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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Scrum님의 [정치 성향 테스트] 에 관련된 글.
이걸 보니, 나는 극좌에 속하는구나^^...
근데 극좌가 뭘까^^...
Authoritarian | |||
Lef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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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 | |
Libertarian |
어제 연구회와 관련한 회의를 하고,
1차 뒷풀이를 하고 집으로 오다가 여자친구한테 만나자고 했다가,
(밤 10시가 된 상황에서 만나자고 하면 여자친구가 부담스러울까봐)
그냥 집에 간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보니 눈이 살살 오는 것이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너무 아깝더라.
뒷풀이에서 소주 서넉잔을 마셨으니, 기분도 삼삼한데 눈까지 오시다니...
집에 갈까 한잔 하고 갈까 10여분 망설이다가 술집에 들어갔다.
혼자서^^...(후배한테 얘기했더니 아주 궁상을 떤다고 한소리 들었다)
근데 가끔씩 혼자 술을 먹긴 하지만, 무쟈게 심심하더라.
별로 할 일도 없고 술 먹으면서 연신 담배질하고...
안 그러면 술 같이 먹어 줄 사람 전화번호 뒤적이던가^^...
그런데 어젠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술 마시면서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술도 술술이 잘도 넘어가더라^^.
다음부터 혼자 술 마시는 거 별로 안 두렵다.
책을 읽으면 되니까^^...
어젠 무슨 책을 읽었냐 하면 <인간의 벽>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일본 교직원 노동조합 운동과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한 10번은 읽었다^^
(아... 나중에 한번 이 책으로 포스팅해 봐야겠다^^.
아 그러고 보니 산오리께서 주신 <콘센트>에 대해서도 포스팅해야 하는구나^^)
하여간 어제 눈도 예쁘게 오시고 해서
사치 한잔 했다...ㅋㅋㅋ...
개토님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에 관련된 글.
BABCB |
보증은 할 수 없는 서비스 맨 타입 |
▷ 성격 이 타입은 항상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타인을 위한 서비스에 소중한 노력을 모두 소모해버립니다. 따라서 정작 자기가 즐길 차례가 되었을 때는 아무 기력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몹시 쓸데없는 짓만 반복합니다. 물론타인에 대한서비스 정신을 억제하든가 자신이 좀 더 유를 누린다면 이런 손해만 보는 역할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잘 조절되지 않는 것이 이 타입입니다. 이런 타입이 가장 한심하게 느껴질 때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매우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어 모든 단물을 빨아먹고 버릴 때입니다. 세상의 교활한 무리들이 이 사람을 어떻게든 속여 부지런히 모아온 꿀을 빼앗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도 좀 더 엄격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
▷ 대인관계 (상대방이 이 타입일 경우 어떻게 하연 좋을까?) 연인, 배우자 - 생활에 있어서의 서비스는 되도록 다하겠지만 부부관계의 서비스에는 약한 타입입니다. 그 점을 잘 명심하고 선택을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거래처고객 - 당신에게 있어서는 만사형통인 타입입니다. 상대를 잘 활용하여 해낼 수 있는 비즈니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사 - 이런 타입의 상사는 온실의 책임자와 같습니다. 묘목들이 생장의 노력을 게을리 하면 책임자가 쫓겨나고 온실은 문을 닫게 됩니다. 동료, 부하직원 - 이런 타입에게는 일만 평가해줄 것이 아니라 부서 내에서의 존재 가치도충분히 평가해 주도록 하십시오. |
[repertory main page] |
나는 보증 못하니 알아서들 하세요*^^*...
추상 노동
맑스는 상품교환 분석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으로 나아간다:
“비로소 상품 교환 속에서 노동생산물은 그 생산물의 감각적이고 다양한 사용대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동등한 가치대상성을 가지게 된다. (……) 이러한 순간에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은 사실상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적 노동은 한편으로 특정한 유용 노동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총노동의 지절로서, 즉 사회적인 노동 분업의 자연적인 시스템의 지절로서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특수하고 유용한 사적 노동이 각각의 다른 유용한 방식의 사적 노동과 교환될 수 있고 따라서 그 노동들이 동등해지는 한에서, 사적 노동은 바로 그 사적 노동의 생산자의 다양한 욕구만을 충족시킨다.” (Ⅱ.6/104; 23/87, Herv. v. mir)
노동이 분업화된 모든 사회에서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개인의 노동은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부분이며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서 이러한 사회적 성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개별적인 사적 노동이 다른 사적 노동과 동등한 것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사적 노동은 서로가 동등하게 상품 생산에 대해 더 넓어진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따라서 상품생산에 대해서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사실이 통용된다;
“서로 독립적인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인간 노동이라는 동등성 속에 있으며 또한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Ⅱ.6/105; 23/88, Herv. v. mir)
맑스가 첫 번째 인용문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gleiche Geltung)이 무엇으로 실현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이 사적 노동을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좀더 확대된 물음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이러한 동등성이 모든 사적 노동을 서로 동등하게 하면서도 독립적으로 만들지만 그 사적 노동들에 귀속해 있는 하나의 속성에 기인하는가 또는 사적 노동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 문제인가? 가치 분석과 상품의 물신적 특성에 관한 절의 문맥 속에서 맑스는 명백하게 두 가지 가능한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 교환에서 사적 노동들의 동등성은 결코 개별적인 사적 노동들에 곧바로 귀속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다른 사적 노동들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다. 또한 자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 동등성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사람들은 추상적 노동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날카롭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전체 하늘 아래서의 모든(toto coelo) 서로 다른 노동의 동등성은 그 노동들의 현실적인 비동등성(Ungleichheit)을 추상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노동들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서,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Ⅱ.6/104; 23/87f)
이런 한에서 추상적인 노동은 교환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규정이 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보충판……(Erg?nzungen……)에서 맑스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글을 다음에 나오는(Ⅱ.7/55와 비교해 보면, 역시 프랑스 번역판에도 포함되어 있는) 글을 부가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교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서로 다른 구체적인 사적 노동을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물로 환원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노동의 생산물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교환을 통해서만 완수된다.” (Ⅱ.6/41)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추상”이 교환 행위자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하다 :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행할 뿐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지적인 추상과정이 문제가 아니다; 추상은 오히려 교환 행위자들의 교환행위를 통해서 수행된다.(주24-)
맑스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교역의 관점(그리고 추상의 공정)에 기초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서도 답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적 장과 결별하게 된다. 따라서 맑스는 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한에서, 고전경제학 어디에서도 만들지 못한 노동 내에서의 차이가 “정치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Ⅱ.5/22; 23/56)이라는 사실을 정당하게 주장한다.
어제 여자 친구와 늦게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여자 친구가 아시안 게임 축구 준결승이 있다고 하면서
그걸 보면서 저녁을 먹자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 나는 우리나라 국대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요즘 우리나라 국대 축구는 꼭 동네축구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해서 봤는데, 역시나였다.
초반에 뭐 좀 하는 것 같았는데, 한 골 먹고 나서는 상대방 골대 쪽으로 공을 차 올리는 단순한 경기를 운영하였다, 아동복(아드보카드) 감독 이후 방빼(베어백) 감독의 지금까지.
전략이나 전술 개념 자체가 없는 경기처럼 보였다.
지금 이라크가 연기를 잘 해서 이겼느니 어쨌느니 하는데,
사실 이라크의 전술의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는 한국의 단순한 전술을 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라크 골 문전에 수비를 집중시켜서 철저하게 한국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었다.
이라크 수비가 밀집돼 있는 골문 중앙에 공을 차 올린들 골리 날 리 만무하다.
하여간 전술적 측면에서도, 경기 내용 면에서도 거의 패배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 경기를 보면서, 아니 우리가 한 골 먹은 이후로 이라크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여자 친구에게 말했더니 곧바로 가자미 눈이더라.
<넌 같은 한국 사람이 돼서 상대방 이기라고 하는 게 잘하는 일이냐, 왜 삐딱선 타냐>,
뭐 그런 말을 눈빛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엔 한국 축구가 괘씸(?)해서 그랬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미 제국주의 침략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이 이 경기를 통해 시원한 단비를 맞은 것 같은 기쁨을 누린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 김에 아시안 게임 우승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금도 그런 바람이다.
그럼 여자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다.
<네가 말하는 것처럼 고통 받고 있는 우리나라 민중들이 또 그런 기쁨을 누리지 말라는 얘기냐!>
생존권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민중을 생각해 보면 여자 친구의 말이 백번 지당하며,
나의 생각은 뽀대나는 위선일 수 있다.
비정규직 개악법이 통과 전이나 후에 얼마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통으로 투쟁해 왔는가를, 또한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한국 축구의 아시안 게임 우승은 또 하나의 단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다른 한편, <지금 이러한 마당에 한국 축구가 이기냐 지냐가 우리 생존권 사수 투쟁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는 얘기가 있을 수 있다.
한국 축구가 이기냐 지냐에 대한 관심은 당면 투쟁을 물타기하는 것과 같지 않냐는 얘기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 이야기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여자 친구처럼 생각하는 쪽과 지금처럼 생각하는 쪽 둘 다 맞는 이야기이다.
둘 다 맞는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나보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암시랑도 않게 생각하는데, 혼자 쌩쑈를 하는 건 아닌지...
에라,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라크가 우리를 이겼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라크가 우승해서 이라크 민중이 잠깐이라도 기쁨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라크 축구 선수들에게, 또한 이라크 민중들에게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
여자 친구에게도 잘 이야기해야겠다*^^*...
뱀다리> 글을 썼는데, 무쟈게 횡설수설이다.
에이, 모르겠다.
내 능력이 이것뿐인데 어쩌랴^^...
사회화의 특정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 일반에게 그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며 그들에게 그 자리에서의 합리성을 강요한다. 이러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과 그 합리성 바깥에서 결정될 수 없다. 맑스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사람들은 따라서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서로 가치로서 관련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사물들을 동질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사물적인 외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서로 교환 속에서 가치로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서로 다른 노동을 서로 인간노동으로 동일시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행한다.” (Ⅱ.6/104f; 23/88, Herv. v. mir)
이러한 분석이 개인들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고 오히려 개인 그 자체가 해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으로 인용된 글(문장)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는『자본』의 초판에서 좀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 왜냐하면 개인들이 물질적인 사물을 가치라는 추상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개인들의 두뇌의 자연적이며 따라서 무의식적인 본능적 작동인데, 그 작동은 개인들의 물질적 생산의 특수한 방식과 이러한 생산으로 인해 개인의 위치가 정해지는 관계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Ⅱ.5/46)
여기에선 특히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장(Feld)과의 단절이 분명해진다. 경제적 현상들은 더 이상 거래하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즉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는 특정한 인간학과 연관해서 그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것 대신에 (개인들이 보통 결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는)거래의 형태내용(Formgehalt)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우선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 즉 개인들의 거래 행위의 기초가 되는 특수한 생산관계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개인들과 경제적 행위의 동기가 고찰될 수 있다.(주23-)
노동이 노동생산물의 기치형태로부터 이윤과 이자까지 다양한 경제적 형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에 관한 서술은 맑스 노동가치론의 유일한 핵심이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가치론이, 그 본질적인 과제가 이윤의 기원을 셀 수 없는 노동(질적인 노동-옮긴이)의 특정한 양에서 찾게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양적인 노동량 이론(Arbeitsmengentheorie)으로서 파악된다면, 맑스는 “사회주의적 리카르도주의자”의 이론적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맑스는 좀더 근본적인 다양한 질문에 처하게 되는데, 그 문제는 사적 생산자들의 사회 속에서 일관성 있는 사회적 연관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5장 1절 <맑스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에 이어서 5장 2절 <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을 올려 놓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번역부터 미하엘 하인리히의 책 <가치에 관한 과학>2003년 판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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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부 정치경제학 비판 근본 범주들의 양립 #
@ 5장 화폐 가치론 @
# 2절. 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
이미 1장에서 보았듯이, 노동은 고전 정치경제학에서는 늘 오로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개별적인) 개인의 과정인데, 이 과정은 인간에게 고역과 부담을 의미한다. 정치경제학과 관련되는 최후의 지점이 늘 개별적 개인이기 때문에, 즉 “인간에 대해서” 변용된 상품 소유자의 인간학이기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는 정치경제학 일반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상도 아니다.(주19-) 고전 경제학뿐만 아니라 한계주의(Marginalismus-대부분의 인간 행태를 '限界(marginal)'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소위 '限界主義(marginalism)' 분석 방법을 택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嗜好(preference)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으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制度도 주어진 조건으로 하여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늘 두 개별적인 상품 소유자 사이의 행위로서만 상품교환을 주제로 삼는다. 이 둘의 패러다임에서는 교환관계의 양적인 규정에 대한 문제가 중심에 서 있고, 또한 이 둘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인간학과의 관련을 통해서 그 답이 얻어진다. 교환 속에서 이미 늘 전제되고 있는 비교 가능성은 더 이상 이론적인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내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전 정치경제학의 “객관적” 가치론과 한계주의의 “주관적” 가치론은 그들 담론의 개별적 개인이라는 인간학적 구조 속에서 일치한다.
고전 경제학과 신고전 경제학에 대립하여 맑스가 상품교환을 단순히 사회적 재생산의 매개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노동의 한 특수한 형태로 고찰한다.(주20-) 맑스는 교환자들이 교환 속에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문제, 즉 교환자들이 어떤 이해관계를 추구하는가의 문제에 서 있지 않는데, 그 대신에 개별적 개인들에게 교환 이외의 어떤 다른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노동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탐구한다.
“사용대상들은 그것이 상호 독립적으로 행해진 사적 노동의 생산물인 한에서만 상품이다. 이러한 사적 노동들의 복잡성은 사회적인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이 우선 자신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 접촉을 하기 때문에, 또한 역시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우선 이러한 교환 속에서 나타난다. 또는 여러 사적 노동은 사실상 교환이 노동생산물과 그 생산물을 매개로 한 생산자들의 위치를 바꿔 놓는 관계들을 통해 사회적 총노동의 한 지절(Glieder)로서 나타난다.”(Ⅱ.6/103f; 23/87, Herv. v. mir)
개별적 개인들이 자신의 개인적 노동을 상호 독립적인 사적 노동의 형태로 전제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생산물을 교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사적 노동이 일반적으로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나타날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생산자들의 사회화는 그들의 서로 다른 사적 노동 사이에 하나의 응집된 사회적 연관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응집 관계의 수립은 또한 개인들의 교역의 결과물이지만, 개별적 개인들 자체를 명확하게 밝혀 낼 수 있는 어떤 의식적인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의 수립은 독립적인 행위들이 충돌해서 나타나는 단순한 우연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개별적 개인들에게 이러한 결과물은 그들 행위 이전에 현존하는 전제이다. 그들에게 이러한 전제는 상품과 화폐의 대상적 속성으로, 즉 대략 중력 법칙과 같이 바로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속성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에서 맑스는 “물신주의”에 대해서 말한다.(주21- “물신주의”에 대한 개념은 알튀세(1969, S.103)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헤겔의 유해한 어떤 잔재도 아니다. 물신주의는 상품물신과 화폐물신에 한정되지 않고 부르주아 생산관계 전체를 포괄한다. 피셔(Fischer, 1978)의 다양한 물신형태와 아울러 바로 다음 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절과 비교해 보라. 에르켄브레흐트(Erckenbrecht, 1976)는 좀더 넓은 연관 속에서 맑스의 물신주의 개념을 논하고 있다.) 일상의식뿐만 아니라 고전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신들의 경험주의를 토대로 하여 이러한 물신주의로 넘어간다.
따라서 맑스는 상품을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의 물질화”로서 고찰하였고, 그가 규정하고자 한 것은 우선 첫째로 양적인 교환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성격이다.(주19-) 맑스가 이 특수한 성격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정식화하고 있기 때문에, 맑스는 두 개의 상품에 포함된 “공통적인 제3의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노동을 이러한 제3의 것의 실체로 규정하기 위한 “배제방식”도 사용하지 않는다. 뵘-바베르크뿐만 아니라 새로운 비판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이의의 본질적인 부분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논증 과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증 형태들은 아주 그럴 듯하게 맑스가 『자본』 1판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대중화”에 근거한다.(주-20) 맑스가 분명하게 노동가치론에 대한 그 어떤 성질의 “증명”에도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노동을 교환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특징짓는 것이 동어반복일 수 있다라고 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의 그의 주장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Ⅱ.2/114; 13/22).
사람들이 맑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오해의 기원을 위에서 언급했던 비판가들을 통해 그들의 개인적인 한계에서 찾는다면, 그건 거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의 논증이 그의 고유한 경험적 문제 틀(Problematik)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가치론에 대한 증명의 결함에 주목하는 여러 비판가들에게 공통적이다. 맑스에게는 맑스가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현상들(이 현상들은 또한 하나의 모델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일 수 있다)로부터 출발하고 단순한 추상을 통해 그 현상의 (개념) 규정 요소들을 찾아내고자 한다는 사실이 가정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앞 장에서 서술되고 있듯이, 맑스는 곧바로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장에서 나타나는 경험주의와 손을 끊었다. 맑스는 경험론에서 단순히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여러 규정들의 연관이며, 따라서 개념적 구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경험적 현상들은 항상 이미 구성되어 있고, 단순한 직관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형태들로서 간주되는 특정한 사회적 형태들 안에서만 존재한다. 물론 맑스는 경험주의와의 이러한 단절을 단지 불충분하게만 반영하였다. 게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맑스는 사회적 형태들을, 즉 “경제적인 형태 규정들”을 찾아내는 것을 모든 정치경제학의 과제로 편성하였다.(주22-) 이에 반해서 『자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정치경제학이 비록 불완전하긴 하였지만 가치와 가치량을 분석하였고 이러한 형태들에 숨어 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내용이 왜 그러한 형태를 취했는지에 대한 문제를 결코 취급하지 않았다…” (23/94f)
맑스가 여기서 고전 정치경제학으로부터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문제로서 인식되지 못하는 문제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경험적인 현상들이 존재하고 단순하게 “주어진 것(또는 소여)”으로서 나타나는 그러한 사회적 형태들을 고찰함으로써, 맑스는 말하자면 모든 경험주의에 의해서 명백하게 감추어지고 맑스에 대한 현대의 비평가들이 그들 자신의 경험주의에 기초해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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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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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여기도 극좌군! 진보블로거들은 역쉬...극좌파! ㅋ부가 정보
곰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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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ㅎ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