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의 상상, 개토가 쓴 글, 그리고 찍은 그림들.'에 해당되는 글 262건

  1. 방문 2002/07/29
  2. 스티치를 갖고 싶어 2002/07/25
  3. 패닉룸 2002/07/17
  4. 오렌지 카운티 보세요~ 2002/07/13
  5. SPIRIT 2002/07/13
  6. 복수는 나의 것 2002/07/10
  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2/07/09
  8. 2002/07/08
  9. 목화밭엽기전 2002/06/10
  10. Logical Affairs 2002/05/17

방문

from 2002/07/29 19:29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무겁고 깊은, 땅속같은 잠은 어디론가 가라앉아버렸고
기분나쁘게 둔중한 느낌이 머리를 중심으로 온 몸에 남아있었다.
게다가 목 안에는 가는 쇠가루가 뭉쳐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침을 삼켜도 쇠가루 뭉치같은 그 느낌은 개운하게 넘어가지 않고
끈적한 가래만 조금씩 올라올 뿐이었다.
너무 더웠다.

어제 너무 고생을 한 덕분이다.
지하3층과 옥상에서 벌어진 2개의 행사를 번갈아 가며 치뤄야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위아래로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일요일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도 고치러 오는 사람이 없다.
행사에 온 사람들은 좀 투덜대긴 했지만 또 뭐 엘리베이터를 고치게 할 만큼 분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번씩만 오가면 되는 거니까.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고 집에 들어오니 다시 잠이 올 듯했지만
지독한 더위에 잡념이 합세해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선잠이 든 상태로 누워있었다.
이렇게 남의 일을 뒤치닥꺼리나 해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번 달 월급을 받아서 일단 자금을 투자하면
쉽게 돈을 벌만한 장사가 떠오른 것이다.
조금씩 생각을 구체화 시켜가면서 이생각 저생각 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주인은 자주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리곤 해서
집 주인인 줄 알고 생각보다 무겁게 감긴 눈을 비벼대며
문에 다가가 의례적으로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바깥에선 집주인 혼자가 아니거나 혹은 아예 집주인이 아닌듯 두세명의 목소리가 소곤대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네인데 계단에서 넘어졌어. 잠시 좀 들어가서 물좀 얻어먹으면 안될까?'
이거야 원, 안봐도 비디오였다.
분명 방문판매이거나 선교하러 다니는 신자일 것이다.
'지금 바빠요. 다른 집에 가봐요.'하는 순간 우리집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 뭐 잠자던 모양인데, 물이나 한잔 줘.'
산발이 된 머리를 본 할머니가 황당하고 졸린 내 눈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물을 요구했다.
비쩍마르고 골골이 주름이 진, 눈조차 하나의 주름으로 보일만큼 살갗이 주름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특유의 할머니 냄새가 멀리서도 맡아질 만큼
어딘가 괴상하게 할머니스러운 하얀 파마 머리의 할머니였다.
그 뒤로 굉장히 하얗고 붉고 뚱뚱한 한 할아버지가 연신 목과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닦아내는 땀보다 도로 만들어지는 땀이 더 많아보였다.
땀때문인지, 뭔가를 발랐는지 듬성듬성 검은 머리칼이 보이는 흰머리가 젖은 것처럼 머리에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옅은 옥색 남방은 겨드랑이부분이 잔뜩 젖어있었고
배부분과 가슴부분이 속 내의에 척 붙은 느낌으로 약간 젖어있었다.
할머니는 말과 동시에 머리를 불쑥 내밀고 집안을 슬쩍 살피더니
곧바로 문을 활짝 열고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할아버지도 천천히 그 뒤로 따라 들어왔고 나는 별달리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어 그냥 서있었다.
'물만 먹고 갈꺼야. 빨랑 좀 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잔에 따라 주니 둘 다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미적미적 하기에 한잔씩 더 따라주었다.
또 금새 다 비웠다.
'화장실만 좀 쓰고 갈께.'
대답도 듣지 않고 할머니는 화장실을 사용했고 나는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잠깐 쳐다보다가
잔을 모아 싱크대에 담갔다.
너무 졸려서 쓰러질 것 같았다.
할머니가 나오자 두 사람은 현관으로 나갔다.
정말 물만 먹으려던 건가 싶어 문을 잠그러 나섰는데
나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너머로
아저씨 하나와 아줌마 하나가 나타났다.
'아차!'싶은 마음이 들기도 전에 아저씨와 아줌마는 아예
마루 곁의 방으로 들어섰고
너무 졸려서 무슨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고, 제발 나가달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건 정말이야. 너무 졸려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생각했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냈고
아줌마가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세상에 나보다 더 말도 안되는 인간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 지쳐서 나가라고 할 힘도 없었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한 머리를 침대가 있는 큰방으로 돌리고
몸도 천천히 돌려 미끄러지듯 움직이다가
으스스한 기분에 뒤르 돌아다보니...

엄마, 아빠가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29 19:29 2002/07/29 19:29
반성과 비판 없는 무한 상상력의 세계 - 디즈니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디즈니야 말로 미국이 위험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나는 상당히 괴로워졌다.
영화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하고 귀여운 외계인 방문객들,
선명한 색채의 자연, 건강한 출연진들...
환상의 세계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허여멀건 푸르스름하게 컴퓨터나 지키기 보다는
푸른 바다에서 노릇노릇하게 갓 구워진 빵처럼
부드럽고 따듯하게 서핑을 하고 싶단 말이다!

영화관에서 무겁게 발을 떼어내어 복도로 나서는 순간
내 입에서는 '스티치를 갖고 싶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소유에 대한 욕망을 자연스럽고도 강렬하게 끌어내고
결국은 그것을 갖도록 만드는 힘.

생명공학에서 유전자 조작을 이용한 새로운 생물체의 탄생이라는 문제는
도덕적인 기준을 필요로 하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과학기술의 무모한 발전에 대한 경고는 아마도 불이 발견된 이후로 지속되어 온 것일테지만
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나는, 이제 과학이라는 것이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어야할 책임을
사람들이 느껴야한다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디즈니는 말한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어.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우린 뭐든 해도 돼.
'릴로 & 스티치'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생명공학을 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리라.

실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고 희망만 잃지 않는다면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운 믿음이 세상을 파괴하는 선동자라는 것을 믿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귀여운 스티치를 갖고 싶어.
힘센 스티치, 불에 타지 않는 스티치, 말하는 스티치,
초강력 무기 스티치...

디즈니가 주는 꿈과 희망은
자본주의적 장인정신 - 혹은 자본주의의 자체적인 완결성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자, 여기에 꿈과 희망이 있어.
이게 너희들이 꿈꾸어야할 세계, 그리고 욕망.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얻게 될꺼야.
꿈과 희망이 꼭 필요하냐구?
그런 질문은 성립하지 않아.
이미 너희들 내부에 자리잡은 강렬한 욕망을 봐.

우와...정말 대단하다...

현실에서 도피해 얻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 틈에
슬쩍 끼워놓은 새로운 세계 - 스티치,
정말 놀랍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25 18:04 2002/07/25 18:04

패닉룸

from 영화에 대해 2002/07/17 14:38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내가 본 네번째 영화.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편협해지기 마련이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관대해지곤 한다.

내가 본 데이빗 핀처 감독의 가장 좋은 영화는 '파이트 클럽'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본 이후로 데이빗 핀처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으로 빠지지 않고 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패닉룸'에 대한 주변인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긴장하게 만든 감독의 역량에 놀라버렸다.
보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보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다지 무서울 것도 없는 범인들, 뭐 다른 영화들에 비해 굉장할 것도 없는 폭력들이
마치 내가 패닉룸에 갇힌 것처럼, 혹은 집안에 갇힌 것처럼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디포스터, 그녀만으로도 팽팽한 이 영화는
데이빗 핀처의 놀라운 속도감으로 틈이 없는, 그야말로 패닉룸이었다.

흠...그런데,
포레스트 휘태커라는 그 유명한 흑인 배우,
그 배우는 나에게 송강호를 연상시킨다.
송강호가 우리나라에서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다수의 능력있는(?) 영화들에 캐스팅되어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성공한 배우로 이야기되는 데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는 그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늘 거슬리는 존재다.
왠지 그가 연기를 하면, '아! 저건 진짜 연기구나!' 싶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일까?
영화속에서 너무 영화적으로 생겼다는 느낌,
어쩌면 너무 현실에 가까워서 영화에 있기엔 어울리지 않는걸까?
포레스트 휘태커 역시 그런 느낌이다.
너무 영화적이야...

어쨌든,
역시, 영화의 가장 멋진 점은 2시간 남짓 동안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 느낌을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17 14:38 2002/07/17 14:38
삶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피곤한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때부터 그랬던것 같다.

때때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미국식 코미디 영화를
우연히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코미디 장르를 즐기는데 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오렌지 카운티' 정도의 코미디가 딱이다.
코미디를 보고 오히려 심각해진다거나
괴로워진다거나 기분이 찜찜해진다거나...
사실 뭐 대단한 코미디라는 것들은 우울한 현실을 조롱하기 마련이므로
안그래도 우울한 현실을 압축해서 고농도로 즐겨야 한다는 것은 괴롭다.
혹은 웃기는 했는데, 저런 식으로 꼭 웃겨야 되나...
인간이라는 것들은, 남자라는 것들은...싶어서 찜찜하다.

'오렌지 카운티'는 미국에서밖에 만들지 못하는 그런 류의 영화다.
뭐 초대형 블록 버스터야 돈만 있음 되지만
이런 류의 영화는 그곳에 사는 중산층 인간의 정서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는 모습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부분이 있고
이 영화는 유머 감각이 대단히 뛰어나다.
군더더기 없는 내용과 강요없고 끊기지 않는 유모어,
배역에 꼭 어울리는 배우들,
요상한 가족관계,
뭔가 깔끔한 것을 보고 싶은데 뭘 봐야 할 지 알 수 없다거나
여럿이 봐야하는데 결정하기 힘들 때,
뭘 볼지 생각하기 싫을 때,

그저 그냥 늘 그렇듯 꿀꿀할 때,
함 보십쇼.

예전엔 이런 영화가 심심찮게 있었는데
제목하나 기억에 남아있질 않다...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13 23:58 2002/07/13 23:58

SPIRIT

from 영화에 대해 2002/07/13 12:27
서부개척시대 영화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아무 죄 없는 말들을
심하게 괴롭히고 죽이는 것이 늘 괴로웠다.

인디언을 ?는 미국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서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말의 몸부림과 눈을 본다거나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도 모자라 사람이 둘씩 올라타는 것을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느낌을 가졌던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말의 시각에서 본 서부개척시대.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재밌는 부분이 있을만도 한데,
아아~ 이 영화는 영 아니었다.

특히 브라이언 아담스의 토할 것 같은 목소리와 느끼함이
과장되고 억지스럽게 감정을 조작하려 들어서 영화 내내 거슬렸다.
왜 그렇게 시종일관 감동의 도가니를 만들고 싶어하는지.
감동할 틈이 없는 것이다...
'이거야 원, 언제 감동해야 할 지 알 수 없자나..쩝'
어설프게 의인화되어서
마치 말하는 것처럼 '히히힝'대는 말들도 꽤나 신경쓰이고
뭔가 집중이 안되는 지루한 영화였다.
게다가 그 지루함을 한참 참고 이제 뭔가 시작되나보다 싶더니만
끝나버렸다.

누가 보겠다면,
음악없이 말들이 달리는 장면만 트레일러로 보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
돈과 시간내어 보기는 아까운 것이다.

웩~ 브라이언 아담스 너무 싫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13 12:27 2002/07/13 12:27

복수는 나의 것

from 영화에 대해 2002/07/10 14:15
[복수는 나의 것]
- 하드보일드, 아! 하드보일드

[하드보일드(hard-boiled)]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 야후! 백과사전 참조 -


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의 우리 영화에서
무언가를 표방하고 실제로 그 무언가를 보여준 영화는
아마도, [복수는 나의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류승완 감독의 펄프 느와르가 아직 명확한 장르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잔혹극(?)'정도로 불릴 애매한 장르라면...

어쨌건, [복수는 나의 것]은 너무나 '하드보일드'하여
심히 괴롭게 만드는 장난아닌 영화였다.
장르적 완성도가 영화의 완성도와 결합해서, 아, 새로웠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듯
각각의 주인공에 빠져들어 그 갈등과 고통을 맛보되
결코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는 영화.

고도로 이성적이어서 치밀하게 계산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박찬욱 감독에 대해서 생각했다.
[JSA]를 봤을 때만 해도, "흠...참 계산적인 영화로군.."했던 것 같다.
관객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계산해서
잘 끼워맞춘 퍼즐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독이로군...했는데...

역시 그런 감독일 뿐만 아니라
자기 세계가 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감독이 놀라웠던 만큼 배우들의 연기도 대단했다.
아역, 조연, 주연 모두 흠잡을 데 없어서,
지체부자유자로 나오는 류승범은 못알아볼 뻔 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복수는 운명이면서 동시에 운명에 대한 거부이다.
선과 악이라는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복수하는 사람들,
주어진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어떻게든 복수해야하는 사람들.

복수하는 사람들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반항하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에서 착한 사람들로 불리워진 두 복수자들은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그 부조리의 끝을 보기 위해 극단까지 치닫는다.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면서 이야기한다.
'넌 착한 사람이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
왜 내가 이 부조리의 끝을 봐야하는지 알거야...'라고.

세상에 비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미(?)의 실천들, 혹은 이야기들은
거대한 세상에 비해 너무 왜소하고
복수자들은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감독은 말한다.
'복수는 나의 것!'

[복수는 나의 것]은,
구약 성서의 '복수는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므로 로
인간은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의 문장이라는데
나는 이 문장에서 오히려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신이 뭐라고 해도 나는 복수한다.

우스운 것은 복수자의 최후다.
'그런 식으로는 복수가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결말.

당신의 복수도 세상 부조리의 일부야.
누구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세계.
주인공 류는 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송강호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족은, 하나의 단위이다.
그들은 거대한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작은 단위의 부조리에 집착했을 뿐.

제대로 복수한 것은 아마도 영미 정도가 아니었을까...
마지막에는 조직도 남기고 했으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10 14:15 2002/07/10 14:15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10살에 발견하게 되는 세상

10살 쯤 되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면 타인에게 배척당하는 세계.
3일이면 인간의 냄새가 사라지고 괴물과 같이 살게될 그 세계.
숨을 죽이고 세상에 들어서면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또다른 '나', 일하지 않으면 않되는, 소외되고 작은,
남들과 똑같이 하나일 뿐인 '내'가 남게 된다.
믿음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엄마와 아빠가
단순히 욕망에 휘둘리는 돼지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가슴아프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만을 특별하게 느껴줄 누군가를 찾게 된다.

센의 목욕탕은
세상을 바라보는 치히로의 마음이다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시기,

치히로는
괴물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되고
사랑해야할 대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던 세상에서
이제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세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성에 눈뜨기도 한다.

치히로가 통과한 터널을, 우리는 여러번 다시 통과하고 통과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괴로운 일이다.

초등학교 3~4 학년 쯤이 아??었을까 싶은데,
신문보기에 맛이 들어서 엄마가 보던 조선일보를 옆에서 따라 읽곤 했었다.
어떤 기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갑자기 나는 너무 놀라서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며칠 전에 같은 주제의 기사에서 읽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기사가 너무나 뻔뻔스럽게 쓰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어른들과 신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문의 진실성을 너무나 아름답게 각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추악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순간이 아직도 느껴지곤 한다.

그 괴로운 경험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두려워 하지 말고 자신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겪어나가라고,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얼굴없는 괴물은 세상이 '나'에게 만들어주는 욕망이다.
이 괴물은 어떤 세상에 가느냐에 따라서
나만을 위해 사람들을 잡아먹을 만큼 무서워지고
계속 커지기만 하는 욕망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잘 대해주면
모두를 위해 작은 일을 하고 싶어지는 귀여운 욕망이 되기도 한다.

마녀의 커다란 아이는 아마도 아이들 모두를 대변할 것이다.
어른들이 만들어준 방안에서 안전하게 지내기보다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고 싶다고.

미야자키는 아이들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이렇게 풀어놓으면 도식적인 이야기가 - 영화를 도덕 교과서 같이 풀어놓았군...
그가 만들면 환상이 되고 숨 쉴 틈 없이 즐거워진다.

음악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지금까지의 미야자키 영화 가운데 최고였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싶다.

아, 또 하나!
치히로가 어린 시절에 물속에서 하쿠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의 그 따듯하면서도 쿨한 성적인 느낌이,
내가 원하는 그런 성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09 23:13 2002/07/09 23:13

from 2002/07/08 19:27
아주 오래 전은 아니고, 좀 오래 전에, 내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나는 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밝고 아름다운 별이었던 만큼,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그 프라이드를 지구에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지구인이나 혹은 그녀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들은 서로 좀 달랐던 것뿐이다.

그녀는 1573년 3월, 카시오페이아에서 요절했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천재는 요절을 해야 한다던가,
그런 것이 지구의 풍습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

두터운 음악소리를 밀어내고 큰 소리로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좀 짜증이 났다.
그녀는 많이 취한 것 같았고, 혼자인 것 같았고,
아무것도 없어서 저돌적으로 무엇에든 매달릴 곳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이야기 할 기분도 아니었고, 솔직히 그녀는 예쁘지 않았다.

술집 이름은 Tycho's Nova 였다.
주택가 한 귀퉁이 차고를 개조한 아주 작은 Rock Bar였는데, 테이블 2개와 바에 딸린 의자가 5개로 사람이 꽉 차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꽉 찬다해도 스무 명이 서로 꼭 붙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이사와서 짐을 겨우 정리해 두고 어스름해진 창문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다가, 나는 내 방 창문에서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Tycho's Nova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밝은 노란색의 네온으로 별 그림과 Tycho's Nova라는 단어가 있었고, 벽은 온통 검은색에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냐구?]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귀찮아진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그 곳에서는, 나는 아주 예뻤어. 인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구!]

마지막의 [않았다구!]는 그 앞의 문장보다 좀 더 큰 소리여서 나는 움찔했지만,
곧, 음악 속으로 그 단어도 묻혀져 버렸다.
나는 맥주의 상표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Nirvana 의 Milkit이 미친 듯이 Bar 안 곳곳에 부딪히며 내달리고 있었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줘. 나는 지금 아주 피곤하다구.]

Tycho's Nova에는 말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주인 언니와 나, 그리고 그녀 뿐이었다.

[왜 피곤하지?]
[살아야 하니까. 날 좀 그냥 내버려둬 줘. 부탁이야.]
[나도 널 괴롭히려는 건 아니야. 외로워서 그래.]

다시 보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특별히 예쁘진 않았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나도 니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미안해.]

그녀는 내 곁의 둥그런 의자에 앉아 조용히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왜 모두들 그렇게 바쁜 걸까? 난 이제 떠나야 하는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08 19:27 2002/07/08 19:27

목화밭엽기전

from 책에 대해 2002/06/10 22:12
[목화밭엽기전]이라는 책을
동네 대여점에서 빌려다 보았다
자주 그렇듯이
눈으로 슥슥 ?어보았다

백민석이라는 작가의 글중에서
두번째로 읽어보는 글.

백민석은 그렇다치고

요새 나는 피비린내나고 혼란스러운 걸
찾아다니나 싶다
배틀로얄도 그렇고
파졸리니의 소돔도 그렇고
폭력에 질려서
더 큰 자극이 아니면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된걸까

처음에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는데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나보다 싶어
그저 그렇다

폭력을 통해서 세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
보여준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
그저 익숙해질 뿐이지

이 글을 왜 썼을까 생각해보았다
동물원이 양산해내는 괴물들도
그안의 동물들도
이젠 지겹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지속되는 것이 싫다

비정상적인 열정만 남은 괴물이 되는 것도
동물원의 동물이 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런 글은 왜 쓰나

애꿎은 몸만 망가뜨리고 있다
이 몸뚱아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쓰고 싶어서 썼겠지
쓰여지니까 썼겠지
살고 싶어서 살겠지
살아지니까 살겠지
뭐 그런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6/10 22:12 2002/06/10 22:12

Logical Affairs

from 2002/05/17 13:51
일하러 오는 길에는
눈이 부시리만큼
천박한
꽃분홍색의
장미들이
별다른 이유없이
피어들있었다.

친구놈은
대순진리회인지 대순진리교인지
나에게
사악한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불투명한
믿음의 세계로
블랙홀처럼
스스로의 질량을 집중시켰고

며칠전에
나의 일터에
같은 규격의 다른 그림들
대여섯점을 들고 들어와
3만원에 사달라는
어느 미술학도의
요청을
나는
뿌리치지 못해
반추상 형식의 배그림을
사고 말았다

22살의 내동생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 낫씽

오후 1시 30분
구역질이 나서
밥을 먹고 싶지 않다
굶으면 일을 할 수 없을텐데

오전 6시 30분
에 잠이 들었던 나는
차가운 머리를 들고
오후 11시
에 일어나

그런 식으로 물쓰듯 쓰다가는
언젠가 바닥나버릴

수돗물을
20여분이나 틀어놓고
멍하게
뜨거운
물의 기운을
한참 동안
느껴야만 했다

역(逆)기시감
미래의 어디엔가
(혹은 다른 시공의 어느 곳에)
지금
나와
꼭 같은
내가 있을 것 같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5/17 13:51 2002/05/17 1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