꿈도 같았다는 것. 청춘이 꾸는 꿈만으로 이 세상의 어느 한쪽에서는 바람이 불고 태풍이 일 수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 우리를 둘러싼 갑갑한 세상을 향해 돌 한 번 던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는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 없었다는 것. 너무 빨리 늙어버려서, 이제는 세상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이 빠져버렸다는 것. - 소설가 공선옥..

 

<몽상가들>을 읽어내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영화광들의 영화다.

68년 5월 혁명의 작은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앙리 랑글루아(씨네마떼끄 관장) 해임 사건으로 시작해서... (재현과 뉴스릴의 흥미로운 교차편집)
"신선한 이미지"를 보는 행위에 대해 표현하는 나레이션은.. 관능적인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이자벨의 처녀성이 그렇게 비유되는 건, 아.. 싫어..)

 


 

베르톨루치는 매튜의 입을 빌어 영화 만들기에 대해,

피핑 탐, 관음증, 부모의 침실을 훔쳐보는-거역할 수 없는 짜릿한 범죄...

그런 얘기들을 한다. 이 영화 역시, 그에 충실하게 '훔쳐보기'의 매력으로 짜여져가고..

나로 말하자면... 예술의 자기반영적인,

그러니까 이런,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이런 식의 편집이나 대사들을 즐긴다.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고 중첩되고 분열되고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여기서는, 글쎄. 새로운 의미의 생성까지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정치적 관점의 모호함만 아니라면 좋아했을텐데. 쩝.

모호함이 아니라 불쾌함인가.

(무셰뜨의 자살과 이자벨의 자살이 같이 놓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거미의 계략"은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영화였고,

일견 각성시킨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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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3일의 休.

멈추어라멈추어라멈추어라.

일요일 저녁 7시다.

앞으로 12시간 안에 씻고 자고 일어나 다시 씻고 사무실로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묵은 것들을 삭히려면 3일이 아니라 3년은 13년은 걸릴 것 같은데.

내일이면 중심을 잡아야 한다.

 

며칠간 함께 한 것들.

 



극영화/어져스터, 아톰 에고이앙 (done)

소설/바늘, 천운영 (done)

다큐/인간의 시간, 태준식 (done)

기타/현대가족이야기, 조주은 (nearly)

다큐/기차길 옆 공부방, 서경화 (done)

수필/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 (not much)

기타/분노의 그림자,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 (not much)

소설/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done)

극영화/밀리언달러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 (done)

극영화/여자 정혜, 이윤기 (done)

수필/인생은 아름다워라(영혼의 순례, 묘지기행), 맹난자 (nearly)

 

여자, 정혜.. 애정만세를 떠올리게 하지만 애정만세는 아닌... 상처마저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 배열들을, 모른 척 넘어가며 영화에 이입할 수 없다. 상처 가진 독신녀에게 모성을 환기시키는 후경의 배치와 오프사운드들도 거슬릴 뿐. 호명, 응시, 눈부신 초록 - 그것이 희망인가?

 

밀리언달러베이비.. 단단한 근육은 모두 살로 흘러내린 모건 프리맨 할아버지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그들의 노년이 아름답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헐리우드 영화로군. 물론 영화 속의 모습일 따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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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미셸 공드리의 현란한 감각이나
찰리 카우프만의 놀라운 상상력.

 

뮤직비디오나 광고로 봤다면 매혹적이었겠지만..
100분짜리 장편영화를 채우기엔 한참 부족하다..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 나란히 누운 연인의 부감 샷,
푸른 폐허, 라는 머리색 이름,
최선을 다해서 기억해 달라는 대사,

 

아름다운 것들은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

 

예고편



난 너 없이도 잘 지내 / 나를 지워줄래? / 나, 당신을 알아요?

 

she was impulsive.. / that's what intimacy is...


 

 

clementine..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있네

내사랑아 내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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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nation / jonathan cauotte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tarnation

 

"because it's not your fault, renee."

 

귀에 자꾸 맴돈다.

고통스런 타인의 삶, 그리고 지독한 관음증. 원하는 것은 무엇?

 

뒷얘기. 저작권 해결 비용을 따지니 218 달러의 예산이 40만 달러로 뛰었단다.

 

 



조너선 코엣의 <타네이션>

가정해보자. 아름답고 건강했던 당신의 어머니가 지붕에서 떨어진 뒤 정신이 이상해졌다면, 그래서 위탁시설을 전전하며 자라나야 했다면,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거지 같은 집구석에 살면서 당신 역시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리게 된다면,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가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할머니는 죽고 할아버지는 알츠하이머로 망가지고 어머니는 리튬 과다로 위독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삶이라면. 그것이 당신이 품고 가야 할 가족이라면. 이 버거운 삶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의 무게에 눌려 세상을 향해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겠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넌 왜 늘 그렇게 고통스러운 얼굴로 살아가는 거지?” 서른해를 그렇게 살아온 남자가. 이제 영화로 대답한다. 여기, 내 엿 같은 삶이 있어. 보라고. 들으라고. 하지만 나는 이 지옥을 사랑해.

2004년 미국 영화계는 <타네이션>이라는 200달러짜리 영화 앞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너선 코엣이라는 서른한살의 감독이 만든 이 자전적 다큐멘터리는 2004년 초 선댄스영화제를 거쳐 칸영화제에 소개되었고, LA영화제 최고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으며, 뉴욕영화제에 상영된 이후, 10월 초 뉴욕에서 개봉했다. 극장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한동안 <타네이션>에 대한 이야기가 뜨겁게 오갔다. <뉴욕타임스>의 A. O. 스콧은 “올해 가장 이상하고, 가장 흥미로운 영화. 이제 <타네이션>의 영향을 받은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영화가 속속들이 출현할 것”이라며 이 영화의 영향력을 점쳤고,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비범하고, 직설적이고, 절박하고, 분노에 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이고 희망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사실 <타네이션>이 선택한 ‘비디오다이어리’ 방식이나, 편집 스타일은 그리 새롭지 않다. 한물간 유행이요, 지루한 MTV스타일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회상이나 재연이 아닌, 날것 그대로 포획된 끔찍한 삶의 장면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그 삶에서 나온 편집스타일은 스타일에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자아분열적 증세에 시달리는 그에게 한장의 사진이 멀티숏으로 분할되고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화면은, 팝아트적인 표현방식이 아니라 바로 코엣의 머리 속에 펼쳐진 투명한 지옥도다. 또한 가족의 역사를 커다란 자막을 통해 대상화해 소개하는 방식은 그가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11살 때부터 이웃의 카메라를 빌려 찍은 160시간의 분량의 테이프와 200장이 넘는 스틸사진들, 전화기의 음성메시지, <악마의 씨> 같은 컬트영화 클립들을 컴퓨터로 편집한 <타네이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노력을 제한다면, 단돈 218달러 32센트라는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맨해튼 5애비뉴 보석가게의 도어맨으로 일하던 코엣은 어느 날 존 카메론 미첼(<헤드윅>)의 차기작인 <숏버스>의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러프하게 편집된 <타네이션>을 보게 된 미첼은 이 비상한 영화를 구스 반 산트에게 소개했다. 반 산트는 “글을 쓸 돈으로 영화를 찍는 시대. 나는 늘 이런 영화를 기다려왔고 여기 그가 나타났다”며 <타네이션>의 출현을 반겼다. 결국 이 두 감독이 제작프로듀서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브루클린의 어두운 방에서 썩어문드러졌을 이 불행한 남자의 일기장이 전세계 관객에게 펼쳐지게 된 것이다.

조너선 코엣은 “영화감독을 꿈꾸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수 없는” 태생형 필름메이커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화찍기’는 천재성의 이른 발견이나, 단순히 취미생활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영화는 자신을 지켜내는 유일한 무기였다. 따뜻한 총이요, 부작용 없는 약물이었다. 영화의 제목 ‘Tarnation’(eternal+damnation)처럼 ‘영원히 저주받은’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때 그는 밥먹듯이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이 지옥을 껴안을지를 발견했다. 그것이 영화였다. 그렇게 그는 영화와 함께 살아남았다. 곪아터져서 진물이 나고 피가 흐르고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88분간의 기록, <타네이션>은 그 처절한 생존일지다.

 

[출처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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