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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29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1)
    금자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

"소설가 까뮈가 좋아하는 풍경은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전철 안, 노석미의 스프링 고양이,194쪽, 바로 이 부분을 읽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마음 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정다운 무관심,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잠시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을 역시 '잠시'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잠시'가 그저 영겁의 시간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내고 그 사이사이  언제 갈 수 있을지 시계를 보고 속으로부터 치미는 짜증을 참다가 조금 내어도 보았다가, '이러면 안되지'쯤의 마음으로 짬짬히 감정노동도 하였다.

 

아빠는 내게 이력서를 좀 써 보라고 하였다.
나는 언짢은 표정으로 "전 지금 다니는 곳이 좋아요"라고 했다.
친척들의 결혼식에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해서
내 직장을 내가 계속 다닐지 말지 간섭받아야 하냐구요.

 

엄마는 "아, 너보다 4살 어린 **도 결혼했는데 우리 딸은 언제나 결혼할랑가"
라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중얼거렸다.

엄마, 엄만 도대체 미적 감각이 있냔 말이요,

6쌍의 쌍쌍구리가 동시에 한 예식장에서 찍어내듯이 결혼하는, 이 촌스럽고 공장같은 곳을 보면

하루쯤은 결혼식 생각이 진절머리 날텐데.

 

엄마와 아빠는 의젓하게 취직해서 자기 몫의 차를 몰고온 어린 친척들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빠는 말했었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바는 단지 부모가 서울나들이라도 오면 니가 니 자동차를 끌고 나와 부모한테 서울 귀경을 시켜주는 것이다"
서울로 대학과 대학원을 꼬박 보내준 부모에게 참 미안했다.
그래도 새삼스럽게 무슨 서울 귀경이란 말이더냐. 
부모님이 젊은 언니, 오빠 시절에 오랫동안 서울에 사셨던 것을 내 다 알고 있다

.

내가 힘든 것은,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길에 '정다운 무관심'을 보고 눈물이 났던 것은,
그들이 그저 짠, 해서였다.
그것조차 못 해주는 자식으로 미안해서였다.
자식의 '그것'조차 인정해주지 않고 끝까지 자기 식대로만 사랑하려는 부모가 미워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단지 그들의 허영심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아서였다.

엄마는 잠시 입원해있을 때
죽을 병도 절대 아닌데 괜시리 죽을 사람처럼
자기가 죽으면 내가 자식 중에 제일 불쌍해서 어쩌냐고 했다.
반지하방에 사는 부동산 제 6계급의 막내딸이자 아파도 (돈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서적으로 돌봐줄 '남편'이 없는 '노처녀'.

 

우리는 잘못 사랑하고 있다.
이토록 사랑받고 사랑하는데 우리 사이에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이해받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 난무난무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가 그저 '레밍턴 스틸'과 '전국노래자랑' 같은 것이면 좋겠다.

내가 어릴 적 우리집은 텔레비가 한 대였는데 같은 시간에 하던 레밍턴 스틸과 전국노래자랑 때문에

엄마 단독 전선 vs 언니와 나의 연합 전선이 치열하게 맞붙었었다. 난 지금도 전국노래자랑 BMG가 싫다.

 

'정다운 무관심'이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흘렀다면,
엄마의 '객기부리기용' 자식은 될 수 없다해도
내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 얼마나 행복한지 말할 수 있을텐데.
아플 때 누구보다 날 잘 돌봐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난 많이 사랑받고 있고 많이 사랑하고 있다, 는 것을 알면
엄마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 테니까.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인채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 오는 길은
쌍팔년도 신파극처럼 나도 짠헸고 그들도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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