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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이더이다^^

미류님의 [Red] 에 관련된 글.

You scored as Green.



Green is mostly associated with 'envy' but it best suits the description of freshness, rebirth and renewal. You believe that sometimes it is best to start things fresh just for the energising buzz an adventure gives you. And this is what you are all about; adventure. You love exploring, testing the limits and reaching out to what is out there.

Green

78%

Blue

67%

Purple

56%

Red

56%

Orange

50%

Pink

50%

White

45%

Black

39%

Yellow

34%

내가 나를 모르는데, 이게 정말 내 모습일지는...

맞는 것도 있고, 안 맞는 것도 있고... ^^...

믿으시거나 말거나*^^*...

제가 좋아하는 색 중의 하나가 녹색이긴 한데,

녹색보다는 노란색이나 빨간색을 더 좋아하는데...

다시 함 해볼까나^^...

근데 귀차니즘 때문에 할 수 있을까?

 

뱀다리 : 트랙백을 누르긴 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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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이 글은 <작은 책 06년 11월호>에 실리 글 중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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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11 사태 이후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부시를 비롯한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테러 단체나 테러 국가는 이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이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세력들을 의미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국가는 단연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들 중에서도 좀 만만하다 싶은 제3세계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미 제국주의에게 이들 국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미 제국주의는 자본의 최대한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반면에,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최상의 가치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3세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 중 중심이 되는 국가 중의 하나가 바로 쿠바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권 국가인 쿠바를 이끌어 낸 중심인물들은 바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회 하면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 받는 사회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양의 탈을 쓴 전체주의 사회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산술적인 평균치로 모두 획일화시키며 개인들의 개성을 말살시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전체주의 독재 국가, 독재국가=테러국가쯤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위에서 말한 그런 사회가 아니다. 만일 사회주의가 이런 사회라면 맑스를 비롯한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 풀고 통곡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이 적대적 경쟁 속에서 ‘기계화되고 가축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의 삶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사회를 말한다. 즉 끊임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운동 과정 속에 있는 사회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를 지향했던 사람이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현실적으로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고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며, 체와 피델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체와 피델은 그 첫 번째 노력으로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를 문제 삼고 이 생산관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느냐’ 하는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는 인간의 모든 삶과 그 양식인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체와 피델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모든 민중에게 민중의 필요에 따라, 즉 공공의 필요에 따라 생산물을 공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실천했다. 이러한 생각과 실천은 모든 산업과 기업이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처럼 채산성에 그 목적을 두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이 사회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것에는 민중 자신이 자본주의형 인간으로부터 사회주의형 인간으로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이 빠져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민중 자신의 생산과정이 빠져 버리게 되면, 여전히 민중들은 자본주의의 문화, 정치 등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삶에 익숙해지게 돼서 이후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민중 자신이 사회주의의 커다란 장애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체는 “야수 같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민중 자신의 생산과정은 동료들에게 나눔의 마음과 공동의 노력에 대한 가치를, 그리고 공동의 사회적 과업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으로서 민중 자신의 자기의식을, 즉 인간으로서의 자기의식(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도 배제되고 소외되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소통 체계, 즉 민주주의적 관계가 유기적이고도 긴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쿠바에서는 초기부터 문맹 퇴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쿠바의 노력에 대해 프랑스 주요한 환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인 르네 뒤몽은 1965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혁명은 완전한 기쁨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그토록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던 노동자 대중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들이 보여 준 문맹 퇴치 운동에 대한 집념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은 코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쿠바에서는 이러한 코뮌 형태가 협동농장과 같은 협동생산 체제, 그리고 이러한 체제에 맞는 교육 체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코뮌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코뮌을 구성할 수 있는 물적 기초가 있긴 하다. 그 물적 기초는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그 자체가 코뮌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임노동자’의 연합체이며, 조합원들 자신의 자기 생산이 현실적으로 노동조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족 형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이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쿠바의 경우를 그대로 따라할 수도 없으며, 따라 해서도 안 된다. 이는 체와 피델, 그리고 쿠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다. 쿠바와 우리의 삶의 물적 조건은 아주 다르다. 체와 피델은 이러한 생각 위에서 쿠바만의 물적 조건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이는 체가 정통 맑스주의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혁명 2단계에 따른 첫 번째 단계인 민족부르주아지 혁명의 단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코뮌이 가족이건 국가이건 간에 개별적인 하나의 형태에 머물러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코뮌은 그 태생 상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연대의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쿠바는 자신들만의 사회주의적 코뮌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사회주의권 국가와 제3세계 국가와의 교류와 연대를 추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체와 피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물론 체가 쿠바의 소련 핵무기 배치의 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와 관련해서 피델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말이다).
이러한 쿠바의 끊임없는 연대의 노력이 미 제국주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바라는 국가 코뮌을 유지시키면서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 되었다. 체는 체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제3세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세계 연대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피델은 피델대로 자신의 생각과 정책을 묵묵히 밀고나가 최근에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와의 민중무역협정 체결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민중무역협정은 자본주의 무역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 무역 방식은 채산성, 즉 얼마만큼 최대한 자본의 이익을 낼 수 있는가에 초점이 있다면,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의 민중들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공공재를 필요한 만큼 교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쿠바는 모든 산업을 가동시킬 수 있는 연료인 천연가스와 석유가 필요하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의료와 교육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쿠바는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에 교육과 의료 자원인 교육자와 의사, 그리고 쿠바의 교육, 의료 시스템을 제공한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쿠바에 천연가스와 석유를 제공한다. 이것이 이들 세 나라가 맺은 민중무역협정의 기본 골격이다.
이러한 민중무역협정이 세 나라의 민중들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바꾸는 기초이며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인간과 삶의 양식, 나아가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의 현실적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방문하여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코뮌을 구성하기 위한 틀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어떠한 생산물(우리 자신을 포함해서)도 제공하지 못하고 또한 그들로부터 어떤 생산물도 받을 수 없다. 설령 생산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삶의 양식과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우리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야수 같은 자본주의 세상을 원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원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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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역성을 들랴...^^...

오늘 포스팅한 것을 보니 추석이라 괜찮은 영화를 보거나 해서

뜻 있게 보낸 것 같다.

그런데 사실상 난 잠자느라 볼일 다 봤다.

그렇지만서도 잠만 내처 잤다는 건 아니다.

(이거 앞 문장 하고 상당히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것 같구만^^...)

 

작년 추석 때부터인가보다.

명절 때만 되면 좀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며느리와 딸 사이에서

누구의 역성을 들어야 하는가이다.

 

좀 얘기를 해 보자면 이렇다.

명절 때만 되면 명절 치르는 노동은 현실적으로 거의 모두 여성의 몫이다.

그런데 이 여성의 노동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며느리의 노동이다.

결혼을 하신 여성 분들은 시댁에서 명절 노동만 생각하면

온 몸이 아프다는 말씀을 거의 대개가 하신다.

명절 노동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아는

이중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며느리와 딸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결혼하신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며느리와 딸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딸로서의 사회적 지위는 며느리라는 사회적 지위와 고까운 관계에 있다.

딸은 며느리가 하는 모든 가사노동을 시원찮게 여길 때가 많이 있는 것 같다.

며느리는 시부모를 공양해야 하고 남편을 잘 내조하고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는 일종의 지독한 편견이다)이 있는데,

딸들이 이 통념에 잘 길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딸과 며느리 사이의 다툼은 항상

이 통념의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 딸들이 며느리라는 사회적 지위에 서게 되면,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된다.

며느리는 이제 딸들이 참으로 고깝다.

오죽했으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서로 며느리라는 똑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며느리 대 며느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며느리 대 딸로 만나는 것이다.

 

자, 이러한 상황에서 도대체 누구의 역성을 들어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여성 자아의 분열은 자본주의 가부장 사회의 모순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며느리나 딸 둘 다에게 이런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얘기를 못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나의 무능 탓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내 탓이오> 하고 자빠지는 것은 98% 부족한 일이다.

 

며느리의 역성을 들 것인가, 딸의 역성을 들을 것인가.

며느리의 역성을 든다면, 며느리는 딸과 시어머니의 갈굼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며느리의 삶은 더욱 고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딸의 역성을 든다면, 이는 가부장제의 화신(마초)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이런 것은 현실적으로 고부간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 갈등을 현실적으로 당장에 면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박쥐처럼 며느리에게 붙었다가, 딸(시어머니)에게 붙었다 해야 한다.

물론 이게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결국에 가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딜레마이다.

그렇다고 명절을 아주 없애자고 할 수도 없고,

또 명절을 없앤다고 해서 여성의 가사노동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좀 나누어 주시오!!!

 

뱀다리.

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잘 모르지만,

결혼을 한다면 당장에 큰일이란 생각에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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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사람이 만나서 서로 몸을 기대어 불꽃을 사른 다음,

더 이상 사를 것이 없을 때 한줌의 재로 남아서 바람에 따라

각자 제 갈 길을 가면 된다.

 

각자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미련을 남기는 것은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대체로 미련을 남기고서 자신의 갈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서로에게 너무 의존하여 서로에게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의존과 집착은 지배욕을 낳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존이 너무 크게 되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노동과 수고에 기대는 삶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삶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노동과 수고를 지배하려고 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노예의 굴종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삶은 어떠했는가를 깊이 반성해 본다.

답은 뻔할 뻔자이다.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의존적인 삶이었다는 사실...

흐흐흐...

그래서 내 것만을 강조하고 강요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이가 들면서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리라.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일 테고,

자유롭지 않은 나는 그만큼 더 외로워지고...

악무한적인 악순환이다!!!

 

이제 의존을, 집착을, 미련을 버리는 연습을 충실히 해야 할 때이다,

4학년인 이 시점에서...흐흐흐...

더 이상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자유로워지기 위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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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리 자란다, 칭찬 먹고 자란다^^!

대학생씩이나 된 아이들에게 자란다는 표현은 격에 맞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들을 초등학생쯤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티박을 놓을 줄 알면서도,

그냥 자란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굳이 이 표현을 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자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조금씩 웃기 시작하고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다른 때 비하면 엄청나게 빨리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통 한 달 반 정도 지나야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이런 것은 아이들의 이름을 잘 외워서 그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이리라.

 

사실 이름을 빨리 외울 수 있었던 것은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철학 수업은 4명, 법대 지정교양 수업인 논리와 작문 수업은 2반인데,

한 반은 29명, 다른 한 반은 6명이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처음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에 계속 앉았기 때문이다(내가 그렇게 시킨 게 절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말을 시킬 때 처음에는 수줍어 하다가

지금은 목소리에 힘도 들어가고 자신감이 있어 보이더라.

그러면서 눈망울이 또록또록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도 있지만, 그거 정말 사실이다.

그 눈망울을 안 본 사람은 사실 잘 모른다.

보는 사람을 얼마나 설레이게 하는지...

이건 행인 님도 마찬가지일 게다*^^*...(맞지요, 행인 님?^^)

이럴 때 선생이란 직업이 얼마나 축복 받은 직업인지...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의 대화라는 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똑바로 쳐다보면서 <잘 했다, 오케이, 굿>을 하면,

아이는 수줍어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린다.

(요게 또 점수와 연관되기도 하지만서도 말이다*^^*...>

그런 후에 아이들은 내가 하는 말 중에서 무의식적으로 실수로 한 말들은 칼 같이 잡아낸다.

오늘도 한 건 당하고 왔다!!

(칠판에 뭔가 잘못 썼다가 바로 지적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서 어깨를 으쓱거릴 정도다.

(선생이 지가 틀려 놓고서도 어깨를 으쓱거리다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교실은 웃음이 넘쳐난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孟子 盡心 章 上)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함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이 기세에 기름을 부어야 할 것이다.

그 기름은 이른바 야자!!!

(야자란 야간자율보충학습의 준말이다^^)

야자가 무엇인지 감비 님은 경험을 하셨다.

궁금하신 분은 감비 님께 여쭈어 보세용^^...

 

다음 주 야자가 기대된다.

아이들은 훨씬 더 신랄하고도 비판적으로 나를 교육할 것이다.

아기다리고기다리... 야자...

혹시 참여하시고 싶은 분은 덧글 다시라.

아이들에게 허락을 받도록 최선을 다해 보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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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2

<여성의 임노동은 매우 값싸기 때문에 자본에 유리하다. 여성들의 임금은 여성들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지불받고, 노동력의 가치 면에서 남성보다 낮은 상황에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노동의 이런 면들은 명백히 자본에 유리하다. 왜냐하면 임금 수준을 전체적으로 낮추어 주기 때문이다. 비치는 여성이 자본에 이런 이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9쪽)
<기혼여성 노동자의 경우 국가보험과 사회보장 제도에 의해 남편의 피부양자로 간주되어 여성이 실업 상태에 있을 때 그녀의 재생산 비용은 남편 임금으로부터 충당된다. 그러므로 기혼여성을 고용하는 개별 자본가는 여성의 임노동이란 아내와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이용해서 임금을 매우 낮게 지불하고, 여성이 하나의 노동자로서 자신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여성들이 재정적으로 남편(혹은 동거인)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가족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으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낮은 임금을 지불받게 되는 것이다.>(이 역시도 비치의 견해) 
(40쪽)
⇒ 그런데 이러한 비치의 주장이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가족이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가족만을 단순히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공동체(코뮌)를 염두에 두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미셀 바렛이 비치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봐서) 또한 비치가 단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주장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하다. 만일 비치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문제 삼는다면,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이중적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남성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착취 받는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가사노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이중적 구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개량적인 측면이 강하다. 만일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체계를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자본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하여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화시키거나, 아니면 동일 임금 체계의 영역에서 벗어난 노동자들(하위 주체)의 상대적인 임금 삭감을 하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가 아니다(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성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에 기여한다는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기본적인 전략은 노동을 개별화하는 데 있다. 자본은 자기 자신을 보편자(인간 실천 활동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 활동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착각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초역사적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동자를 추상적이고 순수한 개별적 개인(예를 들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개인)으로서의 개별자로 만들고자 하고, 또한 만든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가 인간(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되는 사회적 인간, 즉 유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부터 보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간(개인)은 사회적 인격(사회적으로 인간임을 인정받는 보증서와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 비인간이 된다. 자본은 바로 자기가 이러한 보편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이것을 자본의 물신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자본은 노동자에게 보편성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은 보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는 자본의 보편성과 완전히 다르다. 이 보편성은 인간 실천 활동(생산 활동, 노동)의 결과물로서의 보편성이며, 절대적 보편성이 아닌 역사적 보편성(상대적 보편성)이며, 과정으로서의 보편성이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보편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의 보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노동은 보편성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발전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산물인 노동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으로 대표되는데, 이 임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은 노동자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1대1의 계약 관계를 통해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노동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노동자의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노동의 보편성을 자본으로부터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노동에는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임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에는 임노동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필수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노동이 있다. 이 노동은 임노동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철저하게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삶을 계획하며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인간 유적 존재의 보편성을 현실화시키고 실현시키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노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은 여성의 노동, 특히 여성의 가사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노동이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노동이며, 인간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노동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을 생산하는 노동이며, 계급의식을 형성하며 보편화시킬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는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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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대하여...

오늘 비가 오고 바람도 좀 불고,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뭐 마음이 좀 거시기하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에 선배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불혹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불혹이란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40대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지만 불혹에 관한 이러한 뜻이 적절한 것이 아닐 것 같다는 것이 그 선배와 내가 얻은 공통의 결론이었다.

그 결론인즉슨, 불혹이란 어느 누구도 유혹(?)해 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유혹해 주지 않는다는 것,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유혹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유혹해 줄 사람과 별로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선배는 혼자서 산을 갔다온 후에 혼자서 어디에선가 술을 먹고 있을 것이며, 나는 여기서 이렇게 불질을 하고 있다.

 

40대에는 왜 서로서로가 유혹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40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유혹을 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 일찍 늙어 버려서 쉰 내가 풀풀 나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어서일까^^...

 

얼핏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니지 않을까...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무한한 적대적 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1등이 되어야 한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약육강식의 생존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생존 양식을 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러니까 남에게 어쨌거나 약점을 잡히지 말아야 한다.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유혹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특히 가부장적 조직에서는 이 정도가 더 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놓고 말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와 같이 아프다고 말하게 되면, 겉으로야 네가 많이 아프구나

하겠지만 돌아서서는 나잇살 먹어서도 아직 철딱서니가 없다고 소문나기 십상이다.

그러면 은근하게 사람들에게 따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아픔이라는 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 곧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아픔을 잊고자 하는데 그 아픔을 기억하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 싫어서일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 아픔은 배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자꾸 외로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특히 권력을 가졌다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혹이란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이 외로움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내 생각엔 수다를 떨어야 외로움이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침묵은 외로움, 우울증을 낳는 병원균이라 생각한다.

 

지금 그 선배에게 전화해서 수다를 떨어보자.

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소시민이지 않는가*^^*..

지금 책가방을 싼다.

 

불혹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불혹에 대한 투쟁 승리!

 

반 불혹 집회로!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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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되기의 필요조건.

개강을 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가을하늘처럼 아이들의 모습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아이들 없는 학교는 앙코 없는 찐빵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고,

실 없는 바늘이다.

아이들의 싱그러움은 학교를 싱그럽게 만들고 선생을 싱그럽게 만든다.

또한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이 푸르고 싱그러워야 

선생도 한 학기 동안 싱그러워질 수 있다.

교육이란 아이들과 선생 모두 서로에게 싱그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이들과 선생 모두 서로에게 싱그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권력을 쥔 선생이 먼저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이지 싶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건네기 위해서는 선생은 끊임없이 수신(修身)해야 한다.

수신이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다.

즉 자신을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몸과 마음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이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점쟁이보다도 더 잘 선생의 상태를 잘 안다.

그리고 개코보다도 더 정확하게 선생의 냄새를 잘 맡는다.

아이들은 선생의 눈빛이나 옷 입은 상태를 보고서

선생의 몸 상태나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직감적으로 알아낸다.

 

만일 선생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최고조가 아닐 경우

아이들은 선생 말이나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날 수업은 그걸로 끝이다.

이런 상태가 두서너 번 되풀이되면 한 학기 수업은 말 그대로 망한 것이다.

아이들은 선생이 자신들에게 집중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선생이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선생의 몸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아이들의 몸과 마음도 콩밭에 가기 마련이다.

 

선생이 몸과 마음의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서 자신들에게 집중해 나갈 때

아이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면서 선생과 아이들 사이에는 믿음이 쌓여가게 된다.

믿음이 쌓여갈 때 아이들은 공부에 집중하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집중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푸르고 싱그러워지면서 아주 활발해진다.

그러면 이러한 아이들의 상태가 선생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더욱더

최선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맑스가 말한 대로 교육자가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민주주의이며 이 민주주의를 아이들과 선생 모두 일상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현장 활동이란 다름 아닌 학교에서 아이들과 이러한 민주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학기에는 나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의 마음도

콩밭으로 갔고, 그래서 수업은 거의 엉망의 상태가 되었다.

이는 아이들의 강의 평가에 고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거의 꼴찌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고통이었고 슬픔이었으며 나의 삶에 많은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었다.

 

이제 이번 학기에는 내 삶에 상처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삶에 상처를 남기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 아이들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된다.

자신의 고통을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떠넘기는 어리석고 사악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가을하늘처럼 푸르고 가을햇살처럼 청명한 2학기를 만들어야지.

 

 

예전에 끄적였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래서 그냥 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위해, 나를 위해 나를 장작으로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서^^...

 

# 박남준 시인의 <흰 부추꽃> 노래를 듣고 #  - 2001. 3. 13. 화 -

 

그래도 그때
푸르던 때 있었습니다

 

해와 달 별 서슬 푸르게 차갑던 시절
서툴던 우리 삶 어쩔 줄 몰라
상처 주고 상처 받고 고통 받고 고통 주며
슬픔으로 얼룩지던 밤

 

그렇지만
그 상처 고통 슬픔 옹글옹글 모아
소주 막걸리로 빚어
서로에게 힘과 양식되어
삼십촉 희미한 백열등 희망과 사랑으로
서로 어깨 맞대고 보듬으며
서러운 노래
시리도록 푸르게 불렀던 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서투른 삶 더 서툴어지고
옹글옹글 모여 희망과 사랑을 빚었던
그 상처와 고통과 슬픔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밤거리에서
쓰레기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무심한 발길에 걷어 채이고
행여 묻을세라 청소부가 쓰레기통에 처박고

 

이 상처 고통 슬픔 모아
도끼 만들어
세상을 도끼질하고
나를 베어내어
아궁이 장작불에 던져져
세상 상처 고통 슬픔 빚어
화롯불 따스함 전해 줄 수 있을지
희디흰 재로 뿌려져
푸른 숲이 될 수 있을지

 

그래도
이 세상 도끼질하여
나를 베어 장작 만드는 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때
푸르던 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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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순된 존재

좀전에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하면서 책을 읽다가

연구실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던 참이었다.

(연구실은 내 이름으로 된 연구실이 아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프로젝트에

선정된 여러 선배들이 학교로부터 배정받은 연구실인데,

이 선배들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아서 자리 지킴이로 나와서

공부하는 곳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엄청 모여드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연구실이 속해 있는 문과대 건물에서 아이들의 한자 능력 검정 시험이 있는 것이었다. 교회 차량에서 내린 아이들은 교회 선생님(?, 요즘은 교회에서도 아이들을 모으기 위해 한자도 가르치는 모양인가?)이 나눠 주는 수험표를 들고 고사장 안으로 하나둘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한자의 뜻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 능력을 측정한다고 저 난리들인지... 학부모의 교육열(?)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좀더 좋은 곳에 취직을 해서 생존경쟁에 밀리지 않고 먹고살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이란 오죽할까...

그런데도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안타깝고 씁쓸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이건 사교육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그렇다고 사교육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학교와 집이라는 사회의 모든 영역(아이들에게는 학교와 집은 거의 대부분의 인간 관계를 맺는 곳이 아닌가 한다)에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 그래서 아이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 인간해방, 여성해방, 노동해방 등의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의 미래도 불투명해 보인다는 것이 너무 서글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또한 서글프고 자괴감이 생기게 만드는 것은 그 아이들이 앞으로 나의 밥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1월에 고3 수능이 끝나면 빛을 갚기 위해 돈을 벌러 이러한 사교육 시장으로 가야 하는 처지다.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 강사들이 적게는 기백만 원에서 기천만 원의 빛을 지고 살아서 어쩔 수 없이 사교육 시장으로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사교육 시장으로 안 나가려면 정규직 교수가 되는 길밖엔 없는데, 이게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 먹고사는 것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내 존재의 실존적(?) 모순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비단 나뿐만이 그러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디서부터 이 모순의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인가?

 

이 모순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나의 업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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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1

이 글은 얼마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 것입니다.

< > 부분은 아래의 책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고,

화살표(==>)로 된 부분은 제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  

 

『페미니즘과 계급 정치학』(미셀 바렛 외 지음, 신현옥?장미경?정은주 편역, 여성사, 1995)

 

Ⅰ. 미셀 바렛 : 오늘날의 여성 억압

 

■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문제점>

 

<“비록 자본가 계급 남성과의 결혼이 여성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그녀를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녀 자신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부르주아 남성의 부인들은 대부분 임노동자나 월급쟁이처럼 자신의 생계비를 벌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한다. 그래서 사실상 여성들은 (나이나 전문 직종의 훈련 부족이라는 추가적인 불리함과 함께) 본질적으로 존재해 온 프롤레타리아트이다.”(크리스틴 델피, The Main Enemy)>
(28쪽)

⇒가부장적 착취 체계 : 자본가 계급과 결혼한 여성은 자본가 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PT 계급의 일원으로서 PT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부장제 개념을 특정한 배경 하에 사용하는 방식은 최근의 이론 작업에서 상대적으로 드물어지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현대 자본주의를 ‘가부장제’로 좀더 일반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들이 많다. 이렇게 할 경우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첫째,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관계의 조직과는 완전히 독립된 지배 체계로 이해되며, 따라서 이런 분석은 앞서 논의했던 생물학주의처럼 보편적?초역사적 양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남성지배 체제로서 가부장제를 구성하려고 할 때, 이 개념은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경직성을 띠게 된다. 이런 문제는 최근에 유물론적 페미니즘에 정신분석학적 전망을 통합해 정식화해 보려는 복잡한 시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가부장제를 현재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버지의 지배로서의 가부장제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로서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논의가 근본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가부장제 개념을 맑스주의 분석과 결합하여 사용하려는 최근의 시도들 가운데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 Einsenstein)이 편집한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입장』(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은 이런 주제 하에 여성억압과 자본주의에 대한 몇 가지 흥미 있는 글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결국 대립적인 두 이론적 접근 방법을 화해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딜fp마에 봉착하고 있다. 아이젠슈타인 자신은 가부장제란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것이며, 오늘날 ‘성역할에 기초한 남성권력’에 의존하고 있고, 또 핵가족 내에 제도화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의에서 가부장제는 어느 정도까지 자율적인 체계를 형성하는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이젠슈타인은 가부장제가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이용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단순히 언급하고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급은 자본주의가 곧 가부장제이다라는 주장과는 병존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이젠슈타인은 가사노동을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관점에 따라 매우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가부장제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가부장제’를 자본주의로부터 분석적으로 독립시키는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외재적인 남성권력 체계로서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쪽과 가부장적 조직관계가 자본에 기능적이라고 주장하는 쪽 사이에서 그녀의 분석은 동요하고 있다.>
(29~31쪽)

⇒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단지 기능적 결합이라거나 (서로 독립적으로 병존하면서) 어느 쪽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그런데 이것을 애초에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켜 버린다면, 환원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기초는 (현실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또는 새로이 생산하는 개별적 여성의 가사노동이다. 이 속에서 개별적 여성의 노동력은 착취되고, 사적인 것으로 타자화된다. 이러한 착취와 타자와의 해체를 통한 여성해방은 곧 자본주의의 기초를 해체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즉 여성해방은 곧 노동해방과 직결된다. 이는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라고 불렸던) 기존의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을 남성?정규직 노동자로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노동계급의 외연과 내연의 양 측면 모두에서 그 규정을 새로이 구성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 기존 맑스주의에서의 노동해방을 통해 여성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여성해방을 통해서는 노동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

⇒ ① 페미니즘(특히 이리이가레)이 처하고 있는 난점 - 여성과 여성과의 관계(연대)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위 논문의 3장 1절에 나오는 상품 관계 도식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 ②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을 통한 공동체 형성은 개별적 가족, 개별적 여성의 가사노동의 해체를 통한 여성의 주체화와 그러한 가사노동의 공공화?사회화를 통해 가능하다. 학위 논문 3장 1절에 나오는 상품 관계 도식을 참조해 보면 일단 보편의 자리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억압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에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란 여차저차한 현상이 어떤 경우에 나타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른 조건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능주의라기보다 오히려 환원주의이다. 이 경우에 성별 관계(gender relation)는 자본의 작용 결과로 환원되고 있다.>
(38쪽)

⇒ 환원주의적 설명에 따라 성별 관계가 자본의 운동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타자에 머물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이때 노동자의 의식은 ‘사물화된 의식’(즉자적 의식)에 머무르고 만다), 주체로서의 여성을 타자에 머물도록 한다. 이럴 경우 맑스주의 운동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며, 결국 자본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돼 버리고 만다.

⇒ 노동자의 이중적 모순 : 노동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와 비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 사이의 모순(이때 노동자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은 → 계급과 젠더 사이의 모순으로 나타나며 → 이는 곧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 이러한 모순의 지양(해체)(지배와 억압의 지양)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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