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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우리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에서 독립한다.
이번 주에 방을 알아보고 그제 계약을 했다.
그리고 독립하겠다고 우리 어머님께 말씀 드린 것은 오늘 아침에서였다.
그런데 어머님의 반응이 의외로 담담하시더라.
내 예상대로라면 <왜 편한 집을 놔두고 나가서 사서 고생하려 하느냐!>,
<월세면 그 월세가 얼마나 아까운지 아느냐!>, <남의 집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너처럼 게으른 녀석이 집 나가면 몸이나 망치지 않겠느냐!> 등등 시시콜콜하게
뭐라 말씀하셨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냐, 좀 있다 나가면 돈 마련해서 전세라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이 말씀이 전부였다.
그러시곤 돌아누우셔서 짐짓 잠을 청하시는 듯하시는 거다.
많이 서운하셨던 것 가타는 생각이 들더라.
평생 도움 안 되는 남편, 자식 새끼 뼈빠지게 뒷바라지했더니
그렇게 지 갈길 가겠다고 하니...
이젠 혼자구나라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닌지...
학교 오면서 마음이 참 아프고 안 좋았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께서 내가 태어날 때쯤 나셨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 어머니 나이(68세)쯤 되신 어떤 어머니라도 마찬가지일 게다.)
우리 어머니 젊으셨을 때(처녀였을 때) 인근 동네에서 소문난 글쟁이였단다.
동네 여인들의 제문은 어머니께서 도맡아 쓰셨다고 한다.
그 제문이 하도 구구절절하여 그 제문을 읽으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처녀 때 쓰신 제문 우리 큰 외숙모님께서 아직도 가지고 계시면서 울적할 때 커내서 읽어보신단다.
하긴 얼마 전에 핸폰 문자 보내는 법 가르쳐 주었더랬다.
그 이후에 가끔씩 문자를 보내시는데, 그 내용이 참 내 마음을 울렸더랬다.
<아들아오늘은어찌지냈느냐밤이깊어지니니가보고싶구나일찍왔으면좋겠구나엄마가>
뭐 이런 내용들이었다(물론 철자법도 틀린 글이긴 했지만 말이다).
언젠가 어머니께 살아오신 내용을 글로 쓰실 생각이 없으시냐고 여쭤 봤더니
그냥 웃으시기만 하더라.
<이 나이 들어서 글은 무신...>
참 쓸쓸한 웃음이었더랬다.
그때 공책, 펜 사 드리고 글을 쓰도록 하셨으면 살아오시면서 쌓인 한이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많이 들기도 한다.
오늘 드어가서 다시 권유해 보아야겠다.
(만일 글을 쓰시면 어머님께 동의를 구해서 블로그에 올려볼까나^^...)
이렇게 우리 어머니가 보인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집을 나오려 하니 참 착잡하다.
이제 조금씩 서로 간에 물길이 트려고 할 때...
우리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한 건 전적으로 내 여친 때문이다.
내 여친께 참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다.
여친이 맛있는 거 사 줄 때 꼬옥 어머니가 생각나고,
그래서 안 먹고 어머님 갖다 드리곤 했는데...
이젠 가져다 드리기 쉽지 않게 됐다.
이젠 집에 별로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집을 나오는 거니까...
하여간 한켠 마음이 먹먹하고 아프고 답답하다.
오늘 집에 들어갈 때 우리 어머니 좋아하시는 초밥 사 가지고 들어가야겠다.
자꾸 눈물 나려 한다.
살면서 울 엄니께 많이도 참 못되게 굴었다.
후우...
물론 이미 추상 노동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한 모순적인 것의 양립(추상노동과 구체노동-옮긴이)이 발견된다.(주2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 제1판에서 맑스는 여전히 가능한 한 추상노동을 단순하고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노동과 동일시한다.(주26-)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가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지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Ⅱ.2/109; 13/17) 게다가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노동들 그 자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를 띠는 단순한 노동, 요컨대 질적으로 동일하며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추상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추상이다.(……) 보편적 인간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평균노동 속에 존재하며 인간 근육, 신경, 두뇌 등의 특정한 생산적 지출이다.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적응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순한 노동이다…… 이 단순한 노동은 사람들이 모든 통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한 한 모든 노동을 형성한다.”(Ⅱ.2/110; 13/18)
맑스는 여기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추상들을 서로 동일시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좀더 기계화된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추상으로서 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추상, 특수한 성질을 지닌 노동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대체, 따라서 특정한 한 종류의 노동지출과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 노동”, 즉 특정한 종류의 노동지출이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노동.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결코 추상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실체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본』 제1판에서도,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도 동시에 단순한 평균노동으로 측정된다(Ⅱ.5/19f). “추상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고찰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Ⅱ.5/31). 그러고 나서 우선 제2판에서 단순노동과 추상노동이 엄밀하게 구분되었고 처음부터 가치실체로서의 추상 노동으로 시작하였다.(주27-) 물론 두 개의 첫 소절에서 추상 노동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주의적인” 것을 많이 연상하게 한다. 생산적 활동의 특정한 성격이 추상되고 난 후에 그 추상 안에 오로지 생산적 활동이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지출”(Ⅱ.5/24; 23/58)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후에, 맑스는 (제1판과 대비되어 새롭게 파악된)두 번째 소절의 끝에서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또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속성 안에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Ⅱ.6/79; 23/61)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치 “추상 노동”이 노동의 자연적 속성에 해당하고, 노동의 가장 보편적인 생리학적 규정들, 즉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품 생산에서만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규정들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추상성이 결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속성이라는 사실, 즉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질적인) 상이함에 대한 추상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자본』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주29-)
이러한 것은 나에게 물론 하나의 정식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맑스는 자신의 담론을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으로 자신의 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서 맑스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주30-) 여기에서 우선 고전 정치경제학이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를 구별했지만 상품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추상 노동의 생리학적 파악은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 없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수행되지 못한 구별이 보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구별을 통하여서는 노동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주31-) 추상 노동이 사실상 노동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규정으로 파악될 때에 비로소 고전 정치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다.
추상 노동
맑스는 상품교환 분석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으로 나아간다:
“비로소 상품 교환 속에서 노동생산물은 그 생산물의 감각적이고 다양한 사용대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동등한 가치대상성을 가지게 된다. (……) 이러한 순간에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은 사실상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적 노동은 한편으로 특정한 유용 노동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총노동의 지절로서, 즉 사회적인 노동 분업의 자연적인 시스템의 지절로서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특수하고 유용한 사적 노동이 각각의 다른 유용한 방식의 사적 노동과 교환될 수 있고 따라서 그 노동들이 동등해지는 한에서, 사적 노동은 바로 그 사적 노동의 생산자의 다양한 욕구만을 충족시킨다.” (Ⅱ.6/104; 23/87, Herv. v. mir)
노동이 분업화된 모든 사회에서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개인의 노동은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부분이며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서 이러한 사회적 성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개별적인 사적 노동이 다른 사적 노동과 동등한 것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사적 노동은 서로가 동등하게 상품 생산에 대해 더 넓어진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따라서 상품생산에 대해서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사실이 통용된다;
“서로 독립적인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인간 노동이라는 동등성 속에 있으며 또한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Ⅱ.6/105; 23/88, Herv. v. mir)
맑스가 첫 번째 인용문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gleiche Geltung)이 무엇으로 실현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이 사적 노동을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좀더 확대된 물음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이러한 동등성이 모든 사적 노동을 서로 동등하게 하면서도 독립적으로 만들지만 그 사적 노동들에 귀속해 있는 하나의 속성에 기인하는가 또는 사적 노동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 문제인가? 가치 분석과 상품의 물신적 특성에 관한 절의 문맥 속에서 맑스는 명백하게 두 가지 가능한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 교환에서 사적 노동들의 동등성은 결코 개별적인 사적 노동들에 곧바로 귀속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다른 사적 노동들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다. 또한 자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 동등성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사람들은 추상적 노동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날카롭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전체 하늘 아래서의 모든(toto coelo) 서로 다른 노동의 동등성은 그 노동들의 현실적인 비동등성(Ungleichheit)을 추상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노동들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서,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Ⅱ.6/104; 23/87f)
이런 한에서 추상적인 노동은 교환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규정이 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보충판……(Ergänzungen……)에서 맑스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글을 다음에 나오는(Ⅱ.7/55와 비교해 보면, 역시 프랑스 번역판에도 포함되어 있는) 글을 부가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교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서로 다른 구체적인 사적 노동을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물로 환원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노동의 생산물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교환을 통해서만 완수된다.” (Ⅱ.6/41)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추상”이 교환 행위자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하다 :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행할 뿐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지적인 추상과정이 문제가 아니다; 추상은 오히려 교환 행위자들의 교환행위를 통해서 수행된다.(주24-)
맑스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교역의 관점(그리고 추상의 공정)에 기초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서도 답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적 장과 결별하게 된다. 따라서 맑스는 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한에서, 고전경제학 어디에서도 만들지 못한 노동 내에서의 차이가 “정치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Ⅱ.5/22; 23/56)이라는 사실을 정당하게 주장한다.
아래의 내용은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한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부족하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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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1장 1절-4절 #
1. 기계(machine, 제작, 생산)
- 유기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 변증법적 통일의 반대 개념이다.
- 비유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불어로는 ça이고, 독일어로는 Es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들은 프로이트 개념인 id를 가리킨다.
- 기계는 언제나 분리되고 새로이 구성될 수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요소들의 기계적(비유기적) 구성체이다.
-이런 면에서 기계는 고대 원자론에서 원자들(더 나아가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to apeiron(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들, 무한정자))의 구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또한 이 기계는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이기도 하다.
2. 욕망
- 이러한 기계를 생산하고, 연결되고 연접되는 기계들의 기계를 생산하게 하는 힘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 여기서 생산은 근대의 의식적 주체로서의 Ich(나)가 아니라 욕망이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에게서 욕망은 결핍, 결여, 필요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욕망은 들뢰즈에게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chaos(카오스) 내에서의 흐름일 따름이다.
- 그러므로 들뢰즈는 프랑스 68혁명을 맑스의 거시적 혁명인 정치경제적 혁명(결여를 메꾸는 반결여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으로 본다. 이 68혁명은 결여-반결여를 넘어서는 혁명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곧 <기관 없는 신체들>이다.
- <기관 없는 신체들>은 루소의 자연인(원초적 자연인)처럼 어떠한 것도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욕망으로부터 이러한 기계, 신체 없는 기관은 어떻게 생산되는 것인가?
- 이 문제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이 생산 과정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은 우연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 그렇지만 이러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들뢰즈의 욕망 체계는 신화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3. 이전의 정신분석학의 긍정과 한계
- 긍정 : 무의식의 측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한계 : 이 무의식의 측면을 개인적, 성적인 측면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무의식의 개인적, 성적인 측면을 사회 전체 측면으로 확대시켰다.
- 들뢰즈는 이전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 치료의 목적을 사회의 통합으로 보았는데, 이는 제국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사회의 통합은 결국 정신병자를 건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들뢰즈의 관계 방식
- 들뢰즈의 관계 방식은 <종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의 방식은 변증법적 관계 방식과 다른 비유기적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 연결적(접속적) 종합 --> 이접적 종합 --> 연접적 종합
- 연결적(접속적) 종합은 und(또, ~그리고)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방식은 최초로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를 들뢰즈는 <생산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리비도이다.
- 이접적 종합은 entweder ~ or(~이거나 ~이거나)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종합은 욕망이라는 흐름의 매끄러운 표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등록, 기입되는 종합이다. 등록, 기입은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등록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누멘(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연접적 종합은 so~ daß~(그래서 ~이다)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인데, 이 종합에서 비로소 주체(그래서 나는 ~이다)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이접적 종합에서 파여진 홈을 메꾸면서 이루어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일시적, 분열적, 유목적 주체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의 생산을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볼룸타스(자발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이 주체는 소비의 선택을 통해서 주체로서의 자기를 인식(의식)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주체는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주체이다.
- 그런데 이러한 종합 형식의 순서는 『자본』에서의 가치형태의 전개 순서와 매우 유사하다. 연결적 종합은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와 닮아 있으며, 이접적 종합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닮아 있고, 연접적 종합은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와 닮아 있다.
- 여기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처음의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관계 방식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사용가치)에 따라 흘러간다. 바로 이러한 것에 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맑스에게서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용가치 자체에는 어떤 관계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상품소유자로서의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이접적 종합과 연접적 종합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관계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 그 자체는 모순이 없는 매끄러운 자본의 표면을 원한다. 그런데 자본의 모순에 따라 자본의 저항 주체가 자본의 운동 과정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는 자본에 의해 호명되고 또 다시 자본에 의해 자본 속으로 포획, 포섭된다. 자본은 소비를 통한 자본의 물신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홈을 메운다. 이는 또한 그람시의 <동의>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블로그에 글을 쓴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게으름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과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자기 검열...
지금 생각해 보면 두려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산 것 같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억척스럽게 그리워하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일종의 편집증을 보인 것 같고...
그래서 꽃다운 청춘(?)에 연애를 못해 본 것도 같고^^...
갑자기 두려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계기였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그저 내 삶이 그냥 그저 그렇게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일까?
어쩜 이런 생각하게 된 것도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쨌든.
두려움은 내 실존의 왜소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왜소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결국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것이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고...
두려움은 삶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삶에 생채기를 내고 생채기에 또 생채기를 내면서 결국 자신을 증오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벽을 쌓게 되고 자기 앞 마당에 봄이 오지 않게 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도록 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두려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맞짱을 떠야 하는 방법밖엔 없다.
두려움을 강철 같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이젠 두려움을 없애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 가자고 다짐해 본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바로 실천활동(Praxis)이 아닐지...
또한 자기변혁으로서의 혁명이 아닐지...
곰탱이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올해의 삶의 목표^^....
두려움! 다이다이로 맞짱 한번 떠 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뭐*^^*...
2월 중구난방에 대해서 말씀 드릴게요^^.
1. 주제 - 에이즈에 관한 이야기.
2월 중구난방 주제는 미류 님과 함께 하는 <에이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 때와 곳
때 : 2월 7일(수요일) 늦은 7시
곳 : 인권사랑방 사무실
3. 방식
몇 가지 키워드(빈곤, 여성, 동성애, 의약품 등)를 사용해서
에이즈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런 키워드를 아우르는 총체적 시각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에이즈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시간이 나면 해외 에이즈 운동 단체 CD를 같이 볼 수도 있습니다.
** 1월과 마찬가지로 2월 중구난방에 많이 같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말> 2월 7일은 미류 님께서 원하시는 날짜입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날 시간을 빼셔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약도를 올립니다^^. 그런데 복사를 해 와서 약도를 올리다 보니, 인권사랑방 집들이 기사가 함께 딸려 왔네요^^. 어떻게 지우고 편집하는지를 잘 몰라서 일단 이대로 올릴게요^^. 미안합니다^^.
| 충정로 사무실 집들이에 초대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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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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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석과 관련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잡설을 늘어놓을까 한다.
대체로 보석은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투명한 것이 더 값이 나간다.
불순물이 들어간 것은 순도가 떨어진다고 해서 별로 쳐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값 비싼 투명한 보석보다는 불순물이 들어간 보석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불순물의 특성에 따라 보석의 색깔이 각기 다른 빛을 내며 신비함을 더해 준다.
보석과 관련해서 사람을 생각해 보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사람보다는
불순물이 섞인 사람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일까?
불순물이 섞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순물이 들어간 사람은 까칠하지 않은 사람이고,
불순물이 들어간 사람은 까칠하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또한 불순물이 들어간 사람은 개성이 있는 사람이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개성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물론 불순물이 어떻게 섞일 수 있을까 하는 관계 구조가 더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살짝 빼 놓고 생각하려고 한다. 왜냐고 묻지 마시길...^^
왜냐하면 재미 없을 것 같아서^^... )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독야청청을 꿈꾸는 것인데, 사실상 이는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라고 외치는 것은 불쌍한 동어반복일 따름이지 않을까?
잘난 척을 좀 하자면(퍼버퍽!!!), 그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 개인일 따름이다.
이러한 개인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인일 따름이다.
우리는 맑스의 말처럼 사회적 개인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순물이 가득 섞인 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이 바로 <유적> 개인이며,
바로 인간으로서의 개인이다.
불순물을 섞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길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이 아닐까^^?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불순물의 인간관계...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관계이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인간관계가 아닐까?
불순물이 가득한 인간관계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붉은 사랑께서 말씀하신 <인간관계가 바뀌어야 세상이 빠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혁명은 바로 불순물에 있는 것은 아닐지...
믿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3. 마마상
앞에서 연분홍치마가 <마마상>이라는 다큐를 만드셨다고 했는데, 마마상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마상이란 말은 중간포주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성노동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성노동자들을 관리해 주고 성노동과 관련한 여러 기본적인 지식과 테크닉을 교육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지촌과 같은 곳에 이주 여성 성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답니다. 그래서 이 이주 여성 성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성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국내 여성들이 마마상을 하고 있답니다. 이 국내 여성들은 기지촌 자체가 삶과 주거 공간이 돼 버렸고 다른 곳에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분들이라고 합니다.
마마는 엄마를 뜻하고 상이라는 것은 일본말로 아무개 씨를 지칭하는 것인데 어원적으로 이 두 말이 합쳐진 것이 아닌가 한다더군요.
(근데 앞에서는 예삿말 투였다가 지금은 높임말 투네요. 제가 지금 몸이 아픈 여친한테 가봐야해서 정신이 없나봅니다. 이해해 주세요^^)
4. 10대 여성의 성 권리
10대 여성의 성 권리와 관련해서는 10대의 성 권리, 특히 여성의 성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러한 권리와 더불어 10대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권 또는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씀하셨고,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참 공감을 했더랬습니다.
** 제가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많이 미흡하리라 생각됩니다. 여친 때문에 맘도 급하고 해서 여기서 어제의 중구난방 이야기를 일단(!)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5. 다음 번 중구난방 일정
날짜 : 2007년 2월 6,7,8(수,목,금) 중 하루 (정확한 시각은 아직 미정^^)
주제 : 모두 3가지인데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 같네요^^.
1) 에이즈에 관한 문제(미류 님 활동과 관련)
2) 성 전환자에 관한 문제(초보좌파 님 활동과 관련)
3) 청소년 인권에 관한 문제.
이상 3가지인데, 아마도 미류 님과 관련된 1)번 주제가 채택될 가능성이 낳을 것 같다는 개인적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중구난방 많이 응원해 주시고, 매니매니 참가해 주셔용*^^*...
어제 저녁 7시 반부터 <연분홍치마>에서 성적소수문화환경에 대하여 중구난방을 하였다.
중구난방에 참여한 블로거들로는 먼저 리우스, re, 스머프, 초보좌파, 에밀리오, 스캔플리즈, 달군, 곰탱이이다. 블로거가 아닌 분들 중에는 똘망 선생님, 두발 자유화와 관련하여 일인 시위를 하였던 이름없음의 고등학생이 있었다.
7시 반부터 시작해서 11 정도까지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중구난방이 계속되었다. 연분홍치마 사무실은 일반주택이었는데, 참 아늑하였다. 서로 무릎을 맞대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분위기가 참 따뜻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중구난방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구난방의 앞날이 아주 맑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보게 하였다.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중구난방만을 위한 팀 블로그를 만들자는 얘기도 오고갔다.
어제 한 얘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올려보려 한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아마도 리우스께서 블로그에 올리실 거라 생각한다. *^^*...
1. 연분홍치마
연분홍치마라는 활동공간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인데,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여성주의 시각과 감수성으로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성적 감수성을 바꿔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어제 자료집을 5,000원 주고 샀으면 자세한 소개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참으로 아쉽다^^).
왜 연분홍치마로 이름을 정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해 여기 계신 활동가들께서는 그냥 이쪽 활동을 고민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분홍치마 어떻겠냐고 말이 나왔다가 기왕이면 연분홍이라는 색깔이 더 예쁠 것(?) 같다는 것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여기서 활동하시는 활동가들은 모두 6분인데, 중구난방에서는 3분이 같이 자리를 하였다).
그리고 연분홍치마 활동의 주요 매개 수단은 영상 미디어라고 한다. 얼마 전에는 <마마상>이라는 다큐를 만드셨는데(마마상의 이름에 대해서는 좀 있다 설명하고자 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의 공간과 역사를 담담하게 그린 영화라 한다. 지금은 국제 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수 있는 미디어 교육을 당진에서 하고 계신다고 한다. 앞으로는 10대 여성의 성과 관련한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2. 성적 소수와 성적 소수자의 차이
앞에서 연분홍치마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이라고 하였는데, 왜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 성적 소수(여기서 잠깐 썰렁한(?) 우스개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성적이 나쁜 소수를 위한 모임이 아니냐고 농담을 하곤 했단다^^)인가에 대해 설명하셨다.
성적 소수자라고 하면 어떤 집단을 떠올리게 되고, 소수자 집단은 여럿인데 어떤 한 특정 소수자 집단의 이해를 위해 활동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성적 소수자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애초의 모임 목적과 성격을 일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소수 집단을 아우르는 메카니즘(구조)를 통칭하기 위해 <성적 소수>라고 했단다.
사실 소수라고 한다면 이건 단순히 숫자상의 소수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속에서 피지배의 위치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소수를 개별화시켜 분할 통치하고자 하는 것이 자본의 기본 통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글이 날라갈까 봐서 다음으로 계속 합니다^^. 맘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날라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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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글솜씨가 참으로 아깝기만 하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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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문턱도 못가보신 울 어머니도 이래 저래 비상한 재조를 가지셨더라구요. 그런데 효도는 커녕 지금까지 속만 썩혀들이고 있으니... ㅠ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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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글을 보고싶다는...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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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 참으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아마 모든 어머님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행인> 아~~~...ㅠ...(완전 동감)
풀소리> 언제 보여 드릴 날이 있을 거예요^^. 참 시험 합격하셨다는 소릴 들었는데, 축하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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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독립인거 같은데, 그걸로 무슨불효가 되겠어요? 독립해 보면 더 어머니한테 잘 하실 거 같아요..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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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찡~ 하네요...담은, 독립해도 불효, 안해도 불효... ㅎㅎ 독립안하면 더 불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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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오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산오리님^^.리우스> 오랜만이네요^^. 진작 독립했다면 하는 생각도 있어요^^ 이젠 열심히 더 잘 살아야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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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거 간만에 곰탱이님 불로그에... ^^;;이거 번역 올라온 것도 몰랐습니다. 크... 저야말로 정말정말 죄송해요 -_-;
저도 가끔 어머니한테 글좀 써보라고 권유(?)를 하는데... 저는 일단, 제 어릴적 얘기가 알고싶으니 그걸 써달라고 했더랬죠. 그랬더니 정말 써주셨어요 ㅎㅎ 곰탱이님도 이런 방법을 한번 써보심이? 아무래도 당신 이야기는 좀 어색해 하실테니... 일단 곰탱이님 어릴적 얘기로 시작을 한다음 가속이 붙으면!?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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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정말로 그래야 할까봐요^^. 어릴 적 얘기는 간간이 듣기는 했는데.. 하여간 써 달라고 해 봐야겠습니다^^. 종종 들러 주세요^^..ㅋㅋ..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