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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은.사.람.들.을.어.떤.잔.혹.행.위.에.도.타.협.시.킨.다.

.관.습.은.사.람.들.을.어.떤.잔.혹.행.위.에.도.타.협.시.킨.다. <조지 버나드 쇼> 이 부분 (반육식, 반 자본주의 부분은 내 친구 전하영이 맡아서 썼어요, 옮겨보았습니다.) 나는 육식을, 특히 산업화된 육식을 자본주의와 동일한 선상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면 아주 쉽게 우리가 왜 육식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인간조차도 상품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말 못하는 소나 돼지, 닭들이 상품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굉장히, 굉장히 광범위한 시장(먹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에 관계된 상품이기 때문에 엄청난 이윤이 달린 문제이므로 더더욱 은폐의 골은 깊다. 일단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육식은 기업적 생산방식에 기초한 육식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한다. 농장이든, 집 마당에서 기르든 이전의 방식으로 동물을 기르고 식용화 했던 것에 대해 나는 아직까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아니, 사실은 뭐 어때?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동물권적인 입장, 종차별주의 반대자로서 반육식을 하지 않고, 반자본주의적 사회생태주의자의 입장에서 육식에 반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낯설게 여겨질 사람들이 분명 몇몇은 될 것이라 여겨지는데(나도 그랬었기 때문에!) 상상되는 고기들은 그런 포장된 상품이고,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 고기들의 원천인 소나 돼지, 닭들이 농촌에서 평화롭게 걸어 다니거나 낮잠을 자거나 여물이든, 모이든 뭔가를 먹는 모습을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이데올로기 조작이 일어나고 있다. tv를 보면 돼지고기가 씽긋 웃으며 소시지가 되길 원하는 듯이 보여주는 광고가 있는가하면, 닭들은 먹히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닭고기 소비자들을 이끈다. 이렇게 우리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고기들이란 전부 깔끔하게 포장되어 슈퍼마켓에 진열되거나 구워지고 삶아져서 원래의 형태와는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 동물들이 고기가 되어 각각의 대중들에게 전달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닭고기를 먹기 위해 그 자리에서 닭을 잡아야 한다면 모두가 닭을 먹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자신의 집에 손님을 초대했을 때 육식주의자인 사람에게는 좌석에 살아있는 닭을 놓았다고도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단백질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며 교과서나 통계치 발표에 대한 치열한 로비가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는 것인데 각종 유제품 기업들의 로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주장이다. 이렇게 광고와 교육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보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황과 더불어 고기들은 상품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정착하였다. 육식을 하지 않고 이런 저런 책을 접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던 놀라운 사실, 그리고 나를 확고한 반육식주의자로 만든 계기가 있다. 보통 우리가 사회시간에 배웠던 바로는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의 상징인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은 포드가 자동차 산업에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가들이든 누구든 모른 채하고 싶었던 점이 있었던 것 같다. 포드는 어디서 그 아이디어를 얻었냐는 것이다. 포드는 천재적(으로 악독)인 경영자라서 갑자기 컨베이어벨트를 상상해 내었다. 배운 대로라면 이렇게 되는데 사실은 많은 반육식주의자들이 밝힌 바대로 포드가 어떻게 하면 생산비용을 낮추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당시에 가장 적은 돈으로 최고의 자본을 획득할 수 있었던 시대의 산업인 축산업자들의 도살장에 견학?을 가보고 동물들의 시체를 고기들로 분해하는 ‘분해라인’에서 힌트를 얻어 그 역으로 ‘조립라인’을 만든 것이다. 분해와 조립이라는 과정의 순서가 다르긴 하지만 생산물을 만드는 데 있어 노동 분업을 시도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그리고 그 대상에게 있어 많은 소외와 산업적 효율성을 적용했다는 것은 동일한 매커니즘이다. 단지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효율성.. 그건.. 좋은 것..? -_-a” 할 수도 있겠는데, 그 효율성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닭의 삶의 단면을 보자. 양계장은 닭공장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은데 여기에는 자연광이 전혀 들어오지 않으며 바닥에서 천장까지 선적용 나무상자처럼 쌓인 닭장에는 빽빽하게 닭들이 들어있다. 엘리베이터에 정원 정도의 사람이 서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환경은 양계업체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설계되어있다. 양계업체들은 닭들이 최대한 빨리 자라거나 최대한 많은 달걀을 낳도록 조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광등을 23시간 동안 켜놓는다거나 닭들이 스트레스로 서로를 죽이지 않도록 부리를 잘라버린다든가 하는 일이 수반된다. 이렇게 닭들을 닦달하여 이용할 만큼 이용하면 그들은 본래의 수명의 1/8에서 1/10 정도를 살게 되는데 이쯤의 상태가 되었을 때에는 죽기 전 30시간 동안 모이를 먹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먹은 모이는 닭의 살로 가지 않기 때문에 양계업자 측에서 본다면 그 모이는 ‘낭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이조차도 적은 비용으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상상력을 발휘되어 별 이상한 것들이 첨가되며 그마저도 모자라, 닭이 상품화되기 전에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항생제가 투여된다. 모든 것의 이유는 하나다. 닭의 건강상태는 닭고기가격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직 닭의 무게만이 양계업자에게 이윤을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은 모든 게 이윤 때문이라고 변명.. 하지 않고 당당히 주장한다. 우리나라에도 있는지 모르지만 미국의 가금류 잡지, 양계업자들의 잡지에는 양계업자들의 더욱 더 효율적인 방안에 대한 연구들이 한창이다. .. 그리고 미국 기업들이 하는 거 뭐든 한국에서도 하게 마련일 것이다(국내자료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닭들의 삶은 돼지나 소들에게도 적용된다. 말도 안되게 비좁은 곳에 수용되며 말도 안되는 음식에 말도 안되는 신체손상에 말도 안되는 고통을 겪게 하고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닭이나 돼지나 소가 사람들처럼 살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도시인으로서 자란 나는 특별히 닭이나 돼지나 소에 친밀함이나 연민을 느끼지는 않지만 이들이 고기가 되는 과정에서 분명 자본주의적인 매커니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과정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육식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것이 효율성의 미명아래 자행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노를 일으키는데 이들에게 있어서의 효용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단기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약간의 수치비교만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하게 거론할 수 있는 점은 육식을 한다는 개인적인(그러나 비자발적인) 선택이 사회적인 행위로 확대되었을 때(알다시피 이 시대만큼 육식이 널리 퍼진 적은 없었다, 심지어 중세보다도 현대인들이 특히 미국인들이 고기를 더 많이 먹는다) 전지구적 파괴(이런 점도 육식이 자본주의와 생을 같이 한다)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 생태학적으로 보았을 때 육식은 너무나도 낭비스러운 행위다. 수치를 많이 대면 머리가 아프므로 간단한 예를 하나 생각해보자(나머지는 각자가 가서 공부하도록..) 일단 단백질 1칼로리를 얻기 위해 소요되는 화석연료는 쇠고기의 경우 78칼로리이며 콩의 경우는 2칼로리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1칼로리의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서 78칼로리의 에너지가 필요하며 콩의 경우는 2칼로리로 에너지 효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왜 나는가. 이것은 에너지가 축적되면서 점차 효용성이 낮아지는 것 때문이다.(화학자 G.밀러에 의하면 먹이사슬에서 “먹이를 포식하는 과정에서 약 80~90%의 에너지는 주변으로 상실되어 버린다”, 즉 10~20%의 에너지만이 포식자의 세포에 축적되어 다음 단계의 먹이사슬로 전환될 에너지로 남는다). 방목한 소에게서는 1칼로리의 쇠고기를 얻기 위해 투입해야하는 에너지가 1칼로리가 조금 안되는데 산업적 축산 시스템에서는 소에게 먹일 곡물과 물 등을 포함해 78칼로리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질적으로는 이렇게 손실이 일어나지만 여전히 가격, 이윤의 측면에서는 이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하는 것이 육식의 매커니즘인데, 이러한 차이를 메우는 것은 한정된 자원과 환경의 고갈이다. 생태학적 비용까지 따져보자면 엄청나게 비효율적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소고기의 생산에 있어서는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의 발달과는 뗄 수 없는 긴밀한 연결고리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있다. 우선 초기 자본주의 발달시기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 3세계에 영향력을 넓히면서 그들의 식생활의 생산지를 그곳으로 옮긴다. 대표적으로 영국에 공급되는 소들은 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방목되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인디언과 버팔로 등의 토착민과 동물들은 쫓겨나고 몰살당하였으며 대신해서 영국 제국주의 국가를 먹여 살릴 품종의 식용을 위한 소들을 방목하게 된다. 방목한 소들은 오랜 세월 형성된 초목들을 먹고살며 축산업은 거의 노다지로 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황금시장이 되었는데, 짧은 기간 동안 오랜 세월 축적된 제 3세계의 땅들이 과잉방목 된 소들에 의해 황폐해지자 이번에는 옥수수 등의 곡식들을 생산해서 소들에게 공급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13억이 되는 대도 불구하고 육식을 위한 고기를 얻기 위해, 오직 자본을 가진 국가의 사람들을 위하여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는 자국내 굶는 사람이 허다 한대도 생산된 곡물들을 미국 등지의 축산업자들에게 싼 가격으로 수출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장이 돌아가는 것은 인간과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업들의 이윤을 위한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육식을 즐기는 것은 더 이상 기호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육식문화 속에 살고 있고, 그러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정정도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호라고 부르는 것에 억압과 모순과 폭력의 본질적인 면이 들어있다면, 그것을 수정하기 위한 고통은 행복한 것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한 사람의 완전 채식주의자(반육식주의자)가 늘어나면 1500평의 열대우림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와 요구가 거대한 벽과 같은 시스템에 구멍을 뚫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반대한다고? 그렇다면 당신이 시위에 나가고 비판글을 쓰고 논쟁을 하는 것만큼 당신의 식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에 빛을 비추어야 할 것이다. ‘다른 세상’은 배부르고 폭력적인 식사 속에서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 그것은 어떻게 썰어도 어떻게 씹어도 자본주의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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