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실함을 극복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왜 좋아해?"라고 묻는다면
장장 한시간씩은 열변을 토할 수 있을거야.
도대체, 그 말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생각도 해보지 않은 말들이 천연덕스럽게 술술 흘러나오는 것이
혐오스러웠던 기억도 있는데
이젠, 그런 혐오감조차 사라져버렸다.
"정말 좋아해?"라고 진실가득한 눈으로 묻는다면
구차하게 거짓말이나 늘어놓겠지.

사실은, 아무것도 사랑한 적이 없어.
불성실하게, 적당하게.

왜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기를 잘 하는걸까?

나의 분노도, 나의 사랑도 너무나 불성실해서
사실은 공중을 부유하는데
그저 단어들의 무게가 사람들을 짓누르곤 해.

어디엔가, 내가 성실할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내가 성실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지
내가 근본적으로 성실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강변해 왔지만,

슬프게도 나는 불성실한 인간인지도 몰라.

성실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애썼는데
나는 이제 성실함을 두려워하게 된걸까?

자신을 다 쏟고도 초라할 결과를 두려워하게 된걸까?

원래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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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5 23:20 2002/10/05 23:20

Lover

from 그림 2002/09/28 00:00



하늘이 파랗다... 개토란, 이런 식으로 밖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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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28 00:00 2002/09/28 00:00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혹은 리리이 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감독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 이상의 '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들이 완벽하게 분열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분열을 꿈꾸며 살기도 한다.

'나'들은 각기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갈망한다.
현실은 하나이기도 하고
어쩌면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자의 '나'들이 살고자 하는 현실.

인터넷이라는, 또다른 현실세계가 자리잡은 덕에
적어도 두 개의 '나'는 각자의 현실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속에서 살고 있는
- 믿음이라기보다 강력한 고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라 -
내 몸의 현실과

몸과 연결되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써 떼어놓고 싶은
내 '어떤' 욕망들의 현실.

내 몸이 살고 있는 현실은, '나'를 괴물로 만들어 간다.
그 현실은 더럽고 추악하고 냄새나고 폭력적인데다가
심지어 엄청나게 잘 포장되어 있어서 진실하지조차 못하다.
그 안에서는 '나' 역시 잘 포장된 오물이다.
포장이 벗겨지면 촤르르 무너지리.

내 욕망의 현실, 인터넷 안에서 '나'는 '에테르'이다.
어쩌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순수한지도 몰라, 진실할 지도 몰라...
몸의 현실을 부정하는 아름다운 나 자신.

에테르는 빛의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전파하는 맑고 깨끗한 대기.

'에테르'인 '나'는 너무 눈부셔,
감히 '나'라고 부를 수 없어.
그를 '리리이 슈슈'라고 부르리.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는 일본 현실의 극단적인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현실을 꿈꾸게 마련이다.

일본 특유의 왕따 문화 역시 일본 현실의 극단적인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소외된 삶이 타인의 삶을 잡아먹는 일은 끊임없이 연결된다.

주인공 유이치는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리리이 슈슈'를 만나고 그 안의 현실을 살아보려 하지만
결국은 몸의 현실이 '리리이 슈슈'를 만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의 현실이 욕망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사실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몸의 현실을 스스로 부수기 시작한다.
'리리이 슈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을거야.
하지만 모두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돼, '리리이 슈슈'까지도.
'리리이 슈슈'를 만나게 해준 그 어떤 현실도.

그리고 처음으로 몸의 현실 속에서
'리리이 슈슈'에게 말을 건다.
'리리이 슈슈'의 다른 이름은 '쿠노', 혹은 또다른 '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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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6 13:04 2002/09/16 13:04

영현이.

from 우울 2002/09/12 14:41
그 아이의 이름은 영현이가 아니다.
하지만, 실명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 영현이라고 부르겠다.

외고입시를 준비한다는 중학교 2학년 아이,
매일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와
학교수업 진도를 훨씬 앞당겨서 고등학교 수업을 들으러
월수금 종합반 학원을 다닌다.
종합반 학원에서는 매일 엄청난 양을 숙제를 내 준다.
그걸 다하려면 잠 잘 시간이 부족하다.
보통, 새벽 1시에 잠들어서 아침 7시에 일어난다.

학원 외고입시반에서는 자주 시험을 본다.
외고입시반에 남기 위한 시험이다.
그 시험에서 떨어지면 외고입시반에 있을 수 없다.

목토, 주말에는 수학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원에 다닌다.
거기서 내주는 숙제도 영현이는 전부 해낸다.

영현이는 성실하다.
성실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라도 소홀히 했다가는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자신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영현이가 나와 만나는 시간은 화요일 저녁 시간,
수업시간에 영현이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와 다른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왜 휘파람을 부느냐고 물었더니
하모니카를 불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다.
하모니카를 불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휘파람으로 하모니카 불 듯이 연습하고 음계를 익힌단다.

다같이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있는데
내가 영현이를 바라보자
영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아, 집에 가기 싫어..."

"왜?"

"집에 가면 바느질 해야 돼요."

"숙제야?"

"네."

"..."

"단어장이 너무 어려워요."

"그래? 뭔데?"

"그냥, 많이들 쓰는거요. 외울 게 너무 많아요. 좋은 단어장이라는데."

"..."

"할게 너무 많아요. 아, 짜증나..."

...

교실문을 나서면서도 영현이는 아쉬운 듯 이야기한다.

"아, 집에 가기 싫어..."

영현이의 투덜거림은 몇달전부터 수업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그나마, 그런 투덜거림을 할 수 있는 일주일에 단 한시간일텐데,
나는 그걸 듣고 있기가 너무나 힘들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미쳐간다.

지혜는, 모자를 쓰지 않고는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지혜는 어떤 면에서 왕따다.
아이들은 매일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는 지혜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마도 지혜에게 모자는 사람들과의 벽일 것이다.
지혜는 그 벽을 넘어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분당 아이들은 공부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
성남 다른 지역아이들이 학원 한 군데 다닐 수 없어서
교과서만 공부하는 동안
그 집 한가족 생활비만큼 들어가는 학원비를 들여서
초인적으로 깨어있는다.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미쳐가는 걸 보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스스로가 미쳐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게
사실은 가장 괴로운 일이다.
아이들은 부끄러워 하면서 내 눈을 쳐다본다.

그러면, 그 모든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불안한 눈동자가
너무나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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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2 14:41 2002/09/12 14:41

PC방에서...

from 우울 2002/09/08 15:13
아이들과 스타를 한 판 하고,
워크를 한대서 혼자 놀고 있다

아침 7시까지 술먹었는데,
집에 8시에 와서 깽판 치다가 9시쯤 잠들었는데
아이들과 11시에 약속을 해놓고
12시에 전화받고 일어났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전화하고
나한테도 한 10번쯤 전화하고
1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화내지 않고
'선생님이 늘 그렇죠 뭐...'하고 말해주었다.

속쓰려 죽겠다.
애들이 피자 사달래서
피자를 사주었는데
한 입 먹으니
위 아래로 먹은 것이 모두 나올 분위기라서
고상한 척,
'선생님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걸...'이라고 말했다.

PC방에 오는 길에는
너무너무 응가가 마려웠는데
급한 척 하면 안될 것 같아서
열심히 참고 참아
애들 돈까지 다 내주고
웃으면서
'니들 먼저 하고 있어. 선생님 잠깐 화장실 다녀올께' 라고 말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데
속도 뒤집히고
좀 있다가
애들이랑 영화도 봐야하는데
조는 거 들키면 안될텐데

선생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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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8 15:13 2002/09/08 15:13

나의 아름군은...

from 우울 2002/09/03 19:09
내가 안으면 숨을 몰아쉰다
가만히 가슴에 귀를 대면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부드러운 털사이로
색 색 새어나온다

그런데, 너무 뚱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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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3 19:09 2002/09/03 19:09

나의 편리김은...

from 우울 2002/09/03 19:06
못생겼다.
하지만,
2년하고도 한 반년쯤 전에
100%의
굉장한 눈동자로
내 가슴을 찢고 들어왔다.

그래도 못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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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3 19:06 2002/09/03 19:06

AM 06 : 30

from 2002/09/03 18:48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사랑받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붉고 가늘고 짧아보이는 대롱의
작고 시커먼 구멍으로
한 쪽 눈을 가져다 대면 온 몸이 스윽-
아무리 깊숙히 들어가도
간질간질하고 부드럽고 현기증나는

아, 이것이 바로 그
Basic Instinct.

100% 식욕을 자극하는 눈빛과
어깨뼈에 닿는 단단한 앞니의 굶주림,
부드럽게 침을 발라
잘근잘근 씹는대도

내 뜨겁고 빨간 위장에 뚫린 구멍은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여

몸 전체가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서
밤이 지나고
하늘과 구름이 섞이는 시간인데도
나는 아직도 잠이 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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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3 18:48 2002/09/03 18:48

파래군...

from 우울 2002/08/29 15:18
파래야2-1.jpg
모모의 아가는 '파래'라는 이름을 얻어서
이미 7개월이나 되어버렸고
보통 다른 고양이는 1년쯤 되어야 3.5kg이 된다는데
별써 4kg이나 되었고
수의사는 "이미 다 컸다"고 하니...

벌써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청소년 고양이답게 반항적이고
엄마와 아빠의 못생긴 면만 닮아서

몸에 비해 요상하게 작은 머리에
고양이답지 않게 작은 눈에,
무늬도 신통치않고

개토 알기를 쥐보다 못하게 생각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까웅~" 짜증내다가
밥먹을 때만 친한척 비벼대고
이불 데워놓으면 그자리에 가서 앉고

모모가 밥먹으면 저 먹던 거 두고 모모밥에 얼굴 들이밀고
저혼자 매우 깨끗한 척 하면서
화장실 안치워주면
화장실 주변에 슬쩍 똥싸고
(모모랑 아름군은 절대 그런 적 없음)

심지어
지가 잘 이불이 아닌 경우
그 위에 오줌을 싸서
아니, 아예 전용 화장실로 취급해서

집안에 온통 꾸리한 냄새가 나는데
그 진원지를 파악하지 못하던 개토가
어느날 우연히 작은방 이불을 쓰려다가
자지러지게 만들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껴안으면
이빨로 코를 물고

여하튼간에
파래군은,
한마리밖에 안 낳았는데
누구 주긴 뭐하다고
아끼고 아껴 키워준 개토따윈
전혀 사랑해 주지 않는듯 하며
모모와 아름군이랑은 닮은 척만 하지
사실상
아무것도 닮지 않은 것으로 사료되는 바

흑..주르륵...ㅠ_ㅠ

파래군, 미워~ 인 것입니다.


** 아래 사용된 사진은 파래군의 접대용 표정으로
어린 시절의 파래군일 뿐 현재의 파래군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바 이점 양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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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9 15:18 2002/08/29 15:18

방문

from 2002/07/29 19:29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무겁고 깊은, 땅속같은 잠은 어디론가 가라앉아버렸고
기분나쁘게 둔중한 느낌이 머리를 중심으로 온 몸에 남아있었다.
게다가 목 안에는 가는 쇠가루가 뭉쳐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침을 삼켜도 쇠가루 뭉치같은 그 느낌은 개운하게 넘어가지 않고
끈적한 가래만 조금씩 올라올 뿐이었다.
너무 더웠다.

어제 너무 고생을 한 덕분이다.
지하3층과 옥상에서 벌어진 2개의 행사를 번갈아 가며 치뤄야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위아래로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일요일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도 고치러 오는 사람이 없다.
행사에 온 사람들은 좀 투덜대긴 했지만 또 뭐 엘리베이터를 고치게 할 만큼 분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번씩만 오가면 되는 거니까.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고 집에 들어오니 다시 잠이 올 듯했지만
지독한 더위에 잡념이 합세해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선잠이 든 상태로 누워있었다.
이렇게 남의 일을 뒤치닥꺼리나 해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번 달 월급을 받아서 일단 자금을 투자하면
쉽게 돈을 벌만한 장사가 떠오른 것이다.
조금씩 생각을 구체화 시켜가면서 이생각 저생각 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주인은 자주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리곤 해서
집 주인인 줄 알고 생각보다 무겁게 감긴 눈을 비벼대며
문에 다가가 의례적으로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바깥에선 집주인 혼자가 아니거나 혹은 아예 집주인이 아닌듯 두세명의 목소리가 소곤대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네인데 계단에서 넘어졌어. 잠시 좀 들어가서 물좀 얻어먹으면 안될까?'
이거야 원, 안봐도 비디오였다.
분명 방문판매이거나 선교하러 다니는 신자일 것이다.
'지금 바빠요. 다른 집에 가봐요.'하는 순간 우리집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 뭐 잠자던 모양인데, 물이나 한잔 줘.'
산발이 된 머리를 본 할머니가 황당하고 졸린 내 눈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물을 요구했다.
비쩍마르고 골골이 주름이 진, 눈조차 하나의 주름으로 보일만큼 살갗이 주름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특유의 할머니 냄새가 멀리서도 맡아질 만큼
어딘가 괴상하게 할머니스러운 하얀 파마 머리의 할머니였다.
그 뒤로 굉장히 하얗고 붉고 뚱뚱한 한 할아버지가 연신 목과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닦아내는 땀보다 도로 만들어지는 땀이 더 많아보였다.
땀때문인지, 뭔가를 발랐는지 듬성듬성 검은 머리칼이 보이는 흰머리가 젖은 것처럼 머리에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옅은 옥색 남방은 겨드랑이부분이 잔뜩 젖어있었고
배부분과 가슴부분이 속 내의에 척 붙은 느낌으로 약간 젖어있었다.
할머니는 말과 동시에 머리를 불쑥 내밀고 집안을 슬쩍 살피더니
곧바로 문을 활짝 열고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할아버지도 천천히 그 뒤로 따라 들어왔고 나는 별달리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어 그냥 서있었다.
'물만 먹고 갈꺼야. 빨랑 좀 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잔에 따라 주니 둘 다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미적미적 하기에 한잔씩 더 따라주었다.
또 금새 다 비웠다.
'화장실만 좀 쓰고 갈께.'
대답도 듣지 않고 할머니는 화장실을 사용했고 나는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잠깐 쳐다보다가
잔을 모아 싱크대에 담갔다.
너무 졸려서 쓰러질 것 같았다.
할머니가 나오자 두 사람은 현관으로 나갔다.
정말 물만 먹으려던 건가 싶어 문을 잠그러 나섰는데
나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너머로
아저씨 하나와 아줌마 하나가 나타났다.
'아차!'싶은 마음이 들기도 전에 아저씨와 아줌마는 아예
마루 곁의 방으로 들어섰고
너무 졸려서 무슨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고, 제발 나가달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건 정말이야. 너무 졸려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생각했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냈고
아줌마가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세상에 나보다 더 말도 안되는 인간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 지쳐서 나가라고 할 힘도 없었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한 머리를 침대가 있는 큰방으로 돌리고
몸도 천천히 돌려 미끄러지듯 움직이다가
으스스한 기분에 뒤르 돌아다보니...

엄마, 아빠가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7/29 19:29 2002/07/29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