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 아이 : 공정한 관리자 모델의 위험

SF
영화 매트릭스에 보면, 요원 스미스가 "테러리스트" 모피어스를 고문하는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한다. 모피어스의 신념을 약화시키기 위해 하는 말 : "인간들이란, 한 지역에서 모든 자연자원을 다 소모하고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런 짓을 반복하지. 지구상에 너희랑 비슷한 존재가 뭔지 알아? 바이러스야. 인류는 질병이야. 이 별의 암과 같은 존재라고"

그래서 "슈퍼 컴퓨터에게 '지구를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하라'고 하면, 아마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다"는 우스개가 나온 것일터다. 우스개라 하기엔 너무 현실적인 답인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럼 이번엔, 슈퍼 컴퓨터에게 국익을 위해 뭐든지 하라고 하면 어떨까? 여기서 영화 "이글 아이"는 시작한다.



현실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이기심과 탐욕, 권력욕으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스스로 잘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공정한 관리자 모델"로서 기계의 힘을 빌리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 즉 잘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전세계를 관리하게 되면,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가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사람은 욕심이 있지만 기계는 그렇지 않고, 정치가는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이지만 엔지니어는 공정하고 합리적이기에, 엔지니어가 만든 기계에 의해 세상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엔지니어는 어떤 가치로부터 중립적이고, 뭐든지 공정하게 판단하는가? 과연 인간이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의 모든 구체적 행동을 예측해서 포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공정한 관리자 - 인공지능"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이 환경, 생태, 여성, 인권 등의 문제를 인식하면서 그 근본 철학에 대해 얘기라도 되고 있는 반면, 정보통신분야에서는 그 위험성에 비해 그런 고민이 충분치 않아 보인다. 기술 혁신은 무조건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절대선이고, 그걸 위해 정보통신 엔지니어는 사회로부터 적당히 분리되어 살아가게끔 유도된다. 뭐든지 그렇지만 "닥치고 앞만 보고 뛰는" 분야 중에 IT만한게 있을까? 한국의 IT산업이 이렇게 뒤틀리고 IT노동자들이 보편적인 노동권도 보장 받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엔 IT에 대한 철학이 빈곤한 탓이다.


요즘 들어 한국엔 사이버 모욕죄, 인터넷 실명제 확대, 그리고 ISP의 감청설비-수사협조 의무화 등 뜨거운 이슈가 많다. 생체(전자)여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개인정보를 뽑아 내고, 정보를 위조할 수 있다는게 실험으로 드러났지만 정부는 오로지 미국에 잘보이려고 강행할 뿐이다. 이런 상황이라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씩 정보통신기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같지만 아직 아쉬운게 많다. 이럴때, "이글 아이"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영화가 아닐까 :)

영화 자체에 대한 평은 이미 꽤나 도는 얘기처럼, 앞에는 숨막히고 중반 넘어가면 좀 뻔하다. 그리고 역시 미국 영화라고 마무리는 정말 "반성하고, 영웅되고, 가족이 재형성"되는 결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주는 많은 "꺼리"들이 무시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현재 한국에 있는 수많은 사회문제를 처음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쓰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무엇이 국익이냐하는 질문부터 시작할 수 있다. 노무현이 "국익을 위해 파병한다"고 했을때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했다. 오히려 파병을 하면 모두가 위험해지고 (한국에 사는 사람도) 국제 사회에서 외면 받아 더 국익을 해칠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 왔다. 이 영화에선 이런 얘기도 뽑을 수 있다.




이런 것보다 더 이참에 하고 싶은 말은 당연히 "거대한 감시", "개인 정보와 프라이버시" 문제이다. 이미 "애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1992) 등을 통해 국가 차원의 거대한 감시망이 개개인을 어떻게 옭죄고 파괴시킬 수 있는지 오래전에 보여졌고, 산드라 블록의 "네트"는 개인 정보의 유출과 조작이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생존의 조건도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보면, 모든 사람에 대한 개인정보가 수집되어 있고, 통합되고 공유되는 사회에서 한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때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유명한 영화만 뽑아서 그렇지 이런 생각꺼리를 찾는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인간과 대화할 수 있으며, 인간 현실에 개입하는 슈퍼 컴퓨터의 아이디어는 소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포함해 숱한 작품 속에 나온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을 지금 이런 사회 구조에서 "무조건적인" 기술 발전으로 만들어 냈을때, 그 파장이 어떻게 될까. 정부와 국가 권력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성, 운영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시민 사회가 정부를 역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 또한 기술의 발전과 적용 과정, 그 성과가 권력층, 국가 폭력, 자본의 이윤만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돌아가는, 민중적인 기술이 되어야 하겠고.


쉴새없이 때려부수고 결말을 뻔하게 맺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이긴 하지만, 그냥 재미를 위해 봐도 좋고, 이렇게 하나씩 현실의 문제와 대입시켜 가며 볼 수 있다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정보인권"에 관한 SF 소설/영화를 모아 같이 보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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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6 02:04 2008/10/16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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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 2008/10/17 10:07 URL EDIT REPLY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이지만, 나름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마지막 부분은 참 아쉬웠다는...;;;;;
지각생 2008/10/22 01:41 URL EDIT REPLY
SF영화보기 모임을 준비중에 있어요. 유이님도 함께 하시죠 :)
장소는 확보됐고, 날짜가 정해지면 바로 공지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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