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from 우울 2002/06/10 16:48
떨어지는 빗줄기

늘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나는
오랜 시간 따듯한 물의 감촉을 느끼는 것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즐긴다
유일하게 행복한

무언가를 그런 식으로 소비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행복

빗줄기 - 물은 원래 그렇게 있는데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6/10 16:48 2002/06/10 16:48

위대한 이성

from 우울 2002/06/10 14:22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이성의 힘을 빌어오는 것이
가끔은 오히려 더욱 비겁한 것처럼 느껴진다

집안에서는 온통 쓰레기 국물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가 쓰러져서
그 안에 들어있던 오래된 국물이 쏟아져나왔다
잘 때는 몰랐는데...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계속 냄새를 맡고 있다

어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지난주에 먹고 남은 맥주병들
입고 벗어놓은 옷가지들

이렇게 망가지면 안되는데

하루종일 월드컵을 피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가
내키지 않는 자위를 하고
짧은 희열을 아쉬워 하고
또다시 리모컨을 들고

도망치고 싶어

EBS에서 [율리시즈의 시선]이라는 영화를 해주었는데
아무런 열정없이 보다가 잠이 들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자꾸 뜨는
동그라미 안의 15라는 숫자가 영화를 한없이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호흡이 길고 긴 영화인데
짜증이 났다
15살이 안된 사람들 중에서
저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주변에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15살 미만의 사람이 있다면 사랑스러울 것 같아

어떻게든 저 15라는 숫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잠이 들었다

참 웃기지도 않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6/10 14:22 2002/06/10 14:22

Logical Affairs

from 2002/05/17 13:51
일하러 오는 길에는
눈이 부시리만큼
천박한
꽃분홍색의
장미들이
별다른 이유없이
피어들있었다.

친구놈은
대순진리회인지 대순진리교인지
나에게
사악한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불투명한
믿음의 세계로
블랙홀처럼
스스로의 질량을 집중시켰고

며칠전에
나의 일터에
같은 규격의 다른 그림들
대여섯점을 들고 들어와
3만원에 사달라는
어느 미술학도의
요청을
나는
뿌리치지 못해
반추상 형식의 배그림을
사고 말았다

22살의 내동생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 낫씽

오후 1시 30분
구역질이 나서
밥을 먹고 싶지 않다
굶으면 일을 할 수 없을텐데

오전 6시 30분
에 잠이 들었던 나는
차가운 머리를 들고
오후 11시
에 일어나

그런 식으로 물쓰듯 쓰다가는
언젠가 바닥나버릴

수돗물을
20여분이나 틀어놓고
멍하게
뜨거운
물의 기운을
한참 동안
느껴야만 했다

역(逆)기시감
미래의 어디엔가
(혹은 다른 시공의 어느 곳에)
지금
나와
꼭 같은
내가 있을 것 같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5/17 13:51 2002/05/17 13:51

짧은 사랑

from 2002/03/22 14:03
얇은 이불에
몸을 감고
커튼도 없는 창문으로
햇볕을 등지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화장실의 작은
창문으로
어린 남자아이가 들어와
내 벗은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어
가로 줄무늬의 반팔 티셔츠와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은
머리가 반짝거리는
무지개처럼 일렁이는
어린 남자아이

창문 밖으로
자동차의 앞문이 닫히는 소리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발소리
달그락
문이 열리는 소리

내 짧은 사랑의 기억.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3/22 14:03 2002/03/22 14:03

황사

from 2002/03/22 13:38
바깥에선
바람소리가 들린다
어찌들으면
서럽게 우는 것도 같아

창문으로는
뿌연
햇빛도 들어오는데

어제밤에는
거리가
온통
사막같은 황토색

아니
어쩌면
그렇게 많은 모래가
공중에
멈춘듯
가득할 수 있을까

먼 중국에서
거대한 바람과 함께
그 모래들은
긴 여행을
떠나온 것일까

그리고
낯선
공중에
멈추었던 것일까

황토빛의 어둠속
아스팔트에
아주 가볍게
뿌리박은

작은 아이는

그가 태어난
46억년 전의 우주를
[기억]하고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3/22 13:38 2002/03/22 13:38

나는 고양이다

from 우울 2002/03/18 17:14
거짓말이지만

-[극락 사과군]께 바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3/18 17:14 2002/03/18 17:14
돈도 시간도 없이 살고 있지만,
그의 영화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폭력의 진실성]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제목은 [피도 눈물도 없이].

일찌기 저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에서 모든 마초들을 헤모글로빈 저수지에 익사시키고
단 한 놈의 마초만 놓아주었더랬는데...

여기 그가 돌아와 다른 마초를 모두 죽이고 자신도 익사하다.

마돈나와 여급의 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첫번째 씬을 제외하고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영화에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피도 눈물도 없이]의 주인공이 두 여자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저수지의 개들은 마돈나와 여급에 대해서 100% 무지하다.
그들의 대화에서 여성에 대한 이해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타란티노는 이 씬에서 왜, 저수지의 개들에게 마돈나와 여급을 이야기하게 했을까?
생존을 위한 폭력에서 쾌락을 위한 것으로 진화한 폭력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경제적 의리로 뭉친 남성 사회가 정의의 배신으로 붕괴하는 과정을 표현한 저수지의 개들.

여성에 대한 이해 없는 남성 사회의 붕괴를 예언하신 타란티노 님의 뒤를 이어
류승완은 쾌락을 위한 것으로 진화한 줄 알았던 폭력이 다시 생존을 위한 폭력으로 퇴화된
우리 사회를 보여주면서 모든 마초를 스스로 죽게 하시고
아무 생각없는 우리 청소년(과연 그들도 마초가 될 것인가)과 멋진 여자들에게 세계를 넘기시다.

누구도 자본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돈가방은 내것이 되지 않는다.
문화를 이야기하고 삶의 여유를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가 쾌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결국 돈가방이었던 거야.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는데, 왜 사람을 죽이려고 해요?"
구조조정에 정리해고된 '독불'은 자본에게 외친다.

더러운 꼴 다보고도 빈대처럼 남자한테 붙어살던 여성도
남자처럼 살아보려고 있는 폼 없는 폼 다잡던 여성도
사실은 남자따위 필요없어.
내가 불쌍해서 살아줬지 필요해서 살아준줄 알아?

"수진아, 내가 그렇게 싫니?"
'독불'은 그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나선 여성들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성질급한 그의 뒷세대가 뭐 대단할 것도 없는 기술로 그를 치어 죽인다.

영화속의 폭력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하고 너무 폭력적인" 그 영화는 그 보다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인간의 시선으로 똑바로 쳐다본다.
"이봐, 잔인하다고? 니네가 더 무서워."

마지막으로 감독을 칭찬해주고 싶은 한 가지는,
그가 이 영화에서 여성을 전혀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아름다운 여성만들기, 섹시한 여성 만들기보다
그녀만의 성격, 그녀만의 표정을 보여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렇게 내맘대로 해석해도 되냐고? 내 맘이지 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3/07 12:29 2002/03/07 12:29

유혈극 [혈녀]

from 2002/02/12 21:01
#1
어두운 거리. 둥글고 커다란 귀걸이가 유난히 눈에 띄는
혈녀의 그림자가 노란 가로등불을 마주한 채로 걷고 있다.
혈녀의 발자국 소리.
화면 왼편에서 나타나는 다른 그림자와 무거운 발자국 소리.
혈녀의 그림자가 빨라지고 발자국 소리도 빨라진다.
다른 그림자가 혈녀의 그림자를 덮치는 순간,

혈녀 : "꺄악~!"

동시에 양쪽 귀걸이를 뽑아 날아올라 상대를 3동강 낸다. 모두 그림자로 처리.
화면을 돌려 불빛을 받은 혈녀의 얼굴을 클로즈 업.
귀걸이에 붙은 살점을 불어 떼어 내고 귀걸이를 다시 한 후 다시 걷는다.
화면 오른쪽으로 사라지는 혈녀의 그림자.

#2
지하철(좌석은 꽉 차있고 한 칸에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서있다.)
혈녀, 다리를 벌리고 앉은 아저씨를 본 다음 좌석 전체를 흩어본다.
7명이 앉을 수 있는 그 좌석에는 6명이 앉아있다.

혈녀 : 아저씨 700원 내고 탔어요?
아저씨 : 아니, 카드로 550원 내고 탔지.
혈녀 : 아자!

동시에 구두를 벗어 굽으로 아저씨의 머리를 내리 찍고 다리를 붙여 앉힌 다음
굽에 붙은 피를 털어 내고 다시 신는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혈녀 내린다.

#3
집에서 편하게 벗고 누운 혈녀. 코를 파고 사타구니를 긁으면서 드라마를 보다 눈물을 글썽인다.
반바지와 티셔츠를 주워 입고 문을 나서는 혈녀.

가게 안.

혈녀 : 아줌마 맥주 주세요.

맥주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혈녀, 버스정류장에서 멈칫하다가
바로 온 좌석버스에 올라탄다.
좌석에 앉아 라이터로 병을 따고 맥주를 마시는 혈녀.
갑자기 혈녀의 눈이 커진다. 클로즈 업.
시선을 따라 카메라 내려가면 옆자리의 남자가 혈녀의 반바지 안쪽으로 손을 넣고 있다.
병깨지는 소리.
혈녀는 맥주병을 좌석 팔걸이에 대고 깬 후
남자의 배를 찌른다.
옆자리로 옮기는 혈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2/12 21:01 2002/02/12 21:01

잭 다니엘

from 2002/02/12 19:41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한다고 생각되었을 때
잭은
티코스노바에서
나와
바랜
포스터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걷는다

티코스노바에는
그의
오래된
가방이 남겨져 있다

가방은
너무나
피곤하여

그가 일어섰을 때
문득 깨어났지만
따라나설
힘이라곤
죽어가는 개미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방은
위태롭게
둥근 의자의 한 귀퉁이에 놓여져서
잭을 생각한다

잭이 없는 티코스노바의
어둠속에서
그의 존재는
죽은 짐승의 그림자처럼
늘어져있다

Tycho's Nova 라는
노란
네온사인이
그림자같은
가방의
그림자를
아주 희미하게
늘어뜨리고 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을 때
흠칫 놀랐지만
어깨줄을
움찔거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 가방은 생각한다

잭은
바랜
공기를
마시면서
걷는다

담배
연기가
공중에서
유일하게
젖어 있다.

다니엘은
텅 비어서

회색 땅에
아무렇게나
꽂힌
나무가지들 틈에
비스듬하게
쓰러져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2/12 19:41 2002/02/12 19:41

아침 7시

from 우울 2002/02/12 18:50
전혀 피곤하지 않은 아침 7시
나는 이런 시간이 좋아
Nirvana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 방에서
몸을 건들거리면서

가식적인 무언가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차고 단단한 공기를 상상하면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밤부터 새벽까지 살아

허우적대는 가족들을 걱정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이

완벽하게 불태울 무언가를 찾고 있어

웃지 않아도 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2/12 18:50 2002/02/12 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