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눈물

from 2006/12/15 02:16

그는 그녀의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살색 골진 내복을 입고.

칼은 무딘 부엌용 도루코.

지겹다.

 

[왜 말리지 않지? 왜 바라보지 않지? 너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니?

울어. 울면서 나를 말리란 말이다. 눈물을 흘려. 나를 보고 울어!]

 

 

그는 대륙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75kg에서 53kg의 몸무게로.

22kg은 어디로 간걸까?

세계의 전체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22kg은 무엇으로 변환되었을까?

 

굉음, 어디에도 굉음 뿐이다. 누군가의 손이 눈앞으로 날아간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총은 어디간 걸까?

 

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6개의 총알이 몸에 박힌다는 것. 오른손이 날아가서 왼손으로 총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이 까맣게 된다는 것.

 

그들은 왜 싸웠을까? 혹은 왜 그곳에 있었을까?

 

스위스의 병원에서 그는 몰핀대신 알코올을 주입당한다.

몰핀은 비싸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 알코올 중독. 중독. 중독.

 

그는 그 엄청난 역사적 무게를

내게 지운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듯이.

그리고 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듯이.

 

나는 전쟁통의 고아처럼

이리저리 튀어다닌다.

숨을 곳을 찾아서.

죽음이 드리워져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되어

나는 그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엄마의 고통도 보지 못한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장치다.

 

 

 

물을 삼키는 법을 잊어버렸다.

물을 삼키지 못해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다.

아무도 내가 물을 삼키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어느 부분인가가 말라가고 있다.

음식물에 섞이지 않은 신선한 물만으로 적셔질 수 있는 곳.

갈증을 느끼지만 물을 삼킬 수는 없다.

내 몸은 아주 작은 자살을 한다.

 

그는 나를 보고 있다.

들킨 걸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나는 다 알고 있단다.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하렴. 혼내지 않을께.]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알코올냄새가 짙게 뿜어져 나온다.

 

[말하라고 했다.]

[...]

[말하지 않으면 때려준다.]

[...]

[말하라고 했잖니. 왜 말을 안해! 말을 하란 말이다.]

 

무언가가 내게 날아든다.

나는 공처럼 둥글게 몸을 만다.

마음으로 아버지를 죽인다.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눈물이 아니다.

육체가 흘리는 피일 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센다.

숫자가 아득이 멀어져 간다.

멀어져 가서는 사라진다.

 

 

 

잉크는 얼룩진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아준다.

 

눈물에 그의 얼룩이 내 얼굴로 옮겨질 것 같아.

 

잉크의 손에는 PEACE 라는 글자가 공업용 잉크로 찍혀 있다.

물론 잉크가 스며들게 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칼로 그 글자들을 새겼기 때문에

잉크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가 깊은 곳은 깊은 만큼 잉크자국이 넓다.

 

소각로에 사람들이 또 들어갔어.

 

그건 사람들이 아니야. 이미 죽었잖아.

 

... 소각로 옆에 또 장이 섰어. 난 시계를 갖고 싶어. 진짜로 움직이는 초침이 있는 시계. 언니, 구경하러가. 이번에 들어간 ...그...그 ..그 [사람]들 중에 진짜 높은 [사람]들도 있었어. 시계가 있을꺼야.

 

어차피 사지도 못해. 갖고 싶어지기만 할껄 뭣하러 봐.

 

잉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작게 얼버무린다.

잉크는 내 손을 이미 이끌고 있다.

잉크는 작다. 나도 작지만 그 아이는 더 작다.

작은 머리 뒤쪽에 칩이 박힌 자리에는 투명한 실리콘 뚜껑이 덮여있다.

우리는 시계를 살 필요가 없다.

그래도 잉크는 시계를 갖고 싶어 한다.

부자들은, 그런 옛날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소각로 옆 장에는 그런 물건들이 나올리가 없다.

크게 손상되었거나 덜 손상된 칩들이 일련번호에 따라 값이 매겨져서

늙은이들에게 팔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총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총을 갖고 싶다.

 

칩은 우리의 전부다.

나는 칩으로부터 말을 배웠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면 누구나 아이의 머리 뒤쪽에 칩을 설치하게 되어있다.

칩은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한다.

우리에게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칩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칩이 고장나면 새 칩으로 교환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소각로에 서는 장에서 칩이 교환된다.

칩이 없다면 우리는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시간이 몇시인지,

아침이 언제 오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칩은 나이에 맞춰 프로그램된 수학과 언어, 과학, 역사 등의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모든 칩이 같은 것은 아니다.

부자들은 정부에서 칩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칩을 만들어 쓴다.

 

잉크는 소각로 지기의 딸이다.

그녀는 매일 들어오는 시체들을 확인하고 매일 내게로 달려온다.

 

시계는 없네...언니가 천천히 걸어서 그래. 아까는 있었던거 같은데. 언니가 천천히 걸어서...

 

말꼬리가 사그라든다.

총도 없다. 있다 해도 우리같은 어린애들에게 보여지지는 않는다.

 

소각로주변에는 때때로 유리구슬같은 것이 뒹굴곤 한다.

시체들의 몸에서 나온 유리조각이 녹아 둥근 유리알이 된 것이다.

가끔은 아주 동그란 것도 있다.

나는 유리구슬을 찾아 바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있다!

 

파란 유리구슬이다. 이물질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투명한 푸른색이다.

모래나 머리카락같은 것이 섞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총알처럼 둥글다.

구슬치기를 하기에는 총알이 좋지만, 이런 유리구슬은 그냥 갖고만 있어도 좋다.

 

잉크에게 구슬을 준다.

 

이거 가져. 용의 눈물이야.

 

잉크의 눈이 구슬만해진다.

 

용이 뭐야?

 

나는 잉크의 질문에 깜짝 놀란다. 잉크는 내 말을 놓치는 법이 없다.

 

용이 뭐지?

나도 모르게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용이 뭔지 급하게 생각하면서 

잉크를 데리고 늙은이들 틈을 지나 하수도 골목으로 가

비어있는 둥근 하수도 안으로 들어갔다.

 

용은 바다에 사는 거대한 동물이야. 이 구슬처럼 바다색깔이라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바다색깔이 이런 색이야?

 

응, 바다는 이런 색이야.

용은 바다 밑바닥에서 가끔 하늘로 솟아오르는데

우리 머리보다 훨씬 더 먼곳에 있는 투명한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대.

 

투명한 하늘까지?

 

응, 투명한 하늘까지.

 

정말 투명한 하늘이 있어?

 

그럼. 거기서 용이 눈물을 흘리면 이렇게 파란구슬이 되어 떨어지는 거야.

 

용은 왜 울지?

 

...

 

용은 왜 울어?

 

용은 전쟁때문에 울어. 사람들이 쏘는 총에 맞은 용들이 죽어서.

사람들은 서로를 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보이지 않는 용들을 죽인 거야.

용은 죽은 용들때문에 울어.

 

잉크야, 우리도 언젠가는 전쟁때문에 죽어.

네가 죽으면 내가 널 위해 울어줄게.

 

잉크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잉크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한번 울기 시작하니 멈춰지지가 않았다.

잉크의 손에 꼭 쥐어진 눈물 위로 잉크의 잉크가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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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5 02:16 2006/12/15 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