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맥주를 한잔 걸치고.. 처마에서 빗방울이 모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러나 공기는 차갑지 않고 바닥은 따뜻한, 넓진 않으나 아주 좁지도 않은, 부담스럽지 않은 적절한 방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하지만 인사한적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에코토피아에 대한 얘기도 하고, 한강에서 자전거타다 술마시는 모임 얘기, 카메라에 대한 얘기, "방"에 대한 얘기,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난 늘 이런 그림을 그려왔었다. 자취를 했다면 이렇게 살았을 거다. 집이 너무 가까워 할 수가 없었지. 돈도 없는데 집 놔두고 왜 그걸 하느냐. 술 먹어 비틀비틀해도, 한시간 넘게 걸어도 어쨌든 집에 돌아오는 눔이, 굳이 자취할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내가 자취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무나 언제 불쑥 찾아와 술 한잔 먹고 가고, 밤새 뭘 하던 아침까지 시간을 때워야 하는 사람들이 왔다 가고, 어질러 지고, 사람들은 퍼져 있는, 그 방을 내가 갖고 싶었다. 아무때나 와. 누구던지 와. 뭐 할 거 있으면 하고.
지금 미문동 방이 내가 그려왔던 방과 많이 비슷하긴 하다. 아니 어찌보면 더 좋다. 돈 안내고 무단 점유하는 "하숙범"이다.
베이스를 연습하다 쓰러져 자던 디디는 집에 가고, 남은 사람들은 다들 컴퓨터 앞에 앉아 논다. 또영과 홍진은 뭔가 재미난 겜을 한다. 마우스 양쪽 클릭만 하면 되는 게임. 나는..? 이 포스팅을 마치면, 오늘 했어야 하나 안 한 것들을 해야지. ㅎㅎ 이제 백수가 됐으니, 더 컨트롤을 잘해야 한다. 늦게라도 사무실을 나가고 할때랑 지금은 확실히 다르다. 어제 술 마시고도 오늘 뜻밖에 일찍 일어나서, 여유 있게 이것 저것 하다보니 저녁 7시가 돼버렸다. 전화는 밧데리가 나갔는지 조용하다. 어머니가 먼저 눈치채신다. 집에 있는데 전화가 안오는 거 보니 밧데리 나간거 아니냐. 그런가부네. 가끔 집에 전화를 놓고 나갔을때 늘 오던 만큼이 안온 탓이겠지. 미문동 방에 와서 충전기에 꽂으니 역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쌓여있고.. "라디오 서버가 작동 안합니다", "어제 메일 보낸거 답 주세요", "이번 주 안에 예약해야된데", "백업 파일이 생성 안됐더군요" 꽃다지 서버 이전하는데 깜박하고 하기로 한걸 안했네.
긴장은 쫙 풀리고, 날 독촉하는 사람도 없고, 당장 내일 해야 하는 일은 없고, 밤샐 거니 집에 갈 걱정도 없고, 어찌 하다 보니 알바하듯 해서 돈은 살짝 끌어 모아놨고.. 좋구나. 이런 나른한 느낌이 좋다. 그러나 너무 빠져들진 말아야지. 빠져들고는 싶은데 나 같은 타입이 "사회생활"이란 걸 하려면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여러 테스트에서 말하고 있다. 하긴 오늘만 봐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