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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인.간

.온.전.히.인.간. 해방의 사상은 해방의 이론을 필요로 한다. 우에노 치즈코 그래서 마르크스가 여태껏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로레타리아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의 오류는 시장이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에 있다. 시장 외부에는 자연과 가족이 있다. 여성은 ‘사람 아닌 사람’을 돌보는 이류시민으로, 자연은 알토란같은 부의 원천으로. 인간의 개념은 ‘인간이 아닌 것’을 맹글어 배제하는 데에 있나니. 자연과 여성 및 소수자는 ‘생사길이 예 있으매 나는 가는다 하는 말도 못 이르고’ 인간의 개념에서 팽 당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진 가장 큰 오류는 이것이다. 여자도 인간이다, 라고 소리 지른 것. 온정을 기대했더냐. 동정심을 자극하고 싶었더냐. 떨이라도 되고 싶었더냐. ‘나는 그대를 인간이 아닌 단지 거의 원숭이 등급의 종족으로 밖에 간주할 수밖에 없다’, 거나 ‘여성은 단지 동물일 뿐이며 그것도 최상위 등급이 아닌 동물이다’, 에 맞선 페미니스트의 반격은 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이로소이다, 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짐승에 대한 인간의 우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라고 물으며 이성과 열정으로 인간은 짐승을 뛰어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성도 이성과 열정을 가진 ‘짐승보다 우월한’ 인간임을 주장했다. 그 시절, 울스턴크래프트는 ‘페미니스트’였다. 인간동물원이란 책에는 아프리카 원시족(원시족이란 말 쓰기 싫어;;) 가족을 동물원에 가둬놓고 서유럽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던 일화가 나온다. 성기가 큰 여성을 구경시켰던 것처럼.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근대 초기에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도입된 것이었다. 키스 토마스에 따르면 근대 이전에는 유아, 젊은이, 가난한 사람들, 흑인, 아일랜드 인, 미친 사람들, 여성이 모두 짐승으로 간주되었다. 토마스 왈, “인간이 짐승으로 한번 인식되자, 짐승 취급을 받는 상태에서 빠져나오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간 지배의 윤리는 인간의 관심 영역에서 동물을 제거해버렸다. 결국 이렇게 해서 동물과 비슷한 상태에 처해있는 인간을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캐롤 아담스, 프랑케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p87 그러니까, 인간의 개념은 유동적이라는 거다. 인간과 1%정도만 유전자가 다른 침팬지를 모기와 묶어 동물이라고 칭하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니, 호랑말코 같은 기준이다. 여성할당제에 혹해서 세상 좋아졌다 자위할지 모른다. 박근혜와 전여옥이 설치니 여성도 사람취급 받는 것 같더냐. 지역구에 나오는 여성후보는 전체의 5%에도 못 미친다. 교토의정서가 통과됐다 해도 여전히 자연은 ‘침묵의 봄’이듯이 여성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저 휴머니스트일 뿐. 다음 미디어, 김윤아와의 인터뷰 중에서. ‘휴먼’에 여성이 끼어있었던 들 이런 말이 나올까. 쓸데없이 쿨 한척 하지 말 것. 여성은 여전히 환경이며 자연이다. 그 길을 질러가는 길은 여성과 자연의 선긋기가 아니다. ‘온전히 인간적’이란 말을 의심하는 것 뿐. 물론 이 말은 여성은 자연이며 남성은 문화라는 이분법을 껴안는 과정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자연과 문화의 일부이며 양자가 모두 자연과 병행할 수 있다. 단, 이러한 작업에 있어서 그들은 상이한 역사적 지위에서 출발하며 그들 각자가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서로 상이할 수 있다. 여성 특유의 자연 영역적 위치와 대립문화로부터의 배제로 인해 여성들에게 할당된 몫이 좀 더 의미심장할 뿐이다. 자연, 여성, 환경, 한신문화사 p134 생태여성주의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페미니즘 논의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연의 이분법적 정의, 그리고 자연의 열등한 지위를 지지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여성해방은 거부한다.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서 생태여성주의는 자신들과 자연의 관계를 ‘배경화’ 내지 ‘배제’하는 단계를 넘어, 능동적이고 의도적이며 반성적으로 위치 지운다. 나는 생태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여성으로서 자연과 관계를 맺는 가장 진정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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