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광고가 싫어

from 우울 2004/01/15 11:35
사랑은 이제 LG의 것이 되었다.
어떻게 LG와 나의 김상을 '똑같은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더이상 김상을 '사랑'할 수 없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여자마음은 이제 '딤채'가 되었다.
여자마음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나
적어도 '딤채'는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에는 하늘도 달도 바다도 아닌
김치냉장고가 담겨 버렸다.

또하나의 가족이라기보다는
아예 유일한 가족이 되어버린 삼성.
텅빈 집에서 세계와의 통로가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주고 위로를 주는
내 가족 삼성 TV와 삼성 모니터 만세, 만만세다.

내가 좀 더 어렸을 적엔 광고가 좀 더 솔직했다.
치사하게 거짓말을 할지언정
뜻도 모를 '사랑'이니 '여자마음'이니 '가족'이니
반짝반짝 무지개가 그려진, 속이 텅빈, 실팍한 비누방울같지는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광고들은 파괴충동을 일으킨다.
그들이 진흙탕에 쳐박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분노하게 한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분노하겠구나.

나는 속이 좁아서 대체 TV며 신문이며 도저히 못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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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5 11:35 2004/01/15 11:35

도그빌

from 영화에 대해 2004/01/13 11:35
라스 폰 트리예의 작품은 폭력적이다.
핸드헬드 카메라의 시선에서부터
진실과 순수의 여주인공에 대한 잔혹하고 구차한 폭행들까지.
부패하고 있는 날고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구역질이 난다.

어둠속의 댄서를 보다가는 중간에 극장에서 뛰어나와 구토를 했다.
보는 동안에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더니
끝나고 나서 가슴속에 얹혀있던 응어리같은 것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한 이틀은 앓았던 것 같다.

그가 싫었다.
굳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이 싫었다.
그가 보여주는 폭력들이 싫었다.
한없이 나약한 진실과 순수가 싫었다.
모든 인간들의 죄를 떠안고 죽어가는 예수의 은유가 싫었다.

인간은 너무 나약해서 진실을 지킬 힘이 없는가?
라스 폰 트리예의 영화가 폭력적인 이유는
나 자신을 극단까지 몰아가서 질문하게 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진실을 지킬 힘이 있는가?

[미국 삼부작]의 첫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의 최근 작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속의 댄서와 비슷한 듯 하면서 많이 다르다.
우선은 핸드헬드 카메라가 대단히 절제된 고정 카메라로 대체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차갑게 응시한다.
무대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장소가 아닌 연극 무대로 대체되었다.
인간들이 서로를 가리기 위해 만든 벽 같은 것은 허상일 뿐이다.
가장 큰 변화는 결말 부분이다.
'또 이런 식이야, 아~ 짜증난다!' 싶을 때
여주인공이 갑자기 냉정한 시선으로 도그빌을 심판하기 시작한다.
그 심판은 통쾌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절망이다.

얄팍한 해석인지 몰라도, 그러한 변화들은
그의 시선이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 신의 시선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느껴졌댜.
[미국 삼부작]이라는 타이틀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9.11과 그에 잇따르는 반응들을
이 영화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이상은 인간이라는 싸구려 변명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지저분하게 감추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하고도 진부하고 거창한 소망이 감독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과도한 모욕인 것일까?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냉소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다음 영화에서 그는 어떤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줄 것인가?
미치도록 괴롭히면서도 또다시 다가가게 하는 그의 영화가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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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3 11:35 2004/01/13 11:35
볼 필요 전혀 없는 쓰레기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도사인양 설교하는 영화따위 딱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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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2 16:03 2004/01/12 16:03

가만히 있고 싶어

from 우울 2004/01/07 16:49
또 하나가 끝났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일에 대한 생각으로 잠이 오질 않는다.
타고난 본성인걸까?
나의 몸은 가만히 있고 싶다고 매일 불평하지만
나의 뇌는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내고 입밖에 소리내어 말해서
책임을 만들고 결국 계속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진심으로는 가만히 있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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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7 16:49 2004/01/07 16:49

난장이

from 책에 대해 2003/12/31 15:44
2003년이 끝나는 날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의미들이
뭐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끝이라 다행인가.
오늘은 새벽 0시쯤에 흰쌀밥에 물말아 김치랑 대구포를 저녁으로 먹으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마저 읽었다.
밥을 먹으면서 보기에는 힘든 책인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한 손에 밥숟가락을 들고 한 손으로 코를 훔치면서
12월 31일의 시작을 맞았다.

나는 천국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옳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버지, 덕분에 천국에 살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게 될 줄 몰랐던 어둠 속, 불안의 시절,
내가 가진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뿐이었는데
따듯하고 깨끗한 집과 편리한 차를 가진 요즈음
분노와 증오가 있던 자리에는 차가운 빛, 욕망이 들어섰다.
매끈한 욕망 덩어리, 제 몸을 삼키고 뭉게뭉게 증식해 간다.

나는 죄를 짓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지옥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변명이다.

나는 정말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일까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난장이들을 외면하면서
나는 절름거린다.

뜨거웠던 추위도 이 겨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얼마나 더 가지면 지옥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천국에 사는 자는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옥에 사는 자는 매일 천국을 꿈꾼다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읽었다.

내 천국은 구름대신 난장이들이 바닥으로 사용되는 곳.

새해에는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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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1 15:44 2003/12/31 15:44
1.
어린 시절, 개토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자주 하는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거짓말 한 번 했다하면, 아빠한테 개패듯이 맞으면서도,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으면서도, 개토는 거짓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개토는 근본적으로 나쁜 아이인 거라고,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소한 거짓말로 삶을 지속하던 어느날,
제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굉장한 구절이 담겨있던 책을 읽었던 것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이는 작가가 될 소질을 가진 아이다'라는 것이 그 구절의 요지였다.

개토는 그 구절로 인해서 꿈을 바꾸기로 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개토는 운명적으로 작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소설가가 되어야 하는구나, 대단한 소설가가 될테다, 그래서,
나를 방구석으로 쥐몰듯이 몰아 빗자루로 패곤 하던
아빠에게 보란듯이 거짓말이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리라.

아빠는,
거짓말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 개토는 얼마나 비뚤어진 아이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어설픈 조각가처럼
개토의 마음을 보기흉하게 여기저기 깎아내고 상처주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꼭 소설가여야할 필요는 없었건만...)

인간은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가? 하는 거창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지만,
개토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거짓말에는 아름다운 점이 있다.
그 안에는 진실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은유와 호소와 슬픔, 유머가 진실을 포함하면서 담겨있다.
완벽한 거짓말에는 완벽한 진실보다 더 많은 내용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거짓말은 유리로 만든 도미노 같은 것이다.
가장 완벽한 거짓말조차도 그 본질적인 속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하나의 전체를 이룬 거짓말이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거짓말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대중을 속이자면 거대한 거짓말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 감탄하는 것이다.

2.
예술을 한다는, 혹은 표현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완벽한 거짓말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뉴로맨서>를 쓴 윌리엄 깁슨은 해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술을 이해하기 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적으로 묘사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체계를 가진 거짓말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실의 그 무엇도 닮지 않은 예술,
가장 거짓이어야 하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예술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사람들은 왜 퍼즐을 맞추는가?
맞추어진 퍼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이 진실이다?
매트릭스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영화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운동권을 위한 영화라고도 하고, 철학을 이야기 한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은 개토는 <저수지의 개들>을 페미니즘 영화로 만들 수도 있다.

5.
여기에서 멈추는 순간,
그 거짓말은 하찮은 것이 된다.
개토는 매트릭스가 하찮은 거짓말임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속상해 한다.
매트릭스라는 거짓말은 진실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있기는 커녕 진실조차 담아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6.
천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열이다.
그의 완벽한 거짓말은 진실과 그 이상의 것들로
나라는 작은 세상을 빛처럼, 오르가즘처럼 채워주며
그것을 구하는 것은 나의 가장 인간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희열을 준비하던 개토에게
매트릭스는 또하나의 하찮은 실망이다.

7.
무지하게 재미있는 매트릭스는
채워질 수 없는 허전함을 잠시 채워진 듯 잊게 해주고 무지하게 맛있는, 라면과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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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6 15:51 2003/11/26 15:51

매트릭스[1]

from 영화에 대해 2003/11/20 20:57
1. Matrix는 자궁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Matrix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연두색 발광 글자들의 흐름, 우리가 사는 사이버 스페이스, 가상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육체는 기계 자궁안에 갇혀있고 우리의 정신은 가상의 세계에 갇혀 있다.
우리는 Matrix안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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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0 20:57 2003/11/20 20:57
오늘 아침에는 '뉴로맨서'를 읽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나오느라 조금 밖에 못읽었지만, 역시 몇번을 읽어도 새롭고 경이롭다.
오늘 아침에 깨달았는데, 'Sims'는 그가 만든 신조어들 중 하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단어를 선사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윌리엄 깁슨은 하나의 단어를 통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다.
그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God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집에 가서 마저 읽어야지.

어제는 뭘봤더라...앨러리 퀸의 '열흘간의 미스테리'와 하루키의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외 단편'을 읽었나 보다.

추리소설을 읽을때마다 굉장히 궁금하다.
세상에 진짜 그런 탐정일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어쨌건 나는 추리소설의 좀 잘난 척 하는 면이 마음에 든다.
꼬질 꼬질하고 괴팍하지만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잡학의 제왕인 탐정들이란 참 매력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 전날 부터는 기억이 안나는군..........
최근에 매치스틱 맨이라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봤는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리들리 스콧에 대해 실망을 표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가 여전히 마음에 든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스도 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해야지...
일단,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전주에서 다 못본 애니매트릭스도 보았었는데, 매트릭스를 다 보고 보니
새롭기도 하고 예전에 전주에서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 주말에는 노틀담의 꼽추를 영화로 봤는데 새로운 것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콰지모도가 노틀담 성당의 못생기고 무식하기만 한 괴물인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노틀담 성당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은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디즈니의 '미녀와 착한 야수' 이야기에 완전히 왜곡된 노틀담의 꼽추만 알고 있던 나에게 영화 노틀담의 꼽추는 사실 충격이었다.
그냥 나쁜 놈이었던 성당의 대신부는
사실, 콰지모도를 거두어 길러주고 신앙 외의 삶을 포기한 사람이었으나
에스메랄다를 보고 이성을 잃게 되어 온갖 위악을 저지르게 되는 가련한 캐릭터이다.
왕자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다.

그 안에는, 인쇄기의 발명에 대해 혼란해 하는 권력과
지식을 독점하려는 권력이 있고,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선동가가 있고,
위선으로 가득찬 지식인,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 자신의 지식을 남용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난도 있고....
감동이었다....무엇보다 대사가 참 아름답다....
언젠가 책을 사서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디즈니 같은 건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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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0 20:30 2003/11/20 20:30

쓰고 싶다

from 우울 2003/11/20 19:47
나는 가끔 생각한다.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그런 욕망을 갖는걸까 아니면 그저 습관일까.
무언가 써야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하다.

모니터를 뒤진다.
그리고 뚫어지게 쳐다본다.
쓸 것이 없는지...생각한다.
그러나 영 쓸 것이 없다.
이상하다. 쓸 것이 없으나 쓰고 싶은 생각 혹은 욕망이 있다.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그걸로 끝.

나의 일이 내 마음에 들어서 나는 요새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멀티가 되지 않는 나는, 일을 하기만 하면 글을 못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에게 인생은 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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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0 19:47 2003/11/20 19:47

어디서......

from 우울 2003/11/10 22:12
오천만원만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
집에 빚 다 갚고, 엄마, 아빠 전세라도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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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0 22:12 2003/11/10 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