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지난달 31일 서울 서초구 이명현 순직해병 특별검사팀에 출석하고 있다. 2025.10.31. 연합뉴스
이명현 특별검사팀(해병 특검팀)이 채 상병 순직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을 구속기소했다. 해병 특검팀이 출범한 지 넉 달 만에 1호 기소다. 사건이 발생한지 2년 4개월 만이다.
정민영 특별검사보는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특검 사무실에서 정례브리핑을 열고 "특검은 2023년 7월 19일 발생한 채수근 해병 사망 사건과 관련해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및 군형법상 명령위반죄로 오늘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또한 박상현 당시 제2신속기동부대장(전 해병대 7여단장), 최진규 전 포11대대장, 이용민 전 포7대대장, 장모 전 포7대대 본부중대장 등 해병대 지휘관 4명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불구속 기소했다. 다만 박모 전 포7대대 간부와 신모 포병여단 군수과장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불기소했다.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권리대행 방해 혐의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했다.
임 전 사단장을 포함한 해병대 지휘관 5명은 지난 2023년 7월 19일 경북 예천군 보문교 내성천 유역에서 집중호우로 인한 실종자 수색작전을 실시했다. 이들은 당시 수색작전을 하던 해병대원들이 구명조끼 등 안전장치를 착용하지 않은 채 허리 깊이의 수중수색을 하게 한 업무상과실로 채모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사망하게 한 혐의를 받는다.
또한 이들은 당시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이모 병장에게 30일간 입원, 6개월 이상 정신과 치료 진단을 받는 등 정신적 상해를 입힌 혐의도 함께 받았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맨왼쪽)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군사법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선서하고 있다. 2025.10.17. 연합뉴스
임 전 사단장은 합동참모본부·제2작전사령부에서 발령한 단편명령에 의해 제2신속기동부대에 대한 작전 통제권이 육군 50사단에 이양됐는데 현장 지도, 수색방식 지시, 인사명령권 행사 등을 통해 작전을 통제·지휘한 혐의도 받았다.
정 특검보는 임 전 사단장 혐의에 대해 "작전통제권을 육군에 이양한 상부의 단편명령을 위반해 실질적으로 작전을 통제·지휘했다"며 "대원들의 안전보단 언론 홍보와 성과를 의식해 무리한 수색을 지시했고 '바둑판식 수색' '내려가면서 찔러보면서 수색' 등 수중수색으로 이어지게 된 각종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해병대원들은 사고 전날부터 수중수색을 하고 있었고 사진도 여러 언론에 보도됐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수색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묵인·방치했다"며 "특검은 임 전 사단장 작전 지휘가 업무상 과실에 해당하고 채수근 해병 사망의 원인이 됐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박 전 여단장에 대해선 작전 지침을 불명확하게 전파했고, 안전대책 없이 임 전 사단장의 무리한 수색지시와 포병부대에 대한 질책을 하달했다고 봤다.
사단장과 여단장이 실종자 수색을 압박해서 대대장·중대장 등 현장 지휘관들이 안전장비를 확보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입수를 시켜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정 특검보는 임 전 사단장에게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가 적용되지 않은 데 대해 "일반적인 직무 권한 자체는 있다고 판단되는데, 당시 작전 통제를 하고 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법리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단편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임 전 사단장은 작전통제권을 넘기고 이 작전에 대해선 통제하면 안 되는 의무가 있었다고 본 것"이라며 "단편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것을 명령 위반으로 의율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직권남용보단 명령 위반으로 의율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특검팀은 당시 채 상병이 속한 포7대대를 포함해 포11대대, 73보병대대 등에서도 수중수색 등 위험한 상황이 있었던 점, 임 전 사단장이 공범들과 주요 참고인들의 진술을 회유한 정황 등을 추가 규명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포렌식을 통해 임 전 사단장이 경북경찰청의 해병대 압수수색 당일 자신의 휴대전화에 있던 해병대원들의 수중수색 모습이 담긴 현장 사진을 보안폴더로 옮겨 이를 은닉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했다.
특검팀은 이 외에도 임 전 사단장이 수중수색 관련 영상기사의 링크를 수신하고, 채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직후 이용민 전 포7대대장과 통화해 '니들이 물 어디까지 들어가라고 지침을 줬냐'는 등 수중수색을 인식했다는 증거를 추가로 확보했다.
정 특검보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사건을 수사했고 기존 수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며 "특검은 법과 원칙에 따라 사건 공소유지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2024.1.9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한편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된 윤석열은 오는 11일 해병 특검팀의 출석 요구에 응해 대면 조사를 받는다.
특검팀은 이날 오후 언론 공지를 통해 "윤 전 대통령 변호인 쪽에서 내일 오전 10시에 특검에 출석하겠다고 알려왔다"고 밝혔다. 윤석열은 특검 사무실 지하를 통해 비공개로 들어갈 예정이다.
윤석열 측 변호인단이 특검팀의 세 번째 통보에 응하면서 해병대원 순직사건과 관련한 수사 외압 의혹의 정점인 윤석열에 관한 첫 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윤석열 측은 지난달 23일과 지난 8일 출석해 조사받으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변호인들의 재판 일정 등을 이유로 불응한 바 있다.김민주 기자
11월 4일 미국 뉴욕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조란 맘다니가 당선되자 언론 지면과 사회관계망 서비스 화면은 온통 '맘다니'라는 낯선 이름으로 도배됐다. 몇 달 전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 예비경선에서 맘다니 시의원이 쟁쟁한 다른 주자들을 제치고 후보로 선출됐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만 해도 다들 '만다니'인지 '망담니'인지 이름마저 헷갈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름을 모르면 상식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할 지경이다. 그만큼 자칭 '민주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 유일체제 시대에 뉴욕시장이 됐다는 사실이 세계인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뉴욕시장 선거 있기 며칠 전인 10월 25일에는 아일랜드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단일후보 캐서린 코놀리가 압승을 거뒀다. 아일랜드에서는 노선이야 달랐더라도 어쨌든 반영국 독립투쟁에 뿌리를 둔 두 우파정당, '피어너 팔'(흔히 '공화당'이라 소개된다)과 '피너 게일'(흔히 '통합아일랜드당'이라 소개된다)이 오랫동안 교대로 집권해왔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재정위기 이후 줄곧 신페인당, 사회민주당, '이윤보다 인간-연대' 같은 좌파 정치세력들이 지지를 늘리더니 급기야 이들이 함께 지지한 코놀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NATO의 군비 확장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아일랜드공화국 대통령의 등장은 맘다니 당선과 함께 또 다른 신선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떠들썩한 주목을 받을만하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뉴욕과 아일랜드를 넘어 과연 어떤 보편적이며 중장기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런 이변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분석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한데 뜬금없이 '서울의 맘다니'를 자처하고 나서거나 다른 이들의 '맘다니'론에 훈수와 핀잔을 토하는 글들은 많아도 정작 두 사건을 관통하는 특정한 민주주의 제도의 중대한 역할에 충분히 눈길을 주는 경우는 찾기 쉽지 않다. 그 제도란 바로 선거제도다.
▲4일(현지시간) 뉴욕 시장으로 선출된 조란 맘다니 민주당 후보가 브루클린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열린 축하 연설에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AFP=연합뉴스.jpg
맘다니와 코놀리, 즉석결선투표제도를 통과하다
뉴욕시장 선거를 앞둔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민주당 주류가 지지한 후보는 앤드루 쿠오모였다. 쿠오모는 예비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본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맘다니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는데, 어쨌든 예비경선에서 민주당 주류 성향 유권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쿠오모 말고 다른 유력 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 주류를 심판하고자 한 진보적 유권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맘다니 말고도 유능하고 원칙 있는 후보가 한 사람 더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 처음 뉴욕시의원으로 당선돼 12년 동안이나 시의회에서 활약했고 2021년에는 뉴욕시 회계감사관으로 선출된 브래드 랜더가 그 사람이었다.
랜더는 시의원으로 있으면서 뉴욕시에 참여예산제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고, 노동자와 세입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정 활동을 펼쳤다. 이번 선거에서 맘다니 지지를 선언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2021년 회계감사관 선거에서는 랜더의 공식 지지자였다. 맘다니와 랜더의 차이라면, 맘다니는 민주당 후보이기 이전에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의 회원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데 반해 랜더는 좀 더 전통적인 민주당 좌파 혹은 리버럴 좌파라는 정도였다.
한국이었다면 예비경선에 참여한 진보 성향 시민들이 맘다니와 랜더, 둘 사이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평소 시의회나 시청에서는 막역한 동지 관계였던 두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서로를 깎아내리다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됐을 가능성이 높고, 유권자들은 둘 중 누가 쿠오모를 꺾는 데 더 유리한지 따지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시 민주당 예비경선에서는 후보와 유권자 모두 이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된다. '즉석결선투표제(instant-runoff voting)'로 시장 후보를 선출하기 때문이다. 즉석결선투표제는 '대안투표제(alternative voting)' 혹은 '선호투표제(preferential voting)'라 불리기도 한다. 한데 '대안투표제'나 '선호투표제'라고 하면, 이름만 들어서는 도대체 어떤 투표제도인지 감이 잘 안 온다. 반면에 '즉석결선투표제'는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달해준다. 이 제도는 한 마디로, 유권자가 투표를 한 번만 하고도 1차 선거와 결선을 동시에 치르는 효과를 거두게 하는 투표제도다.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가 되려면 예비경선 투표자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결선투표제 원리와 같다. 그러나 뉴욕시 민주당은 시장 후보 결선을 따로 치르지 않는다.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적힌 시장 후보 모두에 대해 선호 순위를 매긴다. 가령 맘다니를 1순위 지지 후보로 기표하고, 랜더를 2순위로, 쿠오모는 가장 낮은 순위로 기표하는 식이다. 이런 유권자의 선호도 표시 덕분에 즉석결선투표제에서는 굳이 결선투표를 따로 실시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예비경선에서는 1순위 투표만 개표했을 때 맘다니가 44%, 쿠오모가 36%, 랜더가 11%를 득표했다. 맘다니가 1위를 달리기는 했지만, 민주당 시장 후보가 되는 데 필요한 과반은 획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각 1위, 2위를 한 맘다니와 쿠오모를 제외하고 나머지 후보들을 탈락시킨 뒤에 이 후보들을 1순위로 지지한 표 가운데 2순위로 맘다니나 쿠오모를 지지한 표를 두 후보의 득표에 각각 합산했다. 그랬더니 맘다니 56%, 쿠오모 44%라는 결과가 나왔고, 맘다니가 과반수 지지를 받는 시장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이런 투표제도 아래에서 경쟁했기에 맘다니 진영과 랜더 진영은 굳이 복잡한 정치 게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두 진영은 예비경선 캠페인 기간부터 서로 연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진보적 유권자들은 맘다니와 랜더를 1순위나 2순위로 기표하는 단순한 선택을 통해 이런 연대를 손쉽게 정치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맘다니가 시장 후보로 결정된 뒤에 랜더는 맘다니 선거운동에 발 벗고 뛰어들었다.
뉴욕시 민주당에 이런 투표제도가 도입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6년 전인 2019년에 뉴욕시는 시민투표를 통해 처음으로 각 당의 시 공직자 예비경선에서 즉석결선투표제를 실시할 수 있다는(정확히는, 투표자가 복수 후보를 선택하는 투표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는)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2021년 민주당 예비경선부터 즉석결선투표제로 시장 후보를 선출했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이런 방식에 따라 맘다니를 시장 후보로 선택했다. 소선거구제-단순다수대표제만 완강히 고집하는 것 같은 미국에서도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이렇게 조금씩이나 기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뉴욕이 이제 막 이 길에 들어섰다면, 아일랜드는 즉석결선투표제의 본고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 역사가 오래 됐다. 아일랜드에서는, 이번에 캐서린 코놀리가 승리한 대통령 선거를 오래 전부터 즉석결선투표제로 치러왔다. 이 제도 덕분에 양대 정당, '피어너 팔'과 '피너 게일' 말고도 노동당 같은 상대적 소수 정당 역시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 선거에서는 코놀리 후보가 워낙 압도적인 1순위지지 표(63%)를 얻는 바람에 결선투표에 해당하는 추가 개표 절차를 진행하지 않아도 되었다.
뉴욕뿐만 아니라 이런 아일랜드 사례까지 확인하고 나면, 이제 눈길이 우리 자신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투표자 과반수 지지로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 즉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개혁을 외치는 이들의 오랜 숙원이다. 지금 당장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면, 가장 확실하게 국민투표를 통과할 개헌 의제는 결선투표제 도입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시야를 조금만 더 확장하면, 결선투표제 도입 취지를 구현할 또 다른 방안으로서 아일랜드 대통령선거식 즉석결선투표제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결선투표를 실시하면 국력을 낭비할 뿐이라는, 지겨운 반론에 굳이 대꾸할 필요 없이 우리도 대통령을 즉석결선투표제로 뽑는 게 어떨까.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구현하려는 제도적 틀은 이처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허용해온 상식의 한계보다 훨씬 더 광범하고 다양하다.
▲지난 6월 25일 뉴욕 한 공립학교 근처에서 조란 맘다니 선거운동원들이 임대료 동결 등 구호를 걸고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SWinxy, CC BY 4.0
아일랜드 정치의 역동성을 일군 단기이양식 비례대표제
아일랜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일랜드 하원의원 선거의 독특한 투표 방식도 짚어볼까 한다. 아일랜드는 '단기이양식 비례대표제(single transferable voting)'로 하원의원을 선출한다. '단기이양식'이라니, '대안투표제'나 '선호투표제' 같은 말보다 더 아리송하기만 하다. 일단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제도가 어쨌든 비례대표제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독일식 소선거구-정당명부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북유럽식 광역별(대선거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비례대표제다.
아일랜드식 비례대표제는 우선 광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마찬가지로 선거구마다 복수의 하원의원을 선출한다. 보통 한 선거구에서 3명에서 5명의 하원의원을 선출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의 중선거구제처럼 유권자가 한 명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고 종다수로 2위 득표를 한 후보까지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유권자들은 마치 즉석결선투표제의 경우처럼 복수의 후보에 대해 선호도를 기표한다. 단, 이 경우에 복수의 후보를 선택하는 이유는 한 후보를 과반 득표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다.
이 대목에서 좀 복잡한 논의가 등장한다. 아일랜드식 비례대표제에서는 각 선거구마다 복수 당선자의 당선 기준이 될 '기준수'를 산출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산정 방식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3인 선거구에서 기준수는 26%이고, 4인 선거구에서는 21%, 5인 선거구에서는 17%다(데이비드 파렐, 선거제도의 이해, 전용주 옮김, 한울, 2012. 203쪽). 즉, 3인 선거구에서 당선자는 득표율이 26%를 넘어야 한다. 1순위 지지 표가 이미 기준수, 즉 26%를 넘는다면, 그 후보는 단번에 당선이 확정된다.
문제는 나머지 2인의 당선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두 가지 방향에서 차순위 지지표를 각 후보에게 합산해 기준수인 26%를 넘는 또 다른 당선자들을 산정해낸다. 한편으로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후보의 득표 중 26%를 초과하여 '남은' 표를 2순위 지지 기표 내용에 따라 다른 후보에게 배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1순위 지지 표를 가장 적게 받은 후보부터 탈락시키면서 그가 받은 표를 2순위 지지 기표 내용에 따라 남은 다른 후보에게 배분한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국 최종 합산이 26%를 넘는 3인의 하원의원 당선자를 확정한다.
글로만 봐서는 누구든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모의 투표를 한 번만 해보면, 단박에 익숙해질 수 있다. 아일랜드 국민 500여만 명이 다 수학 천재라서 이런 투표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민주 사회의 시민이면 누구나 경험으로 익힐 수 있는 제도이기에 아일랜드에서 지금껏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이런 아일랜드 하원의원 선출 방식이 다른 비례대표제들과 크게 다른 점이 무엇인지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독일식이든 북유럽식이든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결국 유권자가 '하나의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투표제도다. 그러나 아일랜드식은 비례대표제임에도 유권자가 '복수의 후보'를 선택한다. 유권자는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기보다는 자기가 선호하는 전체적인 정치 지형을 염두에 두고 그에 걸맞게 후보들에게 순위를 매긴다. 결과적으로 다른 비례대표제와 마찬가지로 승자 독식을 피하고 다당 구도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유권자의 선택 논리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들과는 다르다.
아무튼 아일랜드는 독립 이후 계속 이런 비례대표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피어너 팔'과 '피너 게일'이 교대로 집권하는 와중에도 상대적 소수 세력이나 신진 세력의 원내 진출 통로를 열어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통해 현실 정치에 계속 개입하면서 양대 우파정당의 정책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대표적 정치세력이 20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좌파-노동계급 여론을 대변한 노동당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아일랜드식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새 세대 좌파 정치세력들이 노동당을 대체하며 성장하고 있다. 남북 아일랜드 통일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페인당이 2020년 총선에서 제1당(1순위 지지 24.5%)으로 부상할 만큼 약진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세대교체를 내걸고 노동당에서 분리한 사회민주당이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보다 많은 1순위 지지(4.8%, 노동당은 4.6%)를 기록하는가 하면 트로츠키주의 정파들의 연합인 '이윤보다 인간-연대'가 원내에 계속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이번 대선에서 코놀리 후보의 승리를 이뤄낸 주역들이다.
'그럼에도' 선거제도 개혁은 중요하다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필생의 과제였던 선거제도 개혁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비례위성정당의 일상화라는 난장판으로 귀결된 이후에 '선거제도 개혁'은 다시 꺼내기 쉽지 않은 구호가 되어 버렸다. 혁명의 원대한 꿈을 꾸는 이들은 여전히 이따위 하찮은 '개량'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현실 정치를 파고들자고 하는 이들은 더 이상 선거제도를 탓하지 말고 '한국형' 정치 지형에 익숙해지라고 훈계한다.
그러나 문제는 진보정당의 성장 여부가 아니다.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의 더 풍부하고 생생한 발전을 위해서다. 그런 성숙해진 민주주의가 있기에 좌파나 신진 세력이 진출하기도 수월해지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선거운동원의 호별 방문을 허용하는 민주주의였기에 맘다니 시의원 같은 신진 후보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고, 독특한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는 민주주의였기에 금융-재정위기 속에 신페인당 같은 대안 세력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의 '가난한' 정치 지형에 던져진다면, 맘다니는 '공직 박탈이 확정된 선거법 위반 사범'일 뿐이고, 북아일랜드 투쟁에서 잔뼈가 굵은 신페인당 고참 당원들은 '현실 정치에 무능한 늙은 운동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 모든 아수라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선거제도 개혁을 다시 의제에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과제들의 긴 목록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바꾸는 일은 여러 과제들의 하나일 수는 있어도 절대로 생략되거나 주변으로 밀릴 수는 없다.
장석준 배곳 산현재 기획위원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코스피는 상승 출발해 개장 직후 4000선을 재돌파했다. 코스피는 이날 오전 9시 3분 현재 전장보다 59.79포인트(1.51%) 오른 4,013.55에 거래되고 있다.연합뉴스
1. 붕괴
주가는 오르거나 떨어진다. 이런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다. 주가가 올랐다. 상승했다. 급등했다. 폭등했다. 내렸다. 하락했다. 급락했다. 폭락했다 등이다.
그렇다면 '붕괴'란 어떤 의미인가? 붕괴란 무너지고, 내려앉고,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집이 붕괴하고, 건물이 붕괴하면 폭삭 무너져 내려앉는 것이다. 폭락이나 급락해서 망해버렸다는 뉘앙스다.
아래 <주간조선> 기사는 주가지수 3900선이 붕괴됐다고 말하면서 앞에 "내 돈이 휴짓조각 됐다"고 표현했다. 4200정도가 고점이었는데 300포인트, 그러니까 7% 정도 떨어지면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 투자한 돈은 휴짓조각이 된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해석하면 2000선에 머물던 주가가 4200까지 치솟았다가 3900선으로 밀리자 내 돈이 갑자기 휴짓조각이 됐다는 말이다. 그럼 불과 1년전만해도 2000선에 머물렀던 그 시기 내 돈은 무엇이었다는 말이지?
▲기사는 "장 초반 낙폭을 키워가던 코스피는 10시 25분 전장보다 5.67% 하락한 3887.95를 기록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주간조선> 보도 갈무리
아래 <뉴스핌> 기사는 코스피 하락폭이 확대되며 장중 3820선이 붕괴됐다고 표현한다. 코스피 4000선이 붕괴됐다는 표현은 그나마 어색하지라도 않다. 그러나 코스피 3820선이 붕괴됐다면, 3810선도, 3790선도 붕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퍼센티지로 따지면 주가지수가 0.2% 정도만 떨어져도, 매 10단위로 주가지수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가지수가 0.2% 떨어지면 주식시장이 무너지고, 내려앉고, 허물어져서 망해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언론이라니…
▲10월 22일 자 <뉴스핌> 기사뉴스핌 홈페이지 캡처
반면 주식시장의 전문가들은 주식시장이 이렇게 최고점 대비 7% 정도 하락하는 시점에 한결같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가지수가 '조정'받고 있다".
'조정'과 '붕괴'는 투자자에게 주는 어감뿐만 아니라 본질적 의미가 다르다. 한국어를 배운 사람 중 조정과 붕괴를 똑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조정은 급등했다가 숨 고르기를 한다는 의미지만, 붕괴는 종말, 끝, 죽음이다.
그런데 왜 기자들은 '붕괴'와 같은 선정적인 단어를 주로 쓰는 것일까? 전문가들처럼 투자이론을 배우지 못해서? 아니다. 저널리즘 교육을 할때도 기자들에게 이렇게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세계 최대의 통신사인 미국의 <AP통신>은 매년 AP스타일북이라는 것을 발간하는데, 거기에도 경제 현상을 표현할 때는 언론 소비자들에게 절제된 표현을 하라고 명기되어 있다.
예를 들어 2분기 이상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거나 그럴 조짐이 확실히 보여야 경기침체(recession)라는 단어를 쓰라고 조언한다.
경제의 상당 부분은 소비자, 투자자, 기업인들의 소비 및 투자 심리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건 언론이다. 그래서 언론은 최대한 절제된 표현을 통해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에 6%가 폭락했다면 폭락이 맞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3900선이 붕괴되고, 3820선이 붕괴되고, 3800선이 붕괴되고, 3750선이 붕괴됐다고 말하는 건 장삿속 가득한 선정주의다.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자신들의 기사를 자극적 헤드라인으로 팔아먹기 위해 쓰는 천박한 상업주의다.
2. 부글부글
▲<한국경제> 11월 6일 자 기사 "서울 자가 대기업 김부장에 눈물?"…2030 '부글부글'한 이유한국경제 홈페이지 캡처
그러나 언론이 이렇게 과격한 형용사를 쓰는 이유가 꼭 선정주의 때문인가? 다른 이유는 없을까?
여기 또 다른 형용사가 있다. '부글부글'. 100도 이상에서 물이 끓을 때처럼 화가 넘쳐 나 있는 상황을 묘사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라는 웹소설 기반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2030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직장 구하기도 어려운데 극 중 50대의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은 서울에 자기 집도 있으면서 그런 사람에게 무슨 눈물을 짓느냐는 힐난이다. 드라마까지도 세대 갈등을 부추긴다고 비판하지만 이 기사가 헤드라인과 부제를 통해 주려는 메시지는 '청년들이여 분노하라'는 것이다.
누구를 향해? 자신들의 삼촌이나 아버지뻘들을 향해. 자신들이 좋은 직장을 선택할 기회를 미리 빼앗은 것 같은 세대를 향해. 자신들의 좋은 집을 미리 빼앗은 것 같은 중장년층을 향해. 자신들의 연금도 빼앗을 것 같은 기성세대를 향해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언론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런 식의 분노를 부추겨왔다. 그리고 그 분노의 기준, 분노의 방향은 이른바 보수 정치권에서 정치적 이유로 설파해 온 이른바 '세대 갈라치기'와 맥을 같이 해왔다. 공교롭다. 2030과 나이든 보수세대가 연합해서 4060을 사회적으로 왕따시켜보려는 보수 정치권의 선거 전략과 흡사하다.
이들은 586을 겨냥했다. 기초연금을 받는 가난한 노인들을 겨냥했다. 지하철을 타는 65세 이상 노인들을 겨냥했다. 집이 있는 중장년 세대를 겨냥했다. 앞으로 청년세대들은 국민연금도 못 받는다고 불안과 공포를 부추긴다. 그 모든 게 기성세대 중장년층의 잘못이라는 투였다.
그러나 기초연금을 받는 노인들이 기초연금을 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니다. 국민연금이란 제도는 90년대 초반 도입돼서 90년대 중반이후에나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후세대인 40~50년대 생들은 뼈 빠지게 노동했지만 돈을 벌 기회가 많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GDP는 북한에도 뒤졌다.
IMF전후 취업한 중장년세대는 1200조 원의 국민연금 대부분을 낸 주축 세대다. 상당수의 그들은 고등학교때까지 학교에서 몽둥이로 교사들에게 맞고 살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불심검문을 당하면서 경찰에게 맞았다. 학생인권조례도 없었고, 대학교 장학금도 희귀했다. 복지제도도 열악했다.
실업급여제도가 도입된 연도도 겨우 1995년이다.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고 직장에서 쫓겨나도 어디에 하소연도 못 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극중에 나오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52세 김부장'도 만약 그 나이에 실직하면 국민연금을 받는 65세까지 남은 13년을 뭐로 먹고 살아야 할 지 막막한 가장일 뿐이다. 거기에 만약 갚아야 할 아파트 대출금까지 많이 남아 있다면 중산층에서 하층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다.
그렇다고 2030 청년세대가 무슨 죄를 지었나? 그들의 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다. 이들이 선망하는 직장 대부분은 수도권에 밀집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서울 및 수도권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평균 12억 원이라는 서울 아파트를 자가 소유하려면 매년 5000만 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4년 모아야 한다. 결혼이 아니라 연애도 포기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런데 집도 없고 직장 구하기도 힘든 청년들의 미래를 그렇게도 걱정한다는 이른바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신기하게도 서울 집값이 떨어지는 모든 정책들은 또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집값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집값 하락 조짐에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서울 집값이 오르고 분양가가 오르면 부동산 시장이 호황을 맞고 있다고 환호한다.
그러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세대 간 분노를 부추긴다. 정치권을 향해서는 대화와 타협을 하라고 하면서 본인들은 본인들의 독자와 시청자들을 향해 서로가 서로에 주먹질을 하라는 투다. 자식이나 조카가 삼촌이나 아버지의 재산을 뺏으라는 말인가?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9조는 이렇게 명기하고 있다.
"우리는 취재의 과정 및 보도의 내용에서 지역·계층·종교·성·집단간의 갈등을 유발하거나 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
3.어포더블
▲지난 10월 8일 미국 뉴욕시에서 뉴욕 시장 후보 조란 맘다니가 무료 고속 버스 도입 제안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M57번 버스를 타고 이동 중 승객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적 도시인 뉴욕시의 시장이 된 조란 맘다니의 핵심 캠페인 전략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감당이 되는"(affordable)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감당되지 못했기에 뉴욕시민들은 맘다니를 선택했는가?
우리들은 일상에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주거비가 감당이 안 된다."
"아이들 교육비가 감당이 안 된다."
"요즘 물가가 감당이 안 된다."
맘디니는 약 100만 가구의 임대료를 동결하고, 생후 6주부터 5세까지의 모든 아동에게 무상 보육을 제공하고, 시내버스를 무료로 하고, 공공주택을 확대하고, 시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식료품점을 설립해서 물가를 안정시키고 저렴한 가격에 식료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건 사회주의인가? 맘다니를 공격하는 한국 언론의 주장대로 그의 정체성을 "무슬림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한다면 미국적 자본주의를 만끽해 온 뉴욕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맘다니의 마술에 걸려 사회주의자들이 되어버린 것인가? 갑자기 이교도적 이데올로기에 매혹되어 맘다니를 시장으로 뽑아버린 것인가?
그럴리가.
미국의 뉴욕시민들은 여전히 미국 자본주의의 신봉자들이다. 부자를 동경하고, 투자를 좋아하고, 돈을 사랑한다. 다만 그들의 형편이 어려웠을 뿐이다. 주거비가 감당이 안 되고, 교육비가 감당이 안 되고, 물가가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1년여 전 뉴욕에서 우버 택시를 탔을때 그의 월 소득을 물어보니 우리 돈으로 600~700만원 정도였다. 그가 사는 원룸의 월세가 400만 원이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2명의 친구와 함께 3분의 1씩 부담한다고 했다. 월 소득 600만 원으로 혼자 월세 400만 원짜리 원룸에 산다는 건 감당이 안 된다.
그런데 앞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를 낳는다면? 가정을 꾸린다면? 지금의 소득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근로소득 상승은 쥐꼬리,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미래가 불투명하면 좌절하기 쉽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의식주는 삶의 기본이다. 그런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뉴욕은 당장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기본도 안 된 도시다. 뉴욕 시민들이 조란 맘다니를 선택한 이유다.
물론 그가 임기 내 약속을 다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재원 조달이 문제다. 슈퍼리치나 법인에 대한 증세도 이미 저항을 맞고 있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각종 보조금 중단을 공언해왔다. 그의 실험은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가 제시한 것은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이었다. 힐난이 아니라 힐링이었다.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었다. 갈등이나 대립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조정을 통해 화해와 통합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핵심 단어는 뉴욕시민들의 삶의 형편, 어포더빌리티(affordability)였다. "당신 소득으로 뉴욕에서 살 형편이 되나요?"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4. 한국인으로 어포더블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 삶의 기본은 의식주다. 먹을 것, 입을 것, 나와 내 가족이 저녁에 들어와 살 곳. 그게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언론은 빵값과 라면값은 몇백 원만 올라도 비싸다고 난리 치지만 신기하게도 집값은 1~2억 원이 일주일 새 올라도 눈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울 수도권 집값의 하향 안정화를 외치는 정치인, 전문가 등을 '좌파' 또는 '폭락론자'로 낙인찍는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처럼 자기들의 주요 소비자인 독자, 시청자, 대중의 절반 이상(중장년층과 가난한 노인들)을 힐난하며 공격하는 언론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이른바 '정론지'로 자처한다. 일베같은 극우 커뮤니티처럼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부정확한 정보로 왜곡된 분노를 돋우는 '정론지'는 없다. 형용모순이다.
이들이 왜 이러는지, 그 정치경제적 이유는 앞의 설명으로, 지난 한국사의 경험으로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이다. 다만 독자나 시청자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정론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 경제가, 우리가 실질적 피해를 입는다는 점이다.
소비도, 투자도, 경제도 심리가 절반이다. 경제는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대중의 심리가 부정적이면 경제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경제 현실이 진짜 그런지, 객관적으로 폭락한 것인지, 붕괴한 것인지, 아니면 먹고 살만한 것인지, 서울 집값은 미친 집값이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따져보는 습관을 가져보자. 많은 언론들이 특정 목적을 위해 일부러 감정적이고 선정적이라면, 독자나 시청자들이라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경제 현상들을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한국인으로 '어포더블'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24일 경기 고양시 사무실에서 1차 인터뷰 중인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 2025.10.24.정숙 시민기자
김영섭 케이티(KT) 대표이사가 무단 소액결제 해킹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밝히고 지난 4일 KT 이사회에서 대표이사직 연임을 포기했다. KT는 초기 대응까지 최소 7일이 걸렸고, 지난달 11일 1차 브리핑에서 피해자를 278명이라고 발표했다가 이후 2~3차 발표에서는 피해 규모를 확대 발표하는 등 사후 대응 한계를 드러내 소비자 불신을 더욱 키웠다.
2017년부터 KT 관련 의혹들을 추적해 온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은 이번 KT 해킹 사태에서 보여준 미온적인 사후 대응도 민영화로 인해 국민기업이 '주인 없는 기업'이 되면서 공적 역할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는 IMF 이후 한국 사회가 떠안은 '구조적 병폐'들이 KT와 같은 국민기업의 민영화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단언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지난달 24일 경기 고양시 사무실에서 안 전 청장을 만나 공공성과 공익이 사라진 민영화의 민낯을 짚어 보며 KT를 비롯한 국민기업을 개혁해 공공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4일 김영섭 대표이사 사의 표명 이후엔 추가로 서면 인터뷰를 통해 KT 무단 소액결제 해킹 사태에 대해 문답을 주고 받았다.
IMF 이후 주인 없는 기업 된 국민기업
정권 낙하산, 국민기업 사적 이용
-먼저 '국민기업'의 개념을 설명해 주세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 금융의 조건으로 한국 정부에 공기업 민영화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포스코, KT, 케이티엔지(KT&G) 같은 국가 기간산업 기업들이 지분을 외국인들과 국민들에게 개방하면서 줄줄이 민영화 됐습니다. 그 결과 이들 기업은 '국민기업'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인 없는 기업'이 됐습니다. 국민이 주식을 가지고 있지만 경영에는 참여할 수 없으니 형식적인 주주일 뿐 실질적인 통제권은 없는 거죠. 국가가 100% 소유하던 공기업이 주식회사로 전환되면서 국민과 외국인 투자자들이 소유권을 조금씩 나눠 가진 구조로 바뀐 겁니다."
-민영화 이후 어떤 문제점이 발생했나요?
"국민 개개인이 경영에 참여할 수 없다 보니 주식은 국민이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기업이 됐습니다. 이런 틈을 타서 권력을 잡은 정권이 낙하산 인사를 내려보내고 그 경영진들이 회사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국민기업은 국민의 것이 아니게 된 거죠."
황창규 전 KT 대표이사(전 삼성전자 사장 출신 ). 연합뉴스 자료사진
황창규 전 대표, 사적 재판에 KT 자금 사용
조선일보 사주 사위 회사 고가 매입 의혹도
특정 로펌 출장소 된 KT 감사실…내부감사 무력
-구조적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KT를 언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민영화 이후 KT는 정권의 놀이터가 됐습니다. 이명박 정부부터 낙하산 대표이사를 내려보내고 그 사람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이사들을 뽑고 그 이사들이 다시 대표이사를 재선임하는 방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사회를 장악한 사람들이 대표이사를 다시 뽑으니 권력의 사슬이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포스코, KT, KT&G 등을 사적으로 이용했나요?
"회사를 이용해 돈을 빼돌리고, 알짜 회사를 헐값에 팔고, 반대로 부실 회사를 비싼 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회사 자산을 빼돌렸습니다. 하지만 오너가 없으니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결국은 국민의 자산만 사라지게 된 겁니다."
-KT 내부의 대표적인 비리 의혹은 어떤 것이 있나요?
"황창규 전 대표이사 시절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입니다. 국회의원들에게 불법 후원금을 주기 위해 이사들에게 쪼개서 돈을 나눠준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변호사 비용을 KT 돈으로 냈습니다. KT는 국민기업인데 사적 범죄를 방어하는 일에 국민의 돈을 쓴 거죠. 이런 일은 오너가 있는 사기업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계열사 거래입니다. KT는 앤서치마케팅 같은 자회사를 조선일보 사주의 사위가 운영하는 사모펀드에 헐값으로 팔고 나중에 다시 고가로 사들였습니다. 이건 단순한 경영상의 판단이 아니라 사실상 권력층과 언론사 간의 유착 거래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사 돈을 빼돌려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는 구조가 돼버렸죠."
"인사와 감사 시스템도 무력화됐습니다. 감사실이 특정 로펌 출신 변호사들로 구성돼 있어 회사 내부를 감사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경영진의 법적 방패막이가 된 겁니다. 사실상 KT의 감사실은 특정 로펌의 출장소나 다름없는 거죠.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비리도 드러날 수 없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민영화지만 실제로는 국가 자산이 사유화 돼 책임은 분산되고 이익은 특정 집단으로 집중됩니다."
지난 9월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해킹 대응을 위한 과기정통부-금융위 합동 브리핑을 마친 류제명 과기정통부 제2차관과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왼쪽 네번째)이 대화하고 있다. 맨 왼쪽은 롯데카드, 맨 오른쪽은 KT 관계자. 2025.9.19. 연합뉴스
보안 불감증이 부른 KT 무단 소액결제 해킹
김영섭, 공적 역할 도외시…실적 위주 구조조정
KT 사태, 통신업계 전반 문제…보안신뢰 흔들어
-지난 9월 18일 KT에서 무단 소액결제 및 해킹 정황이 발견됐는데 이번 사태의 본질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번 사건은 펨토셀이라는 소형기지국 장비를 해킹해 소비자 비밀번호를 빼내 통장에서 자금을 결제하는 신종 범죄행위 수법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KT 자체 서버를 침해한 흔적도 보여서 유심칩 전체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불법 소액결제와 해킹은 보안 불감증이 근본 원인입니다. 통신기술 진전에 따라 범죄도 고도화되는데 문제의식 없이 대응에 미진했던 것입니다."
-해킹 정황이 9월에 신고됐지만 공식 대응은 한참 뒤에 이뤄졌는데 사후 대응이 늦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식 대응이 늦었다는 것은 책임 회피를 위함이거나 사건을 감추기 위한 것이고 고객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보안 불감증과 고객 무시 사고에서 비롯된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섭 대표이사 취임 후 검찰 출신, 정치권 출신 인사 등을 주요 보직에 대거 영입하면서 '낙하산 인사' '검찰 기업화'에는 열을 올리고 정작 보안사고에는 미온적 대응으로 위기 대응의 한계를 보였습니다.
"김영섭 대표이사는 엘지시엔에스(LG CNS)에서도 국책사업인 차세대 사회보장시스템 구축 지연으로 LG를 부정적 이미지로 평가 받게 한 인물이고, KT에서도 공적 역할을 도외시한 실적 위주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특히 검찰 출신 특정 로펌 변호사들을 대거 주요 보직에 배치하여 KT를 검찰기업화 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김영섭 KT 대표이사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 대한 종합감사에서 질의에 답하고 있다. 2025.10.29. 연합뉴스
-어떤 제도적 보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SK텔레콤도 유심을 무상으로 교체를 해주고 위약금을 면제하는 조치를 했는데 KT의 조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통신 자체 보안도 중요하지만 핀테크 기업들은 인공지능(AI)과 디지털화폐 시대에 통신기기 금융서비스에 대한 보안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대응 방식과 속도에 고객 신뢰와 기업의 성패가 달렸습니다. 최적의 보안체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건설 현장의 실적위주 안전 불감증처럼 통신업계도 보안 불감증이 작금의 사태를 야기했다고 봅니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세계적인 AI기반 보안시스템 업체와 협력체계 구축은 물론이고 불법 펨토셀같은 장치에 대해 상시 감시체계를 위한 인력보강을 하는 한편 소비자들에게 보안이 강화된 유심을 공급하여 주고 더 나아가 기기 사용시 안면인식이나 지문인식 같은 2차, 3차 인증시스템을 구축하여 보안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KT만의 문제가 아니라 통신업계 전반의 보안 신뢰를 흔들고 있는 큰 사건입니다."
-이번 사태가 KT 중장기 경쟁력에 미칠 영향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이번 사태는 KT만의 문제가 아니라 통신업계 전반의 문제입니다. 사후 수습과 대책 마련의 결과에 따라 고객들의 신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뢰 회복에 따라 사운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KT의 방대한 데이터와 전국망을 활용하여 AI로 비정상 상황을 미리 체크하고 학습 시키면 사전 감지한 데이타로 신속하게 비정상 상황에 대처하는 보안 솔루션 분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로 사고와 자살률 급증
공공 책임 문제, 문재인 정부도 침묵·방조
국민기업 책임 있는 주주가 주인이 돼야
-KT의 노동 환경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죠?
"한때 KT는 복지 좋은 직장으로 꼽혔지만, 하청과 외주화의 전형이 됐습니다. 외주화를 통해 인건비를 줄이려다 보니 정규직을 줄이고 협력업체를 늘렸죠. 그 결과 노동자들의 사망 사고와 자살률이 급증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통신선이나 와이파이 설비 작업은 보통 2인 1조가 기본입니다. 한 사람은 위에서 작업하고 다른 사람은 아래에서 안전을 확인해야 하는데, 비용을 아끼려 한 사람이 혼자 작업하는 구조가 되니 일을 하다가 떨어져서 다치거나 죽고 감전 사고를 당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산업재해가 아니라 기업 구조의 문제입니다. 공공성을 잃은 국민기업이 국민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9년 4월 17일 KT상용직노조, KT전국민주동지회 관계자들이 1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KT의 청문회 방해공작 진상규명 및 아현화재ㆍ채용비리 황창규의 신속한 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재인 정부 시절에서도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면서요?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민간 기업이니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말뿐이었어요. 통신망은 국가 안보의 핵심 인프라이기 때문에 이런 대응을 한 문재인 정부는 명백한 직무 유기이자 방조입니다.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타격받는 게 통신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민간 기업이니까 손을 놓고 있는건 공공의 책임을 포기한 행위죠. 민간기업이라며 개입하지 않을 게 아니라 오히려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보를 위해 개입해야 할 사안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국민기업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KT를 국민기업 개혁의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회사의 정관을 바꾸어 이사회 구조를 완전히 새로 짜야 합니다. 대주주, 정부, 노동조합, 소액 주주, 정보통신업 협회 등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이사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사회가 투명해지고 감사가 제 역할을 하면 정권이 손댈 여지가 사라집니다."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면요?
"첫 번째는 이사회의 다원화입니다. 국민연금, 현대자동차. 신한은행 같은 대주주뿐 아니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노동조합, 소액 주주 단체, 통신업 협회 등이 추천하는 각계 인사들을 이사회에 포함해야 합니다. 정권의 낙하산 인사가 아니라 국민이 참여하는 이사회가 경영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감사가 본연의 기능을 다해야 합니다. 특정 로펌과의 유착을 단절하고 세무조사에 준하는 감사가 되도록 회계 전문가로 감사위원회를 설치해 지금처럼 경영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감사는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노동 이사제 도입입니다. 현장 노동자의 안전과 인권 문제를 이사회 차원에서 다뤄 노동자를 회사의 동반자로 봐야 합니다. 이번 정부에서 이런 방식으로 KT의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최초로 노동자들의 염원과 한을 풀어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KT 무단 소액결제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법 기지국 아이디 개수와 해킹에 노출된 피해자 수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1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최민희 위원장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범행에 쓰인 기지국 아이디(셀 아이디) 4개 외에도 추가 불법 아이디가 발견돼 현재까지 모두 20개가량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이날 서울 한 KT 대리점 모습. 2025.10.16. 연합뉴스
KT를 국민기업 개혁의 시금석으로 삼아야
국민기업 개혁, 공공 가치 바로 세우는 일
-왜 KT를 바꾸면 KT&G와 포스코 등도 바뀐다고 생각하나요?
"KT는 기업 규모와 성격상 국민기업 재도약의 실험 모델로 적합합니다. 정권의 입김을 막고 국민의 감시가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2017년부터 KT 관련 의혹을 추적하면서 KT가 자산을 사적으로 어떻게 빼돌렸는지, 계열사 거래를 어떻게 악용했는지 추적해 왔습니다. KT를 구조조정할 방대한 자료도 모았습니다.
또한 KT도 망 사업자라 AI, 디지털화폐 시대, 스카이라이프를 통한 K-문화 수출로 미래 먹거리를 KT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비전도 가지고 있습니다. KT가 표준모델로 안착하면 다른 국민기업도 이 방식을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KT를 추적하며 모은 많은 정보와 자료로 국민기업의 개혁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주식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기업의 방향을 결정할 권한과 감시할 권리가 있어야 진짜 주인입니다. 지금 국민은 주주로 이름만 남았고 권력과 그 하수인들이 국민기업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국민기업에게 공공성과 투명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KT는 민영화로 효율을 높인다고 했지만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 이권과 이익을 몰아주는 부패의 통로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국민기업 개혁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정의와 민주주의, 공공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국민기업은 국민이 진짜 주인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국민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세현-박인규의 정세토크 시즌 2] "대통령은 9.19 복원 경축사에 넣었는데 참모들은 반대…참모들이 '방해'하나"
이재호 기자 | 기사입력 2025.11.10. 08:27:54
에이펙(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받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핵추진잠수함을 정상회담에서 제안했고 다음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를 승인하면서 군에서는 30년 숙원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인규 <프레시안> 고문과 대담에서 에이펙 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이 장면을 꼽았다.
그는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기로 돼 있는데도 이 대통령이 북한과 중국 때문에라도 핵추진잠수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한중관계가 우려되기도 했지만 저렇게 트럼프 대통령을 흔들어서 핵잠 기술을 주겠다고 말하게 하는 건 참모가 '말씀자료'를 써서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순발력은 이재명 대통령의 개인기"라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소위 일선 행정의 달인으로 각인돼 있어서 국제정치적 식견이나 외교술은 약하다고 봤는데, 이번에 보니까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며 "소년공으로 일하면서 터득한 생존의 기술, 살아남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이런 순발력이 생겼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과 관련 "이번 에이펙 회의가 그동안 자주외교를 위한 역량의 양적 축적이 질적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됐는데, 자주국방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야 한다"며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 전 장관은 이번 에이펙에서의 또 하나의 포인트로 미중 정상회담을 짚었다. 그는 "시기적으로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005년 부산에서 열렸던 에이펙 정상회의 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중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2010년이 되면서 중국의 GDP(국내총생산)가 미국의 40%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세계 2위가 됐다"며 20년 동안 미중 간 상황이 변화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박 고문은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고율의 관세를 통해 중국을 무릎꿇리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중국의 대두 수입 재개 및 희토류 공급으로 관세 전쟁을 봉합했다"며 "이는 미국이 당초 목표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 역시 "미국이 중국에 무릎을 꿇은 거라고 볼 수 있다. 무역 전쟁을 1년 휴전한 건데, 내년이라고 중국이 희토류를 미국에 양보하겠나?"라며 "앞으로 대략 10년 정도 지나면 미국이 중국을 저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한편 정 전 장관은 지난 9월 이재명 정부의 관료들을 자주파와 동맹파로 나누면서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다고 발언한 데 대해 "복수의 관계자들로부터 들어 보니 9.19군사분야합의 복원에 반대하는 참모들도 있었는데 이재명 대통령이 경축사에 넣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9.19군가분야합의 이행을 국가장책으로 공표했는대, 참모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러면 참모들이 트럼프라는 '피스메이커'를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보조자(assistant)가 되기는커녕, '페이스 디스럽터'(disruptor, 방해자)역할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한마디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대담은 5일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사)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왼쪽) 전 통일부 장관과 박인규 <프레시안> 상임고문. ⓒ프레시안(이재호)
박인규 : 지난 9월에 더불어민주당에서 개최한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세미나에 참석하셔서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셔서 화제가 됐다.
정세현 :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 9.19 군사분야합의의 선제적·단계적 복원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게 8.15 광복절로부터 한달이 넘도록 이행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복수의 관계자들로부터 들어 보니 9.19군사분야합의 복원에 반대하는 참모들도 있었는데 이재명 대통령이 경축사에 넣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공식연설은 바로 국가정책이다. 대통령은 9.19군가분야합의 이행을 국가장책으로 공표했는대, 참모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면 참모들이 트럼프라는 '피스메이커'를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보조자(assistant)가 되기는커녕, '페이스 디스럽터'(disruptor, 방해자)역할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한마디 했던 것이다.
박인규 : 일부에서는 동맹파와 자주파로 나누는 것 자체가 자주파는 '동맹 생각 안하고 북한만 추종하는 세력'으로 프레임을 씌우려 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세현 : 내가 규정하는 동맹파는 한미관계를 더 중시하는 세력들이고 자주파는 남북관계를 더 중시하는 세력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미관계만, 남북관계만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자주파는 전체가 100이라면 남북관계를 70-80 정도로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동맹파는 70-80 정도를 한미관계에 주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비율의 문제지 대미 종속, 대북 추종 이런 의미가 아니다.
자주파는 미국 이야기 들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한미관계를 중시하지만 남북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동맹파도 남북관계를 완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한미관계를 더 중시하면서 남북관계를 풀어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복잡하게 말할 수 없으니 자주파-동맹파로 이야기한 것이다.
20년 전에 있었던 논쟁을 다시 끄집어 내는 이유가 뭐냐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남북관계가 평화적 관계로 안정되고 미국의 간섭이 줄어들 때까지는 언제든지 자주파 동맹파로 나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박인규 : 지난달 말에 열렸던 에이펙(APEC)에서 경주 선언이 채택됐다. '자유무역'이라는 말은 못 넣었지만 무역 확대를 강조했다. 에이펙 계기로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핵추진잠수함 추진을 언급하기도 했다. 에이펙에서 한국의 외교적 성과는 무엇이며 앞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정세현 : 한미 정상회담도 중요하고 한중 정상회담도 의미가 있지만 미중 정상회담이 한국에서 열렸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005년 부산에서 열렸던 에이펙 정상회의 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중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2010년이 되면서 중국의 GDP(국내총생산)가 미국의 40%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세계 2위가 됐다.
이후 2012년 11월 시진핑(習近平)이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뒤 2013년 3월 중국의 국가주석직도 겸직을 하게 됐다. 그러더니 2013년 6월 미국으로 가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시진핑은 미국과 중국이 '신형 대국관계'를 구축하자고 했다. 이는 과거 미국과 소련의 경우 '제로섬' 게임의 대국관계였지만 미중은 '윈-윈'하는 대국관계를 구축하자는 의미였다.
그런데 중국을 소위 '대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과 함께 "지금은 내가 완전히 무릎 꿇은 것은 아니지만 잠시 네 밑에 들어갈 수 있어.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너를 이길 수 있어. 그때까지는 내가 너 앞에서 먼저 인사할 수 있어. 그러나 우리를 대국 취급해줘"라는 의미가 숨어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더 놀랐던 것은 시진핑이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이 나눠 써도 충분할만큼 넓다"고 이야기했던 지점이다. 이건 미국에 하와이를 기준으로 서쪽은 신경쓰지 말고 동쪽으로 나가라는 의미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미국이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등에 보냈던 미군을 철수하고 '아시아로의 회귀'(피벗투아시아·Pivot to Asia)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30일 부산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 내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2017년 트럼프 첫 번째 집권기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가 '인도-태평양 개념'을 내놨는데, 이걸 트럼프 대통령이 받아서 '인도-태평양전략'이라고 부르며 중국을 에워싸고 있는 국가들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고 중국 경제는 계속 성장했고 따라서 군사력도 커졌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생존해 있던 1987년, 개혁개방이 시작된지 8-9년 만인 1987년 '두 개의 백년론'을 내놨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는 '소강(小康)사회' 건설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는 '대동(大同)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2021년 중국은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달성했다. 중국은 빈부격차는 있지만 국민들이 그런대로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면서 '소강사회'를 건설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동사회 건설인 셈이다.
'대동사회'란 중국의 휘하에서 천하가 태평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대체할 팍스 시니카(Pax Sinica: 중국중심의 국제질서)를 2049년까지 건설하겠다는 것이 덩샤오핑이 제시한 두 개의 백년론인데, 시진핑은 팍스 시니카 달성을 '중국몽(中國夢)'이라고 규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같은 과정으로 보면 이번 미중정상회담은 미국이 중국에 무릎을 꿇은 거라고 볼 수 있다. 무역 전쟁을 1년 휴전한 건데, 내년이라고 중국이 희토류를 미국에 양보하겠나? 앞으로 대략 10년 정도 지나면 미국이 중국을 저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으로 본다.
이런 상황을 트럼프가 예상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상대에 대한 파악을 먼저 한 뒤 자신의 능력을 분석함)할 수 있는 지혜가 없는 셈이다. 중국이 국제적인 경쟁력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세계의 공장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대중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다.
박인규 :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고율의 관세를 통해 중국을 무릎꿇리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중국의 대두 수입 재개 및 희토류 공급으로 관세 전쟁을 봉합했다. 이는 미국이 당초 목표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
정세현 : 이번 APEC을 계기로 한국이 미중 정상 간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인데, 이 틈새를 파고 들어가서 한중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과는 핵추진잠수함 문제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승낙 받았고, 시진핑과 관계를 잘 관리해서 적어도 윤석열 정부 이전으로 한중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에이펙 회의는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출발점이 된 것으로 본다.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소위 일선 행정의 달인으로 각인돼 있어서 국제정치적 식견이나 외교술은 약하다고 봤는데, 이번에 보니까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 소년공으로 일하면서 터득한 생존의 기술, 살아남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이런 순발력이 생겼다고 본다.
일부 행운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한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에는 잘 됐다. 지금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에 아직도 있었다면 이렇게 못했을 것이다. 즉석에서 시진핑과 농담하면서 시진핑으로 하여금 한중관계에 협조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능했겠나.
박인규 : 이번 에이펙을 계기로 각종 정상회담과 회의가 열렸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을 만한 일이 있었다면?
정세현 :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추진잠수함 이야기를 꺼낸 장면이다.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로 돼 있는데도 북한과 중국 때문에라도 핵추진잠수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한중관계가 우려되기도 했지만 저렇게 트럼프 대통령을 흔들어서 핵잠 기술을 주겠다고 말하게 하는 건 참모가 '말씀자료'를 써서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런 순발력은 이재명 대통령의 개인기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이 대통령 주최 정상 특별만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축사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박인규 :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트럼프에게 당신이 '피스메이커'를 해라, 내가 '페이스메이커'를 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핵추진잠수함 이야기를 꺼냈다. 의도가 있어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세현 : 트럼프의 과시욕 성정을 건드려서 받아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평가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기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한미 외교사에서 그 대목이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라고 본다.
또 이 대통령이 미국과 관세협상에서 절대로 시한에 쫓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협상 전략에 입각해보면 협상할 때는 '원칙의 굴래'나 '시한의 굴레'를 쓰면 안되는데, 이 대통령은 협상대표단에게 시한을 의식하지 말고 경제적 합리성과 국익만을 생각하고 버티라고 했다. 결국 미국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박인규 : 한미 양측은 핵추진잠수함 도입과 한국의 방위비를 높인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정세현 : 방위비 올리는 것은 미국 요구를 들어주는 것 같지만 한국의 군사대국화로 연결되는 길이기도 하다. 대북 저지로만 사용된다면 낭비지만, 무기 산업 발전의 토대를 갖추고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을 찾아오기 위한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려면 방위비 증액이 필요하다.
박인규 : 자주 국방의 초석을 놓기 위한 국방비 증액이라는 뜻인가?
정세현 : 그렇다. 이번 에이펙 회의가 그동안 자주외교를 위한 역량의 양적 축적이 질적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됐는데, 자주국방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러면서 전작권 환수를 시작해야 한다.
원래 노무현 정부 때 한미가 2012년 4월 17일 전작권 환수를 하기로 합의를 해서 발표까지 했얶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이걸 2015년 연말로 미뤘고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는 환수 기준을 시한이 아닌 북한의 비핵화라는 조건으로 바꾸면서 전작권 환수 문제가 표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건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도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 2010년대부터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 전작권을 돌려주는 것이 아시아에서의 군사적인 패권을 유지하는데 불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압박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박인규 : 전작권을 환수하게 되면 유엔사령부는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정세현 : 지금 유엔 사무처나 사무총장은 유엔사와 상관이 없다. 유엔 깃발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유엔의 깃발을 계속 쓸 것인지의 문제가 나올 것이다. 법리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법무부든 대통령 안보실에서든 국제법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현 상황이면 전작권 환수 이야기 못한다. 환수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키려면 유엔사 깃발 내려야 한다.
박인규 :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등 민주 정부들은 안보에 취약하다는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방비를 늘려온 측면이 있다. 이재명 정부도 이같은 흐름에서 국방비를 늘렸는데 이렇게 된 거 핵추진잠수함 문제를 확 질러버리면서 국내 정치에서 우위를 차지해 보자는 생각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 이럴 경우 남북관계에는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정세현 : 북한한테는 아마 굉장히 민감하게 꽂혔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을 공격해 들어오는 '행동'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핵추진잠수함을 만들어서 지금은 재래식 무기를 싣고 다닌다고 그러지만 얼마든지 SLBM(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로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에 제해권을 사실상 뺏길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남한이 자금도 많고 잠수함 건조 능력도 좋기 때문에 군비 경쟁에 돌입하면 북한이 따라오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다. 물론 1~2년 내에 핵추진잠수함 건조가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사람들의 '빨리빨리' 정신 때문에 10년 이상 걸릴 사업의 시간이 단축될 가능성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부터 시작한 '지방발전 20X10정책'을 통해 2033년까지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소위 북한판 '소강사회'를 만드려고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남한이 핵추진잠수함을 만들면 북한 입장에서는 자기들 바다에 들어와서 무슨 장난을 치고 갈지 모르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이를 감시·경계 견제하기 위해 국방 분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북한은 처음에는 강하게 반발하다가 투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외교적 해결책을 찾으려 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남한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있지만.
박인규 : 남북관계에는 악화 요인인데, 이걸 좋게 포장해서 보면 '힘을 통한 평화 추구' 이기도 한 것 같다.
정세현 : 미소 군비 경쟁에서 소련은 군비 경쟁을 계속하다 보면 인민 경제가 망하게 될 것이라 보고 결국 미국에 손을 들게 됐다. 북한도 비슷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핵추진잠수함 도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요구에 순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국방력을 늘릴 수 있는 방위 투자를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감당을 못하게 된다. 지금은 말로 비판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말 가지고 안 되고 군사적으로 대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군비 통제 또는 감축으로 가자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5년 안에 온다고 본다.
12월 중순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어서 내년 초 9차 당 대회를 계획해야 하는데, 다음 당 대회가 열릴 2031년까지 5년 동안 인민들에게 경제 발전 목표를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 전쟁 끝나면 북한이 어디에 손을 벌리겠나.
박인규 : 결국 북한에게도 북미 관계 정상화가 필요해 보인다.
정세현 : 트럼프가 북한이 핵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동결하라는 말을 풀어서 한 것이라고 본다. 즉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니 동결이나 비확산 정도에서 끝내자는 것과 함께 NPT(핵확산방지조약) 체제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있다고 본다.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김정은 위원장이 못나간다고 하면서, 트럼프를 좀 초조하게 만들어서 다른 협상 카드를 내놓게 하기 위해 최선희 외무상을 러시아로 보냈다고 본다. 원래 벨라루스에서 열리는 회의를 앞두고 최선희를 러시아로 보냈는데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러시아 방문이었던 것 같다. 김정은의 방러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는 얘기가 오히려 러시아 쪽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이런 중요한 논의를 하러 간 것은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당 창건 80주년 경축행사가 지난 10월 9일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최선희가 10월 26일 러시아로 떠났다고 하니 트럼프는 27일 말레이시아에서 일본으로 오면서 북한이 회담에 나오면 제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정은 입장에서는 이것보다는 2018년 6월 12일 첫 북미정상회담 당시 싱가포르에서 했던 약속을 받고 싶을 것이다.
물론 북한도 계속 버티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지방발전 20X10정책' 성공시켜야 하는데 이거 하려면 필요한 자금이나 원부자재가 외부로부터 들어와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이든 남한이든 관계 개선을 해야 하는데, 미국은 사실 직접 지원해주고 이러지는 않는다. 러시아는 전쟁 끝나면 모른척 할 거고 중국은 북한을 키워놓으면 대들었던 경험만 있기 때문에 '불가근불가원'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남한과 해야 하는 건데,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입장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박인규 : 북미 간 물밑대화 가능성은 없나?
정세현 : 주유엔 북한 차석대사 자리가 비워져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말을 걸어도 대꾸할 창구가 없었다는 얘기다.
다만 케빈 킴 미 대사대리가 얼마 전에 부임했는데 그는 트럼프 1기 정부 때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밑에서 일하면서 2018~2019년 북미 스톡홀름 실무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보면 뉴욕에서 워싱턴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북한외교관들과 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북한이 트럼프 방한 전 혹시 모를 회동에 대비해 판문점 청소하고 손님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이렇게 보면 북한은 미국이 주려고 하는 반대급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때 합의했지만, 이후 당시 국무장관 폼페이로 등 네오곤의 반대 때문에 입구에도 다가가지 못했던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을 원하는데 이걸 해주겠다는 사인을 안 보내니까 김정은으로서는 이번 트럼프와의 만남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박인규 : 워낙 세계적 혼란기라서 앞으로 많은 외교적 도전이 있을 텐데, 지금은 불통이지만 남북관계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관리할 것인가가 중요할 것 같다.
정세현 : 우리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려면 우선 내년 북미정상회담이 순탄하게 준비될 수 있도록 한국이 아이디어를 내고 로드맵까지 만들어서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이번에 트럼프가 에이펙을 전후해서 내놓은 1) 핵보유국 지위 인정 2) 대북제재문제 논의 등 반대급부가 북한에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2018년 싱가포르 합의로 돌아가서 종전선언 하고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협상을 해야 한다고 미국을 부추기고 설득해야 한다.
이와 함께 북한의 체면 상하지 않게 인도적 지원이라든지 이런 것을 하라고 남한에서도 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북미정상회담으로 아스팔트가 깔리면 남북 민간 차원에서의 버스가 달리고 그 뒤에 관용차가 따라가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말하자면 선북미 후남북(先北美 後南北), 선민후관(先民後官)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박인규 : 트럼프는 내년 중간선거에서 이겨야 하는데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쟁 문제는 어려워졌고 북핵 문제가 그래도 상대적으로 풀기 쉽지 않나.
정세현 : 트럼프가 노벨평화상 받고 싶으면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가 나와야 하는데, 내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 마감일인 10월 10일 이전에 북미수교를 위한 연락사무소 설치 정도가 되면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수상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상 받으면 중간선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트럼프 1기 때 폼페이오 국무장관 같은 네오콘이나 아베신조(安部晉三) 같이 북미관계 개선 반대하는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파놓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 2기 정부에 국무장관이 된 루비오는 극단적인 반북반중(反北反中) 인사라는데, 1기 때 폼페이오가 그랬던 것처럼 루비오도 트럼프와 김정은 정상회담 후 합의이행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거나 북한의 반발을 유도하는 꼼수를 쓰지 못하도록 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2의 아베신조'-'여자 이베신조'라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를 비롯한 극우성향 일본 정부의 북미관계 개선 방해 동향도 견제하도록 한미 간에 긴밀한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추운 날씨를 보인 지난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외투를 입은 채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월요일은 기온이 크게 떨어져 내륙을 중심으로 5도 미만이 된다. 겨울옷을 챙겨야 한다.
이날 기상청은 “북쪽에서 찬 공기가 내려와 오늘 아침 기온은 어제보다 4~8도가량 떨어지고 내륙을 중심으로 5도 미만이 된다. 모레 수요일 아침까지 춥다. 오늘은 경기 동부와 강원 내륙·산지, 남부 높은 산지를 중심으로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곳이 있다. 이들 지역에선 서리가 내리는 곳이 있고, 물이 어는 곳도 있다”고 예보했다.
오늘은 전국이 대체로 맑지만, 제주도는 오전까지 가끔 구름이 많다. 오늘 오전까지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고, 동해 먼바다를 중심으로 매우 강한 바람이 분다. 물결도 매우 높다.
오늘 최고기온은 10~16도로 평년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다. 주요 도시의 최고기온은 서울 11도, 인천 10도, 수원 11도, 백령도 10도, 춘천 12도, 강릉 15도, 청주 12도, 대전 13도, 세종 12도, 전주 13도, 광주 14도, 제주 16도, 대구 14도, 울릉도 11도, 부산 16도, 울산 14도로 예상된다.
수치상 한국의 불평등은 점차 완화되는 추세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여러 계층에서 불평등을 호소하고 있다. 숫자와 현실의 차이는 불평등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표적인 불평등 척도는 소득 지니계수였다. 경제 성장의 결실을 얼마나 평등하게 분배하고 있는지가 지금까지 불평등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소득 지니계수는 최근 14년 동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난 2011년(처분가능소득 기준) 0.387에서 2023년 0.323으로 꾸준히 낮아졌다. 2023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에 따르면 37개 회원국 중 한국은 11번째로 소득 지니계수가 높다. 다른 국가보다 소득 불평등 정도가 높은 편이지만, 미국(0.375), 일본(0.357), 영국(0.355)보다 낮은 수준이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은 것을 뜻한다.
수치상으로는 예전보다 불평등 정도가 나아졌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곳곳에서 양극화 심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 이상 소득만으로 불평등을 측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입체적으로 바라본 불평등...다차원 불평등 지수
지난달 28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다차원적 불평등 지수' 연구는 이 같은 고민에서 시작됐다.
수치상 소득 불평등은 완화되고 있지만, 이것으로 사회 불평등이 완화됐는지는 잘 체감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 BLI)나, UN의 '인간개발지수(HDI)'처럼 교육, 건강, 주거, 사회적 관계, 환경 등 비물질적 요소를 포함한 지표들이 등장했다. 이는 불평등을 소득의 재분배만 기준으로 두지 않고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다.
과거에는 소득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소득 수준에 따라 교육, 경제 등 다른 지표들도 개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개인의 소득 수준이 높아진 현재에는 행복이나 건강이 개선되지 않는 '비동조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소득만으로 불평등이 완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돌봄, 고립, 외로움 등 관계 기반의 '신사회적 위험'이 부상하면서, 사회적 연결의 격차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에 소득을 비롯해 자산, 교육, 건강 등 다양한 차원의 불평등을 수치화해 입체적인 지표를 만든 것이 다차원 불평등 지수다.
소득에서 자산으로 옮겨간 불평등
다차원 불평등 지수는 소득, 자산, 교육, 건강의 네 가지 차원을 중심으로 불평등 지수(지니계수)를 산출하고, 각 차원이 전체 불평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분석했다. 지수가 높을수록 불평등 수준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2011년부터 2023년까지의 추이를 살펴본 결과, 전체 다차원 불평등 지수는 우상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2011년 다차원 불평등 지수는 0.176였으나, 2023년 0.190으로 점차 상승했다. 지금까지 불평등의 척도로 삼았던 소득 지니계수가 완화된 것과는 다른 결과다.
과거 불평등의 주요 요인이었던 소득의 불평등이 완화됐음에도 불평등 정도가 점차 상승하고 있다는 것은 불평등의 주요 요인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다.
다차원 불평등 지수를 형성한 기여도를 보면 자산에 대한 불평등이 전체 불평등에서 가장 높은 기여도를 보이고 있다. 2011년에는 소득의 기여도가 38.9%를 차지하면서 불평등의 주된 요인이었으나, 2023년에는 자산(35.8%)이 소득(35.2%)을 앞질렀다. 2022년에는 소득의 기여도가 31.7%, 자산이 40.3%를 기록하면서 차이가 더 벌어지기도 했다. 더 이상 소득만이 불평등을 결정짓는 주된 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자산 불평등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부동산 가격 상승과 자산 축적의 격차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다차원 불평등 지수 및 차원별 기여도 변동 추이 ⓒ국회 입법조사처
세대별로 달리 느끼는 불평등
다차원 불평등 지수를 세대별로 살펴보면 각 세대가 단순한 소득의 불평등을 넘어 다양한 양상의 불평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연구에서는 ▲노인세대(1960년 이전 출생) ▲386세대(1961~70년생) ▲X세대(1971~80년생) ▲밀레니얼(M)세대(1981~90년생) ▲Z세대(91년 이후 출생) 등으로 구분해 각 세대별 불평등 추이를 분석했다.
Z세대는 전체 세대 중에서 가장 낮은 다차원 불평등 지수를 기록하고 있다. 노인세대가 2023년 0.226으로 가장 높고, Z세대가 0.145로 낮다. 특히 교육 기간과 건강에 대한 불평등 기여도가 세대가 어려질 수록 낮아지는 것도 특징이다.
Z세대는 교육 기간과 건강 면에서 비교적 균형 잡힌 삶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자산 축적이 미흡해 자산 불평등의 기여도가 점차 상승하고 있다. Z세대의 자산 불평등 기여도를 보면 2011년 42.8%에서 2023년 44.7%로 꾸준히 상승했다. 특히 2022년 자산의 기여도는 53.5%까지 차지했다.
이는 향후 자산 격차가 Z세대의 주요 불평등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초기 경력 단계에서의 소득 안정성과 주거 지원, 금융 접근성 개선이 요구된다.
M세대는 다차원 불평등 지수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 2011년 0.125에서 2023년 0.144로 꾸준히 상승했다. M세대는 경력 중반기에 접어들며 소득 격차가 확대되고 있으며, 특히 부동산 가격 상승과 자산 형성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산 불평등의 기여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M세대의 자산 불평등의 기여도는 2011년 34.3%에서 43.8%로 올랐다. M세대의 역시 자산과 소득 격차가 불평등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인 모양새다.
X세대는 소득, 자산과 함께 건강 격차가 세대 내 불평등의 주요 기여 요인으로 부상한 것이 눈에 띈다. 중산층 내 양극화가 심화와 함께 나이가 들면서 발생하는 만성질환 등 건강 문제도 점차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소가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세대별 다차원 불평등 지수 변동 추이 ⓒ국회 입법조사처
386세대 또한 자산 불평등 정도가 점차 높아지는 양상을 보이지만, 소득 불평등 지수도 높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최근 5년(2019년~2023)년 사이 소득 불평등 지수는 32%에서 36% 사이에서 등락을 반복하고 있어 소득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모양새다. 이들은 은퇴 전후의 소득 격차와 부동산 보유 여부에 따른 자산 격차가 불평등을 주도하고 있다. 또 노화로 인한 건강 격차 역시 386세대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인세대는 모든 세대 중 가장 높은 다차원 불평등 지수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세대처럼 불충분한 소득 보장, 자산 보유 격차가 주된 불평등 요인이지만, 낮은 교육 수준과 불균형한 건강 상태로 인한 불평등 지수도 높아 거의 모든 차원에서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교육기간에 대한 불평등 기여도를 보면 Z~X세대는 6~9%대(2023년)를 보이지만 노인세대는 24.2%로 높다. 건강 불평등 기여도도 2023년 12.5%로 어느 세대보다 높은 수준이다.
노인세대가 복합적이고 누적된 불평등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라는 것이 지표로 나타난 것이다.
다차원 불평등 지수는 한국 사회의 복합적 격차가 단일한 소득 재분배 중심 정책으로는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각 세대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삶의 조건과 불평등 요인을 반영하는 맞춤형 불평등 완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소득을 불평등의 단일한 지표로 삼던 것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불평등을 측정하는 노력이 계속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충재의 인사이트] 검찰 항소 남용 관행에 경종, 무리한 기소 드러났고 법리적으로도 타당...민감한 시기 고려 않은 건 '실책'
25.11.10 06:18ㅣ최종 업데이트 25.11.10 06:57
▲검찰이 대장동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항소하지 않은 것을 두고 논란이 이는 가운데 '항소 포기'가 아니라 '항소 자제'가 옳다는 지적이 나온다.연합뉴스
검찰이 대장동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항소하지 않은 것을 두고 논란이 이는 가운데 '항소 포기'가 아니라 '항소 자제'가 옳다는 평이 나옵니다. 최근 대장동 사건의 주요 피의자인 남욱 변호사의 진술 번복 등으로 검찰의 무리한 기소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다, 항소권 남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을 반영한 조처라는 반응입니다. 특히 검찰 내부의 항소 기준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리적으로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검찰개혁이 진행 중인 민감한 시기에 항소를 포기해 논란을 자초한 건 실책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대장동 사건 수사팀은 반발하고 있지만 법조계에서는 이번 조처가 검찰의 잘못된 항소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는 견해가 적지 않습니다. 그간 무분별한 항소로 피고인들이 과도한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입는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검찰에선 1심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무턱대고 항소하고 보는 관행이 이어져 왔습니다. 선고형량이 검찰 구형보다 크게 낮을 경우 혐의 입증이 충분했는지 돌아보기보단 구형 대비 선고형의 비율만 따져 기준에 미달하면 기계적으로 항소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검찰의 대장동 재판 항소 포기는 당연한 결정이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실제 검찰 내규로 정해진 항소 기준을 따르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선고 형량이 구형의 3분의1 이하일 때 항소'하도록 돼있는데 대장동 1심 재판 피고인 전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정민용 변호사의 경우 검찰이 각각 징역 7년과 5년을 구형했는데, 법원은 이보다 높은 8년과 6년을 선고했습니다. 김만배와 정영학 회계사, 남욱 변호사 등 다른 3명에게는 구형의 절반 이상이 선고됐습니다.
항소 포기의 당위성은 검찰 기소가 억지임을 보여주는 정황에서도 확인됩니다. 대장동 민간업자인 남욱 변호사는 지난 7일 열린 정진상 재판에서 "검사가 배를 갈라버리겠다고 했다"며 구체적으로 검찰의 회유 압박에 대해 털어놨습니다. 이 정도면 검찰의 협박이 명확해 진상을 규명하고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입니다. 항소 포기에 반발하는 수사팀과 검찰 간부진에는 당시 수사를 주도한 검사들이 거의 그대로 있습니다. 반인권적 강압 수사의 당사자들이 항소를 하지 않은 데 불만을 품는 건 적반하장에 가깝습니다.
1심 판결문에서도 검찰의 기소가 엉터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검찰이 '이재명 저수지 자금' 등으로 몰아붙였던 428억원에 대해 재판부는 이재명 대통령이 아닌 '유동규 자금'으로 결론내렸습니다. 실제 검찰은 이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나 공소장에서 이 대통령이 뇌물을 받기로 했다는 주장은 넣지 못했습니다. 뇌물을 받은 대가로 공공이익을 몰아줬다고 수백번의 압수수색과 언론플레이를 한 결과치고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검찰이 압박 수사로 얻어낸 진술과 추측으로 짜맞춘 프레임은 이미 크게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대장동 수사팀 비롯한 일부 검사들 반발, 이중적
수사팀의 입장이 무조건 반영돼야 한다는 주장도 터무니 없습니다. 수사 방향과 기소 등에서 수사팀의 의견이 존중되는 것은 맞지만 지휘부 생각이 다른 경우 조율을 거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번 사태는 항소에 대한 일선 수사팀과 대검의 의견이 달랐고, 그 과정에서 서울중앙지검과 대검이 협의해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게 중론입니다. 사의를 표명한 정진우 서울중앙지검장이 9일 입장문을 내고 "중앙지검의 의견을 설득했지만 관철하지 못했다"고 말한 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항소 여부는 정 지검장 전결사항이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는데 그는 결국 대검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수사팀 반발이 표면화되자 뒤늦게 사의 표명으로 빠져나가려는 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대장동 수사팀을 비롯한 일부 검사들의 반발이 이중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지난해 검찰이 김건희의 명품백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황제조사' 하면서 무혐의 처분했을 때 수사팀은 물론 검찰 내부에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지귀연 판사의 황당한 윤석열 석방에 대검이 즉시항고를 포기할 때도 검찰에선 한마디의 이의제기도 없었습니다. 검찰은 그간 여당에서 불법을 저지른 검사를 탄핵하려 하자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집단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대장동 수사팀에서 검찰 지휘부의 책임론을 거론하며 공개 입장문을 냈습니다. 불의하고 비겁한 검찰의 민낯을 보여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이재명#윤석열#김건희
검찰이 대장동 사건의 항소를 포기한 데 대해 수사팀이 항의 입장문을 내고, 서울중앙지검장이 사의를 표명하는 등 '검란'(檢亂)으로 비화할 조짐이 보인다. 검찰 출신인 한동훈 전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장동 사건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재명 방탄' 프레임으로 몰아 정쟁으로 키우며 검사들의 항명을 부추기는 양상이다. 검찰개혁 과제 등이 추진 중인 상황에서 불필요한 논란으로 번지지 않도록 조기 대처가 필요해 보인다.
검찰, 대장동 1심 항소 포기…수사팀 반발
중앙지검장도 사의 표명 등 집단 반발 관측
앞서 8일 0시를 기해 서울중앙지검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유동규 씨와 김만배 씨를 비롯한 대장동 사업 민간업자들에 대한 항소를 포기했다. 이들의 1심 판결 항소 시한은 7일 자정까지였다.
형사 사건은 판결에 불복할 경우 선고일로부터 7일 이내에 항소해야 한다. 항소를 포기하면 형사소송법상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 따라 1심보다 형량을 높일 수 없다. 유동규 씨, 김만배 씨 등 피고인 5명은 전원 항소한 상태다.
대장동 사건 수사를 주도했고 공소유지도 담당한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가 앞장서 반발했다. '윤석열 사단'에 속한 대표적 친윤 검사로 통하는 그는 8일 새벽 검찰 내부망 글을 통해 전날 오후 서울중앙지검장이 항소장을 결재했지만 대검 반부패부장이 재검토하라며 항소 제기를 불허했다고 적었다. 또 "대검이 법무부에 항소 여부를 승인받기 위해 보고를 했고, 검찰과가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항소의 필요성을 보고했으나 장관과 차관이 이를 반대했다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강 검사의 글이 올라온 뒤 대장동 수사·공판팀도 이날 오전 입장문을 배포해 "모든 내부 결재 절차가 마무리된 이후인 전날 오후 무렵 갑자기 대검과 중앙지검 지휘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항소장 제출을 보류하도록 지시했다"며 "항소장 제출 시한이 임박하도록 지시 없이 기다려보라고만 하다가 자정이 임박한 시점에 '항소 금지'라는 부당하고 전례 없는 지시를 해 항소장을 제출하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정진우 서울중앙지검장이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5.10.23. 연합뉴스
공판팀의 반발 뒤인 이날 오전엔 정진우 서울중앙지검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항소 포기에 대한 반발로 읽힌다. 검찰 안팎에서는 정 검사장을 시작으로 당시 항소 포기 결정에 관여한 검사들이 연이어 사의를 표명한다거나, 수사·공소 유지 등을 담당하는 일선 검사들의 반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에 항소 포기 소식이 전해지자 "11월 8일 0시 대한민국 검찰은 자살했다"고 적었다. 또 "이재명 한 사람을 위한 항소 포기라는 더러운 불법 지시를 한 대통령실, 법무부, 대검, 중앙지검 관련자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한다"며 "권력의 오더를 받고 개처럼 항소를 포기해주는 이따위 검찰을 폐지하는데 국민이 반대해줘야할 이유가 뭐냐"고 했다.
이미 1심서 중형 선고…항소 실익 없어
무차별 항소에 대한 문제도 고려된 듯
검찰 수뇌부가 항소 포기 판단을 내린 데에는 대장동 사건 피고인들의 선고 형량 등을 고려했을 때 항소에 실익이 없다는 법무부 쪽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언론 민들레> 취재를 종합하면, 법무부는 내부적으로 1심 판결이 기존 대법원 판례에 충실했고, 형량도 구형과 비교해 충분히 선고된 만큼 검찰의 항소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의견을 검찰 쪽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장동 1심 재판부가 특경가법상 배임죄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하고 형법상 일반 업무상 배임죄만 인정했지만, 양형 자체는 형량이 센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에 준해 적절한 선고가 내려졌다는 판단이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3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5.10.31 [공동취재] 연합뉴스
특경법상 배임죄는 이득액이 5억 원 이상 50억 미만이면 3년 이상의 징역, 이득액이 50억 이상인 경우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는 그보다 낮은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이다.
1심 선고에서 유동규 씨에게는 징역 8년과 벌금 4억 원, 추징 8억 1000만 원이 내려졌다. 대장동 민간업자인 김만배 씨는 징역 8년과 추징 428억 원을 선고 받았다. 남욱 변호사는 징역 4년, 정영학 회계사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성남도시개발공사 전략사업실에서 투자사업팀장으로 일했던 정민용 변호사는 징역 6년, 벌금 38억 원, 추징금 37억 2200만 원이 선고됐다.
특히 1심 재판부는 유동규 씨, 정민용 변호사 등 성남도시개발공사에 관여하며 민간업자들에게 개발 편익을 봐준 이들에게는 이례적으로 검찰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했다. 통상 검찰 구형보다 적게 선고되는 관행을 고려하면 되레 검찰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민들레>와 통화에서 "보통 검사가 자동 항소하는 기준은 구형량의 3분의 1(미만)이다. 이 사건은 전체적인 평균을 놓고 보면 구형량의 70% 가까이 선고됐다고 볼 수 있다"며 "기준대로 (항소 포기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대장동 사업이 공공 기여를 얼마나 환수했느냐는 성과에 대해 정치적 논란만 있을 뿐, 대장동 비리 자체는 다툼이 없다"며 "죄에 상응하는 만큼 구형했고, 구형에 상응하는 만큼 선고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일부 검사와 국민의힘 반발에 대해 "무리하게 1심 패소한 걸 항소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잖느냐"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5.10.14. 연합뉴스
법무부 안팎에선 이 대통령이 검찰의 무분별하고 기계적인 상소를 지적한 것이 검찰의 항소 포기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30일 국무회의에서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검사들이 (죄가) 되지도 않는 것을 기소하거나, 무죄가 나와도 책임을 면하려고 항소·상고해서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무죄를 받고도 검찰의 무조건적인 항소에 고통받는 일반 국민의 사례를 언급했지만, 검찰의 관행을 개선하는 과정도 항소 포기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힘 박수영 선거법 사건도 항소 포기했는데
왜 대장동만 난리?…항소 기준이나 있긴 하나
기성 언론 대부분에서 정치 사건이 된 '대장동 사건'을 항소 포기한 게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내놓지만, 이 역시 검찰이 오랫동안 쌓아온 '반 이재명' 프레임에 근거한 분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항소 포기 사례는 대장동 사건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친윤석열계'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은 지난해 10월 부산 금정구청장 보궐선거 당시 자당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단체 문자를 발송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1심에서 검찰이 150만 원(의원직 상실)을 구형했지만 그에 한참 못 미치는 벌금 90만 원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법원에 의원직 상실형을 요청했으나, 그 목표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항소를 포기했다. 항소를 해도 벌금 100만 원 이상이 나오긴 어렵다는 판단에서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박 의원의 선거법 사건과 대장동 사건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박 의원에 대해 항소 포기한 것과 같은 잣대로 본다면, 선고에 적용된 법리를 떠나 특경가법상 배임죄 수준의 더 센 형량을 받아낸 대장동 사건의 경우 항소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을 따져 포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법조계 일각에선 대장동 사건 2심에서 특경가법이 적용되더라도 양형 변화가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만큼 이미 중형이 선고됐다는 의미다.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이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에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2025.3.3. 연합뉴스
또한 검찰의 항소 포기가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엿장수' '고무줄' 기준이다. 과거 항소 행태를 보면, 무조건 기계적으로 항소를 했던 것도 아니다.
검찰은 지난 2021년에도 조수진 당시 국민의힘 의원 공직선거법 사건에서 150만원을 구형했지만, 1심에서 벌금 90만원이 나오자 항소를 포기했다. 반면 2019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은수미 성남시장에 대해선 똑같이 150만 원을 구형하고 벌금 90만 원(시장직 유지)을 선고 받았지만, 검찰은 "형이 너무 가법다"며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항소 여부는 결국 '검사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배 가르겠다는 검찰, 항소하는 게 타당한가
윤 구속취소 즉시항고 포기 땐 조용하더니
대장동 사건엔 지검장 사퇴하며 집단 반발
대장동 사건과 관련한 항소 포기 결정에는 검찰의 그동안 무리한 '조작 수사' '증언 조작'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 관계자는 "남욱 변호사의 충격적인 증언 등을 고려하면 검사들이 항소하는 건 검찰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나 분노를 더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전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이진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정무조정실장 뇌물 혐의 재판에서는 '대장동 수사 과정에서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낸다는 협박에 못 이겨 검사의 수사 방향에 맞춰 진술했다'는 취지의 폭로가 나왔다.
남욱 변호사는 수사 과정에서 "검사들한테 '배를 가르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배를 갈라서 장기를 다 꺼낼 수도 있고, 환부만 도려낼 수도 있으니 네가 선택하라'고 했다"며 "이런 말까지 들으면 검사의 수사 방향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또 "(정일권 부장 검사가) 애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애들 봐야 할 것 아니냐. 여기 있을 거냐'고 했다. 그날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도 말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민들레>와 통화에서 "누가 그딴 식으로 수사를 하느냐"고 어이없어했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남욱 변호사가 3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5.10.31 [공동취재] 연합뉴스
앞서 남 변호사는 지난 9월 대장동·위례신도시·성남에프시(FC) 사건 공판에서도 유동규 씨가 정 전 실장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진술과 관련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2022년 검찰 수사 받을 당시에 검사에게 처음으로 전해 들은 내용"이라는 취지로 증언한 바 있다. 검찰이 그동안 이 대통령의 측근들에 대해 조작된 증언으로 구속시키고 재판에 넘겼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진술 짜맞추기' '허위 진술 강요'는 과거에도 증언이 됐지만, 윤석열 정권 시기 모두 무시됐다. 김만배 씨는 2023년 4월 법정에서 "남욱이 '동생들 좀 살려달라'며 이재명 대표에게 돈을 줬다는 취지로 진술을 맞춰달라고 요청했다"고 폭탄 발언을 했지만, 언론에선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당시 제1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은 같은 해 9월 단식 투쟁 중 두 번째 구속 위기를 맞았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일각에선 대장동 사건과 관련한 조작 수사 정황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검찰이 항소 포기를 이유로 자신들의 문제를 덮기 위해 집단 반발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월 지귀연 부장판사의 어처구니 없는 내란 수괴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해 심우정 당시 검찰총장이 즉시 항고를 포기했을 때에도 검찰 내부에서 이 정도의 반발은 없었다. 하지만 대장동 사건에서는 항소 포기 이유만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이 사퇴하고 검사들이 집단으로 성명을 내며 반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뿌리 깊은 정치검찰의 단면을 보여준다. 공소유지 검사들의 심야 단체 입장 발표야 말로 최근 몇 년 내에 볼 수 없었던 '이례적인' 집단 항명으로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이 열린 4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송언석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등을 규탄하며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2025.11.4 [국회사진기자단] 연합뉴스
검란 부추기는 국민의힘…"이재명 방탄"
그간 검찰의 조작 수사에 대해 함구하고 내란을 옹호해 온 국민의힘은 이번 항소 포기를 고리로 '검란'을 부추기며 정쟁화하려 하고 있다.
장동혁 대표는 페이스북에 "항소 포기는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의 공범인 이재명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며 "포기할 것은 항소가 아니라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이라고 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이재명 정권의 권력형 수사 방해, 수사외압 의혹이 있다"며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처벌을 방해하기 위해 국가 사법 시스템을 뒤흔드는 정권 차원의 조직적 국기문란 범죄"라고 했다.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친명(친이재명) 좌장'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이재명 대통령 방탄을 위해 검찰 항소를 막았다"며 "정치적 개입에 따른 사건 무마 시도"라고 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시절에 '상고 포기'
'패소할 결심' 해놓고 비판할 자격 있나
한동훈 전 대표는 "검찰이 자살했다" "모두 감옥에 가야한다" 등 강도 높은 표현까지 써가면서 최일선에서 비난하고 있지만, 항소 포기를 언급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본인도 법무부 장관 시절 '상고 포기'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는 2022~2023년 법무부 장관 시절,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처분 취소청구소송 2심 재판에서 1심에서 승소한 '추미애 법무부' 변호사들을 갈아치우고 부실한 변론을 하며 '패소할 결심'으로 질타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 법무부의 징계에 소를 제기했지만,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자 셀프로 대통령 자신을 징계하는 꼴이 돼 법무부 장관이 나선 것이다.
한 전 대표는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2심에서 윤석열 총장 징계 취소를 선고하자 상고 포기를 지휘하며 노골적으로 윤석열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소송의 대상이었던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는 한동훈 검사장 관련 감찰 방해·무마가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전 대표의 '패소할 결심'은 윤석열을 위한 패소일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패소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파인그라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신임 지도부 만찬에서 한동훈 대표(왼쪽), 추경호 원내대표(오른쪽) 등과 함께 손을 맞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4.7.24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이재명 위한 항소 포기처럼 눈속임 말라"
"조폭보다 무서운 검사들, 다 책임 물어야"
여당인 민주당은 항소 포기가 아니라 법리 판단에 따른 '자제'라며 근거 없는 선동을 하지 말라고 반박하고 있다. 대통령실에서 이른바 재판중지법에도 제동을 걸었는데, 정치적인 판단으로 결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장윤미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검찰이 공소유지에 성공해도, 무분별하게 항소를 제기해 오던 관행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이미 4년에서 6년의 중형이 선고된 대장동 일당들에 대해 항소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 것을 두고 '대장동 일당 봐주기'라거나 이례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장 대변인은 "'검찰이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거나 '대한민국 검찰이 자살했다'는 국민의힘의 반응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라며 "특히 이재명 대통령을 걸고 넘어지며, 공개적인 재판 불복 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고 했다.
그는 "이미 법원이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대통령이 민간업자들의 유착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수용방식을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시했다"며 "이러한 법원 판단에 눈을 감고, 마치 이번 항소 자제가 이재명 대통령을 위한 것처럼 교묘하게 눈속임을 하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했다.
백승아 원내대변인 서면 브리핑을 통해 "국민의힘이 대장동 항소심 결정을 두고 '정치적 개입'이라며 이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관계와 법리를 무시한 채 이미 무너진 정치적 프레임에 기대려는 구태 정치"라며, 항소 포기에 대해 "법률 원칙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 원내대변인은 "검찰의 무리한 기소였던 것이 드러나고 있는데, 법원이 무죄라 한 부분을 검찰이 항소하고 이의제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라며 "국민의힘은 '대장동 항소심'을 대통령과 억지로 연결 짓는 정치공세를 멈춰야 한다"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연합뉴스 자료사진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남욱 변호사가 전날 검찰로부터 "배를 가르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것과 관련, "검사가 아니라 조폭"이라며 "정치검찰의 회유와 협박으로 조작된 대장동 사건에 대해 즉시 공소 취하하고 진상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같은 당 서영교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검사가 조폭보다 더 무섭고 더 나빴다. 잡으라는 범죄자는 안 잡고 이재명 잡겠다고 남욱의 배를 가르겠다고 했다"라며 "나쁜 검사들 꼭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법무부는 이 검사들 다 책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납북귀환 어부들이 50년의 기다림 끝에 2023년 5월 12일 오후 춘천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춘천지법 형사1부(심현근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던 납북귀환 어부 32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태영호 사건과는 다른 납북귀환어부 간첩 조작 사건)연합뉴스
납북이 월북으로 조작된 사례가 있다. 1970년대 대표적 조작사건 중 하나인 태영호 납북이 그것이다.
어선 태영호의 탑승자는 8명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사는 강대광(선주), 정몽치(선장), 박헌태, 이종섭, 박상용, 강용태(이상 선원), 전남 여수에 사는 박종윤(기관장), 박종옥(선원)"이었다고 알려준다.
민주공화당 정권이 대통령 재선(1967.5.3.)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3선 개헌 국민투표(1969.10.17.)를 향해 나아가던 때인 1968년 6월 4일이었다. 이날 목조기관선인 태영호가 위도면에서 출항했다. 이 배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인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해역으로 가서 병치잡이를 했다. 그러던 중 7월 3일,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북한의 표적이 된 어민들
'남조선혁명과 통일은 동시에 이루어지리라'는 김일성의 구상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벽에 부딪혔다. 북한 군대가 무너트리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이 남한 민중에 의해 붕괴되자, 김일성은 남한 민중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는 남한부터 먼저 혁명시킨 뒤 그 뒤에 통일을 추진한다는 남조선혁명론을 1961년 9월 제4차 조선노동당 당대회에서 천명했다.
북한은 남조선혁명을 유발시킬 위와 같은 목적과 더불어, 베트남전쟁에 투입되는 미국의 군사 역량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1960년대 후반에 무장공비들을 대거 파견했다. 미국 외교협회가 2011년 11월 10일 발표한 <한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문가들이 1955~2010년까지의 한반도 군사충돌로 인정한 1436건 중에서 49.4%인 709건이 196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이 시기에 김일성 정권은 북에서 남으로 무장공비를 파견하는 동시에 남에서 북으로 어민들을 납치했다. 남한 주민들에게 북한의 발전상을 보여줘 남한 민심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북한 경제가 남한을 앞섰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육로를 통해 농민들을 납치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민들이 표적이 됐다.
1970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 '귀환어부 좌담회'는 "최근 들어 북괴는 걸핏하면 생업에 종사하는 무고한 어부들조차 마구 납치해 허위선전, 강제 관광, 간첩 지령까지도 서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북에 의한 '강제 관광'은 '수학여행'으로도 불렸다. 1968년 12월 3일 피랍됐다가 귀환한 속초 어민 남기룡은 만경대대극장·황해제철소·청산리협동농장 등을 답사했다. 그런 곳들을 둘러본 소감을 남한에 가서 홍보하라는 게 북의 요구였다.
태영호 납북 때까지만 해도 남한 정부는 납북어부들을 가급적 처벌하지 않았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당시에는 고의로 월선하였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는 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이 통례였다"고 말한다. 월선했더라도 고의 입증이 되지 않으면 처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방침이 계속 유지됐다면 태영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태영호 선원들은 정부 방침이 강경해지는 시점에 북에서 풀려났다. 이들이 귀환한 날은 강원도 울진·삼척에 무장공비가 출현하기 이틀 전인 1968년 10월 31일이다. 이로부터 9일 뒤 '월경 선박에 대한 전원 구속'을 경고하는 정부 방침이 나왔다. 11월 9일자 <경향신문> 7면 하단의 보도다.
"내무부는 요즘 동해에서 어부들의 납북사건이 자주 일어남에 따라 앞으로 어로저지선을 넘어 고기를 잡다가 납북되는 어부들은 모조리 수산업법 위반으로 입건, 휴전선을 넘어 고기를 잡다 납북되는 어부들은 수산업법과 반공법을 아울러 적용, 모조리 구속한다고 9일 상오 관하 경찰에 지시했다."
이 신문의 같은 해 3월 25일자 7면에 따르면, 이날 수산청은 서해 어로저지선을 NLL 남쪽 2마일에 설정했다. 어로저지선을 넘은 뒤 납북되면 수산업법 위반으로 모조리, NLL를 넘은 뒤 납북되면 수산업법 위반에 더해 반공법 위반(탈출·잠입 등)으로 모조리 구속시키겠다고 내무부가 경고한 것이다.
고문에 괴롭힘까지... 태영호 선원들의 억울함
▲민주노총 경남본부 건물 외벽에 "무죄로 판명된 조작사건들"이라고 새겨진 펼침막이 걸려 있다.윤성효
박정희 정권은 격증하는 어선 납북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는 데다가, 어민들이 이북에서 진술한 남한 지형 및 초소 위치가 무장공비 침투에 활용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부 납북어민들에게 중형을 가하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잡고자 했던 것이다.
태영호는 정부 방침이 강경해질 때 귀환했다. 이런 가운데 선원들에 대한 당국의 조사는 가급적 처벌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국은 이들이 스스로 월북했다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갔다.
10월 31일 북에서 풀려난 선원들은 인천경찰서에서 사흘간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그 뒤 인천서와 여수경찰서를 거쳐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과 전주지검 정읍지청으로 이송됐다. 위도면 선원들은 부안경찰서에서도 수사를 받았다. 이 경찰서에서는 고의 월북을 인정하라며 몽둥이로 구타하는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위 보고서는 말한다.
사건이 순천지청에서 정읍지청으로 넘어간 것은 1969년 4월 29일이다. 4개월여 뒤인 9월 9일, 정읍지청은 해군본부 및 해군인천경비부에 '1968년 7월 3일에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북된 어선이 있는지를 확인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9월 9일에 공문을 받은 해군분부는 27일에 회신을 보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태영호 선원들이 월선하지 않았으며 북한 경비정이 남한 해상으로 넘어와 나포해갔다"는 내용이 회신에 담겼다고 알려준다.
그런데 정읍지청은 회신이 도착하기 전인 9월 12일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기소 의견을 보고했다. '월북하겠다는 확정적 고의가 없었다 해도, 월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가보자는 미필적 고의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9월 16일, 선원들은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에 기소됐다. 9일 뒤에 도착한 위 회신은 검찰의 사건기록 목록에도 기재되지 않고 정읍지원에도 제출되지 않았다고 위 보고서는 지적한다.
고의 월북이라는 검찰 측 주장을 무너트릴 결정적 자료가 은폐됐다. 납북어민들에 대해 강경해지는 정부 방침에 편승하는 사건 조작이었다. 선주 강대광을 비롯한 선원 8명은 당시의 반공법 제6조 제1항이 규정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한 자"로 인정돼 징역 1년에서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선원들은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일례로, 강대광은 "경찰관이 집에 하숙하면서 감시하였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술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다시 수사를 받았다. 남한으로 귀환한 뒤에 북으로 탈출할 시도를 하고 북을 찬양·고무했으며 위도 주변의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였다. 1979년에 광주고등법원은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함께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징역 5년을 받거나, 징역 3년에 집행유예를 받았다.
2006년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증거도 없이 고의 월북으로 처리되고, 영장 없이 장기간 구속됐으며, 고문과 폭행이 있었던 점 등을 이유로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2008년에 정읍지원은 강대광 등 5명이 신청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선고는 검찰 항소가 없어 확정됐다. 2017년에 검찰이 직권으로 청구한 박종옥 재심과 관련해서도 정읍지원의 무죄 선고가 있었다.
태영호 선원들은 납북됐다가 귀환하는 어부들 때문에 고심하던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정권이 아니라 귀환어부들을 혼내주기로 결심한 시기에 공안조작의 대상이 됐다. 태영호 선원들은 국민에 대한 겁주기와 화풀이의 시범 케이스였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8일 서초구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열린 ‘2025 청년페스타'에서 강연한 후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8일 “(내년 상반기) 북-미 회담이 실현되려면 한미연합훈련의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이날 서울 서초구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열린 ‘2025 청년페스타' 강연 후 연합뉴스와 “아주 예민한 문제이긴 하나 한-미 군사훈련을 하면서 북-미 회담으로 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지난 4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향후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높다”며 “북한이 내년 3월 한-미 연합훈련을 분기점으로 삼아 미국과 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방한을 앞두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남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으나 북한이 이에 호응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이에 정 장관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에 (양측이) 만날 수 있었는데 북쪽에서 계산을 잘못한 거 같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정 장관은 “내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차 베이징을 방문하는 전후가 결정적 시기”라며 “우리는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 다섯 달 동안 (북미 정상 만남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재명 대통령이 아펙(APEC) 계기 북미 회동 무산 후 ‘대승적이고 더욱 적극적인 선제 조치'를 언급한 데 대해선 정 장관은 “이미 9·19 남북군사합의 복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며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군사훈련 중단이 그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과 조합원들이 8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근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5.11.08 ⓒ민중의소리
30주년을 맞은 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민주노총)이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겠다"며 새로운 30년에 대한 결의를 밝혔다.
민주노총은 8일 동대문구 장충단로 동대문구 DDP 앞에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를 진행했다.
이날 대회에는 5만여명의 노동자가 모여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낸 민주노총이 이제는 울타리 밖 모든 일하는 사람과 함께 나아가겠다"고 결의를 모았다.
이날 대회사에서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지난 30년은 신자유주의와 싸운 30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여전히 절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이고,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며 "이제 모든 일하는 사람의 자부심이 되는 민주노총으로 거듭 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위원장은 "이제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이 되기 위해, 모든 노동자들의 자부심이 되기 위하여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쟁취하자"며 "업종의 담벼락을 넘어 초기업 교섭을 조직하고 울타리 밖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이 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지낸 권영길 지도위원은 축사에서 "오늘의 민주노총이 전태일의 뜻을 잇는다는 것은,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없는 노동 현장을 만들고, 모든 노동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일터를 만드는 것"이라며 "이제 다시 민주노총다운 민주노총의 길을 걸어가자"고 말했다.
또한 권 지도위원은 "트럼프의 통상 조치는 한국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베어져 있는 돈을 뺏어가는 날강도 짓"이라며 "미국의 경제침략에 맞서 자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세우는 투쟁에 민주노총이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모든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우리 사회의 자주와 평등을 실현하는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민주노총의 새로운 30년을 결의했다.
이들은 이날 결의문을 통해 ▲하청·특수고용노동자들의 교섭권 보장 및 원청교섭 실현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초기업교섭 제도화, 작업중지권 쟁취 ▲미국의 경제침략 저지 ▲국민의힘을 비롯한 내란세력 청산과 사회대개혁 실현 등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우리는 미국 트럼프 정권의 경제수탈과 일자리 약탈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며 "굴욕적인 대미협상을 전면 백지화하고 3,500억달러 조공을 중단할 것을 이재명 정부에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재벌들은 노동자, 민중의 피땀으로 축적한 국부를 미국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한국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미국의 관세조치와 이를 피하려는 기업의 외국 투자로 한국의 제조업이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정준현 지부장은 "미친 관세와 미국의 횡포는 미국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대차 울산1공장은 물량이 없어 휴업을 밥 먹듯 하는 와중에도 현대차 자본은 태국에서 현지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며 "현대제철은 포항2공장은 폐쇄하면서, 미국에다 대규모 일관제철소를 짓겠다고 한다. 도대체 어느 나라 기업이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제조업을 보호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대회 종료 후 참가자들은 명동 세종호텔과 서울고용노동청 방면으로 두 개 행진대열로 나뉘어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으로"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한편, 이날 전국노동자대회에는 개별 노조와 각 단체들이 27개의 부스를 운영하며 여러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서비스연맹 학교비정규직노조는 학교급식법 제정을 위한 100만 청원운동을 진행했으며, 보건의료노조 대한적십자사본부지부는 무상수혈 제도를 알리는 부스를 열었다.
이 밖에도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인권, 성소수자, 장애, 평화 등 다양한 분야의 주장들을 담은 부스를 열었다.
8일 동대문구 장충단로 동대문구 DDP 앞에서 진행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다양한 단체들의 부스가 운영되고 있다. ⓒ민주노총
민주노총 30주년을 기념하는 부스와 전시도 눈에 띄었다.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에서 운영한 '민주노총 굿즈 부스'에는 여러 사람이 몰려 민주노총 30주년의 의미를 담은 기념품 굿즈를 판매했다. 준비한 굿즈 중에서는 현수막을 재활용한 제품과 민주노총의 마스코트 민총이가 그려진 티셔츠 등이 눈에 띄었다.
김진숙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노총 30주년과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아 각 노조에서도 참석을 기념할 수 있는 기념품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많아서 굿즈를 제각하게 됐다"며 "윤석열 파면 투쟁 당시 쓰인 현수막을 업사이클링(재활용)한 가방 등으로 자연보호의 의미도 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격이 저렴하지 않지만, 재활용의 의미와 윤석열 파면 투쟁에 민주노총이 함께했다는 의미도 담겨서 반응이 좋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민주노총의 30년을 담은 사진 전시회도 진행됐다. 전시된 사진을 유심히 보던 구로구에서 온 김아라(32)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민주노총에 대해 모르던 것을 많이 보면서 뜻 깊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함께 사진전을 지켜본 김민주(27) 씨도 "예전 90년대 일어난 일은 그땐 어려서 잘 모르는 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8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근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5.11.08 ⓒ민중의소리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가 8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근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친 뒤 행진을 하고 있다. 2025.11.08 ⓒ민중의소리
8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근에서 민주노총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25.11.8 ⓒ뉴스1
경주 APEC 정상회의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을 거듭 제안했다. “김 위원장과 잘 지낸다”는 친근한 어조에도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사일 발사와 침묵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요구를 사실상 철회하고 대북 제재 완화 의사까지 밝히며 북한의 대화 전제조건을 대부분 수용했으나, 김 위원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싱가포르, 하노이, 판문점에 이은 네 번째 정상회담은 결국 무산됐다.
당장은 우선순위에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 고려
김정은 위원장의 거부 뒤에는 복잡한 지정학적 변수가 얽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은 러시아에 수만 명의 정예 병력을 파병하며 사실상 군사동맹을 구축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미국과의 대화에 응할 경우 북러 관계에 균열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지난 3월 착수한 핵추진 잠수함 개발은 러시아의 기술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됐을 터이다.
북한 조선중앙TV는 10일 '자주의 기치, 자력부강의 진로 따라 전진해온 승리의 해' 제목의 새 기록영화를 방영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9년 행적을 돌아봤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회담하는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2020.1.10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연합뉴스
북한은 파병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퇴역 핵잠수함의 원자로·증기터빈·냉각 시스템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핵추진 잠수함의 핵심부품인 원자로 세트를 손에 넣었더라도 러시아 기술 지원 없이는 잠수함 장착·가동이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 성공은 북한에 있어서 대미 핵억제력의 완성을 의미하며 대미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빅 카드가 된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러시아 관계 유지는 미국 대화보다 우선순위가 높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제의 뒤에 이뤄진 최선희 외무상의 러시아 급파도 트럼프 제의에 대한 푸틴 입장을 타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8월 트럼프-푸틴 알래스카 회담과 10월 부다페스트 회담 취소 사태를 보며 미러 관계 개선 가능성을 낮게 봤을 것이다. 설령 트럼프와 합의에 도달하더라도 하노이 회담 때처럼 네오콘 강경파에 의해 백지화될 수 있다는 회의적 시각도 작용했음 직하다.
북한의 경제 상황 호전도 북미 대화 시급성 떨어뜨려
흥미로운 것은 푸틴 대통령의 역설적 태도다.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난 푸틴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묻고, 김정은 위원장에게 한국의 메시지를 전달할 테니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유럽화’를 포기한 푸틴은 아시아 동진정책을 모색 중이며, 이를 위해 한반도 안정을 선결과제로 본다. 북미 대화 재개가 한국-러시아 경제협력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한국과 경제 교류 재개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변수도 김정은 위원장의 발목을 잡았다. 경주 APEC에서 예정된 트럼프-시진핑 회담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이 서둘러 트럼프를 만나면 북중 관계에 미묘한 난기류가 생길 소지가 있다. 변덕스러운 트럼프의 성향을 고려할 때, 시진핑-트럼프 회동 결과를 지켜보는 게 전략적으로 현명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예정된 상황에서 김정은-트럼프 만남은 시진핑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
북한의 최근 경제 호전도 김정은 위원장이 대화를 서두르지 않는 배경이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인사들은 북한이 식량 자급을 이루고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크게 좋아졌다고 전한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확대는 과거에 비해 안정된 경제 기반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국내 사정의 변화는 북미 대화는 물론이고 남북대화의 시급성을 떨어뜨린다.
지금 더 급한 건 트럼프 아닌가
CNN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37%로 집권 2기 최저치를 찍었고, 부정 평가는 63%로 취임 후 최고를 기록했다. 응답자 68%가 국가 상황을, 72%가 경제 상황을 좋지 않다고 답했다. 관세 전쟁으로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미국 여론은 트럼프에게 싸늘해지고 있다.
11월 4일 뉴욕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조란 맘다니가 당선됐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34세 민주사회주의자이자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는 뉴욕 최초 무슬림 시장이자 최연소 시장이 됐다. 임대료 동결, 최저임금 인상, 무상버스·보육 확대 등 획기적 민생 공약으로 승리한 이 사건은 미국 민심의 흐름을 상징한다. 이대로 가면 2026년 가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역대급 패배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빅딜'을 통해 노벨평화상 수상에 주력하는 이유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부정적 여론을 반전시킬 만한 다른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발표 시점(통상 10월 초)을 고려해 그 전에 김정은 위원장과 북미 수교 같은 역사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고, 실제 수상이 발표되면 그 여세를 몰아 불리한 중간선거 판세를 역전시키려는 계산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북미 수교·대북제재 해제, 한국전쟁 종전선언 및 평화조약 체결이라는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한반도 평화체제는 물론 동북아 질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과거 북미 대화에 매달리던 김정은 위원장은 이제 여유롭게 러·중과 손잡고 시간을 끌며 핵억제력 완성이라는 전략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반면 트럼프는 지지율 급락과 내년 중간선거 패배 위기 속에서 북한과의 극적 합의 카드가 절실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2025.10.29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은 여전히 남북 관계 ‘피스 메이커’ 역할 해야
북미 대화 재개는 일차적으로 북미 수교라는 트럼프의 ‘마지막 카드’에 달렸다. 그러나 그 카드가 나오기 전까지 북한은 러시아 기술 지원으로 핵잠수함 건조를 가속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화하며 경제를 회복할 것이다. 경주 APEC에서의 일방적 구애가 보여주듯이 지금 대화를 간절히 바라는 쪽은 트럼프이지 김정은 위원장이 아니다.
동북아의 지정학적 판도를 뒤바꿀 트럼프-김정은 회동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미중 관계의 추이, 러시아의 동진 전략, 트럼프의 중간선거 계산 등 복잡한 변수가 얽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를 모두 계산하며 최적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6일 국회 예결위에서 내년 3월 김정은-트럼프 회담 성사 가능성에 대해 “합리적 기대”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기대에 불과하며 정확한 타이밍은 미지수다. 분명한 건 북미 대화 조건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미국의 일방적 밀어붙이기 구도가 아니다. 북한이 시기와 조건을 선택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이재명-트럼프 경주 정상회담을 계기로 시작된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은 남북 군비경쟁을 촉발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미 관계 개선의 ‘페이스 메이커’를 넘어 남북 관계의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으로 파탄 난 남북 관계에서 극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북미 해빙이 이뤄져도 한반도 평화체제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로 최대 난관을 넘긴 이재명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길 기대한다.
▲선고공판 출석하는 남욱 변호사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남욱 변호사가 10월 3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일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의 뇌물 혐의 사건 재판 증인으로 출석한 남욱 변호사는 자신에게 '배를 가르겠다'고 말한 검사가 정일권 부장검사라고 증언했다.
- 이진관 재판장 : "증인은 기존과 다른 진술을 하고 있어서 물어본다. ('배를 가르겠다'라고 발언 한 검사가) '선임검사', '높은 검사'라고 했다. 누군지에 대해서 진술을 안 하고 다음에 수사받을 때는 한다는 식으로 했다. 말해봐라. 단순한 증언이 아니고, 기존 진술과 달라서 질문을 하는 거다."
- 남욱 : "정일권 부장검사다. 2022년 9월 당시 정일권 부장검사가 첫날 수사 끝나고 (자정 무렵) 불렀다. 애들 사진... (울먹이며) 죄송하다. 애들 사진 보여주면서 '애들 봐야할 거 아니냐', '여기 계속 있을 거냐'라고 했다. 그러면서 '배를 갈라서 장기를 다 꺼낼 수 있고, 환부를 도려낼 수 있다, 내려가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일 담당 검사랑 이야기를 해봐라'라고 했다."
남 변호사는 '배를 가른다'는 표현에 대해 "제가 많은 죄를 지어서, 우리가 하는 수사에 협조하면 봐주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걸 까서 예컨대 저에게 돈 받은 사람을 모두 범죄수익은닉으로 기소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제 친구들은 대한민국에서 멀쩡히 회사 다니고 사업하는 사람들이라, 저랑 돈거래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소된다면 그들의 인생을 제가 책임질 수 없다"며 "밤중에 불러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심리적으로 버틸 수 없더라"고 덧붙였다.
남 변호사의 발언 이후 정일권 부장검사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그때 남욱 피고인이 진술을 거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면서 "배를 가른다고 말한 적은 없다. 수사하는 과정이 의사가 치료하는 과정과 같기 때문에 환부만 신속하게 도려낼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의사 입장에서는 어디가 아픈지 모르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개복 수술도 해야되고, 아니면 알약으로 치료할 수도 있다. 여러 방법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도록, 신속하게 환부를 도려낼 수 있도록 설명해 달라는 그런 취지였다. 배를 가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애들 사진을 왜 보여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포렌식 자료 중에 사진이 있었고, 오랫동안 아이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도의적, 인도적 차원에서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일권 부장검사는 2022년 여름부터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 부부장검사로서 대장동 수사를 주도했고, 지난해 6월 공판5부장검사로 승진했다. 현재는 의정부지검 남양주지청 형사1부장검사로 재직 중이다.
남욱, 눈물의 작심 발언... 왜?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3부(재판장 이진관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재판에서 남 변호사는 검찰 공소사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지난달 31일 대장동 사건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 중이다.
당초 검찰은 남 변호사를 상대로 한 재주신문을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오후 공판 시작과 동시에 "준비한 건 많지만 몇 개만 물어보고 나머지 신문은 생략한다"라고 했다.
- 검사 : "공모지침서 작성에 관여했나?"
- 남욱 : "관여한 적은 없지만, 관여된 걸로 (1심에서) 판단됐다."
- 검사 : "사업수지와 예산수지 산정에 관여했나?"
- 남욱 : "전혀 관여한 게 없지만 판결문에서는 저도 상의를 한 것으로 판단됐다."
- 검사 : "공모지침서나 사업계획서, 예산 및 수지 산정을 증인이 알고 있던 게 있다면 증인은 자료를 보거나 들어서 알게 된 것이지, 당시에 경험한 사실은 아니라는 거냐?"
- 남욱 : "검사님 말이 맞다. 다만 초기 정영학 회계사와 검사가 저와 상의했다고 그렇게 조사가 이뤄져서 저도 공범자로 기소가 됐다. 정영학 조서가 인정이 돼서 저도 유죄가 된 거다."
남 변호사는 "추가로 말하겠다"면서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초기 수사에서 정영학이 회유됐고, 자료도 허위로 만들어졌다. 허위 진술을 강요받았다고 들었다. 이런 내용은 형사소송법 규정 등을 이유로 증거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초기 진술이 인정돼 배임이 인정된 것으로 판결문에 나왔다. 제가 알기로 수사한 검사들이 공수처에 고발됐지만, 그 이후로 진행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
▲선고공판 출석하는 남욱 변호사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남욱 변호사가 10월 3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남 변호사는 검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도 설명했다. "수사가 끝이 없다. 기억도 없는 말을 수사관이 '그런 것 같다'고 하니, 나중에 와서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수사 과정에서 그렇게 진술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 정진상 측 : "그런 심정이라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 남욱 : "가급적 검찰에, 이재명, 정진상 수사에 가급적 협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정진상 측 : "증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 생각한다고 말하며 검사에 맞춰서 진술했나?"
- 남욱 : "그런 면이 있다."
- 정진상 측 : "진술조서 보면 끝에 '이해한다', '생각한다' 이렇게 끝난다."
- 남욱 : "제가 경험한 게 아니라서 타협점을 찾은 거다."
- 정진상 측 : "유동규가 보석 조건 없이 석방될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 남욱 : "만감이 교차했다. 어쨌든 유동규로 시작된 일인데 먼저 나갔다. 저희는 나가네, 못나가네 설왕설래 있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정진상 측 : "그래서 증인 어떻게 했나?"
- 남욱 : "당시 수사하시는 분들 방향에 특별히 어긋나는 발언을 진술하진 않았다."
이진관 재판장은 남 변호사에게 "이 사건 관련해서 증인의 진술도 우리 사건 쟁점"이라면서 "판결문을 보고 하고픈 이야기를 서면으로 내주면 다 읽어보겠다. 양이 많아도 좋다. 저희 재판부에 접수를 하면 읽어보겠다"라고 말했다. 남 변호사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며 "시간이 걸려도 다 제출하겠다"라고 뜻을 밝혔다.
한편, 재판부는 정 전 실장 측 요청을 받아들여 핵심 증인들의 구치소 출정과 접견 기록이 확보했다. 증언을 잇달아 번복한 남욱 변호사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의 기록을 확보해 검찰 조사나 접견이 진술 번복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취지다. 다음 공판 11월 21일이다. 증인은 대장동 비리 사건의 장본인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다.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5.11.08. 04:21:44 최종수정 2025.11.08. 08:56:42
내란의 밤, 여당 원내대표 추경호의 행보는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증상을 앓고 있는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내란특검이 추경호에 대해 내란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지금 그는 구속 갈림길에 서 있게 됐지만 추경호가 구속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별로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사법 체계는 '어리석음'과 '무능함'까지 엄벌할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란의 밤 추경호의 행보는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 참담한 수준의 어리석음을 이미 상징하고 있다.
의원총회를 국회가 아닌 당사에서 연다는 얘기는 과문한지 모르겠으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원내대표실은 국회 본청에 있고, 의원총회는 국회의원들의 활동 공간인 국회에서 열린다. 그런데 추경호는 11시 3분에 국회로, 11시 9분에 당사로, 다시 11시 33분에 국회 예결위회의장으로, 또 다시 12시 3분에 당사로 의원총회 장소를 바꿨다. 두 번이나 의원총회를 국회 밖인 당사에서 열겠다고 공지했는데, 경찰이 막아 의원들의 국회 진입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의원들을 의정활동 공간이 아닌 국회 밖으로 한데 모으려 했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정작 추경호 본인은 국회 본청 원내대표실에 있었다. 본회의장까지 2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계엄 해제 결의안 표결에 불참했다. 심지어 18명의 의원들을 이끌고 본회의장에 있는 당대표 한동훈을 본회의장에서 나오라고 요구했다. 추경호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자인 한덕수와 통화했고, 정무수석 홍철호와 통화했다. 이어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과 통화하면서 '표결 불참'을 당부하는 취지의 협조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추경호 측의 반응은 이렇다. "윤 전 대통령이 먼저 전화를 건 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끊었다", "계엄을 왜 했느냐 따져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추경호 변호인 측, 동아일보 6일자 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행동 지침도 내릴 수 없었던 무능한 원내대표다'라는 게 추경호의 변호 요지다. 조희대 법원의 그간 행보를 봤을 때 추경호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비상계엄이 위법한 지 몰랐다는 박성재의 손을 들어줄 때처럼, '무능함'과 '어리석음'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는 논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추경호와 윤석열의 통화 내용은 둘이 입을 닫으면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고, 추경호가 계엄 직전인 11월 29일 윤석열과 만찬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그들이 밝히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추경호 측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든 야당 단독으로 본회의 개의와 의결이 가능했다"고 강변한다. '내란의 밤'에 국정을 책임져야 할 여당이 '야당의 의석수'에 나라를 맡겼다는 자기 고백이다. '본회의장에 모여 계엄 해제 표결에 참여하라'는 당 대표의 지시를, 정작 금뱃지를 단 헌법기관들은 대놓고 거부했다. 총 든 군인들이 국회로 몰려드는 그 밤에, 그들은 알 길 없는 계엄의 속사정이나 가늠하면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방치했다.
그 중 몇이나 윤석열의 쿠데타 구상에 충실히 따르려 했는지, 우린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계엄은 잘못했지만 탄핵은 반대하고, 부정선거를 외치지만 내가 당선된 것과는 무관하며, '윤어게인'은 있을 수 없지만, 그걸 외치는 사람들의 표는 탐내는, 저런 사람들이 정말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이란 말인가?
만약 추경호가 구속된다면 그가 윤석열 친위 쿠데타의 장기말이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내란을 모의하고, 계엄 해제 표결을 적극 방어했다는 정황들이 부각될 것이고, 추경호에 동조했던 의원들의 혐의들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해체된 통합진보당의 사례를 따라 국민의힘은 위헌정당 해산 심판대에 서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우린 새 보수정당의 탄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연쇄 파장을 '조희대 법원'이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의문이다. 윤석열을 석방하고 박성재 법무장관의 영장을 기각했던, 지금까지 법원의 행보들을 보면 그렇다.
그럼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만약 추경호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국민의힘은 정치적 동력을 회복했다는 착각에 빠져들 것이다. 내란 특검을 공격하고, 채상병 특검을 공격하고, 김건희 특검을 공격할 것이다. 마치 그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졌다는 것처럼. 법정에서 자신의 부하들과 싸우고 있는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또다시 면회하고, 장외로 뛰쳐나가 이재명 정권을 끝장내자고 목 놓아 외칠 것이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보수 언론은 '특검 수사가 엉터리였다는 게 입증됐다'며 대대적으로 역공을 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일들은 국민의힘이 '내란의 늪'에 더 깊숙히 빠져들도록 만들 것이다. '우린 내란 세력이 아니다'라는 헛된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내란 정당' 딱지를 뗄 수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구속이 되든, 불구속이 되든 어쨌든 추경호는 특검에 의해 기소될 것이고, 윤석열의 불법 계엄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국회의원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법원은 규범을 마련해 줄 것으로 믿는다.
추경호가 구속되든 말든, 영부인의 각종 비리를 감싸기 급급했던 여당, 만취해 군인들과 술 먹었다는 걸 자랑스레 말하는 대통령에 쩔쩔 매는 여당, 그런 대통령 밑에서 이리저리 허수아비처럼 끌려다니던 지리멸렬한 모습이 그날 생중계 된, 그리고 특검이 밝혀낸 '내란의 밤' 국민의힘의 모습이었다. 전한길 같은 극우 유튜버에 휘둘리는 정당, 당대표가 내란 우두머리혐의로 수감된 윤석열 면회를 가고, 최고위원은 허섭한 논리의 혐중 음모론을 제기하는 그런 정당. 정치브로커 명태균에게 휘둘리고, 사이비 종교 신천지, 통일교에 휘둘리는 정당, 그래놓고도 반성도 없는 정당이 '내란 프레임'에서 벗어났다고 자평한들 유권자들이 믿어줄 수 있을까?
추경호는 '국민의힘'이라는 블랙코미디의 조연 배우일 뿐이다. 불법 무도한 계엄 앞에서 본회의장 표결에 불참하고도 뻔뻔하게 "야당만으로도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느니, "표결 거부권도 의원의 권한"이라느니, 기껏 '처벌'을 피하고자 변명하고 있는 걸 "당당함"으로 포장할수록 모순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중도층 유권자들은 더욱 국민의힘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
무능함과 어리석음을 인정받고 취해있을 바에야, 국민의힘은 차라리 추경호가 구속되는 걸 바라는 게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일 수 있다. 홍준표의 말처럼,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드는 게 나라를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일 것이다. 법원은 무능함과 어리석음을 심판하기 어렵지만, 유권자는 그 모습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추경호가 구속되건 말건, 국민의힘이 해산되건 말건, 크게 상관 없는 이유다.
▲추경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윤석열 전 대통령 ⓒ연합뉴스
박세열 기자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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