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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블로그에 글을 쓴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게으름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과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자기 검열...

 

지금 생각해 보면 두려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산 것 같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억척스럽게 그리워하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일종의 편집증을 보인 것 같고...

그래서 꽃다운 청춘(?)에 연애를 못해 본 것도 같고^^...

 

갑자기 두려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계기였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그저 내 삶이 그냥 그저 그렇게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일까?

어쩜 이런 생각하게 된 것도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쨌든.

 

두려움은 내 실존의 왜소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왜소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결국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것이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고...

 

두려움은 삶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삶에 생채기를 내고 생채기에 또 생채기를 내면서 결국 자신을 증오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벽을 쌓게 되고 자기 앞 마당에 봄이 오지 않게 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도록 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두려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맞짱을 떠야 하는 방법밖엔 없다.

두려움을 강철 같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이젠 두려움을 없애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 가자고 다짐해 본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바로 실천활동(Praxis)이 아닐지...

또한 자기변혁으로서의 혁명이 아닐지...

 

곰탱이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올해의 삶의 목표^^....

두려움! 다이다이로 맞짱 한번 떠 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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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되는 중구난방^^!!!

2월 중구난방에 대해서 말씀 드릴게요^^.

 

 

1. 주제 - 에이즈에 관한 이야기.

 

2월 중구난방 주제는 미류 님과 함께 하는 <에이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 때와 곳

 

때 : 2월 7일(수요일) 늦은 7시

곳 : 인권사랑방 사무실

 

3. 방식

 

몇 가지 키워드(빈곤, 여성, 동성애, 의약품 등)를 사용해서

에이즈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런 키워드를 아우르는 총체적 시각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에이즈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시간이 나면 해외 에이즈 운동 단체 CD를 같이 볼 수도 있습니다.

 

** 1월과 마찬가지로 2월 중구난방에 많이 같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말> 2월 7일은 미류 님께서 원하시는 날짜입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날 시간을 빼셔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약도를 올립니다^^. 그런데 복사를 해 와서 약도를 올리다 보니, 인권사랑방 집들이 기사가 함께 딸려 왔네요^^. 어떻게 지우고 편집하는지를 잘 몰라서 일단 이대로 올릴게요^^. 미안합니다^^.

충정로 사무실 집들이에 초대합니다
 
기사인쇄    
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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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사람과 보석

오늘 보석과 관련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잡설을 늘어놓을까 한다.

대체로 보석은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투명한 것이 더 값이 나간다.

불순물이 들어간 것은 순도가 떨어진다고 해서 별로 쳐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값 비싼 투명한 보석보다는 불순물이 들어간 보석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불순물의 특성에 따라 보석의 색깔이 각기 다른 빛을 내며 신비함을 더해 준다.

 

보석과 관련해서 사람을 생각해 보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사람보다는

불순물이 섞인 사람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일까?

불순물이 섞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순물이 들어간 사람은 까칠하지 않은 사람이고,

불순물이 들어간 사람은 까칠하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또한 불순물이 들어간 사람은 개성이 있는 사람이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개성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물론 불순물이 어떻게 섞일 수 있을까 하는 관계 구조가 더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살짝 빼 놓고 생각하려고 한다. 왜냐고 묻지 마시길...^^

왜냐하면 재미 없을 것 같아서^^... )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독야청청을 꿈꾸는 것인데, 사실상 이는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라고 외치는 것은 불쌍한 동어반복일 따름이지 않을까?

 

잘난 척을 좀 하자면(퍼버퍽!!!), 그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 개인일 따름이다.

이러한 개인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인일 따름이다.

우리는 맑스의 말처럼 사회적 개인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순물이 가득 섞인 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이 바로 <유적> 개인이며,

바로 인간으로서의 개인이다.

불순물을 섞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길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이 아닐까^^?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불순물의 인간관계...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관계이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인간관계가 아닐까?

불순물이 가득한 인간관계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붉은 사랑께서 말씀하신 <인간관계가 바뀌어야 세상이 빠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혁명은 바로 불순물에 있는 것은 아닐지...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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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난방-연분홍 치마 2.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3. 마마상

 

앞에서 연분홍치마가 <마마상>이라는 다큐를 만드셨다고 했는데, 마마상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마상이란 말은 중간포주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성노동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성노동자들을 관리해 주고 성노동과 관련한 여러 기본적인 지식과 테크닉을 교육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지촌과 같은 곳에 이주 여성 성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답니다. 그래서 이 이주 여성 성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성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국내 여성들이 마마상을 하고 있답니다. 이 국내 여성들은 기지촌 자체가 삶과 주거 공간이 돼 버렸고 다른 곳에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분들이라고 합니다.

마마는 엄마를 뜻하고 상이라는 것은 일본말로 아무개 씨를 지칭하는 것인데 어원적으로 이 두 말이 합쳐진 것이 아닌가 한다더군요. 

 

(근데 앞에서는 예삿말 투였다가 지금은 높임말 투네요. 제가 지금 몸이 아픈 여친한테 가봐야해서 정신이 없나봅니다. 이해해 주세요^^)

 

4. 10대 여성의 성 권리

 

10대 여성의 성 권리와 관련해서는 10대의 성 권리, 특히 여성의 성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러한 권리와 더불어 10대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권 또는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씀하셨고,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참 공감을 했더랬습니다.

 

** 제가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많이 미흡하리라 생각됩니다. 여친 때문에 맘도 급하고 해서 여기서 어제의 중구난방 이야기를 일단(!)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5. 다음 번 중구난방 일정

 

날짜 : 2007년 2월 6,7,8(수,목,금) 중 하루 (정확한 시각은 아직 미정^^)

주제 : 모두 3가지인데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 같네요^^.

1) 에이즈에 관한 문제(미류 님 활동과 관련)  

2) 성 전환자에 관한 문제(초보좌파 님 활동과 관련)

3) 청소년 인권에 관한 문제.

 

이상 3가지인데, 아마도 미류 님과 관련된 1)번 주제가 채택될 가능성이 낳을 것 같다는 개인적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중구난방 많이 응원해 주시고, 매니매니 참가해 주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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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난방-연분홍 치마 1.

어제 저녁 7시 반부터 <연분홍치마>에서 성적소수문화환경에 대하여 중구난방을 하였다.

중구난방에 참여한 블로거들로는 먼저 리우스, re, 스머프, 초보좌파, 에밀리오, 스캔플리즈, 달군, 곰탱이이다. 블로거가 아닌 분들 중에는 똘망 선생님, 두발 자유화와 관련하여 일인 시위를 하였던 이름없음의 고등학생이 있었다.

 

7시 반부터 시작해서 11 정도까지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중구난방이 계속되었다. 연분홍치마 사무실은 일반주택이었는데, 참 아늑하였다. 서로 무릎을 맞대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분위기가 참 따뜻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중구난방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구난방의 앞날이 아주 맑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보게 하였다.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중구난방만을 위한 팀 블로그를 만들자는 얘기도 오고갔다.

 

어제 한 얘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올려보려 한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아마도 리우스께서 블로그에 올리실 거라 생각한다. *^^*...

 

1. 연분홍치마

 

연분홍치마라는 활동공간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인데,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여성주의 시각과 감수성으로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성적 감수성을 바꿔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어제 자료집을 5,000원 주고 샀으면 자세한 소개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참으로 아쉽다^^).

왜 연분홍치마로 이름을 정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해 여기 계신 활동가들께서는 그냥 이쪽 활동을 고민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분홍치마 어떻겠냐고 말이 나왔다가 기왕이면 연분홍이라는 색깔이 더 예쁠 것(?) 같다는 것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여기서 활동하시는 활동가들은 모두 6분인데, 중구난방에서는 3분이 같이 자리를 하였다).

그리고 연분홍치마 활동의 주요 매개 수단은 영상 미디어라고 한다. 얼마 전에는 <마마상>이라는 다큐를 만드셨는데(마마상의 이름에 대해서는 좀 있다 설명하고자 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의 공간과 역사를 담담하게 그린 영화라 한다. 지금은 국제 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수 있는 미디어 교육을 당진에서 하고 계신다고 한다. 앞으로는 10대 여성의 성과 관련한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2. 성적 소수와 성적 소수자의 차이

 

앞에서 연분홍치마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이라고 하였는데, 왜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 성적 소수(여기서 잠깐 썰렁한(?) 우스개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성적이 나쁜 소수를 위한 모임이 아니냐고 농담을 하곤 했단다^^)인가에 대해 설명하셨다.  

성적 소수자라고 하면 어떤 집단을 떠올리게 되고, 소수자 집단은 여럿인데 어떤 한 특정 소수자 집단의 이해를 위해 활동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성적 소수자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애초의 모임 목적과 성격을 일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소수 집단을 아우르는 메카니즘(구조)를 통칭하기 위해 <성적 소수>라고 했단다.

사실 소수라고 한다면 이건 단순히 숫자상의 소수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속에서 피지배의 위치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소수를 개별화시켜 분할 통치하고자 하는 것이 자본의 기본 통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글이 날라갈까 봐서 다음으로 계속 합니다^^. 맘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날라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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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2.

사회화의 특정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 일반에게 그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며 그들에게 그 자리에서의 합리성을 강요한다. 이러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과 그 합리성 바깥에서 결정되 수 없다. 맑스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사람들은 따라서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서로 가치로서 관련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사물들을 동질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사물적인 외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서로 교환 속에서 가치로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서로 다른 노동을 서로 인간노동으로 동일시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행한다.” (Ⅱ.6/104f; 23/88, Herv. v. mir)

 

이러한 분석이 개인들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고 오히려 개인 그 자체가 해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으로 인용된 글(문장)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는『자본』의 초판에서 좀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 왜냐하면 개인들이 물질적인 사물을 가치라는 추상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

은 개인들의 두뇌의 자연적이며 따라서 무의식적인 본능적 작동인데, 그 작동은 개인들의 물질적 생산의 특수한 방식과 이러한 생산으로 인해 개인의 위치가 정해지는 관계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Ⅱ.5/46)

 

여기에선 특히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장(Feld)과의 단절이 분명해진다. 경제적 현상들은 더 이상

거래하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즉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는 특정한 인간학과 연관해서 그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것 대신에 (개인들이 보통 결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는)거래의 형태내용(Formgehalt)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우선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 즉 개인들의 거래 행위의 기초가 되는 특수한 생산관계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개인들과 경제적 행위의 동기가 고찰될 수 있다.(주23-) 

노동이 노동생산물의 기치형태로부터 이윤과 이자까지 다양한 경제적 형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에 관한 서술은 맑스 노동가치론의 유일한 핵심이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가치론이, 그 본질적인 과제가 이윤의 기원을 셀 수 없는 노동(질적인 노동-옮긴이)의 특정한 양에서 찾게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양적인 노동량 이론(Arbeitsmengentheorie)으로서 파악된다면, 맑스는 “사회주의적 리카르도주의자”의 이론적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맑스는 좀더 근본적인 다양한 질문에 처하게 되는데, 그 문제는 사적 생산자들의 사회 속에서 일관성 있는 사회적 연관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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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1.

지금부터 올리는 번역은 3부 <정치경제학 비판 근본 범주들의 양립> 중 5장 <화폐 가치론>의 2절 <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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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부 정치경제학 비판 근본 범주들의 양립 #

 

@ 5장 화폐 가치론 @


# 2절. 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

 

이미 1장에서 보았듯이, 노동은 고전 정치경제학에서는 늘 오로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개별적인) 개인의 과정인데, 이 과정은 인간에게 고역과 부담을 의미한다. 정치경제학과 관련되는 최후의 지점이 늘 개별적 개인이기 때문에, 즉 “인간에 대해서” 변용된 상품 소유자의 인간학이기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는 정치경제학 일반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상도 아니다.(주19-) 고전 경제학뿐만 아니라 한계주의(Marginalismus-대부분의 인간 행태를 '限界(marginal)'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소위 '限界主義(marginalism)' 분석 방법을 택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嗜好(preference)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으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制度도 주어진 조건으로 하여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늘 두 개별적인 상품 소유자 사이의 행위로서만 상품교환을 주제로 삼는다. 이 둘의 패러다임에서는 교환관계의 양적인 규정에 대한 문제가 중심에 서 있고, 또한 이 둘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인간학과의 관련을 통해서 그 답이 얻어진다. 교환 속에서 이미 늘 전제되고 있는 비교 가능성은 더 이상 이론적인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내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전 정치경제학의 “객관적” 가치론과 한계주의의 “주관적” 가치론은 그들 담론의 개별적 개인이라는 인간학적 구조 속에서 일치한다.


고전 경제학과 신고전 경제학에 대립하여 맑스가 상품교환을 단순히 사회적 재생산의 매개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노동의 한 특수한 형태로 고찰한다.(주20-) 맑스는 교환자들이 교환 속에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문제, 즉 교환자들이 어떤 이해관계를 추구하는가의 문제에 서 있지 않는데, 그 대신에 개별적 개인들에게 교환 이외의 어떤 다른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노동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탐구한다.

 

“사용대상들은 그것이 상호 독립적으로 행해진 사적 노동의 생산물인 한에서만 상품이다. 이러한 사적 노동들의 복잡성은 사회적인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이 우선 자신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 접촉을 하기 때문에, 또한 역시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우선 이러한 교환 속에서 나타난다. 또는 여러 사적 노동은 사실상 교환이 노동생산물과 그 생산물을 매개로 한 생산자들의 위치를 바꿔 놓는 관계들을 통해 사회적 총노동의 한 지절(Glieder)로서 나타난다.”(Ⅱ.6/103f; 23/87, Herv. v. mir)

 

 개별적 개인들이 자신의 개인적 노동을 상호 독립적인 사적 노동의 형태로 전제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생산물을 교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사적 노동이 일반적으로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나타날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생산자들의 사회화는 그들의 서로 다른 사적 노동 사이에 하나의 응집된 사회적 연관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응집 관계의 수립은 또한 개인들의 교역의 결과물이지만, 개별적 개인들 자체를 명확하게 밝혀 낼 수 있는 어떤 의식적인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의 수립은 독립적인 행위들이 충돌해서 나타나는 단순한 우연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개별적 개인들에게 이러한 결과물은 그들 행위 이전에 현존하는 전제이다. 그들에게 이러한 전제는 상품과 화폐의 대상적 속성으로, 즉 대략 중력 법칙과 같이 바로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속성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에서 맑스는 “물신주의”에 대해서 말한다.(주21- “물신주의”에 대한 개념은 알튀세(1969, S.103)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헤겔의 유해한 어떤 잔재도 아니다. 물신주의는 상품물신과 화폐물신에 한정되지 않고 부르주아 생산관계 전체를 포괄한다. 피셔(Fischer, 1978)의 다양한 물신형태와 아울러 바로 다음 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절과 비교해 보라. 에르켄브레흐트(Erckenbrecht, 1976)는 좀더 넓은 연관 속에서 맑스의 물신주의 개념을 논하고 있다.) 일상의식뿐만 아니라 고전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신들의 경험주의를 토대로 하여 이러한 물신주의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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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새해 복들 많이 받자구요!!!

한 해가 홀라당 지나가고 있다.

한 해가 지나가건 말건 그게 무슨 큰 대수랴마는...

그래도 한 해가 간다는데 가만 있자니 좀 거시기하고...

(연구실에서 혼자 있다. 학교는 너무 조용하고^^... 술 생각도 난다만...^^)

 

푸쉬킨이 이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맞나 모르겠다)

세상 살면서 좋은 일을 보는 것보다 좋지 못한 일을 볼 때가 훨씬 더 많은데...

그때마다 슬퍼하거나 좌절한다면 우리네 삶이 너무 거시기하지 않은가...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고 내 뜻대로 안 돼서,

요놈의 세상이 자꾸 우리를 속이고 가지고 놀려 하는데...

 

세상이 우리를 속이려 한다면,

까이꺼 우리가 세상을 속이면 될 일이다!!!

*^^*...

내년엔 우리가 세상를 속이면서 삽시다!!!

사는 거 별거 있수?!

까이꺼 함 해 보는 거지 뭐!!!

내년엔 다들 세상을 속여서 복들 많이 받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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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5.

이토(Itoh)역시도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에서 고전 정치경제학의 잔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는 고전정치경제학의 잔재를 무엇보다도 우선 맑스가 두 상품의 직접적인 교환으로부터 출발하고 두 상품의 공통적인 속성을 그 상품들에 포함되어 있는 추상 노동 속에서 보았을 것이라는 사실로 고정시킨다. 본래의 맑스 이론은 비로소 가치 형태 분석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일 텐데, 왜냐하면 맑스가 가치 형태 분석 이후에 더 이상 직접적 교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상품들의 공통적인 속성을 이제 상품의 화폐 형태에서 찾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을 통한 가치관계의 규정은 비로소 자본주의 상품 생산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가치형태는 가치실체보다 앞서서 그리고 가치실체와는 독립적으로 나타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Itoh 1976). 그러나 맑스는,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교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가치법칙이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비로소 관철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정당하고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의 형태로서 상품을 처음부터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가 추상 노동을 가치실체와 동일시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 “자연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사실이 고전경제학의 잔재를 이루는 것이다.

 

추상 노동에 대한 상반된 두 개의 규정이 양립하고 있다는 것 속에는 이 저작(자본-옮긴이)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문제, 즉 추상 노동이 모든 생산양식에 존재했는지 아닌지 또는 추상 노동이 상품생산에서 특수한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대한 근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추상 노동을 생리학적으로 노동력의 지출로서만 파악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사람들이 추상 노동을 서로 다른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연관으로 파악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즉 그러한 노동들을 교환 속에서 동등한 것으로 파악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의 사실에 달려 있다. 첫 번째 의미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노동을 구체적인 노동으로뿐만 아니라 추상 노동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두 번째 의미에서의 추상 노동은 부르주아 사회에 한정되어 있다.

 

추상 노동을 순수하게 생리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서도, 디터 볼프(Dieter Wolf)는 사회적 총노동이 개별적인 영역으로 배분될 수밖에 없고 거기서 개별적인 노동들이 서로 동등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한에서 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추상 노동에도 사회적인 의미가 부합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주32-) 그러나 그는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단순한 배분이 결코 개별적인 구체적 노동의 동등성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못보고 있다 :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농촌의 가족이 일상적으로 2시간의 경작 노동 이외에 1시간의 재단 노동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은 결코 (질적으로 서로 다른 구체적인 노동을-옮긴이) 동등하게 만드는 것(일반적으로 어떠한 양적 비율로 가능한가? 또는 각각의 모든 노동이 동등한 단순 노동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체적 노동을 가족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에게 배분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연구하는 이론가들의 행위이다.

 

루빈(Rubin)은 이미 20년대에 세분화된 다른 입장을 전개시켰다. 그는 3가지 형태의 “동등한” 노동을 구별하고 있다 : 생리학적으로 동등한 노동, 사회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된 노동, 추상 노동. 루빈은 이후 볼프와 유사하게 서로 다른 노동들이 동등하게 되고 배분될 수 있는 한에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이 각각의 노동분업화된 생산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러나 루빈은 추상 노동을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으로 환원시키지 않고(그리고 이미 생리학적으로 동등한 노동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오히려 추상 노동을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으로 파악한다 : 여기서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특성을 넘어서 물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루빈은 추상 노동의 이러한 고유한 의미가 제1장의 3절과 4절에서 비로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것 속에서 맑스의 서술의 비일관성 또는 모순의 양립을 결코 보지 못했다 : 즉 제1장의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 추상 노동이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된 노동 또는 게다가 생리학적으로 동등한 노동의 의미로 더욱 변화되었다는 것 속에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로부터 노동으로의 분석적 환원에 대하여 이러한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비로소 추상 노동의 고유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한다(Rubin 1973, S.91-109). 그러나 이것은 제1장의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 고전 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필요가 결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치에 들어 있는 특수한 사회적인 것은 거기에서(제1장의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옮긴이) 필요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본』에서 맑스는 추상 노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맑스가 노동과정의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계기를 고찰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인 5장에서도 추상 노동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맑스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

 

“이러저러한 형태로 자연적인 것을 자기화하고자 하는 합목적적인 활동으로서 노동은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자연조건, 즉 모든 사회적 형태와 무관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조건이다. 이에 반해서 교환가치를 정립시키는 노동은 노동의 특수한 형태이다. 예를 들어 특수한 생산적 활동으로서 물적 규정성을 지니고 있는 재단사의 노동은 저고리를 생산하지만 저고리의 교환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재단사의 노동은 저고리의 교환가치를 재단사의 노동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으로서 생산하며 또한 이러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은 재단사가 실로 꿰맬 수 없는 사회적 연관 속에 속하게 된다.” (Ⅱ.2/115; 13/23f, Herv. von m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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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4.

물론 이미 추상 노동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한 모순적인 것의 양립(추상노동과 구체노동-옮긴이)이 발견된다.(주2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 제1판에서 맑스는 여전히 가능한 한 추상노동을 단순하고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노동과 동일시한다.(주26-)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가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지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Ⅱ.2/109; 13/17) 게다가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노동들 그 자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를 띠는 단순한 노동, 요컨대 질적으로 동일하며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추상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추상이다.(……) 보편적 인간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평균노동 속에 존재하며 인간 근육, 신경, 두뇌 등의 특정한 생산적 지출이다.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적응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순한 노동이다…… 이 단순한 노동은 사람들이 모든 통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한 한 모든 노동을 형성한다.”(Ⅱ.2/110; 13/18)

 

맑스는 여기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추상들을 서로 동일시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좀더 기계화된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추상으로서 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추상, 특수한 성질을 지닌 노동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대체, 따라서 특정한 한 종류의 노동지출과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 노동”, 즉 특정한 종류의 노동지출이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노동.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결코 추상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실체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본』 제1판에서도,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도 동시에 단순한 평균노동으로 측정된다(Ⅱ.5/19f). “추상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고찰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Ⅱ.5/31). 그러고 나서 우선 제2판에서 단순노동과 추상노동이 엄밀하게 구분되었고 처음부터 가치실체로서의 추상 노동으로 시작하였다.(주27-) 물론 두 개의 첫 소절에서 추상 노동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주의적인” 것을 많이 연상하게 한다. 생산적 활동의 특정한 성격이 추상되고 난 후에 그 추상 안에 오로지 생산적 활동이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지출”(Ⅱ.5/24; 23/58)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후에, 맑스는 (제1판과 대비되어 새롭게 파악된)두 번째 소절의 끝에서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또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속성 안에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Ⅱ.6/79; 23/61)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치 “추상 노동”이 노동의 자연적 속성에 해당하고, 노동의 가장 보편적인 생리학적 규정들, 즉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품 생산에서만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규정들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추상성이 결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속성이라는 사실, 즉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질적인) 상이함에 대한 추상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자본』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주29-) 

 

이러한 것은 나에게 물론 하나의 정식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맑스는 자신의 담론을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으로 자신의 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서 맑스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주30-) 여기에서 우선 고전 정치경제학이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를 구별했지만 상품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추상 노동의 생리학적 파악은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 없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수행되지 못한 구별이 보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구별을 통하여서는 노동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주31-) 추상 노동이 사실상 노동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규정으로 파악될 때에 비로소 고전 정치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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