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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3.

 

(3) 헤라클레이토스


이런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를 제거하고, 이 물질적 요소를 추상화하여 이 요소들 모두를 다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적 요소(우리는 일상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신적 것을 이야기한다)를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물질적 요소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 물질적 요소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질적 요소와 다를 바 없는 물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아낙시만드로스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정신적 요소를 <>로 비유한다. 그리고 이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으로써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은 물질적인 대립 쌍들의 운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결국 <사공이 많아 결국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라 많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켜 줄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다(多)의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국가 기구가 바로 <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은 헤라클레이토스 말년에 가면 <Logos(영혼, 이성, 정신)>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중에서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는 사라지게 되고, <운동>만이 남게 된다. 그 <운동>은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라짐>으로 표현된다.


(4)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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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부터 계승했던 <운동> 요소까지도 제거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운동>의 요소까지도 부정하는 이유는, 파르메니데스가 대(大) 토지를 소유한 귀족 출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모순율을 바탕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 요소를 비판한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일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이지 <있는 것>이 아닌데(이것이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도록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변화>를 뜻하고, 그 <변화>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을 말하게 되면, 이러한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위의 도식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는 사람, 물, 나무, 소, 말, 개 들이 서로 구별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물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추상화하면, 이것들 모두는 <있는 것>(유식한 말로는 “존재”라고 말한다)이다.

그러면 <있는 것>들의 세계인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있는 것>들은 서로 구별되고 있는데, 그 구별되는 경계선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먼저,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있는 것>들 사이의 구별은 없어지게 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는 그 어떤 구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말이나 개나 소나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세계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경계선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헨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있는 것>-<있는 것(경계선)>-<있는 것>-<있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그러니까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에 어떻게 <운동>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파르메니데스는 반문한다.

다른 한편,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주장과 같은 모순에 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주는 그 경계선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있는 것>-<없는 것(경계선)>-<있는 것>-<없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루어져야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그 역시도 똑같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있는 것>들의 연쇄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틴 세계>는 또한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운동>이란 없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머릿속에서 사고(생각)로 반영하는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에서 <운동>이란 요소가 아예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 중에는 <운동>이라는 관념(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도 <운동>이란 요소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있다고 해도, 이해(利害) 관계를 바탕으로 한 여러 계층, 집단들이 서로 그 중앙국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다툼)이 일어난다면, 그 투쟁(다툼) 때문에 사회는 혼란해질 것이고, 따라서 <다(多)의 공존>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투쟁은 곧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운동)의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투쟁(운동)이 없어야만 <다(多)의 공존>을 이룰 수 있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모두가 부정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세계는 온통 <있는 것> 하나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 때문에 그 당시에도 “돈이 다다”라는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돈, 즉 부(副)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정치 체제(귀족정)’말고는 어떤 정치 체제도 용납될 수도, 또한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것>(귀족정)에는 어떤 <운동>의 요소(권력과의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한 사회 변혁)도 없기 때문이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와서야 물질(존재)-정신(사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이 확연히 드러나고, 또한 정신이 물질보다 우위에 있고 고귀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물질이 정신으로 환원되는,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물질)를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정신)에다 꿰어 맞추는 일이 처음으로 비로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 비유해 보면, 돈(자본)에 우리의 모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꿰어 맞추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운동>과 그 운동의 토대인 <물질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나아가서 인간 역사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 역시도 <물질 세계>의 <운동>의 생산물임을 파악할 수 없었고, <있는 것>을 단지 모든 것의 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없는 것>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없는 것>도 역사적으로 <있는 것>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가도 부르기도 하고, 부르다가도 고프기도 한다. 고프다는 것은 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부르다는 것은 위에 어떤 것이 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모든 것의 삶의 기본 과정이라는 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A는 not A(~A)]이고, [not A(~A)는 A]이며, 결국 [A는 A이면서 동시에 not A(~A)]라는 변증법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연관해서 보자면, 인간의 삶이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그 발전되고 복잡한 삶의 양식을 담아낼 수 있게끔 정치 체제도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계급 이익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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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2,

 

**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 **


위의 신화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비추어 보면,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의 근본 물음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는 <다(多)의 공존>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관심사이고, 이런 관심사가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1) 탈레스


탈레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생한 최초의 철학 학파인 이오니아(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선구자이다. 그런데 탈레스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탈레스가 세계가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의 직업이 항법사였기 때문이다. 항법사란 직업은 배의 물길을 살피는 직업이고, 여러 다른 지역과 나라를 돌아다니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늘 물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2) 아낙시만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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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철학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출신이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 귀족 정치 체제를 주장하고 옹호했던 반면에, 상인 계급들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 역시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가 <다(多)의 공존>을 위한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위의 도식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에 근거해서 최초로 <무한정자(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것. 산화와 비교해 보면 Chaos(혼돈)과 같은 것이다), to 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 <무한정자>로부터 최초의 자연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4가지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불의>가 도사리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다(多)>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만을 관장할 뿐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가 있게 될 경우, 신들의 <다(多)의 공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多)의 공존>을 위해서 <복수의 여신>인 <Nemesis>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진다. 신화에서 <복수>란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온․냉․건․습>의 <온․냉>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과 <건․습>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 그리고 이 두 대립 쌍 자체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만물은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옛말도 있듯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 작용이 없으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수 없듯이, 서로간에 어떤 상호 작용이 없으면 아무 것도 생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태어나려면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서로간의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만물은 그 자체 불의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신화에 따라 복수를 당하여, 만물은 최초의 자연 질서인 <온․냉․건․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이는 기독교의 원죄설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은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간의 운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세계관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건․습>으로부터 만물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런데 <온․냉>, <건․습>과 같은 대립 쌍은 무수히 많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 <아름다움과 추함>, <높고 낮음>, <무겁고 가벼움> 등등…….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 <건․습>의 대립 쌍으로부터 이 이외의 다른 모든 대립 쌍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립 쌍>이라는 동일한 존재 지위에 있는 모든 대립 쌍들 중에서 오로지 <온․냉>, <건․습>만이 필연적으로 <최초의 자연 질서>로 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온․냉․건․습>만을 <최초의 자연질서>로 삼은 것은 <탈레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물은 대체로 따뜻함, 차가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습기가 많다고 하거나 건조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질수록 다양한 직업들과, 이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하기 이전의 단순한 사회 상태에서 나타난 대표자들(이 대표자들이 곧 <온․냉․건․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표자들이 불의를 저지르게 되면 만물로 표현되는 사람들 중에서 새로운 대표자를 뽑게 된다. 이것이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의 계층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에 따라 더 많이 생겨난 작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하여,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서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정하거나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급기야는 <사공이 많아져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식>의 사회 혼란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多)의 공존>은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몇 가지 다양한 물질 요소와 그 물질 요소들 간의 운동>을 전제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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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1.

** 이것은 학생들과 철학사를 공부하기 만들었던 강의안 교재입니다.

왜 이걸 여기에 올리느냐고요?

다 아시면서^^...(이걸 배트께서 날로 먹는 포스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날로 먹을까 해서요^^...)

하루에 하나씩 올리면 일 주일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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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 #


#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 #


 

 

 

Chaos(혼돈)

 

 

 

 

 

 

 

 

 

 

 

 

 

 

 

 

 

 

 

Gaia(땅)

 

Eros(사랑, 조화)

 

Nyx

(밤, 공기)

 

 

 

 

 

 

 

 

Uranos(하늘)

 

 

 

 

 

 



Gaia(땅)

 

 

Uranos(하늘)

 

 

 

 

 

 

 

 

 

 

 

 

 

 

 

 

 

 

 

 

 

 

Kyklopos(외눈박이 신)

 

 

Titan(거인신족)




 

Rhea

(거인신족 계열신)

 

 

Chronos

(거인신족 막내신)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Zeus(하늘)

 

 

Themis(법의 여신)

 

 

 

 

 

 

 

 

 

 

 

 

 

 

 

 

 

 

 

 

 

 

 

 

 

 

 

 

 

 

 

 

 

 

 

 

 

 

 

 

 

Horai(계절의 여신)

 

 

 

Moira(운명의 여신)

 

 

 

 

 

 

 

 

 

 

 

 

 

 

 

 

 

 

 

 

 

 

 

 

 

 

 

 

 

 

 

 

 

 

 

 

eumonia

(질서)

 

dike

(정의)

 

eirehe

(규율,평화)

 

cleito

(분리,계획)

 

cachesis

(분배)

 

atropos

(분배감시)


위에 그려진 도식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의 발생을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이 신화를 살펴보는 까닭은 서양 고대 사상이 어떻게 발생하였고, 그리하여 서양 고대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따져봄으로써, 이 고대 사상이 오늘날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에 어떤 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이 도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신화에서는 한정되어 있고, 규정되어 있어 서로가 구별될 수 있는 이 세계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구별될 수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Chaos(혼돈)의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이 Chaos(혼돈)의 상태에서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Gaia(땅, 대지), Eros(사랑, 조화), Nyx(Erebos)(밤, 공기)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Gaia(땅, 대지)로부터 Uranos(하늘)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대체로 거의 아무런 의심 없이 남성이 하늘, 여성이 땅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신화를 보게 되면, 하늘(남성)은 땅(여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가 결합하여 최초의 신(神, God)이라고 할 수 있는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Kyklopos(외눈박이 신)가 워낙 못생겨서(Kyklopos의 모습이 그 자체 세상에 위협을 줄 정도의 무기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단다*^^*...) 태어나자마자 Gaia(땅, 대지)가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다시 자기 자신의 뱃속으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Titan(거인 신족 ; 영어로는 ‘타이탄’이라고 한다) 계열의 신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을 만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런 생각은 서양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보면, 신이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최초의 자연 질서인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의 결합으로부터 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서양인들의 생각을 빌리자면, 신은 자연인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 즉 신이란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생각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Titan(거인 신족) 계열의 신 중에서 여신인 Rhea와 남신 들 중에서 가장 막내신인 Chronos가 결혼하여 우리의 귀에 낯익은 신들인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등등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 Chronos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Uranos(하늘)의 성기를 거세시키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게 된다. 그리하여 이 Chronos에게서 비로소 ‘신에 의한 세계의 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아버지의 세게 지배권을 찬탈한 Chronos에게는 또 다른 고약한 면이 있었다. 즉 자식을 낳자마자 곧바로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Hades(지하세계)나 Poseidon(바다) 모두 역시 아버지인 Chronos에게 잡혀 먹혔다. 이것을 본 Rhea는 하도 기가 막혀서 마지막 자식인 Zeus를 Chronos 몰래 Gaia에게 맡기고 집채만한 커다란 바위를 보자기에 싸서 Chronos에게 가져간다. 그리고 Chronos에게 보자기에 싼 것을 건네주며, 이것이 방금 낳은 자식이라고 말한다. Chronos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보자기에 싼 것을 그대로 집어삼킨다. 집채만한 바위를 삼킨 Chronos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에 시간이 흘러 Zeus가 청년이 되어서 자기 아버지인 Chronos의 배를 가르고 자신의 형, 누나들을 꺼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과 거인 신족 계열의 신들의 10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 전쟁에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이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Chronos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던 것은 자기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Chronos는 본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chron 또는 chrom은 시간(time)이라는 어원을 가지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이 Chronos의 지배를 받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자기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Chronos는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기 뱃속에 넣어서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Zeus(하늘)는 자기 아버지 Chronos의 배를 갈라서 형, 누나들을 꺼내고 나서 아버지인 Chronos를 깊은 동굴 속에 영원히 유폐시킨다. 이렇게 해서 Zeus(하늘)를 비롯하여 Chronos의 뱃속에서 나온 신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어 영원히 젊게 살 수 있게 된다.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들은 자기 아버지의 1인 독재를 끝장내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한 신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이 세계의 여러 부문을 맡아서 지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신은 Styx(신의 세계에 있는 10개의 강 중에서 9번째의 강으로, 형벌의 강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의 강은 Lethe인데, 망각의 강으로 불려진다. 말하자면 인간의 세계(이승)와 신의 세계(저승)을 가르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맹세하게 된다. 즉 [Zeus는 하늘, Hades는 지하세계, Poseidon은 바다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들은 자기 고유의 지배 영역이 있는데, 다른 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일 다른 신의 지배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게 되면 Nemesis라는 복수의 여신에 의해 복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때 <복수>의 의미는 복수 당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기 이전의 원래의 상태, 다시 말해서 Styx 강에서 맹세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헤시오도스의 신화에서 말하고자 핵심은 <다(多) 의 공존>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화에서 나타나는 역사관은 <운명사관>이다. 그런데 시간의 처음과 끝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의미에서의, 즉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 아니다.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다. 신화에서 각각의 신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이 처음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그 영역을 모든 신이 다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며, 또한 침해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되면 Chronos 때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는 싸움을 계속 하게 되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땅과 영역이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이 있다. 우리가 이러한 소질과 능력, 더 나아가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존해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역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서양의 고대 신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이고, 또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多)의 공존>이 고대 서양 사상에서는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주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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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금단 현상??

금주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어 간다. 

그런데 3주 전부터인가...

일단 왼쪽 머리의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그러더니 왼쪽 귀가 아프고 왼쪽 어금니 쪽의 잇몸이 붓기 시작했다.

이틀을 앓은 후에 약국 가서 약을 사먹고 나서는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위의 증상들이 많이 없어지고 나자,

2주 전부터는 목이 따끔까끔 아프기 시작했고,

가래도 끓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술 끊고 난 뒤의 금단 현상이라고 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 사는 곳 근처의 내과의원에 가서 물어 보았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지...

그랬더니 그 의사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

잘 모르시겠단다...

아~~~...

그러더니 목이 아픈 것은 편도선 때문이 아니라 인후염일 가능성

(인후염이라고 확실한 진단도 아닌...)이 높다고, 그래서 약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찰비가 올라서 3천 4백 원하더라...(4백원 올랐스...언제...).

약값 1800원...

 

그러다 지난 주 금요일부터 감기 몸살기가 살살 오더니 결국 몸살이 왔다.

이번엔 몸으로 버텼다.

그런데 지금은 몸살기는 많이 나아졌는데,

또 지난 번처럼 목이 아프다.

담배 안 핀 지 3일째다.

담배 생각이 별로 안 난다.

 

이게 이른바 금주 금단 현상일까?...

술 끊으면 이런 생고생을 하나?...

왜 그런지 잘 모르니까 답답하다.

 

누구 술 끊으신 분 왜 그런지 좀 가르쳐 주시면 감사감사감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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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지혜^^...

이번 학기에 <영화로 철학하기> 수업이 있어서 얼마 전부터

가지고 있던 영화를 이리저리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는데,

그 중에서 인상이 남는 에니매이션 영화가 <고양이의 보은>과

<귀를 귀울이면>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것을 보고 고양이에 대해서 다시금 옛날의 기억과 추억이 생각났다는 얘기다.

 

이 영화들 속에 나오는 고양이는 푼베르트 폰 직키켄 남작 고양이와 뮤타(그런데 극 중에서 종종 부타로 불리운다. 그런데 부타는 일본 말로

돼지라는 뜻이다)라는 고양이는 청소년(이 두 영화에서 나오는 여학생들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다.

그래서 청소년이란 표현을 쓴다)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의 길라잡이로서

삶의 지혜의 상징들이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란 무엇일까, 또한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서

(사실상 이번 <영화로 철학하기> 수업의 커다란 주제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영화를 유기적으로 잘 선정해야 하는데, 좀 걱정이다. 혹시 이 주제와 관려나여 추천하고 싶은 영화들이 있으면 소개하시라. 소개하신 분들께는 나중에 맛있는 저녁을 대접할 뜻이 있슴다^^.),

동시에 실제 고양이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물음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두 번째 물음부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이 두 물음이 서로 연관성을 가질 수 있고, 구체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어렸을 때, 고양이와 한 10년간 같이 지내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자라던 곳은 달동네였다.

달동네라 좁은 골목길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개를 키우는 집도 몇 없었고, 더군다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개, 고양이를 같이 키웠던 집은 우리집밖에 없었을 것이다.

 

옛말에 고양이는 주인이 없다고 했다.

이건 주인과의 관계를 볼 때, 개에 비하면 주인에 대한 충성도가 아주 낮다.

충성도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주인과의 관계맺음 방식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주인이 잘 해 주면 있고, 주인이 구박하면 그냥 떠나 버린다.

그리고 주인집에 있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

 

이전에 우리집에 있었던 고양이의 하루 일과(?)를 다음과 같다.

(우리집은 고양이를 절대 묶어서 기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 길렀던 고양이들은

모두가 도둑 고양이 출신들이었다. 물론 이삼 일 정도는 묶어 놓았다. 앞으로 우리집이 고양이가

같이 살 집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그 당시 우리집은 아침 8시쯤에 아침밥을 먹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아침 밥상을 부엌에서 가지고 나오는 순간 고양이는 어떻게 알았는지,

담을 타고 집으로 와서 마루 앞에서 밥을 먹으려 하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밥상 위로 올라오려 했다.

우리 어머니께서 고양이의 버릇을 고약하게 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한두 차례 주의를 주었다.

그 후에는 절대로 밥상위로, 심지어는 마루 위로 올라서지 않았다.

우리가 밥을 먹고 난 다음 고양이에게 밥을 주었다.

고양이는 한 번에 절대로 많이 먹지 않는다.

조금씩 자주 먹는다.

밥을 먹고 난 후에 고양이는 휴식 시간을 가진다.

이때 고양이를 건들면 안 된다.

고양이를 귀찮게 굴면 처음에 고양이는 못 본 척하면서 귀찮아 하는 기색을 보인다.

<귀를 귀울이면>이나 <고양이의 보은>에서 뮤타가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는데,

정말 그 표정과 똑같다.

좀더 귀찮게 굴면 담을 타고 집 밖으로 나가 버린다.

이때 몇 번 더 귀찮게 굴면 아예 집을 나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밥 먹고 난 후에 휴식을 취하는 고양이를 절대로 건들면 안 된다.

 

휴식을 취하고 난 후에 10시쯤에 고양이는 슬슬 마실을 나간다.

그런 다음에 점심 먹을 때 아침 때처럼 정확하게 나타난다.

점심 먹고 늘어지게 한숨 잔 뒤에 또 마실을 나간다.

마실 나가서 뭐하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고양이들끼리 모여서 재미난

놀이를 하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고양이의 시간 지키기는 일명 칼 같다.

나와 동생이 학교 갔다가 집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담을 타고

와서 우리를 마중한다. 온갖 아양을 떨면서...^^...

고양이의 아양은 어떨 때는 닭살 돋을 정도이다.

아양을 떨면서 고양이는 우리가 하자고 하는 놀이를 군소리 없이 받아주면서 같이 논다.

그런데 그 노는 시간이 딱 정해져 있다.

정확하게 30분 정도...!!

30분이 지나면 심드렁한 표정을 지면서 또 휴식 시간을 가진다.

물론 이때도 건드리면 안 된다.

그러다가 또 마실을 나간다.

 

저녁을 먹을 때 또 칼 같이 나타난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서는 바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나와 동생하고 한 1시간 가량 또 놀아준다(정말 놀아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러고선 잠시 쉬다가 8시 반쯤 또 집을 나간다.

그러다가 자정쯤 집에 들어온다.

집에 들어와서는 우리 옆에서 꼭 붙어 잔다.

겨울에는 우리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와서는 겨드랑이 밑이나 배 위에서 잠을 잔다.

그러다가 한 새벽 3시쯤 나간다.

겨울에는 방문을 꼭 닫고 자는데, 고양이는 자기가 방을 나갈 때 방문 열어달라고

방문을 발톰으로 긁는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 주면 밖으로 나간다.

아마도 오줌을 누고서 또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나가는 것일 게다.

고양이는 절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배설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배설물을 절대 보여 주지 않고 땅에 파 묻는다.

고양이의 배설물 냄새는 지독하다.

아마도 자신의 배설물이 지독한 줄을 알아서 사람들에게 냄새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아침밥 먹을 때면 또 정확히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고양이의 삶은 <따로 또 같이> 방식의 삶인 것 같다.

고양이는 절대 구속 받으면서 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유기적인 관계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기계적인 관계의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것 같다.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즉 맑스 식으로 말하자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관계의 방식으로 사는 것 같다.

 

고양이와의 의사소통은 그 시기가 개보다는 좀 빠른 것 같다.

약 두 달 정도만 같이 지내면 고양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서로가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큼만 들어준다.

그리고 서로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자기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구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실제 고양이의 삶의 방식인 것 같다.

이제 첫 번째 물음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을 지혜가 무엇인지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을 것 같다.

 

고양이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삶의 방식, 지혜는

우리 인간의 삶에 좋은 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종기 님의 시가 생각난다.

 

# 寓話의 江 1 #

- 마 종 기 지음 -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마 종 기 시집 <그 나라 하늘빛>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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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술을 먹지 말자고 작정한 지 2주가 다 돼 간다.

누구는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지 모른다.

제 버릇 개 주냐면서...

내가 술을 끊어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술 먹기 시작한 지 20여년 이래로

처음이다, 진짜로...

 

일단 술을 마실 체력이 바닥났다.

술을 조금만 먹으면 필름이 끊긴다.

물론 안 그럴 때가 가뭄에 콩 나듯이 있지만...

필름만 끊기면 다행인데, 문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에 대한 불만과 섭섭함 워 이런 것들이

술 취하면 폭발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서운하게 하거나 섭섭하게 한 특정 인물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라는 게 문제다.

그게 정말 무서운 일이다.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이제 주(酒)님의 은총을 거부해야 할 때다.

 

곰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 나려면 마늘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을 멀리 해야 한다.

 

전에 언젠가 리우스가 그런 말을 했더랬다.

왜 애꿎은 술을 가지고 그러냐고...

술 먹는 인간이 문제지 술이 무슨 죄냐고...

정말 맞는 말이다!

술이 뭔 죄가 있나...

술 마시는 곰탱이가 문제지...

그런데 <술> 마시는 곰탱이가 문제라서,

술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술과 별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술도 안 먹고 운동도 하니까 그나마 체력이 조금 생긴 거 같다.

요즘은 이 맛에 산다.

이제 이 체력을 바탕으로 논문을 살살 쓸 준비를 하도록 하자.

공부를 하자!

 

곰탱이, 여기가 로두스 섬이니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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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과 동거 중...

벌레들과 같이 산 지 몇 달 되었다.

모기, 날파리, 나방, 집게버레, 쥐며느리, 바퀴벌레, 쌀벌레 등과 같이...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집이 지저분해서 그렇다라고...

그러나 그건 아니다.

집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한다.

(물론 곰탱이는 게으르다. 청소하는 것은 울 여친이 청소 안 한다고 구박해서 하는 거다.^^)

일주일에 한 번 가지고 될 거냐고 또한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하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딱히 없다. ㅋ~~~.

 

어쨌거나 일단 벌레가 나오면 말이 필요없다. 

잡아서 죽이고 보는 거다. 특히 바퀴벌레는 예외가 없다!

예전엔 모기약을 뿌려 보았지만 실효를 잘 못봤다.

바퀴벌레가 출현한 이후로는 바퀴벌레 약을 한 3일에 한 번씩 뿌려 준다.

그럼 모든 벌레들은 한방에 간다.

 

올 여름은 아주 죽을 맛이다.

방문을 열어 놔야 더운 열기를 빼고 해서 덜 더울 텐데 방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다.

모든 벌레들이 기어들거나 날아들기 때문이다.

특히 모기는 정말 싫다.

모기와 바퀴벌레 정말 싫다.

창문은 올 6월에 방충망을 쳐 놓아서 열어 놓지만(방충망 칠 때 아주 쌩쑈를 했다.

방충망을 쳐 본 적이 없으니, 한 1시간 넘게 걸려서 간신히 방충망을 쳤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튼튼하게 잘 버텨 주고 있다. 방충망 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창문 틀을 아주 깨끗하게 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방충망이 잘 들러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방문을 못 열어 놓으니 너무나도 덥다.

열기가 잘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방의 구조는 참 골때린다.

낮에는 그닥 덥지 않다.

그런데 해가 지고 나면 낮에 머금었던 열기를 방안으로 다 쏟아붓는다.

방세 받으려고 지은 방이라 담을 한 축으로 해서 그냥 블록으로 쌓아서 지은 집이라 그런 것 같다.

또한 주위가 높은 건물들이 많아 바람이 잘 안 분다는 것이다.

집 안보다 집 밖이 더 시원하다.

그래서 벌레들이 더 극성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생활하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게 되었다.

(요즘은 밤에 너무 더워서 잠을 못자고 집에 있는 영화 시디를 몇 번씩 번갈아

반복적으로 보고 있다.)

이걸 보고 나서는 잠시 동안 벌레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바퀴벌레약을 뿌려서 저승으로 보냈다.

참, 내 마음이 요사시럽다!

어쨌거나 벌레의 생리가 무엇인지 잘 공부하면 벌레와의 관계가 좀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사실 마음이 잘 안 간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벌레와의 동거도 끝이 나려나...

벌레들아, 나 좀 봐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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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해석 불가능?)

오늘 새벽에 자면서 꿈을 꾸었더랬다.

근데 꿈이 요즘 내 삶의 상태나 의식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완전 같기도!!..음...)

시대도, 등장인물도 뒤죽박죽이고...(원래 꿈이 그런 건지...)

 

꿈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처음 꿈 상태는 아마도 6.25시절쯤 되는 것 같다.

곰탱이와 감비가 정부군에게 마구 쫓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감비의 친구 아버님 댁에 몰래(?) 들어갔다.

감비가 친구 아버님과 술잔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감비가 술 두 잔쯤 비웠을래나?...

(이때 난 술도 안 마시고 그냥 두 사람 사이에 멍청히 앉아 있었더랬다.)

갑자기 감비가 사라졌다.

난 좀 당혹스러웠다.

-말도 없이 어딜 간 걸까... 나만 남겨 두고...

쫓기는 몸인데다가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집으로 무작정 돌아가기로 했다.

 

이때 시점이 달라진다.

70년대로 말이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집은 70년대 살던 달동네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같이 공부하는 선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또 시점이 달라진다.

요즘이다.

그런데 완전 왕따 취급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생각을 하다 꿈에서 깼다.

 

무슨 의미를 담은 꿈일까...?

내가 보기엔 완전 개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또 같기도!...)

 

사는 게 완전히 같기도(!)인 모양이다, 내가...흐흐...

왜 글구 사냐!!! 이 곰탱아!!!

 

기운이 없어서 그러나...

곰국을 먹어야 하나... (아니,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려 하다니...(퍽퍽퍽!!!))

투쟁 중인 여러 동지들께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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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아, 돌아오다^^...

이러저러하게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를 방치해 두었다..ㅠ...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구나.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깨끗이 해야겠구나.

 

여기를 찾아 주신 다른 블로거 분들께

너무 미안하다는 말씀 전한다.

 

이제 차분히 공부도 좀 하고,

방학 중 생활비도 좀 벌고...

 

<천지인>의 <청계천 8가>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오늘은 이 노래를 좀 배워야겠다.

 

 청계천 8가(김성민 작사,작곡)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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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만이 넘었다^^...

ㅋㅋ...

드뎌 방문자 수가 만이 넘었다^^...

난 언제나 만을 넘어보나 했는데...ㅋ...

드뎌 넘었다.

음 그럼 자축하러 가야겠다^^...

배고파서 저녁 먹으러^^...

ㅋㅋ...

 

뱀다리> 울 엄니가 이걸 보셨으면...

- 에구~~~ 이 싱거운 녀석아...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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