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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by 조지 오웰

  • 등록일
    2010/02/16 15:07
  • 수정일
    2010/02/16 15:07

 

나는 왜 쓰는가

Written by George Orwell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나이 다섯 아니면 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나중 커서 작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에서 스물네 살이 되기까지의 청소년 기간에 나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려 했지만 그게 내 진정한 본성에 어긋나는 짓이고 결국은 내가 오래지 않아 책상에 앉아 책을 쓰게 되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세 아이의 중간이었다. 위 아래로는 각각 다섯 살씩의 터울이 졌고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나는 거의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리고 몇 가지 다른 이유들도 작용해서, 나는 좀 외로운 편이였으며 좋지 않은 버릇들이 몸에 붙어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인기가 없었다.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상상의 인물들과 대화하는 외로운 아이의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문학에 대한 내 포부는 내가 외톨이이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과 뒤섞인 것이었다. 나는 내게 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들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능력 덕분에 나는 나만의 비밀스런 사적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로 들어가 내가 일상의 삶에서 겪은 실패들을 보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년기와 소년기를 통틀어 내가 써낸 진지한(말하자면 진지한 의도로 쓴) 글은 모두 합쳐봐야 여섯 장도 되지 않았다.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나는 내 생애 최초의 시를 썼다. 썼다기보다는 내가 읊조리고 어머니가 받아쓴 것이었다. 그 시에 대해선 지금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게 호랑이에 관한 것이었고 호랑이 이빨을 <걸상 같은 이빨>(제법 그럴 듯한 표현 아닌가) 어쩌고 하며 묘사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필시 윌리엄 블레이크의 「호랑이, 호랑이」를 표절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열한 살 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는데 그때 내가 쓴 사뭇 애국적인 시 한 편이 지방 신문에 실렸다. 그로부터 2년 뒤 호레이쇼 키치너의 죽음에 대해 쓴 시도 신문에 났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따금 조잡한, 그리고 대개는 미완으로 끝나는 <자연시>들을 조지 시대 스타일로 썼다. 두어 차례 단편 소설도 시도해 보았지만 형편없는 실패작이었다. 이것이 그 시절 내가 종이에 실제로 써본 자칭 <진지한> 글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이 기간 내내 나는 어떤 의미에서 문학활동이라 부를 만한 일을 하고 있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주문에 맞춰 쓰는 행사용 글이었다. 이 종류의 글을 나는 빠르고 쉽게 쓸 수 있었으나 나 자신 별로 큰 즐거움은 느끼지 못했다. 학교 숙제 외에 나는 지금 생각해도 아주 놀라운 속도로 희극시 비슷한 행사용 중답시들을 썼고(열네 살 때 나는 아리스토파네스를 흉내낸 각운 희곡 한 편을 일주일 만에 써냈다) 학교의 여러 잡지 인쇄물과 원고 편집을 도왔다. 그 잡지들은 아주 형편없는 광대놀음 같은 것들이었지만, 요즘의 싸구려 신문잡지들에 비하면 오히려 봐줄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들과 함께 나는 15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아주 다른 종류의 <문학 연습>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인데, 이는 유년기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흔히 있는 버릇인 것 같다. 꼬마 시절 나는 내가 이를 테면 로빈 후드라 생각했고 신나는 모험담의 주인공 자리에 나를 앉혀보곤 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얼마 안 가서 불쑥 그 나르시시즘을 잃었고, 대신 내가 한 일이나 눈으로 본 것을 열심히 <묘사>해 보는 일에 점점 더 열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몇 분씩 내 머리에 이런 문장들이 흐르곤 했다. <그는 문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광선 한 줄기가 모슬린 커튼을 뚫고 들어와 탁자에 비스듬히 비치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반쯤 열린 성냥통 하나가 잉크병 옆에 놓여 있었다. 오른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그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길에는 얼룩고양이 한 마리가 죽은 나뭇잎을 쫓고 있었다……> 어쩌고 저쩌고. 이 버릇은 나의 비문학적 연대랄 수 있는 스물다섯 살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런 묘사를 위해 나는 정확한 어휘들을 찾아야 했고 또 실제로 찾아보기도 했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 좋아서라기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충동질 때문에 그런 묘사 작업을 해보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건대 나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나이 때의 내가 그때그때 존경했던 이런저런 작가들의 문체를 반영한 것이었을 테지만, 지금 기억으로는 언제나 뭔가를 꼼꼼하게 묘사해 보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열여섯 살쯤 되어서 나는 돌연 말의 재미-말의 소리와 연상이 주는 재미를 발견했다. 예컨대 『실락원』에 나오는

 

 

그래서 그는 힘들게 온몸으로 버둥대며

나아갔다, 힘들게 온몸으로 버둥대며 그는,

So hee with difficulty and labour hard

Moved on: with difficulty and labour hee,

 

 

라는 두 행은 지금 보면 뭐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당시 그 두 줄을 읽는 순간 내 몸에는 짜릿한 전율이 흘렀었다. <그he>라는 대명사의 철자가 로 되어 있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사물 묘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알 만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까 당시 내가 쓰고 싶었던 책(감히 책을 쓰고 싶었다고 말해도 된다면)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분명하다. 말하자면 나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소설-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미세한 묘사와 인상적인 직유로 가득 찬, 그리고 말이 소리 그 자체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는 화려한 문장들 투성이의 그런 자연주의적 소설을 쓰고 싶었다. 사실 나의 첫 장편 『버마 시절』(서른 살 때 쓴 것이지만 구상은 훨씬 이전부터 되어 있었다)은 다소 그런 종류의 작품이랄 수 있다.

 

이 모든 배경 정보를 내가 여기 털어놓는 까닭은, 우리가 한 작가의 초기 발전 과정을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서는 후일 그를 지배하게 되는 이런저런 동기들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적 제재들은 그가 어떤 시대에 살았는가로 결정된다. 적어도 우리 시대처럼 소란스럽고 혁명적인 시대의 경우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뭔가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는 자기 특유의 어떤 정서적 태도를 획득해 놓고 있고 그렇게 획득한 태도로부터 아주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기질을 길들이고 어떤 미숙한 단계나 괴팍한 기분에 매여 있지 않도록 자기를 훈련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할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초기 영향들로부터 아주 벗어난다는 것은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 자체를 죽이는 일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외한다면, 나는 작가들이 글을 쓰게 되는 데는(산문 작가의 경우) 네 가지 큰 동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기들은 작가에 따라 그 각각의 정도가 다르고, 동일 작가의 경우에도 그가 사는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각개 동기의 비중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네 가지 동기란 이런 것이다.

 

1)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망. 이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작가는 이 특징적 동기를 과학자, 예술가, 정치가, 법률가, 군인, 성공한 사업가-말하자면 인류의 꼭대기 부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유한다. 인류의 대다수는 그리 격렬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는 않다. 대개 나이 서른쯤을 넘기면 사람들은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 대체로 남을 위해 살거나 일상적 일에 짓눌려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는 소수의 재능 있는 인간들,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는 고집센 인간들이 있고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진지한 작가들은 대체로 저널리스트들보다 더한 허영과 자기 중심주의를 갖고 있다. 돈에 대한 관심은 덜 할지 모르지만.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이런 미학적 동기는 산문 작가들의 경우엔 대체로 미약한 편이지만 그러나 팸플릿 저자나 교과서 집필자까지도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어휘와 문구들을 갖고 있고, 이것들은 공리적 이유를 떠나 그를 매혹한다. 어떤 활자체를 쓰고 책의 여백은 어떤 크기로 할까 등의 고려도 그런 것이다. 철도 안내서의 수준을 넘는 책이라면 어떤 책도 이 같은 미학적 관점을 아주 벗어날 수 없다.

 

3)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두려는 욕망.

 

4)정치적 목적-< 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이 여러 가지 충동들이 어떻게 서로 싸우고, 사람과 시대에 따라 그 각각의 충동이 갖는 무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성질상 나는 (여기서 <성질>이라 함은 처음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가 도달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동기들 가운데 1, 2, 3번 동기가 네번째 것을 족히 압도했을 그런 사람이다. 평화 시대였다면 나는 화려한 책 혹은 단순한 묘사 위주의 책을 썼을 것이 틀림없고 나의 정치적 충성이 어느 쪽에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로 살았을 것이다. 어찌 어찌해서 나는 결국 일종의 팸플릿 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잘 맞지 않는 직업(인도와 버마에서의 대영제국 경찰이라는)으로 첫 5년을 보냈고 가난을 경험했으며 실패를 맛보았다. 이런 경험 덕분에 나는 권위라는 것에 대해서 안 그래도 내가 이미 갖고 있던 증오를 한층 더 키웠고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처음으로 충분히 알게 되었다. 또 버마에서의 내 직업은 제국주의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도 웬만큼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경험들은 내게 정확한 정치적 정향을 주는 데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히틀러가 등장하고 스페인 내란 등이 발생했다. 1935년 말까지도 나는 어떤 확고한 결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나의 고민을 표현한 짧은 시 한 편을 썼던 기억이 난다.

 

 

행복한 목사가 되었으리라

2백 년 전이었다면,

영원한 운명에 대해 설교하고

호두나무 자라는 것이나 지켜보는.

 

하지만 사악한 시대에 태어나

나는 잃었네, 그 행복한 천당을.

내 코 밑에는 털이 자라는데

목사들은 털을 깨끗이 면도한다.

 

나중 시절이 좋았던 한때

우리는 아무 일에나 즐거웠고

우리의 심란한 생각들을 흔들어 잠재웠다,

나무들의 가슴 위에.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는 가지려 했지

지금 우리가 숨기는 그 기쁨들을.

그리고 믿었지, 사과나무 가지의 방울새가

내 적들을 떨게 하리라고.

 

그러나 처녀들의 배, 살구들,

응달 시냇물의 물고기들,

말들, 그리고 새벽에 날아오르는 오리떼,

이 모든 것은 꿈이다.

 

꿈을 다시 꾸는 일은 금지되었다.

우리는 기쁨을 흉내내거나 감춘다.

말들은 크롬 강철로 만들어지고

작고 살찐 자들이 그 말들을 몬다.

 

나는 꿈틀거리지 않는 벌레,

하렘 없는 환관

승려와 인민위원 사이를

나는 유진 아람처럼 걷는다.

 

라디오가 울리는 동안

인민위원은 내 미래의 점괘를 봐주고 있다.

그러나 승려는 내게 오스틴 세븐 차(車) 한 대를 약속했다.

목사일은 언제나 수지맞으니까.

 

나는 차가운 대리석 홀에 사는 꿈을 꾸었다.

깨어보니 그것은 진실,

나는 이런 시대에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스미스는? 존스는? 그대는?

 

 

스페인 전쟁과 1936-1937년의 기타 사건들은 정세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았고 그 이후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1936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어졌다. 우리 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이 시대의 작가는 누구나가 다 이런저런 형태로 그 문제들을 다룬다. 그것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어떤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더 많이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가진 미학적 지적 성실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도 활동할 기회도 더 많이 갖게 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일차적 관심은 사람들을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글 쓴다는 것이 도시에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면 나는 책을 쓰지 못하고 잡지에 실릴 글조차도 쓸 수가 없다. 누구든 내 작품들을 검토해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가 쓴 것들 중에 전적으로 선전적인 책의 경우에조차 본격 정치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내가 어려서 획득한 세계관을 아주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버리고 싶지도 않다. 내가 살아 활동할 수 있는 날까지 나는 계속 산문 스타일에 강한 집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구의 표면을 계속 사랑할 것이며 단단한 것들과 쓸모없어 뵈는 정보에도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나의 이런 면을 억누른다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문제는 내게 깊이 뿌리 내린 개인적 호오(好惡)들을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근본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들에 어떻게 화해를 시키는가라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 구성의 문제와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며 진실성의 문제도 새로운 각도에서 제기한다. 그런 어려움들 가운데 노골적인 예 하나만을 여기 적어보기로 하자. 스페인 내전에 관한 나의 책『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솔직히 정치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그 소설 역시 어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형식을 존중하면서 씌어진 것이다. 나는 그 작품에서 나 자신의 문학적 본능들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진실의 전부를 이야기해 보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우선 그 작품에는 신문 기사 등을 인용한 긴 장이 하나 있는데 그 장은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은 트로츠키파를 변호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었다. 일이 년 시간이 지나면 보통의 독자들로선 흥미를 느끼지 못할 이런 장이 거기 끼어 있다는 것은 소설을 망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존경하는 비평가 한 사람은 그 장을 놓고 내게 훈계하기를「왜 그런 장을 거기 넣었는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그 말은 옳았지만, 그러나 나로선 그렇게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당시 영국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한 가지 사실-무고한 사람들이 엉뚱하게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내가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예 그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여러 형태로 계속 대두된다. 언어의 문제는 훨씬 더 미묘해서 그걸 논하자면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다. 단지 나는 근년 들어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한다는 말만 해두고자 한다. 어떤 글쓰기의 스타일 하나를 잘 다듬어 터득하고 나면 이미 그 순간 우리는 그 스타일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동물농장』은 내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지금 7년째 나는 소설에 손대지 않고 있으나 곧 하나 쓸까 한다. 물론 실패작일 것이고 모든 책은 실패작이지만 내가 쓰려는 책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지금 이 글의 마지막 한두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 마치 나의 글쓰기 동기가 전적으로 공적 정신에서 나온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나는 그것을 이 글의 최종적 인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동기의 밑바닥에는 어떤 미스터리가 하나 놓여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마치 길고 고통스런 투병과정처럼 끔찍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마귀에 씌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피곤한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귀는 어린 아기가 시선을 끌기 위해 소리를 내지를 때의 그 본능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개성을 끊임없이 지워 없애려 노력하지 않고서는 어떤 읽을 만한 책도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도 같다. 내 경우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는지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그 여러 동기들 가운데 어느 것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안다. 내가 쓴 책들을 회고컨데,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형용사들 속으로 속아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밑줄 친 구절만 옮겨올려다가 전체를 옮겨와본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 채찍질이 좀 되주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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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액트 너 마저도!

  • 등록일
    2010/01/26 19:48
  • 수정일
    2010/01/26 19:48

* 2010년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운영자 공모심사 발표

http://www.kofic.or.kr/cms/139.do?task=kofic.unityboard.command.Unityboard2Retrieve2Cmd&MASTER_NO=14&BOARD_NO=30995

'(사)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로 선정되었습니다.

단체 소개 참고 기사: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96

* 2010년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운영자 공모심사 발표



http://www.kofic.or.kr/cms/139.do?task=kofic.unityboard.command.Unityboard2Retrieve2Cmd&MASTER_NO=14&BOARD_NO=30996

'(사)시민영상문화기구'로 선정되었습니다.

 

 

 

차곡 차곡 쌓아 왔던걸 송두리채 빼았겼다.

 

후안무치한 저 파렴치함들에는 대체 어떻게 상대를 해야하는걸까?

 

후안무치한 넘들을 언젠가는 응징을 해줘야 할텐데...

 

여튼 새해 갑갑한 소식만 들려온다.

 

그간  맷집 약해진 여기 진보진영

 

두둘겨 맞다보면 다시 좀 강해지겠지.

 

 그럴까? 그렇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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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우중독보행. 시젬 쌀롱바다비.

  • 등록일
    2009/12/10 23:41
  • 수정일
    2009/12/10 23:41

가난 - 우중독보행,  그간의 가난들은 어찌할고 지금의 가난들은 어찌할고 앞으로의 가난들은 어찌할고 하늘 가득 구름 가득 가난한 마음이 날 지배하고 있으니 의지의 박약인가 신념의 굴절인가 언제든 가난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으나 유독히도 독이 되어 내 마음을 어찌할바 모르겠다. 이불 자락 가득한 가난을 무게로 실감할때 나의 잠자리도 늘 가난을 함께 덮고 간다. 꿈에서조차 마음의 허함을 감출 수 없으니 현실적인 가난이야 어찌할 수 있겠지만 마음의 가난과 공허함은 어찌할바 모르겠다. 햇볕이 따스한 봄이 그립다. 세평 정도 되는 봄날의 따듯한 텃밭위에서 나비의 움직임을 함께 하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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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롱바다비 생축공연 셀린셀리셀린느

  • 등록일
    2009/12/10 13:05
  • 수정일
    2009/12/10 13:05

 

혼자서 길을 걸어가다가

혼자서 절뚝이는 세발 고양이를 만나고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혼자서 춤을 추는 외팔 소녀를 만나고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깊고, 끝도 없는 강을 만나고

 

"이젠 어떻해야 해"

 

나는 물었고,

우리는 생각에 잠겼네.

 

 

나의 한쪽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강을 헤엄쳐 나를 멀리멀리 나를 떠나가네

나머니 한 쪽 팔은 세발 고양이에게 주고

고양인 비웃으며 나를 햘퀴고 떠나가네

 

"안녕 내 사랑들아"

 

인사하고 싶지만,

흔들어 줄 손이 없네.

 

 

나는 홀로 깊고, 끝도없는 강물 속으로

걸었네.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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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됴법 통과냐! 헌재 이 개쉑들아! 야마가타 트윅스터 한받

  • 등록일
    2009/11/05 10:55
  • 수정일
    2009/11/05 10:55

전태일거리에서 공연을 시작한지 근 반년이 되어갑니다.

제법 이제 같이 와서 노래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특히 아마추어 증폭기를 카피하는 한받님의

변신은 언제나 저희를 즐겁게...랄라라하게

해주시죠.

 

홍대 인디씬의 최고봉중에 하나라 생각들어요.

 

4집 수성랜드 발매 완료 절찬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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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거리 공연 22차 사진들

  • 등록일
    2009/10/24 19:04
  • 수정일
    2009/10/24 19:04

 

마드라사로 보내는 들불의 노래 10월30~31 공연 홍보중!!!

 

 

 

좌로부터 회기동단편선 기타맨 전태일열사님흉상 조충현

화면바깥 이씬 카메라촬영 칼라TV 박성훈 피디 캠촬영 권기현 피디

 

 

 

 

젬배 회기동 단편선

 

 

노래하는 조충현

 

 

 

 

 

 

 

칼라TV 권기현 피디 울 베이스주자인데 촬영땜시롱 전태일거리에서는 한번밖에 합주를 못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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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정말 미안해_연습 중

  • 등록일
    2009/10/21 03:44
  • 수정일
    2009/10/21 03:44

연영석 - 엄마 정말 미안해

1Capo
 

연영석 엄마 정말 미안해
 

Em                                                 G  
오랜만에 집엘 가면 엄만 내게 묻지
밥은 먹고 다니냐고 잘 사냐고
궁금한 게 많은 만큼 질문도 많은데
그런 엄마 얼굴 위엔 걱정이 가득

Bm                            Em
그런 것이 싫기도 해서
G                        D
화를 내기도 했지

Bm                             Em
그래 놓곤 후회를 해봐도
G                        D
나는 어쩔 수 없어

Gadd9              CM7
엄마 정말 미안해
그런 마음뿐인데
엄마 정말 미안해
그저 마음뿐이네

Em                                G 
집에 있다 나올 때면 엄만 얘길 하지
밥은 먹고 다니라고 때 맞춰서
벌써 가니 언제 오니 어디로 가냐고
그런 엄마 얼굴 위엔 걱정이 가득

Bm                             Em
그런 엄말 이핸 하지만
G                        D
왠지 싫기도 해서

Bm                 Em
뒤돌아선 인사도 못하고
G                        D
그냥 나와 버렸어

Gadd9              CM7
엄마 정말 미안해
그런 마음뿐인데
엄마 정말 미안해
그저 마음뿐이네

Gadd9         CM7
워어어 라랄라라
워어어 라랄라라

Gadd9             CM7
엄마 정말 미안해
그런 마음뿐인데
엄마 정말 미안해
그저 마음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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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파라 Gracias a la vida

  • 등록일
    2009/10/09 02:47
  • 수정일
    2009/10/09 02:47
 
<생에 감사해>를 부르는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청아했다. 흙냄새가 나는 평소의 단조롭고 칙칙한 목소리와는 분명 달랐다. 또한 괄괄한 여장부 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노래를 녹음한 1966년의 비올레타 파라는 어언 50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칠레 민속음악의 전당을 만들어보겠다는 오랜 꿈을 실행에 옮겼다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절망하고 있었다. 또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던 이는 그녀의 직선적인 성격에 진저리치다 볼리비아로 가서 다른 여인과 결혼했고, 건강마저 비올레타 파라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더구나 <생에 감사해>의 노랫말은 그녀의 상황을 알던 사람들로서는 더욱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노랫말이었고, 삶의 은총을 기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생에 감사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어
흑백을 온전히 구분하고,
창공을 수놓은 별을 보고,
무수한 사람들 틈에서 내 님을 찾을 수 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청각을 주어 밤낮으로 귀 기울여
귀뚜라미, 카나리아, 망치 소리, 물레방아, 소나기,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사무치게 사랑하는 임의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새기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소리와 문자를 주어
‘어머니, 친구, 형제자매,
애모하는 영혼의 편력 길을 비추는 빛’ 같은
말들을 떠올리고
표현할 수 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내 지친 발을 이끌어주어
도시와 시골길,

해변과 사막, 산맥과 평원,
그대 집과 거리와 정원을 순례하였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인류의 지성이 낳은 창조물을 볼 때,
악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선인을 볼 때,
그대 맑은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볼 때마다
요동치는 심장을 주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웃음을 주고 울음도 주니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 재료인
즐거움과 고통을 구분할 수 있네.
당신들의 노래는 바로 하나의 노래이고
모든 이의 노래가 바로 나의 노래라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el alto cielo su fondo estrellado,
y en las multitudes el hombre que yo am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oido que en todo su ancho,
graba noche y días, grillos y canarios,
martillos, turbinas, ladridos, chubascos,
y la voz tan tierna de mi bien ama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cedario,
con é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ru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es cansados,
con ellos anduve, ciudades y charcos,

playas y desiertos, montañas y llanos,
y la casa tuya, tu calle y tu pati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el corazón que agita su marco,
c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humano
cuando miro el bueno tan lejos del malo,
cuando miro el fondo de tus ojos claros.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í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y el canto de ustedes que es el mismo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io c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노랫말 번역: 우석균ㆍ정승희

그러나 비올레타 파라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남기고 몇 달 후인 1967년 생을 마감했다. 공연 장소이자 그녀의 거처이기도 했던, 산티아고 외곽의 한 천막에서 스스로 머리에 권총을 쏘고 분신과도 같은 기타에 엎어져 쓸쓸하게 죽어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생에 감사해>는 비올레타 파라가 자신이 상실한 모든 것들을 담은 노래라고. 그녀가 당찬 삶을 선택했기에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는 뜻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1917년 칠레의 산 카를로스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인생은 출발부터 고단했다. 아버지는 악기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한량이어서 가계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노래를 잘해 때때로 마을 잔치에서 노래 품을 팔던 어머니가 이에 질색하여 자식들이 기타를 만지는 것을 금했을 정도였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식이라고는 큰아들뿐이었다. 그 덕에 큰아들은 칠레를 대표하고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바로 반시(反詩)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이다. 반면 나머지 동생들은 처음에는 잔돈푼이나 받는 재미로, 나중에는 가세가 기울어 거리와 식당과 열차 등을 돌아다니며 노래 동냥을 해야 했다. 니카노르 파라는 평생 이에 대해 미안해했다. 특히 비올레타의 천부적인 끼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죽자 제일 먼저 비올레타를 산티아고로 불러올려 어떻게든 학교를 다녀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니카노르 파라 자신도 가난한 고학생 처지라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국 비올레타는 아홉 살 때부터 익힌 음악으로 밤무대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비올레타 파라에게는 덧없는 세월이었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비올레타 파라는 민속음악을 보존, 재창조,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가슴 한 구석이 늘 허전했다. 그러다가 니카노르 파라의 권유로 1953년부터 민속음악을 채집하면서 그녀의 삶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비올레타 파라는 공책과 연필만 달랑 들고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혼자서 칠레대학 민속연구팀보다 더 많은 노래를 채집하는 억척스러움을 발휘했다. 1953년은 또한 그녀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해이기도 하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잊혀져 가던 민요가 비올레타 파라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감격에 찬 청취자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이 감격의 순간을 회고하며 비올레타 파라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진짜 인생은 서른다섯 살이 넘어야 시작돼요.”라고.

1955년 민속 부문에서 칠레의 예술 대상인 카우폴리칸 상을 수상했을 때, 비올레타 파라의 삶은 평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녀의 열정이 너무나 컸다. 폴란드에서 국제민속대회 초청장이 날아들자 비올레타 파라는 주저 없이 유럽행을 선택하였다. 칠레 민속음악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겠다는 포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얼마 후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9개월짜리 딸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비보를 접한 비올레타 파라는 그 아픔을 달래려고 미친 듯이 음악에 몰두하지만, 이런 행동이 결국은 두 번째 이혼의 발단이 되었다.

비올레타 파라의 유럽 생활은 궁핍함의 연속이었으나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파리에서 <칠레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 성격의 음반을 취입하고, 인류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르 박물관 부속 전시실에서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했다. 또 영국에서도 방송에 출연하고 BBC방송국 자료실에 자신의 노래를 보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올레타 파라가 최종적으로 칠레로 돌아온 것은 ‘파라 페냐’(Peña de los Parras)가 문을 연 다음이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 파라와 앙헬 파라가 파리의 상송 카페에 영감을 얻어 1965년 산티아고 시내에 연 라이브 카페다. 페냐는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성과 서정성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한 노래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의 모태가 되었다. 뒤늦게 유럽에서 돌아와 카페의 성공을 두 눈으로 목격한 비올레타 파라는 가슴이 설레었다. 드디어 칠레 사회가 전통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녀가 자살한 장소에 천막을 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속음악의 전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내디딘 그 발걸음은 비올레타 파라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렸다.   산

티아고 외곽까지 일부러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약속된 구청의 지원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파라가 삶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생에 감사해>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살아보지 못한 삶에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쨌든 <생에 감사해>는 이미 희망과 사랑과 건강을 잃은 비올레타 파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비올레타 파라로서는 처절한 순간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킴으로써 노래꾼다운 죽음을 택한 셈이다.

<생에 감사해>는 아르헨티나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와 미국의 포크가수이자 저항운동가인 존 바에즈(Joan Baez)가 부르면서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명곡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생에 감사해>를 즐겨 부른 것은 단지 곡의 내력이나 비올레타 파라의 치열한 삶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전 세계 사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분명 민속음악으로 음악의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빅토르 하라(Víctor Jara) 같은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들에게 대모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 음악의 도시화를 추구하고, 칠레 음악의 국제화를 시도하고,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음악 전통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안데스 전통 악기와 선율을 내세워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인티 이이마니(Inti Illimani) 같은 칠레 그룹의 존재는 비올레타 파라의 선구적인 실험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전통과 도시와 국제성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비올레타 파라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그녀의 음악 경향을 구분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전통 음악에 더 가깝다. 그러나 <생에 감사해>를 비롯한 몇몇 곡들은 선율도 노랫말도 모두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만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생에 감사해>가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명곡으로 꼽히는 것이다.

칠레인들에게는 <생에 감사해>가 아주 특별한 곡이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칠레 사회는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삶은 형편없이 쪼그라져 들었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 희망의 노래가 바로 <생에 감사해>이었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실종된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혹독한 탄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의 희망을 부여잡으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생에 감사해>는 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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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다, 가을의 씨앗

  • 등록일
    2009/09/26 14:40
  • 수정일
    2009/09/26 14:40

 

울 동네 얕트마한 뒷동산을 오르는 계단옆에

다 자란 해바라기, 씨앗을 품었더군요.

 

그 씨앗을 심으면 내년 가을, 이맘때

활짝 핀 노오란 해바라기를 다시 볼 수 있겠지요.

 

낮은 하늘을 휘휘 날아다니는 붉은 고추 잠자리들

잠자리가 밥이 되는 제비와 참새들도

가을 하늘의 품안에서 날고

 

길가의 땅은 간만에 마실 나온 우리집 강아지

똘똘이가 싸 놓은 말랑말랑한 똥을 품었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에 품은 알콩 달콩한

생각의 씨앗들

 

넓고 아득한 세상의 품안에서

돌돌돌 굴러가다 제자리를 찾으면

좋겠어요.

 

울 동네 얕트마한 뒷동산을 오르는 계단옆에

고개 숙인 해바라기

씨앗을 참 많이도 품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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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 등록일
    2009/09/05 03:54
  • 수정일
    2009/09/05 03:54

 

슬픔이 기쁨보고 진지하게 물었다.

 

너는 행복하냐고.

 

진정 행복하냐고

 

 

그래 그랬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랑 느끼는 감정이 아마도 비슷할거라고.

 

아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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