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토토로

from 영화에 대해 2001/06/25 16:27
7월 28일, 토요일에, 이웃집 토토로가 드디어,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된다고 한다.
극장에서 토토로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이웃집에 토토로가 사는 것만은 못해도, 나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일이 될 것같아.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오랫만에 [이웃집 토토로]를 보았다.
사츠키와 메이가 우산을 든 큰 토토로와, 나뭇잎을 쓴 작은 토토로들과 함께
씨앗을 자라게 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사츠키와 메이가 고양이 버스를 타고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언제나 좋은 영화를 보면 그렇듯이, 나는 행복에 겨워 눈물을 줄줄 흘렸다.
토토로처럼 바람이 되는 마법을 쓸 수는 없지만
옆집의 할머니도 아저씨, 아줌마도, 친구들도,
그리고 나무와 밭과 논이 모두 이웃집 토토로인 것이 아닌가.
옥수수가 자라고 오이와 토마토가 자라는 이웃의 토토로...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마음만큼 혹은 더 크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느껴지게 하는 영화였다.
어린 시절에, 토토로를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지만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웃의 토토로를 만나러 갔으면 좋겠다.

[엔딩 한글번역]

누군가가 살며시 오솔길에 나무열매 심어서
조그만 싹 자르면 비밀의 암호 숲으로의 여권
근사한 모험이 시작된다 이웃의 토토로
숲속에서 옛날부터 살고 있는 이웃의 토토로
어릴때에만 당신을 찾아오는 신비한 만남

비내리는 버스정류장 흠뻑젖은 도깨비가 있으면
당신의 우산을 받쳐주죠 숲으로의 여권
마법의 문이 열립니다 이웃의 토토로
달밤에 오카리나 불고 있는 이웃의 토토로
만약 만났다면 근사한 행복이 당신에게 와요

엔딩곡 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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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5 16:27 2001/06/25 16:27

생각 놀이

from 2001/06/23 12:31
투르게니예프

나는 그의 이름을 러시아어로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나의 운동은 아주 개인적이고 또 합리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시대에는 많은 것들이 죽었다.
우리시대가 있기 바로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아주 오래된 오래 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 시기에 우리들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살았는지
혹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살았는지
혹은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마녀를 사냥하라'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한편으로 우리와 비슷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살았던 건지...
위에서 우리의 역사를 주욱 내려다본 무엇인가가 아니라면
이것을 알기는 힘들지 않을까?
혹시 그 무엇이, 나처럼 기억력이 나쁘다면
그조차도 아무것도 정확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죽은 것들이 정말 죽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사랑의 구멍에서 빠져나올 때처럼, 그 것들은, 우리가 카페와 문방구와 술집을 지나는 와중에 어디선가 사라지듯 죽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가지지 않은 것, 사물과 대치되지 않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
그런 것들은 그렇게 사라진다.
우리의 육체가 더 이상 숨쉬지 않더라도,
우리의 죽음은 오랫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내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어쩌면,
아마도, 거리를 헤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다.
헤매이는 그들을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어느 유행가의 가사에서 말하듯,
'슬픈 마음도 이젠 소용없'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시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거리로 내모는 법을 몰랐다.
언어화된 기억 - 그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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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3 12:31 2001/06/23 12:31

두더지 아가씨

from 2001/06/22 23:33
어제는, 오랫만에 두더지 아가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내 방 베란다 지붕에서 과묵하고 예의바른 것으로 생각되는 다른 두 마리의 두더지와 함께 살고 있다.

'두더지로써...'
작고 까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길고 굵은 손가락으로 무릎 위쪽을 살살 긁으면서,
그녀는 내 반응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본다고나 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두더지로써...지붕에 산다는 것이 아주 좋은 일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약간 쉰듯했지만, 듣기에 아주 편안했다.

나는 두더지들을 딱 한번 만났었고,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과묵하고 예의바를지도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응...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들은, 상대방이 약간 어색하고 관심없는 듯이 대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두더지 아가씨는 바깥쪽을 향해있는 그녀의 손바닥을 조금 힘겹게 뒤집어 바라보았다.
(두더지들은 땅을 파기 좋도록 손바닥이 바깥쪽을 향해 있다.)
'비가 오면 시끄럽지. 땅속은 안그런데 말이야...'
'정말 그렇겠는걸.'
'사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늘 시끄럽고, 물론 비가 오면 더 시끄러워지지만, 너무 더워...'
'저런...'
'사실, 나는 지붕으로 이사오는 것을 반대했었어.'
'그래?'
'우린 원래 근처 땅속에 굴이 있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여기저기 아스팔트를 깔았잖아...'
'응...그랬구나...'
갑자기 그녀는 말을 멈추고 베란다 지붕쪽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비밀이야.'
'응...그래.'
우리는 다시 약간 어색해져서,
식탁 위에 놓인 오렌지 쥬스를 한모금씩 마시고 방안을 둘러보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조금 웃었다.

'사실, 먹을 것이 부족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야. 우린 요새 일 할 필요도 없어. 가만히 있어도 지붕에는 벌레가 많고...가끔 비가 오면 아스팔트 위로 지렁이가 나오기도 해. 풍족한 생활이지.'
'흠...'
'혹시, 뭔가 좀 들을 수 없을까?'
'응? 뭐? 음악을 틀까?'
'...사실, 나는 음악을 좋아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녀의 검은 털사이로 언뜻 분홍빛이 지나간 것도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사실, 난 음악을 잘 몰라.'
'아, 그럼...내가 좋아하는 걸 듣자.'
우리는 듀크 엘링턴의 All the thing you are 연주를 들었다.
두더지 아가씨는 말없이 컵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끝까지 듣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난 음악이 너무나 좋아. 흐흑...'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같이 음악을 들었다.
듀크엘링턴과 존 콜트레인과 내가 즐겨듣는 영화음악들도 들었다.
어떤 곡도 그녀를 감동시켰고, 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우리는 시간이 너무 느려서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9시가 되었을 때,
두더지 아가씨는 컵과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가 씻고는
'이제 가야겠어'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살짝 안아주었다.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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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2 23:33 2001/06/22 23:33

수달아이

from 2001/06/20 15:59
어느날, 누군가에게 쪽지가 와서...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나에 대해 스스로 표현하기를, '살아있는 시체'라고 하였다.
밤이고 해서...'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영화제목도 생각나고 해서
농담한 것인데...상대방은 좀 끔찍하였던지...정색을 하고 묻는다.

'무슨 일 있어?'

그에게는 농담이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는 살아있는 시체이다.
기형도처럼 나도 이미 '일생 몫의 삶을 다했다.'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많은 시간을 언니네에서 뒹굴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거나 하고 있을 시간에...)

아마도 오래 전의 일일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때 즈음이었을까?
비가 쏟아붓고, 가끔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밤이었다.
오래된 일이라...날짜같은 건 잊었지만,
그 때의 상황이나 내 옷차림,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혹자 : 그럴리가 없자나! 너 스스로 너는 기억력이 없다고 해놓고...역시 너는 거짓말장이임에 틀림이 없어. 여러분, '좋은 기억'을 읽어보세요...)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중대하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비가 오고 있었다.
가끔씩 빗줄기가 가늘어지면,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도 사그러들어
방안을 채우고 있던 라디오 소리가 한뼘 정도씩 부풀어 올랐다.
방안에는 내가 사용하는 1인용 침대와 작은 책상이 있었고,
책장이 있었고, 바닥에는 책이 잔뜩 깔려있어서
침대와 방문을 연결하는 길이 책 사이로 뚫려있었다.

그 애는, 비를 흠뻑 맞은 채로 내 방에 들어왔다.
아니, 들어와 있었다.
눈을 떠보니 그 애가 침대 발치에 흥건하게 물흔적을 퍼뜨리며 앉아 있었다.
수달처럼 생긴 아이였다.
아마도 비를 맞아서 그렇게 보인 것이리라.
뙤약볕에서 거리낄 것 없이 뛰어놀면서 받은 햇살 냄새와
비냄새가 마구 뒤섞여서 건강하게 느껴지는,
독립적이고 용감한 아이일꺼라고 생각하게 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강하고 독립적이고 용감한 수달 아이.

[난 너의 생명을 먹으러 왔어.]

당시의 나는,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주 잘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바보. 수달같이 생겨가지고는...]

나는 뜬금없는 친근감에 농담이라는 걸 했다.

[넌 진지하지 않아.
너 같은 아이는 자라면 사회부적응자가 되고,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너 스스로 너의 삶을 정당화시켜야 하게 될거야.]

[......]

[한마디로, 인간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지.]

내가 비교적, 공부를 매우 잘 하는 편이기는 했으나,
그런 말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이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모두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내 생명을 먹고, 나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다.
살아있는 시체 쓰레기.
그것이 인간 쓰레기와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있는 시체라는 것을 안다는 점 뿐이다.
결국에 나는 사회부적응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다.

수달 아이는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티슈 한장을 뽑아,
젖은 바지주머니에서 꺼낸 지우개 아저씨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지우개 아저씨는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내 가슴을 슬쩍 만지기 까지 했다.
그래봤자 국민학교 6학년의 가슴이지만 기분 나쁜건 기분 나쁜 것이다.
그리고나서, 지우개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이용하여,
내 심장 위에 덮인 피부를 지워냈다.

[이제 너의 생명을 먹을꺼야. 당장은 아프지 않아.
언젠가는 좀 아프겠지만...
넌 왜 그런지 모를테니까, 진짜 아픈 것만큼 아프게 느끼지 못할꺼야.
그러니 걱정할 건 없어.]

옳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린 나에게 수달아이의 어려운 말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가끔은, 매우 설득력있는 것이다.

지우개 아저씨는 수달아이의 젖은 바지주머니 속으로 아쉬운 듯 돌아갔고,
나는 잠이 들었다.

어쨌든, 그 날, 수달 아이는 내 생명을 먹었고,
나는 내 일생몫의 경험을 끝냈다.
나는 죽음속에서 산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뭐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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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0 15:59 2001/06/20 15:59

빛과 그림자

from 2001/06/20 14:44
[조명과 그림자는 전체 장면 안에서 사물과 사물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사물들의 위치를 결정지어준다. 위치와 빛과 그림자의 강도는 이미지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 극사실일러스트레이션기법, 버트 먼로이-

두 개의 문장이 떠오른다.

'너의 가슴을 만지고 있으면, 안타까워져.'

'난 어렸을 때 세상이 대단한 건줄 알았어. - 나도 그래.'

적어놓고 보면, 아무런 특징없는 두 문장.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거대한 어둠속에서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어떤 구멍을 찾아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
어느 순간, 이를테면, 그가 나에게 첫번째 문장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그 구멍에 빠져들어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미 그 구멍안에 들어가 있는데 계속 더듬거리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그 순간에 대해서 해석해 볼 수는 있다.
그 해석이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 해도, 어차피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누군가 잘 못 될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사실은, 해석해 보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안타깝다'라는 [말]은 나에게 두 사람을 갈라놓은 끝없이 깊은 심연을 연상시켰다.
그 심연을 가로지르는 '안타깝다'라는 [말]이 있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한 것처럼, 그 [말]이 있었다.
'죽음까지 파고 드는 삶'이라는 바타이유의 표현처럼,
에로티즘이라는 것을 그 때, 그 '안타깝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그가
그 심연을 딛고 내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삶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처럼.
두번째 문장에서 '난 어렸을 때 세상이 대단한 건줄 알았어.'의 부분은
내가 그에게 나의 빛과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었고,
'나도 그래' 의 부분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도 그래'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대낮에 보이지 않는 어떤 통로를 통과하는 것과 비슷하다.
길을 걷는다. 어디론가를 향해서, 커피숍을 지나고 술집을 지나고 팬시전문점을 지나고 좌회전하여 길을 건너고...
이미 나는 그 통로를 지나쳐왔다.
어디에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그리고 다시는 그 구멍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는 내게 내 눈이 아름답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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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0 14:44 2001/06/20 14:44

나를 내가

from 2001/06/15 12:32
내가 나를 쫓아 다니기 시작한지 벌써 열흘째이다.
어제도 나는, 그녀의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비난하고 창피주고 웃음거리가 되게 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나는, 사실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더 이상 나를 쫓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더 이상 쫓아다닌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망쳐버린다.

처음 내가 나타난 곳은 내방의 작은 욕실이었다.
내 방 밖에서의 삶은 나를 너무나 피로하게 하지만,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면 난 그 모든 것들을 씻어 내릴 수 있었다.
나로 인해서 이제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그 날, 몸에 온통 비누칠을 하고 머리에 샴푸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가 나타났다.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당황한 나를 바라보았고 밭에서 무우라도 뽑듯이 아주 간단하게 약간의 힘을 들여 수도꼭지를 뽑아버렸다.
순식간에 나는 공간없는 어둠 속같은 절망감에 휩싸였고, 그 반대편에서 나는 멋진(!) 옷을 입고 팔짱을 끼고, 가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나는 나와 아주 다르다.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흑인들의 거대한 곱슬머리에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와 꼭 붙는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남성용 타이즈와 구두를 신고있다.
요즈음에는 그런 차림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나는 헐렁한 면티셔츠와 감색 면바지를 가장 좋아하며 항상 머리를 짧게 깎고 있다.
머리나 옷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아주 다르다.
나는 긴 눈과 높은 코, 긴 입술을 가졌다.
그런 얼굴은 정말, 사람을 비웃기에 아주 적당한 얼굴이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눈에 적당한 코에 보통 입술을 가졌다.

내가 나타났을 때, 내가 나와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나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만 나타난다. 특히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있을 때만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절망감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나는 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나에게 절망감을 주는 것을 즐기고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나의 절망감에 대해서 방어할 수 있는 길은 잠을 자는 것 뿐이었다.
나는 욕실에 내가 나타난 날부터 이틀동안 계속 잠을 잤다.
깨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깊이 깊이 잠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이틀 후 깨어났을 때, 나는 나에 대한 일들을 모두 잊었고,
세상은 밝은 빛과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거짓된 희망...
늘상 하던 대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책상 맞은 편에 내가 걸터앉았다.
풍족한 잠으로부터 힘을 받은 나는 내가 두렵지 않았다.
내가 없는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나는 나의 힘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금새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시선은 내 글을 쥐가 쏠 듯이 갉아먹어 버렸다.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글과 함께 잠도 사라져버렸다. 공기가 멈춘 사막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삶이 지속되었다.
끝없는 모래와 극단적인 태양, 극단적인 추위.

이틀 전, 그녀가 집에 왔을 때, 나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그러나 만족스러운 듯 깔깔거렸다.

어제 그녀의 집에서, 누군가 나의 글에 대해서 논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말했다.
[싸구려 글이죠.]
사람들 모두가 웃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그가 가진 재능은..."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나는 또 말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근거 없는 자존심뿐이죠.]
사람들은 또 웃었다.
조금 후에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오늘은 일찍 집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쉽게 나에 대한 증오와 비웃음을 전염시킨다.
그녀 역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어째서 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있고 난 이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내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소중한 것들을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빼앗기만 하고 그 자체를 즐긴다.
겨우 열흘 동안, 나는 내 모든 것들을 잃었다.
나는 나를, 내가 방해할 수 없도록 아주 깊은 잠에 빠질 생각이다.
깨어날 수 없어서, 나를 깨울 수도 없는 깊은 잠.
새 수도꼭지를 사다가 욕조에 물을 받아두었다.
나는 오늘, 따뜻한 물 속에서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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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5 12:32 2001/06/15 12:32

[야화홍 이야기]

from 2001/06/11 13:39
'야화홍'이란 들고양이들이 사랑을 나눌 때 마시는 술의 이름이다.
들 野, 꽃 花, 붉을 紅, 들에 핀 붉은 꽃이라는 뜻이며,
일설에는 이 술을 처음 빚은 들고양이가 '야화홍~'이라는
뜻을 알 수 없는 울음을 남긴 채 죽어,
이후에 후세 들고양이들이 그 울음에 뜻을 부여한 것이라고도 한다. '
-고양이 잡학사전 P135 '야화홍' 중에서-

[야화홍 이야기]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지하철 안이었다.
아마도 2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이어서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 반대편 중앙에 앉아서 [겨울 이야기]라는 책을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흘끔흘끔 바라보았으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한참 그렇게 쳐다보다 보니 매우 낯설기조차 했다.
사과라는 단어를 계속 발음하다보면
대체 사과라는 단어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본다면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을텐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텐데
그녀는 나의 시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나는 길에서 누군가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하는 편이 전혀 아니다.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런 성격 때문에 자주 가벼운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있쟎아, 방금 그 여자 좀 이상하지 않았어? 도대체 왜 그런 썬글래스를 쓰고 다니는 거지?]
[누구?]
[방금 버스 안에서 우리 앞에 서있던 여자말야. 못 봤어?]

뭐 이런 식인 것이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을 듣거나 보고 비평하는 것에 매우 익숙한 것 같다.
뭐 나만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잘났다거나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그 날은 빠져들듯이 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매우 단정하게 베이지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구두도 베이지색이었고 옆에 둔 백도 베이지색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톤의 분홍색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옷도 구두도 백도 모두 좋은 물건으로 보였다.
머리 역시 단정하게 베이지색 리본이 달린 검은 끈으로 한데 묶여 있었다.
가슴에는 검은색의 나비모양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조금 춥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투피스만 입고 나오기에는 이른 계절이었다.
게다가 그 단정함의 어딘가에 엄청난 혼란이 스며들어있는 것처럼
잠깐씩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내가 내려야 할 곳의 이름이 방송되는 것을 귓전으로 듣고는
문득 시계를 보니 10시 45분이었다.
10시 30분에 지하철에 타서는 자리를 잡자마자부터
정신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으니 족히 15분은 된 것이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나말고도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의 중년아저씨도 있었고,
책을 무릎에 놓은 채 부끄러운 듯 흘끔거리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도 있었고,
부러운 눈초리로 검은색 나비모양 브로치를 바라보는
젊은 여자도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그렇게 유심히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무언가 나를 둘러싼 공기가 변질된 듯한 느낌으로
과감히 일어서서는 지하철 문에 다가섰다.
그 때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향기였다.
지하철 한 칸 가득 굉장히 좋은 향기가 차있었다.
그 향기가 그녀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흔치 않은 향수를 쓰는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지하철에서 내린 뒤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나는 그녀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흔치 않은 경험을 하고도 그런 식으로 완전히 잊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답게 하루를 보냈고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녀에 대한 기억은
나의 어딘가에서, 숨을 죽인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억은 마치 어린 시절 처음 본
동물원의 곰이나 펭귄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이다.
어린 아이는 책과 T.V를 통해 곰과 펭귄에 대한 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동물원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무언가가 다르다고 느낀다.
곰과 펭귄은 익숙하면서도 아주 낯설다.
그리고, 동물원을 나옴과 동시에
그는 그 낯설음과 익숙함에 대해 모두 잊게 되지만
어디에선가 다시 그 낯설음에 마주치게 되면 그 때의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 곰과 그 펭귄.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교외의 작은 공원이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낮의 서울은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3개월 간의 일을 끝내고 받아야 할 돈을 받기 위해 회사에 들른 후
뭐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차를 몰고 양평 쪽으로 향하는 길을 탔다.
조용한 카페에서 차라도 한 잔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냥 운전을 하고 싶기도 했다.
공원 같은 데 갈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공원은 작은 놀이터 정도의 크기로 잘 눈에 띄는 곳도 아니었다.
낮은 나무들로 둘러 쌓인 잔디밭에 몇 개의 나무벤치가 놓여있는
도대체 이런 곳에 사람들이 올까 싶은 곳이었다.
근처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카페가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차를 세울만한 곳도 딱히 없어서 지나가던 차가 우연히
그곳을 발견했다해도 굳이 멈출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그 공원에 간 이유는 그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공원을 한참 지나치고 난 후에야 그녀를 생각해냈고
무의식적으로 차를 돌려 공원으로 향했다.
나무들 틈으로 베이지색의 그녀를 보았을 때는,
보았다기보다는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는
나무들처럼 그냥 풍경이었는데, 무언가가 운전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차를 돌려야만 할 것 같았고 그러다가
그녀를 떠올린 것이다.

그녀는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와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분홍색 머플러는 없었지만 백과 구두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어떻게 온 것일까 하는 것이 공원 옆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공원입구에 들어선
내가 처음 한 생각이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이곳에 두고 간 것일까?
어쨌든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있었고
그늘아래 있는 벤취는 그녀가 앉아있는 곳뿐이었다.
나머지 벤취들은 묵묵히 햇볕아래 데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과 잘 손질된 잔디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놓고 고개를 숙여 잠시 바라보다가는
약간 고개를 들어 반대편 벤취 조금 아래 잔디를 바라보고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곁에 다가섰을 때 그녀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를
내 왼쪽 눈동자에, 왼쪽 눈동자를 내 오른쪽 눈동자에
정확히 맞추었다는 뜻이다.

[앉아도 될까요?]
다시 반대편 잔디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자리였다. 헌팅 같은 것을 할 만한 장소는 아닌 것이다.
그녀는 조금 지친 느낌이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여전히 단정했지만 지쳐 보였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손의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하겠지만, 지하철에서 본 적이 있어요.]
갑자기 주변의 소리가 모두 멈추고
나뭇잎 냄새와 질 좋은 종이냄새가 소리를 채우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냄새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전 굉장히 바빠요....]
[물론 한가할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덧붙여 말했다.
바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고 바람을 들이마신 것 같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오래 한가하겠지만.....]
혼잣말이었지만
나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 맡아보았던 향기와는 조금 달랐지만 같은 분위기의 향이
그녀가 이야기하거나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카페에 가지 않을래요?]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더워졌다.
[카페는 많이 가봤어요.]
무언가 즐거운 생각을 한 듯 표정이 밝았다.
[집에 가요.]
나는 그녀와 함께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욕실에 잠시 있다가는 머리와 몸에 수건을 두르고 나와
내 옷장에서 흰 반팔티셔츠를 꺼내어 입었다.
투피스는 잘 접어서 식탁 밑에 있던 종이봉투에 넣어 옷장 옆에
세워두었다. 백과 구두도 꼼꼼히 점검해서는 종이봉투를 하나 더
꺼내 그 안에 넣은 뒤 투피스 봉투 옆에 세워두었다.

나는 그 봉투들을 옷장 안쪽으로 치워두고
식탁에 다시 앉아 그녀를 바라보다가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은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나 몸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녀가 투피스를 벗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된장찌개와 계란프라이를 간단히 만들어 식탁에 얹을 때까지,
그녀는 공원에서처럼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저녁, 먹을까?]

흰 티셔츠 한 장을 입고서도, 그녀의 걸음걸이나 몸 동작은
수트를 입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웠다.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고 음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검은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맑은 얼음이 녹고
얇은 얼음 아래로 흐르는 호수가 밝은 햇살아래 드러난 것처럼
눈동자 안으로 물과 빛이 가득했다.

[고마워요.]

밤이 되고 그녀가 투명해졌을 때도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머리카락부터 조금씩 바람이, 향기가 되어 가는 그녀를 살짝 안고
나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 안에서,
시원한 그녀의 숨을 맡으며 잠이 들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친숙하고 또 낯설었다.
아주 잘 알고 있으나 전혀 모르고 있는 그 무엇.

[아주 먼 옛날, 그리고도 더 옛날에
야와옹이라는 늙은 들고양이가 있었어요.
야와옹은 들에 누운 늙은 고양이라는 뜻이래요.
원래 그런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후세의 들고양이들이 붙인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라물을 조금씩 마셔가면서 나는 익숙해진 그녀의
검은 물방울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술을 빚는 일을 죽을 때까지 했다는데,
야와옹 역시 어머니의 일을 물려받아 오랫동안 죽을 때까지
술을 빚으며 살았대요.
들고양이들은 술을 좋아하잖아요.]

[아버지는 없었나요?]

[들고양이들은 보통 아버지를 몰라요. 어머니는 알고 있겠지만,
함께 살지 않으니까 잘 알려주지 않거든요.
들고양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군요?]

[응, 잘 몰라요. 어차피 거의 만날 일도 없고...]

[잘 몰라도... 이야기를 듣는데는 별 문제 없으니까.
어쨌든 그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들고양이들이 즐겨
마시는 여러 술을 빚고 또 새로운 술을 만들기도 했죠.
술을 빚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에요.
특히 까다로운 들고양이들의 입맛에 잘 맞는 술을 빚는다는 건
야와옹처럼 술을 빚는 들고양이에게는 자존심을 거는 일이니까
재료도 정성도 여간한 것들이 아니죠.
어머니를 보고 자란 덕인지, 야와옹은 술을 굉장히 잘 빚었나봐요.
그가 빚은 술은 푸른색이면 한없이 깊은 바다를 담은 듯 푸른색,
붉은 색이면 흰 피부에 갓 흐르는 피처럼 붉은색,
그리고 어떤 술도 바람처럼 투명했대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색,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붉은색...]

그녀는 쿡쿡 웃었다.

[그 향이 백리를 멀다하고 퍼져서 누군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다른 들고양이들이 금새 알고 찾아올 정도였다니까 굉장하죠?]

[한번 마셔보고 싶군...]

[그가 만든 술을 마셔봤어요.]

그녀의 눈이 잉크처럼 짙푸르게 물들고
사막에서처럼 더운 바람이 살갗에 닿아
차가운 내 피부 위에 무언가가 응고되었다.

[야와옹은 죽기 전에 야화홍이라는 술을 만들었어요.
1000일 동안 새벽마다 방울꽃 잎사귀 속에 든 이슬을 모으고,
500년도 넘게 살아온 소나무 안에
또 그만큼 오랫동안 살아온 벌들의 집 한 귀퉁이를 얻어
땅속 깊은 곳 검은 흙으로 빚은 작은 독 안에 넣었대요.
오랜 겨울과 밤을 숨죽여 기다리다 이른 봄 새벽에 피어난
너도바람꽃과 햇볕을 사랑하는 금매화꽃과
달빛을 사랑하는 달맞이꽃도,
그리고 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흘린 눈물도 3방울 넣었다고 해요.]

[나 그걸 마셔봤어요.]

나는 그녀가 내 삶의 굉장히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삶이 아니다.
아주 아주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기억,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선생님에 대한 미움,
혼란스러운 시대에 대한 고통과 자아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대학 시절들,
너덜너덜해진 청바지와 짧은 머리, 갈색 테의 안경, 도어즈의 CD,
그런 것들처럼 그녀는 나의 일부였다.

그 날 밤 우리는 아직 낮의 햇살이 숨어있는 지붕 위에 올라가
뜨겁고 달콤하고 보드라운 야화홍을 마셨다.

오랜 꿈의 시작이었다.

함께 아침을 먹고 나서 내가 일을 시작하면
그녀는 [겨울 이야기]를 읽었다.
장을 보러가기도 하고 저녁에는 동네 놀이터로 산책을 갔다.
그녀는 그네를 아주 잘 타서 아주 높이까지 올라가서는 하얗게 웃었다.
시소에 앉아서 지난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다.
오래된 꿈 이야기와 아파서 힘들었던 이야기,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녀가 투명하게 될 때까지 이야기했다.
밤이 되면 지붕 위에 올라가곤 했다.

그녀는 파란 바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우리는 둘 다 도어즈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악은 없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란, 시시한 것들뿐이다.
우린 다른 사람들처럼 매일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그리고 남들처럼 어느 날 헤어졌다.
사실은,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두 계절......여름과 가을을 함께 보냈을 뿐인 것이다.

그 어느 날, 장롱 안에서 수트를 꺼내 입으면서 그녀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오늘 떠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이제 나는 바빠질 거야.
나는 네가 나와 같다고 생각했어. 넌 나에게 나만큼이나 소중해.
난 내년 6월이 되면 다시 한가해지겠지.
하지만, 너에게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거야. 지금 내가 떠나니까.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진실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해야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진실이 있어.
......
나는 널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느낄 거야.
아마도 영원히.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게 더 좋았다고.
삶이라는 것은 보통 가혹하고 잔인한 것이고,
아주 가끔, 봄이라든가 꿈이라든가 행복한 때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혹은 누군가들을 위해서도
봄이라든가 꿈일 권리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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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1 13:39 2001/06/11 13:39

아름이, 개토방에 오다.

from 우울 2001/06/10 21:02
개토의 방은 현재 전쟁터이다.
잠시 휴전 중이기는 하지만(아름이가 밥을 먹고 있다.)
전운이 방안전체에 감돌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모모보다 어린데다가 여독이 덜풀린 아름이가 불리하다.
그러나 아름이는 후퇴를 모른다.(밥먹을 때는 빼고)
모모는 밥먹는 아름이를 슬쩍 건드려보기는 하나 일단 예의는 지켜주는 것 같다.

모모가 집에 온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개토는 생각했다.
'이거야 원, 외출도 할 수 없잖아...하루종일 놀아달라고 보채기나 하고...혼자 두고 나가버릴 수도 없고...거참...난감하군...'
'흠...동생이 필요하겠어...'
다음의 "냥이네"카페에 가서 분양공지를 열심히 뒤져,
모모 못지않게 어여쁜 아가 냥이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2001년 6월 10일 오늘, 아름이는 개토방에 오게 된 것이다.
아름이는 태어난지 열흘쯤 되었을때 다른 두 남매와 함께 버려졌다.
엄마냥이가 압구정의 사진관 앞에 아가들을 두고 사라진 것이다.
사진관 아저씨는 아가들을 거두어 아줌마와 함께 아가들이 젖을 뗄 때까지 잘 키워주셨다.
(사실은, 아저씨, 아줌마라고 해봤자 개토만한 사람들이다.^^)
아가들의 이름은, "아름", "다운", "나비". ^0^~
아름이는 모모보다 한달쯤 어리다. 이제 두달정도 되었을까?
주운 아기라서 정확한 생일은 알 수 없다.

다시, 전쟁이야기로 돌아가자.
오늘 오후 5시 10분, 경복궁 지하철역 근처 파파이스에서,
개토는 아름이를 키워주신 아줌마, 아저씨를 만나 아름이를 픽업한다.
한시간쯤 뒤, 6시 30분경, 개토는 방에 돌아온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상황을 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우나, 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긴장상태이다.
이 후의 전쟁상황은 너무나도 치열하고 잔혹한 장면이기에 이 곳에 올릴 수 없는 점 양해바란다.

아아~ 아름이는 개토의 방에서 모모를 만나기 전까지 너무나 착한 냥이였다.
세상의 냥이가 모두 모모같을 거라고 생각했던 개토로서는 충격적일만치 착한 냥이였다.
방까지 오는 1시간 동안 아름이는 한번도 안울고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내 니야니야 거리며 발톱을 세우던 모모와는 너무나 달랐다.
방에 도착해서는 천진난만하게 모모의 배밑으로 기어들어가려 했다.
이 때, 모모는..."하악~"이라고 하면서 아름이를 밀어내고...개토의 눈치를 보다가 훌쩍 덤벼 물기 시작한 것이다.

"하악~"이 무슨뜻인지도 모르던 착한 아름이는 마냥 좋아 모모에게 다가갔고...계속 맞았다.
맞던 아름이, 열받아서는 모모가 안 덤비면 지가 먼저 덤비기 시작,
"하악~"을 금새 배워 틈만 나면 "하악~"...-_-;;
.
.
.
두 냥이가 싸우기 시작한지 어언 3시간...둘다 지친 상태지만,
모모는 아름이에 비해 아직 건재하다.
아름이는 너무나 졸립다. 자고 싶다...모모가 건드린다.
다리를 들어보는 아름이, 그러나...아아~ 졸려~

모모, 승리했다는 생각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밥을 먹으러 가버리다...
아름이, 또 맞을까봐 무서워서 눈은 감지 못하나 일단 눕다...
.
.
.
아름이 잠들고 모모는 세수하다...^^
모모도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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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0 21:02 2001/06/10 21:02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내방 지붕밑에는 두더지 3마리가 산다.
워낙 과묵해서 아직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나는 어제 그들을 처음 만났다.
그들은, 과묵할 뿐만 아니라 예의도 바른 두더지들인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그들이 "어제 먹은 과자와 차는 정말 고마웠어요"라고 쓰인 메모와 함께
갓구워 따끈따끈한 파이를 창틀 위에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평소 내가 일어나는 시간을 알고 있어서,
그 시간에 맞게 파이를 구운 후에
한마리가 창문에서 내가 깨는 것을 기다리고,
한마리는 지붕에서 다른 한마리를 내려다보며 신호가 오길 기다리고,
다른 마지막 한마리가 파이가 타지 않고 따뜻하게 있을 정도로 오븐의 온도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수가! 그 파이는 바퀴벌레 파이였다.
내가 음식을 좀 가려먹기는 하지만, 바퀴벌레 파이를 먹지 않는다고 혼이 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와 같은 종의 동물들은 바퀴벌레는 잘 먹지 않는다.

나는 그 파이를 어떻게 해야할지...정말 난감해 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내 방에 바퀴벌레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바퀴벌레 파이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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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07 18:37 2001/06/07 18:37

옛날에 to flyingtrees

from 2001/06/07 16:51
눈이 아픈 날이었어.
하루종일 눈에 뭐가 들어간 듯, 갑갑한 것이 몹시 피곤해지는 하루였다니까.
오늘은, 부끄나방이 방에 들어오지 않아야 할텐데.

밤새, 부끄나방이 방안에 온통 부끄가루를 뿌리고 다니니 말야.
내 생각엔 아무래도 부끄가루에 눈을 아프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 같아.
맘같아선 두꺼운 책으로 "퍽"소리나게 내리쳐서 잡아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혹시 내가 말했었나?
지난번에 부끄나방을 'LG 냉장고 사용설명서'로 뭉갰다가
한바터면 B 세계에서 못빠져나올 뻔 했쟎아.

어쨌든 부끄나방이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들어왔다하면 맘내킬때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으니 원.

그럼, 부끄나방 조심하고, 좋은 꿈 꾸어라...

2001년 2월 19일 AM00:10

개토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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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내가 부끄나방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었군.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부끄나방을 죽이면, 부끄나방은 B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되거든.
생각보다 부끄나방은 뚱뚱해서 상당히 큰 문이 되더라고.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그날도 좀 더운 날이었어. 창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아무래도 후루를 못하겠는거야.
걱정이 되긴했지만 후루를 하고 싶은 마음에
창문을 아주 조금 열어두었지.
결국, 내 잘못이긴했어. 그 상태로 잠이 들어선 안되는거였는데.
부끄나방이 들어와버린거야.
온통 부끄가루로 방안이 가득해졌어.
가루가 너무 밝기도 하고 알록달록 정신이 없기도 해서
잠이 깨어버린 나는 너무 화가나,
부끄나방을 'LG 냉장고 사용설명서'로 한번에 내리친 것이지.

그런데 'LG냉장고 사용설명서'에 묻은 부끄나방이
붉은 색의 액체를 잔뜩 토해내더니
(상당히 뚱뚱해서는, 엄청난 양의 액체를 쏟았다니까)
납작해져서 죽어버렸어.

문제는 그 붉은 액체였는데, 'LG 냉장고 사용설명서"를 비롯해
액체가 묻은 곳마다 B세계로 열리는 통로가 생긴거야.

특히 부끄나방의 바람빠진 듯한 시체가 놓인 곳에는
엄청 큰 통로가 생겨버렸어.
흡입력도 대단하더라구.

B세계 안에는 부끄나방들만 사는 모양이야.
부끄가루가 허리까지 차서 걷는 것도 힘들었어.
어떻게 돌아왔냐구?
다행히 손에 'LG 냉장고 사용설명서'를 든 채로
B 세계에 들어온 터라
부끄나방 한마리를 한대 "퍽"하고 쳤더니
돌아오는 통로가 생기더라고.

걸레로 열심히 닦아내긴 했지만
아직도 통로가 좀 남아서 우리 집엔 부끄나방이
자주 왔다갔다 하곤해.

뭐 좀 귀챦기는 해도 내 잘못이니 참아야지 어쩌겠어.

글이 좀 길어졌구나.
자주 좀 보자꾸나.
다음 번에 함께 후루라도 하자.

20001년 2월 19일 AM 00:33
개토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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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07 16:51 2001/06/07 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