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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트럼프 암살 시도가 드러낸 미 정치의 폭력성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6/04/27 08:50
  • 수정일
    2026/04/27 08:5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길주 뉴욕통신원

kiljy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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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27 07:15

  • 수정 2026.04.27 07:26

  • 댓글 0

국가·사회 어젠다를 선악으로 가르면서 폭력화

2021년 의사당 진입 점거 사태에서 드러나

총기와 폭력, 정치 언어로 둔갑한 위험한 시대

총을 들어 미국을 지키겠다는 '마가'도 문제

경호 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의 극한 대립

'외로운 늑대' 열린 공간 끌어낼 정치력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세 번째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기자의 질문을 주의깊게 듣고 있다. 2026.4.25 워싱턴DC 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기 취임 이후 처음 암살 시도를 겪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밤 8시쯤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주최하는 연례 만찬에 참석했다. 약 30분 뒤 만찬장 밖 보안검색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은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현장을 떠났다.

용의자는 만찬장에 진입하려는 과정에 총을 발사했고, 한 보안요원이 총격을 당했지만, 방탄조끼를 착용해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용의자는 캘리포니아주 토런스 출신인 31세 콜 토마스 앨런으로 알려졌다. 앨런은 불법 총기 소지 및 사용 혐의를 받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 만찬장에 총기를 쏘며 진입하려다 실패한 후 경호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된 용의자 콜 토마스 앨런이 바닥에 엎드려 있다. 2026.4.25 워싱턴DC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는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첫 번째 암살 시도는 2024년 7월 13일 펜셀베이니아 소재 버틀러에서 있었던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일어났다. 현장에서 살해된 범인은 유세장 인근 건물 지붕에서 총격을 가했으며 총탄은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의 오른쪽 귀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번째 암살 시도는 2026년 2월 발생했다. 무장한 범인이 트럼프 대통령의 플로리다주 사저인 마러라고에 침입하려다 대통령 비밀경호국 요원들에 의해 사살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세 번째 암살 시도로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여러 차례 암살 대상이 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정치의 폭력화가 어디까지 왔나를 말해준다.

2021년 1월 6일 미 의회 의사당이 시위대에 의해 점거됐다.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2020년 재선에 실패했다면서 미 헌법의 절차대로 의회가 선거 결과를 최종 승인하는 절차를 막으려 했다. 헌법 절차를 방해하려 했으니, 이 사건은 “반란(Insurrection)”으로 불린다. 미 의사당 점거는 1812년 전쟁 당시 영국군이 수도 워싱턴을 장악해 의사당에 불을 지른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시위대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치적 의사 표출이라고 주장했다. 폭력이 적극적 정치 언어로 둔갑했다.

2021년 “반란” 때도 총기 위협이 있었다. 최소한 8명이 총기 소지 혐의로 체포됐고, 경찰은 시위대로부터 약 3000 발의 탄약을 압수했다. 난입 점거 당시 의사당 인근에 다량의 총기와 폭탄을 실은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폭력의 정치 언어는 총기가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2024년 7월과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또한 범인들의 정신이상 증세가 유발한 행동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대 관점, 또는 그에 대한 실망을 극한 폭력성으로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 언어의 폭력화와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세력과 무관하지 않다. MAGA를 상징하는 이미지에는 총기가 들어있는 경우가 흔하다. MAGA 추종자들은 “트럼프, 총기, 하나님”을 하나로 묶고 미국의 위대함은 총기로 성취한다는 메시지를 외친다.

암살 시도를 포함해 미국에 총기를 이용한 범죄가 만연한 이유는 총기가 흔하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은 총기 소지를 사회 구성원의 권리로 인정한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한 손에 농기구를, 다른 손에 거머쥔 총기가 있어서 가능했다는 역사관이 총기 소지 권리를 성문화했다. 이로써 살상 도구가 상품화됐다. 선물로도 주고 받을 정도로 흔해진 폭력 수단이 수중에 있으면 이를 사용할 이유 또한 만들어진다. 술을 냉장고에 채워 놓으면 술 마실 이유가 쉽게 만들어지는 이치다.

 

미국 정치의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음을 보여준 2021년 1월 6일 의회 의사당 점거 당시 모습. 총기와 총기 사용이 정상적 정치 의사 표시로 둔갑했다. 2021.1.6 연합뉴스 자료사진

극한의 정치폭력은 국가와 사회의 어젠다를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선으로 규정하고 반대되는 세력을 악으로 설정하면 극한 폭력이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 잘못된 세력을 설득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척결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정치에는 선과 악을 극단으로만 보는 경향이 더 뚜렷해졌다.

미국 우선주의에 반대하면 미국의 퇴화를 방조하는 세력 취급을 받는다. 이란 전쟁을 반대하면 이란의 핵을 방조한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한 위협을 방관하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동조하거나 묵인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국내 문제에 있어서 트럼프 정부의 관세 위협을 비판하면 미국 노동자의 삶에 대해 무관심한 다국적 국제주의 엘리트로 몰린다. 중간지대가 사라진 곳에서는 상대가 없어져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극단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많다. 친미가 아니면 모조리 친공산으로 몰았던 매카시즘의 재등장이다.

암살 시도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 동원은 '외로운 늑대(Lone Wolf)'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암살 시도 후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수사 당국자들은 용의자가 "외로운 늑대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나도 그렇게 느낀다”라고 말했다. 용의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도 했다. '외로운 늑대'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확신이다. 여기에 자신이 일거에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명 의식이 합쳐지면 비이성적 행동을 정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은 단정하기 어렵지만 용의자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암살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온라인을 통해 총기 구매와 사용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고, 행사장의 배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정보는 말 그대로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수집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기계공학으로 학사, 컴퓨터 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25일(현지시간) 발생한 직후 경호요원들이 총을 꺼내들고 경계하고 있다. 2026.4.25 워싱턴DC AFP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세 번째 암살 시도 후 보안 인력과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지하에 4억 달러를 들여 최첨단 연회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대목이 있다. 정치의 양극화와 이로 인한 정치언어의 폭력성을 돌아보지 않는 한 더 많은 비밀 경호 요원과 더 정교한 하이테크 검색으로도 정치 폭력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을 살피지 못한다"는 경구를 새겨야 할 때다. 더욱이 이 도둑은 정보 취합 능력이 뛰어나고 비이성을 정상으로 전환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중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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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를 말하자 길들이기에 나선 워싱턴을 길들여야

  • 기자명 이경렬 전 대사
  •  
  •  승인 2026.04.27 0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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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이재명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을 만난 후 이번 회담이 “한중관계의 완전한 복원”으로 향하는 계기라고 평가했다. 미국만 보고 움직이지 않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 뒤 곧바로 쿠팡 문제가 워싱턴의 고위급 의제로 떠올랐다. 1월 23일 밴스 부통령은 김민석 총리와 만나 쿠팡 문제를 거론했고, 이튿날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USTR 대표에게 “쿠팡 수사는 통상 문제가 아니라 국내법 문제”라고 따로 설명해야 했다. 한국의 수사를 한국 법으로 처리하겠다는 상식을 한국 정부가 미국에 해명해야 하는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2월 21일에는 국방부가 그 수일 전 서해 상공에서 자기 멋대로 훈련한 주한미군 측에 항의했다. 훈련의 세부 내용은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고 미 공군은 서해상에서 중국 측과 대치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조성했다. 한국은 미국 군사행동의 방식과 범위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드문 장면이었다. 이틀 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서울을 국빈 방문했고 두 정상은 한-브라질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중국과의 관계 복원에 이어 남미의 브릭스(BRICS) 회원과도 외교 축을 넓힌 것이다. 워싱턴 입장에서 보면 서울은 ‘동맹은 동맹이고, 외교는 우리의 판단으로 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기 시작한 셈이다.

3월 10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주한미군 장비의 중동 재배치에 한국은 반대 의견을 냈지만 관철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현실을 변경해야 한다는 의지가 내포된 발언이었다. 지금의 동맹 운용 방식은 만족할 수 없다는 문제 제기이기도 했다. 이어 3월 12일 김민석 총리는 밴스 부통령을 다시 만나 핵추진잠수함과 원자력에 관한 미국의 약속을 조속히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쿠팡 문제도 다시 거론됐다. 한쪽은 안보와 농축·재처리를 밀어붙이고 다른 한쪽은 기업 수사 문제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3월 27일 이 대통령은 전작권을 조기에 되찾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4월 2일 방한한 미 상원의원들에게도 같은 뜻을 다시 밝혔다. 한국은 우리 능력으로 한반도를 방어하겠으며 그 방향에서 전작권 회수를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미국은 전작권 전환 문제를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 어떻게든 이걸 쥐고 흔들며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충성하도록 종용하려는 것이 미국의 속셈이다. 미국은 서울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정부가 기존의 금기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4월 10일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나왔다. 이 대통령은 SNS에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홀로코스트에 빗대며 강하게 비판했고, 이 발언은 곧바로 외교적 파장을 불렀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함께 움직이는 전쟁 국면에서 한국 대통령이 그 행동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그것은 마치 로미오 앞에서 줄리엣의 뺨을 후려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예민함이었다. 한국은 더 이상 미국과 늘 같은 문장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 며칠 뒤부터 워싱턴의 압박은 훨씬 노골적인 형태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3월과 4월 국회에서 북한 구성 지역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언급했고, 4월 17일 숭미언론은 정 장관이 기밀을 누설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미국은 그 발언을 문제 삼아 대북 정보 공유를 제한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대통령은 21일 이 사태를 “터무니없다”고 일축하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야겠다고 코멘트 했다. 눈여겨볼 것은 사실관계만이 아니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사안이 ‘기밀 누출’ 프레임으로 조작된 것이 문제다. 미국과 국내 숭미주의 세력이 합세해 ‘반미집단’에 공세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4월 21일 방시혁 하이브 의장 문제도 불거졌다. 그는 2000억원 규모의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로 이미 지난해 8월부터 출국금지 상태였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관은 방 의장의 미국 방문을 위해 일시적인 출국 허용을 요청했다. 수사 중인 피의자의 출국 문제에 미국대사관이 끼어든 것이다. 미국은 지금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여기고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 단순한 사안이다. 미국의 요청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같은 날 미국 공화당 의원 54명은 강경화 주미대사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한국이 미국 기업을 “조직적으로 표적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쿠팡 수사를 “정부 전체의 공격”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로이터는 SBS 보도를 인용해 미국이 김범석 쿠팡 의장에 대한 법적 안전보장을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핵잠 같은 안보 현안의 고위급 협의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취지의 압박이 있었다고 전했다. 밴스 부통령의 언급도 같은 결이었지만, 미국은 지금 한국의 내정을 안보·통상 이슈와 묶어 다루고 있다. ‘식민지’ 한국을 길들이겠다는 저의다.

4월 21일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미 상원 청문회에서 한국의 전작권 회수 계획에 대해 “정치적 편의가 조건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적권 전환은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지 정치적으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군사 기술자의 중립적 설명이 아니다. 한국 정부의 전작권 조기 회수 의지를 두고 일개 미국 군 지휘관이 공개석상에서 한국의 군통수권자의 통치행위를 재단한 것이다. 전작권은 주권 문제다. 그 속도와 조건을 놓고 최종 판단하는 주체는 한국이어야 한다. 미군 사령관은 한국에 군림하는 미국의 총독이 아니다.

여러 사안을 한 줄로 늘어놓으면 하나의 줄거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국과 숭미주의자들이 합작해 한국의 조그마한 ‘자주적’인 행보들에 반격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1월에는 한중관계 복원 선언이 있었고, 2월에는 서해 훈련 항의와 브라질 국빈 방문이 있었다. 3월에는 주한미군 장비 차출에 대한 불만 표출과 전작권 조기 회수 의지 천명이 이어졌다. 4월에는 미국과 다른 어법으로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워싱턴과 숭미파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한국이 이제 드디어 비록 수줍게나마 자기 판단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위성락 안보실장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굴종이 우리가 지켜야 할 정상상태라는 말일까.

답은 분명해야 한다. 쿠팡 수사는 국내법대로 밀고 가야 한다. 24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미국의 ‘내정간섭’을 비판한 것은 절대 옳다. 정동영 장관 발언을 둘러싼 정보 제한과 국내 프레임 형성 과정은 면밀히 따져야 한다. 전작권 회수는 선언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연합지휘 체제 조정과 한국군 단독지휘 체제 검토를 포함한 별도의 로드맵으로 옮겨가야 한다. 지난 80년 동안 한미동맹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우리가 자주를 말하면 압박이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그 압박은 우리가 비로소 출발선에 섰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눈치가 아니라 결심이다. 미국을 길들여야 할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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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새 국방발전 5개년 계획, 억제와 위험의 극대화

  • 기자명 문장렬 전 국방대 교수
  •  
  •  승인 2026.04.25 1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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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관련: “핵무기수를 늘이고 핵운용수단과 활용공간들을 확장”
해군 수상 및 수중전력 관련: “핵무장화를 중심으로 해군작전능력을 급속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갱신”
여타 첨단무기 개발과 고성능화
대남공격용 주요타격수단의 강화
북한의 전쟁억제력과 한반도 전쟁위험성의 동시적 극대화

북한은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발표한 ‘국방력발전 5개년계획’의 대부분을 달성했다. 2022년부터 2년 이상 팬데믹 때문에 스스로 국경을 폐쇄하고 외부의 경제 지원이 차단된 상태에서 거의 자력으로 이루어낸 성과이기에 놀라울 정도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핵 능력 고도화(핵탄두의 소형·경량화 및 전술무기화, 초대형 핵탄두 생산), 미사일 체계 다변화(극초음속 활공 비행전투부 개발, ICBM과 SLBM을 위한 고체연료 추진엔진 도입), 정찰 및 타격 능력(군사정찰위성 운용 및 무인정찰기 개발) 등이다. 재래식 기반전력의 첨단화도 상당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KN-계열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또는 초대형 방사포와 전차 등의 지상무기, 5천톤급 이상의 구축함 및 잠수함도 개발했다. 그리고 이 모든 무기체계는 핵무기 장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26년 2월의 조선로동당 제9차 대회에서 발표된 새로운 국방발전 5개년 계획은 지난 5년의 성과에 기초하여 핵무력과 재래식 무기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는 일종의 병진개발 정책이다. 고도화는 기존 무기체계의 성능 향상뿐 아니라 새로운 전술과 전략을 구현하는 수단과 방법을 포함한다. 예컨대 북한은 우크라이나전쟁에의 파병 경험과 이란전쟁 관찰을 통해 현대전에서 드론과 인공지능(AI)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그것을 자기네 군사력의 건설과 운용에 반영하려는 듯하다. 북한의 새 국방발전 계획을 비교적 자세히 밝힌 노동신문 보도를 참고하여 주요 내용과 시사점을 짚어보자.

핵무기 관련: “핵무기수를 늘이고 핵운용수단과 활용공간들을 확장”

핵무기의 양적 증대와 운반체계 다양화는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던 사업이다. 북한은 2017년 11월 처음으로 미국 본토까지 도달가능한 사거리 1만km로 추정되는 ICBM 발사에 성공하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이후 계속 ‘완성도’를 높여 2024년 10월 고체추진 화성-19형까지 시험에 성공했다. 전술용 또는 ‘대남용’이라 할 단거리 탄도미사일(사거리 800km 이하)도 KN-23, 24 등 최소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대구경 방사포인 KN-25도 사실상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간주된다. 또한 사거리 2,000km 이상의 토마호크급인 ‘화살’-계열의 순항미사일과 ‘해일’-계열의 핵어뢰를 보유하고 있으며 발사 플랫폼은 지상과 해군함정 모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핵운용수단의 확장은 전혀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기보다는 기존 수단들을 핵과 재래식 2중용도로 개량하거나 지상과 해양 플랫폼에 사용가능하게 개조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북한이 2023년 3월 공개한 핵탄두 ‘화산-31’은 소형 카트리지 형상으로서 충분히 ‘범용’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핵무기 활용공간들을 확장한다고 언급한 것은 육·해·공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포함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인공위성에 핵탄두를 탑재하여 지구궤도를 돌게 한 후 지상에서 공격명령을 발신하여 원하는 지상목표를 타격한다면 ‘우주 핵전쟁’ 능력을 보유하는 셈이 된다. 지상목표를 직접 타격하지 않더라도 우주에서 자상을 지향하여 핵폭발을 일으키면 강력한 전자기펄스(EMP)가 일정 지역의 거의 모든 전자장비들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 북한은 자기 영토 상공의 우주에서 남쪽을 지향한 핵전자기펄스(NEMP) 공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해군 수상 및 수중전력 관련: “핵무장화를 중심으로 해군작전능력을 급속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갱신”

북한의 핵무력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선진국들이 보유한 중대형 구축함과 핵추진 잠수함을 중심으로 핵무장 해군력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2025년 4월에 5,000천톤급 신형 유도탄구축함 1번함 ‘최현호’가, 6월에는 2번함 ‘강건호’가 진수되었다. 잠수함 전력으로는 북한이 ‘전술핵공격잠수함’이라 부르는 ‘김군옥영웅함’을 2023년 9월 진수한 데 이어 2025년 12월에는 8,700톤급 잠수함 개발 현황을 외형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이들 잠수함에는 북극성-4/5형 등 SLBM과 ‘화살’-계열의 전략순항미사일이 탑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대회 후 2026년 3월 10일 김정은국무위원장은 8,000천톤급 대형 구축함 건조 계획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이지스급 구축함과 규모면에서 거의 대등한 것이다.

북한의 해군력 증강 속도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매우 빠른 것이다. 지상전력이나 미사일에 비하면 함정의 건조는 다양한 무기체계를 탑재한 플랫폼이기 때문에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북한은 해군세력을 우선 최고급 수준에서 최소한의 수량을 확보한 후 점차 양적인 증대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량이라 하더라도 기능적으로 필요한 함정들을 핵무장하여 보유한다면 해전에서 한·미·일 해상세력과 유사시 어느정도 맞대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타 첨단무기 개발과 고성능화

여타 군사적으로 의미가 큰 군사력 건설 계획을 노동신문 보도 원문(“” 인용)을 따라가며 살펴보자. “강력해진 지상 및 수중 발사형의 대륙간탄도미사일종합체” 중 수중 발사형 ICBM은 SLBM을 지칭하며 그 종합체들이란 ‘다탄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북한은 다탄두 미사일을 시험한 적이 없지만 일단 ICBM을 보유하면 다탄두화를 추구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다. 1개의 모(母)탄두에 장착된 여러 개의 자탄(핵폭탄과 가짜탄의 혼합)이 발사 후 우주에 진입하면 분리되어 개별 목표를 향해 약간씩 다른 경로로 표적에 접근하기 때문에 모두 다 요격하기가 어렵다. 당연히 핵억제력은 배가하게 된다.

“각이한 인공지능무인공격종합체들”이란 무인기를 AI와 결합하겠다는 의미이므로 ‘종합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서 무인기의 효용성을 절감하고 이란전쟁에서 AI의 위력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미 개발한 ‘샛별’-계열의 전략무인정찰기와 공격형무인기에 강력한 자폭기능을 결합하고 여기에 AI까지 접목하여 현대전의 변화추세에 빠르게 부응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유사시 적국의 위성을 공격하기 위한 특수자산”은 위성요격(ASAT, Anti-Satellite)용 미사일이나 레이저무기가 될 수 있다. 사실 인공위성은 물리학적으로 정해진 궤도를 돌고 방어체계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지상이나 공중 또는 우주(요격위성)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격추하기가 어렵지 않다. 특히 지상에 안정적으로 거치된 레이저발생장치는 빔을 인공위성에 정확히 조사(照射)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다. 물론 레이저무기는 출력에 따라 무인기나 항공기, 심지어 미사일까지 요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적국의 위성을 요격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공통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능력의 개발과 보유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예컨대 중국은 2007년에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이용하여 자국의 기상위성을 (필요에 따라) 파괴한 사례가 있다. 북한도 그러한 능력을 보유하겠다는 것이다.

“적의 지휘중추를 마비시키기 위한 매우 강력한 전자전무기체계들”로는 앞에서 설명한 핵전자기펄스(NEMP)와 함께 비핵전자기펄스(NNEMP) 무기가 있다. NEMP는 어쨌든 핵폭탄을 터뜨리기 때문에 극단적 상황이 아니면 사용을 주저하겠지만 내폭형 재래식 폭탄과 전기장치를 사용하는 NNEMP는 전술적으로 얼마든지 사용가능하다. 미국과 중국은 두 가지 EMP탄을 모두 보유하고 있고 한국은 NNEMP탄을 개발하고 있다.

“더욱 진화된 정찰위성들”을 포함시킨 것은 우주개발을 가속화햐겠다는 의미다. 북한은 2023년 ‘만리경 1호’ 위성의 궤도진입에 성공했지만 2024년 5월에 실패한 후 지금까지 재발사를 시도하지 않고 있다. 인공위성은 정찰 통신 지휘통제 우주교전 등 군사적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은 현대전의 필요 자산이다. 북한이 새 국방발전 계획에 인공위성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겠다는 의지와 계획을 천명한 것은 군사력의 통합적 고도화 측면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대남공격용 주요타격수단의 강화

북한은 600㎜ 방사포와 신형 240㎜ 방사포, 작전전술미사일종합체 등을 대남공격용 주요타격수단으로 규정하고 “연차별로 증강배치하여 집초공격의 밀도와 지속성을 대폭 제고함으로써 전쟁억제력의 핵심부문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집초공격이란 목표물에 화력을 집중해 완전히 파괴하는 공격방식이다. 유사시 다수의 방사포 집중포격 등으로 남한을 초토화하고 소위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겠다는 것이다.(2023년 12월 30일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의 김정은 언급)

새 국방발전 계획에 의하면 남한에 대한 전쟁억제는 기본적으로 ‘핵-재래식 병진’ 전략이지만 재래식전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수단의 하나로 지난 4월19일 시험발사를 통해 새롭게 공개된 무기가 ‘집속탄두(cluster bomb)’를 장착한 ‘화성포-11라형’이다. 탄두부에 넣은 수 백개 이상의 자탄들이 목표지역 상공에서 산포·낙하·폭발하여 축구장 10개 정도 면적 내의 병력과 연성표적을 파괴한다.

북한의 전쟁억제력과 한반도 전쟁위험성의 동시적 극대화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월 9차 당대회 연설에서 지난 5년간의 성과를 자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5개년 국방발전계획이 수행되면 우리의 국가방위력은 비상히 증대되어 적들이 대처하지 못할 높이에 있게 될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 국가를 넘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이미 독자적인 대미 억제력을 어느정도 구비했지만 재래식무기의 첨단화를 병행하면서 미국과 남한에 대한 전쟁억제력을 한층 더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전쟁억제력 강화로 인하여 한반도에서의 전쟁가능성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실 미국은 핵전쟁을 불사하지 않는 한 북한을 침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한편 북한이 먼저 남한이나 미국을 침공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남한에 대해서는 ‘적화통일’도 포기하고 휴전선에 방어용 방벽을 쌓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가능성이 줄어들었다고 하여 평화가 증진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안보의 딜레마다. 군비경쟁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동북아의 군비경쟁은 과거 어느 때보다 격화하고 있다. 미중 간의 패권경쟁과 군사력 증강, 일본의 재무장, 한국의 국방비 폭증 등은 북한의 국방력 발전과 맞물려 전쟁의 가능성은 낮지만 ‘공멸’의 위험성은 극대화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남북관계가 막혀 막대한 경제사회적 기회비용이 허비되는 동안 주변 강대국은 전략적 이익을 편취하고 있다. 북한이 나름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국방발전 계획을 수립고 이행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남북이 함께 전쟁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평화와 안보는 남북이 두 국가이든 한 민족이든 공히 가장 절실한 소망이 아닌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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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주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이 대통령의 평소와 다른 화법

지방선거는 지역 일꾼을 뽑는 선거이지만, 막상 선거 과정에선 지역의 중요한 의제와 이슈들이 간과되곤 합니다. [우리 동네 진짜 이슈] 기획은 각 시민기자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와 불편함을 지적하고, '정치'가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제안합니다. 한 표 한 표가 지역을 바꿔줄 것을 기대하는 시민기자들의 목소리를, 선거에 나오는 후보자들이 경청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본 제주 제2공항 예정지. 2023.3.6 ⓒ 연합뉴스

제2공항 건설 찬성(안전문제 해소 전제), 주민투표와 공론조사 등 다양한 방식 검토(위성곤 더불어민주당 후보)

찬반 입장 표명 없이 갈등해결 주력, 주민투표 반대, 전문가 검증위원회 결론에 따라 결정(문성유 국민의힘 후보)

제2공항 건설 반대, 주민투표로 결정, 취임 즉시 중앙정부에 주민투표 건의, 추진(김명호 진보당 후보)

제2공항 건설 반대, 공론화 거쳐 주민투표로 결정, 취임 즉시 중앙정부에 주민투표 건의, 추진(양윤녕 무소속 후보)

*출처: 제주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가 지난 15일 발표한 제2공항 도민결정권 관련 도지사 후보 입장 확인 자료

6·3 지방선거를 앞둔 제주도의 최대 이슈는 단연 제2공항 건설 문제다. 단순히 공항 건설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 차원을 넘어 누가, 어떤 방식으로 공항을 건설할지 말지를 결정하느냐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 중이다. 그리고 이 쟁점의 핵심은 '주민투표'로 집약되고 있다.

사실 주민투표 이슈를 제외하면 선거판을 달구는 뜨거운 쟁점은 아직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 기조에 맞춰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개발 관련 공약이 그나마 활발하게 제시되는 형국이다. 2035년 탄소중립도시를 완성하겠다는 위성곤 민주당 후보나, 국립기후대학원을 설립하고 기후테크 분야의 신산업을 창출하겠다는 문성유 국민의힘 후보 등의 공약이 대표적이나 폭발력은 약해 보인다.

이 밖에도 대중교통이 불편한 제주도의 현실을 고려한 교통체계 개편, 육지로의 이탈로 인한 청년인구 감소를 막을 방안, 국제적 관광도시로의 비전 등 이런저런 공약들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이나 이해충돌의 민감도 면에서 제2공항 이슈가 단연 뜨거운 게 지방선거를 앞둔 제주의 풍경이다.

현역 도지사와 국회의원이 3파전을 벌였던 더불어민주당 경선 합동토론회에서도 제2공항으로 인한 갈등 해소 방안이 주도권 토론 주제로 제시됐고, 지역언론에서도 이와 관련한 각 당 후보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제2공항 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측은 도지사 후보는 물론 도의원 후보와 출마예정자들을 상대로도 주민투표 찬성 여부를 묻는 질문지를 보내 의사를 확인중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같은 당 후보들도 찬성, 반대, 유보 등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2공항 건설 계획이 발표된 지 10년이 넘었고, 공항 건설을 위한 법적 절차인 기본계획이 고시됐고, 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아직도 이 문제가 이슈로 부각되는 상황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제2공항 문제를 두고 찬반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해법 찾기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아직은 공항부지가 수용되기 전이므로 이번 지방선거가 갈등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할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게 중론이다.

정치권, 국토부, 제주도정의 책임

겨울철 철새도래지가 밀집한 성산읍 제2공항 예정부지는 조류충돌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산읍 신양리의 바닷가 마을 상공에 오리떼가 수직 상승하여 날고 있는 모습. 2023년 2월27일 오후 2시31분 촬영. ⓒ 강석호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정치권과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제주도정의 책임이 크다. 발단은 보수정권으로부터 시작됐다. 2015년 11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를 제2공항 예정부지로 전격 발표한 박근혜 정권의 의문투성이 입지선정, 제주도와 제주도의회가 합의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수용 거부한 원희룡 제주도지사, 윤석열 정권 국토교통부의 무리한 절차 강행에 이르기까지 보수정권이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로 일관해 온 책임이 크다.

민주당 정권의 책임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국토부도 제2공항 사전타당성 용역 재조사 검토위원회 활동을 강제 종결하고, 현 제주공항의 개선으로 수용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전문기관(프랑스 ADPI)의 용역보고서를 은폐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전략환경영향평가 보고서가 환경부에 의해 세 차례나 반려됐음에도 사업수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원희룡에 이어 도정을 맡은 민주당 출신 현 오영훈 지사도 도민결정권을 강조했을 뿐 줄곧 모호한 태도로 일관해 갈등을 키웠다. 또 민주당 소속 3명의 국회의원도 표를 의식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을 뿐 적극적으로 제2공항 이슈를 해결하는 데 나서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제주 제2공항 건설 여부가 6·3 지방선거의 최대 이슈로 부상한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공항 건설에 제기된 각종 문제점과 의구심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데다가 애초 예측했던 관광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제2공항 예정부지를 둘러싼 쟁점들은 저감방안 같은 보완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입지타당성의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조류 충돌의 위험성, 부지 내 존재하는 동굴 파괴 우려, 지하수를 함유한 숨골과 법정보호종 문제에 대해선 마땅한 대책이 없음에도, 정치권과 제주도정은 우려의 목소리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특히 무안공항 참사의 단초가 된 조류충돌 사례가 겨울철 철새도래지가 밀집한 성산읍 공항 예정부지에 대한 의구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15년 제2공항 사전타당성 조사에서 제시한 공항 이용객 수는 2025년 3940만 명, 2035년 4548만 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5년간 제주공항 이용객은 3000만 명을 밑돌고 있다. 2025년 기준 약 1000만 명의 격차가 발생한 것이다. 2024년의 전년도 대비 증가율은 0.9%, 2025년은 전년도 대비 0.6% 증가에 불과하다. 추세적으로 보아도 앞으로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2015∼2016년을 정점으로 제주 이주 열풍은 가라앉은 지 오래됐고, 현재 수준의 관광객만으로도 쓰레기와 교통체증, 환경훼손 등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한 관광수용력은 한계치를 벗어난 상태다. 한마디로 제2공항 추진 명분이 상당히 퇴색한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뜻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월 30일 제주한라대학교 한라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타운홀미팅 '제주의 마음을 듣다'에서 발언권 요청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 타운홀 미팅에서 한 발언도 제2공항 찬반 주민투표 이슈에 불붙인 측면이 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제2공항 문제에 대해 즉석에서 거수로 찬반 의견을 물은 뒤 "하지 말자는 쪽이 여기서는 조금 더 보이기는 한다"라면서 "어쨌든 여러분이 잘 판단하십시오"라고 간단히(?) 마무리하고 넘어갔다.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과 논리 전개를 해오던 대통령이 유독 최대 이슈인 제2공항 문제에 대해서는 평소와 다른 화법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 대해 제주 사회 일각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반응에서부터, 찬반 의견이 팽팽한 만큼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내비친 게 아니냐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나왔다.

사실 대통령의 진의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주도민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겠다는 뜻으로 읽는 게 맞아 보인다. 현재 절차가 진행 중인 국책사업인 만큼 "법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라거나, "도지사가 책임지고 절차대로 마무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굳이 찬반 의사를 거수로 물어보고, '여러분(제주도민)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한 것은 주민투표 혹은 여타 방식의 도민결정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지난 2021년 9월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당시 KBS 제주 인터뷰에서 내놓은 제2공항 문제 해결의 방향성과도 일치한다.

"제2공항 문제는 결국 제주도민들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고, 또 그것도 불합리한 의사가 아니라 합리적인 의사가 중요하고, 그게 과연 제주의 장기적 발전에 도움이 되고 또 제주도민들에게 이익이 되느냐, '장기적으로' '궁극적으로' 이 점에서 좀 판단을 해봐야 되는데... 사실 환경부의 입장도 중요하긴 하지만 제주도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 최종적인 결론을 못 낸, 반대가 조금 많은, 이런 상태인데 합리적으로 설명해서 동의를 받을 수 없는 정책이라면 사실 정치가 도민의 뜻에 반해서 강행할 일은 아닌 거죠. 충분히 절차상으로 국가기관 상호 간에 협의도 해야 되겠고, 또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도민들 간의 상호 토론을 통해서 합리적 의사결정이 되면, 그에 따르는 게 제일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제주 공약 1호인 '탄소중립 선도도시'와 대규모 공항 건설 정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다. 제주 타운홀미팅에서 이 대통령이 도내 전기차 100% 전환 시기를 앞당기도록 장관과 도지사에게 거듭 촉구한 점과 연결해 또 하나의 공항 건설에 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도민결정권과 관련해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방법론이 바로 주민투표다. 직접 민주주의 원리에 비춰보면 갈등 사안 주민투표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명쾌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지사 후보들이 주민투표를 가장 많이 거론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숙의형 공론조사나 여론조사가 도민결정권의 방법론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주민투표에 대한 수용성이 가장 높게 나오고 있다. 2023년엔 공항 건설 찬반 여부와 관계없이 도민의 70% 이상이 주민투표로 결론을 내자는 데에 동의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주민투표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적지 않다. 주민투표를 반대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가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문성유 후보는 "현행법상 국가 사무인 제2공항 건설은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 위성곤 후보도 비슷한 이유로 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주민투표를 주장하는 측은 주민투표법 제8조(국가정책에 관한 주민투표) 제1항에 '주요시설을 설치하는 등 국가정책의 수립에 대한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주민투표의 실시구역을 정해 관계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할 수 있다'라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다.

주민투표를 둘러싼 또 하나의 쟁점은 과연 투표 결과에 패자 측이 승복하겠냐는 점이다. 최근 수년간 실시한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반대의견이 오차범위 안팎에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난 마당에 투표로 결정하는 게 타당하냐는 것이다. 찬성 측이 주민투표를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반대 측은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떠안고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갈등이 큰만큼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패배한 측이 깨끗이 승복해 모든 논란이 일시에 사그라드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주민투표'이므로 일단 결론이 나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적지 않다.

숙의형 공론조사나 여론조사 방식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공정한 절차와 내용을 정하는 과정이 주민투표 못지않게 진통을 겪을 공산이 크다. 만약 제주 제2공항 문제를 도민결정권에 의해 매듭짓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면, 공론조사나 여론조사보다는 모든 제주도민이 참여하는 주민투표가 상대적으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이번 지방선거, 제2공항 논쟁 끝내는 계기 돼야

지난 3월 30일 오후 제주시 노형동 한라컨벤션 앞에서 제주 제2공항 건설에 찬성하는 이들이 피켓 등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30일 오후 제주시 노형동 한라컨벤션 앞에서 제주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관계자들이 제주 제2공항 갈등 해소를 위한 주민투표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위성곤 후보가 당선할 경우, 먼저 주민투표와 공론조사 등 다양한 방식을 놓고 의견수렴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민주당은 제2공항 문제에 대한 환경단체나 시민사회의 반대에 직면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도민결정권을 존중하겠다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위성곤 후보는 지역구 표심을 고려한 탓인지 예외적으로 제2공항 건설에 안전문제 해소를 전제로, 조건부 찬성 견해를 밝혀왔다. 어떤 선택을 하든 속도감 있게 관련 절차를 마련하여 더 이상 도민 분열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당 김명호 후보나 무소속 양윤녕 후보가 당선한다면 공약대로 주민투표가 급물살을 타게 될 전망이다.

국민의힘 문성유 후보가 당선하면 도민결정권 논리나 주민투표는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국민의힘 제주도당은 제2공항을 조속히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펴왔기 때문이다. 문 후보는 전문가 검증위원회의 결론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으나, 사실상 공항 건설이 취소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제주사회를 10년 이상이나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게 한 소모적 논쟁이 반드시 끝나야 한다. 후보자들은 모호한 태도에서 벗어나 확실한 소신과 해법을 제시하고 도민의 선택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지방선거#제2공항#주민투표#도민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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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만찬 총격범, 범행 10분 전 ‘선언문’ 전송…“고위 관료부터 암살”

김원철기자

  • 수정 2026-04-27 06:50

가족에게 범행 동기 알려…트럼프 참석 행사장 보안 허술하다 조롱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토랜스 출신의 콜 토마스 앨런(31·빨간 원 표시)이 25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 행사 중 워싱턴 힐튼 호텔 연회장 방향으로 보안을 뚫고 돌진하고 있다. 이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게시했다. 트루스소셜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 만찬 행사장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의 용의자 콜 토머스 앨런(31)이 범행 직전 가족에게 범행 동기와 표적을 담은 ‘선언문’을 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이 선언문에는 트럼프 행정부 고위 인사들을 암살 표적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명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뉴욕포스트는 26일(현지시각) 앨런이 총격 약 10분 전 가족에게 선언문을 전송했다고 보도했다. 선언문을 받은 형제는 이를 곧바로 코네티컷주 뉴런던 경찰에 신고했다.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선언문에는 트럼프 행정부 관료들을 고위직 순으로 표적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앨런은 선언문에서 특정 인물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소아성애자·강간범·반역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을 남겼다. 그는 “더는 그의 범죄로 내 손을 더럽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또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산탄을 사용하겠다고 밝히면서도, “필요하다면 대부분의 사람을 관통해서라도 목표에 접근하겠다”고 적어 대규모 인명 피해 가능성도 암시했다.

특히 앨런은 행사 참석자들을 “범죄자의 연설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공모자”라고 규정하며 일반 시민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주장도 펼쳤다. 또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면서 범행이 종교적 가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억압받는 타인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 것은 공모”라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앨런은 성명에서 행사장이 위치한 워싱턴 힐튼 호텔의 보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허술했다고 조롱했다. 그는 “무기를 여러 개 들고 들어왔는데도 아무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란 요원이 M2 기관총을 들고 들어왔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고 비판했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의 총기상에서 권총 2정과 산탄총 1정을 구매한 앨런은 항공기 탑승에 따른 보안 검색을 피하고자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까지 기차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용의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앨런을 “매우 문제가 많은 사람”,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인물”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선언문을 읽어보면 그가 기독교인을 증오한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라며 “오랫동안 마음속에 깊은 증오를 갖고 있었고, 강경하게 반기독교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뉴런던 상황에 대해 들었다”며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알려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번 사건으로 국정 운영이나 국가 행사가 흔들리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범죄자들과 정말 나쁜 사람들이 우리나라 행사의 흐름을 바꾸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중단된 출입기자단 만찬을 30일 이내에 다시 개최하기를 희망했다. 이어 당초 만찬장에서 “완전히 다른 ‘사랑의 연설’을 할 예정이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 예정된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방미 일정도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정상 외교 일정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김원철 특파원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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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총격 피신 후 SNS 글 올린 트럼프 “총격범 체포···정신없는 저녁이었다”

수정 2026.04.26 10:38

2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열린 백악관 기자단 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특파원 만찬 행사 중 총격 사건 현장을 피신한 직후 SNS에 글을 올려 “총격범은 체포됐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워싱턴에서 정말 정신없는 저녁을 보냈다”며 “비밀경호국과 법 집행 기관은 정말 훌륭한 일을 해냈다. 신속하고 용감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총격범이 체포됐다고 밝히며 “나는 ‘행사를 계속 진행하자’고 권고했지만, 최종 결정은 법 집행 기관의 지시에 따를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곧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그 결정과 관계없이 오늘 저녁 행사는 계획과는 많이 달라졌고 우리는 다시 행사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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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정동영은 왜 표적이 되었나

  • 기자명 박재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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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6.04.2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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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0
 
   
 

이미 알려진 정보를 언급한 것이 ‘기밀 유출’로 비화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언급한 ‘구성 핵시설’ 발언을 두고 미국과 국내 일부 세력이 보여주는 반응이 이례적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부터 파장의 확산까지 그 배후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의도된 정보 유출과 논란의 증폭

시작은 정 장관의 공개된 정보 언급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이를 ‘미국이 제공한 정보의 공개’라며 문제 삼았다. 이는 국내 보수 언론의 보도를 거치며 ‘안보 참사’, ‘동맹 균열’로 증폭되었다.

주목할 점은 그 이후다. 정 장관의 발언을 구실로 미국이 ‘대북 정보 제공’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사실 자체가 민감한 보안 사안임에도 언론에 노출된 것이다. 미국 혹은 정부 내부의 특정 통로를 통해 흘러나온 정보가 일부 언론과 야당의 정치적 공세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번 사태가 치밀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 대외 전략의 위기와 동북아 관리

미국이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처한 대외적 곤경이 있다. 이란 전쟁의 장기화와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 상실은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에 타격을 입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면서 유럽에서의 영향력도 약화됐다.

중동과 유럽에서 입지가 좁아진 미국에 동북아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거점이다. 일본은 군사 대국화를 위해 미국과 밀착하고 있지만, 한국은 결이 다르다. 대결보다는 평화와 협력을 우선시하는 현 정부의 기조는 대중국 봉쇄를 위해 한반도 긴장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충돌한다.

 

왜 하필 정동영인가

통일부는 현 정부 평화 기조를 실행하는 핵심 부서다. 특히 정동영 장관은 한미연합훈련 축소와 DMZ 관할권의 한국군 이관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전시작전통제권 반환을 추진하는 정부의 정책 기조 역시 미국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 약화를 의미한다.

결국 이번 사태의 본질은 정보 유출 여부가 아니라 ‘자주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다. 국제적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마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상황을 통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소위 ‘시범 케이스’를 통해 한국 정부의 행보를 미국 전략의 틀 안에 묶어두려는 압박으로 풀이된다.

자주권의 시험대, 대통령의 선택

이제 시선은 청와대로 향한다. 정동영 장관을 해임하라는 안팎의 거센 압박 앞에 이재명 대통령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그 선택은 이재명 정부가 자주적 길을 당당히 걸어갈지, 아니면 다시 낡은 질서에 순응할지를 가늠할 시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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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동화책' 같았던 국회 기후특위 공론화, 진짜 질문은 없었다

[인터뷰] '우리가 숙의를 하긴 했나?' 묻는 기후 공론화 참가자들

손가영 기자 | 기사입력 2026.04.26. 09:48:16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지난 13일 마무리된 '기후위기 대응방안에 대한 공론화'에 대한 평가는 거칠게 요약하면 조급함이었다. 겉으론 숙의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촉박한 일정과 부실한 토론 의제 문제가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급기야 공론화 의제숙의단에 참여한 시민사회 위원 8명이 다수 의사를 거스른 진행에 항의하며 중도 사퇴하는 일까지 있었다.

공론화는 2년 전 헌법재판소 결정을 근거로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가 올해 초 추진했다. 헌법재판소는 탄소중립기본법이 정한 탄소중립 목표와 절차가 "미래 세대 환경권을 침해한다"며 '탄소 배출을 어떻게, 얼마나 줄일 것인지'를 제대로 정하라고 국회에 공을 넘겼다. 그런데 기후특위는 "국민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며 지난 2월 '한국형 숙의 공론화'를 추진했다. 2월은 헌재가 정한 법 개정 마감 시한이었다.

그렇게 구성된 기구가 최종 352명이 모인 시민대표단이었다. 이들은 지난 3월 넷째 주와 4월 첫째 주 주말 동안 총 네 차례 토론에 참가했고, 마지막 날인 4월 5일 공론화위원회가 주문한 설문조사에 임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그런데 실질적인 토론 시간은 총 8시간은 될까요? 하루에 2~3시간 정도였으니."

시민대표단이었던 이용희 씨가 "숙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며 지난 20일 <프레시안>과 만나 말했다. 이를 듣던 이보아 공공운수노조 정책국장은 "의제숙의단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의제숙의단은 시민대표단보다 미리 모여 이들이 논의할 의제를 정한 공론화 기구다.

<프레시안>은 지난 20일 서울 강서 공공운수노조 건물에서 이용희 씨와 이보아 정책국장을 만났다. 기후특위 공론화에 대한 이들의 평가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지난 20일 <프레시안>과 인터뷰한 이용희 씨(왼쪽)와 이보아 공공운수노조 정책국장. ⓒ프레시안(손가영)

프레시안 : 3월 11일 시민대표단 모집이 확정됐다. 마지막 일정인 4월 5일까지 대략 한 달 활동했다. 시간이 촉박했나?

이용희 : 우선 지금 내는 비판 의견이 혹시라도 다음 공론장에 해를 끼칠까 걱정된다. 공론화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평가하자면, 시간은 촉박했다. 관련 내용을 미리 숙지하려고 시민대표단에 선정된 후부터 자료실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갔는데, 자료는 거의 본 행사 직전에 올라왔다. 가장 빨리 올라온 게 일주일 전쯤이었다. 미리 보라던 강의 영상은 3일 전에 올라왔다.

본 행사도 토론 자체보다 '리허설'을 더 길게 했다. 4일 간의 행사 일정은 매일 오전엔 강의를 듣고, 오후에 관련 토론을 하고 질문 취합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현장 참석자 160명이 8~10명씩 찢어져서 조별 토론을 했다. 그런데 실질적 토론 시간이 2~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조라 해도, 다들 처음 본 이들이다. 진행자가 '자 얘기해 보세요' 하는데, 토론하기 보단 피상적인 인상을 더 많이 나눌 수 있었다. 저녁에 있을 생방송에 대비한 리허설이 더 길게 진행돼 더 기억에 남는다.

프레시안 : 왜 피상적인 인상을 나눴다고 느꼈나?

이용희 : 토론 진행 방식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아쉽다. 서로가 생각을 원활히 나누는 토론이 전혀 아니었다. 조별 진행자가 의견 분포를 균질하게 하는 데만 집중한다고 느꼈다. 어떤 주장이 나왔을 때, 이를 어떻게 볼 것인지 대화가 이어져야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의도는 없었겠지만, 토론이 통제되는 느낌이었다.

참가자들이 신뢰 관계를 쌓을 시간도 없는 상태에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강의 듣고 점심 먹고 시작된 토론 자리에서 '교수님 생각에 동의한다' '이런 점을 새롭게 알게 됐다' 등 인상 깊은 점 위주로 이야기를 더 하게 됐던 것 같다.

프레시안 : 긍정적으로 본 부분은 없나?

이용희 : 당연히 있다. 가장 크게는 파편적으로만 알던 정보를 이번 기회에 종합적으로 공부하게 됐다. 평소 기후위기를 잘 몰랐던 시민들은 '이렇게나 심각한 문제였다니' 하고 새로 알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자료집이나 영상은 솔직히 '좋은 동화책을 보는' 느낌이었다. 내용이 단편적이었고, 진짜 고민해 봐야 할 질문은 다루지 않는다고 느꼈다. 무엇을 안다는 건 시작점이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할 건데, 우리가 어떻게 변할 건데, 이걸 구체적으로 얘기해 나가야 하는데 관련 내용은 없었다. 전문가들의 주제별 발표 내용도 많이 겹쳤고, 내용도 시민대표단에 맞게 쓰기보다 시간이 촉박하니 대학에서 쓰던 자료를 급히 편집해서 가져온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일주일 전 통보, 도돌이표 논의

프레시안 : 시민대표단이 논의할 의제를 의제숙의단에서 먼저 검토했다. 우선 의제숙의단은 뭔가?

이보아 : 의제숙의단은 시민대표단의 토론과 숙의를 위해, 이들이 논의할 의제를 설정하고 구체화하는 기구였다. 청년, 청소년들과 노동, 시민사회, 산업계에서 17명이 모였다. 또 분야별 전문가 자문단 13명도 따로 있었다. 이들 30명이 2월 26일부터 2박 3일로 워크숍을 했다. 그런데 워크숍 자체를 일주일 전에 통보했다. 며칠 전 통보받은 사람도 있다. 이런 촉박한 결정은 시민대표단 토론 행사 직전까지 계속 같았다. 모두 급하게 준비했고 참여했다.

프레시안 : 전반적으로 숙의가 안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왜 그런가?

이보아 : 가령 불이 났다고 해보자. 그럼 나와야 할 질문은 '누가 불을 질렀느냐'다.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 소재를 밝혀야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이런 게 몽땅 빠졌다. 그러니까 기후위기라면, '누가 탄소배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어떻게 지워야 하는데?'란 의제가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대기업, 화석연료 기반 기업, 부유층 등이 탄소 배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발표에 참여한 학자들도 절대 모를 리 없는 내용이다. 국제적 상식이니까. 그런데 여기선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시민대표단 토론엔 법학·환경 분야 교수 등 박사 15명과 환경단체 관계자 3명이 함께 했다.

이보아 :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특히 시민대표단에 탄소 배출 구조를 설명하는 발표 내용을 보면, 정말 문제가 많다. 계속 '우리'를 거론한다. 산업계가 생산활동으로 배출한 걸 '우리가 먹고 자고 입고, 온수를 쓰고, 전기를 쓰는 데서' 나오는 걸로 설명한다. 발표자 자료를 미리 검수할 때 호도하면 안 된다고 네 차례나 의견을 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구조는 설명하지 않고 개인의 책임으로 표현했는데, 이 개인마저도 소득별로 탄소 배출량이 엄청 차이 난다. 고소득층의 탄소 배출 책임, 당연히 언급하지 않았다. '모두의 책임'만 물었다. 즉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았다.

프레시안 : 의제숙의단은 무엇을 논의해서 시민대표단에 전달했나?

이보아 : 3가지 의제가 있다.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일지 감축 목표, 어떤 경로로 줄일지 감축 경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낼지 이행방안이다. 이 중 책임과 대안 부분인 이행방안을 의제숙의단이 거의 다루지 못했다. 산업계 측을 제외한 의제숙의단 모두가 감축 목표와 감축 경로를 헌재 결정에 맞게 방어하는데 급급했다. 공론화위가 사실상 산업계에 편향돼 있었기 때문이다.

공론화위가 '볼록' 경로(먼 미래에 탄소를 더 많이 감축하는 방식, 반대는 '오목' 경로)를 채택하자고 우기는 데서 드러났다. 헌재 결정 취지는 명확하다. "미래세대에 기후 부담을 지우지 말라"다. 그럼 적어도 국제 사회 수준에 맞게 감축량을 대폭 높이고, 지금 바로 급격히 줄여야 한다. 감축 목표와 경로 모두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워크숍에선 이를 두고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 했다. 끝내 30명 중 18명 이상이 '볼록 경로'를 설문조사 답변 항목에서 삭제하라고 투표해서 공론화위에 요구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 항의했다. 그런데 결국 넣었다. 다 누구를 위한 건가?

▲기후특위 공론화위원회 의제숙의단 참여자 8인은 지난 3월 25일 공론화위원회를 규탄하며 공동 사퇴했다. 공론화위는 의제숙의단 대다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탄소배출 감축량을 미래 세대에 전가하는 '볼록 감축 경로'를 시민대표단 설문조사 문항에 포함시켰다. ⓒ환경운동연합

"공론화위·전문가, 실패한 정책엔 침묵"

프레시안 : 그밖에 아쉬운 점은?

이보아 : 지금까지 왜 탄소중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냐는 점도 쏙 뺐다. 지난 정부들의 정책 실패다. 이를테면 아무 실효성 없는 기업 규제, 배출권거래제 등이다. '이런 규제 수단이 있다'고 언급만 했을 뿐, 결과는 어떻고 평가는 어떤지 아예 논의되지 않았다. 결국 시민들이 마지막에 질문했다. "오늘날 그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라고. 규제수단을 설명했던 발표자는 동문서답했다. 해당 규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답했다. 현재 규제가 실효성이 적다는 질문도 나왔는데, "다른 규제도 함께 작동하면서, 기업도 스스로 바뀌고 있다"고 근거없이 막연하게 답했다.

프레시안 : 추후 공론화 과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바라는 점은?

이용희 : 정말 실효성있고 실질적인 숙의를 할 수 있길 바란다. 가령, 참가자를 '다 쪼개는 방식'의 공론화를 하면 좋겠다. 이렇게 300명씩 모이는 것보다, 분야를 나누든, 지역을 나누든 우리 현실에 맞닿은 문제 위주로 실효성 있는 토론이 가능하게끔 공론화 과정이 개선되면 좋겠다.

이보아 : 기후 공론화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원인을 알아야 해법을 찾는다. 누가 진짜 과다 탄소 배출에 책임이 있는지, 기후 불평등을 얘기하지 않는 건 원인 규명을 하지 않겠단 거다. 기후 불평등을 제대로 직시하고 공론화해, 이를 탄소중립기본법 개정에 반영해야 한다.

또 일회성 공론화 행사를 넘어, 각종 정부 산하 위원회, 논의 테이블에 기후위기의 진짜 당사자를 앉혀라. 기후위기가 이슈가 되니, 부처마다 각종 위원회가 난립 중이다. 정부는 전문가나 산업계 인사만 이해관계자로 인정해 테이블에 앉힌다. 그게 아니라 노동자, 시민, 지역 주민 등 현장 당사자가 그들처럼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손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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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없다⋯국명부터 서로 제대로 부르자

정범진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bjj08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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➂ 두려움·적대 거둔 한반도 생명평화공동체

‘조선’으로 부르자⋯북은 ‘남조선’ 호칭 없애

정동영 통일부 장관, ‘조선’ 호명으로 첫 발

깊은 전쟁의 상흔 벗어나기 위한 적대 청산

적대 조치 찾아 시정 사항 점검 제도화해야

북 '최대 명절'로 꼽히는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인 15일 인천 강화군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 개풍군 마을에서 어린이들이 이동하고 있다. 2026.4.15. 연합뉴스

이 글은 ‘남북 단절로 이어진 적대구조 청산 위한 제언’의 3차례 연재 중 마지막 회이다. 지난 2월 1일에 첫 번째 글 ‘① 한국사회의 대 조선 적대 구조’, 3월 15일 두 번째 글 ‘② 조선사회(북)의 대 한국(남) 적대 구조’에 이은 세 번째 글이다.

앞의 글들에서 우리는 남과 북에 공히 존재하는 적대 구조와 적대 의식을 재생산하는 제도 및 규범 등을 살펴보았다.

과연 한국 사회는 조선에 대한 적대 구조를 청산할 수 있을까? 나아가 조선은 한국에 대한 적대 의식을 거두고, 적대 구조 청산에 나설 수 있을까? 어디에서부터 이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

켜켜이 쌓인 남과 북의 적대 구조

한국사회의 대 조선 적대구조는 전방위적이다. 「헌법」 3, 4조를 필두로 그 하위에 위치하는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은 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정보의 차단, 부실한 교육과정, 취약한 연구 생태계는 조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고, 왜곡된 의식을 재생산한다. 늘어만 가는 국방비와 공격적 군사훈련은 화해와 협력의 근본 장애물이다. 패권국가와 결탁해 분단 구조에 기생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극우세력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대를 이어가며 남북 적대구조 유지의 최첨병으로 기능해왔다.

조선사회의 대 한국 적대구조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노동당 규약, 사회주의 헌법, 각종 제반 법률은 한국에 대한 적대의식 고취를 규범화하고 있으며, 이는 2023년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전쟁에 대한 공포, 흡수통일에 대한 불안은 차단과 봉쇄, 인민들에 대한 통제 강화로 나타난다. 남과 북이 한 민족임을 의미하거나 통일을 지향하는 표현과 상징물은 공식 매체에서 사라졌다. 한국 문화에 대한 접촉과 전파는 최고 사형으로 처벌하고, 최고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수시로 한국을 최대의 적대국가로 규정한다.

 

레온즈 에더 FISU 회장이 20일 세종시청 기자실을 찾아 내년 8월 열리는 충청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북한이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2026.4.20. 연합뉴스

적대 조치 찾아 시정 사항 점검 제도화해야

적대의 시간이 긴 만큼 적대 의식을 재생산하는 구조와 제도,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산적해 있고, 폐해는 심각하다.

정치·경제·군사·교육·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대 조선 적대 조치와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우선해야 할 작업이다. 시민사회와 관련 전문가, 행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특별위원회’ 등을 구성해 철저한 실태 조사를 통한 적대 조치 발굴에 나서야 한다. 여기서 정리된 과제를 영역별로 분류하고, 시정을 위한 로드맵을 작성해 매년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제도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헌법을 수정하고, 국가보안법을 폐기하고, 국방비를 줄이고, 공격적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정보를 개방하고, 교류협력을 확대하고, 제재를 해제하고, 공작원들을 송환하고, 대 조선 적대의식 재생산이 체화된 사회문화를 바꿔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 작업엔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며, 과정 역시 지난할 것이다.

통일부는 현재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5년마다 ‘남북관계발전기본계획’을 수립해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계획이 존재하는지, 무슨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자체도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대한민국 으뜸머슴(대통령)은 취임 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고 선서한다. 남북 관계를 안정되게 관리해야 할 최고책임자인 으뜸머슴은 적대 조치의 실태와 폐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대한 시정 조치와 그 결과를 국민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 정도 수준에서 관리되지 않으면 이러한 노력은 곧 동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이들 조치는 한국이 먼저하고, 조선의 변화를 기다린다. 한국의 선제적 대 조선 적대구조 청산 노력은 조선의 상응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마중물이다.

 

평양국제관광기념품 및 건강제품전시회가 지난 10일 과학기술전당에서 개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다. 2026.4.11. 연합뉴스

적대구조 청산은 반전평화운동

한반도에서 적대 구조 청산이 어려운 이유는 전쟁의 상흔이 깊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은 남과 북의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남겼다. 공포와 원한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한 하늘 아래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남북의 권력자는 상대를 악마화하며, 자신의 폭정과 비민주성을 감췄다.

전쟁을 치른 당사자들에게 전쟁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시는 전쟁을 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산되지 않은 적대 구조는 우리를 언제든지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 남북의 적대 구조를 청산하는 작업은 한반도 공동체의 성원들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북 조선중앙TV는 함경북도 회령시 인계리 폐갱에서 일제시기 학살된 인부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발굴됐다고 11일 보도했다. 2026.4.11.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북한’은 없다, ‘조선’이다

한국 사회에서 조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대표적 사례가 ‘북한’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북쪽에 북한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존재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 통일부장관이 얼마 전 공식 석상에서 이북을 정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호명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상대방을 정확히 명명하는 것은 올바른 관계맺기의 첫걸음이다. 왜곡된 호칭은 상대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거나 배제를 의미한다. 과거에 이북에서 한국은 ‘남조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조선’이라는 표현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물론 ‘괴뢰한국’이라는 대체 표현은 대 한국 적대 의식의 또 다른 형태의 표출이지만 어찌 되었든 한국이라는 국호로 호칭하는 것은 북에서 앞섰다.

정범진 사단법인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대 조선 적대구조 청산을 위한 1호 작업으로, 이북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돌려주자. 실체가 아예 없고, 사실도 아닌 북한이라는 호칭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야 한다. 이북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며 자연스러운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언론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서부터 시작하자. 이제 더 이상 북한은 없다. 조선이다.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를 거둘 때 우리는 한반도 생명평화공동체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하나재단은 정부 자살예방 사업인 '천명지킴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천명수호처'로 위촉됐다고 24일 밝혔다. 하나재단은 북 이탈주민 자살 예방을 위해 '북향민 생명 지킴 5중망 구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사진은 이날 청계광장에서 열린 '천명지킴 발대식'에 설치된 하나재단 홍보부스. 2026.4.24.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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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재판 80주년, 전쟁범죄자 단죄 못해 세계가 신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6/04/25 11:24
  • 수정일
    2026/04/25 11: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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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46년 5월 3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 이치가야의 옛 육군성 대강당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이 열렸다. 이곳은 1934년 육군사관학교 건물로 지어졌다가 1941년부터 대본영이란 이름으로 태평양전쟁의 일본군 지휘부 역할을 했기에 전쟁범죄자들을 단죄하기에는 맞춤한 장소였다.

1945년 8월 30일 46만 명의 미군을 이끌고 일본에 진주한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9월 11일 전범 용의자 체포 명령을 내렸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지시한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해 118명이 두세 달 사이에 끌려왔다. 총리를 세 번이나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 관동군 사령관 시절 만주사변을 주도한 혼조 시게루, 군의관 출신으로 후생대신에 올랐던 고이즈미 지카히코, 문부대신을 지낸 의사 하시마 구니히코는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맥아더 원수의 특별선언과 연합군 사령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1946년 1월 19일 설치됐다. 근거는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하는 모든 전쟁범죄자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는 포츠담 선언 제10조였다.

 

일본 도쿄 신주쿠구 이치가야의 옛 육군성 대강당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이 열리고 있다.

판사와 검사는 각각 11개국 출신 12명씩으로 구성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검사와 판사는 미국·영국·중국·소련·프랑스·네덜란드·캐나다·호주·뉴질랜드·인도·필리핀 11개국에서 파견된 12명씩이었다. 미국은 판사를, 소련은 검사를 두 명씩 파견했다. 재판장과 수석검사는 호주의 윌리엄 플러드 웨브와 미국의 조지프 베리 키넌이 각각 맡았다.

전범들은 전쟁을 기획·주도한 A급(반평화 범죄),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법과 관습법을 어긴 B급(통상의 전쟁범죄),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살해 등 C급(비인도적 범죄) 3가지로 분류됐다. 처벌 대상으로 삼은 범죄 기간은 일제가 군벌 장쭤린을 암살하며 만주 침탈 야욕을 노골화하던 1928년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종료 시점까지로 제한했다.

 

11개국에서 파견된 판사 12명이 도쿄재판 법정의 판사석에 앉아 있다.

체포된 118명 가운데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석방되고 28명만이 기소됐다. 재판은 2년 반 동안 818차례 열렸다. 만주국 황제 푸이에서부터 이등병 병사까지 모두 4천여 명이 증언대에 섰고, 연인원 2만 명의 방청객이 법정을 지켜보았다. 1948년 11월 12일 웨브 재판장의 선고와 함께 마무리됐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히로타 고키 전 총리, 육군 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도이하라 겐지·기무라 헤이타로·마쓰이 이와네, 육군 중장 무토 아키라 일곱 명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1948년 12월 23일 처단됐다. 히로타를 제외한 여섯 명은 교수대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죽었다.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등 군인 11명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 등 민간인 5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외무대신 출신 두 명과 황족 나시모토 모리마사는 각각 20년, 7년, 6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2명은 판결 전에 사망했다.

 

법정에 출석한 A급 전범들. 앞줄 왼쪽부터 도조 히데키 전 총리(사형), 오카 다카즈미 해군 중장(종신형),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대장(종신형),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장(종신형),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사형). 뒷줄 왼쪽부터 하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종신형),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금고 20년),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금고 7년).

이와는 별개로 중국 난징대학살, 일본 오가사와라제도 지치 섬 식인 사건, 필리핀 미군 포로 학살 사건 등에 관해서도 중국·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필리핀에서 재판이 각각 열려 984명이 사형, 475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맥아더와 키넌 수석검사 보호로 처벌 면한 히로히토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훗날 역사가들은 도쿄재판을 ‘실패한 재판’으로 평가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히로히토 천황을 제외한 것이었다. 천황제를 존속시켜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동시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아시아의 방패로 활용하려는 미국 구상에 따라 기소는 물론 조사 대상에서 빠졌고 증언대에도 서지 않았다.

재판에 참여한 나라 가운데 상당수가 히로히토의 퇴위와 처벌을 요구했고 미국 내 여론도 곱지 않았으나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철저히 보호했다. 수석검사 키넌은 증언까지 조작해가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왼쪽)과 만난 히로히토 일본 천황.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켜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동시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아시아의 방패로 활용하려는 구상에 따라 히로히토를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1947년 12월 도조 히데키가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해 군부가 천황 뜻에 따라 침략전쟁에 나섰음을 시인하자 키넌은 다른 전범들을 시켜 발언을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이듬해 1월 도조는 “천황께서 군부의 전언에 마지못해 동의함으로써 개전에 이르렀다”고 증언을 번복했다.

 

천황 대신 단죄의 표적이 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관련자 색출도 철저하지 못했다. 전쟁 상대국은 물론 아시아 지역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숱한 전범에게 형사 책임마저 묻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가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본부) 책임자 이시이 시로가 밀실 교섭을 통해 관련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대신 재판 직전에 석방된 것이다.

만주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도 전범 혐의로 체포됐으나 기소되지 않고 공직 추방 조치만 받았다. 일본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보물과 국가기밀 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로 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거쳐 외무성 장관과 총리 등을 역임했다.

연합국은 한반도에서 전범 재판을 열지 않았다. 만일 서울에서도 국제군사재판이 열려 일제 군국주의 주범들과 협력자들을 단죄했다면 한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은 도쿄재판에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중국도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 전범 색출과 단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중국 측 검사와 증인들은 증거재판주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전범들이 꼼짝하지 못할 증거를 들이대기보다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며 울분을 터뜨리는 것으로 일관했다.

교수형 당한 전범 7명 유골 빼돌린 뒤 무덤 조성

재판 후속 조치도 미흡했다. 독일은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정신을 잇고자 특별법을 제정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처단 의지를 분명히 했다. 형법 86조와 130조에도 각각 나치 상징물이나 표지 유포, 나치 찬양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담았다.

반면 일본은 헌법 9조에 전쟁 포기 선언을 담은 것 말고는 이렇다 할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범 용의자 대부분이 정계, 관계, 재계 등에 복귀해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나섰다. 심지어 처형된 전범들을 추앙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미국은 교수형에 처해진 7명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 군국주의 부활의 불씨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해 시신을 화장한 뒤 비행기로 뼛가루를 태평양에 뿌렸다. 그러나 그 뼛가루는 처형자들의 유골이 아니었고 실제 유해는 재판에 참여한 한 변호사가 수거해 시즈오카현 절간의 불상 밑에 보관했다는 사실이 1958년 밝혀졌다. 그는 미군이 수거해가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화장장 직원을 매수해 빼돌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익들은 이를 1960년 8월 아이치현 니시오시 산가네산에 묻었다. 묘비 ‘순국칠사묘(殉国七士墓)’와 사당 이름 ‘순국칠사묘(殉国七士廟)’ 글씨는 총리 재임 시절의 기시 노부스케가 썼다. 1869년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도쿄의 야스쿠니신사는 1978년 10월 17일 이들 7명과 함께 옥사한 전범 7명을 더해 14명의 위패를 모셨다. 이때부터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거나 공물을 보내는 것은 전범 추모 행위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전범 7명의 유해가 묻힌 일본 아이치현 니시오시의 순국칠사묘. 묘비 글씨는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썼다. (나무위키)

최근에는 도쿄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른바 평화헌법을 고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13년 아베 신조 총리가 “도쿄재판은 연합국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한 것”이라고 말한 이후 여러 정치인이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으며, 다카이치 사나에 현 총리는 취임 전부터 거듭 개헌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002년 상설 전범재판기구 국제형사재판소(ICC) 출범

전쟁을 범죄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다. 프랑스와 영국 등 승전국들은 패전국 독일과 베르사유조약에 조인하며 항복 직전 네덜란드로 피신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소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신병 인도를 거부해 재판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뉘른베르크재판과 도쿄재판에서 본격적인 전범 재판이 이뤄져 침략전쟁을 주도한 인물과 비인도적 행위자 등을 단죄했지만 패전국 관계자에 국한됐다는 한계가 있었다. 1945년 유엔 헌장이 채택되고 1949년 제네바협약이 체결됐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6·25 전쟁 전후 한반도에서 숱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어도 국제사회는 제대로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1968년 베트남전 미라이 학살 주범인 미국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는 미국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가택연금으로 감형됐다가 3년 뒤 해제됐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전쟁과 1994년 르완다 학살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는 상설 국제사법기구 필요성이 대두됐다. 199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유엔 전권외교회의에서 로마 규정을 채택한 데 이어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발족해 제노사이드(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 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25개국이 가입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 건물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강대국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주로 아프리카 국가 범죄자들만 조사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수단 다르푸르 분쟁, 콩고 내전, 케냐 사태, 우간다 내전 등의 전범 용의자 40여 명을 기소했으나 유죄 판결은 고작 다섯 건에 그쳤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전 당시 미군 범죄를 조사하려 하자 미국은 탈퇴를 선언하며 ICC 인사들에 대해 입국 금지, 자금 동결 등의 제재를 내렸다. 유럽연합(EU)이 벨라루스의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첸코 대통령을 처벌해야 한다고 ICC에 촉구했으나 러시아 반대로 무산됐다.

러시아도 ICC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아동들을 러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상대로 2023년 3월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ICC를 탈퇴했다. 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하면 회원국들은 협조할 의무가 있다. 푸틴은 영장 발부 이후 몽골,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ICC 회원국을 방문했으나 ICC의 협조 요구에 응한 나라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 네 명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ICC를 제재했다.

 

2024년 9월 2일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공항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시 국제인권단체와 우크라이나 정부 등은 ICC 체포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몽골 정부를 비판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트럼프는 연일 전쟁범죄 저지르겠다고 공언

이제 화살은 트럼프로 향하고 있다. 미군이 이란 초등학교를 폭격해 170여 명을 숨지게 하는가 하면 “문명 전체를 사라지게 하겠다”거나 “발전소와 교량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의 행위나 트럼프의 경고는 유엔 헌장과 로마 규정이 정한 명백한 전쟁범죄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지난달 17일 초등학교 폭격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80년 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범 재판은 인류에게 큰 교훈을 남겼으나 여전히 각국 지도자들은 역사에서 배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거듭된 국제사회의 약속도 강대국들의 우격다짐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뉘른베르크재판에 출두한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가 신문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비인도적 행위를 질타하고 전범 추모자들을 비판해야 한다. 인권 옹호에 뜻을 모으고 ICC가 제 역할을 하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 당장 전범들을 법정에 세우지 못한다 해도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전쟁범죄 가능성을 낮추고 한 명이라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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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 보수의 'ABC 분류법'을 알아보자

[박세열 칼럼] 유령처럼 존재하는 'D그룹'이 가장 큰 잘못이다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6.04.25. 05:02:12

유시민 작가의 'ABC 분류법'을 빌려와 보수에 적용해 보자. 먼저 A그룹은 보수의 정통성을 박정희에서 찾는 반공 전통의 이른바 '안보 보수'다. 지금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구(舊)주류'라고 볼 수 있겠다. B그룹은 자칭 신(新)보수, 이준석 류의 신진 세력인데, 이들은 무슨 새로운 철학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타자로부터 찾는 습성을 가진다. 즉, 상대에 대한 '혐오'와 '갈라치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우고 그걸 토대로 진영을 가르는 걸 좋아한다.

C그룹은 A와 B의 교집합이다. 반공과 혐오가 만나 혼종을 이루었다. 중국과 북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를 획책해 나라를 전복하려 하고 있다거나(반공의 극대화), 페미니스트와 동성애자들이 한국을 습격해 인구를 소멸시키려 한다는 류의 음모론(혐오의 극대화)을 믿는다. 제대로 된 공론장에서 환영을 못 받으니, 아스팔트에 나와 성조기나 이스라엘기, 혹은 브라질기를 들고 성경을 암송하며 한국이 곧 베네수엘라처럼 될 것이라 저주를 쏟아붓는다.

어쩌면 보수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A그룹은 시대에 뒤떨어져 낡았고, B그룹은 확장성을 걷어차고 있으며 C그룹은 아예 사회의 해악으로 작용한다. A, B, C 중 제대로 된 그룹이 없는 게 지금 한국 보수의 문제다.

제미나이 생성 AI 이미지

미국의 보수 세력은 '공동체'로의 회귀와 같은, 몇가지 주목할만한 가치들을 내놓는다. 마가(MAGA)와 같은 세력은 이를 극단적인 방식과 과격한 신념으로 변형시켜 폭력적으로 활용하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는 과거 '좋았던 시절'(모두가 일자리를 갖고, 이민자들이 백인 공동체를 해체시키려 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한다.

한국의 보수는 해방 이후 거의 80년동안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정작 안보는 미국에 외주를 준다.) 사회에 암약하는 간첩을 색출하자고 주장하는 걸 사상의 기반으로 삼는다. 철학이 빈약하니 2000년대 들어서는 일자리나 자산 시장에서 밀려난 청년, 남성들의 박탈감에 올라타 갈라치기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런 A그룹과 B그룹이 가장 나쁜 방식으로 결합하니, 윤석열이나 전광훈, 전한길, 고성국 같은 류의 '윤어게인'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와 그 주변인들은 그들을 대변하는 세력이다.

특히 C그룹은 진보의 나쁜 점들만 벤치마킹했다. 이들은 스스로 혁명 세력이라 생각하고 대한민국의 운동권 좌파 지식인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80년대에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의 투쟁 방법론을 가져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다. 자신들이 만든 악마회된 좌파의 상상적 이미지를 정작 자신들이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재명을 히틀러에 비유하거나, 86운동권을 볼셰비키에 비유한다고 해서 중도층에 먹힐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나라가 조만간 베네수엘라처럼 붕괴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C그룹은 스스로를 '혁명가'로 여긴다. 그러니 이들에게 A그룹은 "당의 그늘에서 곱게 크신 영감님들(김민수 최고위원)"이고 몰아내야 할 구시대의 적폐가 된다. 또한 지금 국민의힘은 "교수, 관료, 율사. 사회 기득권층들이 모여 3류 운동권 세력들에게 판판이 깨지는(박민영 대변인)" 정당이다. 솔직하게 장동혁 일파가 순수함을 유지한 정당을 한번 보고 싶은 욕심이 없진 않다.

더 비겁한 사람들은 합리적인 견해와, 충분한 지적 소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A그룹과 B그룹에 속하고, 나아가 C그룹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일부' 보수 정치인들이다. 비상계엄은 잘못됐고 윤석열 탄핵은 정당했으며 윤어게인은 불가능하고 한국이 베네수엘라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수가 이렇게 가면 안된다'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권력과 자리의 욕망에만 매몰된 사람들이 지금 한국 보수를 망치고 있다. 이들을 D그룹으로 분류하겠다.

D그룹은 유령으로 존재한다. A, B, C그룹에 단일, 혹은 복수로 속하긴 하는데, 진영이 제공하는 달콤한 권력만을 취하면서도 자신의 정체는 꽁꽁 숨기고 있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작은 권력에서 밀려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장동혁 체제가 잘 못 가도, 전한길, 고성국 류의 극우 인사들에 당이 휘둘려도 완장 찬 몇몇 C그룹 스피커들에게 난도질 당할까 노심초사 한다. 한동훈과 김종혁이 당에서 쫓겨나도 내 일이 아니니 상관 없다.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텐데도 말이다. 국민의힘 107명의 의원들 중에 몇 명이나 D그룹에 속할까?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수의 장점 중 하나는 욕망을 신봉하는 것이다. 그 욕망이란 권력을 향한 왜곡된 욕심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발휘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서로 해치지 않은 평화로운 상태를 바란다. 여기 질문이 있다. '의료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젊은이가 죽어가고 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죽게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국가가 나서서 의료보험에 가입시켜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젊은이의 가족이나 친구, 지역 교회 같은 커뮤니티가 그를 도와야 한다." 이게 지금 보수주의의 새로운 트렌드고, 공동체 주의의 요체다.

지금 한국 보수는 가치와 철학을 먼저 세워야 한다. A, B, C니 하는 그룹의 노선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있는 남북문제에 대해 대안을 내고, 혐오와 갈라치기 대신 보수의 포용 가치를 재정립하고, 베네수엘라 타령 하기 전에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쉽게 말해 '현실의 삶'을 살아야 한다. 지겹도록 말하지만, 보수의 가치는 공동체, 포용, 번영이다. 인간 보편의 욕망들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라. 그렇지 않으면, 민주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보, 보수 논쟁에 '종속변수'로 딸려들어가고 있는 '자칭 보수' 국민의힘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박세열 기자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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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국회의장, 쿠팡과 미 의원들 겨냥 “한국민에게 예의 갖춰라”

위성락 안보실장, ‘쿠팡문제-안보협상 분리 입장’ 따라 “미국과 논의 중”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6.04.24 12:27
  •  
  •  수정 2026.04.24 13:16
  •  
  •  댓글 1
 
 
23일 국회 사무처 직원들을 격려하는 우원식 의장. [사진-국회 사무처]
23일 국회 사무처 직원들을 격려하는 우원식 의장. [사진-국회 사무처]

“그건 명백한 내정간섭입니다. 우리 국회의원들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견이 있으면 편지 보내는 건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나라의 법률이나 그 나라의 근본 기관에 대해서 건드리는 건 안 되거든요.”

24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한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일으킨 쿠팡과 김범석을 감싸고 돌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미국 공화당 소속 일부 의원들을 향해 이같이 일갈했다. 

우 의장은 “지금 이거는 대규모 정보개인정보 유출도 있고, 그다음에 알고리즘 조작 의혹도 있고요. 이건 우리 명백한 현행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그런 걸 한 걸 가지고 의원들이 한국대사한테 무슨 미국 기업들에 대한 편파적인 조치다 얘기하는 거는 우리가 갖고 있는 법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리”라고 질타했다.

“만약에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서 그런 일을 했으면 미국에서 가만히 있을 것이냐”라고 물었다.

우 의원장은 “쿠팡에도 한 말씀해 드리면 지금 하고 있는 태도는 대한민국에서 와서 기업을 하고 돈을 벌면 대한민국의 법률을 지키고, 그걸 이행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에 따라야 될 거 아닌가”라고 질타했다. 

“지금 쿠팡이 하고 있는 건 한국에서 돈은 마음대로 벌고 싶고, 한국의 법률과 국민정서는 나는 무시하고 싶다 이런 태도 아닌가”면서 “쿠팡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예의를 갖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미국 하원의원들은 우리나라 법률의 조치에 대해서 내정간섭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방문을 수행 중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23일 오후 “쿠팡은 기업의 문제”인데 “한미 간의 안보 협의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쿠팡의 문제는 법적 절차대로 진행을 하고, 안보 협상은 안보 협상대로 진전을 해야 된다라는 입장으로 미국하고 많은 논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화당) 의원들이 보낸 서한도 저희가 주목해서 보았다. 그 문제는 또 그 문제대로 의원들과 접촉하여 설명도 하고 이해를 제공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전에도 서한을 보낸 의원들이 있었는데 다 설명했었다”며 “앞으로도 계속 그런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노동자·농민·빈민 단체 등의 상설연대투쟁체인 전국민중행동은 22일 논평을 통해 “자본시장 질서를 교란한 거액의 부당이득 혐의자 방시혁과 국민 개인정보 유출 혐의를 받는 김범석을 지키기 위해 미국 정부가 직접 수사기관과 외교 라인을 압박하고 나선 것은 명백한 국권 침탈이자 외교적 결례”라고 규탄했다.

“최근 방한한 마이클 디솜브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쿠팡 김범석 의장에 대한 출국금지나 체포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며, 이를 지키지 않을 시 ‘핵추진잠수함 도입’ 등 한미 안보 협의(JFS)를 중단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면서 “범죄자를 지키기 위해 국가 안보 사안을 거래 조건으로 내건 것은 트럼프식 ‘거래 외교’의 추악한 민낯”이라고 질타했다.

전국민중행동은 또한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방시혁 하이브 의장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은 1년 4개월에 걸친 수사의 정당한 결과”인데 “주한 미국 대사관은 수사기관에 직접 서한을 보내 ‘BTS 월드투어’와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를 구실로 출국금지 해제를 압박했다”며 “이는 방시혁이 그간 미국 이타카 홀딩스 인수 등 대규모 대미 투자를 단행하고, 미국 정가에 공들여온 로비의 결과인가”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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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겨냥한 정부관계자의 황당 '언플'... 이 대통령, 어찌할 건가

[정욱식의 진짜안보] 정부 내 '3불' 강해질까 우려... 전화위복 계기로 만들어야

26.04.24 19:51최종 업데이트 26.04.24 19:51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0일 오후 외부 일정을 마친 뒤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도착, 미국과 정보공유가 일부 제한된 것과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이재명 정부의 통일외교안보팀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조선(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한 통일부의 노선과 한미동맹 및 일본과의 협력, 그리고 비핵화 원칙 유지에 방점을 찍어온 안보실·외교부 사이에 이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한미연합훈련, 대북제재, 비무장지대(DMZ) 법안, 비핵화 문제, 한반도 평화특사 등을 놓고 다른 입장이 드러나곤 했다. 언론에선 이를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상기한 사안 하나하나가 예민하고도 복합한 문제들이어서 이견이 존재한다는 걸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정동영 장관의 '구성 우라늄 농축 시설' 발언과 이를 빌미로 삼아 미국이 대북 정보 제공 제한 조치를 취했다는 논란은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정부 내에서 이견 존중과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정부 관계자"가 언론 플레이에 나선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 내에서 '3불(불편·불만·불신)'이 강해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두 가지 특이점

<한겨레>가 정부 관계자 말을 인용해 보도한 4월 20일 자 기사한겨레 PDF

이러한 진단은 익명의 "정부 관계자"가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등을 상대로 흘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이 4〜5개의 사안을 가지고 한국에 항의했다고 하는데, 익명의 "정부 관계자"는 유독 정 장관의 발언만 언론을 통해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미국은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이 지난 2월 서해상 미·중 전투기 대치 사건에 관해 한국군 당국에 '사과'했다는 언론 보도, 유엔군사령부가 독점하는 비무장지대 출입 승인권을 통일부가 일부 관리하도록 하는 '디엠제트법', 미·중 전투기 대치 사건과 관련해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주한미군에 항의한 점 등도 문제 삼았다. 그런데도 미국이 마지막에 언급했다는 정 장관의 발언만 "여권 고위 관계자"나 "정부 관계자"의 입을 통해 언론에 집중 부각되고 있다.

또 하나는 미국이 정보 제공을 제한했다는 소식이 정부 관계자를 통해 신속하게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미국은 한국에 제공한 정보가 자신의 동의 없이 언론에 유출된 것을 두고 한국 정부에 항의하면서 정보 제공을 줄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정보 제공 제한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적은 거의 없거나 한참 지난 뒤에나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정부 관계자가 이러한 내용을 언론에 알렸다.

정부 관계자의 언론 플레이는 20일에 보도된 <한겨레>에 "정 장관이 밝힌 정보는 아주 민감하고 큰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 정 장관이 문제를 일으켰고 자신이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장관이 밝힌 정보는 아주 민감하고 큰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10년 전에 미국의 싱크탱크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최근 정보에 따르면 초기 원심분리기 연구개발 시설이 영변 핵시설 단지로부터 45km 떨어진 방현 비행장이나 그 인근에 위치했다는 것을 암시한다"라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선 구성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방현 비행장은 구성에 있다. 이러한 내용은 국내외 여러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되었다. 정 장관은 이렇게 공개된 내용을 근거로 구성을 언급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미국과 긴밀하게 소통해 온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항의에 이러한 내용을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다. 정 장관은 '미국이 제공한 조선의 핵시설 정보나 첩보를 보고받은 바가 없기에 정보 유출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내용을 언급한 것'이라고 미국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 관계자는 언론 플레이에 나서고 있다.

물론 정 장관의 구성 발언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 한미 정부가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적으로 거론해 온 지역은 영변과 강선인데, 정 장관이 현직 고위 관료 신분으로 구성까지 언급하면 한미공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부 내 소통을 통해 구성을 거론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정 장관은지난해 7월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구성과 강선 등 네 군데 우라늄 시설에서 고농축 우라늄을 이미 추출해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나"라고 말한 바 있다. 정부 관계자의 발언처럼 이게 "아주 민감하고 큰 것"이었다면, 정 장관이 3월 6일에 또다시 언급하기 전에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의 항의를 접하고 화들짝 놀란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전문성과 정부 내 소통 부족을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의 리더십은?

베트남을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3일 하노이 총리실에서 열린 레 민 흥 베트남 총리와의 면담에서 발언하고 있다.청와대 제공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이던 20일에 소셜미디어 엑스(X)에 "'(정 장관이) 미국이 알려준 기밀을 누설'했음을 전제한 모든 주장과 행동은 잘못"이라며, "왜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라고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했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이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조선의 핵 관련 공개 발언의 범위와 수위에 대한 정부 내 명확한 가이드라인 수립이 필요해 보인다. 또 정부 내 이견과 갈등을 '외부화'하는 언행을 엄격히 금지하고 정부 관계자들이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 사태로 '3불(불편·불만·불신)'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신뢰 회복·구축을 이룰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도록 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필자 정욱식은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입니다.

#구성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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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강진군수 후보 차영수, 재판 청탁 3천만원 수수 의혹

중학교 동창 판사 동원해 항소심 재판장 로비 시도 의혹

2021년 피해자 K씨 "현금 3천만원 건넸다" 증언

"비밀계좌 입금하면 판사가 체크카드로 꺼내 쓴다" 설명 들어

로비 실패 뒤 자녀 결혼식 축의금으로 3천만원 반환

168억 대출 사기 유죄에도 감점 없이 민주당 공천

2026-04-24 07:23:25

 

6·3 지방선거 민주당 강진군수 후보 차영수씨가 2021년 한 항소심 재판 청탁 대가로 3천만원을 받고 현직 판사들을 동원한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의혹을 제기한 피해자 K씨에 따르면 로비 라인에는 차씨의 강진중학교 동창인 사법연수원 26기 판사와 같은 연수원 26기 광주고법 판사가 거론된다. 차씨는 취재진의 확인 요구에 의혹 전반을 부인했다. 다만 차씨가 K씨에게 설명했다는 해당 판사 부인의 직책 등 일부 정보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차영수 관련 재판 청탁 로비 흐름도(피해자 K씨 등 관련자 증언과 녹취를 토대로 구성)

재판 청탁 의뢰와 3천만원 전달

K씨는 아버지의 항소심을 앞두고 지인인 사법 브로커 오모씨를 통해 차씨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K씨는 차씨가 "내가 잘 아는 판사가 있다"며 재판장에 대한 로비 가능성을 호언했다고 증언했다. K씨 진술에 따르면 그는 2021년 강진에 있는 차씨의 단독주택을 찾아가 과자 박스에 담은 현금 3천만원을 직접 건넸다.

K씨는 이때 차씨가 박스를 열어보고 "띠지가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돈다발의 띠지가 있으면 자금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며칠 뒤 같은 액수의 돈이 돌아왔는데 신권이 아니었다는 게 K씨 설명이다. "제가 가져간 돈은 은행에서 뽑은 새 돈이었는데 돌아온 돈은 새 돈이 아니었다." K씨는 다시 돈뭉치를 고무줄로 묶어 3천만원을 마련해 이번에는 차씨의 자택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건넸다고 한다.

연수원 26기 동창 판사 거론된 로비 라인

차씨가 K씨에게 내세웠다는 카드는 크게 두 갈래였다. 한쪽은 차씨 자신의 강진중학교 동창인 이모 전 지원장을 통한 재판장 공략이다. 이 전 지원장은 사법연수원 26기로 수도권 모 법원 지원장을 지낸 뒤 현재 한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로 있다. 문제의 재판장 역시 연수원 26기 동기다. 다른 한쪽은 같은 26기인 광주고법 김모 판사를 통한 별도 라인이라는 게 K씨 주장이다.

K씨는 차씨로부터 이 전 지원장 부부가 진도 솔비치에 내려온다는 정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차씨의 지시에 따라 전복과 과일 등을 사 솔비치 카운터에 맡기며 이 전 지원장 부인 앞으로 메모를 적어뒀다고 밝혔다. K씨는 "이 전 지원장 부인이 보건소 사무관이라고 차씨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당시 이 전 지원장의 부인은 영등포구 보건소장이었다. 이 전 지원장 부인이 해당 선물을 수령했거나 그 의미를 인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주심 판사 라인은 광주 지역 최모 변호사가 담당한 것으로 K씨는 설명했다. 정식 변호사 선임계는 제출하지 않은 이른바 비공식 변호사다. K씨는 최씨에게도 1500만원을 건넸다고 증언했다.

"비밀계좌 입금하면 판사가 체크카드로 쓴다"…자금 세탁 설명

뉴탐사가 확보한 사법 브로커 오씨와 K씨의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K씨는 차씨로부터 자금 세탁 방식까지 들었다고 증언했다. "차씨가 자기가 쓰는 돈이 아니라고 했다. 판사들끼리만 아는 비밀 계좌가 있고 거기 입금하면 판사가 체크카드로 돈을 빼서 쓴다고 했다."

차씨가 돈뭉치 띠지에 민감했던 배경 설명이다. 신권이나 띠지가 남은 돈은 일련번호 추적이 가능해 계좌 입금에 부담이 된다. 다만 이러한 비밀 계좌의 실제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차씨가 실제로 그런 계좌를 운용했는지, 또는 K씨에게 설명만 그렇게 한 것인지는 수사 영역이다.

로비 실패…재판장 "형이 억울합니까"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아버지의 항소심 형량은 1심보다 늘었다. K씨는 재판장이 선고 후 K씨 아버지에게 "형이 억울합니까"라고 되물었다고 증언했다. K씨는 이후 차씨에게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차씨는 연락을 피했다고 한다.

K씨에 따르면 2022년 무렵 3천만원이 돌아왔다. 차씨는 K씨에게 돈을 돌려주며 "자녀 결혼식 축의금으로 마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그 시기에 차씨 자녀의 결혼식이 있었던 사실은 강진 지역에서 확인됐다.

K씨는 뉴탐사 인터뷰에서 "저는 이 사건이 묻혔으면 했지만, 이런 사람이 군수가 된다면 나 같은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것 같아 응했다"고 말했다.

차씨의 전면 부인, 엇갈리는 진술

뉴탐사가 현장에서 만난 차씨는 의혹 전반을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차씨는 처음에는 K씨를 모른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목포 커피숍에서 한두 번 봤다"고 말을 바꿨다. 강진 자택에서 돈을 받았다는 K씨 진술에 대해서는 "강진에서 본 적 없다"고 했고, 띠지 요구 사실도 "띠지가 뭔지도 모른다"며 부인했다.

동창 이 전 지원장과 관련해선 "명절 때 한두 번 만나는 친구일 뿐"이라고 했다. 뉴탐사가 이 전 지원장에게 직접 통화로 확인한 결과, 이 전 지원장 역시 K씨를 모른다며 해당 사건 관여 가능성을 부인했다. 다만 "차씨는 중학교 친구"이며 "시골 친구들과 수시로 통화한다"고 밝혔다.

168억 대출 사기·입시 부정 해명과 판결문의 괴리

차씨는 168억원대 은행 대출 사기 사건과 관련해 "그 회사 대표이사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 고등법원 판결문에는 차씨가 "대표이사로 재직하며 분양 계약 체결을 동원한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대학원 입시 부정에 대해서는 "오픈북 시험이었다"고 해명했지만, 1991년 1월 25일자 경향신문은 해당 사건을 "조 교수가 시험 문제를 유출해 차영수씨에게 9문제를 알려준 부정행위"로 보도했다. 현직 공직 후보가 확정 판결문과 당대 언론 보도에 남아 있는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것이어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논란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감점 없이 통과한 민주당 공천

차씨는 168억 대출 사기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경선에서 감점 없이 통과했다. 반면 같은 경선에 나섰던 30대 청년 후보 김보미씨에게는 15%의 감점이 부여됐다. 차씨는 근소한 차이로 경선을 통과했다.

뉴탐사가 확인한 사법 브로커 의혹은 민주당 공천 검증 과정에서 다뤄지지 않은 사안이다. 민주당 감찰부단장은 장인재씨다. 사법 개혁을 주요 과제로 내건 민주당이 검증 체계의 구멍을 그대로 둔 채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를 확정한 셈이 됐다.

강진군의 연 예산 규모는 8천억원에서 1조원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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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정당운동과 동병상련인 캐나다의 생태사회주의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6/04/24 09:48
  • 수정일
    2026/04/24 09:4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장석준 칼럼] 생태사회주의를 선택한 캐나다 신민주당, '도약'할 수 있을까?

장석준 배곳 산현재 기획위원 | 기사입력 2026.04.24. 08:26:16

캐나다는 특히 정치와 관련해 한국 언론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현 캐나다 총리(마크 카니)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고, 캐나다 사회 분위기가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트럼프 정부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이웃나라 캐나다와 멕시코에 말도 안 되는 협박을 계속하는 탓에 두 나라 국민들이 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또한 트럼프 정부가 스스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렵사리 구축한 질서를 깨고 있는 상황이어서, '미국이 이를 버린다면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이 재건에 나서야 한다'는 카니 총리의 발언이 세계인의 박수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전하는 한국 언론은 카니 총리가 이끄는 현 자유당(Liberal Party) 정부를 흔히 '진보'라 소개한다. 오랫동안 더불어민주당을 '진보'라 불러온 한국식 관행을 다른 나라들의 보다 보편적인 정치 지형에 별 고민 없이 적용한 결과다. 하지만 이런 관성은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우선 20세기 후반 내내 캐나다 우파를 대표한 정당의 이름부터가 '진보보수당(Progresive Conservative Party)'이었다(현재는 '보수당'으로 개명). 그야말로 21세기 한국인의 정치적 상식을 '조롱'하는 듯한 작명이다.

이 정도는 웃고 넘어갈 만한 문제라 하더라도 또 다른,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자유당 왼쪽에 실은 캐나다의 진짜 '진보' 세력들의 지지를 받는 주요 정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NDP)'이 그 당이다. 이 당도 이름이 묘하게 이웃나라의 민주당을 연상시키지만, 엄연히 미국 민주당보다는 유럽 사회민주당들에 더 가까운 정당이다. 비록 최근 연방 하원(343석) 의석이 7석으로 쪼그라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캐나다 노총의 지지를 받으며 매니토바 주에서 주정부를 이끄는 저력 있는 정당이다.

의석이 급감한 작년 4월 총선 이후 위기에 빠져 있던 신민주당은 3월 29일 위니펙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아비 루이스(1967년생)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신민주당은 대표 선거에서 즉석결선투표제(Instant-Runoff Voting, 유권자가 각 후보에 대해 선호 순위를 매기고, 이를 바탕으로 결선투표를 따로 치를 필요 없이 과반 득표 당선자를 정하는 투표제도)를 실시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굳이 2차 집계를 할 필요 없이 1차 집계에서 56.02% 득표를 기록하며 나머지 네 명의 후보를 커다란 표차로 따돌렸다.

그런데 이러한 압도적 지지만큼이나 많은 이목을 끈 것은 루이스의 정강, 정책이었다. 루이스는 2015년에 발표된 생태사회주의 성향의 정책문서 '도약 선언(Leap Manifesto)'의 공동 제안자 중 한 사람이고, 이번 대표 경선에서도 도약 선언의 내용을 당의 새 노선으로 제시했다. 즉, 루이스가 10년 넘게 외쳐온 생태사회주의 노선이 신민주당 10만 당원(대표 선거 투표율은 70.55%) 중 과반의 지지를 받으며 채택된 것이다.

'도약 선언'

캐나다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나오미 클라인의 2019년 저작 <미래가 불타고 있다: 기후 재앙 대 그린 뉴딜>(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2021)을 읽은 이라면, 도약 선언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밝히듯이, 클라인은 도약 선언의 공저자까지는 아니어도 이 문서의 탄생에 기여한 산파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신민주당의 새 대표 루이스는 다름 아닌 클라인의 배우자다. 두 사람이 함께 도약 선언을 기획했고, 이 문서가 신민주당의 공식 노선이 되도록 압박하는 캠페인에도 함께 나섰다.

도약 선언이 나오게 된 직접적 배경은 2010년대 중반 앨버타 주의 오일샌드 채굴 피해 급증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격화였다. 앨버타 주에서는 이미 1950년대부터 프래킹(수압) 공법을 통해 모래와 뒤섞여 있는 원유를 추출해왔다. 그런데 2010년대부터 미국이 점토층에서 추출한 셰일오일 산유량을 늘리자 캐나다의 오일샌드 산유량도 나란히 증가했다. 고비용으로 천덕꾸러기 취급 당하던 오일샌드 채굴이 화석 연료 자본주의의 장기지속 덕분에 수지맞는 장사로 떠올랐다.

프래킹 공법의 남용은 즉각적으로 재난을 초래했다.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수질 오염도 심해졌다. 지층이 약해져 인공 지진이 빈발했다. 더구나 산유량이 늘어나자 대아시아 수출을 위해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 원유 수송 파이프라인이 새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 파이프라인은 선주민 거주지를 통과했고, 이에 맞서 선주민 공동체의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캐나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백인 이주민들(영국계든 프랑스계든)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삶의 터전을 짓밟으며 건설한 나라다. 20세기에 들어서 뒤늦게나마 이런 식민주의의 역사를 반성하고 선주민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시작됐고, 이는 캐나다 진보-좌파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됐다. 그러나 2010년대에 불거진 파이프라인 건설 논란은 이 노력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원점을 맴돌고 있음을 증명했다. 화석 연료 자본주의라는 지상명령 앞에서 선주민 인권은 다시 한 번 짓밟혔다.

도약 선언은 선주민 공동체가 시작한 파이프라인 건설 반대운동에 공감한 다양한 인물들, 단체들이 함께 모여 나눈 토론의 결과였다. 루이스와 클라인 부부 그리고 이들의 동지인 언론인 마틴 루카스가 토론 결과를 문서로 정리하여 신민주당을 비롯한 정당들을 압박하자고 처음 제안하기는 했으나, 도약 선언 자체는 선주민운동가, 노동운동가, 기후정의운동가 등의 공동 저작이었다.

'지구와 서로에 대한 돌봄에 바탕을 둔 캐나다를 만들자는 요청'이라는 부제를 단 도약 선언은 선주민이 겪는 난개발 문제가 결국 화석 연료 자본주의에 속박돼 있는 모든 캐나다 시민의 절박한 현안임을 확인하며 시작한다. 도약 선언은 난마처럼 얽힌 이 문제가 어중간한 타협책으로는 풀릴 수 없으며, 오직 기후급변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체제로 과감히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사회 체제 전반을 바꿔나가는 '도약'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도약'의 구체적인 방향은 최근 생태사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전환'의 내용과 일치한다. 2050년까지 '100% 청정에너지 경제'로 전환한다는 목표 아래, 화석 연료 인프라, 그러니까 오일샌드 증산이나 파이프라인 증설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대신 지역사회가 소유와 운영의 주체가 되는 재생에너지 중심 체제를 구축하고, 대중교통 체계를 발전시켜 승용차 중심 교통양식을 바꿔야 한다. 기존 탄소집약산업 종사자들이 안정적으로 새 일자리로 이동하도록 국가가 재교육과 일자리 보장, 공공 투자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업들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법인세와 부유세를 강화하고, 누진적 탄소세를 실시하며, 국방비를 삭감해야 한다. 또한 이에 반발할 기득권 세력에 맞서기 위해 각 지역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타운미팅을 개최해 여론을 모아야 하며, 승자독식선거제도 혁파를 포함한 정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도약 선언의 이런 내용은 당연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보수당은 반발했고, 자유당은 무시했으며, 신민주당 안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신민주당이 무시하지 못할 진보-좌파의 숱한 저명인사들, 가령 철학자 찰스 테일러, 영화배우 도널드 서덜랜드, 레이첼 맥아담스, 엘리엇 페이지, 음악가 닐 영, 레너드 코헨, 앨라니스 모리셋 등이 선언문의 공동 서명자로 합류했지만, 신민주당의 앨버타 주 당조직은 격렬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캐나다의 텍사스'라 불리는 앨버타 주민들의 오일샌드 개발 찬성 여론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15~16년에 도약 선언을 신민주당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시키려던 노력은 끝내 실패했다. 그러고 나서 10년만에 루이스는 같은 입장을 내세우는 후보로서 신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섰다. 그 동안 루이스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당세가 강력한 지역구('험지')에 연거푸 도전하고 고배를 마시면서(득표율은 20%를 넘었으나 양대 정당 후보들에 이은 3위를 기록) 당내 입지를 다졌다. 이렇게 어느덧 언론인, 사회운동가에서 전업 정치가가 된 루이스는 도약 선언을 그대로 이은 그린뉴딜 계획, 공공서비스 확대, 공공주택 100만 호 공급,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AI 데이터센터 건설 유예, 1% 초부자세 등을 공약하며 대표 선거에 뛰어들었다.

사실 루이스는 신민주당 안에서는 '금수저'라 할만하다. 할아버지 데이비드 루이스는 토미 더글러스와 함께 1961년에 신민주당을 창당한 주역 중 한 사람이고

1971~75년에는 당 대표를 역임했다. 아버지 스티븐 루이스 또한 신민주당의 주된 기반 중 한 곳인 온타리오 주에서 주당 대표를 맡았던 인물이다. 급진적 이념, 정책에도 불구하고 루이스가 처음부터 유력 후보로 인정받은 데는 이런 가족적 배경이 한몫했다. 그러나 당내 일각의 극심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압승을 거둔 것은 이런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10년 동안 끈질기게 지속된 '도약' 운동의 성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진보정당운동과 동병상련인 신민주당은 과연 '도약'할 수 있을까?

신민주당이 1961년에 창당했다고 하지만, 전신인 '협동공화연맹(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 CCF)'의 창당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32년이다.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가 사회당(SPA)의 정책을 뉴딜로 대폭 수용하고 노동조합들의 지지를 독차지함으로써 독자 좌파정당의 성장이 차단된 바로 그 시점에 캐나다에서는 CCF가 출범하고 원내에 진출함으로써 좌파대중정당이 존립할 여지가 마련됐다. 이웃한 두 나라의 이후 역사와 사회 성격이 갈라지는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하지만 좌파대중정당이 존속할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됐다 뿐이지, 성장하기 좋은 환경까지는 아니었다. 영국 하원처럼 100% 소선거구제를 지금까지 유지하는 캐나다에서는 협동공화연맹-신민주당이 기성 양대 정당, 즉 자유당과 보수당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집권가능정당으로 인정받을 만큼 의석을 불리기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캐나다의 정치 지형은, 노동당이 일찍부터 발전한 오스트레일리아나 노동당이 자유당의 지위를 대체한 영국, 뉴질랜드보다는 오랫동안 양대 우파정당 사이에 노동당이 끼어 있던 아일랜드에 더 가까웠다.

다만, 신민주당은 연방 하원에서는 만년 소수정당이더라도 주정부 수준에서는 빈번히 집권하는 등 풀뿌리 토대가 탄탄했다. 무엇보다 캐나다 노동조합운동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고, 여기에 일부 주에서 상당수 농민들의 지지가 더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 신민주당에서는 이러한 지역 토대의 일부가 대표 선거에서 확인된 전국적 당심(黨心)과 충돌하고 있다. 한때 신민주당 주정부를 탄생시켰던 앨버타 주, 새스캐처원 주의 당조직이 루이스의 노선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공언한다.

이런 점에서 루이스 대표가 이끌 신민주당의 미래는 장밋빛과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가 촉발한 카니 돌풍 때문에 평소 총선에서 거두던 의석 수준(20-30석)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7석)을 받고 그래서 원내 공식정당 지위(우리로 치면, 원내교섭단체)를 잃어버린 당을 추스르는 것부터가 엄청난 도전 과제다. 더 현실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쌓인 막대한 부채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게다가 가까운 시일 안에 소선거구제가 개혁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조건에서 일부 지역조직의 반발은 절대 다수 당원의 지지를 받은(다른 대표 후보들을 1순위로 지지한 당원들도 2순위 지지 후보로는 대부분 루이스를 선택했다) 신임 대표에게조차 넘기 힘든 장애물이 될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그러나 탈출구는 어쩌면 루이스가 강조해온 '도약'이라는 키워드에 있을지 모른다. 아직 비례대표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여 정치 개혁부터 성사시킨 뒤에 다음 과제에 나서겠다고 할 수도 없고, 자유당의 꽁무니만 밟다가 선거에서 자유당의 대체재로 선택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가장 미래적인 과제를 앞장서서 제기함으로써 오래도록 쌓이고 쌓인 숙제들도 동시에 풀어나가는 접근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 대응, 돌봄사회 전환, 디지털 광풍에 대한 개입 등과 복지 확대, 정치 개혁을 마치 동전의 양쪽 면인 것처럼 함께 추진해야 한다. 말하자면 ‘도약’이다.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치 제도나 정치 지형 등에서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캐나다 신민주당과 동병상련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아비 루이스의 '새로운' 신민주당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18일 국회에서 열린 4월 임시국회 제6차 본회의에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관 표결에 앞서 조국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 의원들이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석준 배곳 산현재 기획위원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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