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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야기가 연애이야기로 깔때기 되는 순간

며칠 전 내 연애에 위기를 불어놓은 것은 집주인 아줌마의 푼수 짓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집주인으로부터 "전화주세요"라는 메모를 받고, 이유도 없이 1년 2개월의 계약이 남은 집을 밑도 끝도 없는 '이삿돈'과 '복비'라는 명목 아래 '합법'하게 쫓게나게 되었을 때,갑자기 '막막증'이 뇌수에서 콜라가 터지듯이 펑펑, 흘러넘쳤다. 그냥 나 하고싶은 데로 살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젠체했고, 후회해도 할 수 없다고 마음먹고, 팔자가 그래, 라고 마음 굳히기 한 번까지 했지만 이럴 때는 막막증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갑자기 "'여성환경연대' 다닌다고 하니까 선 들어온 데서 두 번 다 퇴짜맞았어, 볼 생각도 어차피 없었지만 굴욕스러버"라는 은진과 함께 목 놓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은진은 요새 꿈에서 마구 쫓기는 꿈을 꾼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가 목구멍으로 차마 끌어올리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막막증의 정체는 '와세다 1.5평 청춘기에서 훔쳐온 말이다. 아래를 참고하삼 :) 스물다섯 고개를 넘으면 바로 이 ‘막막증’에 걸려버린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막막한 건 사실인데 뭐에 그렇게 막막한지를 모르겠다”라는 것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나도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나 하고픈 대로 하고 살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면 현재에 이렇다 할 불만은 없다. 하지만 뭔가 내 주위에 먹구름이 덮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을 신문기사체로 정리하면 ‘장래에 대한 불안’이 되겠지만 당사자의 느낌은 훨씬 더 복잡 미묘하고 애매하다. (240) 1년 동안 상근가로 일했는데 막상 집을 빼라고 하자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듯했다. 어디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아, 지금도 반지하방인데 쪽방에 기거할 수는 없다고 -_- 나의 룰메양은 한때 방송작가를 오매불망 꿈꾼적도 있어서 그런지 '발리에서 생긴 일' 꿈까지 꿨다고 이실직고 했다. "언니, 키는 조인성보다 작아도 암튼 조인성 같운 스탈의 전무님이 나타나서 하지원한테 오피스텔 사 준 것처럼 나한테 오피스텔 하나 척, 사 준 거 있지" 란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조인성이 아니라 난장이 똥자루라도 오피스텔이면 좋다, 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설을 마구마구 부르짖었다. 윗집 아저씨는 여기 대흥동 17동 토박이인데 2001년에 오천 만원 하던 11평 짜리 집을 안 사고 좀 더 큰 집에 전세로 들어앉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윗 집 아저씨 나이에 비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룰메양과 나, 둘이 사는 집의 평수에 4가족이 사는데 그래서 5천만원이어도 11평 집 대신 그보다 딱 맛밤만큼만 큰 집에 전세를 든 것이다. 암암, 이게 집을 거주권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일반 상식 아니겠삼? 신문사 시험 볼 때 나오는 일반상식보다 더욱 근본을 아는 의미에서의 일반상식이랄까 -_- 그런데 막상 집주인이 집 나가라고 용이 입에서 불을 내 뿜듯이 몰아치고(크헉~~)그 11평 집은 대흥동 전체가 재개발 어쩌고에 걸리자 헹가리치듯 뛰어올라 2억 5천에 육박하니 그 집 안 산게 서러워서 밤에 잠이 안 온다고 했다. 나는 그 옆에서 슴슴하고 물렁한 무나물마냥 "긍께요"만 말했다. 실은 아저씨 나이에 집 걱정하면서 밤에 잠이 안 오는 인생이 되면 상근가로 활동해서 선에서 두번이나 미끌어지는 젊은 날을 왕창 후회하게 될까봐, 그런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연애가 이렇게 절박해지는 지도 몰라. 하루하루 날은 가고, 조선시대의 평균 수명인 33살이 다 되어가고, 뭔가 둘러봐도 뭘 했는지 머릿 속이 새하얗게 되면 달달한 위로가 필요하니까.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 속으로, 상처와 틈새 사이로 뭉클하게 들어오는 진득한 냄새마냥 내 삶을 스캔해주는, 애지중지해주는 관계가 없이는 반짝일 수가 없으니까. 니가 집을 빼라는 집주인도 아닌데 며칠 간 왕 꼬라지를 부리고 니가 제일 싫어하는 밥 먹을 때 화내기를 자행한 것은 너무 미안한데, 그리고 왜 집 이야기가 다시 연애 이야기로 이렇게 깔때기 효과를 발휘하는지 나도 영 거시기한데, 그러고 나니 웬지 니가 정말 뭉클뭉클한 존재가 되었어, 나에게.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주인 아줌마는 재계약은 안 할거지만 남은 1년 2개월은 그냥 살으라고 전화가 왔다. 흠, 푼수 같으니라고. "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무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심각한 일들에 비하면 작가의 고민 따위는 모래알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다. 그때그때 한순간만이라도 반짝일 수만 있다면. " (공중그네 305쪽)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룰메양과는 '오피스텔 사주는 전무님' 말고 NGO활동가를 위한 귀농자금이나 농업공무원,혹은 NGO활동가 비혼여성을 위해 장기임대주택 우선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꿈을 부풀리며 이 반지하방에서 맛나게 밥을 해 먹었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아, 사라진대도 상관없어,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라고 읊조렸다. 니가 있어서 내 인생에 있어서 이 순간만은 마구 반짝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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