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의 상상, 개토가 쓴 글, 그리고 찍은 그림들.'에 해당되는 글 262건

  1. 도그빌 2004/01/13
  2. 브루스 올마이티 2004/01/12
  3. 난장이 2003/12/31
  4. 매트릭스[2] - 거짓말 2003/11/26
  5. 매트릭스[1] 2003/11/20
  6. 우리나라 만세 2003/10/10
  7. 집으로 2003/08/26
  8. 해변의 카프카 2003/08/25
  9. 정체를 밝혀라 2003/06/27
  10. 오늘 작업 2003/06/20

도그빌

from 영화에 대해 2004/01/13 11:35
라스 폰 트리예의 작품은 폭력적이다.
핸드헬드 카메라의 시선에서부터
진실과 순수의 여주인공에 대한 잔혹하고 구차한 폭행들까지.
부패하고 있는 날고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구역질이 난다.

어둠속의 댄서를 보다가는 중간에 극장에서 뛰어나와 구토를 했다.
보는 동안에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더니
끝나고 나서 가슴속에 얹혀있던 응어리같은 것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한 이틀은 앓았던 것 같다.

그가 싫었다.
굳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이 싫었다.
그가 보여주는 폭력들이 싫었다.
한없이 나약한 진실과 순수가 싫었다.
모든 인간들의 죄를 떠안고 죽어가는 예수의 은유가 싫었다.

인간은 너무 나약해서 진실을 지킬 힘이 없는가?
라스 폰 트리예의 영화가 폭력적인 이유는
나 자신을 극단까지 몰아가서 질문하게 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진실을 지킬 힘이 있는가?

[미국 삼부작]의 첫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의 최근 작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속의 댄서와 비슷한 듯 하면서 많이 다르다.
우선은 핸드헬드 카메라가 대단히 절제된 고정 카메라로 대체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차갑게 응시한다.
무대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장소가 아닌 연극 무대로 대체되었다.
인간들이 서로를 가리기 위해 만든 벽 같은 것은 허상일 뿐이다.
가장 큰 변화는 결말 부분이다.
'또 이런 식이야, 아~ 짜증난다!' 싶을 때
여주인공이 갑자기 냉정한 시선으로 도그빌을 심판하기 시작한다.
그 심판은 통쾌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절망이다.

얄팍한 해석인지 몰라도, 그러한 변화들은
그의 시선이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 신의 시선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느껴졌댜.
[미국 삼부작]이라는 타이틀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9.11과 그에 잇따르는 반응들을
이 영화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이상은 인간이라는 싸구려 변명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지저분하게 감추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하고도 진부하고 거창한 소망이 감독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과도한 모욕인 것일까?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냉소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다음 영화에서 그는 어떤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줄 것인가?
미치도록 괴롭히면서도 또다시 다가가게 하는 그의 영화가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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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3 11:35 2004/01/13 11:35
볼 필요 전혀 없는 쓰레기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도사인양 설교하는 영화따위 딱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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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2 16:03 2004/01/12 16:03

난장이

from 책에 대해 2003/12/31 15:44
2003년이 끝나는 날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의미들이
뭐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끝이라 다행인가.
오늘은 새벽 0시쯤에 흰쌀밥에 물말아 김치랑 대구포를 저녁으로 먹으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마저 읽었다.
밥을 먹으면서 보기에는 힘든 책인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한 손에 밥숟가락을 들고 한 손으로 코를 훔치면서
12월 31일의 시작을 맞았다.

나는 천국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옳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버지, 덕분에 천국에 살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게 될 줄 몰랐던 어둠 속, 불안의 시절,
내가 가진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뿐이었는데
따듯하고 깨끗한 집과 편리한 차를 가진 요즈음
분노와 증오가 있던 자리에는 차가운 빛, 욕망이 들어섰다.
매끈한 욕망 덩어리, 제 몸을 삼키고 뭉게뭉게 증식해 간다.

나는 죄를 짓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지옥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변명이다.

나는 정말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일까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난장이들을 외면하면서
나는 절름거린다.

뜨거웠던 추위도 이 겨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얼마나 더 가지면 지옥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천국에 사는 자는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옥에 사는 자는 매일 천국을 꿈꾼다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읽었다.

내 천국은 구름대신 난장이들이 바닥으로 사용되는 곳.

새해에는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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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1 15:44 2003/12/31 15:44
1.
어린 시절, 개토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자주 하는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거짓말 한 번 했다하면, 아빠한테 개패듯이 맞으면서도,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으면서도, 개토는 거짓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개토는 근본적으로 나쁜 아이인 거라고,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소한 거짓말로 삶을 지속하던 어느날,
제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굉장한 구절이 담겨있던 책을 읽었던 것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이는 작가가 될 소질을 가진 아이다'라는 것이 그 구절의 요지였다.

개토는 그 구절로 인해서 꿈을 바꾸기로 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개토는 운명적으로 작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소설가가 되어야 하는구나, 대단한 소설가가 될테다, 그래서,
나를 방구석으로 쥐몰듯이 몰아 빗자루로 패곤 하던
아빠에게 보란듯이 거짓말이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리라.

아빠는,
거짓말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 개토는 얼마나 비뚤어진 아이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어설픈 조각가처럼
개토의 마음을 보기흉하게 여기저기 깎아내고 상처주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꼭 소설가여야할 필요는 없었건만...)

인간은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가? 하는 거창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지만,
개토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거짓말에는 아름다운 점이 있다.
그 안에는 진실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은유와 호소와 슬픔, 유머가 진실을 포함하면서 담겨있다.
완벽한 거짓말에는 완벽한 진실보다 더 많은 내용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거짓말은 유리로 만든 도미노 같은 것이다.
가장 완벽한 거짓말조차도 그 본질적인 속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하나의 전체를 이룬 거짓말이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거짓말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대중을 속이자면 거대한 거짓말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 감탄하는 것이다.

2.
예술을 한다는, 혹은 표현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완벽한 거짓말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뉴로맨서>를 쓴 윌리엄 깁슨은 해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술을 이해하기 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적으로 묘사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체계를 가진 거짓말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실의 그 무엇도 닮지 않은 예술,
가장 거짓이어야 하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예술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사람들은 왜 퍼즐을 맞추는가?
맞추어진 퍼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이 진실이다?
매트릭스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영화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운동권을 위한 영화라고도 하고, 철학을 이야기 한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은 개토는 <저수지의 개들>을 페미니즘 영화로 만들 수도 있다.

5.
여기에서 멈추는 순간,
그 거짓말은 하찮은 것이 된다.
개토는 매트릭스가 하찮은 거짓말임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속상해 한다.
매트릭스라는 거짓말은 진실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있기는 커녕 진실조차 담아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6.
천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열이다.
그의 완벽한 거짓말은 진실과 그 이상의 것들로
나라는 작은 세상을 빛처럼, 오르가즘처럼 채워주며
그것을 구하는 것은 나의 가장 인간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희열을 준비하던 개토에게
매트릭스는 또하나의 하찮은 실망이다.

7.
무지하게 재미있는 매트릭스는
채워질 수 없는 허전함을 잠시 채워진 듯 잊게 해주고 무지하게 맛있는, 라면과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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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6 15:51 2003/11/26 15:51

매트릭스[1]

from 영화에 대해 2003/11/20 20:57
1. Matrix는 자궁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Matrix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연두색 발광 글자들의 흐름, 우리가 사는 사이버 스페이스, 가상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육체는 기계 자궁안에 갇혀있고 우리의 정신은 가상의 세계에 갇혀 있다.
우리는 Matrix안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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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0 20:57 2003/11/20 20:57

우리나라 만세

from 2003/10/10 13:43
한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리고 작고 힘없고 그래도 어른처럼 대접받고 싶어하는 평범한 아이다.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게다가 가족이 함께 사는 집도 있다.
그리고 옆집도 있다.
아이는 또래 친구인 옆집 아이와 친하고 싶었다.
집도 가깝고, 얼굴만 봐도 괜스레 친근감도 느껴지고 그랬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는 옆집 이야기만 꺼내도 아이를 마구 패대기 친다.
따귀도 때리고 밟고 심할때는 목도 졸라서 아이는 몇번을 까무라쳤다.
옆집 아저씨는 '개새끼'고 아줌마는 '미친년'이란다.
옆집 아저씨는 옆집 아이를 맨날 굶긴단다.
옆집 아이는 그런 부모밑에서 자라서 미친개같은 새끼란다.
곁에 가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고 모른척 하란다. 아예 죽도록 미워하란다.

지난 가을에는 아이네 집 뜰에 있는 감나무가 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더랬다.
담밖으로 튀어나간 감을 누군가 따려다가 감나무 가지를 크게 꺾어놓은 것을 본
아이의 아버지는 옆집 아이가 얼마나 악마적인 성격의 소유자인지
아이와 아이의 집안에 얼마나 적대적인 존재이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얼마나 극악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의 귀가 멍해지도록 며칠 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아이가 무서웠던 것은,
아버지가, 옆집 아이의 그 악날한 소행과 자신을 연루시키는 것이었다.
툭하면 때리고 소리지르는 아버지가 지겨워서 어쩌다 대들라치면
아버지는 아이가 옆집 아이와 만나서 나쁜 것만 배운 것이 틀림없다고
옆집 아이가 무슨 짓을 시켰냐고 다그치고 괴롭히고
결국은 매질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가끔 옆집 아저씨를 만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술도 얻어먹고 오고 그런 날은 옆집 아이에게 과자도 한개씩 사주는 것 같았다.

동네에는 아이보다 훨씬 크고 힘도 센 아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힘센 아이의 아버지가 돈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았으니
힘센 아이하고만 놀라고 했다.

아이는 힘센 아이가 잘난 척 하는 것도 보기 싫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것도 싫었다.

아이도 어른이 된다.
어른에게 아이가 생기고 동네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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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0 13:43 2003/10/10 13:43

집으로

from 영화에 대해 2003/08/26 03:50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에게 바칩니다'

마지막 문구를 읽으면서 '딸꾹 딸꾹'거려가면서, 그 후로도 한참을 꺽꺽 울었다.

참 오래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벼르던 영화였는데,
꽤 오래 비디오로 출시가 안되었더랬다.
최근에 기회가 되어 보는 내내 내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워낙에 내가 영화를 볼때만 잘 울기는 하지만,
최근 본 영화가운데 가장 눈물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녀의 이전 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은 상당히 못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집으로'는 어느 정도 잘 만든 영화였다.
그녀는 시골 깡촌에 사시는 할머니와 서울 아이가 만나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담담하면서도 매우 긴장감있게 펼쳐낸다.
별 대단한 이야기도 없건만 영화가 지루하지 않다.
구구절절 설명은 모조리 빼버리고
자잘한 사건들(사건이라기 보다는 이미지에 가까운)만 얼기설기 엮어놓았는데
그게 참 탄탄하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간다.
할머니의 연기는 내가 본 그 어떤 배우의 연기보다 훌륭했다.
할머니는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실컷 울기는 했는데, 감독이 말하려는게 뭔가 싶다.
생각해 보면 사실 별거 없다.
그런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나는 왜 그렇게 울었나 되물어본다.
첫째는 할머니가 사무치도록 고독해보여서 였다.
할머니는 정말 그렇게 고독했을까? 사실은 잘 모르겠다.
상우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마을 분들과의 단조로운 관계들 속에서
잘 지내셨겠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상우가 폭풍처럼 왔다 감으로써 할머니 맘에 흔적이 남아
삶의 의미가 늘었을 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둘째는 짜장면 때문이었다.
먹을 걸로 차별하는게 세상에서 젤 슬픈 거 아마 아는 사람은 다 알거다 싶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동생만 맛난 거 주면 진짜 맘속에서 서러움이 북받쳤다.
상우가 짜장면을 먹는데, 할머니가 안 드신다.
돈이 없으셔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있었어도 안 드셨을게다.
있으면 그 돈으로 딴 거 사주셨을 게다.
그게 참 눈물났다. 왜 눈물이 났을까?
할머니 자신보다 상우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해서였을까?
그러는 할머니가 안스러워서였을까?
가난하니 마음 짠 한 일이 있다. 그게 아름다운가?
그걸 모르겠다.

셋째는 할머니가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상우가 쓴 엽서들은
할머니가 잊혀질 것임을 더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로써 훌륭하게 작동했다.
상우의 할머니에 대한 맘이 간절해서,
그 간절한 마음이 하찮은 편리에 의해 사라질 거라는 게,
할머니를 돌볼 이는 없을 거고
상우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할머니를 막연하게 그리워 하며 눈물을 지을 거라는 게
눈물을 쏟게 했다.

시골마을은 그렇게 아름다운가?
외할머니들은 모두 그렇게 헌신적인가?

참 현실적인 영화같지만 참 동화같은 영화다.
참 예쁜 것만 보았구나 싶기도 하다.

이정향 감독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잊혀진 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 거 말고
어떤 손녀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외할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녀는 이 영화에 그런 대답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게 하려 애썼을 것이다.
나름대로 리얼리즘 영화인 것이다.
그대로 보여주기 리얼리즘 영화인 것이다.

굳이 명확한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작품에는 저자의 시선이 엿보이게 마련이다.
사라져가는 외할머니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석연치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이제 저런 헌신적 외할머니 상은 사라져야 해 라고 용기있게 외칠 자가 있을까나

마지막으로, 그녀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한없이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왜 그에 대한 감사의 말 한 마디 없는 것일까 싶었다.
우연이었는지 모르나 그다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는 길의 카메라 구도라던가 '집으로'라는 제목이라던가
메시지를 직접 던지기 보다 짧은 이미지들의 연속을 통해 보여준다던가
소재도 배우도 진짜 삶속에서 찾아낸다던가, 동네 아마추어 배우들을 쓴다던가
모든 것이 키아로스타미에게 진 빚이 아닌가?
리얼리즘에서 비판을 제외시켰기에 자신은 키아로스타미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도시 중산층 지식인이란 대체 믿기가 힘든 존재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무사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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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6 03:50 2003/08/26 03:50

해변의 카프카

from 책에 대해 2003/08/25 13:24
하루키는 참 남자다.
읽다보면, 정말 무사태평하구나 싶다.
나는, 경험의 뿌리 깊은 단절면에 부딪히면서 그를 보게 된다.

저 너머의 세계에서,
'고속버스 안에서 15살 소년이 20대 여인을 만난다.
그녀를 누나라고 생각한다. 갈 곳 없는 그는 그녀의 집에 가서 잔다.
그녀가 손으로 사정하게 해 준다. 마음 편히 잔다.'

고속버스를 탄 15살 소녀라면 어떨까?
속편하게 오빠라고 생각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집에 가서 잔다거나
그의 손마사지를 받고 오르가즘에 도달한다거나 그 후에 맘 편히 자는 것은
가능성 0%의 영역이다.

하루키 소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성적인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소설 속의 여성들에 대해서
이제 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의 1인칭 시점 서술 방식은 세계에 대해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굳이 상대 역의 여성이 어떤 삶을 사는가는 볼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그의 주된 관심사,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성적 매력을 가졌는가를
부각시켜줄 환상적인 그녀의 외모와 아주 간단한 이력 정도면 충분하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하루키는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일반적인 외디푸스 컴플렉스 이론을 보강하기 위해 '누나'라는 대상을 추가했지만,
엄마로부터 시작해서 어쨌든 모든 여성은 성적인 대상이며
아버지는 극복해야할 대상인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여성주의에 가장 반동적인 사상이다 싶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성적서비스를 받으면서 성장해서 아버지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 새 세계를 창조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가 자신의 극악한 면을 총정리한 대작이다.
사실, 안스럽게도 하루키는 이 대작에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세계 평화를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할 모든 고통에 대해 무지하다.
무사태평이다.

그가 주인공을 30대 중반의 중산층 남성으로 다룰 때는, 그러려니 하고
그의 환상적 이야기를 즐기기도 했지만,

15세 소년을 30대 중반 중산층 남자와 똑같이 다루면서
마치 세대를 넘나드는 대작을 쓴 듯 자만심에 빠진 하루키는 보기 싫다.
100%의 사랑과 그를 못 잊어 병약한 여자도 이제는 지겹다.

그는 주인공 카프카가 자기자신이고 '여러분' 모두란다.
그가 자신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해변의 카프카'는 그의 지난 작품 총정리 였고, 총정리 해 놓은 것을 보니 실망이다.
그의 단편들은 재미있는 것도 많았는데. 그는 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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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5 13:24 2003/08/25 13:24

정체를 밝혀라

from 사진 2003/06/27 14:23


갈월동 숙대입구 근처에 있는 가게를 발견하였다.
굳게 닫힌 철문 위로
['비상탈출구' - 장사하실 분 상담 환영]이라는 문구와
문의전화번호까지 있는 큰 간판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허름해 보이지만,
저 철문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

'비상탈출구'라는 문구가 매우 심상치않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비교적 작은 글씨로 쓰였지만
사실은, 저 문구에 이 가게의 진실이 숨겨 있는 것은 아닐까?

가설 1.

지구 탐험의 임무를 띄고 온 외계인들이 있다.
이들 중 다수가 취업을 하지 못해 먹고 살기 힘들다.
먹어야 임무도 완수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외계인이기 때문에 취업이 더더욱 어렵다.
너무 논리적인 그들은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에 불만을 갖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일부 외계인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주식에 손을 댄다.
그리고 쫄닥 망해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말고 '비상탈출구'에 와서 상담하시라.
합법적인 귀환은 아니나 '장사'할 수 있다.
여기서 '장사'란, '長死', '오랜 죽음'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잠시 죽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잠시라고는 해도 죽은 존재가 되어 있는 시간은
굉장히 길게 느껴지게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시적 표현이다.

슬프다...흑 주르륵...ㅠ_ㅠ
명복을 빈다.

가설 2.

철문을 여는 순간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벽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비단벽지가 발라진
5평짜리 텅 빈 방이 나타난다.
방바닥의 정 중앙에 발을 디디면
정 중앙 바로 앞에 사람 몸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에는 땅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연결되어 있다.
총 4백4십4개의 계단이 나선형으로 좁게 이어져 있다.
게단을 다 내려가면
긴 복도가 있고 그 끝에 여권심사대 비슷한 것이 있다.
긴 복도에는 다양한 행색의 두더지들이 줄을 서있다.
아스팔트로 덮여버려 대체 뚫고 나올 곳을 찾기 힘든 서울을 떠나는 것이다.
주로 당장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과 중국, 소련 등으로 간다.
돈이 많은 두더지들, 무모한 두더지들은 적당한 곳으로 아예 이주한다.
소심하거나 돈이 부족한 두더지들은 잠시라도 쉴 곳을 찾아 떠난다.

역시 불법이다.
두더지 사회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법을 따라보자면 검역을 마치지 않은 동물이 마음대로 한국을 떠나서는 안된다.
게다가 북한으로 갈 경우 국가보안법에 딱 걸리는 것이다.
걸리면 죽음이다.
따라서 '비상탈출구'이다.
비상탈출구를 통해 '장(長)기간 이사(徙)하실 분' 상담 환영인 것이다.

역시 슬프다...ㅠ_ㅠ

그만 할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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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7 14:23 2003/06/27 14:23

오늘 작업

from 그림 2003/06/20 13:40

개토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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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0 13:40 2003/06/20 1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