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from 우울 2001/07/28 00:00
길을 걷다가 부딪치는 타자들은, 때때로 구역질이 나게 한다.
그들이 특별히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타자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자와 동일자라는 고리타분한 이분법적 사고에 너무나 익숙한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주변의 사람들을 타자와 동일자로 나누는 습관이 있었다.
오랜 세월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나는 완전히 고립된 동일자로 남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니, 고립된 동일자인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타자와 동일자를 구분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나는 내가 고립된 동일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었다.

만나지 않겠다고 여러번 이야기 했지만, 친구들은 나를 열심히 설득했다.
선생님께서 내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이다.
서로 연락하고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안 만나겠다고 하면 예의가 아니라고, 거듭거듭 쑤셔대었다.
그래서 고3담임을 만났다. 9년만인가?
만나서는, 몇시간인가를 줄창 울기만 했다.
중간에 몇마디 한 것도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술집 탁자위에 엎드려서는 어디서 뽑아내는지, 선생님 얼굴은 보지도 않고 계속 눈물만 흘려댔다.
뭐 선생이 대단한 사람이어서 그리웠다거나, 무서운 사람이어서 싫었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그가 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으로써 충분했을 따름이다.

그 시절에, 나는 내가 아주 좁고 높은 기둥꼭대기에 서있는 것 같았다.
멀리에서 나를 둥글게 둘러쌓고 있는 타자들은, 그들과 나 사이의 깊고 검은 심연을 바라보고, 죽음을 상상하도록 만들었었다.
그들 각자의 사이에도 그러한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웠다.
혼자라는 것이 두려운 그런 때였다.

나는 고3담임에게 짙게 배어있는 나의 심연과 나의 두려움을 재발견하고, 갑자기 굉장히 무서워졌다.
그래서 울었다.

사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다음날, 함께 고3담임을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가 전화해서는
자신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
친구로써 너무나 부족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단 말인가?

결국은,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책이나 영화나, 그림 등을 통해서,
타자와 소통한다고 느껴질 때 행복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체험, 마치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마법적인 능력.
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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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8 00:00 2001/07/28 00:00

토모아 아와 [2]

from 2001/07/20 12:18
2. 떠난다는 것

그 날은,
다른 날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천천히 고등어를 굽고 국을 끓여 밥을 먹고는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는 것만 빼고는 다른 날들과 다름없이 평온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샤워를 끝내고 방안에서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을 때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 반 팔 티셔츠 위에 녹색 긴 팔 티셔츠를 겹쳐 입고 청바지에 스니커를 신고는 집에서부터 훌쩍 달려온 모양인지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춥지 않니?]

[모르겠어. 달려와서...]

역시 웃으면서 그녀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잠시 문가에 서 있다가 이곳에 올 때처럼 갑자기 훌쩍 웃옷을 벗어 던져버리고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꼬물꼬물 나머지 옷을 벗기 위해 꿈틀거리면서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와, 빨리 들어와.]

몸에 물기가 있는지 확인해 본 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진지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진지한 얼굴의 그녀일 때, 나는 그녀의 눈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녀의 눈 안에는 깊고 검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아주 오래,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와가 마을을 떠나는 꿈을 꾸었어.]

[토모아는 마을을 떠나지 않아.]

[아와는 마을에서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어?]

[나도 잠시 여행을 다녀오곤 하지만, 그건 마을을 떠나는 것과는 달라.
토모아는 마을에서 떠나면 안 돼.]

그녀가 눈을 감았고 나는 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벽지의 작은 꽃무늬들 틈에서 얼굴의 윤곽 같은 것을 찾아내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잠이 들었고 나는 다시 돌아누워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책상 앞에 앉아 읽어야 할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는 아와와 함께 떠나고 싶어.]

잠이 든 줄 알았던 그녀는 어느새 깨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와는 아직 토모아도 아니잖아?]

[곧 토모아가 돼. 이제 한달 후면 16살이 되는 걸.
어쨌든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지금의 토모아는 벌써 104살이고, 토모아의 표식을 가진 이는 나 뿐이야.]

[아와의 생일에 돌아오자. 돌아와서 토모아가 되면 되잖아.]

돌아온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과 아주 다른 이야기이다.
오랫동안 떠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말대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금지된 일도 아니고 전에도 종종 여행을 다녀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떠난다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 떠난다고 하니? 여행하고 싶다고 하면 안 돼?]

[난 떠나고 싶은걸. 여행하고 싶은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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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0 12:18 2001/07/20 12:18

토모아 아와[1]

from 2001/07/19 13:20
1. 옛 도시 토푸

옛 도시 토푸 사람들은 다섯 신을 모시고 있었다.
그 다섯 신은 각각, 하늘을 돌보는 모우, 땅을 돌보는 모야, 물을 돌보는 모하, 사람과 동물을 돌보는 모무, 그리고 그 모든 신을 돌보는 모아였으며 그 중 하늘과 땅을 돌보는 모우와 모야는 남성, 물과 동물을 돌보는 모하, 모무는 여성, 모두를 돌보는 모아는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토푸 사람들은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급 공동체를 만들었다.

가장 윗 계급의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토모아로 모아의 표식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가 현재의 토모아 밑에서 키워지다가 16살이 되는 해에 토모아를 맡게 되어 다시 모아의 표식을 지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토모아로 지낸다.

토모아와 함께 도시를 돌보는 장로가 네 명, 그 중 둘은 여성, 둘은 남성으로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장로가 된다.

토푸의 일반 사람들은 어머니, 아이, 남자, 여자들로 16살이 되기 전까지의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살지만 16살이 되면 모두 각자의 집을 짓는다.

이 이야기는 토푸에서 모아의 표식을 지니고 태어나 36대 토모아가 될 아이, 아와에 대한 것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착한 용과 열 네 명의 사람들, 스무 마리의 양이 함께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착한 용은 그 마을을 지키고 돌보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더운 여름에는 마을의 하늘로 올라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추운 겨울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었으며 무엇보다 음식과 집안을 데울 불을 주었다.
용의 눈을 보는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구슬이 생겼다.
그 구슬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용과 대화하고 나누고 즐거워 할 수 있었다.
용의 구슬을 가진 사람들은 늙지 않았고 아이도 갖지 않았다.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아이였던 사람은 언제나 아이였고 늙은 사람은 언제나 노인이었다.
스무 마리의 양은 건강한 젖과 털을 풍족하게 생산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한 아이가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모두가 슬퍼했으며, 특히 용의 눈에서는 굵고 파란 눈물이 떨어져 마을의 북쪽 산 너머에 작은 연못을 이루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용의 머리를 자르고 심장과 용의 남녀성기를 잘라내어 머리는 북쪽 용의 연못 안에, 심장은 마을 중심에 있는 마을의 우물에, 남성성기는 서쪽 산, 여성 성기는 동쪽 산, 그리고 남은 몸을 남쪽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 아이는 용이 사라진 마을을 토푸라 이름짓고 1대 토모아가 되었다.

마을을 사랑한 용의 영혼은 5개로 나누어져 연못에 가라앉은 머리의 영혼이 모아가 되고,
마을 우물 안에 든 심장의 영혼이 모무가 되었으며, 남성성기는 모우, 여성성기는 모야, 그리고 남은 몸이 모하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도시가 신의 도움으로 이렇게 번창한 것은 용의 구슬을 가진 조상들의 힘이 우리 몸 안에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북쪽 연못 바닥에 내려가면, 용의 머리를 볼 수 있을까요?]

[북쪽 연못은 푸르고 투명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아 누구도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단다. 용의 머리를 찾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용의 영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책을 덮으며 토모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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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나 없다.
완성되지 않은 글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에 자꾸 지저분한 글자더미가 쌓이고, 그 위에 3mm는 족히 될 먼지더께가 쌓이고...
언젠가, 언젠가는 쓰리라...하고 미루고 또 미루는 것이다.

오늘은,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적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내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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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9 13:20 2001/07/19 13:20

아아~ 일하기 싫어

from 책에 대해 2001/07/18 14:27
"무슨 무슨 주의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무서워요. 이 일만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어린 시절부터 길러주어 좀 더 자본주의적인 인간형을 만들어 내는 프로그램인데, 이 일 준비하는 사람들은, 일말의 죄악감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뭔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거리낌 없이 주잖아요? 이런 일을 하면서, 보다 아티스틱한 분위기를 찾는다는 것이, 제게는 속물적으로 느껴져요."

전화기를 꺼버렸다.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행하는 많은 일들은, 왜이리, 치사하고 구차하고 더럽단 말인가?
라고 과장되게 괴로워 하면서, 사실은 그냥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고 싶은 것이다.
습관적으로 나의 괴로움에 적당하게 합리적으로 보일만한 핑계거리를 찾아서는 잘 쓰여지지 않아 반짝반짝한 말들로 포장하여 상대에게 던져주고는 또다른 괴로움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이렇게 꿈틀꿈틀해봤자, 나는 15분 후 일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새, [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라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혹시,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좋아하더라도, 그녀의 소설은 읽지 말라고 아는 사람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녀가 훌륭한 이론가라고 해서, 이런 허접 쓰레기를 소설이라고 쓸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면, 정말 그녀에게 실망, 또 실망이다.
그 명성에 힘입어 그녀의 이 재활용쓰레기가 한국에서 까지 출판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부연설명을 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바빠서 이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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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8 14:27 2001/07/18 14:27

죄와 벌

from 2001/07/13 17:45
점심시간, 회사 근처의 분식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K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분식집의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널부러진 나를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안쪽 구석에 앉아 분식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스포츠 조선을 읽고 있었다. 혹시 내가 넘어져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고 해도, 어쩌면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벌써 5년전의 일이고, 우리는 단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런 것을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그가 사라진 직후 그의 얼굴을 완전히 잊었었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친 그를 내가 알아보았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분식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카메라 줌인으로 그에게 다가가 포커스를 맞춘 것처럼 그가 내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라면과 김밥을 시키고 그것들을 먹으면서 신문에 빠진 그를 바라보고 있자 조금씩 진정이 되면서 이 것 저 것 관찰하고 생각할 여유도 생겼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그는 훨씬 작았다. 1미터 70센티 정도가 될까 말까 한 키에 몸집도 왜소했다. 반 팔 와이셔츠와 감색 양복바지를 입었고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의 회사를 다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냉면을 먹고 있었는데, 젓가락 질 보다는 신문에 더 관심이 많아서 냉면이 줄어드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덕분에 나는 그를 충분히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편하게? 의외로 마음이 편했던 것은 왜일까? K와 내가 주어진 음식을 다 먹고 물을 마시고 휴지로 입술을 닦을 때까지도 그는 냉면그릇을 끄적거리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스포츠 신문을 읽는 것은 그의 커다란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계산을 하고 분식집을 나와 좀 살 것이 있다는 말로 K를 먼저 사무실로 보냈다. K는 비교적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회사로 돌아갔다. 분식집 건너편의 쟈뎅이라는 커피전문점 창가 자리에서 분식집 출구를 바라보고 앉아 30분쯤 기다렸을 때 그가 예의 그 스포츠 신문을 들고 나와 고개를 숙인 채 어디론가 움직였다. 1시 10분이었다. 회사사람들은 아마도 스타크래프트로 아이스크림 내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30분쯤 늦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나는 너무 그에게 집중하여, 내가 왜 그를 쫓는지 조차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느 길을 걷고 있는지도 살피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내가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어서 뒤돌아보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척 느리게 걸어서, 목적지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이 목적지지만, 어차피 도착할 수 없다는 투로, 무심하게 바닥만 바라보면서 그는 걷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다시 놀란 것은,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어 섰을 때였다. 아주 익숙한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수위아저씨도, 바닥과 벽과 천장도, 너무 익숙해서 그와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회사 건물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힘입어 (그는 바닥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가 내린 층에서 함께 내렸다. 내가 일하는 층보다 2층 아래인 5층이었다. 각 층의 구조는 똑같아서, 엘리베이터 바로 곁에는 남, 녀 화장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두었다. 문 바로 앞에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나는 거울로 반대편 화장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닦던 여자가 나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았지만, 문을 닫는 대신 입을 행구고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이번에는 화장실 안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다른 여자가 나와서 손을 씻다말고 문을 쳐다보더니 젖은 손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한 가치 꺼내어 담배 피우는 곳으로 갔다. 그 곳은 화장실에서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모두 볼 수 있는 통로 안쪽에 있어서 그가 화장실에서 나와 어느 회사로 들어가는지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층은 5개로 나뉘어진 방을 3개의 회사가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담배를 들고 나왔다.

[한 대 피우시죠.]
[예, 좋은 담배 피우시네요.]
[아, 내가 좀 더 빨리 공격했어야 하는데.]
[근데, 그 디자인은 언제쯤 완결이 될까요?]
[맨날 그런 소리 하면 뭘 해.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승기씨도 뭐 얼마나 잘한다고 그래요.]
[글쎄, 아직 정확한 기획이 나오지 않아서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고, 어쨌든 일정에는 맞춰야죠.]
[좀만 도와줬으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내가 다시는 상현씨랑 하나봐라.]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 주시면 저희는 정말 감사하죠.]
[워낙 잘 하신다고 하시니까 뭐 잘 되지 않겠어요?]
[아뇨, 뭘...]
...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그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1시 30분.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도 큰 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매우 느리게 처리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라졌었던 것일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담배를 모두 피우고 어색하게 사무실로 쓸려간 뒤에,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문질러 끄면서, 나는 그가 내 1미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잠시 부딪혀 내가 그것을 인식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벽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다시 돌아와 나를 확인할까봐 조금 겁이 났다. 내가 그를 보기 위해 복도로 나서는 순간 그가 나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서고 있어서 나와 마주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가 돌아온다면, 일단 모른척하자. 그리고 여기서 나가 아무 사무실로나 들어가...아니, 혹시 그 사무실이 그의 사무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내가 같은 회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을 닦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것이 좋겠다. 여자 화장실은 보통 붐비니까, 그냥 급해서 내려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화장실 쪽으로 나가면서 복도 쪽을 흘끗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복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약간 당황해서 텅 빈 복도에 그냥 서있었다. 그가 나를 알고 있고, 내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복도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나를 잊었을 것이다.

1시 50분,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 대리가 흘끗 쳐다보았고, K도 나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별 이야기는 없었다. 6시 정각, 나는 사무실을 나와 회사건물 건너편의 횟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시켜먹으면서, 같은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를 기다렸다. 나중에는 술도 한잔 해야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10시까지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혼자 술과 안주를 시키니, 서빙 보는 아가씨가 [손님 기다리시나요?] 하고 물었다. [아뇨. 그냥 혼자 먹을 거에요.] 하고 대답하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그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음식값을 모두 선불로 계산해 버려서 그를 보자 마자 바로 횟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닥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잠실 행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그와 나는 겨우 30센티미터 떨어져서,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있었고, 그는 그 좁은 틈에서 스포츠 투데이를 8분의 1크기로 접어 읽고 있었다. 잠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나는 문가에 기대어 섰다. 그는 처음에 섰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번에는 4분의 1크기로 신문을 접어 읽기 시작했다. 신문을 사람들 머리 위의 짐 두는 곳에 던져놓고 그는 건대입구 전철역에서 내렸다. 물론 나도 따라 내렸다.
10시 30분, 그는 현란한 대학가 술집들을 무심히 지나쳐 느리고 피곤하게 걷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만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저 두 사람을 내가 그냥 뚫고 지나간다 해도 그들은 내가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아야! 이봐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나는 그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위에 놓여있었다. 사실, 앞을 보지 않은 것은 그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보면서 걷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똑바로 보고 그들에게 다가섰던 것이다. 나는 잠시 그 생각을 하느라 그를 놓칠 뻔했다. 그가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고, 어두웠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나는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이 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이내 그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였다. 나는 왜 그를 쫓고 있는가? 이제 와서 나는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려 하는가?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약간 조바심이 났다. 꽤 오래 걸었고, 그는 금방 어디론가 들어가 버릴 것이다.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지저분한 유리창을 통해 희뿌연 빛이 흘러나오는 허름한 문을 열고 허리를 굽혀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그가 이어폰을 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었다. 그가 뭐라고 중얼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우선 멈추어 서서 길 한 켠에 기대었다. 조금 후에 그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는 것이 보였다. 담배나 음료수 같은 것을 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길은 조용했다. 11시가 다되었고, 그 동네 사람들은 일찍 잠이 드는 모양인지, 혹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어쨌든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만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너무나 그에게 집중해 있었다.
집 한 채라고 해봤자 정말 작은 집이었겠지만, 어쨌든 한 집이 사라진 공터가 있었다. 그는 그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어서 이제 손을 뻗치면 그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공터에는 돌이 있었다. 사람 머리보다 좀 작은 돌이었는데, 나는 그 돌을 들고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억.]하고 그가 쓰러졌다. 나는 한번 더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돌을 공터에 내려놓고 나는 잠시 서 있다가 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달빛에 겨우 어둠과 구분되는 긴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나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 한구석에 걸리적거리는 뭔가가 뛰쳐나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에 몰두하자 금새 그 뭔가는 사라졌고, 그 뒤로는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건물 안은 여전했다.

한 달쯤 뒤에 J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혼한다고 했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이야기하다 말고 그는, 나더러 문학동아리에 든 적 없냐고 물었다.
[그 왜, 깃발인가 하는 그 동아리 있잖아. 내 기억에 니가 거기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신입생일 때 그 동아리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가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술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 뒤로는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나는 동아리 활동같은 것 하지 않았어.]
[그래? 나는 그냥, 니가 책도 많이 읽고 해서, 왠지 그 동아리 일 것 같았는데. 아닌가? 어쨌든, 그 동아리 사람 하나가 죽었대.]
[그래?]
[근데, 그게, 살인이래. 돌에 맞아 죽었다나봐. 나도 며칠 전에 들었는데, 별 일이 다 있지?]
[그렇네.]
내가 시큰둥해하자 그는 금새 말을 돌려 자신의 결혼식에 꼭 오라고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내가 착각하여 그 동아리에서 한 번 보았던,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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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3 17:45 2001/07/13 17:45

살인 2

from 2001/07/13 15:27
그녀의 이름은 N-114. 나이는 17세.
K학교 3학년.
성적은 중상위권이며
특별한 점은 없다.

집안은 가난한 편.
부모는 무책임한 편.
대책없는 동생이 하나 있음.

식구들이 하나밖에 없는 방에 모여서
잠이 든 어느 초겨울 밤 11시 20분,
그녀는 시험때문에 친구집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집에서 나왔다.

다음날 그녀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의 식구들은 여기저기 칼에 찔려 죽어있었다.

N-114는 F-03의 집에 11시 40분에 도착했다.
02시 30분, N-114는 수면제를 넣은 컵라면을
F-03에게 먹이고
03시, 졸립다며 F-03의 T-shirt와 반바지를 빌려입고
먼저 침대에 누웠다.
03시 30분 , F-03은 책상위에서 잠이 들었다.
04시10분, N-114는 교복을 입고 F-03의 열쇠를
가지고 F-03의 집을 몰래 빠져나와
04시 30분, 집에 도착해서
옷을 벗고 교복은 화장실 안쪽에 둔 다음
방에 붙은 싱크대 안쪽에 꽂힌 부엌칼을 골랐다.
그리고 A-025 와 J-020, JA-08의 심장을 차례차례
찌른 뒤 다시 그들의 목과 배를 한번씩 더 찔렀다.
그들중 누구도 자신이 찔리고 있다거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A-025만이 처음 찔릴때, 아주 작게
'컥'하는 소리를 냈는데,
그때 N-114는 자신이 태어난 사막을 생각했다.
먹먹한 모래위에서 그녀는 첫울음을 터뜨렸었다.
칼과 자신의 몸을 잘 씻고 꼼꼼히 살핀 후
마른 행주로 칼의 물기와 욕실의 물기까지 완전히 씻고
교복을 다시 입었다.
칼은 마른 행주로 집어 제자리에 두고
마른 행주는 가지고 나가 집앞에서 라이터로 태워버렸다.
문을 잠그고 F-03의 집에 돌아왔을 때는
06시 정각이었다.

그녀는 F-03의 T-shirt로 다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었다.

유산은 한푼도 없었다.
꽤 되는 빚이 있었지만, 그녀가 아직 미성년자인데다가
유산상속권을 거부함으로써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는 이제 가족만큼이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제로 상태였다.

태어날때보다 훨씬 나은 조건인 것이다.
N-114는 친한 친구인 F-03의 집에서 한달간 지내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물으면서 귀찮아하는 친척들도 있었으나
한달정도 무시하자 그것도 뜸해졌고
한달째 되던 날에는 대학시험을 보아
중상위권의 대학에 들어갔다.

N-114는 학교를 휴학하고 과외와 카페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시원에 방을 잡고 영어공부를 했다.

가끔 F-03을 만났지만, 새 학년이 시작될 무렵
N-114는 비행기 표를 사서 미국으로 떠났고
그 후로는 아무도 사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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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3 15:27 2001/07/13 15:27

빵굽는 컴퓨터

from 책에 대해 2001/07/11 17:31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4시간에 한갑정도의 담배를 피우게 된다.

어제는,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를 읽으면서
낮동안은 일을 위한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에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빵굽는 타자기]를 계속 읽었다.
보통은 멀미때문에 버스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데,
어제는, 책을 읽지 않으면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책에서 눈을 떼면 어지럽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 [빵굽는 타자기]를 마저 읽고 잠이 들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책도 다 읽지 못한 채였다.
머리안에 메스를 든 난장이가 있어서 내키는 대로 쿡쿡 찌르고 다니는 것만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담배를 많이 피운 날은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카페인의 각성효과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 괴롭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모기가 있었다.
가끔씩 엄청나게 큰 소리로 빗방울이 지붕을 때렸고 공기는 습하고 뜨듯했다.

불을 끄고 누워 해가 뜰 무렵까지, 모기와 메스를 든 난장이와 공기, 빗방울 그리고 폴 오스터의 인생이 내 몸을 온통 헤집고 다니면서 잠을 괴롭혀댔던 것 같다.
그들은 충분히 즐긴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나는 잠을 끌어안고 쓰러졌다가 방금 일어났다.
지금은 오후 3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역시 나의 인생에 대해 커다란 불만은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내가 원하고 내가 선택한 삶인 것이다.
주어진 세상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원하는 것들을 선택해 왔다고 생각한다.
최선의 것은 아니지만, 더 나은 선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째서 예술이 정치적인가 하면 그들이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이미 자유인 것 같아.]

화두는 돈이다.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죽거나 혹은 싸우거나.
물론 그렇게 싸운다고 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덜 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 시간이 너무 없다.
나는 오늘도 일하러 가야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을 때 글을 쓰는 것은 그만 두어야 겠다.

아, 중요한 것을 빼먹을 뻔 했다.
폴 오스터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
[스퀴즈 플레이]를 읽은 뒤 [빵굽는 타자기]를 읽어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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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1 17:31 2001/07/11 17:31

옛날 아주 먼 옛날에

from 2001/07/03 13:46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세상에는 고양이가 다섯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다섯마리의 고양이들은 나무로 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도 다투는 일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다섯마리의 고양이들은 모두 검은색이었습니다.
녹색의 눈, 분홍색 귀와 발바닥을 빼고는 온통 검은 색의 털로 덮여있었습니다.

어느날, 모두들 밖에 나가 놀고
가장 작은 고양이 한마리만 집에 남아 혼자 놀고 있었는데,
문이 살짝 열리면서 [안녕?]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옆집의 강아지가 놀러온 것입니다.
[무슨 놀이를 하고 있니?]
강아지가 물었습니다.
[털고르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
가장 작은 고양이가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물고기를 가져가라고 하셨어. 갓 잡아온 신선한 물고기래.]
강아지는 주머니에서 물고기를 꺼내어 가장 작은 고양이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우와, 큰 물고기네. 고마워. 모두들 좋아하겠는걸!]
가장 작은 고양이는 물고기를 냉장고 안에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강아지와 함께 숨바꼭질 놀이를 하였습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강아지는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만 가야겠어. 엄마가 기다리실꺼야. 또 놀러올께. 안녕!]

가장 작은 고양이는 혼자 남아 다른 고양이들을 기다렸습니다.
'왜들 이리 늦는거지? 배도 고프고 심심하다...'
[쪼르륵~]
가장 작은 고양이는 냉장고 안의 물고기를 꺼내왔습니다.
'커다란 물고기니까 조금만 먹으면 아무도 모를꺼야.'
가장 작은 고양이는 커다란 물고기의 꼬리를 조금 잘라 먹고는
다시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조금 후에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가 돌아왔습니다.
[냐옹~, 배고프다. 오늘은 무얼 하고 놀았니?]
가장 작은 고양이는 강아지와 논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커다란 물고기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우와, 커다란 물고기로구나. 조금만 먹으면 아무도 모르겠는걸.]
하고 물고기를 꺼내어 가장 작은 고양이와 함께
아주 조금 꼬리윗쪽을 잘라 먹었습니다.
조금 후에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가 돌아왔습니다.
[니야~, 나 돌아왔어. 오늘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왔다니까!
어, 그런데, 신선한 물고기 냄새가 나는걸!]
두마리 고양이는 냉장고에서 물고기를 꺼내어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와 또 한입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물고기가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좋지?]
가장 작은 고양이는 걱정스럽게 다른 고양이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네번째로 작은 고양이가 들어왔습니다.
네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세마리의 고양이들과 조금 남은 물고기를 보고는
갑자기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를 한대 [퍽] 하고 때렸습니다.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자기만 맞은 것이 화가 나서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를 [퍽퍽] 때렸습니다.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가장 작은 고양이를 [퍼버벅] 때렸습니다.
가장 작은 고양이가 [카악~]하고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에게 덤벼들자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에게,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네번째로 작은 고양이에게 덤벼들어
고양이들은 서로 물고 때리고 할퀴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고양이가 돌아왔을 때,
네 마리의 고양이들은 싸우다 지쳐 쓰러져 있고
온통 네마리의 고양이들로부터 뽑힌 털뭉치들이
방안 가득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무슨 놀이야 이건?]
큰 고양이는 그런 놀이는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아주 아주 커다란 물고기를 꺼내어
다른 고양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랫동네 계곡에 큰 물고기가 많다고 해서 거기까지 다녀오느라 늦었어.
늦어서 미안해. 배고프지? 빨리 먹자]

쓰러져 있던 네마리의 고양이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지만,
커다란 물고기를 보고는 부끄러운 것은 금새 잊고 식탁에 앉아
가장 큰 고양이가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물고기를 받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가장 작은 고양이는 싸우다가 온 몸의 검은 털이 다 빠져서
온통 새하얀 털이 새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두번째로 작은 고양이와 세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듬성듬성 빠진 털대신 하얀털과 노란털이 새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털이 모두 빠졌던 가장 작은 고양이는,
네번째로 작은 고양이가 싸우는 동안 털이 하나도 안 빠진 것이 샘이 나서
자는 동안 면도기로 네번째로 작은 고양이의 털을 줄무늬로 밀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네번째로 작은 고양이는
검은털 한칸 건너 흰털이 나는 줄무늬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검은 고양이 말고도
흰고양이, 얼룩 고양이, 줄무늬고양이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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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03 13:46 2001/07/03 13:46

바다

from 2001/07/01 17:22
날짜와 지명, 상호명, 이름 등을 기억 못한다는 것이 내 제멋대로인 기억력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다.
대부분의 알리바이가 날짜와 지명, 상호명, 이름 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내가 무언가 잘못한 일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기억이 없이는 거짓말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상황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 기억력을 보충하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거나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내가 그곳에 갔던 때가 어느 해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늦은 봄, 혹은 초여름이었다.
나는 매우 이른 새벽에, 동해안의 어느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검은 하늘이었지만, 주황색 가로등 불빛 때문에 주변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어쩌면 밝았던 것도 같다. 가로등 불빛도, 흰색이었는지 모른다.
버스에 사람이 많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터미널 바깥의 대로에는 택시들만, 한가하게 줄지어 있었다.
택시 운전사 아저씨들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나에게도 물었을 테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일반시내버스가 다닐때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택시를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터미널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졸았거나, 가져온 책을 뒤적이거나, 아니면 터미널 밖의 거리를 걸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시내버스가 다니게 된 시간에 나는 어떤 버스를 타게 되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탄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버스를 어떤 이유로 선택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버스에서 나는 잠이 들었을 수도 있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나는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곳은 버스가 지나왔고 앞으로 지나갈 좀 넓은 도로와 버스가 지나가는 차선쪽으로 뚫린 다른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새벽이라서 아무도 없었다. 길은 하?R다.
공중도 하?R다. 안개가 가득 했다.
그곳에서 내가 내린 이유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즈음에서 잠이 깨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안개때문이거나 혹은 길이 구부러져서 일 수 도 있지만, 어쨌든 끝이 보이지 않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로 걸어들어갔다.
그 길에 대해서도 나는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 내 키보다 좀 더 큰 둔덕이 내 앞을 길게, 그리고 끝없이 가로막고 있어서, 나는 잔뜩 물에 젖은 풀섶을 헤치고 둔덕을 넘었다.
그리고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도 하?R다.
바다위의 공중도 하?R다.
파도소리만이 바람과 함께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다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거대하고 물컹한 그 덩어리는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왔을 것이었다.
바다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향하던 나는, 아주 긴 시간 후에, 혹은 아주 짧은 순간 뒤에 하얀 공중을 젖히고 드러난 검은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언뜻, 뒤를 돌아본 나는 둔덕을 향해 미친듯이 뛰었다.

그렇게 뛰어 버스정류장까지 돌아왔을 때, 길은 어느새 태양빛으로 가득차 길양쪽으로 반짝이는 초록숲이 나타나 있었다.

홀로 바다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홀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가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 나는 또다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혼자 가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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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01 17:22 2001/07/01 17:22

외출기

from 2001/06/29 18:20
비가 오고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불쾌한 돼지고기와 마늘이 섞인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안을 가득채우고도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많이 아픈 것 같기도 했지만, 특별히 아플 이유도 없었고 사실은 아마도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자주 그렇듯, 기침이 좀 나기는 했지만, 이 기침에 대해서는 신경성이라는 라벨이 붙은지 오래다.
오후 5시까지 빗소리를 들으며 비가 싫다, 특히 더러운 비는 딱 질색이다라고 생각했다.
방안이 눅눅하고 끈적끈적한 공기로 더럽혀져있었다.
어제는 미친듯이 많이 먹었다.
돼지고기 목살 3인분쯤을 혼자서 아무생각없이 마늘과, 파절임과 상추 등의 채소를 곁들여 먹었다.
배가 고팠다.
그렇게 먹고 난 다음날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고 싶어지지 않는다.

화장실에 갔더니, 미국영화에나 나오는 거지 할멈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퉁퉁부은 눈과 허연 기름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가진 여자가 텅빈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활기찬 페미니스트들따위가 세상에서 두번째로 싫었다.
먹고 살아남자 라고 쉰소리를 해대는 여자들이란, 일반 남자들만큼이나 추하기 짝이 없다.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도시락집에 도시락을 시켰다.
착한 목소리로, "하나도 배달이 되나요?" 하고 예의바르게 물었다.
먹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도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7개월이나 버텼으니, 뭐 나도 쓰레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두명이서 하면 될 일을 30명이나 모여들어 제대로 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고 해봤자 변명거리도 못된다.
다들 미친 것이다. 나는 정신병원 같은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내 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안내로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은 특히 안 좋다.
안내인이 없다면이야, 조금은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어제는 아주 오래전에 한 번 가보았으나 매우 낯선 곳으로 오라고, 누군가가 나를 불러냈다.
너무나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뭐 그리 특별한 인간이라고, 내멋대로 군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사당역에는 매우 다른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걷기위해서는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그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나를 향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나의 나약함을 비웃고는 사라져갔다.
약속장소에서는 T.V가 유리창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배가 고파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배가 고파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많이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먹고 난 뒤에는 후회뿐이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최소한의 열량을 섭취하는 것만이 해 볼 만한 일인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가서는 안되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비가 엄청나게 온다. 두더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소리, 거대한 크기, 거대한 것들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난 배가 불러진 다음에는 거짓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새벽 3시까지 헛소리와 술과, 엄청난 양의 담배를 낭비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배가 불러서 생긴 용기는 가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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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9 18:20 2001/06/29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