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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 등록일
    2006/01/24 02:27
  • 수정일
    2006/01/24 02:27

어머니가 불쑥 상자 하나를 내민다. 버려도 되냐고? 요 며칠 집안의 각종 짐들을 싹 내다 버리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 살짝 열어 봤더니 잡다한 편지묶음들. 이런 건 쉽게 버리는 게 아니지- 방구석에 살짝 두었다.

 

오랜만에 조금 졸린다 싶어서 일찍 누웠는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잠이 오질 않았다. 몇 달 전부터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일들. 어찌할까 싶다가 아까 오전에 쳐박아둔 상자가 생각나 꺼내들었다. 가만히 열어 보니 과거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처음 만난 여자친구의 편지들만 따로 모아둔 상자였다. 엽서들도 있고, 별 거 아닌 거 같은 (아마 음료수캔을 책상 위에 두고 가면서 '시원하게 마셔~' 한마디 정도나 쓰여 있을) 포스트잇 종이 쪼가리도 있다. 편지지에, 같이 찍은 스티커 사진까지. 100일이 되었다고, 색지를 네모나게 잘라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받아 온 축하메세지 모음도.

 

이렇게 고3을 보냈었구나.

편지에 쓰여진 'XX과 최고의 복잡남과 최고의 단순녀의 결합'이라는 문구도 재미있다. 2학년 때부터 황신혜 밴드니 어어부 프로젝트니 다른 아이들은 도통 이해 못할 희한한 인디밴드 문화를 매개로 친해지고 조금씩 설레어하면서 가까워지던 때를 생각하니 미소를 짓게 된다. 한편으로는 공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세상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DJ가 정계은퇴했다가 컴백하는 걸 보고 말 바꾸는 사람이라 생각해 그를 싫어했고, 97년 대선 때는 멋모르고 권영길이 옳다고 생각했었지. 아마 내가 그 때 이 친구를 좋아했던 것도, 이 친구가 건네준 엽서에 찍힌 참교육 마크에 왠지 끌렸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다니다 최루탄을 맡아 보기도 했다던 얘기에 나는 더욱 빠져 들었었는지도 몰랐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달라지니 추억의 모습도 달라진다. 이제 전기가 끊어지면 모든 것들이 픽 하고 날아가는 시대인가. 네모난 컴퓨터 화면 속에, 쬐그만 핸드폰 화면 속에 있다. 지금 이렇게 끄적이는 기록들도. 어쩌면 정말 그런 날들이 올 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 낡은 상자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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