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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비판’과 ‘계급적 선택’(2004.07.07.)

‘도덕적 비판’과 ‘계급적 선택’

 

‘도덕적 비판’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2004년 임금협상을 위한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6월 말,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고소득 노동자의 임금인상 자제를 통해 노노간 임금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해결방안(?)을 제출했다.

당연히 시의적절하게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줬다.

지난 6월 10일에는, 144명의 사회원로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동결과 삭감을 요구”하면서, “대기업 노조의 이기심”에 대해 “도덕적인 비판”을 가했다.

5월말 청와대 노사정 간담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기업 노조들이 중소기업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현대차 노조를 질타(?)한 지 얼마 안되서의 일이다.

“노동계의 정규직 지상주의는 노동시장 왜곡과 고용시장 악화를 초래할 뿐”이고, “정규직 근로자의 근로조건 양보와 경영계의 노력을 통해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현실적인 해결책 마련”에 노동계가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경제5단체가 강변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두 달 전인 5월 초의 일이다.

 

이로서 지난 몇 달에 걸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도덕적 해법(?)’은 완성됐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자제와 노동유연화의 전면화’가 그것이다.

정부와 재계와 보수언론이 주도하고, 사회원로와 노총의 지도부가 들러리를 서면서,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해결의 공은 이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넘겨졌다.

정규직 이기주의를 넘어 선 ‘도덕적 선택’의 문제로 됐다.

 

‘계급적 선택’

 

도덕적 선택을 강요하는 거대한 공세 앞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워 하고 동요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공헌 기금’을 제안하기도 하고, 비정규직을 대리한 임금협상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과 동요는 위로부터의 위선적인 ‘도덕적 비판’과 아래로부터 비정규직의 ‘계급적 비판’이라는 이중의 공세에 더욱 빠지게 할 뿐이다.

이런 혼란과 동요가 지속될수록,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그 자체라는 점은 은폐된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상대적인 고임금일 뿐이고, 사실은 잔업특근 등 장시간 노동과 근골격계로 대표되는 노동강도 강화의 결과라는 점은 가려진다.

 

‘도덕적 비판’ 앞에서 동요할수록 계급적 현실은 은폐된다.

계급적 현실이 은폐될수록, 노노간 대립이 더욱 부각되고, 정규직 노동자는 더욱 고립되며, 비정규직 문제해결은 지연된다.

정규직 노동자는 이러한 계급적 현실을 은폐하는 사슬을 끊어야 한다.

그 출발은 먼저 잔업특근과 노동강도 강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노동시간을 단축하여 ‘법정노동시간’으로도 ‘생활임금’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출발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일상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존재가 정규직 고용안정의 안전판”이라는, 강요된 현실을 계급적 단결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이 지금 시기 민주노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2004.07.07.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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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 ‘유연화’,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2004.06.07.)

‘안정’, ‘유연화’,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

 

‘임금안정’

 

‘안정’이란 말이 있다.

그 자체로는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를 ‘임금’이란 말과 연결하면, 즉 ‘임금 안정’은 곧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뜻이 된다.

그래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일단 ‘안정’을 해치는 것이 된다.

지난 2월 노사정위원회가 추진했던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에서는 “향후 경영계가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 노동계는 “2년간 임금안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 표현을 사실 그대로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을 자제하기로 했다”고 바꿔 보자.

합의의 결과로 생길 대중적 분노를 미리 거세해 버린 느낌이 들지 않는가?

 

‘노동유연화’

 

‘노동 유연화’라는 말도 지난 10여 년간 익숙하게 듣던 말이다.

1990년대 초반에 소위 ‘신경영전략’이 일반화되면서 알려진 용어다.

‘유연화’! 얼마나 부드러운 표현인가?

그러나 이 부드러운 표현도 ‘노동’과 결합하면 으시으시해 진다.

‘노동유연화’!, 곧 기업가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노동자를 해고시킬 수 있고,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일을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고상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이러한 ‘유연화’에 노동자들이 저항한다면, 그 노동자들은 해고로 인한 삶의 고통에 항변하기도 전에, 노동시장을 ‘경직화’시켜 국가의 경제발전과 회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로 찍히게 된다.

 

‘노사관계 개혁’

 

‘개혁’이라는 말도 그렇다.

현실을 바꾼다는 뜻이다.

만약 그 현실이 부당하다면, 그래서 지켜야만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그 현실을 ‘개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개혁’이 ‘노사관계 개혁’으로 되면, 바꿔야 할 내용과 대상이 전혀 엉뚱해져 버린다.

노무현 정권이 ‘선진노사관계 로드맵(단계별 일정표)’이라는 것을 만들어 노사관계를 선진적 수준 국제적 수준으로 개혁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개혁’한다는 것이 다름 아니라, 정리해고와 변형근로, 그리고 파견근로를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법적으로 확실하게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이러한 정리해고나 파견근로에 저항하는 노동자나 민주노조가 되고, 이들은 ‘반개혁 세력’이 된다.

게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로 양산된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고, 따라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정규직이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하지 못한 결과, 이러한 여론 공세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

 

노무현 정권 2기 들어, ‘사회적 합의’가 위로부터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6월 4일에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만들어져서 ‘노사정위원회 기구 개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추진될 내용은 ‘임금안정’, ‘노동유연화’의 제도화, 그리고 그를 통한 ‘노사관계의 개혁’이 될 것이다.

‘사회적 합의’라는 용어에 현혹되지 않고 ‘임금억제’와 ‘정리해고’, 그리고 ‘비정규직의 제도화’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단결’ 뿐이다.

 

2004.06.07.

[현자노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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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를 보며(2005.05.11.)

‘경쟁위주의 입시정책 반대, 내신등급제 상대평가 반대’ 촛불시위를 보며

 

지난 5월 7일, 내신등급제와 상대평가제를 반대하는 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로 언론이 떠들썩할 때,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촛불시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교육청 관계자 및 학교교사 760명이 동원되고, 100개 중대 1만여 명의 경찰 동원되어 결국 전국적인 시위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400여명의 고등학생들만이 광화문에 모여 ‘입시 경쟁 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 추모제’를 치렀지만, 그들의 이 사회와 어른들과 교육정책을 향한 절규와 울부짖음에는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때 이 땅의 천만노동자들이 외쳤던 절규와 울부짖음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그것은 철부지들의 투정이 아니라, 한마디로 학생들의 ‘인간 선언’이었다.

그들이 “학생들은 돼지처럼 학교라는 우리에 갇혀서 시험이라는 것에 사육돼, 등급에 따라 백화점(일류대학)과 정육점(이삼류대학)으로 간다”고 외쳤을 때, 학교나 학원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경쟁을 강요받는 생활이 강제수용소처럼 느껴져 “친구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이 학교가 되었고, 이건 더 이상 학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87년 당시 병영 같은 공장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들이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이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고 주장했을 때, 공장의 진정한 주인은 노동자이고,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주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던 87년의 노동자들의 뜨거운 바램과 열망을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들은 이 땅의 교육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내신등급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서열화의 입시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가 공고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살인적인 대학입시경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일부 보수언론들이 학생들의 주장을 빌미로 ‘고교등급제의 적용과 ‘본고사 부활’의 흐름으로 연계시키려는 정략적인 시도가 한심하고 치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올 들어 벌써 20여명의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한 것은 ‘개인적인 자살’이 아니라고, 그것은 “학생들이 학교와 선생님들을 불신하게 하고, 학생들끼리 무한 경쟁으로 치고 받으라는 식의 입시제도”때문이라고, 그래서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내용에 바보같이 억눌려온 시대의 종말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라고 그들이 선언했을 때, 그들은 이미 ‘교육의 한 주체’로 우뚝 선 것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학생들에게 ‘어른’이고자 한다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이 땅의 교육 현실을 헤쳐 나갈 한 주체로 인정하고, 나아가 논술이든, 내신이든, 수능이든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어 결국 3,4중고에 처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경쟁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입시정책’과 ‘대학 서열화’, 그리고 ‘학벌주의’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더 이상 그들만의 외로운 ‘촛불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2005.05.11.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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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2005.10.05.)

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

 

이 글은 현자노조 집행부나 현장 활동가들께 쓰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평조합원들께 쓰는 것입니다.

혹 현자 조합원도 아닌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고, 혹 현장의 정서 즉 ‘당신들의 정서’를 모른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상반기에 노무현 정권과 보수 언론이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를 향해서 ‘고임금’을 받는 ‘노동귀족’들이라고 몰아 부칠 때, 저와 제가 속한 연구소는 당신들의 ‘고임금’을 옹호했습니다.

대공장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지만, 그것은 주야 맞교대와 잔업철야 등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강화의 댓가일 뿐이라고.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일부 지배세력들의 부와 사치와 고소득이 더욱 문제라고.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이 심화된다고, 그래서 비정규입법을 강행하겠다고 정권과 자본과 보수언론이 호들갑을 떨 때, 그에 맞서 당신들의 ‘고용 경직성’ 즉 ‘고용 안정’을 옹호했습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결과라고.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는 노동유연화로는 해결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철회해야 가능하다고.

 

분명 ‘당신들’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했고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만’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하고 방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진영 전체가,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와 차별과 탄압으로 고통받는 전체 노동자들이 그랬을 겁니다.

올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숨막히는 이러한 현실을 과감하게 뚫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계급적 단결을 이뤄낼 것을 기대했습니다.

계급적 단결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 혹은 ‘어떤 희망의 단초’라도 보여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조금씩 무너져 갔습니다.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고, 임금이나 노동조건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차별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을 거라 애써 자위했습니다.

그러나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대 원청 사용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납치 연행하고, 구속하고, 유혈적인 폭력을 휘둘렀을 때,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9월 초 비정규직 노동자인 류기혁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즉각 ‘열사’로 받아 안지 않고 임단협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민주’노조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분들께 묻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의 정서’, 소위 ‘정규직 노동자의 정서’입니까?

현자노조는 당신들‘만’의 노조입니까?

비록 자본에 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지만, 한울타리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탄압받고 죽어갈 때 현장으로부터 함께 연대하지 못하는 노조가 진정 ‘민주’노조입니까?

 

2005.10.05.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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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2004.09.08.)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

 

“일에 쫓겨 이렇다할 취미도 노년에 대한 설계와 준비도 없이 퇴직을 맞아, 일상생활에서 자립하지도 못하고 부인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남성 노인을 가리켜 ‘젖은 낙엽족’이라고 한다.

“마치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듯 부인을 24시간 졸졸 따라다니며 한사코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도쿄대학 여교수가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한국 사회도 이미 2000년에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율이 7%가 넘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젖은 낙엽족’ 현상이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젖은 낙엽족’은 “아침 일찍 출근해 매일 밤 회식하고, 휴일엔 안방에서 뒹구는 생활을 수십년간 해 온 직장인” 출신이 많고, 질병, 고독감, 경제적 빈곤,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 상실 등으로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65세 이상 노인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IMF 외환위기 이후에 ‘오륙도’, ‘사오정’이 당연시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운명은 ‘젖은’ 낙엽은 아닐지라도 ‘추풍낙엽’과 같은 처지로 몰리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전면화되면서 생겨난 신조어 가운데, 또 ‘캥거루족’이라는 것이 있다.

“취업난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않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직하지 않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임금이 적어 부모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청년 실업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캥거루의 특이한 생태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1998년에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지가 ‘캥거루 세대’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캥거루족’도 이미 한국사회에서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에 대학생 가운데 1/5이 휴학했다.

20대의 48%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최근 2년간 대졸취업자의 평균나이가 15개월 가량 높아졌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청년실업자가 머지않아 백만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평균 취업경쟁률은 83:1에 달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캥거루족’이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30~40대 취업 노동자들은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 사이에 끼어 있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장의 고용불안도 버겁지만, 10~20년이면 자신이 혹은 자식들이 닥칠 문제다.

아니 당장 부딪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위 노인문제 전문가들은 ‘젖은 낙엽족’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자기계발에 힘쓰고, 효율적인 자산운용계획을 세워 최소한 9억원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청년실업 문제의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이 생기는 원인이 경제 불황에 따른 취업난도 있지만, “부모세대처럼 아등바등 살기도 싫고 웬만한 직장은 눈에 안 차는” 젊은 세대에게도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눈높이를 낮춰 사회의 밑바닥부터 경험을 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으니 개인이 알아서 책임지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충고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 ‘경제발전이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시대’,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의 제도화에 따라 고용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것인가?

‘고용’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노동자들의 ‘삶의 양식’ 전체를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자노보칼럼] 200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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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발전적인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해(2006.12.15.)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

발전적인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해

 

‘안내자’이자 ‘사랑방’

 

“연구소가 사랑방 같았는데 ---”, “연구소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친정집이었는데 ---”, “10년 넘게 내 삶의 뿌리였는데 ---”, “연구소가 현장 활동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는데 ---”, “그간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 전투적인 이론을 제공해 왔는데 ---”. 지난 12월 2일 총회에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이하 ‘한노정연’)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한 직후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해산에 대한 소감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밝혔다.

그렇다. 한노정연은 지난 11년간 현장 활동가나 좌파 연구자들에게 ‘안내자’이고 ‘친정집’이고 ‘사랑방’이었다.

1995년 7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념적 지표를 상실하고 ‘해체’와 ‘청산’과 ‘잠복’만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던 때에, 좌파 연구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의 기치로 내걸고 한노정연을 결성한 것은 ‘상실과 절망의 시대’를 뛰어넘어 보고자 했던 하나의 몸부림이자 실험이었다.

한노정연은 좌파 연구자들을 묶어주고, 좌파 연구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을 이어주며, ‘현장에서 미래를’ 찾기 위한 모색을 했다.

 

한노정연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성장하는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며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 전망을 함께 머리를 맞대 연구하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각종 토론회와 단행본, 그리고 [현장에서 미래를]에 발표했다.

90년대 초반 이후 “가랑비에 속옷 젖듯” 변화하는 노동현장을 ‘신경영전략’이라는 이론틀로 포착하여, 자본의 새로운 축적전략과 노동통제전략에 민주노조운동이 적극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96~97년 노동법개악을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한복판에서, 노동법 개악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공세’를 전면화하기 위한 전주곡이며, 따라서 노동운동은 과거 민주화운동의 단순한 연장선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진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공세에 민주노조운동이 힘겨운 총파업으로 맞서면서도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주의’로 인해 혼란과 동요에 빠졌을 때, 한노정연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을 이론적으로 엄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주의’의 유혹을 벗어나 ‘계급적 단결’과 ‘노조 및 현장 민주주의 강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배세력의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유연화 공세, 민주노조를 고립시키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로 민주노조운동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노정연은 그 ‘위기’ 공세에 맞서 한편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아가 조합주의적 운동에서 벗어나 사회변혁운동으로 진전할 것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사회의 변혁전략’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했으며, ‘21c 사회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했다.

한노정연의 연구자들은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하고 토론하고 교육했으며, 현장과 노조 활동가들이 계급적 변혁적 노동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지원했다.

회원들의 회비와 특별기금, 그리고 노동조합의 프로젝트만이 유일한 재원이었고,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도 ‘재정 자립’의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으며, 이는 연구원들과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매듭’과 ‘모색’

 

한편으로는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정세와 운동 정세의 변화로 한노정연은 자신의 역사적인 소임을 마무리 짓고 발전적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발전적 해소’라기 보다는 ‘발전적인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한 해소’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1년간 한노정연의 정체성은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으로 표현해 왔다.

즉 내용적으로는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을 위한 이론 정책의 생산을 중심으로, 좌파 연구자들과 실천활동가들이 연구소라는 틀로 모여,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된 연구 활동을 하는 것, 그래서 연구소라는 틀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긴장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 자체가 한노정연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런 이론과 실천의 긴장을 연구소라는 틀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

좌파 연구자들은 반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공동의 지반을 가지고 있지만 극복 전망에 대해서는 입장과 방법을 달리했고, 따라서 더 이상 하나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게 됐다.

연구 활동은 관심과 입장에 따라 다양화되고 개별화됐으며, 또 제도화되기도 했다.

좌파 정치조직의 분화와 분열 역시 연구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한노정연이 과거처럼 좌파 전체를 대표하는 이론정책연구소로서의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하기에는 어렵게 됐다.

그리고 이미 대중조직이나 현장의 활동가 조직, 그리고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생산하고 구체화시켜 나가는 상황에서 회원 조직을 중심으로 연구소를 운영해 나가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게 됐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한노정연이 자신의 역사적인 소임을 다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성과에 집착하여 계속 연구소를 유지하는 것은 이후 질곡을 더욱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해야 한다.

한노정연 ‘발전적 해소’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한노정연이 처한 현실을 통해 드러난 좌파 연구운동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한 ‘매듭’을 짓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그렇지 않다. 좌파 연구운동이 처한 현실적 한계는 한노정연이라는 틀 속에서의 한계일 뿐이다.

오히려 현실 계급정세의 변화는 좌파 연구운동에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의 결과로 고통 받는 노동자민중들은 새로운 대안과 구체적인 비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다양한 영역에서 개별적인 연구 활동을 진행해 오던 좌파 연구자들은 연구자들간의 혹은 연구자들과 대중간의 새로운 방식의 소통과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좌파의 정치조직들 역시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조직적 정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서로간의 소통과 접점을 형성하고 연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산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가능성을 곧바로 현실화시켜 내지는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일거에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주체에 의해서든 어느 시점에서든 이 필요성이 제기되고 새롭게 모색되어야 한다.

만약 한노정연의 해산이 이런 노력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 때 이름 그대로 ‘발전적 해산’이 될 것이다.

 

맑스주의, 그 내부로부터 ‘혁신’과 ‘확장’, ‘재구성’

 

사실 한국의 좌파 이론 지형과 관련하여, 최근 몇 년간 맑스 코뮤날레 학술대회와 [진보평론], [마르크스주의 연구] 등의 발간, 그리고 여러 좌파 연구소와 정치조직의 기관지 발간 등을 통해 그 이론적 패러다임의 여러 쟁점들이 대체적으로 드러났다.

크게는 맑스주의의 전통을 옥소도스하게 지켜나가려는 ‘정통 맑스-레닌주의 경향’, 들뢰즈와 네그리 등의 이론을 도입하여 맑스주의를 폐기하거나 혹은 맑스주의 외부로부터 맑스주의를 해체 재구성하려는 ‘신좌파적 경향’, 그리고 맑스주의를 ‘내부로부터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경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세 번째 경향은 소위 정통 맑스-레닌주의와 신좌파적 경향과 구별하여, 21c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맑스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이론적 전망과 패러다임의 구축을 모색하는 일련의 문제의식과 실험적 시도를 포괄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하나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여러 영역에 걸쳐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이론을 21c 자본주의 현실에 맞게 내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비롯하여,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되거나 형해화된 철학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 21c 서구에서 좌파 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차이의 정치론’의 한계를 극복하여 맑스주의 정치이론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 그리고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져 왔던 여성, 환경, 인권 문제 등 새롭게 부각되는 사회적 의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맑스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통속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화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새로운 좌파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있으며,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간의 오래된 대립구도를 뛰어넘어 새로운 국제주의적 변혁 전략을 탐색하는 시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발전 전략과 정책을 모색하려는 시도 역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21c 사회(코뮨)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이를 향한 각개 약진이 아직은 개별화된 수준에서, 또한 아직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소통과 접점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하나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민중들의 저항과 구체적으로 결합해 나갈 때, 이러한 경향과 시도는 현실의 힘으로 전화할 것이다.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산이 맑스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그간의 여러 시도들을 결집시켜 나갈 수 있는 계기로 된다면 그 역시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200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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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출발’을 위해(2007.01.02.)

‘즐거운 출발’을 위해

 

13년간의 인연

 

벌써 13년이 됐습니다.

한노정연이라는 ‘연구소운동’과 인연을 맺은 지가.

1993년 말 경이었습니다.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2년 반 정도 징역살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징역을 사는 동안 세상은 확 바뀌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함께 운동했던 많은 동지들이, 혹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념적인 지표를 상실하면서, 혹은 90년대 초반 투쟁과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실패에 좌절하면서, 혹은 당장의 생계와 가족 문제 때문에,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변혁 이념을 ‘청산’하는 것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80년대 신군부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그 모진 세월을 함께 버텨왔던 조직들도 하나둘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변혁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동지들은 생활 속으로, 대중조직 속으로, 지역으로, 부문 단체 등으로 ‘잠복’해 갔습니다.

 

후배 연구자들로부터 함께 연구소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은 때가 바로 1993년 말이었습니다.

80년대의 변혁운동이 ‘청산’하고 ‘해체’하고 ‘잠복’하고는 있었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전노협을 중심으로 두 차례의 총파업 투쟁을 전개할 만큼 성장하고 있었고, 노동운동의 성장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 때 두 가지 점을 고민하고 토론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성장을 이론 정책적으로 지원해 나갈 단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하나요, 노동자 대중운동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변혁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이론적으로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그 둘이었습니다.

좌파 교수와 석박사 연구자들, 그리고 노동운동 내 좌파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연구 주체들이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을 연구소의 기치로 내걸기로 했고, 각종 연구 세미나팀의 조직, 월례발표회와 심포지움의 개최,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의 발간, 현장조사 프로젝트, 단행본의 발간 등 각종 사업을 계획했습니다.

이런 준비 끝에 1995년 7월 마침내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가 출범했습니다.

 

당시 한노정연의 출범은 단순히 하나의 연구소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운동’이었습니다.

흩어진 좌파 연구자들을 연결하고, 연구자들과 현장의 활동가들을 소통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성장하는 민주노조운동과 결합하여, 실천적인 긴장을 동력으로 그 속에서 변혁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찾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3년간 한노정연의 연구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현장과 결합하며 연구를 해왔고,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한노정연은 유지되어 왔습니다.

끝까지 한노정연과 고락을 같이 한 연구자들과 현장의 활동가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노정연을 떠난 연구자들 모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한노정연은 그간 그나마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한노정연과 맺은 13년간은,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그야말로 청춘을 다 받친 세월이었습니다.

13년간 한노정연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많은 선배 동료 후배 연구자들로부터 배웠고, 또 노동 현장과 노동 운동의 활동가들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 왔습니다.

이 점 이 글을 빌어 선배․동료․후배 연구자들과 현장․지역의 활동가들에게 “그간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활동비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호주머니돈 까지 써가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연구자들, 현장의 프로젝트 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 혹은 <현장에서 미래를>에 기고할 원고를 마감하느라 밤샘을 밥 먹듯이 했던 연구자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현장이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 지원했던 연구자들, 회원 관리와 회계 정리와 자료 정리라는 고달프지만 티도 안나는 실무를 묵묵하게 하던 연구자들, 그리고 한노정연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도 더 소중하고 챙겨주고 걱정해 주었던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 ---.

한노정연이 지난 13년간의 활동 결과로 남은 소중한 성과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연구자들과 현장 지역의 활동가들일 것입니다.

저에게도 지난 13년간 한노정연과 맺은 인연이 가져다 준 가장 소중한 성과는 바로 이 분들입니다.

 

역사적인 소임과 역할

 

분명 한노정연은 지난 13년간, 아니 지난 10여 년간 명실공히 한국의 ‘좌파’ 노동이론연구의 대표 연구단체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랑스럽습니다.

비록 지금 ‘발전적 해소’라는 명분으로 해체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노정연은 2006년 지금, 변화하는 정세에 걸맞게 연구소를 새롭게 재편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유야 어쨌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내는 데도, 스스로를 발전적으로 재편해 나가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한노정연이 해왔던 역할에 대해 너무 쉽게 판단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만약 한노정연의 역할에 대해 평가하시려면, 실제로 현실에서 그만한 역할을 입증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역할을 기대합니다.

문제는 한노정연이라는 틀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이, 혹은 좌파 진영이 이러한 운동 양식을 어떻게 새롭게 창출해 낼 수 있을가입니다.

 

한노정연은 특정한 운동 발전의 소산물이었습니다.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발전의 소산물이었습니다.

민주노조의 발전이 모든 운동의 발전을 대표할 때, 한노정연은 그 일각에서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은 한노정연의 모토였습니다.

한노정연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그간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의 전망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노동운동을 어떻게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지의 문제는 여전히 모두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더더욱 노동조합 수준의 전망으로는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 전망을 구체화시켜내는 데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노정연은 스스로를 한 단계 진전시켜 내지 못했습니다.

 

모든 조직은 자신을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한노정연 역시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노정연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뭣보다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노동운동의 전망에 대해 한노정연은 구체적인 전망을 만들어나가지 못했습니다.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현실과 호흡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는 한노정연만이 감당해야 하는 몫은 아니지만, 한노정연 역시 이러한 현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한노정연은 변혁운동 진영 내부의 여러 견해의 차이를 조율하거나, 그러한 차이를 뛰어넘는 이론적 전망을 구체화해내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안을 찾아내지도 못했고, 또 그런 능력을 갖춰내기에도 너무 부족했습니다.

현실의 노동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노동운동 자체만이 아니라 전체 변혁운동의 전망을 요구하고 있었고, 변혁운동의 전망을 어떻게 현실화해 낼 것인가는 한노정연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였습니다.

물론 한노정연이 이러한 과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변혁운동의 전망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21C 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논의까지 진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까지였습니다.

한노정연의 역사적인 역할과 소임은.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있습니다.

아직도 뭐라고 똑 부러지게 정리하여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한노정연이라는 틀로는 더 이상 진전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 가지 수준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연구역량들이 당분간 자신의 연구 활동에 좀 더 전념할 수 있는 구조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연구소가 그동안 출판 사업부터 정기간행물 발간, 각종 교육사업, 프로젝트 사업 등을 해왔는데 여기서 많은 사업들이 연구소라는 틀 안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좀 더 전문화해 질적으로 버전업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최근 몇 년간 좌파운동이 정체 내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타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는데, 좌파의 정치운동과 이론운동에 새로운 지형들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가 좌파진영의 이러한 이론적 실천적 지점에서 하나의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자신의 마지막 역사적인 소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발전적 해산의 시기를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출발을 위한 기다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이 만들어 지든지,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할 때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불가피한 논리만을 따른다면, 이러한 바램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를 결정(결단)하면서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고 여러 이유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어떤 일을 하든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무겁고도 엄중합니다.

특히 이러한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좌파의 현실은 더더욱 무겁고 엄중합니다.

그러나 무겁고 엄중한 현실을 그대로 무겁고 엄중하게만 받아들여서는 결코 현실을 변화시켜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좀 더 가볍고 경쾌하게 현실과 마주할 수는 없는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 운동의 발전과 일치할 수는 없는가.

사실 이런 의문은 80년대를 살았던 저나 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돌이켜 봅니다.

한노정연을 만들 때, 참으로 가볍고 경쾌한 심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을 세웠어도 힘들었어도 기뻤고,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너무 들어서인지 어떤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면, 그 출발은 어떤 ‘당위’나 ‘책임’이 아니라 ‘즐거움’으로부터 시작됐으면 합니다.

아직 인생을 오랜 산 것은 아니지만, 즐거운 것이 오래 간다는 판단이 듭니다.

자신이 즐거워야 동지들도 즐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또다시 뜬금없는 바램일지는 모르지만,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가 서로를 다시 즐겁게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과 서로에 대한 기다림이 필요하겠지요.

 

2007.01.02.

사당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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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가락의 비밀(2006.12.29.)

새끼손가락의 비밀

 

 

우리 몸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부분이 ‘손’과 입술입니다.

가장 감각이 둔한 부분은 등이라고 합니다.

손가락, 손바닥, 손목이 정확한 동작을 통해 얻은 감각을 척수를 통해 뇌에 전달할 때 우리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비밀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손의 기능은 3가지입니다.

주먹을 쥐는 것, 물건을 잡는 것, 그리고 손을 펴는 것입니다.

이 3가지 기능 중 어느 하나라도 손상되면 손은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엄지와 주변 근육은 물건을 집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엄지손가락이 움직이는 범위도 가장 크고 화려하며 근력도 가장 셉니다.

나머지 손가락도 3가지 기능에 나름대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의 기능과 관련해서 우리가 잘 모르거나 잊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역할입니다.

다른 손가락에 비해 별 쓸모없을 것 같아 보이는 새끼손가락이 사실은 손동작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하고, 손힘을 사용할 때 기본축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떠한 동작을 하던 반드시 고정된 중심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적인 동작을 할 수 있습니다.

 

손동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손힘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새끼손가락이 사실은 묵묵하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과 약속을 할 때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고 엄지끼리만 하는 약속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건강한 감각

 

하나의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위치에서 드러나지 않게 묵묵하게 새끼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심축이 있어야 그 조직은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역동적인 힘은 이러한 중심축이 얼마나 잘 세워져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이 중심축, 기본축이 무너지면 그 조직은 전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의 화려한 동작도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거꾸로 이러한 중심축과 기본축이 탄탄하다면 엄지손가락은 물론 다른 손가락들도 힘 있고 자신감 있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조직이 위기나 어려움에 처했다면, 위기와 어려움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중심축이자 기본축의 역할을 해 왔던 활동가들이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 금방 드러나지 않고, 그래서 소홀하게 판단하거나 지나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파급력은 만만치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다 새끼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다 스스로 새끼손가락 같은 역할을 자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조직은 현실 변화의 예민한 지점들을 읽어내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 조직의 생명력과 건강함이 달려 있습니다.

건강한 감각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200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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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2007.11.30.)

‘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

 

 

지금은 다시 기억하기도 끔찍하지만, 꼭 4년 반전에 아내가 교통사고로 척추신경을 다치고, 몇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재활치료를 통해 조금씩 걷기 시작했을 때, ‘경직’과 ‘통증’이라는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경추 3번과 4번 신경이 손상을 입었지만, 그나마 다행히 신경이 전부 끊기지 않아 완전 전신마비는 모면할 수 있었고, “걸을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재활 치료를 받는 중에 맞닿게 된 ‘도전’인 셈이었다.

사실 배설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즉 똥오줌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완전마비’가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힘겨운 물리치료의 결과로 근력이 생기고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근력과 함께 ‘경직’이, 신경이 살아난 만큼의 ‘통증’이 동반된 것이다.

 

당시 재활 치료과정에서 알았지만, 마비에는 ‘경직성 마비’와 ‘이완성 마비’가 있었다.

‘경직성 마비’는 불필요하게 신경이 극도로 긴장하면서 온 몸이 뻣뻣하게 되는 것이고, ‘이완성 마비’는 몸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경직성 마비’였다.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이 뻗쳤고, 사지 전체에 팽팽하게 긴장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경직만큼 통증이 수반됐다.

손상으로 흐트러진 신경은 온갖 알 수 없고 가눌 수 없는 통증을 뇌로 전달했다.

그 때마다 아내는 ‘경직’과 ‘통증’의 고통을 호소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는 점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기 재활치료 과정에서는 이완성 마비에 비해 경직성 마비가 빨리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경직’으로 걷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잘 서고 잘 걷는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경험이 풍부한 물리치료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통증’에 대해서는 “통증은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이라 위안해 주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허리를 굽히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면서 그 탄력으로 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에 안주하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했다.

지팡이나 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즈음에, 물리치료사는 “지금 몸이 완전히 고정된 상태다. ‘안정’된 것과 ‘고정’된 것은 다르다. 몸통이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고, ‘고정’된 몸과 ‘안정’된 몸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양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몸통’을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혼자 걸으려면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병원은 온실이고, 바깥세상은 현장이기 때문이다.”

4년 반이 지난 지금, 아내는 아직도 양 손에 힘을 빼지 못하고 있고, 몸통이 자유롭지 못하며,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없어서, 혼자 서서 걷기는 하지만 ‘제대로’ 걷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모든 사람이 갓난아기 시절에 이미 마친 걷기 학습을 아내는 지금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있다.

제대로 걷기 위해.

4년 전 6개월간의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을 나설 때 물리치료사가 했던 마지막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경직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경직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한번은 넘어질 것이다. 그 때 어떻게 순간적으로 대처하느냐가 혼자 걸을 수 있는지에 관건이다.”

 

2007.11.30.

관악산 남쪽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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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고추나무는 일으켜 세우지 말라!(2003.08.19)

쓰러진 고추나무는 일으켜 세우지 말라!

 

몇 달 전 개인 사정으로 농가주택으로 이사 온 뒤, 계속 눈에 거슬렸던 것이 텃밭에 심어져 있던 고추였다.

좋은 종자로 심었다는 고추가 집주인의 관리 소홀로 쓰러져 방치되고 있었고, 농사에는 애초부터 무지랭이인 나는 집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쓰러진 고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바라만 보지 않고 쓰러진 고추나무를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어줍지 않은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쓰러진 고추들이 막 썩기 시작할 때에서야 였다.

 

고추나무 세우기

 

쇠막대기를 땅에 박고 비닐끈으로 쓰러진 고추들을 묶어 세우면서 내가 놀란(?) 것은 고추나무가 너무 좋은 종자여서 풍성하고 실하게 열린 고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졌다는 점이었다.

이웃집 농부들이 고추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때’를 놓치지 않고 지지대를 받쳐 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놀란 이유는 ‘때’를 놓쳤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고추나무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열매를 맺어, 결국 사람이 지지대를 받쳐 주지 않으면 자신이 맺은 열매의 무게마저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썩을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릇 이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더 많은 수확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한 종자 ‘개량’의 결과였다.

이 ‘개량’된 고추나무는 주인을 잘못 만나 다 자라기도 전에 쓰러져 썩게 됐지만, 주인을 잘 만나 ‘때’를 맞춰 풍성하게 수확된 고추들의 운명은 어떨 것인가?

다 팔려서 소비되지 않으면 그대로 밭에서 썩거나 창고에서 썩을 것이니, 결국 고추의 운명은 ‘자연의 때’만이 아니라 ‘시장의 때’와도 궁합이 맞아야 온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고추나무 하나 세우면서 드는 괜한 상념에 마음이 씁쓰레 해졌다.

 

밭 여섯 이랑이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둘이서 한나절을 끙끙대야 간신히 쓰러진 고추나무를 세울 수 있었다.

‘때’를 놓쳐 아쉬웠지만, “남은 고추라도 건질 수 있겠지”하는 조금은 흡족한 마음으로 밭두렁에 주저앉아 매판장에서 사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데, 마침 곁을 지나가던 뒷집 통장 아저씨 왈(曰),

 

“쓰러진 고추는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여, 뿌리가 흔들려 바람이 들어가면 고추가 다 죽어. 괜한 일들을 했구먼.”

 

조급한 기대와 설레임

 

이날 이후, 나는 집을 드나들 때마다 어설픈 마음으로 세운 고추나무들이 하나씩 둘씩 누렇게 시들어 가고, 붉게 익다가 병이 들어 썩은 채 무게를 감당 못하는 시든 나무에 메달린 고추를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러길 보름가량 지났을까?

여름 장마가 끝나가자 고추밭을 하루 빨리 뒤집어엎어 김장 배추와 무우를 뿌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씩 긴장되고 흥분되어 갔다.

누렇게 시들어 빠진 고추나무를 뽑아내고, 밭이랑을 뒤집어엎어 고른 다음, 거기에 새로 김장 배추와 무우 묘종을 심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해지는 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대와 셀레임이 가볍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시들어 빠진 고추나무와 붉게 익다말고 썩어가는 고추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밭을 뒤짚어 엎고, 새로운 묘종을 심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벌써 내년 봄에 파릇파릇 솟아날 배추와 무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런 기대와 설레임으로 자랑삼아 장모님한테 이야기했는데, 정색을 하며 장모님 왈(曰),

 

“고추를 버리지 말고 일일이 다 따야 혀, 얼마나 좋은 고추인데. 썩은 부분만 도려내면 돼.”

 

2003.08.19.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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