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상상력, 그리고 변화

사회운동
기술

1. 나는 서버를 내 필요에 맞게 설치, 운영하는 법을 대강 알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에 있다. 내가 일하는 단체는 IDC 센터에 공간을 갖고 있어, 여러대의 서버를 운영하고 있고, 그것의 관리자이기에 완전한 권한마저 갖고 있다. 물론 서비스를 중단한다거나 하는 것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서비스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은 자유롭게 해 볼 수 있다.

2. (웹)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설정하는 대강의 요령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프로그램들이 대개 일관된 원칙에 의해, 공통의 기준을 가진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음을, 그래서 막 하다보면 다른 것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계속 시도해 보다 길을 찾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삽질을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에너지가 있다.

3 . 또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만든 프로그램이 지금 상황에서 잘 맞지 않을때, 내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할때, 숨어 있는 오류가 있었을때, 그 소스를 분석해서 수정할 수 있으며, 간단한 프로그램은 스스로 만들 수가 있다.



디자인 감각을 키우지 못했다는 점(사실은 자신감이겠지) 때문에 그 부분은 두려워하지만, 위의 세가지 때문에, 나는 웹을 "만들어가는 것" 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단순히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을 활용하는 측면에서, 도구로서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웹 그 자체를 아름다운 것, 이상적인 것,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재료비가 거의 들지 않는, 오직 만들 공간의 그림을 갖고 있고, 방법을 알면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공간. 웹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변화와 발전의 공간으로 보게 된다. 어디선가 좋은 시스템이 있으면 감탄하면서, "나도 한번 해봐야지"라는 생각을 큰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다. 기본적인 능력과, 권한, 물리적 환경을 갖고 있기에.

만일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지금정도나마 숙련되지 않았다면, 분명 내가 바라보는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웹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내가 웹 프로그래밍을 할 수 없다면, 내가 원하는 것, 웹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틀에 국한시켜, 끼워 맞추려고만 했을지 모르고, 내가 서버를 운영할 능력과 여건이 없었다면, 내가 상상하는 것을 실제로 현실(온라인)에서 구현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걸 활용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또 다른 상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상상

"상상"은 "공상"과 달라서, 현실에 바탕을 둬 한걸음 더 나간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현실의 "가능성"의 원이 작다면, (공상이 아닌) 상상의 영역조차 작아질 수 있다. 작은 기술이나마 익힘으로써 스스로의 "가능성의 원"을 넓힌다면, 상상의 시작점은 그만큼 넓어진 곳에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이 어떤 분야던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고, 지금 갖고 있는 기술의 숙련도를 높이는 일을 하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삶의 모든 것이 다 나름의 기술이긴 하지만, 보통 흔히 생각하는 "기술"이라는 것, 그것에 대해서.

내가 만일 지금 이미지 제작/편집 툴의 사용법, 활용 범위를 더 알고, 익숙해지면, 분명 지금처럼 글만 줄창 써대고, 말만 많이 하고, 언어로만 모든 걸 하려 하지 않고 더 많은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서 내 생각을 표현하려 할 것이다. 내 프로그래밍 능력이 더 늘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 스스로, 그리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을 더 만들어주려 할 것이고, 요청하기 전에 찾아내서 만들려 할 것이다. 내가 영상 편집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우고, 익숙해지면, 지금까지 틈틈히 찍어놓은 것들을 가지고 더 많은 상상을 할 것이다. 활동 단체들이 개발자를 아끼고 보듬지 않는 것에 문제제기 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보단,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할지 모른다. 지금껏 컴퓨터에 대해 얘기했지만, 내가 마술을 할 수 있다면, 종종 무료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앞에 나설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생중계 기술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관련된 행사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여,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 호흡하려 할지 모른다.

위에 열거한 것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아직 내가 잘하지는 못하지만 좀 더 익히면 할 수 있을 듯한 것들. 하지만 지금 아는 정도도 몰랐을때는 위에 열거한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과연 미디어 활동가들과 많이 만나고, 주워 듣기로 조금이나마 알게 되기 전까지 개발자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상상을 한적이 있었던가? 물론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희망사항, 바램일 뿐이고, 실제로 그런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인터넷 생중계를 하기 전에 내가 무선랜이 되는 영역을 더 많이 확보하면 좋겠다는 강한 바램을 갖고, FON 등에 대해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권하게끔 됐을까? 아마 아니거나, 다른 계기를 통해 더 나중에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 사람의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고, 그것은 한 걸음 더 나간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하며, 그 상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에 착수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와 무관한 영역이라고 눈돌렸던 것들을 재발견하고, 창조적인 영감을 얻을지 모르며, 여러 분야에 걸친 통합적인 사고로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지 모른다. 그래서 기존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제안하고 기획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추상적인 말장난을 그치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긴 하다 -_-) 기술만으로 분명 모든 것이 되진 않지만, 지금 내가 보기에 "진보"진영은 "실제로 일이 되게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적절하게 활용되지 않아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흔히 좌파가 한다는 "어렵기만 한 말장난, 생각속에서만 건설하는 이상세계"이거나, 흔히 우파가 한다는 "맨날 하던대로 하는 뻘짓"의 형태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변화

"무엇" 과 "어떻게"는 떨어뜨릴 수 있는게 아니라, 같이 만나야 정말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무엇"만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를 얘기한다. 그나마 그 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무엇"을 얘기하는 사람은 많은데, "어떻게"를 말하는 사람은 적다. 운동하는 쪽에서. "진보"라는 곳에서. "어떻게"를 고민하는 사람은 넘치는 "무엇"을 소화해내기에 벅차 스스로 "무엇"을 제안, 기획하기도 어렵다. "무엇"을 고민하는 사람도 실제 "어떻게" 그것이 되는지 잘 모르니, 공허하거나 지금 단계에서 어려운, 많은 부담이 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을 위해 지금 단계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구체적인,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획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활동가들 스스로 꺼리를 찾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그것과 함께, "진보" 운동 영역에서 기술활동가를 육성하고, 힘을 실어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신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업무 집행은 기술활동가가 당연히 거부할 권리가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 "당위"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 "무엇"을 제안, 기획할 상황이 안되었기에 그걸 그냥 받아서 실행해 버리는 일이 많다. 이러면, 결국 활동에서의 소외감과, 과중한 업무 자체로 활동가는 지쳐 나가버린다. 모든 사람들이 (지도부도 포함해서),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컴퓨터던 뭐던 기술들을 익히는 게 어떨까? 실제로 일을 하진 않더라도, 더 실현 가능하고 부담이 적은, 그러면서 시의적절한 상상들을 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덧. 올 한해 너무나 많은, 굵직한 이슈들을 통과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투신해오고 있다.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새로운 방식을 실험해보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시간이 지나 1년의 마지막으로 가고 있는 지금 돌이켜 보면, 얼마나 많은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실제로 추진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는지 모른다. 그 때는 관심 받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그나마 더 할 사람이 없어진 때에 뒤늦게 그 아이디어가 다시 거론되는 현실.. 아이디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걸 할 사람이 부족하다. 사람이 있어도 그걸 자신있게 추진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당면 요구와 상황변화에 의해, 그리고 결과가 불확실하거나 운동의 "기풍"과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끊임없이 제약받고, 혹은 자기 검열하고 소극적으로 추진하다 때를 놓치고 하는 일들... 나 또한 그렇기에 스스로 반성도 하지만, 이건 개인의 탓으로 온전히 돌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로만 하는, 시도만 하는, 반짝하는 그런 변화말고,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일까. 장기적인, 자생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리고 정말 어떤 것들을 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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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3 03:50 2006/11/03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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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생 2006/11/03 11:37 URL EDIT REPLY
왜 가볍게 쓰려다가 툭하면 운동권, 지도부 비판쪽으로 빠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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