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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구간종주2] '한계령'에서 '옛조침령'까지

백두대간 구간종주기2(2008.10.19.)

'한계령'에서 '옛조침령'까지

 

"산길을 따라 걷는 이 시간 모든 것이 아름답다"

 

 

 <산길을 따라 걷는 이 시간 모든 것이 아름답다. 사진: 수담>

 

산악회 홈페이지 맨 위에 있는 글이다.

이 글은 글 자체로만 해도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두 번째 산행을 해보니 그게 아니다.

산이 누구에게나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내게는’ 그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꼴찌를 면할 수 있을 때---.”

이번에는 좀 다를까 했는데, 역시 꼴찌다.

간신히 도착해보서 보니, 선두와는 2~3시간 차이가 났다.

아~ 언제 먼저 도착해서 여유있게, 아니면 “왜 빨리 안와”하면서

일행을 기다려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산악 게릴라처럼---

 

숨 돌릴 틈도 없었다.

01시 50분경, 한계령 어디엔가 도착하자마자

산을 오른다.

첫 번째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출발부터 뒤처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뒤편이다.

다행히 날씨는 맑고, 기온은 가을답게 덥지도 차갑지도 않다.

한 시간 가량, 암릉 구간을 오른다.

사실 이건 차라리 쉽다.

 

 

<암릉을 오르며, 사진:이철호>

 

앞서간 일행들의 헤드랜턴이 별빛처럼 흔들린다.

잠깐 고개를 쳐들면 밤하늘에는 달빛과 몇몇 익숙한 별자리가

무심히 우릴 쳐다보고 있다.

멀리 한계령이 내려다 보이고,

가끔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날이 밝았으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을 단풍과 암릉과

멀리 있는 산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오밤중의 불청객들에게

숙면의 시간을 뺏긴 한계령은

가끔 차가운 한숨을 뱉어낸다.

 

4시 40분경,

망대암산(1236m)에서 짐을 잠깐 풀어

드러누었다.

 

<망대암산 표지, 사진:산초>

 

온갖 잡생각

 

점봉산(1424m)까지는 완만한 능선이다.

새벽 5시 30분 즈음에 점봉산에 도착했다.

아직 동이 트지는 않았지만,

어둠속에나마 멀리 산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점봉산에서>

 

잠깐 앉았다가

다시 단목령을 향한다.

단목령까지는 6.2Km다.

옛날에는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데 더 자신이 있었는데

이번 산행에서는 힘들었다.

왼쪽 무릎 통증 때문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왼쪽 무릎이

통증을 호소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걷고 싶지만

통증을 떨쳐버리려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실없는 잡생각을 떠올린다.

“산도 인생처럼 결국 자신의 짐은 자신이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건가?”

“아니, 그래도 ‘우리’라는 게 있는데 ---”

“어디까지 ‘나’이고, 어디까지 ‘우리’인가?”

“혼자 가는 건가? 함께 가는 건가?”

 

이런 잡생각을 비웃는듯

단풍숲 사이로 여명이 조금씩 밝아온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따라

아침해도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 한다.

 

<단풍숲 사이로 밝아오는 여명, 사진: 산초>

 

길이 나를 이끈다

 

끝없이 걷고 또 걷는다.

내가 길을 걷는 게 아니다.

길이 나를 이끈다.

내려갈수록 산은 어둠 속에 감춰두었던 단풍을 드러낸다.

온통 빨갛고, 온통 노랗다.

 

<세상 모든 물감을 뿌려놓아도 이 보다 더 붉지는 안을 단풍, 사진: 산초>

 

가끔 단풍숲 사이로

산죽=조릿대도 모습을 내민다.

 

 

<조릿대 사잇길, 사진: 물안개>

 

<점봉산 내려오는 길에서 ‘이른아침’, 사진: 박성인>

 

단목령에서

 

아침 8시 5분경에 간신히 단목령에 도착했다.

 

<단목령에서 ‘청계산기슭, 사진: 이철호>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데

후미대장이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 내려온다.

우리보다 뒤쳐진 일행의 배낭이다.

참 대단하다. 아무나 대장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중에 홈페이지를 보고 알게 된 사실.

선두 그룹은 날도 밝지 않았는데 단목령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마 우리 일행이 점봉산 정상에 있을 때

이미 이곳을 지나간 듯.

 

 

<이해가 안된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단목령이라니---, 사진: 수담>

 

근처 개울에서 라면을 끓여 아침을 해먹고

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걷다보니 줄어드네”

 

다시 조침령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조침령까지는 9.9Km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직 채 반도 지나지 않았다.

 

길은 오솔길이고, 가파르지 않아

정겨웠지만,

너무 길었다.

이 길이 2~3Km 정도만 됐으면

걸음이 얼마나 가벼울까?

근데 같이 걷던 ‘이른 아침’ 왈, “어, 걷다 보니 줄어드네?”

 

 

<빨강과 노랑과 녹색과 ---모든 색들의 어우러짐. 인간도 그럴 수 있을까? 사진: 불루문,>

 

북암령을 거쳐

걷고, 또 걷고

또 걷고, 또 또 걷고

 

 

 

 

조침령에서 옛조침령까지

 

걷다보니 길은 줄어들어

13시 5분에 조침령 관망대에 도착.

다 와간다고 생각하니 보이지 않던

산도 보이고

 

 

<조침령 근처에서 바라본 단풍산의 절경, 사진: 하나비>

 

조침령 관망대에서

마지막 숨도 고르고

 

 

<조침령 관망대에서 ‘이른 아침’, 사진: 박성인>

 

 

<조침령 관망대에서 ‘청계산 기슭’, 사진: 이철호>

 

그래도 진동계곡 옛조침령까지는

다시 3Km를 더 가야.

길은 다시 우리를 불러 일으키고

 

 

<조침령, 사진: 산초>

 

 

<조침령에서 옛조침령으로 난 길, 사진:물안개>

 

드디어 ‘옛조침령’에 도착하다!

 

다시 정신없이 걷고 또 걸어

어떻게 걸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내려오다 보니

멀리 억새 사이로 옛조침령과 쇠나드리교가 보인다.

 

<억새 사이로 보이는 옛조침령과 쇠나드리교, 사진: 물안개>

 

14시 30분, 마침내 도착했다.

한계령에서 출발한 지 12시간 40분만이다.

족히 25Km는 된다고 했다.

돌아오는 차에서 홍 대장께서,

이 구간이 백두대간 무박코스에서 가장 긴 구간이라고 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신 일행분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서 다음에는 꼴찌는 면해야 한다고 거듭 거듭 다짐하면서

염치없이 급히 점심을 먹고, 쇠나드리교 아래 물가에서 간단히 몸을 씻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15시 10분에 출발했고

옛조침령에는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한 채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잠결에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 ‘이른 아침’이 사진을 조금만 더 잘 찍어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리고 사진기도 좋았으면 ---

--- 오늘 다른 일정 때문에 빠진 ‘마당쇠’가 이번에 일정이 바뀌어서 가장 어려운 코스를 등반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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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글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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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협동1,2,3-판란드식 교육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협동1,2,3-핀란드식 교육

 

<프레시안>2008.10. / 성현석 기자

 

"평등 교육이 더 '실용'적이다"

 [<프레시안> 창간 7주년 :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협동 (上)

 

어릴 때 읽은 동화 한 토막.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하게 됐다. 지옥에서는 밥 먹는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밥상에 팔만큼이나 아주 긴 젓가락과 숟가락이 놓이는 까닭에, 음식을 제대로 입에 넣기가 힘들다. 밥그릇이 엎어지기 일쑤다. 그럼, 흙에 뒤범벅이 된 음식을 서로 먹겠다고 싸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치던 사람이 이번에는 천국 구경을 하게 됐다. 지옥과 반대로, 천국에서는 밥 먹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밥상이 똑같다. 역시 긴 젓가락과 숟가락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음식을 흘리지 않는다. 긴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서로에게 떠 먹여 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협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같은 밥상, 즉 같은 물질적 조건에서도 '협동' 여부에 따라 행복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각자 생수 사서 마실 돈으로 수돗물 관리에 투자하는 게 낫다" 

북유럽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 동화를 떠올리게 한 사례는 많았다. 핀란드에서는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 스웨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나라들은 수자원 관리 분야에서 세계 1, 2위를 다툰다. '숲과 호수의 나라'라고 불리는 자연환경도 한 이유다. 하지만 '깨끗한 물'을 시민에게 공급하기 위한 공적 투자에 적극적이라는 점이 더 큰 이유로 꼽힌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수돗물의 질을 믿을 수 없어서 각자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경우, 그리고 수돗물을 믿고 마시는 경우. 이 둘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사회적 비용이 더 클까. 물론, 각자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경우다. 생수를 사서 마실 돈을 모아서, 수돗물 관리에 투자하면 결국 모두가 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 이게 협동 모델이다.

북유럽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런 협동이 가능한 이유를 물었다. 부러움 섞인 질문이었다. 대부분 답변이 신통치 않았다. 누구나 뻔히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더 착해서?…경쟁보다 협동이 더 실용적이니까!" 

귀에 쏙 들어오는 대답을 한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한국인 유학생 신경아 씨였다. 신 씨는 캐나다에서 작곡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핀란드 헬싱키에서 오케스트라 지휘 전공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라고해서 특별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며 대답을 시작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흔한 답변처럼 들렸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제도적 차이 외에,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생각에서도 다른 대목이 있지 않겠느냐"라고.

보다 자세하게 이어진 대답은 이랬다. "핀란드 문화는 아주 실용적이다. 협동과 연대에 바탕을 둔 사회 모델 역시 실용적인 판단의 결과처럼 보인다. 복지가 강한 사회니까, 유난히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틀렸다.

햇볕이 적은 핀란드는 사람이 살기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니다. 게다가 오랜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독립한 직후에는 격렬한 내전도 겪었다. 독일, 스웨덴의 지원을 받는 백위군과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적위군 사이의 유혈 충돌이다. 당시, 백위군이 승리하면서, 좌익은 대부분 러시아로 쫓겨났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독일 측에 가담했던 탓에 소련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전쟁 뒤에는 소련과의 무역량이 많았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경제가 파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내부적으로 무한 경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이런 대답은 주 핀란드 한국 대사관 관계자가 전한 이야기와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대사관 관계자는 "북유럽 국가들은 오랫동안 유럽의 변방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핀란드는 자원이 적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사람에 투자하는 수밖에 없다.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했다. 인권과 연대 의식이 유난히 강해서라기보다, 경쟁을 자제하고 협동을 강조하는 모델이 더 '실용'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각자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것보다, 세금으로 수돗물 관리에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설명과 닮았다. 북유럽에서 만난 한국인들 중에는 '믿을 수 있는 수돗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점수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는 순간, 교육이 망가진다" 

'수돗물 모델'과 닮은 사례는 많다. 그 중 하나가 교육이다. 사교육에 들어가는 돈을 세금으로 거둬서 공교육에 투자하면 모든 아이들이 훨씬 질이 높은 교육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수돗물과 교육은 다른 측면이 있다. "내가 꼭 남보다 더 좋은 물을 마셔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자신이 마시는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가 문제일 뿐이다. 굳이 남과 차별화해야 할 필요는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꼭 남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많다. 모두가 좋은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앞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교육의 질보다 '남과 차별화'하는 데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다. "모두가 나쁜 교육을 받더라도, 우리 아이가 전체에서 1등을 하면 만족스럽다"라는 생각이 번지는 경우다. 수돗물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나쁜 물을 먹더라도, 내가 그중에서 가장 좋은 물을 먹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리는 없으니까.

'차별화'하려는 욕망이 질을 높이려는 노력보다 두드러지면, 당연히 전체적인 질은 떨어진다. 교육이 사회적 차별화의 통로가 될 때, 이런 일이 생긴다.

"학교에 서열이 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북유럽 사회가 결정적으로 돋보이는 대목이 이 부분이다. 직업, 학력, 학벌 등에 따른 차별이 매우 적다. 학교에서 받은 점수가 사회에서 받는 대우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적다는 뜻이다. 대학 교수, 법조인 등 오랫동안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직업으로 쏠리는 현상도 약하다. 오히려 생산직과 육체노동자가 높은 소득을 거둔다. 장인(匠人)을 존중하는 문화 때문에, 한 가지 기술을 꾸준히 익힌 사람에 대한 대우가 좋다.

출신 학교를 따지는 문화가 거의 없다. 북유럽에서 만난 교사, 교육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전한 이야기다. 한국에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북유럽 교육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하는 '입에 발린 말'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헬싱키 시내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통계청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라울라 씨는 "학교 간에 서열이 있다고? 글쎄, 핀란드에서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혹시 그가 '좌파'인 걸까. 그렇지 않다. 그의 정치 성향을 물었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중도 우파 지지자' 라고 일러줬다.

녹색당 지지자이며, 오케스트라 연주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앙띠 씨는 같은 질문에 "시벨리우스 음악대학이나 헬싱키 종합대학, 오울루 공과대학 등은 외국에도 좀 알려진 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무리를 하면서까지 이들 학교에 들어가야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또 관련 분야 종사자들 가운데 일부를 제외하면, 학교의 명성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완벽한 평준화는 아니지만, 학교 간 순위 매기기에 열을 올리는 문화와 거리가 멀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우열반 없앤 이유…다양한 아이들이 팀 단위로 공부할 때 성취도가 높다" 

핀란드에는 명문고, 명문대가 없을 뿐 아니라 우열반도 없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부터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져 온 교육개혁이 핀란드 교육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우열반은 1985년에 사라졌다. 대신, 학력이 높은 아이와 낮은 아이가 한 교실에서 공부한다. 경쟁보다 협동을 중시하는 쪽으로 교육정책의 기조가 바뀌면서부터다.

교실 안에 다양한 수준의 아이들이 있고 이들이 팀(Team)을 이뤄 공부할 때, 학업 성취도가 높아진다는 게 정부 차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또 개인 간 점수 경쟁에만 열을 올리느라, 서로 협동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채 졸업한 학생들이 사회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고려됐다. 사회 생활은 대부분 남과 협동하는 과정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더 실용적"이라는 한국 vs "경쟁은 경쟁력을 망친다"는 핀란드

경쟁에서 협동으로 교육 정책의 기조를 옮기는 변화 속에서 반발은 없었을까. 헬싱키에서 만난 한 대학원생과의 짧은 대화 속에 힌트가 있다.

"평등 교육이 이뤄지는 셈이네요." "그런 셈인가요. 아무래도 교육에서 차별을 없애는 게 더 실용적이죠." 

똑같이 '실용'을 내세웠지만, 한국 정부가 택한 방향과는 다른 길을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그 길의 끝은 어떻게 다를까.

 

 

"'혼자 똑똑한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

[<프레시안> 창간 7주년 :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협동 (中)

 

핀란드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신다. 1인당 술 소비량이 세계 1위다. 그래서 알콜 중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꼽히곤 한다. 날씨가 좋은 금요일 저녁이면, 술병을 들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5월 1일 노동절에는 도심 한복판에서 거창한 술판이 벌어진다. 대통령이 직접 나와서 시민과 함께 건배를 외친다.

이렇게 술과 가까운 문화 탓인지, 고등학생들도 술을 많이 마신다. 한국에도 술을 마시는 고등학생이 종종 있지만, 핀란드에서는 공원 등 눈에 띄는 곳에서 마시는 학생들이 많다는 점이 다르다.

핀란드, 공부하는 시간은 가장 적은데 학력은 1위  

술병을 들고 몰려다니는 고등학생들을 보며, 이 나라가 PISA(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력조사)에서 종합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물론, 청소년 시기에 술을 접하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유분방한 문화 속에서도 높은 학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핀란드는 수업 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짧다. 사교육도 거의 없다. OECD가 학생들이 학교 밖·가정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조사한 결과 역시 최저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PISA 순위는 최상위권이다. 핀란드를 바짝 뒤쫓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핀란드와 달리 사교육이 활발하고, 학생들이 학교 밖·가정에서 공부하는 시간도 매우 긴 편이다.

"수학 숙제 있으면 마음이 매우 무겁다"…한국 33.2%, 핀란드 6.7%  

그런데,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핀란드는 학력과 학습흥미·동기가 모두 높은 반면, 한국은 학습흥미·동기가 최하위권이다.

2003년 PISA 수학 부문 결과를 보면, 한국은 홍콩과 핀란드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수학에 대한 흥미도와 학습 동기는 전체 41개 나라 가운데 각각 31위와 38위였다.

당시 학습태도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면, "수학 숙제를 하려고 하면 마음이 매우 무거워진다"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비율이 한국은 33.2%, 일본은 51.5%였다. 반면, 핀란드는 6.7%에 그쳤다. OECD 평균은 29.2%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안절부절 못한다"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한국 학생들은 44.3%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일본 학생들은 42.1%로 비슷했다. 핀란드는 15%, OECD 평균은 29.0%였다. 학습흥미·동기에 관한 답변에서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교육제도 및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합은 2분지엔의 초뿔말이다?"…'염불 외기'가 수학 교육을 대신한 사회

수학 문제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린 학생들만이 아니다. 어른들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어른들 역시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 공부는 군 복무만큼이나 괴로운 일이라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글이 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어찌나 즐겨 읽었는지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기자의 위편삼절은'수학의 정석(定石)'이었다. 읽고 풀고 베개 삼아 베고 자다 일어나 다시 읽고 풀다 보니 책이 걸레처럼 돼버렸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1000쪽 넘는 책 두 권이 거의 암기(暗記)된다. 문제의 관상(觀相)만 척 보고도 정답을 고를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 덕에 입시 점수는 좋았지만 암기의 힘은 끈덕졌다. 요즘도 꿈속에서 기자를 시그마와 인테그랄 사이로 몰아넣고 진땀 흘리게 만드는 것이다."

지난달 27일자 <조선일보> 기사 일부다. 문갑식 기자가 <수학의 정석> 시리즈 저자인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을 인터뷰한 기사다.

같은 지면에 문 기자가 쓴 글을 보면, 더 적나라한 이야기도 나온다.

"1977년 겨울 서울 종로2가 뒷골목 학원가가 생각납니다. 중3 겨울방학 때 '기본수학의 정석'과 '고교기본영어'를 수강했습니다. 수학강사는 염불(念佛)처럼 공식을 외우게 했습니다. '말은 초뿔엔마일의 공차' '합은 2분지엔의 초뿔말이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수열의 말항(末項) 구하는 것, 두 번째는 수열의 합(合) 구하는 공식입니다. 수학 정석의 저자이자 상산고를 최고의 자립형사립고로 만든 홍성대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떠오른 31년 전 기억입니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인데…"한국 학생들은 왜 가만히 있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한국남자들끼리는 재미있지만 외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문제풀이 요령을 염불처럼 외운 이야기도 역시 '국내용'일 뿐이다.

이처럼 엽기적인 방식으로 공부한 이야기를 북유럽 사회에 전하면, 한국에 대해 아주 이상한 인상을 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핀란드 학생들이 "수학 숙제를 하려고 하면 매우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대답한 비율이 6.7%에 그친 데서도 눈치 챌 수 있는 사실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한국 학생들은 문제풀이 요령을 외우는 것으로 수학, 과학 공부를 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과장해서 이야기 한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학생들이 가만히 있느냐"라고 물었다.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일을 강요하는데 저항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집합론을 창시한 수학자 칸토어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라는 말을 남겼지만, 수학 교과서 첫 페이지에서 '집합'을 배우는 한국 학생들은 "수학의 본질은 고통"이라는 말에 더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수학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내가 수학과에 가리라고는…"

그래서 한국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북유럽으로 건너가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문 기자보다 세 살쯤 어린 스웨덴 교포가 겪은 일이다. 정혜영 <프레시안> 스웨덴 통신원의 남편인 그는 1980년대 초에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당시 한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스웨덴에서도 고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스웨덴 사민주의가 낳은 성과가 절정을 구가하고 있을 당시, 그가 놀란 대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수학이 재미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수학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그였다.

뒤늦게 수학의 재미에 눈을 뜬 그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는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수학과에 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스웨덴 방정식과 한국 방정식이 다를 리는 없다. 수학 교과서 속에 담긴 개념은 만국 공통이다. 단지, 가르치고 평가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시그마와 인테그랄 사이에서 진땀을 흘리는 악몽을 꾼다는 문갑식 기자도 스웨덴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면, 수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의 관상(觀相)만 척 보고도 정답을 고를 지경"을 '병리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권장하는 사회에서는, 학생들이 칸토어가 말한 '수학의 본질'로부터 계속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수학 교과서 속 개념을 차분히 숙지할 여유 없이 문제 풀이 요령을 외우기에만 급급한 풍토에서는 "단지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제약만 받을 뿐, 어떤 생각도 허용되는" 수학의 자유를 실감하기 어렵다. 또, 눈에 보이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추상적 사고를 제대로 경험하기도 힘들다.

"□+□=10"과 "1+9=□"의 차이…"'생애 첫 지식 활동'을 어떻게 시작하나"  

스웨덴 학교에서는 덧셈·뺄셈을 가르칠 때, "□+□=10. □에 각각 들어갈 숫자는?"과 같은 유형의 문제를 자주 출제한다. 아이들은 "1과 9, 2와 8,…9와 1" 등 여러 개의 답을 적는다.

초보적인 산수를 배울 때부터 "문제의 답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배어든다. 음수와 양수, 유리수와 무리수, 실수와 허수 등 수(數)에 대한 개념이 넓어질 때마다, 아이들은 어릴 적 접했던 문제의 답이 더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만났던 산수 문제의 답은 "1과 9, 2와 8,…9와 1"만 있는 게 아니라 "-79와 +89, 5.13과 4.87, 1+10i와 9-10i…" 등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 □에 들어갈 숫자는?"과 같은 문제가 주를 이루는 한국, 일본 등과 다른 대목이다. '생애 첫 지식 활동'을 답이 하나인 문제로 시작하는 셈이다.

산수를 익히는 것은 추상적 사고를 하는 첫발을 떼는 작업이다. 이전까지는 사과, 배, 엄마, 아빠 등의 낱말을 익히는 수준에 머무르던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 배, 엄마, 아빠 등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만 하나, 둘, 셋은 그렇지 않다. 숫자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개념화하는 데 주로 쓰이지만, 실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런 개념을 처음 익힐 때, 답이 하나뿐인 문제로 시작하는 것과 답이 무궁무진한 문제로 시작하는 것은 얼핏 사소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다. 이런 차이가 훗날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창의와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로 이어질 수 있다.

평가가 교육의 목적으로 통하는 한국ㆍ일본

한국, 일본 등에서는 왜 '답이 하나인 문제'로 산수를 가르칠까? 이 역시 '답이 여러 개인 질문' 이다. 콕 짚어서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답이 여러 개인 문제'로 산수를 가르치기 어려운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게, '평가'가 목적이 돼 버린 교육 문화다. 평가는 아이들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그런데 평가 결과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에서는, '평가 점수를 잘 받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돼 버린다. 이렇게 되면, 답이 모호하거나 무수히 많은 문제는 내기 어렵다. 답이 선명한 문제, 그래서 평가 결과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기 힘든 문제만 제시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 문제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어른이 돼서 겪는 문제들은 대부분 답이 모호하거나 무수히 많은 문제들이라는 뜻이다. 답이 하나인 문제를 푸는 데만 능해서는 좋은 어른이 되기 어렵다.

반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평가는 수업이 제대로 진행됐는지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라는 입장에 충실한 편이다. 이곳 교사들이 교육에 대해 유난히 더 뚜렷한 신념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학교에서 '등수'를 매기지 않는 문화' 때문이라는 게 교육 전문가들이 흔히 하는 설명이다.

성적표에 '등수'가 없다

핀란드와 스웨덴 모두 7세~15세까지의 의무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9학년제 기초학교(종합학교)가 의무 교육 기관이다. 단, 핀란드에서는 원하는 학생에 한해 10학년까지 다닐 수 있다. 스웨덴에서는 기초학교 8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에 해당) 때 처음으로 성적표를 받는다. 핀란드에서는 1~2학년 때는 점수가 아닌 문장 표현으로 된 성적표를 받는다. 3학년 이상이 되면, 성적표에 평점이 나오기도 한다. 점수에 따른 평가를 실시할지 여부, 점수를 매기는 기준 등은 지방 교육위원회가 정한다.

성적표에 점수가 기재돼 있다면, 당연히 '등수'도 매겨져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의무교육 기간 동안에는, '등수 매기기'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또 굳이 '등수'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거의 없다. 평가의 성격 역시 다른 학생과 비교하기 위한 게 아니다.

게다가 전국, 혹은 지역 단위의 일제고사도 금지돼 있다. 이미 폐지된 일제고사를 부활시킨 한국과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정답이 없는 과제에 대한 주관적 평가  

'등수'가 무의미한 문화는 수업 방식과도 관계가 있다. 북유럽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특정 주제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를 아이들이 똑같이 푼 뒤, 정답을 택한 비율에 따라 점수를 매기는 방식에서는 객관적인 '등수'가 매겨질 수 있다.

하지만, 보고서 작성처럼 뚜렷한 정답이 없는 과제에 대해 교사가 평가한 내용에 대해서는 등수가 큰 의미가 없다. 성적표에 기재되는 점수는 학생이 내놓은 결과물에 대한 교사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학생, 학부모들도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물론, 교사를 믿고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문화는 특히 핀란드에서 견고한 편이다. 스웨덴 등 다른 북유럽 국가에서는 교사에 대한 불신이 상대적으로 강해서 사회 문제로 꼽히기도 한다.

개인별 평가가 아닌 팀별 평가…자기 점수만 챙기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북유럽 학교에서 가장 흔한 수업 방식은 팀(Team)을 이뤄 진행하는 협동 작업이다. 이 경우, 평가 역시 팀 단위로 이뤄진다. 팀에 속한 학생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팀 전체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학력 수준이 높은 아이도 팀 성적이 나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팀 구성원은 혼자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팀 전체가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또, '혼자서만 똑똑한 사람'보다 팀워크(Teamwork)에 능한 사람이 기업과 정부에서 더 뛰어난 '경쟁력'을 발휘한다는 실용적인 고려도 작용했다. 자기 점수를 높이는데만 골몰하는 아이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제도를 속속 도입하고 있는 한국 교육과 대조적이다.

수업에서 협동 작업을 진행하는 팀은 학력 수준이 서로 다른 아이들로 구성된다. 교사는 각각의 팀이 학력과 성격 등 여러 면에서 최대한 다양한 아이들로 구성되도록 배려한다.

학력 수준이 다른 아이들끼리 계속 대화하면서 개념을 터득한다  

기자가 헬싱키에 있는 라또까르따노 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5학년 교실에서는 과학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교사가 던진 질문에 대해 아이들이 팀 단위로 토론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인터넷과 도서관을 이용해 미리 관련 자료를 찾아왔다. 서로 다른 자료를 갖고 있는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답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같은 팀 안에서도, 어떤 아이는 이미 관련 자료를 충분히 읽었다. 다른 아이는 자료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토론해서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앞에 나가서 팀이 찾아낸 답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팀 단위 토론이 시작되면, 처음에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교실은 시끄럽게 달아오르고, 교사는 가만히 지켜본다.

이 과정에서 관련 개념을 먼저 깨닫는 아이가 나온다. 이 아이가 다른 팀 구성원에게 스스로 이해한 바를 설명한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아이는 여전히 엉뚱한 질문을 퍼붓는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먼저 이해한 아이도 설명을 계속 보완하고, 스스로 이해한 바를 되짚어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팀 구성원 대부분이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교사가 제시한 문제의 답을 찾는다.

토론 과정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다. 이해가 안 되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남보다 조금 먼저 깨달아서, 수업 내내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던 아이들은 대화하고 설득하는 능력을 키운다.

토론에서 뒤쳐진 아이들, 그들을 위해 학교와 교사가 있는 것  

이런 설명을 듣고서, 궁금증이 일었다. 학습 속도가 유난히 더뎌서 팀에 기여하지 못하는 학생이 따돌림을 당하는 일은 없을까.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교사에게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과연?' 그래서 이 학교 사뚜 홍깔라 교장에게 다시 물었다. 그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끝내 토론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다. 학교와 교사의 역할은 이런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수업에서 다루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가 교육과정을 별도로 마련한다.

아이들이 이런 과정을 이수하는 것에 대해 창피스러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력이 낮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와 교사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문화는 학교와 사회에서 학력 차이에 따른 차별을 겪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다."

사뚜 홍깔라 교장은 이야기를 마치며 학교를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boat)'에 비유했다. 출렁이는 배 위에서는 한 명만 몸을 잘못 움직여도 배가 균형을 잃고 뒤집어진다.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한 명만 생겨나도, 학교는 제 구실을 못하는 셈이라는 뜻이다.

 

 

"'로마'만 배우는 역사 수업"

[<프레시안> 창간 7주년 :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협동 (下)

 

핀란드에는 '친일파'가 많다.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진 이들이 흔하다는 뜻이다. 이 나라를 오래 지배했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한 이유다. 이런 반감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은 작은 섬나라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핀란드가 독일, 일본 등과 같은 편에 섰던 사실도 한몫했다. 1939년 겨울, 부동항(不凍港, 얼지 않는 항구)을 탐낸 러시아의 침략으로 영토의 10%를 잃어버린 핀란드가 "적의 적은 동지"라는 판단에 따라 러시아의 반대편에 섰던 것.

물론, 이런 호감은 일방적이었다. 일본에서 '친핀란드파'라고 할만한 사람은 드물었다. 폐허 위에서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대륙 반대편에 있는 추운 나라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별로 없었다.

모방의 나라 일본, 핀란드 교육에 관심 갖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 핀란드에 대한 호감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PISA(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력조사) 결과가 이유다. PISA 2006 수학 평가에서 일본 고등학생은 10위를 기록했다. 읽기 능력 평가에서는 14위에 그쳤다. 3년 전보다 각각 4위, 1위씩 후퇴한 결과다.

 일본 교육계가 들썩였다. 일본 학생들도 한국처럼 혹독한 입시 교육에 시달린다. 그런데 늘 PISA 1등을 차지하는 핀란드는 평균 학습 시간이 가장 짧다. 또 아이들의 학습 만족도 역시 1위다. 괴로움을 꾹 참고 공부한 일본 학생들이 실컷 놀면서 지내는 핀란드 학생들에게 한참 뒤지는 셈이다. 일본 정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자신보다 앞선 사례를 배우는 일본 사회의 순발력이 발휘됐다. <아사히>, <요미우리> 등 일본 유력 신문은 핀란드 교육에 관한 분석 기사를 여러 차례 실었다. NHK 등 방송 역시 마찬가지다.

출판계 역시 분주해졌다. 핀란드 교육을 다룬 책들이 서점가에 쏟아졌다. 이 가운데 일본 츠루분카 대학 후쿠타 세이치 교수가 쓴 <경쟁하지 않아도 세계 제일>은 큰 호응을 얻었다. 이를 보완한 책이 <경쟁을 벗어나 세계 최고의 학력으로-핀란드 교육의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한국에서 번역돼 나왔다.

또, 일본 안에서 핀란드 교육에 대한 관심이 치솟자, 주일본 핀란드 대사관은 핀란드 교육을 알리는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경쟁 없이 최고가 된 비결" 

핀란드 교육에 대한 일본 교육계의 관심은 "경쟁 없는 교육이 높은 성취도를 거두는 이유"에 맞춰져 있다.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괴로움을 참고 견뎌야하며, 이 과정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일본 사회 주류의 오랜 통념과 배치되는 사례인 까닭이다.

물론, 핀란드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 게 일본만은 아니다. PISA 결과가 나온 뒤, 핀란드 정부에 '1등의 비결'을 묻는 세계 언론의 취재 요청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는 11가지 교육 원칙을 공통 답변으로 발표했다. 내용은 이렇다.

1. 가정, 성별, 경제 상황, 모국어와 관계없이 교육 기회를 평등하게 할 것.

2. 지역에 관계없이 교육 활동이 가능할 것.

3. 성별에 따른 분리와 차별을 부정할 것.

4.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할 것.

5. 종합제 학교 운영을 통해, '선별하지 않는 기초 교육'을 실시할 것. (특정 기준에 따라 골라낸 아이들만으로 채워진 학교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 평준화 교육을 옹호하는 입장인 셈이다.)

6. 전체적인 틀은 중앙에서 조정하지만 각 지역의 실정에 맞게 실행할 것. 교육행정은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입장에 서서 유연하게 이뤄져야 함.

7. 모든 교육단계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협동하여 활동할 것. (윗 학년과 아래 학년, 초등교육과정과 중등교육과정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

8. 학생의 학습과 복지에 대해 개인의 특성에 맞게 지원할 것.

9. 시험과 성적에 의한 등수 제도를 없애고, 학생의 발달 시점에 맞춰서 학생을 평가할 것.

10. 교사는 고도의 전문성을 갖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것.

11. '사회적 구성주의'에 따른 학습 개념을 도입할 것.

협동을 통한 개념 형성…'사회적 구성주의'에 바탕을 둔 수업 설계  

이들 11가지 원칙 가운데 후쿠타 세이치 교수가 특히 주목한 것은 마지막 원칙이다. 핀란드 학생들이 "경쟁하지 않아도 세계 제일" 학력을 갖게 된 결정적 요인이 '사회적 구성주의'에 바탕을 둔 교육방식이라는 것.

'사회적 구성주의'가 뭘까. 교육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구성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구성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구성주의에 따르면, 지식은 교사의 머릿속에서 학생의 머릿속으로 복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식은 학습자가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하게 객관적인 지식은 없다. 이렇게 보면, '사실(fact)'이 하나여도, '지식'은 학습자의 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을 놓고 지식을 구성하는 작업은 혼자 진행할 수 없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 이뤄지는 작업이다. 더구나 모든 지식은 사회적 '맥락(context)' 속에서만 고유한 의미를 띤다. 얼핏 사회와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자연과학 지식조차 이런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생각이 구성주의 위로 겹치면서 나온 개념이 '사회적 구성주의'다.

협동을 통해 학생들이 개념을 형성하는 핀란드식 수업 방식은 철저하게 '사회적 구성주의'에 따라 설계돼 있다. 핀란드 교육당국자들은 '사회적 구성주의'에 따른 수업이 학생들의 창의성을 고양한다고 믿는다. 교사가 객관적인 지식을 학생에게 전수한다는 발상에 바탕을 둔 수업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미 나와 있는 모범답안을 모방하도록 유도할 뿐이라는 설명이다. 교육에서 경쟁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 애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치열한 경쟁은 모방하는 능력을 키우는데는 유리하지만, 창조성을 소모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창의성을 기르려면, 경쟁보다 협동을 장려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교육 당국자들 사이에 퍼져 있다.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적용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고도로 철학적인 개념인데, 핀란드 교사들이 이런 개념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후쿠타 세이치 교수가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 이르멜 하리넨 보통교육국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르멜 하리넨 국장은 "그렇다. 핀란드에서는 모든 교사들이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런 대답이 과장된 것인지, 실제에 정확하게 부합하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핀란드 학교에서 교사에 따라 수업 내용이 다른 경우가 흔하다는 점은 사실이다. 지식은 학생이 스스로 구성해가는 것이므로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수업 방식도 드물다. 대개의 수업이 팀 단위로 진행된다. 평가 역시 팀 단위로 이뤄진다. 그래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학생과 경쟁하며, 자기 점수만 챙기는 학생은 나타나기 어렵다. 한 교실 안에 있는 팀들이 각기 다른 내용을 익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교실 안에서 획일적인 척도에 따른 경쟁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진도의 압박"이 없다…교사가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설계

그런데 구성주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은 한국 교육계에 낯선 표현이 아니다. 현행 7차 교육과정이 구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학생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는 7차 교육과정의 취지가 실제 수업에서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한국 교사들은 구성주의, 혹은 사회적 구성주의에 따라 수업을 하기 힘든 이유로 "진도의 압박"을 꼽는 경우가 많다. 학생의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교사가 같은 속도로 교과 진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개념을 형성하도록 할 만한 여유를 갖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핀란드 학교에서 사회적 구성주의에 따른 수업이 잘 진행될 수 있는 이유 한 가지가 드러난다. 핀란드에서는 개별 교사가 사실상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하도록 돼 있다. 국가는 큰 틀에서 개별 교과교육의 목표를 정할 따름이다. 이런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어떤 교재를 택해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칠지 여부는 전적으로 개별 교사에게 맡겨져 있다. 교사마다 수업 내용과 진도가 다를 수 있는 배경이다.

'표준'은 경계 대상이다…등수 매기는 시험은 없다 

학생들이 교사에 따라 다른 내용을 익히고 있으므로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통 평가도 불가능하다. 또 학력에 대한 표준을 정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표준(Standard)'이라는 낱말은 핀란드 교육에서 경계 대상으로 여겨진다. 모든 학생이 따라야 할 표준이 없으니, 개별 학생이 표준에 얼마나 다가갔는지 측정하기 위한 시험도 없다.

핀란드 학생들은 종합학교(한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과정)을 졸업하는 16세가 돼서야 첫 시험을 치른다. 종합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남과 비교하는 시험을 겪지 않는다. 두 번째 시험은 인문고등학교 3학년 때 치르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이다.

교사가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것은 핀란드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웨덴 등 북유럽 교육이 대부분 이런 특징을 띠고 있다. 안승문 스웨덴 웁살라 대학 객원연구원이 겪은 사례에서도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

한 주제를 파고들면서, 탐구하는 법을 익힌다

안 연구원의 딸은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웁살라에 있는 종합학교로 전학했다. 딸은 지금 학교에서 받는 역사 수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학기 내내 '로마'만 다뤘다고 했다. 로마 역사에서 주제를 정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업을 학기 내내 했다는 것.

핀란드, 스웨덴 등에서는 이런 식의 수업이 흔하다. 대학 강의처럼 한 가지 주제만 다루는 이런 식의 수업은 교과 내용 전체에 대해 고르게 시간을 안배하는 한국 수업과 많이 다르다.    학기 내내 한 가지 주제만 다루면, 학생들이 고른 지식을 갖추기 힘들지 않을까. 그렇다. 실제로, 학생들은 천차만별의 지식을 갖게 된다. 어떤 학생은 로마 역사에 정통한 반면,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서는 백지에 가깝다. 다른 교사와 함께 수업한 학생은 1차 세계대전에 대해 해박하지만, 고대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문제를 풀도록 요구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이런 식의 교육이 가능한 배경에는 단편적인 지식을 고르게 습득하는 것 자체는 교육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있다. 오히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탐구하면서, 지식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지식 자체보다 탐구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주제에 대해 폭넓은 자료를 수집해서 고유한 시각으로 엮어낸 경험은 다른 주제를 탐구할 때도 큰 도움이 된다.

고른 지식을 쌓기보다 깊은 통찰력을 키운다

그리고 한 학기 내내 '로마'를 주제로 보고서를 쓴다면,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있다. 또 특정 시기에 명멸한 숱한 인간 군상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로마'라는 프리즘으로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 특징을 살피는 것. 이 정도면 역사 수업의 목표로 충분하다는 게 북유럽 교사들의 생각이다. 모든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지식의 범위는 매우 좁게 설정돼 있다.

학생들이 단편적인 지식을 외우기보다 개념을 깊이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수학 수업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핀란드, 스웨덴 등에서는 수학 시간에 학생들이 각각 다른 문제를 풀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복잡한 응용문제를 모든 학생이 풀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관심 있는 학생만 풀면 된다.

대신, 교사는 모든 학생이 방정식, 함수 등 추상적인 개념을 깊이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 풀이는 이런 개념이 구체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를 소개하는 절차일 뿐이다. 수학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도 문제만 빠르고 정확하게 풀어내면 높은 평가를 받도록 돼 있는 한국, 일본 등과 다르다.

교사는 전문직…자율성에 걸맞은 책임감을 요구받는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교사에게 높은 자율성을 보장하는 북유럽 식 교육이 실효를 거두려면, 교사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문제 풀이 요령을 가르치는 수준이라면, 특별한 전문성이 필요 없다. 하지만 개념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교사의 실력이 중요하다.

또 교사가 자율적으로 수업 내용과 교재를 정하도록 돼 있는 상황을 게으른 교사가 악용할 수도 있다. 교육 내용을 자율적으로 정하는 교사가 학생들이 왜곡된 개념을 익히도록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위험에 대해 북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뚜렷한 답은 없다. 교사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믿을 따름이라고 한다. 이런 경향은 핀란드에서 더욱 뚜렷하다.

핀란드에서는 교사가 전문직이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모든 교사가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다. 교직의 사회적 위상도 높다. 안승문 연구원은 핀란드에서 초중등 교사는 한국에서의 대학 교수와 비슷한 위상을 누린다고 전했다.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을 꼽을 때면 교사가 늘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급여 수준은 높지 않다. 사회적 평균 임금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다. 핀란드 교사들은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주당 35~40시간쯤 일한다. 하지만 아이들과 부대끼다보면, 갑작스럽게 처리할 일이 생겨서 노동시간이 확 늘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휴가일수는 다른 직업과 비슷하다.

반면, 정신적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다. 핀란드 교육 전문지 <오뻬따야(Opettaja)> 보도에 따르면, 2005년 핀란드 교사 5명 중 1명이, 교장 3명 중 1명이 학부모들로부터 심한 정신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핀란드 학부모들은 교사의 전문성을 신뢰하면서도, 사소한 권리 침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특징이 한편으로는 교사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 교직이 왜 인기가 있을까. '안정적인 직업'이어서? 그렇지 않다. 북유럽 사회는 노동조합이 강력하고, 복지가 잘 돼 있는 편이어서 무슨 일을 하건 고용 불안을 심하게 느끼지 않는다.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도 교사, 공무원과 비슷한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안정성'이 직업 선택의 기준이 되는 일은 드물다.

"가르치는 즐거움, 협동 속에서 싹 튼다"

핀란드 학생들은 교직을 택하면서 "재미있는 일"이라는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핀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 전공이 예능 계열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 '일의 즐거움'은 직업이나 전공을 택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교사가 되려는 이들은 보통 "어릴 때부터 남을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라고 이야기한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대부분의 수업이 협동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보다 조금 먼저 개념을 터득한 학생은 동료들을 돕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다보면, 이런 역할을 즐기는 학생들이 나온다. 이런 학생들은 자신이 먼저 터득한 개념을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법을 늘 궁리한다. 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주로 교육학 계열을 택한다.

동료들과 가장 잘 협동하는 학생이 교사가 돼서 다시 협동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런 순환이 이뤄지는 한, 핀란드식 교육을 향해 쏟아지는 "경쟁하지 않아도 세계 제일"이라는 찬사는 시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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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구간종주1] 진부령에서 화엄사까지

백두대간 산행기1(2008.10.04.~05.)

진부령 고개에서 화암사(미시령)까지

 

첫발을 내딛다

<진부령 고개 - 백두대간 출발에 앞서, 사진:이철호>

 

 

<진부령 고개 - 백두대간 출발에 앞서, 사진:이철호>

 

사실 얼떨결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90년대 초에 백두대간 종주 꿈꿨고, 15년 넘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이도 있고 해서 더 미루지 말아야겠다고 거듭 다짐하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지다 ‘경기우리산악회’를 만났다.

그렇게 첫걸음을 뗐다.

 

새벽 2시경 인제의 어느 휴게소에서 먹은 시레기국과 김치는

뭐랄까, 무박산행의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된 면모를 보는 것 같았다.

“바로 이거다.” 무릎을 쳤다.

경험은 복잡할 수 있는 것을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끄럽고 부드럽게 한다.

 

무모한 도전?

 

 

<새벽 안개 사이로, 사진: 초록이>

 

너무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나고 뼈저리게 느끼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벽 3시 진부령 고개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산에 오르는데

숨은 벅차오르고, 두 발은 점점 무거워지고 ---

아 이런 걸 이른바 ‘사점(死點)’이라고 하는구나.

“너무 준비를 안했구나.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다시 결심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죽자 사자 뒤따라 잡았다.

후미 대장은 그럴 필요없다고 천천히 가라고 하지만

한번 뒤처지면 끝내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새벽에 마산봉을 오르며, 사진: 수담>

 

내려가는 게 더 두려운 ---

 

마산봉으로 올라가는 사방은 칠흙같이 컴컴한데---

해드렌턴이 비친 길만이 새벽 안개를 뚫고 다가온다.

계속 오르길 두시간 반 여만에 드디어 내리막길이다.

그런데 내려가는 게 더 두렵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산은 새벽 안개 속에서 모습을 조금씩 내밀고, 사진: 좋은친구>

 

6시 30분 병풍바위 직전에서 아침식사.

동은 이미 터서 단풍에 물든 산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지만

구름에 덮힌 산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하게 보여주길 꺼려한다.

 

 

<병풍바위 앞에서 아침식사, 사진: 수담>

 

걷고, 또 걷고

 

7시에 다시 출발.

한걸음 한걸음씩 사부작 사부작, 호흡을 가다듬으며.

숨가쁘게 걷다 잠깐 스친 붉고 노란 단풍들이

눈길을 붙잡지만

채 음미할 틈도 없이 걷고 또 걷고 ---

 

 

<그림같은 단풍, 사진: 초록이>

 

7시 50분경에 대간령(큰새이령)을 지나치고 가는데

8시 반쯤 갑자기 비가 내려

비옷을 뒤집은 쓰고

무릎에 쥐가 난 이치열을 뒤로 하고

다시 신선봉을 향해 오른다.

그리고 다시 10시 20분에 상봉(1244m) 도착.

<상봉에서, 사진: 이철호>

 

홀딱 빠지다

 

상봉에서

숨돌릴 틈도 없이 다시 하산하기 시작.

 

<상봉에서, 사진: 하나비>

 

드디어 이제 오를 건 다오르고 내려가는구나. 드디어.

내려가다

너덜바위 근처에서

뒤따라오는 일행과 만났는데

이치열이 발에 난 ‘쥐’ 때문에 초죽음.

 

 

<상봉에서 내려오다가, 사진:하나비>

 

그래도 하산으로 생긴 여유 덕택에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이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단풍든 산에 홀딱 빠지기도 하고.

 

 

<빨갛게 물이 오른 단풍, 사진: 산초>

 

꼴찌지만 ‘알탕’도 하고

 

미시령 400여m 못 미쳐

화암사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끝이 없다.

 

간신히 2시쯤에 주암을 거쳐 화암사에 도착. 다시 걸어서 버스까지.

도상으로 14.25Km라고 하지만 18Km는 족히 걸은 듯.

하루동안 이렇게 오래, 길게 등산해 보기는 처음.

 

 

<화암사 근처에 있는 주암, 사진: 산초>

 

일행은 이미 다들 와서 전체 사진까지 찍어 출발준비를 하고 있고,

당연히 지진아 3인은 전체 기념 사진에 끼지도 못하고.

다음번에는 전체기념 사진에 꼭 끼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도 해본다.

 

<화암사 입구에서 전체 기념사진, 사진: 산초>

 

그래도 서둘러 점심을 먹고

주변 천진천에서 몸을 씻으니(‘알탕’)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씻긴 듯 개운.

바로 이 기분이구나. 이 맛이구나.

11시간 반동안의 힘든 기억도, 피로도

천진천의 차가운 물에 씻겨 가고.

버스에 오르니 오후 3시.

범개역에 도착하니 오후 8시 30분.

 

<하산후 막걸리와 함께 점심식사, 사진: 반디불>

 

“다시 산에 오르다. 살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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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역사와산'과 함께 다녀오다

 

천관산-'역사와산'과 함께 다녀오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역사와 산'(171회)과 함께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에 다녀왔습니다.

2008년 10월 11일(토) 밤 10시 30분에 출발,

12일(일) 새벽 6시 30분에 도착 후 11시쯤까지 대략 4~5시간 가볍게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중턱에서 억새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과 남해, 사진;김기헌>

 

높이가 723m 정도되는 아담하고 이쁜 산입니다.

이런 산이 동네에 있다면 매일이라도 올랐을 겁니다.

능선으로 오를 때 눈앞에 남해 바다가 훤하게 보이고, 산등성이에는 한참 억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원암에서 바라본 천관산, 사진;김기헌>

 

1시간쯤 오르다 정원암 조금 못미쳐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사실 오래간만이라 아침식사를 싸와야 한다는 걸 몰라서

빌붙어 먹었습니다.

산에서 먹는 밥은 진짜 꿀맛입니다.

그것도 빌붙어 먹는 밥은 더욱 꿀맛입니다.

 

 

<중턱에서의 아침식사, 사진;김기헌>

 

연대봉에 서면, 멀리 소록도도 보이고, 두륜산과 주작산도 보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라도의 정감어린 산의 풍취를 보여준다”고.

 

 

 

<연대봉에서, 사진;김기헌>

 

천관산 가을 억새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만 때쯤, 억새를 보러 천관산으로 많이 온다고 합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내려올 때,

산을 오르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산등성이에 있는 억새들>

 

억새풀 사이의 산등성이길을

둘째 현이와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처음 알았습니다.

현이가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고 있고, 암벽 등반을 원한다는 것을.

그것도 한방에 하고 싶다는 것을.

현이에게 얘기했습니다.

“세상에 한 방은 없다. 세상은 준비한 사람에게만 기다려 준다”고.

현이가 이 말뜻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산을 오르고, 함께 얘기한다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즐겁습니다.

 

 

<산등성이 억새길을 현이와 함께 걸으며, 사진;김기헌>

 

환희대는 연대봉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산아래를 내려다 보면

왜 이름이 환희대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산을 오르면, 멀리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습니다.

 

 

 <환희대에서 마당쇠와 함께, 사진;김기헌>

 

<환희대에서 김기헌, 사진;박성인>

 

무릎이 아프긴 해도

내려오는 길은 한결 가볍습니다.

오늘 다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마음을 가볍게 합니다.

끙끙대며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웬지 뿌듯해집니다.

다 내려온 다음

다시 올려다보는 산은

마음을 더욱 뿌듯하게 합니다.

 

 

<환희대에서 내려다본 능선, 사진;김기헌>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24시간 여 함께한 '역사와산' 분들이

마치 1~2년 함께 지낸 벗들처럼 정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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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

촛불 탄생 실화와 배후 & 우리의 꿈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9일, 우리를 잡아가라"

 

송경동 / 시인

<레디앙> 2008년 09월 05일 (금) 07:43:47

 

 

“한가위 전에 기륭, KTX, 이랜드, 성신여대, 코스콤, GM대우, 도루코, 콜트콜텍, 하이텍알시디코리아, 재능교육, 광주시청비정규직… 그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터로 보내줄 수 있다면… 890만 비정규노동자들에게도 눈물바람 없어도 되는 따사로운 한가위가 될 수 있다면.”

 

구로동 후미진 골목과 촛불

 

 

4월,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기 전 나는 서울 구로동 디지털산업단지 내 후미진 골목 속에 있는 기륭전자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의 촛불을 켜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도 잘 주목하지 않는 작은 촛불이었다. 작을 땐 열 명이 채 안되는 이들이 모여 멋쩍어하며 켰다.

 

며칠 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함부로 생각하고 재단했지만, 하루 나갔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그때부터 구로동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난 저녁 10시 경이면 늦더라도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나도 광화문 네거리를 밤새 떠돌다 먼동이 터오를 때면 다시 돌아왔다. 때로는 해산이 끝나고도 무슨 미련이 남아 프레스센터 앞 노상에 앉아 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잠시 눈 붙이고 나면 다시 기륭으로 향했다. 그렇게 2008년 봄과 여름이 가고 가을 초입이 되었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라고 늘상 표현하는데, 정말 어쩌다보니 ‘기륭비정규여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기륭여성노동자 투쟁 1000일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3월말부터 공대위를 꾸리는 작업부터 주도적으로 함께 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절반은 기륭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5월 11일 하이 페스티벌 마지막 행사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 조명탑에 그들이 오를 때, 5월 26일 다시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오를 때, 다시 6월 11일 공장 옥상을 점거하고 전원 무기한 끝장단식을 들어갈 때, 그리곤 이제 단식 83일차가 되는 오늘까지 그들, 기륭 동지들과 한 몸이 되어, 편파적으로 움직였다. 기륭 동지들을 닮아 시시때때로 눈물나던 날들이었다.

 

목숨 건 투쟁은 동지를 불러모으고

 

비정규 투쟁은 쉽지 않았다. 특히 기륭 투쟁은 3중고, 4중고의 투쟁이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도 부당해고당했지만 대법에서도 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법외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3년여를 지나오며 사측은 대부분의 라인을 중국으로 이전해 버렸다.

 

고용을 받아줄 공장이 없다는 얘기 앞에 우리 쪽 사람들도 오히려 수긍하는 쪽이었다. 더더욱 지금의 최동렬 회장은 기륭을 인수한 지 6개월이 채 안되는데 왜 자기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냐고 했다.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우리 쪽 사람들도 눈치를 살폈다. 거기다 남은 조합원들도 생계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빼면 10명이 전부였다. 위로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 투쟁이었다.

 

하지만 기륭 여성 비정규직 동지들은 최선을 다했다. 딱 하나 빼놨던 것, ‘죽음을 거는 투쟁’까지를 선택했다. 그 완강함과 진정성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2008년 상반기 비정규투쟁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몇 명이 외롭게 지켜왔던 농성장엔 이제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태반이다. ‘대학생 릴레이단식단’이 들어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움직인다. 10개 단체나 모임들이 주도해서 스스로 ‘기륭을 사랑하는 네티즌연대’를 만들고 독자적으로 사업들을 만들어 간다.

 

근자엔 기륭의 주거래사인 미국 시리우스사 공략을 위한 원정투쟁단 보내기 기금 모금 사업을 펼치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1억 짜리 광고를 네티즌 모금을 통해 달성해 보겠다고 한다. 가히 제2의 기륭 공대위가 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 96차와 103차, 그리고 105차 촛불문화제가 기륭 공장 앞에서 열렸다.

 

광화문 촛불의 수수께끼

 

그러다 보니 근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기륭이 광화문 촛불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묻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네티즌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기실 광화문 촛불은 그간 민중민주 운동을 해왔던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투쟁이었다. 전혀 의외의 조직 경로와 여타 전투적 운동들을 넘어서는 완강함, 모두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운동,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창조적으로 자기를 생성해 가는 새로운 자율적 운동 앞에서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평범한 촛불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 관건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광화문 촛불운동을 처음에 시작했던 사람들을 만나자 의문이 풀렸다. 우연히 4월말 처음 오프라인 집회를 기획했던 네티즌들을 만났다. 촛불이 튀어나온 것은 4월 말이었지만, 나름 지난한 준비가 있었다.

 

처음 아고라 토론방을 중심으로 광우병 소와 관련된 문제 제기를 꾸준히 올리는 이들이 있었다. 금세 여론이 형성되었다.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 제기였다. 오프라인에서 갈 곳을 딱히 찾지 못한 수많은 민주 시민들이 토론과 소통에 참여했다.

 

자연스레 까페 모임들이 제안됐고, 너댓개의 소통 까페들이 조직되었다. 네티즌들은 이 까페 공간을 통해 다양한 자체 학습과 공동 행동들을 실험했다. 리플 달기부터, 사이버 리본달기 등등. 어느 정도 조직력이 형성되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동호회 까페들 조직에 들어갔다.

 

촛불 탄생의 기원 '실화'

 

목적의식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결집해 있는 생활 관련 까페들에 접근해 갔다. 유명한 패션까페, 음식까페, 유명 연예인 팬까페들이었다. 그곳에서 읽을만한 글들을 꾸준히 올리며, 베스트 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초보적인 수준부터 사이버 공동행동을 실험, 조직해 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상에서 관계와 생동하는 삶을 느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밥상머리에서조차 죽음을 느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했다.

 

수위가 점점 높아져 위력적인 사이버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이제 거리로 나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날짜를 정하고, 전체 까페들에 공지를 올렸다. 4월 26일,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조직 확인을 해보니 1만에서 3만이 확인되었다. 누가 주역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라면서 2008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모든 새로운 운동은 물론 정세가 밑바탕이 되겠지만 의외의 정성과 노력, 믿음과 꿈에 의해 실현된다. 사이버라고 무슨 신화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사이버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편지를 통해 오가듯 오갈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도 유령이 아닌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모두는 평범하다는 사실. 결핍이 그리움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존중을 연다는 믿음을 가졌다. 서로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사실. 그런 소외된 현실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소외되지 않는 만남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광화문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

 

비정규 투쟁은 2중 3중으로 소외된 투쟁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힘이 필요했다. 그 필요를 향한 간절함이 촛불 네티즌들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고, 가고 싶은 곳이 없는 뿌리뽑힌 마음으로 새벽을 맞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간절함은 기륭여성비정규직들이 고공에서, 공장 앞에서 1100일씩 노숙하며 가져온 외로움과 간절함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같다. 둘 다 일부 자본들의 초과 착취를 위해 기획된 일이다. 그래서 촛불이 막 시작되던 5월 11일, 서울 시청 광장 조명탑에 올랐을 때 허공에 내걸은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썼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

 

그때부터 우린 광우병 촛불과 비정규직 촛불의 만남을 염원했다. 2차 고공농성 당시 구로역 광장에서 자연스런 지역 촛불을 켜들었다. 7월 초 아예 1040인 동조단식단을 조직해 시청 광장으로 나아가 청와대로 진격하는 희한한 선도투를 결행했다.

 

우리가 광화문으로 나선 수많은 연약한 촛불 소녀들, 촛불 시민들을 함께 동지로 삼고 도울 수 있는 길은 촛불들의 배후에는 비정규직 투쟁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이었다. 6월 촛불의 배후에서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물론 주체적 준비는 충분치 않았지만 기륭 동지들과 기륭 공대위는 끊임없이 그런 입장과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광화문 투쟁만큼이나 절박하고 끈질기며, 완강하게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광화문 촛불들이 정신 머리 없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운동권들 탓에 동력을 잃고 실망하며 갈 곳을 잃을 때 작은 곳이지만 올 곳이 있다는 것을 만드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광화문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론 그런 씁쓸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한켠에 남는 것은 이 시대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여하튼 광화문 촛불도 시들해지고, 기륭 투쟁도 어려워지던 때, 우리는 이제 활력과 분노를 잃지 않고 있는 광범위한 촛불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가자는 기조를 택했다. 그리고 시도했다. 이미 네티즌들도 기륭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 했다고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광화문을 중심으로 거대한 촛불이 연일 타오를 때는 듣는 시늉도 않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서도 요청을 받아 주었다.

 

 

96차 촛불과 103차 촛불, 105차 촛불이 구로동의 조그마한 공단 골목 안에서 지펴졌다. 더 이상 많은 수도 아니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촛불들이 조금씩 모여 들었다. “기륭이 아니었으면 오늘 평일 촛불이 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마음 서늘했다.

 

마지막 촛불을 지키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마음이 강건한 숨은 일꾼들이거나, 정말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기쁘게 기륭에서는 이 두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껏 여러 도움들과 나눔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광화문 촛불의 마지막 지킴이들이었다.

 

가슴 아픈 건 후자의 분들이었다. 우린 수많은 운동 과정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성정은 말할 수 없이 착한 그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의식과 생활의 간극 사이에서 안주하는 삶을 잃어버린 수많은 이들. 말하자면 허세욱 열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그보다도 어렵고 외로운 삶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KBS 앞에서의 노숙도 힘들어졌을 때 이 분들이 기륭 농성 천막에서 며칠을 기거하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는 분들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농성장 앞 밥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두었다. 누구든 식사를 달라고 하면 묻지 마시고 밥을 내주시고 수량만 적어놔 달라고. 그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네티즌 사이버 행동이 언론보다 더 큰 힘 돼

 

이런 네티즌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기륭 투쟁의 전기를 맞기도 했다. 그들이 조금씩 기륭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사이버 상에서 움직여주는 힘이, 그간 여러 언론들에서 조금씩 기륭 문제를 다루어주었던 것보다 훨씬 큰 힘을 주었다.

 

그들은 기륭 문제를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투쟁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륭의 주 거래사인 미국의 시리우스사에 대한 항의 메일 조직, 자발적 릴레이 동조단식 조직 등은 그간 기륭 투쟁이 사측과 사회를 향해 해왔던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타격을 넘어 자본 타격의 실마리를 풀어 주었다.

 

그 분들은 광화문의 상징들을 기륭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아프리카 TV>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나흘간에 걸쳐 기륭 농성장에 상주하며 일상을 네티즌들에게 송출해 주었다. 네티즌들을 따라 <칼라TV>가 들어오고, '촛불다방'이 들어오고, '다인이 아빠' 차가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80그릇의 삼계탕을 끊여 주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분들이 기륭 농성장의 주인이 되었다. 명색이 집행위원장이라지만 사실 그 분들 중 몇 분 빼놓고는 인사도 나눠보지 못했다. 광화문 촛불 대열에서 그랬듯이, 나도 그냥 기륭 농성장을 찾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려 하거나, 지도하려 하거나, 질서지우려 하거나 지휘하려 하거나 통계내려 하지 않았다. 작은 대추리처럼, 작은 광화문처럼 늘 농성장은 편했고, 모두가 주체였다.

 

물론 기륭에서의 경험은 작은 실험일 뿐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시도일 뿐일 수도 있다. 이런 시도들과 실험, 새로운 만남들이 곳곳에서 진행 중임도 알고, 그렇게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고, 만남이고, 투쟁일 뿐이다. 투쟁이 이어져 나간다면, 이런 만남은 지속될 것이다. 투쟁이 사그라지면 만남도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그라져도 좋을 것이다.

 

기억, 만남 그리고 투쟁

 

필요한 것은 믿음이며, 삶일 뿐이다. 삶이 있다면 만나질 것이고, 삶이 없다면 쓸쓸해질 것이다.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시적으로 말해 버리고 말고 싶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투쟁이라고. 맨날 박터지며 소리지르며 싸우기만 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이 부정한 구조와 체재와 제도를 넘어서는 꿈을 꾸는 운동이라고.

 

며칠 전 회의에서 기륭공대위는 기륭 단사 문제를 넘어 비정규직을 만들고 은폐하며 양산하는 이 사회 구조 자체를 문제삼는 투쟁으로 나아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만인 선언, 만인 행동’에 모두가 힘모아 나서자고 결의했다.

 

제2의 촛불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통해 만들어 보자고 얘길하고 있다. 촛불 시민들에게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다시 노래하자고, 그 선봉에 890만 비정규직들과 이 시대의 양심들이 함께 떨쳐 일어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게 꿈일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꾸는 순간, 그만큼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꾸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 0%이지만, 꾸는 순간만큼은 100%의 고밀도다. 그 밀도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도 있다.

 

2008년 촛불로 나섰던 수많은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고, 신화화, 우상화 시킬 필요없다. 그들도 890만 비정규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일상이 죽음으로 점철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나왔던 것이다.

 

견결한 이들을 만나고 싶어 나왔던 것이다. 반성하며 나왔던 것이다. 정말 헌신적이고 살아 있는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에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목청껏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쳤던 것이다.

 

실망한 촛불에게 말걸기

 

자, 이제 공안탄압과 후퇴해버린 사회운동들에 실망해 실의에 빠진 ‘위대한 촛불’들에게 누군가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우리 서로에게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운동이 폭발할 때 그 파도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정세를 타고 올라 앉아 묘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새로운 정세,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운동의 계기, 지점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87년 6월 21주년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많은데, 왜 87년 7~9월을 만들자는 목소리들은 소수인가? 왜 6월의 이데올로기에 7~9월이 밀리는가. 왜 소수 정규 세상에 다수 비정규 아픔들이 밀리는가?

 

명백한 객관 사실보다 꿈을 더 이야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엄혹하고 폭력적이며 부조리한 세상이라면 있는 객관에 대한 쓸데없는 재단과 평가, 인정보다는 그 시간에 신기루 같을지라도 더 많은 새로운 꿈이나 꾸며 살고 싶다.

 

차라리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조금은 더 양심적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실패는 아니라는 것 쯤이야 모두가 알겠지. 타협하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과 대지가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

 

이제 모두가 떨쳐 일어서고 있다. 제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렇다면 지난 시기 노무현당과는 안 싸우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누구와 어떤 정신으로 싸워나갈 것인가?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 나는 나와 싸운다. 소심한 나와.

 

 

제발 우리를 쥐잡듯 잡아가다오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탁한다. 제발 9월 9일 서울역 앞에서 890만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나서는 우리를 쥐잡듯 잡아다오. 제발 한번만 더 우리의 동지, 우리의 배후가 되어다오.

 

참, 기륭 김소연 분회장 단식이 오늘로 87일째다. 응급처치로 링겔을 가끔씩 맞으니 단식이 아니란다. 시시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바보야. 정말 죽어라는 소리인지. 참 무감하다. 이 사회가. 그리곤 이제 며칠 후면 한가위란다. 한가위란다.

 

* * *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 일정

 

9월 5일, 금,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 (시흥집중)

9월 5일, 금, 저녁 7시, 기륭 네티즌 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기륭 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이랜드 상암 촛불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철도 노조 촛불 문화제(촛불 집중)

 

9월 7일, 금,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시흥 집중)

9월 7일, 일, 저녁 7시 KBS

 

9월 8일, 월, 저녁 7시, 기륭문화제

9월 8일, 월,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홈에버 면목 집중)

 

9월 9일, 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 1차 행동, 서울역

 

9월 10일, 수, 오후 4시~, 기륭 일일 주점(용산 철도 웨딩홀)

9월 11일, 목, 기륭 네티즌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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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기고] 지못미, 뉴코아 노조

오도엽(작가) / <참세상>2008년09월08일 0시47분

 

8월은 끔찍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싸움이 천일하고도 백일이 넘어가고, 김소연 분회장은 차마 기록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의 시간을 단식으로 항거하고 있다. 새마을과 KTX 승무 노동자가 서울역 40미터 철탑에 고공농성에 들어가고 부산에서도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강원도 문막의 도루코 비정규 노동자도 정문 앞에 철탑을 세우고 목이 빠져라 공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충청도 오창의 하이텍씨알티코리아 노동자도 공장에 천막을 쳤다. 길게는 삼천일 이상을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생계를 잃은 노동자에게 하루란 목숨이 달린 시간이다. 이들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 사업주들은 법원에서 부당해고와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법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사업주들은 아직도 공장을 돌리고 주식과 부동산 투기를 통해 이익을 취득하고 있다. 하지만 법으로 복직 판결을 받은 노동자는 공장 앞에서 한뎃잠을 자야하는 비극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8월의 무더위보다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분노마저 타버려 가슴 속이 하얀 잿가루가 되었다.

 

쉽게 뉴코아 합의를 이야기하는 언론과 사람에 가슴이 아팠다

 

끔찍한 팔월의 마지막 날을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뉴코아 노동자들의 협상타결 소식이다. 사백일이 넘는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이 끝났다는 말에 기뻐 만 할 수 없는 협상안을 들여다보고 어금니를 으스러지게 꽉 깨물어야 했다. 이것은 사업주가 사백일 넘게 싸워온 뉴코아 노동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내용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협상의 대상은커녕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와 사업주의 관계가 아니라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주가 노예에게 가하는 채찍만큼 가혹하였다.

 

뉴코아 노동자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보내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런 사업주와 400일 넘게 싸운 게 얼마나 힘들었으며 위대한 몸짓이었는지 뜨거운 가슴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다. 당신들의 가슴에 노예주의 채찍에 맞아 깊게 생긴 생채기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신문과 인터넷 언론을 뒤적이며 분노를 하였다. 보수언론은 싸우는 노동자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있고, 진보언론은 그런 협상안에 도장을 찍은 안타까움과 함께 ‘백기투항’이니 ‘굴복’을 들이대며 또 한 번 뉴코아 노동자에게 채찍을 내리치고 있지 않는가. 한 진보 인터넷 언론에서는 인터뷰이를 밝히지 않은 채 따옴표를 쳐서 “뉴코아노조 간부들이 자기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말을 서슴없이 기사로 내보냈다. 같은 기사에 뉴코아노조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 위원장의 목소리로 “이랜드일반노조의 파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그것도 ‘막대한 영향’이라는 기사를 썼다.

 

지난해 여름 뉴코아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싸움을 위해, 외주화 저지를 위해 정규직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싸운, 그것도 처절하게 434일을 싸운 그 소중한 흔적은 다 지우고 가려한다. 상급단체는 다른 사업장에 ‘막대한 영향’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 싸움을 지켜주지 못한 반성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코멘트를 딸 것이 아니라 뉴코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데 상급단체가 슬슬 꼬리를 뺀 정황을 먼저 다루고 지적해야 옳지 않는가. 노사 합의문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손해배상과 가압류만을 해결하고 노조와 연대조직의 손해배상은 모른 체했다’는 지적이 있다. 노동자들의 피해를 막으려고 서비스연맹도 민주노총도 만든 것이다. 당연히 상급단체에서 그 문제는 싸워야 하고 풀어야 할 문제이지 뉴코아 노동자를 평가하는 도덕의 잣대는 아니다.

 

말하고 싶다. 뉴코아노조의 정규직 노동자만큼만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과 상급단체들이 싸웠더라면, 아니 그 절반이라도 싸웠더라면 최소한 기륭전자의 김소연 분회장이 80일이 넘는 단식을 하는 일은 이 땅에서 없었을 거다.

 

지난 금요일 기륭전자 단식장에 갔더니 지금 단식을 중단하면 도루코 노동자의 싸움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멈출 수 있겠냐는 말을 들었다. 어떤 기사에서는 “뉴코아 노사의 합의가 이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장 뉴코아노조와 함께 파업을 시작한 같은 이랜드그룹의 유통업체 홈에버의 비정규직 문제도 직격탄을 맞게 됐다.”라고 썼다.

 

과연 홈에버 노동자는 어떨까? 추석맞이 집중투쟁을 하는 홈에버 상암점을 찾아갔다. 이랜드 노동자의 얼굴을 보았다. 겉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 여유로운 모습이다. 이남신 이랜드 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직격탄을 맞을 걱정보다는 뉴코아 간부들이 이 힘든 시간을 어찌 이겨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하루빨리 만나 함께 풀고 싶다는 동지의 애정이 담긴 걱정을 하였다. 협상에서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이랜드 자본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보여주었기에 싸움의 정당성과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 우려만 하지는 않았다.

 

맞다. 회사와 합의한 내용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니다. 너무도 쉽게 합의내용을 이야기하고 재단하는 언론과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노동조합의 항복문서였다는 표현에서 다른 장기투쟁사업장에 미칠 파급 효과를 들이대며 비판하거나 안타까워했다. 그 마음은 이해하면서도 화가 났다.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를 싸웠는지 백일을 싸웠는지 천일을 싸웠는지 숫자로 계산하는 일만큼 서러울 때가 없다. 이 숱한 날들이 어찌 노동자가 싸운 날짜이겠는가. 사업주가 싸우게 한 날짜이자 버틴 날짜이지. 노동자에게 그것도 비정규 노동자에게는 단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가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도 질기게, 끈질기게 싸워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임금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알면서도, 노동자에게 이 시간은 죽기보다 어려운 시간이기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은 뉴코아 합의서

 

뉴코아 노동자의 사백일이 넘는 항거를 돌아본다. 그 항거의 순간순간을 뉴코아 노동자의 마음이 되어 바라본다. 이 시간을 ‘뜨거운 가슴’으로 본 뒤에 이번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합의서를 ‘차가운 이성’으로 보았으면 한다. 그 합의서에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의 핏발 선 눈을 보았으면 한다.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은 많은 희망을 주었다.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시작된 뉴코아 노동자의 파업은 보이지 않는 숱한 곳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일터를 지켜주었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지난해 6월, 파업을 선택했을 때 달려갔듯이 이번 합의서의 선택에도 사랑으로 찾아가 뉴코아 노동자를 만났으면 한다. 그 다음에 비판도 하고 평가도 하고 비난도 하였으면 한다. (다만 뉴코아 노동자에게 시간을 준 뒤 만나고 이야기 하자.) 어차피 노동자는 목숨을 건 끝없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니까. 앞으로도 지난 1년보다 더 어려운 선택을 뉴코아 노동자는 끊임없이 해야 하니까.

 

이제는 당분간 뉴코아 노조에서 보내 올 문자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문자를 받을 게 아니라 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당신의 집과 적금통장이 손해배상에 가압류를 당해야 하던 순간, 가정이 파괴되려던 순간, 생계에 허덕여야 했던 순간, ‘지 못 미’ 였다고.

 

어렵게 뉴코아 조합원과 인터뷰를 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8월 초에 지부 조합원들과 현장에 복귀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며 말을 아꼈다. 18명의 해고자 문제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평생 응어리로 안고 살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물론 외주화 부분도 아쉽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 어찌되더라도 마지막까지 간부들이 비정규 노동자의 고민을 놓지 않은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뉴코아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얻은 것 하나 없다. 하지만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의 투쟁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싸움으로 남을 것이다.

 

싸움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타협도 있고 굴복도 있다. 노동자의 싸움은 그 결과를 떠나 그 과정이 너무도 귀중하다. 그 귀중함을 스스로 지울 필요가 없다. 박양수 위원장과 함께 술 한 잔 할 날을 기다린다.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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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자가 꼭 봐야할 영화 목록

노동자가 꼭 봐야할 영화 목록

 

 

노동자뉴스제작단

 

 

- 작품 소개 -

 

명멸하는 불빛 (1996, 50분)

<랜드 앤 프리덤>을 감독한 바 있는 영국의 좌파 감독 켄로치의 작품으로, 항만업에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1995년 회사로부터 부당 해고된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올해 1월에 마침내 종료된 이들의 투쟁은 임시직 고용에 대한 반대투쟁, 새로운 차원의 국제 연대의 조직화, 노동자 부인 조직의 활동 등과 관련해서 풍부한 문제의식을 제시해줍니다.

 

로저와 나 (1989, 1시간 30분)

1988년 제네럴 모터스 회사의 회장이 저임금 노동력 확보를 위한 멕시코 공장이전 계획에 따라 미국 플린트 시에 있는 11개 공장을 폐쇄하면서 노동자 3만명은 대책없는 실업상태에 빠지고 플린트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GM의 사장을 플린트시로 데려오고야 말겠다는 마이클 무어의 집요한 노력을 따라 진행되는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리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항구를 뒤흔든 노동자들 (1997, 30분)

탄압에 처해있는 노동자들에게 통찰력과 가능성을 선사해주는 영국 작가 앤 매리 스위니의 작품으로 영국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해고된 항만노동자들의 아내들로 구성된 ‘항만노동자 지지 여성모임’의 각오와 투쟁을 소개하고, 국제연대활동과 연대투쟁에 동참한 환경운동 활동가들이 추진한 길거리 캠페인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철 노동자의 인권 (1994, 17분)

사회변혁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비디오를 제작, 배포하는 활동에 주력하는 일본의 대표적 단체인 비디오 프레스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일본 국철회사의 민영화로 인한 노동조건의 악화, 대량 해고에 맞서 싸웠던 고쿠로 투쟁을 보여줌으로서 민영화의 폐해, 그리고 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을 차분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로사 (1995, 31분)

일본의 오가와마치 영화클럽에서 제작한 비디오 작품인 과로사는, 연 3000 시간 이상의 노동으로 매년 1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과로사로 죽고 있는 일본의 현실을 주시하면서, 과로사의 원인과 구조 그리고 일본적 경영체제의 문제점, 기업과 정부의 과로사 희생자와 가족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우스콘신 (1994, 7분)

미국의 노동만화가 마이크 코노파키의 작품으로 노동영화제 당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입니다. 마우스콘신이라는 쥐의 마을에서 언제나 고양이가 쥐의 대표로 선출되어 그들에게 불리한 정책들만을 행한다는 것을 꺠달은 쥐들이 이제 자신들 스스로가 대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를 통해서,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가 왜 필요한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코믹 애니메이션입니다.

 

아웃 앳 워크 (1996, 55분)

미국의 노동자 TV 로그램의 제작자이자 대학 교수이기도 한 테미 골드와 캘리 앤더슨이 만든 이 작품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해고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세명의 동성애 노동자의 삶을 5년동안 추적한 연대기 형식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이성애자들이 보여주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 노동자들과 동성애자들의 연대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원숭이가 아니다 (1997, 5분)

토착민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 아리안족을 하누만(힌두전설에 나오는 원숭이신)으로 나타내는 라마야나(인도 2대 서사시중 하나)를 하층계급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형상화한 노래로, 인도의 야만적인 카스트제도가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지고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방직공장 노동자들 (1997, 16분)

봄베이 시내 방직공장 폐쇄에 맞서 노동자들이 방직공장을 점거한 사건을 담은 작품으로, 오랜동안 녿동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온 인도의 아난드 파트와드한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메트로 투쟁의 날 (1997, 28분)

캐나다에서 노동자 TV인 Working TV를 운영하는 줄리어스 피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항해서 벌어진 캐나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의 시위를 담고 있습니다. 신속한 속보성을 중심에 놓으면서 투쟁의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조망하는 이 작품을 통해서 노동운동이 TV채널을 소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히 운영할 수 있음이 입증됩니다.

 

아일랜드 문제의 근원 (1983, 1시간 40분)

영국노동운동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던 크리스 리브즈의 작품으로, 최근 수십년 동안 지속되어온 아일랜드 내전의 근원을 풍부한 인터뷰와 역사적 사료들을 통해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내전을 역사적으로 거슬러올라가면서 우리는 종교적인 광신이라는 허위의식의 이면에,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차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패스트푸드 우먼 (1992, 28분)

미국 아팰라치아 지역을 기반으로 탄광 노동자, 농업 노동자 등 다양한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조명하는 어팰숍이라는 독립 제작 단체의 작품입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내밀하게 관찰하면서 패스트푸드점에서의 단순 임시직 노동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고용 불안정, 사회보장혜택의 결여 등에 대한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어업 논쟁 (1997, 23분)

남아프리카의 식품 산업 노동조합 연맹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의 어업에 제안되어진 변화와, 이러한 변화들이 산업 전체에 그리고 비공식적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라는 주제를 둘러싼 논쟁을 특화시켜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라는 독특한 노조 체계를 지닌 남아공 노조의 교육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나를 위한 모두 (1997, 20분)

노동자를 위한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국 네트워크인 UPPNET과, 노동아 비디오 단체인 레이버 비트가 함께 만든 작품입니다. 1997년 1월 20일 동경에서 샌프란시스코, 스톡홀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항만노동자들이 영국 리버풀 항만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시위와 작업중단 투쟁을 수행하는 장면들을 모아서 보여줍니다.

 

- 이들 작품외에, 노동영화제에서 전세계 참가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바 있는 노동자 뉴스 제작단의 두 편의 작품도 함께 배급합니다.

* 총파업 투쟁 속보 (1997, 50분) - 1997년 베를린 영화제 초청작

* 해고자 (1997, 1시간 45분) - 1997년 야마가따 영화제, 1998년 프라이부르그 영화제 초청작

* 파업전야(1990, 1시간 50분) - 장산곳매 제작. 드라마

 

 

- 노동자를 위한 비디오 자료 목록 -

 

 비디오의 홍수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시대에 좋은 비디오를 찾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비디오를 소개하는 책자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흥행위주로 소개 되고 있는 이런 소개책자속에서 좋은 비디오를 발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노동자 뉴스 제작단은 노동조합에서 비디오 활용응 위하여 좋은 비디오 목록울 선정하였다. 많은 비디오를 수록하지는 못했지만 수록된 비디오만이라도 함께 감상하여 영화에 대한 올바른 토론문화를 활성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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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큐 멘 타 리 <다큐멘타리>

 

1. 원진레이온투쟁기 (1993, 푸른영상)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에게 발생한 심각한 산업재해 문제와 투쟁

 

2. 풀은 풀끼리 늙어도 푸르다 (1996, 푸른영상, 58분)

비전향 출소 장기수들의 끝나지 않은 여정

 

3. 상계동 올림픽 (1989. 푸른영상)

상계동 철거민들의 투쟁을 다룬 작품.

 

4.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 (1995, 푸른영상)

양심수와 장기수 어머니들의 삶과 투쟁의 이야기.

 

5. 미디어 숲속의 사람들 (1995, 푸른영상)

TV의 홍수속에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드라마와 다큐로 만든 작품.

 

6.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1995, 푸른영상)

도시 부랑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작품.

 

7. 결혼전 이야기 (1993, 푸른영상)

결혼 40일 전부터 결혼까지 여성의 심리적 변화를 그린 작품.

 

8.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1993, 푸른영상)

아시아지역 매매춘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

 

9. 약속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1995, 푸른영상)

강경대 열사의 죽음과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가족들의 삶을 다룬 작품.

 

10. 봉천동 이야기 (1997, 푸른영상)

봉천9동 철거반대싸움을 1년동안 하고있는 대책위의 활동과 주민들의 삶을 다룬 작품.

 

11. 명성 그 6일의 기록 (1997, 푸른영상)

1987년 6월, 명동성당에서 4박 5일의 농성 전개 과정을 통해 6월항쟁의 의미를 재조명한 작품.

 

12. 53일간의 기록 (1993, 서울영상집단)

1993년, 울산, 현대정공노동조합, 직권조인에 맞선 조합원들의 53일간의 투쟁의 기록

 

13.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 (1995, 서울영상집단)

폐교 위기에 처해있는 두밀리 분교를 둘러싼 주민과 교육부의 갈등을 통해 아이들의 교육환경 문제를 그린 작품.

 

14. 낮은 목소리 (1995, 보임)

일제하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현재의 생활을 통해 우리사회에서 소외된 정신대 문제를 재기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을 그려낸 작품.

 

15. 로저와 나 (마이클 무어)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 GM사는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플린트시의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고 공장을 싼 임금의 맥시코로 이전한다. 이로인해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탄에 빠지고 플린트시는 점차 황폐화 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반면 이러한 상황을 지역 부유층들은 얼마나 왜곡되게 바라보가 있는가를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

 

16. 아메리칸 드림 (바바라 코플)

미국 식품노조의 한 사업장에서 인금삭감 반대하여 시작된 기나긴 파업투쟁 과정과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갈등과 산별노조와 지역노조의 갈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

 

극 영 화 <극영화>

 

1.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투쟁

 

1) 전함포템킨 (1925,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67분, 명화클럽)

러시아 혁명을 전후하여 전함 포템킨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항거와 오뎃사 민중들의 짜르체제에 대한 투쟁을 다룬 영화.

 

2) 1900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40분, 우일영상)

1900년대 초 이탈리아 북부의 한 농촌지역을 배경으로 지주계급과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농민의 투쟁을 지주와 소작농의 아들의 서로 다른 인생의 궤적을 통해 그린 대서사극

 

3) 메이트원 (존 세일즈, 135분)

1920년대 광산 노동자들의 조합결성과정과 투쟁을 그린 영화. 참담한 노동조건과 노조파괴자, 구사대, 조합의 내부배신자속에서도 인종과 국적을 넘어서 단결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4) 워터 프론트 (1954, 엘리아 카잔, 108분, 대우)

한 항만 노동자가 폭력적이고 반노동자적인 부두노동조합을 폭로한다

 

5) 파업전야 (1990, 장산곶매, 110)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때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어느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치열한 투쟁 끝에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촬영은 실제 파업중인 한독금속 공장내에서 했으며 한독금속 노동자들과 함께 제작했다.

 

6) 뉴스보이 (1992, 케니 오르데카, 신한)

1930년대 대공황의 미국, 신문팔이 소년들이 언론재벌에 조직을 만들고 투쟁하는 모습을 뮤지컬로 형상화한다.

 

7) 호파 (1992, 대니 드 비 토, FOX)

남미계 이민 노동자에서 전체노동자의 지도자로 성장한 카리스마적인 인물 지미 호파의 삶

 

8) 하얀 외침 검은 태양 (1990, 에릭 바르비에, 140분, 영성)

2차대전 전야의 유럽, 한 탄공촌 도시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노동자들과 폴란드인 노동자들의 집단적 적대감. 그것을 조장했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 계급 전체로부터의 봉사와 착취를 이끌어내는 자본가계급의 본질을 드러낸다.

 

9) 노마레이 (1979, 마틴 리트, 114분, 대우)

노마레이라는 평범한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가 노동현실을 직시하면서 노조위원장으로 선정 투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블의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위해 투쟁해 가는 노마레이의 삶이 인상적이다.

 

10) 실크우드 (1983, 마이크 니콜스, 131분, 대우)

핵공장에서 일하다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진 카렌 실크우드의 실화를 영상화한 작품. 핵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면서 평범한 노동자가 핵 누출로 위헙받고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회사측의 허술한 관리를 비난하면서 적극적으로 싸워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1) 투쟁의 날들 (1978년, 노만 주이슨, 145분, SKC)

미국 트럭기사노조연맹을 이끌어 가는 2명의 주인공을 통해 당시 미국적 환경에서의 노조운동 문제점을 그린 영화.

 

12) 랜드 앤 프리덤 (1995, 켄 로치, 110분)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당시 파시즘정권에 대항했던 국제사회주의자들의 투쟁과정을 진실되게 그려낸 명작.

 

13) 살바도르 (1986, 올리버 스톤, 123분, 스타맥스)

1980년대 엘살바도르 내전을 배경으로 우익정권의 만행과 미 CIA 개입을 미국인 종군기자의 눈으로 고발. 제3세계 정치적인 문제를 서구 감독들이 영화화 하고는 하지만 민중들의 투쟁의 관점보다는 양심적인 지식인 수준의 한계를 갖고 있다.

 

14) 비정성시 (후 샤오시엔, 금성)

1945년 이후 49년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옮기는 4년간의 격동기에 역사적 질곡으로 인해 비극을 맞게되는 한 가족의 삶을 담담하게 그림. 잘못된 역사를 질타하고 역사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힘’을 나타내는 작품.

 

15) 전태일 ( 1995, 박광수, 100분)

1970년 근로기준법과 8시간 노동쟁취를 외치며 노동현장에서 분신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

 

16) 붉은 시편 (1971, 미끌로쉬 얀초, 88분)

현재의 억압속에 1989년이 오면 헝가리 농민들이 더이상 노예상태로 살수 없어 일어난다는 상징적인 내용.

 

17) 단스 (1985년, 벨기에, 성베네딕트)

벨기에의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그린 작품으로, 파업투쟁을 함께하다 처형을 당한 단스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2. 자본주의 사회의 풍자와 본질

 

1) 모던 타임즈 (1936, 찰리 채플린, 110분, 우진)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으로 전락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묘사

 

2) 베를린 천사의 시 (1987, 빔 벤더스, 미디아트)

천사의 눈으로 지상의 세계, 그 밑바닥을 시적 정서로 바라본 작품

 

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 (1984, 세르지오 레오네, 223분, 리빙홈)

돈을 최대의 목표로 여기는 마피아의 생리를 뒷 골목에서 도둑질하던 소년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4)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1989, 울리 에델, 스타멕스)

브룩클린이라는 한 거리의 창녀 트랄라를 통해 구원받지 못하고 썩어가는 미국의 단면을 보여준다

 

5) 블레이드 런너 (1982, 리들리 스코트, 114분, SKC)

21세기를 무대로 인조 인간들과 그들의 반란에 맞서는 인간의 모호한 싸움을 그린다

 

6) 자하정 (1986, 관금붕, D&C)

시간이 멈춰버린 홍콩에서 생각하는 낙태당한 희망

 

7) 보이즈 엔 후드 (1991, 존 싱글턴, 콜럼비아)

총, 마약, 살인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젊은이들의 초상화

 

8) 십계 (1988, 키에슬로프스키, 분도시청각)

성서의 십계명의 뜻을 현대인의 일상 생활을 통해 묻는 옴니버스 영화

 

9) 차이나타운 (1974, 로만 폴란스키, CIC)

한 사립탐정이 부유층 여성의 남편을 조사하다 엄청난 음모를 알게된다

 

10) 헐리우드 출세기 ( 1989, 크리스토퍼 게스트. 97분, RCA 콜럼비아)

꿈 많고 야심만만하며, 순수로 가득찼던 한 감독지망생이 또 하나의 자본주의 시스템인 헐리우드의 생이레 상처받고 적응하며 세상에 순응하는 “개싸움”에 관한 영황.

 

11) 그들도 우리처럼 (1990, 박광수, 영성)

탄광촌에 숨어든 운동권 수배자와 다방레지, 탄광사장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삶을 그림.

 

12) 꼬방동네 사람들 (1982, 배창호, 라이프)

달동네 사람들을 다룬 사회성 짙은 드라마

 

13) 하수인 (1973, 알란 브릿지스, 103분, 대우)

한 남자와 한여자가 있다. 여자는 상류층 미망인이고 남자는 전형적은 프롤레타리안 택시 운전수이다. 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있는 일은? 하수인을 채우는 것은 소통의 가능성없는 고정된 계급들의 순환이며, 남자와 여자,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를 통하여 개안들의 관계를 선행하는 계급을 들여다 본 작품.

 

14) 파고 (1996, 코엔형제, 120)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실재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든 작품. 아내를 납치해 장인을 통해 돈을 만지려 했던 한 소시민의 행동은 결국 우연치 않게 수많은 사람의 살인을 불러온다. 작가의 냉철한 시선으로 미국사회의 한 단면을 섬뜩하게 보게된다.

 

3. 혁명, 전쟁, 파시즘

 

1) 위대한 독재자 (1940, 찰리 체플린, 130분, 우진)

체플린이 유태인 이발사와 독재자 힌켈의 1인 2역을 하며 히틀러의 야망을 비난한다

 

2) 무방비도시 (1945, 로베르토 로셀리니, 93분, 시네마떼크)

제2차 대전중의 유럽. 제3제국의 기세는 꺽이지 않고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이 활발한 이 시기에 공산주의자와 카톨릭 신부도 하나의 적에 맞서기 위해 연대한다.

 

3) 지옥의 묵시록 (1979, 프란시스 코폴라, CIC)

월남전에서의 인간의 광기를 극적으로 묘사하여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

 

4) 레즈 (1981, 워렌 비티, CIC)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현장을 취재한 [세계를 뒤흔든 10일]의 저자 존 리드의 일생을 그린 영화

 

5) 컴앤씨 (1983, 엘렘 클리포드, 105분, 우진)

2차대전말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소련인민 학살을 다룬 영화. 표현주의적인 영화기법에도 불구하고 투쟁적인 전사로 변해가는 한 소년을, 역사속에서의 한 개인의 변화와 훌륭히 결합시키고 있으며 제국주의적 파시즘의 비인간적인 본질과 만행을 비판하는 감독을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6) 한나의 전쟁(세경)

2차대전 당시 한나 쉐네시라는 실제인물의 지하활동을 그린 이야기로 파시즘의 비인간적인 고문과 학대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강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7) 유로파 (1991, 라스 폴 트리에, 골든베어)

전쟁의 후유증과 이념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그림. 형식적 실험이 돋보인다.

 

8) 등대선 (1985,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86분, CBS폭스 비디오)

60년대 이후 서방세계로 망영한 아버지와 아들의 얘기를 통해 전쟁과 아나키즘, 80년대 동구 사회주의의의 표류를 심리적으로 다룬 영화.

 

4.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 (정치, 언론, 역사, 교육, 인권)

 

1) 허공에의 질주 (1988, 시드니 루멧, 120분)

60년대 학생운동을 했고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FBI의 추격을 받는 부모와 15년간 도피생활을 해온 아들이 부모의 전력 때문에 음악에의 열정을 속으로 삭혀야 하는 심정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

 

2)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뜻하지 않게 상원의원이 된 순진한 촌뜨기 스미스가 정가의 비리를 알게되고 혼자 힘으로 워싱턴의 타락한 민주주의에 도전한다

 

3) 장비빛 인생 (1994, 김홍준, 드림박스)

80년대 뒷골목 만화방에서 만화방여주인, 깡패, 노동운동가, 쫓기는 청년등 그들이 처한 삶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

 

4) 이지 라이더 (1969, 데니스 호퍼, 우일)

두 히피 청년이 오토바이로 여행하며 겪는 사건을 그린 로드무비

 

5) JFK (1992, 올리버 스톤, SKC)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끈질기게 파해친 한 검사의 시선

 

6) 벽 (1980, 알란 파커, 우일)

학교는 표준화된 인간을 상품처럼 찍어내는 공장에 불과하기에 현대 교육체계는 해체되어야 한다

 

7) 나는 살고 싶다 (1958, 로버트 와이즈, 우일)

그레이햄 사건이 사회적 편견. 법의 부조리에 의한 희생을 그림.

 

8) 자전거 도둑 (1948, 빅토리오 데 시카, 명화클럽)

전후 이탈리아, 어려운 시절 생계를 위해 겨우 마련한 자전거를 도둑맞은 아버지와 아들의 자전거 찾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9) 말콤 X (스파이크 리, 240)

인종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미국 사회파 감독인 스파이크 리가 만든 말콤엑스의 생애를 다룬 작품, 비타협주의자라 불리우는 말콤엑스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변화과정과 당시의 사회상황을 읽어낼 수 있다.

 

10) 프론트 (1976, 마틴 리트, 95분, 대우)

1947년 미 의회는 메카시 상원의원의 지도하에 이른바 빨갱이 축출작업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그때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매카시즘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다룬 영화.

 

11) 코드네임 콘돌 (1975, 시드니 폴락, 118분, 대우)

CIA를 소재로 한 추리물로 의문에 쌓이 살인사건을 통해 정보기관의 냉혹함과 암투를 그린 서스펜스물. CIA를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10년간 상영금지 됐었다.

 

12) 당통 (1982, 안제이 바이다, 136분, 삼부)

로베스삐에르와 당통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갈등, 마침내 공화파가 다시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기 직전의 상황을 연극적인 묘사로 다룬 영화, 18세기 현장에 카메라를 갖다 댄 듯한 현장감이 넘치는 다큐 드라마로 차가운 색채 중심은 당통의 성격과 전체 분위기를 형성한다.

 

13) 네트워크 (1976, 시드니 루멧, 121분, SKC)

치열한 취재경쟁 속에 점차 거대한 방송 메카니즘의 부품으로 전락해 가는 방송 종사자들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벌이는 살인, 자살을 그린 작품. 시청률을 위해 끔찍한 인간성 말상의 현장이 TV방송국을 무대로 형상화된다.

 

14) Z (1968, 코스타 가브라스, 127분, SKC)

그리이스 좌파의원 람브라키스의 정치적 암살을 주제로 한 거칠고 숨가뿐, 리듬감 넘치는 다큐형식의 드라마. 한때 정치영화의 최고로 떠받들어 졌던 영화로 1967년 군부대의 공격으로 그리스내 민주세력이 전멸당한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

 

15) 계엄령 (1973, 코스타 가브라스, 우일)

1970년 남미 우루과이에 파견된 미국인 납치사건을 영화화. 미국과 결탁한 군부 독재통치하의 억압과 그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의 투쟁을 기록영화처럼 다룸. 제3세계 정치현실을 읽을 수 있다.

 

16)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스타맥스)

칠레의 정치적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옮긴 영화. 이사벨 아앤데의 원작이 바탕, 남미 근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17) 플레이어 (로버트 알트만)

헐리웃 제작시스템, 그속에서 활동하는 영화인들의 작태에 관한 신랄한 야유를 담고 있는 작품. 꿈과 영광, 화려한 스타의 명예가 숨쉬는 동산처럼 보이는 헐리웃은 사실상 협작과 매수와 살인과 흥행을 위해 진실을 값싸게 흥정하는 자본의 논리가 숨어 있는 곳임을 이영화를 통해 환기시키고 있다.

 

18) 페이퍼 (1993, 론 하워드, CIC)

한 신문사를 배경으로 취재 경쟁과 야망을 위해 보도의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의 현실에 맞서는 한 신문기자의 얘기.

 

19) 프라하의 봄 (1987, 필립 카프만, 우진)

체코의 자유화 물결이 소련에 의해 무너진 1968년을 배경으로 그려진 젊은이들의 비극을 다룸.

 

20) 파워 (1986, 시드니 루멧, 우일)

전세계 선거전을 조정하는 정치광고 일인자의 사생활과 야망을 통해 정치세계의 비리를 영화화.

 

21) 케이지맨 (1992, 장 지량, 영성)

빈민가에 쓰러져가는 닭장같은 공간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다룸.

 

22) 저스티스 (1979, 노만 주이스, 대우)

이상에 불타는 젊은 변호사가 법조계의 비리에 분노하여 투쟁하는 법정드라마.

 

23) 어퓨굿맨 (1992, 로브 라이너, 우일)

쿠바 주둔 미해병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군 조직내에 팽배해 있는 권위적인 위계질서와 그로인해 벌어지는 사건은폐를 파헤치는 젊은 법무관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싸움.

 

24) 아빠는 출장중 (1985, 에밀 쿠스트리챠, 세종)

경찰에 연행된 아버지가 출장갔다고 믿고있는 어린이아이의 눈을 통해 유고의 정치 상황과 관료주의를 비판.

 

5. 인종차별, 여성

 

1) 똑바로 살아라 (1989, 스파이크 리, 콜럼비아)

이테리게 피자집을 중심으로 한 흑인들의 삶을 흑인 특유의 감각으로 그린다

 

2) 미시시피 버닝 (알란파커, 콜럼비아)

흑인 운동가의 실종사건을 수사하러온 두 FBI 요원을 통해 미국내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보여주는 작품. 실제 있었던 일을 토대로 미국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지만, 작음 양심이 승리한다는 전형적인 작품.

 

3)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코트, SKC)

남편의 구타에 시달리는 주부와 독립심 강한 웨이트레스가 여행을 떠나 벌어지는 사건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가지 폭력 상황들을 묘사하고 그에 저항하는 두 여성의 해방의 몸짓을 그림.

 

4) 정글피버 (1993년, 스파이크 리, 100분)

미국내 소수민족인 이탈리안 백인여성과 성공한 흑인남성의 사랑을 통해 인종간의 편견과 갈등을 그렸다.

 

5)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1997, 스티븐 프리어스)

영국의 중소도시, 인종차별과 동성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가선 작품.

 

6) 보이즈 앤 후드 (1991, 존 싱글턴, 콜롬비아)

미국 LA의 흑인 사회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리면서, 우정, 사랑, 생존의 문제를 진지하고 깊이있게 묘사

 

7) 꿈꾸는 도시 (1991, 존 세일즈, 129분, 콜롬비아 트라이스타)

정치가와 기업가들의 결탁으로 일어난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인종차별에 분개한 흑인들이 시청으로 몰려가지만 폭동이 아닌,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그 치유책을 동시에 제시하는 영화.

 

8) 비밀과 거짓말 (1996, 마이클 리, 120분,)

96년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영국사회의 인종문제와 계급문제를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6. 교육 현실 비판

 

1) 닫힌 교문을 열며 (1992, 장산곳매)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한 국어교사와 교지를 만들면서 진실된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학생들, 학교당국의 비겁한 태도, 국어교사의 해직 등 우리의 교육 현실의 문제점과 전교조 교사들이 실현하려는 참교육의 중요성을 묘사한 작품

 

2)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황규덕, 정우)

대학입시를 앞둔 2학년 4반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전 학생이 겪는 고교시절을 진솔하게 다룬 영화.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

 

3)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강우석, 110분, 세웅)

한 여고생의 자살을 통해 물질이 지배하는 조직사회에서 끊임없는 상승욕구는 목적보다도 수단을 합리화하면서 자기자신을 정당화시키지만 점차도 허위의식에 묶이는 것을 고발한 작품.

 

4)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워어, 드림박스)

전통, 엄격한 규율, 권위를 자부하는 미국의 한 학교를 배경으로 획일화, 비인간적 교육제도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불합리를 진지한 접근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

 

5) 위험한 아이들 (1996)

빈민가에 발령받은 선생님이 폭력과 마약외에는 아무 희망도 없는 학생들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게 돕는다는 내용.

 

6) 언제나 마음은 태양 (1967, 제임스 클라벨, 대우)

영국 한 빈민가에 발령받은 흑인교사가 학생들과의 갈등속에서 교육의 참 의미를 깨닫고, 학생들이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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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학교 6년을 마치며

이우학교 6년을 마치며

 

“요즘 느끼는 건데 절 ‘이우’라는 곳에 보내(준 용기-두 줄로 지워진 부분임)주기 위해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결이가 지난 해 크리스마스 때 카드에 적어 보내 온 글입니다.

결이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왜 엄마 아빠가 ‘갈등’했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결이가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결이가 지금 이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판단과 느낌을.

물론 궁금합니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그래서 졸업하는 날에 결이에게 물어 볼 생각입니다. ‘이우 학교, 어땠냐?’고.

아마 결이가 졸업하면서 느끼고 판단한 만큼, 꼭 그만큼 이우에서의 6년은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우학교를 보낼 때, 무슨 대단한 ‘용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딜레마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6년 전에 결이를 이우학교에 보낼 즈음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 ‘짧은 머리’를 강요했던 지난 세대의 억압에 맞서 소위 ‘민주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싸운 수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 엄마 아빠의 세대는 자녀들에게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과 물질적인 조건을 열어 주었지만, 동시에 그 ‘자유로운 개성’이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의 틀 속에서 경쟁의 승자와 패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 또한 남겨주었다.

그래서 아빠인 나는 갈등한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우리 애들이 패배하지 않도록 공부할 것을 부추긴다. 두 아이가 ‘자유로운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것을 바라면서도, 현실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진다.

머리를 빡빡 깎고 싶다는 결이에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윽박지른 것은 ‘빡빡 머리’에 대한 나의 ‘감성적 반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공부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소박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이‘들’이 시험 성적에 의해 평가되거나 재단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경쟁 논리보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 존중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습니다.

무엇보다 결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개성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길 원했습니다.

‘대안’학교 자체에 대한 여러 논란이나 그 실험의 성공 가능성, 그리고 결이‘들’이 그 실험의 첫 대상일 수 있다는 점 등 초창기의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우는 의미있는 하나의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결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06년 5월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고1이 돼서야 간신히 마련한 핸드폰으로 문자메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빠 나 머리 좀 튀게 자를께” / “어떻게?”

“음 닭머리, ㅋㅋㅋ”, “아빠는 어떻게 생각해?” / “너무 튀지 않겠니?”

“음 그걸 노린건데 ㅜㅜ 해도 괜찮지?” / “니가 감당할 수 있겠니? 알아서 결정해라”

“나 닭머리 결심했어”

 

영국 축구 선수인 베컴의 닭머리를 생각했는데, 웬걸 결이는 그날 저녘에 가운데 머리털만 남기고 나머지를 다 밀어버린 ‘스킨해드’를 해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다.

당황 --- 분노(?) ---

그래서 결이를 붙들고 협박(?)했습니다. “스킨해드는 안된다. 스킨해드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이건 개성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킨해드족과 한 집에 같이 살 수 없다. 니가 아무리 니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비춰질 수 밖에 없다 --- 운운.”

결국 결이를 끌고 이발소로 데려가 머리를 빡빡 밀게 했습니다.

간신히 한 고비를 넘겨 안심하던 중, 열흘 뒤에 다시 결이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습니다.

 

“아빠 나 축구공 스크래치해도 돼?” / “축구공 스크래치가 뭔데?”

“음 그냥 해보고 싶은건데 머리에 축구공 모양으로 파는거야” / (심각한 고민 끝에) “결아, 네 개성이 꼭 머리로만 나타나야 하는 거니? 다른 것으로 개성을 표현할 수 없니?”

“음 나도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볼께” / “그래”

 

드디어 설득시켜 냈다고 안심하던 중, 다시 열흘 뒤 --- 문자메세지로 최후 통첩!

 

“아빠 저 오늘 머리 자를께요. 돈은 그냥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용돈으로 할께요”

 

그날 축구공 스크래치한 결이의 머리를 보며,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억지로 잘했다고 할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냥 무시해서 지나쳤는데 ---

다음 날 결이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결의의 한마디 ‘결정타’ 때문에 하루종일 넋을 잃고(?)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는 내가 곰곰이 생각한 결론이 꼭 아빠의 생각대로 되야한다고 생각하나봐”

 

이렇게 결이는 한 ‘인간’으로 커갔습니다.

물론 6년간 머리를 길렀다 밀었다 변화무쌍했지만, 그 내면은 아빠에게 ‘결정타’를 날릴만큼 쑥쑥 자랐습니다.

엄마 아빠는 결이 ‘속’에서 이우를 언뜻 보았고 느꼈습니다.

 

***

 

“아빠, 내가 잘하고 싶은 것과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작년, 그러니까 결이가 고2 때 가을이었을 겁니다.

갑자기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해서 밤늦게 들어 온 내게 결이가 뜬금없이 한 얘기였습니다. 얘기인즉슨, 1여 년간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온갖 열정을 쏟아 붓다가,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은 노래와 연기를 잘 하고 싶어서 였는데, 잘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고민한 결과 과학을 잘 할 수 있고, 그래서 문과에서 이과로 바꾼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뮤지컬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은근히 부담이 됐었습니다.

그래도 본인이 원한다면 그러라고 했었습니다.

1년간 온갖 노력을 하다가 결국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방향을 고쳐 잡았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결정 때문에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판단이 또 달라질 수 있지만, 자신이 스스로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 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우에서 결이가 얻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빠, 요즘 많이 헷갈린다. 나는 시간을 가지고 집중해서 문제를 푸는 게 내게 맞는 것 같은데, 수능은 잘 안맞는 것 같아.”

 

며칠 전, 개학을 앞두고 결이를 다시 학교 앞 자취방으로 데려다 줄 때 자동차 안에서 결이가 토로한 고민이었습니다.

“앞으로 80여일 밖에 안남았으니까, 그 때까지만 참고 일단 수능 준비에 전념해 봐. 대학에 들어가면 네가 하는 공부 방식이 커다란 장점이 될 거다”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 친구가 촛불집회에 같이 가지고 했는데, 가고 싶었는데 --- 안갔어. 한 번 가면 촛불집회에 계속 빠져버릴 것 같아서.”

 

“그러냐. ---” 그 날 차 안에서 저는 결이에게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이를 자취방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6년간 결이는 저렇게 자랐는데, 우리는 여전히 ‘원점’에 있구나.

엄마 아빠의 딜레마와 불안도, 우리의 교육 현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

그래도 졸업하는 날, 아니 수능이 끝나는 날, 수능 결과에 관계없이 결이에게 이렇게 물어 볼 생각입니다.

“이우 학교 6년간, 행복했냐?”

 

***

 

(꼭 드리고 싶은 얘기)

이우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님들 그간 고마웠습니다. 사실 지난 6년간 저의 가족이 학교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무임승차한 기분입니다. 그래도 선생님과 여러 학부모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6년간 무사히 학교를 마치게 됐네요. 그래서 ‘학교에 대해’ 편지를 쓰라고 했는데, ‘결이’ 얘기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여러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저희는 졸업하는 날 결의로부터 이런 답변을 들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6년간 행복했다”고.

 

2008.08.27.

3학년 박결 엄마 유영란, 아빠 박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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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항쟁, '상상력'에 '계급'을

‘상상력’에 ‘계급’을!

- ‘2008년 촛불항쟁’과 좌파의 정치 -

 

 

 

‘100일 간의 축제’ vs ‘100일 간의 악몽’

 

“이 체제에 위기의 경향이 ---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그에 앞서 대중의 의식과 헤게모니 블록이 변화되어 이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면, 이런 폭발은 의심할 바 없이 엄청난 역사상의 퇴보를 야기할 ‘우파의 대규모 역공’을 촉진시킬 지도 모른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가운데서)

 

촛불항쟁이 8월 15일을 기해 100회째 집회를 맞았다. 7월 중순 이후 이명박 정권의 전방위 탄압에도 촛불은 꺼지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타오르고 있다. 초기의 발랄하고 경쾌한 동력은 잠시 모습을 감췄지만, 그 끈질김은 계속되고 있다. 그 출발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듯이, 그 어느 누구도 촛불이 언제 꺼질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언제 꺼지나, 꺼지지 않나”가 더 이상 쟁점이 아닐 것이다. 이미 ‘2008년 촛불’은 100일간의 타오름만으로도 자신의 역사적 몫을 충분히 다했다. 촛불항쟁의 지속 여부를 둘러싸서 ‘광우병 대책위’ 내부에서는 불매운동으로 전환, 지역에서의 생활밀착형 촛불집회, 서울에서의 집중집회 지속 등의 논란이 있다. 어느 방향으로 결정이 이루어지든, 혹은 각각의 방향으로 결정이 나든, 그것은 그 자체로 촛불의 파문이자 잔영일 것이다. 새로운 촛불의 준비일 것이다.

 

‘100여 일간의 악몽’을 지워버리기 위해 이명박 정권과 수구보수언론은 총력적인 반격을 펼치고 있다. 2008년 5월에 켜진 촛불이 이명박 정권의 취임 100일간의 초기 국정주도권 장악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듯이, 100여 일간의 촛불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 내 모든 변혁의 가능성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몸부림이 ‘공포의 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어떠한 치장도 미사여구도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8월 12일, “촛불시위자들도 미국에서 쇠고기 먹던 사람들로, 수입되면 먹을 것”이란 이명박의 발언은 차라리 치기稚氣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0여 명이 넘는 촛불집회 연행자들에게 벌금 폭탄이 예고되고, 촛불을 진압하기 위해 이명박식 백골단인 1,700명 규모의 ‘경찰관 기동대’를 창설했다.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고, 휴대용 분사기로 시위 참가자를 철저하게 색출하겠다는 경찰의 태세는 광장과 거리의 촛불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검찰을 동원한 MBC ‘PD수첩’ 강압 조사, 촛불집회의 진원지인 ‘아고라’가 속한 포털 Daum에 대한 세무조사는 아래로부터의 소통과 토론의 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100여 일간의 악몽’을 하루빨리 벗어던지고, 아니 철저하게 짓이겨 지워버리고 아직 권력의 힘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시급하고 차질 없이 하는 것, 그래서 공약대로 경제를 살리고 그 성과에 바탕하여 20% 안팎으로 추락한 지지율을 회복하고 747의 날개를 활짝 펴는 것,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을 원상회복하는 것, 아마 이것이 이명박 정권의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의 당선을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의 확인”으로 해석한 이명박 정권은 8월 들어서 ‘법과 원칙’, ‘개혁의 차질 없는 진행’을 내세우며,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거침없이 해나가고 있다.

그 첫 번째 수순이 방송장악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감사원, 검찰,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등 주요 권력기관을 총동원하여 정연주 KBS 사장을 해임시켰다. 이어 8월 11일에는 공기업선진화추진위원회를 통해 41개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통·폐합, 기능조정을 주 내용으로 하는 ‘1차 공기업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등 기업 규제완화 관련한 법안을 입법 예고했으며, 방송통신위원회는 대기업의 방송 진출 문턱을 낮춘 방송법 시행령도 추진 중에 있다.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국공유기업을 국내외 자본에게 내다 팔며,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교육시장화 정책을 다시 전면화하려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이러한 전면적인 반격 앞에서 100여 일간 끈질기게 타올랐던 촛불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일지는 모른다. 혹 그래서 촛불이 소진되기 전에 이 촛불의 동력을 시급히 국회로 가져가 촛불이 제기한 문제를 국회 내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턱없는 유혹과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물론 ‘거리와 광장의 촛불이 꺼지느냐 꺼지지 않느냐’, 혹은 ‘이명박 정권의 진퇴 여부’가 당장은 승패의 1차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2008년 촛불항쟁’이 100여 일간 보여준 역동성과 새로움과 풍부함을 당장의 성패 여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2008년 촛불항쟁’은 지난 10여 년간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해, 대중적 반격의 첫 라운드일 지도 모른다. ‘조직적 방어’가 아닌 ‘대중적 공세’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2008년 촛불항쟁’은 향후 10년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헤게모니 블록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그 한계와 약점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면.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체들의 주도로, 또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2008년 촛불’은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만큼 그 어떤 정치사회세력도 그 어떤 계급도 이 촛불이 제기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2008년 촛불’로부터,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100여 일간의 촛불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가 이후 촛불을 어떻게 진전시킬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때로는 당혹스럽게, 때로는 놀라움으로 촛불과 조우했던 좌파는 ‘2008년 촛불항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물론 2008년 촛불의 전모를 지금 온전히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금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2008년 촛불항쟁’으로부터 좌파적 ‘상상력’을 끄집어 내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좌파적 ‘상상력’을 ‘계급’이라는 주체와 결합시켜 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시대에, 좌파의 근본적인 자기 성찰과 좌표 설정의 계기이자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좌파는 진정 또 하나의 촛불로, ‘제2, 제3의 촛불’로 21c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이 열렸다

 

“이러한 자발성은 해체되고 흩어져서 탈주하는 자발성이 아니라 모여서 방향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발성이었다. 현장에서 바로 바로 토론을 통해 입장을 정리해 나가는 모습에서 대중은 직접행동을 통해 대리주의를 거부하였고, 현장에서 움직이는 대중의 ‘집합적 이성’이 오히려 이제까지의 어떠한 이론가, 운동단체, 정당 보다 우위에서 움직였다.”

(남구현, ‘촛불의 정치-몇 가지 쟁점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

 

‘광장’이 열렸다.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의 결과로 형성된, 숨 막힐 것 같던 보수 일방의 제도 정치구조의 틀을 무력화시키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5월 초 청계광장에서 여중고생들이 켠 촛불의 당당함과 발랄함이 20대, 30대, 4~50대의 부끄러움을 일깨워 100만 촛불항쟁으로 발전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에서 불붙은 촛불이 이명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과 항의로 이어지면서 출범 100일도 채 안된 정권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줄은.

그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거침없이 오가며 타오르던 촛불이 의제를 독점하며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해 온 조중동 언론 권력의 실체를 불과 한 달여 만에 폭로하여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릴 줄은.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촛불이 불러일으킨 촛불들이 경찰의 통제와 탄압을 오히려 비틀고 조롱하면서 무력화시키고, 수구보수세력만이 아닌 제도 정치권 전체를 패닉상태로 몰아넣었으며, 나아가 소위 ‘운동권’마저 하나의 촛불로만 머무르게 할 줄은.

 

5월, 촛불이 연 ‘광장’은 “바리케이트 없는 해방구”였다. 거기에서는 이명박 정권도, 제도 정치권도, 조중동의 언론권력도, 심지어 이른바 운동권도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하나의 촛불이 또 다른 촛불을 일깨웠고, 인터넷과 광장을 순식간에 오가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소통’과 ‘토론’과 ‘직접행동’의 광장이 형성됐다. 인터넷과 거리의 광장에서 이명박 정권과 경찰은 조롱거리가 됐고, 제도권 정당은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었으며, 디지털 생중계와 아고라에서의 토론은 보수언론을 무력화시켰다.

‘광장’은 그 자체가 ‘직접민주주의’의 산실이자 배움터였다.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거리에서 촛불들은 ‘직접 참여’해서 정보의 소통과 토론을 통해 ‘직접 결의’했고, 또 ‘직접 행동’했다. 촛불들은 정부의 폭력에 대한 공포없이 자유롭게 발언했으며, 다양함 속에서도 때론 발랄하고 명랑하고 유연하게, 때론 간명하고 단호하고 끈질지게 발언했고 행동했다. 광장에서는 어떤 권위도 인정되지 않았고, 또 누구의 참여도 가로막지 않았다.

 

통일된 중앙지도부도 수직적인 위계체계도 없었지만, 촛불들은 스스로 시민기자단이 되었고, 의료지원단이 되었으며, 자원봉사자가 됐다. 모두가 전위였고, 모두가 배후였으며, 세대와 깃발을 뛰어넘어 오직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연대만이 촛불과 촛불을 이어주었다. 87년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민주주의의 동력은 의회민주주의 혹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에 갇히거나 소진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보존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광장에서의 직접민주주의라는 방식으로 역동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2008년 촛불의 ‘광장’은 저항과 축제가 어우러진, 정치와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정치의 장이었다. 저항과 축제가 서로를 배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항으로 형성된 공간이 곧 축제의 장소가 됐으며, 축제는 곧바로 저항의 자양분이 됐다. 정치는 문화에 의해 풍부해졌고, 놀이와 문화는 정치로 고양됐다. 비장함과 즐거움이 서로 섞였고, 분노와 해학⋅풍자가 서로 어우러지며 뒤엉켰다. 그래서 “예전에는 시위대와 구경하는 시민들 사이의 경계가 뚜렷했지만, 촛불집회에서는 서로 섞여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촛불 ‘광장’이 새롭게 열어젖힌 것은 공간과 주체와 그 방식만이 아니었다. 요구와 의제 역시 확장됐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협상이 계기가 됐지만, 그래서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와 ‘재협상’ 요구가 가장 주된 의제이자 동력이기는 했지만, 촛불은 자신의 요구를 ‘쇠고기’에만 가두지 않았다. 10대들에 의해 ‘미친 교육’이,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의해 ‘전기⋅가스⋅의료⋅물의 사유화 저지’가, 그리고 ‘건강보험 민영화 반대’⋅‘한반도 대운하 반대’와 ‘공영방송 사수’로 요구와 의제가 확장됐다.

그리고 이 모든 요구와 의제의 확장은 ‘이명박 OUT’으로 모아졌다. 집권 초기에 그 어떤 제도적 정치적 견제도 없이 거침없이 강행될 것 같았던 이명박 정권의 ‘프랜들리 비즈니스’ 정책은 불과 집권 100여일 만에 강력한 대중적 저항에 부딪히게 됐다. 그 결과 이후 어떠한 사안에 대한 대중적 저항도 ‘이명박 OUT’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와 의제의 확대에 두려움을 느낀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수구보수언론들은 6월 10일 이후에 “‘촛불집회’의 성격이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인 쇠고기 재협상 요구에서 이명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 즉 정치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국면을 전환시키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예고했고, 또 그렇게 했다. 그들이 의제의 확장을 두려워했던 것은 “고통받는 대중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화되는 것”이고, 몽매한 무지렁이 대중들이 의제의 확장 속에서 “특정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고 실천하게 만들기 때문”(이광일, ‘촛불정치와 민주주의, 공화국의 미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인 것이다. 의제의 확장에 대한 ‘탄압’은 곧 민주주의의 확대⋅심화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의 표현인 것이다.

 

2008년 8월, 우리는 촛불항쟁이 열어젖힌 새로운 ‘열린 광장’을 가지게 됐다. 그것도 세계사적인 유례가 없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직접민주주의의 광장을. 저항과 축제가 서로 어우러지고, 주체들의 직접 참여와 소통과 행동에 의해서 무한히 의제가 확장되는 광장을. 그리고 그 어떤 직접행동도 이제 이명박 정권과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직접 겨냥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광장을 가지게 됐다.

이 광장은 10대 촛불소녀가 발랄하게 열어젖힌 공간이지만, 어느 주체에게도 닫혀 있지 않다. 누구도 이 광장에 참여하고 소통하면서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광장에서 촛불들이 비록 ‘분노의 밧줄’로 이명박 정권을 간신히 지탱하던 ‘와이어’를 끊어 ‘명박산성’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해학과 풍자’로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고 비틀어서 정치적으로 고립시켰고 수구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폭로하고 무력화시켰다.

 

당장 촛불의 ‘광장’이 제도화된 의회주의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광장은 21c 한국사회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긴밀하고 신속한 연결을 통해, 저항과 축제의 융합을 통해, ‘제도의 정치’, ‘공간의 정치’를 뛰어넘는 ‘기동전의 정치’, ‘시간의 정치’의 가능성을, 그래서 의제를 선도하고 확장하면서 정치사회적 헤게모니를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시켰다.

그것은 단지 ‘고통의 호소’와 ‘비장함’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더욱 공세적이고 발랄하고 유연하고 다양하고 즐겁게 소통하고 직접 행동할 수 있을 때에야 열리는, 그런 광장이다. 비록 이명박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탄압으로 광장이 다시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지난 100여 일간의 광장의 경험과 기억까지 다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21c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아니 모두 거쳐 가야 할 ‘광장의 정치’의 시대가 열렸다. 여기가 로두스다. 바로 여기서 뛰어라!

 

 

‘밥상’위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정치의 확장과 새로운 정치 주체의 등장

 

“촛불의 외침은 우리 사회의 부자유나 음습함,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일거에 날려버린 유쾌한 반란이며 문화혁명입니다. 정치사회적 투쟁의 선도자는 성인 남성이라는 통념은 5월 2일 청계광장에 모인 촛불소녀들로 당혹스러울 만큼 깨졌습니다”

(박원석, ‘촛불은 혁명을 닮았습니다’, <<촛불은 민주주의다>> 가운데서)

 

먹거리의 정치화! 아마 이명박 정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의 복원의 대가로 ‘쇠고기’를 내주고 돌아온 이명박 정권이 “이제 우리 국민은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게 됐다”고 자랑스럽게 협상 결과를 발표하자마자,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와 ‘재협상’을 요구할 줄은.

그리고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시작된 촛불이 한반도 대운하 계획, 영어 몰입교육, 4⋅15교육자율화 조치, 의료⋅물⋅전기⋅가스의 사유화, 공기업과 은행의 사유화, 강부자⋅고소영 내각, 물가인상을 불러일으킨 고환율 정책 등 이명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로 확대될 줄을. 더욱이 그 가장 앞줄에, 그 가장 중심에 10대의 여학생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여성들이 설 줄은.

 

2008년, ‘쇠고기’라는 일상의 먹거리가 한국 정치의 최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먹거리가 정치화된 것이다. 쇠고기라는 일상의 먹거리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일상의 삶의 문제가 건강과 생명의 문제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일상의 삶의 문제, 먹거리의 문제가 위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곧바로 정치화하지는 않는다. ‘일상의 정치’, ‘생명의 정치’를 무매개적으로 혹은 초역사적으로 절대화시킬 필요는 없다. 2008년 이명박 정권 등장 직후, 쇠고기라는 먹거리 문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한 데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뒤에 보여주었던 모습과 정책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와 실망과 절망이다. 경제살리기에 대한 기대는 출범하기도 전에 꺾였다. 말로는 ‘경제 살리기’와 ‘서민 경제’, ‘머슴’ 등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독점 재벌과 부자들만을 위한 불도저 정권이라는 것이 취임 초기부터 투명하게 드러났다. ‘어륀지’ 영어 몰입교육은 물론, 강부자⋅고소영 내각, 한반도 대운하의 강행,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4⋅15교육자율화 조치, 전기⋅가스⋅물의 사유화, 규제 완화, 방송장악 시도 등, 최소한의 공공 안정망과 노동자 민중들 자신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급격한 시장화의 추진에 대중들은 절망했고 분노했다. 더욱이 국회의 2/3는 보수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대중들의 이해를 제도 정치권 내에서 대변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절망과 분노에 기름을 끼얹힌 것이 바로 4월 ‘쇠고기 협상 타결’이었다. 값싼 쇠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건강은 안위에도 없고, 검역주권마저 포기하면서 쇠고기를 내준 이명박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5년을 견뎌내야 하는데. 그래서 촛불을 들었고, 쇠고기라는 먹거리는 정치화됐다. 일상의 먹거리와 건강⋅생명의 문제는 현실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그것도 그 중심에. 정치는 쇠고기라는 일상의 문제로 확장됐고,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확장됐다.

그 일상의 문제, 건강⋅생명의 문제는 10%도 채 안되는 가진자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고 그래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자들의 일상의 문제이자 건강⋅생명의 문제였다. 영세 자영업자들과 농민들과 청년실업자들과 비정규 노동자들과 도시빈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촛불을 끈질기게 사수했고, 자유발언대에서 자신들의 삶의 현실을 남김없이 드러냈고, 이명박 정권과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2008년 촛불은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으로 호명된, 조직화되지 않고 자각되지 않은 계급투쟁의 맹아였다. 오히려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강남의 부유층들만이 자신들의 계급적 자각과 결집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먹거리의 정치화’라는 정치의 확장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10대 여학생들과 여성들의 전면적인 등장이라는 정치 주체의 확장과 맞물려 있다.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 주체의 확장’이다. 10대 여학생들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으로 가장 먼저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여성들 역시 먹거리 문제에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감이, 혹은 예민함이 모두를 곧바로 직접 행동에 나서게 하지는 않는다.

‘광우병 쇠고기, 너나 먹어’라는 당찬 말에서 드러나듯, 국가 권력의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권력의 폭력에 의한 공포의 경험이 없는, 그래서 자유롭고 발랄하고 당당한 10대였기에 가능했다. 여성들이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인 관계망을 형성해서 일상적으로 부담없이 소통하면서 자유롭고 다양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토론을 해왔기에 가능했다. 일상의 민주주의가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런 정치가 미국산 쇠고기와 함께 생활 속에 잘게 쪼개지면서 시민들 속에 들어왔다. 20이 80을 지배하거나 말거나, ‘정치에는 문외한이에요, 호호호’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아주머니들이 배운녀자의 살아있는 눈빛을 체득하면서 섹시한 여전사들로 변모했다. 성원의 변화는 시위의 본질과 양태를 변화를 필연적으로 가져왔다. 그러므로 2008년 촛불이 갖는 여성중심의 특징과 문화적 다양성의 특징은 불가분의 유기적 결합을 하고 있다.”(목수정, ‘촛불소녀와 배운녀자, 문화적 상상력을 운동에 풀어놓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

 

2008년 쇠고기라는 ‘먹거리의 정치화’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가 드디어 우리의 일상의 ‘밥상’ 위에 올라왔음을 뜻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의 실체가 일상과 삶의 정치적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2008년 촛불항쟁에서 그것은 국제통상에서 ‘검역 주권’의 문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수준에서 이해되고 있다. 좀 더 나아가 한미FTA 협상에 대한 미국 국회의 비준과 맞물려 있다는 점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아직 촛불 속의 대중이 쇠고기라는 먹거리와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간의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가 한미FTA 반대나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반대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이제 일상에서의 삶과 건강⋅생명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라는 자본의 운동과 일상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현실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과거에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에 맞선 저항이 있었다. 구조조정과 민영화, 그리고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간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서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투쟁을 힘겹게 전개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정규직의 구조적 양산과 고용불안의 제도화, 그리고 자본의 분할 통제에의 포섭이다. 그래서 노동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 역시 지속되고 있다.

이제 반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투쟁의 맹아가 일상의 영역, 소비의 영역, 건강과 생명의 영역에서 그 모습을 잠깐 드러냈다. 그것도 전혀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그러나 아직 그 맹아는 ‘검역 주권’과 ‘주권재민’이라는 강보에 싸여 있고,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촛불에 당혹스러워 하거나 낯설어 하거나 서운해 하고만 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는 인간의 삶을 생산의 영역만이 아니라 생활과 소비의 영역, 나아가 생명 그 자체도 파괴하고 있는데, 노동자에게 생산의 영역과 소비⋅생활의 영역은 여전히 분리되어 있고, 또 각각 자본의 논리와 법칙에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자본에게는 통일된 두 영역이 노동자 민중들에게는 충돌되거나 별개의 문제로 된다. 조합주의적 인식과 대응, 소비자주의적 인식과 대응만으로 이 두 영역을 결합시킬 수는 없다. ‘반자본’의 정치적 전망만이 이 둘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좌파는, 노동자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가 밥상위의 정치가 되는 현실, 권위와 폭력에 주눅 들지 않고 광장에서 해방감을 맞보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촛불의 주체들과 어떻게 대면하고 소통할 것인가? ‘광장’을 활용만 할 것인가? 새로운 주체들에 서운함만을 표현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바꾸겠습니까?”

-MBC100분토론, 나경원 한나라당 국회의원

“아니, 그럼 국민을 바꿔요?”

-아고라 네티즌

(아고라 폐인들,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 가운데서)

 

2008년, 두 개의 대한민국이 충돌했다. 두 개의 민주주의가 충돌했다. 두 개의 민주공화국이 충돌했다. 이명박 정권과 수구보수세력들의 대한민국⋅민주주의⋅민주공화국과 촛불항쟁에서의 대한민국⋅민주주의⋅민주공화국 간의 충돌이 그것이다. 이명박의 대한민국은 8⋅15를 건국절로 하여 대대적인 기념식을 했고, 촛불의 대한민국은 광장에서 거리에서 촛불로 타올랐다. 이명박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을 어떻게 바꿀 수 있냐”고 항변했고, 촛불의 민주주의는 “그럼 국민을 바꾸냐”라고 맞받아쳤다. 이명박의 민주공화국은 제도정치권 내 엘리뜨들만이 ‘공적’인 업무를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촛불의 민주공화국은 국민들이야말로 권력의 주체라는 것이었다.

이명박의 대한민국은 “촛불대중의 문제제기를 단지 수입쇠고기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기술적인 문제로 축소”시키고자 했고, 이에 촛불은 “쇠고기 수입 결정이 주권을 지닌 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관료적 방식으로 도출”(이광일, 앞의 책)된 데 대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드리대며 비판했다. 정치는 오로지 선택된 엘리뜨만의 몫이라는, 그래서 광장으로 나온 촛불에 대해 ‘촛불배후론’을 드리대며 탄압하는 이명박의 정치관에 대해, 촛불은 ‘내가 배후고, 우리 모두가 배후’며, ‘정당한 시민들과 싸움에서 정권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정치관으로 대응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08년 촛불항쟁 기간 동안에 가장 많이 가장 자연스럽게 불려진 노래이자 구호인 <헌법 1조>다. 2008년 촛불항쟁의 주 슬로건이자, 이념이다. 왜 2008년에 새삼스럽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구호가 외쳐지고, 노래가 불려졌는가? 왜 <헌법 제1조>가 60여 년간 활자 속에 묻혀 있다가, 촛불들에 의해 거리로 광장으로 불려나왔는가?

물론 쇠고기 협상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권의 “1인 중심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일방적 결정과 집행”, “국민건강과 직결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를 거치는 민주적 절차 부족”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과 행태가 지난 20여 연간 쌓아 온 민주주의의 성과를 파괴할 것이라는 위기감의 표현이다. “대한민국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임을 “국민은 종업원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정치적 주체”임을, 그래서 “대통령을 바꿀 수는 있지만, 민주공화국은 바꿀 수 없다”는 자각과 결의의 표현이다.

 

2008년 촛불이 단지 대한민국 국민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거듭남을 알리는 신호”만인가? 2008년 촛불이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 20여 년간 쌓아 온 민주주의만인가? 2008년 촛불이 ‘과거’만을 향하고 있었는가? 촛불 대중은 이명박 정권 들어 대한민국이, 국가가 ‘공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사적자본의 이해의 증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으며, 제도 정치권은 단지 자본간 이익의 분할을 위한 거래소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은 국내외 독점자본의 최고집행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짧은 기간 내에 간파했다.

그래서 촛불대중은 나섰다. 권력을 더 이상 제도정치권에 위임할 수 없다고. “내가 곧 정치의 주체”라고. 부와 권력을 가진자들에게는 관대하고 가난한 대중들에게는 고통일 뿐인 현실의 민주공화국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겠다고.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주권자인 인민대중이 공적인 것을 처리하는 정체인 민주공화국을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고. ‘주권을 지닌 인민대중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스스로 실천하고 구현하겠다고. <헌법 제1조>는 2004년 탄핵과정에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보수세력이 보여주었던 학습효과일 뿐이었다. 그들이 기대고자 했던 <헌법>을 거꾸로 드리밀며, 그 헌법의 수호자는 그들이 아닌 바로 촛불이라고 되받아쳤다.

 

이러한 촛불대중의 등장으로 이명박 정권과 수구보수세력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자유주의 개혁세력들은 무기력해졌다. 그들이 내밀 수 있는 것은 ‘벌거벗은 탄압과 폭력’, ‘촛불 배후론’, ‘폭력 시위’ 운운 정도였다. 촛불대중의 등장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것은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의민주주의이고, 직접 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빨리 촛불을 접고 여의도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어느 저명한 자유주의 정치학자의 훈수도 동원됐다. ‘제도화’된 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의 본령으로 바라보는 이런 주장의 근저에는 대중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담겨져 있었다.

 

2008년 촛불이 ‘대의민주주의’적 환상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직접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의 보완물로 여기고 있다. 또 촛불이 지배세력의 ‘폭력 시위’ 운운 공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폭력/비폭력 논란에서도 드러났듯이 “비폭력주의가 ‘저항’ 그 자체를 반대하거나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면서 촛불의 역동적인 진전 그 자체를 가로막기”(남구현, 앞의 책)도 했다.

“애초 대중 자체가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무리, 폭도mob라는 그들의 오랜 대중혐오증을 확산”시키려는 ‘폭력시위’ 딱지, “대중은 자기결단을 할 수 없고, 그 어떤 엘리트나 리더들의 지도 혹은 대의를 매개로 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이광일, 앞의 책)라는 ‘촛불시위 배후론’ 등 지배세력의 공세는 여전히 2008년 촛불대중들의 머리 위를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다.

 

2008년 촛불이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현실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주권선언이자 직접행동이다. 그 속에는 “기존의 국가와 법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개인들의 삶을 파괴하는 그 공공성에 대한 저항이 잠재”되어 있다. “자본의 시녀가 되어버린, 시장과 경제 권력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이 촛불의 잠재적 역동성”(박영균, ‘촛불의 이념, 민주공화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이다.

2008년 촛불은 그 진전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집단 이성’의 힘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명박산성 앞에서의 폭력/비폭력 논쟁이 그랬고, 아고라에서의 소통과 토론이 그랬다. 물론 이 촛불의 광장에, 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에 노동자계급이 계급적 주체로 등장하고 있지는 못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장애인들, 여성노동자들, 여성농민들이 하나의 계급적 주체로 이 광장에 서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2008년 촛불의 광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작게 느껴지고, 여전히 소외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장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는 직접 참여하고 직접 소통하고 직접 발언하고 직접 실천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연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 자신의 전망을 직접 행동을 통해 ‘공적’인 것으로 정치화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 속에서, 계급은 촛불을 계급의 정치로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며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한편으로는 “국가주의라는 틀을 뛰어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해석되고 실천될 필요”(이광일, 앞의 책)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계급적으로 더 급진적으로 해석되고 실천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촛불은 더 지속되어야 한다. 더 급진화되어야 한다.

 

 

‘상상력’에 ‘계급’을! 그리고 ‘조직’을!

 

“역사적 과정을 구체화하고 강화할 수 있는 혁명지도부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이론은 공리공론에만 그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뿐이다.

이론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기초작업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론적 분석이 제공해 준 통찰력을 역사적 실제로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적 지식인’이 없다면, 이론은 실천에서 유리된 채로, 이성은 감성에서 분리된 채로, 그리고 에로스와 로고스의 통일은 깨어진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변증법적인 긴장이 존재할 때에야, 조직화의 문제가 생기 넘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가운데서)

 

2008년 촛불항쟁은 어쩌면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노동자계급은 지난 10여 년간 힘겹게 진행해왔던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성과인 촛불 앞에서 당혹해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08년 촛불항쟁이 과연 지난 10여 년간 노동자계급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직접적인 성과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촛불이 여중고생들이 앞장서서 쇠고기 재협상 요구라는 생존과 검역주권 요구로부터 출발했지만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전반에 대한 ‘대중적 반격’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촛불이 만들어 낸 새로운 정세는 잠깐 불이 붙었다가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국면과 맞물려 재점화됐을 때, 그래서 제도 정치 전반의 위기와 경제적 위기가 결합됐을 때, 그것은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국면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국면에서 대중들이 항상 직접 저항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삶에 대한 이기적 욕망 혹은 경제적 공포는 ‘강력한 권력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구체적 전망’, 그리고 그 전망을 현실화시켜 나갈 수 있는 역사적인 헤게모니 블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때론 파시즘적 권력이 강력한 유혹이 될 수도 있다. 다행히 2008년 촛불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환상을 일찍 접게 만듦으로서, 대중 자신이 급진화되고 새로운 역사적 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해 나갈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갑작스럽게 다가 온 촛불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아니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파업은 없었다. 촛불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 안지 못했다. 10여 년간 반신자유주의 구조조정투쟁에서 누적된 패배의식 때문인가? 그래서 정세의 역동적인 변화에 둔감해졌는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틀에 갇혀 수동화되어 있기 때문인가? 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고 패배의 대가는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혹할 거라는 판단 때문인가? 촛불과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지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촛불광장이 노동자들의 판이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인가? 정치적으로 너무 수동화되거나 탈정치화되어 있기 때문인가?

2008년 촛불은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둘러 싼,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를 둘러 싼 ‘정치’투쟁이다. 그것이 비록 10대와 여성이라는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촉발되고 확장되었지만, 그것이 비록 먹거리 문제라는 소비와 생활의 영역을 중심으로 촉발되었지만, 자본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공세에 맞선 정치투쟁이다.

 

노동자계급은 이 촛불 정세에서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자신의 촛불을 들어야 한다. 촛불과 함께 하며 소통하고 연대해야 한다. 촛불에 직접 참여하면서 촛불을 현장으로 지역으로 일상의 삶으로 실어날아야 한다. 현장과 지역과 일상의 삶의 문제를 촛불의 광장으로 실어날아야 한다. 이 촛불의 정치에서 기권해서는 안된다. 촛불은 다가오는 거대한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일 수 있다. 이 촛불의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이 최소한 역사적인 헤게모니 블록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새로운 주체들과의 연대 속에서 또 새로운 영역에서 의제를 확장하고 촛불을 계급적으로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 촛불의 상상력 속에, 그 정치적 문화적 상상력에 계급이 접속해야 한다.

“현재 촛불은 특정한 지도부가 이끄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자발적이고 즉각적인 거리토론과 인터넷을 통해서 의제를 형성하고 해결하고 일정을 결정한다. 모든 조직과 단체는 촛불에 일원으로 참여할 뿐이다. 현재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 현재 환경운동단체가 대운하로 촛불과 접속하고, 공공부문 노동자가 사유화로 접속하고, 언론단체가 공영방송 사수로 촛불과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 일단 촛불 분위기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촛불에 참여해서 조합간부나 조합원들이 촛불 분위기를 몸소 파악하고 촛불들과 함께 싸우면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국민적 의제인 쇠고기, 대운하, 교육, 의료, 공영방송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김동성, ‘촛불과 함께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 투쟁과 사회화투쟁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

 

당혹하고 머뭇거리는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다. 좌파 역시 촛불의 광장에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욱 정확히는 이 새로운 광장에 개입할 준비와 역량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의제를 계급적 관점에서 신속하게 분석하고 전망을 제출할 정치 역량과 좌파적 전문성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실시간으로 이어주는 소통 공간도, 광장에서 직접 소통하고 연대하고 행동할 역량도, 노동자계급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내어 촛불의 역동적 진전을 가로막는 지점을 뚫고 나갈 물리력과 조직력과 정치력도, 공세적인 당당함과 발랄함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좌파의 무능을 자족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한가한 짓이다. 2008년 촛불로부터 좌파는 배워야 한다. 2008년 촛불 정세는 좌파의 정치가 가능해 지는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정세에서 좌파는 한편으로는 촛불을 급진화시키면서 좌파적 대중과 소통하고 연대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자신이 집단지성의 형성을 통한 역사적 헤게모니 블록의 한 축으로 서나가야 한다.

 

광장의 정치에서 정치적 전망에 대해 발언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정치적 전망’과 ‘정치활동가’가 필요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매순간 이론과 실천의 긴장을 창출하면서 집단 지성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쌍방향의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생산의 영역만이 아닌 생활과 소비 영역까지 포함해 의제를 생산하고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좌파적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 좌파의 문화와 상징과 이미지를 2008년 촛불에서 보여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광장으로 나온 10대와 대학생, 여성 등 새로운 급진적 주체들과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 모든 시도를 반자본 사회화와 직접민주주의⋅노동자민중통제를 결합시켜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진전해야 한다.

이 속에서 좌파는 정치적 활력을 새롭게 복원하고 능력있고 준비된 정치적 주체로 서 나가야 한다. 2008년 촛불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좌파 정치운동의 자성과 혁신의 계기로 삼아 나가야 한다. 그 혁신의 결과가 ‘계급정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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