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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개념의 해소의 계기들 1>에 이어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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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포이어바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에서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보았다고 강조하였다.(주56-)
물론 맑스는 이후 몇 개월 동안 앞에서 말했던 비판에 착수하지 않았다. 8월 말 맑스는 엥겔스를 통해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견해를 계속해서 일치시켜 나갔다. 그들은 공동으로 브루노 바우어에 대한 비판 작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신성가족 또는 브루노 바우어와 그 동료들에 대한 비판적 비판의 비판』을 썼다.
바우어는 그 사이에 자신의 “자기의식의 철학”을 추상적이고 “순수한 비판”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바우어에게서는 더 이상 민족과 통치권력이 대립하였던 것이 아니라, (바우어가 비판하고 있는 형태인) “정신”과 바우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의 실패에 대한 책임 전가 대상이었던 무지몽매한 “대중”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바로 “대중”(프롤레타리아트)을 미래의 혁명 담지자로 보았다. 따라서 맑스와 엥겔스가 바우어와 그에게 여전히 항상 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추종자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사실은 명백한 것이었다.
비로소 이렇게 청년헤겔학파와 결별하면서(결별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글들을 맑스가 썼다) 맑스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중의 일부분, 따라서 바우어를 둘러싼 영역에서 여전히 발견되고 있는 헤겔의 자립화된 추상에 대한 비판을 총괄하였다. 맑스는 또한 국민경제학의 관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비판으로서의 프루동의 비판을 비판하며, 『경제학-철학 수고』에서의 자신의 경제 연구의 결과물의 가치를 비판한다.
새로운 요소는 이념적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관련성에 대한 분석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는 “역사”와 “이념”의 관념적인 자립화에 대하여, 맑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이념’은 자신이 ‘이해관계’와 구별되는 한 항상 자신을 욕되게 한다. 다른 한편 대부분 역사적으로 자신을 관철시켜 나가는 모든 ‘이해관계’가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들어서게 될 때, ‘이념’이나 ‘표상’ 속에서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서 인간적인 이해관계와 완전히 혼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쉽다.”(2/85)
프랑스 유물론의 발전에 근거해서 이념과 이해관계를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운동으로 연관시키는 일은 일반화된다 :
“17세기 형이상학의 붕괴가 18세기의 유물론으로부터만 해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운동 자체가 그 당시의 프랑스인들의 삶의 실천적 형태로부터 해명되는 한에서이다.”(2/134)
그런데 이념의 생산과 실천적인 사회적 삶 사이의 연관성이 인식되면, 이념은 결코 더 이상 이성적 본질인식으로서 현실성과 대립할 수 없게 된다. 참된 존재와 현실적 현존재 사이의 모순이라는 문제틀(Die Problematik), 즉 지금까지 맑스 담론 구조 틀을 형성해 온 문제틀은 이러한 새로운 표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유적 존재의 역사성과 더불어 인간학적인 본질철학에 두 번째 폭약이 장전된 셈이다. 물론 맑스와 엥겔스는 이에 관해서 결코 알지 못했다. 포이어바흐는 『신성가족』 여러 곳에서 여전히 열광적으로 환영받고 있다.(주57-)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의식적 비판은 이후에 비-인간학적이고 비-본질철학적인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는 매개가 된다.
이 부분은 제2부 <맑스의 과학적 혁명> 3장 <비판으로서의 인간학 : 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중에서 6절 <맑스 개념의 해소의 계기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6절은 2부분으로 나누어서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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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맑스의 과학적 혁명 #
@ 제3장. 비판으로서의 인간학 : 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
** 6절 맑스 개념의 해소의 계기들 **
『경제학-철학 수고』를 통해 맑스의 관심은 마지막으로 새로운 대상영역, 즉 경제학으로 옮겨졌다. 물론 이런 것은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을 이론적 도구로 삼는 것과 같이 나타난다. 맑스는 단순히 개별적 이론에 대한 비판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으로서의 국민경제학 비판을 겨냥하는 국민경제학의 비판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 따라서 이 종교비판이 종교를 인간의 자기소외 형태로 파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맑스는 이제 국민경제학을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것으로 파악한다.
맑스의 경제학은 여전히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것과 동일한 이론적 영역에서 출발한다. 맑스의 인간주의 개념은 이미 분명하게 나타났다.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맑스의 비판에 대해서도 특정한 인간 “존재”가 기초를 이루고 있다. 정치경제학이 상품소유자를 “인간으로” 파악하는 반면에, 이 상품 소유자는 맑스에게서 오로지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사회가 개인이라는 영속적인 존재가 객관화되는 것으로 파악되는 한에서, 사람들은 맑스의 개인주의에 관해 말한다. 또한 “인간 존재”가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에 맑스의 과학개념 역시 경험적이다.(주-54) 분명히 정치경제학의 비역사주의(Ahistorismus)는 맑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맑스는 국민경제학의 이론적 장과 결별한다는 사실 때문에 국민경제학 비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인간학을 사용하는 방식과 양식을 통해서 국민경제학 비판자가 된다. 정치경제학이 자신의 인간학을 단정적으로 사회적 현실과 관계시키려고 하는 반면에, 맑스는 현실적인 (인간)관계와 그 관계를 무비판적으로 반영하는 국민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척도로서 자신의 인간학을 사용한다.
대상의 변화를 통해 포이어바흐에게서처럼 의식과 종교가 아니라 노동이 분석의 중심에 있을 것을 요구 받는다. 또한 맑스는 인간 유적 존재 개념에 대한 내용의 풍부함으로 이미 포이어바흐 인간학의 내용적인 규정들을 넘어섰다. 맑스 담론의 구조는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의 발자취를 가지고 있다.
맑스는 자신이 이론적으로 포이어바흐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맑스 자신에 의해서 그렇게 불리우며) 『수고』의 세 번째 노트의 끝부분에서 발견되는 “머리말”에서,(주55-) 맑스는 법, 도덕, 정치 등에 대한 비판을 더 확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국민경제학과 사회주의의 유용한 문헌을 언급한 후에,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게다가 실증적인 비판 일반과 마찬가지로 국민경제학 비판과 그 비판의 참된 근거는 포이어바흐의 발견에 힘입은 바 크다. 포이어바흐에 의해서 비로소 실증주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비판이 생겨나게 되었다.”(Ⅰ.2/317; EB 1/468)
여기에서는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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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에서보다는 『밀의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에서의 발췌』에서 부르주아의 소외된 사회와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성의 대립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맑스는 상품교환에서의 욕구 상호간의 도구화에 “인간적인” 생산을 강하게 대립시키고 있다 :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산한다면 좋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보자 :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을 생산할 때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중적으로 인정한다면 좋을 텐데. 내가 1) 나를 생산할 때 나의 개인성과 그 개인성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냈으면 좋을 텐데…… 2) 나의 생산물을 당신이 즐기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인간 존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줄 수 있어야 하고, 3) 당신을 위해 당신과 (인간) 유 사이의 중재자가 있어야 하고, 당신의 고유한 존재를 보충해 주는 존재로서의 당신 자신에 의해……(그 중재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4) 나의 개인적인 삶의 표현 속에서 직접적으로 당신의 삶이 표현되어야 하고, 따라서 나의 개인적인 행위 속에서 직접적으로 나의 참된 존재, 나의 인간 존재, 나의 공동체가 확립되고 현실화되었다면 좋을 텐데. (……) 나의 노동이 자유로운 삶의 표현이 되고, 따라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좋을 텐데.”(Ⅳ.2/465f; EB 1/462f)(주53-)
이에 반해 현재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간주된다 :
“우리의 생산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어떠한 생산도 되지 못한다. 즉 어떠한 사회적 생산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산을 상호 결속시키는 것이 인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Ⅳ.4/462f; EB 1/459)
맑스는 여기서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인간학으로부터 인간 존재에 상응하는 사회상태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그 사회상태를 이상(Ideal)으로서 현실성에 대립시키고 있다. 맑스가 다른 곳에서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를 인간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는 한, 이러한 공동체가 소외의 형태로 나타난다”(Ⅳ.2/452; 40/451, Herv. von mir)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치 소외 상태로부터 비-소외된 상태로의 이행 과정에서 인식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여기서 분명히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 구조를 잔손질을 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걸맞는 사회적 상태와의 대결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비판한다. 참된 인간 존재에 적대적인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도덕적 비판 형태의 마지막 목적은 인간 존재의 현실화를 역사의 목적으로 제시하는 맑스 역사 개념의 목적론적인 계기를 통해 감춰진다.
그러나 이러한 “공상적인 사회비판의 형태에서 벗어나기”(Sost 1980, S.29)는 당장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형태들이 “약간 나중에 씌어진” 『수고』의 세 번째 노트에서 “지금까지의 불충분함에 대해 명백하게 수정”(Sost 1980, S.30)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것은 Sost에 의해 가정된다. 이 형태들은 다음과 같은 글을 증거로 인용한다 :
“사적 소유의 운동 속에서, 즉 바로 경제의 운동 속에서 모든 혁명적 운동이 자신의 경험적 토대뿐만 아니라 이론적 토대를 발견한다는 사실로부터 필연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Ⅰ.2/263; EB 1/536)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위해 필수적인 Sost의 수용에 대립해서 『밀의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에서의 발췌』는 『수고』의 세 번째 노트 이후에 비로소 씌어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금까지의 불충분함에 대한 수정”이 바로 결코 단순한 신앙고백을 통해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인용된 진술이 맑스 (사상) 발전의 이러한 시점에 대해 어떤 다른 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설령 이 사실 속에서 이후의 결과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나타난 불충분함은 오히려 소외 개념 자체에서 나타난 결과이며 따라서 오로지 새로운 개념을 통해 극복된다.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1>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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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도 맑스는, 인간의 역사성을 바로 감각의 영역에서 강조하고 인간의 5가지 감각의 형성이 “지금까지의 전체 세계사의 노동”(Ⅰ.2/270; EB 1/541f)일 수 있음을 확정할 때 포이어바흐를 넘어서게 된다.
포이어바흐를 넘어서는 인간 유적 존재에 대한 규정은 포이어바흐와는 아주 다른 헤겔의 평가로 이어진다. 『수고』의 세 번째 노트에서 맑스는 세 개의 긴 부분으로 헤겔의 철학과 대결하였다.(주41-) 거기서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그리고 특히 브루노 바우어를, 그의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헤겔 논리학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오로지 포이어바흐만이 헤겔 변증법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주-42) 그러나 맑스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인간 존재의 역사적 생성을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포이어바흐와는 다르게 헤겔을 인정하고 있다.(주43-)
맑스의 존재 개념이 포이어바흐와 구별되는 두 가지 계기가 있는데, 그 두 가지 계기는 역사성과 생산으로서, 인간 자신의 생산으로서 대상성, 즉 맑스가 헤겔에게서 재발견하고 있는 대상성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
“헤겔은 근대 국민경제학자들의 관점에 서 있다. 그는 노동을 존재로서, 즉 인간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서 파악한다.”(Ⅰ.2/292f; EB 1/574)
물론 맑스는 헤겔이 역사성과 노동을 오로지 사변적인 방식으로만 파악한다는 사실을, 즉 헤겔이 알고 있는 노동이 “추상적이고 정신적인”(같은 곳)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이것은 헤겔의 소외 개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 헤겔이 소외를 이미 대상화 속에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헤겔은 현실적인 소외를 결코 해소(지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소외의 대상적 형태를 없애 버림으로써 의식 속에서만 폐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대립하여 헤겔에서 긍정적 계기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본다. 즉
“소외 안에서 나타난, 대상적 존재의 소외의 해소에 의한 그 존재의 전유(소유, Aneignung)에 대한 통찰,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실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통찰”(Ⅰ.2/301; EB 1/583).
맑스에게 있어서 국민경제학과 헤겔 철학은 소외 안에서의 과학들이다. 맑스는 “참된 유물론”과 “실제적 과학”을 이들과 대립시킨다. 참된 유물론과 실제적 과학을 토대를 닦은 사람은 포이어바흐라고 할 수 있다(Ⅰ.2/276; EB 1/570). 이러한 실제적 과학은 바로 이 과학이 인간 존재를 그 존재의 소외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형태로 파악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 특징이 나타난다.
맑스가 인간 유적 존재의 대상화를 대상적 생산으로 파악하고 이 생산을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포이어바흐의 비역사적인 인간학은 이미 잠식당하고 있다.(주44-)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유적 존재의 내용을 지니고 있는(inhaltliche) 규정으로 여겨진다. 맑스의 담론 구조는 여전히 하나의 인간학적인 존재철학이다. 특히 이것은 분명히 유적 존재의 사회성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게서 이러한 사회성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로서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다.(주45-)
맑스는 『수고』(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사회적 현실성을 인간 존재의 객관화로 파악한다 : 사회성은 개별적 개인들에게 내재해 있는 유적 존재를 통해 나타난다. 분명히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무엇보다도 ‘사회’를 또 다시 개인과 대립하는 추상으로서 정립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Ⅰ.2/267; EB 1/538)(주46-)
그러므로 여기서 맑스는 정치경제학과 똑같은 개인주의(Individualismus)로부터 출발한다. 사회는 직접적으로는 개인이라는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구성되므로 이러한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파악될 수밖에 없다.(주47-) 그런데 정치경제학이 현존 사회를 인간 사회로 파악했던 반면에, 맑스는 인간 유적 존재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바탕으로 해서 현존 사회가 다만 이러한 소외의 객관화라는 사실, 즉 (현존 사회의) 인간이 참된 사회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립한다.(주48-)
이러한 참된 사회성은 공산주의를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공산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
“인간의 자기소외로서의 사적 소유의 긍정적 해소(지양)로서 공산주의, 따라서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인간 존재의 현실적 전유(소유)로서의 공산주의 ; 그러므로 완전히 지금까지의 모든 부의 발전을 의식하고 또 그 안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인간, 즉 인간적인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로서의 공산주의.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연주의 = 인간주의, 완전한 인간주의 = 자연주의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순의 참된 해소이며, 현존재와 존재(또는 본질) 사이, 대상화와 자기 확증 사이, 자유와 필연성 사이, 개인과 (인간) 유 사이의 진정한 해소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자기 자신을 이러한 해결로 알고 있다.”(Ⅰ.2/263; EB 1/536)
여기에서 맑스의 존재개념과 소외개념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계기들이 모여 있음을 보게 된다. 현실성은 관념적인 인간 존재와 대조되는데, 여기서는 현존재와 존재(또는 본질)의 불일치, 모순, 현실적 존재의 소외가 확정된다. 이러한 모순은 공산주의에서 해소된다.(주49-)
맑스가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존재로 “복귀”(주50-)하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에 관해 말할 때, 인간이 여전히 자신의 인간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함축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근원적인 통일의 분리, 상실, 심지어 자신의 고유하고 참된 본질(또는 존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분리, 상실에 다름 아닌 소외의 개념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주51-) 상실로서 하나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그러나 항상 이미 이런 상실 앞에 있는 다른 하나의 상태를 가정하게 된다. 물론 맑스는 소외되지 않는 국면으로서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비추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물론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이런 근원적인 상태의 지위(상)에 관한 문제를 낳는다.(주52-)
여기에서는 <가치에 관한 과학> 중 2부 <맑스의 과학 혁명> 3장 <비판으로서 인간학: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5절의 <인간존재, 기원과 유토피아>를 번역하였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3>으로 계속해서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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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맑스의 과학적 혁명 #
@ 제3장. 비판으로서의 인간학 : 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
** 5절.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전개되었던 맑스의 인간 존재 개념은 1844년 국민경제학 비판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존재 개념이 『요강』과 『자본』에서 나타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구성되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맑스 이론 발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맑스가 유적 존재의 대상성을 대상적 생산으로 파악하는 한에서, 맑스의 인간 유적 존재 개념이 포이어바흐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간략하게 대략적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반해서 포이어바흐에게는 이성, 의지, 정서가 가장 중요한 인간 존재 개념 규정이다(Feuerbach 1841, 39쪽). 따라서 포이어바흐는 종교에서 비밀스러운 인간 존재가 명백히 드러나는 인간 소외의 결정적 형태를 보았다.(주37-) 이에 반해서 맑스의 세 번째 공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은 산업의 역사와 산업에 의해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인간 심리학인, 즉 지금까지 인간 존재의 연관성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항상 외적인 유용성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파악되었던 심리학인 인간 존재 능력이 펼쳐진 책을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운동하는 소외 속에서- 오로지 인간의 보편적 현존재, 즉 종교, 또는 추상적-보편적 인간 존재의 역사를 인간 존재 능력의 실현과 인간의 유적 행위로서의 정치학, 예술, 문학 등으로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산업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인간의 대상화 능력을 감각적이고 낯설며 유용한 대상의 형태로, 즉 소외의 형태로 가지고 있다.”(Ⅰ.2/271; EB 1/542f)
또한 산업이 “인간과 자연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학 사이의 현실적인 역사적 관계”(Ⅰ.2/272; EB 1/543, Herv. von mir)인 한에서, 역사성은 인간 유적 존재의 이러한 대상성 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른바 전체 세계사는 인간의 노동에 의한 인간의 생산, 인간을 위한 자연의 생성에 다름 아니다.”(Ⅰ.2/274; EB 1/546)
맑스는 여기서 노동이 『정신 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장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헤겔의 노동개념의 본질적인 계기를 받아들인다. 거기서 헤겔은 주인을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는 노예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바로 자신의 본성의 우월함과 사유 능력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따라서 노동 생산물에 대한 직관 속에서, 즉 자신의 창조물 속에서 노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주38-) 맑스에게서 인간 유적 존재의 현실화는 자신의 창작물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생산력의 전개와 역사성으로서의 대상성이 포이어바흐의 존재 규정들을 넘어서고 있지만, 인간 존재의 감성(Sinnlichkeit)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맑스는 사적 소유의 긍정적인 해소가 인간 삶의 감각적 전유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
“사적 소유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소유할 때, 그 대상은 비로소 우리의 대상이 된다는 정도로 우리를 어리석고 일면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감각을 대신해서 이러한 감각의 단순한 소외, 즉 소유라는 감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 따라서 사적 소유의 해소는 모든 인간의 감각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이다.”(Ⅰ.2/268f; EB 1/540)(주-40)
(지금 인터내셔널가 모음을 듣고 있다.
올릴 수 있어서 같이 들으면 좋으련만...
인터내셔널가와 영화 <귀향>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
어제 밤 늦게(?, 8시50분 시작) 씨네 큐브에서 여친과 둘이서 이 영화를 보았다.
감독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인데, 이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다.
아니다. <그녀에게>라는 영화를 시디로 본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시디 찾아서 다시 봐야겠다.
늦게 영화 보고 나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냥 내가 본 영화의 느낌을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이 영화 <귀향>은 <안토니아스 라인>과 좀 비슷하게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안토니아스 라인>과 <귀향>은 가부장제의 살인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양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화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새로운 삶의 양식은 바로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의 삶을 통해
보편적인 유적 인간의 삶이 진실로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보편적인 유적 인간의 삶은 개별적이고 부수적인 삶의 영역을 보편적인 삶의
영역으로, 사회적인 삶의 영역으로 만드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귀향>에서 유령으로서 살아온 어머니, 그 어머니의 딸 라이문다와 쏠레,
그리고 라이문다의 딸 파울라, 그리고 아우구스티나와 다른 여성들...
이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언제나 개별적이고 부차적인 존재로
언제나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가부장제의 상징인 남편(아버지)을 살해(?)함으로써
가부장제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초를 마련한다.
그 기초는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귀향>에서는 바로 <모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귀향>에서 모성은 가부장제에서 신비화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간, 즉 보편적인 유적 인간을 생산해 내는
여성노동의 현실적이고 역사적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모성을 지닌 여성은 그 자체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을 생산해 내는 보편성과 유적 인간 본성을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서 현실화시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주체라고 생각한다.
<귀향>에서 어머니, 라이문다와 쏠레, 파울라, 아우구스티나 등의 여성들은
바로 자기 자신 안의 보편성과 유적 인간 본성을 가부장을 살해하고 공범이
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확인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서로에게서 인간임을 확증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들에게는 어떠한 일도 개별적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공동체적인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고 생각해 본 것을 내 맘대로 적어 보았다.
어쩜 또 오바하고 있는 걸까^^...
덧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여러 여성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성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azrael님의 [꿈] 에 관련된 글.
고양이 님의 꿈 내용과는 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트랙백을 걸어 본다.
어제 밤에 꿈을 꿨드랬다.
그런데 너무 쪽 팔리는 꿈이었다, 기분도 좀 거시기하고...
새벽에 깨어나서 너무 창피해서 그 이후로 잠도 못 잤다.
지금부터 꿈 얘기...
꿈의 핵심적 내용은 내가 공금을 횡령해서 사적인 데에
내 마음대로 썼다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학회의 분과(맑스분과)에서 난 분과장으로 있다.
(명색이 분과장이긴 하지만, 지금은 거의 활동을 쉬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학회에서 분과 지원금으로 한 달에 30만 원씩 지원을 해 주는데,
내가 그걸 사적으로 내 개인을 위해서 썼다는 거다.
(이건 꿈 속에서 그렇다는 얘기고, 사실은 전혀 그런 것이 없다!!!)
그런데 내가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나를 가장 잘 알고 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 중 한 사람이
나를 엄청나게 몰아부쳤다.
(오늘 그 선배랑 강의 끝나고 점심 같이 했는데,
꿈 얘기를 할까 하다가 창피해서 관뒀다. 나중에 함 해 봐야겠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절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나를 잘 아는 형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항변했다.
그리고서 내 통장을 조사해 보면 알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 선배는 막무가내였다.
너 같은 놈은 아예 학회에서 활동을 못 하게 해야 한다면서,
윽박지르면서 주먹을 올려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서는 학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공개적인 자리(학회 심포지움 자리였던 것 같다)에서
나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이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는 것 같았다.
더더욱이 기가 막힌 것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를 잘 아는 선후배들까지 나를 위해 변호를 해 주기는커녕
모두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쌩을 깠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질질 짤면서 사람들에게 말도 못하고...
그 비난의 소리와 눈초리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그러다가 잠이 깼다.
아~~~! 이런 개떡 같은 꿈이 있나!!!
그런데 더 개떡 같은 일은 내가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질질 짰다는 것이다.
왜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싸움할 생각을 못했는가!!!
뷰웅신...
왜 질질 짤고 난리였냤 말이닷!!!
아~~~...
쪽팔려 죽겠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뚝섬 역쯤 왔을까...
한 어머니와 아이(아들)이 지하철 문이 열지자마자
쫓기듯이 들어와서는 노약자 석에 앉았다.
그 노약자 석에는 나이 지긋하신 중년 부인이 중간에 앉아 계셨는데,
그 아이가 노약자 석에 앉자마자 그 중년부인을 마구 밀쳐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엄마를 옆에 앉히기 위해서...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 아이의 행동을 말리기 시작하고,
중년 부인께서는 어찌 할 바를 모르시다가 마주 보이는 노약자 석에 앉게 되셨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그 중년 부인께 미안하다는 눈웃음을 보내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 아이가 좀 아픈 아이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는데, 중년 부인께 하는 행동을 보고
그 아이가 아프고 있겠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아마도 자폐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자폐증이 아니라면 다른 병일 수도...
(보통 자폐증 아이들은 엄청나게 소리를 지르던데,
그 아이는 소리는 지르지 않더라...)
아마도 그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학교로 등교시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어머니도 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께서는 주위 사람들을 굉장히 의식하고서
끊임없이 미안한 눈웃음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아이가 아픔으로 해서 그 어머니께서도 아프신 것 아닌지 하는 생각에...
오전 내내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 아이는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쓸데없이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면서
산만한 행동을 보이는 병을 같이 앓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아마도 모르겠지...
그러다가 자신의 병이 다 나아서 알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하는 생각...
그 어머니께서는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다가 만일 알게 된다면...
그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멍이 들고 새까맣게 타들어갈지 하는 생각...
그 두 사람의 상처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치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날도 추운데, 더더욱 추운 아침이었다...
뱀다리 : 물론 두 사람 다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잘못 보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눈빛이나 분위기로 봐서는...
내 자신이 너무 무능하다는 것을 절감한 너무도 추운 아침...
잘 살아야 할 텐데...
<정치학 비판 : 인간해방과 혁명 1>에 이어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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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법철학 비판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오히려 “해결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제공하는 과제, 즉 실천”(Ⅰ.2/177; 1/385)(주22-)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무기의 비판”이 요구된다면, 이러한 혁명적 실천의 사회적인 담지자(주체)가 누구이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나타난다. 맑스는 우선 한 계급의 계급이해가 보편적 이해로 사칭되는 상황에 그 계급이 놓여 있을 때 부르주아 사회의 그 한 계급이 해방된다는 것에, 정치적이지만 단지 “부분적인” 혁명이 기인한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볼 때 독일에서는 부르주아의 어떠한 계급도 결코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독일에서 단지 정치적이고 부분적인 혁명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을 때라도, “근본적인 혁명”, 즉 “보편적인 인간 해방”이 가능할 수도 있다(Ⅰ.2/179; 1/388).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에 놓여 있다. 즉
“부르주아 사회의 한 계급이지만 그 사회의 어떤 한 계급일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계급의 형성에, 모든 신분을 해소하는 하나의 신분의 형성에, 자신의 보편적 고통을 통해 보편적 특성을 가지며…… 한마디로 인간의 완전한 상실이며, 따라서 인간의 재획득을 통해서만 인간 자신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국면의 형성에. 하나의 특수한 신분으로서 사회를 이렇게 해소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Ⅰ.2/181f; 1/390)
맑스는 이제 더 이상 『라인 신문』이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처럼 무질서하게 “무장된” 계급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힘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맑스는 이 개념을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한다)에 관해 말한다. 또한 맑스는 더 이상 『유대인 문제』에서처럼 단순한 정치적 해방의 요구보다는 인간 해방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인다. 맑스는 이제 인간 해방은 오로지 근본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자신으로 하여금 결국에 공산주의의 지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이러한 혁명의 역사적 담지자(주체)로 본다. 이러한 근본적인 혁명에서는 경제적 관계의 혁명화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나타난 경제적 분석은 바로 당연한 귀결로 나타난다.
맑스는 이제 또한 더 이상 이성적 인간성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위치 때문에 혁명에 적합할 수 있는 한 계급에 관계한다. 그러나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위치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의 잠재력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의 도움을 받아 사변적으로만 확립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으로 이끌 수밖에 없는, 현실과 인간 존재 사이의 모순이 있다. “고통 받는”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모순을 바로 느끼는 반면에, 철학은 이러한 모순을 모순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결합은 혁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주23-)
맑스가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해방의 역사적 주체를 본다는 사실에 대한 원인을 대개 파리에서 독일과 프랑스 노동자의 단결을 맑스가 보았다는 데서 찾는다.(주24-) 크라츠(Kratz)는 물론 맑스가 사회적 변혁의 담지자(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경험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맑스는 이러한 경험을 이론적인 딜레마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마지막으로는 루게와의 편지 교환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식개혁”, 따라서 철학적 비판을 통해 도달한 이론적 통찰을 실천적-혁명적 행위의 전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분명히 처음에는 철학적 반성을 토대로 행위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사유하며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감각적이며 경험적인 존재로서 파악하는 포이어바흐의 감각주의는 또 다시 (맑스에게-역자 삽입)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제 소외는 모든 인간에게 관계되는, 즉 사유의 영역뿐만 아니라 물질적 현존과 관계되는 소외로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또한 역시 비 이론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소외를 경험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소외 상태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영역에 있게 된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맑스가 무엇보다도 먼저 프롤레타리아트를 “고통 받는” 계급으로 특징짓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파악의 직접적인 결과이다(Kratz 1979, 173쪽 이하).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을 통해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으며 공산주의로 넘어갈 수 있었다. 비록 박사학위논문 이후에 그의 이론적 개념의 개별적이고 실질적인 계기들이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그 밑바탕에 놓여 있는 구조는 동일한 것으로 남게 된다 : 현실성은 자신에 대립해 서 있는 (인간)존재(본질)와 비교되어 비판된다. 이러한 비판이 우선 오로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일어난다면, 존재와 현실성의 (이분법적 대립의) 붕괴는 이제 혁명을 통해서만 지양되는 필연적인 소외로 파악된다. 맑스에 의해 암시된 인간 존재의 사회성은 포이어바흐가 인간의 유적 존재에 부여한 실질적인 내용물을 넘어서고 그 내용물을 제거해 버린다. 그런데 맑스가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유적 존재의 개념에 어떤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맑스의 유적 존재가 비판의 척도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주체라는 개념 규정에도 사용된다는 사실 속에서 나타난다 : 보통 인간 존재에 대해 낯선(소외된) 이러한 계급은 근본적인 혁명의 담지자(주체)로 될 수밖에 없다.(주25-) 따라서 맑스의 경제적 이론과의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되는 영역의 경계가 표시된다 : 그 영역은 포이어바흐 인간학의 추론적 구조(diskursive Struktu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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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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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 어렵고 잼없슴돠~! 잼있는 글을 올려주삼~! ㅋㅋ부가 정보
곰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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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죄송함다!!! 잼있는 글을 올리도록 노력하겠삼^^...부가 정보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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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스머프님... 좀 어렵긴 해도, 잘 읽어보시면 무지 재밌답니다. ^^;;(1) 두번째 문단: "신성가족"의 제목은 다음과 같이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성가족 또는 브루노 바우어와 그 동료들에 대한 비판적 비판의 비판> --> <신성가족 또는 브루노 바우어와 그 동료들의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2) 다섯번째 문단: "새로운 요소는 이념적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 "새로운 요소는 이념과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 그 다음 문장에서... "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는 “역사”와 “이념”의 관념적인 자립화..." --> "“역사” 및 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는 “이념”의 관념적인 자립화" (즉 여기서 자립화되는 것은 "역사"와 "이념"이며, 다시 "이념"="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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