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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30
    농성장, 밤샘, 민주주의(5)
    금자
  2. 2009/01/17
    자본주의와 효도의 상관관계 (2)
    금자
  3. 2008/10/22
    비온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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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09/29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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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8/08/16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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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06/01
    결혼식 대신 스윙댄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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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05/26
    시만단체, 진짜 주 5일인 거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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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05/17
    임시보호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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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05/03
    불편한 관계, JIF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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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3/07
    집이야기가 연애이야기로 깔때기 되는 순간(3)
    금자

농성장, 밤샘, 민주주의

조계사 앞에 세워진 '운하백지화 국민행동' 농성장 천막에 앉아 차소리를 부릉부릉 들으면서,

옆에 있는 생태지평 활동가들이 보는 '선덕여왕'의 소리를 들으면서, 거리에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훈련을 혹독하게 하고 있다. -_- 

 

천막 22일째라는 농성장을 '운하백지화 국민행동'에 참여하는 환경단체들이 돌아가면서 지키고 있는데

단체도 몇 개 안되고, 활동가 다들 무슨 프로젝트네 뭐네 하는 실무도 그대로고, 농성장에서 자도

다음날 사무실에 나가 일해야 하니까, 농성장에 누가 나와서 잠을 자는가는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요, 계륵이요,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이다. 

비정하게 돈으로 치자면 내 기준으로는 한 20만원 쯤 주면 할까말까한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천막 농성장, 오늘로 22일째>

 

 

더군다나 지난 주 금요일에 내가 일하는 단체가 당번이었고 그 다음날인 토요일에는 범국민대회가 있어

새벽부터 저녁 6시까지  땡볕 아래에서 시청광장에 붙박이로 있어야 했기에 오늘 당번은 참으로 거시기했던 것이다. 

 

이러고 자시고 간에, 나는 조계사에 오는 길바닥에서 같이 일하는 활동가와 엄청 싸웠다. 

좀 얌체 같아서, "아니, 금요일도 농성장에서 안 자고 토요일도 아예 못 나오면 어쩌겠다는 거냐"

라고 강짜를 부렸다가, 왕 크게 싸웠다.  

어린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  시부모와 함께 살아서 시간제약이 있는 사람, 몸이 안 좋은 사람, 집에 문제가 있어 

일찍 가봐야 하는 사람 등을 빼고 나면 남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그리고 그 남는 사람들이 농성장의 밤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자지 않은 반면, 어떤 사람은 몇 번을 잔다. 

 

사람은 다양하고, 사정도 다양하고, 각 개인마다의 일정도 다 중요하고, 

그것을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다양성의 밑감이라는 것,

그래서 소수자 할당제도 하고 산술적인 평등이 아니라 사정을 고려한 형평성이 중요하다는 것,

그런 것을 알지만 말이다. 

동성애자나 장애인 이슈 등 현재 내 일상과 뭔가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

추상적으로 외쳐야 하는 다양성은 쌍수들어 환영하지만 말이다.

 

내가 뭔가 손해를 봐야하는 다양성은 너무 힘들다. 

사회적 양육, 돌봄 노동을 그리 많이 읽었지만 어쩔 때는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싸운 활동가는 아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금, 토요일을 못 나온다고 했는데 사실 그게 얌체처럼 느껴졌다. 화가 났다.

나도 개인 사정은 많다, 는 말이 목구멍을 치려고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다양성이고, 어디까지가 '20만원 알바'라도 할까말까 고민이 드는 일을 감내해야 하는 다양성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4대강 죽이기 막는 활동은  '지더라도 해야만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여기 와서 자원활동할 수도 있는 거지만, 지금 그 차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니깐.)  

그 사람에게도 개인 사정은 참으로 절박했을 것이다. 

그 날만은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 배려받는 것만큼 배려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빠진 공백을 누군가가 메워야 하고 그게 내 몫이 되었을 때에는 다양성이고 뭐고 자시고 간에 

길바닥에서 소리쳐서 싸울만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명박이가 민주주의를 다 말아먹었다'고 그 사람 욕을 밤이고 낮이고 간에 들입다 했는데

오늘 농성장에 앉아 민주주의, 나도 말아먹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  

   

 

<농성장 물품 준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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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효도의 상관관계

오랫만에 친구들, 만났다.

나의 전 룸메들, 전전 룸메들, 그리고 그들과 내가 함께 살았던 불광동과 상도동을 둘러싸고 자기들도 덩달아 '룸메'마냥

그 자장 안에 머물렀던 친구들이 모두 만났다.

 

달순의 말대로 '마음 속 안면' 이 있는 우리들,

휴지 말대로 '설명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설득시키려 진땀빼고,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프리~'한 친구들,   

이혼 후에 홀로서기 하던 휴지와 (예전에는 혼자 죽는게 무섭다고 하드만,인쟈는 자기 환갑이 을매 안 남았다며

우리더러 그 날 재롱 좀 떨고, 자기 제삿날에 다들 모이라고 하네.) 

세상에는 자기 똥 닦을 줄 아는 인간과 그걸 남이 해결해줘야 하는 여섯살 이하,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며

여섯살 날 성현이를 '이류 시민' 취급하던 철 없던 비혼, 금자와 기묘,

그런 금자와 기묘 VS 성현이 사이의 묘한 기류를 쿨하게 내버려 두던 성현이 엄마, 오정,

그들과 한 건물, 같은 층에 있는 옆 집에 기거하는 죄로 수시로 살림을 약탈당하던 '박사 부부' 미물과 앙,

(살림 뿐이냐, 여름에 그 집에서 어쩌다가 에어컨만 켰다 하면 우루루 몰려가 바로 거실 점령.) 

그리고 그 집의 게스트들, 조, 하영, 달순, 민영.   

 

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뇌 속에서 세르토닌이 마구 분비되면서 행복지수가 팍팍 올라간다.

 

휴지는 요새 미국의 미혼모 지원재단의 한국인 코디네이터로서 일한다.

이혼한지 5년도 넘은 휴지더러 매해 신년 덕담으로 "조신하게 *서방을 기다리면 곧 돌아온다"는 말로 휴지를 환장하게 만들고

"인류학이 학문이냐, 아들이냐 키워라"는 말로 휴지의 존재를 깔아뭉개던 그 아버지께서,

요새 그녀를 월남전에 나가 장렬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역군의 용사' 취급을 하신다.

 

해외 재단에 고용되어 외쿡인과 솰라솰라 하면서 달러로 월급 받고,

'경박스런' 장사도 아니고 '학문'해서 그걸 바탕으로 '좋은' 일 하는 딸년이 마구 자랑스러워진 게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살아생전 한 번은 이럴 때도 있는 거지라고 넘어가기에는,

그렇기에는, 정말이지 촌스러워서 짜증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혼하고, 보따리 시간 강사하고, 자투리 번역에 프로젝트 하고, 어린 친구들과 함께 살고, 그럴 때도 지금의 휴지였고, 하는 일은 까놓고 보면 다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인데,

버는 돈의 액수가 달라지니 이혼도 뭐고 다 정리된 거다. 역전.

그래서 요새 휴지는 '후지는' 효도 이빠이 하고 있다. 그래서 술 먹고 '마음 속 안면'이 있는 친구들 앞에서 부모에게 화 낸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라면 내가 또 휴지에게 질 쏘냐.

자식이 자기 삶을 감당하다면, 자유의지로 그것을 선택하고 책임진다면, (최저임금을 받아도 내가 받는 건데 왜 그러시는지,참)  

그 선택이 부모가 보기에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지지는 못해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정하는 것이 

다 큰 자식과 부모 사이의, 어른과 어른의 관계이거늘,

나에게 자기 결정권이 있다는 자체를 부정하는 우리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집에 전화하는 것도 나에게는 부담 팍팍이다.

사랑한다는 말로 인간 사이의 예의가 사라진 관계, 가족.

나도 알고 있다,

이것을 뛰어넘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던지, 아니면 시장에서 인정받아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어오던지,   뭐 둘 중 하나다.

자기들 잘 먹고 살라고 그런거 아니고, 정말이지 나를 사랑하여 하도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 50% 이상인 것도 알겠다.

한데 그 감당, 당사자인 휴지와 내가 하는 거다. 독거노인 돼서 '그 때 부모 말 들을걸' 하는 것도 다 우리 몫이다. 

찌질한 인생보다 더 갑갑한 게, 그럴까봐 부모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하고 싶은 거 못하는 거다, 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이런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를 다시 한번 못 박은 것은 휴지 아버지의 한 마디였다.

휴지가 너무 자랑스러운 나머지, 2009년 새해 덕담으로 휴지더러 정말 '좋은'일을 한다면서

"적어도 미혼모들은 깨끗하지 않는냐, 이혼한 사람들처럼 서류가 더럽지는 않다""라고 가라사대.

행정학 박사이신 휴지 아버지께서는 서류상 빨간 줄 없이 '깨끗한' 미혼모들은 충분히 도와줄만 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그래서 엉겹결에 요새 효도하고 있는 휴지, 신년 밥상머리 앞에서 외쳤다.

"아버지, 저도 깨끗해요, 깨끗해!"

 

자본주의와 효도의 상관관계, 거 무섭다 해도

뛰어넘지 못한 선, 결국 있는 거였다.

그래서 신년 밥상머리에서 아버지 말씀에 '버럭'하면서 불효를 저지른 휴지처럼, 나도 부모가 원하는 효도는  어찌해도 도리 없다는 신념만 얻었다. 주발이는 '노친네들, 어쩔 수 없어, 니 맘대로 살어'라고 도장 팍팍 찍었다.

 

김어준 말대로,

부모의 기대가 정당하든 않든, 그에 부응치 못한 거, 미안해 하는 건, 옳다. (나도 충분히,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 (건투를 빈다_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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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다

비온다. 오늘 하루 종일, 그리고 지금 이 밤.

 

4월부터 11월까지 밖에서 키우는 식물들은 거의 손이 안가도

자연이 다 키워준다.

나는 무용지물이고 -_-;;; 알아서들 '쑥쑥이'가 되어간다. 특히 여름.

그 놈들은 밖에만 있었을 뿐인데 여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담뿍 자라서 겨울에 안으로 가져다놓으면,

실내공간을 다 잡아먹는다.

 

그런데 요새 비가 안와서 한 동안 직접 물을 주는 '손'이 되었다.

손바닥만한 땅뙈기도 아니고 화분 몇 개 키우는 나도 이런데

농사짓거나 흙을 가까이 느끼거나, 혹은 목이 타서 힘들었을 식물들은 오죽했을까.

 

도시에서 자란 나로써 '날이 가물다'라는 것을 몸이 기억하는 것이 용하다.

반짝반짝하는 관계들만큼이나 반짝반짝하는 날씨맑음을 좋아하는 나인데도

오늘 비가 와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오월에 키운 상추 이파리, 쫄면을 해 먹으면서 슥싹 따다 먹었다.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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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

"소설가 까뮈가 좋아하는 풍경은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전철 안, 노석미의 스프링 고양이,194쪽, 바로 이 부분을 읽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마음 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정다운 무관심,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잠시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을 역시 '잠시'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잠시'가 그저 영겁의 시간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내고 그 사이사이  언제 갈 수 있을지 시계를 보고 속으로부터 치미는 짜증을 참다가 조금 내어도 보았다가, '이러면 안되지'쯤의 마음으로 짬짬히 감정노동도 하였다.

 

아빠는 내게 이력서를 좀 써 보라고 하였다.
나는 언짢은 표정으로 "전 지금 다니는 곳이 좋아요"라고 했다.
친척들의 결혼식에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해서
내 직장을 내가 계속 다닐지 말지 간섭받아야 하냐구요.

 

엄마는 "아, 너보다 4살 어린 **도 결혼했는데 우리 딸은 언제나 결혼할랑가"
라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중얼거렸다.

엄마, 엄만 도대체 미적 감각이 있냔 말이요,

6쌍의 쌍쌍구리가 동시에 한 예식장에서 찍어내듯이 결혼하는, 이 촌스럽고 공장같은 곳을 보면

하루쯤은 결혼식 생각이 진절머리 날텐데.

 

엄마와 아빠는 의젓하게 취직해서 자기 몫의 차를 몰고온 어린 친척들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빠는 말했었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바는 단지 부모가 서울나들이라도 오면 니가 니 자동차를 끌고 나와 부모한테 서울 귀경을 시켜주는 것이다"
서울로 대학과 대학원을 꼬박 보내준 부모에게 참 미안했다.
그래도 새삼스럽게 무슨 서울 귀경이란 말이더냐. 
부모님이 젊은 언니, 오빠 시절에 오랫동안 서울에 사셨던 것을 내 다 알고 있다

.

내가 힘든 것은,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길에 '정다운 무관심'을 보고 눈물이 났던 것은,
그들이 그저 짠, 해서였다.
그것조차 못 해주는 자식으로 미안해서였다.
자식의 '그것'조차 인정해주지 않고 끝까지 자기 식대로만 사랑하려는 부모가 미워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단지 그들의 허영심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아서였다.

엄마는 잠시 입원해있을 때
죽을 병도 절대 아닌데 괜시리 죽을 사람처럼
자기가 죽으면 내가 자식 중에 제일 불쌍해서 어쩌냐고 했다.
반지하방에 사는 부동산 제 6계급의 막내딸이자 아파도 (돈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서적으로 돌봐줄 '남편'이 없는 '노처녀'.

 

우리는 잘못 사랑하고 있다.
이토록 사랑받고 사랑하는데 우리 사이에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이해받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 난무난무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가 그저 '레밍턴 스틸'과 '전국노래자랑' 같은 것이면 좋겠다.

내가 어릴 적 우리집은 텔레비가 한 대였는데 같은 시간에 하던 레밍턴 스틸과 전국노래자랑 때문에

엄마 단독 전선 vs 언니와 나의 연합 전선이 치열하게 맞붙었었다. 난 지금도 전국노래자랑 BMG가 싫다.

 

'정다운 무관심'이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흘렀다면,
엄마의 '객기부리기용' 자식은 될 수 없다해도
내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 얼마나 행복한지 말할 수 있을텐데.
아플 때 누구보다 날 잘 돌봐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난 많이 사랑받고 있고 많이 사랑하고 있다, 는 것을 알면
엄마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 테니까.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인채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 오는 길은
쌍팔년도 신파극처럼 나도 짠헸고 그들도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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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아

기묘가 중국의 교환학생을 끝내고 들어와 내 방에 잠시 머물고 있다.

중국 공산당 서열 108위 쯤의 '짱골라' 아들내미를 만나서 결혼소식을 팡팡 터뜨리며

우리에게 중국행 비행기표를 선사하라는 말도 민망하게,

연애 한 번 안 하고 한국으로 들어와버린 것이다.

 

그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아.

 

기묘 덕택에 그동안 게으름에 파묻혔던 못 보았던-실은 연애질에 매진하느라,(컹컹,친구들, 자네들도 그랬잖은가-_-;;;)-

휴지, 미물, 달순, 오정, 성현 등을 만나고 있다.

오랫만에 보았더니 새삼 너무 좋아서,

아 나는 인복이 철철철 넘치는 사람이라서 '88만원' 세대쯤이야, 하는 미친 마음이 되었다.

대체 88만원 월급과 인복이 무신 상관관계란 말인가.

그저, 돈어 없어서 어쩔 때는 과일 사 먹는 것도 저어되는, 참으로 추레한 삶이지만

친구들 때문에 참 좋다, 라는 이런 착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보지. ㅋㅋ

 

기묘와 자기 전에 불 꺼 놓고 이래저래 이야기 하고

말똥만 굴러가도 웃다 쓰러진다고, 웃고 자지러지느라 침대보를 엉망으로 헝클어놓아도 친구와 있어서 참 좋다.

아침에 같이 일어나 밥도 같이 먹고 물통에 물도 척 하니 싸가고

밤에는 또 얼굴을 보니,

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서울 타지 생활을 하면서도 남들과 함께 사는 것을 그렇게 좋아라 했는지 감이 왔다.

 

암튼 요새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블로그는 참 오랫만에 들어와 봤다.

행복하니,

뭔가 적고 싶은 기분이 도통 들지 않았던 것일까.

 

자랑질이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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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대신 스윙댄스!

31살,

결혼식에 불려나가고 결혼 안하냐고 채근당하고 결혼하는 친구들과 거리가 생기고.

비혼일지라도 결혼, 결혼에 연루되는 나이.

 

중국에서 공부하는 기묘가 친구 결혼식 때문에 잠깐 한국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공무원 결혼이 젤 좋더라, 아주 둘 다 공무원인데 초 간단 식으로 빨랑 끝내더라고, 공무원 그거 하나 좋드라"

공무원과 초간단 결혼과의 상관성은 모르겠지만

친구 결혼식마저 초간단해서 좋을만큼 결혼식은 대개 지루하고 지겹다.

주발이는 웬만하면 돈으로 때우고 정말 축하해주고 싶은 친구의 결혼식만 간다,고도 했다.(난 돈이니, 시간이니?)

나는 무쟈게 사랑해도 결혼식 야외촬영을 고집하는 인간이라면 그 결혼 물리고 말만큼 신혼부부 거실벽에 붙은

결혼식 사진이 싫다. 그리고 결혼식은 그 결혼사진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똥파리 쯤으로 여긴다.

차라리 일본처럼 하객들 모두 엄청 멋내고 드레스 입고가면 조금이라도 룰루랄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드레스 사려고 쇼핑구 다니면서 돈 쓸 생각을 하니 것도 손사래질 쳐진다.

 

또 어쩌고 저쩌고 남의 결혼식에 연루되는 일이 생겨서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 있었더니

"너라면 어떻게 결혼할건데?"라는 질문이 들어왔디.

"흠, 난 비혼으로 살건데" 가 답이지만 이러면 대안도 없이 무능한 꼴통페미 -_-로 오해받을까봐

 만약 파트너와 함께 동거식이라도 한다면, 라고 바꿔 생각해봤다.

 

결혼식 야외촬영 할 에너지와 시간과 돈으로

같이 살 사람이랑 친구들과 스윙댄스를 배워서 야외에서 춤추고 맛난거 먹고 싶다.

(살사, 탱고는 나한테 너무 느끼혀)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스윙 초보 '지터박'을 배우고 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이 지루박이냐고 물어보는 너에게

아냐, 지터박이야, 라고 했는데 인터넷 검색했더니 현장용어로는 '지루박'이 맞았다.

뭔들, 좋아, 우리는 지루박 차차차.

더 많이 배우거나 바에서 화려하게 춤추거나 간지가 안나도 좋아.

그냥 너랑 손잡고 좋아하는 노래 한 곡 따라서 스텝만 맞으면 돼.

유럽 여행이라도 같이 가게 되면

저녁식사 자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이 밥 먹다가 일어나

가볍게 춤추고 다시 앉아서 차 마시는 곳 같은 데서 나도  너랑 가볍게 스윙 저터박 한 번. 

 

 

너랑 같이 살든 못 살든, 고잉 온 하든 깨지든, 동거식을 하든 못 하든,

너와 함께 결혼식보다는 스윙댄스를 배우는 지금이 좋아.

 스텝 스텝 라아~ 스텝,  결혼하는 커플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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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만단체, 진짜 주 5일인 거니?

시만단체, 진짜 주 5일인 거니? 

믿을 수 없어.

시민단체들이 주 5일  문구를 채용 조건에 써 놓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라는 생각이 마구 든다.

허위, 과장 채용 광고로 노동부에 제소할까보다.

 

3월 여성의 날부터 시작하여 지구의 날, 공정무역의 날, 태안 방제활동, 대운하 반대 행사 등등

행사가 끝나고 하루 종일 서 있어서 허리가 찌르르하는 느낌을 부여잡고 집에 돌아오면

설겆이 통에는 그릇이 쌓여있고

방바닥에는 먼지가 구릅처럼 뭉쳐 떠 다니고

아침에 쓰고 던져놓은 수건이 먼지 구름들 옆에 뒹글고 있고

냉장고 안에는 며칠 동안 해 먹지 못해 시들해진 야채나 허연 곰팜이가 끼여있는 버섯.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50주의 주말을 통으로 가져다 바쳐서

대운하 폐지 선언이 으랴차차, 터져 나와도

나는 이런 냉장고를 청소하면서 음식 재료들을 싹쓸어 쓰레기통에 쳐 넣으면서

행복할 거 같지는 않다.

 

5월 24일,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행사로 서빙고 역에 아침 8시 도착했다.

토요일 아침 6시 일어나는 것이 나름 억울해

모여있는 다른 단체 활동가들에게

토, 일요일 근무를 하면 평일에 대체휴무를 쓸 수 있는냐고 물어보자

그런 건 없다는 대답과 있어도 일이 많아서 못 쓴다, 라는 대답을 들었다.

도체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과 대체휴무는 영 모른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어서

같이 침 튀기고 피를 토함시롱 단체 욕을 하거나, 

것도 거시기하면 이렇게 아침부터 오두망정을 떨게 만든 이메가 욕이라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들 환경운동을 열심히 한 각고의 세월 끝에 욕망마저 사그라든 성인군자의 세계, 극락의 세계, 도의 세계에

진입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도가 통하지 않는다.

 

플랫슈즈를 흔들면서 카페에서 허섭한 책도 읽고, 음식물 쓰레기는 말린 후 잘게 썰어 텃밭거름으로 만들고,

블로그 글도 쓰고, 진보넷 집들이도 놀러가고, 비혼 축제도 느긋이 즐기고, 가만히 빈둥빈둥 나인채로 있고

나 사용기도 적어보고, 친구네 냐옹이 채식 간식도 만들어주고,

그런 것들을 하면서 주말을 보내고 싶다.

 

 평일에는 이걸 하다가 이걸하고 저걸하고 하고하고 ,이멜 보내고 이걸 하고 돈계산하고 하고하고, 마구 복잡하다가

 주말에는 다시 일하니 

 왜 시민단체에서 일하는지,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왜 하고 있는지

 그런 거를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다.

 

 단체에서 일하는 주제에 욕심도 많다라든지,

 일반 직장인들은 더 죽을둥 살둥 일한다든지

 그런 말은 위로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기쁘게 일하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고 내가 일을 어떻게 꾸리고 싶은지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느 날 일이 없는 주말 아침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하는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있는 생활은 싫다.

 내 삶에 마구 드드드드드, 대운하가 건설되고 있는 중이다.

 플러그를 뽑고, 한 박자 천천히.

 내가 일하는 단체의 슬로건이지만, 그래서 더욱 쾌씸하다.

 천천히, 가고 싶다.

 사랑도, 관계도, 잡스러운 것도 이 세상의 모든 러블리한 것들 중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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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보호처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광우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멋쟁이, 라고 봐주기는 커녕 -_-;;;

까칠하고 까탈스럽고 성격 모난 사람의 취급을 받는다.

혹은 브릿지도 바르도 흉내를 내는 동물 애호가로 생각된다.

 

나는 정확히는 채식주의자라기보다는, '고기 공장'에 반대하는 반(anti)육식자로 조개도 먹고

간혹 남들이 남긴 고기도 주워 먹는다.

 

그리고 멍멍이도, 냥이도 키우지 않는다.

간혹 섹스도 피곤해서 못 해 먹겠는, 나 하나 추스리기에도 바쁜 인간이라서 그렇고,

멍멍이나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니며 소녀적 취향을 낭만적으로 간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싫어서 그렇다.

 

그런데

요새 유기견과 유기냥이에게 관심이 간다.

유기 동물을 보살피는 것이 고양이와 테이블에서 홍차를 나눠 마시거나

멍멍이와 네일 케어를 받는 것처럼 '호사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사진의 어진이는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고, 먼 길을 돌아 주인을  찾아왔다가 다시 버림을 받았다.

다시 버릴 때는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2층 아래로 개를 집어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진이는 구조될 당시 뒷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버티도 새끼 때 버려져 한 겨울을 혼자서 살아남은 멍멍군이라고 했다,

 

잠깐, 입양을 생각했지만 혼자 살고 바쁘고  집에 잘 붙어있지도 않고

개 사료 살 돈을 털어 신발을 기여이 사고 말 (이후 찬밥으로 개밥 만들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겠지)

나에게 그건 참 이기적인 것 같아 관뒀다.

 

멍멍이를 돌보고 계신 분께

유기견들 임시보호는 할 수 있다고 하고 마음을 접었다.

 

이제, 멍멍이들과 냥이들은 임시보호하고

그 동물들을 맡아줄 사람들에게 반육식을 권하는 활동으로 

온갖 귀여븐 동물 사진으로 불싸질러진 이내 마음을 수습해야 쓰겄어.

 

p.s

광우병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30개월 이하의 소' 같은 말 말고(병 걸리기 전에 소를 빨랑 잡으라고?) 

공장식 축산업에 반대하는 피켓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어진이와 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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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관계, JIFF

난 전주영화제에 놀러나와 있다. 자랑질이다.

썬그라스를 연신 쓰고 다녀도 '간지'보다는 햇빛을 피하려는 진정성이 더 느껴질만큼 날씨도 뜨겁다. 에헤라디야~~

('간지'용이다, 실은)

금요일 휴가내고 노동절인 목요일부터 내리 놀고 있다. 에헤라디야~~자진방아를 돌려라.

느껴지는 바대로, 팔자 좋은 년이다.

특히 기혼녀들에게는 정말 팔자 좋은 년이다.

 

나와 같은 팀의 혜진은 휴가내고 전주 간다는 내 옆에서 징징대면서 말했다.

"나는 한참 농사 바쁠 때라서 시댁인 전라도 고흥까지 내려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 말을 도돌이표 했다.

뭔가 조금 억울하고, 휴일에 놀러다니는 비혼이 좀 부럽기도 하고, 고흥은 너무 멀고, 그래서 가기는 진절머리 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의 체념도 약간 섞인 그런 표정이었다.

 

이봐, 나는 게이랑 위장결혼하지 않는 한,

받지도 못할 축의금을, 그리고 피같이 애지중지한 휴일을 털어서 니들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곤한다고, 이라는 말이 느자구없이 터져나올 뻔 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낮은 출산율이라는 거국적인 문제를 가져오는 주범에

수유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서 유방암 걸릴 가능성이 더 많다는 기사에 두려워하고, 그런다고.

이렇게 국제영화제에 팔랑팔랑 놀러다니다보니 생명보험 하나 안 들었는디 말이쥐.

 

하지만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도 고흥 가기 싫은 한 기혼녀의 사정에 공감했으며

무엇보다도,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생각될만한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싶었다.

혜진은 나보다 4살 어리다. 그리고 자알 결혼했다. 남편이 아파트도 샀다. (크헉, 이게 젤 부러) 

거기다대고 비혼녀 운운하면 남들이 나를 인생의 루저, 찌찔이처럼 여길 것이고, 진짜 '노처녀'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집에 놀러와

자기 친구 중 결혼도 잘하고, 남편도 잘 만나고, 재테크도 나름 성공하고, 아이들도 예쁘게 크고 있는데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친구 이야기를 하자,

'노처녀 히스테리'를 왕빵 부렸다.

그 이야기를 한 친구가 우울증에 걸린 결혼 잘 한 여자라도 된 듯 마구 삿대질까지 해 댔다. 

오바, 했다. 열내다가 갑자가 정신을 차리고 족팔려서 뻘쭘했다.  

"넌 애인이 있어도 어째 노처녀 히스테리가 걸리냐?"라고 내 친구가 수상스레 쳐다봤다.  

"배째라, 난 '꼴통 페미'에 노처녀 왕 히스테리야" 라고 대꾸했다.

뭐 꼴리는 대로 대답했지만

나도 궁금했다.

나, 노처녀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야?

내가 왜?

아파트 때문에??

믿을 건 차곡차곡 모아둔 돈 밖에 없는 비혼여자 주제에 골드미스는 커녕 실버미스도 감지덕지한

'친환경 스댕(steinless)' 미스라서???

 

나는 마치 부르조아를 타도하는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투사가 된 것처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삼시롱 나름 생의 고통에 시달리고 자신의 자유가 메말라가고 있다고 비통해하는

모든 기혼녀들이 미웠다.

미워요, 미워. 것도 왕창으로다.

내가 남편이 사준 아파트와 가져다주는 월급을 포기하고  '도시 빈민'  비혼녀가 되는 삶을 선택했듯이

국제 영화제를 싸돌아다니고 인생에 대해서 심오하게 번민하는 이 거시기까지 차지하려 드는 것은,

너무 거시기했다.

하다못해 비혼인 나에게  기혼녀의 처지를 불평하는 것은 그렇다.

인생에는 싸가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억하심정까지 들었다.

요는 내가 남편이 없고 집도 없고 월급도 곱하기 1배이고 암이 걸리면 돌봐줄 인간과 돈도 없이

죽어야만 팔자라고, 불평하지 않듯이

적어도 기혼녀들은 내가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 팔자 좋겠다는 눈빛을 보내서는 안되는 거다.

 

그런데 어제 여기 전주에서  '불편한 관계'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다큐먼터리처럼 아이 둘을 가진 부부의 일상을 소소하게, 일상의 속도로 그려냈다.

베티 프리단이 1963년, '여성의 신비'라는 책에서 중산층 전업주부의 삶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드러냈다면

이 영화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1980년대 헝가리 부부의 표정과 삶으로 그려냈다.

이 흑백영화 속의 삶을 보고 있자니, 고통스럽고 마음이 부딪껴서 

밖에 나가 초여름 바람에 부유하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 마시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알게 되었다.

미국이건, 헝가리건, 1960년대건, 1980년대건,

그리고 여기 2008년의 한국이건,

전업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결혼해 본적이 없지만 

그들의 빈 곳과 불만과 허전함도 비혼녀의 그것과 형태가 다를 뿐임을.

기혼녀를 절절이 미워하면서 여기 내려와서 처음 본 영화가 그랬다.

 

남의 고통에 몰인정해지지 않기,

내 스스로 '친환경 스댕'  미스의 삶을 살갑게 껴 안기.

그리고 기혼녀를 내 불안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기,

결국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기혼녀를 적으로 만든다.

 

나는 전주에서 철이 조금 더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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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야기가 연애이야기로 깔때기 되는 순간

며칠 전 내 연애에 위기를 불어놓은 것은 집주인 아줌마의 푼수 짓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집주인으로부터 "전화주세요"라는 메모를 받고, 이유도 없이 1년 2개월의 계약이 남은 집을 밑도 끝도 없는 '이삿돈'과 '복비'라는 명목 아래 '합법'하게 쫓게나게 되었을 때,갑자기 '막막증'이 뇌수에서 콜라가 터지듯이 펑펑, 흘러넘쳤다. 그냥 나 하고싶은 데로 살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젠체했고, 후회해도 할 수 없다고 마음먹고, 팔자가 그래, 라고 마음 굳히기 한 번까지 했지만 이럴 때는 막막증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갑자기 "'여성환경연대' 다닌다고 하니까 선 들어온 데서 두 번 다 퇴짜맞았어, 볼 생각도 어차피 없었지만 굴욕스러버"라는 은진과 함께 목 놓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은진은 요새 꿈에서 마구 쫓기는 꿈을 꾼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가 목구멍으로 차마 끌어올리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막막증의 정체는 '와세다 1.5평 청춘기에서 훔쳐온 말이다. 아래를 참고하삼 :) 스물다섯 고개를 넘으면 바로 이 ‘막막증’에 걸려버린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막막한 건 사실인데 뭐에 그렇게 막막한지를 모르겠다”라는 것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나도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나 하고픈 대로 하고 살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면 현재에 이렇다 할 불만은 없다. 하지만 뭔가 내 주위에 먹구름이 덮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을 신문기사체로 정리하면 ‘장래에 대한 불안’이 되겠지만 당사자의 느낌은 훨씬 더 복잡 미묘하고 애매하다. (240) 1년 동안 상근가로 일했는데 막상 집을 빼라고 하자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듯했다. 어디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아, 지금도 반지하방인데 쪽방에 기거할 수는 없다고 -_- 나의 룰메양은 한때 방송작가를 오매불망 꿈꾼적도 있어서 그런지 '발리에서 생긴 일' 꿈까지 꿨다고 이실직고 했다. "언니, 키는 조인성보다 작아도 암튼 조인성 같운 스탈의 전무님이 나타나서 하지원한테 오피스텔 사 준 것처럼 나한테 오피스텔 하나 척, 사 준 거 있지" 란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조인성이 아니라 난장이 똥자루라도 오피스텔이면 좋다, 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설을 마구마구 부르짖었다. 윗집 아저씨는 여기 대흥동 17동 토박이인데 2001년에 오천 만원 하던 11평 짜리 집을 안 사고 좀 더 큰 집에 전세로 들어앉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윗 집 아저씨 나이에 비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룰메양과 나, 둘이 사는 집의 평수에 4가족이 사는데 그래서 5천만원이어도 11평 집 대신 그보다 딱 맛밤만큼만 큰 집에 전세를 든 것이다. 암암, 이게 집을 거주권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일반 상식 아니겠삼? 신문사 시험 볼 때 나오는 일반상식보다 더욱 근본을 아는 의미에서의 일반상식이랄까 -_- 그런데 막상 집주인이 집 나가라고 용이 입에서 불을 내 뿜듯이 몰아치고(크헉~~)그 11평 집은 대흥동 전체가 재개발 어쩌고에 걸리자 헹가리치듯 뛰어올라 2억 5천에 육박하니 그 집 안 산게 서러워서 밤에 잠이 안 온다고 했다. 나는 그 옆에서 슴슴하고 물렁한 무나물마냥 "긍께요"만 말했다. 실은 아저씨 나이에 집 걱정하면서 밤에 잠이 안 오는 인생이 되면 상근가로 활동해서 선에서 두번이나 미끌어지는 젊은 날을 왕창 후회하게 될까봐, 그런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연애가 이렇게 절박해지는 지도 몰라. 하루하루 날은 가고, 조선시대의 평균 수명인 33살이 다 되어가고, 뭔가 둘러봐도 뭘 했는지 머릿 속이 새하얗게 되면 달달한 위로가 필요하니까.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 속으로, 상처와 틈새 사이로 뭉클하게 들어오는 진득한 냄새마냥 내 삶을 스캔해주는, 애지중지해주는 관계가 없이는 반짝일 수가 없으니까. 니가 집을 빼라는 집주인도 아닌데 며칠 간 왕 꼬라지를 부리고 니가 제일 싫어하는 밥 먹을 때 화내기를 자행한 것은 너무 미안한데, 그리고 왜 집 이야기가 다시 연애 이야기로 이렇게 깔때기 효과를 발휘하는지 나도 영 거시기한데, 그러고 나니 웬지 니가 정말 뭉클뭉클한 존재가 되었어, 나에게.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주인 아줌마는 재계약은 안 할거지만 남은 1년 2개월은 그냥 살으라고 전화가 왔다. 흠, 푼수 같으니라고. "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무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심각한 일들에 비하면 작가의 고민 따위는 모래알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다. 그때그때 한순간만이라도 반짝일 수만 있다면. " (공중그네 305쪽)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룰메양과는 '오피스텔 사주는 전무님' 말고 NGO활동가를 위한 귀농자금이나 농업공무원,혹은 NGO활동가 비혼여성을 위해 장기임대주택 우선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꿈을 부풀리며 이 반지하방에서 맛나게 밥을 해 먹었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아, 사라진대도 상관없어,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라고 읊조렸다. 니가 있어서 내 인생에 있어서 이 순간만은 마구 반짝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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