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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알바

  • 등록일
    2007/01/17 13:05
  • 수정일
    2007/01/17 13:05

 

직업이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이 있습죠. 그에 따른 자기 소개 혹은

자기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전에는 특별히 어떤 일을 아르바이트로 해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집안에 어머니께서 자잘한 부업거리를 들고 오신적이 있긴 했었지요.

조화(造花)에 꽃잎달기 100개 채우면 단가가 몇백원정도 였던가? 머 그런 부업을

어머니 손을 도와 해본게 전부일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들어와서 여름방학때

가양동에 있는 제일제당 다시다 공장에 일용 잡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회라고 하는 시스템을 첨 겪은 곳입니다.

어머니 친구분의 아들이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지요.



그곳에서의 가장 뼈저리게 기억에 남는 일은 컨베이어 벨트앞에서의 작업였습니다.

모던 타임즈였던가요? 공장에서 하루종일 나사를 죄는 노동자로 나왔던

채플린의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

여자의 젖꼭지까지도 나사로 보여 그걸 조일려고 따라다니는 찰리 채플린의 연기.

그런 이상한 강박증을 갇게하는 힘겨운 노동에 대한 모습을 역설적이게도 희화시켜

우스꽝스럽게 보여주었던 영화.

제게도 다시다를 포장하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아주 미쳐버릴것 같았던, 돌아버릴것 같았던

그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딴 생각을 잠깐만하면 포장해 넣어야하는

다시다 봉지가 저리로 밀려가

제자리에서 일어나 휘다닥 뛰어가서 봉지를 채와서 박스에 포장을 해 넣어야했던,

그런 지독한...밸트에 묶인 노동.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얼흥얼 들국화의 노래를...그리고 흥얼흥얼

기계 한번 고장나서 안 멈추나하고...

기계가 멈추면 사람들을 놀리지 않기위해 청소를 시켰습니다.

그나마 청소하는게 쉬운일에 속했었지요.

아침에 너무 졸리면 쉬는시간에 잠시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를 내리고 걸터앉아

깜박깜박 졸기도 자주 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솔솔, 빨래감을 담궈놓은 물에 하이타이가 솔솔 풀리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추석 맞이 사은품 세트를 포장하기 위해서 물량이 많을때는

야간학교에 다니는 여중생들이 잠시 투입되었지요.

그 꼬맹이들이 스무살이 채 되지도 않았던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좀 조숙했다면 그때 원조교제를 시도 해봣을듯하네용. ㅎㅎ

 

고백을 하자면 그나마 벨트앞에서 하던 일은 지루했지만 쉬운 편에 속하는 일이였습니다.

끔찍하게 힘들었던 일은 멸치 다시다의 재료인 멸치에 포함되어 있는

분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제조 과정에 투입 됬던 일이였습지요.

1분당 한 포대씩을 진동을 하는 기계에 털어 넣어야 했지요.

그게 한 포대에 25kg인가 햇을겁니다.

숨돌릴틈없이 한포대씩을 털어넣는 역할을 하거나

한포대씩 분순물이 제거된 멸치를 빈 포대에 다시 받아서

4개씩 파레트에 4층 높이로 쌓는일.

정말 힘들고 너무 고되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먼지도 많고 일은 힘들고 바쁘고 정말 뼛골이 빠지더군요. 

 

그래서 그 공정을 관리하는 공장의 관리자급인 사람에게 자리를 좀 이동시켜 주면

안되겟냐고 면담을 신청햇습니다.

사실 폐가 안 좋아서 너무 먼지먹고 하는 일에는 견딜수가 없다고 그렇게 사정을 했었죠.

(쪽팔리게도 어릴적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를 했던것 같습니다.)

 

그의 반응은, 너 대학생 알바냐고, 니 아버지가 잘 살고 그러면 뭐하러 이딴데 와서 일하냐고,

하기 싫음 힘들면 때려치고 일 관두고 나가라고...

 

'조까라 마이싱이다!' 하고 일을 그만 둘수가 있을까요? 그때 저로써...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을 순진한때 였었지요. 부끄럽기도 하더군요.

 

그때 그 다시다 공장의 공장장이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이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일을 하던 도중 집에서 아버지와 막걸리 한사발을 하다가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이 너무 힘들면 이야기라도 해줄까하는 걸 됏네요, 하고

고개를 가로젓긴 했었지요.

그래도 문득 간사하게도 그 순간에 공장장 이름이라도 팔았으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기 공장장이 울 아버지 친구인데...머..그런...

 

하여간 멸치 다시다의 계절은 용케 끝나고 소고기 다시다쪽으로 배치가 되었고,

소고기를 익히는곳에서

일한건 재미 있었습니다. 왜냐 점심무렵이 지나고 슬슬 배가 고파질때즘 익혀진 소고기를

소고기 양념장같은것에 찍어먹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잔업을 꽤나했었습니다. 야근 작업을 할 경우에의 일당이

기본 근무에 비해 1.5배를 주긴했으니까요.

야간은 2배였고요. 몇번인가 야간에 일을 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87년도였고 첫 월급이 20여만원을 조금 넘는 정도였던거 같습니다.

그때 출근표 도장 찍힌것과 첫월급이 명기된 종이쪽지를 버리지않았으니

아마 방구석 어딘가에 있을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그곳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기억에 많이 납니다.

그때 한양대 사회학과 학생이 한명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1학년 새내기였고

까무잡잡하게 생긴  키도 훤칠한 미남형이엇지요.

둘은 괜히 쉬는 시간에 사아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운동가요를 슬쩍 부르기도 했고,

대학생 초년생이라는 동질감에 잘 어울리긴 햇었습니다.

하기만 그뿐이였습니다. 생각하면 참 뻘쭘한 대학생 새내기들 둘이 

괜한 운동가요 부르며 폼잡고 그런 셈이였을겁니다.

그 친구가 그때 고기서 일하던 역시 우리 또래의 여직원중에 

풍만하고 몸매가 꽤 매력적으로 생겼던

여자를 꼬셔서 밖에서 만났나고 하는걸 듣긴 했었지요.

 

하나하나 잠시지만 같이 일을 했던 이들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밤업소에서 일하다 호스테스랑 관계하고나서는 성병걸려 약 먹는다고

 매일 놀림을 당하던 중학교 동창이였던 친구,

안양 타이거라는 폭력조직 서클에 있었다던 성질 고약한 친구,

가리봉동에서 살고있다던 사람 좋았던, 봉제공장일부터 시작했다던,

온갖 노동일로 잔뼈가 굵었던 친구.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려 보니 20대 초반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특별히 갈곳없는 또래또래들이 많았었네요.

 

가장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사람은 다시다 공장의 옥상에 위치한 옥탑방에서

혼자 일하던 사람입니다.

굼띤 업무처리 때문에 노상 그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온 선임 직원에게 욕 먹고

무릎팍을 채여 멍투성이기도 했었던것 같은데...

그의 취미가 클래식 기타를 치는것 였습니다.

그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습하고 있는데 잘 안된다고

무척 어렵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던게 인상적이였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않지만 참 선량하고 착했었다는 그런 기억만이 슬핏 남아있네요.

어째든 그 여름이 지나고 대학에 복귀해서 저는 클래식 기타반 문을 두드렸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지요.

 

회사의 가게 앞에서 돼지 껍데기를 안주로 술을 먹어본게 그때가 처음이기도 합니다.

좋은 추억이건 나쁜 추억이건 오래 묵으면 이렇게 아련하고 아찔하기만 하군요.

 

첫 알바가 끝나고...월급턱을 낸다고 고등학교 친구들 몇몇을 이대앞에서인가

모이게 해서 술을 한잔 샀습니다.

 

그리고 그날 첫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뻐금 담배가 아니라

가슴 속 깊히 담배를 빨아 피웠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친구넘들은 지금 무얼하고 살고 있을련지...

잠시나마 같이 한 공간에서 일했던, 나를 빗방울처럼 스쳐갔던 사람들은

또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고 잘 지내고 있을런지...

 

후..담배가 문득 찐하게 땡깁니다.

 

(르포문학교실 수업을 마치고 4기 모임방에 자기소개를 구술생애사 형태로 하기

숙제를 이곳에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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