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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해가 기울 무렵 숙소로 들어가다가,
BCP 현금인출기 계단 앞에 젊은 경비가 구겨지듯 앉아 있는 걸 봤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하염없이 그걸 들여다 보고 있었던가 만지고 있었던가.
스무살 쯤 되었을까?
참 여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문득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저이를 안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고 3 때, 그런 생각을 처음 했었다.
곧 무너져버릴 것 같던 한 녀석 앞에서.
그 때는 누가 날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 절실했다.
안아주는 것, 안기는 것,
그 친밀한 행위는 말없는 위안이어서 좋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사람을 안아줄 줄 아는 사람이고 싶은데,
나는 안기는 데도 서툴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부꼬의 시장은 한겹 먼지가 제 빛깔을 가리고 있었다.
이 날도 축제가 있었다. 광장을 돌며 춤을 춘 아이들은 일제히 줄을 서서 무언가를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빵과 우유였다.
웬만한 전통춤에는 흥미를 잃어버린 내 눈에,
뽀또시에서 온 듯한 아이들의 춤이 가슴 아프게 박혔다.
남자아이들은 광산에서의 노동을,
여자아이들은 가사 노동을,
간단한 동작으로 보여주었는데 두 가지 모두 참, 난 마음이 아프더라.
어린 날 추었던 저 춤으로부터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세뇨르 데 말따 병원의 세탁실,
군이 체 게바라의 시신을 공개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곳.
바로 이 사진이 촬영된 곳이다.
40년 전의 병원은 모두 새로운 건물로 대체됐지만,
과거의 그 세탁실만은 보존되고 있다.
ruta del che는 체 게바라의 마지막 날들을 바예그란데에서 관광상품화 한 것이다.
다니는 내내 특별한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유독 이 세탁실에서만큼은 기분이 묘해졌었다.
40년을 켜켜이 새겨지고 또 새겨진 저 낙서들은 희망의 증거일 수 있을까.
떠나간 혁명가의 자리가 쓸쓸했다.
체의 유해는 꾸바 산따 바바라에 있지만,
그의 유해가 발굴된 곳에는 fosa del che가 있다.
최근에 새롭게 단장된 모양인데, 가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체를 비롯, 그와 함께 발견된 게릴라들의 묘.
이 곳은 나머지 게릴라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는
fosa del guerrilleros, 게릴라 전사들의 묘
들어가는 길은 참 좁고 예뻤다. 양옆으로 로타리 클럽의 땅에 사유지에,
체를 추종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땅주인들이 싫어해서 이 길을 만들게 됐단다.
이 벽화는 매년 아르헨띠나 자원활동가들에 의해 바뀐단다.
왼쪽의 여성은, 전투에서 사망한 유일한 여성 게릴라였던 따니아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이 곳이 라 이게라(la higuera), 체가 살해당한 곳.
대강 오역하자면,
"당신의 본보기(ejemplo=example)가 새로운 새벽을 비춥니다."
이것도 대강 오역하자면,
"진실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따른다.
이러한 자질 없이 진정한 혁명가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살해당한 옛 학교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이 문을 통해 한 남자가 영원으로 떠났다."
박물관 내부에는 다양한 추종자들의 메모와 물건들이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한 일본인의 명함과 함께 일장기가 벽에 붙어 있더라는..
el churo. 추로 계곡의 마지막 캠프.
가는 길은 내내 황량했는데, 이 곳만은 푸르렀다.
체의 마지막 전투. 67-10-08
ruta del che 곳곳에 추종자들이 남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내가 일종의 정신병인지 전염병인지 환자인데,
병원은 아니고 버스에 있었던 것 같다.. ㅎㅎ
(하도 버스를 오래 타다보니, 별.. ㅡ.ㅡ)
첫 번째 간호사는 그냥 나를 평범한 환자로 대했는데,
두 번째 간호사는 나와 손만 닿아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다.
깊이 상처받고 만 나는, 그러지 말아요. 나는 조금 아플 뿐이라구요.
그러고 나서, 내 곁을 줄곧 지키고 있던 어떤 남자의 손을 잡으며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이상해?
남자는, 아니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라고 대답해 주었다.
꿈에는 남자의 손과 팔, 옆구리만 나와서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 한다.
다만 ´누구´일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
(너야 너. 너라고 생각했어. 기분 좋지? ㅎㅎ)
문득, 내 삶에 그렇게 내 손을 기꺼이 잡아줄 ´남자´들이 여러 명 존재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놀랍게도! ^.^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아주 깊이 의존하며 어떤 시절들을 살았다는 것도. 젠장맞을. 참 벗어나지 못 하는 구나.
이럴 때는 하루끼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참 유치, 센치하게도.
한밤의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한다던 단편.
왜 삶에는 항상, 한밤의 기적 소리가 필요한 것일까?
새벽도 아니고 점심 시간 가까워지는데,
하필 아침의 꿈이 마음을 여러 갈래로 향하게 만들었다.
아, 온몸에서 냄새난다.. 좋다...
여행하면서 가장 큰 삽질은 루트와 관련된 것인데,
요즘 들어 삽질을 좀 심하게 하고 있다.
정보의 부족, 언어소통의 문제 등이 골고루 작용한 탓인데,
평소에는 그러려니 한다.
처음 오는 곳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니까.
늘 정석대로 잘 다니면 그것도 재미없잖아.
하지만 이번 삽질은 흑, 용서가 안 된다.
산따 끄루스에서 바예그란데에 갔다가 사마이빠따에 갔다면.....
같은 길을 두 번 왕복할 필요도(더불어 시간 낭비, 택시비 낭비도 없었을테고 ㅎㅎ), 메르세데스 소사가 참가한 체 게바라 사후 40주기 콘서트도 놓치지 않았을 거다!!!!!!!!!!!!!!!!!!!!!!!!!!!!!!!!!
바예그란데에 내가 도착한 건 8일 밤 8시 반 경.
그 때 콘서트가 진행 중이었다는 걸 안 건, 오늘 오후 4시 경.
9일에 까사 델 라 꿀뚜라에 갔다가 모든 행사가 끝났다는 걸 알았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메르세데스 소사가 다녀간 것도 아니고, 아쉬워할 필요 뭐 있나 했던 건데, 메르세데스 소사가 다녀갔단다!!! 게다가 남미 각지의 민중가수들이 라 이게라와 바예그란데 두 곳에서 각각 콘서트를 했다니.....
도착 당일 밤, 피곤했지만 혹시 뭐가 있을까 싶어 광장 주변을 돌아다녔었다. 그런데 포스터 하나, 안내문 하나 발견하지 못 했고, 숙소 주인도 아무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냔 말이야.. T.T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괜찮았을텐데, 왜 호세(오늘의 가이드)는 그 얘길 해줬냐구!!! 그것도 오늘의 일정이 거의 끝날 무렵에!!!! 내가 모르는 가수 이름만 댔어도 덜했을텐데, 왜 메르세데스 소사를 언급했냐구!!!!
으아아아아악.
하지만 오늘은 근래 들어 최고로 흥미진진했던 하루.
아, 삽질. 쓰고 보니 군대용어구나. ㅡ.ㅡ
아...... 잉그마르 베르히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에드워드 양...
이들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안타까운데,
마르셀 마르소 할아버지가 지난 22일, 세상을 떠났단다.
오로지 하얀 조명 아래 작지만 유연한 그가 펼치는 조용한 수다..
그것이 마침내 끝났을 때 한참 눈물을 흘렸었다.
어떤 세상이, 끝났다. 그와 함께.
하지만, 그는 분명, 더 가벼워진 몸으로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났을 거다.
말이 필요없는 그는 어딜 가든 어느 누구와도 아름답게 잘 어울릴 수 있으리라.
안녕, 마르셀.
비프도 안녕.
오랜만의 김윤의 시, 말1
말이 길어집니다.
말을 할수록 나는 말에 다칩니다.
그러니 그대 얼마나 많이 나의 언어에 상처 입었겠습니까
꽃이라 했더니 그 꽃된 것 울었습니다.
사랑이라 했더니 그 사랑된 것 떠났습니다.
나는 자꾸 중언 부언합니다.
의미가 된다는 건 말이 아니라는 걸 마르셀 마르소 는 언제부터 알았을까요?
나의 시는 또 이렇게 무참히 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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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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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어서 와라. 만나면 우리 먼저 안아주자~^^부가 정보
nin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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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헤어질 때, 우리 꼭 껴안고 서로 뽀뽀해줬었잖아... ㅋㅋ그 때도 참 따뜻했어!!! 다시 만나거든 꼭 그렇게 인사하자!!! ㅎㅎ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