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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09
    [피플]스머프에 나타난 정치경제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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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8/05
    아~~ 무릎이여 ㅠ.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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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스머프에 나타난 정치경제학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적인 논제
Socio-political Themes in The Smurfs ::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즉, 내가 "개구쟁이 스머프-이하 스머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알아챈 사회-정치학적인 경향을 분석한 글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티비 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 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 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 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넘(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편리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애자이다. 반면 편리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주책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 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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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내놓고 크게 소리칠 날이여

 

너무나도 갑갑할 때가 있다.

 

내 꿈은 뭐다. 근데 이 꿈을 큰소리로 외칠 수 없다.

 

심지어 밖으로 내놓기조차 힘들다.

 

항상 안으로 더욱 더 안으로 그 이름을 삭힐 뿐이다.

 

60, 70년대 자유라는 이름이 그리도 애절했을까? 민주주의란 말이 그토록 애절했을까?

 

민중들의 꿈은 언제나 그렇게 그렇게 애절하고 갑갑해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나 밖으로 표출되면 안되는 항상 위험한 것이던가?

 

때로는 술 진탕 마시고 크게 외치고 싶다. 내꿈이여 내꿈이여

 

하지만 역시도 안으로 삭일 뿐이다.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나도 한 땐 복종을 찬양하고 복종을 당연시했던 한 인간이었다.

 

한용운의 '복종'이란 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한 인간이었다.

 

왠지 모를 엘리트적인 위치 속에서 이 사회의 이끄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아래 이 사회의 유지(개선, 보수가 선행하는 이었지만)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듯 무의식속에 엘리트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사회 유지를 최우선시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대학에서의 시간들은 그런 나를 진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밎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내 꿈을 민중들의 꿈과 동치시킬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되었다.

 

민중들의 삶 속에서, 민중들과의 만남에서 내 꿈이 새순 돗 듯 나타날 거라는 믿음을...

 

사회에 막혀버린 묻혀버린 그 민중들의 꿈, 그 꿈이 즉 나의 꿈이라는 것을...

 

이 사회를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선 그들이 더 이상 사회에서 눈 돌리고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꼿꼿이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 사회는 그 꿈을 향해

 

달릴 것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거리낌없이...

 




♪ 피엘쏭 타는 목마름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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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씨 놀랍다.

정말 모른채 살아왔다.

 

그이름 석자가 생소할 정도로

 

우연찮게 유이 블로그에서 아니 그 전에 영화보기 위해 유이 만나서 그에 대해 들은 후에

 

일부로 블로그에 찾아가서 그의 음성을 들었다. 생각을 들었다.

 

듣기 전의 마음은 신기함 정도라 할까? 어쨌든 별 기대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듣고서는 너무나도 비통했다. 그토록 감수성이 뛰어난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갔다는... 또한 그가 활동하고 생활하고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그 시기를 내가 알지 못했음에 너무나도 안타까왔다.

 

정말 그의 팬이 됐을텐데. 팬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긴 한데, 하지만 그의 팬이 될 수 있었다면..

 

잔잔한 그의 음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다.

 



19만3천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한 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한 사람에게는
몇일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 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 한 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아이들에게 힐리스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해 정말 미안하다'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이 19만3천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19만3천원,
인라인스케이트 세 켤레 값입니다.
35m상공에서 100여일도
혼자 꾿꾿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 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속에 그 힐리스 대목에 목이 메인 이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힐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영화 [빌리 엘리엇]중에서 T-REX의 음악
cosmic dancer띄워드렸습니다.
강정숙씨,양정선씨,김도균씨 잘 들으셨어요?
신청하신 곡이었는데요,

영화를 보면요.
빌리가 왕립발레학교 오디션을 보려갈때
여비가 없으니까 다른 파업노동자들이
돈을 걷어서 여비를 많이 만들어주죠?
참 없는 사람들이 더 없는 사람들을
스스로를 생각하는 모습들,
가슴이 참 찡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강동훈씨,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오늘,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런지요.'하시면서
사연보내주셨네요.참, 정말 아이러니칼하죠?
그들 옆에 섰던 대통령이 그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동귀족이라고 지탄받는 대기업 한진중공업의
노조지부장이었죠? 고 김주익씨.
고 김주익씨가 남긴 지갑 한 번 볼까요?
파업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고
재산을 다 가압류당하구요.
그에게 남은 돈은요.
세 아이들의 인라인스케이트도 사줄 수 없는 돈.
13만5천80원이었습니다.
어떤가요?귀족다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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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머니 졸업논문

하루종일 이리저리 끌려다님

 

국회 도서관까지 가서 한참 헤매고...

 

다리 조금 나은거 같아 운전도 했는데, 역시 운전은 무릎에 무지 안 좋은듯

 

어느덧 완전 요양이 되어버린 요즘 너무나도 힘들다. 에구 에구

 

빨리 빨리 나아서 막 뛰어다녀야 하는데...

 

 

어머니 졸업논문 타이핑하느라 완전 밤샜네. 흑흑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느 새나라 어린이가 되어야 했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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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사탄 출현

 

 

진짜 똑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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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 병원진료

오늘 일은 무지 짧게.

 

병원 아침에 갔다가 밀려서 엄마 대학(방송 통신 대학) 도서관 가서 1시간 동안 한강 1편 한 40페이지 정도 읽다.

 

정말 재밌었는데 시간상 못 읽는게 너무 아쉬워서 에구구~~

 

ㅋㅋ. 이렇게 하루 일 쓰다 보니 예전에 일기 쓰던 생각이

 

굉장히 맘에 드는 결혼 꿈을 꾼 다음 나중에 그 여자 만날 거라는 확신에 편지 형식으로 1차 일기를 썼던 일도 생각나고...

 

군대 제대하고 여자 만나면 주려고 군대에서 있었던 일, 들었던 생각, 좋은 글귀들 만들어 2차 편지를 썼던 일도 생각나고...

 

나중에 쪽팔려서 다 버렸다는

 

암튼 글케 해서 2시쯤 진료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씀

 

무릎반월연골인가 모시깽인가에 문제가... 나중에 MRI 찍어보자는 비싸다고 안 찍고 해결되면

 

그렇게 하자고... 다행 다행..

 

어쨌든 2주 지나고 나서 다시 보기로 했으니까 그 때까지 낫도록 기대해봐야지.

 

아구~~ 힘들다. 이런 이런. 나중에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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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릎이여 ㅠ.ㅠ

정말 아파보니까 알겠다.

 

이 세상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말하는 일반사람 위주로 되어있는지

 

무릎이 아픈지 벌써 6일째, 우리 집 현관을 나간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도저히 이 따위 무릎으로 내려가기 힘든 계단부터 좀 힘쓰다 보면 한 쪽에 과도한 무리를

 

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싸구려 슬리퍼가 발바닥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모든 상점에 다 있는

 

턱들은(아마도 비나 흙 등 여타의 것들이 못 들어가도록 만든 것일테지만) 다시 한 번 내

 

무릎을 괴롭힌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8월 3일 동생 입대를 앞두고 안 좋은 다리 이끌고 피서가서 아픈 무릎에

 

신경만 죽어라 쓰고 오히려 물 밖보다 물 안이 좋아서 입술 시퍼래질 때까지 물 속에도 있어

 

보다가 좀 이라도 편할까 차에 들어가 의자 눕히고 쉬다가 땀 뻘뻘 흘리며 고생하기도 하고

 

아퍼서 죽겠는 다리로 동생 입대전이라 병원도 못가고 얼음 찜찔만 죽어라 하면서 버티고

 

의정부 따라가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쉬어야 하는 데 쉬지도 못하고 통증을 키우는 짓을

 

하구~~

 

결국 오늘 병원 갔더니 연골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2주 약 먹어서 상황보고 괜찮아지면

 

약물 치료, 안 좋으면 MRI 찍고 수술을 하자는 의사 말에 당황

 

종종 다리 헛디뎠다 생각하면서 아픔을 인내하던 일들이 연골이 닳아서 생겼던 이상 행위라고...

 

쪽집게대.. 그 선생.. 흠~~ 내가 그런 일 겪었는지 어떻게 알았지?

 

달리다 무릎이 빠지는 것 같은 일이라든지, 한 참 굽혔다 무릎 펴기 힘들다던지..

 

놀라워 놀라워~~ 제길...

 

쩝 어쨌든 이 노무 힘든 세상에서 이 다리 가지고 어떻게 살아간다냐??? 에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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